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王家博物館 佛像 컬렉션의 형성과 의미*

Collecting Buddhist Statues in Colonial Korea: A Reconsideration of the Prince Yi Royal Household Museum Collection*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1;309():107-144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1 March 31
doi : https://doi.org/10.31065/kjah.309.202103.004
**Leeum, Samsung Museum of Art
이승혜**
**삼성미술관 Leeum
*이 글의 초고를 꼼꼼히 검토하고 건설적인 지적을 해주신 익명의 심사자들과 집필 과정 중 조언해주신 강희정, 김혜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Received 2020 December 31; Revised 2021 January 07; Accepted 2021 March 02.

Abstract

1909년 11월 창경궁 안의 박물관이 공중에게 개방됐다. ‘帝室’ 혹은 ‘李王家’ 박물관이란 대조적인 명칭의 함의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은 식민지적 상황과 떼놓을 수 없다. 이 점은 1990년대 이래 본격화된 이왕가박물관에 관한 연구가 설립의 주체와 목적을 밝히는 데 경주한 것에서도 확인된다. 반면 근대기 ‘佛像’ 혹은 ‘佛敎彫刻’이라는 새로운 미술 장르, 나아가 ‘한국 불교조각사’라는 학문적 범주의 형성에 있어서 이왕가박물관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다뤄진 바 없다. 불상은 이왕가박물관이 자랑하는 주요 소장품 중 하나였다. 이왕가박물관은 1909년에 개관한 이후 1915년에 朝鮮總督府博物館이 개관하기 이전까지 한국의 유일한 박물관이자 ‘제도적 수요자’로서 미술시장의 형성과 근대적 미술 장르의 이식, 그리고 불교조각 연구의 방향 설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와 관련하여 20세기 벽두를 강타했던 ‘高麗瓷器熱狂’과 유사한 현상을 불상의 수집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주목된다. 바꿔 말하자면, 1910년대에 본격화된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수집은 일본인 통치 권력층의 계급적 취미가 반영된 고려자기나 여러 동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던 서화의 수집과는 성격을 달리한다.

이 논문은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컬렉션의 형성과 의미를 明治維新 이후 일본에서 형성된 고대 불상에 대한 인식과 관련하여 살펴봤다. 우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구미와 일본의 연동 속에서 예배의 대상이었던 동아시아 불상이 수집과 관람의 대상으로서 전화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이를 통해 이왕가박물관 설립의 숨은 주체이자 근대 초기 한국 불상의 주요 수요자였던 일본인 문화 엘리트들이 불상을 ‘나라의 精華’로 이해하게 됐다는 것을 밝혔다. 다음으로 그동안의 연구에서 언급되지 않았던 신문기사와 학술적인 글이 아니라는 이유에서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이왕가박물관의 관계자가 남긴 글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수집 과정을 상세히 살펴봤다. 마지막으로 이왕가박물관과 유력한 일본인 고미술품 수장가들이 모은 불상이 조선미술사의 일부로 편입되고 문화재로서 가치를 공인받는 과정을 당시의 대표적인 官撰 출판물이었던 『韓紅葉』과 『朝鮮古蹟圖譜』의 분석을 통해 살펴봤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그동안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수집에 관한 이해를 넓히고 그 미술사적 의의를 재정립했다.

Trans Abstract

In November of 1909, the museum inside Ch’anggyŏnggung Palace opened its doors to the public. The founding and administration of this museum—as indicated by the prefixes that once adorned its name, like “Imperial Household” and “Yi Royal Household”—were inseparable from the colonial situation. In fact, studies on the Prince Yi Household Museum since the 1990s have largely focused on the principal agents and purpose of its founding. Past scholarship has paid little attention, however, to the seminal role that the Museum played in the introduction of modern categories like “Buddhist statues” and “Buddhist sculpture,” not to mention the history of Korean Buddhist sculpture as a modern academic discipline. Buddhist statues were one of the main types of art objects collected by the Museum. The Prince Yi Household Museum was the sole museum on Korean soil as well as the only institutional collector of Korean art objects between 1909 and the founding of the Government General Museum of Korea in 1915. As such, it heavily influenced developments in the art market as well as directions in research on Korean Buddhist sculpture. Intriguingly, there was no art market frenzy for Korean Buddhist statues comparable to that which developed around Koryŏ ceramics. In addition to vigorously collecting Koryŏ ceramics, which functioned to signify social distinction among the Japanese colonial authorities, the Prince Yi Household Museum also collected paintings and calligraphy from the Chosŏn period that were traditionally cherished by the Korean cultural elite. What, then, might have motivated the Museum to collect Korean Buddhist statues in the 1910s?

This article examines the formation and historical implications of the Museum’s Buddhist statue collection. The profile of the Museum’s collection was, I argue, largely shaped by imperial Japan’s modern discovery of ancient Buddhist statues as artworks, which in turn was propelled and conditioned by Japan’s effort to assimilate the values of the West after the Meiji Reformation. First, I trace the process whereby East Asian Buddhist icons were transformed from objects of worship into objects for collecting and display as a result of interactions between imperial Japan and the West during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y. By so doing, I reveal how Japanese cultural authorities—the driving force behind the establishment of the Prince Yi Household Museum and early collectors of Korean Buddhist statues—came to understand Buddhist statues as the “quintessence of the nation.” Next, I examine Prince Yi Household Museum’s collecting of Korean Buddhist statues based on a close reading of primary sources, including contemporary newspaper articles and writings by the museum staff that have received little scholarly attention due to their non-academic nature. Lastly, I examine how Korean Buddhist statues in the Prince Yi Household Museum and in the hands of powerful Japanese collectors were incorporated into the canon of Korean Buddhist art history and publicly approved as valuable cultural properties. I argue that government publications, such as Karamomiji (1909) and Chōsen koseki zufu (1915–1935), functioned as sites where Korean Buddhist statues that had lost their provenance due to predatory collecting could be given a new place in the art historical canon. In these ways, my analysis contributes to the understanding of the Prince Yi Household Museum’s collecting practices in colonial Korea and their lasting legacy in the historiography of Korean Buddhist art history.

Ⅰ. 서론

1909년 9월 창경궁 안에 우리나라 최초의 박물관이 동물원, 식물원과 함께 문을 열었다. 설립 직후에는 純宗(재위 1907-1910)과 소수의 선택된 이들에게만 개방되다가 그해 11월 1일에 공중에게 개방됐다. 이 박물관은 대한제국기에는 帝室博物館이라 불렸고, 1910년 한일 강제병합 이후에는 李王家博物館, 李王職博物館, 昌慶苑博物館 등으로 다양하게 지칭됐다.1, ‘제실’ 혹은 ‘이왕가’ 박물관이란 대조적인 명칭의 함의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은 식민지적 상황과 떼놓을 수 없다. 이 점은 1990년대 이래 본격화된 이왕가박물관에 관한 연구가 설립의 주체와 목적을 밝히는 데 진력한 것에서도 확인된다.2, 이러한 선구적인 연구들에 이어 이왕가박물관이 탄생한 이후 미술시장과 미술 장르의 형성 등에 미친 영향을 분석한 논고들도 속속 발표됐다. 특히 이 연구들은 무덤의 부장품이었던 고려청자가 일제강점기에 접어들어 미술품으로 재인식되는 과정에서 식민지 관료들의 계급적 취향이 투사됐으며, 이왕가박물관이 이를 제도적으로 공인해줬다는 점을 설득력 있게 밝혔다.3

반면 근대기 ‘佛像’ 혹은 ‘佛敎彫刻’이라는 새로운 미술 장르, 나아가 ‘한국 불교조각사’라는 학문적 범주의 형성에 있어서 이왕가박물관의 역할에 대해서는 거의 다뤄진 바 없다.4, 19세기에 들어 동아시아와 외부세계와의 접촉이 본격화된 이래 동아시아의 불상은 서구, 이어서 일본에 의해 서구의 ‘조각’에 대응하는 미술품으로서 재발견됐다.5, 박람회와 박물관은 신앙의 대상이었던 전근대의 불상이 미술품으로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았던 공간이었다. 한국 불상이 사찰이라는 본래의 자리를 벗어나 미술품으로서 인식되게 된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6, 이왕가박물관은 1909년에 개관한 이후 1915년에 朝鮮總督府博物館이 개관하기 이전까지 한국의 유일한 박물관이자 최초의 ‘제도적 수요자’로서 미술시장의 발전, 근대적인 미술 장르의 형성 및 한국불교조각 연구의 방향 설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7, 이왕가박물관의 컬렉션은 왕실의 수장품을 계승한 것이 아니라 개항기 이후 ‘미술’로서 대상화된 분묘 출토품과 불상, 그리고 전통적으로 감상과 수장의 대상이었던 서화를 미술시장에서 구매하여 구축됐다.8, 그중 불상은 박물관 설립을 둘러싼 논쟁 중 궁 내외 인물들이 유서 깊은 궁궐 전각에 진열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했던 바로 그 유물이란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Figs. 1, 2).9, 이왕가박물관의 고려자기 컬렉션은 일본인 통치 권력층의 특수한 사적 취미의 연장선에서 수집됐으며, 다양한 화목을 망라하는 서화 컬렉션은 전통적인 서화감식안을 반영하여 형성됐다.10, 그렇다면 이왕가박물관 컬렉션의 또 다른 중심이었던 불상은 어떤 이유에서 수집되고 전시된 것일까? 이와 관련하여 20세기 벽두를 강타했던 ‘高麗瓷器熱狂’과 유사한 현상을 불상의 수집에서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이 주목된다. 물론 이미 1900년대 초반에 조선에 부임했던 일본인 관료나 거류민이 불상을 수집했다는 기록도 확인되나 고려자기에 대한 열광과 견주기 어렵다.11, 이 점에서 이왕가박물관 불상 컬렉션의 형성은 이왕가박물관의 설립을 입안하고 추진했던 일본인 고위통치층이 明治維新 이후 경험했던 불상의 ‘再맥락화’, 그리고 이 시기 성립된 일본미술사와 연계하여 살펴볼 필요가 있다.12

Fig. 1.

博物館本官 陳列室 一部, Part of the galleries in the Main Building of the Museum. Postcard. 14.2×9.0cm. Acc. no. kuip 1197. Busan Museum

Fig. 2.

