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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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경주백탑 천궁 출토 문물은 현재 정식 보고서가 발간되지 않았으며, 관련 자료는 출토 당시의 상황을 정리한 간략보고서와 발굴 참여자가 출판한 소책자 그리고 간략보고서를 바탕으로 한 기초 연구가 있다. 德新·張漢君·韓仁信, 「內蒙古巴林右旗慶州白塔發現遼代佛教文物」, 『文物』 (1994, 12), pp. 4-33; 張漢君, 「遼代慶州白塔建塔碑銘考」, 『中國建築學會建築史學分會會議論文集』 (1994), pp. 41-49; 邱瑞中, 「遼慶州白塔佛教文物安置規矩與建塔緣起考」, 『內蒙古社會科學』 (1996, 4), pp. 35-40; 清格勒, 「遼慶州白塔塔身嵌飾的兩件紀年銘文銅鏡」, 『文物』 (1998, 9), pp. 67-68; 趙豐, 「遼慶州白塔所出絲綢的織染繡技藝」, 『文物』 (2000, 4), pp. 70-81; 劉志安, 「遼代釋迦佛舍利塔內出土的“無垢淨光大陀羅尼經”鎏金銀板」, 『北方文物』 (2002, 1), pp. 52-53; 韓仁信, 「遼慶州白塔文物志略與紀聞」 (中國戲劇出版社, 2005), pp. 1-255; 古松崇志, 「慶州白塔建立谜をさくる—11世纪契丹皇太后か奉纳した佛教文物」, 『遼文化·遼宁省調查報告書』 (京都大學大學院文科研究科, 2006), pp. 133-175; 王珊·李曉岑·陶建英·郭勇, 「遼代慶州白塔佛經用紙與印刷的初步研究」, 『文物』 (2019, 2), pp. 76-93과 96; 성서영, 「요 경주백탑 천궁 출토 칠불법사리탑의 유형과 봉안 의미」, 『선문화연구』 32(2022), pp. 331-384.
2) 봉함주은유금법사리탑의 탑찰은 복발, 3개의 보주, 풍탁이 달린 2개의 산개로 구성되었으며, 사리장엄구로는 보기 드물게 탑찰의 정점에 진주 장식을 문 봉황이 표현되었다. 이러한 특징과 내부에 안치된 경판은 간략보고서에서 이를 ‘鳳銜珠銀鎏金法舍利塔’라 명명한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독특한 디자인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미가 담겨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필자는 십자형의 진주 장식이 景教의 십자가가 아니라 마노석의 절리가 문양화되어 발전한 瑪瑙花紋을 표현한 것임을 밝혀냈다. 이는 成敘永, 「遼代瑪瑙花紋的實例與特征」, 『清華大學藝術博物館官刊』 1期(2021), pp. 46-59.
6) 경주백탑 찰좌 내부에서 두 개의 건탑비가 출토되었다. 간략보고서에는 碑首의 특징에 따라 「螭首造像建塔碑」와 「圓首建塔碑」로 구분하였다.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p. 9, 22-23, 그리고 33. 필자는 동일한 기조를 유지하여, 각각을 「조상비」와 「원수비」로 약칭하였다.
7) 古松崇志는 유금은경판에 근본다라니 공덕 중에서 망자의 추복 관련 내용만 새겨졌고, 음력 7월 15일 우란분절에 불사가 거행된 사실을 근거로 당시 건탑 불사가 성종의 추복을 빌기 위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위의 논문, pp. 153-157.
12) 「조상비」에는 “…相肚中安置金法舍利並四面安九十九本…”라 하였다. 여기에서 相肚는 상륜부의 복발을 말하며, 필자는 경주백탑 복발 내부의 오실을 ‘천궁 오실’이라 칭하였다. 필자와 달리 간략보고서에는 이를 ‘상륜당 오실’이라고 칭하고 있다. 相輪樘은 탑찰부 전체를 이르는 말이며, 경주백탑 탑찰부 복발과 찰좌에는 상술한 오실 외에도 여러 봉안 공간이 있어, 이에 대한 혼동을 막기 위해 복발 내 천궁 오실이라 하였다.
