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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7; 2023 > Article
장소를 표상하는 문자와 형상: 정선의 〈천불암도〉와 능파대도*

Abstract

이 글은 정선(鄭敾, 1676-1759)의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에 있는 11폭 중 어디인지 명확지 않은 유일한 장면이던 <천불암도(千佛嵓圖)>가 동해시 능파대(凌波臺)를 그린 것임을 밝힌 것이다. 정선이 조선시대 삼척의 능파대를 그렸고 능파대가 천불암으로도 간주되었던 사실은 정선을 비롯한 명사들의 삼척 방문 흔적이 용추폭포·무릉반석의 각자(刻字), 능파대를 묘사한 시문(詩文)으로 남아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세간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이에 화제(畫題)와 도상(圖像)의 관점에서 재현대상인 지역과 장소를 검토하고 18-19세기 관동명승의 시각적 재현양상 가운데 그 표상과정을 분석함으로써 <천불암도>가 능파대도의 일환임을 확인해 정선 회화는 물론 조선 후기 화단에 대한 이해를 심화, 확장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우선, 기존 연구에 언급된 천불암의 위치에 관한 문헌기록의 타당성 여부를 검토하고, 천불암의 후보지로 해금강과 능파대를 택하여 <천불암도>와 비교되는 장소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이어 동해안의 명소를 그린 《관동명승첩》의 9폭 각각의 대상지역을 중심으로 정선을 포함한 18-19세기 한국화가의 관동명승 재현양상을 정리하여 특정 장소가 화제와 도상으로 정착되고 계승, 변형되는 표상과정을 추적하였다. 그런 가운데 정선의 관동명승 형상화에 있어 1710년대 전반에 금화현감, 1730년대 전중반에 삼척부사를 지낸 이병연과의 교류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고, 기회가 될 때마다 명소의 경관을 화본에 기록해 화고를 축적한 정선이 새로운 작품제작에 이를 활용했던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와 같은 화고·화본 개념은 정선이 그린 능파대도의 존재를 유추해내는 기반이 되었다. 정선의 화고에 있던 천불암 내지 능파대를 재현한 화본은 정선 작품을 임모한 권신응의 <능파대도>가 <천불암도>와 유사한 형태와 구도를 취한 점, 그 권신응 그림에 대한 권섭의 시문에 ‘천불’이 언급되고 있는 점, 이윤영이 정선의 영향을 벗어나고자 새로운 <능파대도>를 창안해낸 점을 한꺼번에 설명해주는 단서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1730년대와 1740년대 전반에 정선이 <천불암도> 내지 <능파대도>를 그렸고, 그에 자극받은 권신응이 1744년, 이윤영은 1750년대에 각자 역량껏 <능파대도>를 그렸으며, 1788년과 그 이후에 김홍도 및 추종자가 새로운 <능파대도>를 그렸던 능파대도 전개의 전반적인 흐름이 파악되었다. 지금껏 능파대의 시각적 재현은 김홍도 작품 위주로만 언급되었을 뿐, 정선 작품이나 그것이 후대에 미친 영향은 알려진 바 없었다. 하지만, 이제 정선과 김홍도를 거쳐 이후에도 지속된 실경산수화의 역사에 천불암도와 능파대도가 나란히 자리하고 있고, 그 도상이 바닷가 촛대바위와 해안석림, 송림, 언덕, 점경인물 등이었음이 명확해졌다. 산수화 속 지역과 장소, 시간을 특정함에 있어 문자가 형상보다 가변성이 많다는 점, 연대가 분명한 형상 간의 형태적 유사성이 문자보다 더 명확한 기록과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 그럼에도 그러한 특정화 작업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곤 하는 것이 대개 문자라는 점에 유의해 실경산수화의 화제와 도상 및 작업맥락의 역사성과 실제를 면밀히 이론화해야 할 것이다.

Abstract

This paper reveals the location depicted in Picture of the Thousand Buddhas Rocks (千佛嵓圖, ‘Ch’ŏnburamdo’), the last unidentified image in Album of Famous Sights of East Kangwŏn Region (關東名勝帖, ‘Kwandong Myŭngsŭng ch’ŏp) by famous Korean painter Chŏng Sŏn (鄭敾, 1676-1759), and identifies the subject of the painting as the Terrace of Splendid Waves (凌波臺, ‘Nŭngp’adae’) in present-day Tonghae City. The location of the painting’s subject can be derived from the evidence of Chŏng Sŏn and other well-known figures’ visitation to the scenic spots in the vicinity of Samch’ŏk during the Chosŏn Dynasty. Chŏng Sŏn’s painting of Nŭngp’adae as Ch’ŏnburamdo and the evidence of his visitation, including two rock epigraphs (one on the left side of Yongch’u Waterfall, the other beside a flat boulder known as “Murŭngpansŏk”), as well as the large quantities of poetry and prose detailing and praising the beauty of ‘Nŭngp’adae’, were largely unknown until now. The aim of this paper is to examine from iconographic and painting subject perspectives the region and location depicted in Ch’ŏnburamdo, and to analyze the process of representation in 18th-19th century visuals in regard to the famous sights of the East Kangwŏn Region, thus confirming the location of Ch’ŏnburamdo as Nŭngp’adae and further deepening the understanding of Chŏng Sŏn and other late Chosŏn painters.
First, a literature review inspecting the validity of Ch’ŏnburam’s location in the existing research will be conducted, through which two potential candidates for the location of Ch’ŏnburam - Haegŭmgang and Nŭngp’adae - will be examined in terms of their place specific characteristics vis-a-vis Ch’ŏnburamdo. Next, the depictions of the scenic sights in the East Kangwŏn region by Chŏng Sŏn and other 18-19th century Korean painters will be discussed with a focus on the famous east coast locations depicted in 9 paintings in Kwandong Myŭngsŭng ch’ŏp. The establishment of these locations as icons and imagery of landscape painting subjects as well as the progressions and changes of these depictions will also be detailed. Also, it can be derived that interactions with Lee Pyŏngyŏn, the magistrate of Kŭmhwa in the early 1710’s and who would later govern the entire Samch’ŭk region in the early and mid-1730’s, were decisive motivations for the representations of East Kangwŏn’s famous locations. It can also be derived that Chŏng Sŏn would record landscape sketches at every available opportunity so that these sketches could be used in the creation of new paintings. These sketches are also the key foundation of the proposition of the existence of Nŭngp’adaedo - a drawing of Nŭngp’adae by Chŏng Sŏn. Lastly, the source painting of Ch’ŏnburam (Nŭngp’adae) in Chŏng Sŏn’s painting sketches explains how Kwŏn Sinŭng’s later imitation painting of Chŏng Sŏn’s work, Nŭngp’adaedo, resembles Ch’ŏnburamdo in both form and structure, why thousand buddhas - the rocks’ namesake - is mentioned in Kwŏn Sŏp’s poetry and prose of the same imitation painting, and how Lee Yunyŏng created a new Nŭngp’adaedo as a way to diverge from Chŏng Sŏn’s influence.
As a result, we can conclude that in the 1730’s and early 1740’s, Chŏng Sŏn painted Ch’ŏnburamdo (Nŭngp’adaedo), which then inspired Kwǒn Sinŭng in 1744 and Lee Yunyŏng in the 1750s to paint their own versions of Nŭngp’adaedo. It can also be concluded that, in 1788 and beyond, Kim Hongto and his followers would paint new versions of Nŭngp’adaedo as a continuation of this artistic flow. Until now, visual recreations of Nŭngp’adae were viewed mainly from the perspective of Kim Hongto’s work and without understanding how Chŏng Sŏn’s work and influence impacted future generations of this piece. But now, Chŏng Sŏn and Kim Hongto’s Ch’ŏnburamdo and Nŭngp’adaedo can be placed side-by-side in the history of true-view landscapes. Additionally, the imagery of these paintings, including the iconic Ch’ottaepawi Rock, rocky coastal cliffs and hills, pine forests, and staffage have now also been clearly identified. Thus, for future identifications of regions, places, and time periods in landscape paintings, this paper calls for specific attention to be paid to how text can be more subject to change than imagery vis-à-vis the conveyance of the characteristics of a region or location in a landscape; how the similarities in imagery between works in a clear chronological era can provide more conducive evidence than a written document or record; and how, despite the aforementioned points, text can still be a decisive force in identifying the real locations of landscapes, such that a more minute discussion of the historical reality of the subject, imagery, and artistic context of landscape paintings can be theorized.

Ⅰ. 머리말

<천불암도(千佛嵓圖)>는 정선(鄭敾, 1676~1759)이 1738년에 그린 《관동명승첩(關東名勝帖)》에 수록된 11폭 중 어디를 그린 것인지가 명확지 않은 유일한 장면이다(Fig. 1). 이것이 동해시 추암동의 능파대(凌波臺)를 그린 것이라는 민원이 제기되자 동해시는 학계의 도움을 구했고,1 이를 계기로 관동명승 재현양상 가운데서 <천불암도>를 살펴본 필자는 천불암이 능파대라는 뜻밖의 결론에 도달했다.2 진경산수화의 대가로서 화성(畫聖)으로 추앙되기도 한 조선화단의 대표자 중 한 사람으로,3 18세기 한국에 새로운 회화를 성행시킨 정선이 삼척의 능파대를 그렸고(Fig. 2, 3, 3-1),4 능파대가 천불암으로 간주되기도 했던 사실은 세상에 처음 소개되는 상당히 큰 이슈이다. 이에 더해 정선을 비롯한 여러 명사들의 방문 흔적이 무릉계곡 용추폭포와 무릉반석의 각자(刻字), 능파대를 기념한 시문 등으로 남아 있는 점도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5 이에 그간의 연구성과를 공유함으로써 정선 회화는 물론 조선 후기 화단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연구방법은 산수화의 재현대상인 지역과 장소를 화제(畫題)와 도상(圖像)의 관점에서 관찰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2003년부터 실경산수화의 재현대상지역을 조사하고 제작맥락을 확인하는 작업을 수행해온 필자에게 이 방식은 정선·김홍도 위주의 작가론·작품론을 넘어 조선화단에 새롭게 접근할 대안이었다.6 이에 관련 연구와 전시를 꾸준히 지켜보았고,7 중국의 도시를 그린 실경산수화로 관심을 확장하는 한편 <동아시아 화제의 집성 및 해제 DB 구축> 사업을 병행하면서 화제로서의 실경을 논할 설명틀을 모색하였다.8 2019년에는 국립춘천박물관의 관동팔경 특별전 <고성 청간정>을 기획, 진행하며 지역의 명소가 화제와 도상으로 정착, 유지, 변형되는 표상과정을 주목했고,9 그것이 변화한 양상 자체를 고찰해 화가나 작품에 관한 의미있는 사실을 도출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10
<천불암도>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화제와 도상의 표상과정을 검토해 재현대상에 접근해보고자 한다. 이때 표상은 “나타내다, 밝히다, 드러내다”라는 의미인 표(表)와 “모양, 그림”을 뜻하는 상(象)이 결합된 단어다. 사전적으로 “추상적이거나 드러나지 아니한 것을 구체적인 형상으로 드러내 나타냄”이란 의미고, 명소 내지 승경처가 가진 기념성과 상징성, 대표성이 문자나 형태, 즉 화제나 도상이 된 점을 주목한 용어다. 영어로 representation에 해당하고 “재현”이라고도 한다. <천불암도>는 기본적으로 천불암이라는 장소가 있고, 그곳을 표상하는 화제와 도상이 결합해 완성되었다. 이 제목과 형태의 기원이 된 대상지역은 어디인가? 정선의 <천불암도>는 무엇을 얼마나 사실적으로 표현한 것이고, 천불암이 능파대로 간주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이 글은 먼저 《관동명승첩》의 일부로서 <천불암도>가 가진 특징을 파악한 뒤, 기왕에 알려진 문헌기록을 확인하고 각종 지도와 사진 등 시각자료와 비교 대조해 천불암의 장소성을 검토해보고자 한다. 이어 《관동명승첩》을 중심으로 조선 후기의 관동명승 재현양상을 정리해 정선의 화고(畫稿)나 화본(畫本), 원본화첩(原本畫帖)의 존재를 드러내고, 이에 기반하여 지금껏 간과된 능파대도의 등장과 <천불암도>와의 연관성을 밝혀보도록 하겠다.

