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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0; 2023 > Article
‘경주 동궁과 월지’ 출토 공예품의 주요 논점 再考

Abstract

경주 월지 출토품은 통일신라의 공예 문화를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지만 일부 유물은 완형으로 수습되지 않아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발견 당시 외형이나 수량, 현재 상태 등을 뚜렷하게 알 수 없는 공예품도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1975년 발굴조사를 시작하고 50여 년이 지난 상황에서, 현재의 주요 논점을 再考하고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먼저 월지 출토품으로만 확인되는 특정 기형과 공예기법을 살펴보았고 경주에서 산출되는 수정과 각종 골각류의 활용과 제작, 장식 기술을 검토하였다. 특히 <漆花形裝飾>은 불감이라는 용도를 명확하게 하였고 기능에 충실한 <금동 초심지 가위>는 새로운 조명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단서로 제시하였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竹形裝飾>, <花鳥文 骨片>, <草花文 漆板> 등도 용도와 기법, 문양 등에 관한 연구가 진전된다면, 통일신라 공예의 다른 면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함조문과 보상화문, 연주문 등의 다양한 모습을 간직한 월지 출토품은 중국 唐과 통일신라, 일본 奈良時代의 공통된 유행을 증명해 주며, 우리나라 문양사 연구의 寶庫로 평가할 수 있다.

Abstract

The excavation of Wŏlchi pond in Kyŏngju has yielded numerous craftworks that offer crucial information about Silla’s crafts. However, due to damage or missing parts, it is difficult to fully understand the nature of some items. Additionally, there are some findings whose appearance and conditions at the time of discovery remain unidentifiable. Therefore, over 50 years since the initial excavation in 1975, it is necessary to re-examine the current key issues and discuss the future directions of studies concerning the discoveries from Tonggung Palace and Wŏlchi pond. Firstly, I examined specific shapes and production techniques that are only observed in the findings from Wŏlchi pond. Further, I investigated the usage, and manufacture and decorative techniques of crystals and various objects made of bone and horn produced in Kyŏngju. I proposed the correct function of the Lacquered Flower-shaped Ornament as a portable shrine and additionally presented the Gilt-Bronze Wick Trimmer, suitably made for its role, as evidence of the new culture involving candles. When further research is conducted into the uses, production techniques, and decorative designs of the items found in incomplete form, such as Bamboo-shaped Ornament, Bone Fragment with Flower and Bird Design, and Lacquered Plate with Flower and Foliage Design, we may be able to understand more aspects of the craft culture of Unified Silla. Furthermore, the recovered items from Wŏlchi pond exhibiting various designs, such as birds holding flowers in their beaks (hamjomun), flower medallions (bosanghwamun), and rows of beads (yeonjumun), provide evidence that Unified Silla shared a common decorative trend with Tang China and Nara Japan. Tonggung palace and Wŏlchi pond are valuable resources for the history of decorative patterns in Korea.

Ⅰ. 머리말 : 월지 출토 공예품의 현황

신라를 살았던 사람들의 흔적을 간직한 월지 출토품은 그 시대를 이해할 수 있는 많은 이야기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경주 동궁과 월지에서는 지난 1975년부터 1976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며, 약 33,000점의 유물이 수습되었다.1 대체로 연못 서쪽에 복원된 건물지를 중심으로 호안석축 내부 반경 6m 거리 안쪽 바닥 토층에서 유물이 출토되었다. 상당수는 와전류가 포함되었고 일상생활에서 사용하는 금속이나 칠공예품, 불교미술품, 목간 등도 확인되었다. 특히 금속이나 칠공예품은 각종 기명과 숟가락이 많았으며, 일부 장식이 있는 의례품이나 명문이 있는 경우도 있어 주목되었다.2
동궁과 월지는 근래에도 주변 건물지를 발굴하였고 일부 지역은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 2016년 11월에는 ‘나’지구 북편 발굴 과정에서 두 점의 금박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99.99% 순도로 제련된 금을 두께 0.04mm로 얇게 펴서 표면에 새와 꽃을 새긴 장식이다. 육안으로 작업이 가능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길 만큼 고도로 정교한 기술력으로 세간의 관심을 끌었고 동궁과 월지의 중요성을 새삼 일깨우는 발견이었다.3
월지 출토품 중에는 삶의 과정에서 소비된 여러 종류의 공예품을 찾을 수 있고 왕실의 호화로운 생활, 종교에 대한 믿음, 이국취미와 문화 교류, 선호된 장식기법과 문양, 새로운 유행 등 다양한 측면을 살펴볼 수 있다. 그럼에도 논쟁이나 쟁점이 될 정도로 폭넓게 연구가 축적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 어렵다. 현전하는 통일신라 공예품이 많지 않아 서로 비교하고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부족한데, 이는 문헌 기록도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同時代 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더욱 뚜렷하게 차이를 느끼게 된다. 또한 미술사에서는 회화나 조각에 비해 전반적으로 공예사 연구가 많지 않은 상황이며, 통일신라 공예는 범종이나 사리장엄구를 비롯한 佛具 연구에 좀 더 많은 관심이 집중된 경향도 있다.
한편, 동궁과 월지에서 발견된 유물 중에는 출토품으로 현재까지 유일하거나 미술사적 의의가 중요한 공예품이 많지만 완형으로 남지 않아 실체를 파악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다. 일부 유물은 아직도 출토 당시의 명확한 외형이나 수량, 현재의 상태 등 기본적인 정보를 온전하게 파악하기 쉽지 않다. 여러모로 까다로운 환경이지만 미술사, 고고학, 역사, 보존과학 등에서 근래 공예품에 대한 흥미로운 견해와 새로운 시각을 제시하는 연구가 진척되고 있다. 서로 간의 소통이 확대되고 다양한 의견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의미 있는 방향과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느덧 월지 발굴 50여 년이 흐르고 있다. 따라서 ‘경주 동궁과 월지’ 출토 공예품의 주요 논점을 정리하면서 현재의 연구 단계를 점검해 보고자 한다.4 선학의 연구를 바탕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과 아직 논의가 본격화되지 않은 분야를 검토하여, 월지 출토품에 대한 이해와 앞으로의 여정을 고민해 볼 것이다. 월지 출토품은 방대한 수량이므로 금속과 칠공예품 가운데 주요 유물을 선별하였으며, 기물의 용도와 제작, 재료와 장식기법, 문양 등을 통해 통일신라 공예 문화를 再考하고 중요한 일면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Ⅱ. 국내 ‘유일한’ 출토 공예품의 용도와 의미