20) 요 황실에서 미륵 상생 신앙에 의거하여 법사리 및 공양물 안치한 사례는 경주백탑 건립 이전에 거행된 조양북탑 천궁 불사에서도 발견되며, 이에 관해서는 다른 논고에서 구체적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22) 「조상비」에서 장간다라니라고 지칭한 것은 경권을 기둥과 같은 형태로 둥글게 말았기 때문이다. 장간다라니는 「梵字相輪樘中陀羅尼呪」, 「佛形象中安置法舍利記」, 「四大陀羅尼呪」의 3종류로 구성되었다. 「범자상륜당중다라니주」만 紫铜板로 제작되었으며, 나머지는 모두 마종이 인쇄본이다. 즉, 자동판 상륜당중다라니주를 축으로 나머지 종이본 다라니주를 둥글게 말았으며, 이를 다시 명주로 싼 다음 법사리탑에 봉안하였다. 장간다라니 형식과 구성은 德新·張漢君·韓仁信, 앞의 논문, p.20; 성서영(2022), p.335 주7.
27) 경전에서 대공덕취다라니와 육바라밀다라니는 제개장보살이 부처를 모방하여 설하는 다라니로, 다라니 용도와 공덕만을 서술되었을 뿐, 구체적인 다라니 명칭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기존 연구에서는 다라니 공덕에 의거하여 각각을 ‘대공덕취다라니’와 ‘육바라밀다라니’라 지칭하고 있다.
31) 기존 연구에서 이를 모두 <석가설법도>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주존의 형상과 당시 정황을 고려할 때 이는 <미륵하생설법도>가 아닌가 한다. 필자는 2012년 12월 25일에 조양북탑 천궁에서 출토된 4편의 은편을 모두 친견 및 조사할 수 있었다. 휴일에도 불구하고 흔쾌히 조사를 허락해주신 조양북탑 박물관의 劉大志 부관장님, 王志华 연구원 그리고 孫唯舜 님께 다시 한번 무한한 감사를 드린다.
32) 필자는 <미륵하생설법도> 중에 요 흥종과 그의 정비 인의황후가 출현한 것은 이들에게 미륵 하생시 미륵에 귀의한 전륜성왕 양거와 그의 부인을 투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표현은 요 흥종 연간 요 황실에 성행했던 말법 신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성서영, 「조양북탑 탑부조상의 도상 연구」, 『미술사연구』 27(2013), pp. 195-196; 성서영, 앞의 논문, 369-375 그러나 이와 다른 관점도 있다. 먼저 조양북탑 발굴 조사 보고서에는 주존이 석가불이며, 두 인물은 각각 황제의 모습을 한 梵天과 황후의 모습을 한 帝釋天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았다. 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朝陽北塔博物館 編, 『朝陽北塔: 考古發掘與維修工程報告』 (文物出版社, 2007), p. 72; 이외에 김연미 역시 주존이 석가불이라고 보았으며, 『요사』 기록을 근거로 면류관을 쓴 인물은 황실 가족을 신격화한 형상일 수도 있다고 보았다. 김연미, 「요대 조양북탑 사리공과 진언종 여법존승법의 기원」, 『미술사와 시각문화』 10(2011), p. 189와 p. 209 주104.
33) 竺法護가 한역한 『佛說彌勒下生經』과 鳩摩羅什가 한역한 『佛說彌勒下生成佛經』 경전에는 미륵 하생시 염부제를 다스리는 전륜성왕은 ‘蠰佉’이며, 鳩摩羅什가 한역한 『佛說彌勒大成佛經』에는 ‘穰佉’, 義靜이 한역한 『彌勒下生成佛經』에는 ‘餉佉’라고 한역되었다.
