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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08; 2020 > Article
18세기 일본 남화(南畵)의 전개에서 심남빈(沈南蘋) 회화가 지닌 의미*

Abstract

1731년 12월부터 1733년 9월까지 나가사키[長崎]에 머물렀던 청인(淸人) 화가 심남빈(沈南蘋, 1682-1760?)은 중세 이후 어용회사(御用繪師)들이 중추를 이루었던 일본화단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7세기까지 일본화단에는 어용회사들에 의해 지배계층의 요구에 따라 장식성이 강조된 화조화 전통이 자리잡고 있었다. 18세기 일본의 화조화는 이같은 전통을 기반으로 심남빈의 회화가 유입되면서 정치(精緻)한 필묵법과 채색법이 유행하게 되었다. 그리고 길상성까지 내재되어 있는 청대(淸代) 공필화조화풍이 새로운 경향으로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중국 문인화의 동아시아 확산이라는 측면에서 주로 연구되어온 남화(南畵)는 발생 시점에서 이미 문인화와 반대되는 경향인 공필화조화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중국·조선의 문인화와 다른 일본 남화의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심남빈의 회화와 남화의 관계를 중심으로 ‘일본의 문인화’로 보기도하는 남화의 성격을 보다 명징하게 도출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와 더불어 복잡다단하게 전개되었던 18세기 일본화단의 특징을 근거로 화파별 연구가 아닌 개별 인물 중심 연구의 필요성을 제안하고자 한다.

Abstract

Having arrived in Nagasaki in December 1731 and staying until September 1733, the Qing painter Shen Nanpin (1682-ca.1760) stirred up the Japanese artworld that shogunates’ official painters (goyō-eshi) had dominated since the medieval era. By the seventeenth century, Japanese ruling class commissioned the official painters to produce decorative bird-and-flower painting; the elite group’s preference established a firm tradition of the genre. While the tradition was still in practice, the eighteenth century saw a stylistic change with the introduction of Shen’s paintings whose sophisticated use of ink, brushstroke, and colorations would draw profound attention and popularity. The Chinese mode of bird-and-flower painting, which features not only minute brushworks but also auspicious implications, thus emerged as a new trend in Japan.
Although often studied as an extension of Chinese literati painting tradition, Japanese nanga (Southern painting) at its inception was deeply associated with the meticulously depicted bird-and-flower painting—arguably the antithesis of literati painting. The unexpected affinity distinguishes the Japanese literati painting from that of China and of Korea. Paying attention to the relationship between nanga and Shen Nanpin’s paintings, this study aims to shed new light on the nanga, or Japanese bunjinga, and its characteristics. While discussing the issue, this paper also argues that it is necessary to focus more on individual painters than on painting schools for a better understanding of the eighteenth-century Japanese painting, the development of which is notorious for its complexities.

Ⅰ. 머리말

에도[江戸]시대에 규슈[九州] 북서쪽에 있는 나가사키[長崎]는 중국과 유럽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에도바쿠후[江戸幕府]는 1638년 공식적으로 쇄국정책을 실시한 이후에도 교역을 통한 수익 증대를 위해 나가사키항을 통한 네덜란드, 청(淸)과의 교역은 허용하였다. 대신 네덜란드 상인의 거주 지역은 나가사키 항구에 인공으로 만든 데지마[出島]라는 섬으로 제한되었으며 일본인들은 공식적인 업무 이외에는 이곳에 접근할 수 없었다. 한편 청과의 교역 역시 지속되면서 도진야시키[唐人屋敷]라고 부르는 중국인 거주지도 형성되었다. 이처럼 근세 일본의 대외교역은 폐쇄적인 형태로 전개되었지만 네덜란드와 청의 다양한 화적(畵籍)들은 꾸준히 유입될 수 있었다. 이 화적들은 오랜 전통의 어용회사(御用繪師) 집단인 가노[狩野]파 등 직업화가들이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던 당시 일본화단에 새로움을 더해 주었다. 그리고 청을 통해 유입된 17세기 황벽종과 중국 강남 지역의 도시문화 역시 근세 일본회화의 전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에 따라 새롭게 흥기한 화파는 크게 한화파(漢畵派), 황벽파(黄檗派), 가라에메키키파(唐繪目利派), 남화파(南畵派), 남빈파(南蘋派), 양풍화파(洋風畵派), 사생화파(寫生畵派) 등을 꼽을 수 있다. 현재 일본 미술사학계에서는 이 화파 구분에 따라 연구를 진행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화파별 인물구성을 기준으로 삼았기 때문에 당시에 복잡 다단하게 전개된 여러 화풍을 설명하는 데 충분하지 않다. 한 사람의 화가가 자신의 개성 표현을 위해 특정 화풍에 천착하기보다는 여러 가지 회화기법을 실험하며 취사선택을 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다. 대표적인 사례로 남빈파, 사생화파, 남화파를 들 수 있다. 이 화파들은 양식 분류상에서 남빈파는 중국 원체화풍(院體畵風), 사생화파는 사생화풍(寫生畵風), 그리고 남화파는 문인화풍(文人畵風)이라는 각기 특정 화풍의 틀속에서 연구되어 왔다.1 그러나 남빈파, 사생화파, 남화파로 분류되는 대부분의 화가들은 회화 학습을 위해 나가사키 여행이라는 공통된 외국미술 체험을 행했고, 사승관계 등의 화가 간 교류망 역시 화파를 초월하여 이루어짐으로써 서로 회화양식을 공유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즉 화파를 구분할 수 있을 정도로 화파별 회화양식이 명료하지 않으며 서로 혼재된 양상을 띠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단순한 화파 구분에서 벗어나 인물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춰 근세 일본의 회화에 대해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18세기 일본화단 전개에 영향을 끼친 외래유입의 대표적인 사례로는 중국 절강(浙江)성 출신으로 1731년에 나가사키로 건너간 화가 심남빈(沈南蘋, 1682-1760?)의 회화를 꼽을 수 있다.2 그의 회화경향은 중국 전문화가들의 세밀함을 바탕으로 한 공필화조화풍 (工筆花鳥畵風)으로 분류된다. 그의 회화는 나가사키에서 ‘남빈파(南蘋派)’라는 화파를 형성할 정도로 크게 유행하였다. 그리고 남빈파의 회화는 교토, 오사카 지역에도 전파되어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 1733-1795), 마쓰무라 고슌(松村吳春, 1752-1811), 간쿠(岸駒, 1756- 1839) 등 사생화파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 일반적인 연구경향이다.3 이는 심남빈이 당시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화조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게 해주고 사생화파의 기반을 마련한 중국 화가라는 점으로 부각되게 해주었다.4 그러나 18세기의 일본회화는 남빈파, 사생화파뿐만 아니라 전반적으로 심남빈 회화에 반응하며 전개되었다. 특히 문인화, 남종화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는 일본의 남화는 오히려 문인화와 반대되는 경향의 공필화조 화가인 심남빈 회화의 영향을 받으며 형성되었다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다. 그만큼 심남빈 회화의 일본 전파는 화파 구분 없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나가사키로 유입된 중국과 네덜란드의 회화를 통해 18세기 일본 화단에서 새로운 회화경향이 시작된 배경에 대해 우선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심남빈의 회화가 남빈파, 사생화파뿐만 아니라 다른 화파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는 점에 대해 주요 남화가들을 중심으로 확인할 것이다.5 남화가들의 심남빈에 대한 인식 차이에 따라 회화경향의 차이가 생긴다는 점을 확인함으로써 심남빈의 회화를 근세 일본 남화의 전개에서 중요한 요소로 제시하고자 한다.

Ⅱ. 나가사키(長崎)에서 시작된 새로운 회화경향

에도[江戸]시대 중기에 해당하는 18세기에는 도로의 정비와 함께 숙소 등 편의시설이 발달하면서 여행은 일반 서민계층에서도 널리 유행하게 되었다. 에도시대 초기부터 에도성 근처에 저택을 제공하고 지방 다이묘[大名]의 부인과 자식을 에도에 거주하게 하는 산킨코타이[参勤交代] 제도로 인해 지방 곳곳에서 에도로 향하는 도로가 정비될 수 있었다. 산킨코타이는 도로의 정비뿐만 아니라 지방과 에도를 왕래한 수많은 다이묘 수행원들로 인해 에도의 문화가 전국으로 확산되는 효과도 발생시켰다. 특히 에도와 오사카를 오가는 주요 도로인 도카이도[東海道]의 경우에는 길을 따라 명승지 및 절경이 모여 있어 <도카이도53차[東海道五十三次]>와 같은 우키요에[浮世絵] 풍경화나 와카[和歌] 및 하이쿠[俳句]의 인기 있는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6 그리고 당시 또 다른 주요 여행지였던 나가사키는 중국, 네덜란드와 교역이 이루어진 곳이다. 나가사키로 유입된 각종 수입품은 외부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이를 표현하는 방식의 변화를 발생시켰다. 나가사키가 근세 일본화단에서 미술문화 유행의 중심지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다음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나가사키[長崎]에서는 매년 봄 · 가을 두 번 서화회(書畵會)를 열어서 서화를 좋아하는 자는 남녀노소 구별 없이 그 모임에 참석했다. 각국의 문인들도 소문을 듣고 와서 당(堂)은 가득 차며 번잡했고, 구름과 안개처럼 서서 (겨우) 하루 보는 정도에 그쳤다. 모임이 끝난 후에는 모임에 썼던 여러 작품을 정리하고, 작가의 이름 및 출신지를 기록하여 따로 한 책으로 엮어서 사방으로 보냈다. 만재(万載)와 일운(逸雲)이 그 간사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7