월지에서 수습된 유물 중에는 국내에서는 ‘유일한’ 혹은 출토품 중에는 ‘유일한’ 사례가 포함되어 주목된다. 이를테면 제3건물지 J16구 바닥층에서 출토된 금동가위는 국내에서 1점만 발견된 유물이다(Fig. 1). 일반적인 용도의 철제가위는 많은 수로 발견되었지만 초심지를 자르는 금동 가위는 지금까지 유일하다.5 비슷한 유물은 중국에서도 출토된 예가 없으며, 일본 正倉院 南倉에도 1점만 전하고 있어 일찍부터 한국과의 영향 관계에 대하여 관심이 높았다(Fig. 2).
평탈 장식이 있는 칠기도 출토지가 명확한 유물로 중요하다(Fig. 3). 『三國史記』 興德王 敎書(834)를 보면 四頭品과 백성에 ‘朱裏平文物’을 규제하는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6 여기에서 평문은 평탈과 유사한 기법으로 볼 수 있다. 또한 禁令의 行間을 읽으면 평탈기법이 사두품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유행한 장식임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통일신라 평탈공예품은 수량이 많지 않으며, 대부분 출토지가 불분명한 傳世品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삼성미술관 리움, 일본 東京國立博物館 등에 전하고 있다.7 또한 평탈은 나무나 금속, 가죽 등 다양한 바탕 재료에 장식하는 기법이며, 특히 청동 거울 뒷면을 장식한 예가 많다. 나무에 평탈은 월지 출토품을 제외하면 東京國立博物館에 소장된 <銀平脫六角木盒>만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는 일제강점기 반출된 小倉武之助 蒐集品이며, 당시 문화재 피해자료에 ‘銀平脫葡萄唐草文龜甲形 小匣 1合 傳경상남도 출토’라고 기재된 유물이다.8 통일신라의 유산으로 추정할 수 있지만 안타깝게도 출토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다. 이러한 정황을 고려하면 출토지가 확실한 월지 유물의 중요성을 상기하게 된다. 실제로 월지 발굴 이후, 우리나라에서도 평탈기법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고 연구의 초석이 마련되었다.
발굴보고서에 <花鳥文 骨片>으로 소개한 251점도 희소한 유물이다.9 동물의 뼈로 만든 장식물로 수량은 많지만 대부분 파편이며,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없어 완형을 추측하기도 쉽지 않다. 표면에는 한 마리 또는 두 마리 새가 꽃가지를 물고 날아가는 모습이 장식되거나 화초문이 표현되었다. 오랜 시간 문양의 특징에 주목하고 용도에 관해서는 쉽게 판단하기 어려웠는데, 근래 목가구인 주자의 장식이라는 흥미로운 견해가 제시되었다.10 또한 적외선 촬영으로 骨片 1점의 뒷면에서 ‘小花釘百八十二銉釘六十’이라는 11자의 묵서를 판독하여 소개하였다.
보고서에 <花鳥文 骨片>의 다음 항목으로 서술한 <草花文 漆板>도 드문 예로 관심을 끈다. 漆板은 半破된 부분만 남았고 용도는 未詳으로 기록하였으며, 전시에 소개된 바 없고 화질 좋은 도판도 거의 없다. 기물의 전체 표면은 옻칠하였다. 앞면은 화려하게 문양을 장식하고 뒷면은 無文이다. 앞면 중심에는 새가 자리하고 그 주변은 이중으로 연주문을 둘렀으며, 다음 바깥에는 화문이 에워싸고 있다(Fig. 4). 이러한 문양의 구성과 배치는 당과 통일신라의 전형적인 특징을 반영한 모습이다.11
漆板은 전나무 판재에 흑칠하고 丹彩와 黃彩로 무늬를 그린 密陀繪로 추정하였는데,12 이는 일산화납인 밀타승을 들기름이나 오동기름과 혼합하여 끓인 다음 식혀서 여과한 밀타유를 안료의 매제로 사용하는 유채를 말한다.13 납을 300도의 열로 태워서 얻는 일산화납(PbO)으로 황색을 만들고 보다 높은 480도로 처리하면 사산화납(PB304, 연단)인 적색 안료를 얻을 수 있다. 밀타회 칠기 유물은 현재 보고된 예가 없으며, 관련된 내용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다면 새로운 논의로 이어갈 수 있는 자료가 된다. 한편 발굴 초기에는 漆板의 장식을 평탈로 보는 견해도 있었다. 칠판의 문양 구성과 표현은 평탈 기물에도 많이 나타나는 특징이며, 일본 正倉院 소장품 중에도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전한다.14
월지 출토품의 위상이 강조되는 ‘유일한’ 자료 가운데, 목칠과 금속공예 분야에서 두 종류의 유물을 선택하여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공예품의 용도에 대해서 검토하고 이를 바탕으로 유물의 지니는 시대적 의미와 문화를 파악하고자 한다.

1. 漆花形裝飾과 竹形裝飾

월지에서 출토된 칠기는 주로 갯벌과 바닥에서 수습되었고 완형에 가까운 형태는 33점, 파편은 100여 점으로 조사하였으며, 饌盒 모양의 그릇, 盞이나 鉢, 小壺, 木梳, 용도가 불분명한 漆花形裝飾과 竹形裝飾 등으로 분류하였다.15 용도 未詳으로 기술한 두 종류의 칠기장식은 南岸 護岸石築 갯벌층에서 瓦塼과 木製欄杆 등과 함께 출토되었고 흑색 옻칠 위에 문양이 부착된 것으로 인식하였다.
먼저 漆花形裝飾은 발굴 당시 보고서에는 牛角形 부재로 불렀으며(Fig. 5), 꽃잎이 중첩된 모양의 화판으로 구성되고 표면에는 은평탈 장식이 있다. 은이 변색되고 떨어진 부분이 많아서 문양을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나비와 초화문, 운문 등이 간략하게 표현되었다. 기존의 자료에는 모두 16점으로 소개되었지만 실제로는 모두 24점이 현전하며, 화판의 모양은 같고 크기만 다른 형태로 세 종류로 구분된다. 그렇지만 실제로 모두 전시되거나 사진 자료가 공개된 바는 없으며, 일반적으로 대형 화판 8개를 모아놓은 모습인 연꽃 봉오리와 같은 형상으로 볼 수 있다(Fig. 3). 지금까지 유물의 용도를 특정하기 어려워, ‘꽃장식칠기’, ‘花形平脫漆器’, ‘花形裝飾漆器’, ‘黑漆銀平脫花蝶文花形裝飾’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렀다. 또한 佛壇과 같은 특별한 부분에 장식했을 平脫部材로 보거나 의식구의 일부로 소개한 논문이 있으며,16 이에 대해서 필자는 불감일 가능성을 제시한 바 있다.17
화판형 장식은 두께 1cm 정도로 형태는 약간 구부러진 곡면이며, 모두 연결하면 중앙에 반원형의 공간이 만들어지는 구조를 가진다. 화판 끝의 부분 한쪽 면은 옻칠하지 않았고 좌우로 각지게 홈을 파 놓았다. 또한 측면에 못이 박혔다는 발굴 당시의 기록을 볼 때, 원래는 서로 연결되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본다면 화판형 장식의 원형은 연꽃 모양의 불감으로 추정된다.
시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漆花形裝飾을 중국 雲南의 大理國 崇聖寺 三塔 출토 <蓮花形木製佛龕>과 비교해 볼 수 있다(Fig. 6).18 전체가 연화형이고 꽃잎이 중첩된 모습으로 표현된 부분이 월지 출토품과 상당히 유사하다. 崇聖寺 불감처럼 월지 출토품도 대좌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 위에 개폐형으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또한 비슷한 구조를 가진 개인 소장품도 전하는데, 우리나라 금동여래좌상 봉안의 신례로 언급한 불감이다.19 역시 8개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었으며, 불감을 열면 내부의 불상이 등장하고 닫으면 연꽃 봉오리 형태를 지닌다. 유물의 재료는 다르지만 월지 출토품의 형태와 비슷하다. 개인소장 불감은 불상의 양식에 근거하여 고려의 유산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臺北 國立故宮博物院에서도 비슷한 유형을 찾아볼 수 있다. <青銅鎏金坐佛蓮花壇城>으로 전시된 유물은 금속으로 만든 연화형 불감 속에 일곱 부처를 모시고 있다(Fig. 7). 받침대를 두고 꽃잎에 경첩을 달아 개폐형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연화를 이중으로 배치하여 좀 더 입체적인 외형을 완성하였다. 기본적인 외형과 구조, 꽃잎의 배치 등에서 월지 출토품과의 연관성을 보게 된다.
비록 월지 출토품과 비교할 수 있는 同時代 유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았지만 불감의 외형에서 연결되는 지점은 분명하게 파악된다. 연꽃을 불교 미술품의 모티브로 활용한 것은 자연스럽고 꽃송이를 펼치듯 극적 효과를 연출하는 불감의 유형이 제작되기 시작한 이후에는 여러 지역과 시대에서 오래도록 선호되었을 것이다. 또한 佛龕을 뜻하는 명문을 가진 칠기편이 동반 출토된 점도 개연성을 높여준다.20 이후, 佛龕 현판과 칠기 蓮峯 장식품, 2점의 소형 치미의 규격과 명문, 제작기법을 분석하여 전체를 불감에 쓰였던 유물로 추정한 연구도 발표되어, 월지 출토품의 용도에 관하여 추가적인 단서를 제공하였다.21 또한 월지 출토 불상의 봉안 양상을 살펴보면서, 불감의 조성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하였다.22 따라서 이제 漆花形裝飾을 불감으로 명명하고 통일신라 불감 연구와 불교 공예품에 장식된 평탈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논의로 확장해야 한다.
다른 한 종류는 대나무를 잘라놓은 듯한 형태로 銀平脫竹形裝飾으로 보고되었고 지금까지 8점 수습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실제로는 파편을 포함하여 다량으로 출토되었고 길이도 여러 종류로 확인되며, 완전한 모습의 형태는 알 수 없다. 초기 보고서를 통해 기물의 한쪽 끝부분을 일정한 공간으로 구획하고 위아래에는 연주문이 있으며, 내부에 창을 만들고 그 안에 꽃이나 기물과 같은 문양을 표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재료는 부드러운 피나무로 알려졌고 두께가 얇아서 하중을 받는 용도로 이용하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추측만 가능했다. 때문에 기존에는 한쪽 부분만 일정하게 장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문양이 있는 쪽이 서로 연결된 물품일 가능성을 제시하였고 기물의 형태가 竹管처럼 보여 피리의 일종인 簫와 유사한 형태라고 추측하였다.23
소는 排簫로도 부르고 삼국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사용하였던 악기이다. 중국은 戰國時代부터 簫에 옻칠한 예가 있고 正倉院 소장품 중에도 평탈기법이 장식된 피리 종류가 여러 점 남아 있어,24 銀平脫竹形裝飾의 용도를 고려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다양한 排簫의 管數 중에는 8管 악기도 있고 월지 출토품이 8점이라고 알려졌기 때문에 신빙성을 높여주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출토품의 명확한 수량과 상세한 특징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나온 부정확한 가설로, 여러 측면에서 연구의 문제점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銀平脫竹形裝飾의 용도에 대해서는 앞으로 고민이 필요하다. 다만 평탈 장식의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하고 연주문으로 공간을 구획하거나 꽃잎의 끝을 뾰족하게 마무리한 세부 표현은 문양 연구에서 주목할 특징이라는 점은 강조할 수 있는 부분이다.

