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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0; 2023 > Article
채용신蔡龍臣 평생도平生圖: 편집된 기억의 시각화를 통한 자의식의 표출

Abstract

석지 채용신(1850~1941)의 일생을 담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생도> 10폭병풍(고 이건희 회장 유족 기증)은 8세에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31세에 결혼을 하고 3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고, 51세에 태조 어진을 그리고, 칠곡군수, 정산군수 등을 역임하고 1910년 61세에 회갑연을 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구성되었다.
채용신은 자신의 평생을 10폭으로 그려 관직 생활을 무난하게 완수하고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경험을 그려넣음으로써 개인의 영광을 자손에게 보이고 가문 대대로 전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기억은 선택되고 재편집되어 시각화되었다. 권철수가 1924년 쓴 글이 평생도와 내용이 부합되며, 인물, 건물 등 묘사가 채용신의 다른 그림과 유사하다는 점, 70세부터 80옹으로 스스로 일컬었다는 점 등을 통해, 평생도는 채용신이 1920년경 주도적으로 관여하여 그린 것으로 보았다. 또한 장독대의 흰 버선본, 이정표 역할의 장승 등 곳곳에 당시 생활 문화가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어 민속학적으로 우리나라 근대 생활문화를 알려주는 시각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Abstract

Pyeongsaeng-do, Paintings of an Ideal Life by Chae Yong-sin, a part of the Lee Kun-hee Bequest now stored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is a ten-panel folding screen that depicts scenes from the painter’s life: at eight years old, he learns to read from his father; at thirty-one, he marries his wife; at thirty-seven, he passes Kwagŏ, the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takes up a government position; at fifty-one, he paints a posthumous portrait of King Taejo; he serves as governor to Ch’ilgok-gun and Chŏngsan-gun; and celebrates his 60th birthday in 1910.
On the ten panels, Chae Yong-sin depicted important events of his life such as his successful career and participation in the production of King Taejo’s portrait, to present to and commemorate with his progeny his moments of glory. Important events were carefully chosen, edited, and drawn on each screen. The correspondence of represented events with the record of Chae’s life made by Kwŏn Ch’ŏlsu in 1924, the similarity in style of the people, buildings and other motifs to his other paintings, and the fact that he referred to himself as “an old man of eighty years” since he was seventy years old, all suggest that Chae actively participated in the making of this ten-panel painting around 1920. In addition, the painting faithfully reflects contemporary culture—the white patterns for pŏsŏn, changsŭng that acted as a signpost—, serving as an important visual document to how people lived in early modern Korea.

Ⅰ. 머리말

화가의 일생을 담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생도> 10폭 병풍(고 이건희 회장 유족 기증)의 주인공은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50~1941)이다. 8세에 아버지에게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31세에 결혼을 하고 37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오르고, 51세에 태조 어진을 그리고, 칠곡군수, 정산군수 등을 역임하고 1910년 61세에 회갑연을 여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구성되었다. 92세까지 살았지만, 결혼을 31세에 다소 늦게 하고 부인이 67세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회혼례는 치를 수 없었고 회갑연을 마지막으로 평생도가 마무리되었다.
채용신은 태조 어진, 고종 어진 등을 그렸던 화가로, 관직에서 물러난 50대 중반 이후 고향인 전라북도 일대로 내려와 정착하여 지역 인사들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다. 기록상으로 40대부터 초상화를 그렸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남아있는 것을 보면 50대 중반부터 2~30년 동안 본격적으로 초상화를 제작한 것이 확인된다. 1920년대 후반부터는 그동안의 채용신의 화풍과 조금 달라진 특징을 보이는 초상화를 제작하게 되므로, 채용신이 본격적으로 자기만의 필력과 특징적인 화풍으로 초상화를 제작한 것은 70대 중반인 1920년대 중반까지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채용신은 조선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초상화 전통을 유지하면서도 자신만의 새로운 화풍으로 근대 초상화의 문을 열었을 뿐 아니라, 초상화에 당당하게 화가의 이름과 관직, 품계까지 적극적으로 남기는 관습을 만들었다. 초상화는 주인공이 되는 인물에 대한 존숭과 숭배의 의미가 담겨져 있었고, 그런 이유로 화가가 자신의 이름을 남긴 예는 드물었음을 감안할 때 이는 매우 새로운 현상이었다. 채용신은 “전前 정산군수定山郡守”, “종이품從二品” 등 자신이 역임한 마지막 관직과 품계를 이름과 함께 그림에 구체적으로 남겼다는 점에서 중인 출신의 화사가 아니라 양반 관료였음을 드러내고자 하는 신분상 자의식을 볼 수 있다. 자화상을 그리고 스스로 자신의 평생을 그림으로 남기고 있는 것 또한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채용신의 평생도에 대해서는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宜夫)가 화면 상단의 화제를 소개하면서 그림 내용에 대해 최초로 공개한 후 흑백도판으로만 소개되었을 뿐 실물이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동안 제대로 연구하기 어려웠고, 따라서 평생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채용신을 연구한 학위논문에서 생애를 기술하기 위한 자료로 활용되면서 언급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1 본고에서는 채용신 <평생도>를 소개하고, 언제 그려졌고 누가 그린 것인지 문제를 정리하고, 화가가 본인의 평생도를 기획 제작한 유례없는 현상은 편집과 해석을 통한 자의식의 표출 결과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보고자 한다.

