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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0; 2021 > Article
조선후기 찬합의 제작과 사용양상*

Abstract

찬합은 여러 종류의 음식을 여러 층 또는 구획에 나누어 담아 포개어 쌓을 수 있게 고안된 기물이다. 본 논문은 조선후기에 찬합이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제작될 수 있었던 문화적 배경과 재질별 찬합의 제작양상을 밝히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다층형 구조의 기물인 찬합은 동아시아 삼국에서 다양한 명칭으로 불릴 만큼 각계각층에서 널리 애호된 기종이다. 중국과 일본을 통해 국내에 유입된 찬합은 조선후기에 들어서 사용과 제작이 성행하기 시작했으며, 왕실과 문인들 사이에서 각광 받는 고급 기물로 자리 잡았다.
조선후기에 제작된 찬합은 재질에 따라 기형의 연원이 되는 바가 달랐는데, 목기 찬합은 明代의 휴대용 찬합에서, 자기 찬합은 1811년 신미사행의 접대를 위해 일본의 信樂에서 제작된 자기 2단 원형 찬합에서 그 기형의 기원을 찾아보았다.
또한 조선후기 찬합이 왕실 연향용, 휴대용 등 식기로써의 용도 이외에도 보관 및 수납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통해 찬합의 다양한 용도와 복합적 성격에 대해 파악할 수 있었다.

Abstract

The chanhap is a type of tableware designed to stack various types of dishes in separate compartments or tiers. This dissertation aims to determine the characteristics of chanhap by medium as well as the cultural background that popularized their manufacture and use in the late Joseon era.
Chanhap’s multitiered structure, dubbed differently across different civilizations, has been widely favored in the three major Far East countries among various social classes. It was introduced to the Korean culture from China and Japan, and the manufacture and usage became popular in the late Joseon. Chanhap secured its reputation as a luxury piece loved by royals and scholars.
The late-Joseon chanhap in different media differ in origins. This study found origins of wooden chanhap from the portable dish box from the Ming Dynasty; porcelain chanhap from the 2-tier round Japanese porcelain dish box made to receive the Sinmi Envoys from Joseon in 1811.
Specific historical records have revealed that the late-Joseon chanhap was used as portable carrier and storage as well as dishware for royal banquets. This discovery has illuminated the various usage and complex characteristics of the multitiered structure of chanhap.

Ⅰ. 머리말

찬합이란 각종 음식을 여러 층 또는 구획에 나누어 담아 포개어 쌓을 수 있게 제작된 기물이다. 찬합의 용례는 문헌 기록을 통해 여러 사례가 나타나는데, 중국 明代 간행된 『遵生八牋』에는 휴대용 다층형 기물이 ‘提盒’으로 기술되어 있으며, 일본 室町時代에 작성된 『君台観左右帳記』에는 원형 다층합이 ‘食籠’으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후기의 기록에는 중국과 일본을 다녀온 사신들의 사행록에서 ‘杉重, 重箱, 饌榼, 饌盒’으로 불렸음이 확인된다. 찬합은 동아시아 삼국에서 提盒·食籠·杉重·重箱·饌盒 등의 다양한 명칭으로 불릴 만큼 애호된 기종이다. 국내에서 찬합의 형태는 이미 삼국시대부터 확인되지만 조선후기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학계에서 찬합에 관한 단독 연구는 개진된 바 없으나, 공예사와 문화사 분야에서 부분적으로 간략하게 언급되었다. 공예사적인 측면에서는 자기 찬합의 등장 시점과 제작 방법에 대해 고찰하였고, 문화사적인 측면에서는 조선통신사가 경험한 대부분 목기로 추정되는 찬합과 궁중연향에 등장한 왜찬합에 대하여 고찰한 바 있다.1 하지만 기존 연구에서는 조선후기 찬합의 유입에 영향을 준 국가를 일본으로 한정했고, 재질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를 포괄하지 못했으며, 공예사와 문화사 두 분야의 통합적인 고찰이 면밀하게 진행되지 못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에 필자는 조선후기 찬합이란 특수기형의 제작배경과 사용양상에 주목하고자 한다. 찬합이 조선후기에 본격적으로 유입되고 제작될 수 있었던 배경과 사용되었던 문화를 면밀하게 고찰하고, 재질별 찬합의 제작양상과 특징을 밝히며, 찬합의 다양한 용도와 성격을 다각적으로 살피고자 한다.
이를 위해 중국과 일본의 문헌 사료를 기반으로 찬합의 쓰임을 분석하고, 中·日 사신단의 사행록에 등장하는 찬합의 경험 사례를 분석하여 찬합의 유입 배경을 파악하겠다. 이어 재질별 찬합 기형의 조형적 연원을 분석하여 종류를 구분하는 시도를 해보고자 한다. 더불어 찬합의 다양한 용도를 밝혀내면서 동시에 찬합에 대한 기존 개념을 재고하고 새로운 틀을 제시하고자 한다.

Ⅱ. 조선후기 찬합 제작배경과 유행양상

1. 中·日 찬합 사용문화

찬합은 동아시아에서 일찍부터 사용된 기물이다. 한 층을 여러 구획으로 나눈 단층형 구조의 찬합은 3세기 중국 魏晉時代에 제작된 절강성 嵊州市 浦口鎭의 永安 6년(236)묘 출토 靑瓷七隔圓盤에서 확인되며, 다층형 구조의 찬합은 9세기 唐代에 제작된 法門寺塔 地宮 출토 銀製 套盒에서 확인할 수 있다(Fig. 1). 그중 은제 투합은 5단 원형 구조로 한 층에 4개의 구획을 나눈 형태이다. 측면에는 花窓形 透孔이 있으며 가장자리 턱에 다른 층을 얹어 일정하게 쌓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이 투합은 일반적으로 의례에서 차와 함께 차려내는 다과를 담았던 용기로 알려져 있다.2 한편 明代에는 휴대용 찬합이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당시 간행된 『遵生八牋』에는 휴대용 찬합의 기형과 용도를 상세히 묘사해 두기도 하였다.3
일본에도 다층형 구조의 합이 그려진 기록이 남아있다. 室町時代(1336-1573) 중기에 쓰여진 『군다이칸소초키(君台観左右帳記)』에는 일본에 차문화가 전수되는 과정에서 자리 잡은 실내 장식이 그려져 있다.4 그중 다도 선반 장식 [茶湯棚飾] 도설에서 찬합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데, 선반 상단에는 중국 福建省의 建窯에서 만든 天目 찻잔인 建盞뿐만 아니라 茶碗, 風爐, 水指 등 茶具가 올라간 선반에 4단 원형 구조를 가진 食籠이 함께 자리 잡고 있어 식롱이 茶具 중 일부였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Fig. 2). 또한 江戶時代(1603-1867) 대표적인 요리서인 다이고산진(醍醐山人)의 『요리하야시난(料理早指南)』에는 ‘重箱 요리법’이 등장하며, 重箱·提重·割籠·檜割籠이라 불리는 다양한 형태의 휴대용 찬합이 묘사되어 있다.5
중국과 일본의 찬합을 사용한 문화에 대한 기록은 조선후기 사신들의 사행록에서 주로 찾아볼 수 있다. 정조 14년(1790) 乾隆皇帝의 萬壽節에 謝恩副使로 청나라에 다녀온 徐浩修(1736-1799)의 사행 기록인 『燕行紀』에는 접빈 의례와 하사품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① 演戲를 시작한 뒤에 모두 세 번 음식을 宣賜하는데 (…) 饌을 거둔 뒤에는 세 번 다 酪茶를 宣賜한다. 연희를 마치기 전에 軍機大臣 和珅이, 내려 주신 각종 물품을 갖고 와서 연회에 참석한 모든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나는 正使와 함께 각각 蘋果 1楪과 普洱茶 1병, 茶膏 1匣을, 그리고 서장관은 빈과 1접과 보이차 1병을 공경히받았다.6
② 西瓜, 蘋果, 포도, 餑餑, 淸茶 등을 각각 붉은빛 朱盒에 담아서 여러 신하에게 나눠 주었는데 皇旨를 따른 것이라고 한다.7
明·淸代 왕실의 사신 접견례를 살펴보면 외국의 사절이 북경에 도달하면 환영하는 의식인 下馬宴, 환송하는 의식인 上馬宴, 그리고 황제를 알현하는 의식인 朝參禮 등이 거행되었는데, 이 세 의식에서 모두 차를 올리는 進茶 의례가 행해졌다.8 이어서 하사품으로는 수박[西瓜]·사과[蘋果]·포도 등의 과일과 다과[餑餑], 청차·보이차 등의 차가 제공되었다. 이 하사품은 각각 붉은빛 합에 담아 여러 신하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는 주칠한 합에 각각 음식을 담아 한 층씩 쌓아 올린 찬합일 것으로 짐작된다.
일본에 다녀온 조선통신사의 사행록에서도 찬합을 찾아볼 수 있다. 효종 6년(1655) 일본 사행길에 올랐던 南龍翼이 쓴 『扶桑錄』에는 “의성의 부자 및 두 중이 (…) 각각 杉重 찬합을 바치는데 찬품이 또한 심히 사치스러웠다.”라고 하였다.9 영조 39년(1763) 趙曮의 『海槎日記』에는 “바다를 건넌 뒤부터는 지나가게 되는 연로의 각 고을 태수가 으레 杉重 및 果餠을 수시로 보내온다고 하는데, 이른바 삼중이란, 삼나무로 만든 3층 찬합에다가 여러 가지 과일과 떡·음식을 담은 것을 말한다.”라고 기록하여 찬합의 재질과 찬품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10 이어서 일본의 찬합이 조선으로 유입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기록은 순조 11년(1811) 신미사행 기록인 『東槎錄』에서 확인된다. 이 사행록에는 ‘에도에서 보낸 잡물을 분배한 목록’이 남아있으며, 목록에는 “上官인 製述官 1원에게는 蒜隅別饌盒, 掌務官 1원에게는 蒜隅饌盒 1좌, 書記 2원에게는 蒜隅饌盒이 1좌씩, 次上官인 伴倘 2인에게는 砂饌盒을 각각 1좌씩 분배하였다.”는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11 이 기록을 통해 목기로 제작된 산우찬합과 자기로 제작된 사찬합의 유입이 확인된다.12
위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찬합은 일찍이 중국의 차문화 속에서 사용되고 전파되었으며, 명대 이후에는 휴대용으로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에서도 다구와 동반한 기물로 사용되기 시작하여 에도시대에는 다양한 형태의 휴대용 찬합으로 발전하였다. 사행록을 통해 중국과 일본에 다녀온 사신들이 찬합을 사용하거나 받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이 과정에서의 경험으로 조선에서도 찬합에 대한 수요가 형성되어 제작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 조선후기 기록에 나타난 찬합

