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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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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號를 주제로 제작된 詩·畵가 내장된 권축에 대해 14, 15세기 여말선초 기록에는 권축의 주인의 호 뒤에 ‘卷’, ‘卷子’, ‘詩卷’, ‘軸’, ‘詩軸’, ‘卷軸’ 등의 명칭이 통용되었다. 본고에서 지칭하는 ‘詩畵卷’의 용어는 ‘시와 그림이 함께 구성된 두루마리’를 의미하며, 여말선초에 통용된 명칭이 아님을 밝힌다.
3) 현전하는 題詩卷詩는 사대부의 시권에 붙인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선승들의 시권이다. 조명제, 「14세기 高麗 지식인의 入元과 순례」, 『역사와 경계』 69(2008), p. 27 참조; 여말선초 승려들의 제시권시는 임종욱, 「耘谷 元天錫의 佛敎詩 硏究」, 『불교어문논집』 2(1997), pp. 265-270 참조.
4) 무로마치 선승들의 시화축에 장대하게 찬시를 쓰는 형식은 송, 원대 제찬풍조가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형식적 연관성이 없고, 여말선초 시문집에서 보이는 畵贊詩와 친근성이 있다. 赤澤英二, 「室町水墨畵と李朝畵の關係」, 『大和文華』 117(奈良: 大和文華館, 2008), p. 2 참조; 무로마치 시화축의 내용 역시 오에이(應永, 1394~1427)期 圖贊과 여말선초의 산수도 圖贊은 전반적으로 상통하는 면을 보인다. 赤澤英二, 같은 논문(2008), p. 3 참조.
5) 일본 시화축 역사의 초기인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1336~1392) 후기에 시화축의 화면형식은 일정하지 않았고 횡권과 종축의 형식이 병행되고 있었다. 島田修二郎, 「室町時代の詩畵軸にっいて」, 『禪林畵讃: 中世水墨畵を讀む』 (毎日新聞社, 1987), p. 12 참조.
6) 李穡, 『牧隱集』 권4, 「松月軒記」. “스님은 평소에 당대의 名公이나 雅士들과 어울려 노닐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들 역시 스님에게는 깍듯이 禮貌를 갖추어 대우하곤 하였다. 그리고 스님은 技藝에도 능한 면모를 보여 書畵를 대할 적엔 정밀한 감식안을 자랑하였으며, 古今에 두루 통하여 막히는 바가 없었다[師平生喜從當世名公雅士游 盡得其禮貌 而於藝又能 精鑑書畫 博極今古].”
7) 李穡, 『牧隱集』 권4, 「松月軒記」. “前林觀寺住持玉田禪師以吾座主歐陽先生所書松月軒三字 求記於予曰…(중략)…如翰林承旨歐陽原功 集賢學士揭曼碩 國子祭酒王師魯 中書參政危太朴 集賢待制趙仲穆 道家如吳宗師皆爲之題贊敍引 集賢待制趙仲穆 眞人張彥輔 吳興 唐子華 又爲松月軒傳神 今皆失李穡之.”
8) 조맹부의 아들이었던 조옹은 죽서(竹西) 양겸(楊謙, 1283~?)의 《竹西草堂圖卷》의 제자 ‘竹’, ‘西’ 를 쓴 바 있다. David Ake Sensabaugh, “Fashioning Identities in Yuan-Dynasty Painting: Images of the Men of Culture.” Ars Orientalis 37(2009), pp. 120-121 참조; 또한 조옹은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나옹혜근의 제자가 되었던 축원지천(竺源智泉, 1324~1395)이 오대산에 들어가 벽봉화상(碧峯和尙, 생몰년미상)을 배알할 때 만나 축원지천에게 ‘竺’, ‘源’의 전서체 大字를 써 준 바 있다. 權近, 『陽村集』 권38, 「追贈正智國師碑銘 竝序」.
17) 申叔舟, 『保閑齋集』 권14, 「一菴松堂卷記」. “一菴松堂專上人 釋之秀者也 僕於正統壬戌之冬 與甄城李伯玉 平陽朴仁叟 丹溪河仲章 昌寧成謹甫諸君 受命讀書于覆鼎山之津寬寺 上人亦先住錫 始與識面…(중략)…一夕 出一卷求詩 迺千峯所命一菴松堂也 諸君旣重上人 皆有詩.”