Ⅱ. 〈천불암도〉와 천불암의 장소성 검토

실경산수화는 소재가 된 경관의 장소명 자체를 화제로 삼는 경향이 대세이다. 《관동명승첩》 역시 화폭마다 화면 상단의 좌측이나 우측에 “千佛嵓”, “亭子淵”의 장소명을 쓰고 낙관하였다(Fig. 1, 4). 화첩 내 <시중대도(侍中臺圖)>, <총석정도(叢石亭圖)>, <해산정도(海山亭圖)>, <삼일호도(三日湖圖)>, <청간정도(淸澗亭圖)>, <죽서루도(竹西樓圖)>, <망양정도(望洋亭圖)>, <월송정도(越松亭圖)> 역시 흡곡의 시중대, 통천의 총석정, 고성의 해산정·삼일호, 간성의 청간정, 삼척의 죽서루, 울진의 망양정, 평해의 월송정 등 장소명을 화제 삼았다. ‘관동팔경(關東八景)’에 속한 명소는 6곳이고, 강릉 경포대와 양양 낙산사는 보이지 않는다. 금화의 수태사동구(水泰寺洞口), 평강(현 철원)의 정자연은 금강산 서쪽에 위치해 유람시 오가며 거치는 장소다(Fig. 4). 금강산도 제작관행의 연장선에서 《관동명승첩》을 만든 것으로, 금강산은 빼고 관동명승 재현에 주력한 점이 특징이다. 이 점과 화첩 구성을 고려할 때, 넘실거리는 바닷물결 중에 우뚝 솟은 여러 석주를 그린 <천불암도>는 동해안 명소를 재현한 것이고, 그곳의 이름이 화면 상단 좌측에 쓰인 “千佛嵓”이라 하겠다.
천불암의 위치에 관해서는 5가지 상이한 견해가 병존한다. 첫 번째가 고성의 만물초(萬物草)라고 본 견해고,11 두 번째는 통천의 임도면 내지 옹천 남쪽 골짜기의 옥경동이라는 견해,12 세 번째는 고성과 통천 사이 어딘가에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이상경이라는 견해,13 네 번째는 이상의 설을 소개한 후 흡곡 앞바다의 승도(僧島)일 수 있다고 한 견해(Fig. 5),14 다섯 번째는 이번에 제기된 삼척의 능파대(=추암, 촛대바위)라는 민원(Fig. 6)15 등이다. 이 중 세 번째는 특정한 장소가 아니고, 네 번째는 <천불암도>의 외관이나 석주의 배치와 부합하지 않기에 제외한다(Comparing the upper right section of Fig. 5 with Fig. 1). 이어 다섯 번째인 민원을 후순위로 하면, 고성 외금강 만물초를 꼽은 첫 번째, 통천 옹천의 옥경동을 꼽은 두 번째를 주목케 된다. 그런데, 기록을 읽어보면, 둘 다 사람인양 동물인양 다양한 모양과 형태의 바위군을 묘사한 점이 <천불암도>에 근접하긴 하나 산속의 깊고 큰 골짜기를 전제한 장소인 점에서 바닷가에 줄지어 늘어선 석주가 보이는 그림 속 환경과 잘 들어맞지 않는다. 기실 이들 문헌은 ‘천불동’에 대해 서술한 것이지 ‘천불암’을 언급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금강산 사진엽서에 <외금강 만물상 천불암>이 있지만,16 역시 바닷가 환경이 아니다.
이에 바다의 만물상이 위치한 해금강을 주시하게 된다. 위성지도 웹서비스인 구글어스(Google Earth)에서 “만물상”을 검색하면 외금강 만물상 외에 바다의 만물상이 표시되고, 실제로 해만물상(海萬物相)이 해금강 지역에 있다.17 넓은 의미에서 통천 총석정, 고성 삼일포까지 포괄하는 해금강은 좁게는 삼일포에서 약 4km 동쪽에 있는 남강 하구에서 바다로 펼쳐진 해식지형을 말한다. 금강산 만물상을 바다에서 다시 보는 느낌의 해만물상이 중심인 해금강은 불암(佛岩)· 송도(松島) 같은 섬과 칠성암(七星巖)·입석(立石)·금강문(金剛門) 등 해식애와 해식암초가 장관이다.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20세기 <금강산도> 10폭 병풍에 그려진 해금강 부분을 보면,18 해만물상 앞의 입석과 송도 사이에 “佛岩”이 있고, 해안가 발봉 근처에 “千佛山”이 있다. 따라서 이 해안지형과 불암, 천불산 같은 지명을 <천불암도>와 연결시켜 생각해볼 수 있다.
1724년에 제작된 《영동지도(嶺東地圖)》의 <고성>에는 산지지형 아래 해금강이 바다의 칠성봉과 함께 그려져 있고, 1861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바다의 세모꼴 암봉군으로 해금강과 칠성봉을 보여준다.19 일찍이 정선은 해금강 부근의 명소인 해산정을 사람 형상을 한 칠성봉과 함께 그렸고(Fig. 7), 1747년에는 부처나 신선이 바다 한가운데 출현한 듯한 바위 형상들을 단독 포착한 <칠성암도>를 그렸다(Fig. 8). 1745~46년에 강원도관찰사 김상성(金尙星, 1703~1755)은 관동의 명소를 순력하고서 1746년 즈음 화공에게 십경을 그리도록 해 강릉부사 조적명(趙迪命, 1685~1757), 삼척부사 오수채(吳遂采, 1692~1759) 등 소론계 문인의 시문과 짝지워 《관동십경(關東十境)》 시화첩을 만들었고, 그중 해금강의 기암괴석과 칠성암을 함께 그린 <해산정도>가 있다(Fig. 9).20 이에 해금강에서 <천불암도>의 대상지역을 찾게 되지만, 일제강점기 사진엽서 <해금강의 불암>에 보이는 바위 형태나 바닷가 모습은 <천불암도>의 것과 상당한 차이가 있다.21
다음은 동해시 능파대를 살펴보겠다. 《영동지도》의 <삼척>에는 “凌波臺” 글씨 아래 중첩된 석주들이 그려져 있고, <대동여지도>에서는 허목의 동해척주비와 관련되는 만노봉(萬弩峯)만 표시된 상태다.22 능파대는 옛이름인 추암은 물론 촛대바위라는 별칭으로도 유명한데(Fig. 3, 3-1), 능파대라는 명칭 자체는 세조 치세시(1455~1468) 도체찰사를 지낸 한명회(韓明澮, 1415~1487)가 그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에 합당하도록 붙여준 새 이름이었다. 그가 감탄했던 경관은 “기암괴석이 좌우로 늘어서서 흡사 사람이 눕기도 하고 비스듬히 서있기도하”고 “소나무가 우거져 그 사이로 비치”는 것으로,23 <천불암도>의 중앙에 특징적으로 묘사된 기암괴석, 좌측 하단의 표현에서 암시되는 솔숲과 연결된다(Fig. 1). 1769-71년에 삼척부사를 지낸 이민보(李敏輔, 1720~ 1799)는 1794년에 해암정이 중수된 것을 축하하면서 다음과 같이 능파대를 묘사했다.
능파대는 동해 바닷가에 있는데 가파른 언덕이 파도를 내려다보고 있고, 불룩하게 솟아올라 높지만 길게 뻗어 내리면서 평평해져 마치 사람이 쌓아서 만든 것 같았다. 기이한 바위와 흰 돌들이 바다속에 늘어서서 모두 언덕을 마주보며 둘러싸 옹호하고 있는데, 그 높이가 십수 장까지 이르고, 그 형상은 매우 다양하여 (중략) 스님이 두 손을 잡고 읍하는 모습도 있었다. 또 그 모여있는 모습이 돛대를 모아놓은 것과 비슷하고, 높이 솟아 있는 모양은 당절이 서 있는 것과 같았다.24
바닷가의 구릉진 언덕과 이를 둘러싼 바다속에 늘어선 기이한 바위와 흰 돌들에 대한 묘사는 <천불암도>에 필적하는 동시에 지금의 경관과도 부합한다(Fig. 2). 김홍도의 <능파대도>(Fig. 6)와 <천불암도>를 비교하면(Fig. 1), 촛대바위를 비롯한 석주의 형태와 배열, 언덕과 석주의 배치 등이 달라서 동일한 장소를 그린 것이라 수긍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약간 다른 지점에서 촛대바위와 주변 실경의 모습을 바라보면(Fig. 3), <천불암도>의 화면 오른쪽에 그려진 가장 높이 솟은 석주, 그 왼쪽에 있는 하단부에 구멍이 뚫린 석주, 둘 사이에서 움푹 꺼지듯 나지막한 석주의 정상부가 모나게 잘린 모습과 비교되는 경관이 있다. 특히 <촛대바위 세부>를 자세히 보면(Fig. 3-1), 바다를 바라보며 서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연상케 하는 촛대바위의 전체 모습, 모난 듯 원만한 정상부의 형태, 금 간 듯 깨진 듯 가로지른 바윗결, 공수(拱手)한 스님의 어깨와 소맷자락인양 불룩한 중간부, 좁은 몸통이 아래로 가며 넓어지다가 방형 암석이 돌출한 하단부 등이 <천불암도>에서 제일 키 큰 석주의 형태나 이를 묘사한 선묘와 대체로 닮았다. 이에 정선이 능파대 촛대바위와 여러 석주를 천불이 깃든 바위 형상으로 표현한 것이 <천불암도>일 가능성을 고려하게 된다.
실제로 해운정 현판에 명문장가 김창흡(金昌翕, 1653~ 1722)이 능파대를 읊은 시가 전하는데, 그 「능파대」를 차운해 지은 시에 ‘천불’이 언급된 사례가 있다. 이민보, 이헌경(李獻慶, 1719~1791), 이광도(李廣度)의 시로,25 기존에 ‘부처’, ‘불상’ 등으로 번역해 주의를 끌지 못했지만, ‘천불’ 표현을 살려 다시 생각해보겠다. 앞서 능파대의 아름다움을 상세히 묘사했던 이민보는 삼척부사 재임시절에 “우뚝 솟은 저 돌기둥 큰 파도 막고/ 누대 앞 우뚝 선 바위 무슨 형상 본떴는가/ 날래게 온 천불이 우뚝하니 가부좌 틀고/ 여러 신선 쉬고 있는 바다 기운 차갑네”라 읊었다.26 돌기둥의 형상을 부처나 신선의 현현으로 비유하며 ‘천불’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유사하게 1780~81년 삼척부사를 지낸 이헌경도 “우뚝 솟아 하늘의 한 기둥 되고/ 주위엔 부처가 천 분이나 계신 듯”이라며 능파대 해안석림을 천불과 동일시했다.27 1826~30년에 삼척부사를 지낸 이광도 역시 “조물주가 갈고 깍아 천불을 만들고/ 오랜 세월 비바람이 만년을 닦아왔네”라 했다.28 능파대 석주 자체가 ‘천불’과 연결될 소지가 있었던 것이다. 여기서 ‘천불암’이란 명칭이 능파대에 덧씌워졌을 가능성이 열린다.
아울러, 정선이 이병연(李秉淵, 1671~1751)과 함께 무릉계를 방문한 자취나 <죽서루도>를 그린 사실은 인근에 자리잡은 능파대를 그렸을 가능성을 주시케 한다. 용추폭포 앞 왼쪽 절벽에 새겨진 “李秉淵·鄭敾·洪遇箕” 각자는 관동지역을 유람하며 여러 명소를 그린 정선이 1732~36년에 삼척부사를 지낸 이병연 등과 함께 무릉계곡을 방문한 사실을 전해준다(Fig. 10).29 또한 무릉계곡 입구에 있는 무릉반석 석벽의 “眞珠伯李秉淵 眞寶守洪遇箕 甲寅三月來” 각자는 삼척부사 이병연, 청송현감 홍우기가 1734년 3월에 함께 그곳을 찾았음을 전해준다(Fig. 11).30 무릉반석과 용추폭포의 석벽에 새겨진 비슷한 서체의 두 각자에 두 사람이 공통으로 등장한 것은 1734년 3월 무릉계곡 유람에 정선 역시 함께 했을 것임을 추정케 한다. 이병연과 홍우기 모두는 임천 조씨 집안에 장가든 조정의(趙正誼)의 사위로 서로 동서지간인데, 이에 착안해 <죽서루도> 하단 중앙에 배에 앉거나 서서 오십천 선유를 즐기며 죽서루 내 기생 셋을 보는 갓 쓴 도포 차림을 한 뒷모습의 세 선비가 이병연·홍우기·정선이라 추측하기도 한다.31 이와 같은 이병연·정선의 흔적과 촛대바위와 닮은 석주가 있는 <천불암도>, ‘천불’을 언급한 능파대 시문을 함께 고려하면, 정선이 부처 형상을 곳곳에 숨긴 과장된 여러 석주 표현으로 능파대 바닷가 경관을 그려내는 것이 실제로 가능했을 법하다.