昌慶宮明政殿내佛像展示, Display of Buddha statues in the Myŏngjŏngjŏn Hall of Ch'anggyŏnggung Palace. Print from dry plate. 10.9×8.3cm. Acc. no. yuri konp’an 5139.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이 글에서는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수집의 정책적·문화적 배경을 밝히고, 1910년대에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컬렉션이 가치를 公認받고 ‘조선미술사’로 편입되는 과정을 밝히려 한다. 이를 위해 우선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구미와 일본에서 일어났던 동아시아 불상의 미술품으로서의 재맥락화 현상을 살펴보겠다. 이와 같은 고찰을 통해 이왕가박물관 설립의 숨은 주체이자 근대 초기 한국 불상의 주요 수요자였던 일본인 문화 엘리트 사이에서 불상이 어떻게 이해됐는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즉각적인 맥락을 넘어, 全지구적 맥락에서 한국 불상 수집의 첫 순간을 재조명하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다음으로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수집과정을 당대의 신문기사와 이왕가박물관의 일본인 관료들이 남긴 글을 통해 고찰하고자 한다.13 이를 통해, 단편적이나마 이들이 어떠한 생각과 기준에서 한국 불상을 수집하고 대내외에 소개했는지 가늠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마지막으로 이왕가박물관과 유력한 일본인 고미술품 수장가들이 모은 불상이 조선미술사의 일부로 편입되고 문화재로서 가치를 공인받는 과정을 일제강점기 官撰 출판물을 통해 분석하겠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그동안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수집에 관한 이해를 넓히고 그 미술사적 의의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Ⅱ. 19세기 말-20세기 초 동아시아 佛像의 재맥락화

유럽에서 불교는 1 8세기 이전까지만 해도 ‘偶像’(idol), 즉 불상을 숭배하는 종교 정도로 여겨졌다(Fig. 3).14, 19세기에 들어서 불교 연구가 본격화되기 시작했고, 지식인들이 아시아 여행을 통해 사상과 종교를 직접 접하면서 불상에 대한 인식에도 변화가 생겨 났다. 그렇지만 동아시아 불상은 19세기 중반까지도 유럽인들이 생각하는 조각의 판테온에 입성하지 못했다. 1845년에 제임스 스테파노프(James Stephanoff, 1786-1874)가 그린 <태초부터 피디아스 시대까지의 조각과 회화 미술작품들의 조합>에는 힌두와 자바 조각에서부터, 페르세폴리스와 바빌론의 조각, 초기 그리스의 조각에 이르기까지 돌로 만들어진 고대의 조각이 위계에 맞추어 배열돼있다(Fig. 4).15 그러나 여기에선 한국은 물론 그보다 먼저 서구에 알려졌던 중국이나 일본의 불상도 찾아볼 수 없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 동아시아 불상은 이국적 취향에 부합하는 오브제, 동양 고대 종교와 문명의 물적 증거, 원주민들이 만들어낸 비교적 좋은 조각 등 여러가지 분류체계 사이를 유동하고 있었다. 불상의 위치와 위상의 유동은 당시 유럽의 문화 중심지였던 파리 한복판에서 대중들에게 불상을 공개했던 체르누스키박물관과 기메박물관의 전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Fig. 3.

우상을 숭배하는 티베트인들, Tibetans Worshipping Idols. After Athanasius Kircher, China Illustrata (1667), p. 72

Fig. 4.

<태초부터 피디아스 시대까지의 조각과 회화 미술작품들의 조합>, An Assemblage of Works of Art, from the Earliest Period to the Time of Phydias. James Stephanoff. 1845. Watercolor. 74.3×62.2cm. The British Museum

앙리 체르누스키(Henri Cernuschi, 1821-1896)와 에밀 기메(Émile Guimet, 1836-1918)는 동양의 고대 문명과 종교에 대한 깊은 관심에서 출발해, 아시아 여행을 통해 방대한 규모의 컬렉션을 구축한 동양 미술품 수장가였다. 두 사람은 메이지시대 초기 廢佛毁釋의 위기에 처한 일본의 사찰들을 돌며 불교 유물을 수집하거나 몰락한 무사들이 헐값에 내놓은 물건 등을 사들일 수 있었다. 체르누스키는 1873년 파리 산업궁(Palais de l’Industrie)에서 ‘동아시아 예술’(Arts de l'Extrême-Orient)이라는 제목 아래 자신의 소장품 일부를 전시했다. 그는 이 전시가 끝난 후 저택박물관 형태의 공간을 신축하여 1875년부터 본인이 수집한 동아시아 유물을 전시했다. 이 건축물과 체르누스키의 미술 컬렉션은 그의 사후 파리시에 기증됐고, 1898년에 파리시립박물관으로서 재개관했다. 체르누스키박물관에서 대중의 관심을 끈 곳은 2층에 있는 청동기와 불상전시실이었다. 이곳에서 불상은 관람객들이 동서양 문명의 차이와 유사점을 체험할 수 있도록 전시됐다(Fig. 5).16, 기메의 불상 수집 역시 고대 종교에 관한 관심에서 촉발됐다. 그는 1876년에 아시아 종교를 연구하기 위해 파견된 프랑스 정부의 공식 사절단의 일원으로 중국, 일본, 인도 등지를 여행했다. 기메는 아시아 여행에서 구매한 수집품을 1878년의 파리 만국박람회의 특별 전시에서 선보였으며 이듬해 리옹에 ‘동양종교박물관’을 표방한 기메박물관을 설립하여 전시했다. 기메박물관은 1889년에 파리로 이전하여 재개관했다. 파리의 기메박물관은 지정학적 출처에 따라 유물들을 분류해 전시실을 꾸리긴 했으나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된 고전시대의 조각상들과 마찬가지로 미학적 관점에서 불상을 전시했다는 점이 주목된다(Fig. 6).17

Fig. 5.

체르누스키박물관의 청동 유물 전시실, Display of the Bronze Gallery of the Musée Cernuschi. Photograph. Mid-1890s. Musée Cernuschi

Fig. 6.

기메박물관 일본실 전시, Display of the Japan Gallery of the Musée Guimet. Photograph. 1903

체르누스키박물관과 기메박물관은 전시를 통해 불교의 교리와 사상을 시각화한 불상이 속한 곳은 민속학박물관이 아니라 ‘종교박물관’ 내지 ‘아시아박물관’이라는 메시지를 던졌을 것이다. 체르누스키와 기메가 아시아를 여행하던 당시 한국은 아직도 서구인은 발을 들일 수 없는 미지의 나라였다. 한국 불상의 수집은커녕 당시 유럽에서 붐을 일으켰던 중국 취미나 일본 취미에 비견할 만한 한국 취미조차 생겨날 수 없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개항 직후 시작된 서구인들의 한국유물 수집은 민속품에 집중돼 있었다. 그 외에 서구인들이 고려자기를 수집한 사례들도 간혹 확인되나 불상은 결코 주요 수집품목이 아니었다. 이점에서 프랑스의 민속학자이자 탐험가인 샤를 바라(Charles Varat, 1843-1893)의 수집품은 이례적이며, 당시 프랑스 지식인 사회의 불교와 불상에 관한 문화적 관심을 반영한다. 바라는 1888년에 프랑스 문교부의 요청으로 약 6주에 걸쳐 조선을 탐사하고 “조선 토산품의 모든 견본”이란 관점에서 유물을 수집했다.18, 바라의 수집품에는 통일신라시대의 소형금동불, 고려 말 조선 초에 조성된 <금동천수관음보살상>, 조선시대의 <목조석가모니여래좌상> 등 다양한 시대와 도상의 불상이 포함돼 있다(Fig. 7).19, 그의 수집품은 1889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주 전시장이었던 트로카데로 궁(Palais du Trocadéro) 내의 인류학 및 민족학 전시실에서 처음으로 전시됐고 1891년에는 기메박물관으로 이관되기 시작했다(Fig. 8).20, 그러나 1893년에 문을 연 기메박물관 한국실 전시에서 불상이 소개된 방식은 일본이나 중국의 불상과는 달리 여전히 “민속 전시회”이자 “민족지적 전시”라고 불릴 만한 것이었다.21

Fig. 7.

<목조여래좌상>, Buddha. 15th-16th centuries. Wood. H. 61cm. Musée Guimet. After Cambon, L'Art de Coréen au musée Guimet, Pl. 15

Fig. 8.

1889년파리만국박람회바라의컬렉션전 시 광경, Display of Varat’s collection at Exposition Universelle of 1889.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동아시아 불상은 1900년을 전후로 한 시기에 이르러서야 유럽과 미국, 그리고 이들에게 적극적으로 자국의 미술을 선전했던 일본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수집하고 전시할 만한 것으로 새롭게 인식됐다.22, 19세기 말에 이르면 중국에서도 王懿榮(1845-1900)이나 端方(1861-1911) 같은 골동품 애호가들이 불상을 수집하기 시작했으나 일본에서와 같은 官 주도의 불상 재발견 현상은 찾아볼 수 없다.23, 다시 말해, 불상의 미술품으로서의 재맥락화는 메이지시대 일본이 서구와의 관계 속에서 자국의 불상을 ‘조각’이자 ‘나라의 精華’[國の精華]로 재발견하고 가치를 부여했던 경험과 떼어놓고 이해할 수 없다.24, 이 점에서 ‘일본미술사’가 유럽과 미국에 대한 자화상으로서 그려졌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25, 조선미술사는 그렇게 형성됐던 일본미술사와의 관계 속에서 설정됐기 때문이다.26