Ⅱ. 채용신 평생도의 구성과 특징

채용신의 평생도가 처음 알려진 것은 1943년 화신화랑에서 열린 유작전에서였다. 그 후 1951년 논문을 통해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宜夫)는 채용신의 아들 채상묵蔡尙黙이 집에 채용신의 작품, 인장 등을 가지고 있었고 그 중에 ‘平康後人蔡石芝堂70老翁平生圖’라고 제題한 견본채색의 10폭 병풍이 있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도판 없이 화면 상단의 제문만 소개하였다.2 이를 통해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첫째, 지금은 원 장황을 잃고 개장된 상태이나, 원래는 병풍에 채용신의 평생도임을 알려주는 제첨이 있었다. 둘째, ‘채석지당70노옹‘이라는 표현에서, 병풍이 그려진 제작시기를 채용신이 70세가 된 해인 1920년경으로 대략적으로 파악해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채용신은 72세였던 1921년 <김제덕 초상>(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허홍 초상>(개인 소장) 등을 그리면서, 관지에 ’석지80옹‘이라고 칭한 바 있다. 당시 그는 70대였지만 80옹이라고 하였던 것인데, ‘망팔望八’ 개념으로 이해해볼 수 있다. 이를 참고한다면, 70옹이라고 한 평생도 병풍은 채용신 60대였던 1910~1920년 사이에 그려졌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채용신 아들의 집에 있었던 것이 현재는 이건희 컬렉션에 포함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었는데, 그 중간의 이력은 명확하게 확인되지 않는다.(Fig. 1.)
그동안 채용신의 평생도를 누가 그렸을지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존재하였다. 정황상 화가가 스스로 자신의 평생도를 그렸다는 것은 일반적이지 않고, 병풍 위에 채용신이 직접 쓴 관서가 없다는 점 때문에, 채용신의 아들이나 손자가 그렸거나, 채용신과 같이 그렸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작가 문제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가능성이 제게되었던 것이다. 본고에서는 평생도 10폭의 내용을 먼저 간단하게 살펴보면서 제작시기와 제작자에 대해 논의를 전개해 보고자 한다. 각 폭 상단에 적힌 제문은 다음과 같다3.
(1폭) 入學圖 학문을 시작하다
公之大人及第. 公本洛陽之人也. 搆屋於三淸洞 家産淸寒 別無外師. 故受學於父親. 採薪於南山 夜讀晝耕. 是年八歲也.
공의 아버지께서 급제하였다. 공은 본래 서울 사람으로 삼청동에 집을 지어 두었다. 재산이 없이 가난하여 따로 스승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부친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남산에서 나무를 하면서 주경야독하였다. 이때 나이가 8세였다.
(2폭) 婚禮圖 혼례를 올리다
公之聡明才藝聞於四境 納幣願聘者不知其數. 竟結緣於(完山)李氏家卽古碧堤郡也.
공의 총명함과 재주가 사방에 알려져 예물을 보내 사위 삼으려는 사람이 부지기수였다. 마침내 완산 이씨와 결혼하였으니 집은 옛 벽제군碧堤郡(지금의 전북 김제)이었다.
(3폭) 到門圖 과거에 급제해 집으로 돌아오다
丙戌仲春登及第. 公身着錦衣 項載桂花. 天恩亡極. 開大燕招賓客如四海雲. 參拜先壠 獻壽椿堂 其榮誰不賛也.
병술년(1886년, 37세) 음력 2월에 과거에 급제하였다. 공은 비단옷을 입고 목에는 계수나무 꽃을 걸었다. 임금의 은덕이 망극하여 큰 연회를 열어 손님들을 초대하니 사해의 구름이 모인 것 같았다. 선조의 묘에 참배하고 아버지에게 술을 올리니 그 영예를 누가 칭찬하지 않겠는가.
(4폭) (4폭) 水軍練習圖 수군을 훈련시키다
庚寅仲夏拜命突山 荏居四載. 政行明白 吏民咸服 多有金石頌德處矣. 公好武藝 行水軍練習軍儀整莊 旌旗掩海 一境誰不驚嘆哉. 解印歸家 滿城老幼痛泣送別者多.
경인년(1890년, 41세) 음력 5월 돌산 근무를 명 받아 4년간 근무하였다. 정치와 행실이 도리에 맞으니 관리들과 백성들이 다 복종하여 금석문에 칭송하는 글을 새긴 곳이 많았다. 공은 무예를 좋아하여 수군 연습을 행하였는데 군대의 모습이 정돈되고 장엄하며 깃발이 바다를 뒤덮으니 그 지역의 누구인들 경탄하지 않겠는가. 임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니 성안의 많은 사람들이 슬피 울며 송별하였다.
(5폭) 寫御容圖 황제의 어진을 그리다
庚子春拜命中樞院議官 在職壹年. 其歲奉御命 敬寫太祖高皇帝聖貌於興德殿中. 上愛益重之 屢蒙金玉之恩典. 聖上與東宮殿下立於左 右 丞相尹容善立於公前 於是公揮筆如神 滿朝皆大驚.
경자년(1900년, 51세) 봄에 중추원 의관에 임명되어 1년간 재직하였다. 그 해에 어명을 받들어 흥덕전에서 삼가 태조 고황제의 어용御容을 그렸다. 황제는 (공을) 아끼고 더욱 소중히 여겨 여러번 금옥을 하사하는 은전을 내렸다. 황제와 동궁 전하가 좌우에 서고 승상 윤용선이 공의 앞에 섰다. 이에 공이 귀신같이 붓을 휘두르니 만조백관들이 모두 크게 놀랐다.
(6폭) 新延圖 새 임지로 부임하다
庚子中秋 拜命慶尙道漆谷郡守. 在郡未幾 以老親病患尤重 歸鄕侍湯. 噫 天不助運 不幸逝去.以公之至孝至誠奉柩 三年謝客 不出門戶 是公之天性也.
경자년(1900년, 51세) 경상도 칠곡 군수에 임명되었다. 군에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늙으신 부모의 병환이 심해져 고향으로 돌아가 약 시중을 들었다. 아! 하늘이 운을 돕지 않아 불행히도 돌아가시니 공의 지극한 효성으로 장례를 치르고, 3년간 손님을 만나지 않고 집 밖을 나서지 않았으니 이것은 공의 천성이었다.
(7폭) 到荏圖 새 임지에 도착하다
甲辰中秋聖上愛公之淸寒 招命忠淸南道定山守. 公臨郡 聽訟如流水執事如一民称其淸德. 於是事師勉奄崔先生於長龜洞.
갑진년(1904년, 55세) 음력 8월에 황제가 공의 청빈함을 아껴 충청남도 정산 군수로 임명하였다. 공이 군에 이르러 소송을 처리하는 게 흐르는 물과 같았고 일을 처리하는 것이 한결같으니 백성들의 공의 맑은 덕을 칭송하였다. 이 때 장구동에서 면암 최선생을 스승으로 모셨다.
(8폭) 見身圖 아전들이 인사를 올리다
到荏後六房官員見身. 宜在定山新荏圖下.
부임 후 육방 관원들이 찾아와 인사를 드렸다. (이 그림은) 마땅히 정산 군수에 새로 부임하는 그림 다음에 있어야 한다.
(9폭) 奉天恩圖 황제의 은혜를 받들다
翌年乙巳 天恩尤極 賜拜參判. 公感天恩 大會郡人 設燕于愛民堂. 公與貞夫人李氏幷坐中堂祝天恩. 樂音振天 歡聲動地. 在郡三載政行大治 未幾時局不利 在官不可. 解印敀農搆小屋於全州紆北面場岩之陽 老來逸趣 不下於淵明也.
이듬해 을사년(1905년, 56세) 황제의 은덕이 더욱 극진하여 참판으로 임명하였다. 공이 황제의 은혜에 감동하여 군의 사람들을 많이 모아 애민당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공과 정부인 이씨가 중당에 나란히 앉아 황은을 축하하였다. (이 날) 음악이 하늘에 울리고 환호하는 목소리는 땅을 움직였다. 군에 근무한 지 3년 동안 정사가 잘 다스려졌으나 얼마 되지 않아 시국이 불리해져 관직에 있을 수 없었다. 벼슬을 그만두고 농촌으로 돌아가 전주 우북면紆北面 장암場岩 남쪽에 작은 집을 지으니, 노년의 편안한 흥취가 도연명에 못지 않았다.
(10폭) 回甲宴圖 회갑연을 열다