이와 같이 미술의 중심지로 급부상한 나가사키는 화가들의 여행지로 선호되었고 나가사키 여행의 경험은 18세기 일본의 화단이 중세부터 지속된 가노파, 도사[土佐]파 등의 어용회사 중심의 전개에서 벗어나 다채롭게 진행되는 데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나가사키를 통한 외국 미술의 유입에서 가장 주목할 점은 네덜란드와 교역을 통해 형성된 박물학(博物學) 및 서양화법의 유행이고, 청과의 교역에서는 심남빈 회화의 유입을 들 수 있다. 나가사키에서 이루어진 교역은 일본화단에 서양화법과 더불어 심남빈의 공필화조화의 사실적인 표현을 수용하는 데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8 일본화단의 심남빈 회화 수용은 중국 원체화(院體畵)에서 볼 수 있는 세밀한 필묵법과 진한 채색법의 발생을 의미한다. 한편 네덜란드 회화로부터는 수입 서적들 속 삽화나 동판화를 통해 선원근법과 명암법 등이 주로 수용되었다.9
심남빈은 1731년 12월부터 1733년 9월까지 나가사키에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회화는 당시 일본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18세기 이후 일본화단의 변화를 주도하게 되었다. 심남빈 회화의 높은 인기는 지배계층 사이에서도 통용되어 막부 쇼군(將軍)인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재위 1716-1745)도 심남빈의 회화를 애호하였다. 도쿠가와 요시무네는 심남빈이 중국으로 돌아간 이후에도 심남빈의 그림을 찾았고 결국 그에게 헌상된 23점의 심남빈 회화는 12점의 채색화만 소장되고 “극채색만을 좋아하신다(極彩色計リ之御好ミニ御座候)”는 말과 함께 나머지 11점의 수묵, 담채화가 반납되었다.10 이 일화는 18세기 일본에서 지배계층의 공필화조화 애호 경향과 함께 심남빈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을 잘 보여준다.
일본에서는 중세부터 화단에 군림해온 어용회사 집단인 가노파(狩野派)와 도사파(土佐派) 화가들에 의해 황실 및 귀족들의 건축 장식용으로 후스마(襖)라고 부르는 미닫이문과 병풍에 그린 장식적인 화조화가 유행하였다. 화려한 금박 배경에 대담한 붓놀림으로 그린 이들의 화조화는 에도시대 중기까지 큰 인기를 누렸으나 계보를 따라 미술형식을 답습하는 어용회사(御用繪師) 특유의 보수적인 전통으로 인해 점차 매너리즘적인 경향이 흐르게 되었다. 심남빈의 회화가 일본에 유입된 이후에는 장식성에 치중한 화조화풍에서 벗어나 보다 정치(精緻)한 화법이 유행하였고 이와 더불어 화조화에 내재된 길상성 역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에 대해서는 심남빈 그림의 의미를 해석한 『남빈백폭목록(南蘋百幅目錄)』의 인용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남빈백폭목록』은 『심남빈화도백폭(沈南蘋画図百幅)』의 다른 제목이다.11 『남빈백폭목록』에서 심남빈의 그림 중 <일품당조도(一品當朝圖)>(Fig. 1)에 대한 해석문을 보면 학이 중국에서 ‘일품(一品)’ 관직의 관복 장식으로 사용된다는 점, ‘조(朝)’자는 조정에 출사할 때 쓰는 단어라는 점 등이 적혀있다. 이는 심남빈의 작품을 본 나가사키의 통역관들이 중국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묻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중국회화의 길상성이 일본에서 처음 주목받기 시작한 당시의 분위기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남빈백폭목록』은 중국 길상 사전의 역할을 하며 여러 화보에도 인용되는 등 화가들의 회화제작에 널리 참고되었다.
심남빈 회화로부터 비롯된 원체화풍의 정치(精緻)한 화법은 중국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동경이 자리잡은 나가사키와 간사이[関西] 지역의 많은 화가들에게 신선함으로 다가갔다.12 대표적인 예로 가라에메키키[唐絵目利]로 활동했던 나가사키의 화가들을 꼽을 수 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에서 점차 교역량이 증가하는 것을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교역을 비롯하여 나가사키의 행정·사법을 총괄하는 부교[奉行]라는 직책을 만들어 상주시켰다. 그리고 휘하에 가라에메키키라고 부르는 일종의 감정관을 두었다. 가라에메키키는 외국 서화의 감정을 비롯하여 수입품 각종을 그림으로 그려 기록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들이 심남빈 회화의 영향을 받은 사실은 이시자키 겐쇼(石崎元章)의 <방심전화조도병풍(倣沈鈿花鳥圖屛風)>(Fig. 2)을 통해 확인할 수 있으며 감정 업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공필 화조화풍을 수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심남빈에게 직접 배운 유일한 일본인 화가인 유히(熊斐, 1712-1773)는 공필화조 화풍이 일본화단 전반에서 유행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나가사키의 가라에메키키였던 와타나베 슈세키(渡辺秀石, 1639-1707) 문하에서 처음 그림을 배운 뒤에 심남빈의 제자가 되었다. 유히가 학습한 심남빈 화법은 다른 화가들에게 계승되면서 심남빈 회화가 전국적으로 유행하게 되었다. 일본에 전수된 심남빈 화조화의 대표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단봉조양도(丹鳳朝陽圖)>(Fig. 3), <송학도(松鶴圖>, <녹학도(鹿鶴圖)12폭병풍>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화면의 배경에 등장하는 나무, 바위 등의 경물은 화조화라는 주제를 돋보이도록 하는 수단으로 등장하며 대체로 변각구도 안에 등장한다. 세부 표현에서는 바위나 나무 등을 거칠고 속도감 있는 묵법으로 그림으로써 그림의 주인공격인 꽃이나 동물의 정치한 묘사 및 진채(眞彩)를 사용한 점과 대비시켜 주제의식을 강화하는 방식을 주로 구사했다. 심남빈의 화풍은 규슈를 넘어 다른 지역에도 전달되었다.13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은 이국적인 소재로서 중국, 네덜란드와의 교역을 상징하는 공작도이다. 교토의 마루야마 오쿄(円山応挙)(Fig. 4), 하세가와 로세쓰(長沢芦雪)(Fig. 5), 마시야마 마사카타(増山雪斎) 등 소위 사생화파로 구분되는 화가들은 앞서 언급한 심남빈의 작품처럼 나무나 바위 위에 공작이 서있는 모습을 경사진 구도에 배치하였다.14 그리고 주인공인 공작은 공필진채로, 바위나 나무의 화법은 선염 혹은 거친 묵법으로 서로 다르게 구사함으로써 대비되는 화면 효과를 자아내었다. 심남빈을 통해 청대 원체화풍이 나가사키를 통해 일본에 유입되어 가노파 등 어용회사의 오래된 화조화 전통에서 벗어나 새로운 화풍이 발생하게 된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같은 시기에 유입된 네덜란드의 각종 서적류와 동판화 작품들은 일본화단에 원근법과 같은 서양회화 기법도 전해주었다. 서양회화 역시 심남빈을 대표로 하는 중국 회화와 함께 18세기 일본화단에 큰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일조하였다. 그러나 시바 고칸(司馬江漢, 1747-1818) 등의 양풍(洋風)화가들처럼 네덜란드 회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명료하게 드러나는 화가도 있지만 대부분의 일본 화가들의 사실적인 표현은 중국회화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유럽의 것인지를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양쪽의 영향은 복합적이었고 절충적이었다. 특히 가라에메키키들은 그림으로 기록을 남겨야 하는 업무의 특성상 그들의 화풍은 사실성이 강하며 중국 회화와 네덜란드 회화의 여러 기법을 절충하여 그리는 제작태도를 지녔다.
가라에메키키였던 이시자키 유시(石崎融思, 1768-1846)의 <게이호화란진항도(瓊浦華蘭進港圖)>(Fig. 6)는 중국과 네덜란드 상선이 나가사키항에서 항해하는 모습을 그린 풍경화이다. 부감법을 사용하여 먼 곳에서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항구의 전반적인 모습과 네덜란드인들을 상주시켰던 데지마[出島], 배 등을 적절하게 배치하여 세밀한 필치로 그렸다. 세부 표현을 보면 수평선이 드러나고 양쪽에 배치된 산들이 소실점을 향해 점차 작아지는 선원근법을 사용한 점도 볼 수 있는데 1852년에 네덜란드인 루트비히 미하일 나델(Ludwig Mikhail Nadel)이 간행한 『Nippon(Japan)』 속 삽화인 <나가사키항과 해변의 조망(長崎港と湾の眺望)>(Fig. 7)의 원근법을 사용한 구도, 경물의 배치와 유사하다. 서로 제작연도의 차이가 있지만 시바 고칸의 <나가사키항도(長崎港圖)>에서도 유사한 구도를 확인할 수 있듯이 이러한 동판화가 나가사키에 이미 다수 유입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시자키 유시 역시 1820년에 <게이호화란진항도>를 그릴 때 나가사키로 수입된 동판화를 참고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원경의 산을 그릴 때는 반원형의 둥근 산 형태에 부드러운 선염으로 처리하고 산뜻한 색감을 표현하였는데 이는 도사파[土佐派]의 야마토에[大和絵] 화풍과 유사하다. 도사파는 무로마치[室町]시대(1336-1573)에 가노파[狩野派], 운코쿠파[雲谷派]와 함께 일본의 대표적인 화가집단으로 에도시대에도 활동하였다. 야마토에는 헤이안[平安] 시대(794-1185)에 형성된 일본의 전통 회화 장르로서 도사파에 의해 그 전통이 유지되어 왔다. 18세기에 이르러서는 복고야 마토에(復古大和絵)를 주창한 나고야[名古屋] 출신 화가들이 새롭게 화단에 등장하였다.15 다나카 도쓰겐(田中訥言, 1767-1823)의 <닌토쿠 덴노도(仁德天皇圖)>(Fig. 8)와 와타나베 기요시(渡辺清, 1778-1861)의 <화하행렬도(花下行列圖)>에서 산과 언덕의 표현을 보면 초록색과 황토색을 몰골법으로써 부드럽게 칠한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복고야마토에 화가들이 도사파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화법이다. 다나카 도쓰겐 등 복고야마토에 화가가 도사파의 화풍을 계승한 점에 대해서는 <닌토쿠 덴노도>에서 “도사 미쓰오키를 떠올리며 도쓰겐이 그렸다(土佐将監光起意, 訥言製)”라고 쓴 제발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18세기 일본의 화가들은 이처럼 사실성이라는 큰 범주 아래 전통적인 일본화법에 심남빈의 공필화조화풍과 네덜란드의 서양화풍을 효과적으로 절충하여 그림을 그린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당시의 회화경향은 회화양식을 기준으로 화파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복합적이었다. 화가들마다 외국 회화에 대한 반응 및 주목하는 점은 각기 다를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심남빈 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화가들, 서양화법을 위주로 그린 화가들, 실경 사생에 주목한 화가들 등 다양한 화풍이 발생하게 되었다. 남화가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렇게 다양한 회화가 서로 융합되고 취사선택되는 화단의 분위기 속에서 남화가들은 심남빈을 어떻게 인식했으며, 회화제작에서 심남빈 회화의 어떤 측면에 영향을 받았던 것일까.

