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09; 2021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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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 식민관료의 주도로 박물관이 설립됐다고 본 의견은 睦秀炫, 「일제하 李王家博物館의 식민지적 성격」, 『美術史學硏究』 227(2000), pp. 81-104; 박소현, 「帝國의 취미: 李王家博物館과 일본의 박물관 정책에 대해」, 『美術史論壇』 18(2004), pp. 143-169; 이성시, 「조선왕조의 상징 공간과 박물관」, 임지현·이성시 엮음, 『국사의 신화를 넘어서』(휴머니스트, 2004), pp. 265-298. 박물관의 개방과 서화 소장품 형성에 있어서 순종과 조선인 관료들이 주체적인 구실을 했다는 의견은 박계리, 「他者로서의 李王家博物館과 傳統觀: 書畵觀을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40(2003), pp. 221-248.
3) 박소현, 「‘고려자기’는 어떻게 ‘미술’이 되었나: 식민지시대 ‘고려자기열광’과 이왕가박물관의 정치학」, 『사회 연구』 11(2006), pp. 9-45; 손영옥, 「이왕가박물관 도자기 수집 목록에 대한 고찰」, 『한국근현대미술사학』 35(2018), pp. 263-290.
4) 이에 관한 시론적 접근으로는 Seunghye Lee, “The First Korean Museum and the Categorization of ‘Buddhist Statues’,” Sungkyun Journal of East Asian Studies 21, no. 1(forthcoming). 본고는 필자가 위의 영문 논문에서 천착하지 않은 주제를 추가적인 자료를 바탕으로 고찰한 후속 연구이다.
5) 순수미술로서 조각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형성된 역사적 개념이다. Stanley Abe, “Sculpture: A Comparative History,” in Jaś Elsner, ed., Comparativismin Art History (London and New York: Routledge, 2017), pp. 94-108 참조.
6) 한국 불상은 1876년 개항 이후 한국을 찾은 서구인들과 일본인들에 의해 수집되기 시작했으며, II장에서 후술하겠지만 서구인에 의해서는 이미 1890년대에 파리의 박람회와 박물관에서 전시된 바 있다. 자율적인 국외 박람회 출품은 1900년 파리만국박람회 대한제국관 전시가 최초로 알려져 있으며, 국내에서는 1907년 가을에 지금의 을지로 입구인 銅峴에서 열렸던 경성박람회에 출품된 <금동불상>을 시초로 본다. 한편, 한국 불상이 미술품으로서 연구된 것은 1897년에 小衫榲邨이 『國華』에 발표한 3부작 논문 「上古中古に涉ゐ美術品の支那び朝鮮に關係あゐ略說」가 효시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한국 불상을 주제로 삼은 본격적인 미술사적 연구는 1902년 關野貞의 고적조사 이후에 시작된 것으로 봐야 할 것이다. 홍선표, 『한국근대미술사: 갑오개혁에서 해방 시기까지』(시공아트, 2009), pp. 45-46, p. 49, 300; 강희정, 「일제강점기의 조선 불교미술 조사와 복원-한국 불교미술 연구의 출발점-」, 『미술사와 시각문화』 9(2010), pp. 150-151.
8) 왕실과 관계된 것은 궁내부 駐馬科에서 보낸 연과 갑옷 등에 불과하다. 이 점은 藤田亮策의 회고와 일치한다. 「宮內府出品」, 『皇城新聞』 1909년 10월 30일; 睦秀炫, 앞의 논문, pp. 85-89. 조선 왕실의 전통적인 수장품에 대해서는 황정연, 『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신구문화사, 2012) 참조.
11) 關野貞은 1902년 7월 6일에 일본 공사관에서 주한 일본공사 林権助(1861-1939)가 수집한 古劍, 고려자기, 도기, 불상 등을 구경했다고 하며. 같은 해 8월 12일에는 부산에서 일본 영사의 소개로 한 好古家를 만나 각종 불상, 도기, 회화 등을 봤다고 기록했다. 関野貞研究会 編, 『関野貞日記』(東京: 中央公論美術出版, 2009), p. 118, 122.
12) 근대기 일본미술사와 한국미술사의 인식체계 형성 과정에서 양국 불상의 ‘탈맥락화’와 ‘재맥락화’ 현상은 강희정의 연구에서 선구적으로 고찰됐으며, 본고도 이와 같은 선행 연구성과에 힘입은 바 크다. 특히 한국 불상의 재맥락화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에서 상세하게 분석됐다. 姜熺靜, 「일제강점기 한국미술사의 구축과 석굴암의 ‘再맥락화’」, 『先史와 古代』 33 (2010b), pp. 59-82.