2. 금동초심지가위와 촛대

금동가위는 제3건물지 J16구에서 남으로 10m 지점의 바닥층에서 출토되었고 건물이 내려앉은 자리로 추정된다.25 가위는 두 개의 동판을 오려 교차한 후 굵은 못으로 고정하였고 날의 끝부분은 반원형 금동판을 붙였다. 날 부분은 닳아 실제 사용했던 흔적을 볼 수 있다. 손잡이는 마치 덩굴무늬처럼 굴곡진 형태로 사용하기 편하게 끝부분이 안쪽으로 말려든 모양으로 만들었다. 앞면에는 당초문을 선각하였고 바탕에는 어자문을 장식했으며, 뒷면에는 문양이 없다. 가위의 표면은 산화되었고 오랜 먼지가 쌓여 전체적으로 검은색 빛이 감돌고 부분적으로 도금이 남았으며, 희미하지만 청색을 칠한 듯한 흔적이 관찰된다. 푸른색은 당초문에 진하게 남아, 마치 문양을 돋보이게 하는 의도가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또한 발굴 보고서와 보물 지정조사에서도 문양 내부에 청색 안료의 흔적이 보인다는 견해를 밝혔다. 그렇지만 도금된 상태에서 안료를 칠한 예를 찾아보기 어렵고 부식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앞으로 과학적인 분석을 통해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금동가위는 일본 正倉院 南倉에 소장된 가위와 비교할 수 있는 자료로 유명하다. 正倉院 소장품은 일찍부터 독특한 외형으로 관심을 끌었지만 월지 출토품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특별한 용도를 파악하지 못했다. 월지의 가위에 반원형 금동판이 달린 것과 마찬가지로, 正倉院 소장품에서 떨어져 나간 금속구가 추가로 발견되면서 심지절단용 가위로 확인된 것이다.26 두 가위는 두께 0.2cm 정도의 동판으로 만들었고 유려하게 구불거리는 손잡이와 날 부분이 모두 동일하다. 다만 일본의 가위는 장식이 없고 월지 출토품은 전면에 문양을 새겨 넣어, 세부 표현에는 구분되는 특징이 나타나고 있어 두 유물에 대해서는 다양한 측면에서 검토된 바 있다.27
특히 금동가위가 초심지를 자르는 용도라는 점에서 초와 촛대를 함께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초를 태울 때는 일정시간이 지나면 심지를 다듬어 끝부분의 재를 없애야 한다. 심지는 보통 삼베와 같은 직물로 만들어, 연소된 끝부분을 정리하지 않으면 불꽃이 작아지거나 불규칙해지고 그을음이 생길 수 있다. 이는 등잔에 기름을 넣고 심지로 태울 때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가위를 활용하는데, 잘라낸 심지가 다시 촛물에 떨어지는 불편한 상황을 방지하기 위하여 아이디어가 필요했을 것이며, 가위를 자르는 날 부분에 얇은 판을 부착하여 자른 내용물이 빠지지 않게 만들었다. 월지 출토품은 이처럼 기능에 충실한 공예품으로 완성되었고 심지절단용 가위의 형태는 현재까지도 변하지 않고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중국의 기록을 참고하면 통일신라는 밀초를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고,28 당시는 고가였던 초와 호화로운 금동초심지가위에 어울리는 촛대가 삼성미술관 리움에 전한다(Fig. 8). <금동 수정장식 촛대>는 한 쌍으로 외형과 장식이 거의 유사하고 초꽂이와 촛물받이, 중심기둥, 받침대 등으로 구성된다. 촛대에는 48개의 수정이 장식되었고 백색 투명한 색상과 보라색 빛깔이 감도는 자수정이 혼합되어 있다. 또한 촛대의 전면에는 다채로운 장식이 있는데, 주로 선각으로 무늬를 새기고 바탕은 어자문기법으로 시문하였다. 어자문은 끝이 둥근 방울정을 이용해, 바탕을 작은 원문으로 촘촘하게 메워 주문양을 돋보이게 하는 공예기법이다. 월지의 금동가위도 유사하게 문양을 배치하고 장식하였다. 촛대와 가위는 제작기법과 문양으로 볼 때, 모두 통일신라 8세기 유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초와 촛대 그리고 월지와 正倉院의 초심지가위를 종합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買新羅物解」의 내용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752년 6월, 신라 왕자 金泰廉을 필두로 700인에 달하는 거대한 사절단이 일본에 도착하였고,29 신라사절의 물품을 구입하기 위해 일본의 귀족들이 작성하여 담당 관청에 제출한 문서가 「買新羅物解」이다. 여기에는 구매를 원하는 물건의 품목, 수량, 가격 등이 기술되었고 지금까지 30여건의 문서편이 알려져 있다.30 문서 중에는 蜜, 蜜汁, 臘蜜 등이 일곱 차례 등장하여, 신라에서 꿀과 납밀이 수출된 상황을 알 수 있다. 문서의 품목을 정리하는 초기 과정에서 일본의 학자들은 모두 약물로 분류하였고,31 蜜汁은 약재가루를 환약으로 만들 때, 臘蜜은 색료를 고착시키거나 주조할 때 쓰였을 것으로 파악하였다.32 그런데 납밀은 광택을 내거나 염색을 할 때도 사용되며, 초의 원료이기도 하다. 신라에서 꿀과 밀랍을 사용하고 일본에 공급할 정도였다면 밀초를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구입 품목 중에 蜜汁, 臘蜜, 燭臺 등이 포함된 문서가 주목되는데,33 신라의 꿀과 밀랍, 촛대를 함께 수입한 내역을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正倉院에는 奈良時代의 밀랍이 지금까지 보존되어 있다. 벌집을 채취하여 분리한 기름을 둥글고 납작한 원반형으로 만들고 중앙에 구멍을 뚫어 실로 꿰어 놓았다. 20개가 세트로 구성되어, 모두 30묶음이 남아 있다. 이동이 편리한 형태로 보관되었으며, 유통되었던 원래의 상황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근래 밀랍의 성분 조사에서 중앙아시아나 서아시아에 분포하는 서양종이 아닌 동양종 꿀벌이 만든 것으로 밝혀졌는데, 한국의 재래종도 같은 계열이다.34 현존하는 正倉院 소장품의 일부가 「買新羅物解」에 기록된 신라의 밀랍일 수도 있다. 일본에서 수입한 밀랍의 정확한 용도를 파악하기는 어렵지만 촛대와 나란히 주문한 점으로 보아, 초의 재료였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문서에 표기된 燭臺가 <금동 수정장식 촛대>와 관련이 있고 일본의 귀족들이 애호했던 품목이었을 지도 모른다. 正倉院 南倉에 소장된 초심지 가위는 이러한 가정을 더욱 뒷받침하는 유물이다. 따라서 밀초의 재료, 촛대, 초심지 가위 등 일련의 세트화된 공예품을 일본이 신라에서 수입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다. 왕실에서 불을 밝히고 사찰에서 공양구로 쓰였던 새로운 조명 문화와 일본과의 교류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요구되며, 월지 출토품은 이에 대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Ⅲ. 공예 장식기법과 문양의 의의