38) 1947년 宿白이 북경대학교 도서관 필사본 정리 중 『永樂大典·順天府志』에 수록된 『析津志』을 발견하였다. 『析津志』의 편자 熊自得가 至元二十三年(1363)에 운강석굴을 직접 방문하여 필사한 金 皇统七年(1147)에 작성된 「大金西京武州山重修大石窟寺碑」이 포함되어 있었다. 비문에는 “…遼重熙十八年母后再修…”라 기술되었으며, 이를 통해 장성황태후가 운강석굴을 중수하도록 명하였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외에도 최근 운강석굴에서 요대 사원 유적이 발견되었다. 상술한 비문과 요대 사원 유적은 宿白, 「“大金西京武州山重修大石窟寺碑”校注——新发现的大同云岗石窟寺历史材料的初步整理」, 『北京大学学报(人文科学)』 (1956, 1), pp. 79-80; 雲岡石窟文物保管所·文物保護科學技術研究所, 「雲岡石窟建築遺跡的新發現」, 『文物』 (1976, 4), pp. 89-93; 宿白, 「大金西京武州山重修大石窟寺碑的發現與研究——與日本長廣敏雄教授討論有關雲岡石窟的某些問題」, 『北京大學學報(哲學社會科學版)』 (1982, 2), p. 31; 谷敏·張慶捷 等, 「雲岡石窟窟頂二區北魏遼金佛教寺院遺址」, 『考古學報』 (2019, 1), pp. 109-163.
39) 태후의 애책문은 田村實造·小林行雄,「慶陵: 東モンゴリアにおける遼代帝王陵とその壁畵に關する考古學的調査報告」(1953), pp. 233. 한역하면, “부지런히 실제를 구하였으며, 널리 육행의 나머지까지 완전히 하였다. 삼승의 뜻을 통달하였으며, 움직임은 반드시 사람의 마음에 화합하고, 정지함은 반드시 부처의 뜻을 따랐다.”
40) 화엄사 박가교장전 전각 내 梁에는 건립 시기 기록한 두 개의 묵서가 남아 있다. 각각은 “維重熙七年歲次, 戊寅九月甲午朔十五日戊申時建”와 “推誠竭節功臣, 大同軍節度使雲, 弘德等州觀察, 處置等使, 榮祿大夫檢校太尉, 同政事門下平章, 使持節雲州 諸軍事, 行雲州刺史, 上柱國, 弘農郡開國公, 食邑四千戶, 食實封四百戶楊又玄”이다. 이에 따르면, 박가교장전은 중희7년(1038)에 대동군 절도사 양우현의 책임 하에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황실 관련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처음 건립 시는 작은 소형 불전에 불과하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필자는 전각에 안치된 존상 내용과 특징으로 보아 실질적으로 황실 지원하에 건립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며, 다른 논고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41) 화엄사 박가교장전의 보살상의 고관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 그중에서도 ‘원통형 고관’은 일찍이 학계에서 큰 주목을 받았으며,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그러나 다른 종류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으며, 명칭 역시 보관의 주요 문양에 따라 각기 다르게 명명되고 있다. 필자는 형태에 근거하여, ‘변형 삼각형 고관’이라고 명명하였으며, 고관의 특징과 구체적 의미는 다른 논고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42) (南朝宋) 范晔, 『后漢書』 (中華書局, 1965), p. 3665. 이 부분의 내용은 “通天冠은 높이 9촌이고, 똑바로 세운다. 정수리에서 약간 비스듬하게 줄어들다가 곧게 내려 铁卷梁을 만든다. 앞에 山이 있고, 展筩으로 述을 만들며, 천자(乘輿)의 상복이다”. 乘輿은 고대 천자 혹은 제후가 타던 수레를 말하며, 황제의 별칭이기도 하다. 황제라는 명칭은 秦代 이후로 사용하였으므로, 천자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54) 혹자는 필자의 이러한 견해를 장성황태후의 환생 바램으로 이해하기도 한다. 그러나 요 거란족은 죽으면, 그 혼백을 국경 북쪽의 흑산(黑山)의 신이 관장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동짓날 천자는 백색의 양, 말, 기러기를 잡아 흑산을 향해 望祭를 지냈으며, 五京에서는 종이로 人馬 1만개를 만들어 흑산에 제사를 올리고 불에 태웠다. 거란인들은 이를 매우 두려워하여 제사를 올리지 않으면 흑산에 접근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는 (元) 脫脫, 앞의 책, p. 957. 요 흥종 연간 불교 문화가 절정에 이르렀고, 장성황태후도 독실한 불교신자였지만, 황실 내에서 거란족 특유의 샤머니즘적 습속과 믿음도 여전히 굳게 지켜졌다. 장성황태후에 대한 추가적인 기록 및 자료가 발견되지 않는 상태에서 장성황태후가 윤회에 기초한 환생까지 철저하게 받아들였는지는 현재 명확하게 입증할 수 없다.