국내에서도 일찍이 삼국시대부터 찬합을 사용한 것이 확인된 바 있다. 천마총에서 출토된 단층형 구조의 칠기 찬합과 안압지에서 출토된 다층형 구조의 칠기 찬합이 그 예이다.13 출토품을 통해 신라 왕실에서 이미 칠기 찬합이 최고급 기종으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는 仁宗(1109-1146) 長陵 출토품 중 단을 쌓아 올린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 套盒이 발견되기도 했다. 조선전기에는 일본의 큐슈 총관이 사신을 보내어 食籠을 진상한 기록이 있으나 사용 예는 찾아볼 수 없다가 조선후기 들어 성행하기 시작한다.14 그 정황을 조선후기 기록을 통해 살펴보기로 하겠다.
문헌사료나 회화자료에 나타난 찬합은 음식을 즐기는 연향이나 계회, 아회의 장면에서 주로 등장한다. 우선 영조 6년(1730) 21명의 중신이 궐내 음악 기관인 梨園에 모여 열었던 계회를 그린 <梨園耆老會圖>에는 黃漆 다층형 구조의 찬합이 등장한다(Fig. 3). 찬합과 동반하는 기물이 찻물을 끓이는 화로, 솥과 물병, 목이 긴 백자병 등의 茶具인 것으로 보아 황칠의 찬합 또한 차문화에서 사용되는 다구의 일종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15 또한 찬합에 고급 칠 재료인 황칠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왕실에서 기로연을 맞는 중신들에게 내린 사찬 찬합일 가능성도 살필 수 있다.
왕실 관련 기록에서도 찬합을 사용한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난다. 왕실 찬합은 헌종 14년(1848)에 열린 연향에 대한 기록인 『戊申進饌儀軌』의 「饌品」조에서 ‘四層倭饌榼’이라는 용어로 등장하여 1902년 연향의궤에까지 꾸준히 사용된다. 이뿐만 아니라 왕실의 산릉을 조성할 때 참여한 관원들에게 왕이 찬합을 내리는데, 이를 기록한 음식 발기에도 찬합이 등장한다.16 그중 하나를 살펴보면, kjah-310-202106-001i1.jpg는 고종 15년(1878) 哲宗의 妃인 哲仁王后(1837-1878)의 산릉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관리들에게 왕이 내린 사찬 찬합에 담긴 음식을 상세히 적어 놓은 음식 발기이다(Fig. 4). 발기에는 사층찬합 5좌, 삼층찬합 15좌에 造菓類, 脯類 등 총 19가지의 음식이 담겼음이 기록되어 있다.
찬합의 선호는 찬품의 화려함에서도 기인하여, 이를 경계하고자 하는 기록도 발견된다. 정조 19년(1795) 왕의 화성 행궁 행차 시 ‘반과의 금령’을 어긴 자들의 죄를 다스린 기록에서 다양한 찬합을 확인할 수 있다. 적발된 품목 중에는 크고 작은 찬합, 반찬을 담은 대궤 등이 있다.17 임금이 궁궐 외부로 거둥하는 의례를 행할 때 반과에 대한 경계를 엄중히 하는 것은 幸行의 비용을 절약하려는 뜻에서 시행되었다.18 찬합을 사용하면 담기는 반찬의 가짓수가 늘어나 자칫 많은 비용이 들 수 있음을 경계하려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찬합은 왕실과 문인들 사이에서 각광 받는 고급 기물로 자리 잡는다. 明代 후반에 중국에서는 상품경제가 발달하여 물건의 상품화 경향이 두드러졌으며, 점차 사치 풍조가 퍼지고 취향이 다변화되면서 심미적인 것마저도 상품화되어 소비되었다.19 이러한 물질문화의 연장선상에서 明末 문인문화가 조선에 유입되어 문사들이 서재나 정원에서 한적한 여가생활의 일환으로 고동서화를 수집하거나 감상하는 문화가 유행하였다.20 찬합은 이러한 물질문화의 한가운데에서 유입된 기물이다. 당시 책가도에 중국의 고급 죽공예품인 班竹 찬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예를 통해 조형적 심미성을 갖는 찬합이 사대부들의 감상용 기물로써 수집·애호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21
이를 잘 보여주는 기록은 徐有榘(1764-1845)의 『林園十六志』에서 찾아볼 수 있다. 「怡雲志」에는 임원에서 살면서 여가에 즐길 만한 일들을 정리해 두었는데 이 중 ‘휴양에 필요한 도구’로 찬합을 언급한다.
③ 일본에서 만든 삼단이나 사단짜리로, 검붉게 옻칠을 하고 그 위에 금색으로 그림을 그린 찬합이 좋다. 자기로 만든 찬합 중에서 哥窯의 氷紋 있는 찬합이 상품에 들어간다.22
이 기록에서 ‘검붉은 옻칠을 하고 그 위에 금색으로 그림을 그린 찬합’은 그릇 표면에 붓으로 옻칠을 하고, 그 칠이 굳기 전에 금가루로 시문하는 일본의 마키에(蒔絵) 칠기 찬합을 말한다. ‘가요의 빙문이 있는 찬합’은 중국 송나라 가요에서 제작된 도자기로 유약 표면이 미세하게 갈라지면서 얼음이 갈라진 듯한 문양이 생기는 찬합을 말한다. 수입 찬합이 조선의 고급 수요층의 차별적인 기물에 대한 욕구를 충족시킬 만한 조건을 지니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으로 조선후기 찬합 생산 시기를 살펴보자. 먼저 1795년 정조의 화성 행궁 행차 시 盤果의 금령에도 불구하고 하급 관리들이 소지하여 적발된 찬합과 정조 17년(1793) 문인 李鈺이 북한산에 오른 산행기에 등장한 일인용 찬합, 徐有聞의 청나라 기행기에서 ‘내 찬합에서 약과를 내어 세 사람에게 나눠 주니’라는 기록에 등장하는 찬합은 모두 여행길에 지참할 수 있는 휴대용 목기 찬합이다.23 목기 찬합은 18세기 후반부터 활발하게 사용되기 시작하였고, 그 수요에 맞추어 생산도 진행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층형 구조로 제작하기 특별히 까다로웠던 자기 찬합의 경우는 『林園十六志』, 「贍用志」에서 제작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④ 우리나라 관요에서는 한 칸짜리만을 만들 수 있을 뿐 층층이 겹쳐지는 칸을 만들 수 없는 데다 품질 또한 거칠고 떨어져서 감상할 만한 반열에 들지 못한다. 『금화경독기』24
서유구가 ‘瓷盒’에 대해 기록한 이 글은 『金華耕讀記』를 참고문헌으로 밝히고 있는데, 이 책은 서유구가 1806-1823년 유배지에서 임원 생활을 토대로 저술한 농업서이다. 따라서 19세기 1/4분기 이후가 되어서야 자기 찬합이 생산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25 이후 1884년에 작성된 『分院磁器公所節目』, 「內出別燔器皿貢價」에는 ‘오층찬합 매좌 3냥 5전, 삼층찬합 매부 2냥 5전, 酒盒甁 매부 2냥’이라는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Table 1).26 19세기 중후반에는 분원에서 오층 이상의 찬합을 안정적으로 생산할 수 있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타 기종과의 가격을 비교하면 오층 찬합의 경우 青彩畫大大盒, 大大缸 등과 동일한 가격이며, 문방용품·다구·일상용기보다 높은 가격으로 책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Ⅲ. 찬합의 재질별 제작경향

