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전반 일본의 만주지역 요업 확장과 식민지적 운용*
Expansion of Japanese Ceramic Industry in Manchuria and Colonial Exploitation in the Early 20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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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청말민초 중국의 주요 산업 중 하나였던 요업이 침체되자 중앙정부는 복원 차원에서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근대식 시스템을 지향했던 자업공사의 설립 등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의 근대화 노력과는 별개로 일본은 대중 무역 확장을 목적으로 일본 자기를 대거 수출하여 중국 시장을 장악하였다. 더 나아가 만주에서 채취되는 자원을 활용하여 대외 침략에 필요했던 막대한 물자 수요의 충족을 위해 남만주철도주식회사 부속 중앙시험소의 요업부를 설치하여 중화학용 도자를 대량 생산하였다. 또한 동북지역에 거주했던 일본인들을 위한 생활 자기의 공급을 위해 일본의 근대식 제자업(製瓷業) 교육이 중국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지면서, 표면적으로 동북지역의 요업은 여러 양상으로 확장된 모습을 보인다. 비록 생산량과 유통 규모, 기술 및 설비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지만, 이는 일본 요업에 필요했던 원료와 생산품의 유통, 동북 요업의 노동자에 대한 일본의 가혹한 착취에 기반해 성장했을 뿐이며, 일본의 대중 식민정책의 주요 골자라고 할 수 있다.
Trans Abstract
Towards the end of the Qing Dynasty and into the early Republic of China, the ceramics industry, a vital component of China’s economy, faced stagnation. In response, the central government embarked on modernization efforts to rejuvenate the industry, achieving tangible progress such as establishing modern systems through the Porcelain Company. Despite these efforts, Japan aggressively exported goods to China, aiming to expand its trade and dominate the Chinese market. Additionally, the ceramics department within the central laboratory of the South Manchurian Railway Company was established to mass-produce ceramics for heavy chemical use, utilizing resources from Manchuria to meet the substantial material demands for foreign invasions. Furthermore, modern Japanese apprenticeships were extended to Chinese laborers to meet the daily ceramic needs of Japanese residents in the northeastern region. Thus, on the surface, the ceramics industry in the Northeast appeared to have expanded in various aspects.
The Chinese ceramics industry underwent significant changes in production scale, distribution, technology, and infrastructure. However, these developments were not the result of natural growth but rather arose from the allocation of raw materials and products essential for Japan’s ceramics sector. Moreover, they were fueled by the harsh exploitation of laborers in the northeastern ceramics industry, serving as a key aspect of Japan’s broader strategy of mass colonization.
Ⅰ. 머리말
오늘날 길림성, 요녕성, 흑룡강성, 내몽골을 중심으로 한 중국 동북지역은 중국의 요업사 측면에서 봤을 때, 전통적인 요업의 중심지가 아니었다. 역대로 이 지역을 차지했던 가장 강성한 세력인 거란과 여진의 지배하에 있을 때도 유목민족의 풍습과 특징에 내재된 독자적인 도자문화는 이룩하였지만, 대부분 연유도기나 흑유, 백유도기 등 저화도 위주의 생산품 위주였다. 즉 청자와 백자 중심의 중원지역 자기에 버금가는 질 좋은 상품은 생산하지 못했다. 그 배경에는 우선 품질 좋은 자석(磁石)의 채굴 문제는 차치하더라도, 요업의 특성상 오랜 기간에 걸쳐 구축되어야 하는 요업 관련 인프라의 미비가 가장 크다고 볼 수 있다. 동북지역 요업 기술의 낙후된 상황은 만주족의 국가였던 청대까지도 지속된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20세기 초 청말민초를 기점으로 그 양상에 변화가 생긴다. 전통 수공업 방식에서 근대 요업의 형태로 전환되었고, 만주국시기에 접어들면 일명 만주지역의 요업은 크게 확장되어 만주의 대표 산업으로 성장하기에 이른다. 만주의 요업 성장에는 1910년 설립된 남만주철도주식회사(南滿洲鐵道株式會社, 이하 만철) 부속 중앙시험소의 요업과(窯業科)로 인해 더욱 박차가 가해졌다(Fig. 1). 잘 알려졌다시피 일본이 동북지역 요업 확장에 적극 나선 목적은 일본의 대외 침략에 필요했던 막대한 물자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만주를 일본 침략전쟁의 병참기지로 만들기 위한 의도의 결과로 볼 수 있다.
반면 청말민초 외세 열강의 침략과 내부적으로 붕괴된 청조의 상황은 빠른 속도로 중국의 경제침체를 가져왔고, 강서성 경덕진을 위시한 복건, 광동 등 전통적인 요업의 중심지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국가 차원에서 자주 근대화를 위한 요업의 복원 시도가 이루어졌고, 일정 수준의 성과도 나타났다. 당시 중국 요업의 근대화는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했던 중국 내 일본 자본의 요업에 맞설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로 작동하였다. 예컨대 중국 내 항일 의사로 추앙받는 두중원(杜重遠, 1895~1943)은 1923년 봉천성(奉天省, 현 요녕성)에 봉천조신요업공사(奉天肇新窯業公司)를 설립하여 일본 기업의 독점을 저해하고자 하였다(Fig. 2). 그렇지만 만주 지역을 병참 기지화하여 모든 자원을 수탈하고자 했던 일본은 만주국 시기 동북 요업을 계속 확장하였고, 이는 중국 요업은 물론 산업화에 음과 양으로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1
중국의 요업 기술과 잠재적인 광물 자원에 대한 깊은 관심으로 촉발된 일본의 중국 요업 관여는 20세기 초 청조 말기에 시작되어 만주국이 패망하는 1940년까지 지속된다. 이에 본 연구는 20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일본의 중국 동북지역 요업 관여와 확장이 중국을 식민통치하는데 어떤 작용을 하였는지 주목하고자 한다. 식민통치를 위해 일본은 왜 요업을 중시했으며, 또 전통적으로 요업의 중심지가 아니었던 동북지역, 즉 만주에 요업을 확장했는지도 살펴볼 것이다. 이는 만주 일대 요업의 형성이 중국을 비롯하여 한반도 식민지화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볼 수 있는 전제적 조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Ⅱ. 청말민초 요업의 근대화와 일제의 요업 관여
중국의 요업은 전통적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최대 규모의 수공업 산업이었다. 일찍이 전국 각지에서 요업이 형성되어 체계적으로 운영되면서, 세계 최고 수준의 자기를 생산하였다. 그러나 18세기 후반경부터 유럽이 본격적으로 산업형 자기를 대량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국제시장에서 그 지위가 점차 축소되었고, 급기야 19세기 중반 아편전쟁으로 중국 시장이 개방되면서 유럽 및 일본의 자기에 밀려 국내시장마저 잃게 되었다. 연이어 1850년부터 약 14년간 중국 남부지역에서 일어난 태평천국운동은 번화한 도자기의 도읍이었던 경덕진에 큰 피해를 입혀 도자기 생산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2 게다가 서양 열강의 침략과 청나라 정부의 부패는 경덕진으로 대표되는 중국의 도자기 산업을 오랫동안 침체에 빠뜨리게 된다. 이는 자연히 전통 산업 시스템의 경쟁력이 저하되어 중국 경제에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경덕진 도자의 무역량 감소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 아래 도자기 산업의 부흥은 경덕진의 관련 이해 관계자가 공동으로 추구하는 목표가 되었다.
