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4;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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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왕릉이 지닌 보수성과 일관성에 대해서는 조인수, 「조선시대 왕릉의 현상과 특징: 명청대 황릉과의 비교를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 262(2009), pp. 69-98 참조.
2) 『조선왕조실록』의 일례를 들면, 한준겸이 선조에게 아뢰기를, “석물은 정해진 尺數가 있어 加減할 수 없는 것인데, 후대로 내려오면서 점차 커져서 강릉·태릉의 석물은 매우 큽니다.”하니, 상이 이르기를, “건원릉과 헌릉 등의 석물을 자로 재어와 《오례의》에 정한 척수와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하였다. 『선조실록』 권127, 33년(1600) 7월 정묘(26일).
3) 제1기는 왕릉 석물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조선 건국에서 15세기 중반으로, 신덕왕후 정릉에서 시작된다. 제2기는 15세기 말에서 16세기 말로, 『국조오례의』가 간행되고 석물의 체제가 정립되며, 그 시작점에는 공혜왕후 순릉이 있다. 제3기는 임진왜란 직후에 조성된 의인왕후 목릉에서 시작되며, 석물의 간소화기이다. 제4기는 『국조상례보편』의 간행으로 새로운 제도가 시행되는 18세기 중반의 정성왕후 홍릉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까지로, 다양한 양식이 혼재한다. 이에 대한 자세한 언급은 김이순, 「조선왕릉 석물조각 개관」, 『조선왕릉 석물조각사 I』 (국립문화재 연구소, 2016), pp. 22-113 참조.
5) 왕후릉이 먼저 조성되었을 때도, 나중에 조성된 왕의 능이 기존 왕후릉의 정자각을 같이 사용하면 왕후릉의 능호를 그대로 사용했다. 물론 왕릉과 왕후릉에 차등을 둔 듯한 사례도 있다. 사대석을 없애라는 세조의 遺敎에 따라 왕릉에서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게 되는데, 일부 왕의 능에는 다시 병풍석을 설치했으면서 정희왕후릉을 전례로 삼은 왕후릉에서는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았다.
7) 황정연, 「조선 태조비 神德王后 貞陵의 조성과 封陵 고찰」, 『서강인문논총』 46(2016), pp. 241-266; 황정연, 「조선후기 단의빈묘의 封陵과 석물 追排 - 1722년 『혜릉석물추배도감의궤』의 분석」, 『동양문화연구』 21(2015), pp. 185-214.
8) 조선왕조에서 원비와 계비를 포함하여 38명의 왕비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20명이 왕보다 오래 살았다. 조선시대 왕의 평균 재위 기간은 19년 2개월이며 평균수명 47세이다. 재위 기간이 30년을 넘은 왕이 7명이 있는데 그중에서 6명의 원비가 왕보다 먼저 사망했다. 본 연구의 대상인 10명의 왕은 평균 재위 기간이 32년 6개월이며, 평균수명도 57세로 여타의 왕에 비해 오래 살았다.
9) 貞陵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태조가 “壽陵에 거동하였다”라는 언급이 실록에 있기 때문에 貞陵을 수릉으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태조실록』 권10, 5년(1396) 12월 무신(24일).
18) 어머니인 소혜왕후가 실질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도 있으나(김우기, 「조선 성종대 정희왕후의 수렴청정」, 『조선사 연구』 10(2001), pp. 169-202), 왕실의 가장 큰 어른이자 능 조성의 경험이 있는 정희왕후가 주도했을 가능성이 더 크다.
21) 순릉을 조성하고 5년 후인 실록의 1479년 1월 10일 기사에서 최호원의 건의에 따라 壽陵을 미리 정하기로 방침을 세운 것을 보면, 순릉은 처음부터 수릉의 의도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22) 국장도감 관원 집의 許遲가 지문·시책문을 가지고 와서 아뢰기를, “또 지문 중에, 이미 ‘상이 슬픔을 스스로 참지 못하겠다.’ 하였으니, 애통의 뜻을 다한 것입니다. 그런데 또 ‘정신이 혼미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였습니다. 이 일이 重喪도 아닌데 이렇게 극에 이르니, 후일의 의논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중종실록』 권21, 10년(1515) 3월 갑신(27일).
24) 이 석물은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목록에 영릉 초장지 석물로 등록되어 있으나 이는 오류이다.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김이순, 「세종대왕 ‘구 영릉(舊 英陵)’ 석물 연구」, pp. 166-170 참조.
26) 1537년 천릉한 희릉에 건립한 무석인(동측)의 크기가 무려 336cm로 조선왕릉 석물 중에서 가장 크다. 『조선왕릉 학술보고서 III』 (국립문화재연구소, 2016), p. 3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