조선후기 제작된 찬합의 전세품 대다수는 목기이며, 그에 비해 수량이 많지는 않지만 자기로 제작된 것도 남아있다. 그러나 편년을 확인할 수 있는 찬합이 없고, 출토 사례도 많지 않아 시대별 제작양상을 파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따라서 이 장에서는 완형으로 전세되는 유물 중 대다수를 차지하는 다층형 목기와 자기 재질의 찬합을 대상으로 기형의 연원을 파악하고, 제작양상을 분석하여 그 특징을 알아보고자 한다.

1. 목기 찬합의 종류와 특징

목기 찬합 기형의 근원은 중국 명나라의 高濂이 간행한 『遵生八牋』(1591)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유구는 『준생팔전』을 인용하여 『林園十六誌』, 「怡雲志」의 ‘명승지 여행을 할 때 필요한 행장’ 기록에서 휴대용 찬합인 提盒과 휴대용 화로인 提爐를 기록하였다. 먼저 휴대용 찬합인 ‘제합’에 대한 기록을 살펴보기로 한다(Fig. 5).
⑤ 높이는 총 1.8척 길이는 1.2척, 깊이는 1척으로 하여 작은 찬장과 같은 방식으로 바깥 몸체를 만든다.27 맨 아래에 사방 0.42척 되는 공간을 남기고 판갑을 대서 작은 수납공간 1개를 만든 다음 안에 술잔 6개·술단지 1개·筯子 6벌·勸杯 2개를 차곡차곡 넣는다. 그 위의 공간에는 6칸을 만들되, 마치 네모난 찬합의 바닥같이 만든다. 매 칸의 높이는 0.19척이고, 그중 위의 4칸은 칸마다 접시 6장씩을 차곡차곡 넣어두었다가 과일과 안주를 담아 술상에 올린다. 또 아래 2칸은 칸마다 큰 접시 4장씩을 차곡차곡 넣어두었다가 鮭菜를 담아서 반찬으로 올린다. 밖에는 전체를 덮는 문 1개를 만들어, 문을 장착했다 떼었다 하며 곧 자물쇠로 잠글 수 있게 한다. 제합은 손에 들기에 매우 가볍고 편리하며, 6명의 손님 접대에 필요한 물품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 『준생팔전』28
이 기록에서 제합은 손잡이가 달린 7층 방형 구조로 총 6명이 사용할 수 있는 음식 및 식사 도구들을 휴대할 수 있도록 고안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준생팔전』을 인용한 것을 통해 명나라에서 다층형 구조의 기물이 음식과 식사 도구를 담아 휴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어 흥미롭다. 다음은 같은 기록에 수록된 ‘제로’에 대한 내용이다(Fig. 6).
⑥ 아래 1칸은 네모난 상자처럼 만들고, 그 안에 물 끓이는 구리화로를 장착하는데, 몸체가 네모난 상자 모양과 같다. 이를 아래 상자 모양 안에 끼워 앉힌다. 중간 칸은 바닥에 2개의 구멍을 나누어 내고, 왼쪽 구멍에는 불을 지펴 차 단지를 올려 두고서 차를 제공할 수 있게 한다. 오른쪽 구멍에는 끓는 물을 붓고 그 위에 통처럼 생겼으면서 뚜껑이 달린 작은 솥 1개를 올려 솥 안에 술을 중탕한다. 긴 하루의 오후에 이 솥으로 죽을 끓여 손님에게 대접할 수도 있다. 화로 옆에 하나의 작은 구멍을 뚫어 이 구멍으로 숯을 꺼내고 바람이 들어가게 한다. (…) 총 3칸이 1架를 이룬다. 위에 자물쇠를 채울 수 있게 하고, 앞의 제합과 짝이 되게 한다. 『준생팔전』29
이 기록을 통해 제로는 술을 데우고, 죽과 차를 끓여 손님을 대접할 수 있는 3층 방형 구조의 휴대용 화로가 장착된 찬합임을 알 수 있다. 제합과 제로가 한 짝을 이루면 음식과 식기를 담아 휴대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야외에서도 따뜻한 차와 술을 마실 수 있었다. 목궤에 들어있는 상자를 앞으로 빼내어 쓰는 ‘서랍형’인 제합과 상자를 쌓아 올리는 ‘중층형’인 제로의 기형은 이후 목기 찬합 기형의 근원이 된다.
서랍형 찬합은 『준생팔전』에 묘사된 ‘제합’과 같이 바깥 몸체인 목궤 안에 상자를 서랍식으로 밀어 넣을 수 있게 고안되어 있으며, 목궤 상단의 손잡이를 사용해 휴대가 가능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서랍형 찬합은 맞짜임, 턱짜임, 사개짜임, 연귀짜임의 방식으로 결구시키며, 짜임만으로는 결구가 단단해지지 않는 부분은 대나무 못을 사용하여 판재를 잇거나 금속장석을 사용하여 견고하게 마감한다. 또한 서랍형 찬합은 주로 透孔을 마련하였는데, 투공은 기능적으로 음식의 부패를 방지하고, 서랍을 빼기 쉽게 하기 위함이었으며, 심미적으로는 장식 효과를 노린 것이다.
서랍형 찬합의 대표적인 예로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木製饌盒>을 들 수 있다(Fig. 7). 판재는 사개짜임으로 결구되어 있으며, 바깥 몸체인 목궤의 모서리에는 나비형 귀장식으로 더욱 견고하게 접합되도록 하였다. 앞널은 측널과 경첩으로 연결되어 여닫이문을 달아두었다. 내부에는 삼단으로 칸이 나뉘어 있고, 숫자가 음각된 4개의 상자를 서랍처럼 넣고 뺄 수 있도록 제작하였다. 앞·뒤·측면 모두에 두 줄의 세장한 타원형 투공이 시작 높이를 달리하여 자리하고 있다. 윗널에는 국화형바탕활형 들쇠가 부착되어 있어 휴대를 목적으로 만들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찬합 중 유일하게 장소에 관한 명문이 새겨진 <典膳司名饌盒>도 서랍형 찬합이다(Fig. 8). 앞 널에 ‘宮內府 典膳司’라는 명문이 있다. 전선사는 궁의 음식에 관한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고종 32년(1895) 사옹원에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1910년까지 지속되었다. 주칠이 된 낮은 목궤 안에 흑칠이 된 상자 두 단이 들어가 있으며 각각 주칠로 飯, 饌이라 적어 두었다. 『준생팔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목궤에는 자물쇠가 부착되어 있다.
중층형 찬합은 『준생팔전』에 묘사된 ‘제로’와 같이 방형 또는 원형의 상자 여럿을 차례로 쌓아 올린 기형이다. 대표적인 예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木製饌盒>은 은행나무 판재로 제작한 3단 방형의 중층형 찬합이다(Fig. 9). 손잡이와 연결된 하단 받침대 위에 찬합 세 단을 차례로 쌓아 올리는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각 모서리를 보강하기 위한 장치로 망두형 거멀잡이를 사용하였다. 하단 받침대에는 목가구에서 보이는 박쥐문의 風穴을 내어 음식의 부패를 막고 장식 효과를 노렸다.30 또한 찬합 안팎으로 옻칠을 하여 음식을 담아도 썩지 않게 고려하였다. 중층형 찬합 중에는 나전으로 장식한 고급 찬합도 확인할 수 있다. 이화여자 대학교박물관 소장 <螺鈿雙龍花鳥文饌盒>은 4단 중층형 찬합이다. 네 개의 상자를 손잡이가 부착된 받침대 위에 올리도록 고안되어 있다. 나전의 주름질 기법을 사용하여 매화, 국화, 새, 방아깨비를 표현하였으며, 뚜껑에는 四爪 雙龍을 표현하였다. 문양의 형식화 경향이 진행된 것으로 보아 19세기 중후반에 제작된 찬합으로 보인다(Fig. 10).
한편 목기 중층형 원형 찬합은 목재의 축을 고정시킨 다음 목물레[鹿盧]로 회전시키며, 칼로 깎아 내는 갈이질 작업으로 제작한다. 재래식 갈이틀은 발로 돌려가며 축을 회전시켜 기물을 깎아내는데 회전속도가 느리고 속도 변화가 불규칙해 생기는 칼자국으로 굴곡이 심하게 보인다.31 따라서 목기 원형 찬합은 방형과 비교하여 장식이 적고, 재래식 갈이틀 사용으로 내부가 매끄럽게 처리되지 못하여 질적인 차이를 보인다.

