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말선초 승려들의 詩畵卷 : 名號·堂號 주제의 ‘詩卷’·‘詩軸’ 기록을 통해 본 실체와 위상*

Scrolls of Poem-Paintings by Buddhist Monks of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 Records of the “Scrolls of Poems” on the Studio Name and Their Significance*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2;315():39-74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2 September 30
doi : https://doi.org/10.31065/kjah.315.202209.002
**Ewha Womans University
이혜원**
**이화여자대학교
*이 논문은 2021년 제64회 전국역사학대회에서 발표한 내용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Received 2022 April 12; Revised 2022 April 25; Accepted 2022 May 23.

Abstract

본 논문은 현전하지 않는 14, 15세기 여말선초 승려들의 名號·堂號 주제 시화권에 대해 기록을 통하여 복원을 시도한 연구이다. 이 과정에서 원대 문인들의 圖卷 속 공간 중심의 서사적·서술적 산수화와는 성격이 다른 자연물을 기호화하여 호를 도해한 산수화가 詩·書와 함께 ‘號’라는 통합된 주제를 표상하며 詩畵卷으로 제작되고 있었던 실체를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의 太古普愚를 인가했던 원의 石屋淸珙은 ‘一菴深隱’을 선불교의 이상적 그림의 전범으로 제시한 바 있다. 기록을 통해 본 승려들의 시화권의 그림은 대체로 ‘一菴’ 즉 所居 모티프와 ‘深隱’ 즉 山水 모티프에 호와 관련된 자연물의 모티프가 결합하는 공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들 그림은 시화권 주인의 정신적 지향인 호를 주제로 삼고, 호의 각 글자를 시각화한다. 또한 이 과정에서 조선전기 대표적인 화풍이었던 원대 李郭派畵風과 劉道權畵風이 14세기 고려 승려들에 의해서 유입되고 있었고, 승려들의 수묵산수가 문사들에 의해 애호되었던 양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불어 동아시아회화사에서 조선전기 회화에 양식적으로 깊이 영향을 받았다고 일부 논의되었던 무로마치시대의 서재도 시화축이 양식 뿐 아니라 여말선초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과 창작주체, 형식, 내용에서도 상통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 시도된 문헌을 통한 여말선초 승려들의 시화권의 복원이 많은 작품이 유실된 한국 회화사의 영역을 확장하고 동아시아 예술사속 시화권의 흐름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Trans Abstract

This article examines written records of the now-lost poem-painting scrolls created by Buddhist monks who were active in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the fourteenth through fifteenth centuries) in order to reconstruct their artistic exercises and reassess their significance in the history of East Asian art. The literati painters of Yuan China reserved pictorial space in landscape painting for narrative or descriptive purposes. In contrast, the Buddhist monk-painters of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depicted natural features in their landscape paintings, accompanied by poems, as encrypted codes precisely corresponding to the characters of their studio names, or ho 號 (Ch. hao). Yuan’s Shiwu Qinggong 石屋淸珙 (1272~1352), who officially conferred the dharma to Goryeo’s Taego Bou 太古普愚 (1301~1382), proposed “a single thatched hut in the depth of the retreats,” or yi an shenyin 一菴深隱, as exemplary of Chan Buddhist paintings. The written records of the monks’ handscroll paintings suggest that the monks of the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painted landscapes by combining the motifs of a thatched hut and of the depth of the retreat with depictions of natural features that signified their studio names. While the monk’s studio name was the central theme of the painting, each character of his name was also rendered pictorially. The records further testify that Goryeo monks played a critical role in introducing to Korea the styles of the Liu Daoquan 劉道權 and Li-Guo 李郭 schools, which gained tremendous traction in the early Joseon art scene, as the literati regarded highly of ink paintings by monks. It has been widely noted that early Joseon paintings contributed to the development of the paintings of a scholar’s studio in Muromachi Japan. The monks’ poempaintings themed on their studio names further attest to the significant impact that early Joseon paintings made over not just the style but also subjects, form, and content of Japanese paintings. Even if many works of premodern Korean painting are now lost, written records about them still survive. Close examinations of such textual sources can help illuminate the historical trajectory of Korean poem-painting scrolls in the context of East Asian art history.

Ⅰ. 머리말

본 연구는 14, 15세기 여말선초 승려들이 자신들의 號를 주제로 제작한 詩畵卷에 대한 문헌기록을 다루고 있다.1 詩畵卷은 하나의 주제에 대해 題字·그림·題詠으로 구성된 두루마리로 詩書畵 三絶을 담은 종합예술이다. 한편 중세 동아시아의 문인들은 자신의 정신적 지향점을 齋名, 軒號, 堂號로 삼아 懸板으로 올린다. 이는 개인의 정체성을 하나의 槪念으로 문자화하여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는 행위이다. 이러한 행위가 문예로 재현된 것이 名號·堂號 주제의 詩畵卷이다. 현판이 실제 공간에서 호 주인의 정신적 지향을 현시한다면,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은 동일한 방식으로 大字의 題字가 현판을, 그림이 실제 공간을 대체한다.

14, 15세기 동아시아에서는 문인,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의 圖卷 제작이 성행했는데, 기본적 형식 안에서 양상은 삼국이 다르게 전개되었다. 원대(元, 1271~1368) 명호·당호 주제 도권의 화면형식은 대체로 橫卷이며, 北京 故宫博物院 소장 1364년 주덕윤(朱德潤, 1294~1365)이 그린 《秀野軒圖卷》(Fig. 1)과 같이 오른편부터 왼편으로 大字의 題字·그림·題跋의 구성을 갖추었다. 한편 日本 무로마치시대(室町時代, 1336~1573)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축의 화면형식은 대체로 縱軸으로, 香雪美術館 소장 15세기 중엽 작자미상 〈湛碧齋圖〉나 五島美術館 소장 1538년 센카(僊可, 생몰년미상)가 그린 〈雪嶺齋圖〉(Fig. 2)와 같이 상단 끝에 大字의 題字를 갖춘 예는 드물며 아래부터 위로 그림·題跋의 구성을 갖추었다. 조선후기 문신 미수(眉叟) 허목(許穆, 1595~1682)은 《玄洽卷子》의 발문에서 “(좋은) 卷軸은 書, 詩, 名士를 갖추어야하는 세 가지 어려움이 있으며, 古人의 文墨古跡을 찾아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僧의 軸에서 보아야 한다.”고 언술한 바 있다.2 14, 15세기 여말선초의 경우 현전하는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은 없으나, 문헌기록을 통해 살펴보면 題字·題詠을 갖춘 승려들의 ‘詩卷’이 제작·성행하였고,3 시권 중 일부는 그림이 포함된 시화권이었다. 또한 이들 여말선초 승려들의 시화권은 무로마치시대 서재도 시화축과 창작주체, 형식, 내용면에서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고,4 시기적으로 선행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5

Fig. 1.

朱德潤, 《秀野軒圖卷》, Zhu Derun, Studio of Refined Wilds with frontispiece and colophon, 1364, Yuan, hand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28.3×210cm, The Palace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Special Exhibition: Two Hundred Selected Masterpieces from the Palace Museum, pl. 17)

Fig. 2.

僊可, 〈雪嶺齋圖〉, Senka, Setsurei-sai Study with Rinchū Soshō perface, 1538,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97×17cm, Gotoh Art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Special Exhibition: Art of The Muromachi Period, pl. 310)

이에 본 논문은 14세기 麗末을 대표하는 禪師인 옥전달온(玉田達蘊, 14세기 활동),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의 시화권 관련 기록과 15세기 鮮初를 대표하는 禪師인 일암학전(一菴學專, 15세기 활동)의 시화권 관련 기록을 발굴하여 이를 출발로 여말선초 시화권의 실체를 추적하려 한다. 이 과정에서 시화권을 주도했던 창작주체로서 승려를 주목하여 高麗와 元의 서화교류의 한 축으로서 승려의 역할을 살펴보고, 이들에 의해 제작된 산수화가 조선 전기 수묵산수화와 무로마치 시화축에 끼친 영향 관계를 살핌으로서 그 위상에 다가가려 한다.

Ⅱ. 名號·堂號 주제 시화권의 제작양상

1. 14세기

1) 옥전달온(玉田達蘊, 14세기 활동)의 ‘松月軒’ 관련 시서화

14세기 시화권 제작의 도화선이 되었던 창작주체는 문인적 성향과 시서화의 소양을 갖춘원 유학승 출신 禪師들로 추정된다. 이들은 원에서 강남출신의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교유했고, 이들과 ‘고동서화 취미의 雅士’로서 동일한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대표적인 예가 林觀寺 주지였던 옥전달온(玉田達蘊, 14세기 활동)이다.6

前 林觀寺 주지 옥전선사가 내 좌주 歐陽玄선생이 쓰신 ‘松月軒’ 세 자를 가지고 와 나에게 軒記를 써 달라 하면서 말하기를 (중략) 한림승지 歐陽原功과 집현학사 揭曼碩과 국자 좨주 王師魯, 중서 참정 危太朴과 집현 대제 趙中穆과 道家의 吳宗師같은 이들도 모두 그를 위하여 제·찬·서·인을 써주었고, 집현 대제 조중목과 眞人 張彦輔, 吳興의 唐子華도 松月軒을 위하여 傳神을 하였으나 이제 잃었으니 아깝구나.7

이 글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쓴 옥전달온의 「松月軒記」이다. 옥전달온은 이름[名]은 달온(達蘊), 호(號)는 옥전(玉田), 헌호(軒號)는 송월헌(松月軒)이다. 그는 원 태정기(泰定, 1324~1328) 인도승 지공(指空, Dhyāna-bhadra Sūnyādina, 1300~1363)이 고려에 왔을 때 출가하여, 1328년에 지공과 함께 入元했다. 「송월헌기」에는 옥전달온의 所居이자 헌호였던 송월헌과 軒號의 내력, 송월헌에 대한 友人의 시서화 상찬과 관련된 글이 있다. 옥전달온이 기증받은 ‘松月軒’ 관련 시서화는 ‘송월헌’이라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大字·그림·제찬 즉 원대 도권의 형식을 갖추고 있어 시화권을 염두에 둔 사전 창작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첫째, ‘松’, ‘月’, ‘軒’ 세 글자는 한림 승지를 지낸 구양현(歐陽玄, 1283~1357)이 썼다. 둘째, 그림[“爲松月軒傳神”]은 3인의 화가가 참여했는데, 이들은 조옹(趙雍, 약 1290~1360),8 장언보(張彦輔, 14세기 활동), 당체(唐棣, 1296~1364)였다. 마지막으로, 題·贊·敍·引은 구양현, 元詩四大家이자 儒林四傑이었던 집현학사 게혜사(揭傒斯, 1274~1344), 국자좨주 왕기(王沂, 14세기 활동), 중서참정 위소(危素, 1303~1372), 앞서 그림을 그린 조옹, 그리고 도가의 오종사(吳宗師)와 같이 원대 강남 출신의 명성 높던 學者, 文人, 道士였다.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은 「題玉田禪師松月軒」에서 “문안공 게만석과 문공 구양원공 등 여러 선생의 제영이 걸려 있었다[有揭文安公曼碩歐陽文公原功諸先生題詠]”는 부제를 붙였다.9 이러한 기록은 이색이 「송월헌기」 기문에서 분실했다고 기록한 그림 등이 고려 유입 후 분실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2)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의 《聰無聞卷》과 ‘平源’ 관련 시서화

