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7;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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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22년 1월 20일 동해시장 수신, 관광과장·문화체육과장 참조로 제출된 최준석(동해문화원 자문위원)의 민원「겸재 정선의 관동명승첩 천불암 그림 게시 요청」 및 근거자료 참조.
3) 정선의 생애와 작품세계를 논의한 대표적인 연구는 김리나, 「정선의 진경산수」, 『겸재 정선』 한국의 미 1 (중앙일보사, 1977; Lee, Lena Kim, “Chŏng Sŏn: A Korean Landscape Painter,” Apollp, No. 78, London, 1968. 8), pp. 159-170; 유준영,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고찰」, 『고문화』 18(1980; Joon-young Yu, “Chŏng Sŏn: ein Koreanischer Landschafts maler aus der Yi Dynastie,” Inaugural Dissertation zur Erlangung des Doktorgrades der Philosophischen Fakultät der Universität zu Köln, 1976), pp. 48-59; 이동주, 「겸재일파의 진경산수」, (학고재, 1995; 『월간아세아』 1969. 4.), pp. 214-259; 이태호, 「겸재 정선의 가계와 생애」, 『이대사학연구』 13·14 (1983. 6.), pp. 83-93; 동저, 「조선 후기 진경산수의 발달과 퇴조」, 『진경산수화』 (국립광주박물관, 1991); 최완수, 『겸재 정선 진경산수화』 (범우사, 1993; 「謙齋眞景山水畵考」, 『澗松文華』 21·29·35·45, 1981·1985·1988·1993); 동저, 『겸재를 따라가는 금강산 여행』 (대원사, 1999); 동저, 『겸재정선』 1·2·3 (현암사, 2009); 박은순, 『금강산도 연구』 (일지사, 1997); 변영섭, 「진경산수화의 대가 정선」, 『미술사논단』 5(1997. 10), pp. 139-164; 유홍준, 『화인열전: 내 비록 환쟁이라 불릴지라도』 1 (역사비평사, 2001), pp. 183-324 등.
4) 능파대, 해암정, 무릉계는 조선시대에 삼척부에 속했으나 동해가 시로 승격된 1980년부터 동해시의 명소가 되었다. 동해시청 누리집의 https://www.dh.go.kr/pages/sub.htm?nav_code=dh1470759114 참조.
5) 2022년 11월 14일, 필자는 동해시청 박찬형 학예연구사의 도움으로 능파대, 해암정과 무릉반석, 용추폭포의 현장을 답사했고 민원 내용을 다양하게 검토, 확인하였다. 참고한 논저는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역, 『完譯 陟州集』 (삼척시, 1997); 관동대학교 영동문화연구소 편, 『東海市 金石文集』 (동해문화원, 2002); 심의승 편, 배재홍 역, 『국역 삼척군지』 (삼척시립박물관, 2009); 『先祖의 文化遺蹟』 海巖亭·海雲亭 篇 (삼척심씨대종회, 2015); 『동해시 무릉계곡 금석문 3D 스캔 기록화 사업 조사보고서』 (동해시청, 2018); 이상균, 「동해 무릉계 명승 탄생의 문화사적 배경」, 『문화재』 제52집 제1호(2019), pp. 22-43 등이다.
6) 지역별 실경산수화 연구의 시작은 이태호, 『그림으로 본 옛서울』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1995); 『몽유금강: 그림으로 보는 금강산 300년』 (일민미술관, 1999); 『아름다운 금강산』 (국립중앙박물관, 1999); 문동수, 「강원도와 진경산수화」, 『우리 땅, 우리의 진경: 조선시대 진경산수화 특별전』 (국립춘천박물관, 2002), pp. 290-298 등. 2003년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의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개발 및 그 응용 연구>에 참여한 이래 2004년 동국대학교 김상현 교수의 <미술사문헌연구> 박사과정 수업시 「불교 소재의 금강산도 연구」, 2005년 서울대학교 안휘준 교수의 <한국회화사연구Ⅰ> 석박사과정 통합수업시 「서울과 경기지역을 재현한 산수화의 비교」를 발표한 필자는 2005년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관동팔경 답사>를 도왔고, 「산수화 속의 경기도」, 『옛그림 속의 경기도』 (경기문화재단, 2005), pp. 38-103를 집필했다.