20) 李承召, 『三灘集』 권5, 「一菴松堂詩」; 姜希孟, 『私淑齋集』 권1, 「題一菴松堂」; 성현은 “일암이 사대부에게 청해 받은 시권이 책상 상자에 가득하니, 한 시대의 정묘한 시들이 모두 거기에 모여 있었다.”고 하며, “신숙주, 이석형, 박중선(朴仲善, 1435~1481), 성삼문, 유성원(柳誠源, ?~1456), 강희맹, 서거정(徐居正, 1420~1488), 홍응(洪應, 1428~1492), 이승소, 성임(成任, 1421~1484), 성간(成侃, 1427~1456), 임원준(任元濬, 1423~1500), 이명헌(李明憲), 김수녕(金壽寧, 1436~1473) 등이 모두 그와 교분이 깊었고 신숙주가 가장 그를 좋아하고 아꼈다.”고 했다. 成俔, 『慵齋叢話』 권7; 成俔, 『虛白堂集』 권9, 「題一庵松堂詩卷後」.
21) 《일암송당권》에서 〈一菴松堂圖〉 는 별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시화축의 예에서도 이츄츠조(惟忠通恕)의 ‘白雲丹壑’과 같이 제시와 발문의 수량이 많은 경우 시화가 별폭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고, 실제로 南禪寺의 승려 츄가(中和)의 〈三益齋圖〉(1418)의 序文은 별폭으로 제작되었다. 島田修二郎, 앞의 논문(1987), p. 12 참조.
25) 權近, 『陽村集』 권15, 「送雲雪岳上人序」. “吾扣牧隱齋 蒙吾堂之名之記矣 然吾身無所住 寧有所謂堂乎 強而名之堂者 以寓夫道也 吾事吾師二十年之久 猶不得其道之髣髴 今也失吾師 內而求之心 外而求之名 將以質之四方之先覺 欲得搢紳之言 以爲行遠之資.”
28) 李穡, 『東文選』 권51, 「賜龜谷書院畵贊幷序」. “達磨折蘆渡江圖 童子普賢六牙白象圖 覺雲龜谷大字共四軸 高廣如一 皆上親筆”; 李崇仁, 『陶隱集』 권3, 「內願堂大禪師龜谷雲公蒙賜御筆普賢達磨肖像二卷龜谷覺雲四大字以詩爲賀 三首」.
30) 許筠, 『惺所覆瓿藁』 권4, 「詞翰傳芳序」. “丁未夏 余在三陟 (중략) 有稱李生者忘其名 手一編來示 題曰詞翰傳芳披閱之 卽世廟朝嬖髡信眉詩卷也 金文良爲序 徐剛中 姜景愚 景醇 成重卿 李三灘 爲詩俱自書 贊不知何人作 而書則鄭東萊也 終以安可度畫釋迦 彌陀二軀 極小而妙 末有御璽一顆 眞古物也.”
31) 14, 15세기 성행했던 승려들의 명호, 당호 주제의 시화권 전통은 16세기에 지속된다. 16세기 승려들의 명호, 당호 주제의 시화권은 중종(中宗, 재위: 1506~1544)대 이행(李荇, 1478~1534)이 쓴 《元惠詩軸》의 제시 “작은 그림은 더없이 소쇄하고 / 小圖絶瀟洒 방장실은 자못 맑고 그윽하다 / 丈室頗淸幽”,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여주 梨湖의 선승 진(眞)의 村廬에서 眞의 《山水小軸》을 위해 이행(李荇, 1478~1535)이 쓴 시에 이어 쓴 차운시(1531), 역시 김안국이 선승 지웅(志雄)의 《山水竹行軸》을 위해 권민수(權敏手, 1466~1517), 이행이 쓴 시에 이어 쓴 차운시, 이홍남(李洪男. 1515~?)이 쓴 「題僧軸畫」 등의 기록을 통해 승려들의 시축 안에 그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李荇, 『容齋集』 권3, 「題元惠詩軸」.; 金安國, 『慕齋集』 권6, 「嘉靖辛卯秋 自驪之梨湖 赴外姑祥于廣之長旨里 夜宿村廬 有僧釋眞持山水小軸來乞詩 就次容齋李相公韻以贈」.; 金安國, 『慕齋集』 권6, 「次容齋 退齋兩公韻 書志雄師畫山水竹行軸」.; 李洪男, 『汲古遺稿』 권下, 「題僧軸畫」. 선승 지웅(志雄)의 《山水竹行軸》은 제목과 김안국의 제시 “山水淸而奇 竹亦淸而奇 誰敵此淸奇 蒼然兩公詩 山人泊與淡 三絶何用玆 要非塵土物 卷之還吾師”를 통해 山水와 竹이 각각 그려진 그림과 권민수, 이행, 김안국의 시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35) 太古普愚는 1346년 入元 전 창작한 「太古庵歌」를 통해 석옥청공에게 인가받았다. 「태고암가」는 태고보우가 삼각산에 위치한 자신의 소거이자 명호·당호였던 太古庵의 무한한 공간성과 절대자유를 노래한 시가이다. 김종진, 「〈太古庵歌〉의 주제적 계보와 창작 의의」, 『한민족문화연구』 42(2013), pp. 203-208 참조.