1. 기물의 성형과 장식

월지에서 출토된 칠기 중에는 표면의 옻칠 층과 바탕 재료가 분리된 채 수습된 경우도 있다. 특히 주칠대접은 기물의 성형 과정을 알 수 있는 자료로 일찍부터 관심을 끌었는데, 바닥에 원형 판을 두고 나무를 얇게 패서 감아올리며 형태를 만들었다(Fig. 9).35 이러한 성형 방식은 기존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며, 다양한 기형으로 응용할 수 있는 진전된 기술이다. 버드나무 가지로 만들면 柳枝成形法으로 부르고 대나무로 짜거나 감아올리면 籃胎漆器라고 하며, 卷胎라는 명칭도 사용한다.
正倉院 北倉에는 은평탈합 4점이 전하는데, 『東大寺獻物帳』 <國家珍寶帳>에 백제 의자왕이 일본의 内太臣에게 선물한 항목과 연관된 유물이다.36 은평탈합 4점은 X선 투시를 통해, 그릇과 뚜껑의 밑면에 얇고 넓은 원형의 판을 대고 측면은 가늘게 자른 나무를 감아서 올려 형태를 만들었다.37 월지 출토품과 제작 방식에서 친연성이 보인다. 또한 北倉에 함께 전하는 <漆胡瓶>의 제작과도 연결된다(Fig. 10).38 호병과 같이 굴곡 있고 복잡한 외형을 제작할 때는 卷胎 기법이 매우 효과적이다.
<漆胡瓶>은 그리스 오이노코에(Oinochoe)에서 유래하였으며, 원형의 긴 몸통에 높은 굽이 있고 내용물을 따르는 주구와 손잡이가 달린 형태로 만든다. 광범위한 지역에서 다양하게 변화하며 유행한 기형이며, 서아시아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쪽으로 전파되었고 중국에서는 호병이라는 명칭으로 분류한다. 동아시아로 전파된 이후, 자기나 칠기로 번안되었고 正倉院 소장품처럼 옻칠 위에 은판으로 장식한 기물도 만들었다.
<칠호병>의 몸체와 받침대, 鳳首形 머리 부분 등의 외형을 나무로 어떻게 제작하였는가에 대해서는 오랜 시간 논란이 있었으며, X선 투시로 기물 전체에 일정하게 횡선이 나타나는 것을 확인하여 나무를 얇고 좁게 다듬어 성형한 것으로 이해하였다.39 특히 높이 41.3cm, 복부 지름 18.9cm의 크기에 760g의 가벼운 무게로 籃胎漆器로 추정하였는데, 투시된 素地 표면의 선이 籃胎와 같은 짜임이 아니라 巻胎로 판단하였다. 아직 나무의 재질은 파악되지 않았지만,40 호병의 성형 방법에 대한 의문은 월지에서 출토된 칠기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월지에서는 巻胎로 만든 칠기와 나무에 은평탈기법이 장식된 유물이 모두 출토되었다. 통일신라도 漆胡瓶과 같은 유물을 제작할 수 있었는가에 대하여 궁금하고 앞으로 관련 유물을 확인할 수 있기를 고대한다.

2. 선호된 재료와 기법

월지에서는 2000여 점의 수정이 발견되었다. 출토 수량으로 볼 때 당시 재료의 선호도를 짐작할 수 있다. 대부분 원래의 장식에서 떨어져 수습되었고 일부는 불상 광배의 장식으로 남아 있다(Fig. 11).41 수정은 광배나 金銅幡과 같은 佛具의 장엄으로 활용되었는데, 이에 대해서는 불교미술에서 필수적인 장엄구로 寶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부처와 진리의 상징물로 고찰한 선행 연구가 있다.42 이후 수정이나 마노, 진주와 같은 보석으로 광배를 장엄한 불상이 추가로 확인되면서, 통일신라시대 유행한 하나의 장식유형으로 검토하였다.43
중국 浙江省 寧波 天封塔의 地宮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남송대 유물과 함께 출토된 통일신라 금동불입상의 광배에는 진주가 장식되었으며,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근래 새로 입수한 소장품 중에는 수정과 마노를 장식한 광배를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지난 1994년에 해인사 大寂光殿 중수 공사 과정에서 수습된 금동불상의 광배에도 수정이 장식되었다. 두광과 신광의 테두리 선을 따라 보석을 배치하고 금속으로 만든 꽃잎 모양의 난집에 알물림 한 후, 리벳으로 광배에 고정한다. 난집의 꽃잎 끝부분을 오므려 보석을 감싸는 방식을 嵌裝이라고 하며, 고대 보석을 장식하는 대표적인 기법이다.
부처의 신성함을 시각화한 광배에 보석으로 빛을 더하는 방식은 상당히 효과적인 수단이다. 그럼에도 이와 같은 불상의 유형은 다른 나라에서는 잘 발견되지 않는다. 월지 출토품을 감안하면, 광배를 꾸미는 재료로 수정을 좋아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색투명한 수정이 불교의 청정함을 나타내면서, 빛나는 보주를 표현하기에도 적절했을 것이다. 또한 앞서 살펴본 통일신라 촛대도 다수의 백수정과 자수정을 감장하여 광채를 강조했는데, 이러한 유형의 촛대도 중국 唐에서는 확인되지 않는 특징이다.
통일신라에서 수정을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었던 이유 중에서는 재료의 원활한 공급을 생각해 볼 수 있다. 『三國遺事』에는 경덕왕이 월명사에게 수정 108개로 만든 염주를 하사하는 내용이 기록되었고 義湘法師가 신장에게 수정염주를 받았다는 신비로운 이야기도 전하며,44 「매신라물해」에도 일본이 신라에서 수입한 수정염주가 확인된다.45 이처럼 수정은 국내에서 생산되는 대표적인 보석으로 일찍부터 비교적 흔하게 사용되었다.
고려 光宗 10년(959)의 기록을 보면, 周에 사신을 파견하면서 자수정과 백수정 ‘二千顆’를 보냈다.46 2천이라는 적지 않은 수량은 국가의 예물로 보낼 수 있는 양질의 수정을 상당량 확보하고 운용했다는 점을 알려준다. 또한 작고 둥근 낱알을 세는 단위인 ‘顆’로 볼 때, 구슬 형태로 가공하여 보낸 것도 짐작할 수 있다. 우수한 재료의 조달과 가공 기술을 모두 추측할 수 있는 기록으로 중요하다. 후대의 문헌이지만 丁若鏞이 지은 『牧民心書』에는 각 지역에서 산출되는 대표적인 보물의 목록을 나열하면서, 경주의 수정을 지목하였다.47 경주에서 오래전부터 양질의 수정이 생산되면서 지역의 특산물로 인식한 것이다. 경상도에서 수정이 채굴된 기록은 『朝鮮王朝實錄』에서 수월하게 찾아볼 수 있고 전라도와 강원도 등에서도 다수 발견되었다.48 또한 투명한 보랏빛을 띠는 紫色 수정도 여러 지역에서 채취되었고,49 국내산 자수정은 현재까지도 우수한 품질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수정은 경주의 특산물이었고 양질의 자수정도 생산되었기 때문에, 월지 출토품은 대부분 국내산일 가능성이 크다.
수정 재료와 기법처럼, 동물의 뼈나 뿔을 재료로 발전한 기법도 관심을 끈다. 앞서 언급한 <花鳥文 骨片>도 동물의 뼈로 만들고 표면에 문양을 새기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월지에서는 동물 뼈로 만든 유물이 상당수 발견되었고 골각품에 대한 기록도 비교적 여러 문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먼저 『삼국사기』에는 四頭品 여인이 사용할 수 있는 머리 장식 빗으로 ‘素牙角木’을 언급하였는데,50 이는 장식 없이 상아나 뿔로 만든 빗을 뜻한다. 통일신라는 당의 영향을 받아, 여인의 머리에 빗을 꽂는 장식이 유행하였다. 문헌에 언급된 상아는 코끼리 엄니를 이르지만 포유동물의 어금니를 두루 뜻하기도 하며, 古代는 일각고래, 향유고래, 해마, 하마의 엄니도 상아처럼 공예 재료로 쓰였다.
특히 해마나 고래의 이빨인 魚牙는 金銀과 牛黃, 人參 등과 함께 신라의 특산물로 알려져 있으며, 신라에서 唐에 魚牙를 보냈다는 기록도 다수 전한다.51 고래는 동해에서 얻을 수 있는 어종이며, 특히 향유고래는 대형으로 상당한 크기의 이빨을 가지고 있다. 문헌의 내용을 볼 때, 신라가 동쪽 바다에서 건져 올린 고래의 이빨이나 뼈를 코끼리 상아의 대체품인 魚牙로 사용했을 수 있다. 일본 正倉院에는 상아로 만든 笏과 향유고래의 아래턱뼈로 만든 大魚骨笏이 모두 소장되어 있다(Fig. 12, 13).52 두 종류의 홀은 육안으로 재질을 쉽게 구분하기 어려워, 상아의 대체품인 魚牙의 용례를 증명해준다. 향유고래의 뼈로 만든 홀은 唐代 유물로는 알려진 바 없어서, 통일신라와 관련된 기물로 추정할 수 있다. 「買新羅物解」에는 신라의 상아홀을 구입한 내역도 확인되어,53 韓日의 의례품 교류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홀은 관리가 드는 의례 물품으로 신분에 따라 각각 다른 재질로 만들며, 신라는 六頭品의 지위인 級飡까지 상아홀을 사용할 수 있었다.
「買新羅物解」에는 상아홀만 아니라 여러 종류의 상아제 공예품이 기재되어 있다.54 내용을 보면 상아제 빗과 비녀, 장식이 추가된 장신구, 원재료를 1차 가공한 상아 등이 확인된다. 여기에서 특히 ‘牙鏤’라는 표현이 주목되는데, 이는 상아에 장식기법이 더해진 것으로 연구된 바 있다.55 즉 신라의 문헌에는 ‘牙鏤’와 함께 ‘金鏤’와 ‘銀鏤’도 기록되어, 재료와 기법으로 구성된 용어로 판단된다. 唐의 문헌에 ‘牙鏤’는 찾기 어렵지만 ‘鏤牙’라는 기록은 확인되는데, 황실의 珍寶를 담당하는 中尙署의 관리가 해마다 2월 2일에 호화롭게 장식한 象牙尺을 황제에게 헌상한다는 부분이다.56 따라서 ‘牙鏤’와 ‘鏤牙’는 같은 의미였으며, 황실에 진상할 만큼 아름다운 장식을 갖춘 상아제 기물이다.
『唐六典』에 기록된 鏤牙尺의 모습은 正倉院 소장품으로 추측할 수 있다(Fig. 14).57 상아를 붉은색이나 녹색으로 물들여, 표면을 새겨서 문양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상아는 유기물이기 때문에 따뜻하게 만들어 표면을 염색할 수 있고 긁어내면 원래의 색이 드러난다. 바탕과 표면의 색상 대비 효과가 있고 긁어낸 면을 채색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기법을 일본에서는 ‘撥鏤’라고 한다. 문헌 기록과 유물을 통해, 신라의 ‘牙鏤’는 唐의 ‘鏤牙’와 같고 일본의 ‘撥鏤’와 같은 계통의 장식기법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월지 출토품과 기록을 연결하면, 신라는 동물의 뼈와 뿔을 재료로 선호하였고 그에 따라 장식기법도 상당히 발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花鳥文 骨片>의 재료와 문양을 표현한 기법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논의하면서(Fig. 15), ‘牙鏤’와의 관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또한 주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월지 출토품과 중국이나 일본의 비교 연구도 더욱 본격화되어야 할 것이다.