Ⅲ. 18~19세기 관동명승의 시각적 재현양상

다시 《관동명승첩》으로 돌아가 화첩 수령자와 화가의 관계에 유념하여 그 시각적 재현양상을 살펴보겠다. 마지막 제11폭 <정자연도>(Fig. 4)의 우측 상단에 화제 “亭子淵”을 쓰고 “무자년 가을 우암 최영숙을 위해 그리다. 겸재(戊子秋 爲寓庵崔永叔寫 謙齋)”라 관지를 쓴 이 화첩은 1738년에 63세의 정선이 최창억(崔昌億, 1679~1748)을 위해 그린 것이다. 자가 영숙(永叔), 호가 우암(寓庵)인 최창억은 조선 중기에 이항복, 신흠 문인인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의 후손이다.32 인조반정의 공신이던 최명길은 병자·정묘호란 때 주화파(主和派)로 나선 현실주의자였고, 양자 최후량(崔後亮, 1616~1693)은 중국 오파(吳派) 문인화가 중 한 사람인 문징명(文徵明)의 화첩을 매개로 김상헌(金尙憲, 1570~1652), 허목(許穆, 1595~1682) 등과 서화를 논한 풍류인이었으며, 손자 최석정(崔錫鼎, 1646~1715), 최석항(崔錫恒, 1654~1724)은 숙종대 소론의 영수로 정승의 지위에 누차 오른 권세가였다. 그런 최후량의 손자이자 최석항의 양자인 최창억은 17~18세기의 유력한 경화세족 구성원으로 화가와 직접 교류하며 그림을 수집할 수 있는 사회경제적 지위의 보유자였다.33
최창억이 헌정받은 《관동명승첩》을 18~19세기 관동명승 재현양상 가운데 살펴볼 때 가장 주의를 끄는 점은 화첩 내 동해안 그림 9폭의 화제와 도상이 수령자보다 화가 자신의 관동유람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 그 형식과 내용에 있어 주문자의 의도나 행적보다 화가가 만든 화고와 화본이 부각된다는 사실이다. 금강산과 관동명승 유람의 역사는 신라 왕실과 화랑에 대한 기록, 최치원(崔致遠, 857~?)의 시문이 기원하는 고대로 소급되지만, 그림으로 감상하는 활동이 본격화된 것은 조선시대이고, 실명화가(實名畫家)의 화고와 화본이 부상한 것은 정선이 활동한 조선 후기에 이르러서이다.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이 기증받은 16세기 중반의 <경포대도>, <총석정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관동도(關東圖)로 꼽히고,34 금강산 유람과 금강산도 제작이 성행한 17~19세기에 관동팔경(關東八景)의 성립과 그에 이은 관동팔경도(關東八景圖)의 화제와 도상 성립, 전형화, 변형의 과정도 함께 전개되었다. 그 중 가장 뚜렷한 족적을 남긴 정선의 성취와 업적이 화고와 화본에 기반한 전문가적인 작업결과였음을 《관동명승첩》을 통해 확인하게 된다는 점이 흥미롭다. 이를 설명하고자 현존하거나 기록으로 전하는 관동명승을 그린 정선의 대표 작품과 대상지역을 연결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리해 보았다(Table 1).35
관동지역 명소의 경관을 담은 개별 화면형식은 조선 중기 이래 성행한 기행문학과 시서화 합벽첩 제작풍조에 따라 애호된 화첩식 금강산도에 기반한다. 기행사경에 따른 금강산도의 표현방식을 이끌며 내금강·외금강·해금강과 관동명승 모두에 대해 빈번하게 적용된 이 화면형식은 전통회화의 전도식/총도식/총람도식 표현과 구분되는, 명승명소 시각화의 새 장을 열었다.36 전통적인 전도식 표현에 비판적이었던 趙涑(1595~1668)이 “사람이 몸소 다니며 본 것을 그린다면” “앉은 곳을 따라 폭마다 다르게 해야 본 것을 그려낼 수 있는 것”이라 한 주장에 부응한이 화면형식은 문학적이고 현실적인 관점에서 한정된 범위의 특징으로 명소를 표현하도록 이끌었고, 금강산과 관동명승은 물론 여타 지역의 경관을 담는 그릇이 되었다.37 “본 것을 그려낼” 것을 촉구한 승경처 유람 경험의 시각화 요구가 사회적 공감과 지지를 얻자 명소의 특정 경관을 그린 화첩 제작이 17~19세기에 선호되었다. 공감과 지지는 또 다른 작례의 출현을 가져왔고,38 병풍이나 권축 같은 다른 매체의 제작으로 확산되었다. 관동명승의 화제와 도상 역시 그 가운데서 성립, 발전하였다.
이병연과 김창흡을 비롯해 김시보(金時保, 1658~1734), 정동후(鄭東後, 1659~1735)와 신태동(辛泰東, 1659~1729)이 함께 한 1711년 가을의 금강산 여행을 기념한 《신묘년풍악도첩(辛卯年楓嶽圖帖)》은 현존작품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산출된 정선의 기년작이다(Fig. 5, 7).39 전체 13폭 중 6폭이 관동의 명승으로 흡곡 시중대, 통천 옹천·총석정, 고성 문암·해산정·삼일호의 경관을 그렸다. 또한 1712년에 이속(李涑, 1647~1720)과 이병연·이병성(李秉成, 1675~1735), 장응두(張應斗, 1670~1729)와 함께 금강산을 유람한 정선은 이병연을 위해 《해악전신첩(海嶽傳神帖)》을 그려주었다. 이 화첩은 김창흡 제화시가 더해져 삼절(三絶)로 일컬어졌고,40 조유수(趙裕壽, 1663~1741), 홍중성(洪重聖, 1668~1735), 이하곤(李夏坤, 1677~1724), 신정하(申靖夏, 1680~1715), 조귀명(趙龜命, 1693~1737) 등이 지은 무수히 많은 시문을 낳으며 서화애호가 사이에서 정선의 명성을 크게 떨쳤다. 전체 30폭 중 관동명승은 7폭이다. 흡곡 시중대, 통천 문암·옹천·총석정, 고성 문암·해산정·삼일호를 그렸는데, 1711년 화첩에 비해 통천 문암이 추가되었을 뿐 거의 동일한 화제다. 작품이 현존하지 않아 단정할 수는 없지만, 1747년에 거의 동일한 지역과 장소를 그린, 같은 제목의 《해악전신첩》이 간송미술관에 현존해 어느 정도 추정해볼 수 있다. 이 두 번째 《해악전신첩》은 전체 21폭으로 처음에 만들었던 화첩보다 규모가 축소되었는데, 7폭이 흡곡 시중대, 통천 문암·총석정, 고성 문암·삼일호·해산정·칠성암을 재현하였다. 통천 옹천이 빠지고 고성 칠성암이 추가된 것뿐 나머지는 동일하다(Fig. 8).
주목되는 사실은 1747년까지 정선이 줄곧 그렸던 흡곡, 통천, 고성의 명소가 1711년 화첩과 1712년 화첩에서 다루었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부구성과 형상에 다소 가감과 변형이 있긴 해도 이전에 그린 장소를 되풀이해 그렸던 현상은 자신만의 축적된 화고나 화본을 고려할 때 이해할 수 있다. 지금까지 세 화첩은 모두 금강산을 세 차례 유람한 정선의 기행사경(紀行寫景)에 의한 결과로 설명되었지만,41 1711년과 1712년의 금강산 탐승으로 화고나 화본이 축적되고 그에 기반해 작업한 흔적이 있다면, 1747년의 두 번째 《해악전신첩》은 그 화고나 화본을 활용한 결과일 것이다.42 초기에 만든 화고가 나중의 작품 제작을 위한 화본이 된 것이다. 이 화고와 화본은 1724년 조유수가 이병연에게 해산가경(海山佳景)을 읊은 시 4수로 정선으로 하여금 삼부연, 불정대, 삼일포, 시중대를 그린 4폭의 작은 병풍(小屛)을 만들도록 재촉할 것을 요청하며 주문했을 때 그에 부응해 그린 작품의 기초였을 것이다.43 또한, 1732년 즈음에 조귀명의 육촌 형이자 조유수의 양자인 조적명(趙迪命, 1685~1757)이 소장하던 <해산정도> <삼일포도>를 포함한 《해악도병》 8폭을 제작할 때도 활용되었을 것이고,44 이외에 소장자가 명확지 않아서 불특정 도시민을 위한 작품이었을 법한 《해악팔경》, 《해악팔경·송유팔현첩》을 만들 때도 활용되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1738년에 완성된 《관동명승첩》은 1710년 5월부터 1714년 12월까지 금화현감을, 1732년 윤5월에서 1736년 4월까지 삼척부사를 지낸 이병연과의 교류가 정선의 관동명승 형상화에 있어 결정적인 계기였음과, 기회가 될 때마다 화본을 만든 정선이 새로운 작품 제작에 자기 화고를 활용했음을 보다 확실하게 알려주는 매체다.45 우선 흡곡, 통천, 고성의 명소를 그린 화면이 1747년의 《해악전신첩》과 이후 작품에서 비슷한 도상으로 반복되거나 약간 변형되고 있어 이 오래 지속된 기억의 원천이 1711~12년에 만든 화고나 화본이라 여겨진다. 예컨대, 1711년 화면에서 화제가 없는 공통점이 있는 해산정(Fig. 7), 총석정을 그린 경관이 1738년 선례를 따른 1747년 화면에서 화제와 낙관을 갖춘 채 건축물, 돌기둥의 배치와 형태만 다르게 그려진 것은 1712년을 전후한 변화에서 기원한다.46 다음으로, 《관동명승첩》에서 간성 청간정, 삼척 죽서루,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을 그린 그림은 상대적으로 가까운 1730년대 전반의 기억의 산물이고, 삼척부사 이병연, 간성군수 이병성과 함께 한 유람 경험, 청하현감에 재임한 정선 자신의 이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가장 오래된 청간정 그림인 <청간정도>가 처음 그려진 것은 이병성이 간성군수로 재임하던 1731~33년이다.47 이병연·정선의 1734년 무릉계 방문은 <죽서루도>의 화본을 낳았을 것이고, <천불암도>가 능파대를 그린 것이라면 이 역시 그 당시의 산물이 될 것이다. 이병연의 『사천시초』에 있는 「망양정」은 <망양정도>가 그려진 계기와 이병연을 연결시키고, 나귀 탄 선비와 시동이 그려진 <월송정도>는 관동유람을 마친 뒤 근무지로 내려가는 자전적 여정에서 기원한 듯하다.48 상이한 시기에 만들었던 동해안 명소 화본을 활용해 ‘관동명승’ 주제에 맞는 화폭을 집성한 화첩이 《관동명승첩》인 것이다.
그러한 화본의 활용양상을 화제와 도상의 변화 가운데서 확인해보겠다. 우선 고성의 문암 장면을 보면, 화제는 장소명인 “門岩”보다 그곳에서의 행위를 더한 “門岩觀日出”이 선호되었다. 조사된 4폭 중 1712년 것은 현전하지 않고(Table 1), 나머지는 유람자가 문암의 바위에 올라앉아 동해의 일출을 보는 경관이다(Fig. 12, 13, 14). 1711년에 “高城門岩觀日出”이 화제였던 장면이 1747년에는 “門岩觀日出”로, 좀 더 나중에는 “高城門岩”으로 간략화되었다. 그런 가운데 1711년 그림에서 문암의 높은 바위에 올라앉았던 인물들이 1747년과 이후 그림에서 문암 앞 너럭바위 같은 곳에 앉아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보는 것으로 바뀌었다. 각각 조금씩 다른 점이 있지만, 전경 왼쪽 하단에 치우친 경물, 그 뒤의 작은 토파 내지 섬, 그 너머에 화면 왼쪽으로 무게 중심을 싣는 원경의 산, 수평선이 약간 높은 푸른 바다와 붉은 해 등 구성이 대체로 비슷하다. 여기서 1712년 그림의 내용을 유추하면 1747년의 구성과 유사할 듯한데, 제목부터 “門岩觀日出”로 동일하다.
1747년의 정선 그림이 이전의 화제와 도상을 활용한 것임은 <시중대도> 비교에서도 파악된다(Fig. 5, 15, 16). 고성 문암의 예처럼 1711년과 1747년의 그림을 비교하면 화면 좌우변에 언덕과 섬, 토파를 배치하고 중앙에 석호의 고요하고 잔잔한 물결, 원경에 사주와 어촌의 평화로운 모습이 그려진 점이 동일하다. 다른 점은 느리고 신중하고 섬세한 필치가 적용된 1711년 그림과 달리 빠르고 과감하고 자신감 넘치는 1747년의 완숙한 필치, 1711년 그림 원경에 고기잡이 같은 점경인물이 거의 보이지 않게 그려진 것과 달리 1747년 그림은 화면 거의 중앙에 선유를 즐기며 담소하는 문인들이 그려진 구성이다. 동일한 선유 장면이 1738년 <시중대도>에 보여서 이전에 시도한 도상임을 알 수 있고, 휘영청 밝은 보름달은 소동파(蘇東坡)가 그랬듯 밤에 배를 타고 선유에 나선 문인들의 서정적이고 낭만적인 심사를 대변해준다. 이것이 1712년 그림과 연결된다는 점은 화제 “侍中臺”에 더해진 “中秋泛月”에서 알 수 있다(Table 1). 1747년 <시중대도>에서 달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수평선이 높은 고풍스런 부감시와 섬, 사주, 솔숲이 있는 토파 배치, 호수에 배를 띄우고 유유자적 즐기는 문인들의 모습이 1738년 그림과 유사하다. 화제가 “시중대”로 바뀌어 “중추범월”이 탈락된 1738년 그림의 도상은 십중팔구 1712년 그림의 “시중대 중추범월” 화제와 도상에서 기원할 것이다. 1712년에 만든 화본이 나중에 줄곧 활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18세기 후반에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의 금강산도가 출현하면서 관동명승 재현 양상도 크게 바뀌었다. 1788년 가을, 정조의 명에 따라 선배 화원 김응환(金應煥, 1742~1789)과 함께 관동지역과 금강산의 명소를 두루 돌아보고 실경을 사생한 김홍도는 100여 폭으로 그려 화첩이나 화권을 제작했고 금강산도의 역사를 새롭게 써나갔다.49 금강산도의 일환으로 관동명승을 그리는 경향은 계속 유지되었지만, 김홍도 이후부터 지역별 화제가 현격히 증가했고, 화풍 자체가 확연히 달려졌다. 화풍 변화는 <시중대도>를 같은 장소를 그린 정선 작품과 비교해 실감할 수 있다(Fig. 17). 김홍도 그림은 한결 낮아진 수평선, 중앙으로 모아지며 일점투시를 연상케 하는 토파와 사구, 언덕의 배치, 높고 먼 시점에서 시중호 전체를 조망한 현실적인 시선, 섬세하고 사실적인 세부묘사 등에서 정선 그림과 큰 차이가 있다. 갑자기 꿈에서 깬 듯한이 놀라운 시각세계가 불러일으킨 충격과 감동은 1788년 이후 금강산도 화가들로 하여금 김홍도 화풍을 따르는 가운데 전통을 변주하거나 탈전통의 자유로운 표현을 추구하도록 이끌었다. 이는 상당히 많은 연구자에 의해 언급된 바이기에, 여기서는 정선과 동시대나 이후 활동한 18~19세기 여타 화가가 그린 관동명승의 주요 사례를 시기별로 정리하고(Table 2),50 계속해서 정선의 <천불암도>와 관련해 주목할 지점을 찾아보도록 하겠다.