Ⅲ. 심남빈(沈南蘋) 회화에 대한 인식과 남화(南畵)의 전개

일본의 남화는 중국 명·청대 회화 중에서도 강소(江蘇)·절강(浙江)지역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일본의 유일한 대외 창구였던 나가사키에 강소·절강지역 출신 상인들이 주로 드나들면서 그곳에서 간행된 서적과 회화류가 주로 유입되었기 때문이다.16 남화의 형성에는 17세기 이후 교토[京都]·오사카[大阪]에서 유행한 중국 문인취미도 그 기저에 존재한다. 이와 더불어 ‘남화(南畵)’라는 용어가 중국 남종화에서 파생되었기 때문에 남화를 문인화의 한 종류로 바라보는 관점도 존재한다.17 그러나 남화는 회화양식의 측면에서 중국·조선의 문인화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중국과 조선에서는 문인화를 우선 사대부 계층이 주도했기 때문에 그들끼리 공유하는 회화양식 혹은 회화를 평가하는 관점의 기준이 존재하였다. 반면 일본의 남화가들은 사대부 계층이 아니었던데다가 일반 상인들의 교역에 의해 일단 나가사키로 들어온 중국의 문물을 통해 수용했기 때문에 그 내용면에서 조선과 다른 양상을 띠게 된 것이다.18 따라서 중국과 조선에서는 문인화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던 심남빈의 공필화조화가 일본에서는 그 대상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18세기 초에 형성된 일본의 남화는 <Table 1>에서 볼 수 있듯이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하여 전개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연구에서는 이렇듯 시기별 구분을 전제로 진행되는 것이 보편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중국과 네덜란드 회화의 유입 속에서 다양한 화풍이 혼재되는 가운데 남화가 유행했기 때문에 시기별 구분만으로 대표적인 특징과 의의를 도출하기가 충분하지 않다. 예를 들어 다니 분초(谷文晁, 1763-1840)는 일생에 걸쳐 가노파 등 일본의 전통회화부터 중국·조선의 회화, 네덜란드의 서양회화 등을 구사하여 화업의 폭은 대단히 넓고 화풍은 다양하며 절충적이다.20 반대로 같은 시기에 활동한 다노무라 지쿠덴(田能村竹田, 1777-1835)은 청대 사왕화풍(四王畵風)을 기반으로 한 남종화를 추구하여 근대까지 교토 화단의 남화가 명맥을 유지하는 데 기틀을 마련한 인물이다. 이처럼 남화라는 큰 틀 속에서 다니 분초, 다노무라 지쿠덴 모두 동일한 ‘남화파’로 분류되지만 한 화파로 보기에는 양식적으로 차이가 많은 것이 일본 남화의 특수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장에서는 심남빈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중심으로 남화의 전개를 바라볼 것을 제안한다. 심남빈에 대한 인식의 차이와 그의 회화를 수용하는 정도에 따라 남화가들의 회화를 보다 명료하게 구분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18세기 심남빈 회화의 수용

심남빈의 회화는 사생화파뿐만 아니라 문인취향을 공유하며 중국의 문인화가 기저에 위치해있던 남화에도 영향을 끼쳤다. 특히 18세기 전반에 활동한 남화가들의 회화에서 그 영향은 더욱 강했다. 이들이 심남빈의 회화를 남화 제작의 전범으로 삼은 사실은 아래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 근세에 청나라 사람 심남빈(沈南蘋)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 영모화훼의 법을 전하였다. 그래서 그 명성이 크게 떨쳐졌다. … 우리나라의 그림은 처음에는 두 갈래로 나갔는데, 남종(南宗)을 부르짖는 사람들의 경우엔 심남빈이 그 효시가 되었다.21