스님은 자신의 거실을 江月軒이라고 이름하였다. 평소에 세속의 문자를 익힌 적이 없었지만, 사람들이 시를 지어 달라고 부탁하면 붓을 잡고 곧장 써 내려갔는데, 별로 정신을 기울이지 않는 듯하면서도 深遠한 흥취가 우러나오곤 하였다. 만년에는 또 墨畫 그리기를 좋아하였는데, 스님의 산수화는 劉道權의 화풍과 비슷한 점이 있다.10

나옹혜근은 이름[名]은 혜근(惠勤), 호(號)는 나옹(懶翁), 헌호(軒號)는 강월헌(江月軒)으로 凡동아시아에서 큰 명성을 누리던 승려이다. 나옹혜근은 1348년 원에 유학하여 燕京 法源寺에서 지공에게 인가받고, 이후 1350년 절강을 유력하여 항주 淨慈寺의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에게 인가받음으로써 臨濟宗의 禪脈이 되어 10년 만에 고려에 귀국한 선승으로 공민왕의 왕사였다. 위 인용문은 14세기 후반기 나옹혜근과 같이 시와 수묵산수에 능했던 선승이 창작주체가 되어 시화권을 제작했던 정황을 알려준다. 이색은 이 글에서 나옹혜근의 화풍이 元의 산수화가 유도권(劉道權, 14세기 활동)의 화풍과 비슷하다고 언술하고 있다. 신숙주(申叔舟, 1417~1475)의 「畵記」 (1445)와 김안로(金安老 1481~1537)의 『龍泉談寂記』에는 유도권이 濃淡을 잘하는 산수화가라고 언술하고 있다.11

萬樹長松雲滿天 수많은 낙락장송에 하늘에는 구름이 가득하고

蒼崖深處掛飛泉 푸른 절벽 깊은 곳엔 폭포가 걸려 있네.

平生自厭生三耳 평생에 나는 세 귀 생긴 걸 싫어하노니

何日相從學坐禪 서로 종유하여 좌선을 배워 볼꼬.12

이 시는 총무문선사의 《聰無聞卷》의 권두에 있는 나옹혜근의 산수화를 보고 이색이 쓴 제화시이다. 총무문(聰無聞, 생몰년미상)은 사대부 출신의 선승으로 호는 無聞이다. 일찍이 공민왕(恭愍王, 1330~1374)에게 남악에 사는 무문이라는 ‘南’, ‘嶽’, ‘無’, ‘聞’ 大字의 친필을 하사받고, 공민왕의 사후에 이색에게 제찬을 요구한 바 있다.13 《총무문권》은 나옹혜근의 산수화, 이색의 제화시 등으로 구성된 시화권으로, 李穡의 「題聰無聞卷」 제화시에는 권의 머리에 나옹혜근의 산수화가 있다는 부제[卷首有懶翁山水]를 더하고 있어 고려 말기 승려들의 시화권의 순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Fig. 3).

Fig. 3.

李穡, 『牧隱集』, I Saek, Mokŭnjip, 14th century, Koryŏ, Kyujanggak (Database for Korean Classics, https://db.itkc.or.kr)

환암 혼수의 제자인 分上人이 또 나옹 혜근을 따라서 함께 생활해 온 지가 여러 해 되었으므로, 나옹으로부터 평원(平源)이라는 號를 받았는데, 그 墨跡이 아직도 새롭기만 하다. 그리고 山水圖로 말하면 나옹이 得意로 여기는 바로서 그 平遠 솜씨가 돋보여 애호할 만한데, 여기에다 또 길 떠나는 선물로 노래까지 잇 따라 지어서 적어 주었으니, 이를 통해서도 나옹의 기량이 거의 남김없이 발휘된 것을 볼 수 있다 하겠다.14

이 글은 나옹혜근이 환암혼수(幻庵混修, 1320~1392)의 제자이자 자신과 여러 해를 함께 했던 평원분(平源分, 생몰년미상)을 위해 제작한 시서화의 제작과정 및 경위에 대해 이색이 쓴 說이다. 나옹혜근은 평원분에게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의 호에서 유래한 平源이라는 號를 지어주고[翁游江南 嗣法於平山 則平乃翁之所自出也 而本源自性 於是顯矣 合而言之曰平源], 그의 호를 쓴 墨跡, 그 다음 山水圖, “거기에다가 가는 것을 전송하는 송(頌)을 잇대었다[而繼以送行之頌]”고 했다.15 이 기록을 통해 나옹혜근은 제자를 송별할 때 호를 지어주고, 그 호를 쓴 표제[平源之號 墨跡]·그림[山水圖]·시[繼頌]로 구성된 권을 주기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색은 이 산수도가 平遠法으로 그려졌다고 했다. 이는 “나옹혜근의 시가 深遠의 趣가 우러나왔다”는 앞서 이색의 언술16과 맥이 이어져, 나옹혜근이 제작한 시화권의 전체적 분위기를 알려준다.

2. 15세기: 일암학전(一菴學專, 15세기 활동)의 《一菴松堂卷》(1442년 전후)

一菴松堂 專上人은 스님 중에 뛰어난 자이다. 나는 正統 壬戌年(1442) 겨울에 甄城 李伯玉, 平陽 朴仁叟, 丹溪 河仲章, 昌寧 成謹甫 諸君과 더불어 명을 받들어 覆鼎山 津寬寺에서 독서하였는데, 上人 또한 그곳에 머물러 있어서 비로소 얼굴을 알게 되었다. (중략) 하루 저녁은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 시를 구하는데, 千峰이 명한 바 ‘一菴松堂’이라 하였기에 諸君이 이미 상인을 중히 여겨서 모두 시를 지어주었다.17

이 글은 신숙주(申叔舟, 1417~1475)가 일암학전의 《一菴松堂卷》에 쓴 기문이다. 일암학전은 이름[名]은 학전(學專), 호(號)는 일암송당(一菴松堂), 당호(堂號)는 일암(一菴)이다. 일암학전은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1418~1453)의 《몽유도원도권축(夢遊桃源圖卷軸)》(1447)에 참여한 제시자이자 성현(成俔, 1439~1504)이 ‘儒釋士林의 사표’라고 했던 천봉만우(千峰萬雨, 1357~?)의 제자로 ‘一菴松堂’은 스승 천봉만우가 命한 호이다.18 《一菴松堂卷》은 일암송당의 주제에 대한 題字·그림·題詠·기문·발문의 구성을 갖추었다. 《일암송당권》에는 천봉만우가 쓴 ‘一’, ‘菴’, ‘松’, ‘堂’의 제자가 있고, 15세기를 대표하는 문사들이 제영에 참여하고 있었다. 신숙주의 「一菴松堂卷記」에는 1442년 覆鼎山(삼각산) 津寬寺에서 사가독서할 때 일암학전이 시를 구했고 “諸君이 卷에 있는 천봉만우의 題字를 보고 모두 시를 지어주었다”고 했다.19 이때 《일암송당권》의 제찬에 참여한 賜暇讀書하던 집현전 학사들은 伯玉 이석형(李石亨, 1415~1477), 仁叟 박팽년(朴彭年, 1417~1456), 丹溪 하위지(河緯地, 1412~1456), 謹甫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이었다. 또 이 권은 후에 이승소(李承召, 1422~1484), 강희맹(姜希孟, 1424~1483) 등 명사들의 시와 성현(成俔, 1439~1504)의 후발문이 더해졌다.20 신숙주가 제한 〈一菴松堂圖〉 역시 《일암송당권》과 관련된 그림으로 생각된다.21 신숙주의 〈一菴松堂圖〉 제화시를 보면 〈일암송당도〉는 堂[一菴·高堂], 봉우리[岑], 푸른 소나무[蒼松], 江의 모티프로 구성되었다.22 성현은 『虛白堂集』 권9, ‘題跋’ 「題一庵松堂詩卷後」에서 “(일암학전이) 거처하는 곳에 ‘一’자를 내걸고 ‘庵’이라 이름 하였다. 몸은 一庵 가운데 있으면서 마음으로는 一理의 오묘함을 연구하니, 일리의 오묘함은 다른 곳에 있지 않고 바로 뜰 앞의 소나무에 있는 것이다[其爲居也揭一名菴 身在一庵之中 心究一理之妙 一理之妙不在乎他 在庭前松樹耳].”고 했다.23 한편 강희안(姜希顔, 1417~1464)은 일암학전이 “수년 동안을 한 곳에 있지 않고 옮겨 다니니 머무는 곳이 없다[眞所謂應無所住矣]”고 했다.24 따라서 〈일암송당도〉는 그의 실재 所居이자 동시에 그의 정신적 소거를 표상한 그림이었을 것이다.