폐불훼석과 그 부산물인 외국인들의 일본 고미술품 유출은 메이지유신 이후 19세기 후반에 걸쳐 일본이 대내외적으로 추진했던 미술정책과 문화재 행정의 기폭제 중 하나로 작용했다. 일본 정부는 폐불훼석에 대한 반성에서 1871년에 ‘古器物保存方’을 시행했고, 1872년 이래로 전국 각지의 古社寺에 조사원을 파견하여 소장 문화재를 조사하여 작자와 연대를 비정하고, 가치를 판단하여 등급을 매겼다. 메이지시대 일본미술사 구축에 큰 역할을했던 어네스트 페놀로사(Ernest Fenollosa, 1853-1908)와 오카쿠라 가쿠조(岡倉覺三 혹은 天心, 1863-1913)도 이와 같은 고사사 조사의 멤버였다. ‘목록 만들기’와 ‘등급 매기기’가 중심이 된 이때의 조사는 이후 일본 문화재 조사와 보호 정책, 나아가 불상의 연구방법과 방향의 단서가 됐다.27, 불상은 메이지시대에 설립된 도쿄와 나라, 교토의 帝室博物館에서도 특별한 자리를 차지했다. 사찰을 벗어난 불상에는 종교적 의미를 대신하여 국민국가의 문화유산이라는 새로운 의미가 부여됐다.28, 이와 동시에, 일본 정부는 1862년 이래 주요 박람회에 빠짐없이 참여하며 서구에 자국의 미술을 선보였다. 일본은 1893년의 시카고 만국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에서 박람회 참가 역사상 처음으로 산업관이 아닌 ‘미술관’에 입성했다. 불상은 서구의 주요 미술 범주인 조각과 종교미술에 상응하며, 서구의 모델을 모방한 것이 아니기에 박람회라는 서구가 만든 틀 안에서 독창성을 지닌 미술품으로써 새롭게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40여 년에 걸쳐 관 주도로 국내외에서 진행된 일본미술 만들기는 1900년의 파리만국박람회를 위해 편찬된 『일본미술의 역사(Histoire de l’art du Japon)』와 이를 일본어로 번역한 『고본일본제국미술약사(稿本日本帝国美術略史)』의 출간으로 이어졌다. 오카쿠라가 편찬에 깊이 간여한 이 책에서 나라시대의 조각은 그리스의 조각과 비교됐다.29

일본과 중국 불상에 관한 서구의 새로운 관심은 이러한 일련의 과정과 연동하며 배태됐다. 미술품으로서 재발견된 불상은 1900년대에 들어서 미국의 미술관에 본격적으로 입성했다. 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가 오카쿠라가 기틀을 세웠던 보스턴미술관(Museum of Fine Arts, Boston)의 동아시아 불상 컬렉션이다. 오카쿠라는 1904년에 오랫동안 교분을 나눠왔던 윌리엄 비겔로(William S. Bigellow, 1850-1926)의 주선으로 보스턴미술관의 중국·일본 미술품을 감정한 후 고대불교조각 부문이 취약하다고 평가했다. 그는 1905년 중국·일본부의 자문으로서 보스턴미술관을 위해 일본 현지에서 일본 불상을 수집했고, 1906년에는 중국에서 35점의 중국 조각을 수집했다.30, 이 시기 미국에서 형성된 또 다른 주요 동아시아 불상 컬렉션으로 찰스 랭 프리어(Charles Lang Freer, 1854-1919)의 수집품이 있다. 그는 1904년 미국 정부에 수집품을 기증할 것을 약속했고, 이때부터 1919년에 세상을 뜰 때까지 앞으로 세워질 미술관, 즉 지금의 프리어갤러리(Freer Gallery of Art)를 염두에 두고 중국 불상을 수집했다.31, 프리어가 중국 불상 수집에 착목한 데에 페놀로사의 조언이 있었다는 지적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32, 오카쿠라가 보스턴미술관을 위해, 프리어가 워싱턴에 세워질 국립아시아미술관을 위해 미학적이고 역사적인 가치를 담보한 오래된 불상들을 수집하던 당시 한국 불상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구미에서 한국 불상은 여전히 민속학 혹은 민족지학의 관점에서 수집되고 있었다.33, 혹은 중국이나 일본 불상을 수집하는 과정에서 부수적으로, 더 정확히는 일본 불상으로 오인되어 수장됐다. 일례로 루브르박물관은 1903년에 일본인 미술품 중개상 하야시 다다마사(林忠正, 1853-1906)의 소장품인 <금동반가사유보살상>을 일본 불상으로 인식하고 구매했다(Fig. 9).34 이와 같은 인식은 오카쿠라에게서도 확인된다. 그가 1908년에 일본에서 수집했던 <약사여래입상>은 애초에는 일본 불상으로 오인됐다. 이와 같은 사례들은 우리나라 불상이 거래의 초기부터 일본이라는 프리즘을 거쳐 구미의 수장가와 미술관에 소개됐다는 점을 알려준다.

Fig. 9.

<금동반가사유보살상>, Pensive Bodhisattva. Gilt bronze. Ca. late 6th-7th centuries. H. 16.0 cm. Musée Guimet. After Cambon, L'Art de Coréen au musée Guimet, Pl. 8

Ⅲ. 李王家博物館의 佛像 수집과 제시

한국 불상의 본격적이고 조직적인 수집은 이왕가박물관의 설립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조선의 미술시장은 1905년에서 1910년에 이르는 짧은 기간 동안 비약적으로 규모가 커지고 거래량도 늘어났다.35, 이 시기 미술시장의 성장을 견인하고, 방향을 제시했던 것은 공적 권위와 구매력을 갖춘 이왕가박물관이었다. 1908년 1월부터 본격적으로 수집을 시작한 이왕가박물관의 컬렉션은 1912년 12월에 박물관 최초의 도록인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全2冊, 이하 『사진첩』으로 약칭)이 발간될 무렵에는 12,230점에 달했다(Fig. 10).36, 이왕가박물관은 설립 준비단계인 1908년 1월부터 8월까지는 고려시대 분묘에서 도굴되어 유통되던 고려청자 및 금속 유물을 주로 구매를 통해 수집했다. 박물관 개관 직후인 1909년에서 1910년 사이에는 서화를 주로 구매하여, 도굴품 중심의 고려 청자에서 舊家에 秘藏돼 있던 조선의 서화 부문까지 컬렉션의 범위를 확장했다. 이와 같은 수집 방향은 박물관 설립의 숨은 주체였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와 이를 실행했던 당시 宮內府 次官 고미야미호마쓰(小宮三保松, 1859-1935)의 개인적인 취향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37, 여기에서 이들의 개인적 취향이 메이지 일본이 근대화와 서구화의 과정에서 겪었던 일련의 변동 속에서 형성됐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수집의 실무는 박물관 설립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했던 고미야, 이토 통감의 인척이었던 事務官 스에마쓰 구마히코(末松態彦, 1870-1935), 시모고리야마 세이이치(下郡山誠一, 1883-?), 李鵬增(1874-?) 등이 담당했다.38

Fig. 10.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 Cover of the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이왕가박물관이 가장 활발하게 유물을 수집했던 1908년에서 1917년까지 10년간의 수집 경향을 분석한 결과에 의하면 불상은 전 시기에 걸쳐 꾸준히 입수됐으나, 각 해의 전체 수집 분량에서는 2% 내외에 불과할 정도로 비중이 크지 않았다.39,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인계된 과거 이왕가박물관 소장품, 즉 德壽品의 유물카드에는 구매 연도, 구매 가격, 골동품상의 이름 정도가 기록돼 있을 뿐 작품의 유래나 출처(provenance)에 대해서는 정보가 없다. 중요한 점은 주요 불상을 판매했던 골동품상이 박물관에 도자기를 납품했던 유력한 상인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이다.40 이들은 시마오카 다마키치(島岡玉吉), 야나이 세이치로(失内瀨一郞), 에구치 도라지로(江口虎次郞), 곤도 사고로(近藤佐五郞), 요시무라 이노키치(吉村亥之吉), 아오키 분시치(靑木文七) 등을 망라한다. 이 점은 당시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수집이 고려자기 거래를 통해 이미 형성돼 있었던 일본인 박물관 관계자들과 골동품상 사이의 네트워크를 통해 이뤄졌다는 점을 시사한다.

그런데 통감부 시절인 1909년에 구매 이외의 방법으로 불상을 수집하려던 정황이 있어 흥미롭다. 1909년 6월 『皇城新聞』에는 北漢山 中興寺에 소재한 불상 12구를 勅令으로 창덕궁 내 박물관에 移置하고, 그 절의 승려인 趙淵荷와 權豐谷 두 사람에게 金貨 五拾圜을 頒給했다는 내용이 보도됐다.41, 신문기사에 의해 박물관 전시를 위한 불상의 이동이 공론화되고, 그에 대한 금전적 대가에 관한 정보까지 유포된 것이다. 비록 몇 줄의 단신에 불과하나 예배의 대상에서 관람의 대상이자 금전가치로 환산되는 거래의 대상으로 바뀐 불상의 위상이 확연히 드러난다. ‘칙명’과 ‘반급’이란 형식 뒤에 자리한 전통적인 군주의 권위는 향후 사찰에 봉안된 불상들이 판매되거나 유출되는 것에 대한 조선인들의 거부감을 완화해 줬을 것으로 짐작된다. 같은 해 7월에는 고미야가 陛見禮와 御陪食을 위해 상경한 각도의 관찰사를 인도하여 동물원과 박물관을 관람시키고, 각지에 환임한 후에 관하의 군수에게 奇異한 陳列品을 收上하게 하라고 설명했다고 한다.42 기이한 진열품 속에는 불상도 포함됐을 것이다.

