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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朝鮮 刺繡와 산동 魯繡와의 相關과 전개* :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자수산시청람도>를 중심으로*

Abstract

본 연구는 오래전부터 한반도와의 역사적, 지리적, 문화적, 풍속사적 인연이 깊은 산동(山東)의 노수(魯繡)를 통해 조선 자수사의 공백을 살피는 시도이다. 노수는 명대 후반 무렵 명성을 얻기 시작한 강남의 고수(顧繡)와는 달리, 고대를 거쳐 중세 원에 이어 청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와 지속적인 상관을 고찰할 수 있어, 하나의 자료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다. 특히 조선 후반을 기해 입수되거나 제작된 노수풍의 유물들은 당시 지배층의 문예적 취향과 산동과 연관이 깊은 안주수를 비롯한 조선화된 자수에 대한 다양한 정보도 담고 있었다.
고대부터 사용되던 꼰사는 중세 송대 말 푼사와 회수가 감상용 자수그림의 제작에 사용되면서, 중세 동아시아 자수 제작에서 푼사가 유행하는 시기를 거쳐, 원대에 다시 유행하는 실의 유형이다. 이런 푼사의 사용은 원대 말 산동 노수에서 융사(絨絲)인 푼사에서 선사(線絲)이 꼰사로 실의 조건이 변함에 따라, 새롭고 다양한 정연된 자수기법들이 출현하게 되면서 노수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당시 복식 의장의 견고함을 위해 꼰사를 유행시켰기 때문에 산동의 노수를 ‘의선수(衣線繡)’라고도 칭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노박집람』(1517년경)을 통해 조선에서도 실의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를 통해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노수풍 유물들과 명청대 노수와의 비교와 함께, 조선에서 전개되는 꼰사라는 특화된 실의 상태라든가, 자수된 연지수금도나 고사인물도의 도상과 작풍 및 조선의 궁양(宮樣)인 2줄 정금사[정채사]의 전개 양상, 궁수와 민수, 안주수 등 여러 관점을 상관지어 살펴보았다.

Abstract

This study aims to fill the gaps in the history of Korean embroidery by examining Luembroidery of Shandong, an area closely related to the Korean peninsula in history, geography, culture, and custom. Unlike Gu-embroidery of Jiangnan that gained renown in the late Ming dynasty, Lu-embroidery’s relations to Korea could be found from the ancient times, through medieval Yuan to the Qing period, and therefore has significance as historical documents. Needlework in Lu-embroidery style, made or brought to Korea in the late Joseon period represent the literary preferences of the ruling class at the time and also hold diverse information on localized embroidery in Joseon, including Ahn Joo-embroidery, closely associated with Shandong.
Kkonsa existed since the ancient times, but was eclipsed in popularity by p’unsa, used in painted embroidery in medieval period in East Asia. It regained dominance again during the Yuan dynasty. In the late Yuan period, Lu-embroidery reached another golden age as Shandong Lu-embroidery employed kkonsa, a type of twisted embroidery thread rather than p’unsa, a type of silk thread, and as new techniques of more diversity and refinedness were developed. Shandong Lu-embroidery is also called uiseonsu, meaning embroidery for clothes, as kkonsa was widely used as being suitable for more sturdy costumes. In Nopakchiplam, it is recorded that new types of embroidery threads were used in Joseon as well. Conclusively, this study compared the Lu embroidery style works at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and the works of Ming-Qing period, and examined how kkonsa were used in Joseon. The iconography and style of embroidered Lotus Pond and Waterfowl and narrative figure paintings, and the use of Joseon royal style two-strands Jeonggumsa, royal embroidery, folk embroidery and Ahn Joo-embroidery were all considered for more comprehensive understanding.

Ⅰ. 머리말

본 연구는 원대(元代) 이래 산동(山東) 노수(魯繡)의 특징인 ‘꼰사’1를 통해 조선 시대 자수와의 상관을 모색해보는 시도이다. 현재 조선 자수사는 그동안 19세기에 절정기였던 궁수(宮繡)를 통해 꼰사가 조선 자수의 주된 특징이며, 민수(民繡)에서는 반푼사나 푼사를 사용하였다고 보는 대체적인 관점이 이어오고 있다.2 그러나 푼사를 사용하거나 또는 꼰사와 푼사를 함께 사용했던 시대와 유물도 있고, 실로 인해 궁수와 민수의 특성이 고려되면서, 자수기법도 발달하기 때문에 조선 자수가 꼰사로 특화하게 된 연유에 있어 여러 제반 요인에 대한 고찰은 조선 자수사의 정립에 있어 필요하다 할 수 있다. 특히 산동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한반도와 지리사, 문화사 및 외교사적 상관이 지속된 곳이기도 하다. 자수사적으로도 노수는 고대 이래 오랜 전통을 이어 오면서 여러 지방수들의 생성과 발전에 영향을 주었던 유파이다. 더욱이 원대 후반에 꼰사로 변화된 노수의 복식자수와 기용자수는 이미 고려 후반에 원과의 부마(駙馬)체제 중에 유입되면서, 점차 조선 지배층의 자수 소용에도 깊은 상관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양란(兩亂) 이후에 노수의 감상용 자수그림은 명대 후반 푼사를 사용하면서 명성을 얻었던 강남 고수(顧繡)의 감상용 자수그림과 함께, 조선 왕실과 권문가로 유입되면서 지배층의 감상과 제작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3 따라서 여러 시대적 변화에 따라 조선에서 꼰사의 전개는 다각적인 해석이 필요하다고 사료된다.
또한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는 노수와 연관되는 <전(傳)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 작자수>(이하 조선본 <산시청람도(山市晴嵐圖)>)와 실의 탈락이 상당히 진행된 미상의 <자수(刺繡)[화조도(花鳥圖)])>가 전하고 있다. 이들은 중국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의 노수<산시청람도>(이하 청대본<산시청람도>)와 <부용쌍압도축(芙蓉雙鴨圖軸)>의 도상과 기법 및 채사의 운간배치와도 유사한 작풍이 전개되고 있어, 감상용 자수그림의 유행에 있어서도 노수의 역할이 추정되는바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명·청과 조선 자수에서 본격적인 꼰사의 유행, 자수연지수금도(刺繡蓮池水禽圖)와 2줄 쇄련수(鎖鏈繡[사슬수])4 및 화려한 보색 대비, 안주수(安州繡)의 전개까지 연구사적으로 소외되었던 조선 자수의 특징을 노수의 여러 연구 성과와 사료 및 조선의 문예사, 풍속사, 여성사, 자수사적 성과를 바탕으로 검토해보겠다.5 이처럼 실을 통한 다양한 변화와 전개에 따른 제고(諸考)는 노수의 변모와 함께 원 간섭기를 기준으로 한 고려 자수의 변곡(變曲)과 양란을 기준으로 한 조선 자수의 변곡을 배경으로, 19세기 초 조선 자수가 중국보다 뛰어나다는 명성을 얻는 조선적인 특색을 갖추어 가는 대요(大要)을 정리해보는 것에 다소의 목적이 있다.

Ⅱ. 산동 노수의 내력과 한반도와의 상관

1. 지리학적, 문화사적 내력

산동은 지리학적으로 고대부터 한반도와 가장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면서 근·현대까지 꾸준한 관계를 이어왔다. 그동안 많은 고고학적 발견들을 바탕으로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와 용산문화(龍山文化)와 같은 중국 신석기 문명의 중요한 발상지로 알려져 왔다. 또한 한반도와의 긴밀한 관계로 인해 샤머니즘과 조류숭배 등을 문화적 특징으로 하는 알타이어계 종족인 동이제족(東夷諸族) 문화의 토착 자생지였음이 밝혀지면서 주목되는 지역이기도 하다. 더욱이 산동은 고대 동이제문화의 기층 세력이었던 제(齊)와 노(魯)가 서주(西周) 통치 이후 제는 맹자(孟子, B.C.372 추정-B.C.289 추정)를, 노는 공자(孔子, B.C.551~B.C.479)와 묵자(墨子, B.C.479 추정~B.C.381 추정)를 배출한 의미가 깊은 지역이기도 하다.6 그리고 문화사적으로는 지속적으로 발해만(渤海灣)과 황해 사이의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통해 만주로 이어지는 기항지(寄港地)였으며, 고대 한반도와의 신문명이 교류되는 해상 실크로드의 창구이기도 했다. 특히 이들 교류 경로는 북방 동이계 문명의 소통지로 오랫동안 선호된 루트였다. 또한 산동의 등주항(登州港)은 오랫동안 한반도를 잇는 중요한 관문으로 서주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 B.C.770~B. C.221)의 제에 걸쳐 7대 옥패(玉幣) 중 하나인 고조선 문피(文皮)가 유입되던 곳이었고,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국 내륙과의 정치, 문화사적 교류를 지속하던 곳이었다.7 특히 이곳은 고구려의 패망으로 당으로 끌려간 고구려 유민들이 생활하고 있던 곳으로, 고구려 유민 출신인 절도사 이정기(李正己, 732~781) 집안이 당(唐)의 간섭에서 벗어나 60여 년간 독립적인 치세를 이어가면서 산동 전체와 하북(河北),하남(河南),안휘(安徽)를 통치하면서 중국 역사에서 유의미한 족적을 남긴 곳이기도 하다. 이런 이정기 집안의 산동 지배력을 붕괴하기 위해 당과 함께 평정에 참여했던 신라군사 3만 명은 그 이후에 산동 반도 해안과 내륙의 회수(淮水)와 대운하변 그리고 양자강 하류 및 남중국 연해안에 ‘신라방’, ‘신라촌’이라는 집락들을 이루며 잔류하였고, 훗날 장보고(張保皐, 780년대-846)의 해상 네트워크를 형성할 수 있는 단초가 되기도 했다.8 9세기 전반에는 장보고의 원찰 적산(赤山) 법화원(法華院)과 발해관(渤海館)이 등주 등 각 도처에서 운영되면서, 교역의 절정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장보고 선단(船團)의 해체 이후에는 중세 한중 교섭의 중심이 산동 등주에서 점차 강남 연해지역으로 이동하여 고려와 이슬람 등의 교역으로 확대되기도 하였다.9 또한 산동 등주는 17세기 연행 중 명과 후금(後金)과의 정치적 상황에 따라, 해양연행이 한때 이곳을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로(公路)였던 시기도 있었다.10
그리고 북송이 금에 의해 패망하자, 산동은 금에 복속되었고, 북송의 많은 귀족들이 금으로 끌려가 자수 등의 수공업에 종사하면서 금의 시중을 들었던 내력도 있다.11 금의 패망(1115~1234) 이후에는 금대의 예인(藝人)들과 문인들이 원대 산동으로 유입되어 활발히 활동하였는데, 당시 산동은 항주(杭州), 양주(楊州)를 거친 강남의 물자가 수도인 대도(大都)로 운송되는 운하가 건설되어 전국의 각종 물화가 교통되는 번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12 이런 번성은 17세기에도 이어진다. 그곳을 방문한 조선 사신들의 『조천록(朝天錄)』을 보면 산동은 남경과 북경을 잇는 운하가 있는 곳답게 각 도시에 누각들이 즐비했고, 점포와 시사(市肆)도 번창하여 왕래하는 빈객도 많아 아주 부유하고 번화하면서, 명말 상품경제의 발전과 번창을 이끌고 있었다고 묘사되고 있었다.13 이처럼 긴 역사적 상관 속에서 산동은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요동 또는 발해만의 가까운 해상교통로를 통해 오랫동안 인적, 물적 교류가 직간접적으로 유지되면서 깊은 인연이 지속되는 곳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4 또한 이런 오랜 역사적 내력을 거친 산동 노수는 명청대 감상용 자수그림에도 꼰사를 이용하면서 자수의 소용과 제작에 변화를 주며 재전성기를 맞이하는데, 조선 자수의 기법과 도상 및 궁양의 정착에도 다소의 상관이 있다는 점에서 고려할 유파라고 할 수 있다.

