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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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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20세기 초 창덕궁의 변화를 다룬 연구로는 김정동, 「개화기 우리 궁궐에 이입된 서양요소들-창덕궁 희정당을 중심으로」, 『한국건축역사학회 2006년도 춘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한국건축역사학회, 2006.5), pp. 202-224; 한병수·박진홍·한동수, 「20세기 초 서양문물의 도입과 궁궐 정침의 공간 변화-창덕궁 희정당을 중심으로」, 『대한건축학회 춘계학술발표대회논문집』 31권 1호(대한건축학회, 2011.4), pp. 153-154; 우동선·기세황, 「1908년 창덕궁 인정전 일곽의 개조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23 2호(2014.4), pp. 53-64;, 「1920년 창덕궁 내전 일곽의 재건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23 3호(2014.6), pp. 43-54; 이강근, 「近代期 昌德宮 건축의 변천에 대한 연구」, 『강좌미술사』 42(2014), pp. 11-31; 장필구, 「20세기 전반기 조선왕실의 변화와 창덕궁 건축 활동의 성격」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 박사학위논문, 2014); 이규철, 「1907~1910년 창덕궁 중심 공간의 재편」, 『대한건축학회 논문집-계획계』 31 6호(대한건축학회, 2016.06), pp. 151-162; 김지현, 「창덕궁 내전 일곽 공사로 보는 일제강점기 궁전 별전」, 『건축역사연구』 29 2호(2020), pp. 63-74. 등이 있다.
4) 인정전은 일본 메이지궁에서 공식 행사와 천황을 알현하는 공간이었던 표궁전(表宮殿)의 구조와 기능이 유사하였다. 일본 메이지궁의 표궁전과 관련하여 山崎鯛介, 「明治宮殿の設計内容に見る儀礼空間の意匠的特徴」, 『日本建築学会計画系論文集』 69(2004. 04), pp. 169-176. 참조; 우동선·기세황, 앞의 논문(2014. 4)에서는 <明治宮殿竣工平面圖>에 나타난 메이지궁의 구조, 메이지궁의 조영을 주도한 인물 등에 대한 비교·분석을 통해 인정전이 메이지궁을 모방하여 개조되었음을 밝혔다. 이외에도 각주 2에 언급된 연구들을 통해 일본의 메이지궁과 근대 창덕궁의 건축 공간과의 연관성이 확인되었다.
5) 창덕궁 인정전과 관련하여 근대기에 작성된 건축도면이 약 13종 전한다. 근대 건축도면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국립문화재연구소, 국가기록원,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등에 소장되어 있다.
8) 조선시대 외교의례의 공간은 정전의 내부가 아닌 외부였다. 조시내, 「한국 근대 궁궐건축의 공간과 장식 특성 연구」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22), pp. 8-13.
9) 현재 선정전 내부에 배치된 어좌는 평상의 형태로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제작된 진연(進宴)·진찬(進饌) 의궤의 도설(圖說)에 그려진 용평상(龍平床)과 형태 및 규격이 매우 유사하다. 조시내, 「대한제국기 宮中 宴享用 家具 연구」, 『美術史學硏究』 264(2009), pp. 145-146; 어좌로 사용된 좌구와 어좌 공간에 대한 연구로 제송희, 「조선 후기 국왕의 御座 연구」, 『미술사연구』 42(2022), pp. 7-40참고.
10) 1917년 11월 10일 창덕궁 대조전의 서온돌에 화재가 발생하였다. … 인정전과 선정전은 무사하였지만 희정당, 대조전, 경훈각, … 등 무려 800 여평에 달하는 건물들이 모두 불타버렸다. 『순종실록부록』, 1917년 11월 10일.
11) 李王職長官 子爵 閔丙奭 이하 高等官이 화재 이후의 처리 방법에 대하여 회의를 하고, … 新殿은 조선식으로 건축하기로 하고, 그 외에는 서양식을 참조하기로 하였다. … 『순종실록부록』, 1917년 11월 14일.
12) <大造殿平面圖>에는 1912년 대조전 수리시 양심합과 희정당을 연결하는 복도가 그려져 있기 때문에 1912~17년 사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近代建築圖面集-해설편』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9), p. 52.
13) 우동선·기세황, 앞의 논문(2014. 6), pp. 43-54에서는 관련 신문기사의 검토와 현장 조사를 통해 1920년 재건된 대조전과 희정당이 한(韓)·일(日)·양(洋)의 절충된 양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밝혔다.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해석을 참고하여 재건된 대조전이 전통적 침전과는 다른 양상의 공간 특성을 갖추고 있었음을 강조하였다.
15) 대조전은 李王同妃兩殿下의 御起居하는 宮室이다. …오른편인 興福軒이라하는 王殿下의 御居室이며 좌측으로 觀理閣이라 하는 妃殿下의 御居室이 拜聽된다, 「覲見儀를 行하실 大造殿 拜觀記」, 『每日申報』, 1922년 4월 26일.