1909년 11월에 박물관이 공중에게 개방된 이후에도 수집 활동은 활발하게 이어졌다. 1910년 2월 궁내부 御苑事務局 博物館部는 “한국 미술 및 미술공예품 중 오래되고 더할 나위없이 뛰어난 물건과 역사상 참고가 될 물건”을 일본과 중국의 製作品과 함께 구입하겠다는 신문광고를 여러 차례 냈다.43, 그러나 골동품상을 통해 이와 같은 기준을 충족하는 불상을 구하기는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은 1911년 2월에 『每日申報』에 게재된 「博物館의 佛像買入」이란 단신에서 확인된다. 기사에 의하면 당시 스에마쓰는 “各地方 寺刹에 있는 불상과 기타 新舊各種物品을 다수 매입”하려 계획 중이었다.44, 앞서 살펴본 구미와 일본 컬렉터들의 사례가 말해주듯이, 현지에서 수준 높은 불상을 수집하려 한 것이다. 그렇지만 2년 후인 1913년에 스에마쓰가 발표한 「조선의 고미술보호와 창경궁박물관(朝鮮の古美術 保護と昌慶宮博物館)」이란 짧은 글로 보아 이 계획 역시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45, 『사진첩』이 발간된 직후 발표된 이 글은 지난 4년여간 박물관을 위해 유물을 수집했던 스에마쓰의 경험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스에마쓰는 먼저 박물관의 소장품 수집 추이를 회고하고, 각 미술 장르를 대표하는 한국미술품에 대해 평가를 남겼다. 불상에 관해서는 시대가 내려옴에 따라 점차 쇠퇴했다고 전제한 후 그 책임을 한국불교의 쇠퇴에 돌렸다. 한반도의 사찰을 돌아본 후 그가 도달한 결론은 석조 조각을 제외하면 미학적인 가치를 지니는 불상이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46 이 결론은 당시 사찰에 예배의 대상으로 봉안된 17세기 이후 조성된 조선시대 불상에 대한 평가와도 다름없다. 이 점에서 스에마쓰의 평가는 고대 불상에 대한 편향을 드러내는 동시에, 조선이 고대 불교문화의 찬란한 성취를 계승하는 데 실패했다는 동시대 官學者들의 식민 담론을 반영한다. 스에마쓰는 이왕가 박물관에 전시되거나 『사진첩』에 게재된 불상을 어떤 경로를 걸쳐 수집했는지는 함구한 채, 앞으로 한국적인 특징을 지닌 석조 조각을 수집하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이왕가박물관은 왜 “삼국시대, 신라통일시대의 작품과 관련 있는 중요한 彫像의 구입”에 힘을 기울였던 것일까? 그 단서는 1912년에 처음으로 출간된 『사진첩』의 편집체제에서 찾을 수 있다. 이왕가박물관은 1918년에는 3권으로 확장한 재판본을 발행했고, 1929년에는 불상부, 1932년에는 회화부와 도자기부를 각각 별권으로 다시 간행했다.47, 각각의 판본은 목차의 구성이나 내용의 증감, 수록작품 등에서 크고 작은 변화를 보여주나 모두에는 박물관의 설립과정을 정리한 고미야의 「緖言」과 저자를 밝히지 않은 불상에 관한 「槪說」이 공통적으로 실려 있다. 고미야는 “이왕가私設박물관의 작업은 지금까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던 조선의 각종 미술품을 한 장소에 모아둔 것에 불과하다. 조선의 미술공예에 관한 체계적 연구는 뒷날로 미루지 않을 수 없다.”라고 전제한 뒤, 이 도록은 “연구 자료를 제공하는 동시에 好古家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애써 겸양을 표했다.48 그러나 이 사진첩의 출간은 편년과 양식적 진화라는 근대 미술사의 틀 안에서 한국 불상이 서술되고 가치를 부여받는 사실상 최초의 순간이기에 그 중요성을 간과할 수 없다. 본고의 논의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점은 초판본과 재판본에서 불상이 제1책의 맨 앞에 전면적으로 배치됐다는 점이다. 별권으로 간행된 제3판에서도 불상부가 회화부와 도자기부에 앞서 가장 먼저 출간됐다. 이와 같은 배열은 불상보다는 고려자기가 시장에서 주목받았다는 사실이나 사찰에 봉안된 불상에 관한 스에마쓰의 야박한 평가 등을 떠올릴 때 다소 의아하다. 이토록 신중하게 계획된 출판물의 서두에 불상이 전진 배치된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세 판본에 수록된 불상들은 도합 72점으로 이왕가박물관의 전체 불상 컬렉션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나, 이왕가박물관이 비교적 일관된 관점에서 불상의 시대별, 도상별 구성을 안배하여 사진첩을 구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먼저 초판본 불상 부문을 살펴보면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시기에 조성됐다고 연대를 비정한 불상 47점과 불감 1점, 도합 48점의 유물이 시대순에 따라 수록돼 있다.49, 구체적으로는 삼국시대 불상 11점, 통일신라 시대 불상 23점, 고려시대 불상 11점이 실려 있고, 조선시대의 불상은 3점이 실려 있다. 도상적으로는 아미타여래가 22점으로 절반 가까이 되며, 관세음보살상 9점, 약사여래상 5점, 석가여래상 4점, 여의륜관세음상 3점, 대일여래상·천인상·삼존여래상·세지보살상·주자가 각각 1점씩을 차지한다. 아미타여래상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는 施無畏印과 與願印을 결한 소형 금동불을 모두 아미타여래로 비정했기 때문이다. 재판본 불상 부문에는 모두 43점의 불상이 수록됐다. 이왕가박물관은 이들을 삼국시대 12점, 통일신라시대 16점, 고려시대 12점, 조선시대 3점으로 편년했기 때문에 시대적 구성비는 초판본과 대동소이하다. 도상적으로는 아미타여래상 11점, 관세음보살상 16점, 약사여래상 4점, 석가여래상 3점, 여의륜관음상 3점, 대일여래상 2점, 천인상·삼존불상·세지보살상·주자가 각각 1점이다. 초판본에 수록된 소형 금동불 중 완형이 아니거나 보존상태가 좋지 않은 것, 그리고 유형적으로 거의 동일한 것들이 배제됐다.50, 빈자리는 통일신라시대의 소형 금동불 및 고려시대의 관세음 보살상으로 채워졌다.51, 1929년에 출간된 『사진첩』 불상부에는 삼국시대 12점, 통일신라시대 20점, 고려시대 12점, 조선시대 4점 도합 48점의 불상이 수록되어 통일신라시대의 비중이 약간 더 높아졌다.52, 이 중 초판본이나 재판본에 수록되지 않았던 불상은 모두 14점이다.53 도상적으로는 아미타여래상 19점, 관세음보살상 12점, 약사여래상 6점, 여의륜관세음상 3점, 석가여래상 3점, 대일여래상 2점, 세지보살상·보살상·주자 각 1점의 분포를 보인다.

세 번에 걸쳐 연속적으로 수록된 불상들은 이왕가박물관이 본 불상 컬렉션의 중심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그중 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의 소형 금동불이나,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으로 비정된 <鐵釋迦如來>처럼 대형의 불상도 있다(Figs. 1, 11).54, 도판 해설에 의하면 이 불상은 경기도 광주 부근의 밭두렁에서 수년간 풍설의 박해를 받으며 금빛이 벗겨지고, 허리 아래는 땅속에 묻혀 부식이 진행되던 것을 박물관으로 옮겨 진열할 때 응급으로 수보했다고 한다. 당대의 유물 중 석굴암의 석불 이외에 이처럼 규모가 크고 우수한 것은 없다는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한편 초판본에서는 釋迦如來, 재판본과 불상부 별권에서는 大日如來로 비정된 대형 석조 불상은 스에마쓰가 수집을 희망했던 한국적 특색을 지닌 석조 조각의 표본으로 보인다(Fig. 12).55, 선정된 불상 중 반가사유상 3점은 일본 불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고대 불상을 중시한 박물관의 시선을 여실히 드러낸다. 의자에 걸터앉아 오른손을 뺨에 대고 생각에 잠긴 보살의 도상은 3세기경 인도에서 창안됐으나, 5-7세기 동아시아 삼국에서 광범위하게 유행했다. 삼국시대의 <金銅如意輪觀音>과 또 다른 <金銅如意輪觀音>은 지면에서도 특별한 취급을 받았다(Figs. 13, 14). 후자는 『사진첩』 재판본에서 유일하게 컬러사진으로 재현된 불상이며,56, 불상부에서는 이 두 불상에 한해 정면, 측면, 배면 3컷의 도판이 게재됐다. 무엇보다도 전자의 <金銅如意輪觀音>은 도판 설명에서 ‘推古式’ 불상의 원형으로서 제시됐다는 점이 주목된다(Fig. 13).57

Fig. 11.

<鐵釋迦如來>, “Iron Śākyamunī Buddha.”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23

Fig. 12.

<石刻釋迦如來>(右), “Stone Carving of Śākyamunī Buddha” (right).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33

Fig. 13.

<金銅如意輪觀音>, “Gilt-bronze Cintāmaṇi Wheel Avalokiteśvara.”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7

Fig. 14.

<金銅如意輪觀音>, “Gilt-bronze Cintāmaṇi Wheel Avalokiteśvara.”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9

스이코식은 일본 스이코천황(재위 592-628)의 시대, 지금은 飛鳥시대로 지칭되는 시기의 미술 양식을 일컫는 용어이다. 스이코시대는 오카쿠라가 1890년부터 1891년에 걸쳐 東京美術學校에서 개설했던 최초의 일본미술사 강의에서 설정한 ‘미술사’ 상의 시대이자 일본 미술의 시작으로 보았던 시기이다.58, 이 시기는 백제에서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후 처음으로 불교 사원과 미술이 조영된 시대였다. 따라서 法隆寺로 대표되는 ‘스이코식’ 불교미술에서는 삼국시대 한국 불교미술의 영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여기에서 오카쿠라와 그의 스승인 페놀로사가 만들어낸 일본미술사의 틀 안에서 불교와 불교미술의 위치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들은 서구의 사상적 토대인 기독교에 필적할 수 있는 아시아의 사상으로 불교를 발견했고, 그 사상의 시각적 구현으로서 불상을 내세웠다. 앞서 언급했듯이, 오카쿠라는 일본의 고대 불상이야말로 고대 그리스 조각에 필적할 만한 조각이라고 주창하며 불상에 미술품으로서의 가치를 적극적으로 부여했다.59, 이와 같은 미술사의 틀 안에서는 인도에서 창안된 불상이 중국과 한국을 거쳐 일본에 전파됐고, 한국 불상이 일본 불상에 양식적 영향을 주었다는 인식이 일본이 자부한 문화적 우위에 아무런 상처를 입히지 못한다. 이제는 사라진 위대한 문명들과 그 사이의 매개체였던 조선에서 불교와 불상은 이미 스러졌고 그 가장 진전된 형태의 미술은 ‘아시아 문명의 寶庫’인 일본에 있다고 인식됐기 때문이다.60, 오히려 일본 고대 불교미술에 큰 영향을 미친 삼국과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우수함을 강조함으로써 이를 수용하여 만들어진 일본 불상의 뛰어남을 강조할 수 있었다.61