55) 요대 다수의 귀족 묘장에서 鎏金冠이 다수 출토되었다. 대다수는 한차례 도굴된 이후 발견되어, 묘주를 정확히 확인할 수 없는 안타까운 실정이다. 그러나 남녀의 용도 구분이 명확하며, 문양도 조금씩 다르다. 여성 유금관은 양쪽에 긴 날개 모양의 관식이 달려 있어, ‘高翅冠’이라 명명되었다. 남성 유금관은 형태 혹은 장식 문양에 따라, 명칭이 ‘山冠’, ‘卷雲冠’, ‘蓮葉冠’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고 있다. 이외에도 보살관 형태의 보관을 ‘焊腰’라고 보는 관점도 있다. 賈璽增, 「遼代金冠」, 『收藏家』 (2011), pp. 96-113; 成敘永, 「遼代白衣觀音造像研究」, 『東亞都城和帝陵考古與契丹遼文化國際學術研討會文集』 (科學出版社, 2016), pp. 439-441.
57) 요대 귀족 유금관의 표면은 여러 문양으로 화려하게 투각되었으며, 이러한 특징은 불·보살상의 보관 표현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成敘永, 앞의 논문, pp. 439-441.
66) 張獻哲, 「山西臨猗發現兩幅五代絹畫」, 『文物』 (1984, 7), pp. 53과 102; 喬正安, 「臨猗縣仁壽寺北宋塔宮清理簡報」, 『文物季刊』 (1995, 1), pp. 19-24; 張總, 「風帽地藏像的由來與演進」, 『世界宗教文化』 (2012, 1), pp. 87-88.
67) 張總은 두 존상이 모두 지장보살을 표현하였으며, 주존 아미타와 함께 双지장의 구도를 이루고 있다고 보았다. 張總, 「風帽地藏像的由來與演進」, 『世界宗教文化』 (2012, 1), pp. 87-88.
68) 張暢耕은 95년 초고에서 응현목탑은 응주 출신인 인의황후와 그의 집안이 발원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후 수정 보완된 논문이 2001년 『遼金史論壇』6집에 실렸으며, 이후 대부분의 연구자들이 그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張暢耕·寧立新·支配勇, 「契丹仁懿皇后與應州寶宮寺釋迦塔」, 『遼金史論壇』6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1), p. 136.
69) 國家文物局文物保護科學技術研究所·山西省古代建築保護研究所·山西省雁北地區文物工作站·山西省應縣木塔文物保管所, 「山西應縣佛宮寺木塔內發現遼代珍貴文物」, 『文物』 6期 (1982), pp. 1-8; 閻文儒·傅振倫·鄭恩淮, 「山西應縣佛宮寺釋迦塔發現的『契丹藏』和遼代刻經」, 『文物』 6期 (1982), pp. 10-13.
71) 『묘법연화경』은 통상적으로 7권본이지만, 응현목탑 출토 本은 8권이다. 8권은 본래 권7의 「묘음보살품」, 「관세음보살보문품」, 「다라니품」, 「묘장엄왕본사품」, 「보현보살권발품」으로 구성되어 있다.
73) 외도의 형상은 王惠民, 「婆藪仙與鹿頭梵志」, 『敦煌研究』 2期(2002), pp. 64-70; 王惠民, 「執雀外道非婆藪仙辨」, 『敦煌研究』 1期(2010), pp. 1-7; 呂德廷, 『佛教藝術中的外道形象 ——以敦煌石窟為中心』, (蘭州大學博士學位論文, 2015), pp. 1-196.
