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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근대 창덕궁 주요 전각의 공간과 장식 특성*

Abstract

창덕궁의 인정전, 대조전 영역은 순종이 즉위했던 1907년부터 수리와 개조가 이루어졌다. 인정전과 선정전은 순종의 접견 공간으로 변용되었고, 대조전은 정무, 학문, 휴식 등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는 최대 규모의 전각으로 재건되었다.
1910년대 창덕궁 인정전과 선정전에는 <봉황도>, 일본의 산업 공예품, 일본풍의 서양 가구들이 일본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배치되면서, 타율적 근대화가 진행되었다. 이외에도 유럽과 중국의 공예품들도 창덕궁에 유입되었다. 19세기 후반 근대 외교의 도입과 함께 유입되었던 서양 가구들은 1920년 재건된 대조전 영역으로 옮겨져 유럽풍의 접견 공간을 완성했다. 창덕궁의 청대 장식으로는 궁궐의 넓은 실내공간과 입식으로 변화된 생활에 편리했던 청대의 가구와 법랑기가 선택되었다. 청대의 장식은 동남아시아 화교집단 페라나칸 양식이 두드러졌으며, 이것은 19세기 후반 중국의 미술품 수출 양상과 관련이 있었다. 한편, 식민 지배 속에서도 양기훈, 김규진 등의 서화가들은 근대적 의식을 발휘하면서도 전통을 계승한 궁중 장식화를 그려냈다. 아울러 화가들은 도안을 공예가에게 제공하고, 공예가는 도안을 사용하여 작품을 제작하면서 근대화된 공예품 제작 기반도 공고히 되었다. 이처럼 20세기 초 창덕궁 주요 공간의 장식은 시대적 상황과 공간 특성에 대처해가면서 한국만의 특수한 근대성과 문화적 다양성이라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냈다.

Abstract

When King Sunjong acceded to the throne in 1907, Injeongjeon Hall and Seonjeongjeon Hall of Changdeokgung Palace were refurbished and renovated. The two halls were transformed into audience area for the king and Daejojeon Hall was rebuilt to become the largest area in the palace that could perform various functions including the king’s state affairs, education, and leisure.
In the 1910s, the Painting of Phoenixes was installed in Injeongjeon Hall, and Japanese industrial crafts and European Japonisme furnitures were placed here and in Seonjeongjeon Hall by political intentions of the Japanese government, bringing a forced modernity to the palace. European and Chinese crafts were also brought to the palace. In 1920, Daejojeon Hall was renovated and European furniture, imported in the late 19th century at the beginning of Joseon’s modern diplomatic relations, was arranged to complete a European style audience hall for the king. Qing-style furniture and enamelware were also chosen for the palace as they were suitable for the spacious rooms and new lifestyle of using chairs and tables. The Qing-style was mostly Peranakan style, favored by Chinese immigrants to the Southeast Asia who were important customers for the late 19th century Qing artisans. On the other hand, traditional court paintings were continued by painters such as Yang Kihoon and Kim Gyujin who tried to maintain the tradition while accepting modernity even though Joseon was occupied by Japan at the time. Moreover, painters provided designs for craftsmen who made products that lay foundations for modern craftworks. The early 20th century interior designs at Changdeokgung Palace accommodated the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and the distinct characteristics of the space, and consequently created new values of modernity and cultural diversity particular to Korea.

Ⅰ. 머리말

궁궐은 국정 운영의 공간이자 왕실 구성원들의 일상이 영위되는 공간이었다. 19세기 조선에 서양식 접견례와 연회가 도입된 후, 정치, 통상 관련 행사들이 궁궐 내부에서 거행되었고, 궁궐에는 이에 적합한 공간과 장식이 요구되었다. 이에 따라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개조되거나 새로 건립된 궁궐건축들은 개항 후 촉발된 서양문화의 전래, 국제질서의 변화, 그리고 고종의 근대화 정책 등 다양한 요인과 무관하지 않았고, 그 영향은 일제강점기까지 이어졌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실질적 정궁으로 역할했던 창덕궁은 근대 외교가 시작된 궁궐이었다. 조선이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고, 조선에 일본, 미국, 영국, 러시아 등의 공사관들이 건립되면서 각국의 외교관들은 자국의 이익을 위해 궁궐에서 고종을 접견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고종이 임어(臨御) 했던 창덕궁에서는 조선 최초의 서양식 외교의례가 거행되었다. 1880년 11월 26일 일본 공사 하나부사 요시타다(花房義質)를 접견할 때 새로운 방식의 외교의례가 창덕궁 중희당(重熙堂)에서 시작되었으며, 총 32회의 근대 외교가 창덕궁 중희당, 희정당(熙政堂) 그리고 정확한 전각 명(名)을 밝히지 않았으나 정치 활동의 중심 공간이었던 편전(便殿)에서 이루어졌다.1 급변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하기 위해 서양식 접견례가 도입되었으나 이를 행할 마땅한 공간이 즉각적으로 마련되기 어려웠기 때문에 고종은 창덕궁의 기존 전각들을 활용하였다. 20세기 초에 이르러 고종황제가 강제 퇴위 되고, 뒤를 이어 즉위한 순종황제의 거처가 다시 창덕궁으로 결정되면서 비로소 창덕궁 주요 전각들은 변화를 맞이하였다.2
본 연구는 순종의 주요 활동 공간이었던 인정전(仁政殿), 선정전(宣政殿), 대조전(大造殿) 등을 공간적 범위로 하여3 1907년부터 1920년까지 재편된 창덕궁 주요 전각의 공간 변화와 궁궐건축이라는 특수한 공간을 꾸미고 구성했던 장식의 특성을 밝히는 것이 목적이다. 특히, 창덕궁을 중심으로 전세(傳世) 되는 근대 왕실유물을 종합적으로 파악하고, 궁궐건축 공간의 성격과 기능을 반영하면서 목적성을 가지고 활용되었던 장식의 양상과 특성을 조명함으로써 근대 창덕궁 주요 전각의 공간과 장식이 갖는 미술사적 가치와 의미는 무엇인지 진단해 보고자 한다.