당시 중국 정부가 추구한 도자기 산업 부흥의 핵심은 서양을 배워 기계화 생산 모델을 도입하며 신식(新式)의 산업용 도자 기업을 설립하는 것이었다.3 1895년 청일전쟁 끝에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은 메이지 일본의 대륙 침략을 본격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역설적으로 많은 중국의 지식인들이 중국의 전통적인 수공업 모델이 낙후되어 있음을 깨닫고 서양을 본받아 전면적인 부흥 정책을 펼치게 되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경덕진 또한 현대 도자 산업의 개혁을 단행하였다. 청대 말기의 정치가이자 양무파(洋務派)의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던 호광총독(湖廣總督) 장지동(張之洞, 1889~1907)은 광서22년(光緖22年, 1896) 청 정부에 서양식의 산업화된 신식 자기회사 설립의 지원을 요청하고, 세금 문제에 특권을 부여하도록 노력하였다.4 청말 신식 자기공장의 설립이 논의된 것을 발단으로 경덕진 요업에 서양식 기계화 생산라인 모델을 채택하는 문제는 경덕진 요업 부흥의 중요한 요건이 되었다. 그러나 청 말기 정치 사회적으로 어려웠던 상황에서 요업의 근대화는 바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럼에도 중국 요업의 부흥은 꽤 시급한 문제였기에 강서성 지방정부는 청 중앙정부에 자기공장의 설립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광서29년(1903) 강서순무(江西巡撫) 가봉시(柯逢時, 1845~1912)는 ‘공예를 진흥하여 이권을 보호한다[振興工藝,而保利權]’를 주창하며, 관이 은 10만 냥을 조달하고 나머지는 도가 자체적으로 주식을 모아 강서자기공사(江西瓷器公司)의 설립을 제안하였다.5 즉 정부와 민간 합작 형태로 근대식 자기공장 설립의 초안이 구상되었다. 동년 3월 은 10만 냥을 조달하고 손정림(孫廷林)을 파견하여 도자기 회사를 설립하도록 하였으며, 그해 경덕진에 가마터를 건설하고 노동자를 모집하기 시작했다.6 그러나 조정에서 예상대로 자금을 조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래 계획된 ‘10만 냥’은 ‘1만 냥’에 불과하고 자체 자금 조달 과정도 순조롭지 않아 강서자기공사의 운영은 잠시 주춤하게 되었다.7 광서33년(1907)에 이르면, 양강총독(兩江總督) 단방(端方, 1861~1911)은 청 조정에 경덕진자기공사의 운영을 관민합작에서 민간으로 전환해야 경쟁력이 있음을 상소하였다.8 당해 청 조정은 <강서자업공사(江西瓷業公司)>를 설립하였고, 단방의 상소대로 민간 운영으로 전환되었다. 선통원년(宣統元年, 1909)에 드디어 정부의 설립 인가가 승인되었고, 그 이듬해인 선통2년(1910) <강서자업공사(江西瓷業公司)>의 명칭으로 정식 설립되었다. 이때 장계직(張季直, 1853~1926), 원추항(袁秋航), 서화군(瑞華君)과 같은 사회 저명 인사의 투자와 하북, 호북, 강소, 안휘, 강서 등 5개의 성(省)이 공동으로 자금을 조달하여 총 20여만 위안이 투자되었다.9 조정에서 인가된 근대식의 자업공사 설립으로 기존의 청 황실 관요어요창은 자업공사로 귀속되었고,10 당시 안휘성 기문현(祁門縣)의 공생(貢生) 강특장(康特璋, 1877~1946)을 초빙하여 경영을 일임하도록 하였다.11
당시 중국 정부가 근대식 자기공장을 설립하기 위한 배경에는 가봉시의 상소처럼 ‘권익을 보호하고 이윤을 창출하며 산업을 발전’하기 위한 목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중국을 침략한 열강은 여러 차례의 전쟁을 통해 청나라 정부에 불평등 조약을 체결하도록 강요하여 많은 특권을 빼앗았다. 외국 상인들은 경덕진에 공장을 설립하여 도자기를 제조하려고 여러 차례 시도했으며, 이권 상실을 피하기 위해서는 도자기 회사 설립이 필수적인 상황이었다. 즉 경덕진의 이권을 청 정부가 스스로 보호하지 않는다면, 청 경제의 몰락이 현실이 되는 상황에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새로 설립된 강서자업공사는 공장 운영의 조직 시스템을 비롯하여 생산 장비, 제품 유형 등 모두 경덕진의 전통 요업과 차별을 두며 전방위적으로 근대식 산업 시스템을 지향하였다(Fig. 3). 강서자업공사를 위시하여 광서-선통년간 청 정부의 주도로 중국 각지에 근대식 요업 공장이 설립되었다. 근대 요업공장의 주목적은 요업의 개량화로 원료, 생산설비, 요도구의 개선 및 개량에 있었다. 이에 광서30년(1904) 복건성에 하문복건보화제자유한공사(廈門福建寶華製瓷有限公司)를 설립하였고, 광서31년(1905)에는 산동성의 치박도자공예전습소(淄博陶瓷工藝傳習所), 광서32년(1906)에는 호남성에 호남자업공사(湖南瓷業公司)를 설립하였다(Fig. 4).12
한편, 중국 정부의 자체적인 요업 근대화 노력과는 별도로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 일본 정부는 중국 요업을 시찰하고 조사하는 대대적인 작업에 착수하였다. 이때는 일본의 도예 관련 업자들에게 중국 시장에 대한 흥미가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로 메이지31년(1898)농업 상공부가 대중(對中) 무역 확장을 위해 중국 상공업 시찰단을 파견했다. 구체적으로 일본 도자기 판매의 판로확보와 중국 문화재 약탈을 위한 목적이 가장 컸다. 예컨대 대표적으로 1898년 교토시도자기시험소(京都市陶磁器試験所) 소장 후지에 나가타카(藤江永孝, 1865~1915)가 중국에 파견되어 중국 요업을 조사하였고, 그중 경덕진에 머물면서 경덕진 경영과 조직, 원료와 안료, 제작방식, 유통, 수출 문제 등을 자세히 다룬 보고서를 1900년 2차례에 걸쳐 출판한 바 있다.13 미노(美濃) 출신의 도예가이자 도자기 관련 사업으로 명성을 떨친 카토 스케사부로(加藤助三郎, 1857~1908) 역시 메이지 31년(1898) 중국을 방문하여 경덕진은 물론 광주 지역의 요업공장, 광동 석만요, 강소 의흥요의 요업을 시찰하고, 대만 등 유통 및 판로와 관련된 지역을 조사하여 보고서로 출판하였다.14 이들은 일본 도자기의 대중 수출 문제를 중요한 현안으로 여겨, 중국 내 자기 산업의 현황과 일본자기의 판로를 파악하는데 상당한 관심을 두었다. 후지에 에이코우에 따르면, 19세기 중국의 도자기 생산이 국내 수요를 충족시키기에 충분하지 않을 정도로 떨어진 상황이었다. 당시 일본에서 수입한 것을 제외하면 중국 4억 인구는 오로지 국내 유일의 제조지인 경덕진에 의존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 내 도자기 수요가 연간 약 300만 위안에 달하지만, 경덕진의 도자기 생산액은 연간 약 250만 위안 정도에 그치므로 일본 도자기를 수출한다면 중국이라는 큰 시장을 점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였다.15 카토 스케사부로 역시 당시 일본이 대중무역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지 않음을 지적하며, 중국으로의 판로를 넓힌다면 생산 품질이 일정하지 않은 일본 도자기의 질적 향상을 기대해 볼 수 있으며 해외 무역상품으로 가장 중요한 제품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다.16 이들의 중국 요업에 대한 조사는 일본의 대중 도자무역에 중요한 참고 자료를 제공하여, 20세기 초반에 이르면 중국은 일본의 최대 도자기 수출국 중 하나가 되었다.