己酉秋以土匪村閭大亂 故不得己移居益山金馬山下甲第. 庚戌春二月初四日卽公之華甲 設燕中堂. 諸子諸婦共獻鶴壽 遠賔近戚歡喜不絶 公與夫人貞夫人亦說之. 以後行樂第見石芝堂行蹟.
기유년(1909년, 60세) 가을에 도적들로 인해 마을에 큰 난리가 났기 때문에 부득이 익산 금마산 밑의 큰 집으로 이사하였다. 경술년(1910년, 61세) 음력 2월 4일은 공의 화갑이었다. 중당에서 잔치를 베풀고 여러 아들과 며느리들이 장수를 빌며 술을 올리니, 멀리서 온 손님과 가까운 친척들의 즐거움이 끊이지 않았고 공과 그 부인인 정부인 역시 기뻐하였다. 이후의 행락은 『석지당행적』에 차례로 보인다.
평생도라는 화제는 조선시대부터 그려졌는데, 높은 벼슬을 지내고 오복五福을 누리는 사대부의 이상적인 일생을 평생의례 부분과 관직생활 부분으로 구성하여 도해한 그림이다. 실존 인물의 평생을 그린 것이 아니라 가장 이상적이라고 생각되는 인생의 행로를 형상화한 것이라, 도상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경향이 있다. 18세기말, 19세기 모든 특권의 담지자였던 경화세족들이 자신들이 획득한 부와 관직에의 영예가 세세토록 영속하기를 희구하며 향유하였던 그림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고, 오복을 모두 갖춘 삶이 자손 대대로 지속되기 바라는 염원이 시각적으로 응축되어 나타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4 관료로서의 공적과 개인의 기념할 만한 일생을 시각화하여 기억 속에 영구히 보존하고 싶어하는 소망을 시각화한 평생도는 출세와 장수를 바라는 보편적인 길상적 염원이 투영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5 현재 남아있는 평생도는 모두 병풍으로 8폭, 10폭 등 다양하며 20여 건이 확인된다. 첫째 폭에는 돌잔치가 그려지고, 그 뒤로 혼례, 삼일유가 등이 뒤따라 오며 관직 부임이 나오고, 마지막은 회혼례로 마무리 한 것을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12폭의 평생도는 서당 공부, 소과小科 응시應試, 치사致仕, 회갑연回甲宴, 회방례回榜禮 등의 장면이 추가되었다. 출생, 성장, 혼인, 관직 생활, 장수 등 기본 구성은 동일하다.
채용신의 평생도는 조선시대 평생도 구성을 기본적으로 따르면서도 채용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돌잔치 대신 ‘입학도’라는 이름으로 아버지로부터 글을 배우던 8세 때 이야기가 들어가 있고, 실제 역임했던 무관직, 군수 및 어진御眞 모사의 경험 등이 포함되어 실제 개인의 이력이 그려진 것이다. 명문가의 선비가 아니라 무과 출신인 화가가 주인공으로 그려졌다는 점은 기존 평생도와 차별화되는 지점을 제공하며, 이 평생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어진 제작에 참여했다는 것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기회가 아니었다. 또한 남은 여생 동안 초상화를 상업화하여 주문제작하며 살았던 그에게, 어진 화사라는 과거는 그의 실력을 입증해 주는 동시에 초상화 값을 올려줄 수 있는 이력에 해당하였다. 정산군수, 칠곡군수 등 관직 이력과 종이품이라는 가자加資된 품계는 채용신이라는 실력있는 화가가 관직 또한 높이 올라가 덕망이 깊었다는 남다른 이력을 더해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두번째 특징은 당시 생활문화를 정확하게 반영하고자 노력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제1폭 화면 아래쪽에는 ㄱ자 초가집에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있는 채용신이 그려졌다.6 오른쪽에는 개천이 흐르고 있고 다리를 건너야만 집에 이를 수 있었는데, 그 물길은 화면 위로 흐르고 있고, 오른쪽 상단에는 ‘형제정兄弟井’이라는 이름이 정확하게 적힌 우물이 보인다. 이 우물은 지금도 종로구 삼청동에 남아 있다. (Fig. 2, 3) 7. 우물의 이름을 적어넣었다는 점에서 특정 우물을 그렸다는 것을 분명하게 명시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초가집 주변의 장독대에는 버선본이 거꾸로 붙어 있다(Fig. 4). 나쁜 기운이 땅에서 올라오는 것을 막고 장맛이 변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장독대에 흰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 놓았던 실제 풍습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전통 문화는 옛 사진 속에도 남아 있으며 지금도 유지되고 있다(Fig. 5). 장독대와 버선본의 표현은 제1폭부터 제10폭까지 병풍 전체에 일관성 있게 그려지고 있어 흥미롭다. 풍속화의 사실 정신에 비견될 만큼 당시 생활 문화를 정확하게 반영한 채용신의 기록 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채용신이 작은 디테일을 놓치지 않고 끈질기게 표현하는 특징은 송산사 소장 칠광도七狂圖에서도 드러난다.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에 반발하며 거짓으로 미친 척하고 정읍에 은거하며 ‘칠광, 즉 일곱 명의 미치광이’로 자신들을 불렀던 7명의 인물들이 주인공이다.8 이 그림은 송민고宋民古(1592∼1664) 가 그린 것을 채용신이 1910년에 모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9, 호호정유허비, 태산사, 남천사 등 정읍내 주요 건물 및 유적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특히 무성리 석불입상 경우에는 불상이 무릎 높이까지 묻혀 있는 모습이 반영되어 있어 채용신 그림의 정밀함을 보여주는 것으로 주목된 바 있다.10 또한, 평생도 제3폭에는 37세 채용신이 과거에 급제하여. 말을 타고 관복 차림에 어사화를 꽂고 집으로 돌아오는 모습이 제3폭에 그려졌다. 『각사등록各司謄錄』에 의하면, 채용신에 대해 “蔡東臣年三十七, 本平岡居全州”라고 하여 그가 전주에 거주하고 있었음이 확인되는데,11 화면 오른쪽 상단에 채용신 일행이 지나온 성곽과 문은 전주성일 가능성이 있겠다.
제6폭에는 1900년 4월 태조 어진을 그린 공으로 채용신이 그 공을 인정받아 같은 해 5월 경상도 칠곡 군수에 임명되어 부임하는 장면을 그렸다.12 화면 중앙 왼쪽에서부터 시작되는 행렬에는 가마 2기가 그려져 있고 행렬은 화면 밖으로 잠깐 나갔다가 다시 위쪽으로 나와 디딜방아 부근에서 코너를 돌아 위로 향하고 있다. 화면 상단 행렬의 가장 끝에는 두 명의 여인이 전모를 쓴 모습으로 말을 타고 가고 있으며 그 앞에는 “自官三十里”라고 적혀 있는 남장승이 서 있다.(Fig. 6) “여기서부터 관아까지 30리”라는 이정표에 해당한다. 칠곡군까지의 거리를 표시한 것으로 보이며, 주변 배경을 놓치지 않고 자세하게 그림에 반영하였던 것은 매우 흥미롭다. 또한, 평생도에는 6폭, 8폭, 10폭 병풍이 실내 혹은 실외에서 치러진 행사 장면에 등장하고 있다. 현재 남아있는 궁중병풍들은 8폭과 10폭이 대부분이지만, 민간에서 6폭 병풍이 많이 사용되었는데 그러한 실제 상황을 반영한 것이며, 혼례 장면에서는 야외에서 병풍 2좌를 길게 연결하여 사용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20세기 전반에 병풍이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알려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Fig. 7)