오사카(大阪) 출신으로 서화 수장가로도 유명한 기무라 겐카도(木村蒹葭堂, 1736-1802)는 남화 전개의 앞세대에 해당하는 남화가이다. 기무라 겐카도는 위의 글에서 볼 수 있듯이 심남빈을 남종, 즉 일본 남화의 시작으로 설정한 것을 알 수 있다. 기무라 겐카도는 중국 명대(明代) 동기창(董其昌, 1555-1636)의 남북종론(南北宗論)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중국·조선과 달리 그림을 그리는 자의 문아(文雅)함 혹은 그리는 자의 신분이 사대부인지의 여부를 남·북종화 구분의 기준으로 두지 않은 것이다. 이는 초기 남화가들 사이에서 보편적인 인식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 기무라 겐카도, 야나기사와 기엔(柳沢淇園, 1704-1758) 등은 심남빈의 제자인 유히, 소 시세키(宋紫石, 1715-1786), 가쿠테이(鶴亭, 1722-1786) 등을 통해 심남빈 회화를 수용하였다. 이들이 수용한 심남빈 화풍은 입체감을 주기 위한 음영법, 진한 채색, 정교하고 세밀한 필법이 대표적이다.
남화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야나기사와 기엔은 가노파와 가라에메키키에게 처음 회화를 배웠다. 이후 독학으로 중국의 고서화와 『개자원화전(芥子園畵傳)』 등의 화보를 모사하였고, 시서화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문인화가의 풍모를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나 그가 남긴 작품들의 대부분은 사군자를 제외하고 진한 채색이 강조된 청대 화과도, 화조도류가 주를 이루고 있다. 특히 <난화과실도(蘭花果実圖)>(Fig. 9)는 서양화풍으로 그린 청대(淸代) 장위방(張爲邦)의 <세조도(歲朝圖)>(Fig. 10)와 구성, 채색 방식에서 유사하여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가노 탄유(狩野探幽, 1602-1674)도 이와 유사한 화풍의 <과실도> 연작을 남긴 바 있다. 따라서 야나기사와 기엔은 처음 회화를 배웠던 가노파의 영향 속에서 중국 회화를 수용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야나기사와 기엔이 그린 <설중매화소금도(雪中梅花小禽圖)>(Fig. 11)의 경우는 과한 S자형의 나무와 나뭇가지에 호분을 칠해 눈을 표현한 점에서 심남빈의 제자인 가쿠테이가 그린 <설매도(雪梅圖)>(Fig. 12)의 화풍과 유사하다. 초기 남화가로 분류되는 그가 가쿠테이 등 남빈파 화가들과 교류가 활발했다는 것을 보다 확실하게 보여주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기무라 겐카도는 1788년에 나가사키에 가서 중국 화적을 감상할 수 있었으며 유히와 가쿠테이에게 그림을 배우며 심남빈 회화의 영향을 받았다. 대표적으로 가쿠테이가 그린 <괴석모란화조도(怪石牧丹花鳥圖>(Fig. 13)는 진한 채색에 음영을 가하여 입체감이 느껴지도록 하였으며 새의 깃털에 호분을 칠하여 장식성이 두드러지게 처리한 작품이다. 기무라 겐카도의 <화조묵란괴석도(花鳥墨蘭怪石圖)>(Fig. 14)는 흑백 도판만 전해지고 있어 채색은 확인할 수 없지만 가쿠테이 작품의 구성과 필선을 구사한 방식이 유사한 것을 알 수 있다.22 야나기사와 기엔과 기무라 겐카도의 이 작품들은 심남빈의 회화가 제자들을 통해 남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남화 연구에 있어 회화 학습 과정에서 심남빈 회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화가들도 있었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이는 남화라는 용어가 비록 남종화, 문인화에서 비롯된 것으로 인식되지만 양식적인 면에서 중국·조선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는 원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일본의 남화는 나가사키로 유입된 심남빈의 원체화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사대부 출신이 그린 문아(文雅)한 특징을 추구했던 중국·조선의 문인화와 양식적으로 확연한 차이를 보이며 발전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기무라 겐카도의 경우처럼 심남빈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중국 명말청초(明末淸初) 오파화풍의 그림을 그린 화가들도 존재하였다.23 18세기에 활동한 남화가들의 이와 같은 절충적인 회화 제작태도는 중국 문인문화의 유행이 심화되는 가운데 중국·조선의 문인화가들처럼 남종화를 추구했던 19세기의 남화가들보다 회화양식면에서 다양성을 지녔다고 평가할 만하다.
일본 남화를 대표하는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1723-1776), 요사 부손(与謝蕪村, 1716-1784), 다니 분초의 경우는 심남빈에 대한 인식 차이를 통해 본 남화의 전개에서 별도로 볼 필요가 있다. 이들 역시 회화 학습 단계에서 심남빈의 회화를 배웠거나 『개자원화전』, 『팔종화보(八種畵譜)』와 같은 중국 화보의 영향을 받았다. 다니 분초는 심남빈-유히-소시세키로 이어지는 심남빈의 화풍을 소 시세키의 아들인 소 시잔과 함께 에도에서 서화회를 개최하는 등의 교유를 통해 수용하였다. 공필화조화풍으로 그린 <공작도(孔雀圖)>(Fig. 15)는 이를 대표적으로 보여준다. 금지(金地) 배경에 진하고 거친 바위 윤곽선 및 부벽준을 가한 방식은 중세부터 활동한 어용회사(御用繪師)인 가노파, 도사파에서도 즐겨 구사한 화법이지만, 공작이라는 이국적인 소재를 선택한 점과 이를 공필화조화풍으로 그린 것은 심남빈 화풍 수용의 결과로 볼 수 있다. 요사 부손 역시 심남빈 회화의 영향이 감지되는 작품을 제작한 바가 있다. 그의 <고목팔팔조도(枯木叭叭鳥圖)>(Fig. 16)는 기무라 겐카도가 소장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심남빈의 <초화군금도>의 변각 구도, 무리지어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 까마귀 도상, 그리고 옅은 먹과 진한 먹으로 까마귀의 입체감을 살린 표현 방식과 비교가 가능하다. 한편 이케노 다이가는 이부구(伊孚九) 등 다른 도일(渡日) 청인 화가의 영향을 받았으며 나가사키로 유입된 중국 화보를 통해 회화 학습을 하였다.24
그러나 이들의 회화는 심남빈 회화의 영향이 일부에 지나지 않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화업의 폭은 넓고 자가화법의 면모는 명징하다. 다음의 글은 이러한 평가를 잘 보여준다.
  • 다이가가 청인(淸人) 이부구(伊孚九)를 경모(敬慕)할 때는 그림이 정(正)하여 정신아취(精神雅趣)를 함께 갖추기에 충분했지만 후에 일변하여 이풍(異風)을 만들어 드디어 방일(放逸)의 필(筆)이 되었다.25

이케노 다이가가 한 명의 화가로서 활동할 무렵에는 “후에 일변하여 이풍(異風)을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중국 회화의 프레임에서 벗어나 자가화법을 완성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케노 다이가, 요사 부손, 다니 분초 등이 앞서 살펴본 심남빈의 회화를 남종화의 하나로 바라봤던 남화가들과 가장 큰 차이는 심남빈의 회화를 배우러 나가사키로 여행을 가는 대신 전국 단위의 여행을 선호했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이들의 화업에서 나가사키로 유입된 중국 공필화조화의 영향이 작은 대신에 자연 사생을 통한 진경도(眞景圖)나 하이쿠[俳句]를 그림으로 표현한 하이가[俳画] 모두 자연 사생에서 얻은 주관적인 감정을 그림으로 풀어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26 진경도나 하이가로 대표할 수 있는 이들의 회화는 다른 남화가들처럼 심남빈의 회화를 전범으로 삼기보다 학습 대상의 하나 정도로 여겼던 것 같다.27 이러한 학습 태도는 회화 제작에 다양성을 심어주었고 앞서 살펴본 남화가들과 달리 조선회화 수용에도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게 해주었다고 생각한다. 1763년 조선에서 건너간 통신사 수행화원인 김유성에게 후지산[富士山]을 남종화법으로 그리는 방법을 물어본 이케노 다이가의 행적과 회화 학습을 위해 중국, 조선, 류구국(流球國)의 회화를 폭넓게 모사한 다니 분초의 <사산루화본(寫山樓畵本)>은 이를 잘 보여준다.28 따라서 조선과 일본의 회화교류를 논할 때 주로 거론되는 화가들이 심남빈과 나가사키 여행의 영향이 작은, 바로 이들이라는 점은 향후 한일 회화교류 연구에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19세기 남종화(南宗畵)의 추구

19세기 초반의 일본은 겐로쿠(元禄) 시대(1688-1704) 이래 경제 발전과 죠닌(町人) 계급을 필두로 형성된 화려한 도시문화 속에서 문예, 학문, 사상의 다채로운 전개가 심화되는 시기였다. 이 시기를 특별히 분카[文化]·분세이[文政] 연간의 이름을 합쳐서 가세이[化政] 문화(1804-1830)라고 부른다. 에도·오사카·교토와 같은 대도시에서는 중국 문인문화를 향유하는 인물들이 등장하여 문예계를 이끌어 나갔다. 도시 속 중국 문인문화의 유행은 17, 18세기에도 성행한 것이지만 19세기의 양상은 이전 시기와 차이가 있다. 100여 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중국 문인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짐과 동시에 교조적으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스스로 중국 문인화가들과 동일시하는 남화가들이 나타났다.
  • 태용(態勇)은 자(字)가 추금(秋琴)이고, 나가사키(長崎) 사람이다. 집이 나가사키항 근처에 있어서 누각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이나사산(稲佐山)의 좋은 경치를 앉은 채로 모두 눈에 담을 수 있다. 집은 시원하고 높고, 책상과 의자는 나에게는 맑아 보이기만 하다. 구조와 위치 모두 당풍(唐風)이다. 그래서 누각에 오르면 중국 오(吳)의 어느 집을 방문해서 문인운사(文人韻士)와 고요하고 청량한 서재에서 만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어 곧장 세상의 잡념을 잊게 해준다. 나는 나가사키에서 거의 1년 동안 있었는데 이 누각에 자주 들렀다. 아침, 저녁으로 추금(秋琴)과 만나 대화를 하고, 시를 짓고 그림을 평가하고, 점심에 집에서 차를 마시고, 밤에는 등불 아래에서 술을 데웠다.29

위의 글은 19세기의 남화가인 다노무라 지쿠덴(田能村竹田)이 나가사키 여행에서 겪은 일화를 기록한 것이다. 글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비유를 일본에 유입된 중국 문인문화의 핵심지역이었던 오(吳) 지역에 빗대어 스스로 문인이 된 기분을 풀어놓고 있다. 일본 남화가들이 중국의 문인문화를 수용하면서 이처럼 지역을 특정하고, 스스로 중국 문인과 일치시키는 시각은 18세기의 화가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러한 태도는 회화제작으로도 연결된다.
18세기의 남화가들은 나가사키로 유입된 중국의 원체화를 자의적으로 해석하며 수용했지만 19세기에 이르러서는 문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더욱 중국 문인화에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대표하는 인물은 규슈 출신의 남화가인 다노무라 지쿠덴과 라이 산요(頼山陽, 1780-1832)이다. 다노무라 지쿠덴은 전배인 기무라 겐카도와 만난 이후부터 본격적인 회화제작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명(明)·청대(淸代) 문인문화가 크게 유행한 간사이(関西)지역과 나가사키를 활발하게 오가며 활동하였다.30 그는 9세기 이전 일본에 유입되었다가 한동안 유행이 끊긴 것으로 전해지는 중국의 사(詞)에 주목하며 최초로 『전사도보(塡詞圖譜)』라는 사보(詞譜)를 간행하고, 고문사학(古文辭學)을 자신의 학문적 기반으로 삼는 등 철저하게 중국 문인으로서 자의식을 지닌 인물이었다.31 다노무라 지쿠덴의 심남빈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 당대의 화가들은 화조화를 그릴 때 몰골법을 주로 하였다. 이것은 심남빈(沈南蘋) 이후 처음 성행하게 된 것이다. 남빈은 이름은 전(銓), 자는 형재(衡齋), 오흥 출신이다. 교호(享保) 연간에 요청을 받아 나가사키(長崎) 부교쇼(奉行所)에 와서 그림 수 폭을 헌상하고 많은 포상을 받았다. 남빈의 그림은 윤곽선이 가지런하고 그 색채는 진하고 윤기가 난다. 태평(太平)한 때가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점차 셋슈(雪舟)·가노(狩野) 두 파에 싫증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한 때 모두들 남빈을 칭찬하고 경쟁하며 그의 화풍을 따랐다. 심남빈은 화법을 나가사키의 유히(熊斐)에게 전해줬고 유히는 이를 에도 출신인 소 시세키(宋紫石)에게 전해 줬으며 시세키는 아들인 시잔(宋紫山)과 함께 대대로 그 화업을 계승하였다.32