13) 이왕가박물관의 일본인 관료들이 남긴 글에 관해서는 全東園, 「 「韓国文化財」形成過程に関する史的考察: 植民地期 「朝鮮文化財」 研究の成立と言説空間の形成」(東京外国語大学 博士学位論文, 2017), pp. 202-212 참조.
15) 스테파노프는 1817년부터 1845년까지 영국박물관의 컬렉션에 영감을 받은 6점의 수채화를 제작했다. 시리즈의 마지막인 이 작품은 고전시대의 그리스조각을 미술의 정점으로 보는 19세기 중반 유럽 미술관의 시각을 선명히 보여준다. Ian Jenkins, “James Stephanoff and the British Museum,” Apollo 121(Mar., 1985), p. 179; 스탠리 아베, 「중국 조각의 근대적 순간」, 『美術資料』 82(2012), pp. 67-69.
16) 신상철, 「19세기 프랑스 박물관에서의 동양 미술품 수용 역사-앙리 체르누스키의 동아시아 여행과 파리 시립 아시아박물관의 설립 과정에 관한 고찰」, 『博物館學報』 38(2020), pp. 17-18.
17) 신상철, 「19세기말 프랑스 박물관 역사와 아시아 콜렉션: 동양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 『美術史學』 22(2008), p. 153; 崔婟銀, 「한국의 미술, 광통교에서 이에나로-프랑스의 한국유물 수집과 기메동양박물관의 한국실 형성-」(成均館大學校 석사학위논문, 2018), pp. 20-21.
18) 바라는 한양에 주재 중이던 프랑스 공사관 콜랑 드 플랑시의 조력으로 짧은 시간 동안 상당한 수준의 유물을 수집했다. 샤를 바라·샤이에 롱, 『조선기행: 백여 년 전에 조선을 둘러본 두 외국인의 여행기』(눈빛, 2001), p. 64; 신상철, 「19세기 프랑스 박물관에서의 한국미술 전시 역사: 샤를르 바라(Charles Varat)의 한국 여행과 기메박물관 한국실의 설립」, 『한국학연구』 45(2013), pp. 52-53.
19) 바라가 수집한 불상은 Pierre Cambon, L’Art de Coréen au musée Guimet (Paris: Réunion des Musées Nationaux, 2001), p. 12, 57-58, 71-72, 76, 78, 82, 84, 86-87, 97 참조.
21) 기메박물관의 한국실 개관 전시에 관해서는 G. S., “Notes and Queries,” T’oung Pao 5, no. 1(1894), pp. 104-105; 崔婟銀, 위의 논문, pp. 61-64.
22) 구미의 박물관이나 컬렉터들이 불상을 미술품이란 인식 아래 수집하고 전시했던 움직임은 1900년대부터 포착되며, 중국 불상의 수집 붐은 1910년대부터 일어났다. Stanley Abe, “Collecting Chinese Sculpture: Paris, New York, Boston,” in Alan Chong and Noriko Murai, ed., Journeys East: Isabella Stewart Gardner and Asia (Boston: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 2009), p. 433.
24) ‘나라의 精華’란 표현에 관해서는 岡倉天心, 「「國華」發刊の辭」, 『岡倉天心全集』 3(東京: 平凡社, 1979), pp. 22-28; 강희정, 『나라의 정화(精華), 조선의 표상(表象): 일제강점기 석굴암론』(서강대학교 출판부, 2012), pp. 15-27.
28) Noriko Aso, Public Properties: Museumsin ImperialJapan (Durham and London: Duke University Press, 2014), p. 31.
30) 1905년에 수집된 불상과 그 전시에 관해서는 “Recent Acquisitions of the Chinese and Japanese Department,” Museum of Fine Arts Bulletin 4, no. 18(Feb., 1906), pp. 3-6; “Sculpture in the New Japanese Cabinet,” Museum of Fine Arts Bulletin 4, no. 19(Apr., 1906), pp. 11-14.
31) Daisy Yiyou Wang, “Charles Lang Freer and the Collecting of Chinese Buddhist Art in Early-Twentieth-Century America,” Journal of the History of Collections 28(2016), pp. 1-16 참조.
33) 일례로 1902년에 라이프치히민속박물관이 구매한 쟁어(H. Sänger)의 컬렉션에는 삼국시대의 <금동보살입상>,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이 2구 포함돼 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pp. 37-38.
41) 「佛像入舘」, 『大韓每日申報』 1909년 6월 24일. 중흥사는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축성된 북한산성의 중심도량이었다. 18세기 초에는 136칸에 이르는 대가람이었으나 1904년에 큰불이 나 절 대부분이 소실됐다. 1902년에 처음 조선을 조사하고 펴낸 關野貞의 보고서에는 화재 이전 중흥사의 주요 전각이 소개돼 있으나 불상에 관한 언급은 없다. 기사 속 12구의 불상이 어떤 것이었는지는 후속 연구를 통해 추적하려 한다. 중흥사에 관해서는 關野貞, 『韓國建築調査報告』(東京: 東京帝國大學工科大學, 1904), pp. 200-202 참조.