Ⅱ. 인정전, 대조전 영역의 공간 변용

창덕궁의 주요 전각들은 순종이 즉위하여 창덕궁으로 이어(移御)했던 1907년 11월부터 본격적으로 개조되거나 변용되었다. 가장 먼저 정전(正殿) 인정전의 실내공간이 1907년부터 메이지궁(明治宮)의 알현실과 유사하게 개조되어 순종의 공식 행사장으로 기능하였다.4 개조된 인정전을 그린 <第一號謁見所及附續建物平面圖>(1908)를 살펴보면,5 인정전의 행각은 전각 형태로 개조되었고, 복도가 신설되었다(Fig. 1). 조선의 인정전이 현관 인정문(仁政門)과 행각으로 둘러싸인 마당 가운데 위치했다면, 개조된 인정전은 인정전, 행각, 현관, 복도가 하나의 동선으로 연결되었다. 변화된 인정전의 통합적 구조는 정전이었던 인정전의 기능을 ‘알현소(謁見所)’로 축소·변용하고자 했음을 보여주며, 도면의 이름에서도 인정전이라는 고유 전각 명 대신 알현소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1910년대 촬영된 창덕궁 사진에서도 변용된 인정전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데, 인정전의 동서 행각에는 휴게실, 식당, 탈모소, 대기 공간 등이 갖추어져 있었고, 이러한 공간들은 복도로 연결되었다.6 과거의 인정전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던 새로운 기능의 공간이 마련되고, 공간을 연결하여 동선을 원활하게 한 것은 순종과의 접견을 순조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세부적으로는 조선시대 정전에 깔렸던 전돌 바닥은 마루로 교체되어 인정전의 내부와 외부는 뚜렷한 경계를 가지게 되었고, 당가(唐家)의 좌탑(座榻)을 철거한 넓은 홀(hall) 형태의 실내는 서양식 접견례를 행하기 적합하게 되었다(Fig. 5 참고). 당가의 어좌(御座) 대신 이화문(李花文)이 수 놓인 서양 의자로 대체된 중심 공간에서 순종은 접견인과 동일한 높이에서 만날 수 있게 된 것이었다.7 이러한 인정전의 공간 변용은 궁궐 내부에 접견의 공간이 정착된 양상을 보여주며,8 정전으로서의 전통적 기능과 역할이 ‘알현소’로 축소된 것이었다.
창덕궁의 편전 선정전도 서양 장식이 도입되면서 온전한 편전의 기능을 수행하기보다는 접견을 위한 공간으로 변용되었다. 일제강점기 촬영된 선정전 내부 사진을 살펴보면, 전돌 바닥은 우물마루로 교체되어 카페트가 깔렸으며, 전등, 커튼 등의 장식도 눈에 띈다(Fig. 2). 특히, 선정전 내부의 중심 공간 역시 인정전과 마찬가지로 어좌와 일월오봉병이 치워지고, 안락의자와 탁자, 그리고 일본 병풍들로 대체되었다.9
한편, 창덕궁 대조전은 1917년 화재로 전소되어 1919년 경복궁의 교태전(交泰殿)을 이건하여 재건되었다.10 이왕직은 재건되는 대조전, 희정당 등을 외부는 조선식으로 하고, 내부는 서양식으로 개조하기로 결정했다.11 <大造殿平面圖>(1912~17)에는 대조전 영역의 수리된 부분, 건물의 변형에 관한 기록이 적혀있어12 대조전 공간의 기능 뿐만 아니라 공간 변화과정 및 구조적 특징까지도 확인할 수 있다(Fig. 3).1 대조전은 홀 형태의 대청에 샹들리에를 설치하고, 전통 창호문은 유리문으로 교체되어 순종황제의 접견 공간으로 꾸며졌다. 한편, 양 익각(翼閣)의 동·서 온돌은 순종 내외의 생활 공간으로 의복실, 목욕탕, 화장실, 이발소 등이 새롭게 마련되었으며,14 동쪽 구역이 황제의 공간, 서쪽은 황후의 공간으로 주체에 따라 공간이 구성되고 배치되었다.15 재건된 대조전은 여전히 순종 내외의 침전(寢殿)으로 기능했지만 전통적 침전과는 차이가 있었다. 대조전의 중심 공간은 접견의 공간이었고, 대청을 중심으로 황제와 황후의 생활 공간이 정확히 구분되면서 정무와 휴식이 같은 전각에서 이루어졌다. 목욕탕, 화장실, 이발소 등의 공간도 내부로 들어왔으며, 라디에이터와 같은 난방시설이 도입되어 입식의 생활방식도 정착되었다.
대조전 남쪽의 희정당(熙政堂)은 경복궁 강녕전(康寧殿)의 부재를 옮겨 한양(韓洋) 절충식으로 재건되었고,16 순종의 집무실이자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전각이었다. 희정당의 중앙에는 접견실, 서행각에는 회의실과 식당, 동행각에는 여러 칸의 귀빈실이 있었고, 양판 여닫이문을 설치하여 공간의 기능을 구분하고, 고정식 가구들을 배치하여 공간의 성격을 명확히 하였다.17 접견실이었던 희정당의 중앙홀은 벽화를 부착하여 공간의 대칭성이 강조되었고, 벽난로, 라디에이터, 보일러와 같은 근대식 난방시설도 설치되었으며, 바닥에는 카페트가 깔리고 서양식 가구로 장식되었다(Fig. 4).
1920년 재건된 대조전과 희정당은 정무, 학문, 침소 등 다양한 기능의 공간들을 수용하였으며, 국권 상실 후에도 접객의 기능을 이어왔다. 즉, 대조전 영역은 침전의 전형적 기능에서 벗어나 벽을 트거나 복도를 연결하여 유동적이고 통합적 공간을 추구하면서 복합적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되었다. 대조전의 이러한 공간 특성은 서양 건축에 영향받았던 근대 일본건축의 영향으로 볼 수 있으며,18 결과적으로 접견, 휴식, 욕실, 식당, 이발소 등 일상생활에 필요한 기능들을 단일한 공간에서 가능하게 함으로써 침전이었던 대조전의 기능을 크게 확장 시켰다.
지금까지 살펴본 창덕궁 인정전, 대조전의 공간 특성은 경복궁, 덕수궁의 궁궐전각들과도 비교해 볼 수 있다. 고종이 1873년(고종 10) 건립했던 경복궁 집옥재(集玉齋)는 어진의 봉안, 고종의 서재, 그리고 서적을 보관했던 용도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사방이 퇴칸으로 둘러쌓인 넓은 중앙 대청을 가지고 있었고, 고종은 경복궁으로 환어(還御) 했을 때 집옥재를 외국 사신의 접견 장소로도 사용하였다. 집옥재에는 건립 당시의 시대적·정치적 상황을 보여주는 청(淸)의 건축요소와 고종의 정치 자립 의지 등이 내·외부 공간에 표영되어 있었다.1 대한제국의 황궁이었던 덕수궁에는 다양한 기능이 집약된 수옥헌(漱玉軒), 돈덕전(惇德殿), 정관헌(靜觀軒) 등의 양관들이 건립되었다. 덕수궁의 양관들은 고종황제의 의지에 따라 근대국가 대한제국을 홍보하고자 국제외교의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반면, 1908년 개조된 창덕궁 인정전과 1920년 재건된 대조전에는 상술했듯이 일본의 주도로 건축 활동이 이루어지면서 근대 일본건축의 공간 특성이 반영되었다. 이에 따라 20세기 초 창덕궁 주요 전각의 공간은 자율 의지가 결여되었다는 측면에서 식민지적 근대화, 일본화된 근대화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그렇다면, 20세기 초 창덕궁의 건축 활동과 궁궐건축에서 찾을 수 있는 긍정적 의미와 가치는 없는 것일까?
20세기 초 창덕궁 주요 전각의 개조와 재건에는 근대적 측량기술, 투시투영법, 축적, 방위 등이 적용된 서양식 건축도면이 활용되기 시작했다. 서양식 건축도면의 도입 이전에는 궁궐건축을 중건하거나 수리할 때 공사의 진행 과정, 재료, 시공 방법 등에 이르는 상세한 내용이 의궤를 통해 기록되었고, 도설(圖說)에는 건축 그림을 수록하여 궁궐의 외관을 알 수 있게 하였다. 한편, 20세기 창덕궁 인정전, 대조전의 개조 및 재건에 도입되었던 서양식 건축도면에는 평면도, 입면도, 단면도 등의 그림과 구체적 정보들이 함께 기입되었고, 이를 통해 인정전과 대조전의 개조 및 재건 계획, 공간적 특징, 내부 공간의 활용 등에 이르는 건축 과정과 변화 양상에 관한 내용까지도 압축적이고 효율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비록 20세기 창덕궁의 건축 활동에 활용되었던 서양식 건축도면 역시 외부로부터 비롯된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겠으나 결과적으로 공간에 대한 이해의 확장이라는 발전적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창덕궁의 인정전, 대조전의 경우 급변하는 정치 및 외교 상황에 적응하기 위해 필요했던 건축 활동이 즉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전통적 궁궐건축의 단일했던 기능은 복합적이고 입체적인 기능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측면에서 20세기 초의 창덕궁 인정전, 대조전 등은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궁궐건축으로서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Ⅲ. 창덕궁 주요 전각의 장식 특성