3. 함화조문과 보상화문

월지 출토품은 통일신라의 문양을 연구하는 데에도 유용한 자료가 된다. 출토품 중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와전류에 다종다양한 문양이 나타나고 금속이나 칠기, 骨片 등 여러 유물에서도 당시 유행이 반영된 장식을 찾을 수 있다. 고분이나 사찰과 달리 왕실의 일상에서 선호된 문양이라는 점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또한 통일신라는 정치, 종교, 사회, 문화 전반에서 동아시아적 가치를 공유하고 대외 교섭이 활발했던 시기이므로, 문양은 다양한 지역과의 교류와 전파, 상징의 변화 등을 고찰할 수 있는 주제가 된다.
여러 종류의 문양 가운데 함화조문과 보상화문을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두 문양은 중국 唐과 통일신라, 일본 奈良時代를 연결할 수 있는 대표적인 장식으로, 8세기 동아시아의 유행을 엿볼 수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일찍부터 일본 학자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즉 明治부터 昭和에 걸치는 시기를 奈良時代와 병치하려는 의도를 반영한 것이다. 奈良時代를 唐의 발전된 문화를 의욕적으로 받아들여 나름의 고유한 문화로 발전시켰던 계기로 인식하면서, 근대 일본이 서양의 문화를 수입하여 아시아의 맹주로 성장한다는 맥락과 서로 이어진다고 주장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문양의 기원에 대하여 고찰하면서, 서아시아에서 중앙아시아를 거쳐 동쪽인 중국과 일본으로 전파되는 실크로드 문화에 의미를 크게 부여한다.58 중국 唐에 영향받아 동서로 연결되는 奈良時代 문양의 특징을 규명하는데 중심을 두었기 때문에, 통일신라의 정세와 시대적 역할은 외면하거나 소략하게 언급하는데 머물렀다. 이는 일본의 연구 경향에 가장 큰 원인이 있지만 국내 미술사 연구가 상대적으로 늦게 진전된 부분과 통일신라 공예품의 출토 상황이나 전세 유물의 현황과 무관하지는 않다.
국내에서도 서역 문물의 유입이나 당과 밀접했던 교류와 관련해서 함조문이나 보상화문은 중요한 관심의 대상이었다.59 그렇지만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되는 데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고 그 과정에서 월지 출토품의 역할이 크게 작용하였다. 우리나라에서 함조문과 보상화문에 대한 시선은 일본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면서 비로소 본격화되었고,60 통일신라 금속과 칠기의 문양에 대하여 전체적인 논의가 이루어졌다.61 경주의 건물 유적과 사찰터에서 발견된 수막새나 암막새를 비롯한 와전의 문양을 조명하는 부분에서도 성과가 있었다.62 그리고 삼국과 통일신라의 함조문과 보상화문을 중심으로 문양의 기원과 전파, 상징 의미의 변화를 검토한 논문도 발표되었다.63
월지에서 수습된 암막새와 수막새 중에는 새가 꽃가지나 수대를 물고 나타나는 함조문이 다양하게 등장한다(Fig. 16, 17). 꽃가지를 물고 날아가는 모습이나 두 마리 새가 사이좋게 함께 물고 있는 표현도 있다. 감은사지를 비롯한 다른 유적의 출토품을 더하면, 새의 종류와 물고 있는 장식은 더욱 다양하다. 앵무가 화려한 장식을 물고 있거나 꼬리가 긴 새가 포도송이를 물고 있는 모습도 연출되었다. 이는 삼국시대 유물과 비교하면 더욱 특징이 뚜렷한데, 무령왕비의 두침이나 금동대향로, 고구려 고분벽화의 함조문은 벼슬과 꼬리가 강조된 상서로운 새의 모습이고 주로 연화화생과 같은 불교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에 비해 통일신라는 새의 종류와 자세, 표현 등이 다채롭고 중국 당도 비슷하였다. 때로는 한 쌍의 원앙이 목을 두르고 동심결을 물고 있는 특별한 함조문이 인기를 끌었는데, 이는 부부나 연인의 금슬을 상징하는 무늬였기 때문이다(Fig. 18).
이처럼 당과 통일신라 이전 시대에는 함조문이 주로 고분미술이나 불교미술품에 표현되어, 재생, 승선, 또는 연화화생과 같은 종교적 의미를 담고 있었으며, 지역을 거슬러 사산조페르시아의 함조문은 왕권과 위엄, 그리고 신성한 종교적 상징을 지니고 있었다. 이에 비해 당과 통일신라가 되면 함조문이 금은기, 동경, 직물, 건축 등 다양한 미술 분야의 장식으로 채용되어, 고분이나 불교미술의 장식과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그에 따라 문양이 지니는 상징도 장수, 부귀, 부부의 금슬이나 남녀의 애정 등 보다 보편적인 길상 의미로 확대되었다. 특히 통일신라는 막새에도 함조문이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특징으로 건축 장식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사용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러한 상황을 월지 출토품이 분명하게 확인해 준다.
調露 2年(680)의 명문 유물을 비롯한 월지 출토 보상화문전은 아름다운 건축 부재의 전형으로 유명하다(Fig. 19). 팔메트 잎 반쪽을 오므린 도안과 중첩된 잎의 표현, 꽃잎 끝이 뾰족하게 마무리된 부분 등이 주요 특징인데, 이와 같은 문양은 월지에서 출토된 수막새에서도 상당수 확인할 수 있다(Fig. 20). 수막새 문양은 좀 더 간략하게 표현했지만 팔메트를 반쪽으로 나눈 모양의 잎을 두 개 모아 하트로 만든 기본 구성은 비슷하다.
팔메트를 반으로 잘라 꽃잎을 만들거나 하트 모양으로 도안한 예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유물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다. 지난 1931년에 발굴된 이란 담간의 테페 히사르(Tepe Hissar)에서는 카바드 1세(Kawad I, 재위 488-531)의 사산조 궁궐터가 확인되었고 남은 두 개의 기둥 표면에서 장식 문양이 발견되었다.64 기둥에 표현은 문양은 반으로 접은 두 개의 팔메트 잎을 서로 대칭하여 오므린 모습이다. 특히 팔메트 잎이 마주하는 끝부분은 뾰족하게 마무리하는 특징을 가진다.
이러한 표현은 중국 당에 전파되었고 8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애호되는 꽃문양 가운데 하나로 유행하였다. 보상화는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꽃에서 비롯되어 다양한 요소를 결합할 수 있었으며, 상서로운 의미를 지닌 대표적인 식물 도안으로 자리하게 된다. 불교의 寶華와 연결된 상징을 지니고 있어, 불교 미술품에 나타나지만 점차 보편적인 길상문으로 일상의 기물을 장식하는데 채택된다. 이러한 유행은 통일신라에도 유입되어, 성덕대왕 신종의 상대와 하대, 음통과 당좌에도 보상화문이 나타나고 불교 공예품이 아닌 일상의 문양으로도 활용되면서 월지 출토품을 비롯하여 촛대나 거울 등의 공예품에도 장식된다.
앞서 살펴본 <花鳥文 骨片>에서도 함화조문을 볼 수 있고 <草花文 漆板>도 비슷한 계통의 문양을 장식하였다(Fig. 4, 15). 또한 칠판의 장식과 마찬가지로 함조문이나 보상화문이 나타나는 유물에는 공간을 구획하기 위하여 연주문이 자주 등장한다. 구슬과 같은 원문을 연결하여 공간을 나누는 방식은 당시 크게 유행하였으며, 앞의 두 문양과 함께 동서문화의 교류에서 비슷한 궤적을 보여준다.65