채용신의 일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1900년, 51세의 나이에 어진御眞을 그린 것으로, 제5폭에 그려졌다. 1900년은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였고, 태조 어진 등을 모사한 것은 왕실 차원에서 중요한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경운궁慶運宮 (순종대에 덕수궁으로 명칭 변경)으로 환궁하자마자 선원전璿源殿 건설을 서둘렀고, 6월 22일에는 즉조당卽阼堂에 있던 어진들도 선원전으로 이안移安했다. 이후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였고, 1899년 12월 19일에 이성계 및 직계 5대조 조상들을 황제로 추숭하자 태조 어진의 경운궁 선원전 봉안 문제가 신하들 사이에서 제기되었다. 1899년 12월 31일에 이근명李根命이 상소하여 황제 즉위 후 고종의 정통성이 확립되려면 경운궁 선원전에 태조 어진을 봉안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고종은 영흥 준원전濬源殿의 태조 어진을 이모하라고 지시했다. 이렇듯 1900년은 조경단 조성과 더불어 태조 어진 모사를 통해 정통성을 확립하고자 했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13. 당시 채용신은 “전주화원全州畫員 채용신”으로 불리고 있었다.14 초상화를 잘 그린다고 채용신을 추천한 이가 있었고, 이를 확인한 고종은 지방 화원을 태조 어진 모사의 주관화사로 채택하게 하였다. 당시에 태조어진 모사 주관화사가 채용신으로 결정되는 과정은 『봉명사기奉命寫記』를 통해 확인된다.
(전략) 민병석이 ‘(채용신은) 일찍이 경북京北 삼청동三淸洞에 살았는데 지금은 전라북도 완산군에 살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도성안에서 일찍이 그 사람에게 초상화를 그린 자가 있는가?’라고 하니, 병석이 대답하여 말하기를 ‘일찍이 저의 초상을 그렸으며 또한 판서 김성근과 판서 김규홍, 판서 홍순형의 초상화를 그렸는데 초상화를 본 사람들이 모두 매우 닮았다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여러 초상화를 가지고 들어오도록 하라. 짐이 장차 친히 그의 솜씨를 볼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네 명 신하의 초상화를 가져다 올리니 임금이 조정에 나와 보고 ‘좋다’라고 말을 하였다.15
전라도관찰사에게 칙서를 내려 일이 지체되는 폐단이 없도록 전주군에서 노자를 지급해 속히 채용신을 서울로 올려보내달라고 하였던 기록을 보면, 채용신이 당시 전주 관아에서 고용한 정식 화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16 채용신이 전주에서 올라올 때는 노비 한 명을 데리고 왔고, 왕실에서는 채용신이 어진을 그리며 연고가 없는 한양에서 생활하면서 드는 기름과 땔감, 양식과 찬거리 등에 대해 비용을 계산하여 지급하고자 의논하였음도 영정모사도감의궤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17
3월 21일 준원전에 모셔진 태조의 어진을 가져와 흥덕전에 이봉하고 모사를 진행하였다. 23일부터 26일까지 초본草本으로 모사한 뒤에 4월 13일 정본 채색까지 모두 완료하고 16일 장황 완성 후 24일 선원전에 봉안하였다고 한다. 당시 태조 어진 모사 작업에 참여한 이들의 명단도 『승정원일기』에 기록되어 있는데, 윤용선尹容善(1829~1904)을 필두로 영정모사도감을 설치하여 석달에 걸쳐 진행되었던 일의 결과, 많은 이들에게 하사품이 내려지고 품계를 가자하였다. 주관화사 2명(조석진, 채용신), 동참화원 7명(백은배 등), 도화주사 4명(윤석영 등), 장황인 5명(한응창 등)에게는 원하는 대로 시상을 하였고, 오봉병五峯屛 기화, 반차도班次圖 기화 등에 참여한 16명에게는 아마 1필을 하사하였다18. 이번 태조어진 모사 작업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는 화사의 총수는 30명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태조 어진을 그리는 장면(평생도 제5폭)에는 수많은 인파들에 둘러쌓여 있는 채용신이 보인다.(Fig. 8) 당시 어진을 그렸던 장소는 경운궁 흥덕전으로, 북쪽에 일월오봉도와 화조도 병풍이 그려져 있고, 그 앞쪽에 채용신이 사모에 녹색 관복을 입고 서쪽을 바라보고 앉아 붓을 들고 홍룡포紅龍袍를 입은 태조 이성계를 그리고 있다. 면류관을 쓴 고종과 순종이 가까이에 서서 이를 지켜보고 있으며, 그 옆에는 금관조복을 입고 홀을 든 관료들도 함께 지켜보고 있다. 채용신과 같이 어진 주변에 앉아 붓을 들고 있는 인물들은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화가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에 붓을 들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기본적으로 사실을 담보하고 있다고 보더라도, 이 장면에서는 과연 사실 그대로일까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된다. 비단 위로 가로지르는 나무 틀인 내왕판來往版을 설치하여 위아래로 움직일 수 있게 공간을 확보하고, 그 위에 올라 앉아 붓을 들고 있는 채용신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1928년 순종 어진을 그리는 김은호를 찍은 사진을 통해 실제로 그런 방식으로 어진을 모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어 흥미롭다(Fig. 9). 그러나, 김은호는 실내 아무도 없는 한적한 공간에서 어진 모사에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다. 반면, 채용신은 면류관을 쓴 고종과 순종 및 여러 대신들에 둘러 쌓인 채로 다른 화사들과 함께 모사를 진행하고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면류관은 누가봐도 고종과 순종임을 알아볼 수 있는 장치이긴 하나, 태조 어진을 모사하는 화가 앞에 면류관을 쓰고 나타나 그리는 내내 구경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로 보기 어렵다. 경운궁 너머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사관 깃발의 묘사는 궁 주변 환경까지도 정확하게 반영하고자 했던 의도를 보여주며, 러시아공사관은 건물 구조를 유사하게 표현해 냈음을 사진으로 남아 있는 옛 모습과 비교해봤을 때 알 수 있다. 그러나, 10년이 넘게 흘러서였는지, 고종과 순종의 복식도 실제와 다르고, 각 국의 국기 모양 역시 유사하지만 정확하게 맞지는 않는다.19 기념비적인 국가적 사업에 참여했던 경험은 채용신의 기억 속에서 재편집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본적으로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지만, 인생의 드라마틱한 순간은 기억 속에서 다시 편집되어 시각화된 것으로 생각된다.