2. 노수의 자수사적 내력

노수는 산동의 제와 노 지역의 자수를 아울러 칭했던 것으로, 이 지역은 고대부터 뽕나무 생산지로서 비단과 자수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15 더구나 고대 제순(帝舜)의 12장(章) 천자 복장에 관한 기록(『서경(書經)』)은 노수를 기반으로 작성되었고, 제나라의 수공예 기술을 기록한 『고공기(考工記)』에서 ‘五采를 갖춘 것이 繡(五采備謂之繡)’라고 정의된 자수는 화려한 색사를 사용했던 산동 노수의 특징으로 보인다.16 그리고 노수는 앞서 본 고고학적, 문화사적 상관을 보더라도 동북지방을 포함한 고대 동이계 자수와 북방계 국가의 자수 그리고 삼국과 고려시대 자수까지 지속적인 교류를 통해 성장하였을 가능성도 있다. 기법상 노수는 고고학적 발굴 상 가장 시대를 올라가는 발굴유물들을 통해 쇄수(鎖繡[개구식쇄수(開口式鎖繡), chain stich, 사슬수])가 변화한 머리땋는 모양의 쇄련수가 일찍이 소용되고 있었다. 더욱이 산동 임치(臨淄)에서는 이 기법이 상하로 순환하여 기복(起伏)된 운기문수(雲氣紋繡[변체운문양(變體雲文樣)])의 일종인 ‘장수수(長壽繡)’, ‘신기수(信期繡)’, ‘승운수(乗雲繡)’라 불리던 한 대(漢代) 자수보다 이른 자수 편(片)들이 출토되기도 하였다. 동시에 가는 금사(金絲)와 두께가 다른 0.4mm의 금박도 출토되었다.17 당시 한족은 금을 사용하지 않았지만, 북방 초원지대에 사는 유목인들은 금을 사용한 복식을 선호하고 있었다. 육홰(陸翙)의 『업중기(鄴中記)』에 의하면, 산동을 포함한 양쯔강 이북을 중심으로 후조(後趙, 319~351)를 번창케 한 석호(石虎)는 흉노(匈奴)의 별종(別種) 갈(羯) 출신의 후예였는데 수렵에 나아갈 때 금선(金線)으로 장식한 합환고(合歡褲)을 입었다고 한다.18 그리고 북송 말, 송과 금이 평화교섭[소흥화의(紹興和議), 1142]을 행할 때에도, 증답품(贈答品)으로 금나라는 연금사(撚金糸)의 비단을 자주 이용했다고 한다.19 중세 북방국가인 요‧금‧원(遼‧金‧元)의 자수는 고대에서 당대(唐代)까지 유행한 꼰사의 쇄련수20를 기본으로, 당말(唐末)에 푼사의 평수(平繡)와 초기 자련수로의 전환 양식을 받아들였고, 한대 이래 중앙아시아와 인도 등 서쪽과의 교류를 통해 금사의 정금수(釘金繡[정채수(釘彩繡)], 한국자수에서는 징금수)21를 이용한 작풍으로 위상이 상당히 높았다고 한다. 유물 상 한반도에서도 일찍이 정금수가 사용되었으며,22 가장자리를 정금하는 작풍이 조선에서는 왕실 기법으로 특화, 전개되었다.
한편 송대에는 궁정의 자수품을 민가와 사찰에 주문하여 제공받았는데, 북송 말이 되면 휘종(徽宗)이 문수원(文繡院, 1104)을 설치하여 300여 명의 자수 장인의 기예와 유명 서화를 융합시켜 직접 제작케 하였다.23 이때 제작된 감상용 자수그림은 명말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찬(讚)처럼 머리카락보다 가는 푼사를 이용하여 정교한 운간(暈間[Gradation])을 묘사할 수 있어, 회화처럼 가치있는 대상으로 격상하게 되었다.24 다시 말하자면 고대 이래 강한 꼰사를 사용하던 작풍이 송대 말에 푼사로 변하게 된 것이었다. 또한 복식과 기용(器用)에도 서화의 밑그림을 사용하면서 회수와 푼사를 함께 하였는데, 이러한 작풍은 북방국가의 자수 소용(所用)에도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북방국가에서는 회화의 제재인 연지수금도(蓮池水禽圖)를 만지교(滿池嬌)라 부르면서 황실 의장에 시수(施繡)하였다. 이런 서화의 밑그림을 사용한 자수는 특히 원대에 복식 가득 만수(萬繡)하는 의장(意匠)풍습과 자수의 화제 확장에도 영향을 미쳤다. 게다가 원대에는 다산(多産)과 기복(祈福)을 우의(寓意)한 전지(纏枝), 절지(折枝), 화훼, 화조, 단화(團花), 팔길상(八吉祥) 등이 묘사된 기품있는 자수를 제작하기도 하였다.25 이처럼 어느 시대보다 자수를 적극 활용하게 된 까닭은 인도에서 건너온 목본면(木本棉)을 산동 황하 유역의 노 지역인 서남지방에서 가장 먼저 재배하면서, 면화(棉花)를 꼰 면사가 곧 민가의 방직과 실의 주된 재료가 되었던 풍습에 연유한다.26 즉 견사보다 좀 더 다루기 용이한 면화가 대량으로 중국 내륙에 보급되면서, 당시 중원의 주인이던 원대 황실과 민가의 자수생활이 일변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송의 영향 하에 노수도 푼사를 사용하다가, 꼰사의 면사를 사용하는 풍속에 맞추어 꼰사로 전환되었던 것이다. 복식의 견고함[縫製]을 위해 사용되게 된 꼰사는 복식에 만수(滿繡)하는 의장에 사용됨에 따라 의선수(衣線繡)로 칭하기도 하였다. 이후 감상용 자수그림에도 사용되면서 감상과 효율적인 면이 충족되자, 유행하게 되었다고 상정된다.
그러므로 중국에서 꼰사를 의미하는 ‘의선수’(Fig. 1) 27는 의선을 쌍사연선(雙絲撚線) 또는 가연쌍고선(加撚雙股線)이라 칭하는데, 대체로 꼰사 두 개를 덧대 다시 꼰 실이거나, 여러 가닥의 꼰 실을 다시 하나로 합쳐 다양한 두께로 꼬아 제작한 실을 말한다. 예를 들어 원대 자수의 걸작으로 알려진 <종색라자수화조문협삼(棕色羅刺繡花鳥文夾衫)>(Fig 2, 2-1)과 원말 산동 추현(鄒縣) 이유암묘(李裕庵墓)(1351) 출토인 <산수인물여군대(山水人物女裙帶)>(전장 155, 너비 5cm)와 소매 끝 그리고 신발 양면에는 산수인물과 화훼 등이 시수되었는데, 화려한 보색대비의 채사를 이용한 반푼사의 평수와 자련수가 사용되었다.30 또한 <종색라자수화조문협삼>(Table 2-①)에서 수파나 토파를 묘사하기 위해 2-3줄의 채사를 겹쳐 나열한 작풍은 옷을 튼튼하게 꿰매는 기법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작풍은 명·청대 감상용 자수그림인 명말 노수인 <부용쌍압도축>(Fig. 3)과 <하화원앙도축(荷花鴛鴦圖軸)>(Fig. 4), <문창출행도축(文昌出行圖軸)>(Fig. 6)과 청대 노수인 <모란봉황도(牧丹鳳凰圖)>(Fig. 5)를 포함하여 청대 고수에서도 그 전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 유물인 <자수연지수금문사경보(刺繡蓮池水禽紋寫經褓)>(Table 1-②, Table 2-③)에서도 같은 작풍을 볼 수 있다.
이처럼 중세 지배층의 복식이나 기용자수에는 기존에 사용해 왔던 푼사와 새로운 양식인 꼰사가 사용되었는데, 특히 꼰사의 본격적인 사용은 도상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새롭고 다양한 자수기법들이 출현되면서 자수의 성장을 예고했다. 즉 송말원초(宋末元初)까지는 푼사라는 조건 때문에 자수를 할 수 있는 채사와 자수기법들이 다양하게 발전하지 못해서, 평수, 자련수 그리고 쇄련수, 정금수[정채수]와 같은 간단한 자수기법과 회수(繪繡)를 겸한 작풍이 유지되고 있었다. 더욱이 북송 말 감상용 자수그림이 제작되기 전까지 자수는 대부분 신분을 나타내는 의장이나 특권층의 생활용품 또는 (전쟁)지형 지도나 견마(犬馬)의 옷 등을 장식하는 계서(繼序)와 실용에 중점되고 있었다. 아울러 공덕불사(功德佛事)가 주된 용도였다는 것도 주지의 사실이다.
그러다가 원 후반기에 꼰사로 실의 조건이 다시 변함에 따라, 만수 의장 및 수불과 자수사경 등에 꼰사의 두께를 조절한 섬세한 재현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실의 변화는 씨앗수, 이음수, 금문수(錦紋繡)와 같은 새롭고 묘사적인 다양한 자수기법들을 출현시켰고 아울러 원의 자수 발달과 용례를 가속시켜, 노수는 제 2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중세 수불 제작의 변화와 고려와 조선 시대의 자수 및 명·청시대 자수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꼰사(의선수)로 감상용 자수그림을 제작한 명청대 노수는 강렬한 색채 대비를 위해 채사가 배치되면서 전형적인 민간 색채를 보이며, 장식을 중시하는 특징으로 전개되었다. 다음은 고려와 조선의 유물과 기록에서 보이는 푼사와 꼰사의 등장과 용례를 살펴 그 변화과정을 정리해보겠다.