1. 인정전과 선정전의 일본식 장식

1915년 발간된 잡지 『新文界』에는 창덕궁 인정전의 내부 공간과 장식을 묘사한 글이 실려있다.
中央寶座에는 金塗椅子 一雙을 靜置하고, 其 後面에는 雙鳳을 畵하였고, 其 左右에 黃色錦帳에 金線을 繡하여 掛垂하였는데, 案內者 曰, 此 寶帳은 年前 東京으로부터 製來하였는 바 其代金은 一萬圓이라 云하며 其前에는 七寶大花甁 一雙을 左右에 陳列하였고, 寶座 左右에는 丁鶴喬, 金海岡의 竹石畵 及 趙錫晋, 李導榮 山水畵 等 大屛風을 陳設하였으니 其 王居의 壯麗함은 能히 一枝의 筆로 形容키 難하도다.20
『新文界』에 묘사된 인정전은 1911년 촬영된 <창덕궁 인정전 내부>의 모습과 일치하는데,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좌탑이 사라지고, 이화문이 장식된 서양 의자 한 쌍과 봉황 그림으로 대체된 공간 구성이었다(Fig. 5). 1908년 인정전의 개조가 시작되었을 때 당가의 상부구조는 남긴 채 아래의 좌탑과 일월오봉병이 철거되었고, 대신 <봉황도>와 <사령도>가 장식되었다.21 <봉황도>는 금박의 종이 위에 봉황을 그려 벽에 부착하는 방식으로 장식되었는데(Fig. 6), 벽 그림을 활용하여 공간을 장식하는 사례는 일본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선에서 시서화를 병풍으로 장황하여 배설(排設)하거나 창호나 장지에 그림을 그려 궁궐건축의 장식으로 활용하였다면,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일본에서는 성곽건축의 접객 공간을 금박의 벽 그림으로 호화롭게 장식하였다. 양식적 측면에서도 <봉황도>에는 금박종이 위에 한 쌍의 봉과 황이 단독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러한 방식은 조선의 봉황 그림에서는 유사한 예를 찾기 어렵다.22 한편, 봉황과 관련하여 일본은 19세기 이후 봉황, 공작, 꽃, 일본의 명승 등을 소재로 공예품을 제작하여 전 세계에 수출하였으며, 봉황은 일본 황실을 상징하기도 했다.23 개조된 인정전을 장식했던 <봉황도>는 을사늑약 이후 대한제국이 처했던 현실이 반영된 그림으로 일본은 <봉황도>를 통해 대한제국이 일본에 종속되었음을 드러냈으며, 이로써 인정전은 창덕궁의 정전이 아닌 일본의 의도대로 ‘알현소’가 되었다.
인정전에서 서양 의자로 대체된 어좌의 앞쪽에 장식되었던 <칠보화병(七宝花甁)>은 800℃ 전후에서 소성된 유약에 유리 혹은 에나멜을 이용하여 등나무, 국화, 백합, 새 등의 문양을 시문한 금속제 화병으로 일본의 수출용 산업 공예품이었다(Fig. 7).24 화병은 일본이 서양의 꽃 문화를 받아들여 꽃을 일본 주택의 도코노마(床の間) 장식으로 활용하면서 크게 유행한 기종이었다. 일본 화병은 1880~1910년대 집중적으로 제작되어 만국박람회를 통해 전 세계에 소개되었으며, 일본을 대표하는 산업 공예품으로 자리 잡았다. 현재 창덕궁에 유입된 일본 화병들은 대략 높이 30cm, 60cm 정도가 대부분이며, <칠보화병>의 경우에만 높이가 1m에 달한다. 이러한 사실은 <칠보화병>이 궁궐건축의 공간 규모에 적합하도록 보통의 장식 화병보다 크게 제작되어 인정전의 대표 장식기(粧飾器)로써 특별히 배치되었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창덕궁의 편전, 선정전도 인정전과 유사한 시기 공간 장식이 바뀌었다. 선정전의 내부 장식에서는 화폭과 화폭 사이에 4개 혹은 5개의 구멍을 뚫어 연결한 일본 병풍들이 주목된다(Fig. 2 참조). 일본은 조선 초기부터 조선 왕실에 병풍을 예물로 보냈으며,25 19세기 후반부터는 해외 시장을 겨냥하여 자수(刺繡)로 병풍을 제작하여 수출하였다.26 이에 따라 한일합방을 전후로 궁궐에 유입된 일본 병풍은 자수 병풍이었으며,27 주로 외교 선물로 궁궐에 유입되었다.
20세기 초 순종과 창덕궁이 촬영된 사진에서는 이질적인 서양 가구들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서양, 일본, 한국의 혼합된 장식 특성을 가진 의자들이다. 1909년 촬영된 <순종초상사진>과 1910년대 인정전 동행각을 촬영한 사진에서 확인되는 <순종황제의 의자>는 사진자료를 통해 적어도 대한제국기에 제작되어 창덕궁 인정전을 중심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29 <순종황제의 의자>는 마키에(蒔繪) 기법으로 이화문을 시문하고, 다리에 바퀴가 부착된 암체어로 일본 황실에서 사용되었던 <일본 천황의 의자>와 양식과 기법이 유사하여 근대 일본 가구의 영향이 명확하다(Fig. 8, 9).
한편, 을사늑약(1905년) 이후 촬영된 <순종황제 사진>에 등장하는 <이화봉황문암체어>는 창덕궁에서 사용되었던 순종황제의 의자로 등받이 상단에는 일본 황실을 상징했던 봉황이 대한제국 황실 문장인 이화문을 날개로 감싸는 형상으로 장식되었다. 이것은 이왕가로 격하된 대한제국 황실이 일본 황실의 일부임을 뜻하는 ‘내선일체(內鮮一體)’가 표현된 노골적 표식이었으며, 창덕궁 장식 기물에 반영된 식민지 대한제국의 위상이기도했다(Fig. 10).30
일본에 외교권을 빼앗기고, 한일병합의 길을 걷게 되면서 창덕궁의 공간에는 일본 미술의 영향력이 커져만 갔다. 인정전의 <봉황도>와 창덕궁에서 사용되었던 순종황제의 의자에는 일본 문화와 정신을 이식하여 원활한 식민 지배에 이용하고자 했던 일본의 의도가 반영되어 있었다. 자수 병풍 및 화병 등으로 대표되었던 일본의 수출용 산업 공예품도 창덕궁 인정전과 선정전의 접견 공간에 배치되어 근대화된 일본을 과시하였고, 이를 통해 조선에 대한 일제의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듯 보인다. 이처럼 창덕궁 주요 전각의 공간에 나타난 일본식 장식은 피할 수 없었던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으나 창덕궁에는 시대적 흐름에 반응하고 대응했던 다양한 다른 특성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2. 대조전의 유럽풍 장식