38) 《馥庵上人手卷》 속 제화시와 유사한 모티프로 《海松卷子》에 권근이 쓴 「題海松卷子」의 제화시가 있다. 《海松卷子》는 海上, 孤峯, 蒼松을 배경으로 산수도가 있는 ‘海’, ‘松’의 호를 풀이한 卷으로 생각된다. “바닷가 봉우리가 우뚝 솟아 / 海上孤峯聳半空 빽빽한 소나무가 바람 보내네 / 蒼松鬱鬱送淸風 선옹의 심사가 깨끗도 하여 / 仙翁心跡俱蕭洒 한 조각 티끌도 가슴에 없다 / 一片炎塵不到中.” 權近, 『陽村集』 권8, 「題海松卷子」; 고유섭, 「고려 화적에 대하여」, 『고유섭 전집』 2(열화당, 2007), p. 232 참조.
40) 목계(牧谿), 옥간(玉澗)과 같은 남송 선종 회화의 성취를 볼 때, 회화전통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서 원대에도 절강성에서 불화와 여기회화가 계속 발전했다. 鈴木敬, 『中國繪畵史』 中之二(東京: 吉川弘文館, 1984), p. 6 참조.
44) ‘송별’ 주제 시화권으로 추정되는 시권의 일예로 승려의 《山水軒詩卷》에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쓴 차운시가 있다. “집 머리의 푸른 빛이 물소리를 누르나니 / 屋頭蒼翠壓潺湲 소리에서 시내를 생각하고 色에서 산을 생각하네 / 聲想溪流色想山 (중략) 내일 들 다리 위에서 이별 나눌 때에 / 明日野橋分袂處 있어도 바쁜 사람과 가도 한가한 사람 일러라 / 忙忙留與去閑閑” 金守溫, 『拭疣集』 권4, 「次上人山水軒詩卷韻」. 한국고전종합DB 김달진 (역)수정, 참조.
45) 무로마치 書齋圖 詩畵軸의 心齋的 성격에 대해서는 島田修二郎, 앞의 논문, p. 20 참조; 심경호, 「일본 五山의 山水圖(書齋圖) 詩畵軸의 題詩文에 관한 일 고찰」, 『漢文學論集』 42(2015), p. 157 참조.
46) 李崇仁, 『陶隱集』 권1, 「題倫上人絶磵松風軒卷」; 韓脩, 『柳巷詩集』, 「陽村先生權近批點次韻答檜岩長老倫絶磵」; 權近, 『陽村集』 권7, 「絶磵」; 朴興生, 『菊堂遺稿』 권1, 「絶磵松風軒歌 贈益倫」.
49) 이색은 「松風軒詩 絶磵特來索賦」에서 “절간(絶磵)이 특별히 와서 짓기를 청했다.”고 하며, 제시 끝에 “하물며 내 이제 그림자 속 그림자를 그려 내자니 / 況今描出影中影”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색이 그림을 통해 윤절간의 송풍헌을 보며 제시를 짓고 있음을 비유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李穡, 『牧隱集』 권26, 「松風軒詩 絶磵特來索賦」. 한국고전종합DB 양주동 (역) 인용.
52) Richard Stanley-Baker(リチャ―ド·スタンリニベイカ), 「湖景山水の傳統に關する諸問題 特に文清との關聯において」, 国際交流美術史研究会 編, 『アジアにおける山水表現について·東洋における山水表現 2 国際交流美術史研究会 第3回シンポジアム』 (国際交流美術史研究会, 1984), pp. 34-37 참조.