“한 때 모두들 남빈을 칭찬하고 경쟁하며 그의 화풍을 따랐다”는 말은 현재 그렇지 않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특정화파에 국한된 유행이 아니라 18세기 일본화단 전반에 끼친 심남빈 회화의 영향력을 가늠할 수 있는 평가이기도 하다. 다노무라 지쿠덴은 심남빈의 회화를 남종화의 하나로 봤던 초기 남화가들과 달리 공필화조화가로 이해하였다. 또한 남빈파 화가들의 계보를 언급할 정도로 심남빈에 대한 이해가 축적되면서 심화되었다. “당대의 화가들은 화조화를 그릴 때 몰골법을 주로 하였다. 이것은 심남빈 이후 처음 성행하게 된 것이다”는 언급과 “남빈의 그림은 윤곽선이 가지런하고 그 색채는 진하고 윤기가 난다”고 한 것은 과거 어용회사의 장식성에 치중한 화조화에서 벗어나 청대 공필화조화풍이 유행한 것을 의미한다. 이렇듯 다노무라 지쿠덴은 심남빈의 회화를 공필화조화풍으로 규정하는 한편, 남화에 대해서는 명대 동기창 등이 주창한 남북종론의 관점에서 이해하였다.
  • 오안[応安] 연간(1368-1374) 이후로 죠세쓰[如雪], 슈분[周文], 셋슈[雪舟], 가노 모토노부[狩野元信] 등 여러 명이 스승의 법을 계승하여 서로 어깨를 견주며 번갈아가며 회사(繪事)를 주관했고, 필묵을 단련하여 기운과 품격이 웅장하고 위엄이 있었으며, 명성을 대대로 드높였다. 그러나 그 전하는 것은 송대(宋代)의 원체(院體)로 원사대가(元四大家) 혹은 명(明)의 심주(沈周)·문징명(文徵明) 등에 미치지 못했다. 예전부터 우리나라(일본)는 조맹부(趙孟頫)가 말한 문인화라는 것, 그 전하는 바를 아직 얻지 못해 애석할 뿐이다. 동기창(董其昌)은 말하길 마원(馬遠)·하규(夏珪), 이당(李唐) 그리고 유송년(劉松年)은 이사훈파(李思訓派)이고 우리들이 배울 바가 아니라고 하였다.33

다노무라 지쿠덴은 1834년에 간행한 『산중인요설(山中人饒舌)』에서 죠세쓰[如拙], 슈분[周文], 셋슈[雪舟], 가노 모토노부[狩野元信] 등 중세 화가들을 높이 평가하면서도 그들의 화풍을 남송(南宋) 원체화(院體畵)에 비교하며 원(元) 사대가, 명대(明代) 오파(吳派)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는 다노무라 지쿠덴이 상남폄북(尙南貶北)의 입장에서 남북종론을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그의 회화 역시 이를 반영하듯 오파와 사왕화파 화풍에 기반을 둔 산수화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중에서 생애 후기에 그린 <풍우도계도(風雨渡溪圖)>(Fig. 17), <추강풍노 시의도(秋江風怒詩意圖)>(Fig. 18), <심산연기도(尋山聯騎圖)> 등은 19세기 후반에 활동한 후배 남화가들에게 산수화의 양식적 원형을 제공한다는 의미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 작품들의 공통점은 근경에 한쪽으로 치우치게끔 배치한 언덕이나 가옥이 원경의 주산과 평행을 이루며 이로 인해 중경에 큰 강이 흐르고 있는 구도이다. 원경에 위치한 산은 단필마피준(短筆麻皮皴) 등 다양한 준법으로 그렸다. 이렇게 다양한 준법이 구사된 것은 이전 남화가들의 작품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이다. 다노무라 지쿠덴이 그림을 그릴 때 준법을 중요시 여긴 것 역시 동기창이 서화일치를 기반으로 한 남종화의 형성 요건으로서 준법을 중요하게 여긴 관점을 따른 결과로 볼 수 있다.
다노무라 지쿠덴과 가깝게 지냈던 라이 산요(頼山陽, 1781-1832)는 기무라 겐카도가 세상을 떠난 이후 교토, 오사카 문예계의 중심 역할을 한 학자이자 서화가였다. 그의 심남빈 회화에 대한 인식은 심남빈과 함께 나가사키에 왔던 청인(淸人) 화가 정배(鄭培)의 <백충도권((百蟲圖卷)>(Fig. 19) 끝에 쓴 발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정배는 심남빈의 제자답게 심남빈 화풍의 <풍모란도(風牡丹圖)>(Fig. 20)와 같은 공필화조화풍의 작품도 남겼다. 그러나 <백충도권>은 공필 위주의 ‘남빈파 회화’와 화풍상 거리가 먼 작품이다. 남빈파 회화는 구륵법과 농채 위주로 대상을 또렷하게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반면, 이 작품은 서예적인 필선과 담채가 주를 이루며 간솔한 분위기를 자아내기 때문이다.
  • 정배(鄭培)의 화훼초충 두루마리는 암기자(巖碕子)가 소장하고 있다. 정배의 화법은 심남빈의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남빈일파(南蘋一派)의 그림은 정치(精緻)하고 아름답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정배는 솔필(率筆), 윤곽선을 사용한 구륵법, 윤곽선을 사용하지 않는 몰골법을 대상에 따라 구분하여 사용했다. 게다가 그 묘사는 생기로 가득하다. 명대 서위[徐靑藤]와 진도복[陳白陽]이 남긴 화훼화의 정신을 정배가 계승했다는 것은 이 작품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34

작품 왼쪽 발문에 라이 산요는 정배가 심남빈의 계승자이긴 하지만 이 작품은 다른 화풍이라고 규정하며 명대 문인화풍 화조화가인 서위, 진도복과 연결지었다. 몰골법과 담채에서 오는 작품의 아취를 높이 평가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앞서 살펴본 다노무라 지쿠덴의 인식과 공통된 경향을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나가사키를 통해 중국의 서화가 유입되기 시작한 지 100여 년이라는 시간이 흐르면서 남종화에 대한 이해는 더욱 깊어질 수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19세기 남화가들은 동기창의 화론을 수용하여 상남폄북의 입장에서 남북종론을 추구하게 되며 초기 남화와 다른 양상을 띠게 되었다.

Ⅳ. 맺음말

심남빈은 오랜 세월동안 일본화단을 대표해왔던 가노파와 도사파 회화가 매너리즘 경향을 보이고 있을 때 일본에 건너가 길상적 의미를 더하고 세밀한 필치로 그린 화조화를 유행시켰다. 지금까지는 이 점에 초점을 맞추어 심남빈이 18세기 일본화단에 끼친 영향을 남빈파와 사생화파에 주로 한정지으며 연구되어 왔다. 한편 남화에 대한 연구는 ‘남화’와 ‘문인화’라는 용례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동아시아 문인화의 확산이라는 관점을 기반으로 바라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남화는 나가사키에서 이루어진 교역을 통해 청대 원체화가인 심남빈 회화를 수용하며 전개되었기 때문에 사대부 계급의 존재, 서화일치를 중시한 중국·조선의 문인화와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일본의 남화를 심남빈 회화의 영향을 제외하고 문인화의 동아시아 확산을 중심으로만 보는 것은 중국 문인화의 틀 속에서 재단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심남빈의 회화는 18세기 일본화단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남화의 경우에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남화가 처음 유행하던 18세기에 오히려 심남빈을 남종화의 개조(開祖)로 바라보고 회화제작에서도 그의 회화양식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다른 하나는 나가사키를 통한 중국과의 교역이 지속되고 중국회화에 대한 정보량이 늘어나면서 문인화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는 것에 기인한다. 이에 따라 19세기의 남화가들은 심남빈을 더 이상 문인화가가 아닌 원체화가로 정의내리게 되었다. 이처럼 각기 다른 인식은 서로 다른 양상의 남화를 전개시키는 데 많은 영향을 끼쳤다.
서두에서 살펴봤듯이 현재 일본의 미술사학계에서는 남화를 두고 일본회화의 특수성을 반영한 ‘남화’로 봐야하는가, 아니면 중국 문인화의 전파라는 관점에서 ‘문인화’로 봐야 하는가에 대한 의견으로 구분된 채 연구자마다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심남빈의 회화는 남화가 문인화인가, 아닌가에 대한 관념적인 논의에서 벗어나 하나의 회화 장르로서 ‘남화’ 그 자체로 바라볼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근세 일본의 남화 연구에서 화가들마다 다른 심남빈에 대한 인식은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는 데 중요한 요소로 다뤄져야 한다. 더불어 지금까지 행해져온 화파 중심의 관점에서 벗어나 개별 인물을 중심으로 유기적인 연관성을 놓고 바라봐야 당시 일본 남화의 면모를 더욱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으며 중국·조선 문인화와의 구체적인 비교 및 교류사 연구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Notes