Ⅳ. 능파대도와 〈천불암도〉의 관계

정선이 활동한 시기의 관동도에는 ‘관동팔경’, ‘관동십경’ 화제를 그린 허필(許佖, 1709~1761)의 《관동팔경도병》, 1746년작 《관동십경》이 있다(Fig. 9, Table 2).51 정선파가 속출하던 시대에 그와 다른 방식으로 작업한 이들 사이에서 관동팔경, 관동십경이 그려진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 권신응(權信應, 1728~1786)이 1744년에 그린 《영동열경(嶺東列景)》이 주의를 끈다(Fig. 18).52 서화감상과 제화시 창작을 즐긴 문필가 권섭(權燮, 1671~1759)의 손자이던 그는 조부의 지도와 격려를 받으며 10대부터 시문과 글씨를 배우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53 《영동열경》은 그가 그린 《모경흥기첩(暮景興起帖)》의 전체 44폭 중 일부로, 흡곡 시중대, 통천 총석정·옹천, 고성 삼일포·해금강, 양양 낙산사, 강릉 경포대, 삼척 죽서루·능파대, 울진 망양정, 평해 월송정 및 장소미상의 우암 등 관동명승 12곳을 금강산도 6폭과 함께 그렸다(Table 2). 이외에 《모경흥기첩》은 단양팔경을 그린 《단구팔경(丹丘八景)》과 청풍육승, 제천이승, 문경십승을 그린 《십팔명승(十八名勝)》을 수록해 금강산과 관동지역뿐 아니라 단양·청풍·제천·문경의 실경을 그리기도 한 소년화가의 폭넓은 시도를 전해준다.54
이를 발굴한 윤진영 선생은 《영동열경》의 금강산도와 관동도를 같은 장소를 그린 정선의 현존작품과 비교하여 나무를 그린 미점이나 선묘를 살린 준과 선염 등에서 평소 정선이 사용한 화법을 따랐고 구도와 시점 역시 거의 유사해 정선 그림을 방작한 결과로 간주하였다.55 모본(模本)인 정선 그림을 참고하되 경물의 배치와 구도를 부분적으로 변형하고 정선보다 훨씬 과감하고 속도감 있는 붓질을 거침없이 운용한 모방작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권신응이 과감한 필묵법이 적용된 정선의 원화를 보고 그 구도와 포치, 운필의 특징을 배워 감각적인 필치로 그려낸 것이라 보았다. 예컨대 <시중대도>와 《관동명승첩》에 실린 정선의 <시중대도>를 비교해 경관을 보는 시점과 구도와 화법이 유사함을 지적하였다(Comparing Fig. 18 with Fig. 15). 넓은 호수와 원경의 경물이 멀리 밀려나 보이도록 그린 정선에 비해 권신응은 오른쪽 사구 일부만 세로로 긴 화면에 배치했고 미점 처리된 수목, 준이 거의 없는 언덕 등 정선식 표현을 빠르고 투박한 붓질로 처리했는데, 정선의 <시중대도>를 모방해 그리면서 약간 변형을 가한 것이다.
실제로 정선 이전에 그려진 적 없는 망양정, 월송정을 그린 권신응 그림을 정선의 <망양정도>, <월송정도>와 비교하면, 가로로 긴 넉넉하고 여유있는 공간에 펼쳐진 정선의 경관이 권신응에 의해 세로로 긴 화면에 맞게 압축된 느낌이 들 만큼 서로 닮아있다.56 두 화면 모두에서 특유의 T자형 소나무 처리, 빠르고 투박한 붓질로 구사한 정선화법을 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망양정이 자리잡은 절벽을 화면 우측에 배치해 망망대해와 대비시킨 구도와 시점, 울창한 송림 너머로 돌을 쌓아 만든 듯한 성벽과 돈대 위 누각형 문루인 월송정을 화면 우측 중앙에 둔 구성에서 유사한 정선의 화폭을 보고 모방해서 그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공맹(孔孟) 이래 상고주의가 팽배한 동아시아에서는 중국 육조시대부터 전이모사(轉移模寫)를 회화학습의 주요 방법론으로 삼아왔고, 명청대에 크게 성행한 방고회화(倣古繪畫)의 여파가 한국과 일본에까지 두루 미쳤음을 고려할 때,57 금강산과 관동명승을 그린 권신응의 《영동열경》은 동시대 대가의 작품을 모사한 임모(臨摹) 단계의 회화로 파악된다.
이러한 임모작은 모방의 대상인 금강산과 관동명승을 그린 정선 화첩이 권신응 곁에 있었음을 전제한다. 필시 권섭이 소장하거나 지인에게 빌려온 정선 화첩이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권신응이 《영동열경》을 그린 1744년 이전에 그에 속한 장소의 대부분을 정선이 이미 그린 상태였고, 각 경관을 그린 화본이 그의 화고에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앞서 <Table 1>에 제시한 정선이 그린 관동명승 목록에 빠져 있는 강릉 경포대, 1753년경에야 보이는 양양 낙산사를 1744년 전에 정선이 모두 그려두었던 것이다. 보다 주목할 점은 앞에서 <천불암도>의 대상지역일 가능성이 있다고 본 해금강, 능파대를 그린 화폭이 《영동열경》에 모두 수록되어 있다는 것이다(Fig. 19, 20). 이는 1744년 이전부터 해금강, 능파대를 그린 정선 그림이 존재했음을 뜻하고, 당시 그려진 정선 그림의 형상과 구도와 필치를 가늠해 현존하는 정선 그림과 비교해볼 자료가 확보되었음을 의미한다.
정선의 <해금강도>는 2폭 정도가 현존한다.58 그중 하나가 《해악팔경·송유팔현첩》에 수록된 <해금강도>이다(Fig. 21). 만년작으로 추정되는 화첩의 일부인 이 그림은 노필답게 단순하고 명확한 구도와 형태를 취했고, 과감하면서 숙달된 붓질로 바다의 기암절벽, 넘실거리는 파도, 작은 쪽배를 타고 바람과 물결에 온몸을 내맡긴 3명의 유람객과 사공을 묘사하였다. 배를 타고 바다에서 금강산 일만 이천 봉을 두루 유람하는 듯한 통쾌함과 달관의 느낌이 있다. 그에 비해 권신응 그림의 모본인 1744년 전에 완성된 정선 그림은 보다 넓은 해안을 바다에서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시점을 취했던 듯하다. 권신응은 불쑥불쑥 솟은 기암괴석과 이를 휘감은 커다란 물결을 그리고, 일렁거리는 파도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지나는 유람선도 2척이나 작게 그려 놓았다. 정선의 원본에서도 유사한 장면이 연출되었을 텐데, 넓고도 세밀한 관점으로 경관 전체를 포착한 화면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부터 <해산정도>를 그리면서 해금강 근처의 칠성암을 사람 형상을 닮은 바위 형태로 줄곧 그렸던 장본인이기에(Fig. 7), 또 1747년에는 칠성암을 아예 별도의 한 폭으로 그리는 파격적인 시도도 감행했던 화가이기에(Fig. 8), 정선은 1744년 이전에 권신응이 보여준 것 이상의 장대하고도 독특하고 멋진 <해금강도>를 그렸을 것이다. 현존하는 <해금강도>는 그 도상에서 파생된 것으로, 1744년 이전에 그린 해금강도 화본에서 유람선 중심의 세부장면이 분화되어나온 듯하다.
한편, 정선이 그린 <능파대도>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그런데, 권신응의 <능파대도>(Fig. 20)와 정선의 <천불암도>(Fig. 1)를 비교하면, 바다와 육지 사이에 불쑥불쑥 솟은 기암괴석이 배치되고, 화면 좌측 하단에 유람객이 그려지며, 화면 상단 부분의 넘실거리는 파도가 화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인 점에서 화면에 경관을 배치하는 발상과 방식이 유사하다. 권신응 그림에 그려진 바위의 모습과 형태를 꼼꼼히 들여다보면 사람인양 바위인양 기암괴석이 서로 마주보며 인사하는 듯한 모습인 것이 정선식 분위기가 확실히 있다. 이것이 암시하는 1744년 전에 그려진 정선의 능파대도가 <천불암도>와 보다 명확하게 관련될만한 근거는 더 없을까? 권신응의 <능파대도>와 짝을 이루는 권섭의 시문, 1750년대에 그린 이윤영(李胤永, 1714~1759)의 <능파대도> 등이 그 역할을 할 수 있다.
우선 권섭의 시문부터 보면, 《영동열경》의 회화 각 폭은 화제인 각 장소를 주제로 권섭이 지은 시문에 대응되고 있다. 그림에 대해 초서로 쓴 시와 산문이 짝이 되도록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의 기행사경도 합벽 형식을 취한 것으로, 그중 능파대를 읊은 권섭의 시에 “천불” 표현이 보인다.59
푸른 바닷가 누런 모래펄 / 작고 작은 언덕 이어지고 / 함께 원정함을 받들며 / 촘촘하게 서 있구나. 하얗게 빛나는 바위는 한결같이 마치 천불이 둘러싼 듯한 모양이라, 특별한 절경을 이루고 있다. 그 앞에 작은 정자를 세우고 또 뒤쪽 언덕 높은 데에 큰 누각을 짓는다면 반드시 관동팔경보다 먼저 손에 꼽게 될 것이다.60 (밑줄-필자)
여기서 “하얗게 빛나는 바위”가 “천불이 둘러싼 듯한 모양”이라는 표현은 삼척부사를 지낸 이민보, 이헌경, 이광도가 능파대를 보며 “천불”을 운운한 것과 유사한 능파대의 문자적 표상이다. 권섭은 자연경관이 빼어난 이곳에 정자와 누각이 세워진다면 관동팔경보다 더 유명해질 것이라 단언했는데, 정선과 권신응의 그림, 그의 시문이 능파대를 이미 명소의 반열에 올려놓았음을 주시하게 된다.61 권신응은 화면 상단에 화제를 “凌波臺”로 써놓았고(Fig. 20), 정선의 원본화첩을 임모한 그림의 제작맥락, 그림 속 바위를 “천불”과 연결시킨 권섭의 시문을 함께 고려할 때 원본화첩에 있던 정선 그림의 화제 자체가 “凌波臺”였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천불암”이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이윤영의 <능파대도>는 단양에 은거한 1751년 이후에 그린 선면 산수화 3폭 중 하나이다(Fig. 22).62 화면 상단 중앙에 이윤영이 직접 “해석(海石)은 이름이 능파대다. 삼척부에서 북동쪽으로 10리 지점에 있다”고 써서 능파대를 바닷바위로 지정하고, <옥순봉도>는 강바위(江石), <화적연도>는 계곡바위(溪石)로 제시한 흥미로운 작품이다.63 그중 <화적연도>는 같은 장소를 그린 정선 그림과 비교해 유행이된 정선화풍에서 탈피해 품은 뜻을 형상으로 펼치려 한 문인화가의 사의적 실경(寫意的 實景)의 하나로 해석된 바 있다.64 그 관점을 견지하면서 정선의 영향을 벗어나려는 의지야말로 정선 회화에 익숙한 경험을 전제함을 주목하고자 한다. 이윤영은 맨눈으로 본 화적연, 옥순봉, 능파대를 그리기보다 정선의 <화적연도>, <옥순봉도>,65 <능파대도>를 접한 경험에 실경에서 얻은 영감과 나름의 의도를 더해 자신의 산수화를 그려냈다. 정선과 달리 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한 결과 아무도 생각지 못한 계석·강석·해석의 바위 시리즈를 만든 것이다.
<능파대도>를 그리면서 그는, 육지에서 바다를 본 정선과 달리 바다에서 능파대를 바라보면서 촛대바위를 비롯한 석주, 언덕, 해안을 배치했다. 그래서 정선이 바닷가 기암괴석의 형태에 집중하며 화면 중앙에 석주 하나하나를 배치한 것과 달리 선면의 전경 우측에 치우치도록 해안석림 군체를 배열했고, 정선이 도외시한 너른 해변과 그 너머의 산봉우리를 그려 전혀 다른 산수를 만들어냈다. 정선이 가로로 너울거리는 푸른 물결을 수직으로 거스르며 선묘 위주의 석주를 하얗게 상형한 것과 달리 그는 바다를 하얗게 남겨두고 선면의 화면 형태를 따라 거의 방사형으로 솟은 석주에 붓질과 담채를 더해 바위의 거친 질감을 살리고자 했다. 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정선 그림을 보았던 시각적 경험의 잔향은 화면 좌측 언덕에 앉아 석주와 바다를 가리키면서 담소하는 점경인물 2명의 표현에 여전하다. <천불암도>에서 석림과 송림 사이에 위치한 언덕에 앉거나 서서 석주와 바다를 바라보던 4명을 대체한 이윤영 그림 속 그들은 자연경관으로서 능파대의 장관에 경탄할 뿐 아니라 정선의 <능파대도>와 또 다른 차원으로 거듭난 기특한 산수에 거함을 기뻐하며 이를 그린 화가의 만족스런 심정을 대신 전해주는 아이콘과 같다.