페놀로사와 오카쿠라가 설정한 일본미술사의 인식체계는 세키노 다다시(關野貞, 1868-1935)를 비롯한 일본 관학파들에 의해 고수됐으며, 이러한 입장이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사상적·이념적 지주가 됐다.62, 이상의 관점에서 보면 고대 일본 불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이 『사진첩』에 수록된 불상 중 과반수를 훌쩍 뛰어넘을 정도로 중시됐다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지 않다. 이 점에서 『사진첩』의 편집체제는 오카쿠라와 페놀로사가 초석을 다지고 일본 정부가 공인한 일본미술사의 틀 속에서 한국 불상이 이해되고 대내외에 제시된 양상을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그 틀 안에서 한국 불상은 중국, 더 멀리는 인도까지 연결되는 일본 불상의 양식적 근원 찾기 속 하나의 고리로서 이해됐다. 동시에 한국 고대 불상에 부여된 높은 가치는 조선불교와 조선왕조의 불가피한 쇠망이라는 관학자들의 담론 속에서 이해해야만 한다. 조선의 古蹟을 집중적으로 조사했던 세키노는 불교를 적극적으로 포용했던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가 한국 문화의 황금기였으며, 고려는 이미 쇠망이 시작된 시기이자 조선은 국운이 전적으로 쇠퇴한 시대로 봤다.63, 이와 같은 논리는 1915년에 고미야가 발표했던 「조선예술 쇠망의 원인과 장래(朝鮮藝術衰亡の原因及將來)」에서도 확인되듯이 당대의 일본인 최고위층 관료들과 지식인, 미술 소장가들에게 널리 공유되고 있었다.64, 『사진첩』의 구성은 불상의 개설에 보이는 “불상 제작의 우열로 미술 전반의 상태를 알 수 있다.”는 말에서 드러나듯이, 통일신라시대를 정점으로 한 불교미술이 쇠퇴함에 따라 조선미술도 하강했다는 일제의 역사관을 시각적으로 충실히 재현했다.65

Ⅳ. 李王家博物館 佛像 컬렉션의 公認

이왕가박물관의 가장 중요한 수집 방법은 미술시장에서의 구매였다. 1908년에 박물관에 부임했던 시모고리야마의 증언에 의하면 고미야는 매일 아침 골동상의 물건을 보고 감정한 후에 사들였으며, 본인 역시 매일같이 골동상에 출근했다고 한다.66, 이로 인해 이왕가박물관의 소장품은 조선총독부의 자체적인 고적 조사와 발굴을 통해 소장품 일부를 확보한 조선총독부박물관의 그것과는 대비하여 이해돼 왔다. 그러나 일견 궤적을 달리하는 이왕가박물관의 수집 활동과 그 결과물인 불상 컬렉션 역시 『朝鮮古蹟圖譜』(全15冊)를 통해 조선 총독부의 치적으로서 대내외에 제시됐다는 점이 주목된다. 제1대 조선 총독인 데라우치마사타케(寺內正毅, 1852-1919)는 세키노의 조사를 바탕으로 『조선고적도보』를 발간하도록 추진했다. 『조선고적도보』는 일본 식민통치가 거둔 거대한 성과로 국제사회에 널리 선전됐다. 데라우치가 비서관실에 『조선고적도보』를 보관해 두고 내외빈에게 직접 서명하여 발송해줬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다.67 이왕가박물관과 조선총독부박물관의 성격을 대비해서 보는 과거의 시각에서 벗어나, 이왕가박물관 중심부의 일본인 관료들이 총독부의 고적 조사를 담당했던 관학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었고, 조선미술사의 캐논 형성에 어떻게 직간접적으로 동참했는지 그 전개 과정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東京帝大 造家學科 교수였던 세키노가 조선의 고건축과 유적을 처음으로 조사한 것은 1902년의 일이었다. 이후 세키노는 주기적으로 한국을 방문하며 조사를 진행했고, 한국미술에 관한 강연과 저술 활동도 병행했다. 1909년 11월 23일 종로 廣通館에서 열렸던 세키노와 고적조사 사업의 조수 야쓰이 세이이쓰(谷井濟一, 1881-1959), 구리야마 준이치(栗山俊一)의 강연은 이후 度支部에 의해 『韓紅葉』이란 책으로 출간됐다.68, 세키노의 논문은 삼한시대, 삼국시대, 통일신라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역사상의 시기를 구분하고, 이 체계 속에서 대표적인 건축물과 유물을 통해 한국미술을 논의한 본격적인 미술사 연구이다.69, 세키노는 이 논문에서 한국의 삼국이 남북조시대의 중국과 아스카시대의 일본을 매개했다고 논의했다. 일본의 法隆寺, 法起寺, 法輪寺 堂塔과 中宮寺, 廣隆寺 등에 보존된 다수의 불상을 통해 당시 삼국의 예술 양식과 그 발달 여하를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삼국시대와 아스카시대 일본미술 사이의 친연성을 강조했다.70, 이 책에는 조사 당시에 야쓰이가 촬영한 총 72점의 사진이 삽도로 수록돼 있어서 주목된다. 연대 순서에 따라 별도의 소제목 없이 3점, 선사시대 1점, 삼국시대 8점, 통일신라시대 10점, 고려시대 20점, 조선시대 30점의 사진이 실렸다. 세키노가 문화의 절정기로 꼽은 통일신라시대 유물과 유적의 사진이 적게 실리고, 고려와 조선시대의 그것이 훨씬 큰 수량을 차지하는 것이 눈에 띈다. 당시 세키노는 건축학적 견지에서 조사를 추진했기에 유존하는 목조건축의 사진을 우선으로 게재했던 것 같다. 이 점은 여기에 게재된 조선시대 사진 30점 중 무려 18점이 목조건축이란 데서 확인된다. 또한, 전체 72점의 사진 중 마애불이나 전각 안에 봉안된 불상 외에 독립된 불상들의 사진은 모두 3점이 실렸는데 그중 2점이 고미야의 소장품을 촬영한 것이어서 주목된다. 삼국시대의 유물 중 第12圖 彌勒銅像(小宮三保松氏藏)이 포함됐고, 통일신라시대의 유물로 第22圖 小銅佛三驅 (小宮三保松氏藏)가 소개됐다.71, 세키노는 특히 고미야 소장의 소동불 3구를 “남북조, 아스카시대와 삼국시대의 연쇄작용의 귀중한 표본”이라고 논의하며 중요하게 다뤘다.72, 이 두 점의 사진은 고미야가 세키노에게 개인적인 소장품의 조사와 촬영을 허락할 만큼 두 사람 사이에 교분이 두터웠다는 사실을 시사한다.73 이들의 교류와 세키노의 학술적 권위를 고려할 때, 『한홍엽』에서 간취되는 세키노의 시각이 1910년대에 고미야의 주도 아래 전개된 이왕가박물관의 불상 수집 방향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불상이 공식적으로 대내외에 소개된 것은 1912년에 출간된 『사진첩』 초판본을 통해서였다. 수집된 불상들이 『조선고적도보』에 전면적으로 게재됐다는 사실은 이들이 이왕가‘사설’박물관의 소장품이라는 종래의 위치를 넘어서 조선총독부의 치적으로서 새로운 가치를 부여받고,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표본으로써 조선미술사의 서술 체계 속에 흡수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1915년부터 1935년에 걸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는 선사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미술의 역사를 시간의 흐름에 맞추어 유적과 유물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구성됐다. 모두 6,330점의 유적과 유물 사진이 실린 이 시리즈의 편찬과 감수는 세키노가 주도했다.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불상은 1916년 출간된 『조선고적도보』 제3책의 말미에 별도로 마련한 ‘三國時代佛像’이란 부분에서부터 등장한다(Fig. 15).74, 여기에는 조선총독부 소장의 <동조미륵보살상>(圖1361-1364)과 이왕가박물관 소장 <동조미륵보살상>(圖1365-1366)을 필두로 모두 30점의 불상과 1점의 광배가 실려 있다(Fig. 16). 총독부 소장품과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이 각각 10점씩 실렸고, 고미야의 소장품은 <동조미륵보살상>(圖1376), <동조석가여래입상>(圖1380-1381), <동조석가여래입상>(圖1382-1383), <동조금강역사상>(圖1402)의 4점이 실렸다. 이 외에도 미야케조사쿠(三宅長策) 소장의 <동조미륵보살상>(圖1367-1368) 1점, 야마네 마사쓰구(山根正次) 소장 불상 2점(圖1388, 圖1394-1395), 가와라 겐노스케(河原健之助) 소장 불상(圖1385) 1점이 실렸다(Fig. 17).

Fig. 15.

<朝鮮古蹟圖譜>, Cover of the Chōsen koseki zufu, vol. 3, 1917

Fig. 16.

<金銅彌勒菩薩像>, “Gilt-bronze Image of Maitreya Bodhisattva.” After Chōsen koseki zufu, vol. 3, Pl. 1361

Fig. 17.

<銅造彌勒菩薩像>, “Bronze Image of Maitreya Boddhisattva.” After Chōsen koseki zufu, vol. 3, Pls. 1367-1368

1917년에 발간된 『조선고적도보』 제5책은 통일신라시대의 제2편에 해당하는 것이다. 이 책은 조선총독부에서 조사한 경주의 왕릉과 출토품에서 시작하여 석굴암을 거쳐 경북 각지의 사찰과 폐사지, 경주 남산에 소재한 여러 불상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출처 혹은 소재지가 분명한 이들 불상의 뒤를 이어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철조석가여래좌상>(圖2001)부터 <동조관세음보살입상>(圖2138)까지는 조선총독부와 이왕가박물관, 그리고 개인 수장가들이 수집한 불상이 게재됐다. 이 133점의 불상 중 이왕가박물관 소장품은 42점, 총독부 소장품은 57점에 달한다. 고미야의 소장품은 2점이 수록돼 있다.75, 또한, 고적 조사 사업을 계획하거나 직접 참여했던 이들이 수장한 불상이 상당수 포함됐다. 우선 데라우치의 소장품이 8점,76, 세키노의 소장품 6점,77, 야쓰이의 소장품이 1점 실려 있다.78, 그 외에도 오카쿠라가 일본에서 수집했던 <동조약사여래입상>이나 당시 도쿄미술학교 교장이었던 마사키 나오히코(正木直彦, 1862-1940)가 수장한 불상도 1점 포함돼 있다.79, 일본에 있는 미술계 주요 인사들의 수장품까지 망라한 것이다. <동조약사여래입상>은 오카쿠라가 1908년 일본에서 구매한 것으로 그의 사후 장남인 오카쿠라 카즈오(岡倉一雄, 1881-1943)의 손을 거쳐 에드워드 홈즈(Edward Jackson Holmes, 1873-1950)에게 증여됐다(Fig. 18). 1932년 홈즈의 기증으로 보스턴미술관의 소장품이 됐다. 이 일련의 과정에서 『조선고적도보』가 이 불상의 미술사적 가치를 높이는 보증서가 돼주었으리란 점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Fig. 18.