Ⅳ. 맺음말: 월지 출토품과 통일신라 공예 문화

통일신라의 공예를 이해하는 과정에서 경주 월지 출토품이 가지는 위상은 특별하다. 월지 유물 중에는 국내에서는 ‘유일한’ 혹은 출토품 중에는 ‘유일한’ 사례가 다수 포함되며, 왕실의 일상에서 종교 생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공예품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부 유물은 완형으로 수습되지 않아 실체를 파악하기 어렵고 발견 당시의 외형이나 수량, 현재의 상태 등을 뚜렷하게 알 수 없는 공예품도 여전히 남아 있다. 따라서 1975년 발굴조사를 시작하고 어느덧 50여 년의 시간이 흐른 오늘날의 연구 현황과 주요 논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먼저 월지에서 발견된 금속과 옻칠 공예품 가운데 대표적인 유물을 선별하여, 용도와 문화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또한 공예사 연구에서 주요하게 다루는 기물의 성형과 장식기법, 재료의 특징과 산출지, 문양 연구의 의의 등에 관해서도 연구의 현황과 경향을 소개하였다. 월지 출토품의 방대한 수량과 중요도에 비하면 소략한 내용이지만 나름의 의미를 찾으면서 앞으로의 연구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하였다.
월지 출토품으로만 확인되는 특정 기형과 공예기법에 주목하였고 경주에서 산출되는 수정이나 각종 골각류의 활용과 제작, 장식 기술을 검토하였다. 이는 통일신라 공예가 각별한 위상을 지니고 있었음을 확인해 주었다. <漆花形裝飾>은 불감이라는 용도를 명확하게 하였고 기능에 충실한 <금동 초심지 가위>는 새로운 조명 문화를 엿볼 수 있는 단서로 제시하였다. 나아가 밀초와 촛대를 연결하면 일본과의 다각적인 교류 관계를 밝힐 수 있는 자료로 의미를 더하게 된다.
완전한 모습은 아니지만 <竹形裝飾>, <花鳥文 骨片>, <草花文 漆板> 등도 용도와 제작기법, 문양 등에 관한 연구가 진전된다면, 통일신라 공예의 다른 면모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함조문과 보상화문, 연주문 등의 다양한 모습을 간직한 월지 출토품은 중국 唐과 통일신라, 일본 奈良時代의 공통된 유행을 증명해 주며, 우리나라 문양사 연구의 寶庫로 평가할 수 있다.
이번 논고는 기존의 연구 자료와 보고서, 전시 등을 중심으로 고찰하였으며, 모든 중요 유물을 직접 조사하지 못한 한계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아직 단정하기 어려운 혹은 오류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완전하게 알지 못한다는 매우 현실적인 결론은 아쉬운 부분이며, 앞으로 많은 조언과 보완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우리가 어디까지 알고 무엇을 모르는지, 어떤 부분을 더욱 주목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명확하게 인식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에 월지 출토품의 주요 논점을 ‘再考’하는 의의를 두고자 한다.

Notes

1) 월지 발굴은 1975년 3월 25일부터 1976년 3월 25일까지 1년간 진행하였고 주변 건물지는 1976년 5월 10일에서 12월 30일까지 발굴 조사하였다. 출토 유물은 완형 15,000점, 파편 18,000점으로 약 33,000점이며, 금속제 완형 843점, 목재 완형 1,132점, 용기류 완형 1,748점, 와전류 완형 5,798점 등으로 파악하였다. 文化財管理局, 『雁鴨池 發掘調査報告書』 (1978);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못 속에서 찾은 신라, 45년 전 안압지 발굴조사 이야기』 (2020), pp. 84-85 참고.

2) 월지 출토품을 중심으로 통일신라 금속제 기명을 정리한 연구는 이난영, 「統一新羅의 銅製器皿에 대하여: 雁鴨池 出土品을 중심으로」, 『미술자료』 32 (국립중앙박물관, 1983), pp.1-18; 통일신라 청동 숟가락을 고찰하면서 월지 출토품을 검토한 연구는 정의도, 「청동숟가락의 등장과 확산」, 『석당논총』 42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08), pp. 271-380; 「통일신라시대 식도구 연구」, 『석당논총』 73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9), pp. 287-340; 월지 출토품 중에 평탈 장식이 있는 칠기를 주목한 연구는 이종석, 「한국 고대 칠기 연구: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를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84); 同著, 「統一新羅期의 平脫遺物 數例」, 『蕉雨 黃壽永博士 古稀紀念 美術史學論叢』 (通文館, 1988), pp. 607-623; 신숙, 「통일신라 평탈공예 연구」, 『미술사학연구』 242·243 (한국미술사학회, 2004), pp. 29-61; 명문이 있는 유물에 대한 검토는 고경희, 「新羅 月池 出土 在銘遺物에 對한 銘文 硏究」 동아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94)이 있으며, 유물의 명문에 대해서는 추가 발견과 연구가 지속되고 있다.

3)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동궁과 월지 출토 8세기 통일신라 금박유물 공개」 (2022.6.16), 문화재청 보도자료 참고.

4) 本稿는 국립경주박물관이 2022년 12월 16일 <‘경주 동궁과 월지’ 연구의 현단계와 쟁점>을 주제로 개최한 신라학 학술대회의 발표를 토대로 내용을 보완하여 작성하였다. 당시 토론을 통해 여러 견해를 제시해 주신 선생님들과 박물관 관계자분들께 지면을 빌어 감사함을 밝힌다.

5) 文化財管理局, 앞의 보고서 (1978), pp. 395-399.

6) 金富軾, 『三國史記』 卷第33 雜志 第2, 器用, “四頭品至百姓. 禁金·銀·鍮石·朱裏平文物, 又禁毬 ·㲮 ·虎皮大·唐毯等.”

7) 국립중앙박물관에 3점의 평탈거울이 소장되었으며, 삼성미술관 리움 金銀平脫貝盒 1점, 東京國立博物館 銀平脫六角木盒 1점 등이 있다.

8) 황수영, 『日帝期文化財被害資料』, 한국미술사학회 (1973), p. 27의 3217번 참고.

9) 文化財管理局, 앞의 보고서(1978), p. 353.

10) 전효수, 「월지 출토 화조문뼈장식의 용도 추정」, 『동원학술논문집』 18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7), pp. 103-117.

11) 신숙, 「統一新羅 平脫工藝 硏究」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2), pp. 78-79.

12) 김원룡, 이종석, 『木漆工藝』 韓國의 美 24 (中央日報社, 1981), p. 208 도판 설명 참고.

13) 吳勝杰, 「盛唐遺珍-密陀繪工藝初探」, 『東方收藏』 (2021. 21), pp. 55-57.