후지에 에이코우나 카토 스케사부로 외, 요업기술자였던 쿠로다 세이칸(黒田政憲, 1870~1918),17 상해해외실업연습생 신분이었던 이시구로 히데히사(石黒秀久)18 등 다수의 일본 요업관계자들이 중국을 방문하여 중국 경덕진을 비롯한 여러 지역의 요업 상황을 관찰하거나 중국내 소비되는 일본도자기의 현황 및 가격, 일본 도자의 판로 등을 조사하였다. 당시 거의 유일하게 요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던 경덕진을 중심으로 일본이 행한 정밀한 조사와 분석은 중국 도자기 산업의 면모를 보완한 일면도 있다. 하지만 본질은 일본의 대중(對中) 경제 및 자원 침탈을 목적으로 한 산업 조사 성격으로 일본의 대외 침투 및 확장의 중요한 일환으로 작용되었다. 이는 민국시기부터 만주국시기까지 일본이 중국 요업을 수탈하는데 유리한 근거를 제공하였을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 경덕진을 비롯한 민족산업자본의 발달을 억제하고 요업을 식민지산업으로 육성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된다.
Ⅲ. 민국-만주시기 일본의 만주지역 요업확장을 통한 식민지적 운용
1. 만주지역의 요업 형성과 배경
중국의 요업은 청말민초 중국 중앙정부가 외세에 맞설 수단으로 요업의 근대화를 주창하며 여러모로 발전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실제 강서도무국(江西陶務局)과 도업시험소(陶業試驗所)를 설립하며 지방 각지에 근대식 요업공장을 설립하며 기계식 요업 체제를 구축하는 등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루었고, 이는 민국시기를 넘어 만주국 시기까지 계속 확장되었다. 특히 전통적인 요업의 중심지가 아니었던 동북지역은 경덕진보다 더 일찍 요업의 근대화를 이루며 산업형 요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중 요녕성은 요업이 가장 활발히 운영된 지역이다. 요녕은 과거 중국 요업의 주류지역은 아니었음에도 청말부터 요업을 비롯하여 중화학공업을 근간으로 하는 산업화가 본격화되었다. 요녕의 산업화는 당시 일본이 중국 시장의 침투를 단행하면서 벌어진 현상이었다. 메이지유신을 거치면서 열강에 합류한 일본은 대외 확장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무역을 통해 해외 시장, 특히 중국 시장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 세력은 동북을 중심으로 급속히 팽창하여 일본이 중국에 투자한 25억엔 중 동북 3성이 16억 1,700만 엔을 자치할 정도로 일본 자본의 지배가 심각했다. 특히 중국 투자의 65%나 해당되는 동북3성 중에서도 요녕성이 주요 투자지였다.19
요녕의 근대 요업은 1909년 일본 공기업이었던 만철의 부속기관 중앙시험소의 설립과 함께 시작된다. 만철은 1905년 러일전쟁 이후, 포츠머스 조약에 따라 일본은 러시아로부터 요동반도 남부의 관동주(関東州) 임대권과 러시아가 개발 중인 동청철도(東淸鐵道)의 남쪽에 해당하는 장춘~대련까지의 철도 시설과 그 부속지를 획득하면서 시작된다. 이후 1906년에 반관반민(半官半民)의 성격의 국책회사인 남만주철도회사를 설립하면서 만주 개발을 본격 진행했다. 만철은 철도 사업뿐만 아니라 무순(撫順) 석탄광과 안산(鞍山) 제철소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했다. 그리고 초대 만철 총재인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857~1929)의 식민지 경영 방침인 문‘ 장적 무비(文装的武備)’에 따라 1907년 중앙시험소가 설립되었다.20 중앙시험소의 주요 임무는 만주에서 채취되는 자원을 활용하여 새로운 산업을 창출할 가능성을 탐구하는 것이었다. 그중 요업은 중화학 분야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여 중앙시험소 내 요업과(窯業科)가 설치되었고, 이곳에서 도자 재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었다. 도자 재료에 대한 연구는 중앙시험소가 벌인 여러 연구 분야 중에서도 초기부터 수행한 프로젝트 중 하나였다.