1 특히 남화의 경우는 중국 문인화의 동아시아 전파라는 측면에서 ‘일본의 문인화’로 보거나 ‘일본의 회화’라는 특수성을 강조하여 ‘남화’ 그 자체로 보려는 상반된 시각이 있지만, 두 가지 견해 모두 기본적으로 중국 문인화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다는 점을 인식의 근간으로 삼고 있기에 하나의 화파로 여겨지고 있다. 우선 첫 번째 견해인 남화를 ‘일본의 문인화’로 보는 인식은 남화가 남종화(南宗畵)에서 파생된 용어이고, 남화파에 속하는 주요 화가들이 사대부 신분은 아니지만 유교적 교양주의에 기반한 지식인들이었다는 점을 강조한 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사사키 조헤이는 ‘남화’라는 단어가 메이지[明治] 시대의 조어(造語)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하며 ‘남화’는 이미 에도시대부터 사용되어온 단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남화’의 개념은 문인화 혹은 남종화와 동일한 개념이 아닌, 보다 넓은 의미에서 포괄적으로 사용되었고 시대에 따라 이해의 변화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남종화와 문인화를 각각 회화양식과 작자의 신분을 기준으로 규정하며 남화는 양식적 다양성으로 인해 남종화로 보기 어렵다고 하였다. 반면 남화를 문인화와 동일하게 보는 것에 대해서는 남화파 화가들의 다양한 신분 때문에 다소 무리가 있다고 하면서도 유교적 교양주의 및 노장사상에 경도된 지식인 혹은 문인정신을 갖춘 이들이 남화의 주요 제작 주체였다는 점을 근거로 ‘일본 문인화’로 보는 것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佐々木丞平, 佐々木正子, 『文人画の鑑賞基礎知識』(至文堂, 1998), pp. 95-101. 이러한 佐々木丞平, 「江戸時代 中·後期 画壇」, 『日本美術全集-大雅と応挙』 第19巻(講談社, 1993), pp. 146-150; 佐々木丞平, 「外来文化到来の時代」, 『日本美術全集』 第24巻(学習研究社, 1979), pp. 128-130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반대로 두 번째 견해인 일본 회화로서의 ‘남화’를 주장하는 견해는 요시자와 추(吉沢忠)의 논저에서 대표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그는 일본 남화는 하나의 양식으로 규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회화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단순히 남종화의 약어가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이케노 다이가[池大雅], 요사 부손[与謝蕪村]을 예로 들며 이들은 명확하게 직업화가들이기 때문에 ‘직업화가가 그린 문인화’라는 것은 성립할 수 없다고 하였다. 또한 중국에서 행해진 직업화가에 대한 문인화가들의 ‘멸시관’을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므로 일본의 남화를 두고 ‘문인화’라는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吉沢忠, 「総論」, 『水墨美術大系-日本の南画』別卷第一(講談社, 1976), pp. 39-44. 한편, 남화의 어원에 대해서는 구로가와 슈이치(黒川修一)의 의견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그는 18세기 이후 일본에 유입된 중국 회화와 화보로부터 남종적인 묘법을 의식적으로 취하는 화가들이 나타났고, 간세이[寛政] 연간(1789-1800) 무렵부터 이 화가들을 일본의 '남종'으로 인식하는 것이 두드러지기 시작했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남종 이외의 화법도 구사했기 때문에 현재는 '남종화'라 부르지 않고, 원래 약칭이었던 ‘남화’라는 용어에 약칭 이상의 이미가 부여되기 시작했다고 해석하였다. 黒川修一, 「中山高陽と『画譚雞肋』」, 『日本絵画論大成』 第6卷(ぺりかん社, 2000), pp. 298-299.

2 그의 본래 이름은 심전(沈銓)이고, 호가 남빈(南蘋)이지만 ‘심남빈(沈南蘋)’이 하나의 고유명사처럼 논저, 전시명 등에서 사용되고 있으므로 본고에서도 ‘심남빈(沈南蘋)’으로 통칭한다.

3 2001년 지바시미술관(千葉市美術館)에서 개최한 《江戸の異国趣味-南蘋風大流行》 특별전은 심남빈이 1731년에 도일(渡日)한 이후 형성된 남빈파의 회화가 18세기 일본 사생화파에 끼친 영향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한 성격의 전시였다. 이후 심남빈에 대한 인식 및 연구는 대체로 이 전시의 관점을 기반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4 심남빈의 회화가 18세기 사생화풍의 시작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오카쿠라 덴신(岡倉天心, 1863-1913)이 거론한 이후 일반적인 관점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다만 오카쿠라 덴신의 심남빈 회화에 대한 설명은 비판의 대상이었던 도쿠가와 바쿠후[幕府]에 의해 에도의 예술이 경직된 반면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준 교토의 자유로운 학예경향을 부각시키기 위한 배경에서 비롯된 것이다. 오카쿠라 덴신은 심남빈의 회화로부터 시작된 사실주의 경향이 교토 사생화파의 성립을 지나 메이지시대에 ‘현대 일본미술’이 나오기 전까지 회화를 이끌어온 ‘창조적 정신’이 되었다고 높게 평가하였다. 오카쿠라 텐신, 정천구 역, 『동양의 이상』(부산: 산지니, 2011), pp. 198-201.

5 18세기 일본에서 유행한 남빈파(南蘋派) 회화, 양풍화(洋風畵) 모두 도우가[唐画]의 영향이라는 큰 틀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보고 교토(京都)·오사카(大阪)의 사생화파, 에도(江戸)의 남화파·수묵화파 등의 성립과 유행에 대해 살펴 본 최신 연구로는 伊藤紫織, 「江戸時代の唐画」, 東京大学 大学院 博士論文(2013)이 있다. 그리고 일본의 근세회화를 화파별로 연구하는 점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감해주시고 사료 번역 등 여러모로 검 토해주신 쓰루문과대학(都留文科大学)의 가토 히로코(加藤弘子)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린다.

6 에도시대에는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에도와 교토를 오가는 도카이도 등 주요 5개의 가도와 14개의 지선 도로로 다니는 여행이 크게 유행했다. 정치적, 군사적인 목적으로만 여행했던 중세에 비해 17, 18세기는 사원 참배, 하이쿠 시인들의 여행 등 사적 목적의 여행이 성행하게 되었다. 자연스럽게 도로를 중심으로 숙박업 등 상업활동이 촉진되었으며 미술에서는 여행지의 실경을 그리고 외국 미술 견문을 하는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 근세 일본의 여행에 대해서는 크리스틴 구스, 강병직 옮김, 『에도시대의 일본미술』(예경, 2004), pp. 165-186; 다카하시 치하야, 김순희 옮김, 『에도의 여행자들』(효형출판, 2004) 참조.

7 田能村竹田, 『竹田莊師友畵錄』 上卷, “崎鎭每歲春秋兩次, 修書畵會. 一時善書畵者, 無 士女少長咸到. 如各國文人逸士, 亦聞風來會. 滿堂喧闐, 雲蒸霞蔚, 大極一日之觀矣. 日後收所獲之諸幅, 著錄作者姓名籍里, 更爲一冊, 錄梓分送四方也. 万載與逸雲, 特可其盟云.”

8 고노 모토아키(河野元昭)는 에도시대에 간행된 화론서를 분석하여 사생의 개념을 생의사생(生意写生), 객관사생(客観写生), 정밀사생(精密写生), 대간사생(対看写生)으로 구분하였다. 고노 모토아키는 이 구분에 근거하여 중국 원체화풍의 정교하고 세밀한 화법과 서양화법을 사용하여 사실적으로 풍경을 재현하는 화법 모두 사생이라는 큰 범주 속에 포함시켜 바라볼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河野元昭, 「江戸時代 「写生」 考」, 山根有三先生古稀記念会 編, 『日本絵画史の研究』(吉川弘之館, 1989), pp. 387-403.

9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 재위 1716-1745)가 양서(洋書) 규제를 완화한 이후 일본에서 란가쿠[蘭学]가 유행할 수 있었다. 이에 따라 서양의 다양한 지식과 동판화 등의 회화가 유입되었으며 일본화단에서는 이에 반응하여 아키타 난가[秋田蘭畵]라는 새로운 회화 장르가 시작되었다. 강민기, 「에도 후기의 서양미술 인식아키타 난가(秋田蘭畵) 연구」, 한정희, 이주현 외 지음, 『근대를 만난 동아시아 회화』(사회평론, 2011), pp. 201-226 ; 이종찬, 『난학의 세계사』(알마 출판사, 2014); 강덕희, 「동아시아에서 서양화법의 도입과 전개」, 서강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박사학위논문, 1999, pp. 51-155 참조.

10 兒島薰(Kojima Kauru), 정다움 역, 「18세기 일본의 西洋繪畵 受容: 중국의 文化的 影響하에서」, 『미술사연구』 23(미술사연구회, 2009), pp. 118-119.