Ⅲ. 조선에서 노수의 자수사적 내력과 전개

1. 조선 이전 실의 내력

조선 시대에서 꼰사의 노수와의 상관을 논하기 전에 이전 시대의 유물에서 푼사의 용례를 잠깐 살펴보고, 꼰사로의 변화를 정리하겠다. 현재 고려 11세기 유물로 추정하는 월정사 팔각구층석탑의 사리구에서 발견된 <수라향합갑낭(繡羅香盒匣囊)>(Table 1-①)은 최고(最古)의 자수 유물이다.31 이 낭에는 금사와 은사를 이용한 정금수와 금사의 사슬정금수, 푼사의 평수와 평수계로서 간단한 자련수가 사용되어 중세 고식(古式)의 자수기법을 보여주고 있다. 이중 푼사의 평수는 이 낭에 시수된 연지동자문(蓮枝童子文)의 동자 머리(Table 1-①′)에 적용되었다. 평수는 기존 중세 이전 회수나 쇄련수, 변수 또는 망수로 면을 채우는 방식에서 제작 속도를 빠르게 하고, 도상의 표현에 있어 회화적인 현실감을 느끼게 하는 기법이다. 또한 조선 초기 유물인 <자수연지수금문사경보>Table 1-②, ②′)와 <자수주머니(繡囊)>(Table 1-③, ③′)에도 반푼사나 푼사의 장단침(長短針)을 교차하는 자련수와 평수가 사용되고 있어 오랫동안 기본적인 운간을 담당하는 보편적인 기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라향갑낭>의 연지(蓮枝)를 잡고 있는 동자와 <자수연지수금문사경보>의 연지(蓮池)에서 수금이 노니는 전경 같은 회화적 서사(敍事)는 보다 사실적인 묘사를 추구했던 중세의 인문 사유를 이은 작풍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작풍은 요대(遼代) 경주(慶州) 백탑(白塔, 1147~1149) 유물 중 푼사의 평수계 기법으로 제작한 <홍라지자수연주매죽봉접문잔편(紅羅地刺繡聯珠梅竹蜂蝶紋殘片)>(Fig. 7, 7-1)과 남송대 <자수요지과학도(刺繡瑤池跨鶴圖)>(Fig. 8, 8-1)에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푼사의 소용은 원대 후반부터 꼰사로 변화를 거치면서 주변국의 실과 소용에 있어서도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고려도 원 말부터 인식한 꼰사의 의장은 정황상 원의 공주들과 혼례를 한 부마국이라는 상황에서 작풍이 전래된 후 조선 왕실로 차츰 전승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예를 들어 충선왕(忠 宣王, 1275~1325)이 고려로 복위할 때(1310) 함께 온 왕비(妃) 보탑실린 소국 대장공주(韓國長 公主, 薊國大長公主)의 전래품과 고려말 공민왕(恭愍王, r.1352~1374)과 혼인한 원의 노국공주(魯國公主, ?~1365)의 전래품(1349) 32에서 정황상 노수의 유입을 고려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당시 유럽과 동아시아를 통틀어 가장 발전된 원 황실의 고급 물건들이 고려 왕실로 상당히 풍성하게 유입되었던 것이다. 이중 <종색라자수화조문협삼>의 일부 도상(Fig.2-1)처럼 ‘연지원앙도’양식이 혼례의 표상으로 원나라 공주들의 혼수품에 시수되어 유입되면서,33 고려와 조선 지배층의 혼례 양식과 자수를 이용한 문물 풍습의 변화에 오랫동안 깊은 영향을 미치면서 꼰사의 양식이 자리잡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2. 조선에서 실의 내력

유물 상 자수에 사용된 실은 고려는 주된 문양에 푼사를 사용하였고, 조선은 18세기 이전까지 꼰사와 혼합된 양상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실에 대한 유일한 정보는 기록상 14세기 초 원나라 대도(大都)의 상인들과 통상하던 고려 역관들의 역서(譯書)『박통사(朴通事)』와 『노걸대(老乞大)』를 16세기 조선 역관들이 이해하기 쉽게 주석한 『노박집람(老朴集覽)』(1517년경)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책은 시대의 풍습 변화에 따른 용어들의 해설서라 할 수 있는데, 원과 명 그리고 고려와 조선시대에 사용된 실과 그 변화된 소용까지 관련 기록을 담고 있다. 우선 푼사와 관련된 기록을 보자면, 다음과 같다.
‘納綉’는 아직 실로 꼬지 않은 명주실로 깁에다 수를 놓은 것인데 무늬가 본바탕 밖으로 드러나지 않게 한 것을 ‘납수’라고 부른다. ‘綉’는 ‘繡’로 표기하기도 한다.34
즉 납수(納繡)는 ‘以末合之絲滿綉紗面…이라 하여 ‘아직 실을 꼬지 않은 명주실로 깁에다 수를 놓은 것’으로 납수라는 특정 기법을 설명하면서 ‘꼬지 않는 실’을 사용하였다는 내력을 밝히고 있다. 납수는 연구사적으로 납사수(納紗繡, Counted stitch)를 말하는데, 원대 유행한 기법으로 중국에서는 명·청대까지 활발히 사용되었다. 편년의 문제는 좀더 고찰의 여지가 있지만, 고려 14세기 후반으로 추정되는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의 <자수아미타여래도(刺繡阿彌陀如來圖)>(105×42.9cm, (『한국자수이천년』, 도02.05))에서 여래가 입은 납의(納衣)가사에 푼사의 납사수가 시수되어 있다. 그리고 17세기 중반 『음식디미방』의 저자로 알려진 안동 장계향(張桂香, 1598~1680)의 어릴 적 시를 자수로 보장한 『전가보첩(傳家寶貼)』(1667년 즈음, 71.5× 62.5cm, 한국국학진흥원(재령이씨 석계종택 기탁))에도 납사수에 푼사가 사용되었다. 따라서 16세기『노박집람』의 기록처럼 푼사의 납사수를 사용하던 양상은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보편적인 작풍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서 16-17세기에 다수 그려진 <공신 초상화>에서 공신들의 자수흉배문의 바탕문인 납사수에도 푼사가 사용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반면 동시대의 중국 전래품인 정태제(鄭泰齊, 1612~1669)의 <학흉배>(37.5×38.5cm, 석주선기념박물관)35와 선암사 소장의 <자수용문탁의(刺繡龍文卓衣)>(청대, 115.0×365cm, 중요민속자료 제244호)와 절일흉배인 <기호산신도(騎虎山神圖)>(청대, 35×36cm, 서울공예박물관(『한국의 자수』, 도 153))의 납사수에는 꼰사가 사용되어 있어 중국에서는 변화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노박집람』에서는 꼰사에 관한 기록도 있다. 즉 ‘선사(線絲)’라는 실의 존재인데, 16세기 중반에는 ‘선사’를 ‘뷔윤 실’로 부르던 조선 사회의 풍속을 짐작케 하여 고려 말 사용되기 시작한 꼰사가 이 시기가 되면 어느 정도 사용되고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36 뷔윤 실은 ‘뷔다’라는 ‘비비다, 꼬다’의 동사에서, 비비어 꼰 실 즉 꼰사를 의미하는 것이다.37 기록에 의하면 원대에 선사는 슬란(膝甲) 제작에 사용하였는데, 슬란은 소매나 무릎 주위를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튼실한 뷔윤실로 문양을 수놓아 장식하던 의장물 중 하나였다. 이 내력을 통해 장식과 견고함을다 갖춘 의선수 즉 꼰사의 소용이 16세기에는 사가나 시정으로 확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푼사는 ‘末合之絲’, 또는 ‘융사(絨絲)’라는 용어로 제시되었으며, 한자로는 ‘말융(抹絨)’으로 기록하였고, 한글로는 ‘니근 실’로 칭하고 있었다. 니근 실의 사전적 의미는 숙사(熟絲) 상태의 실을 의미했다.38 이런 관련 용어들을 정리하면 다음 <Table 3>과 같다.
『노박집람』이 편찬되던 실제 16세기 후반 유물을 보면 이 두 가지 실이 함께 쓰이기도 했다. 예를 들면 조경(趙儆, 1541~1609)묘 출토물인 <해치(獬豸)흉배>(Fig. 9, 9-1)에서는 해치의 갈기나 서기(瑞氣)를 묘사하는 곳에 푼사를 사용하였고 이외 다른 신체 부위나 주변부는 꼰사를 사용하였다. 또한 17세기 전반 왕실 유물인 인목대비(仁穆大妃, 1584~1632) 발원의 『불설아미타경(佛說阿彌陀經)』(1621, 19.8×6.5cm, 국립중앙박물관)의 표지수에는 푼사가, 1년 뒤에 제작한『금광명최승왕경(金光明最勝王經)』(1622, 34.6×12.0cm,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표지수에는 꼰사가 사용되었다. 이 『금광명최승왕경』은 꼰사로 제작된 이른 기년작이라고 할 수 있다. 『불설아미타경』을 장식하는 승강용(昇降龍)은 푼사의 평수로 시수하여 회화처럼 땀이 정교하고 세련된 양상이다. 이에 반해서 『금광명최승왕경』은 꼰사로 만지교풍의 연지를 시수하였지만, 땀이 다소 고르지 않아 숙련된 기량은 아니다. 같은 시기 왕실 발원으로 기량이 다른 유물이 전하는 것도 주목되지만, 두 가지 실이 왕실에서 사용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외 명 만력제(萬曆帝, r.1572~1620)에게 진상된 기년작 『전가진완(傳家珍玩)』<세화십장생도>(1606)(Table 2-④)에서도 원산에는 꼰사의 자련수를, 대부분 도상의 면과 윤곽선에는 푼사의 쇄련수를 사용한 용례를 볼 수 있다. 실제 유물의 크기가 워낙 작고 자수의 땀조차 작아서 꼰사와 푼사의 의미가 크지 않을 수 있지만, 2가지 종류의 실이 기법에 따라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푼사의 자련수로 송대 자수를 그대로 모수하던 고수가 명성을 얻던 시기인데, 이 자수그림은 1605년 명 황제를 배알하던 강첨(姜籤, 1557~1611)의 자수흉배를 기이하게 여겨 황제의 호감을 샀던 내력을 가지고 있다.40 아마 황제의 관심은 흉배문 자체보다는 고식인 쇄련수로 제작하는 작풍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쇄련수는 고대부터 선과 면 묘사에 함께 쓰이던 기법인데, 중세에 이르면 선의 묘사에 주로 적용되었다. 즉 원대 후기 유물인 <종색라자수화조문협삼>(Table 2-①)과 고려 말기 유물인 <단화문자수(團花紋刺繡)>(1360)(Table 2-②), <자수연지수금문사경보>(Table 2-③)에서는 수파나 토파의 선 묘사나 식물의 줄기나 잎맥 묘사에 2-3겹으로 시수되던 기법이었다. 그리고 <Table 2-②>처럼 쇄련수는 다른 기법보다 결속이 약해서 일부가 탈락되어 전해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고려에 이어 조선 17세기 전반의 사가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던 고식 기법이었다. 따라서 17세기가 되면 푼사와 꼰사를 사용한 납사수 유물이 전하는 것처럼, 때로는 꼰사의 북방계 자수기법들로 제작된 중국 자수 유물들도 발굴되는 경우가 있어, 실의 변화에 따른 다양한 자수기법이 사용되면서 제작 상의 변화가 있었다고 감지할 수 있다. 결국 이런 용례를 통해 조선 후기에는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실이 선별, 사용되기도 하였는데 점차 왕실과 지배층이 꼰사를 선호하면서 꼰사로 변화하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3. 조선 자수에서의 노수 유입과 전개