7) 이보라, 「조선시대 관동팔경도의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6); 최윤정, 「조선후기 금강산의 불교」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8); 이순미, 「조선후기 충청도 四郡山水圖 연구」, 『강좌미술사』 27 (2006), pp. 285-315; 동저, 「조선후기 겸재화파의 한양실경산수화 연구」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2); 박정애, 「조선후기 관서명승도 연구」, 『미술사학연구』 258 (2008.6), pp. 105-139; 동저, 『조선시대 평안도 함경도 실경산수화』 (성균관대학교출판부, 2014); 이상균, 「조선시대 관동유람의 유행배경」, 『인문과학연구』 31 (2011), pp. 167-196; 윤진영, 「조선후기 서촌의 명소와 진경산수화의 재조명」, 『서울학연구』 50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13), pp. 69-107; 『그림과 책으로 만나는 충북의 산수』 (국립청주박물관, 2014); 『우리 강산을 그리다: 화가의 시선,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국립중앙박물관, 2019).
8) 박효은, 「南京을 재현한 명말청초 산수판화와 회화」, 『명청사연구』 43 (2015), pp. 83-127; 동저, 「17-19세기 한국화가의 중국 도시 인식과 그 표현」, 『명청사연구』 46 (2016), pp. 319-360; 동저, 「南京과 揚州를 그린 17-18세기 중국 산수화와 후원자」, 『미술사학』 36 (2018), pp. 247-278.
10) 김울림, 「김홍도의 관동사경과 울진 문암」, 『한국고지도연구』 제11호 제2집 (2019. 12), pp. 29-50; 박효은, 「그림 속으로 들어간 간성의 명소, 청간정」, 같은 책, pp. 51-72; 김세호, 「조선시대 간성 선유담의 문화사」, 같은 책, pp. 73-89.
11) 양사언(楊士彦, 1517~1584)의 「千佛洞記」를 인용한 홍경모(洪敬謨, 1774~1851)의 견해: 洪敬謨, 『冠巖遊史』 卷 13, 「海嶽傳神帖小記」; 최완수, 앞의 책(1999), pp. 193-196. 이것이 실제에 부합하는지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북한지역정보넷> http://www.cybernk.net/에서 천불동을 검색하면 “외금강 천불동 구역”의 설명과 千佛山, 千佛川, 千佛瀑布 등에 대한 설명도 보이는데, 그 위치가 만물상과 다르다.
12) 혹자를 인용한 홍경모의 언급과 박사해(朴師海, 1711~1778)의 언급: 洪敬謨, 위의 글; 朴師海의 『蒼巖集』 卷7, 「玉京洞在甕遷南谷 一名千佛洞」; 최완수, 위의 책, pp. 194-197. 임도면을 찾아보면 혹자가 말한 장소와 박사해가 언급한 곳이 같음을 알 수 있다. http://www.atlaskorea.org/; http://www.cybernk.net/.
15) 이 글 각주1의 민원. 이 주장의 근거는 정선, 김이소, 이유, 김낙우, 이병[ ](연?)의 이름이 새겨진 용추폭포 각자, 이병연과 홍우기가 갑인년 3월에 다녀갔다는 내용의 무릉반석 각자, 김창흡이 해암정에 남긴 시구와 차운한 편액들, 동해안에서 희게 빛나며 군립해 솟은 유일한 해안석림임을 확인한 답사결과 등이다.
16) e뮤지엄(https://emuseum.go.kr/)의 부산광역시립박물관 소장 사진엽서 <외금강 만물상 천불암> 참조.
18) e뮤지엄의 조선민화박물관 소장 10폭 병풍 <금강산도> 참조. 이 병풍에는 자동차, 철도, 증기선과 근대식 건물이 그려져 있고 20세기에 새로 개발된 구만물상, 오만물상 등의 지역, 구룡폭포 부근 암벽에 김규진이 1919년 여름에 새긴 “彌勒佛” 각자 등이 그려져 있어 20세기 작품임을 알 수 있다.
20) 김상성 외, 서울대 규장각 역, 『(시화첩) 관동십경』 (효형출판, 1999); 김남기, 「《관동십경》의 제작과 시세계 연구」, 『한국한시연구』 14 (2006), pp. 303-330.