11 심남빈 작품이 지닌 길상성에 대해서는 박보나, 「江戸 中·後期 화단의 南蘋派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2020), pp. 18-21 참조.

12 17세기 초 황벽종 승려의 도일(渡日) 이후 나가사키로 유입되기 시작한 중국 강남지방의 문화는 일본 지식인 계층의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심을 자극하였다. 그리고 나가사키와 함께 새로운 번영기를 맞이한 교토, 오사카 등 關西지역에 문인취향을 형성시키는 데 일조하였다. 크리스틴 구스, 강병직 옮김, 앞의 책, pp. 154-155.

13 심남빈 화풍이 나가사키에서 다른 지역으로 전파된 것을 문헌에서 확인할 수 있는 사례는 우에다 아키나리(上田秋成, 1734-1809)가 작성한 『あしかびのことば』에서 확인할 수 있다. 『あしかびのことば』는 우에다 아키나리가 기무라 겐카도와 교유하며 그와의 일화에 대해 적은 것으로, 유히(熊斐, 1712-1773)에게 심남빈 화풍을 배운 가쿠테이(鶴亭, 1722-1786)가 오사카(大阪)에 심남빈 회화를 전달한 최초의 화가라는 기무라 겐카도의 말을 전하고 있다. 小林忠, 『江戸の絵画を読む』(ぺりかん社, 1998), p. 70.

14 근세 교토화단에서 유행한 <공작도>에 내재된 사생성과 20세기 초반 중국 미술계의 일본 사생화풍 수용에 대해서는 배원정, 「20세기 중국의 工筆花鳥畵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17), pp. 126-153 참조.

15 小林忠, 「伝統への復元-江戸琳派と復古大和絵派の場合」, 『日本美術全集-大雅と応挙』 第19巻(講談社, 1993), pp. 165-166; 나미키 세이시(並木誠士), 이장훈 역, 「호림박물관 소장 일본회화에 대하여」, 『일본회화의 거장들』(호림박물관, 2018), p. 180.

16 이장훈, 「타노무라 치쿠덴(1777-1835)의 회화와 19세기 關西 문인화단」, 고려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13), pp. 32-40.

17 각주 1번 참조.

18 조선과 일본의 문인화 수용 양상에 대해서는 1763년 통신사 수행화원으로 일본에 건너간 김유성(金有聲, 1725-?)과 일본의 와타나베 겐타이(渡辺玄対, 1749-1822)가 만난 일화를 통해 대표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와타나베 겐타이는 명대 심주(沈周)를 배우려고 했다는 김유성에게 심남빈 그림을 본 적이 있는지 물었지만 김유성은 없다고 답하였다. 중국과 조선은 거리가 가까운데도 못본 이유를 묻는 와타나베 겐타이에게 김유성은 육로를 통해서만 중국 화적(畵籍)이 유입되므로 그 양이 많지 않아 그런 것 같다고 대답해주었다. 이 일화를 통해 주로 육로를 통해 중국과 교류한 조선, 해로를 통한 일본에 유입된 화적의 내용이 서로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입된 화적의 차이는 양 국가의 화단이 서로 다른 회화경향을 갖게 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 일화에 대해서는 김영남, 앞의 논문, pp. 116-117 참조.

19 이 표는 남화를 문인화로 보는 관점과 일본 회화의 특수성을 강조한 관점 모두 사용하고 있는 구분에 의한 것으로, 두 관점을 대표하는 연구자들인 사사키 조헤이, 요시자와 추의 논저를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佐々木丞平, 佐々木正子, 앞의 책, pp. 95-101; 吉沢忠, 앞의 책, pp. 39-44.

20 다니 분초 회화에 대한 평가는 시대별로 구분된다. 우선 다니 분초가 활동한 시기인 19세기에는 그에 대해 북종화를 잘 그리는 화가로 평가하였다. 다니 분초에게 그림을 배운 적이 있는 다노무라 지쿠덴은 다니 분초에 대해 “붓놀림이 강하고, 채색은 진하다. 생각하건대 복고를 목적으로 한 것이다. 산수화는 마원·하규의 북종화를 배웠고, 예찬·황공망의 남종화법은 즐기지 않았다(用筆遒勁, 賦色濃厚. 其意蓋在復古也. 學馬夏輩, 不悅倪黃諸法).”고 평가한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와 같은 관점은 다니 분초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1850년대부터 근대까지 지속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다니 분초는 『古今南畵要覽』(1853)에서 ‘남북합법(南北合法)’으로 구분될 때도 있지만 대체로 남종화, 문인화와는 다른, 별도의 화파로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1928년에 간행된 『日本美術書画便覽』에서는 남빈파, 문인파, 다음에 분초·가잔파(文晁·華山派)로 되어 있고, 『日本書畫人名辭書』에서는 마루야마파(円山派), 시조파(四條派), 고린파(光琳派) 등과 함께 분초파(文晁派)로 따로 구분되어 있으며, 그 다음에 ‘남종제가(南宗諸家)’라는 큰 카테고리 아래 다이가토파(大雅堂派), 부손파(蕪村派), 지쿠덴파(竹田派), 카잔파(華山派) 등이 나열되어 있다. 즉 다니 분초는 활동할 당시부터 근대까지 문인화와 다른 회화 경향을 지닌 화가라는 정체성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사사키 조헤이가 다니 분초를 에도 문인화가로 구분하며 평하길 “문인화의 범위가 다니 분초로부터 확장되었다”고 한 점을 볼 때, 다니 분초가 문인화파 혹은 남화파 화가로 편입된 것은 20세기 중반 이후 미술사연구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田能村竹田, 『山中人饒舌』 上卷; 芳賀登 編, 『日本美術書画便覽』, 『日本人物情報大系』 第65券(皓星社, 2001), pp. 552-554; 杉原夷山 編, 『日本書畫人名辭書』 正編(松山堂, 1926-1929), pp. 317-319; 佐々木丞平, 앞의 논문, p. 146 참조. 『古今南畵要覽』(1853)의 분류에 대해서는 황빛나, 「‘南畵’ 탄생 - 용어의 성립 시기 및 개념 변천에 관한 小考」, 『미술사논단』 41(한국미술연구소, 2015), pp. 200-202 참조.

21 김영남, 「기무라 켄카도(1736-1802)의 회화 연구: 18世紀 大坂畵壇의 朝·淸 總畵交流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대학원 문화재학협동과정 미술사학전공 석사학위논문(2005), p. 121 재인용. 木村蒹葭堂, 『建氏畵苑』(大阪中之島圖書館本), “近世淸人沈衡齋航海擊傳翎毛花卉之法, 無名太振, … 而吾邦之繪事始爲兩途彼唱南宗者沈氏其蒿失哉.”

22 김영남, 「기무라켄카도(木村蒹葭堂, 1736-1802)의 繪畵 硏究」, 『미술사학』 21(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7), pp. 131-133; 크리스틴 구스, 강병직 옮김, 앞의 책, pp. 144-146; サントリー美術館 圖錄, 『生誕 250周年 谷文晁』(東京: サントリー美術館, 2013), pp. 190-191.

23 이장훈, 「타노무라 치쿠덴(田能村竹田, 1777-1835)의 중국 회화 수용, 그 이상과 실제」, 『미술사학연구』 287 (한국미술사학회, 2015), pp. 110-116; 김영남, 앞의 논문, pp. 136-139.

24 박윤희, 「이케노타이가(池大雅)의 문인화에 대한 이해와 실제」, 『미술사학연구』 255(한국미술사학회, 2007), pp. 201-208.

25 倉野煌園 輯, 『鉄翁画談』, “池大雅の如きに至りては、曾て淸人伊孚九を慕ひし時は其の畵正しくして情神雅趣共に備はりたりしが後に一變して異風を生じ遂に放逸の筆と爲れ.”

26 이케노 다이가는 일생에 걸쳐 후지산 실경도를 여러 차례 그렸는데 현재 전해지는 작품만 30여 점에 이른다. 이외에도 고 후요(高芙蓉, 1722-1784), 간 텐주(韓天寿, 1727-1795)와 함께 교토에서 출발하여 일본의 서부 해안을 따라 여행하며 소위 ‘삼악(三岳)’이라 불리는 하쿠산[白山]·다테산[立山]·후지산[富士山] 중심의 <삼악기행도(三岳紀行圖) 8폭병풍>을 그리는 등 다수의 진경도를 제작하였다. 요사 부손 역시 하이쿠 시인인 마쓰오 바쇼에 대한 경의의 뜻을 담아 직접 답사하며 지역의 풍속을 그린 <오쿠노호소미치[奥の細道]>를 남긴 바 있다.

27 이케노 다이가가 도일 청인 화가들 중에 심남빈이 아니라 이부구(伊孚九)를 통해 청대 사왕화풍 회화를 배워 자가화법을 완성한 점에 대해서는 박윤희, 앞의 논문, p. 213 참조. 이케노 다이가의 진경도에 대해 18세기 동아시아 실경산수화 유행의 확산의 측면에서 해석한 연구로는 한정희, 최경현, 『사상으로 읽는 동아시아의 미술』(파주: 돌베개, 2018), pp. 302-303 참조.