Ⅴ. 맺음말

지금까지 정선의 <천불암도>가 동해시 능파대를 그린 것임을 논증하였다. 천불암의 위치 비정과 관련된 기왕의 다양한 논의를 소개하고 새 후보지로 택한 해금강과 능파대의 장소성을 고지도와 사진, 회화자료 및 실경과 비교하여 검토하였다. 또한, 정선을 비롯한 18~19세기 화가에 의해 관동지역의 명소가 화제와 도상으로 정착, 계승, 변형된 표상과정을 살펴보았고, 그 가운데서 전문적인 화가로 활약한 정선의 작업 성격을 전해주는 화고와 화본의 존재, 천불암을 능파대로 형상화한 원본화첩의 사례를 발견했다. 특히 <천불암도>와 유사한 형태와 구도로 그려진 권신응의 <능파대도>, 그에 대한 권섭의 시문에 있는 ‘천불’ 언급은 정선이 그린 능파대도의 존재는 물론 <천불암도>와 거의 유사한 그 도상적 면모를 주목케 하였다. 더불어 정선 같은 동시대 최고 화가의 경지에 도전한 그림을 그린 이윤영의 과감한 시도를 새롭게 파악할 수도 있었다. 정선의 원본회화가 권섭·권신응과 이윤영 모두에 의해 감상되었다는 점이 중요하다. 동시대 감상자 사이에서 광범위하게 유통된 정선 회화의 여파가 모방과 창작의 모든 영역에서 다양한 작품 제작을 촉진하고 있었음을 전해주기 때문이다.66
이상 논의한 사실을 정선의 관동명승 재현양상 가운데 다시 자리매김해보면 <Table 3>으로 정리된다. 이로써 1730년대와 1740년대 전반에 정선이 <천불암도> 내지 <능파대도>를 그렸고(Fig. 1), 그에 영향받은 권신응이 1744년, 이윤영은 1750년대에 각자 역량껏 <능파대도>를 그렸으며(Fig. 20, 22), 1788년과 이후의 김홍도 및 그 추종자가 새로운 <능파대도>를 그렸음이 파악된다(Fig. 6). 이 변화의 역사가 지금껏 묻혀 있었던 것이다. 그리된 이유는 장소를 표상하는 문자와 형상이 고정되지 않았던 때문인 듯하다. 정선의 <관동팔경도> 8폭 화첩을 소장한 20세기의 개인이 있기에 정선도 관동팔경도를 그린 듯하지만,67 오늘날 알려진 관동팔경과 일치하는지는 알 수 없다. 최소한 1738년 당시 정선과 최창억에게 ‘관동팔경’, ‘관동십경’은 ‘관동명승’보다 덜 중요했고, 능파대는 천불암으로 불릴 수 있었다. 권신응은 1744년에 정선 화첩을 모방해 능파대가 포함된 관동명승 12폭을 그렸고, 권섭은 관동팔경보다 훨씬 기막힌 절경으로 꼽히게 될 능파대의 명소적 가능성을 내다보았다. 장소명과 화면구성과 평가, 즉 화제와 도상과 산수품평의 결과가 달라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능파대의 시각적 재현은 김홍도 위주로만 언급되었을 뿐, 정선이 그린 능파대도는 알려져 있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정선과 김홍도는 물론 그 이후로 지속된 실경산수화의 역사에 천불암도와 능파대도가 함께 있고, 그 도상이 바닷가 촛대바위와 해안석림, 송림, 언덕, 점경인물 등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더불어 이 고찰을 통해 실경의 장소명이 화제로 기능하면서 상응하는 도상을 가졌던 점이 명확히 드러났는데, 특정 화가의 화고나 화본과 연결된 화제와 도상의 선후관계를 따져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배열하면 회화사적 변천을 시각적으로 설명할 근거가 확보된다는 점이 파악된 것은 꽤 의미있는 발견이라고 생각한다. 산수화 속의 지역과 장소, 시간을 특정함에 있어 문자가 형상보다 가변성이 많다는 점, 연대가 분명한 형상 간의 형태적 유사성은 문자보다 더욱 명확한 기록과 단서를 제공한다는 점, 그럼에도 그러한 특정화 작업에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곤 하는 것이 대개 문자인 점에 유의해 실경산수화의 화제와 도상 및 작업맥락을 면밀히 검토하고 그 역사성과 실제를 이론화하고자 노력해야 할 것이다.

Notes

1) 2022년 1월 20일 동해시장 수신, 관광과장·문화체육과장 참조로 제출된 최준석(동해문화원 자문위원)의 민원「겸재 정선의 관동명승첩 천불암 그림 게시 요청」 및 근거자료 참조.

2) 해암정 및 천불암에 대한 문헌사적, 회화사적, 건축사적 접근 내용은 『동해 해암정 및 천불암 학술세미나』 발표자료집(동해시, 2022. 12.) 참조 바람.

3) 정선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논의한 대표적인 연구는 김리나, 「정선의 진경산수」, 『겸재 정선』 한국의 미 1 (중앙일보사, 1977; Lee, Lena Kim, “Chŏng Sŏn: A Korean Landscape Painter,” Apollp, No. 78, London, 1968. 8), pp. 159-170; 유준영,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고찰」, 『고문화』 18(1980; Joon-young Yu, “Chŏng Sŏn: ein Koreanischer Landschafts maler aus der Yi Dynastie,” Inaugural Dissertation zur Erlangung des Doktorgrades der Philosophischen Fakultät der Universität zu Köln, 1976), pp. 48-59; 이동주, 「겸재일파의 진경산수」, (학고재, 1995; 『월간아세아』 1969. 4.), pp. 214-259; 이태호, 「겸재 정선의 가계와 생애」, 『이대사학연구』 13·14 (1983. 6.), pp. 83-93; 동저,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발달과 퇴조」, 『진경산수화』 (국립광주박물관, 1991); 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謙齋眞景山水畵考」, 『澗松文華』 21·29·35·45, 1981·1985·1988·1993); 동저,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대원사, 1999); 동저, 『겸재정선』 1·2·3 (현암사, 2009); 박은순, 『금강산도 연구』 (일지사, 1997); 변영섭,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 『미술사논단』 5(1997. 10), pp. 139-164; 유홍준, 『화인열전: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1 (역사비평사, 2001), pp. 183-324 등.

4) 능파대, 해암정, 무릉계는 조선시대에 삼척부에 속했으나 동해가 시로 승격된 1980년부터 동해시의 명소가 되었다. 동해시청 누리집의 https://www.dh.go.kr/pages/sub.htm?nav_code=dh1470759114 참조.

5) 2022년 11월 14일, 필자는 동해시청 박찬형 학예연구사의 도움으로 능파대, 해암정과 무릉반석, 용추폭포의 현장을 답사했고 민원 내용을 다양하게 검토, 확인하였다. 참고한 논저는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역, 『完譯 陟州集』 (삼척시, 1997);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편, 『東海市 金石文集』 (동해문화원, 2002); 심의승 편, 배재홍 역, 『국역 삼척군지』 (삼척시립박물관, 2009); 『先祖의 文化遺蹟』 海巖亭·海雲亭 篇 (삼척심씨대종회, 2015); 『동해시 무릉계곡 금석문 3D 스캔 기록화 사업 조사보고서』 (동해시청, 2018); 이상균, 「동해 무릉계 명승 탄생의 문화사적 배경」, 『문화재』 제52집 제1호(2019), pp. 22-43 등이다.