1920년 창덕궁 대조전이 재건될 때의 신문기사를 보면 대조전이 프랑스식으로 장식되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31 대조전이 프랑스식으로 장식되었던 배경으로는 개항 초부터 대한제국기까지 궁궐을 중심으로 유입되었던 프랑스식 실내장식에 대한 경험과 창덕궁의 건축 활동에 관여했던 일본인들을 통해 근대 일본의 궁전과 저택을 꾸몄던 프랑스식 실내장식이 간접적으로 대조전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32 재건된 대조전은 외부는 조선식이었으나 내부 공간은 프랑스식으로 장식된 대표적인 한양(韓洋) 절충식 전각이었다.33 대조전의 서양식 장식에 대해 『每日申報』 (1922. 4. 26.)에는 대조전을 장식했던 ‘황금 테두리의 당초 문양 의자’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실려있으며,34 실제로 대조전 영역에 황금 테두리의 서양 의자들이 다수 전한다. <붉은 융단 의자>는 황금색 프레임에 다마스크(Damask) 패턴의 꽃무늬가 직조된 붉은색 융단으로 장식되었으며, 곡선의 등받이, 카브리올 다리(Cabriole leg), 도금된 장식 요소 등은 프랑스 로코코 양식과 관련 깊다(Fig. 11).35 좌판 아래에 ‘大造殿西溫突’이라고 적힌 표식이 있어 정확한 사용처가 확인된 <붉은 비단 스툴> 역시 유려한 곡선이 돋보이는 전형적인 로코코 양식으로 도금된 이화문이 목제 프레임에 부착되어 있다(Fig. 12). 대조전에 전하는 서양 의자들은 공간의 기능에 따라 <황금이화문암체어>, <붉은 융단 의자> 등은 접견의 공간에서 <붉은 비단 스툴>은 왕비의 생활 공간이었던 대조전 서온돌에서 사용되었다.36
한편, <宮闕洋館應接室 스케치>와 <內部裝飾圖>를 통해서도 궁궐건축에 적용되었던 유럽풍 장식의 특성과 활용 예를 확인할 수 있다. <宮闕洋館應接室 스케치>는 대조전 후원에 1916년 착공되었던 양관(洋館)의 응접실 투시도로써 프린지(Fringe) 장식이 달린 화려한 프랑스식 의자와 소파들, 기하학적인 커튼박스와 정확한 문양을 알 수는 없으나 복잡하고 화려한 무늬의 커튼, 벽난로 등이 그려진 스케치이다.37 <宮闕洋館應接室 스케치>에 반영된 공간은 유럽풍의 실내장식이 궁궐 내부에 적용된 예를 보여주며, 이를 통해 창덕궁 대조전 영역에 전하는 서양 의자들과 캐비넷, 탁자들의 활용 양상도 유추할 수 있다. <內部裝飾圖>는 이화문과 용이 장식된 커튼과 창의 스케치로 창덕궁 전각의 실내 창에 설치하고자 고안된 디자인으로 여겨지며(Fig. 13), 바로크 양식을 연상시키는 화려하면서도 웅장한 커튼은 20세기 초 인정전에 설치되었던 커튼과 매우 유사하다.38 <宮闕洋館應接室 스케치>와 <內部裝飾圖>는 창덕궁의 유럽풍 장식이 계획적으로 고안된 디자인 개념이 적용되었던 사실을 보여주며, 이것은 창덕궁 공간들이 공간의 기능과 성격을 고려한 장식으로 꾸며졌을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실제로 대조전 영역의 유럽풍 가구와 장식들은 사용되었던 공간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접견실에 배치되었던 서양 의자의 경우, 프레임은 황금색으로 도금되거나 이화문이 장식되었고, 패브릭의 색상은 대부분 황금색이나 붉은색이었다. 황금색과 붉은색의 서양의자들이 선택되었던 것은 조선의 궁궐에서 왕의 가구로 붉은색, 대한제국기에는 황색의 가구가 사용되었던 전통과 무관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內部粧飾圖>에 그려진 바로크 양식의 커튼도 접견실과 같은 공적 기능을 수행했던 공간을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사적 공간이자 일상의 공간에서 사용되었던 가구들은 공간 주체의 취향까지 고려된 가구들이 선택되었는데, 대조전 서온돌에서 사용되었던 여성스럽고, 우아한 선이 돋보이는 황후의 가구가 이를 증명한다(Fig. 12 참조). 다시 말해 대조전 영역의 유럽풍 장식들은 공간의 기능과 목적을 강조할 수 있는 장식들이 선택되었고, 대조전을 사용했던 순종과 순종비의 주관적 취향도 반영되었던 것이다.
마지막으로 창덕궁 대조전을 중심으로 전세되고 있는 장식들을 종합해 보았을 때, 1920년 재건된 대조전의 유럽풍 장식은 당대 유럽에서 제작되어 유행했던 장식과는 거리가 있었다. 대조전 영역의 유럽풍 장식에는 조선에 근대 외교와 연회문화가 도입된 19세기 후반 이후 수요와 필요에 따라 궁궐에 유입되었던 서양 가구들이 포함되어 있다. 대한제국 황궁이었던 덕수궁이 황궁으로서 기능을 잃게 되면서 덕수궁의 연회장이었던 돈덕전을 장식했던 일부 가구들이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으로 옮겨졌던 것이다.39 덕수궁의 화려한 궁정 스타일의 로코코 가구들이 창덕궁으로 옮겨져 대조전 영역의 공적 공간을 중심으로 접목되었고, 이로써 창덕궁 대조전은 대한제국 황궁의 유럽풍 공간처럼 재현될 수 있었다.

3. 청대(淸代) 가구와 법랑기(琺瑯器)

창덕궁 대조전 대청에 놓여진 <나전탑상(螺鈿榻床)>은 중국 청대(淸代) 가구로 순종황제가 손님을 접견할 때 앉았던 가구였다(Fig. 14). <나전탑상>은 중국에서 팔걸이와 등받이가 달린 의자이자 침상으로 사용되었던 탑(榻) 혹은 탑상(榻床)이라 불리는 가구로 전면에는 흑칠을 하였고, 등받이와 좌판에는 대리석을 상감하였으며, 나전 장식은 매우 화려하다. <나전탑상>과 같이 투각, 상감, 나전 등 다양한 기법이 사용된 흑칠의 상감칠기는 청 말기 말레이반도로 이주했던 화교 ‘페라나칸(Peranakan)’의 가구와 관련 깊다(Fig. 15).40 페라나칸의 가구는 열대성 기후에서 사용하기 적합하도록 등받이, 좌판 등에 대리석을 상감하고, 나전으로 장식된 독창적 양식을 갖추었다. 대조전에 함께 배치되어있는 <태사의(太師椅)>와 <나전체경(螺鈿體鏡)> 등도 대리석이 상감되고, 박쥐, 조롱박 등의 문양이 투각된 페라나칸의 양식 특성을 반영하고 있다.41 페라나칸 가구의 창덕궁 유입 배경은 19세기 중국 최대 무역항이었던 상해에서 찾을 수 있다. 19세기의 상해는 동북아와 동남아의 중간 거점으로 전 세계에서 생산된 수출품의 집결지였다. 페라나칸 양식의 가구는 화려한 미감을 선호했던 페라나칸을 겨냥하여 중국 남동부에서 제작되었던 자개가 상감된 흑칠 가구들로 상해를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되었다.42 조선에서 활동했던 양행(洋行)과 상인들도 상해를 통해 전 세계의 물품들을 수입하였고, 이러한 경로로 페라나칸 양식의 청대 가구들이 창덕궁에 유입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대조전 서온돌에는 용과 봉황이 고부조로 조각된 청 황실 가구의 양식 특성을 보이는 <목제침대>가 있다.43 침대와 함께 배치된 <쌍용장식의자>, <원형탁자>, <방형탁자> 등도 제작기법 및 장식이 <목제침대>와 서로 유사하다. 이처럼 대조전에 전하는 중국 가구들은 페라나칸 양식도 있고, 청대 황실 가구의 특성을 보이는 가구들도 있다. 서로 다른 양식의 가구가 대조전이라는 동일한 공간에서 함께 사용되었던 정황은 대조전의 중국 가구 일부가 이전 시대 다른 전각에서 사용되다가 대조전으로 옮겨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대조전은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건립되었기 때문에, 교태전의 가구들이 대조전으로 옮겨졌거나 청대 양식의 궁궐건축인 집옥재의 중국 가구 및 공예품들이 일제강점기 대조전으로 유입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양식적 측면에서는 청대 황실 가구들이 먼저 유입되어 사용되다가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반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페라나칸의 가구가 순차적으로 유입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현재 창덕궁에 전세되고 있는 청대 장식은 가구를 제외하고는 대다수가 법랑기(琺瑯器)였다. 청의 법랑기는 강희제(康熙帝, 1662~1722)때 개발되어 청 황실을 위한 고급 공예품으로 자리 잡았으며, 18세기 이후 조선에서도 조·청 교류의 증가로 청대의 법랑기가 애호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1886년 촬영된 <고종사진>에서 창덕궁 농수정(濃繡亭)을 장식하고 있는 한 쌍의 법랑향로가 확인된다. 사진 속 향로와 유사한 창덕궁 전세품인 <겹사법랑향로(掐絲琺瑯香爐)>는 2점이 세트이고, 높이가 143cm에 이르는 대형의 사이즈로 궁궐과 왕의 권위를 상징했던 장식 기물이었음이 분명하다(Fig. 16). 대형의 법랑향로는 청나라 황제가 사신을 접견하거나 정무를 보았던 청 궁궐의 중요 장식기물 중 하나였고,44 조선에서도 궁궐의 장식을 위해 청의 법랑향로가 사용되었던 것이다. 다만, <겹사법랑향로>의 유입경로와 제작 시기, 그리고 20세기 이후 재편된 창덕궁의 공간에서 <겹사법랑향로>가 장식되었던 기록과 자료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시대적 간극이 존재하는 <겹사법랑향로>와 근대 창덕궁 공간과의 관련성을 언급하기는 조심스러우나 청의 황실 공예품에 대한 조선 왕실의 애호 및 선호사상이 근대까지도 영향을 미쳤던 사실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또한, 청의 법랑자기도 창덕궁에 함께 전한다. <분채화조문백자화병(粉彩花鳥文白瓷花甁)>, <분채화조문백자돈(粉彩花鳥文白瓷墩)> 등은 중국 경덕진(景德鎭) 민간 가마에서 제작된 것으로 불투명한 유리질의 유약에 로즈 핑크, 청록색, 노란색 등의 법랑 안료로 채색하고 꽃문양을 주로 시문한 페라나칸 양식의 법랑자기였다(Fig. 17).45 창덕궁에 전세되는 페라나칸 양식의 법랑자기들은 소수의 식기류를 제외하고 화병, 의자 등 장식용 기물이 대다수이며,46 이것은 19세기 이후 제작된 페라나칸의 법랑자기들이 주로 장식을 목적으로 궁궐에 유입되었음을 시사한다.
창덕궁의 청대 장식은 궁궐의 넓은 실내공간 및 입식 생활에 편리하게 설계된 청대 가구와 청 황실의 고급 공예품이었던 법랑기 등이 선택적으로 적용되었다. 특히, 19세기 후반 이후 중국 본토에서 제작되어 동남아시아 일대로 수출되었던 페라나칸 취향의 미술 양식이 두드러졌으며, 이것은 상해와 광동의 무역항을 통해 전 세계로 수출되었던 중국의 미술품 수출 양상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러나 청대 건축의 특성이 반영되지 않았던 대조전의 공간에 청의 장식 기물이 놓여졌기 때문에 창덕궁의 공간과 청대 장식의 관계에 대해서는 신중히 검토해 보아야 한다. 장식이 놓였던 건축과 양식적으로 무관했던 청대 장식이 대조전을 꾸밀 수 있었던 것은 사용자였던 순종황제와 국가가 대조전의 건축 활동에 주도적 역할을 할 수 없었던 특수한 시대 상황이 일차적 배경이자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에 따라 대조전의 재건과는 크게 상관없이 이전 시기 유입된 청의 황실용 장식 기물과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이후까지도 활발히 유통되었던 페라나칸 양식의 가구, 법랑자기 등이 창덕궁의 공간 안에서 혼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조전의 청대 장식과 관련하여 1차 문헌의 발굴의 부재와 청 장식의 유입 및 유통과정에 대한 구체적 조사가 부족하여 추정으로 결론 지을 수 밖에 없었던 한계를 인정하며, 이에 관한 후속 연구를 기약하고자 한다.