Ⅲ. 시화권의 구성과 호의 시각화 방식

1. 시화권의 제작의도와 구성

懶翁의 제자 운설악이 산으로부터 서울에 와서 우리 座主 牧隱先生을 뵙고 堂號를 청하니, 선생이 負暄堂이라 명하고 따라서 記를 지어 주었는데, 그것을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이며 말하기를, “내가 목은에게 찾아가서 나의 당호와 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내 몸이 일정하게 머무는 곳이 없는데 어찌 堂이란 것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억지로 당호를 가진 것은 道에 의탁하려는 것입니다[強而名之堂者 以寓夫道也]. 내가 우리 스승 섬기기를 20년이란 세월을 하였으나 오히려 도의 髣髴함도 얻지 못하였는데, 이제 스승을 여의었으니, 안으로는 내 마음에서 구하고 밖으로는 당호에서 구하여, 장차 사방의 先覺들에게 質正하려 하는데, 縉紳들의 말씀을 구하여 먼 길의 路資로 삼고자 합니다.”25

이 글은 여말선초를 대표하는 文翰으로 이색의 제자였던 권근(權近, 1352~1409)이 1382년 나옹혜근의 제자 雲雪岳上人에게 써준 序文으로 여말선초 승려의 명호, 당호 주제 詩卷의 제작의도와 제작과정을 보여준다. 이 글을 통해 나옹혜근의 제자인 운설악상인이 스승의 입적 후 스승과 교유했던 名士를 찾아 堂號와 記文을 받고, 또 그 명사의 제자를 찾아 序文을 받고, 향후 縉紳들에게 제시를 받아 求道의 여정을 시작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정한 머무는 곳이 없었던 운설악상인과 같은 승려에게 당호 주제의 시권은 구도의 매개체였으며, 명호 주제의 시권 역시 그 성격이 다르지 않았다. 다음은 14세기 명호, 당호 주제 시권의 구성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금년 가을 상인이 산에서 내려왔으므로, 내가 그를 보고 너무 기뻐 하루 종일 붙들어두었는데, 그때 상인이 두루마리 하나를 꺼내어 보여주며 말하기를[上人出示一卷曰], “내가 나의 초당을 霜竹이라 이름하고 六友 金祕判에게 청하여 큰 글자를 써주었다[而請六友金祕判作大字]. 앞으로 상죽에 대한 詩歌를 천신들 사이에서 구하려고 하니[將以求詠歌薦紳間], 그대가 記文을 써주면 좋겠다[子幸記之].”26

이 글은 曹溪宗 예은봉(猊隱峯)의 제자였던 은계각림(隱溪覺林, 14세기 활동)의 堂號였던 霜竹軒 주제의 시권에 이숭인(李崇仁, 1347~1392)이 쓴 記이다. 은계각림은 육우당(六友堂) 김구용(金九容, 1338~1384)의 ‘霜’, ‘竹’의 大字, 이숭인의 記文을 받고 이후 ‘霜竹’에 대한 천신들의 題詠으로 구성된 시권을 제작하려 하였다. 이와 같이 제자·제영으로 구성된 시권에 그림이 삽입된 것이 시화권이다. 『景德傳燈錄』을 중간하고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환암혼수의 법맥을 이었던 구곡각운(龜谷覺雲, 14세기 활동)의 《龜谷覺雲禪師御書畵詩卷》의 예를 보면, 이 시권은 구곡각운의 名·號에 대해 大字를 쓰고 그림을 그린 공민왕(恭愍王, 1330~1374)의 서화를 주제로 제작된 시화권이다.27 공민왕은 구곡각운의 이름인 ‘覺’, ‘雲’과 그의 호인 ‘龜’, ‘谷’을 쓰고, 달마가 갈댓잎을 타고 있는 도상의 〈達磨折蘆渡江圖〉와 보현이 코끼리를 타고 있는 도상의 〈童子普賢六牙白象圖〉을 그려 같은 크기의 두루마리 네 개를 구곡에게 하사했다.28 “큰 글씨는 깊고 온자하여 만근 무게의 솥과 같다[大字深穩如萬鈞鼎]”는 이색의 언술은 이름[名]인 ‘覺’, ‘雲’과 명호[號]인 ‘龜’, ‘谷’이 大字로 쓰였음을 알려준다. 《구곡각운선사어서화시권》은 이색의 서문과 이숭인, 이인복(李仁復, 1308~1374) 등 진신들의 제시를 받아 공민왕의 題字·그림 두루마리와 별권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색은 서문에서 “달마(達磨)의 마음으로, 보현(普賢)의 행적을 따랐다. 그의 이름을 생각하여 마음에 아무것도 가지지 아니함으로써 모든 존재의 원리를 삼았고 그의 號를 생각하여 藏六을 모든 행동의 근본으로 삼았다.”고 했다.29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 시화권에서 제자·그림·제찬은 이와 같이 시권 주인의 ‘號’라는 통합된 주제를 표상하며 삶의 지향을 현시한다. 14세기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 시화권의 성격은 15세기에 지속되며, 구성은 제자, 그림, 기문, 서문, 제영, 후발문 등의 순서였을 것으로 생각되고, 구성과 순서는 권에 따라 자유롭게 변주되는 양상을 띠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15세기 명호·당호 주제 시권의 구성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丁未(1607, 선조40) 여름에 나는 삼척(三陟)에 있었는데, (중략) 이생(李生)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 이름은 잊었다. 그가 책 한 편을 들고 와 보여주는데 表題가 《詞翰傳芳》이라 씌어 있었다. 펴보니, 世祖때 총애 받던 중 信眉의 詩卷이었다[世廟朝嬖髡信眉詩卷也]. 金文良이 序를 하였고 徐剛中ㆍ姜景愚ㆍ景醇ㆍ成重卿ㆍ李三灘이 시를 하였는데 모두 손수 글씨를 썼으며, 贊은 누가 지었는지 알 수 없으나 글씨는 鄭東萊가 썼고, 安可度의 그림인 釋迦와 彌陀 二軀로 끝을 맺었는데 그 그림이 아주 미묘했으며, 맨 마지막에는 御璽 하나가 찍혀 있는 참으로 古物이었다.30

이 글은 허균(許筠, 1569~1618)이 안평대군과 수양대군이 모두 존경하던 고승이자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의 형이었던 신미(信眉, 1403~1480)의 《信眉詩卷》에 대해 쓴 글이다. 《信眉詩卷》의 구성은 「詞翰傳芳」의 表題, 김수온의 序文, 서거정, 강희안, 강희맹, 성임, 이승소 등 5인의 자필 題詩,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의 글씨로 쓴 贊, 안견(安堅, 15세기 활동)의 佛畵, 세조의 御璽, 즉 표제, 서문, 제시, 제찬, 그림의 순서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세조의 어새는 15세기 승려들의 시화권의 전통이 세조대 불교계에서 여전히 성행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왕실에서도 긍정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31

2. 호의 시각화 방식

14, 15세기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에서 號의 주제는 13, 14세기 동아시아 승려들의 문집과 어록에서 성행했던 名號詩, 道號詩와 연관된다고 생각된다.32 또한 이 주제는 元代 강남 임제종 楊岐派 설암조흠(雪巖祖欽, 1215~1287)계에서 성행했던 庵居詩와도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33 특히 고려 충선왕(忠宣王, 1275~1325)이 조맹부(趙孟頫, 1254~1322)에게 소개받고 스승으로 모셨던 원의 중봉명본(中峰明本, 1263~1323)은 동아시아 암거시 성행의 중심에 있었는데, 그의 당호이자 소거였던 환주암을 노래한 「幻住菴歌」는 자신의 거처하는 공간의 의의를 당호풀이를 통해 제시하면서 자신이 지향하는 바를 드러내었다.34 그의 어록인 『廣錄』은 입적 후 『普寧藏』에 편재되어 고려와 일본에 유포되어 성행하였다. 그렇다면 선종 회화에서 집, 즉 所居에 대한 모티프는 어디에서 유래할까? 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으로 원대 대표적인 선승으로 고려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를 인가함으로써 한국불교 조계종의 조종으로 일컬어지는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의 언술을 들 수 있다.35 그는 “法道는 寂寂하여 모방하기 어려우니 ‘一菴深隱’이 좋은 그림이다[法道寂寂不可模 一菴深隱是良圖].”36라 하여 菴子와 산수가 결합한 ‘一菴深隱’을 선불교의 이상적 그림의 전범으로 제시한 바 있다. 기록을 통해 본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의 그림은 대부분 시화권 주인의 ‘一菴’ 즉 所居 모티프와 ‘深隱’의 배경이 되는 山水 모티프에 명호·당호와 관련된 松, 竹, 梅, 月 등의 자연물의 모티프가 결합하는 공식으로 재현되고 있다. 이들 그림은 시화권 주인의 정신적 지향인 명호, 당호를 주제로 삼고, 명호, 당호의 글자를 쪼개어 각각의 글자를 시각화한다. 무로마치 시대의 서재도로 불리는 산수도 시화축 역시 일본 靜嘉堂 소장의 작자미상, 〈三益齋圖〉(1418)(Fig. 4)와 같이 시화축 주인의 명호, 당호를 표상한 그림으로 볼 수 있다. 삼익재는 『論語』 「季氏」에 “유익한 벗이 셋 있고 손해되는 벗이 셋 있으니, 정직하고 성실하고 견문이 많으면 유익하다[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에서 유래한 당호로 〈삼익재도〉에서는 松·竹·梅로 三益을 표상하였다.

Fig. 4.

Artist unknown, 〈三益齋圖〉, San’eki-sai Study, 1418,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101.5×38.8cm, The Seikadō (Nihon bijutsu zenshū, vol. 12, pl. 68)

峯巒隱映白雲中 봉우리의 희미한 모습 구름 속에 보이고

松檜森森有梵宮 무성한 솔숲에 범궁이 있네

門外扁舟能濟渡 문밖의 작은 배가 사람을 건네니

吹來吹去是香風 불어오고 불어가는 것은 향기로운 바람이네.37

이 시는 天台宗 복암상인(馥庵上人)의 《馥庵上人手卷》의 그림을 보고 권근(權近, 1352~1409)이 쓴 「題天台馥庵上人手卷啚後」의 부분이다. 이 그림은 향기를 뜻하는 馥과 소거를 뜻하는 庵이 결합하여 후각적 이미지를 담은 산수도로, 제시 중 香風은 솔향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작품은 峯巒, 白雲, 松檜森森, 梵宮, 門, 扁舟 등의 모티프로 원경의 백운에 가려진 희미한 봉우리를 배경으로 근경의 솔숲 속 암자를 그린 산수도로 생각된다.38 이러한 모티프를 이해하기 위한 시각적 자료로 무로마치 선승들의 시화축인 일본 根津美術館 소장의 작자미상, 〈披錦齋圖〉(1464)을 들 수 있다(Fig. 5). 당시 창작자들을 지배했던 詩畵一律사상에 근거하여 제시로 확인되는 14세기 승려들의 시권을 분석하면 이들은 대체로 경물이 클로즈업되며 호를 표상한 기호에 집중하는 양상이 강했는데, 권근이 제시를 쓴 《복암상인수권》 속 그림은 원경이 점점 멀어지며 공간이 넓어지고 산수적 요소가 강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14세기 말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 속 그림이 근경중심의 산수와 원경으로 확장된 산수 두 유형이 공존하고 있었음이 확인된다.