중앙시험소의 요업과가 대련에 설치된 이후, 요녕의 본계(本溪) 우심대(牛心臺)의 경질점토와 대석교(大石橋) 마그네사이트, 대련 복주만(復州灣)의 연질점토, 여순(旅順)의 석영과 무순(撫順)의 석탄 등을 원료로 한 내화재, 일상 도자기, 유리 제품 등의 생산을 실험하였다.21 당시 중앙시험소 소장이었던 사토 마사노리(佐藤正典, 1891~1985)의 증언에 따르면 중앙시험소는 크게 ‘실험과 자원조사(1907~1912)’ → ‘공업 이식(1912~1925)’ → ‘화공업의 독자적 발전(1926~1945)’ → ‘본국으로의 기술 송환(1945~1949)’의 순서대로 진행 및 운영되었다. 요업과가 존속했던 1910~1920년간 활동은 주로 자원을 조사하고 이를 통해 얻은 원자재를 시험하였으며, 또 시험 결과에 근거하여 시제(試製)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공업 이식을 더욱 잘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담당하였다.22 즉 요업과는 만주요업의 기본이 되는 기초자료 수집과 실험을 수행하는 기구였다. 이후 요업과는 1920년 2월 만철로부터 독립하여 요업시험공장(窯業試驗工廠)으로 개칭되었고, 연구부를 중심으로 내화벽돌시험공장, 도자기시험공장, 유리시험공장을 설치하였다. 이후 1920년 대화요업공사(大華窯業公司, 현 대련전자그룹의 전신)로 전환되었다.23 이처럼 만철 중앙시험소에 의한 요녕지역 요업은 근대식 공장 설비를 채택하여 일찌감치 산업화로 전환되었다. 또한 요녕지역이 중화학용 도자 재료 연구를 위해 기지 역할을 했던 것 외에도 동북 일대는 일본산 생활도자기들이 가장 많이 유통된 곳이었다.24
만철의 중앙시험소 운영에 따른 동북지역 자원의 갈취 등 일본 제국주의의 동북 침략이 심화될수록 중국인들의 저항운동도 같이 고조되어 이권 회수와 외국상품 불매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는 결과적으로 자국의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외국의 경제침략을 저지하는 압박 역할을 하게 됨으로써 중국 민족자본의 사업 창출을 촉진시켰다.25 이때 일본 동경고등공업학교에서 요업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두중원(杜重遠, 1897~1943)은 1923년 요녕 봉천(奉天, 현 심양)에 실업구국(實業救國)의 뜻으로 근대식 도자기 공장인 조신요업공사(肇新窯業公司) 설립하였다. 이 요업공장은 중국 최초의 민족자본에 의해 설립된 근대식, 즉 전면 기계화 요업공장으로 일본이 장악했던 벽돌과 기와에 대한 생산 독점의 저지는 물론 일본 상인들과 경쟁하기 위해 조신요업의 생산품을 일본 제품보다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기도 했다(Fig. 5).26 조신요업에서 생산된 도자기가 동북시장을 빠르게 점령하면서 동북지방의 일본도자기 독점이 타파되었고, 이로 인해 매년 100만 위안 이상의 이권을 회복할 수 있기 때문에 일본 자본이 대련에 설립한 대화요업공사의 판매량이 급감하면서 결국 내화벽돌 제조로 전환되었다.27 비록 두중원의 업적은 요업을 통한 항일운동의 일면이지만, 당시 일본의 산업자기와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기 위해 중국 요업에 대한 끊임없는 질적 개량의 산물이기도 하다(Fig. 6).28 요녕지역을 둘러싼 일본과 중국 자본의 근대식 요업공장의 설립은 점차 동북지역의 요업 인프라를 확장하는데 기여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상황은 1931년 9월 18일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이 요녕에서 만주일대로 요업을 확장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일본은 1932년 3월 만주국을 세우고, 1934년 제정(帝政) 시행으로 만주국은 만주제국이 되었다. 만주국은 지리적으로 현재 중국의 요녕, 길림, 흑룡강의 동북 3성과 내몽골에 걸치며 면적은 약 130만km2이었다. 주지하다시피 청나라 마지막 황제였던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 1906~1967)가 만주국 황제로 옹립되지만, 실질적으로 국가 경영은 관동군과 만철 등을 통해 일본이 담당하였다. 일본 침략자들은 광범위한 만주지역 농민의 토지를 박탈했으며, 이런 행위를 ‘아직 개발 및 활용되지 않은 토지’라고 주장했다.29 당시 일본은 동북지역의 많은 인력을 값싼 노동력으로 산업에 유치했고, 만철의 대규모 운영은 이를 기반으로 더욱 활발해졌다. 만철은 1906년 창립 이래 철도노선의 확장과 조사부의 설치로 중국 동북지방에 영향력을 확대해 갔으며, 1차 세계대전 이후 호경기를 맞은 일본의 경제는 만주에 자본을 적극 투자하면서 물자의 흐름이 증가하였다. 게다가 만주국시기 철도에 관한 모든 권한을 위임받아 독점적 세력을 유지하기도 했다. 특히 조사부의 설립은 초기 중국 동북지역의 정치·경제·지질 등의 기초적인 조사연구에서 일본의 중국진출 확대와 함께 중국 전역을 조사대상으로 삼으면서 일명 식‘ 민지 과학’의 표본으로 자리잡기도 했다.
일본 자본이 거의 우위를 점했던 동북의 요업 분야는 시멘트, 유리, 벽돌, 내화토, 도자기 등의 중화학 분야로 상술한 바 1912년 이 분야에 대한 제조 및 연구의 수행을 위해 만철은 요업시험공장을 설립하였다. 요업시험공장의 주요 업무는 우량의 도자기 원료를 찾기 위한것으로 지질학적 조사가 우선시 되었다. 예컨대 만철 초기에는 요업조사를 전방위적으로 실시하였는데, 당시 푸순의 탄광에서 고도자가 발견되면서 좋은 도자 원료가 있을 것으로 예상되어 전문 인력을 파견하여 조사를 벌였다. 화학자 히라노코스케(平野耕輔, 1871~1947)는 이때 조사를 진행했던 담당자로 실제 푸순에서 품질 좋은 내화토(자원)을 발견하였고,30 이를 기점으로 만철은 만주 외에도 천진, 북경, 한구(漢口), 남경, 상해 등 중국의 주요 도시에 대한 요업 조사를 실시하기도 했다.31
내화토와 시멘트 생산을 위한 점토와 석영, 마그네사이트를 발견한 후, 내화벽돌에 대한 일본 수입의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만철 본부의 승인을 받아 중앙시험소 요업과가 메이지 44년(1911) 7월에 소규모 공장을 짓고 내화벽돌을 시험하면서 생산하기도 하였다.32 그중 마그네사이트는 높은 열을 잘 견디는 성질이 있어 내화벽에 주로 사용되고, 시멘트, 고무, 제지, 도자기 공업에 두루 사용될 정도로 유용한 광물자원으로 꼽힌다. 그러나 20세기 초반만 하여도 인도에서 그 산지가 소량 확인될 뿐 동양에서 전무했던 상황이 중앙시험소의 지질조사에 의해 지금의 내몽골 지역에서 확인되었다(Fig. 7). 히라노 코스케는 1917년부터 만철 중앙시험소 요업과장으로 근무하면서 이 사실을 매우 중요하게 인식하였고, 마그네사이트 시험공장을 요업공장 중 내화벽돌 공장에 부속하여 제조 시험을 실시하였다.33 즉 일본 입장에서 동북지역의 잠재된 광물은 식민산업의 일환인 군수품 생산에 필수적인 철강 재생산의 기본원료로 일본에는 없거나 매우 부족한 여러 지하자원의 보고(寶庫)였던 셈이다. 그 밖에 전기용 절연전자(絕緣電瓷)와 저압용품(低壓用品)을 만드는 실험도 진행하였다.