17세기가 되면 중국의 복식 자수에는 꼰사가 사용되었고, 노수도 꼰사의 평수나 자련수 그리고 이음수를 이용한 금문수로 장식된 감상용 자수그림을 제작하면서 회화처럼 감상되었다. 의장에도 <화조화>, <산수화>, <문자도(文字圖)>와 같은 회화 도상이 그대로 시수되었으며, 공덕[발원]자수로의 전개도 지속되고 있었다. 이처럼 원대에 유행한 꼰사는 명·청대 노수의 특징으로 유지되고 있었는데, 명 말에 푼사로 송대 감상용 자수그림을 재현한 강남의 고수가 지배층의 소장과 감상을 위해 제작되면서 지배층의 가장 선호된 지방수였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중국 대부분의 지방수도 꼰사를 사용하고 있어 노수의 오랜 영향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노수가 조선으로 유입되거나 전래에 관한 직접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앞서 지리학적, 문학사적, 자수사적 깊은 인연과 조선 유물에서 실의 변화를 통해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그 이유 중 하나는 명말 이전까지 자수의 소용은 중국이나 조선 모두 계서적 소용이 우선이었고, 중국도 만력연간에 이르러서야 만수의 복식 자수를 사용하던 황실 풍습 때문에 이를 제작해주는 각 지방수가 있었고,41 이런 자수의 위상 아래, 감상용 감상그림도 황실 의례로 소용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명화(名畫)를 모수하여 명성을 얻었던 명말 고수의 유행으로 인해 감상용 자수그림은 황실을 중심으로 유행하게 되는데 17세기 중반부터는 권문가와 부상(富商)이 주도하고 있었다.42 이러한 상황은 조선도 마찬가지였는데, 18세기 전반까지 감상용 자수그림의 제작과 감상은 공식적으로 왕실과 일부 권문가에서만 사용되고 있었다.
다만 17세기 기록을 통해서야 조선에서는 산동 노수가 적용된 기용자수와 감상용 자수그림의 유입에 대해 추정할 수 있다. 즉 임란 이후 17세기 지배층의 생활용품과 사치품은 중국의 신문물에 집중하고 있었는데, 이들 공급은 평안도의 가도(椵島)를 중심으로 근접에 위치한 산동의 등주와 절강 등지에서 몰려든 상선들의 각종 물화 무역을 통해서였다. 이 시기 가도는 명말 제독(提督) 모문룡(毛文龍, 1576~1629)이 거점으로 삼았던 곳으로, 조선의 각 지방 상인들이 모여 각국의 물화를 직접 구입하는 밀무역 상업 장소로서 명성이 높았던 곳이기도 했다. 이 산동의 등주를 거쳐 가도를 이용하던 통로는 다양한 사치품과 사주품들이 자유롭게 매매되던 무역로 중 하나였고, 명대 풍습도 가감없이 유입되던 곳이었다. 그리하여 그곳을 관장했던 모문룡은 자신의 사리(私利)를 위해 생소하지만 다양한 각종 사치품들을 조선 조정에 헌상하곤 하였는데, 이원익(李元翼, 1547~1634) 등 친분있는 권문가에 선물한 여러 자수그림의 유입도 이 루트를 이용했을 가능성이 있다.43 그 무렵 산동 노수는 17세기 고수(顧繡)를 비롯한 강남 각 지방수들의 유명세에 밀리던 시기였으나, 명청대 황실로 꾸준히 상납될 정도로 명성이 유지되고 있었다. 당시 이원익이 받았던 <자수화초도(刺繡花草圖) 6폭>은 재상(宰相)이던 그도 처음 본 작풍이었다. 이 자수그림은 연지(蓮池)를 배경으로 하거나 금옥병(金玉甁)과 화분에 소나무, 대나무, 복사꽃, 배꽃과 같은 각종 꽃들이 꽂아있고, 주변엔 벌과 나비가 노니는 장면들이었다.44 예를 들어 꼰사를 사용한 서울공예박물관소장의 <자수사계분경도(刺繡四季盆景圖)>(139×204cm)와 유사할 것으로 사료된다. 즉 명작이나 화보를 모수하거나 고사인물도로 명성이 높았던 고수보다는, 연지수금도를 주로 시수했던 노수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명대의 세간에는 격사(緙絲)로 제작된 <세조도(歲朝圖)> 풍의 화훼화조도도 유행하고 있었고, 원대부터 산동 의선수의 주된 주제였던 연지수금도의 만지교 양식이 세조도로 제작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이 도상은 청대가 되면 황실의 절일 의미와 부합되면서 감상용 자수그림의 주제 일부로 자리 잡았는데, 이러한 양상은 조선의 자수병풍 중 연지수금도가 화제 중 하나가 된 내력과 상관이 깊다.45
또한 산동 노수의 직접적인 유입은 17세기 중엽 조선 왕실에 있던 명말 유민 궁녀 4인에 의한 것으로 고려된다. 이들 중에는 자수와 회화에 능한 산동 출신의 궁녀 최회저(崔回姐, 1626~1705) 뿐만 아니라 고수 중심지인 강남 소주 출신의 궁녀 굴저(屈姐, 1623~1697)도 있었다. 모두 50년 이상 조선에 살면서 명말 황실 풍습을 전하며 이 시기 조선 왕실 의례와 의장 및 풍습의 변화에 깊게 관여하고 있었다. 더욱이 당시 조선 왕실과 권문가의 최대 관심사였던 명말 의장 풍습이던 수의수상, 자수된 품등흉배와 절일흉배 및 봉황흉배 등의 등장과 유행에 있어서도 이들의 영향력은 상당하였기 때문에 꼰사의 보급을 촉진시켰을 것이다.46
그리고 19세기 기록에 출현한 ‘안주수’47도 산동 노수의 작풍을 반영했다고 볼 수 있다. 19세기 후반에 지배층의 남성들이 이광사(李匡師, 1705~1777)의 초서를 안주수 장인에게 자수로 장정케 하고 이를 돌려가며 감상했던 적이 있다.48 아마 지배층에서는 이름난 서체(書體)를 자수로 주문하는 풍습이 있었던 모양인데, 안주수가 특정된 것은 이 분야에 명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 각 명문가에서는 양란 이후 희소하게 전하는 집안 어른의 서체나 중국 명서(名書)를 전가(傳家)하기 위해 수첩(繡帖)의 제작을 주도한 경우가 있었다. 또한 동기창이나 미불(米芾, 1051~1107)의 서체를 모수(摸繡)하여 감상하던 명말청초 문인의 취향이 풍속과 함께 조선에 유입되면서 글씨를 장정하는 작례도 있었고,49 환란 후 왕실에서도 상실된 왕실 유물을 모으면서 인목대비와 정명공주의 글씨까지도 모각(模刻)했던 사례도 있었다. 18세기에도 사가 남성과 여성들이 잘된 글씨를 다투어 소장하려고 했던 만큼 17세기 이후 이런 풍속에 의해서 안주수가 점차 주목되었다고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앞서 본 『전가보첩』과 명성왕후(明聖王后, 1851~1895)의 글씨를 병풍으로 보장한 <자수한시병풍(刺繡漢詩屛風)>(19세기 후반, 각 폭 112.2×31.3cm, 국립고궁박물관(『아름다운 궁중자수』, 도067))이 전하는데 이런 풍습의 유행으로 안주수나 그 양식이 남성 문인들에게 명성을 얻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안주수는 귀한 서체나 명서를 자수로 보장하는 유행에 의해 명성을 얻다가, 19세기 개화기를 맞이하여 감상용 자수그림의 제작에도 본격적으로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안주수는 근현대 궁수 주문품과 진상품의 특징이 주문자의 기호에 따라 꼰사와 푼사를 선택하여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궁수와 민수의 형태로 전하였다고 보인다.50 그리고 안주수를 가업으로 잇던 오형률의 회고를 보면, 여덟 가닥의 실을 꼰 꼰사 2개를 합사하여 성냥개비 정도가 되는 굵기의 실을 사용했다고 한다.51 그래서 안주수는 <Fig. 1>처럼 여러 가닥의 꼰사를 합한 다양한 굵기의 꼰사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소요된 실의 값과 노임(勞賃)에 따라 완성품의 가격이 천차만별이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이를 통해 근현대까지 이어지는 안주수는 산동 노수의 특성 중 하나인 꼰사를 그대로 계승했다기보다는 왕실과 지배층의 자수 소용에 있어 각자 주문자의 취향에 따라 제작되면서, 조선화(朝鮮化)의 진행에 나름의 역할을 하였다고 상정할 수 있다. 다음 장에서는 감상용 자수그림에서 보이는 노수의 작풍을 통해 조선화로 진행된 양상을 살펴보겠다.