Ⅲ. 채용신 평생도의 제작시기와 제작자

평생도 병풍은 후대에 개장되었고, 초상화에 자세하게 남겼던 형식의 채용신의 관서가 없다. 상단의 글도 누군지 알 수 없는 제3자가 쓴 것이다. 여러 가지 의문점을 던져주는 이 병풍은 최근 연구성과를 통해 1924년경 혹은 그 이전에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20. 이렇게 보는 근거는 채용신과 지인의 글을 모아 편집한 『석강실기石江實記』에 수록되어 있는 권철수權哲壽라는 인물이 1924년에 병풍 그림에 부친 명문 ‘화병명畫屛銘’이라는 글이다. ‘화병명’의 대상이 된 병풍은 평생도와 같이 총10폭이며, 내용도 채용신 평생도와 대체적으로 부합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평생도 병풍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으로 생각된다. 이 글은 1924년 국추절菊秋節(9월)에 지은 것이라 밝혀져 있으므로, 평생도는 1924년 이전에 제작되었음은 확실하다. 전체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석강 채공이 기예에 신비하고 정사에 통달하여 명성과 영광이 일세에 소문났다. 그의 만년에는 옛 것에 감개하여 평생의 경력으로 병풍 십첩十疊을 그려 자손에게 보였으니, 그 생각이 원대하다. 운고雲皐 이우李友가 특히 이 뜻으로 공을 위하여 나에게 병풍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비록 글을 잘하지 못하지만, 또한 사절할 수도 없어 이에 감히 명을 짓는다.
어릴 때에 단정히 몸을 양육했고 가정에서 학문에 나아갔도다
틈나는 시간에는 나무를 했고 빈 산에는 낙락장송 있었도다
자라서 관례, 혼례를 치르자 예의가 찬란하였다
이름이 과거합격명부에 올라 무예로 여러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도다
임금의 화상을 그리자 임금께서 총애하고 신하는 공손하였도다
돌항에 첨절제사를 지내니 군관들이 복종하였도다
부산진에 첨절제사로 나가니 형벌, 정치가 깨끗하였도다
칠곡 부사로 다스리니 모든 일이 밝게 되었도다
정산 군수로 나가니 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였도다
특히 큰 은혜를 입어 이품二品의 직책을 지냈도다
갑자년(1924) 국추절菊秋節에 청사생 권철수가 삼가 짓다21
이 글은 ‘제題’가 아니라 ‘명銘’이라고 하였다. 명문은 경계의 뜻을 나타내고 공적功績을 기록하는 기능을 지닌다. 이 병풍에 대한 글이 ‘제화병’이 아니라 ‘화병명’이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글의 성격을 말해준다. 글을 부탁한 이우李友와 이 글을 지은 권철수가 누구인지는 문헌 기록에서 확인되지 않는다.
1910년 환갑을 맞아 잔치를 열고, 그 이후 1924년 권철수가 화병명을 짓기까지 그 사이에 이 병풍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1910년 환갑을 맞이한 이후 1924년까지 그는 전라북도 지역에서 주문받은 각계 인사들의 초상화를 그려주며 화가로서 가장 분주한 삶을 살았는데, 1920년대 초부터는 정읍에서 공방을 운영하며 초상화를 주문받아 그렸음은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다. 그런데, 1910년~ 1924년이면 한참 초상화 주문에 응하여 전업 화가의 길을 가고 있었던 채용신이 매우 사실적인 초상화를 그리던 전성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 필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과연 그가 직접 그린 것인가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조선시대 평생도 가운데 스스로 자신의 평생도를 제작한 전례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도 이 병풍의 제작자가 누구인가라는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가 된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석강실기』에 실린 「화병명」에 평생도와 유사한 내용이 확인되며, ‘평생의 이력을 그려 자손에게 보이고자 했다’는 표현은 채용신 스스로 그린 것으로 해석하게 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만일 채용신이 아닌 제3자가 그렸다면 그의 아들이나 손자일 가능성이 큰데 자손에게 보이고자 했다는 것으로 볼 때 아들이나 손자가 그린 것보다는 본인이 그린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평생도의 제작동기가 자손들에게 보이고 가문 대대로 남기고자 했던 것도 명확하게 알 수 있다.
본고에서는 채용신의 다른 인물화와 비교해 보면서 화풍상의 일관된 특징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 화풍 비교의 대상이 된 작품은 호림박물관 <벌목도>와 1910년작 송산사 소장 <칠광도 七狂圖>, <송정십현도松亭十賢圖>, 1915년작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다. <벌목도>는 채용신이 언제 그렸다는 관서가 온전히 적혀 있지 않지만 채용신의 도장이 왼쪽 상단에 확실하게 찍혀 있고, <칠광도>와 <송정십현도>는 그가 1910년에 정읍 칠보면 김직술金直述의 집에 머무르면서 제작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금은 확인하기 어렵지만 뒷면에 관서가 적혀 있다고 한다.22 채용신의 관지와 인장을 잘 갖추고 있는 <무이구곡도>는 그의 전형적인 산수화풍으로 그려진 대표작 중 하나로, 주자를 중심으로 인물 표현이 등장한다. 산수 표현이 주를 이루고 인물이 소략하게 그려졌지만, 1915년으로 제작시기가 확실하고 인물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함께 검토해야할 작품이다.
우선 인물 표현을 보면, 동그란 얼굴에 5~6등신대로 짧아진 신체 비례, 얼굴과 인물을 묘사하는 필선 등에서 유사한 점이 보인다.(Fig. 10, 11, 12, 13) <벌목도>와 <송정십현도> 경우에는 얼굴과 몸에 음영 표현이 추가되어 있다는 특징을 보이나, 상대적으로 등장하는 인물의 숫자가 적고 그림에서 인물 한명 한명이 주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좀더 인물 표현에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기본적으로는 공통된 필치와 화풍이 간취된다. <평생도> 인물의 의습선이 다소 경직되어 있게 느껴지는 차이점은 있으나, 여러 폭의 병풍으로 제작되었으며 많은 인물을 한꺼번에 많이 그렸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또한 산수 표현에서도 작품 간의 화풍상 유사성이 확인된다. 바위를 묘사한 구불구불한 필선의 흐름, 녹색과 노란색을 함께 구사하여 표현한 점에서 전형적인 채용신 산수화풍을 볼 수 있다.(Fig. 14, 15) 특히 노란색의 구사는 다른 화가에 비해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인물과 산수 표현 뿐 아니라, 기와 지붕을 한 건축의 세부 구조에서도 일관된 특징을 찾아볼 수 있다.(Fig. 16, 17, 18, 19) 전체적으로 초상화에서 보이는 치밀한 묘사력과는 분명 차이가 나지만, 분명한 것은 채용신이 그린 것으로 관지가 있거나 기록이 있는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 간에는 공통점이 간취된다는 점이다. 따라서, 초상화와 다른 화목에서 기량적 차이가 보이는 것은, 화목에 따라 채용신이 다른 화풍을 선별적으로 선택하였던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초상화에서는 주인공의 얼굴에 가장 공을 들여 그렸다면, 평생도에서는 그러한 화풍 대신 소재의 선택과 당시 실제 풍경과 생활문화의 반영 등 사실적인 기록 면에 중점을 두었던 결과, 초상화에서 보이는 극사실적인 묘사력이 보이지 않는 결과를 낳았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겠다.
또한, 삼청동 우물의 이름, 장독대의 버선본 표현, 장승에 적힌 거리 표시 등 평생도의 주제와 크게 관계없는 주변 풍경 묘사를 놀라울만큼 정확하게 해냈다는 점은, 채용신 본인이 아니면 어렵지 않았을까 추정하게 만드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공방의 존재가 확실하고, 평생도에 담긴 내용이 방대하기 때문에 아들, 손자 등이 함께 작업했을 가능성이 분명히 있다. 여러 기록과 전해지는 이야기를 통해 볼 때, 채용신은 익산에 ‘금마산방’을 운영하면서도 김제, 정읍, 진안 등의 누군가의 집에 머물면서 초상화를 그렸고, 1920년경 정읍에 ‘채석강도화소‘를 운영하면서부터는 좀더 본격적인 공방 체제를 갖추었다. 1923년 할아버지 류제양柳濟陽(1846-1922) 초상을 찾으러 구례에서 정읍으로 찾아온 손자, 류형업柳瀅業(1886~1944)은 체용신의 아들과는 서류 처리만 진행하고 할아버지 초상이 생전의 모습과 달라질까 염려되어 채용신과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23 채용신 공방을 찾아온 이는 모든 대화를 채용신과만 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된다. 부분적으로 공동 작업이라 하더라도, 초상화는 채용신 이름으로 주문을 받았고 제작이 되었으며 “닮지 않으면 책임지겠다”는 채석강도화소 광고지의 자신감 표현도 오롯이 채용신의 뛰어난 능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24. 그렇다면 평생도 역시 아들, 손자의 손이 더해졌다 하더라도, 채용신이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그림도 상당부분 직접 그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평생도>가 가지는 특징, 다른 인물화, 산수화와의 화풍 비교, 문헌기록에서 보이는 초상화 제작 상황 등을 참고할 때, <평생도>는 채용신이 기획을 하고 주도적으로 그리되, 아들 혹은 손자의 도움을 받아 완성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Ⅳ. 채용신 평생도의 문화사적 의의