14) 奈良国立博物館, 『正倉院展』 (2014), pp. 92-94.

15) 文化財管理局, 앞의 보고서 (1978), p. 246.

16) 이종석, 앞의 논문(1984), p. 63; 안덕춘, 「韓國 木漆工藝의 硏究」, 『論文集』 17 (전주대학교, 1988), p. 44.

17) 신숙, 앞의 논문 (2004), pp. 46-48.

18) 姜懷英, 邱宣充, 『大理崇聖寺三塔』 (文物出版社, 1998), pp. 73-74 ; 李昆聲, 『云南考古學論集』 (云南人民出版社, 1998), pp. 357-358; 雲南省博物館(www.ynmuseum.org/detail/1430.html) 참고.

19) 鄭永鎬, 「金銅仰蓮座內 金銅如來坐像-金銅如來坐像 奉安의 新例」, 『文化史學』 19 (한국문화사학회, 2003), pp. 255-259.

20) 칠기편의 명문 판독은 육안으로 쉽지 않아, 그간 여러 의견이 제시되었다. 1975년 발굴 당시에는 ‘壬⼦龕第⼀’로 파악하였고(야장 TR 16 기록; 文化財管理局, 앞의 보고서 (1978), p.16), 일부 연구에서는 음각된 부분이 명확하지 않아 ‘◯龕第⼀’로 판단을 유보하였다(고경희, 앞의 논문(1994), p. 55). 이후 2002년 출간된 국립경주박물관 도록에 ‘佛龕第⼀’로 언급되면서(국립경주박물관, 『⽂字로 본 新羅 - 新羅人의 記錄과 筆跡』 (2002), p.97), 다수의 논문에 같은 내용이 소개되었다. 또한 최근에는 ‘王寺龕第⼀’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양은경, 「동궁과 월지 출토 불상의 봉안양상과 신라왕궁 속 불교시설」, 『신라문화』 62 (동국대학교 WISE캠퍼스 신라문화연구소, 2023), pp. 179-180). 어떤 주장이라도 불감과 연관된 칠기 현판이라는 점은 다르지 않다.

21) 김유식, 「한국 고대 치미의 변천과 전각형 주자 발생」, 『한국기와학회 학술대회 발표자료집』 10 (한국기와학회, 2018), pp. 41-66.

22) 양은경, 앞의 논문 (2023), pp. 176-181.

23) 簫는 竹管을 나무틀에 꽂아서 만든 악기로 세로로 부는 피리의 한 종류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구려 고분벽화인 안악 3호분, 덕흥리 고분벽화, 집안 17호분 등에 簫의 모습이 나타나며, 부여 능산리출토 백제금동대향로의 악사 중에도 연주 모습이 등장한다. 또한 백제 멸망 직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충남 연기군 碑巖寺 癸酉銘全氏阿彌陀佛三尊石像에도 소를 부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24) 松本包夫 編, 『正倉院寶物にみる樂舞·遊戱具』 (紫紅社, 1991).

25) 文化財管理局, 앞의 보고서 (1978), pp. 83-84.

26) 鈴木靖民, 「正倉院の新羅文物」, 『古代對外關係史の硏究』 (吉川弘文館, 1985), p. 427.

27) 신숙, 「통일신라 금속공예의 성취와 국제교류: 국보 제174호 <금동 수정장식촛대>」, 『미술사학연구』 290 (한국미술사학회, 2016), pp. 43-66; 양은경, 「고대 한일 해양 네트워크: 정창원 소장 신라 가위」, 『한국상고사학보』 106 (한국 상고사학회, 2019), pp. 81-107.

28) 신숙, 앞의 논문 (2016), pp. 45-47.

29) 『續日本記』 卷第18, “己巳大宰府奏新羅王子韓阿□金泰廉貢調使大使金暄及送王子使金弼言等七百餘人.”

30) 正倉院文書マルチ支援データベース (wwwap.hi.u-tokyo.ac.jp) 참고.

31) 東野治之는 臘蜜을 藥物로, 蜜汁은 기타로 구분하였고 皆川完一은 蜜과 蜜汁을 모두 약물로 분류하였다. 東野治之, 「鳥毛立女屛風下貼文書の硏究-買新羅物解の基礎的考察」, 『史林』 57권 6호 (1974), pp. 16-17; 皆川完一, 「買新羅物解拾遺」, 『正倉院文書硏究』 2 (吉川弘文館, 1994), p. 150 참고.

32) 박남수, 「752년 金泰廉의 對日交易과 「買新羅物解」의 香藥」, 『한국고대사연구』 55 (한국고대사학회, 2009), pp. 376-377.

33) 「買新羅物解」, <…申請應物事>, “牙笏 沈 丁香 … 蜜汁 … 腦蜜 … 燭臺 蘓芳 天平勝寶四年六月廿四日 事業從八位上日置酒持.”

34) 奈良國立博物館, 『正倉院展』 (2017), pp. 26-27.

35) 이종석, 앞의 논문 (1984), p. 61.

36) 신숙, 앞의 논문(2002), pp. 9-11; 同著, 「7세기 백제와 일본 正倉院 소장품」, 『미술사학』 36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8), pp. 175-178.

37) 木村法光, 「正倉院漆工品の內部構造と施工について」, 『正倉院の漆工』(平凡社, 1973), pp. 150-152.

38) 奈良國立博物館, 『正倉院展』 (2016), p. 20-23.

39) 正倉院事務所編, 『正倉院の漆工』 (平凡社, 1975), p. 148; 小口八郎, 『シルクロード: 古美術材料·技法の東西交流』 (日本書籍, 1981), p. 45.

40) 正倉院 北倉 소장 漆胡瓶의 素地 구조와 표면의 옻칠 성분에 대해서는 寺田晁, 「正倉院宝物漆胡瓶の素地造り私考」, 『梅光女学院大学論集』 25 (梅光女学院大学, 1992), pp. 1-12 참고.

41) 국립경주박물관, 경주시, 『경주의 황금문화재』 (2015), pp. 236-255, 364-365.

42) 강우방, 「寶珠의 思想: 雁鴨池出土 寶珠를 中心으로」, 『미술자료』 24 (국립중앙박물관, 1979), pp. 10-22.

43) 신숙, 「한국 고대 보석장식 공예품과 국제교류」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pp. 88-93.

44) 一然, 『三國遺事』 卷第5 感通第7 月明師兜率歌, “王嘉之賜品茶一襲水精念珠百八箇.”; 卷第3 塔像第4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義湘法師…齋戒七日浮座具晨水上龍天八部侍從引入崛內參禮空中出水精念珠一貫給之.”

45) 신숙, 앞의 논문 (2016), pp. 192-200 참고.

46) 『舊五代史』 卷138 外國列傳2 高麗, “周顯德六年, 高麗遣使貢紫白水晶二千顆.”; 『冊府元龜』 卷972 外臣部 朝貢第五, “世宗顯德…六年…十一月高麗複遣使貢銅五萬斤白水精各二千顆.”

47) 丁若鏞, 『牧民心書』 工典 6條 第1條 山林, “大典曰 諸邑寶物產處成籍 藏於工曹 本道本邑看守 所謂寶物者 慶州產水晶…黑山海中產石雄黃之類 是也.”

48) 『朝鮮王朝實錄』 太宗 13卷, 7年(1407) 5月 3日, “得水精石於順興府小白山.”; 太宗 23卷, 12年(1412) 3月 29日, “慶尙道都觀察使安騰進回回沙門都老所採水精三百斤.”; 太宗 27卷, 14年(1414) 6月 20日, “前司正李宥智進水精石及墨炭宥智來自江原慶尙道曰高城順興有水精石.”; 世宗 24卷, 6年(1424) 5月 27日, “慶尙道監司進順興府産出水精石.”; 世宗 27卷, 7年(1425) 2月 18日, “傳旨安東府使府所産水精石多採以進禁人私採.”; 世祖 34卷, 10年 (1464) 8月 2日, “江原道觀察使進高城杆城等邑所出水精石.”; 燕山 15卷, 2年(1496) 6月 9日, “命馳書于慶尙全羅江原監司採水晶如此樣者以進.”; 燕山 45卷, 8年(1502) 8月 27日, “江原道産出水晶曾命採進.”

49) 『朝鮮王朝實錄』 世祖 34卷, 10年(1464) 9月 16日, “全羅道觀察使採茂長縣紫色水精石以進命禁人採取.”; 燕山 45卷, 8年(1502) 7月 9日, “下書于全羅道觀察使崔漢源江原道觀察使朴元宗曰無瑕品好白紫水晶採取以進.”; 燕山 45卷, 8年(1502) 7月 18日, “採進紫水晶一塊曰.”