4. 전통의 근대적 계승

조선말 도화서 화원이었던 양기훈(楊基薰, 1841~1911)의 그림은 순종사진의 배경이 되거나 창덕궁의 실내 장식으로 활용되었다.47 이와 관련하여 양기훈의 <매화도>를 밑그림으로 하여 제작한 <매화도 자수 병풍>이 여러 점 전한다.48 1906년 대한제국 황실에 헌상 되었던 <매화도 자수 병풍>은 화면 하단에 수 놓인 ‘時維 光武十年丙子冬十月 臣楊基薰’라는 관서를 통해 양기훈이 궁궐의 장식용 자수 병풍을 제작하기 위해 자신의 그림을 화본(畫本)으로 제공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기에는 전통적 수공업 체제가 붕괴하고 기계생산이 시작되면서 근대 디자인 개념인 도안(圖案)이 출현하게 되었고, 도안을 매개로 한 공예품 생산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양기훈의 그림은 자수 병풍 제작을 위한 도안으로 활용될 수 있었다.49 매화나무 한 그루를 리듬감 있게 수 놓은 <매화도 자수 병풍>은 실제 나무 아래 있는 듯한 효과를 주며, 명암의 효과가 뛰어났다(Fig. 18). 양기훈은 장식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대담한 구도의 밑그림을 제작하였고, 그의 그림은 자수 병풍으로 제작되어 창덕궁 공간을 장식하였다.50
1920년대에는 대형의 서화 병풍들이 인정전에 펼쳐졌다(Fig. 5 참조). 김규진의 <竹石圖 병풍>(1914), 김응원의 <蘭石圖 병풍>(1920), 강진희의 <鍾鼎瓦塼銘臨模圖 병풍>(1916) 등이다.51 김규진, 김응원, 강진희 등은 1910~20년대 활발히 활동했던 서화가들로 인정전에 진설할 작품을 의뢰받았던 것으로 추정된다.52 김규진, 김응원, 강진희는 그림에 자신의 이름과 ‘謹畵’, ‘謹寫’ 혹은 ‘臣...’ 등의 관지를 남겨 화가로서의 자의식을 표출하면서 왕에게 헌상했다는 뜻을 밝혔으며,53 창덕궁 인정전의 장식을 위해 군자의 상징성과 국왕의 안녕, 감계를 주제로 한 대형의 궁궐 장식용 그림을 제작하였다.
한편, 대조전과 희정당의 접객 공간이었던 대청에는 김규진, 오일영, 이용우, 김은호, 노수현, 이상범 등이 그린 대형의 부벽화(附壁畫)가 장식되었다.54 인정전에는 <봉황도>, 덕수궁 덕홍전에는 아마쿠사 신라이(天草神來)의 <송학도>와 같은 일본화가 장식되었던 것에 반하여 이왕직 영선과는 1920년 대조전의 장식을 위해 조선의 화가들에게 벽화를 의뢰하였다.55 희정당 대청에 부착된 김규진의 <金剛山萬物肖勝景圖>와 <叢石亭絶景圖>는 조선의 궁중 장식화와 상통하는 공필 채색 화풍의 특징을 갖추었으나 조선의 궁중 장식화가 십장생도, 모란도 등 길상적 그림이 선호되었던 것과 달리 금강산을 소재로 문 위의 벽면 전체를 화면으로 활용한 대형의 장식 그림이라는 점,56 그림 아래 ‘金圭鎭謹寫’라는 묵서(墨書)와 낙관(落款)을 남긴 점에서 궁중 장식화의 전통과는 차이가 있었다(Fig. 19).57 김은호의 <白鶴圖>, 오일영과 이용우가 함께 그린 <鳳凰圖>는 순종 내외의 화평과 장수를 위한 길상화로써 대조전에 부착되었고, 왕비의 휴식 공간인 경훈각(景薰閣)에는 이상범의 <三仙觀波圖>와 노수현의 <朝日仙觀圖>가 부착되었다.58 창덕궁 대조전 영역의 부벽화는 공간의 기능과 성격에 적합한 주제에 화가의 근대적 의식과 화풍이 가미되어 새로운 전통을 창조하였다. 또한, 일제강점기 우리 화가의 그림이 창덕궁 대조전을 장식될 수 있었던 것은 왕실 기능이 축소되고, 위축되는 시점에서 조선 미술의 명맥을 이어가고자 했던 순종의 의지와 당대 화가들이 이룬 성과였으며,59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 시기 허용될 수 있었던 귀한 예술 활동이었다.
순종비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1894~1966)가 창덕궁에서 사용했던 <주흑칠나전의걸이장>, <주흑칠나전삼층장>, <주흑칠나전침대> 등에서도 전통을 계승한 양식 특징과 근대성을 동시에 찾을 수 있다(Fig. 20).60 순정효황후의 가구들은 모두 주칠(朱漆)과 흑칠(黑漆)을 조화롭게 사용하고, 나전 장식의 양상이 유사하여 1명의 제작자가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주흑칠나전의걸이장>의 문 안쪽에 ‘金鎭甲製作’이라는 인장이 찍혀 있어 근대 공예가 김진갑이 제작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들 가구는 십장생도, 금강산도 등을 주름질과 끊음질 등의 전통 나전 기법으로 꾸몄고, 바탕에는 옻칠 위에 금가루와 은가루를 뿌려 장식하여 일본 칠기의 영향을 보이기도 한다. 특히, <주흑칠나전의 걸이장>과 <주흑칠나전침대>는 이도영의 <金剛山九龍淵>, <萬物相三仙庵>, <金剛山萬物相>, <金剛山立石之松島> 등을 밑그림으로 하여 나전 장식되었고,61 김규진, 유운홍 등 유명 화가의 그림이 가구 장식을 위한 도안으로 활용되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 하다.62 요컨대 순정효황후의 가구들은 의걸이장, 삼층장 등에 보이는 전체적인 구조 및 형태, 칠의 사용, 문양의 시문 기법 등에서 조선 왕실 가구의 전통을 계승하였으며, 유명 화가들이 도안을 제공하고, 공예가에 의해 공예품으로 제작되는 제작 구조, 그리고 작품에 작가로서의 의식을 드러냈다는 점에서는 근대적 특성이 발현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양기훈, 김규진, 김응원, 강진희, 김진갑 등은 자신의 작품을 궁궐에 헌상하면서 이름을 남겨 작가적 정체성을 드러냈으며, 화가는 궁궐의 장식용 기물 제작을 위해 도안을 공예가에게 제공하였고, 공예가는 도안을 공예품 제작에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이들이 만들어낸 창덕궁의 장식 병풍 및 부벽화, 그리고 나전 가구들은 근대기 격변과 일제강점기의 억압 속에서도 근대적 요소를 수용하고 전통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보여주었으며, 이를 통해 소멸되어가던 조선의 전통은 창덕궁의 공간 안에서 근대와 상호작용하며 재편될 수 있었다.