2. 자기 찬합의 종류와 특징

자기 찬합 유입에 대한 유일한 기록은 앞서 살펴보았듯이 1811년의 일본 사행록인 『東槎錄』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에는 ‘에도에서 보낸 잡물을 분배한 목록’이 남아있는데 次上官인 伴倘 2인에게 砂饌盒이 각각 1좌씩 분배되었다.32 『동사록』에는 기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일본 측 자료에서 그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대마번에서 작성한 『文化易地信使來聘記錄』의 「江戶勘定奉行所」 기록을 살펴보면 1811년 조선통신사(이하 신미사행)의 접대를 위해 이마리(伊万里)와 시가라키(信樂)에 자기 제작을 의뢰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시가라키에 자기 제작을 의뢰했던 주문서 또한 남아있는데 1804-1830년에 시가라키 나가노무라(長野村)의 도공이었던 이시노 이헤에(石野伊兵衛)의 가문에 남아있는 「差上申御請書の事」가 그것이다.33 이 주문서에는 의뢰한 식기의 구체적인 종류, 규격, 수량과 함께 주문한 기종의 대략적인 생김새를 파악할 수 있는 도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중 뚜껑이 덮인 2단 원형 구조의 합이 등장한다(Fig. 11). 이는 ‘坪’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높이는 2寸 2分(약 6.6cm)이고 주문 수량은 350개이다. 신미사행에 참여한 인원이 336명이었으므로 대다수가 이 기형을 경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시가라키는 본래 壺, 茶碗 등의 기물을 제작하는 곳으로 식기 제작에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접견에 필요한 식기 제작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태토는 御用 茶壺에 쓰는 최상품을 썼고, 유약은 조선인이 좋아하는 백색유를 사용하는 등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보인다. 조선통신사 접대용 식기 중 현존하는 碗을 분석한 결과, 長石 80%, 土灰 20%의 성분으로 이루어진 백색유를 施釉하였으며, 약 1,280도에서 燒成한 것으로 확인된다.34 동시에 제작된 ‘坪’ 또한 유사한 성격을 지녔을 것으로 보이며, 에도에서 분배된 잡물 중 ‘사찬합’은 사행원들의 접대용 식기로 제공되었던 坪과 같은 기형이었을 것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조선의 자기 찬합은 시가라키에서 자기로 제작된 2단 원형 찬합을 모본으로 삼아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지며, 시기별 제작 기술의 발달에 따라 원형, 방형, 주합형으로 기형을 구분하여 분석해보고자 한다.

1) 원형

자기 원형 찬합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1811년 신미사행을 통해 일본에서 유입된 시가라키 2단 원형 찬합의 기형이 조선의 자기 원형 찬합 생산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 것으로 파악된다. 2단 원형 찬합은 아랫단의 경우 전형적인 발의 형태를 띠고 있으며, 아랫단 구연부에 유약을 닦아 윗단의 굽이 포개어지도록 제작된다. 자기 원형 찬합은 출토품과 전세품을 합하여 수량이 가장 많으며, 주로 2단으로 제작되었다. 높이 평균 10.0cm, 구경 평균 9.0cm의 크기를 갖는 자기 2단 원형 찬합은 주로 실용적인 식생활 기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白磁靑畵網文饌盒>이 이러한 추정을 뒷받침해준다(Fig. 12). 망문이 시문된 자기 2단 원형 찬합은 같은 문양이 시문된 잔, 잔받침, 각접시 등과 함께 구성되어 식생활 용기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자기 찬합 출토품 중 원형 찬합은 70% 이상이 시가라키 2단 원형 찬합 유형에 속해 있다. 분원리 요지 출토품 뿐만 아니라 청진 8지구, 청진 12-16지구, 서울 육조거리 등지에서 출토된 자기 원형 찬합 편은 한층 높이가 3.7-5.0cm, 구경 5.5-9.0cm의 크기를 갖고 있다.35 바닥 굽은 안쪽을 곡면으로 깎은 수직굽으로 여러 개의 합을 포갤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분원리 요지에서 출토된 박쥐문 찬합 편의 경우 구연과 굽에 흙물을 발라 포개어 구웠다(Fig. 13). 현재까지 확인된 2단 원형 찬합 출토품에는 청화로 횡선이 시문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청화 횡선대는 19세기 초에는 시문된 예가 거의 드물고, 1837년 덕온공주 길례 때 사용된 접시부터 청화선이 배치되는 예를 찾아볼 수 있으므로 자기 2단 원형 찬합은 1837년 이후에 생산이 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36