16) 양제로 건축되리라는 말이 있으나 양제로 건축함은 창덕궁 안의 다른 건축물과 서로 대하여 조화가 고르지 못한 고로 자연히 이전대로 조선식의 궁정을 건축하기로 결정하였다. 『每日申報』, 1917년 12월 20일.
17) 희정당의 고정식 가구 배치와 관련하여 1920년대 그려진 <熙政堂御居間家具配置>를 참고할 수 있다. <熙政堂御居間家具配置>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앞의 책, p. 56. 의 도판 059 참고.
18) 전각과 전각 사이를 복도로 연결하여 통합된 구조를 형성하는 공간 특성은 일본의 메이지궁과 유사하며, 1908년 개조된 인정전과 1920년 재건된 대조전 영역에 영향을 미쳤다. 우동선·기세황, 앞의 논문(2014. 6), p. 46.
21) 20세기 초 창덕궁 인정전이 개조되면서 당가가 해체되고, 일월오봉병 대신 봉황도가 부착되었다. 봉황도 아래에는 개조 이전의 인정전 당가 하단 부분을 일본식 미닫이문으로 개조하여 그 위에 <사령도>가 그려졌다. <사령도>는 용, 거북, 봉황, 기린을 소재로 한 그림으로 근대 일본화풍에 영향을 받아 제작되었다. 박윤희, 「20세기 창덕궁 인정전 당가(唐家)의 변형 과정 고찰-일월오봉병, 봉황도, 사령도를 중심으로-」, 『고궁문화』 14(2021), pp. 122-127.
22) 창덕궁 인정전 <봉황도>와 관련된 연구로 김수진, 「한국 봉황 문장(紋章)의 기원과 정치학-창덕궁 인정전 <봉황도>에서 청와대 봉황 문장까지」, 『한국학, 그림과 만나다』 (태학사, 2013); 김현지, 「동아시아 유교사회의 이상적 이미지 봉황」, 『꽃과 동물로 본 세상』 (사회평론, 2021), pp. 16-55. 등이 있다.
23) 일본에서 봉황은 천황과 황실을 상징하는 문양으로 사용되었다. 20세기 초 흔하게 발행된 일본 황족들의 사진과 기록이 인쇄된 <皇族畫報>에 봉황이 장식되었다. https://www.gogung.go.kr 의 소장품 고궁 574 참고.
24) 일본의 칠보공예는 금, 은, 구리, 청동 등의 금속 바탕에 유약을 800℃ 전후 고온에서 소성하여 녹인 후 유리 혹은 에나멜을 이용하여 채색을 입혀 제작했으며, 얇은 금속선으로 모양을 내는 유선 칠보와 칠보 유약 사이에 금속선을 붙이지 않고 모양을 내는 무선 칠보로 구분된다. 「七宝」, 『日本の美術』 3(至文堂, 1993), p. 322.
25) 일본 병풍은 조선 초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꾸준히 유입되었다. 특히, 임진왜란으로 한일 외교 관계가 단절되었다가 국교가 회복한 17세기 초부터 조선 왕실에 유입된 일본 병풍의 수는 크게 증가하였다. 김수진, 「조선 왕실에서의 왜장병풍 제작과 그 문화사적 의의」, 『미술사와 시각문화』 23(2019), pp. 12-16.
27) 창덕궁을 중심으로 전세되고 있는 근대 일본 자수 병풍은 공간의 배경 장식으로 효과적이었던 꽃과 새를 화재(畫材)로 한 것이 많았다. 대표 작품으로는 https://www.gogung.go.kr/ 유물번호 창덕6600 <국작도(菊雀圖) 자수 병풍> 참고.
28) 1900년대 일본 병풍이 황실에 진헌되는 일이 많았다. 『皇城新聞』 1908년 10월 25일; 『순종실록부록』의 1911년 5월 12일, 1915년 10월 6일, 1917년 6월 19일, 1920년 6월 3일 등의 기록을 통해 일본 병풍의 유입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29) Fig. 8. <순종황제의 의자>는 <순종초상사진>(1909)과 <창덕궁 인정전 동행각> 사진에서 확인되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품 유물번호 기타5와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앞의 책, p. 11 <仁政殿東行閣上層休憩室> 참조.
33) 외형은 조선식이지만 내부 공간이 서양식으로 장식된 한양(韓洋) 절충식 전각으로는 1908년 개조된 창덕궁 인정전, 1912년 준공된 덕수궁 덕홍전(德弘殿), 그리고 1920년 재건된 창덕궁 대조전, 희정당 정도이다.
34) 대조전은 李王同妃兩殿下의 御起居하는 宮室이다. … 接見室 … 정면에는 黃金枠의 당초문양의 倚子가 二脚 各樣色彩中에 燦然히 光輝를 발하여 … (중략). 「覲見儀를 行하옵실 大造殿 拜觀記」, 『每日申報』, 1922년 4월 26일.