Fig. 5.

Artist unknown, 〈披錦齋圖〉, Hikin-sai Study, 1464,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113.6×27. 3cm, The Nezu Institute of Fine Arts, Tokyo (Preserving Heritage: The Nezu Collection, pl. 2)

Ⅳ. 회화사적 영향과 의의

1. 조선 전기 수묵산수화에 끼친 영향

14세기 유학승 출신들이 제작한 시화권 속 그림들은 어떤 화풍이었을까? 먼저 이색이 쓴 「松月軒記」에 있는 조옹, 장언보, 당체가 선물한 ‘송월헌을 위한 傳神[“爲松月軒傳神”]’ 3점 관련 기록을 보겠다. 옥전달온에게 서화를 기증한 조옹과 당체는 조맹부의 아들과 제자였다. 1342년 趙雍 필 臺北故宮博物院 소장 〈採菱圖〉(1342)(Fig. 6)와 唐棣 필 대만고궁박물원 소장의 〈谿山烟艇〉(Fig. 7)은 元代 李郭派 산수화풍이다. 15세기 조선 전기 산수화의 일예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 안견 필 《四時八景圖》 〈晩春〉(Fig. 8)을 보면 북송대 곽희풍을 고전적 전범으로 삼으면서, 근경 토파 위 喬木의 雙松, 경물 배치, 전체 구도 등에서 원대 이곽파의 영향을 받고, 특히 당체의 〈계산연정〉의 경우 추가된 새로운 요소들과 중경·원경의 묘사에서 연관성이 보인다. 「松月軒記」 기록은 조선 전기 산수화에 끼친 원대 이곽파의 영향에 대한 경로 중 麗末 유학승 출신이 주체가 되었던 참신한 사례가 된다.

Fig. 6.

趙雍, 〈採菱 圖〉, Zhao Yong, Picking Water Chestnuts, 1342, Yuan,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107. 6×35.1cm, The Palace Museum, Taipei (The Palace Museum, https://www.npm.gov.tw)

Fig. 7.

唐棣, 〈谿山煙艇〉, Tang Di, Boating in the Mist of a Mountain Stream, 14th century, Yuan,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silk, 133.4×86.5cm, The Palace Museum, Taipei (The Palace Museum, https://www.npm.gov.tw)

Fig. 8.

전 안견, 〈만춘〉, 《사시팔경도》, Attributed to An Kyŏn, “Late Spring in Eight Views of the Four Seasons”, in Saship’algyŏngdo, 15th century, Chosŏn, ink and color on silk, 35.2×28.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나옹혜근(懶翁惠勤, 1320~1376) 기록 역시 조선 전기 회화사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나옹혜근은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화풍인 ‘劉郭(유도권·곽희)’ 중 농담을 잘했다는 유도권(劉道權, 14세기) 화풍의 애호자였다. 또한 그는 1350년 3월부터 1353년 3월에 법원사로 돌아오기까지 平江府·杭州·明州·婺州 등 浙江省 일대를 3년간 주유한 바 있어,39 ‘묵화(墨畫) 그리기를 좋아했다’는 그가 목계(牧谿, 13세기 후반 활동)로 대표되는 절강성 일대의 남송 선종 회화의 전통을 접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Fig. 9).40

Fig. 9.

牧谿, 〈漁村夕照圖〉, Attributed to Muqi, Fishing Village in Evening Glow, 13th century, Song, handscroll, ink on paper, 33.0×112 .6cm, The Nezu Institute of Fine Arts, Tokyo (Nihon bijutsu zenshū, vol. 12, Ink painting and medieval picture scroll, pl. 2)

이색은 나옹혜근의 제자였던 豐禪師의 그림을 얻기 위해 기다리며 (풍선사가) “心畫를 방금 혜근나옹에게서 전수했다 / 心畫方傳勤懶翁(후략)”41 고 했다. 이는 당시 나옹혜근의 禪畵가 제자들에 의해 전수되고 있었고, 이들의 수묵산수화가 당시 이색으로 대표되는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無塵의 풍격을 갖춘 새로운 예술로 환영받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시권은 수천 명이었다는 나옹혜근의 제자들에 의해 제작된 경우가 많아 여말 시권의 발전에 있어 나옹혜근의 역할을 알 수 있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당시 대표적인 화풍으로 유도권과 곽희를 하나로 묶어 ‘劉郭’이라 언술한 바 있다.42 14세기 옥전달온과 나옹혜근의 시화권 관련 기록은 문사적 정체성을 지닌 유학승들이 원대 강남출신 서화가들과의 교유를 통해 새로운 조형언어와 형식을 고려에 유입시키고 영향을 끼쳤던 사례를 보여준다. 14세기 시화권 기록 속 원대 이곽파와 유도권 화풍은 15세기 일암학전의 〈一菴松堂圖〉 제화시로 이어진다.

一菴栖碧岑 일암은 푸른 물가 언덕에 거처하고

蒼松蔭高堂 푸른 소나무 높은 堂에 그늘 짓네.

禪翁何所爲 禪翁이 어찌하여 게 있는가?

江流空自長 강물이 흘러 空으로 스스로 나아가네.43

이 시는 〈一菴松堂圖〉에 신숙주가 쓴 제화시이다. 제화시 제1구는 푸른 물가 높고 험한 봉우리에 위치한 堂의 이미지이다. 제화시 제2구는 푸르른 소나무가 봉우리 끝 높은 곳에 있는 堂을 그늘 짓는 이미지이다. 제시에서 보이는 江·岑·松堂 모티프 조합은 15세기 작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전 安堅 필 《四時八景圖》 〈晩春〉(Fig. 8)과 비교할 수 있다. 이들 작품에서는 험준함을 강조하기 위해 사선방향으로 돌출한 언덕, 언덕의 높이를 강조하기 위한 화면의 편파구도, 소나무의 배치가 공통적으로 보인다. 제화시 제3구와 제4구는 일암송당의 주인인 일암학전이 선승이며 이 그림이 空을 내면화한 禪畵임을 확인하고 있다. 이색은 나옹혜근의 제자인 溪月軒의 시집 『印空吟』의 跋文에서 ‘空의 세계’를 ‘비어있는데 만물이 나오게 하는 것’으로 문자와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이 ‘空의 세계’를 시각화할 때 원경에 농담과 여백을 통한 넓은 공간감, 안개의 효과적인 사용, 공간적 깊이감이 있는 묘사를 채택했을 가능성이 크다. 일암학전은 조선전기 문예관을 이끌고 있던 名士들과 매우 친밀했던 선승이다. 이는 여말선초 선승들의 서화 취향과 재현방식을 내재한 수묵산수가 조선 전기 산수화의 감상층의 미감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또한 조선전기 산수화에 내재된 超越과 淸淨의 주제의식, 寂寂한 고요의 세계 역시 여말선초 승려들의 서화 전통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2. 무로마치 수묵산수화와의 관계

여말선초 시권 기록에서 齋居와 送別은 주요한 주제였는데,44 이는 무로마치 시화축도 같은 양상을 보인다. 무로마치 시화축 중 書齋圖 시화축으로 명명되는 齋居 주제의 시화축은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 시화권 기록과 형식, 내용 뿐 아니라 號를 시각화하는 방식 등에서 매우 유사하다. 무로마치의 선승들의 서재도 시화축은 실경의 재현이 아니었다.45 무로마치 서재도 시화축에서 보이는 당호의 표상, 표상에 대한 노골적인 재현, 모티프의 구성과 조합은 시대적으로 선행했던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 기록에서 보이는 제화시의 특징과 매우 유사하다.

冷冷絶磵水 차디찬 절벽 아래 물

磵水源流活 떨어지네 이곳 송풍헌으로

落此松風軒 물은 퐁퐁 솟아 활기차게 흐르고

松風晝夜喧 솔바람은 밤낮으로 조용할 때가 없네.46

이 시는 《松風軒卷》에 쓴 이숭인의 제시로 이숭인은 명호인 絶磵의 “차디찬 절벽 아래 물”과 헌호인 松風軒를 콜라보하여 시각적으로 재현하였다(Fig. 10). 나옹혜근과 환암혼수의 제자인 윤절간(倫絶磵)은 자신의 당호를 松風軒으로 짓고 이색에게 記를, 정추(鄭樞, 1333∼1382)에게 銘을 구했다.47 윤절간은 나옹혜근에 이어 양주 檜巖寺 주지가 되었던 선승으로 《松風軒卷》, 《倫絶磵卷子》, 《倫上人絶磵松風軒卷》으로 불리는 권을 제작했으며, 여기에 제시로 참여한 문인들은 이숭인, 권근, 정몽주(鄭夢周, 1337~1392), 한수(韓脩, 1333∼1384) 등 이색문하 고려 최고의 문인들이었다.48 이숭인의 제시로 미루어 《松風軒卷》 그림은 전체적으로 솔바람 소리, 송풍헌으로 떨어지는[落] 폭포소리의 청각적 이미지를 송풍헌 이미지와 함께 시각화시킨 작품이었을 것이다.49 이렇듯 청각적 이미지를 시각화한 시각적 자료로 무로마치 시화축인 일본 靜嘉堂 소장의 작자미상, 〈聽松軒圖〉(1433)(Fig. 11)를 들 수 있다. 그림은 전체적인 경물을 앞으로 당겨 경물을 크게 묘사하고 있으며, 상단 1/3인 원경에는 백운에 가려진 高峯, 1/3인 중경에는 화면 중심을 대각선으로 가르며 비스듬히 누워 화면을 가득채운 소나무 한그루와 우측 소나무 가지 밑에 놓인 聽松軒, 화면 좌측 하단에는 작은 계단식 폭포를 통해 聽松과 軒의 시각적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는 시각화의 방식에서 시기적으로 앞서는 여말선초 시화권이 시화축의 최성기였던 오에이(應永, 1394~1428)기 시화축의 전범이 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Fig. 10.

李崇仁, 『陶隱集』, I Sungin, Toŭ njip, 14th century, Koryŏ, Kyemyŏng University (Database for Korean Classics, https://db.itkc.or.kr)

Fig. 11.