Ⅳ. 맺음말: 근대 창덕궁 공간과 장식의 의미

근대 창덕궁 인정전, 대조전 등의 주요 전각들은 정무, 학문, 침소, 휴식 등 다양한 기능을 수용하였고, 다채로운 문화적 요소들이 공존하는 공간이었으며, 식민지로 전락했던 대한제국의 위상이 고스란히 반영된 공간이었다. 20세기 초 창덕궁은 건축 활동에 서양식 건축도면이 활용되면서 공간에 대한 인식과 이해가 발전적으로 진행되었고, 정치 상황과 새로운 생활방식에 대응하기 위한 적극적 변화가 창덕궁 인정전, 대조전 영역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창덕궁에 새롭게 조성된 공간들은 조선의 전통적 정전, 편전, 침전의 궁궐 공간과는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조선의 궁궐전각들이 의례의 공간, 집무의 공간, 휴식의 공간 등 고유한 기능에 따라 활용되었다면, 20세기 초 창덕궁에 재건되거나 개조된 전각들은 전통적 기능을 갖추었을 뿐 아니라 근대적이고 새로운 기능의 공간들이 서로 연계되어 어우러짐으로써 근대 건축으로 발전해가는 방향성을 보여주었다.
장식적 측면에서는 타율적 근대화를 대변하고 있으나 간과할 수 없었던 일본 장식, 근대적 외교 및 이벤트를 수행하기 위해 요구되었던 서양 장식, 상해와 같은 세계적 무역항을 통해 유입된 청대 장식, 그리고 전통 양식의 장식 등이 창덕궁 인정전, 선정전, 대조전을 중심으로 공존하고 혼재하면서 복잡한 역사적 특수성을 띠게 되었다. 우선적으로 일본의 정체성이 반영된 <봉황도>와 문화적 자부심을 표출했던 일본의 산업 공예품들이 창덕궁의 정전, 인정전에 배치되어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근대국가로 발돋움하기 위해 적극적 수단으로 활용되었던 대한제국의 유럽풍 궁궐 장식이 재건된 대조전 영역까지 연결되었고, 20세기 수출용 미술품의 흐름을 보여주는 청대 페라나칸 양식의 가구와 공예품들도 유입되어 창덕궁의 공간을 장식하였다. 아울러 조선의 화가와 공예가들도 근대적 의식을 발휘하면서 전통을 지켜내려는 의지를 창덕궁의 장식 그림과 가구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처럼 창덕궁에 나타난 서로 다른 특성을 가진 장식들은 20세기 초 우리가 처했던 시대 상황과 창덕궁의 공간에 대처하고 적응해가면서 한국만의 근대성과 문화적 다양성을 만들어냈다.
본 연구는 근대 창덕궁 주요 전각의 공간과 장식 특성을 파악하고, 미술사적 의미와 가치를 고찰하고자 했다. 건축, 회화, 공예 등 다양한 분야의 조사와 연구를 통해 창덕궁의 공간과 장식에 관한 종합적 정보를 파악하고, 다양한 양식 특성과 의미를 확인한 점은 본 연구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부족함을 느꼈던 문헌 자료의 발굴, 유통과정에 대한 구체적 조사 등이 더욱 진행되어 앞으로 진일보한 후속 연구가 이루어질 수 있기를 기약하는 바이다.

Notes

1) 최초의 근대식 외교에 대한 기록은 『승정원일기』, 고종 17년 11월 26일.

2) 20세기 초 창덕궁의 변화를 다룬 연구로는 김정동, 「개화기 우리 궁궐에 이입된 서양요소들-창덕궁 희정당을 중심으로」, 『한국건축역사학회 2006년도 춘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한국건축역사학회, 2006.5), pp. 202-224; 한병수·박진홍·한동수, 「20세기 초 서양문물의 도입과 궁궐 정침의 공간 변화-창덕궁 희정당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31권 1호(대한건축학회, 2011.4), pp. 153-154; 우동선·기세황, 「1908년 창덕궁 인정전 일곽의 개조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23 2호(2014.4), pp. 53-64;, 「1920년 창덕궁 내전 일곽의 재건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23 3호(2014.6), pp. 43-54; 이강근, 「近代期 昌德宮 건축의 변천에 대한 연구」, 『강좌미술사』 42(2014), pp. 11-31; 장필구, 「20세기 전반기 조선왕실의 변화와 창덕궁 건축 활동의 성격」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이규철, 「1907~1910년 창덕궁 중심 공간의 재편」, 『대한건축학회 논문집-계획계』 31 6호(대한건축학회, 2016.06), pp. 151-162; 김지현, 「창덕궁 내전 일곽 공사로 보는 일제강점기 궁전 별전」, 『건축역사연구』 29 2호(2020), pp. 63-74. 등이 있다.

3) 昌德宮을 修 理터인 大 皇 帝 陛下 臨 御 실 殿閣만 斯速修 理다더라. 『大 韓每日申報 』, 1907년 10월 10일.

4) 인정전은 일본 메이지궁에서 공식 행사와 천황을 알현하는 공간이었던 표궁전(表宮殿)의 구조와 기능이 유사하였다. 일본 메이지궁의 표궁전과 관련하여 山崎鯛介, 「明治宮殿の設計内容に見る儀礼空間の意匠的特徴」,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 69(2004. 04), pp. 169-176. 참조; 우동선·기세황, 앞의 논문(2014. 4)에서는 <明治宮殿竣工平面圖>에 나타난 메이지궁의 구조, 메이지궁의 조영을 주도한 인물 등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해 인정전이 메이지궁을 모방하여 개조되었음을 밝혔다. 이외에도 각주 2에 언급된 연구들을 통해 일본의 메이지궁과 근대 창덕궁의 건축 공간과의 연관성이 확인되었다.

5) 창덕궁 인정전과 관련하여 근대기에 작성된 건축도면이 약 13종 전한다. 근대 건축도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기록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6) 개조된 인정전의 공간에 관련한 사진 자료는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일본 궁내청 소장 창덕궁사진첩』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2006) 참고.

7) 현재의 인정전은 1995년 복원공사를 통하여 조선후기의 인정전으로 복원한 것이다.

8) 조선시대 외교의례의 공간은 정전의 내부가 아닌 외부였다. 조시내, 「한국 근대 궁궐건축의 공간과 장식 특성 연구」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pp. 8-13.

9) 현재 선정전 내부에 배치된 어좌는 평상의 형태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진연(進宴)·진찬(進饌) 의궤의 도설(圖說)에 그려진 용평상(龍平床)과 형태 및 규격이 매우 유사하다. 조시내, 「대한제국기 宮中 宴享用 家具 연구」, 『美術史學硏究』 264(2009), pp. 145-146; 어좌로 사용된 좌구와 어좌 공간에 대한 연구로 제송희, 「조선 후기 국왕의 御座 연구」, 『미술사연구』 42(2022), pp. 7-40참고.

10)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 대조전의 서온돌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 인정전과 선정전은 무사하였지만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 … 등 무려 800 여평에 달하는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순종실록부록』, 1917년 11월 10일.

11) 李王職長官 子爵 閔丙奭 이하 高等官이 화재 이후의 처리 방법에 대하여 회의를 하고, … 新殿은 조선식으로 건축하기로 하고, 그 외에는 서양식을 참조하기로 하였다. … 『순종실록부록』, 1917년 11월 14일.

12) <大造殿平面圖>에는 1912년 대조전 수리시 양심합과 희정당을 연결하는 복도가 그려져 있기 때문에 1912~17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近代建築圖面集-해설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 p. 52.