25) 『東海市 金石文集』, pp. 221, 214, 219; 『先祖의 文化遺蹟』, pp. 97-98, 113, 92-93에 全文이 실려 있다. 삼척부사 재임 사실은 『국역 삼척군지』, pp. 234-236. 이외에도 『先祖의 文化遺蹟』, pp. 103-104에 실린 李周赫의 「敬次三淵先生板上韻」에 “천불이 만경창파에 절하는 듯(千佛齊拱萬頃瀾)” 구절도 있다.
29) 『동해시 무릉계곡 금석문 3D스캔 기록화 사업 조사보고서』, 용추폭포-금석문-111의 “金履素·履裕·金樂祐” 각자는 김창집 후손 김이소(1735~1798)와 동생 김이유 및 김낙우를 가리키며 훨씬 후대의 방문 결과이다.
33) 경화세족과 화단의 관계는 강명관, 「조선 후기 경화세족과 고동서화 취미」, 『한국의 경학과 한문학: 죽부 이지형 교수 정년퇴임 기념논총』 (태학사, 1996), pp. 765-802; 홍선표, 「조선 후기 회화의 애호풍조와 감평활동」,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미술사논단』 5, 1997. 10.), pp. 231-254; 박효은, 「조선 후기 문인들의 회화수집활동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6.). 최창억은 윤덕희(尹德熙, 1685~1776)의 <수노인도>, <마도>를 헌정받기도 했다. 최완수, 앞의 책 1 (2009), pp. 389-395; 차미애,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 (사회평론, 2014), pp. 157, 365-366.
34) 『우리 강산을 그리다』, pp. 18-23; 이수미, 「十六世紀 實景山水畫 이해의 확장: 〈鏡浦臺圖〉, 〈叢石亭圖〉를 중심으로」, 『美術資料』 96 (2019. 12), pp. 18-53.
35) <Table 1>의 작성을 위해 이 글 각주3의 최완수, 박은순, 각주7의 이보라 등의 논저를 참고하였다.
36) 박은순, 앞의 책, pp. 70-77은 총도식/전도식vs화첩식 표현형식을 주목했고, 이영수, 「민화 금강산도에 관한 고찰」, 『미술사연구』 14 (2000), pp. 99-136은 총람도식vs명소도식으로 분류했으며, 홍선표, 「금강산도의 발생과 발전」, 『조선시대 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pp. 471-478에서 지도식 전경도vs유람 장소별 각경도로 분류했다. 필자는 동아시아 산수화의 보편적 화면구성 형식으로서의 전경도vs각경도를 주목한다. 박효은, 앞의 논문(2018).
38) 박효은, 앞의 논문(1999.6), pp. 84-87; 동저, 「문화한 장원: 1804년작 《임곡운구곡도》의 회화사적 고찰」, 『한국문학과예술』 제40집 (2021. 12), pp. 381-420에서 17세기 이래 서울경기 문인들의 회화수집활동 가운데 안동 김씨의 경우, 한시각이 1664년에 그린 시화첩 《북관수창록》, 조세걸이 1682년에 그린 시화첩 《곡운구곡도》 및 1804년 임모작의 제작을 이끈 김수항, 김수증의 기여와 후대에의 영향이 언급되었다. 《북관수창록》의 전경도·각경도, “몸소 다니며 본 것을 그린” 《곡운구곡도》의 각경도가 후손에게 전수되고 방문자 사이에 열람되었기에 18~19세기에 미친 17세기의 영향을 주시하게 된다. 《곡운구곡도》는 1712년 《해악전신첩》을 그리던 즈음의 정선에게 열람된 듯하다. 이경화, 「해악전신: 정선의 1712년 금강산도 제작에 관한 재고」, 『미술사와 시각문화』 25 (2020), pp. 109-112.
39) 작품의 제작맥락은 최완수의 논저를 참고했고, 소장자 신태동은 이경화, 「정선의 《신묘년풍악도첩》: 1711년 금강산 여행과 진경산수화의 형성」, 『미술사와 시각문화』 11 (2012), pp. 192-225.