Artist unknown, 〈聽松軒 圖〉, Chōshō-ken Study (detail), 1433,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silk, 103.0×31.8cm, The Seikadō (Tokyo National Museum, Nihon no Suibokuga Japanese, pl. 10)

또한 경물의 배치와 양식도 조선 초기 수묵화와 밀접한 관련성이 있다. 무로마치 시화축에 대한 조선수묵화의 영향에 대해서는 와키모토 소쿠로(脇本十九郎)가 1934년 「日本水墨画壇に及ぼせる朝鮮画の影響」에서 1423년 슈분(周文)의 來朝와 오에이(應永)에서 분메이(文明)까지 시기(1394~1487)의 일본 수묵화단을 조선계로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담론화되어 그 기조를 유지하며 근래에 이르고 있다.50 미술사가 아카자와 에이지(赤澤英二)는 「室町水墨畵と李朝畵の關係」에서 일본 正覺寺 소장 《地藏十王圖》(1461)(Fig. 12)와 같이 여말선초 계통의 불화에서 볼 수 있는 ‘기묘한 주봉’과 ‘강한 묵색’의 특징이,51 리처드 스탠리베이커(Richard Stanly-Baker)는 天理大學 도서관 소장 安堅 필 〈夢遊桃源圖〉(1447)(Fig. 13)와 松平康東 소장 이수문(李秀文, 1403~?) 필 《墨竹畵冊》 (1424)(Fig. 14)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조선화의 ‘부유하는 듯 중량감 없는 형상’과 산 표면의 조광효과인 ‘하이라이트’적 특징이 무로마치 서재도 시화축인 金地院 소장 필자미상 〈渓陰小築圖〉(1413)(Fig. 15), 〈三益齋圖〉(1418)(Fig. 4) 등에 나타나고 있음을 지적했다.52

Fig. 12.

Artist unknown, 《地藏十王圖》 (第1 幅), The 1st Panel of the Painting of Ksitigarbha and Ten Underworld Kings (detail), 1461, Muromachi, Shokaku-ji (Akajawa Eiji, “Muromajji seuibokeuga to Richyoga no kankei,” pl. 2)

Fig. 13.

안견, 〈몽유도원도〉, An Kyŏn, Dream Journey to the Peach Blossom Land (detail), 14 47, Chosŏn, handscroll, ink and color on silk, 38.6×106.2cm, Tenri Central Library, Tenri University (Chosŏn jŏn’gi gukpojŏn, pl. 2)

Fig. 14.

이수문, 《묵죽화책》 (제7葉), Lee Sumun, The 7th picture of the Album of Bamboo paintings, 1424, Chosŏn, ink on paper, 30.4×44.5cm, Private collection of Koto Matsudaira (Kukpo, pl. 36)

Fig. 15.

傳 明兆, 〈溪陰小築圖〉, Attributed to Minchō, Kei’ in Shōchiku (detail), 1413,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on paper, 101.5× 35.2cm, Konchi-in (Tokyo National Museum, Nihon no Suibokuga, pl. 5)

특히 주목되는 작품은 1423년에 내조하여 1424년 2월에 떠났던 전 슈분(周文, 15세기 활동) 필 東京国立博物館 소장 〈竹齋讀書圖〉(1447)와 일암학전의 〈一菴松堂圖〉(1442 전후) 기록(Fig. 16)이다. 이들은 제작시기가 가깝고 《四時八景圖》(15세기 후반기 추정)의 〈晩春〉(Fig. 8), 〈初秋〉(Fig. 17) 등과 모티프의 구성과 배치가 유사하여 〈일암송당도〉 제시, 《사시팔경도》, 〈竹齋讀書圖〉(Fig. 18) 세 작품은 같은 맥락에 있다고 볼 수 있다.53 〈죽재독서도〉와 〈일암송당도〉 두 작품은 각각 서문과 발문이 있는 시화권으로 이들 서발문으로 인해 조선과 무로마치 시대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 시화권의 공통점이 확인되는 동시에 시화권에 대한 감상주체의 시각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54

Fig. 16.

申叔舟, 『保閑齋集』, Sin Sukchu, Pohanjaejip, 15th century, Chosŏn, Kyujanggak (Database for Korean Classics, https://db.itkc.or.kr)

Fig. 17.

전 안견, 〈초추〉, 《사 시팔경도》, Attributed to An Kyŏn, Early Fall in Eight Views of the Four Seasons, 15th century, Chosŏn, ink and color on silk, 35.2×28.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Fig. 18.

傳 周文, 〈竹齋 讀書圖〉, Attributed to Shūbun with Inscription by Jikuun Tōren (detail), 14 47,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136.5×33.6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Nihon no Suibokuga, pl. 12)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 기록과 무로마치 선승들의 시화축과의 관련성은 일본 승려들의 대대적 방문, 즉 대규모의 인적교류에 그 원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색은 靈隱寺에 머물던 선승 中菴守允의 당호 雪梅軒을 위해 제시를 썼고,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은 개성 石房寺에 2년간 머물던 永茂라는 선승의 詩卷에 제시를 썼고, 정몽주 역시 永茂의 嵒房에 대한 제시를 썼다.55 오대산이나 금강산과 같은 불교의 성지를 순례하던 도중 正宗, 聖松, 全壽와 같은 일본 선승들이 원주의 원천석(元天錫, 1330~?)을 방문하여 시를 받은 사례도 있었다.56 세종대에는 만 명이 넘는 일본인이 조선을 방문했다. 사절로 왔던 일본인 선승들 역시 시화축 제작을 위한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적인 명호나 당호와 관련된 제시를 얻었는데, 슈분과 함께 日本國王使의 副使로 조선에 왔던 본레이(梵齡, 15세기 활동)의 예는 특히 주목된다. 본레이는 1422년, 1424년, 1425년 조선에 3차례 사절로 왔는데, 이때 마다 공식적 창구를 통해 자신의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축과 관련된 요구를 적극적으로 하였다. 1422년에는 당호인 ‘松泉幽處’의 전서체의 제자를 요구하여 세종이 정척(鄭陟, 1390~1475)을 시켜 써주게 했고,57 1424년에는 예조에서 일본국왕사를 위한 餞別宴이 열렸을 때, 正使 專使 게이쥬(圭籌)와 함께 자신들의 시화축을 集賢殿 관리들에게 보여주며 제화시를 요청하여 김상직(金尙直, 15세기 전반기 활동)이 竹軒詩, 신숙주의 부친이었던 신장(申檣, 1382~1433)이 梅窓詩, 노변갑(魚變甲, 1381~1435)이 雪庵詩를 써주었다는 기록이 있다.58 또한 1425년에는 ‘松泉幽處’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어달라고 禮曹에 요청하여 세종은 이를 예문관에 맡겨 권채(權採), 권홍(權弘), 정이오(鄭以吾) 등이 《松泉幽處卷》, 혹은 《齡上人松泉幽卷》으로 불렸던 권의 제시를 써주었다.59 당시 이직(李稷, 1362~1431)은 ‘일본 승려 범령의 암자 이름이다[日本僧梵齡菴名]’라는 부제로 「松泉幽處」의 제시를 써주었고, 이원(李原, 1368~1429)은 「題日本僧松泉幽處卷中」에서 松·泉·幽의 모티프로 제시를 지었다.60 시화축에서 중요하게 인식되던 서문은 권채(權採, 1399~1438)가 썼다. 권채는 유교와 불교에서의 ‘松·泉·幽의 의미를 논설한 후, “장차 우리나라의 예악과 문물의 번성한 것과 이웃나라를 사귀고 먼 곳 사람을 회유하는 도리로써 그 나라에 선전해서 두 나라 사이의 우호하고 백성을 안식시키는 기틀이 천만세를 두고 틀림이 없게 하려는 것이 의심이 없다. 이것으로 서문을 쓴다.”고 끝을 맺고 있어 무로마치 외교사절인 선승의 시화축에 제시와 서문을 써주는 행위가 기본적으로 문화적 우위에 바탕을 둔 조선의 交隣정책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Ⅴ. 맺음말

본 연구는 기록을 통해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의 실체를 추적하였다. 이를 통하여 高麗, 元의 서화교류의 한 축이자 여말선초 서화를 주도했던 창작주체로서 승려를 주목하여 그 성격을 분석하고자 했고, 여말선초 승려들에 의해 유입·제작된 산수화가 조선 전기 수묵산수화에 끼친 영향과 무로마치 선승들과의 시화축 교류 관련 기록을 살핌으로써 그 위상에 다가가고자 했다.

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의 실체는 다음과 같다. 첫째 형식이다.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은 대체로 題字·그림·제찬의 순서로 제작되었다. 둘째 창작주체이다. 제작자는 승려였으나, 題字와 제찬은 사대부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셋째 내용이다.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은 號를 표상하였다. 시화권에서 제자·그림·제찬은 시권 주인의 ‘號’라는 통합된 주제를 표상하며 삶의 지향을 현시하였다. 넷째, 그림에서 명호·당호를 시각화하는 방식이다. 그림은 시화권 주인의 명호, 당호의 글자를 쪼개어 각각의 글자를 시각화하였다. 기록을 통해 본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 시화권의 그림 공식은 산수 배경의 시화권 주인의 所居 이미지와 명호·당호와 관련된 자연물의 이미지가 결합한 양상을 보인다.

본 연구를 통해 밝혀진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의 위상은 다음과 같다. 첫째 조선 전기 수묵산수화에 끼친 영향이다. 이색이 쓴 玉田達蘊의 「松月軒記」에 있는 조옹, 장언보, 당체가 선물한 3점 관련 기록은 조선 전기 산수화에 끼친 원대 이곽파의 영향에 대한 경로 중 유학승 출신 선승이 주체가 되었던 참신한 사례가 된다. 또한 劉道權 화풍의 애호자이자, 원대 선종회화의 산실이었던 浙江省 일대를 3년간 주유했던 懶翁惠勤 관련 기록 역시 조선 전기 회화사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14세기 옥전달온과 나옹혜근의 시화권 관련 기록은 문사적 정체성을 지닌 유학승들이 원대 강남출신 서화가들과의 교유를 통해 새로운 조형언어와 형식을 고려에 유입시키고 영향을 끼쳤던 사례를 보여준다. 둘째 무로마치 서재도 시화축과의 관련성이다. 무로마치 서재도 시화축에서 보이는 당호의 표상, 표상에 대한 노골적인 재현, 모티프의 구성과 조합은 시대적으로 선행했던 여말선초 승려들의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 기록에서 보였던 특징과 유사하다. 이는 여말선초 시화권이 무로마치 시화축의 전범이 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한다.