Ⅳ. 국립중앙박물관소장 <자수산시청람도>의 분석과 제고

1. 도상적 양상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인 조선본 <산시청람도>(Table 4-①)는 이왕가박물관에서 20세기 초에 왕실본으로 구입한 4개의 자수 그림들 중 한 점이며,52 노수와 연관된 유물로 알려져 있다.53 이외 전인헌왕후작자수그림 <춘유방초도(春遊芳草圖)>(이하 <춘유방초도>)(Fig. 10) 도 노수와 상관이 깊다. 두 유물 모두 조선 시대 왕실 자수의 작풍인 궁수로 인식된 2줄 금사의 정금수와 채사의 정채수 및 2-3줄의 채사를 배열하는 용례도 담고 있어 눈길을 끈다. 이런 작풍은 요·금·원의 북방자수에서 일찍이 살필 수 있는 기법이어서 그 연관도 추정해 볼 수 있다. 따라서 조선본 <산시청람도>를 중심으로, <춘유방초도>와 작가 미상의 <(자수)화조도>(Fig. 11)와 명청대 노수작(Table 4-②, Fig. 3, 4, 5, 6)들과의 도상적 상관과 내력을 분석함으로서, 조선시대 자수의 일면을 간략히 정리하겠다.
우선 ‘산시청람도’는 소상팔경도(瀟湘八景圖)의 화제 중 하나로, 청대 강희 연간(康熙年間, 1661~1722)에 제작된 청대본<산시청람도>(Table 4 -②)와 조선본<산시청람도>(Table 4-①)가 구도와 제재 상 서로 유사함이 보여 눈길을 끈다. 청대본<산시청람도>(Table 4-②)는 당시 명성 높았던 청대 고수의 2m가 넘는 장축의 之자형 3단 구도와 회수 및 화보를 모수하는 작풍의 영향을 받은 유물이다. <산시청람도>은 명대 문인화가인 문징명(文徵明, 1470~1559)이 그린 《소상팔경도책(瀟湘八景圖冊)》(絹本設色, 23.5×32.5cm. 廣東省博物館)류가 여러 본 전할 정도로 유행하던 제재인데, <산시청람도>와 관련하여 그가 지은 <계성모옥(鷄聲茅屋)>이라는 제화시도 함께 전하고 있다. 이 제화시(Table 4-③)는 문징명의 서예에 능했던 장자(長子) 문팽(文彭, 1498-1573)의 글씨로 이 시가 다시 씌여 회자되면서 유행했다. 내용상 그림에서 보이는 산시의 한적한 정경과 인물의 정취를 간결히 압축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청대본 <산시청람도>의 상단 제발(Table 4-⑤)에도 부첨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제화시 마지막에는 ‘右咏山市晴岚’라고 모수되어 있는데(노란 밑줄), 아마 자수로 제작할 때 모본이던 화책의 우측에 놓인 산시청람도를 보고 쓴 제화시까지 그대로 시수한 정황 때문으로 짐작된다. 더욱이 각 등장인물이나 모옥(茅屋)들은 문징명이 그린 <품다도축(品茶圖軸)>(1531, 88.3×25.2cm, 북경고궁박물원)의 도상을 바탕으로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과 같은 화보의 내용을 재구성한 방수(倣繡)로 상정된다. 그러므로 청대본 <산시청람도>는 광활한 송강을 주 배경으로 한 완만한 C자형 횡축 구도를 주로 채택한 문징명 본을, 심산의 산시를 배경으로 삼아, 동시대 유행한 고수파의 之자형 3단 종축구도로 재구성한 방작(倣作)이라 볼 수 있다.
그리고 조선본 <산시청람도>(Table 4-①)는 청대본(Table 4-②)처럼 상·중·하 3단으로 구분되며 之자형 구도의 유물이다. 청대본과는 달리 상단 제발의 여백 부분이 잘린 듯 다소 짧아 보이며, 제화시는 없다. 아마 원래 크기는 청대본과 유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상단의 여유롭지 않은 공간에 ‘山市晴嵐’이라는 화제(Table 4-④)가 보첨(補添)되어 있어, 산시청람도라는 화제를 감상자에게 알리고 있다. 글자의 배치는 山이 분리되어 市晴嵐과는 다른 열에 배열되어 있다. 소상팔경도는 클리브랜드박물관 소장의 <산시청람도>(조선 15-16세기, 115.3×60cm)와 미상의 <산시청람도>(조선 16세기 전반 경, 90.5×47.5cm, 국립진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듯이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꾸준히 제작되었던 화제였다. 그러나 화제를 후첨하거나 열이 달라지는 방식은 조선 후·말기 (민화)산수도에서나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소상팔경도첩》<산시청람도>(지본 담채, 27.0×20.4cm, 간송미술관)에는 ‘산시청람’이라고 후첨, 배열되어 있으며, 일부 민화풍 산수도에서도 이처럼 화제가 후시(後施)되어 있는 것을 간혹 살필 수 있다.
세부적으로 보자면, 조선본(Table 4-①)과 청대본(Table 4-②)의 상단에는 산봉우리가 끊임없이 이어지면서 굽이치는 하류가 하단까지 길게 드러나 있고, 중단과 하단에서는 주막 정경과 인물, 주막으로 이동하는 인물들이 있다. 각 처 등장인물들의 동세는 자연스럽지만, 조선본의 경우, 주막의 전경에 집중된 청대본보다는, 땔감을 지고 하산하는 모습, 주막에서 음식을 먹거나 접대하는 모습, 주막을 향해 걸음을 재촉하는 모습 등 산시를 배경으로 한 생활의 정취를 듬뿍 담고 있어 평화롭고 여유로운 분위기이다.
그리고 <청대본>은 3단의 구도이긴 하나, 각 구획 별로 화보 풍의 다른 주제 도상들이 조합되어 있다. 가령 상단은 주막의 전경을, 중단은 김명국(金明國, 17세기 활동)의 <설경산수도(雪景山水圖)>(17세기, 101.7×54.9cm, 국립중앙박물관)처럼 교각 위에서 배웅하는 가인(家人)을 안타깝게 보는 기려(騎驢)의 인물이 있다. 하단에는 교각을 지나 주막을 향하는 인물로 구성되었다. 마치 화보의 여러 내용을 조합한 듯하다. 반면 <조선본>은 <청대본> 상단 주막의 전경을 중심으로 구도적으로 안정된 스토리로 전개된다. 산시라는 소재적 접근에 치중하였다고 볼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제작된 산시청람의 전형과도 부합되는 구도와 주제를 갖추었다. 게다가 산시청람의 전형인 근경 돌다리는 청대본에서 2개를 그렸지만, 조선본에는 묘사되지 않았을 정도로 청대본과는 전혀 다른 전개를 하고 있다.
이처럼 ‘고사인물도(古事人物圖)’라는 주제로 감상용 자수그림으로 제작한 유물은 고수작으로 밝혀진 전인헌왕후작자수<신선도>, 전정명공주작자수<고사인물도>, 미상<고사인물도>(107.6×39.7cm, 덕수4331) 등이 전하고 있다. 조선 후·말기가 되면 왕실가와 지방 명문가에까지 차차 중국의 감상용 자수그림이 유입되어 감상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57 즉 청대 고수에서 주로 제작하던 고사인물도의 유행 사조를, 북경 경수(京繡)58에 포함된 산동 노수에서도 받아들였으며, 이러한 시류는 조선 후기 이후 왕실의 자수고사인물도의 제작에도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선본 <산시청람도>는 청대본을 그대로 모수했다기보다는 3단 구도를 사용한 고수의 유행 작풍과 함께, 화보를 참고하여 꼰사와 회수 그리고 2줄 정금수[정채사]라는 고식의 자수기법으로 제작한 방수작으로 사료된다. 다음은 조선 왕실 자수 특성이라 할 수 있는 2줄 정금사[정채사]의 고식(古式) 기법과 신식(新式) 기법이 조화를 이루어 조선화로 전개되는 양상을 살펴보겠다.

2. 기법적 양상

⒧ 고식의 양상과 전개

조선본<산시청람도>(Table 4-①)는 <춘유방초도>(Fig. 10)와 함께 고식과 신식 자수기법으로 제작되어 시대적 변모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과 기용의 윤곽선에는 ‘쌍고연선(雙股撚線)’의 꼰사를 사용한 2줄 채사의 가름이음수(Table 5-ⓛ), 2줄 채사의 쇄련수(Table 5-②), 3줄 이상 채사의 가름이음수와 이음수의 혼용(Table 5-③) 그리고 정금수와 정채수(Fig. 12)가 시수되어 유사한 작풍을 선보인다. 이 중 꼰사 상태인 2줄 채사의 쇄련수(Table 5-②)는 앞서 원대 지배층이 입었던 <종색라자수화조문협삼>(Fig. 2, Table 2-①)에서 의장 자수기법으로 사용되던 것이었다. 그리고 이들 기법은 명·청대 노수인 <부용쌍압도축>(Fig. 3), <하화원앙도축>(Fig. 4), <모란봉황도>(Fig. 5), <문창출행도축>(Fig. 6)의 토파나 수파 등의 묘사에도 사용되어 있어서 원대 노수의 특징이 명·청대로 이어지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좀 더 살펴볼 여지가 있지만, 실을 꼬아 쓴 2줄의 금사나 채사를 나무의 묘사에 사용한 정금수[정채사](Fig. 12)는 북방계 자수의 1줄 정금수[정채사]에서 예부터 이어진 영향이며, 원대 이후 유행한 작풍이다. 예를 들어 조선 전반 복장(腹藏)유물인 <자수화문잔편(刺繡花紋殘片)>(14~16세기, 1.0×30.5cm, 수국사 소장(『한국자수이천년』, 도03.03))에서도 푼사로 문양을 채우고 1줄 정금수로 윤곽을 두른 상태를 볼 수 있다. 다만 이 기법에 있어 조선본과 명청대 노수본은 차이가 있는데, 조선본에는 2-3줄을 배열한 쇄련수 또는 정금수[정채수]를 사용하고 있어 다소 고식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나 청대본 <산시청람도>(Table 4-②)에서는 2-3줄의 각각 다른 채사를 이용한 이음수나 사선평수로 재현되고 있다. 즉 전형은 유지되었지만 기법상 다른 변모의 전개라고 할 수 있다. 이런 2-3줄의 이음수나 사선평수는 청대 고수에서도 보이므로 17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들 기법이 통상적인 기법이 되었다고 판단된다. 조선에서는 사선평수가 유물 상 17세기 전반 왕실가에서 일부 사용한 것을 볼 수 있으나, 지배층의 본격적인 사용은 17세기 중반 이후 일부 유물과 청대 수입품으로 추정되는 유물에서 보이고 있다. 사선평수는 뒷장 신식 기법에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또한 조선본 <산시청람도>와 <춘유방초도>에서도 기법 상 차이가 있어 그 제작 시기를 고려할 수 있다. 가령 <춘유방초도>(Fig. 10, Table 5-①, ②, Table 6)의 인물, 말, 산수 등에는 2줄 정금수와 쇄련수를 사용한 고식이 있고, 이중 <Table 6>를 보면 시수한 실이 한 두 줄 탈락되어 먹선만 남은 흔적도 살펴진다. 반면 조선본<산시청람도>(Table 4-①, Fig. 12, 13)에는 나무줄기나 가옥의 일부 부재에만 2줄 채사와 정금수, 직침의 가름이음수가 사용되었을 뿐 인물의 외곽선(Fig. 18)에 단선의 이음수가 사용되어 제작 상 시기가 좀 더 내려올 것으로 추정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청대 자수에는 윤곽선을 사선평수나 이음수로 정리하는 양상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양상으로 보아 조선본<산시청람도>와 <춘유방초도>가 노수와 상관되지만, 모두 화본이나 모본을 두고 왕실가의 명을 받은 수방 내인이나 전문 제작가가 고식을 바탕으로 고사인물도나 3단 구도와 새로운 자수기법과 같은 신(新) 양식을 받아들여 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 다른 예를 들면 어제(御製)가 시수된 <서왕모도(西王母圖)>(144.5×50.3cm, 국립중앙박물관, 덕수4732)의 제작 내력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서왕모도>는 청 강희(康熙, 1662-1722)연간에 제작된 고수작 <자수취소경곡도축(刺繡吹簫慶曲圖軸)>(淸 康熙, 비단자수, 187×47cm, 고궁박물원(『織繡書畫』, p.87)과 구도, 도상 및 자수기법이 유사한 모수 작이다.59 숙종이 어람어제(御覽御製)한 시기가 1699년이라고 알려져 있지만, 이 그림의 삼산(三山), 서왕모 그리고 봉황에는 강연(强撚)과 약연(弱撚)의 두께가 다른 꼰사와 푼사 및 금사가 사용되어 화려하게 치장되어 전체적인 분위기는 생경(生硬)하다. 또한 17세기 후반의 것이라고 보기에는 바탕천인 공단의 광택이 너무 흐르고, 다양한 채사로 이어 재현한 연운(煙雲)묘사와 정금수 등이 세련된 기량을 보여 제작 시기는 재고가 필요하다.
이외 잘 알려진 일본 중궁사(中宮寺) 소장 <천수국수장(天壽國繡帳)>(622, 전체 480cm, 견본자수, 이하 구본(舊本))의 보수 전력에서도 푼사에서 꼰사로 변모된 시대적 작풍과 양상까지 살펴볼 수 있다. <천수국수장>은 1275년과 안영연간(安永年間, 1772~81)에 여러 차례 보수했던 전력이 있다.60 1275년에 모수한 신본(新本)편은 꼰사 위주로 묘사되어 그나마 잘 보존된 구본과 달리, 푼사를 사용하여 보수하였다. 그리고 보수한 지 500여 년이 지난 1731년에 수장의 보장(寶藏) 상태가 기록된 적 있었다. 그런데 신본에 도리어 손상된 부분이 훨씬 많다는 기록으로 보아, 신본이 제작되던 1275년에도 푼사를 사용한 송대 자수영향 때문에 꼰사의 수용이 보편적이지 않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마침 일본에 전하는 12~14세기 중세 수불에서도 푼사와 반푼사를 사용한 자련수와 쇄련수 중심의 자수 기법들이 사용되어 회화성 짙은 사실감이 잘 재현되고 있다. 더욱이 18세기 후반 안영 연간에 재차 보수된 <천수국수장>의 일부 인물들 얼굴에는 백색 안료를 칠하고, 머리카락, 눈썹, 눈, 코, 입, 귀를 먹(墨)으로 보첨(補添)하였다.61 이러한 작풍은 보수 시기상 청대 유행한 고수처럼 차차 자수보다는 회수를 더 사용하여 회화적 보완에 치중했던 시대적 작례와도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조선본<산시청람도>(Fig. 12)와 <춘유방초도>(Fig. 13)에서는 유독 나무의 몸통 안에 정금수로 채우고 윤곽선을 2-3줄의 채사[정채사]로 두르고 있는 독특한 묘사가 있는데, 왕실 의장으로 사용하던 금사62를 감상용 자수그림의 도상 곳곳에 정금하여 완성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런 작풍은 중국이나 조선의 어느 감상용 자수그림에서도 볼 수 없는 작례로서, 의장적이고 장식적인 고급 취향을 드러낸다고 판단되어 감상자(주문자)의 신분은 상당히 높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특히 <Fig. 13>의 나무묘사에는 나무 몸통을 정금수로 채우고 그 위에 다시 정채수로 장식하였는데, 김여온(金汝溫, 1596~1665)의 <해치흉배>(Fig. 14)에서도 보이는 작풍이어서 주목된다. 이런 금사로 특화된 전개는 조선 후·말기가 되면 종친 이혁(李爀, 1661-1722)의 <운학흉배(雲鶴胸背)>(;Fig.. 15)와 숙선옹주(淑善翁主, 1793~1836)<봉황방보(鳳凰方補)>(20.5×23.0cm, 경기도박물관(『아름다운 궁중자수』, 도020)), 영친왕비(英親王妃, 1901-1989)<적의보(翟衣補)>(1922) (17.5cm, 국립고궁박물관(『아름다운 궁중자수』, 도010))와 <자수구봉문베갯모(刺繡九鳳紋枕)>(13.3×11.3cm, 서울공예박물관(『아름다운 궁중자수』, 도047)에서 2줄 정금수[정채사]로 볼 수 있어, 조선 왕실 자수 즉 궁수로 완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중 2줄 정금수가 장식된 수침도 왕실용이었지만, 때로는 기록 상 신하들에게 사여된 경우도 있었다. 이들 수침은 실제 사용하지는 않고 나무상자에 보장되어 수십 년이 지나도 화려한 ‘난금사(爛金絲)’가 빛나고 있어 옛 군주[정조]의 성은을 그리워하는 시(詩)로 읊어지기도 하였다.63
이처럼 금사를 말아 누금(縷金)이나 축금(蹙金), 반금(盤金)을 한 후 정금하는 기법은 당대(唐代) 이래 황실용이라는 특정 계층의 의장을 위한 것이었다. 이후 중세 북방국가에서 청대 황실에 이르기까지 정금수는 고려와 조선에 이어 왕실 의장으로 유지된 궁수 유물과 맥을 같이한다. 이런 정황으로 보아 조선본들은 2줄 채사나 금사로 정금한 작풍과 같은 원 이래 전해진 의장수의 전형과 함께, 제작 당시 모수했던 노수의 꼰사와 3단구도, 회수와 같은 시대적 작풍을 함께 적용한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2) 신식의 양상과 전개