만주의 요업은 지리·토양적 환경으로 중화학공업에 특화되었지만, 도자기 생산은 옹기나 조질 도기 생산 정도에 그쳤다. 그 외의 도자기류는 중국 내 강서성과 광동성 생산품이나 일본으로부터의 수입품에 의존하였다. 이에 만철은 수익성을 위해 요업시험공장에서 도자기 제조 사업을 시도하였고, 1920년 10월 일본인 기업가의 투자자금 16만 5천 엔으로 대화요업공사를 설립하였다. 만철은 대화요업공사에 공장용지 및 건물, 기계설비를 무상 대여하는 등 본래 요업시험공장의 사업이었던 도자기 제조업을 양도하였다.34 도자기 사업부문을 양도받은 대화요업공사는 주로 만주인용 식기류를 중심으로 도자기 생산을 시작하였다. 이후 대화요업공사는 상술한 두중원의 조신요업공사와 함께 만주의 대표적인 도자기 제조 기업이 된다. 두 회사가 설립된 전후로 일본인들은 대련에 만주제도주식회사(満洲製陶株式会社)와 오쿠노제도소(奥野製陶所), 대련 보란점(普蘭店)의 혜동요업공장(恵東窯業工廠), 굉달요업공장(宏達窯業工廠), 동성요업공장(東升窯業工廠), 요녕안산(鞍山)의 해청(海城)에 해성요업주식회사(海城窯業株式会社), 요동요업공창(遼東窯業工廠) 등이 설립되어 운영되었다.35 이들은 주로 식기류와 전기 및 통신용 절연체 등을 생산했다(Fig. 8).36
이처럼 당시 만주지역에 도자기 공장이 다수 설립된 배경은 만주의 도자기 사정에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상술한 것처럼 이 지역의 요업은 크게 발달하지 못했고, 심지어 만주에는 도자기를 생산할 수 있는 설비가 미비하여 외부 생산품에 의존도가 상당히 높은 상황이었다. 현지의 일상 도자기에 대한 고정적인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만철이 도자기 공장을 건설한다면 이러한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 이런 정황들은 히라노 코스케의 증언에서도 확인된다. 비록 만주에서는 좋은 원료가 생산되지 않지만, 낮은 품질의 상품을 생산할 수 있는 원료가 생산되고 있으므로 만주에서 생산하면, 중국 남부(경덕진)나 내륙 지역에서 가져오는 것보다 유리하다고 판단한 바 있다.37 이러한 이점 때문에 도자기 관련 시험소 및 공장을 설립하여 식기를 비롯하여 각종 전기용 절연체 등의 생산에 집중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대련의 대화요업공사는 이런 목적에 의해 만철이 설립하였고, 주요 업무는 만주 내 소비를 위한 저가의 식기류 생산과 더 나아가 시베리아 지역으로의 판로를 넓히기 위함이었다. 또 히라노 코스케는 만주의 요업이 지금보다 더 확장되어야 함을 주장했는데, 그 배경에는 ‘원료가 풍부하고 연료와 노동력이 저렴하며, 중국인 노동자의 높은 능률’을 꼽기도 하였다.38 즉 만주의 요업은 만철 입장에서 상당한 수익성이 보장되는 분야였으며, 실제로도 만철이 진행한 여러 사업 중 최초로 수익성을 달성한 분야였다.
2. 일제의 만주지역 요업 확장을 통한 식민지적 운용
20세기 극 초반부터 동북지역의 요업이 형성되고 활성화되면서 만주국이 들어서면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1933년 만주국 건국 이후, 일본의 만주지역에 대한 노골적인 정복과 수탈은 요업 분야도 예외가 아니었다. 특히 만주국 건국 이후 도시 건설 및 산업 개발로 건축자재 등의 수요가 증가하였고, 또 인구의 유입으로 도자기 소비시장도 확장되었다. 건축자재로는 만철 중앙시험소가 고열 공업용 내화벽돌의 원료인 알루미나 원광을 발견함으로써 내화벽돌 및 내화물 제조업이 더욱 발달했다. 내화벽돌은 제철 및 강철 등의 공장시설에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므로, 만주국 건국 이후 동북지역 전체에 걸쳐 내화벽돌 및 내화물이 대규모로 생산되었다.39 또한 일본의 요업회사가 만주로 진출하는 예도 확인된다. 교토의 절연체 브랜드였던 쇼푸공업주식회사(松風工業株式会社)가 만주로 진출하여, 무순쇼푸공업주식회사(撫順松風工業株式会社)를 설립하고 도자기 절연체류를 생산하였다.40
그 밖에도 다수의 일본자본에 의한 요업공장이 건설되었고, 그중 규모가 비교적 큰 것은 만주도자기주식회사(満州陶磁器株式会社)였다. 만주도자기주식회사는 1939년 건축자재나 전기 절연체류의 생산이 발달했던 동북요업의 특징에 비해 상대적으로 식기류의 생산이 저조했던 상황에서 설립된 회사였다.41 만주국 건국 전후로 재만 일본인들이 점차 증가하였지만, 그들의 생활용 식기는 이전처럼 중국의 남부지방 생산품이나 일본 수입품에 의존한 상황이었다. 재만 일본인을 위한 생필품의 부족을 타파하기 위해 만주 내 공급으로 방향 전환이 이루어지면서, 만주국 국책회사인 만주생활필수품주식회사 등의 투자를 받아 설립되었다.42 다만 만주에서는 점토의 조달은 가능했지만, 식기용 자기에 적합하도록 제토(製土)할 수 있는 설비가 거의 전무하다시피 했다. 또 자기를 장식하는 유상채용 안료를 제조할 수 있는 회사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현실적인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일본은 중국 근로자들에게 숙련된 일본인이 기술교육을 하도록 조치하였고, 이를 주도한 인물은 도자기 기술사였던 가토 노보루(加藤登)였다. 가토 노보루는 다이쇼 13년(1924)에 세토(瀬戸) 기후현에 창업된 마루야먀 도자기(丸山陶器)회사의 기술자로 만주도자기주식회사의 중국인 근로자를 교육하기 위해 일본의 장인집단을 꾸려 만주로 왔다.43 이때 세토에서 실력있는 물레장인을 비롯하여 여러 분야의 요업 기술자들이 만주도자기주식회사의 기술지도자로 참여하였다. 재만 일본인을 주요 타켓층으로 한 식기와 도예품을 생산하였는데, 이는 만주국 정책에 따른 업무였다. 또한 일본은 근대식 도자제작 기술과 만주의 전통적인 기술을 결합하여 생산 및 경영에 관한 전문적인 지도를 목적으로 길림공업지도소(吉林工業指導所)를 설립하기도 하였다.44 이처럼 동북지역의 요업은 일본의 대중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민국시기부터 일본에 의해 여러 양상으로 확장된 모습을 보여준다. 초기 동북지역의 요업은 일본이 침략 전쟁을 수행하기에 필요한 인적·물적 자원을 수탈하기 위한 소위 병참 기지화 정책으로 시작했지만, 만주국 건국 전후에는 일본 자본의 침투로 인한 경제침탈로 확장되었다. 대화요업공사와 만주도자기주식회사의 예를 통해 살펴봤듯이 재만 일본인의 일상 생활용품 공급이 우선시 되었지만, 그 과정에서 1933년 발표된 <만주국경제건설강요(満洲国経済建設綱要)>에 의거하여 일본 물품의 수입세율 인하를 단행하는 등 만주 내 일본 제품의 진출 및 침투를 목적으로 하였다.45 그 결과 만주 내 일본 자본의 공장에서 생산된 생활 도자기는 이전보다 대량으로 유통될 수 있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일본이 철저하게 ‘실용 노선’에 따라 요업정책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병참 기지화 정책에 따른 요업 육성을 위시하여, 일본 자본 하에 생산된 상품의 시장을 확대하면서 동시에 값싼 노동력을 이용하는 등 경제적 수탈을 강화하였다. 이런 경향은 만철의 중앙시험소가 ‘방고지나도기의 실험연구[倣古支那陶器の試験研究]’ 프로젝트를 중단한 것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 이 프로젝트는 중앙시험소 요업과장인 히라노 코스케가 요업과 연구부 주임이었던 코모리 시노부(小森 忍, 1889~1962)에게 일임한 업무였다. 히라노 코스케는 오늘날 과학이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인정받은 중국도자기를 똑같이 만들 수 없음을 지적하며, 중국 도자기 유약 연구의 필요성을 피력했다. 실제로 중앙시험소는 코모리 시노부의 연구로 동홍유[辰砂釉]와 천목유(天目釉), 청자유와 갈유[蕎麦釉]를 실험한 작품 200여 점을 2차례에 걸쳐 전시회를 열었고, 호평도 받았다(Fig. 9).46 이처럼 일본이 만주의 요업을 육성한 목적은 매우 뚜렷하다고 볼 수 있다.