2) 방형

자기 방형 찬합은 목기 방형 찬합의 기형을 모본으로 삼아 네 개의 면을 판성형 기법으로 제작한 것이다. 제작과정에서 고도의 기술을 필요로 하였던 방형의 자기 찬합은 제작이 보다 용이하며, 가벼우면서도 큰 크기로 제작이 가능한 방형의 목기 찬합으로 대체되어 제작량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고급 수요층을 대상으로 실용 겸 완상의 목적으로 제작된 자기 찬합은 수량은 적지만 대부분 경질이며, 태토가 치밀하고, 문양을 시문하는 데 있어서도 정성을 들여 제작하였다. 주로 2-3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높이는 평균 약 15.0-19.0cm, 길이는 약 11.0-14.0cm가 일반적이며, 양각·청화·청채 백자 등으로 제작되었다. 문양은 雲文, 산수문을 비롯하여, 반복적인 문자나 문양이 시문되어 있는 경우도 있다. 문양 구성은 각층 단독으로 시문되는 것이 일반적이나 각층을 연결하는 연속 문양이 시문되기도 했다. 층을 쌓는 기술이 발전된 상태에서 연속적 문양은 각층의 올바른 위치와 순서를 정하는 역할을 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37
자기 방형 찬합의 제작은 원형에 비해 까다로웠기 때문에 제작 시기 또한 그에 비해 늦었다. 방형 찬합의 제작 시기는 문양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 1850년경에 제작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白磁靑畵雲壽福文 庚戌六主基昌庚日中銘 多角 楪匙>는 내저면에 두 겹의 윤곽선이 있는 둥근 雲文의 형태가 청화로 시문되어 있는 접시이다(Fig. 14). 유사한 형태의 운문이 원형과 방형의 자기 찬합에서 모두 확인되는데, <白磁靑畵雲文三層饌盒>은 각층 단독 시문 구성 형태로 구름이 각층마다 반복되고 있다(Fig. 15). 청화로 두 겹의 윤곽선을 두른 구름의 형태와 구름을 제외한 여백을 청화로 채색한 시문 방법이 동일하다. 이러한 문양은 19세기 중반 애용되었던 문양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방형의 자기 찬합 제작 시기가 19세기 중반 이후라는 것을 추정하는 근거가 되어 준다. 또한 위에서 자기 찬합 중 제작 시기가 가장 이른 것으로 추정되는 2단 원형 찬합이 1837년 이후로 제작된 것으로 보아 판성형 기법으로 제작하여 층을 쌓는 고도의 기술이 필요했던 방형 찬합은 원형 찬합보다 늦은 19세기 2/4분기가 되어서야 제작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3) 주합형

酒盒形 찬합은 주로 원형으로 제작되며 음료를 담는 병과 음식을 담는 발이 조합된 구성이다. 주합형 찬합은 17세기 중반부터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하는데, 인조 21년(1643) 淸의 勅使 영접을 위해 마련된 迎接都監 應辦色에서 수행한 직무처리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의궤인 『迎接都監應辦色儀軌』에서 ‘銀酒盒’이라는 용어로 찾아볼 수 있다.38 또한 앞서 살펴본 19세기 후반 기록인 『分院磁器公所節目』, 「內出別燔器皿貢價」(1884)에서 ‘酒盒甁’이 나타나 주병과 합으로 구성된 기물을 분원에서 제작하였음을 파악할 수 있다.
주합형 자기 찬합 전세품은 병·발·뚜껑이 결합되거나 뚜껑 없이 병과 발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뚜껑 없이 병·발로 구성된 <白磁靑畵山水文盒>은 3단 구성으로 맨 위의 단이 병으로 되어 있다. 각층마다 청화로 산수문을 그렸으며, 순백의 태토 위에 광택이 좋고 투명한 유약을 바르고, 굽바닥에는 모래가 섞인 내화토를 받쳐 포개 구운 흔적이 있다. 분원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Fig. 16).
종합해보면 조선후기 제작된 목기 찬합 기형의 근원은 명나라의 서랍형과 중층형 구조의 휴대용 찬합에서 찾아볼 수 있었다. 자기 찬합은 기형의 종류에 따라 근원이 되는 바가 달랐는데 원형의 경우 1811년 신미사행의 접대를 위해 시가라키에서 제작된 2단 원형 찬합이 모본이 된 것으로 보았으며, 방형 찬합은 목기 중층형 찬합 기형을 모본으로 삼아 제작된 것으로 보았다. 이로써 찬합은 재질별 기형의 근원이 되는 바가 달랐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었다.

Ⅳ. 찬합의 용도와 성격

다층형 구조의 찬합은 동아시아 문화에서 오랫동안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어 왔다. 앞서 언급되지 않은 찬합의 용도를 살펴보면, 중국에서는 문방구류를 보관하기도 했으며, 일본에서는 정월에 먹는 음식인 오세치(おせち)요리를 담기도 했다. 류큐국에서는 제기로 사용하기도 했고, 싱가포르의 페라나칸 문화에서는 혼례용품으로 마련되기도 했다. 이는 다층합이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동아시아에서 널리 사용하고 있던 찬합을 중국·일본과의 교류를 통해 받아들인 조선에서는 기본적으로 식기로써 사용하였으나 실용기로도 사용하였다. 이 장에서는 왕실 연향용 식사용기, 휴대용 식사용기 그리고 보관 및 수납용기로 나누어 살펴보기로 하겠다.
먼저 왕실 연향용 식사용기로 사용된 찬합부터 살펴보고자 한다. 왕실 의례 관련 기록에서 ‘찬합’이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한 시기는 헌종 13년(1847)으로, 헌종과 후궁 慶嬪金氏의 嘉禮와 관련한 의식 절차와 물목 등을 한글로 기록한 『뎡미가례시일긔』에서 상감마마에게 올린 기물 중에 ‘왜사층찬합’이란 용어로 처음 보인다. 그리고 이듬해인 헌종 14년(1848) 창경궁 통명전에서 純元王后(1789-1857)의 六旬을 경축하여 베푼 연향에 대한 기록인 『戊申進饌儀軌』의 「饌品」조에서 ‘四層倭饌榼’이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때부터 찬합은 왕실 의례에 꾸준히 등장하는데, 현전하는 19종의 궁중연향의궤를 분석한 결과 총 10종의 의궤에서 ‘饌榼’이라는 용어를 확인하였다.39 1848년부터 1892년까지는 찬품조에 四層倭饌榼이라 기록하지만 1900년대 들어서는 四層饌榼이라 기록하였다.
「饌品」조에서는 찬합에 담긴 음식의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찬합이 처음 등장한 『무신 진찬의궤』(1848)의 通明殿正日進饌에서 대왕대비전에 올린 음식상은 饌案, 味數, 小膳, 大膳, 鹽水, 進湯, 進饅頭, 進茶, 別饌案, 果榼이었다. 果榼의 찬품을 담는 기물은 四層倭饌榼이며, 찬품은 ‘약과·각색다식·각색당·각색절육’으로 대부분 동일하다. 또한 찬합이 제공되었던 대상은 왕실 위계 상 최고 권위자인 대왕대비전, 대전, 중궁전, 세자궁, 세자빈궁이다. 이를 통해 궁중 연향에서 사용되었던 사층왜찬합은 극소수의 최고 권위자만을 위한 기물이었다는 사실을 파악할 수 있다.
다음으로 찬합이 가진 이동의 효율성을 최대한 부각시켜 휴대용으로 활용된 예는 여행용 찬합에서 살펴볼 수 있다. 앞서 살펴본 提盒은 함께 길을 나선 여섯 사람이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식기와 음식을 담은 휴대용 찬합이다. 조선시대 여행자들은 여행에 나서기 전에 기본적인 취사도구와 식기류를 챙기고, 식량으로는 쌀과 반찬, 그리고 술 등을 준비하였다.40 조선후기의 문인 李鈺(1760-1812)이 정조 17년(1793) 8월 26-29일에 걸쳐 북한산에 오른 산행기인 『重興遊記』에는 산행에 지참한 물품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중 ‘일인용 찬합 하나’가 포함되어 있다.41 회화자료에서도 여행용 찬합을 찾아볼 수 있다. 김득신의 아들인 金夏鐘(1793-미상)이 그린 『海山圖帖』 중 금강산 <명경대>에는 선비가 술병과 찬합을 곁에 두고 경치를 즐기고 있는 장면이 등장한다(Fig. 17). 그림에서 먼 여행길에 지참한 휴대용 목기 방형 찬합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조선후기 문인문화의 특성을 잘 보여주는 雅會圖 속에도 찬합이 등장한다. 아회도는 문인들이 주변 경관이 아름다운 명산과 명승에 저택을 짓고 후원에 樓亭을 꾸미고 사적으로 혹은 즉흥적으로 모여 즐긴 풍류의 한 장면을 그린 그림을 말한다.4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金蘭契帖圖>는 북한산 重興寺에서 열린 문인들의 모임을 그린 아회도 중 하나이다(Fig. 18). 화폭 오른쪽에 글을 짓는 문인들과 스님 앞에 목이 긴 백자병과 잔, 그리고 목기 3단 방형 찬합이 그려져 있다. 야외에서 열린 문예 모임에 동반하는 기물은 휴대가 용이해야 했으므로 휴대용 찬합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찬합은 음식의 보관을 목적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목기 찬합은 음식의 보관과 부패 방지를 위해 수분에 강하고, 건습 조절과 통풍이 잘되는 판재로 제작하였으며, 그 위에 옻칠을 하여 방수, 방충과 내열 효과를 더하였다. 자기 찬합도 방수·보온 및 자연 통풍의 효과로 인해 음식 보관이 수월하였다. 목기 찬합 중에는 상자를 10단까지 쌓아 올리도록 고안된 찬합도 제작되었다(Fig. 19). 높이가 무려 46cm에 달해 실내에서 음식을 보관할 때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자기로 제작된 다층합 중에는 총 높이가 약 8cm 이하로 식기로 활용되기에는 크기가 작은 기물이 있다(Fig. 20). 소금·설탕 등을 담는 양념 용기로 활용되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식기 이외의 용도로 활용된 기록이 있어 주목된다. 앞서 살펴본 1884년 작성된 『分院磁器公所節目』, 「內出別燔器皿貢價」에 찬합과 함께 ‘飛陋盒 매개 4전’이라는 기록이 등장한다.43 또한 池圭植이 작성한 『荷齋日記』에 “귀천 김 진사가 硯滴 2개, 飛陋盒 1개를 오늘 7냥 5전에 가져갔다.”, “남한산성 李容弼에게 水仙花盆 1좌와 飛陋盒 1개를 부송하였다.”라는 기록으로 보아 분원에서 비누합을 제작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44 세면을 할 때 사용하는 비누는 한자로 ‘飛陋’라고 적고 ‘더러움을 날려 버린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 비누는 어떤 재질로 만들어졌을까? 1759년(영조3 5) 『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 「二房儀軌 稟目秩」의 銀匠에게 필요한 물품 목록에 ‘豆飛陋 2되’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供上과 各貢으로 나누어 궁중의 연간 소요 경비를 기술한 『萬機要覽』의 惠慶宮편에 ‘飛陋小豆 13두 2승. 매 두의 값은 8전’이라는 기록이 있어 비누는 ‘小豆’ 즉, 팥을 원료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45 팥을 갈아 비누로 만들어 세면할 때 사용하려면 방수가 되는 자기 재질로 비누합을 제작하는 것이 가장 좋았을 것이다. 비누합의 기형은 아사카와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에서 ‘비누합은 겹겹이 겹쳐진 뚜껑이 있는 기물로 찬합보다는 작고, 이층 또는 삼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각층에 소금, 가루비누 등을 넣어둔다.’고 기록하고 있어 양념용기와 세면용기로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46
찬합은 동아시아의 공예와 식문화의 교류 과정을 잘 보여주는 기물이다. 또한 왕실 연향용 식기로서뿐만 아니라 실용성을 새롭게 부각시킨 휴대용 식기로서의 측면을 동시기에 구현한 기물이기도 하다. 더불어 식사용기와 식품 보관용기 이외에 수납용기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다는 점은 찬합이 어떠한 용도 변화도 수용 가능했던 다채로운 성격의 기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Ⅴ. 맺음말