채용신은 자화상을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1943년 화신백화전에서 열렸던 채용신 유작 전에 출품된 것은 확인되나, 그 이후 소장처가 확인되지 않는 상황이다. 조선시대부터 근대 20세기 전반까지 우리나라 화단에서 자화상은 많지 않다. 전업 화가의 길을 갔던 채용신이 스스로의 모습을 그린 것은 평생도를 그린 것과 같은 맥락일지 모른다. 즉, 중인 출신의 화사가 아니라 양반 가문 출신이라는 자신의 사회적 정체성을 후세에 보여주고자 하는 욕망의 발현이 아니었을까. 석강실기 기록에서 권철수가 “평생의 이력을 그려 자손에게 보이고자 했다”는 기록과 같은 맥락으로 해석된다.
독보적으로 여러 점의 초상화가 남아 있는 18세기 예원의 총수로 불렸던 강세황姜世晃(1713~1791)은 자화상을 그리고 그 옆에 자찬自讚을 함께 남겨 오사모를 쓰고 야복을 입은 스스로를 몸은 조정에 있지만 뜻은 재야에 있음을 은유적으로 나타냈다. 이러한 자화상 제작은 18세기 문학사에서 자의식적 경향의 글쓰기가 크게 유행했던 흐름 속에 자찬 묘지명 등이 등장했던 것과 같은 맥락에서 본다.25 동아시아 지식인들은 자신의 학문과 활동이 이 세상에서 유효하다고 평가받기를 염원했기에, 인생의 대한大限을 의식하고 삶을 뒤돌아보면서 스스로를 혁신할 기획을 세웠다.26 자찬 묘지명을 지은 대표적인 인물로 정약용丁若鏞(1762~1836)이 있다. 그는 1822년 회갑을 맞아 자신의 묘지명을 썼다고 한다. 그 후 14년을 더 살았지만, 당시에는 빈곤과 건강 상태로 인해 언제 눈을 감을지 모른다는 압박감도 있었을 것이고, 출사出仕할 기회도 더 이상 없을 것으로 판단하였기 때문에 그는 생의 마감을 준비하는 의미에서 의미심장하게 묘지명을 서술하였고 분량도 방대하였다.27 이러한 조선시대 선비들의 관습은 근대시기까지 이어져, 20세기에도 전우田愚(1841~1922), 김택영金澤榮(1850~1927)등이 자찬 묘지명을 지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분개하며 안산으로 물러나 지냈던 유원성柳遠聲(1851~1945)의 「모옹자명帽翁自銘」은 ‘행적의 글을 스스로 지어 후손에게 밝힌다’고 스스로 성격을 밝혔다. 채용신 평생도 제작배경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예다.28 1905년 정계에서 물러나 1911년 환갑을 맞아 자명을 지은 유원상과 1905년 정산군수직에서 물러나 1910~1920년경 평생도를 그린 채용신 에게 공통점이 있었다. ‘자손(후손)에게 보이고자 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평생도가 ‘이상적인 선비의 일생’을 형식적으로 담은 것에 반해, 채용신 평생도는 조선시대 평생도와 전혀 다른 맥락, 즉 자찬 묘지명과 같은 맥락에서 제작된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채용신은 문인들의 오래된 자찬 묘지명 관습을 분명히 알고 있었을 것이며, 그들이 죽음을 대비하며 스스로 돌아보는 글을 지었듯이 화가로서 그는 시각언어인 그림을 선택해서 자찬 묘지명을 대체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1923년 할아버지 초상을 찾으러 온 손자와 채용신이 나눈 대화는 초상화를 의뢰하고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채용신이 느낀 감회를 짐작하게 한다. 아래 기록은 구례를 찾아와 채용신 초상 제작 주문을 받은 채용신의 막내 아들 채관묵蔡官黙을 통해 류형업이 세상을 떠난 할아버지 류제양 사진을 보내 초상화를 주문하고 두 달 후에 찾으러 갔던 날 남긴 것이다. 문화 류씨 집안에서는 생활일기를 매일 기록하여 20세기 전반 지역 생활문화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3월 17일) 석지옹의 정사精舍에 머물렀다. 할아버님 초상화를 모사하는데 혹시 자세하지 않은 곳이 있어 조금이라도 생전의 모습과 달라지지 않을까 걱정되어 마치 눈에 보듯이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석지옹이 감탄하며 말하기를 “조금씩들은 다 기억해 내지 못하게 마련인데 어찌하여 그렇게 (눈으로 보듯이) 하나하나 다 기억하고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제가 비록 모자라지만 할아버님을 모신 지가 37년이 되었습니다. 생전에도 할아버님이 조금이라도 노하시거나 또 못마땅하셔 조금 찡그리시거나, 조금이라도 흡족해 하시면 그것을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할아버님이 집안에서 앉으시고 누우시며, 밖으로 외출하시는데 있어 옆에서 같이 하거나 모시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였으니 만약 1년을 모신다하여도 어찌 자세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3월 18일) 할아버님 초상화를 모사한 수수료 100원은 처음에 먼저 채관묵에게 20원을 예약금으로 주고 잔금은 영정 모사를 마치는 날에 주기로 구두약속을 하였다고 석지옹에게 말하였다. 그랬더니 석지용이 웃으며 말하기를 “상중인 당신의 정성스러운 그 마음을 처음 보고 몹시 흡족하였고, 또한 앞서의 약속이 있는데 어찌 돈의 많고 적음을 말하겠습니까? 서로간에 정리를 잊지 말고 따른다면 오히려 돈 몇푼보다 나을 것이니, 당신이 그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라고 하였다.29
주문받아 정해진 가격에 규격화된 유형으로 반복하여 그려준 초상화였지만, 상중에 초상을 그리기 위해 멀리서 찾아오고 할아버지를 자세하게 묘사하는 모습을 보며, 그 마음을 높이 샀다. 수많은 이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누구보다 그런 마음의 오고감을 느꼈을 채용신은 자신도 후세에 그렇게 기억되었으면 하는 바램에 스스로의 평생도를 그렸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정산군수를 마치고 지역으로 돌아와 익산에 금마산방을 차리고 생활하다가 1923년경 정읍 신태인으로 공방을 옮길 때의 상황을 보면, 황장길이라는 어르신이 집 한칸을 공방으로 쓰라고 내줄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던 것으로 전한다.30 류제양 초상을 찾으러 갔던 손자가 채용신 공방에서 최익현 초상을 보았다는 기록에서처럼 동시에 여러 점을 제작하고 있을 정도로 주문은 적지 않았던 것이 확인되지만, 류제양 초상도 채용신의 아들이 구례까지 가서 채용신 초상화 주문을 광고하고 주문 의뢰를 받아왔던 것을 알 수 있는데, 정읍 인근 지역만으로는 주문제작 공방 체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평생도가 1920년경 그려졌다면 평생 초상화를 그리며 살았던 무관 출신의 채용신은 ‘어진화사’ 명성에 힘입어 지역에서 유명해졌지만, 그와 아들들은 채용신의 화려했던 70년 이력과 명성으로 정읍 공방의 주인으로서의 제2의 전성기를 꿈꾸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평생도는 채용신이 그렸거나, 최소한 채용신이 많은 부분 총괄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채용신이 스스로의 평생 도를 위해 선택한 순간들은 기억 속에서 재편집되어 시각화되었고, 후세에 길이 남아 채용신의 이력을 전하고 어진화사로서 화려했던 순간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각 자료가 되었다.