여말선초 승려들의 시화권은 生을 건 치열한 求道의 표상이었고, 숭고한 인간 정신을 詩書畵의 종합예술로 시각화하는 작업이었다. 여말선초 승려들은 문사적 성향과 詩書畵 능력을 갖추고 있었고, 이는 그들이 정신적 지향을 문예로 재현할 때 시화권이 이상적인 매체가 될 수 있었음을 암시한다. 14세기 시권 성행의 도화선이 되었던 창작주체는 문사적 성향과 시서화의 소양을 갖춘 원 유학승 출신 승려들로 이들은 원에서 강남출신 당대 최고의 명사들과 교유했다. 15세기 一菴學專 역시 성현(成俔, 1439~1504)은 “一菴이 사대부에게 청해 받은 시권이 책상 상자에 가득하니, 한 시대의 정묘한 시들이 모두 거기에 모여 있었다.”고 했다. ‘인간적 관계’를 매개로 하는 예술인 명호·당호 주제의 시화권은 ‘정체성’이라는 보편적 속성이 내재해 있기에 국경을 초월하고 계층을 초월하였으며, 그림의 새로운 형식, 내용, 재현방식 또한 거부감 없이 확산될 수 있었다. 본 연구에서 시도된 ‘문헌기록’을 통한 여말선초 승려들의 시화권의 복원이 많은 작품이 유실된 한국 회화사의 영역을 확장하고 더불어 동아시아 예술사속 시화권의 흐름을 규명하는데 도움이 되길 기대한다.

Notes

1)

號를 주제로 제작된 詩·畵가 내장된 권축에 대해 14, 15세기 여말선초 기록에는 권축의 주인의 호 뒤에 ‘卷’, ‘卷子’, ‘詩卷’, ‘軸’, ‘詩軸’, ‘卷軸’ 등의 명칭이 통용되었다. 본고에서 지칭하는 ‘詩畵卷’의 용어는 ‘시와 그림이 함께 구성된 두루마리’를 의미하며, 여말선초에 통용된 명칭이 아님을 밝힌다.

2)

許穆, 『記言』 권10, 「跋玄洽卷子」. “吾見僧軸 有三難 人一詩一書一 得書難 詩又難 人又難 求觀古人文墨古跡 必於僧軸焉觀之.”

3)

현전하는 題詩卷詩는 사대부의 시권에 붙인 작품도 있지만,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선승들의 시권이다. 조명제, 「14세기 高麗 지식인의 入元과 순례」, 『역사와 경계』 69(2008), p. 27 참조; 여말선초 승려들의 제시권시는 임종욱, 「耘谷 元天錫의 佛敎詩 硏究」, 『불교어문논집』 2(1997), pp. 265-270 참조.

4)

무로마치 선승들의 시화축에 장대하게 찬시를 쓰는 형식은 송, 원대 제찬풍조가 일본에 전래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나 형식적 연관성이 없고, 여말선초 시문집에서 보이는 畵贊詩와 친근성이 있다. 赤澤英二, 「室町水墨畵と李朝畵の關係」, 『大和文華』 117(奈良: 大和文華館, 2008), p. 2 참조; 무로마치 시화축의 내용 역시 오에이(應永, 1394~1427)期 圖贊과 여말선초의 산수도 圖贊은 전반적으로 상통하는 면을 보인다. 赤澤英二, 같은 논문(2008), p. 3 참조.

5)

일본 시화축 역사의 초기인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1336~1392) 후기에 시화축의 화면형식은 일정하지 않았고 횡권과 종축의 형식이 병행되고 있었다. 島田修二郎, 「室町時代の詩畵軸にっいて」, 『禪林畵讃: 中世水墨畵を讀む』 (毎日新聞社, 1987), p. 12 참조.

6)

李穡, 『牧隱集』 권4, 「松月軒記」. “스님은 평소에 당대의 名公이나 雅士들과 어울려 노닐기를 좋아하였는데, 그들 역시 스님에게는 깍듯이 禮貌를 갖추어 대우하곤 하였다. 그리고 스님은 技藝에도 능한 면모를 보여 書畵를 대할 적엔 정밀한 감식안을 자랑하였으며, 古今에 두루 통하여 막히는 바가 없었다[師平生喜從當世名公雅士游 盡得其禮貌 而於藝又能 精鑑書畫 博極今古].”

7)

李穡, 『牧隱集』 권4, 「松月軒記」. “前林觀寺住持玉田禪師以吾座主歐陽先生所書松月軒三字 求記於予曰…(중략)…如翰林承旨歐陽原功 集賢學士揭曼碩 國子祭酒王師魯 中書參政危太朴 集賢待制趙仲穆 道家如吳宗師皆爲之題贊敍引 集賢待制趙仲穆 眞人張彥輔 吳興 唐子華 又爲松月軒傳神 今皆失李穡之.”

8)

조맹부의 아들이었던 조옹은 죽서(竹西) 양겸(楊謙, 1283~?)의 《竹西草堂圖卷》의 제자 ‘竹’, ‘西’ 를 쓴 바 있다. David Ake Sensabaugh, “Fashioning Identities in Yuan-Dynasty Painting: Images of the Men of Culture.” Ars Orientalis 37(2009), pp. 120-121 참조; 또한 조옹은 무학자초(無學自超, 1327~1405)와 함께 원나라에 가서 나옹혜근의 제자가 되었던 축원지천(竺源智泉, 1324~1395)이 오대산에 들어가 벽봉화상(碧峯和尙, 생몰년미상)을 배알할 때 만나 축원지천에게 ‘竺’, ‘源’의 전서체 大字를 써 준 바 있다. 權近, 『陽村集』 권38, 「追贈正智國師碑銘 竝序」.

9)

李崇仁, 『陶隱集』 권2, 「題玉田禪師松月軒 有揭文安公曼碩歐陽文公原功諸先生題詠」.

10)

李穡, 『牧隱集』 권14, 「普濟尊者諡禪覺塔銘 幷序」. “師所居室曰江月軒 平生未嘗習世俗文字 有請題詠 操筆立書若不經意 理趣深遠 晚好黑戲 山水逼道權”

11)

申叔舟, 『保閑齋集』 권14, 「畵記」. “道權則尤善濃淡 今有水墨山水圖一.”; 金安老, 『龍泉談寂記』. “劉道權工山水尤善濃淡.

12)

李穡, 『牧隱集』 권15, 「題聰無聞卷 卷首有懶翁山水」.

13)

李穡, 『牧隱集』 권 6, 「前兩街聰公號無聞 所居南嶽 玄陵書以賜之 求予題贊 謹書三絶」.

14)

李穡, 『牧隱集』 권10, 「平源說」. “幻菴弟子分上人從懶翁居亦且數年 故得翁平源之號 墨跡尙新 而山水圖 又翁所得意 平遠可愛 而繼以送行之頌 觀於此翁之伎倆 殆無餘蘊矣.”

15)

李穡, 『東文選』 권97, 「平源說」. 한국고전종합DB 임창순 (역) 인용.

16)

李穡, 『牧隱集』 권14, 「普濟尊者諡禪覺塔銘」. “有請題詠 操筆立書 若不經意 理趣深遠.”

17)

申叔舟, 『保閑齋集』 권14, 「一菴松堂卷記」. “一菴松堂專上人 釋之秀者也 僕於正統壬戌之冬 與甄城李伯玉 平陽朴仁叟 丹溪河仲章 昌寧成謹甫諸君 受命讀書于覆鼎山之津寬寺 上人亦先住錫 始與識面…(중략)…一夕 出一卷求詩 迺千峯所命一菴松堂也 諸君旣重上人 皆有詩.”

18)

申叔舟, 『保閑齋集』 권14, 「一菴松堂卷記」.

19)

申叔舟, 『保閑齋集』 권14, 「一菴松堂卷記」; 김은정, 「保閑齋 申叔舟의 교유와 한시」, 『한국한시연구』 23(2015), pp. 26-28 참조.

20)

李承召, 『三灘集』 권5, 「一菴松堂詩」; 姜希孟, 『私淑齋集』 권1, 「題一菴松堂」; 성현은 “일암이 사대부에게 청해 받은 시권이 책상 상자에 가득하니, 한 시대의 정묘한 시들이 모두 거기에 모여 있었다.”고 하며, “신숙주, 이석형, 박중선(朴仲善, 1435~1481), 성삼문, 유성원(柳誠源, ?~1456), 강희맹, 서거정(徐居正, 1420~1488), 홍응(洪應, 1428~1492), 이승소, 성임(成任, 1421~1484), 성간(成侃, 1427~1456), 임원준(任元濬, 1423~1500), 이명헌(李明憲), 김수녕(金壽寧, 1436~1473) 등이 모두 그와 교분이 깊었고 신숙주가 가장 그를 좋아하고 아꼈다.”고 했다. 成俔, 『慵齋叢話』 권7; 成俔, 『虛白堂集』 권9, 「題一庵松堂詩卷後」.

21)

《일암송당권》에서 〈一菴松堂圖〉 는 별폭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무로마치 시대의 시화축의 예에서도 이츄츠조(惟忠通恕)의 ‘白雲丹壑’과 같이 제시와 발문의 수량이 많은 경우 시화가 별폭으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된 바 있고, 실제로 南禪寺의 승려 츄가(中和)의 〈三益齋圖〉(1418)의 序文은 별폭으로 제작되었다. 島田修二郎, 앞의 논문(1987), p. 12 참조.

22)

申叔舟, 『保閑齋集』 권2, 「題一菴松堂圖」. “一菴栖碧岑 蒼松蔭高堂 禪翁何所爲 江流空自長.”

23)

成俔, 『虛白堂集』 권9, 「題一庵松堂詩卷後」.

24)

姜淮伯·姜碩德·姜希顔, 『晉山世稿』 권3, 「贈一菴」. 국역 『진산세고』, 강성섭 역, pp. 172-173 참조.

25)

權近, 『陽村集』 권15, 「送雲雪岳上人序」. “吾扣牧隱齋 蒙吾堂之名之記矣 然吾身無所住 寧有所謂堂乎 強而名之堂者 以寓夫道也 吾事吾師二十年之久 猶不得其道之髣髴 今也失吾師 內而求之心 外而求之名 將以質之四方之先覺 欲得搢紳之言 以爲行遠之資.”