찬합은 동아시아에서 일찍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애호된 기물이며, 조선후기 들어 본격적으로 사용되고,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찬합 사용이 성행하게 된 배경을 찾아보고, 조선에서 제작된 찬합의 재질별 제작양상을 밝히는 데 주목하였다.
찬합은 중국에서 제작되기 시작하여 차문화를 기반으로 전파되어 나갔으며, 일본에서도 차문화와 동반하여 사용되었다. 명대 이후에는 실용성이 뛰어난 휴대용 찬합으로도 사용되기 시작했다. 중국과 일본의 찬합 사용문화는 이들 나라에 다녀온 사신들의 사행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중국에 다녀온 사신들은 접빈 의례에서 차와 동반하는 기물로 찬합을 경험하였고, 일본에 다녀온 사신들은 진상품으로써 갖가지 음식을 담은 찬합을 경험하고 유입시켰다. 이러한 경험으로 조선에서도 찬합에 대한 수요가 형성되었으며 제작의 배경이 되었다. 18세기 후반이 되면 목기 찬합이, 19세기 1/4분기 이후에는 자기 찬합이 조선에서 제작되기 시작한다.
한편 조선에서 제작된 찬합은 재질에 따라 기형의 연원이 되는 바가 달랐음을 확인하였다. 목기 찬합 기형의 근원은 明代 간행된 『준생팔전』에 기록된 ‘제합’과 ‘제로’에서 찾을 수 있었다. 제합은 목궤에서 상자를 빼내는 서랍형 찬합의 모본이 되었으며, 제로는 상자를 쌓아 올리는 중층형 찬합의 모본이 되었다. 자기 찬합은 1811년 신미사행 때 사행원에게 분배된 시가라키 2단 원형 찬합인 ‘坪’이 모본이 되어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자기 찬합은 2단 원형 찬합의 생산이 가장 이른 시기에 이루어졌고, 19세기 중반 이후에는 단을 쌓는 기술이 발전하여 방형 찬합 또한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마지막으로 찬합은 동아시아에서 식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조선에서도 왕실 연향용, 여행자들을 위한 휴대용, 문인문화를 풍요롭게 해주는 야연용, 식품 보관용 등의 식기로서의 사용 이외에 보관 및 수납용기로도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본 연구는 조선후기 들어 찬합 사용 문화가 성행했던 문화적인 배경과 유행 양상을 살펴 동양 삼국에서 광범위하게 애호된 찬합이 지닌 문화적 의미에 주목했다. 또 재질별 찬합 기형의 모본을 밝혀내고, 소형 자기 찬합의 새로운 용도를 제시함으로써 조선후기 다양한 재질로 제작되고 복합적인 용도로 사용된 찬합이 지닌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본 연구에서 미처 심도 있게 다루지 못한 왕실 연향용 찬합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후속 논문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Notes

1) 공예사적인 측면의 연구는 장남원, 「고려시대 청자 투합(套盒)의 용도와 조형계통」, 『미술사와 시각문화』 9(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10), pp. 175-180;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일지사, 2000), pp. 336-337; 同著, 「일본 高麗美術館 소장 19세기 조선백자 연구」, 『미술사학연구』 no.253(한국미술사학회, 2007), p. 192; 구혜인, 「조선후기 양각 백자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07), p. 101: 최경화, 「조선후기 분원리 시기 관요 백자 연구: 1752-1895년을 중심으로」(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4), p. 97을 참조하였다. 문화사적인 측면의 연구는 김상보, 「조선통신사를 통해서 본 한국과 일본의 음식문화」, 『문화전통논집』 12(경성대학교한국학연구소, 2004), p. 10; 정희정, 「조선후기 의궤도설과 기록화를 통해서 본 연향의궤」(이화 여자대학교 식품영양학과 박사학위논문, 2015), p. 98; 박정희, 『17-18세기 통신사에 대한 일본의 의식다례』 (민속원, 2010), pp. 264-269를 참조하였다.

2) 齊東方, 『唐代金銀器硏究』(中國社會科學出版社, 1999), pp. 122-123.

3) 휴대용 찬합의 근원은 高濂의 『遵生八牋』(1591)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기록에서 휴대용 찬합인 提盒과 휴대용 화로인 提爐가 등장한다. 3장에서 자세히 다루었다.

4) 『군다이칸소초키』의 원본은 현전하지 않으며, 현재 16-19세기에 제작된 총 100여 점 이상의 편집본, 전사본, 필사본과 간행본이 존재한다(이정은, 「아시카가의 문화적 권위와 군다이칸소초키(君臺観左右帳記) 제작의 경제적 의미」, 『미술사학』 36(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18), p. 219).

5) 醍醐散人, 『料理早指南』(日本 国文学研究資料館 所藏), p. 32.

6) 徐浩修, 『燕行紀』 正祖 14年(1790) 8月 1日 “始戱後, 宣饌凡三度 (…) 撤饌後三度, 皆宣酪茶, 止戱前, 軍器大臣和珅, 領欽賜各種頒于參宴諸臣, 余與正使, 各蘋果一楪, 普洱茶一壺, 茶膏一匣, 書狀官蘋果一楪, 普洱茶一壺”.