Ⅴ. 맺음말

이상에서 채용신 <평생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는 1900년 어진을 그렸던 공으로 여러 관직 생활을 하고 1905년 정산군수 역임을 마지막으로 전북 지역에 내려와 초상화를 그려주며 지냈고, 1920년대 초반부터는 정읍에 공방을 차려 본격적으로 그림을 주문 제작한 것이 확인된다. 채용신은 8세에 입학할 때부터 61세에 회갑연을 치를 때까지 자신의 선별된 이야기를 10폭 병풍 속에 담았다. 이상적인 선비의 평생을 소재로 했던 그 이전 시기 평생도와 달리, 화가가 자신의 평생을 소재로 그렸다는 점에서 매우 특별한 맥락을 가진다.
권철수라는 인물이 1924년 쓴 글이 평생도와 내용상 부합된다는 점에서 제작시기는 1924년경 혹은 그 이전으로 볼 수 있으며, 1951년 작품을 실견한 연구자의 글에 ‘석지당70노옹’이라는 표현과 채용신이 초상화 관지에 그의 나이를 70대부터 스스로를 ‘80翁’이라고 표현했던 관습에 의거하여 60대인 1910년~1920년 사이에 제작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채용신 인물화의 기준작으로 볼 수 있는 그림들과의 비교를 통해 인물, 건물, 산수화풍이 유사한 특징을 보인다는 점에서 완성할 때까지 아들과 손자가 어느 정도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겠지만, 소재의 선택과 화면 구성 등에서 채용신이 대부분을 담당했을 것으로 보았다. 또한, 곳곳에 관아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장승이나 버선본을 거꾸로 붙여 놓은 장독대 등 당시 풍경과 생활 문화가 충실하게 반영되어 있어, 민속학적으로 우리나라 근대 생활문화를 알려주는 시각자료로서 의미가 크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채용신은 평생도를 통해 관직 생활을 무난하게 완수하고 어진 제작에 참여했던 경험을 그려넣음으로써 개인의 영광을 자손에게 보이고 가문 대대로 전하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기억은 선택되고 재편집되어 시각화되었다. 자화상이나 자찬 묘지명처럼, 평생도 역시 스스로의 이력을 통해 사회적 정체성을 시각화하는 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

Notes

1) 채용신 평생도는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宜夫)가 발표한 논문(「石芝 蔡龍臣」, 『美術硏究』, 제162호. 동경: 1951)에 도판 없이 소개되었고, 그 이후 여러 연구논문에서 그에 의거해 평생도를 채용신의 생애를 연구하는 데에 자료로 활용하였다. 2001년 국립현대미술관 특별전 ‘석지 채용신’ 도록에 흑백사진이 공개되면서 그 후 연구에서는 흑백사진과 함께 소개되었다. 정석범, 「蔡龍臣 회화의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5), 변종필, 「蔡龍臣의 초상화 연구」, 경희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양진희, 「石芝 蔡龍臣의 繪畵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석사학위논문, (2019) 그리고 2021년 고 이건희 회장 유족에 의해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되며 공개되었다.

2) 구마가이 노부오(熊谷宜夫), 앞의 논문, pp.34-35.

3) 번역은 『어느 수집가의 초대』, (국립중앙박물관, 2021) 참고.

4) 최성희, 「19세기 평생도 연구」,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윈노문, (2002), p. 107.

5) 서윤정, 「《평생도(平生圖)》의 제작 경향과 변화 양상: 도상과 화풍의 전승과 변용의 관점에서」, 『한국문화』, 96호, (2021), p. 177.

6) 평생도 도판과 내용은 『아주 특별한 순간- 그림으로 남기다』, 국립전주박물관, (2023) 참고.

7) 형제정은 지금도 종로구 삼청동 3번지에 남아있는데 물이 맑고 맛이 좋아서 위장병에 특효가 있었다고 한다. 칠성당에 제사를 올릴 때 이 우물을 쓴 데서 붙여진 이름은 원래 성제정星祭井이었는데, 백성들 사이에서 회자되면서 발음하기 쉽게 변하여 형제정이라고 된 것이라 한다.

8) ‘칠광’은 김대립金大立(1550∼?), 김응찬金應贊(1553∼1632), 김감金勘(1590∼1662), 안치중安致中(1591∼1643), 송민고宋民古(1592∼1664), 이상향李想嚮(1585∼1645), 이탁李卓(1581∼?) 등 7명이다. 칠광도에 묘사된 경관에 대해서는 박정민, 「1900년대 초 태인 고현내의 경관-칠광도를 중심으로」, 『韓國史硏究』 제189집, (2020.6) 189-226쪽 참고.

9) 채용신 등 저, 이두희, 이충구 역, 『석지 채용신 실기』, (국학자료원, 2004), pp. 13-14.

10) 박정민, 앞의 논문, p. 210.

11) 선무군관 채동신은 37세. 본관 평강(平康). 전주 거주. 아버지는 折衝將軍 蔡權永이라고 『각사등록』에 기록되었다. “選武軍官蔡東臣年三十七, 本平岡居全州, 春等 一巡, 柳葉箭貫 一中, 邊四中, 父 折衝將軍蔡權永” 『各司謄錄』, 「湖南啓錄」 高宗23年(1886) 10月 19日. 양진희, 앞의 논문(2019) p. 11에서 재인용.

12) 『承政院日記』 光武4년(1900) 5月 2日(壬寅). 평생도 상단에는 ‘仲秋’라고 하였으나 오기인 것으로 보인다.

13) 조인수, 「전통과 권위의 표상: 高宗代의 太祖 御眞과 眞殿」, 『미술사연구』20호, (2006), pp. 29-56.

14) 庚子正月初十日全州畵員蔡龍臣亦率一奴上來現身是如乎此人則與京居之人有異限畢役間粮饌似當題給是乎旀燈油每日五夕式溫堗木半丹式依已例上下何如 圖章内依爲旀粮饌叚試才畵員一體代錢磨鍊上下. 『影幀摸寫都監儀軌』 0001권, 奎13982, 0103-0103면.