40) 趙裕壽, 『后溪集』 卷8, 「李一源海山一覽帖跋」. 시화의 관계는 김형술, 「海嶽傳神帖에 나타난 詩畫 교섭의 새 양상」, 『한국한문학연구』 45 (2010), pp. 403-435.
42) 박은순, 앞의 책, pp. 135-138에서 정선의 <장안사도>에 있는 비홍교를 들어 기행사경 초기에 만든 초본을 평생 활용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1747년 《해악전신첩》이 금강산 여행과 기행사경의 산물임을 의심하진 않았다. 1747년 정선의 금강산 기행사경설에 회의적임을 공개적으로 처음 표명한 것은 유홍준, 앞의 책, p. 300이고, 이경화, 앞의 논문(2020), pp. 102-108은 1712년 《해악전신첩》 복원을 위해 1711년 《신묘년풍악도첩》과 1747년 《해악전신첩》의 구성을 비교했다. 필자는 화고와 화본의 활용을 관동명승의 재현에 적용하려는 것으로, 박효은, 「《석농화원》을 통해 본 한·중 회화후원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3), pp. 200-236에서 기본발상이 언급되었다.
43) 趙裕壽, 『后溪集』 卷8, 「答李一源」 및 卷2, 「題四帖小屛五絶 一帖各三首」. 최완수 선생의 논저에서 사대부 문인화가 정선의 신분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줄곧 인용된 이 자료는 이병연의 중개를 통해 정선의 금강산도 4폭을 그려받고자 한 조유수의 주문행위로 달리 해석된 바 있다. 박효은, 「18세기 조선 문인들의 회화수집활동과 화단」, 『미술사학연구』 233·234 (2002. 6), pp. 158-159.
45) 이와 관련해 후원자 이병연과 정선의 독특한 관계나 정선의 예술가적 성장 및 시장 개척 면모가 지적된 바 있다. 박효은, 앞의 논문(2002; 2005); 동저, 「17-19세기 조선화단과 미술시장의 다원성」, 『근대미술연구』 (2006), pp. 127-135.
46) 이 점은 좀 더 자세히 설명되어야 하지만 지면 관계상 별고를 기약한다. 관련 도판 및 설명은 최완수, 앞의 책 1 (2009), pp. 90-143, 341-399 및 같은 책 3, pp. 45-167 참조 바람.
49) 姜世晃, 『豹菴遺稿』 卷4, 「送金察訪弘道金察訪應煥序」. 김홍도의 금강산도에 관해서는 박은순, 앞의 책, pp. 271-391; 진준현, 「김홍도의 금강산도에 대한 고찰」, 『서울대학교박물관 연보』 8 (서울대학교박물관, 1996), pp. 3-72; 동저,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 pp. 210-306. 19세기의 동향으로는 이영수, 「19세기 금강산도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6); 동저, 「19세기 문인들의 백과사전식 저술활동과 금강산 그림」, 『한국고지도연구』 제11권 제2호 (2019. 12.), pp. 5-28.
50) <Table 2>의 작성을 위하여 박은순, 앞의 책; 진준현, 앞의 책; 김상성 외, 서울대 규장각 역, 앞의 책; 『선문대학교 박물관 명품도록』 Ⅱ, 회화편 (선문대학교박물관, 2000); 윤진영, 「옥소 권섭의 소장 화첩과 권신응의 회화」, 『장서각』 제20집 (2008. 10.), pp. 215-251; 『조선시대 실경산수화』 Ⅰ,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서화도록 제26집 (국립중앙박물관, 2018) 등 참조.
53) 권섭에 대해서는 고연희, 『조선 후기 산수기행예술 연구』 (일지사, 2002), pp. 266-272; 이창희 역주, 『내 사는 곳이 마치 그림 같은데』 (도서출판 다운샘, 2003); 윤진영, 「옥소 권섭의 그림 취미와 회화관」, 『한국학(구 정신문화연구)』 제30권 제 1호 (2007), pp. 141-171.
55) 윤진영, 위의 논문, pp. 223-228. 그런데 倣作은 “倣筆意”, “倣” 형식으로 화면에 모방한 대가를 명시해 창작방식의 일환으로 倣古 태도를 표방한 작품을 지칭한다. 화면에 재현대상의 장소명을 써서 화제로 삼은 권신응의 경우는 방작이 아니라 특정한 정선 화첩을 임모한 결과이다. 상응하는 사례로 조세걸의 《곡운구곡도》를 후대에 모방한 《임곡운구곡도》가 있다. 박효은, 앞의 논문(2021. 12) 참조 바람.