조선본<산시청람도>와 <춘유방초도>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기법은 앞서 놓은 꼰사의 긴실의 꽁무니를 가르며 선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Table 7>를 보면 양 끝 꽁무니에 생긴 생김새가 쇄련수 모양이며, 길게 실을 이어 선처럼 연결되는 모습을 하고 있다. 재현 상 꼰사를 이용하여 (긴)선을 표현하기 때문에 가름 선수라고 칭할 수 있고, 장단(長短)으로 땀을 이어가며 선의 모양을 만들어서 이음수와 같은 역할을 하여 가름이음수64라고도 부를 수 있다. 이 기법은 조선본<산시청람도>의 모옥을 땀의 실 길이를 자유롭게 조절하여 묘사할 수 있어 제작 시간을 단축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게다가 묘사상 수파 그리고 토파 및 산세의 긴 선을 표현하기 때문에 기세가 시원하며 운치있는 재현을 할 수 있다. 다만 도상을 그린 먹선의 강약을 따라 묘사하기에는 선이 고르지 못해 정치(精緻)한 기법이라 할 수 없고, 긴 선의 경우에는 쉽게 탈락할 수도 있어, 실용적인 기법은 아니다. 이 기법은 명대 후기 유물에서도 간혹 볼 수 있지만, 주된 기법은 아니다.65 또한 당시 고수의 수파나 토파 묘사에 시수되던 사선평수와도 기법상 차이가 있다. 반면 조선에서는 19세기 이후에 제작된 안주수와 같은 대작의 병풍류에서는 종종 확인되는 기법이다. 이 가름이음수는 기존 왕실과 사찰 그리고 일반 사대부 집안에서 다양한 물상의 윤곽선 재현에 사용되던 고식의 반푼사의 쇄련수 자리가, 곧 꼰사의 이음수로 대체되어 유행하였기 때문에, 그다지 적극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다고 짐작된다. 그러나 2미터 가량의 조선본 <산시청람도>와 <춘유방초도>의 산세와 토파, 수파(Table 7-②)를 그린 먹선 위로 길고 짧은 선묘의 가름이음수가 특정되어 사용되었고, 간혹 <Table 7-①>처럼 선단 끝이 아닌 옆을 찔러 선을 묘사하는 이음수가 섞여 있기도 하다. 이처럼 기법 상 다소의 차이가 있는 묘사는 대작을 제작하면서 여러 명의 제작가가 참여한 현상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명대 노수본인 <부용쌍압도축>(Fig. 3)에는 쇄련수의 2줄 꼰사가 선묘에 시수된 반면, 청대본 <산시청람도>(Table 4-②)에는 기존 쇄련수나 가름이음수를 대신하여 2-3줄의 채사를 배열한 이음수가 섞여 사용되기도 하였다. 아마 노수는 이음수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전까지는, <Table 2-①>처럼 2-3겹 다채사의 쇄련수로 토파나 수파의 윤곽선을 시수하던 작풍이었다. 이후 청대가 되면 <Table 7-①>처럼 짙은 남색, 월백색(月白), 옅은 미색의 세 층으로 나누어66 바깥에서부터 안쪽의 순서대로 그 경계선을 수놓은 이음수나 사선평수 양상으로 변모되었다고 고려된다.
조선에서 사선평수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유물은 17세기 중반 <운안흉배(雲雁胸背)>(1650년대, 36×36cm, 석주선기념박물관)와 『전가보첩』 그리고 심익창(沈益昌, 1652~1725)의 배위인 성산 이씨(星山 李氏, 1651~1671)의 묘에서 출토된 <자수화조문스란치마>(『이승에서의 마지막 치장』, 도14)(Fig. 13) 67와 심익창의 <백한흉배(白鷳胸背)>(36×36cm, 경기도박물관(『衣紋의 조선의 옷』, p.60)) 등에서이다. 나무줄기나 선 묘사에서 사선평수가 능숙히 시수되어 있어서, 고식인 쇄련수를 대체하는 기법이 되었다고 사료된다.
이외 노수작인 <Fig. 3, 4>에서 괴석을 투과해서 보이는 초목(草木)묘사는 노수가 주로 채택하는 도상 특징 중 하나인데, 17세기 중반 심익창의 배위 성산 이씨의 <자수화조문스란치마>의 일부 폭(Fig. 16)과 미상 작으로 전하는 <자수화조도>(Fig. 17, Fig 11)의 도상과 친밀하다. 이런 유형은 조선시대 자수 흉배의 도상에서도 지속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괴석의 묘사 과정에 따라 흉배의 제작연대를 추정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또 다른 신식 기법 작풍은 18세기 이후 외세 영향인 사생적 화풍의 유행에 의한 것이다. 예를 들면 17세기에 높은 명성을 얻은 고수의 영향 하에 강남의 각 지방수들은 서양 화풍의 영향를 받아 이미 완성된 자수그림 위에 등장인물의 음영을 나타내기 위해, 코 부위를 밝은 채사로 보첨(補添)하거나, 凹凸에 따라 보색(補色)을 첨하기도 하였다. 이런 새로운 추세는 외세 문명의 강력한 유입에 의해 각 지방색이 점차 퇴색되면서 중국적인 특색과 명성을 잃어가는 단계와 청대 자수의 변모된 과정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조선도 18세기 중반 군신초상화에서 서양화풍을 볼 수 있는 것도 이와 비슷한 세태를 반영한 것이었다. 조선본<산시청람도>(Fig. 18)와 <춘유방초도>(Fig. 19) 및 명대 노수<문창출행도축>(Fig. 6-1)에도 인물의 코, 귀, 손, 이마 부분에 밝은 채사가 (후대에)보첨되는 이색적인 작풍을 살필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 조선의 감상용 자수그림을 보면 이런 음영을 하지 않고 도리어 평수 중심의 자련수와 자리수를 기본으로, 윤곽을 이음수로 두르고 화려한 금문수로 회화성을 강조하며, 꼰사와 2줄 금사의 정금수로 장식하는 격식있는 궁수가 완성되었다. 즉 중국의 시국과는 다른 ‘조선화된 정형적인 작풍’으로 정점을 이룬 것인데, 조선 자수의 특화된 전개로 정의할 수 있다.