47) 재판본에는 초판본 발행 이후 박물관이 사들인 신자료 및 구미 인사의 이해를 위한 영문번역이 추가됐고, 장르별 개설 외에 통사적 서술인 總論이 새로 실렸다. 李王職 編,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 上(京城: 李王職, 1918) 참조.
49) 몇몇 불상의 제작연대는 그동안 수정되기도 했으나 본고에서는 당대의 인식을 드러내기 위해 이왕가박물관의 편년을 기준으로 논의했다. 다만 도판의 캡션에서는 현재의 시대구분에 따라 신라시대란 표현은 통일신라시대, 이조시대란 표현은 조선시대로 바꾸었다. 한편 불상의 명칭이나 도상 비정은 사진첩의 표기를 따랐다. 예컨대 반가사유상은 일본에서는 奈良와 平安시대 이래 오랫동안 여의륜관음상으로 인식됐고 이와 같은 인식은 사진첩의 캡션에 반영돼 있다.
50) 『사진첩』 초판본 제1권 중 圖12 <銅阿彌陀如來>, 圖13 <金銅阿彌陀如來>, 圖14 <金銅藥師如來>, 圖16 <金銅阿彌陀如來>, 圖15 <金銅阿彌陀如來>, 圖17 <金銅觀世音菩薩>, 圖18 <金銅阿彌陀如來>, 圖20 <銅藥師如來>,圖21 <金銅阿彌陀如來>, 圖22 <金銅阿彌陀如來>, 圖25 <銅阿彌陀如來>, 圖26 <銅阿彌陀如來>, 圖28 <金銅阿彌陀如來>, 圖30 <銅阿彌陀如來>, 圖31 <金銅阿彌陀如來>, 圖32 <金銅阿彌陀如來>의 16점에 해당한다.
51) 『사진첩』 재판본 상권 중 圖9 <金銅阿彌陀如來>, 圖13 <金銅觀世音菩薩>, 圖14 <金銅阿彌陀如來>, 圖15 <金銅觀世音菩薩>, 圖16 <金銅觀世音菩薩>, 圖17 <金銅觀世音菩薩>, 圖18 <金銅觀世音菩薩>, 圖19 <金銅觀世音菩薩>, 圖20 <金銅觀世音菩薩>, 圖40 <挾貯觀世音菩薩>의 10점이다.
52) 사진은 모두 51점이 수록됐으나 그중 圖2-4 및 圖9-11은 같은 상을 여러 각도에서 찍은 것이고, 圖40으로 수록된 <銅製觀世音菩薩>과 <銅製勢至菩薩>은 초판본과 재판본에서 각각 별도의 도판으로 제시됐던 것을 반영해 수량을 집계했다. 李王職 編,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 佛像ノ部』(京都: 李王職, 1929) 참조.
53) 『사진첩』 불상부 중 圖7 <金銅觀世音菩薩>, 圖17 <金銅阿彌陀如來>, 圖18 <金銅阿彌陀如來>, 圖20 <金銅阿彌陀如來>, 圖21 <金銅藥師如來>, 圖22 <金銅藥師如來>, 圖34 <金銅阿彌陀如來>, 圖36 <金銅大日如來>, 圖39 <銅製阿彌陀如來>, 圖44 <金銅菩薩像>, 圖45 <金銅阿彌陀如來>, 圖46 <人造石製觀世音菩薩>, 圖48 <木造阿彌陀如來>, 圖49 <木造阿彌陀如來>이다.
68) 이 강연록은 1909년 가을부터 1910년 초에 걸쳐 진행됐던 세키노 그룹의 조사성과에 기초했다. 그 정식 보고서는 이듬해에 출간된 세키노의 『朝鮮芸術之研究』(京城: 度支部建築所, 1910)이다. 세키노는 『한홍엽』에 실은 글을 개고하여 정식 보고서에 다시 실었다. 1910년의 보고서의 내용과 한글 번역은 정인성, 『한국 고고학자가 다시 쓰는 『조선고적조사보고』-1909년과 1910년의 조사내용-』(경상북도·한국국외문화재연구원, 2020), pp. 8-151.
70) 關野貞, 앞의 논문(1909), pp. 29-31; 정인성, 위의 책, p. 94; 車順喆, 「 『韓紅葉』과 일본인들의 한국문화 인식과정 검토」, 『한국고대사탐구』 11(2012), pp. 55-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