13) 우동선·기세황, 앞의 논문(2014. 6), pp. 43-54에서는 관련 신문기사의 검토와 현장 조사를 통해 1920년 재건된 대조전과 희정당이 한(韓)·일(日)·양(洋)의 절충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혔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해석을 참고하여 재건된 대조전이 전통적 침전과는 다른 양상의 공간 특성을 갖추고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14) 평상시 기거하는 방은 오른편으로 20여평의 온돌실이며, 그 방에 연결하여 이발실, 강습실 등이 연결된다. 『每日申報』, 1920년 1월 17일.

15) 대조전은 李王同妃兩殿下의 御起居하는 宮室이다. …오른편인 興福軒이라하는 王殿下의 御居室이며 좌측으로 觀理閣이라 하는 妃殿下의 御居室이 拜聽된다, 「覲見儀를 行하실 大造殿 拜觀記」, 『每日申報』, 1922년 4월 26일.

16) 양제로 건축되리라는 말이 있으나 양제로 건축함은 창덕궁 안의 다른 건축물과 서로 대하여 조화가 고르지 못한 고로 자연히 이전대로 조선식의 궁정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每日申報』, 1917년 12월 20일.

17) 희정당의 고정식 가구 배치와 관련하여 1920년대 그려진 <熙政堂御居間家具配置>를 참고할 수 있다. <熙政堂御居間家具配置>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앞의 책, p. 56. 의 도판 059 참고.

18) 전각과 전각 사이를 복도로 연결하여 통합된 구조를 형성하는 공간 특성은 일본의 메이지궁과 유사하며, 1908년 개조된 인정전과 1920년 재건된 대조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우동선·기세황, 앞의 논문(2014. 6), p. 46.

19) 경복궁 집옥재의 건립 배경과 공간 특징은 조시내, 앞의 논문(2022), pp. 30-34.

20) 최찬식, 「昌德宮拜觀記」, 『新文界』, 1915년 8월호.

21) 20세기 초 창덕궁 인정전이 개조되면서 당가가 해체되고, 일월오봉병 대신 봉황도가 부착되었다. 봉황도 아래에는 개조 이전의 인정전 당가 하단 부분을 일본식 미닫이문으로 개조하여 그 위에 <사령도>가 그려졌다. <사령도>는 용, 거북, 봉황, 기린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근대 일본화풍에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박윤희, 「20세기 창덕궁 인정전 당가(唐家)의 변형 과정 고찰-일월오봉병, 봉황도, 사령도를 중심으로-」, 『고궁문화』 14(2021), pp. 122-127.

22) 창덕궁 인정전 <봉황도>와 관련된 연구로 김수진, 「한국 봉황 문장(紋章)의 기원과 정치학-창덕궁 인정전 <봉황도>에서 청와대 봉황 문장까지」,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태학사, 2013); 김현지, 「동아시아 유교사회의 이상적 이미지 봉황」, 『꽃과 동물로 본 세상』 (사회평론, 2021), pp. 16-55. 등이 있다.

23) 일본에서 봉황은 천황과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20세기 초 흔하게 발행된 일본 황족들의 사진과 기록이 인쇄된 <皇族畫報>에 봉황이 장식되었다. https://www.gogung.go.kr 의 소장품 고궁 574 참고.

24) 일본의 칠보공예는 금, 은, 구리, 청동 등의 금속 바탕에 유약을 800℃ 전후 고온에서 소성하여 녹인 후 유리 혹은 에나멜을 이용하여 채색을 입혀 제작했으며, 얇은 금속선으로 모양을 내는 유선 칠보와 칠보 유약 사이에 금속선을 붙이지 않고 모양을 내는 무선 칠보로 구분된다. 「七宝」, 『日本の美術』 3(至文堂, 1993), p. 322.

25) 일본 병풍은 조선 초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꾸준히 유입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한일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국교가 회복한 17세기 초부터 조선 왕실에 유입된 일본 병풍의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김수진, 「조선 왕실에서의 왜장병풍 제작과 그 문화사적 의의」, 『미술사와 시각문화』 23(2019), pp. 12-16.

26) 일본의 수출용 자수 병풍에 관하여 김수진, 「근대 전환기 조선 왕실에 유입된 일본 자수 병풍」, 『미술사논단』 36(2013), pp. 91-116참조.

27) 창덕궁을 중심으로 전세되고 있는 근대 일본 자수 병풍은 공간의 배경 장식으로 효과적이었던 꽃과 새를 화재(畫材)로 한 것이 많았다. 대표 작품으로는 https://www.gogung.go.kr/ 유물번호 창덕6600 <국작도(菊雀圖) 자수 병풍> 참고.

28) 1900년대 일본 병풍이 황실에 진헌되는 일이 많았다. 『皇城新聞』 1908년 10월 25일; 『순종실록부록』의 1911년 5월 12일, 1915년 10월 6일, 1917년 6월 19일, 1920년 6월 3일 등의 기록을 통해 일본 병풍의 유입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29) Fig. 8. <순종황제의 의자>는 <순종초상사진>(1909)과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 사진에서 확인되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유물번호 기타5와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앞의 책, p. 11 <仁政殿東行閣上層休憩室> 참조.

30) 『李王家紀念寫眞帖』 (1919)에는 <이화봉황문암체어>에 앉아있는 순종 내외 초상사진이 실려있다. https://www.gogung.go.kr/ 유물번호 고궁770 참조.

31) 朝鮮古式에 佛國式을 加味한 昌德宮 內 大造殿, …. 『每日申報』, 1920년 10월 13일.

32) 최지혜, 「근대 전환기 궁궐에 유입된 프랑스식 실내장식과 가구」, 『고궁문화』 12(2019), pp. 51-59.

33) 외형은 조선식이지만 내부 공간이 서양식으로 장식된 한양(韓洋) 절충식 전각으로는 1908년 개조된 창덕궁 인정전, 1912년 준공된 덕수궁 덕홍전(德弘殿), 그리고 1920년 재건된 창덕궁 대조전, 희정당 정도이다.

34) 대조전은 李王同妃兩殿下의 御起居하는 宮室이다. … 接見室 … 정면에는 黃金枠의 당초문양의 倚子가 二脚 各樣色彩中에 燦然히 光輝를 발하여 … (중략). 「覲見儀를 行하옵실 大造殿 拜觀記」, 『每日申報』, 1922년 4월 26일.

35) 근대 전환기의 궁궐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서양 가구 및 장식에 대한 연구로 최지혜, 「근대 전환기 실내공간과 서양 가구에 대한 고찰: 석조전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미술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 「20세기 초 덕수궁·창덕궁에 유입된 리놀륨(Linoleum) 바닥재 연구: 리놀륨의 제작 방식과 특성 및 사용을 중심으로」, 『文化財』 54 1호(2021), pp. 18-31. 참조.

36) 현재 대조전 대청과 희정당 접견실에는 암체어, 서양식 장의자인 세티(settee) 등 로코코 양식의 서양 의자들이 남아있다.

37) 대조전 양관은 1917년 대조전의 화재로 공사가 중단되어 현존하는 건축물은 아니다. <宮闕洋館應接室 스케치>는 지면상 디지털 장서각 청구기호 RD04504 참조. https://jsg.aks.ac.kr/

38) 1908년 개조된 인정전 실내 창과 커튼 장식은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앞의 책, p. 24의 <인정전동행각내부> 참조.

39)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가구 일부에는 덕수궁 돈덕전에서 사용되다가 창덕궁 대조전 영역으로 이전되었다는 표식이 부착되어 있어 이동이 용이한 가구들의 사용처가 변화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40) 페라나칸은 말레이반도를 중심으로 이주한 중국인과 현지인 사이에 태어난 중국인 후손으로 청대에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무역을 주도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Jesse Russell, Peranakan (Edinburgh : Book on Demand, 2012), pp. 8-10.

41) 대조전의 중국 가구의 현황은 <나전탑상> 1점, <태사의> 4점, <방등> 1점, <나전체경> 1점, <쌍용장식의자> 2점, <원형탁자> 1점, <방형탁자> 1점이다.

42) Ronald G.Knapp, The Peranakan Chinese Home : Art and Culture in Daily Life (Tokyo : Tuttle Publishing, 2012), pp. 76-81.