50) 金富軾, 『三國史記』 卷第33 雜志 第2, 色服, “四頭品女…梳用素牙·角·木.”

51) 『唐會要』 卷95, “開元…十二年 興光遣使獻果下馬二匹 牛黃 人參 頭髮 朝霞紬 魚牙 納紬 鏤鷹鈴 海豹皮 金銀等.”; “天寶…七載 遣使獻金銀及六十總布 魚牙 納朝霞紬 牛黃 頭髮 人參.”; “大歷…八年 遣使來朝 並獻金銀牛黃魚牙納朝霞紬等方物.”

52) 일본 正倉院 문서 가운데 『東大寺獻物帳』의 <國家珍寶帳>에는 赤漆欟木厨子에 수납된 품목이 열거되었는데, 그 중에는 牙笏一枚, 通天牙笏一枚, 大魚骨笏一枚 등이 나타난다. 기록에 보이는 세 점은 正倉院 北倉에 현존하며, 그 밖에도 中倉에 木笏과 魚骨笏이 있고 南倉에 木笏이 있어, 모두 6점의 홀이 남아있다. 野尻忠, 「魚骨笏の来歴」, 『鹿園雑集』 9(奈良国立博物館, 2007), pp. 63-74 참고.

53) 각주 32) 참고.

54) 신숙, 앞의 논문 (2016), pp. 192-200 참고.

55) 신숙, 「8세기 「買新羅物解」와 韓日 보석장식 공예품 교류」, 『한국고대사탐구』 39 (한국고대사탐구학회, 2021), pp. 301-305.

56) 『大唐六典』 卷22 上一卷, 少府監, 中尚署, “每年二月二日,進鏤牙尺及木畫紫檀尺”

57) 北澤菜月, 「撥鏤尺をめぐって」, 『正倉院展』 (奈良國立博物館, 2015), pp. 117-120.

58) 伊東忠太, 「奈良模樣の起源に就て(下)」, 『考古學雜誌』 3-6(1913), pp. 308-309; 原田淑人,「統一新羅時代の瓦甎文に就いて」,『東亞古文化硏究』(1940), pp. 341-348; 林良一, 『シルクロ―ド』(美術出版社, 1962); 渡邊素舟, 『東洋文樣史』 (富山房, 1971); 增田精一, 「綬帶をつけた鳥獸意匠の比較-東西文化交流に關連して」, 『東洋學術硏究』 3(東洋哲學硏究所, 1972); 森豊, 『花喰鳥文樣展開』 (六興出版, 1974); 井口喜晴, 「咋鳥文の系譜」, 『Museum』 375(東京国立博物館, 1982), pp. 4-14; 林良一, 『東洋美術の裝飾文樣』 (同朋舍出版, 1992).

59) 김원룡, 「古代韓國과 西域」, 『美術資料』 34 (국립중앙박물관, 1984), pp. 1-6; 이난영, 「統一新羅와 西域」, 『石堂論叢』 20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1994), pp. 165-185.

60) 曺圭和, 「寶相花文樣考」, 『論文集』 17 (국민대학교, 1980), pp. 219-238; 임재영, 「花喰鳥文樣考」, 『한성대학교 논문집』 10 (1986), pp. 543-563.

61) 채해정, 「統一新羅의 金屬 및 漆工藝品 技法과 文樣 硏究」, 『미술사연구』 15 (미술사연구회, 2001), pp. 53-73.

62) 임영신, 「統一 新羅 時代의 瓦當과 塼에 나타난 寶相花紋의 硏究」 동아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논문(1982); 김민식, 「新羅 寶相華文 수막새의 變遷」 영남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9).

63) 신숙, 「統一新羅와 唐의 銜鳥文研究」, 『미술사연구』 24 (미술사연구회, 2010), pp. 61-85; 同著, 「8세기 동아시아의 유행: 상상의 꽃, 보상화의 이미지와 문양」, 『한국중세고고학』 11(한국중세고고학회, 2022), pp. 73-98.

64) Erich F. Schmidt, “The Sasanian Palace”, The Museum Journal XXIII, no. 4 (December, 1933), pp. 454-470.

65) 坂本和子, 「連珠文の伝播」, 『シルクロード学研究叢書』 4 (シルクロード学研究センター, 2001), pp. 83-96; 前田たつひこ, 「連珠円文を求めて」, 『東西南北: 和光大学総合文化研究所年報』 (2007), pp. 185-198; 장경희, 「隋唐代 聯珠環文錦의 東西交涉」, 『한국공예논총』 10-2 (한국조형디자인학회, 2007), pp. 1-23.

Fig. 1.
<금동초심지가위> Gilt-bronze Wick Trimmer, Unified Silla, L. 25.5cm, T. 0.2cm, Gyeongju National Museum (Courtesy of the Gyeongju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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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백동초심지가위> Nickel Wick Trimmer, L. 22.6cm, T. 0.2cm, Shōsō-in minami kura (Nara Kokuritsu Hakubutsukan, Shōsōinten, 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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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漆花形裝飾> Lacquered Flower-shaped Ornament, Unified Silla, Gyeongju National Museum (Courtesy of the Gyeongju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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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草花文漆板> Lacquered Plaque Decorated with Flowering Plant (draw ing), Unified Silla, Gyeongju National Museum (Draw ing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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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漆花形裝飾> 부분 Detail of Lacquered Flower-shaped Ornament, Unified Silla, Gyeongju National Museum (Courtesy of the Gyeongju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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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蓮花形木製佛龕> Lotus-shaped Wooden Portable Shrine, H. 10.6cm (shrine), Yunnan Provincial Museum (Yunnan Provincial Museum, http://www.ynmuseum.org/detail/143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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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青銅鎏金坐佛蓮花壇城> Seated Buddhas on a Lotus Mandala, 17th-18th century, Qing, W. 25.3cm, H. 11cm,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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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금동수정장식촛대> Gilt-bronze Candlesticks with Inlaid Crystal Ornaments, Unified Silla, H. 36.8cm, D. 21cm (bottom) Leeum Museum of Art (Courtesy of Le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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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朱漆대접> Red-Lacquered Bowl, Silla, H. 4.8cm, Gyeongju National Museum(Courtesy of th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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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漆胡瓶> Persian Style Lacquered Ewer, H. 41. 3 cm, D. 18.9 cm (belly), Shōsō-in kita kura (Shōsō-in, http://www.shosoin.kunaicho.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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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금동광배> Gilt-bronze Mandorla, Unified Silla, H. 15.5 cm, Gyeongju National Museum (Kungnip Kyŏngju pangmulgwan, Kyŏngju ŭi hwangg ŭm munhwajae, 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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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牙笏> Ivory Scepter, L. 39cm, Shōsō-in kita kura (Shōsō-in, http://www.shosoin.kunaicho.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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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大魚骨笏> Taigyoguhu. L. 35.8cm, Shōsō-in kita kura (Shōsō-in, http://www.shosoin.kunaicho.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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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紅牙撥鏤尺> Red-stained Ivory Shaku Ruler with Bachiru Decoration Decoration, Shōsō-in naka kura (Shōsō-in, http://www.shosoin.kunaicho.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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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花鳥文骨片> 부분 Detail of Bone Engraved with Flowers and Birds, Unified Silla, Gyeongju National Museum (Courtesy of the Gyeongju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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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함화조문암막새> Concave Roof-end Tile with a Bird Holding Flower in Its Beak, Unified Silla, W. 15.4cm, H. 5.8cm, Gyeongju National Museum (Kungnip Kyŏngju pangmulgwan, Silla wajŏn, p. 3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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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함화조문 수막새> Convex Roof-end Tile with Birds Holding Flower in the Beaks, Unified Silla, D. 14.5 cm, (Kungnip Kyŏngju pangmulgwan, Silla wajŏn, p. 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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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鍍金貝形銀盒> Gold-plated Shell-shaped Silver Box, Tang, Shaanxi Provincial Institute of Archae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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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보상화문전> Tile with Floral Medallion Design, 32 . 8×32. 8cm, Gyeongju National Museum (Courtesy of the Gyeongju National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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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보상화 문 수막새> Convex Roof-end Tile with Floral Medallion Design, Unified Silla, D. 12.5 cm, Gyeongju National Museum (Kungnip Kyŏngju pangmulgwan, Silla wajŏn, p. 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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