Ⅳ. 맺음말

산동 노수는 고대부터 이어져 온 명성을 바탕으로, 원대에 실의 변화에 따른 변모된 작풍과 저변화된 자수의 유행 풍조에 따라, 명‧청시대는 물론 고려와 조선시대 궁수와 안주수(安州繡)에 이르기까지 오랜 상관을 미친 유파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송대에 사용되던 푼사보다, 원대노수에서 의장의 견고함을 위해 사용했던 꼰사가 노수의 주된 실로 변하면서, 새롭고 다양한 자수기법들이 출현할 수 있었다. 또한 이는 복식 의장과 감상용 자수그림의 제작에도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노수는 의장과 장식, 감상이라는 각 유행 요소를 충족시킨 유파라고 할 수 있다.
조선에서도 『노박집람』(16세기 중반)을 보면 한자로 ‘선사’라는 꼰사와 ‘융사’라는 푼사가 같이 등장하는데, 언문으로 ‘선사’는 ‘뷔윤 실’로, ‘융사’는 ‘니근 실’로 칭하였다는 것을 통해 2가지 실이 함께 사용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고려에 이어 조선에서도 계서적 사용을 의미하는 금수찬조(錦繡纂組)의 의장이 송의 영향을 받아, 보편적으로 푼사를 사용하다가, 복식 가득 꼰사로 자수 의장을 하는 원과 산동 노수의 영향으로 점차 변모하게 되었다고 판단된다. 17세기 중반이 되면 꼰사는 점차 흉배나 수의수상에 사용되면서 장식과 견고함을 다 갖춘 지배층의 실로 대두되었다고 상정된다. 반면 중국은 명대 후반 무렵 명성을 얻기 시작한 고수가 머리카락보다 가는 푼사를 사용하여 송·원대 자수를 모수하며 명성을 얻고 있었다. 게다가 당시 송강파의 거장 동기창이 송대 자수를 추앙하고, 원대 자수를 폄하하자, 고수가 부각되면서 푼사가 다시 유행하는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조선 왕실 기법으로 유지되는 꼰사와 2줄의 금사와 채사를 윤곽선에 정금하는 작풍은 기존 한 줄의 금사를 윤곽에 정금하는 이전 작풍과는 달리, 보다 장식적인 전개이다. 금사를 이용하는 기법은 고급 취향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수불이나 일부 지배층에서는 사용될 수 있었지만, 조선 후기가 되면 왕실 작풍으로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즉 자수기법이 복잡하고 공정이 많이 들어가는 제작 기법은 고식으로서, 또는 격식있는 기법으로 왕실에서만 소용하는 궁수로 전승되었다고 정리된다. 따라서 조선본<산시청람도>와 <춘유방초도>는 노수와 상관을 가지면서, 조선화로의 변화과정을 담은 작품으로 사료된다. 본 연구는 조선의 내외 복합적인 양상 속에서 노수를 통해 꼰사와 푼사 소용의 전개가 있었다는 것과 실의 구분으로 궁수와 민수로 정의되는 내력과 안주수의 실의 변모를 고찰해본 것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Notes

1) 꼰사는 여러 가지 섬유를 가지런히 모은 후 꼬임을 주어 제작한 실의 상태를 말하는데, 꼬임을 많이 하여 단단하게 꼬은 꼰사[강연사(强撚絲)]와 꼬임을 적게 하여 꼬은 반푼사[약연사(弱撚絲)]가 있다. 이외 꼬임을 하지 않는 푼사가 있는데, 이들 실은 모두 자수를 하는데 사용되었다.

2) 허동화, 『이렇게 좋은 자수』 (한국자수박물관, 2001), p. 268; 김태자, 「韓國 傳統刺繡의 樣式的 特徵」, 『아시아민족 조형학회 국제학술회의』 (2002), pp. 111-120.

3) 양수정, 「傳 仁獻王后의 자수그림 <신선도> 연구」, 『동악미술사학』 20(2016ⓑ), pp. 40-49; 양수정, 「조선 17세기 자수그림의 移行에 관한 試論-節日胸背를 중심으로」, 『동악미술사학』 23(2018), pp. 18-25; 양수정, 「조선 후기 刺繡의 顧繡 受容과 展開」, 『美術史學硏究』 311(2021), pp. 45-86.

4) 한국의 자수유물은 현대 자수기법 용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기법들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은데, 간혹 합의되지 않은 새로운 용어들이 창출되어 연구사적 혼동이 오는 경우가 많다. 본 연구는 이런 고식(古式) 자수기법을 지칭하는 용어가 없기 때문에, 고식을 설명할 경우에는 중국자수기법용어(한자[(유사한)한국자수기법용어])를 기본으로 하여 서술하였다. 이외는 한국자수기법용어를 선택하였음을 밝힌다. 또한 본 연구는 이해 상 다수의 도판이 제공되어야하나, 지면 상 한정된 도판 수로 진행되었다.

5) 이러한 논의는 전개상 기존 의견과 다른 점이 부각될 수 있다. 또한 조선 자수사의 문헌 자료 미흡과 유물 부재라는 전반적인 연구사적 한계와 역량 부족으로 시대적 특징이 정연되지 못한 의견으로 전개될 수 있다는 점은 관점의 확장을 시도해보았다는 측면에서 양해를 구하는 바이다. 따라서 추후 발굴될 자료연구를 통해 본 연구를 보강하는 재차의 기회를 갖고자 한다.

6) 王迅, 『東夷文化與淮夷文化硏究』 (北京大學出版社, 1994), pp. 89-94; 박선희, 「평양 낙랑유적 복식유물의 문화성격과 고조선」, 『고조선단군학연구』 20(2009) p. 151.

7) 조원진, 「고조선의 발전과 대외관계 연구」, 세종대학교 박사학위논문(2017), pp. 120-133.

8) 지배선, 「이정기 일가의 산동 지역 활동」, 『이화사학연구』 30(2003), pp. 719-735; 이정렬, 「산동반도와 고구려의 잊혀진 영웅, 이정기장군」, 『열린전북』 68(2005), pp. 245-248.

9) 조영록, 「나당 동해관음도량, 낙산과 보타산-동아시아 해양불교 교류의 역사현장」, 『정토학연구』 17(2012), p. 209.

10) 조규익, 「사행노정으로서의 등주-그 심상 공간적 성격과 의미」, 『語文硏究』 38-4(2010), p. 448.

11) 李民寏(1573-1649), 『紫巖集』 6, [雜著], 「建州聞見錄」, 銀鐵革木, 皆有其工, 而惟鐵匠極巧. 女工所織, 只有麻布, 織錦刺繡, 則唐人所爲也.; 유지원, 「조선인의 기록을 통해 본 만주의 都城」, 『인문학연구』 13-1(2012), p. 18.

12) 신지영, 「元代 東平 지역과 雜劇 水滸戱」, 『중국소설논총』 49(2016), pp. 53-54, pp. 59-60.

13) 유보전·샤오샹샹, 「조선 사신들의 눈에 비친 明末 山東의 사회 풍속 일면 고찰」, 『동방한문학』 61(2014), pp. 275-305.

14) 이경엽, 「중국 발해만 타기도의 도서적 생태환경과 민속문화」, 『도서문화』 25(2005), pp. 277-282.

15) 黃能馥, 陳娟娟(共)著, 『中國絲綢科技藝術七千年史-歷代織繡珍品硏究』 (中國紡織出版社, 2002), p. 23; 李瑛, 「鲁繡绣藝術歷史沿革探析」, 『山東工藝藝術學报』 (2019), p. 103; 許崇岫, 「鲁绣的演变及影响-从威海地区的刺绣看鲁绣的传承与发展」, 『管子學刊』 4(2007), pp. 123-124.

16) 김주연, 「朝鮮時代 宮中儀禮美術의 十二章 圖像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pp. 33-45; 양수정, 「조선시대 자수그림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6ⓐ), pp. 16-24.

17) 黃 能馥, 小笠原 小枝, 『中國美術全集 6 工藝編-印染織綉』 (上海 : 上海人民美術出版社 ; 北京 : 文物出版社 : 人民美術出版社, 1986-1989ⓐ), p. 14.

18) 『鄴中記』, … 石虎時著金線合歡褲(案《太平寰宇記》載此條云:虎每獵,著金線織成合歡褲)

19) 黃 能馥, 小笠原 小枝, 『中國美術全集 7 工藝編-印染織綉』 (上海 : 上海人民美術出版社 ; 北京 : 文物出版社 : 人民美術出版社, 1986-1989ⓑ), pp. 9-10.

20) ‘쇄련수’는 고대 사슬수의 일종으로, 연구사적으로 머리카락을 땋는 모양으로 촘촘히 연결된 것을 말한다. 고대부터 점선면의 표현에 사용되었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쇄수(鎖繡), 변자고수(辮子股繡) 또는 쇄련수, 벽침수(劈針繡), 접침(接針)이라고 한다. 이중 접침은 쇄련수를 더 긴 땀으로 시수(施繡)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사슬수로 통일되어 있다. 기술(記述)상 본 연구에서는 쇄련수로 칭하였다. 조선시대 유물에서는 땀이 짧아서 꼰사보다는 실제 반푼사나 푼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21) 정금수는 현대어인 징금수이다. 사전상 징금이라는 말은 해지기 쉬운 천 위에 다른 천을 대고 듬성듬성 꿰매다는 의미를 가진 징그다에서 어원하면서, 금사와 채사를 고정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본 연구에서는 유물의 금사와 채사를 고정하는 별도의 사용을 명확히 설명하기 위해, 금사[채사]를 고정한다는 의미로 정금수[정채수]라는 용어를 선택하였다.

22) 심연옥·금다운, 『한국자수이천년』 (크리빗, 2020), pp. 32-37. 백제 7세기 미륵사지 서쪽 석탑에서 출토된 사리 잠엄구에서 강연사의 푼사를 금편으로 감아 만든 연금사가 징금된 직물 편이 수습되었다. 이외 능산리사지에서 연금사 뭉치(부여박물관 소장)가 발굴된 바 있다.

23) 수에융니엔, 자오리, 샹강 지음, 안영길 역, 『중국미술사 3』 (다른생각, 2011), pp. 482-483.

24) 滿洲國立博物館, 「解說」, 『纂組英華』(東京座右寶刊行會發行, 1935, 董其昌의 撰文 참조; 양수정, 앞의 글(2021), p. 50.

25) 수에융니엔, 자오리, 샹강 지음, 안영길 역, 위의 책(2011), pp. 482-484.

26) 殷航, 「魯繡的源與流」, 『文化休閒』 (濟南文化產業網-2020.03.25).

27) 王桂祥, 「論地方歷史傳統對當代鲁繡傳承人的影响」, 『邊疆經濟與文化』 4(2019), p. 47; 이미지 출처- https://www.nibico.com.tw/wiki/wiki/bed_02.htmlhttps://kknews.cc/finance/qlnnma8.html.

28) 이미지 사용을 허가해준 불교중앙박물관에 감사드린다.

29) 이미지 사용을 허가해준 인천시립박물관에 감사드린다.

30) 王軒, 「鄒縣元國李裕庵墓清理簡報」, pp. 14-20, 王軒, 「論李裕庵墓中的几件刺繡衣物」, p. 21. 『文物』 4(鄒縣文物保管所, 1978); 黃能馥·切畑健, 『中國美術全集6-工藝』 (京都書院, 1996), p. 26; 趙豊, 『中國絲綢通史』 (蘇州大學, 2005), p. 365.

31) 주경미, 「고려시대 월정사 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再論」, 『진단학보』 113(2011), p. 87

32) 『國譯高麗史』, 「列傳」, [忠宣王 后妃] (네이버지식백과); 金安老, 『龍泉談寂記』, 「金安老撰」; 李肯翊, 『練藜室記述別集』 14, 「文藝典故」, [書畫家].(한국고전종합DB)

33) 양수정, 앞의 글(2016ⓐ), pp. 68-78; 양수정, 「朝鮮時代 자수그림 滿池嬌의 傳承과 變容」, 『진단학보』 133(2019), pp. 193-231.

34) 정광, 양오진 역주, 『노박집람역주』 (태학사, 2011), p. 221.