전술하였듯이 만주지역의 요업은 여러 방면으로 일본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일본 도자의 유통이 확대된 점도 대단히 중요한데, 특히 오늘날 현전하는 만주국 황실 도자기의 사례는 당시 만주의 도자기 시장이 일본 도자에 잠식된 정황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황실에서 사용된 것이지만 고급품과 중저품이 모두 확인되고 있다. 당시 만주 일대에 유통된 일본 자기가 거의 흩어져 개인소장품이나 경매 등에서만 확인되는 현 상황을 고려하면, 황실 소장품은 20세기 전중반 만주에서 유통되는 일본 자기의 대표적 사례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현재 공개된 자료에 따르면, 만주국 황실에서 사용된 도자기의 생산지는 크게 일본과 중국으로 나뉘며 종류는 양식기와 중국 전통자기로 구성된다(Fig. 10, 11). 물론 수량으로 봤을 때 일본 도자기가 압도적으로 다수를 차지한다. 일본 도자기도 근대화의 물결 속에 일본에서 수입된 수입 양식기와 진설기 류인 항아리, 방고중국자기, 일식용 식기가 주를 이룬다. 생산지로 보면, 20세기 초부터 수입되던 기후현의 미노(美濃)와 아이치현의 세토(瀬戸)를 비롯하여 사가현의 히젠(肥前), 가고시마현의 사츠마(薩摩),이시카와현의 쿠타니(九谷) 등으로 추정되는 예가 확인된다.47 양식기의 경우, 금장으로 난화문[蘭章]이 장식된 산업용 자기가 일괄 전하고 있다(Fig. 12). 생산지는 일본도기회사(日本陶器會社, 노리타케)에서 생산된 것으로 가장자리가 금장으로 둘러지고 난화문이 장식되었다. 이는 우리나라 대한제국시기 금장 이화문의 서양식기와 거의 대동소이하여, 당시 일본의 식민통치 하에 공급된 과정이 같은 것으로 보인다(Fig. 13). 난화문의 정식 명칭은 난화어문장(蘭花御文章)으로 일본인의 지시에 의해 일본 가문의 문장(紋章) 풍습을 이어받아 만주국의 상징이 되었다. 일본이 만주국의 휘장으로 난을 선택한 이유는 중국 전통문화에서 말하는 ‘금란지교(金蘭之交)’를 통해 일본제국과 만주국이 서로 진심으로 대하고, 일왕과 푸이가 한마음 한뜻임을 상징하기 위함이었다.48 난화문이 장식된 서양식기는 도자기뿐 아니라 유리와 은기로도 제작되었다(Fig. 14).
흥미로운 점은 만주국의 양식기가 동시기 대한제국 소용 양식기에 비하면 수량이나 품종, 제작국 등 여러모로 풍부하지 못하다. 그 배경에는 아마도 국가 차원에서 서양 열강들과 돈독한 외교관계를 맺어 그들과 동등한 위치의 독립국을 열망했던 대한제국과 다른 태토 차이에 기인한다고 판단된다. 주지하다시피 19세기 말 조선이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며 서구에 눈을 떴고, 이어 건국된 대한제국은 서구 열강 대열에 합류하기 위해서 그들과 친분을 쌓는 외교적 자리가 불가피했다. 외교의 장이었던 서양식 연회가 매우 중요했던 대한제국의 경우 다양한 양식기가 필요했지만, 일본에 의해 세워진 괴뢰국 만주국은 외교상 그런 절차가 필요치 않았다. 푸이 개인도 그다지 외교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지 않았던 것과 무관치 않을 것이며, 대규모의 연회자리가 필요 없었던 만주국은 대한제국처럼 복수의 유럽국가에서 생산한 다양한 서양식기 세트가 필요치 않았을 것이다. 즉 대한제국에 비해 다소 소략한 만주국의 서양 식기 수량과 종류는 그의 영어교사였던 레지널드 존스턴(Reginald Johnston, 1874~1938)의 영향을 받아 서양 문화에 관심을 가지고 서양식(食)을 좋아했다고 알려진 푸이 개인의 취향이 반영된 정도로 여겨진다(Fig. 15).49 오히려 양식기보다 일본식 그릇과 도자기가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은 무기력한 만주국 황실의 상황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Ⅳ. 맺음말
중국의 동북지역 요업은 청말민초 중앙정부의 요업 근대화의 바람을 시작으로 첫걸음을 내디뎠지만, 곧 일본의 만주지역 점령과 함께 동북요업은 계속 확장되어 생산량, 규모 및 장비에 상당한 변화가 있었다. 물론 만주 요업 확장 배경에는 일본의 만주 혹은 더 나아가 중국의 자본침탈과 병참기지화를 노린 전략에 의한 것임은 자명하다.