6) 지역별 실경산수화 연구의 시작은 이태호, 『그림으로 본 옛서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5); 『몽유금강: 그림으로 보는 금강산 300년』 (일민미술관, 1999); 『아름다운 금강산』 (국립중앙박물관, 1999); 문동수, 「강원도와 진경산수화」, 『우리 땅, 우리의 진경: 조선시대 진경산수화 특별전』 (국립춘천박물관, 2002), pp. 290-298 등. 200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의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개발 및 그 응용 연구>에 참여한 이래 2004년 동국대학교 김상현 교수의 <미술사문헌연구> 박사과정 수업시 「불교 소재의 금강산도 연구」, 2005년 서울대학교 안휘준 교수의 <한국회화사연구Ⅰ> 석박사과정 통합수업시 「서울과 경기지역을 재현한 산수화의 비교」를 발표한 필자는 2005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관동팔경 답사>를 도왔고, 「산수화 속의 경기도」, 『옛그림 속의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2005), pp. 38-103를 집필했다.

7) 이보라, 「조선시대 관동팔경도의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최윤정, 「조선후기 금강산의 불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이순미, 「조선후기 충청도 四郡山水圖 연구」, 『강좌미술사』 27 (2006), pp. 285-315; 동저, 「조선후기 겸재화파의 한양실경산수화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2); 박정애, 「조선후기 관서명승도 연구」, 『미술사학연구』 258 (2008.6), pp. 105-139; 동저, 『조선시대 평안도 함경도 실경산수화』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4); 이상균, 「조선시대 관동유람의 유행배경」, 『인문과학연구』 31 (2011), pp. 167-196; 윤진영, 「조선후기 서촌의 명소와 진경산수화의 재조명」, 『서울학연구』 50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3), pp. 69-107; 『그림과 책으로 만나는 충북의 산수』 (국립청주박물관, 2014);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국립중앙박물관, 2019).

8) 박효은, 「南京을 재현한 명말청초 산수판화와 회화」, 『명청사연구』 43 (2015), pp. 83-127; 동저, 「17-19세기 한국화가의 중국 도시 인식과 그 표현」, 『명청사연구』 46 (2016), pp. 319-360; 동저, 「南京과 揚州를 그린 17-18세기 중국 산수화와 후원자」, 『미술사학』 36 (2018), pp. 247-278.

9) 『고성 청간정』 관동팔경특별전 Ⅳ (국립춘천박물관, 2019).

10) 김울림, 「김홍도의 관동사경과 울진 문암」, 『한국고지도연구』 제11호 제2집 (2019. 12), pp. 29-50; 박효은, 「그림 속으로 들어간 간성의 명소, 청간정」, 같은 책, pp. 51-72; 김세호, 「조선시대 간성 선유담의 문화사」, 같은 책, pp. 73-89.

11)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千佛洞記」를 인용한 홍경모(洪敬謨, 1774~1851)의 견해: 洪敬謨, 『冠巖遊史』 卷 13, 「海嶽傳神帖小記」; 최완수, 앞의 책(1999), pp. 193-196. 이것이 실제에 부합하는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북한지역정보넷> http://www.cybernk.net/에서 천불동을 검색하면 “외금강 천불동 구역”의 설명과 千佛山, 千佛川, 千佛瀑布 등에 대한 설명도 보이는데, 그 위치가 만물상과 다르다.

12) 혹자를 인용한 홍경모의 언급과 박사해(朴師海, 1711~1778)의 언급: 洪敬謨, 위의 글; 朴師海의 『蒼巖集』 卷7, 「玉京洞在甕遷南谷 一名千佛洞」; 최완수, 위의 책, pp. 194-197. 임도면을 찾아보면 혹자가 말한 장소와 박사해가 언급한 곳이 같음을 알 수 있다. http://www.atlaskorea.org/; http://www.cybernk.net/.

13) 洪敬謨, 위의 글; 최완수, 위의 책, pp. 195-196.

14) 최완수, 위의 책, pp. 198, 221, 224에서 바다에 열립한 僧形像의 백색 화강암주 특징을 『東國輿地勝覽』 卷45, 「歙谷縣」 侍中亭條와 연결시켰다.

15) 이 글 각주1의 민원. 이 주장의 근거는 정선, 김이소, 이유, 김낙우, 이병[ ](연?)의 이름이 새겨진 용추폭포 각자, 이병연과 홍우기가 갑인년 3월에 다녀갔다는 내용의 무릉반석 각자, 김창흡이 해암정에 남긴 시구와 차운한 편액들, 동해안에서 희게 빛나며 군립해 솟은 유일한 해안석림임을 확인한 답사결과 등이다.

16) e뮤지엄(https://emuseum.go.kr/)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사진엽서 <외금강 만물상 천불암> 참조.

18) e뮤지엄의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10폭 병풍 <금강산도> 참조. 이 병풍에는 자동차, 철도, 증기선과 근대식 건물이 그려져 있고 20세기에 새로 개발된 구만물상, 오만물상 등의 지역, 구룡폭포 부근 암벽에 김규진이 1919년 여름에 새긴 “彌勒佛” 각자 등이 그려져 있어 20세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19) 규장각 원문검색 서비스의 ‘영동지도’(古915.16-Y43), e뮤지엄의 ‘대동여지도’ 전체 이미지 참조.

20) 김상성 외, 서울대 규장각 역, 『(시화첩) 관동십경』 (효형출판, 1999); 김남기, 「《관동십경》의 제작과 시세계 연구」, 『한국한시연구』 14 (2006), pp. 303-330.

21) e뮤지엄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사진엽서 <해금강 불암> 참조.

22) 각주19의 검색사이트 참조 바람.

23) 韓明澮, 「凌波臺記」; 『東海市 金石文集』, p. 11.

24) 李敏輔, 「海巖亭重修記」; 『국역 삼척군지』, p. 329.

25) 『東海市 金石文集』, pp. 221, 214, 219; 『先祖의 文化遺蹟』, pp. 97-98, 113, 92-93에 全文이 실려 있다. 삼척부사 재임 사실은 『국역 삼척군지』, pp. 234-236. 이외에도 『先祖의 文化遺蹟』, pp. 103-104에 실린 李周赫의 「敬次三淵先生板上韻」에 “천불이 만경창파에 절하는 듯(千佛齊拱萬頃瀾)” 구절도 있다.

26) 李敏輔, 「凌波臺 次三淵韻」, 砥柱等閒捍巨瀾 臺前峙石象何顔 湧來千佛跏趺兀 憩得群仙沆瀣寒.

27) 李獻慶, 「凌波臺」, 嵬呼天一柱 環似佛千軀.

28) 李廣度, 「凌波臺」, 化工礱斲環千佛 劫雨磨磷閱萬秋.

29) 『동해시 무릉계곡 금석문 3D스캔 기록화 사업 조사보고서』, 용추폭포-금석문-111의 “金履素·履裕·金樂祐” 각자는 김창집 후손 김이소(1735~1798)와 동생 김이유 및 김낙우를 가리키며 훨씬 후대의 방문 결과이다.

30) 위의 글, 무릉반석-금석문-14. 眞珠는 삼척의 옛이름이고 眞寶는 경상북도 청송군의 옛이름이다.

31) 『萬家譜』 9冊(林川趙氏)과 『寒水齋集』 卷25, 「參判金公載顯神道碑銘幷序」; 이상균, 앞의 논문, p. 33.

32) 최완수, 앞의 책(1999), p. 51; 동저, 앞의 책1 (2009), pp. 389, 394.

33) 경화세족과 화단의 관계는 강명관, 「조선 후기 경화세족과 고동서화 취미」, 『한국의 경학과 한문학: 죽부 이지형 교수 정년퇴임 기념논총』 (태학사, 1996), pp. 765-802; 홍선표, 「조선 후기 회화의 애호풍조와 감평활동」,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미술사논단』 5, 1997. 10.), pp. 231-254; 박효은, 「조선 후기 문인들의 회화수집활동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6.). 최창억은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수노인도>, <마도>를 헌정받기도 했다. 최완수, 앞의 책 1 (2009), pp. 389-395; 차미애,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 (사회평론, 2014), pp. 157, 365-366.

34) 『우리 강산을 그리다』, pp. 18-23; 이수미, 「十六世紀 實景山水畫 이해의 확장: 〈鏡浦臺圖〉, 〈叢石亭圖〉를 중심으로」, 『美術資料』 96 (2019. 12), pp. 18-53.

35) <Table 1>의 작성을 위해 이 글 각주3의 최완수, 박은순, 각주7의 이보라 등의 논저를 참고하였다.

36) 박은순, 앞의 책, pp. 70-77은 총도식/전도식vs화첩식 표현형식을 주목했고, 이영수, 「민화 금강산도에 관한 고찰」, 『미술사연구』 14 (2000), pp. 99-136은 총람도식vs명소도식으로 분류했으며, 홍선표, 「금강산도의 발생과 발전」,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pp. 471-478에서 지도식 전경도vs유람 장소별 각경도로 분류했다. 필자는 동아시아 산수화의 보편적 화면구성 형식으로서의 전경도vs각경도를 주목한다. 박효은, 앞의 논문(2018).

37) 南鶴鳴, 『晦隱集』 卷5; 박은순, 앞의 책, p. 72.

38) 박효은, 앞의 논문(1999.6), pp. 84-87; 동저, 「문화한 장원: 1804년작 《임곡운구곡도》의 회화사적 고찰」, 『한국문학과예술』 제40집 (2021. 12), pp. 381-420에서 17세기 이래 서울경기 문인들의 회화수집활동 가운데 안동 김씨의 경우, 한시각이 1664년에 그린 시화첩 《북관수창록》, 조세걸이 1682년에 그린 시화첩 《곡운구곡도》 및 1804년 임모작의 제작을 이끈 김수항, 김수증의 기여와 후대에의 영향이 언급되었다. 《북관수창록》의 전경도·각경도, “몸소 다니며 본 것을 그린” 《곡운구곡도》의 각경도가 후손에게 전수되고 방문자 사이에 열람되었기에 18~19세기에 미친 17세기의 영향을 주시하게 된다. 《곡운구곡도》는 1712년 《해악전신첩》을 그리던 즈음의 정선에게 열람된 듯하다. 이경화, 「해악전신: 정선의 1712년 금강산도 제작에 관한 재고」, 『미술사와 시각문화』 25 (2020), pp. 109-112.

39) 작품의 제작맥락은 최완수의 논저를 참고했고, 소장자 신태동은 이경화,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 1711년 금강산 여행과 진경산수화의 형성」, 『미술사와 시각문화』 11 (2012), pp. 192-225.

40) 趙裕壽, 『后溪集』 卷8, 「李一源海山一覽帖跋」. 시화의 관계는 김형술, 「海嶽傳神帖에 나타난 詩畫 교섭의 새 양상」, 『한국한문학연구』 45 (2010), pp. 403-435.

41) 이 견해는 이 글 각주3에 소개한 최완수 선생의 논저를 통해 지속적으로 주장되었다.

42) 박은순, 앞의 책, pp. 135-138에서 정선의 <장안사도>에 있는 비홍교를 들어 기행사경 초기에 만든 초본을 평생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1747년 《해악전신첩》이 금강산 여행과 기행사경의 산물임을 의심하진 않았다. 1747년 정선의 금강산 기행사경설에 회의적임을 공개적으로 처음 표명한 것은 유홍준, 앞의 책, p. 300이고, 이경화, 앞의 논문(2020), pp. 102-108은 1712년 《해악전신첩》 복원을 위해 1711년 《신묘년풍악도첩》과 1747년 《해악전신첩》의 구성을 비교했다. 필자는 화고와 화본의 활용을 관동명승의 재현에 적용하려는 것으로, 박효은, 「《석농화원》을 통해 본 한·중 회화후원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pp. 200-236에서 기본발상이 언급되었다.