15) 채용신을 추천한 것은 議政府 贊政 閔丙奭(1858~1940)이었다. (前略) 有工於畵者乎? 議政府贊政閔丙奭對曰 有之, 前僉節制使臣蔡龍臣是也. 曾居京北三淸洞矣, 今在全羅道完山郡. 上曰, 都城內有曾寫眞於其人者乎? 丙奭對曰, 曾寫臣賤像, 又寫判書臣金聲根·判書臣金奎弘·判書臣洪淳馨之像, 見之者咸曰 酷肖. (後略)”『奉命事記』「記」. 변종필, 「蔡龍臣의 초상화 연구」, 경희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12), pp. 98~99에서 재인용.

16) 訓令 庚子正月初八日 今此 濬源殿奉安 影幀陪來京中摹寫奉安 眞殿事勅下矣全州郡居前僉使蔡龍臣精解畵法是如爲有置玆以發訓訓到卽時自本郡給盤費卽速起送俾無稽滯之弊爲宜事. 『影幀摸寫都監儀軌』 0001권, 奎 13982, 0243-0243면.

17) 경자년 정월 초10일 전주 화원 채용신이 다시 노비 한 명을 데리고 도착했다고 하옵니다. 이 사람은 서울에 사는 사람과 달라 일을 마칠 때까지 양찬(糧饌: 양식과 찬거리)을 이에 맞춰 지급하려 하온데, 등유는 매일 오석 씩, 온돌의 땔감은 반 단씩 선례에 따라 내려주고 화원의 試才 시 주는 양찬을 기준으로 하여 그 일체를 돈으로 마련하여 내려주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庚子正月初十日 全州畵員蔡龍臣亦率一奴上來現身是如乎. 此人則與京居之人有異, 限畢役間粮饌, 似當題給是乎. 於燈油每日五夕式, 溫堗木半丹式, 依已例上下, 何如圖章内依爲於粮饌叚試才畵員, 一體代錢磨鍊上下. 『影幀摹寫都監儀軌』(奎13982).

18) 영정모사도감을 설치하고 초본, 정본을 제작하여 배접하고 보안하여 배례하기까지 전 과정이 『승정원일기』와 『影幀摸寫都監儀軌』, (奎13982)에 기록되어 있다.

19) 그런데 영국 국기는 잘못 그려졌다. 당시 덕수궁 담장 너머로 영국, 프랑스, 러시아 공사관이 있었던 것은 사실 반영이나, 정확한 모양을 기억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20) 권철수의 기록을 통해 1924년경 혹은 그 이전으로 정리한 것은 양진희, 앞의 논문, p. 232. 연보 참고.

21) 石江蔡公神於技藝達於政事聲譽榮光聞於一世 及其晩年慨然感舊乃以平生經歷爲屛十疊以示子孫其廬遠矣. 雲皐李友特以此意爲公屬不侫以屛銘自顧雖不文亦有不可辭者玆敢爲銘曰 端養幼身 家庭就學 暇日采薪 空山松落 及長冠婚 禮儀燦爛 掛名榜文 武藝衆讚 奉摹御像 君寵臣恭 節制突港 軍吏服從 臨鎭釜域 刑政淸平 治府漆谷 庶事稱明 守郡定山 百姓頌德 特蒙殊恩 二品之職 甲子菊秋節晴沙生權哲壽謹述 畫屛銘. 채용신 등 저, 이두희, 이충구 역, 앞의 책, pp. 73-74.

22) 김직술은 최익현이 거병할 때 재정을 맡아 전라북도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금하였던 인물이다. 칠광도 등의 뒷면은 현재 액자에 부착된 채로 장황되어 있어 확인이 어려운 상태다.

23) 「구례 류씨가의 생활일기」(하), 한국농촌경제연구원, (1991) pp. 573.

24) 문화류씨 가문에서 주문한 <류제양 초상>은 지금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다. 『석지 채용신 초상화』, 국립전주박물관, (2020) 참고.

25) 최석원, 「강세황 자화상 연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8).

26) 심경호, 『내면기행 : 선인들, 스스로 묘비명을 쓰다』, (민음사, 2018). p.9.

27) 김형호, 「茶山 「自撰墓誌銘」 硏究」,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과 석사학위논문, (2011).

28) 심경호, 앞의 책, p.546.

29) 『求禮文化柳氏 生活日記』, (한국학중앙연구원, 2000) 참고.

30) 당시 여러 전해지는 상황에 대해 알려주신 정읍 신태인 읍사무소 정성섭 읍장님 등 관계자분께 감사드린다.

Fig. 1.
채용신, 평생도 Ch’ae Yongsin, P’yŏngsaengdo, Ten-panel folding screen, Early 20th century,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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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채용신, 평생도 제1폭, Ch’ae Yongsin, Detail from the first panel of P’yŏngsaengdo Ten-panel folding screen, Early 20th century,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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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형제정, 서울 종로구 삼청동, Hyŏngjejŏng well(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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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채용신, 평생도 제1폭, Ch’ae Yongshin, Detail from the first panel of P’yŏngsaengdo Ten-panel folding screen, Early 20th century,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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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장독대 위 버선본, pŏsŏnbon on the Changdoktae National Folk Museum of Kroea (https://www.nf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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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채용신, 평생도 제6폭, Ch’ae Yongsin, Detail from the sixth panel of P’yŏngsaengdo, Early 20th century,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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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채용신, 평생도 제2폭, Ch’ae Yongsin, Detail from the second panel of P’yŏngsaengdo, Early 20th century,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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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채용신, 평생도 제5폭, Ch’ae Yongshin, Detail from P’yŏngsaengdo, Ten-panel folding screen, Early 20th century,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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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김은호가 순종 어진을 그리는 사진, Photo of Kim ŭnho (1928) (kŭndae misul yŏn’guso, Idang Kim ŭnho, 1978,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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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채용신, 평생도 제1폭, Ch’ae Yongsin, Detail of P’yŏngsaengdo, Ten-panel folding screen, Early 20th century,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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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채용신, 벌목도 부분, Ch’ae Yongsin, Detail from Pŏlmokto, Early 20th Century, Color on silk, Horim pangmulgwan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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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채용신, 칠광도 부분, Ch’ae Yongsin, Detail from Ch’ ilgwangdo, Early 20th century, Color on silk, Songsansa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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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채용신, 무이구곡도 부분, Ch’ae Yongsin, Detail from Muigugokto, 1915,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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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채용신, 평생도 제4폭, Ch’ae Yongshin, Detail from the fourth panel of P’yŏngsaengdo, Ten-panel folding screen, Early 20th century, 10 Panel,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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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채용신, 무이구곡도 부분, Ch’ae Yongshin, Detail from Muigugokto,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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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채용신, 평생도 제8폭, Ch’ae Yongsin, Detail from the eighth panel of P’yŏngsaengdo, Ten-panel folding screen, Early 20th century,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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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채용신, 칠광도 부분, Ch’ae Yongsin, Detail from Ch’ ilgwangdo, Color on silk, Songsansa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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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채용신, 평생도 제6폭, Ch’ae Yongsin, Detail from the sixth panel of P’yŏngsaengdo, Early 20th century,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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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채용신, 무이구곡도 부분, Ch’ae Yongsin, Detail from Muigugokto, Color on cotton,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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