외간상 20세기 초의 동북지역 요업은 분명 크게 성장했지만, 일본의 침략과 식민지 지배를 위한 전략에 불과했다. 그 중심에는 1910년 설립된 만철의 중앙시험소 요업과가 있었으며, 주로 만주 요업의 토대가 되는 우량 자원의 채굴과 실험이 행해졌다. 이 과정에서 근대식 산업이 형성되었지만, 실상은 전쟁 물자를 안정적으로 대량 공급하기 위한 방편으로 전쟁에 필요한 통신 절연체나 내화재, 시멘트의 생산이 주를 이루었다. 이뿐만 아니라 재만(在滿) 일본인들을 위한 일본제 자기 식기의 공급을 통해 중국 자기 시장의 잠식을 초래하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의 근대식 제자업(製瓷業) 교육이 중국 근로자들을 대상으로 이루지기도 했다. 물론 두중원과 같은 중국인에 의해 설립된 민족자본의 근대식 도자기 회사가 일정수준의 시장을 확보하며 동시에 동북지역의 요업 인프라를 확장하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표면적으로 동북지역의 요업이 여러 양상으로 확장된 모습은 역설적이게도 1931년 만주사변을 계기로 일본이 요녕에서 만주일대로 요업을 확장하는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요업에 필요한 원료와 생산품의 유통, 동북 요업의 노동자에 대한 일본의 착취, 그리고 민족자본의 요업 위축 등에서 동북 요업에 대한 일본의 약탈적 본질이 확인된다. 만철의 중앙시험소는 이를 바탕으로 만주 요업을 확장하였으며, 그 정책 노선은 뚜렷하게 대중 식민정책을 따르고 있다. 병참 기지화를 위해 실‘ 용 노선’을 고수한 만철의 정책은 훗날 일본 근대 도예의 시작을 알린 코모리 시노부의 ‘방고지나도기의 실험연구’조차 중단케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 기간 동안 동북 요업의 확장은 일본의 대외 침략에 필요한 막대한 물자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결과적으로 수많은 일본 자본에 의한 기업의 범람과 확장은 중국 오히려 중국 요업 산업의 발전에 큰 장애물이 되었다. 요컨대, 이 시기는 동북 요업 발전사에 있어 역설적이게도 가장 암울한 시기로 기록된 것이다.
Notes
19세기 말 이후 진행된 일본의 중국 요업 관여 정황은 오늘날 당사자였던 일본과 중국의 관점에서 핵심 기구였던 만철의 경영방식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만철을 전문으로 다루는 연구학술지(『滿鐵研究』 (中國近現代史史料學學會滿鐵資料研究分會))를 발간하는 등 만철연구에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다만 만주 요업의 경우 만철 중앙실험소 활동을 제외하면, 자국의 근대요업 상징이자 ‘항일’ 활동을 펼쳤던 두중원과 그가 설립한 봉천조신요업공사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행적과 업적 소개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관련 연구로 다음을 참조. 須永德武, 「満洲の窯業」, 『立教経済學研究』 第59巻 第3號 (2006), pp. 63-99; 加藤昭子, 「戦時期,陶磁器企業の満州進出について」, 『愛知県立大学大学院国際文化研究科論集』 第10號 (2009), pp. 113-135; 張誌強·徐建東, 「杜重遠與奉天肇新窯業公司」, 『遼寧大學學報』 第2期 (1984), pp. 86-90; 周曉紅, 「杜重遠與肇新窯業公司」, 『蘭臺世界』 第2期 (1999), pp. 42-43; 吳艷, 「滿鐵窯業試驗機構的活動及影響研究」, 『黑龍江社會科學』 第3期 (2020), pp. 148-153.
江西省輕工業廳陶瓷研究所, 『景德鎮陶瓷史稿』 (北京: 生活·讀書·新知三聯書店, 1959), p. 268.
李松杰, 「近代景德鎮瓷業改良路徑與實務困境」, 『江西社會科學』 第2期 (2021), p. 144.
[淸] 光緖22年(1896) 正月, 「江西紳商請辦小火輪, 瓷業及蠶桑學堂折」, “現擬集股興辦,惟成本鉅而運費多,必須官為扶持乃能興鼓舞,擬請除中式瓷器經行關卡仍照例完稅抽厘外,其有創造洋式瓷器統歸九江關出口,援照煙台製造外洋果酒之例,暫免稅厘數年,數年以後,如銷廣利倍,再按海關進出口稅則及內地釐金辦法酌量徵收,並援製造果酒之例,準於江西一省,定限十五年,只準華人附股,不准另行設局.”
[淸] 柯逢時, 光緒29年(1903) 5月初4日, 「開辦江西瓷器公司折」, “奏為開設景德鎮瓷器公司派員經理以振工藝而保利權恭折仰祈聖鑑事...即經委辦瓷器公司,籌撥銀十萬兩,以為之創,餘由該道自行集股.”
[淸] 柯逢時, 光緒29年(1903) 5月初4日, 「開辦江西瓷器公司折」, “查有湖北候補道孫廷林⋯⋯於三月間,在該鎮建設窯廠,招集工人,專營洋式瓷器,必精必良,約計秋間,即可出貨.”
項坤鵬, 「由柯逢時《開辦江西瓷器公司折》引發的思考-試析江西瓷業公司的幾個問題」, 『中國國家博物館館刊』 第4期 (2012), p. 125.
[淸] 劉錦藻, 『清朝續文獻通考』 卷383, 「實業六·工務」,“江西景德鎮磁器公司,原擬官商合辦, 至今未有實際辦法,去年李嘉道來滬集股,與上海道瑞澄會商,該公司不如改歸商辦,較有把握擔任發起,定名為商辦江西磁業有限公司,議集股二十萬元,每股五元計四萬股,發起人認一萬五千股,俟批准後再招二萬五千股⋯今該道等自行集股設立公司,多用機器仿造外磁,洵足振興實業、 挽回利權.”
江西省輕工業廳陶瓷研究所, 앞의 책, p. 270.
[淸] 端方, 光緒33年(1907), 「奏改江西瓷業公司為商辦」, “既而景德鎮之官窯亦歸該公司經營,於是以景德官窯為總廠,鄱陽官窯為分廠.” 詹偉鴻, 「江西瓷業公司與清御窯廠關係新發現史料及分析」, 『中國陶瓷』 第53卷 第11期 (2017), p. 40에서 재인용.
강서자업공사가 설립된 이후, 청 왕실의 관요였던 어요창이 귀속된 점 때문에 강서자업공사가 청 왕조의 마지막 관요로 알려져 있다. 다만 강서자업공사가 어요창의 시설을 일부 임대하여 자기를 생산한데다가 운영도 관에서 민간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마지막 청 관요로 보는 견해에 이견도 존재한다. 江西省輕工業廳陶瓷研究所, 앞의 책, p. 271; 詹偉鴻, 위의 논문, pp. 41-43.
編輯部, 「中國陶瓷工業百年概論」, 『陶瓷』 第2期 (2017), pp. 65-66.
藤江永孝, 「清國景徳鎭磁器視察報告」,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92號 (1900), pp. 274-283; 同著, 「清國景徳鎭磁器視察報告(承前)」,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93號 (1900), pp. 305-340.
加藤助三郎, 「清國窯業視察談」,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89號 (1900), pp. 153-162; 同著, 「清國陶磁器産地視察報告」,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93號 (1900), pp. 314-323; 同著, 「清國陶業視察追加報告」,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95號 (1900), pp. 389-394.