26)

李崇仁, 『陶隱集』 권4, 「霜竹軒記」. “今年秋 上人自山來 子見之喜 留之畢日 上人出示一卷曰 吾以霜竹署吾軒 而請六友金祕判作大字 將以求詠歌薦紳間 子幸記之.”

27)

李仁復, 『東文選』 권15, 「題曹溪龜谷覺雲禪師御書畵詩卷」.

28)

李穡, 『東文選』 권51, 「賜龜谷書院畵贊幷序」. “達磨折蘆渡江圖 童子普賢六牙白象圖 覺雲龜谷大字共四軸 高廣如一 皆上親筆”; 李崇仁, 『陶隱集』 권3, 「內願堂大禪師龜谷雲公蒙賜御筆普賢達磨肖像二卷龜谷覺雲四大字以詩爲賀 三首」.

29)

李穡, 『東文選』 권51, 「賜龜谷書院畵贊幷序」. “養之以道者又熟 故達磨心而普賢行 顧其名也 以無心爲群有之宗顧其號也 以藏六爲群動之本”.

30)

許筠, 『惺所覆瓿藁』 권4, 「詞翰傳芳序」. “丁未夏 余在三陟 (중략) 有稱李生者忘其名 手一編來示 題曰詞翰傳芳披閱之 卽世廟朝嬖髡信眉詩卷也 金文良爲序 徐剛中 姜景愚 景醇 成重卿 李三灘 爲詩俱自書 贊不知何人作 而書則鄭東萊也 終以安可度畫釋迦 彌陀二軀 極小而妙 末有御璽一顆 眞古物也.”

31)

14, 15세기 성행했던 승려들의 명호, 당호 주제의 시화권 전통은 16세기에 지속된다. 16세기 승려들의 명호, 당호 주제의 시화권은 중종(中宗, 재위: 1506~1544)대 이행(李荇, 1478~1534)이 쓴 《元惠詩軸》의 제시 “작은 그림은 더없이 소쇄하고 / 小圖絶瀟洒 방장실은 자못 맑고 그윽하다 / 丈室頗淸幽”, 김안국(金安國, 1478~1543)이 여주 梨湖의 선승 진(眞)의 村廬에서 眞의 《山水小軸》을 위해 이행(李荇, 1478~1535)이 쓴 시에 이어 쓴 차운시(1531), 역시 김안국이 선승 지웅(志雄)의 《山水竹行軸》을 위해 권민수(權敏手, 1466~1517), 이행이 쓴 시에 이어 쓴 차운시, 이홍남(李洪男. 1515~?)이 쓴 「題僧軸畫」 등의 기록을 통해 승려들의 시축 안에 그림이 있었음이 확인된다. 李荇, 『容齋集』 권3, 「題元惠詩軸」.; 金安國, 『慕齋集』 권6, 「嘉靖辛卯秋 自驪之梨湖 赴外姑祥于廣之長旨里 夜宿村廬 有僧釋眞持山水小軸來乞詩 就次容齋李相公韻以贈」.; 金安國, 『慕齋集』 권6, 「次容齋 退齋兩公韻 書志雄師畫山水竹行軸」.; 李洪男, 『汲古遺稿』 권下, 「題僧軸畫」. 선승 지웅(志雄)의 《山水竹行軸》은 제목과 김안국의 제시 “山水淸而奇 竹亦淸而奇 誰敵此淸奇 蒼然兩公詩 山人泊與淡 三絶何用玆 要非塵土物 卷之還吾師”를 통해 山水와 竹이 각각 그려진 그림과 권민수, 이행, 김안국의 시로 구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32)

김종진, 「동아시아 禪歌의 비교문학적 연구 서설 -13·4c 동아시아 문예사조로서 禪歌의 창작과 교류-」, 『국어국문학』 158(2011), p. 196 주30 참조.

33)

원대 강남 임제종의 禪僧들은 강호에 은거하거나 산림에 주석하면서 禪을 수행하여 ‘庵居知識’이라 불리었다. 김종진, 위의 논문(2011), pp. 191, 195 참조.

34)

김종진, 위의 논문(2011), p. 194 인용, 참조.

35)

太古普愚는 1346년 入元 전 창작한 「太古庵歌」를 통해 석옥청공에게 인가받았다. 「태고암가」는 태고보우가 삼각산에 위치한 자신의 소거이자 명호·당호였던 太古庵의 무한한 공간성과 절대자유를 노래한 시가이다. 김종진, 「〈太古庵歌〉의 주제적 계보와 창작 의의」, 『한민족문화연구』 42(2013), pp. 203-208 참조.

36)

石屋淸珙, 「山居詩」, 『石屋淸珙禪師語錄』 (『卍續藏』 第 70冊).

37)

權近, 『陽村集』 권7, 「題天台馥庵上人手卷啚後」.

38)

《馥庵上人手卷》 속 제화시와 유사한 모티프로 《海松卷子》에 권근이 쓴 「題海松卷子」의 제화시가 있다. 《海松卷子》는 海上, 孤峯, 蒼松을 배경으로 산수도가 있는 ‘海’, ‘松’의 호를 풀이한 卷으로 생각된다. “바닷가 봉우리가 우뚝 솟아 / 海上孤峯聳半空 빽빽한 소나무가 바람 보내네 / 蒼松鬱鬱送淸風 선옹의 심사가 깨끗도 하여 / 仙翁心跡俱蕭洒 한 조각 티끌도 가슴에 없다 / 一片炎塵不到中.” 權近, 『陽村集』 권8, 「題海松卷子」; 고유섭, 「고려 화적에 대하여」, 『고유섭 전집』 2(열화당, 2007), p. 232 참조.

39)

정영식, 「懶翁惠勤의 강남유학에서의 행적과 그 영향」, 『한국선학』 37(2014), pp. 34-35 참조.

40)

목계(牧谿), 옥간(玉澗)과 같은 남송 선종 회화의 성취를 볼 때, 회화전통의 연속성이라는 점에서 원대에도 절강성에서 불화와 여기회화가 계속 발전했다. 鈴木敬, 『中國繪畵史』 中之二(東京: 吉川弘文館, 1984), p. 6 참조.

41)

李穡, 『牧隱集』 권19, 「待豐禪師」.

42)

徐居正, 『四佳集』 권14, 「永川公子贈雲山圖 詩以謝之」. “妙筆淸新絶代無 欲將劉郭作輿奴.”

43)

申叔舟, 『保閑齋集』 권2, 「題一菴松堂圖」.

44)

‘송별’ 주제 시화권으로 추정되는 시권의 일예로 승려의 《山水軒詩卷》에 김수온(金守溫, 1410~1481)이 쓴 차운시가 있다. “집 머리의 푸른 빛이 물소리를 누르나니 / 屋頭蒼翠壓潺湲 소리에서 시내를 생각하고 色에서 산을 생각하네 / 聲想溪流色想山 (중략) 내일 들 다리 위에서 이별 나눌 때에 / 明日野橋分袂處 있어도 바쁜 사람과 가도 한가한 사람 일러라 / 忙忙留與去閑閑” 金守溫, 『拭疣集』 권4, 「次上人山水軒詩卷韻」. 한국고전종합DB 김달진 (역)수정, 참조.

45)

무로마치 書齋圖 詩畵軸의 心齋的 성격에 대해서는 島田修二郎, 앞의 논문, p. 20 참조; 심경호, 「일본 五山의 山水圖(書齋圖) 詩畵軸의 題詩文에 관한 일 고찰」, 『漢文學論集』 42(2015), p. 157 참조.

46)

李崇仁, 『陶隱集』 권1, 「題倫上人絶磵松風軒卷」; 韓脩, 『柳巷詩集』, 「陽村先生權近批點次韻答檜岩長老倫絶磵」; 權近, 『陽村集』 권7, 「絶磵」; 朴興生, 『菊堂遺稿』 권1, 「絶磵松風軒歌 贈益倫」.

47)

李穡, 『牧隱集』 권5, 「松風軒記」; 鄭樞, 『東文選』 권49, 「倫上人松風軒銘」.

48)

鄭夢周, 『圃隱集』 권2, 「倫絶磵卷子」.

49)

이색은 「松風軒詩 絶磵特來索賦」에서 “절간(絶磵)이 특별히 와서 짓기를 청했다.”고 하며, 제시 끝에 “하물며 내 이제 그림자 속 그림자를 그려 내자니 / 況今描出影中影”라고 하였는데, 이는 이색이 그림을 통해 윤절간의 송풍헌을 보며 제시를 짓고 있음을 비유하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李穡, 『牧隱集』 권26, 「松風軒詩 絶磵特來索賦」. 한국고전종합DB 양주동 (역) 인용.

50)

脇本十九郎, 「日本水墨畵壇に及ぼせる朝鮮畵の影響」, 『美術研究』 28(帝國美術院附屬美術研究所, 1934), pp. 163, 165 참조.

51)

赤澤英二, 앞의 논문(2008), pp. 5-7 참조.

52)

Richard Stanley-Baker(リチャ―ド·スタンリニベイカ), 「湖景山水の傳統に關する諸問題 特に文清との關聯において」, 国際交流美術史研究会 編, 『アジアにおける山水表現について·東洋における山水表現 2 国際交流美術史研究会 第3回シンポジアム』 (国際交流美術史研究会, 1984), pp. 34-37 참조.