57) 한정희, 「중국회화사에서의 복고주의」, 『한국과 중국의 회화』 (학고재, 1999), pp. 10-43; 동저, 「한·중·일 삼국의 방고회화 비교론」, 『동아시아 회화 교류사』 (사회평론, 2012), pp. 253-276.
58) 우학문화재단 《해악팔경·송유팔현첩》의 <해금강도>는 최완수, 앞의 책(1999), p. 164에 개인 소장으로 소개되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작가미상의 <해금강도>(증 9888)는 유복렬, 『한국회화대관』(문교원, 1979), p. 342 및 도 181에 오세창-유복렬-손세기 소장의 정선 작품으로 소개되었고, 현재 e뮤지엄에서 이미지 다운로드가 가능하다.
59) 『삼척 죽서루』, p. 133에 <죽서루도> 우측에 배치된 이 글은 죽서루를 읊은 시로 소개되었다. 하지만, 앞에 있는 <능파대도> 우측의 시문이 경포대를 읊었고 그 앞에 <경포대도>가 있다. 그림이 선행하고 뒤에 시문이 이어진 것이다. 따라서 <죽서루도> 우측의 시문은 능파대를 읊은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61) 동해문화원 및 겸재정선미술관 발표시 필자는 『삼척 죽서루』, p. 133에 따라 권섭이 능파대를 관동팔경 중 최고로 꼽는 특이한 관동팔경 개념을 가진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玉所集』, 「海山錄」의 ‘遊賞品題錄’에서 삼일포에서 청간정까지 관동팔경 하나하나를 차등있게 품평한 것을 보고서 탈초와 번역을 새로 시도해 본문 내용을 수정했다. 이 과정에 신영주, 류승민 선생의 도움을 받았기에 이 자리를 빌어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63) <능파대도>, 海石 名凌波臺 在三陟府 北東十里; <옥순봉도>, 江石 名玉筍 在淸風上流 丹陽初境; <화적연도>, 溪石 名禾積 距京百餘里. 도판은 『고려대학교박물관 명품도록』 (그라픽네트, 2008), 도 160.
65) 정선이 그린 <옥순봉도>는 아직 접하지 못했지만, 옥순봉 옆에 있는 구담봉을 그린 <구담도>는 고려대학교박물관에 현존하기에 비교할 수 있다. 기록에서는 이병연이 소장한 《사군첩》에 있는 <龜島玉筍峯>이 해당 사례다. 趙裕壽, 『后溪集』 卷5, 「題一源所藏鄭畵四郡嶺南二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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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myonyŏn P’ungakto ch’ŏp |
Haeak Chŏnsin ch’ŏp |
Haeak Chŏnsin pyŏng |
Haeakto byŏng |
Kwandong Myŏngsŭng ch’ŏp |
Haeak Chŏnsin ch’ŏp |
Haeak P’algyŏng |
Haeak P’algyŏng Songyu P’arhyŏn ch’ŏ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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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 |
1712 |
1724 |
c. 1732 |
1738 |
1747 |
c. 1753 |
mid-18th centu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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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session of Sin T’aetong |
Possession of Lee Pyŏngyŏn |
Possession of Cho Yusu |
Possession of Cho Chŏkmyŏng |
Possession of Ch’oe Ch’angŏk |
Possession of Songae(?) |
Unidentified collector |
Unidentified collecto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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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tional Museum of Korea | Nonextant | Nonextant | Nonextant | Kansong Art Museum | Kansong Art Museum | Kansong Art Museum | Woohak Cultural Foundation | |
歙谷 | Shijungdae | *Shijungdae Chungch’u Pŏmwŏl | Shijungdae | 侍中臺 | Shijungdae | |||
Hŭpkok | Shijungdae | |||||||
通川 | (Ongch’ŏn) | Ongch’ŏn | Ongch’ŏn | |||||
(Ch’ongsŏkchŏng) | Ch’ongsŏkchŏng | 叢石亭 | Ch’ongsŏkchŏng | Ch’ongsŏkchŏng | Ch’ongsŏkchŏng | |||
T'ongch'ŏn | Ch’ongsŏkchŏng | |||||||
Munam | Munam | Munam | ||||||
高城 | Kosŏng Munam Kwan Ilch’ul | **Munam Kwan Ilch’ul | Munam Kwan Ilch’u | Kosŏng Munam | ||||