81) 요대 시책의는 (元)脱脱, 앞의 책, pp. 930-931; 島田正郎, 「契丹の再生礼」, 『遼朝史の研究』 (東京, 1979), pp. 339-348(원문은 『民族學研究』 14권(1949)에 수록), 金渭顯, 『契丹社會文化史論』 (경인문화사, 2004), pp. 87-90(원문은 『거란의 土俗考』, 『明大論集』 15호, 1984).
82) 요대 재생의는 (元)脱脱, 위의 책, pp. 930-931; 島田正郎, 위의 책, pp. 321-338(원문은 『民族學研究』14권(1949)에 수록), 金渭顯, 위의 책, pp. 87-90.
85) 발해 서지촌 출토 입상은 孫元吉·變萬象, 「渤海故都上京龍泉府發現金佛」, 『北方文物』(1991), p. 17; 최성은, 「발해 상경성의 불상 - 동아시아 불교조각과의 비교연구-」, 『동북아역사논총』 27 (2010), p. 32; 허형욱, 「한국 고대 약사여래 신앙과 도상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 학위 논문(2017), pp. 197-203.
88) 요 상경 전적사 석굴은 남, 북, 중굴로 구성되었으며, 중굴과 남굴의 내벽 3면에는 발해풍의 나한상이 배치되어 있다. 李逸友, 「內蒙古巴林左旗前後昭廟的遼代石窟」, 『文物』 12期(1961), pp. 38-39. 발해풍의 조상에 관해서는 다른 논고에서 논의하고자 한다.
89) 필자와 달리 요대 미륵불 사상이 그다지 성행하지 않았다고 하거나, 혹은 상술한 존상을 미륵불로 보지 않는 견해도 있다. 藤原崇人, 『契丹仏教史の研究』 (法蔵館, 2015), pp. 191-192; 성서영, 앞의 논문, p. 330 주61.
94) 요대 운거사 방산석경 사업은 성종 대 시작되어 흥종, 도종 조에도 이어졌다. 도종의 출자는 도중에 중지되었으나, 通理大師 출자 발원으로 각경 사업은 계속될 수 있었다. 그 후 대안10년(1094)년에 출자금이 소진되었으며, 사문 善銳을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선사들의 유풍을 따르기로 뜻을 모았으며, 천경7년까지 지속되었다. 특히, 천경8년에는 도종과 통리대사의 주도하에 완성된 석경과 비문 총 4260편을 운거사의 서남쪽 지하 석실에 매장하였으며, 그 위에 석탑 1좌를 세웠다. 이것이 바로 운거사 남쪽에 세워진 壓經塔이며, 탑신에 사문 志才가 이상의 내용을 기술한 「涿州 涿鹿山 雲居寺 續密藏石經塔記」가 새겨져 있다. 林元白, 「房山雲居寺塔和石經」, 『文物』 Z1期(1961), p. 67; 陳述, 앞의 책, pp. 328-330; 塚本善隆, 『中国近世仏教史の諸問題』 (大東出版社, 1975), pp. 493-536. 상술한 「연화면경」은 천경5년에 陳國別胥가 시주하였으며, 金吾太师 참여하였고, 志核가 새겼다. 여기서 진국별서는 蕭義의 부인이자, 天祚帝 德妃의 어머니이다. 장녀가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었으며, 이러한 이유로 각경 사업에 많은 시주를 하였으며, 적지 않은 기록이 「전요문」에 남아 있다. 陳述, 앞의 책, p. 299, 309-313.