53) 안휘준교수는 무로마치 시대 시화축에서 하나의 전형이 출현하는 분안(文安, 1444~1449)기의 작품인 전 슈분 필 〈죽재독서도〉를 전 안견 필 《사시팔경도》와 비교하며 이들 작품의 편파이단구도, 확대 지향적 공간개념, 근경에 비스듬한 언덕 위 雙松 모티프 등 경물구성법과 공간개념의 유사성에 대해 논했고, 이동주선생은 靜嘉堂 소장 전슈분 필 〈蜀山圖〉(1440)와 개인소장 전 슈분 필 〈水色巒光圖〉(1445)가 오오치(大內)씨의 청경사로 조선에 왔다가 가져간 손카이(尊海)의 大願寺 소장 《瀟湘八景圖》와 學圃 贊 〈山水圖〉와 일맥상통함을 지적하며, 전 슈분의 작품들이 조선 초기 산수화의 맥락 안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안휘준, 「朝鮮王朝初期의 繒畵와 日本室町時代의 水墨畵」, 『韓國學報』 2(일지사, 1976), pp. 2-21 참조; 이동주, 『한국회화사론』 (1987, 열화당), pp. 43, 282 참조; 북한의 조성진은 무로마치 말기 화가들의 구도나 공간 처리는 조선 초기 산수화와 연관성을 보여주지만 산이나 바위의 묘사에서는 남송계통의 묵필법과 준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는 무로마치 수묵화가 조선화의 영향을 내포하면서 일본적인 미감에 알맞은 형식으로 형성되는 과정임을 논술하였다. 조성진, 「일본 무로마찌시대의 수묵화단에 미친 조선화의 영향에 대하여」, 『조선예술』 553(2003), p. 76 참조.; 장진성교수는 周文 화풍을 보여주는 산수화를 일괄하여 周文系 산수화라 부른다고 전제하며, 이들 산수화의 구도, 수지법, 바위 표현이 전형적인 남송원체 화풍인 馬夏派 화풍 특히 하규 양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장진성, 「무로마치(室町) 수묵화와 조선 초기 회화: 슈분(秀文), 슈분(周文), 분세이(文淸)를 둘러싼 쟁점들」, 『미술사논단』 36(2013), pp. 44-48 참조; 조선 초기 회화와 무로마치 수묵화의 관계에 대하여 한일학계에서 제기된 학문사적, 학설사적 쟁점 전반은 홍선표, 「美術文化 (미술문화)로 보는 韓日(한일); 조선 초기 한일 회화교류 연구의 학문사적, 학설사적 과제」, 『일본학』 37(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3), pp. 1-23 참조. 홍선표 교수는 이 글에서 “양상과 실태를 재구하기 위해 관점의 전환과 새로운 자료의 발굴, 양식 분석틀의 갱신 등에 의한 문제의식과 노력이 요망된다”고 주장하였다.
54) 〈죽재독서도〉의 지쿠운 도렌(竺雲等連)이 쓴 서문은 선적인 통찰 보다 儒敎的 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島田修二郎, 앞의 논문, p. 24 참조; 淸水義明, 「禪家の詩畵軸における畵と贊の問題」, 『水墨畵と中世繪巻: 南北朝〮 室町の繪畵Ⅰ』 (東京: 講談社, 1992), pp. 162-169 참조; 무로마치 선승들의 당호 역시 선종 이념이나 선종 고사에 유래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은둔사상을 배경으로 삼은 문학적인 아칭이 대부분이며 간혹 유교사상을 따른 것이 있다. 島田修二郎, 앞의 논문, p. 16 참조; 이는 세속적, 현실적, 문인적이고 관료와의 교류에 치중하며 사상성의 약화가 보이는 무로마치 선시의 특징과 함께 한다. 인권환, 「高麗 시와 日本 五山詩의 比較 硏究」, 『한국한문학연구』 31(2003), pp. 382-384 참조; 이에 반해 성현이 쓴 〈일암송당도〉의 발문은 ‘일암송당’을 禪的, 純一的, 이상적 특징을 지닌 온전한 선의 수행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成俔, 『虛白堂集』 권9, 「題一庵松堂詩卷後」.
55) 李穡, 『牧隱集』 권1, 「雪梅軒小賦」; 鄭道傳, 『三峯集』 권2, 「次韻題日本茂上人詩卷」; 鄭夢周, 『圃隱集』 권2, 「贈嵒房日本僧永茂 二絶」; 이밖에 이색은 사절로 온 선승 萬峯惟一에게 제시 「萬峯」을 써주었고,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回禮官으로 온 梅湖軒上人이 돌아갈 때 그의 호인 ‘梅’, ‘湖’, ‘軒’ 제자를 써주고, 그 뒤에 매호헌의 모티프로 제시를 써주기도 하였다. 李穡, 『牧隱集』 권6, 「萬峯爲惟一上人題 日本人也 時奉使其國」; 成石璘, 『獨谷集』 권下, 「日本國回禮官梅湖軒上人求書號 書贈之 題其後」 “湖上梅花照水開 山前湖水抱軒回 上人樂處無人識明月淸風自去來.” 엄경흠, 「고려말(高麗末) 지식인(知識人)의 대일본승(對日本增) 시(詩) 교류(交流)와 일본(日本)에 대한 인식(認識)」, 『동남어문논집』 29(2010), pp. 281-304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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