<銅造藥師如來像>, “Bronze Image of Bhaiṣajyaguru Buddha.” After Chōsen koseki zufu, vol. 5, Pl. 2018

『조선고적도보』 제7책은 고려시대의 제2편으로 1920년에 간행됐다. 각지의 불교사찰과 불상에 이어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고려시대 <동조석가여래좌상>(圖3201), <동조관세음보살좌상>(圖3202), <동조관세음보살입상>(圖3203), <동조세지보살입상>(圖3204)이 실렸다. 고려시대 분묘에서 발견된 공예품을 다룬 『조선고적도보』 제9책은 1929년에 간행됐는데 여기에는 <小佛像>(圖4283)이 1점 실렸다. 『사진첩』 초판본에서 다른 소형 금동불과 함께 제시됐던 이 불상은 여기에서는 조선총독부 소장의 小佛龕과 같은 페이지에 실렸다(Figs. 19, 20).80 명시적인 설명 없이도 그 기능을 유추할 수 있도록 재분류하여 배치한 것이다. 흥미롭게도 『사진첩』 초판본에서 조선시대 불상으로 소개됐던 3점은 『조선고적도보』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Fig. 19.

<小佛像>이 게재된 페이지의 레이아웃, Layout showing “Statuette of Buddha”(Pl. 4282). After Chōsen koseki zufu, vol. 9, p. 1257

Fig. 20.

<銀藥師如來>가 게재된 페이지의 레이아웃, Layout showing “Silver Bhaiṣajyaguru Buddha”(Pl. 40).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40

결과적으로 『조선고적도보』와 같은 출판물은 그 제도적 권위를 통해 출처가 모호한 이왕가박물관 불상 소장품을 공인해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고미야와 세키노처럼 미술시장과 고고유적에서 가장 먼저 좋은 유물을 접할 수 있었던 특권층이 소장한 불상에도 역사적 가치를 부여하여 차후 시장에서의 가치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으리라 추정된다. 출판을 전제한 세키노의 조사와 촬영, 그리고 감수를 거친 뒤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이 불상들은 이미 그 유래를 잃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한국미술사에 편입되어 저마다의 위치를 부여받았다.

Ⅴ. 결론

20세기 초 박물관이란 근대적 제도의 도입은 불상이 예경과 신앙의 대상이 아니라 수집, 전시, 감상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가장 주요한 動因이었다. 그러나 그간의 연구에서 한국 불상이 사찰과 사지라는 본래의 맥락을 벗어나 박물관이란 공간에서 미술품으로 탈바꿈하는 최초의 순간은 한 번도 논의되지 못했다. 또한, 한국 불상을 조직적으로 수집한 최초의 박물관이 이왕가박물관이란 점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기존의 한국미술사 연구에서는 이왕가박물관이 일제의 식민지적 정책으로 설립됐고 연구와 조사의 기능이 미비했다는 이유로 박물관의 설립과 운영이 한국미술사에 미친 영향이 극히 제한적이라고 봤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본고에서 밝혔듯이 궁궐 안에 불상을 안치하여 공중에게 전시한 것은 분명 불상의 위치 이동을 넘어 위상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사건이었다. 이왕가박물관의 설립 주체가 누구였건 간에 존재하기 시작한 박물관은 미술시장은 물론 근대적인 미술 장르의 이식, 그리고 해방 후 한국불교조각사의 연구 방향 설정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예컨대 한국 불교조각사와 국립중앙박물관의 불상 소장품을 대표하는 명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국보83호 반가사유상의 연구사를 들 수 있을 것이다(Fig. 14). 1912년에 이왕가박물관이 일본인 상인에게 구입한 이 불상은 이왕가박물관의 다른 소장품과 마찬가지로 그 출처나 유래가 불명확하다. 잃어버린 출처는 이 상을 둘러싼 열띤 논의가 오랫동안 제작국의 비정으로 수렴되는 결과를 낳았다. 해방 후 한국불교조각사 연구에 착수했던 한국인 연구자들은 이왕가박물관의 약탈적인 수집 활동이 남긴 부정적인 유산을 극복하는 것을 첫 번째 과제로 삼았던 것이다.

1912년부터 1929년에 걸쳐 발간됐던 『사진첩』의 세 가지 판본에 실린 불상은 고작 70여점을 상회하기에 이왕가박물관 불상 컬렉션을 온전히 대표한다고는 보기 어렵다. 그러나 여기에 보이는 일관된 시대별, 도상별 분포에 관한 분석과 평가를 통해, 근대기 일본이 구축한 일본미술사와 동양미술사에 있어서 한국의 불상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를 밝히기 위한 고리로서 이들의 의미를 추출할 수 있었다. 이왕가박물관은 막후에서 설립을 주도하고 한일 강제병합 이후 실질적으로 운영을 주도했던 일본인 통치층이 메이지유신 이후 내재화했던 불교와 불상에 관한 관념을 구현한 제도이자 전시 공간이었다. 메이지시대 일본에서 불교는 ‘동양’을 한데 묶는 이상으로서 발견됐고, 불상은 미술 나아가 문명 발달의 척도로서 발견됐다. 이 두 개념은 이왕가박물관이 한국 불상을 수집, 분류, 전시하고, 수집한 불상을 대내외에 제시하는 데 근간이 됐다. 당시 일본인 식민지 관료들과 관학자들이 총력을 기울여 발간한 관찬 편찬물은 일본이 수립한 미술사의 틀 안에 조선미술을 위치시키고, 이를 국제 사회와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알리는 선전의 도구이자 장이었다. 『사진첩』과 『조선고적도보』는 일제가 수집하고 가치를 부여한 조선의 미술을 사진과 함께 수록한 도록이자 미술사적인 시기 구분 속에서 개별 유물의 위치를 비정하고 역사적 가치를 부여한 미술사적 간행물이었다. 본고에서는 『조선고적도보』의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이왕가박물관 소장의 불상이 공인받고 역사적인 가치를 부여받는 과정을 복원했다. 이를 통해 대부분 불법적이고 모호한 유출 과정을 통해 그 출처를 이미 잃어버린 이왕가박물관이나 일본인 수장가들의 불상들이 『조선고적도보』 속에 구현된 조선미술사의 체계 속에 편입되면서 새로운 미술사적 위상을 획득했음을 밝혔다. 관찬 편찬물이자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조선고적도보』의 학술적 권위는 여기에 수록된 유물들이 미술시장에서 재차 거래될 때 시장가치를 높여주는 제도적 권위로서 작용했을 것이다.

Notes

1)

宋起炯, 「‘창경궁박물관’ 또는 ‘李王家박물관’의 연대기」, 『역사교육』 72(1999), pp. 169-198 참조.

2)

일본 식민관료의 주도로 박물관이 설립됐다고 본 의견은 睦秀炫, 「일제하 李王家博物館의 식민지적 성격」, 『美術史學硏究』 227(2000), pp. 81-104; 박소현, 「帝國의 취미: 李王家博物館과 일본의 박물관 정책에 대해」, 『美術史論壇』 18(2004), pp. 143-169; 이성시, 「조선왕조의 상징 공간과 박물관」, 임지현·이성시 엮음,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휴머니스트, 2004), pp. 265-298. 박물관의 개방과 서화 소장품 형성에 있어서 순종과 조선인 관료들이 주체적인 구실을 했다는 의견은 박계리, 「他者로서의 李王家博物館과 傳統觀: 書畵觀을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40(2003), pp. 221-248.

3)

박소현, 「‘고려자기’는 어떻게 ‘미술’이 되었나: 식민지시대 ‘고려자기열광’과 이왕가박물관의 정치학」, 『사회 연구』 11(2006), pp. 9-45; 손영옥,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수집 목록에 대한 고찰」,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5(2018), pp. 263-290.

4)

이에 관한 시론적 접근으로는 Seunghye Lee, “The First Korean Museum and the Categorization of ‘Buddhist Statues’,” Sungkyun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21, no. 1(forthcoming). 본고는 필자가 위의 영문 논문에서 천착하지 않은 주제를 추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고찰한 후속 연구이다.

5)

순수미술로서 조각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형성된 역사적 개념이다. Stanley Abe, “Sculpture: A Comparative History,” in Jaś Elsner, ed., Comparativismin Art Histor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17), pp. 94-108 참조.

6)

한국 불상은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과 일본인들에 의해 수집되기 시작했으며, II장에서 후술하겠지만 서구인에 의해서는 이미 1890년대에 파리의 박람회와 박물관에서 전시된 바 있다. 자율적인 국외 박람회 출품은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 전시가 최초로 알려져 있으며, 국내에서는 1907년 가을에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銅峴에서 열렸던 경성박람회에 출품된 <금동불상>을 시초로 본다. 한편, 한국 불상이 미술품으로서 연구된 것은 1897년에 小衫榲邨이 『國華』에 발표한 3부작 논문 「上古中古に涉ゐ美術品の支那び朝鮮に關係あゐ略說」가 효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 불상을 주제로 삼은 본격적인 미술사적 연구는 1902년 關野貞의 고적조사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홍선표, 『한국근대미술사: 갑오개혁에서 해방 시기까지』(시공아트, 2009), pp. 45-46, p. 49, 300; 강희정, 「일제강점기의 조선 불교미술 조사와 복원-한국 불교미술 연구의 출발점-」, 『미술사와 시각문화』 9(2010), pp. 150-151.

7)

‘제도적 수요자’란 표현은 손영옥, 『미술시장의 탄생: 광통교 서화사에서 백화점 갤러리까지』(푸른역사, 2020), p. 140.