藤江永孝, 「支那の輸出磁器に就て」,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7卷 第84號 (1899), p. 433; 前﨑信也, 「明治期における清国向け日本陶磁器」, 『デザイン理論』 第60號 (2012), p. 79에서 재인용.
加藤助三郎, 위의 논문, p. 154.
黒田政憲, 「清國窯業視察復命書」,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10卷 第14號 (1902), pp. 169-175; 同著, 「清國視察談」,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20卷 第236號 (1912), pp. 293-311.
이시구로 히데히사의 보고서는 1906년 14巻 166號를 시작으로 총 4회(1906년 14~15卷 166~169號)에 걸쳐 출판되었다. 石黒秀久, 「清國上海陶磁器業練習調査報告」,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14卷 第166號 (1906), pp. 745-752; 第14卷 第167號 (1906), pp. 800-805; 第14卷 第168號 (1906), pp. 843-848; 第15卷 第169號 (1906), pp. 10-16.
당시 일본의 대외 투자 총액은 27억 8천만엔 정도이며, 그중 중국의 투자는 25억 엔을 차지한다. 張誌強·徐建東, 앞의 논문, p. 86.
고바야시 히데오, 임성모 역, 『만철,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산처럼, 2004), pp. 46-54.
대련전자그룹[大連電瓷集團] 홈페이지(https://www.insulators.cn/%E5%A4%A7%E7%93%B7%E8%AE%B0%E5%BF%86), 2023년 9월 20일 검색.
吳艷, 앞의 논문, p. 149.
編輯部, 앞의 논문, p. 67.
민국시기 중국 내의 수입자기 중 유럽산(영국과 독일) 자기는 남방지역에서 주로 유통되며 인기가 많았고, 일본자기는 북방을 중심으로 판매되었다. 陳重民, 『今世中國貿易通』 (上海: 商務印書館, 1927), p. 104.
張誌強·徐建東, 앞의 논문, p. 87.
周曉紅, 앞의 논문, p. 40.
周曉紅, 「肇新窯業-開啟東北民族工業的新曙光」, 『今日遼寧』 第2期 (2017), p. 23.
일본 및 외세 요업에 대항하기 위해 경덕진 요업의 근대화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민국 정부는 1929년 경덕진과 강서성의 성도 남창(南昌)에 각각 강서도무국(江西陶務局)과 도업시험소(陶業試驗所)를 설립하였다. 쑨원도 요업진흥의 계획을 추진했던 만큼, 강서성 지방정부는 당시 일본에서 선진요업기술을 익히고 돌아온 두중원을 경덕진으로 초빙하여 근대식 요업교육을 일임하는 등 전통 도자기 산업의 생산과 조직을 현대적으로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불안정한 전쟁 환경과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도무국의 운영 시스템으로 인하여 실패한다. 관련 연구로 다음을 참조. 黃誌繁·胡小紅, 「民國時期杜重遠景德鎮瓷業改革述論」, 『贛南師範學院學報』 第31巻 第4期 (2010), pp. 199-123.
艾慕晨, 「偽滿前東北地區移民狀況研究」, 『理論觀察』 第6期 (2018), p. 15.
平野耕輔, 앞의 논문, p. 112. 그 밖에 푸순에서의 도자 원료 및 연료의 발굴은 고려청자의 발견으로 인해 고려청자 도요지가 천금채(千金寨)에 존재한다는 정보를 통해 양질의 도자원료(점토, 점판암(粘板岩), 경사암(硬砂巖), 장석, 석회석 등)의 채굴 및 조사가 실시된 바 있다. 森勇三郎, 「清國撫順陶磁器業의 古蹟其他」, 朝鮮總督府 農商工 部 編, 『官立工業傳習所報告』 第1回 (京城: 農商工部, 1909), pp. 82-94.
平野耕輔, 앞의 논문, p. 113.
吳艷, 앞의 논문, p. 151.
平野耕輔, 「滿鐵の窯業試驗と滿洲の窯業」,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34巻 第399號 (1926), p. 114.
須永德武, 앞의 논문, p. 71.
須永德武, 위의 논문, p. 70.
孫瑜, 「論偽滿時期日本對中國東北窯業的掠奪」, 『哈爾濱師範大學社會科學學報』 第1期 (2021), p. 134.
平野耕輔, 앞의 논문, p. 115.
平野耕輔, 위의 논문, p. 119.
加藤昭子, 앞의 논문, p. 115.
須永德武, 앞의 논문, p. 71.
加藤昭子, 앞의 논문, p. 127.
孫瑜, 앞의 논문, p. 136.
당시 마루야먀 도자기[丸山陶器]회사는 미국시장을 중심으로 도자기를 수출하였지만, 일본정부의 기업 동제로 공장이 군용창고로 사용되어 생산이 중단된 상황이었다. 加藤昭子, 앞의 논문, p. 126.
須永德武, 앞의 논문, p. 71.
加藤昭子, 앞의 논문, p. 116.
코모리 시노부는 일본 근대 도예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도예가이자 중국 도자 연구가였다. 1911년 교토도자기시험소(京都陶磁器試験所)에 입사하여 도자기 산업 기술의 기초적인 연구를 하면서 중국 고전 도자기 연구, 특히 유약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1917년 만철 요업부로 이직하여 교토 시절부터 연구한 중국도자기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1921년 중앙시험소를 나와 대련시에 코모리도자기연구소(小森陶磁器研究所)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각지의 고대 도자기를 연구하였고, 이는 일본인이 중국도자를 본격 연구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이다. 木田拓也, 「大連における中国陶磁の研究-大正期の小森忍と匋雅会のネットワーク」, 『東京国立近代美術館研究紀要』 21 (2017), p. 13.
현 연구성과에 따르면, 청대 말기 일본에서 수입된 일본자기의 80%는 중저품질의 미노와 세토산 자기가 절대 다수를 이루었으며, 품질이 뛰어난 히젠자기나 사츠마, 쿠타니 생산품은 소량만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前﨑信也, 앞의 논문, p. 81). 청말 유입된 일본자기의 생산지 분포는 공개된 자료로 판단컨대 만주국 건국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만주국 시기 만주도자기주식회사가 설립된 배경 중 하나로 히젠자기와 같이 품질이 뛰어난 일본산 자기의 수입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현지에서 생산된 저렴한 도자기를 공급하려는 의도도 있었다.
石憲, 「偽滿皇帝御用餐具上的蘭花」, 『東方收藏』 第7期 (2011), p. 54.
당시 푸이의 식사는 청궁의 옛 제도에 따라 단독으로 행해졌으며, 보통 두 종류의 요리와 스프, 한 종류의 디저트, 빵, 과일 정도만 차려진 단촐한 식단으로 알려졌다. 또한 푸이가 사용하는 식기는 이탈리아와 일본에서 제조된 것으로 오로지 푸이만 사용했다. 石憲, 앞의 논문, p. 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