43) 趙裕壽, 『后溪集』 卷8, 「答李一源」 및 卷2, 「題四帖小屛五絶 一帖各三首」. 최완수 선생의 논저에서 사대부 문인화가 정선의 신분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줄곧 인용된 이 자료는 이병연의 중개를 통해 정선의 금강산도 4폭을 그려받고자 한 조유수의 주문행위로 달리 해석된 바 있다. 박효은, 「18세기 조선 문인들의 회화수집활동과 화단」, 『미술사학연구』 233·234 (2002. 6), pp. 158-159.

44) 趙龜命, 『東谿集』 卷6, 「題十二兄迪命所藏海嶽圖屛」.

45) 이와 관련해 후원자 이병연과 정선의 독특한 관계나 정선의 예술가적 성장 및 시장 개척 면모가 지적된 바 있다. 박효은, 앞의 논문(2002; 2005); 동저, 「17-19세기 조선화단과 미술시장의 다원성」, 『근대미술연구』 (2006), pp. 127-135.

46) 이 점은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야 하지만 지면 관계상 별고를 기약한다. 관련 도판 및 설명은 최완수, 앞의 책 1 (2009), pp. 90-143, 341-399 및 같은 책 3, pp. 45-167 참조 바람.

47) 최완수, 위의 책, pp. 350-357; 『고성 청간정』, pp. 54-58.

48) 최완수, 위의 책, pp. 379-385.

49) 姜世晃, 『豹菴遺稿』 卷4, 「送金察訪弘道金察訪應煥序」. 김홍도의 금강산도에 관해서는 박은순, 앞의 책, pp. 271-391; 진준현, 「김홍도의 금강산도에 대한 고찰」, 『서울대학교박물관 연보』 8 (서울대학교박물관, 1996), pp. 3-72; 동저,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 pp. 210-306. 19세기의 동향으로는 이영수, 「19세기 금강산도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동저, 「19세기 문인들의 백과사전식 저술활동과 금강산 그림」, 『한국고지도연구』 제11권 제2호 (2019. 12.), pp. 5-28.

50) <Table 2>의 작성을 위하여 박은순, 앞의 책; 진준현, 앞의 책; 김상성 외, 서울대 규장각 역, 앞의 책; 『선문대학교 박물관 명품도록』 Ⅱ, 회화편 (선문대학교박물관, 2000); 윤진영, 「옥소 권섭의 소장 화첩과 권신응의 회화」, 『장서각』 제20집 (2008. 10.), pp. 215-251;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Ⅰ,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서화도록 제26집 (국립중앙박물관, 2018) 등 참조.

51) 박지현, 「연객 허필 회화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4); 이보라, 앞의 논문 및 이 글 각주20의 논저 참조.

52) 『삼척 죽서루』 (국립춘천박물관, 2015), pp. 132-135; 윤진영, 앞의 논문, pp. 215-251.

53) 권섭에 대해서는 고연희, 『조선 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일지사, 2002), pp. 266-272; 이창희 역주, 『내 사는 곳이 마치 그림 같은데』 (도서출판 다운샘, 2003); 윤진영, 「옥소 권섭의 그림 취미와 회화관」,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제30권 제 1호 (2007), pp. 141-171.

54) 이외에 권신응의 《翎毛鱗甲帖》, 《寄懷帖》, 《夢畫帖》에 대한 내용은 윤진영, 앞의 논문(2008. 10.).

55) 윤진영, 위의 논문, pp. 223-228. 그런데 倣作은 “倣筆意”, “倣” 형식으로 화면에 모방한 대가를 명시해 창작방식의 일환으로 倣古 태도를 표방한 작품을 지칭한다. 화면에 재현대상의 장소명을 써서 화제로 삼은 권신응의 경우는 방작이 아니라 특정한 정선 화첩을 임모한 결과이다. 상응하는 사례로 조세걸의 《곡운구곡도》를 후대에 모방한 《임곡운구곡도》가 있다. 박효은, 앞의 논문(2021. 12) 참조 바람.

56) 『삼척 죽서루』, pp. 132-135의 <망양정도>, <월송정도>와 『겸재 정선』 1, p. 344 비교 바람.

57) 한정희, 「중국회화사에서의 복고주의」, 『한국과 중국의 회화』 (학고재, 1999), pp. 10-43; 동저, 「한·중·일 삼국의 방고회화 비교론」, 『동아시아 회화 교류사』 (사회평론, 2012), pp. 253-276.

58) 우학문화재단 《해악팔경·송유팔현첩》의 <해금강도>는 최완수, 앞의 책(1999), p. 164에 개인 소장으로 소개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작가미상의 <해금강도>(증 9888)는 유복렬, 『한국회화대관』(문교원, 1979), p. 342 및 도 181에 오세창-유복렬-손세기 소장의 정선 작품으로 소개되었고, 현재 e뮤지엄에서 이미지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59) 『삼척 죽서루』, p. 133에 <죽서루도> 우측에 배치된 이 글은 죽서루를 읊은 시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능파대도> 우측의 시문이 경포대를 읊었고 그 앞에 <경포대도>가 있다. 그림이 선행하고 뒤에 시문이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죽서루도> 우측의 시문은 능파대를 읊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60) 權燮, 《嶺東列景》, 「凌波臺」, 滄海黃莎 短短之丘 一奉圓淨 蔥蔥立立 晧白之石 一似千佛圍繞 作分外之奇絶 立小亭於其顚 又於後麓高處 作大閣則 必先數於關東八景.

61) 동해문화원 및 겸재정선미술관 발표시 필자는 『삼척 죽서루』, p. 133에 따라 권섭이 능파대를 관동팔경 중 최고로 꼽는 특이한 관동팔경 개념을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玉所集』, 「海山錄」의 ‘遊賞品題錄’에서 삼일포에서 청간정까지 관동팔경 하나하나를 차등있게 품평한 것을 보고서 탈초와 번역을 새로 시도해 본문 내용을 수정했다. 이 과정에 신영주, 류승민 선생의 도움을 받았기에 이 자리를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62) 이순미, 「단릉 이윤영의 회화세계」, 『미술사학연구』 242·243 (2004), pp. 255-289.

63) <능파대도>, 海石 名凌波臺 在三陟府 北東十里; <옥순봉도>, 江石 名玉筍 在淸風上流 丹陽初境; <화적연도>, 溪石 名禾積 距京百餘里. 도판은 『고려대학교박물관 명품도록』 (그라픽네트, 2008), 도 160.

64) 박효은, 앞의 논문(2005), pp. 85-93.

65) 정선이 그린 <옥순봉도>는 아직 접하지 못했지만, 옥순봉 옆에 있는 구담봉을 그린 <구담도>는 고려대학교박물관에 현존하기에 비교할 수 있다. 기록에서는 이병연이 소장한 《사군첩》에 있는 <龜島玉筍峯>이 해당 사례다. 趙裕壽, 『后溪集』 卷5, 「題一源所藏鄭畵四郡嶺南二帖」.

66) 이러한 면모의 저변에 화가 자신에 의한 회화의 상품화 현상이 자리잡고 있고, 미술시장과의 관련 하에 보다 면밀히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와 관련한 기존 논의는 본고 각주 45에 소개한 박효은의 논문 및 장진성, 「정선과 수응화」,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 항산 안휘준 교수 정년퇴임 기념 논문집 (사회평론, 2006), pp. 264-289 ; 동저, 「정선의 그림 수요 대응 및 작화방식」, 『동악미술사학』 11 (2010), pp. 221-236 등이 있다.

67) 유복렬, 앞의 책, p. 338. 石嵐 趙鶴永 舊藏品으로만 소개된 이 관동팔경도의 세부 내용은 알 수 없다.

Fig. 1.
鄭敾, <千佛嵓圖>, 《關東名勝帖》 Chŏng Sŏn, “Picture of the Thousand Buddhas Rocks,” in Album of Kwandong Myŏngsŭng ch’ŏp, 1738,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32.3×57. 8cm, Kansong Art Museum (Hyŏnamsa, Kyŏmjae Chŏng Sŏn 1, p.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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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추암 능파대 실경의 전체 경관> General view of the real-scenery landscape of the Terrace of Splendid Waves, Tonghae City,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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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추암 능파대의 촛대바위와 주변 암석들> Real-scenery landscape of Nŭngp’adae and Ch’ottaepawi Rock, Tonghae City,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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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1.
<촛대바위 세부> Detail of Ch’ot-taepawi Rock, Tonghae City,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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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鄭敾, <亭子淵圖>, 《關東名勝帖》 Chŏng Sŏn, “Picture of the Stream near a Pavilion,” in Kwandong Myŏngsŭng ch’ŏp, 1738,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32.2×57.7cm, Kansong Art Museum (Hyŏnamsa, Kyŏmjae Chŏng Sŏn 1, p. 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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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鄭敾, <侍中臺圖>, 《辛卯年楓嶽圖帖》 Chŏng Sŏn, “Picture of the Terrace of Attendance,” in Sinmyonyŏn P’ungakto ch’ŏp, 1711,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36.8×26.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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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傳 金弘道, <凌波臺圖>, 《海東名山圖》 Attributed to Kim Hongto, “Nŭngp’adae to,” in Haedong Myŏngsando, after 1788, Late Chosŏn or afterwards, Ink on Paper, 30.5×43.0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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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鄭敾, <海山亭圖>, 《辛卯年楓嶽圖帖》, Chŏng Sŏn, “Picture of the Pavilion Watching the Mountains and Sea,” in Sinmyonyŏn P’ungakto ch’ŏp, 1711,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36.8×26.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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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鄭敾, <七星巖圖>, 《海嶽傳 神帖》 Chŏng Sŏn, “Picture of the Big Digger Stone,” in Haeak Chŏnsin ch’ŏp, 1747,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32.0×17.4cm, Kansong Art Museum (Hyŏnamsa, Kyŏmjae Chŏng Sŏn 3, p. 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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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作者未詳, <海山亭圖>, 《關東 十境》 Anonymous, “Haesanjŏng to,” in Kwandong Sipkyŏng, around 1746, Late Chosŏn, Ink and color on Silk, 31.5×22.5cm,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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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李秉淵-鄭敾-洪遇箕 刻字>, Epigraph on a Rock by Lee Pyŏngyŏn, Chŏng Sŏn, and Hong Uki, carved on a rock on the left side of Yongch ’u Waterfall, Murŭnggye, Samhwadong, Tonghae City (Tonghae City, Research Report for the 3D Scan Digitalization of Epigraphs at Murŭng Valley, Tonghae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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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李秉淵-洪遇箕 刻字>, Epigraph on a Rock by Lee Pyŏngyŏn, and Hong Uki, adjacent to the flat boulder “Murŭngpansŏk” near Golden Orchid Pavilion, Murŭnggye, Samhwadong, Tonghae City (Tonghae City, Research Report for the 3D Scan Digitalization of Epigraphs at Murŭng Valley, Tonghae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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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鄭敾, <高城門巖觀日出圖>, 《辛卯年楓嶽圖帖》 Chŏng Sŏn, “Picture of Watching the Sunrise at Munam in Kosŏng,” in Sinmyonyŏn P’ungakto ch’ŏp, 1711,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36.0×37.9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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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鄭敾, <門巖觀日出圖>, 《海嶽傳神帖》 Chŏng Sŏn, “Picture of Watching the Sunrise at Munam,” in Haeak Chŏnsin ch’ŏp, 1747,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33.0×25.5cm, Kansong Art Museum (Hyŏnamsa, Kyŏmjae Chŏng Sŏn 3, p. 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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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鄭敾, <高城門巖圖>, 《海嶽八景·宋儒八賢帖》 Chŏng Sŏn, “Picture of Munam in Kosŏng,” in Haeak P’algyŏng Songyu P’arhyŏn ch’ŏp, mid-18th century,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25.0×19.2cm, Woohak Cultural Foundation (Hyŏnamsa, Kyŏmjae Chŏng Sŏn 3, p.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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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鄭敾, <侍中臺圖>, 《關東名勝帖》, Chŏng Sŏn, “Shijungdae to,” in Kwandong Myŏngsŭng ch’ŏp, 1738,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32.2×57.7cm, Kansong Art Museum (Hyŏnamsa, Kyŏmjae Chŏng Sŏn 1, p. 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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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鄭敾, <侍中臺圖>, 《海嶽傳神帖》, Chŏng Sŏn, “Shijungdae to,” in Haeak Chŏnsin ch’ŏp, 1747,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32.0×24.8cm, Kansong Art Museum (Hyŏnamsa, Kyŏmjae Chŏng Sŏn 3, p. 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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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傳 金弘道, <侍中臺圖>, 《海東名山圖》 Attributed to Kim Hongto, “Shijungdae to,” in Haedong Myŏngsando, after 1788, Late Chosŏn or afterwards, Ink on Paper, 30.5×43.0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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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權信應, <侍中臺圖>, 《嶺 東列景》 Kwŏn Sinŭng, “Shijungdae to,” in Album of Various Scenes in East Kangwŏn (Yŏngdongyŏlgyŏng), 1744, Late Chosŏn, Ink on Paper, 26.5×17.5cm, Private Collection (Ch’unch’ŏn National Museum, Chuksŏru Pavilion, Samch’ŏk, p. 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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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權信應, <海金剛圖>, 《嶺東列 景》 Kwŏn Sinŭng, “Picture of the Sea Diamond,” in Yŏngdongyŏlgyŏng, 174 4, Late Chosŏn, Ink on Paper, 26.5× 17.5cm, Private Collection (Ch’unch’ŏn National Museum, Chuksŏru Pavilion, Samch’ŏk, p.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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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權信應, <凌波臺圖>, 《嶺東列 景》 Kwŏn Sinŭng, “Nŭngp’adae to,” in Yŏngdongyŏlgyŏng, 174 4, Late Chosŏn, Ink on Paper, 26.5×17.5cm, Private Collection (Ch’unch’ŏn National Museum, Chuksŏru Pavilion, Samch’ŏk, p.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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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1.
鄭敾, <海金剛圖>, 《海嶽八景·宋儒八賢 帖》, Chŏng Sŏn, “Haegŭmgang to,” in Haeak P’algyŏng Songyu P’arhyŏn ch’ŏp, mid-18th century,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25.0×19.2cm, Woohak Cultural Foundation (Hyŏnamsa, Kyŏmjae Chŏng Sŏn 1, p. 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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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2.
李胤英, <凌波臺圖>, 《關東勝景圖》, Lee Yunyŏng, “Nŭngp’adae to,” in Kwandong Sŭnggyŏng to, 1750s, Late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22.5×57. 3cm, Korea University Museum (Graphicnet, Masterpieces of Korea University Museum, p. 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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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Chŏng Sŏn’s Representations of Famous Sights in East Kangwŏn
辛卯年楓嶽圖帖 海嶽傳神帖\ 海嶽傳神屛 海嶽圖屛 關東名勝帖 海嶽傳神帖 海嶽八景 海嶽八景·宋儒八賢帖
Sinmyonyŏn P’ungakto ch’ŏp
Haeak Chŏnsin ch’ŏp
Haeak Chŏnsin pyŏng
Haeakto byŏng
Kwandong Myŏngsŭng ch’ŏp
Haeak Chŏnsin ch’ŏp
Haeak P’algyŏng
Haeak P’algyŏng Songyu P’arhyŏn ch’ŏp
1711
1712
1724
c. 1732
1738
1747
c. 1753
mid-18th century
Possession of Sin T’aetong
Possession of Lee Pyŏngyŏn
Possession of Cho Yusu
Possession of Cho Chŏkmyŏng
Possession of Ch’oe Ch’angŏk
Possession of Songae(?)
Unidentified collector
Unidentified collector
National Museum of Korea Nonextant Nonextant Nonextant Kansong Art Museum Kansong Art Museum Kansong Art Museum Woohak Cultural Foundation
歙谷 Shijungdae *Shijungdae Chungch’u Pŏmwŏl Shijungdae 侍中臺 Shijungdae
Hŭpkok Shijungdae
通川 (Ongch’ŏn) Ongch’ŏn Ongch’ŏn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叢石亭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T'ongch'ŏn Ch’ongsŏkchŏng
Munam Munam Munam
高城 Kosŏng Munam Kwan Ilch’ul **Munam Kwan Ilch’ul Munam Kwan Ilch’u Kosŏng Munam
(Haesanjŏng) Haesanjŏng Haesanjŏng 海山亭 Haesanjŏng Haegŭmgang
Kosŏng Haesanjŏng Ch’ilsŏngam
(Samirho) Samirho Samirho Samilp’o 三日湖 Sasŏnjŏng (Samirho) Samilp’o
Samirho
杆城 淸澗亭
Kansŏng Ch’ŏngganjŏng
襄陽 Naksansa
Yangyang
江陵
Kangnŭng
三陟 竹西樓
Samch’ŏk Chuksŏru
蔚珍 望洋亭
Ulchin Mangyangjŏng
平海 越松亭
P’yŏnghae Wŏlsongjŏng
? 千佛嵓
Ch’ŏnburam