35) 김연미, 「조선시대 자수 흉배 연구 : 출토 유물을 중심으로」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pp. 71-72; 이 흉배는 사가 제작보다는 중국 수입품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36) 정광, 양오진 역주, 위의 책(2011). pp. 217-218.

37) 국립국어원 사전, 우리말샘(www.korean.go.kr).

38) 정광, 양오진 역주, 앞의 책(2011), pp. 217-218. 푼사는 삶아 익힌 실의 상태(熟絲)인 ‘니근 실’로 기록되었다.

39) 이미지 사용을 허가해준 서울 역사박물관에 감사드린다.

40) 李瀷, 『星湖先生全集』 56, 「題跋」, [書姜主簿家藏繡帖]; 姜世晃, 『豹菴稿』 5, 「題跋」, [題繡帖].

41) 趙豊, 앞의 책(2005), p. 98.

42) 양수정, 앞의 글(2021), pp. 48-58; 양수정, 앞의 글(2016ⓐ), pp. 334-335.

43) 李瀷, 『星湖先生全集』 56, 「題跋」, [跋家傳繡帳」; 李元翼, 『梧里先生文集』 1, 「詩」, [錦障花草帖 六首幷敍]; 李埈, 『蒼石先生文集』 14, 「跋」, [梧里李相公花草障後跋]; 『蒼石先生文集』 3, 「詩」, [次韻題梧里相國刺繡花草].

44) 양수정, 앞의 글(2016ⓐ), pp. 198-208.

45) 양수정, 앞의 글(2018), pp. 7-15.

46) 정재륜, 강주진 역, 『東平尉公私聞見錄』 (양영각, 1985), pp. 328-330; 李德懋, 『靑莊館全書』 47, 「磊磊落落書補編 (下)」, ‘崔回姐 柔姐緊姐’; 양수정, 앞의 글(2021), pp. 59-60.

47) 繡林苑, 『李朝의 刺繡』(新星精版社, 1994), pp. 264-265. 구전에 의하면 안주수는 임진왜란 때 산동으로 끌려간 한 선비가 그곳 남자들이 자수를 놓는 것으로 보고 소일거리로 배웠던 것인데, 귀국 후 평안도 안주에 정착하여 안주 수를 뿌리내리게 했다고 전한다.

48) 李裕元, 『林下筆記』 30, 「春明逸史」, [河上齋].

49) 양수정, 「조선 17세기 수첩(繡帖)의 문예사적 가치」, 『한국민화』 13(2020), pp. 6-33.

50) 장경희, 「20세기 초 양기훈 필 <자수매화병풍> 연구」, 『한국예술연구』 35(2022), pp. 214-236.

51) 繡林苑, 앞의 책(1994), p. 263.

52) 양수정, 앞의 글(2016ⓑ), pp. 49-63; 양수정, 앞의 글(2021), pp. 64-77. 이 중 전인헌왕후작자수<신선도>(139.2×42.3cm, 덕수5698)와 전(傳)정명공주(貞明公主, 1603~1685) 작자수 <고사인물도>(139.4×42.4cm, 덕수 6030)는 강남 고수작으로 판단된다.

53) 嚴龍, 「중국 청대 궁정의 자수예술」, 『동아시아자수예술의 역사』 (2013), p. 159.; 국립고궁박물관의 특강(2013)에서 중국학자 얀용(嚴龍)선생은 두 유물 간 노수와의 연관 가능성을 간단히 언급한 바 있다.

54) 이미지 사용을 허가해준 국립중앙박물관에 감사드린다.

55) 이미지 사용을 허가해준 국립중앙박물관에 감사드린다.

56) 이미지 사용을 허가해준 국립중앙박물관에 감사드린다.

57) 양수정, 앞의 글(2021), pp. 45-86.

58) 黃 能馥, 小笠原 小枝, 앞의 책(1986-1989ⓑ), p. 30; 양수정, 앞의 글(2016ⓐ), pp. 343-344. 경수는 명청대 북경과 심양을 중심으로 한 궁정자수의 영향이 가장 크고, 그 기반은 北繡 계통의 민간자수자수 제품을 총칭하기도 한다. 청대에는 경수라 하였다.

59) 양수정, 「조선 17세기 자수그림의 전승과 이행」, 『미술사학보』 48(2017), pp. 50-51.

60) 澤田むつ代, 「天壽國繡帳の現狀」, 『上代裂集成』 (中央公論美術出版, 2001), pp. 68-70.

61) 澤田むつ代, 위의 글(2001), p. 71.

62) 오다연, 「朝鮮 中期 泥金畵 硏究」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9), pp. 19-20. 금의 사용과 출납은 왕의 통제 하에서 왕실용을 제외하고는 철저하게 관리되어 조선 중기의 경우 일반사회에서는 쉽게 사용할 수 없었다고 한다.

63) 尹行恁, 『碩齋稿』2, 「詩」, [迎春軒賡韻]; 朴允默, 『存齋集』 7, 「詩」, [繡枕幷小序]; 鄭元容, 『經山集』17, 「誌銘」, [故室貞敬夫人江陵金氏墓誌銘].

64) 심연옥·금다운, 앞의 책(2020), p. 55.

65) 고수 <東山圖>(1632년 이전)의 소나무 묘사(푼사)(『海上錦繡』, 도36)와 청대 고수<十六應眞圖冊>(『織繡書畫』, 도 2)에서 낙관 주문방인을 시수한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66) 故宮博物院 編, 『經綸無盡-故宮藏織繡書畵』 (紫禁城出版社, 2006), p. 238. 월백색은 옅은 남색 계통의 담청색으로 푸른빛을 띤 흰색이라고 함.

67) 『承政院日記』33, 仁祖 9年(1631), 7月 8日(庚辰); 정재륜 著, 강주진 譯, 앞의 책(1985), p. 164.

Fig. 1.
衣線繡[꼰사]의 도면, The Drawing of Ŭisŏnsu[Kkonsa-twist thre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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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棕色羅 刺繡 花鳥文夾衫>, Embroidered Bird-and-f lower Patterns on a Robe, Yuan dynasty, 62×43cm, Inner Mongolia Museum (Zhongguo zhi xiu fu shi quan ji 4, fig. 31-14) (Left)
Fig. 2-1. Detail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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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Lu Embroidery, <芙 蓉 雙鴨圖軸>, Hibiscus and Two Ducks, Ming, 140×57cm, National Palace Museum (Embroi- dered Pictures, fig.15) (Lef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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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Lu Embroidery, <荷花 鴛鴦圖軸>, Lotus and Mandarin Ducks, Late Ming, 136× 54cm, National Palace Museum (Embroidered Pictures, fig.14) (Midd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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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Lu Embroidery, <牧 丹鳳 凰圖>, Peony and a Pair of Phoenixes, Qianlong era (r.1735-1796), 134×51cm, National Palace Museum (Embroidered Pictures, fig.18)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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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Lu Embroidery, <文昌出行圖軸>, God Wen Chang Taking a Rest during his Trip, Ming, 145×57cm, National Palace Museum (Embroidered Pictures, fig.16) (Left)
Fig. 6-1. Detail (R 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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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紅羅地刺繡聯珠梅竹蜂蝶紋殘片>, Embroidered Bamboo, Plum, Bee and Butterfly, Liao, The White Pagoda (1147-1149), Qingzhou, Chifeng Museum (Liao Textile and Costumes, fig. 136) (Left)
Fig. 7-1. Detail (R 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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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刺繡 瑤池 跨鶴圖>, Riding a Crane over a beautiful Terrace, Embroidery, Song, 25.2× 27.1cm, Liaoning Provincial Museum (http://www.lnmuseum.com.cn) (Left)
Fig. 8-1. Detail (R 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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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獬豸胸背>, Rank Badge with a Horned Lion, 16th-17th century, Chosŏn, 34.5×34.5cm, excavated from the tomb of Cho Kyŏng (趙儆, 1541-1609), Sŏul Museum of History (Left)39
Fig. 9-1. Detail (R 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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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作者未詳, <春 遊芳草圖>, Unidentified artist, A Spring Outing, Chosŏn, Scroll, 179.6× 46.3cm,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graph by Sujeang Yang)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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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作家未詳, <刺繡 (花鳥圖)>, Unidentified artist, Embroidery (Flowers and birds), 107. 6×39.7cm, National Museum of Korea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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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조선본<산시청람 도>, 수지 세부 (정채수와 정금수), Detail of couching stitches (gold and colored treads for the trees), Dwelling by a Mountain Stream (photograph by Sujeang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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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춘유방초도>, 수지 세부 (정채수 위에 정금수), Detail of couching stitches (gold and colored treads for the trees), A Spring Ouing (photograph by Sujeang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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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해치흉배>, 세부 (정금수 위에 정 채수), Detail of a rank badge (Couching stitches, the colored tread over the gold tread), 40×40cm, excavated from the tomb of Kim yŏon (金汝溫, 1596~1665), Andong National University Museum (17segi mugwanon iyagi, p. 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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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雲 鶴胸背>, Detail of a rank badge, Chosŏn, 34×30.8cm, excavated from the tomb of I Hyŏk (李爀, 1661- 1722), Kyŏnggi Provincial Museum (photograph by Sujeang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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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자수화조문스란치마의 도면 중 6면>, The sixth section of the drawings of Embroidered Skirt, Chosŏn, 59× 354cm, excavated from the tomb of Lady Lee (Seongsan clan), Kyŏnggi Provincial Museum (The Costume and Pattern of Joseon Dynasty, fig. 0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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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세부, Detail (Rock, Fig.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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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산시청람도>, 인물세부. Dwelling by a Mountain Stream, Chosŏn (photograph by Sujeang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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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춘유방초도>, 인물 세부. Detail of a figure, A Spring Outing, Chosŏn (photographes by Sujeang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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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자수 기법 중 古式 1-평수, 자련수 Traditional Embroidery Techniques 1-Stain stitch, Long and short st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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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2.
자수 기법 중 古式 2-쇄련수 Traditional Embroidery Techniques 2, Swaeryŏnsu stitch(Plait sti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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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3.
실의 유형 Tread Types
Baktongsa mid-14th century Novakchillam mid-16th century
Yungsa(絨絲) Punsa-untwisted thread NigŭnShil Boiled thread (Suksa(熟絲))
Maryung(抹絨)
Sŏnsa(線絲) Kkonsa-twist thread PwiyunShil A thread twisted by rubbing it together
Table 4.
山市晴嵐圖와 제화시 The Poems and Paintings of Dwelling by a Mountain Stre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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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5.
선본 <산시청람도>와 <춘유방초>에서의 2-3줄 꼰사 사례, The Chosŏn renditions of two or three-stringed Kkonsa Shown in the Dwelling by a Mountain Stream and A Spring Ou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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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6.
<춘유방초>에서의 2줄 꼰사 탈락 사례 The case of Chipped off one or two-stringed threads on Embroidered A spring out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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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7.
이음수와 가름이음수, Outline Stitch and Split(Outline)Stitch Applied on Chosŏn painting of Dwelling by a Mountain Stream and A Spring Outing (photographes by Sujeang Y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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