Date | Activities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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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重熙十六年 二月 十五日 | 啟土開掘地宮 Dig up the earth and initiate the excavation of the underground palace |
The 15th day of the second month,the 16th year of the Chongxi reign | ||
2 | 重熙十六年 四月 十七日 | 下葬舍利 Bury sarira |
The 16th day of the fourth month,the 16th year of the Chongxi reign | ||
3 | 重熙十六年 四月 十七日―重熙十八年 六月 十五日 | 積功及第七級并随級內葬讫舍利11 |
From the 17th of the fourth month,the 16th year of the Chongxi reign to the 15th day of the sixth month,the 18th year of the Chongxi reign | Accumulate merits up to the seven stories and enshrine sarira in each story until its completion | |
4 | 重熙十八年 七月 十五日 | 於相肚中安置金法舍利並四面安九十九本棖竿陀羅尼及諸供具莫不依法臻至嚴簡潔安置供養金具奉 |
The 15th day of seventh month,the 18th year of the Chongxi reign | Enshrine the gold dharma-sarira in the middle of the inverted bowl; enshrine ninety-nine pillars type dharanis and all the Buddhist ritual and ceremonial utilities in other four rooms. There is nothing that are not enshrined when precisely and concisely following the dharma. |
Literatures | Historic Record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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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後漢書』 卷30 「與服志」 | 通天冠, 高九寸, 正竖, 頂少邪却, 乃直下为鐵卷梁. 前有山, 展筩为述, 乘輿所常服. |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30 of Hou Hanshu(Book of Later Han) | The Heaven-connecting crow n is nine cun high and stands upright. It is slightly shrunk and tilted on the top and then straightly descends at its back, forming iron-rolled strings. It has a mountain-shaped decoration in the front and is adorned with Zhantong. It is the ordinary clothes of a son of Heaven. |
『晉書』 卷25 「與服志」 | 通天冠, 本秦制. 高九寸, 正豎, 頂少斜卻, 乃直下, 鐵為卷梁. 前有展筒, 冠前加金博山述, 乘輿所常服也. |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25 of Jinshu(Book of Jin) | The Heaven-connecting crown was originally from the etiquettes of Qin. It is nine cun high and stands upright. It is slightly shrunk and tilted up on the top and slightly descends at its back, making iron-rolled strings. At the front it has a Zhantong decoration, as well as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added. It is the ordinary clothe of a son of Heaven43. |
『南齊書』 卷17 「與服志」44 | 通天冠, 黑介幘, 金博山顏, 絳纱袍, 皁缘中衣, 乘輿常朝所服. |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17 of Nanqishu(Book of Southern Qi) | The Heaven-connecting crown has a black head-kerchief and a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attached to the front. (It is usually goes with) the Crimson Gauze Robe, Tunic with black fringes. They are the clothes of the emperors for the daily imperial court. |
『舊唐書』 卷45 「與服志」45 | 通天冠, 加金博山, 附蟬十二首, 施珠翠, 黑介幘, 髮纓翠綏, 玉若犀簪導. |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45 of Jiu Tangshu(Old History of the Tang Dynasty) | The Heaven-connecting crown is added with a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attached with twelve cicadas and is exerted with pearls and jades. It has a black headkerchief, hair straps, tassels made from kingfisher feathers, and jade-like rhinoceros hairpins. |
『新唐書』 卷24 「車服志」46 | 通天冠者, 冬至受朝賀, 祭還, 燕群臣, 養老之服也. 二十四梁, 附蟬十二首, 施珠翠, 金博山, 黑介幘, 組纓翠緌, 玉犀簪導. |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45 of Xin Tangshu(New History of the Tang Dynasty) | The Heaven-connecting crown is wore when the Emperors receives congratulatory ceremonies at the winter solstice, returns from the sacrifical rituals, feast the various ministers, and bestow the elderly (family members). It has twenty-four strings, is attached with twelve cicadas, and exerted with pearls and jades, It has a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black head-kerchief, silk straps, tassels made from kingfisher feathers, and jade rhinoceros hairpins. |
『遼史』 卷56 「儀衛志」 | 皇帝通天冠, 諸祭還, 及冬至, 朔日受朝, 臨軒拜王公, 元會, 冬會服之. 冠加金博山, 附蝉十二, 首施珠翠. 黑介帻, 髮缨翠, 玉犀簪導. |
“Treatise on Carriages and Dress,” Vol. 56 of Liaoshi(History of Liao) | The emperor’s Heaven-connecting crown is wore when they returns from sacrificial rituals, receives congratulatory ceremonies at the winter solstice, on the courts of the first day of a lunar month when they meet the nobilities in the front hall, and on the gatherings of the New Year’s Day and the winter solstice. This crown is added with a golden grand mountain adornment, attached with twelve cicadas, and exerted with pearls and jades on the top. It has black head-kerchief, hair straps, and kingfishe feathers, and jade rhinoceros hairpi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