(Haesanjŏng) | Haesanjŏng | Haesanjŏng | 海山亭 | Haesanjŏng | Haegŭmgang | |||
Kosŏng | Haesanjŏng | Ch’ilsŏngam | ||||||
(Samirho) | Samirho | Samirho | Samilp’o | 三日湖 | Sasŏnjŏng (Samirho) | Samilp’o | ||
Samirho | ||||||||
杆城 | 淸澗亭 | |||||||
Kansŏng | Ch’ŏngganjŏng | |||||||
襄陽 | Naksansa | |||||||
Yangyang | ||||||||
江陵 | ||||||||
Kangnŭng | ||||||||
三陟 | 竹西樓 | |||||||
Samch’ŏk | Chuksŏru | |||||||
蔚珍 | 望洋亭 | |||||||
Ulchin | Mangyangjŏng | |||||||
平海 | 越松亭 | |||||||
P’yŏnghae | Wŏlsongjŏng | |||||||
? | 千佛嵓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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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ak Chŏnshin ch’ŏ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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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eak Chŏnshin ch’ŏp |
Haeak P’algyŏng |
Haeak P’algyŏng Songyu P’arhyŏn ch’ŏ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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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11 |
1712 |
1724 |
c. 1732 |
1738 |
After 1738 Before 1744 |
1747 |
c. 1753 |
mid-18th century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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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session of Sin T’aetong |
Possession of Lee Pyŏngyŏn |
Possession of Cho Yusu |
Possession of Cho Chŏkmyŏng |
Possession of Ch’oe Ch’angŏk |
Kwŏn Sŏp or a close confid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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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川 | (Ongch’ŏn) | Ongch’ŏn | 甕遷 | Ongch’ŏn | |||||
Ongch’ŏn | |||||||||
T’ongch’ŏn | (Ch’ongsŏkchŏng) | Ch’ongsŏkchŏng | 叢石亭 | 叢石亭 | Ch’ongsŏkchŏng | Ch’ongsŏkchŏng | Ch’ongsŏkchŏng | ||
Ch’ongsŏkchŏng | Ch’ongsŏkchŏng | ||||||||
Munam | Munam | Munam | |||||||
高城 | Kosŏng Munam Kwan Ilch’ul | **Munam Kwan Ilch’ul | Munam Kwan Ilch’u | Kosŏng Munam | |||||
(Haesanjŏng) | Haesanjŏng | Haesanjŏng | 海山亭 | 海金剛 | Haesanjŏng | Haegŭmgang | |||
Kosŏng | Haesanjŏng | Haegŭmgang | Ch’ilsŏngam | ||||||
(Samirho) | Samirho | Samirho | Samilp’o | 三日湖 | 三日浦 | Sasŏnjŏng (Samirho) | Samilp’o | ||
Samirho | Samilp’o | ||||||||
杆城 | 淸澗亭 | ||||||||
Kansŏng | Ch’ŏngganjŏng | ||||||||
襄陽 | 洛山寺 | Naksansa | |||||||
Yangyang | Naksansa | ||||||||
江陵 | 鏡浦臺 | ||||||||
Kangnŭng | Kyŏngp’odae | ||||||||
三陟 | 竹西樓 | 竹西樓 | |||||||
Chuksŏru | Chuksŏru | ||||||||
Samch’ŏk | 千佛嵓 | 凌波臺 | |||||||
Ch’ŏnburam | Nŭngp’adae | ||||||||
蔚珍 | 望洋亭 | 望洋亭 | |||||||
Ulchin | Mangyangjŏng | Mangyangjŏng | |||||||
平海 | 越松亭 | 越松亭 | |||||||
P’yŏnghae | Wŏlsongjŏng | Wŏlsongjŏng | |||||||
? | 牛巖 | ||||||||
Ua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