43) <목제침대>는 보수시에 프레임은 중국 청대의 것이나 스프링과 원단은 일본에서 수입하였으며, 내부 조립시 사용한 육송은 국내산이라고 조사된 바 있다. 에이스 침대, 『창덕궁 대조전 침대 복원보고서』 (문화재청, 2009) 참조.

44) 중국 청(淸)나라의 황실 궁궐이었던 심양 고궁의 숭정전은 청 황제의 공식 업무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내부에는 보좌를 중심으로 양 쪽에 건륭 년간(1735~1796) 제작된 법랑향로 1쌍이 장식되었다.

45) 김은경, 「19세기 조선왕실 소용 淸代 釉上彩 瓷器 연구」, 『강좌미술사』 46(2016), pp. 135-147.

46) 궁궐에 전세되는 장식용 페라나칸 양식의 법랑자기는 국립고궁박물관, 『新 왕실도자』 (국립고궁박물관, 2020), pp. 191-195의 도판 82-86 참고.

47) 각주 29에서 언급한 <순종초상사진>에서도 양기훈의 <매화도 자수 병풍>이 사진의 배경이자 장식으로 활용되었다.

48) 궁중에 헌상된 화가의 관서가 있는 자수 병풍은 양기훈과 김규진의 작품이 있으며, 양기훈과 김규진은 자수 공예가 발달했던 평양 출신이었다. 양기훈과 김규진은 평양 출신 화가로서 평안도 안주 지역의 자수 공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이들의 그림을 본으로 한 자수 병풍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49) 근대 공예와 도안(圖案)에 대한 선구 연구로 최공호, 『산업과 예술의 기로에서』 (미술문화, 2008) 참조.

50) <매화도 자수 병풍>은 실의 꼬임이 두텁고, 속수를 활용하여 입체감을 강하게 표현했던 안주수(安州繡)로 제작되어 장식적 효과가 더욱 뛰어났다. 박윤희, 「궁중 자수의 전통과 화원의 수본 제작」, 『아름다운 궁중 자수』 (국립고궁박물관, 2013), p. 204.

51) 김규진의 <竹石圖 병풍>은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서화I』 (국립고궁박물관, 2012), pp. 244-245의 도판 155, 김응원의 <蘭石圖 병풍>은 pp. 248-249의 도판 157, 강진희의 <鍾鼎瓦塼銘臨模圖 병풍>은 pp. 258-259의 도판 164 참조.

52) 창덕궁에 전하는 대형의 장식용 서화 병풍은 1917년 창덕궁 화재 이후 창덕궁에 배설할 병풍 및 기물 등이 진상되었던 사실과 관련 있었다. 강민기, 「제국을 꿈꾸었던 전환기의 화단」, 『왕과 국가의 회화』 (돌베개, 2011), p. 298.

53) 창덕궁에는 강진희, 김규진, 김은호, 김응원, 안중식, 양기훈, 이도영, 이한복, 정학교, 조석진 등의 작품들이 1980년 발견되었으며, 현재 총 34점이 전하며,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화재관리국, 『宮·陵所藏遺物目錄』 (문화재관리국, 1980) 참조.

54) 조은정, 「1920년 창덕궁 벽화 조성에 대한 연구」, 『미술사학보』 33(2009);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희정당 부벽화 모사도 제작 보고서』 (문화재청, 2009) 참조.

55) 이왕직의 곤도 시로스케는 조선 화가를 사회로부터 인정받게 하고, 그들에게 생활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순종에게 건의했고, 순종도 이에 크게 만족한다고 하였다.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 이언숙 역,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마고, 2007), p. 302.

56) 김규진의 금강산도와 관련하여 이영수, 「20세기 초 李王家 관련 金剛山圖 硏究」, 『미술사학연구』 271·272(2011), pp. 205-236참조.

57) 김규진의 <금강산만물초승경도>는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희정당 벽화 특별전 도록』 (국립고궁박물관, 2017), p. 44 도 1 참조.

58) 김은호의 <백학도>는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대조전 벽화』 (국립고궁박물관, 2015), pp. 28-29, 오일영, 이용우의 <봉황도>는 pp. 18-19, 이상범의 <삼선관파도>는 pp. 70-71, 노수현의 <조일선관도>는 pp. 62-63참조.

59) 조선사람의 미술을 숭상하며 겸하여 전하의 평생 애호하시는 본지에 어김이 없고자 한다. 『동아일보』, 1920년 6월 24일.

60) 순정효황후(1894~1966)는 일제강점기 순종과 함께 창덕궁 대조전에서 머물렀으며, 순종황제가 1926년 사망한 후에는 대비(大妃)로 창덕궁 낙선재에 기거하였다. 순정효황후의 창덕궁 가구는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사이트 참고. http://museum.donga.ac.kr/

61)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 소장의 순정효황후 가구의 <금강산도> 도안과 관련하여 이영수, 앞의 논문, pp. 221-229참조.

62) 김진갑은 이왕직미술품제작소 나전부에서 활동한 바 있고, 조선미술전람회에서 나전칠기로 다수 입상한 근대 공예가였기 때문에 도안을 작품에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었다. 최공호, 「김집갑의 나전침대-사용자와 제작경위」, 『미술사연구』 36(2019), pp. 7-32참조.

Fig. 1.
<第一號謁見所及附續建物平面圖>, Ground Plan of Injŏngjŏn Hall, 1908, Korean Empire, 62×70cm,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ttps://www.yoks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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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선정전 내부>, Audience Chamber of Sujŏngjŏn Hall, 1920, Seoul Museum of History (Seoul Museum of History, https://www.museum.seou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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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大 造 殿平面圖>, Ground Plan of Taejojŏn, 1912~ 17, 91.1×101.4cm,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ttps://www.yoks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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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창덕궁 희정당 접견실>, Audience Chamber of Hŭijŏngdang, 1921, Maeilsinbo (1921.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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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창덕궁 인정전 내부>, Injŏngjŏn of ch’angdŏkkung, 1911, 8.8×13.9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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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봉황도>, Phoenixes, c. 1910, 328×399.3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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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칠보화병>, Cloisonne Vase with Enamel Design, early 20th century, h. 93.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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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순종황제의 의자>, Chair of Emperor Sunjong, early 20th century, Korean Empire, h. 102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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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일본 천황의 의자>, Chair of the Japanese Emperor, late 19th century, Meiji era, Numazu City (小泉和子, 『西洋家具ものがたり』, p.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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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이화 봉 황문암체어>, Chair of Emperor Sunjong, early 20th century, h. 109cm, Ch’angdŏkkung Management Office of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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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붉은 융단 의자>, Side Chair, early 20th century, h. 102.8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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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붉은 비단 스툴>, Stool, early 20th century, 86×86×60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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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內部 裝 飾圖>, Painting for Interior Design, early 20th century, 70.8×51.5cm,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ttps://www.yoks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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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나전탑상>, Chinese Style Settee, early 20th ceuntry, Qing Dynasty, 209×134×109cm, Ch’angdŏkkung Management Office of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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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Balckwood Settee, early 20th century, Qing Dynasty, h. 136cm, The Peranakan Gallery The Peranakan Gallery (https://www.theperanak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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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겹사법랑향로>, Incense Burner with Enamel Design, early 20th century, Qing Daynasty, h. 143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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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분채화조문백 자화병>, White Pocelain Vase with Peacock and Flower Design, 19-20th century, Qing Dynasty, h. 91.8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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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매화도 자수 병풍>, 畫本: 양기훈, Ten-Panel Folding Screen of Embroidered Plum Blossoms, 1906, Korean Empire, 247. 3×400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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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김규진, <叢石亭絶景圖>, Kim Kyuchin, Superb Landscape of Ch’ongsŏkchŏng, 1920, 882.5×195.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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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김진갑, <주흑칠나전의걸이 장>, Kim Chinkap, Red and Black Lacquered Furniture with Inlaid Mother of Pearl Design, 1930s, h. 196cm, Seokdang Museum of Dong-a University (Seokdang Museum of Dong-a University, http://museum.dong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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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wangsŏng sinm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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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chong sillok.

Sunchongsillokbulok.

Sŭngchŏngwŏn ilg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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