* Shijungdae Chungch’u Pŏmwŏl : Autumn Moonlight Voyage at Shijungdae 侍中臺中秋泛月

** Munam Kwan Ilch’ul : Watching the Sunrise at Munam 門巖觀日出

Table 2.
Other Representations of the Famous Sights in East Kangwŏn
Kwŏn Sinŭng, Yŏngdong Yŏlgyŏng
Anoumous, Kwandong Sipkyŏng
Hŏ P’il. Kwandong P’algyŏngto byŏng
Kang Sehwang, P’ungak Changyu ch’ŏp
Attributed to Kim Hongto, Kŭmgang Sagun ch’ŏp
Kim Hachong, Haesando ch’ŏp
Lee Ŭisŏng Haesando ch’ŏp/ Kwandong Myŏngsŭng ch’ŏp
Anonymous, Kŭmgangsan togwŏn
1744
c. 1746
mid-18th century
1788
After 1788
1816
Early 19th century
19th century
Possession of Kwŏn Sŏp
Possession of Kim Sangsŏng
Unidentified collector
Possession of Kang Sehwang
Unidentified collector
Possession of Lee Kwangmun
Unidentified collector
Unidentified collector
Private Collection Kyujanggak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Sŏnmun University Museum National Museum of Korea Private Collection National Museum of Korea Private Collection/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歙谷 侍中臺 Shijungdae Shijungdae Shijungdae Shijungdae
Hŭpkok Shijungdae
通川 甕遷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Ongch’ŏn Ongch’ŏn Ongch’ŏn
Ongch’ŏn
T’ongch’ŏn 叢石亭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Hwansŏnjŏng Hwansŏn kuji mangch'ongsŏk Hwansŏnjŏng Hwansŏnjŏng
Kŭmnan'gul
高城 海金剛 Haesanjŏng (Ch’ilsŏngam, Haegŭmgang) Haesanjŏng Haegŭmgang Haesanjŏng Haesanjŏng
front view Haegŭmgang Haegŭmgang Haegŭmgang
Haegŭmgang rear view Haegŭmgang Haegŭmgang Haegŭmgang
Taehojŏng Taehojŏng Taehojŏng
Kosŏng 三日浦 Samilp’o Samilp’o Samilp’o Samilho Samilho Samilp’o
Hyŏnjongam Hyŏnjongam Hyŏnjongam
Samilp’o Yŏngnangho Yŏngnangho
Kamho
杆城 Ch’ŏngganjŏng Ch’ŏngganjŏng Ch’ŏngganjŏng Ch’ŏngganjŏng Ch’ŏngganjŏng Ch’ŏngganjŏng
Kahakchŏng Kahakchŏng Kahakchŏng Kahakchŏng
Kansŏng (Yŏngnangho) Yŏngnangho
Nŭngp’adae
襄陽 洛山寺 Naksansa Naksansa Naksansa Naksansa Naksansa Naksansa
Kwanŭmgul Kwanŭmgul Kwanŭmgul
T’owangp’ok
Wasŏndae Wasŏndae Wasŏndae
Pisŏndae Pisŏndae
Yangyang Naksansa Kyejogul Kyejogul Kyejogul Kyejogul
Sŏrang Ssangp’ok
Sŏrang Chŏn’gyŏng
Sŏrang Kyŏngch’ŏnbyŏk
江陵 鏡浦臺 Kyŏngp’odae Kyŏngp’odae Kyŏngp’odae Kyŏngp’odae
Hohaejŏng Hohaejŏng
Hwallaejŏng
Kangnŭng Kyŏngp’odae Maehakchŏng
Ch’wijŏkchŏng
Ch’angsŏkchŏng
Mosŏnjae
三陟 竹西樓 Chuksŏru Chuksŏru Chuksŏru Chuksŏru Nŭngp’adae Chuksŏru
Chuksŏru Nŭngp’adae Nŭngp’adae
Samch’ŏk 凌波臺 Murŭnggye Murŭnggye
Nŭngp’adae Yongch’u Yongch’u
蔚珍 望洋亭 Mangyangjŏng Mangyangjŏng Mangyangjŏng Mangyangjŏng
Ulchin Mangyangjŏng Munam
Sŏngnyugul
平海 越松亭 (Wŏlsongjŏng) Wŏlsongjŏng Wŏlsongjŏng
P’yŏnghae Wŏlsongjŏng
? 牛巖
Uam
Table 3.
Chŏng Sŏn’s Representations of the Famous Sights in East Kangwŏn
辛卯年楓嶽圖帖 海嶽傳神帖 海嶽傳神屛 海嶽圖屛 關東名勝帖 嶺東列景原本畫帖 海嶽傳神帖 海嶽八景 海嶽八景·宋儒八賢帖
Shinmyonyŏn P’ungakto ch’ŏp
Haeak Chŏnshin ch’ŏp
Haeak Chŏnshin pyŏng
Haeakto byŏng
Kwandong Myŏngsŭng ch’ŏp
Original Album of Yŏngdong Yŏlgyŏng
Haeak Chŏnshin ch’ŏp
Haeak P’algyŏng
Haeak P’algyŏng Songyu P’arhyŏn ch’ŏp
1711
1712
1724
c. 1732
1738
After 1738 Before 1744
1747
c. 1753
mid-18th century
Possession of Sin T’aetong
Possession of Lee Pyŏngyŏn
Possession of Cho Yusu
Possession of Cho Chŏkmyŏng
Possession of Ch’oe Ch’angŏk
Kwŏn Sŏp or a close confident
Unidentified collector
Unidentified collector
Unidentified collector
National Museum of Korea Nonextant Nonextant Nonextant Kansong Art Museum Nonextant Kansong Art Museum Kansong Art Museum Woohak Cultural Foundation
歙谷 Shijungdae *Shijungdae Chungch’u Pŏmwŏl Shijungdae 侍中臺 侍中臺 Shijungdae
Hŭpkok Shijungdae Shijungdae
通川 (Ongch’ŏn) Ongch’ŏn 甕遷 Ongch’ŏn
Ongch’ŏn
T’ongch’ŏn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叢石亭 叢石亭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Ch’ongsŏkchŏng
Munam Munam Munam
高城 Kosŏng Munam Kwan Ilch’ul **Munam Kwan Ilch’ul Munam Kwan Ilch’u Kosŏng Munam
(Haesanjŏng) Haesanjŏng Haesanjŏng 海山亭 海金剛 Haesanjŏng Haegŭmgang
Kosŏng Haesanjŏng Haegŭmgang Ch’ilsŏngam
(Samirho) Samirho Samirho Samilp’o 三日湖 三日浦 Sasŏnjŏng (Samirho) Samilp’o
Samirho Samilp’o
杆城 淸澗亭
Kansŏng Ch’ŏngganjŏng
襄陽 洛山寺 Naksansa
Yangyang Naksansa
江陵 鏡浦臺
Kangnŭng Kyŏngp’odae
三陟 竹西樓 竹西樓
Chuksŏru Chuksŏru
Samch’ŏk 千佛嵓 凌波臺
Ch’ŏnburam Nŭngp’adae
蔚珍 望洋亭 望洋亭
Ulchin Mangyangjŏng Mangyangjŏng
平海 越松亭 越松亭
P’yŏnghae Wŏlsongjŏng Wŏlsongjŏng
? 牛巖
Uam

* 侍中臺 中秋泛月 Shijungdae Chungch’u Pŏmwŏl : Autumn Moolight Voyage at Shijungdae

** 門巖觀日出 Munam Kwan Ilch’ul : Watching the Sunrise at Mun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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