53)

안휘준교수는 무로마치 시대 시화축에서 하나의 전형이 출현하는 분안(文安, 1444~1449)기의 작품인 전 슈분 필 〈죽재독서도〉를 전 안견 필 《사시팔경도》와 비교하며 이들 작품의 편파이단구도, 확대 지향적 공간개념, 근경에 비스듬한 언덕 위 雙松 모티프 등 경물구성법과 공간개념의 유사성에 대해 논했고, 이동주선생은 靜嘉堂 소장 전슈분 필 〈蜀山圖〉(1440)와 개인소장 전 슈분 필 〈水色巒光圖〉(1445)가 오오치(大內)씨의 청경사로 조선에 왔다가 가져간 손카이(尊海)의 大願寺 소장 《瀟湘八景圖》와 學圃 贊 〈山水圖〉와 일맥상통함을 지적하며, 전 슈분의 작품들이 조선 초기 산수화의 맥락 안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안휘준, 「朝鮮王朝初期의 繒畵와 日本室町時代의 水墨畵」, 『韓國學報』 2(일지사, 1976), pp. 2-21 참조; 이동주, 『한국회화사론』 (1987, 열화당), pp. 43, 282 참조; 북한의 조성진은 무로마치 말기 화가들의 구도나 공간 처리는 조선 초기 산수화와 연관성을 보여주지만 산이나 바위의 묘사에서는 남송계통의 묵필법과 준법을 구사하고 있음을 지적하며, 이는 무로마치 수묵화가 조선화의 영향을 내포하면서 일본적인 미감에 알맞은 형식으로 형성되는 과정임을 논술하였다. 조성진, 「일본 무로마찌시대의 수묵화단에 미친 조선화의 영향에 대하여」, 『조선예술』 553(2003), p. 76 참조.; 장진성교수는 周文 화풍을 보여주는 산수화를 일괄하여 周文系 산수화라 부른다고 전제하며, 이들 산수화의 구도, 수지법, 바위 표현이 전형적인 남송원체 화풍인 馬夏派 화풍 특히 하규 양식을 보여준다고 주장하였다. 장진성, 「무로마치(室町) 수묵화와 조선 초기 회화: 슈분(秀文), 슈분(周文), 분세이(文淸)를 둘러싼 쟁점들」, 『미술사논단』 36(2013), pp. 44-48 참조; 조선 초기 회화와 무로마치 수묵화의 관계에 대하여 한일학계에서 제기된 학문사적, 학설사적 쟁점 전반은 홍선표, 「美術文化 (미술문화)로 보는 韓日(한일); 조선 초기 한일 회화교류 연구의 학문사적, 학설사적 과제」, 『일본학』 37(동국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3), pp. 1-23 참조. 홍선표 교수는 이 글에서 “양상과 실태를 재구하기 위해 관점의 전환과 새로운 자료의 발굴, 양식 분석틀의 갱신 등에 의한 문제의식과 노력이 요망된다”고 주장하였다.

54)

〈죽재독서도〉의 지쿠운 도렌(竺雲等連)이 쓴 서문은 선적인 통찰 보다 儒敎的 隱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島田修二郎, 앞의 논문, p. 24 참조; 淸水義明, 「禪家の詩畵軸における畵と贊の問題」, 『水墨畵と中世繪巻: 南北朝〮 室町の繪畵Ⅰ』 (東京: 講談社, 1992), pp. 162-169 참조; 무로마치 선승들의 당호 역시 선종 이념이나 선종 고사에 유래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은둔사상을 배경으로 삼은 문학적인 아칭이 대부분이며 간혹 유교사상을 따른 것이 있다. 島田修二郎, 앞의 논문, p. 16 참조; 이는 세속적, 현실적, 문인적이고 관료와의 교류에 치중하며 사상성의 약화가 보이는 무로마치 선시의 특징과 함께 한다. 인권환, 「高麗 시와 日本 五山詩의 比較 硏究」, 『한국한문학연구』 31(2003), pp. 382-384 참조; 이에 반해 성현이 쓴 〈일암송당도〉의 발문은 ‘일암송당’을 禪的, 純一的, 이상적 특징을 지닌 온전한 선의 수행공간으로 인식하고 있다. 成俔, 『虛白堂集』 권9, 「題一庵松堂詩卷後」.

55)

李穡, 『牧隱集』 권1, 「雪梅軒小賦」; 鄭道傳, 『三峯集』 권2, 「次韻題日本茂上人詩卷」; 鄭夢周, 『圃隱集』 권2, 「贈嵒房日本僧永茂 二絶」; 이밖에 이색은 사절로 온 선승 萬峯惟一에게 제시 「萬峯」을 써주었고, 성석린(成石璘, 1338~1423)은 回禮官으로 온 梅湖軒上人이 돌아갈 때 그의 호인 ‘梅’, ‘湖’, ‘軒’ 제자를 써주고, 그 뒤에 매호헌의 모티프로 제시를 써주기도 하였다. 李穡, 『牧隱集』 권6, 「萬峯爲惟一上人題 日本人也 時奉使其國」; 成石璘, 『獨谷集』 권下, 「日本國回禮官梅湖軒上人求書號 書贈之 題其後」 “湖上梅花照水開 山前湖水抱軒回 上人樂處無人識明月淸風自去來.” 엄경흠, 「고려말(高麗末) 지식인(知識人)의 대일본승(對日本增) 시(詩) 교류(交流)와 일본(日本)에 대한 인식(認識)」, 『동남어문논집』 29(2010), pp. 281-304 참조.

56)

元天錫, 『耘谷行錄』 권2, 「丙辰閏九月日本諸禪德來此其叢林典刑與我國之制作一詩以贈」. 조명제, 앞의 논문(2008), pp. 24-25 재인용.

57)

『世宗實錄』 권28, 세종 7년 4월 23일 壬戌. “小衲所居之室 號松泉幽處 壬寅之臘 予求篆書向之四字 遂命鄭陟 令篆書賜之 持歸國 以爲珍藏焉.”

58)

『世宗實錄』 권23, 세종 6년 1월 25일 壬寅.; 장진성, 앞의 논문(2013), p. 44 참조; 박은순 교수는 이 시화축이 조선에서 구한 시화축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박은순, 「繪畫를 통한 疏通: 朝鮮에 전해진 日本繪畫」, 『미술자료』 91(2017), p. 26 참조.

59)

權採, 『東文選』 권93, 「日本國使齡上人松泉幽卷詩序」. “一日以其所扁松泉幽 請於搢紳先生曰 歲在壬寅 特蒙篆書之賜 余固珍藏 願贈一言”

60)

李原, 『容軒集』 권2, 「題日本僧松泉幽處卷中」. “滿地松陰連講榻 一泓泉水照禪心”; 李稷, 『亨齋詩集』 권3, 「松泉幽處 日本僧梵齡菴名」. “松茂泉甘地更深”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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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朱德潤, 《秀野軒圖卷》, Zhu Derun, Studio of Refined Wilds with frontispiece and colophon, 1364, Yuan, hand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28.3×210cm, The Palace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Special Exhibition: Two Hundred Selected Masterpieces from the Palace Museum, pl. 17)

Fig. 2.

僊可, 〈雪嶺齋圖〉, Senka, Setsurei-sai Study with Rinchū Soshō perface, 1538,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97×17cm, Gotoh Art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Special Exhibition: Art of The Muromachi Period, pl. 310)

Fig. 3.

李穡, 『牧隱集』, I Saek, Mokŭnjip, 14th century, Koryŏ, Kyujanggak (Database for Korean Classics, https://db.itkc.or.kr)

Fig. 4.

Artist unknown, 〈三益齋圖〉, San’eki-sai Study, 1418,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101.5×38.8cm, The Seikadō (Nihon bijutsu zenshū, vol. 12, pl. 68)

Fig. 5.

Artist unknown, 〈披錦齋圖〉, Hikin-sai Study, 1464,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113.6×27. 3cm, The Nezu Institute of Fine Arts, Tokyo (Preserving Heritage: The Nezu Collection, pl. 2)

Fig. 6.

趙雍, 〈採菱 圖〉, Zhao Yong, Picking Water Chestnuts, 1342, Yuan,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107. 6×35.1cm, The Palace Museum, Taipei (The Palace Museum, https://www.npm.gov.tw)

Fig. 7.

唐棣, 〈谿山煙艇〉, Tang Di, Boating in the Mist of a Mountain Stream, 14th century, Yuan,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silk, 133.4×86.5cm, The Palace Museum, Taipei (The Palace Museum, https://www.npm.gov.tw)

Fig. 8.

전 안견, 〈만춘〉, 《사시팔경도》, Attributed to An Kyŏn, “Late Spring in Eight Views of the Four Seasons”, in Saship’algyŏngdo, 15th century, Chosŏn, ink and color on silk, 35.2×28.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Fig. 9.

牧谿, 〈漁村夕照圖〉, Attributed to Muqi, Fishing Village in Evening Glow, 13th century, Song, handscroll, ink on paper, 33.0×112 .6cm, The Nezu Institute of Fine Arts, Tokyo (Nihon bijutsu zenshū, vol. 12, Ink painting and medieval picture scroll, pl. 2)

Fig. 10.

李崇仁, 『陶隱集』, I Sungin, Toŭ njip, 14th century, Koryŏ, Kyemyŏng University (Database for Korean Classics, https://db.itkc.or.kr)

Fig. 11.

Artist unknown, 〈聽松軒 圖〉, Chōshō-ken Study (detail), 1433,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silk, 103.0×31.8cm, The Seikadō (Tokyo National Museum, Nihon no Suibokuga Japanese, pl. 10)

Fig. 12.

Artist unknown, 《地藏十王圖》 (第1 幅), The 1st Panel of the Painting of Ksitigarbha and Ten Underworld Kings (detail), 1461, Muromachi, Shokaku-ji (Akajawa Eiji, “Muromajji seuibokeuga to Richyoga no kankei,” pl. 2)

Fig. 13.

안견, 〈몽유도원도〉, An Kyŏn, Dream Journey to the Peach Blossom Land (detail), 14 47, Chosŏn, handscroll, ink and color on silk, 38.6×106.2cm, Tenri Central Library, Tenri University (Chosŏn jŏn’gi gukpojŏn, pl. 2)

Fig. 14.

이수문, 《묵죽화책》 (제7葉), Lee Sumun, The 7th picture of the Album of Bamboo paintings, 1424, Chosŏn, ink on paper, 30.4×44.5cm, Private collection of Koto Matsudaira (Kukpo, pl. 36)

Fig. 15.

傳 明兆, 〈溪陰小築圖〉, Attributed to Minchō, Kei’ in Shōchiku (detail), 1413,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on paper, 101.5× 35.2cm, Konchi-in (Tokyo National Museum, Nihon no Suibokuga, pl. 5)

Fig. 16.

申叔舟, 『保閑齋集』, Sin Sukchu, Pohanjaejip, 15th century, Chosŏn, Kyujanggak (Database for Korean Classics, https://db.itkc.or.kr)

Fig. 17.

전 안견, 〈초추〉, 《사 시팔경도》, Attributed to An Kyŏn, Early Fall in Eight Views of the Four Seasons, 15th century, Chosŏn, ink and color on silk, 35.2×28.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Fig. 18.

傳 周文, 〈竹齋 讀書圖〉, Attributed to Shūbun with Inscription by Jikuun Tōren (detail), 14 47, Muromachi, hanging scroll, ink and color on paper, 136.5×33.6cm, Tokyo National Museum (Tokyo National Museum, Nihon no Suibokuga, pl. 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