7) 徐浩修, 『燕行紀』 正祖 14年(1790) 8月 5日 “又以西瓜, 蘋果, 葡萄, 餑餑, 淸茶, 各盛于朱盒, 頒于諸臣, 因皇旨云”.

8) 이행철·최한선, 「中國 宮廷의 飮茶文化」, 『동아인문학』 27(동아인문학회, 2014), p. 301.

9) 南龍翼, 『扶桑錄』 孝宗 6年(1655) 11月 15日 “義成父子及兩僧, (…) 各呈三重榼, 饌品亦甚侈”.

10) 趙曮, 『海槎日記』 英祖 39年(1763) 10月 7日 “聞渡海後, 則所經沿路, 各州太守例有杉重及果餠之隨時送來者, 所謂杉重, 以杉木三層饌盒, 盛以雜果餠饌之謂也”.

11) 柳相弼, 『東槎錄』, 「江戶所送雜物分派記」 純祖 11年(1811) “製述官一員, 蒜隅別饌盒一坐,掌務官一員, 蒜隅饌盒一坐, 書記二員各, 蒜隅饌盒一坐, 伴倘二人各, 砂饌盒一坐”.

12) 蒜隅饌盒은 네 귀퉁이를 원뿔형 누름쇠로 댄 찬합을 말한다(조선시대 대일외교 용어사전 DB, 한국학중앙연구원).

13) 이영주, 『경주 안압지 출토 칠기 연구』(대구가톨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6), pp. 39-40.

14) 食籠을 진상한 기록은 『朝鮮王朝實錄』 世宗 3年(1421) 11月 6日 6번째 기사 “食籠一介”; 世宗 6年(1424) 10月 6日 7번째 기사 “金粧飾食籠一箇”; 成宗 4年(1473) 8月 25日 3번째 기사 “堆紅食籠一箇”에서 찾아볼 수 있다.

15) 그림에 등장하는 백자병은 일반적인 백자병에 비해 목이 길다. 해강도자미술관 소장 <白磁鐵畵‘進上茶甁’銘甁>은 높이가 39.5cm로 일반적인 백자병에 비해 목이 10cm가량 높은 편이다. 이 병에는 철화로 ‘진상다병’이라 적혀 있어 목이 긴 병이 茶甁으로 사용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16) 산릉도감은 조선시대 왕이나 왕비가 사망한 직후부터 왕릉이나 왕비릉을 조성하기 위해 능이 완성될 때까지 존속하였던 한시적인 기구이다. 이와 관련된 음식발기인 kjah-310-202106-001i3.jpg, kjah-310-202106-001i4.jpg, kjah-310-202106-001i5.jpg에 사찬 찬합에 대한 기록이 발견된다.

17) 『日省錄』, 正祖 19年(1795) 閏2月 10日 “司僕巨達金奉泰, 卜馱中, 捉得大小饌盒, 壯勇營伺候軍金明麟, 所負饌物大匱一件”.

18) 『承政院日記』, 高宗 1年(1864) 8月 8日 “幸行時飯果申飭, 出於節費之意”.

19) 조인수, 「물질문화연구와 동양미술」, 『미술사와 시각문화』(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08), p. 20.

20) 홍선표, 『조선회화』(한국미술연구소, 2014), p. 11.

21) 궁중화원이었던 장한종과 이형록이 그린 책가도에는 2단 원형의 세장한 기형을 가졌으며 무정형의 검정색 반점이 찍힌 斑竹 찬합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반죽은 중국 호남성 등지에서 고급 죽공예품의 재료로 쓰인다(남소라, 『조선후기-근대 목기·자기 찬합 연구』(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6), pp. 86-89).

22) 徐有榘, 『林園十六誌』, 「怡雲志」 卷1, 休養器具 饌盒 “倭造三撞四撞, 髹漆金畵者, 佳瓷者, 哥窑氷紋者, 入品. 『金華耕讀記』(한역은 임원경제연구소, 『이운지』 1(풍석문화재단, 2019), p. 226 참조)”

23) 본고 각주 17, 41 참조; 徐有聞, 『戊午燕行錄』 卷1, 正祖 22年(1798) 11月 22日.

24) 徐有榘, 『林園十六誌』, 「贍用志」 卷2, 炊爨之具 瓷盒 “我東官窯造者, 但能作一格, 不能作層累之格, 品亦麤劣, 不入鑑賞. 『金華耕讀記』(한역은 임원경제연구소, 『섬용지』 1(풍석문화재단, 2016), pp. 425-426 참조)”

25) 최경화, 앞의 논문, p. 97, 각주 251 참조.

26) 『分院貢所節目甲申節目改飜謄』, 「內出別燔器皿貢價」 “五層饌盒毎坐價三兩五戔, 三層饌盒毎部價二兩五戔, 酒盒瓶毎部價二兩”.

27) 明의 營造尺은 약 31.8cm이므로, 제합의 높이는 57.24cm, 길이는 38.16cm, 깊이는 31.8cm로 환산할 수 있다(명대 조척에 대한 자료는 이종봉, 「韓·中·日 近世時期 度量衡制 比較 硏究」, 『역사와 경계』 110(부산경남사학회, 2019), pp. 431-433 참조).

28) 徐有榘, 『林園十六誌』, 「怡雲志」 卷8, 名勝遊衍 提盒 “高總一尺八寸, 長一尺二寸, 入深一尺, 式如小厨, 為外體也. 下畱空方四寸二分, 以板閘住, 作一小倉, 内裝酒杯六, 酒壺一, 筯子六, 勸杯二. 上空作六格, 如方合 底每格高一寸九分, 以四格, 每格裝碟六枚, 置菓殽供酒觴, 又二格, 每格裝四大碟, 置鮭菜供饌筯. 外總一門, 裝卸即可關鎖, 遠逰提甚輕便, 足以供六賓之需『遵生八牋』(한역은 임원경제연구소, 『이운지』 4(풍석문화재단, 2019), p. 404 참조)”; 『遵生八牋』 卷8, 「起居安樂牋」下 “溪山逸遊具” ‘遊具’(『遵生八牋校注』, p. 261).

29) 徐有榘, 『林園十六誌』, 「怡雲志」 卷8, 名勝遊衍 提爐 “下層一格如方匣, 内同銅造水火爐, 身如匣方, 坐嵌匣内. 中分二孔, 左孔炷火, 置茶壺以供茶; 右孔注湯, 置一桶子小鑊有葢, 頓湯中煮酒. 長日午餘, 此鑊可煮粥供客. 傍鑿一小孔, 出灰進風. 其壺, 鑊迥出爐格上 (…) 總三格成一架. 上可箾關, 與提盒作一副也 『遵生八牋』(한역은 임원경제연구소, 『이운지』 4(풍석문화재단, 2019), pp. 406-407 참조)”; 『遵生八牋』 卷8, 「起居安樂牋」 下 “溪山逸遊具” ‘遊具’(『遵生八牋校注』, p. 261).

30) 목가구에 낮은 다리를 달아 방바닥과의 사이로 열기가 상승할 수 있도록 하고, 뚫린 밑 부분이 적게 보이도록 風穴을 달아 시각적인 안정감을 주었다(박영규, 『한국 전통 목가구: 전통목가구의 도면과 상세』(한문화사, 2011), p. 259).

31) 박영규, 「조선 목제구의 조형성과 목제기법 연구」, 『조선시대 제례와 목제구』(용인대박물관, 2005), pp. 36-38.

32) 柳相弼, 『東槎錄』, 「江戶所送雜物分派記」 純祖 11年(1811) “伴倘二人各, 砂饌盒一坐”.

33) 平野敏三, 「朝鮮使と信樂燒」, 『日本やきもの集成- 近畿』Ⅰ(平凡社, 1987), p. 100.

34) 平野敏三, 앞의 논문(1987), p. 101; 平野敏三·今駒清則, 『日本のやきもの』 7(淡交社, 1986), p. 204.