35) 근대 전환기의 궁궐을 중심으로 남아있는 서양 가구 및 장식에 대한 연구로 최지혜, 「근대 전환기 실내공간과 서양 가구에 대한 고찰: 석조전을 중심으로」 (국민대학교 미술학과 박사학위논문, 2018);, 「20세기 초 덕수궁·창덕궁에 유입된 리놀륨(Linoleum) 바닥재 연구: 리놀륨의 제작 방식과 특성 및 사용을 중심으로」, 『文化財』 54 1호(2021), pp. 18-31. 참조.
37) 대조전 양관은 1917년 대조전의 화재로 공사가 중단되어 현존하는 건축물은 아니다. <宮闕洋館應接室 스케치>는 지면상 디지털 장서각 청구기호 RD04504 참조. https://jsg.aks.ac.kr/
39)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된 가구 일부에는 덕수궁 돈덕전에서 사용되다가 창덕궁 대조전 영역으로 이전되었다는 표식이 부착되어 있어 이동이 용이한 가구들의 사용처가 변화한 정황을 확인할 수 있다.
40) 페라나칸은 말레이반도를 중심으로 이주한 중국인과 현지인 사이에 태어난 중국인 후손으로 청대에 동남아시아와 중국을 잇는 무역을 주도하면서 독특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Jesse Russell, Peranakan (Edinburgh : Book on Demand, 2012), pp. 8-10.
42) Ronald G.Knapp, The Peranakan Chinese Home : Art and Culture in Daily Life (Tokyo : Tuttle Publishing, 2012), pp. 76-81.
43) <목제침대>는 보수시에 프레임은 중국 청대의 것이나 스프링과 원단은 일본에서 수입하였으며, 내부 조립시 사용한 육송은 국내산이라고 조사된 바 있다. 에이스 침대, 『창덕궁 대조전 침대 복원보고서』 (문화재청, 2009) 참조.
44) 중국 청(淸)나라의 황실 궁궐이었던 심양 고궁의 숭정전은 청 황제의 공식 업무공간으로 사용되었으며, 내부에는 보좌를 중심으로 양 쪽에 건륭 년간(1735~1796) 제작된 법랑향로 1쌍이 장식되었다.
48) 궁중에 헌상된 화가의 관서가 있는 자수 병풍은 양기훈과 김규진의 작품이 있으며, 양기훈과 김규진은 자수 공예가 발달했던 평양 출신이었다. 양기훈과 김규진은 평양 출신 화가로서 평안도 안주 지역의 자수 공예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이에 따라 이들의 그림을 본으로 한 자수 병풍이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50) <매화도 자수 병풍>은 실의 꼬임이 두텁고, 속수를 활용하여 입체감을 강하게 표현했던 안주수(安州繡)로 제작되어 장식적 효과가 더욱 뛰어났다. 박윤희, 「궁중 자수의 전통과 화원의 수본 제작」, 『아름다운 궁중 자수』 (국립고궁박물관, 2013), p. 204.
51) 김규진의 <竹石圖 병풍>은 국립고궁박물관, 『궁중서화I』 (국립고궁박물관, 2012), pp. 244-245의 도판 155, 김응원의 <蘭石圖 병풍>은 pp. 248-249의 도판 157, 강진희의 <鍾鼎瓦塼銘臨模圖 병풍>은 pp. 258-259의 도판 164 참조.
52) 창덕궁에 전하는 대형의 장식용 서화 병풍은 1917년 창덕궁 화재 이후 창덕궁에 배설할 병풍 및 기물 등이 진상되었던 사실과 관련 있었다. 강민기, 「제국을 꿈꾸었던 전환기의 화단」, 『왕과 국가의 회화』 (돌베개, 2011), p. 298.
53) 창덕궁에는 강진희, 김규진, 김은호, 김응원, 안중식, 양기훈, 이도영, 이한복, 정학교, 조석진 등의 작품들이 1980년 발견되었으며, 현재 총 34점이 전하며,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문화재관리국, 『宮·陵所藏遺物目錄』 (문화재관리국, 1980) 참조.
54) 조은정, 「1920년 창덕궁 벽화 조성에 대한 연구」, 『미술사학보』 33(2009);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창덕궁 희정당 부벽화 모사도 제작 보고서』 (문화재청, 2009) 참조.
55) 이왕직의 곤도 시로스케는 조선 화가를 사회로부터 인정받게 하고, 그들에게 생활자금을 지원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하여 순종에게 건의했고, 순종도 이에 크게 만족한다고 하였다. 곤도 시로스케(權藤四郞介), 이언숙 역, 『대한제국 황실비사』 (이마고, 2007), p. 302.
58) 김은호의 <백학도>는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대조전 벽화』 (국립고궁박물관, 2015), pp. 28-29, 오일영, 이용우의 <봉황도>는 pp. 18-19, 이상범의 <삼선관파도>는 pp. 70-71, 노수현의 <조일선관도>는 pp. 62-63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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