8)

왕실과 관계된 것은 궁내부 駐馬科에서 보낸 연과 갑옷 등에 불과하다. 이 점은 藤田亮策의 회고와 일치한다. 「宮內府出品」, 『皇城新聞』 1909년 10월 30일; 睦秀炫, 앞의 논문, pp. 85-89. 조선 왕실의 전통적인 수장품에 대해서는 황정연, 『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신구문화사, 2012) 참조.

9)

權藤四郞介, 『李王宮秘史』(京城: 朝鮮新聞社, 1926), p. 26.

10)

박소현, 앞의 논문(2006), pp. 16-18, 35-37; 박계리, 앞의 논문, pp. 237-239.

11)

關野貞은 1902년 7월 6일에 일본 공사관에서 주한 일본공사 林権助(1861-1939)가 수집한 古劍, 고려자기, 도기, 불상 등을 구경했다고 하며. 같은 해 8월 12일에는 부산에서 일본 영사의 소개로 한 好古家를 만나 각종 불상, 도기, 회화 등을 봤다고 기록했다. 関野貞研究会 編, 『関野貞日記』(東京: 中央公論美術出版, 2009), p. 118, 122.

12)

근대기 일본미술사와 한국미술사의 인식체계 형성 과정에서 양국 불상의 ‘탈맥락화’와 ‘재맥락화’ 현상은 강희정의 연구에서 선구적으로 고찰됐으며, 본고도 이와 같은 선행 연구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한국 불상의 재맥락화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에서 상세하게 분석됐다. 姜熺靜, 「일제강점기 한국미술사의 구축과 석굴암의 ‘再맥락화’」, 『先史와 古代』 33 (2010b), pp. 59-82.

13)

이왕가박물관의 일본인 관료들이 남긴 글에 관해서는 全東園, 「 「韓国文化財」形成過程に関する史的考察: 植民地期 「朝鮮文化財」 研究の成立と言説空間の形成」(東京外国語大学 博士学位論文, 2017), pp. 202-212 참조.

14)

양희정, 「세상의 끝, 아시아: 중세~근대 초 유럽이 그린 아시아의 종교와 관습」, 『東垣學術論文集』 16(2015), pp. 148-152.

15)

스테파노프는 1817년부터 1845년까지 영국박물관의 컬렉션에 영감을 받은 6점의 수채화를 제작했다. 시리즈의 마지막인 이 작품은 고전시대의 그리스조각을 미술의 정점으로 보는 19세기 중반 유럽 미술관의 시각을 선명히 보여준다. Ian Jenkins, “James Stephanoff and the British Museum,” Apollo 121(Mar., 1985), p. 179; 스탠리 아베, 「중국 조각의 근대적 순간」, 『美術資料』 82(2012), pp. 67-69.

16)

신상철, 「19세기 프랑스 박물관에서의 동양 미술품 수용 역사-앙리 체르누스키의 동아시아 여행과 파리 시립 아시아박물관의 설립 과정에 관한 고찰」, 『博物館學報』 38(2020), pp. 17-18.

17)

신상철, 「19세기말 프랑스 박물관 역사와 아시아 콜렉션: 동양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 『美術史學』 22(2008), p. 153; 崔婟銀, 「한국의 미술, 광통교에서 이에나로-프랑스의 한국유물 수집과 기메동양박물관의 한국실 형성-」(成均館大學校 석사학위논문, 2018), pp. 20-21.

18)

바라는 한양에 주재 중이던 프랑스 공사관 콜랑 드 플랑시의 조력으로 짧은 시간 동안 상당한 수준의 유물을 수집했다. 샤를 바라·샤이에 롱, 『조선기행: 백여 년 전에 조선을 둘러본 두 외국인의 여행기』(눈빛, 2001), p. 64; 신상철, 「19세기 프랑스 박물관에서의 한국미술 전시 역사: 샤를르 바라(Charles Varat)의 한국 여행과 기메박물관 한국실의 설립」, 『한국학연구』 45(2013), pp. 52-53.

19)

바라가 수집한 불상은 Pierre Cambon, L’Art de Coréen au musée Guimet (Paris: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2001), p. 12, 57-58, 71-72, 76, 78, 82, 84, 86-87, 97 참조.

20)

崔婟銀, 앞의 논문, pp. 43-48.

21)

기메박물관의 한국실 개관 전시에 관해서는 G. S., “Notes and Queries,” T’oung Pao 5, no. 1(1894), pp. 104-105; 崔婟銀, 위의 논문, pp. 61-64.

22)

구미의 박물관이나 컬렉터들이 불상을 미술품이란 인식 아래 수집하고 전시했던 움직임은 1900년대부터 포착되며, 중국 불상의 수집 붐은 1910년대부터 일어났다. Stanley Abe, “Collecting Chinese Sculpture: Paris, New York, Boston,” in Alan Chong and Noriko Murai, ed., Journeys East: Isabella Stewart Gardner and Asia (Boston: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2009), p. 433.

23)

스탠리 아베, 앞의 논문, pp. 66-67.

24)

‘나라의 精華’란 표현에 관해서는 岡倉天心, 「「國華」發刊の辭」, 『岡倉天心全集』 3(東京: 平凡社, 1979), pp. 22-28; 강희정, 『나라의 정화(精華), 조선의 표상(表象): 일제강점기 석굴암론』(서강대학교 출판부, 2012), pp. 15-27.

25)

高木博志, 「日本美術史の成立·試論-古代美術史の時代区分の成立」, 『日本史研究』 400(1995), pp. 74-98.

26)

다카기 히로시(高木博志), 「일본미술사와 조선미술사의 성립」, 임지현·이성시 엮음, 앞의 책, pp. 165-196.

27)

오카다 켄, 「中國 佛敎彫塑史 硏究의 回顧와 展望: 日本·韓國에 있어 中國 佛敎彫塑 硏究의 의미」, 『美術史論壇』 19(2000), pp. 142-144.

28)

Noriko Aso, Public Properties: Museumsin ImperialJapan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4), p. 31.

29)

노유니아, 「서구를 향한 일본미술 선전: 독자성과 오리엔탈리즘」, 『일본비평』 20(2019), pp. 103-108 참조.

30)

1905년에 수집된 불상과 그 전시에 관해서는 “Recent Acquisitions of the Chinese and Japanese Department,” Museum of Fine Arts Bulletin 4, no. 18(Feb., 1906), pp. 3-6; “Sculpture in the New Japanese Cabinet,” Museum of Fine Arts Bulletin 4, no. 19(Apr., 1906), pp. 11-14.

31)

Daisy Yiyou Wang, “Charles Lang Freer and the Collecting of Chinese Buddhist Art in Early-Twentieth-Century America,” Journal of the History of Collections 28(2016), pp. 1-16 참조.

32)

Abe, 앞의 논문(2009), p. 435.

33)

일례로 1902년에 라이프치히민속박물관이 구매한 쟁어(H. Sänger)의 컬렉션에는 삼국시대의 <금동보살입상>,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2구 포함돼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pp. 37-38.

34)

Cambon, 앞의 책, Pl. 8, p. 282.

35)

한국 근대기 미술시장의 형성에 관해서는 김상엽, 「한국 근대 미술사 연구와 한국 근대 미술시장사 연표」, 『東洋古典硏究』 46(2012), pp. 295-318 참조.

36)

小宮三保松, 「緖言」, 李王職 編,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 第1冊(京城: 李王職, 1912).

37)

고미야는 고려자기야말로 ‘한국미술의 精髓’라고 상찬했다. 小宮三保松, 「朝鮮の美術」, 『朝鮮』 3, no. 5(1909), p. 30.

38)

이붕증이 박물관 진열을 위해 고려사기 75점을 구매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李氏南行」, 『大韓每日申報』 1910년 1월 25일.

39)

이왕가박물관의 연도별 유물 구입 추이는 박계리, 앞의 논문, pp. 229-230 참조.

40)

이들의 도자기 판매에 대해서는 손영옥, 앞의 논문, pp. 267-268, 277-278.

41)

「佛像入舘」, 『大韓每日申報』 1909년 6월 24일. 중흥사는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축성된 북한산성의 중심도량이었다. 18세기 초에는 136칸에 이르는 대가람이었으나 1904년에 큰불이 나 절 대부분이 소실됐다. 1902년에 처음 조선을 조사하고 펴낸 關野貞의 보고서에는 화재 이전 중흥사의 주요 전각이 소개돼 있으나 불상에 관한 언급은 없다. 기사 속 12구의 불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후속 연구를 통해 추적하려 한다. 중흥사에 관해서는 關野貞, 『韓國建築調査報告』(東京: 東京帝國大學工科大學, 1904), pp. 200-202 참조.

42)

「博物園觀覽」, 『皇城新聞』 1909년 7월 21일.

43)

「陳列品購入公告」, 『皇城新聞』 1910년 2월 18일, 19일, 20일, 22일, 23일, 24일. 같은 광고가 2월 18일과 24일 『大韓民報』에도 실렸다.

44)

「博物館의 佛像買入」, 『每日申報』 1911년 2월 4일.

45)

末松熊彦, 「朝鮮の古美術保護と昌慶宮博物館」, 『朝鮮及滿洲』 69(1913), p. 126.

46)

末松熊彦, 위의 글, p. 126.

47)

재판본에는 초판본 발행 이후 박물관이 사들인 신자료 및 구미 인사의 이해를 위한 영문번역이 추가됐고, 장르별 개설 외에 통사적 서술인 總論이 새로 실렸다. 李王職 編,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 上(京城: 李王職, 1918) 참조.

48)

小宮三保松, 앞의 글(1912). 해석은 宋起炯, 앞의 논문, pp. 173-174을 참조했다.

49)

몇몇 불상의 제작연대는 그동안 수정되기도 했으나 본고에서는 당대의 인식을 드러내기 위해 이왕가박물관의 편년을 기준으로 논의했다. 다만 도판의 캡션에서는 현재의 시대구분에 따라 신라시대란 표현은 통일신라시대, 이조시대란 표현은 조선시대로 바꾸었다. 한편 불상의 명칭이나 도상 비정은 사진첩의 표기를 따랐다. 예컨대 반가사유상은 일본에서는 奈良와 平安시대 이래 오랫동안 여의륜관음상으로 인식됐고 이와 같은 인식은 사진첩의 캡션에 반영돼 있다.