35)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 『조선시대 마지막 官窯 廣州 分院里 白磁窯址』(2006), p. 38; 한울문화재연구원, 『鐘路淸進8地區 遺蹟Ⅱ』(2013), p. 36; 한울문화재연구원, 『鐘路 淸進12-16地區 遺蹟』(2013), p. 38·p. 123; 한강문화재 연구원, 『서울 육조거리 유적』(2011), p. 165.

36) 청화 횡선대 시문 시기에 대해서는 최경화, 앞의 논문, p. 239를 참고하였으며, 덕온공주 길례 때 사용된 <백자 청화당초문접시>는 해강도자미술관 소장품이다.

37) 구혜인, 앞의 논문, p. 101.

38) 『迎接都監應辦色儀軌』 “大通官求請, 銀酒盒二, 銀食器二, 銀羔美器二, 銀錚盤二等”.

39) 饌榼이 등장하는 10종의 의궤는 『戊申進饌儀軌』(1848), 『戊辰進饌儀軌』(1868), 『癸酉進爵儀軌』(1873), 『丁丑進饌儀軌』(1877), 『丁亥進饌儀軌』(1887), 『壬辰進饌儀軌』(1892), 『辛丑進饌儀軌』(1901), 『辛丑進宴儀軌』(1901), 『壬寅四月進宴儀軌』(1902), 『壬寅十一月進宴儀軌』(1902)이다.

40) 정치영, 『사대부, 산수 유람을 떠나다』(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4), p. 287.

41) 李鈺, 『重興遊記』 行李 二則 “(…)斑竹詩筒一 筒中東人詩卷一 彩牋軸一 一人榼一”(이옥 저, 실시학사 고전문학연구회 역, 『이옥전집』 3(소명출판, 2001), p. 96).

42) 송희경, 「朝鮮 後期 雅會圖 硏究」(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04), p. 58.

43) 『分院貢所節目甲申節目改飜謄』, 「內出別燔器皿貢價」 “飛陋盒毎個四戔”.

44) 池圭植, 『荷齋日記』 卷5, 1898年 3月 10日 “歸川金進士硯滴二介, 飛陋盒一介”; 卷8, 1903年 1月 13日 “南漢李容弼許, 水仙花盆一坐, 飛陋盒一箇付送”.

45) 『萬機要覽』 財用1 供上 「惠慶宮」 “飛陋小豆十三斗二升, 每斗價八錢”.

46) 아사카와 다쿠미 저, 심우성 역, 『조선의 소반, 조선도자명고』(학고재, 1996), p. 132.

Fig. 1.
<은제투합(銀製套盒)>, Silver Side-dish Box, Tang Dynasty, 9th century, H. 3.8cm(each), D. 10.3cm(mouth), Famen Temple Museum (Report of archaeological excavation at Famen temple Ⅱ, 2007, Fig.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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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군다이칸소초키君臺観左右帳記)>, Kundaikan souchouki, Muromachi era, National Diet Library, Japan (dl.ndl.g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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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이원기로회도(梨園耆老會圖)>, Album of Painting on the Gathering of Elderly Scholars, Joseon Dynasty, Colors on paper, 34×48.5cm, National Museum of Korea (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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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kjah-310-202106-001i2.jpg>, Document that Records the Name of the Food, Joseon Dynasty, 1878, 31.5×115.7cm, The Academy of Koran Studies Jangseogak (jsg.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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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제합(提盒)>,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Portable Side-dish Box, Imwŏnshibyukchi, Joseon Dynasty,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db.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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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제로(提爐)>, 『임원십육지(林園十六志)』 Portable brazier, Imwŏnshibyukchi, Joseon Dynasty,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db.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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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목제찬합(木製饌盒)>, Wooden Side-dish Box, Joseon Dynasty, H. 27cm, 18.5 ×10.7c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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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전선사명찬합(典膳司名饌盒)>, otable Food Container with the Inscription Jeonseonsa, Daehan Empire, H. 18.9cm, 21.2 ×20.1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Deoksugung Palace Management Office, The Emperor’s Dining Table of the Daehan Empire, p.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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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목제찬합(木製饌盒)>, Wooden Side-dish Box, Joseon Dynasty, H. 28.3cm, 15 ×19.8cm, National Museum of Korea (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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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나전쌍룡화조문찬합(螺鈿雙龍花鳥文饌盒)>, Black-lacquered wood with mother-of-pearl inlay Side-dish Box with Flower and Dragon Designs, Joseon Dynasty, H. 28.4cm, 17.5 ×17.5cm, Ewha Womans Univers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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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坪>, Stackable Bowl (Japanese ceramics aggregation- Kansai, 1987, p. 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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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백자청화망문찬합(白磁靑畵網文饌盒)>, Blue and white Porcelain Side-dish Box with Net pattern Designs, Joseon Dynasty, 19th century, H. 10.3cm, D. 8.6cm (mouth), 5.5cm(base), National Museum of Korea (In Blue and White Porcelains of the Joseon Dynasty, 2014, p. 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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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백자청화박쥐문찬합편(白磁靑畵蝠文饌盒片)>, Piece of Blue and white Porcelain Side-dish Box with Bat-pattern Designs, Joseon Dynasty, 19th century, H. 3.9cm, D. 8.2cm(mouth), 6.2cm(base), Excavated at bunwonri, Gwangju, Gyeonggi provine,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Last Official Kiln Site of Joseon White porcelain at Bunwon-ri in Gwangju-si, 2006, p.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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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백자청화운수복문 경술육주기창경일중명 다각 접시(白磁靑畵雲壽福文 庚戌六主基昌庚日中銘多角 楪匙)>, Faceted Blue and White Porcelain Dishes for the Royal Court, Joseon Dynasty, around 1850, H. 2.8cm, D. 13.2cm, National Museum of Korea (In Blue and White Porcelains of the Joseon Dynasty, 2014, p.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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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백자청화운문삼층찬합(白磁靑畵雲文三層饌盒)>, Blue and white Porcelain Side-dish Box with Clouds Designs, 18-19th entury, H. 14.3cm, 8 ×8.1cm, Horim Museum (Joseon White Porcelain Masterpieces Exhibition, 2003, p.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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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백자청화산수문합(白磁靑畵山水文盒)>, Blue and white Porcelain Side-dish Box with Landscape Designs, Joseon Dynasty, late 19th century, H. 19cm, D. 4.3cm(mouth), 7.4cm(base), Neiraku Art Museum (Korea Cultural Heritage, Collected by Neiraku Art Museum, Japan, 2006,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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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Kim Ha-jong, <해산도첩(海山圖帖)>>, Album of Haesandocheop, Joseon Dynasty, Colors on Silk Fabric, 29.7 ×43.3cm (each page), National Museum of Korea (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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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금란계첩도(金蘭契帖圖)>, Painting Album of Meeting of Middle Class Literati, Joseon Dynasty, 1857, Colors on paper, 42.0 ×109.5cm, National Museum of Korea (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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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목제찬합(木製饌盒)>, Wooden Side-dish Box, Joseon Dynasty, H. 46cm, 16 ×16c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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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백자청화기하문이층합(白磁靑畵幾何文二層盒)>, Blue and white Porcelain Box with Geometric Designs, Joseon Dynasty, late 19th century, H. 7.8cm, 5.8×5.6cm, The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The Pottery of the Yi Dynasty, 1993, Fig.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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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分院磁器公所節目』, 「內出別燔器皿貢價」 기종별 가격 비교, Price comparison of Bunwon Ceramics by model (1884)
Price Price by model
Over 8 nyang [a unit of old Korean coinage] 陽刻七楪具盖盤床 A set of Embossed Tableware (13 nyang), 龍樽 Dragon Jars in White Porcelainware (8 nyang 5 jeon)
3 nyang 5 jeon 五層饌盒 5-tier Side-dish Box, 大大缸 Large Pot
青彩畫大大盒 Blue and White Porcelain Large Box
2 nyang 5 jeon 三層饌盒 3-tier Side-dish Box, 中大楪 A Medium Plate, 青彩畫中盒 Blue and White Medium Porcelain Box
2 nyang 酒盒甁 Bottle and Box Set
Under 2 nyang 筆筒 Pencil Case (1 nyang 5 jeon), 茶鍾 Teacup (7 jeon), 飛陋盒 Soap Box (4 j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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