28 박은순, 「에도시대 朝鮮 繪畵의 收藏과 鑑評」, 『미술사학』 40(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20), p. 103의 각주 6.

29 田能村竹田, 『竹田莊師友畵錄』, “態勇, 字秋琴. 長崎鎭人. 家鎭之波当場. 有樓, 面干海. 稲山秀色, 可坐而餐也.軒窓爽敞, 几榻雅潔. 構造位置, 一撫唐山. 故一登覽, 則如身到吳門, 訪文人韻士, 坐其蕭齋淨室內. 使人頓消世盧塵念矣. 予在崎鎭, 殆一歲許. 寓斯樓之日爲多. 晨夕對晤, 論詩評畵, 午軒撰茶. 夜燭溫酒.”

30 이장훈, 앞의 논문, pp. 91-116.

31 다노무라 지쿠덴과 일본의 고문사파(古文辭派)인 소라이학(徂徠學)의 영향관계에 대해서는 宗像健一, 「『師友画録』の周辺-‘竹田における復古」, 『竹田とその交友たち』展 圖錄(大分: 大分県立芸術会館, 1994); 米澤嘉圃, 「田能村竹田と蘐園學派 上」, 『國華』 540號(東京: 國華社, 1935); 米澤嘉圃, 「田能村竹田と蘐園學派 中」, 『國華』 541號(東京 : 國華社, 1935) ; 米澤嘉圃, 「田能村竹田と蘐園學派 下」, 『國華』 542號(東京: 國華社, 1936) 참조.

32 田能村竹田, 『山中人饒舌』, “時史花卉翎毛, 多從沒骨法. 蓋沈南蘋後始盛. 南蘋名銓字衡齋, 吳興人. 享保中應徵到長崎鎭進畵數幅. 賞賚甚夥. 銓畵勾染工整, 賦色濃艶. 時昇平日久, 人漸厭雪舟狩野二派. 故一時悉称南蘋, 翕然爭趨失. 銓傳法於崎人態斐. 斐傳諸江戸人宋紫石. 紫石子紫山世其業矣.”

33 田能村竹田, 『山中人饒舌』, “應安以來, 如雪周文雪舟元信數子, 師資相受, 比肩互起主張繪事. 筆墨遒勁, 氣格雄偉, 名嗚百世. 然其所傳, 宋時院體, 不及元四大家, 若明石田衡山諸老. 及ばず。故本邦於趙松雪所論士夫畵者, 未得其傳. 惜哉. 董玄宰有言, 若馬夏及李唐劉松年, 又是大李將軍之派, 非吾曹当學也.”

34 “鄭培花卉草蟲卷, 巖碕子所藏. 鄭畵出於沈南蘋. 沈一味工緻姸麗而己. 鄭則時用率筆勾勒沒骨隨物互拖而生機躍然. 蓋有窮於靑藤白陽之遺意者, 觀此卷可見.”

Fig. 1.
大原東野,『名数画譜』, Ohara Toya,Meisu Gafu, 1820, Waseda University Library (Photo from Waseda University Library, チ03 035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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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石崎元章, <倣沈鈿花鳥圖屛風>, Ishizaki Gensho, Flowers and Birds after Shen Nanpin, Mid-Edo period, Pair of six-panel screens, color and gold leaf on silk, Each 130.0×50.9cm, Nagasaki Prefectural Museum (Photo from The Nanpin school : the fascination with the exotic in Edo-period painting, pp. 24-25, pl.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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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沈南蘋, <丹鳳朝陽圖>, Shen Nanpin, Phoenix in the Morning Sun, Ca. 1735-1795, Hanging scroll, color on paper, 212.3×108.3cm, Yurinkan Museum (Photo from The Nanpin school: the fascination with the exotic in Edo-period painting, p. 22, pl.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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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円山応挙, <牡丹孔雀圖>, Maruyama Okyo, Peony and Peacock, 1767, color n silk, 130.4×98.8cm, Imperial Household Agency in Japna (Photo from Nihon Bijutsu Zenshu, Vol. 24, pl.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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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長沢芦雪, <牡丹孔雀圖>, Hasegawa Rosetsu, Peony and Peacock, 1782, color and gold leaf on paper, 166.9×184.6cm, Joe and Etsuko Price Collection(Photo from JAKUCHU: The Price Collection and The Age of Imagination, p. 81, pl.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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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石崎融思, <瓊浦華蘭進港圖>, Ishizaki Yushi, Foreign ships entering Nagasaki harbor, 1820, color on silk, 84.2×147.8cm, Nagasaki Museum of History and Culture (Photo from Nagasaki Museum of History and Culture, 絵(長崎)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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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長崎港と湾の眺望>, View of Nagasaki’s harbor and bay, Ludwig Mikhail Nadel, Nippon, 1852, paper book printing, 39.5×59.5cm, Kyushu National Museum(Photo from Kyushu National Museum, YA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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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田中訥言, <仁德天皇圖>>, Tanak a Totsugen, Emperor Nintoku, 19th century, color on silk, 101.0 ×32.0cm, Horim Museum (Photo from Masters of Japanese Painting, p. 98, pl.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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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柳沢淇園, <蘭花果実圖>, Yanagisawa Kien, Orchid and Fruits, 18th century, Hanging scroll, color on silk, 57.6×37.9cm, Private collection (Photo from Exhibition Yanagisawa Kien : bunga no shi, shinki no gaka, The Museum Yamato Bunkakan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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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張爲邦, <歲朝圖>, Zhang Weibang, Suìzhāo, Qing Dynasty, Hanging scroll, color on silk, 137.3×62.1cm, The Palace Museum, Beijing (Photo from Three Thousand years of Chinese Painting, p. 289, pl. 2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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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柳沢淇園, <雪中梅花小禽 圖>, Yanagisawa Kien, Plum Blossom and Birds in Snow, 18th century, Private collection (Photo from The Museum Yamato Bunkakan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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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鶴亭, <雪梅圖>, akutei, Plum Blossoms in Snow, 1755, ink on silk, 120.6×49.2cm, Kobe City Museum (Photo from Kobe City Museum Websi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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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鶴亭, <怪石牧丹花鳥圖>, Kakutei, Peony, Flower, Bird and Oddly Shaped Stone, 1769, color on silk, 105.2×43.5cm, Kobe City Museum (Photo from Kimura Kenkado: Naniwa chi no kyojin: tokubetsuten botsugo 200-nen kinen, pl.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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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木村蒹葭堂, <花鳥墨蘭怪石圖>, Kimura Kenkado, Flower, Bird, Orchid and Oddly Shaped Stone, 1769 (Photo from A Study on paintings of Kimura-kenkado, pl.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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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谷文晁, <孔雀圖>, Tani Buncho, Peacock, 19th century, color and gold leaf on paper, 125.5×241.0cm, Ueno Memorial Hall (Photo from Tani Buncho, p. 166, pl. 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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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与謝蕪村, <枯木 叭叭鳥圖>, Yosa Buson, Hahacho Birds on a Old Tree, 18th century,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144.4× 46.0cm, Suntory Museum of Art (Photo from Celebrating Two Contemporary Geniuses Jakuchu and Buson, p. 159, pl.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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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田能村竹田, <風雨渡溪圖>, Tanomura Chikuden, Cross Valley in the Storm, 1827,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136.1×47.6cm, Private collection (Photo from Tanomura Chikuden kihon gafu, pl.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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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田能村竹田, <秋江風怒詩意圖>, Tanomura chikuden, Windy Scene in Autumn, 1826,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125.8×36.2cm, Idemitsu Museum of Art (Photo from Tanomura Chikuden in The Idemitsu Collection, pl.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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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鄭培, <百蟲圖卷>, Teibai, Insect Amid Flowers and Grasses, Ca. 1723-1795, color on silk, 33.5×483.7cm, Nagasaki Prefectural Museum (Photo from The Nanpin school: the fascination with the exotic in Edo-period painting, pl.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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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鄭培, <風牡丹圖>, Teibai, Peonies in the Wind, Ca. 1723-1795, color on silk, 99.5×41.8cm, Kobe City Museum (Photo from The Nanpin school: the fascination with the exotic in Edo-period painting, pl.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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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일본 남화(南畵)의 시기별 분류(The Periodic of Japanese Nanga)19
Mid-Edo Period The Formation of Nanga 남화의 성립
Sakaki Hyakusen(彭城百川, 1698-1752)
Hattori Nankaku(服部南郭, 1683-1759)
Yanagisawa Kien(柳沢淇園, 1703-1758)
Kion Nankai(祗園南海, 1677-1751)
The Completion of Nanga 남화의 완성
Yosa Buson(与謝蕪村, 1716-1784)
Ikeno Taiga(池大雅, 1723-1776)
Kimura Kenkado(木村蒹葭堂, 1736-1802)
Late Edo Period The Spread of Nanga 남화의 확산
Kansai Nanga(関西南画) Kanto Nanga(関東南画)
Urakami Kyokudo(浦上玉堂, 1745-1820) Watanabe Kazan(渡辺崋山, 1793-1841)
Okada Beisanjin(岡田米山人, 1744-1820) Tani Buncho(谷文晁, 1763-1841)
Tanomura Chikuden(田能村竹田, 1777-1835) Tsubaki Chinzan(椿椿山, 1801-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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