50)

『사진첩』 초판본 제1권 중 圖12 <銅阿彌陀如來>, 圖13 <金銅阿彌陀如來>, 圖14 <金銅藥師如來>, 圖16 <金銅阿彌陀如來>, 圖15 <金銅阿彌陀如來>, 圖17 <金銅觀世音菩薩>, 圖18 <金銅阿彌陀如來>, 圖20 <銅藥師如來>,圖21 <金銅阿彌陀如來>, 圖22 <金銅阿彌陀如來>, 圖25 <銅阿彌陀如來>, 圖26 <銅阿彌陀如來>, 圖28 <金銅阿彌陀如來>, 圖30 <銅阿彌陀如來>, 圖31 <金銅阿彌陀如來>, 圖32 <金銅阿彌陀如來>의 16점에 해당한다.

51)

『사진첩』 재판본 상권 중 圖9 <金銅阿彌陀如來>, 圖13 <金銅觀世音菩薩>, 圖14 <金銅阿彌陀如來>, 圖15 <金銅觀世音菩薩>, 圖16 <金銅觀世音菩薩>, 圖17 <金銅觀世音菩薩>, 圖18 <金銅觀世音菩薩>, 圖19 <金銅觀世音菩薩>, 圖20 <金銅觀世音菩薩>, 圖40 <挾貯觀世音菩薩>의 10점이다.

52)

사진은 모두 51점이 수록됐으나 그중 圖2-4 및 圖9-11은 같은 상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것이고, 圖40으로 수록된 <銅製觀世音菩薩>과 <銅製勢至菩薩>은 초판본과 재판본에서 각각 별도의 도판으로 제시됐던 것을 반영해 수량을 집계했다. 李王職 編,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 佛像ノ部』(京都: 李王職, 1929) 참조.

53)

『사진첩』 불상부 중 圖7 <金銅觀世音菩薩>, 圖17 <金銅阿彌陀如來>, 圖18 <金銅阿彌陀如來>, 圖20 <金銅阿彌陀如來>, 圖21 <金銅藥師如來>, 圖22 <金銅藥師如來>, 圖34 <金銅阿彌陀如來>, 圖36 <金銅大日如來>, 圖39 <銅製阿彌陀如來>, 圖44 <金銅菩薩像>, 圖45 <金銅阿彌陀如來>, 圖46 <人造石製觀世音菩薩>, 圖48 <木造阿彌陀如來>, 圖49 <木造阿彌陀如來>이다.

54)

『사진첩』 초판본 제1권 圖23, 재판본 상권 圖7, 불상부 圖30에 해당한다.

55)

『사진첩』 초판본 제1권 圖33, 재판본 상권 圖28, 불상부 圖31 참조.

56)

『사진첩』 재판본 상권 圖10 및 초판본 圖9와 불상부 圖9-11 참조.

57)

『사진첩』 초판본 제1책 圖7, 재판본 상권 圖7, 불상부 圖2-4 참조.

58)

오카쿠라의 시대 구분론에 대해서는 高木博志, 『近代天皇制の文化史的研究: 天皇就任儀禮·年中行事·文化財』(東京: 校倉書房, 1997), pp. 358-361.

59)

다카기 히로시, 앞의 논문, p. 170; 기노시타 나가히로, 「岡倉天心과 美術史」, 『美術史論壇』 9(1999), pp. 307-325.

60)

강희정, 「일본미술사 성립기의 인도미술 인식-메이지(明治)기에서 다이쇼(大正)기를 중심으로-」, 『人文論叢』 60(2008), pp. 177-179.

61)

강희정, 앞의 책, pp. 22-23, 41-43.

62)

다카기 히로시, 앞의 논문, p. 168.

63)

關野貞, 앞의 책; 關野貞, 「韓國藝術の變遷について」, 『韓紅葉』(京城: 度支部建築所, 1909), pp. 23-72.

64)

小宮三保松, 「朝鮮藝術衰亡の原因及其の將來」, 『朝鮮彙報』 no. 8(1915), pp. 12-19.

65)

「佛像」, 李王職 編, 앞의 책(1912) 참조.

66)

박소현, 앞의 논문(2006), p. 13.

67)

다카기 히로시, 앞의 논문, pp. 186-187.

68)

이 강연록은 1909년 가을부터 1910년 초에 걸쳐 진행됐던 세키노 그룹의 조사성과에 기초했다. 그 정식 보고서는 이듬해에 출간된 세키노의 『朝鮮芸術之研究』(京城: 度支部建築所, 1910)이다. 세키노는 『한홍엽』에 실은 글을 개고하여 정식 보고서에 다시 실었다. 1910년의 보고서의 내용과 한글 번역은 정인성, 『한국 고고학자가 다시 쓰는 『조선고적조사보고』-1909년과 1910년의 조사내용-』(경상북도·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20), pp. 8-151.

69)

강희정, 앞의 논문(2010a), p. 151.

70)

關野貞, 앞의 논문(1909), pp. 29-31; 정인성, 위의 책, p. 94; 車順喆, 「 『韓紅葉』과 일본인들의 한국문화 인식과정 검토」, 『한국고대사탐구』 11(2012), pp. 55-56.

71)

사진은 關野貞, 앞의 논문(1909), p. 12, 25.

72)

關野貞, 위의 논문, p. 31; 정인성, 앞의 책, p. 94.

73)

세키노의 일기에서는 1915년 7월 25일 이왕가박물관을 방문해 고미야를 만났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두 사람 사이의 교분은 고미야가 현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골동품을 매개로 이어졌다. 세키노는 1931년 3월과 9월에 逗子의 고미야 자택을 방문해 한국 회화와 중국 회화 및 銅器 등을 실견했다. 関野貞研究会 編, 앞의 책, p. 232, 646, 651.

74)

朝鮮總督府 編, 『朝鮮古蹟圖譜』 第3冊(京城: 朝鮮總督府, 1916), 圖1361-1407 참조.

75)

朝鮮總督府 編, 『朝鮮古蹟圖譜』 第5冊(京城: 朝鮮總督府, 1917), 圖2009, 圖2119.

76)

朝鮮總督府 編, 위의 책, 圖2036, 圖2037, 圖2058, 圖2072, 圖2073, 圖2074, 圖2080, 圖2081.

77)

朝鮮總督府 編, 위의 책, 圖2011, 圖2014, 圖2049, 圖2055, 圖2059, 圖2091.

78)

朝鮮總督府 編, 위의 책, 圖2045.

79)

朝鮮總督府 編, 위의 책, 圖2018, 圖2019.

80)

李王職 編, 앞의 책(1912), 圖40; 朝鮮總督府 編, 『朝鮮古蹟圖譜』 第7冊(京城: 朝鮮總督府, 1920), 圖42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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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博物館本官 陳列室 一部, Part of the galleries in the Main Building of the Museum. Postcard. 14.2×9.0cm. Acc. no. kuip 1197. Busan Museum

Fig. 2.

昌慶宮明政殿내佛像展示, Display of Buddha statues in the Myŏngjŏngjŏn Hall of Ch'anggyŏnggung Palace. Print from dry plate. 10.9×8.3cm. Acc. no. yuri konp’an 5139.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Fig. 3.

우상을 숭배하는 티베트인들, Tibetans Worshipping Idols. After Athanasius Kircher, China Illustrata (1667), p. 72

Fig. 4.

<태초부터 피디아스 시대까지의 조각과 회화 미술작품들의 조합>, An Assemblage of Works of Art, from the Earliest Period to the Time of Phydias. James Stephanoff. 1845. Watercolor. 74.3×62.2cm. The British Museum

Fig. 5.

체르누스키박물관의 청동 유물 전시실, Display of the Bronze Gallery of the Musée Cernuschi. Photograph. Mid-1890s. Musée Cernuschi

Fig. 6.

기메박물관 일본실 전시, Display of the Japan Gallery of the Musée Guimet. Photograph. 1903

Fig. 7.

<목조여래좌상>, Buddha. 15th-16th centuries. Wood. H. 61cm. Musée Guimet. After Cambon, L'Art de Coréen au musée Guimet, Pl. 15

Fig. 8.

1889년파리만국박람회바라의컬렉션전 시 광경, Display of Varat’s collection at Exposition Universelle of 1889. Bibliothèque nationale de France

Fig. 9.

<금동반가사유보살상>, Pensive Bodhisattva. Gilt bronze. Ca. late 6th-7th centuries. H. 16.0 cm. Musée Guimet. After Cambon, L'Art de Coréen au musée Guimet, Pl. 8

Fig. 10.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 Cover of the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Fig. 11.

<鐵釋迦如來>, “Iron Śākyamunī Buddha.”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23

Fig. 12.

<石刻釋迦如來>(右), “Stone Carving of Śākyamunī Buddha” (right).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33

Fig. 13.

<金銅如意輪觀音>, “Gilt-bronze Cintāmaṇi Wheel Avalokiteśvara.”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7

Fig. 14.

<金銅如意輪觀音>, “Gilt-bronze Cintāmaṇi Wheel Avalokiteśvara.”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9

Fig. 15.

<朝鮮古蹟圖譜>, Cover of the Chōsen koseki zufu, vol. 3, 1917

Fig. 16.

<金銅彌勒菩薩像>, “Gilt-bronze Image of Maitreya Bodhisattva.” After Chōsen koseki zufu, vol. 3, Pl. 1361

Fig. 17.

<銅造彌勒菩薩像>, “Bronze Image of Maitreya Boddhisattva.” After Chōsen koseki zufu, vol. 3, Pls. 1367-1368

Fig. 18.

<銅造藥師如來像>, “Bronze Image of Bhaiṣajyaguru Buddha.” After Chōsen koseki zufu, vol. 5, Pl. 2018

Fig. 19.

<小佛像>이 게재된 페이지의 레이아웃, Layout showing “Statuette of Buddha”(Pl. 4282). After Chōsen koseki zufu, vol. 9, p. 1257

Fig. 20.

<銀藥師如來>가 게재된 페이지의 레이아웃, Layout showing “Silver Bhaiṣajyaguru Buddha”(Pl. 40). After Ri Ōke Hakubutsukan shozōhin shashinchō (1912), vol. 1, Pl. 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