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식선 왕문고와 남훈전본 해내진상론의 비판적 검토*
A Critical Review of Su Shi’s Inland True-Portrait from Nanxun Hall: Examining Fa Shishan, Wang Wengao, and their Clai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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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본고는 18~19세기 동아시아의 蘇軾(1037~1101) 숭모 풍조 속에서 정설로 퍼진 南薰殿 이야기를 추적한 연구이다. 청나라 고증학자 法式善(1753~1813)은 1802년 남훈전에 보관된 역대 화상첩을 열람하였다. 이 때문에 그가 翁方綱(1733~1818)에게 전한 소식의 초상화는 황실의 남훈전에 소장되었던 화상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법식선과 옹방강 사후, 이러한 설은 王文誥(1764경~?)와 같은 문인에 의해 정설로 굳어졌고, 마침내 ‘남훈전본’ 혹은 ‘海內眞像’으로 명명되어 조선에도 널리 파급되었다.
필자는 기존의 학설에 의문을 제기하고, 법식선이 모사한 것이 진짜 남훈전본이 아니라 《三才圖會》의 인물도상에서 파생된 夢禪居士(1777~1840) 소장본이었음을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아울러, 옹방강의 냉정한 평가와 함께 사라졌던 소위 ‘남훈전본’이 왕문고에 의해 ‘해내진상’으로 부활한 내막을 밝히고, 의문에 싸여있던 도상의 연원에 대한 새로운 통찰도 제공한다.
본고는 잘 알려지지 않은 법식선 일파의 대두와 그들의 논리를 재조명함으로써 다원적인 19세기 문단을 보다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과 분석틀을 제공해준다.
Trans Abstract
This paper traces the development of the theory surrounding the Nanxun Hall 南薰殿, which became a widely accepted orthodoxy in East Asia during the eighteenth and nineteenth centuries, within the broader context of the increasing reverence for Su Shi (蘇軾 1037~1101). In 1802, Qing scholar Fa Shishan (法式善 1753~1813) conducted an inspection of portraits stored in the Nanxun Hall, leading to rumors that a portrait he reported to Weng Fanggang (翁方綱 1733~1818) was part of the imperial collection housed there. After the deaths of Fa Shishan and Weng Fanggang, this theory gained widespread acceptance, particularly through the influence of literati like Wang Wengao (王文誥 1764~?), and eventually became solidified as fact. The term ‘Portrait from Nanxun Hall’ or ‘Inland True-Portrait’ (海內眞像) emerged to describe these portraits, and the theory was disseminated widely, even reaching Chosŏn Korea.
In this paper, I challenge the prevailing scholarly consensus, providing concrete evidence that the portrait copied by Fa Shishan was not the genuine from Nanxun Hall, but rather a version owned by Mengshan Jushi (夢禪居士, 1777~1840), based on the figural iconography from the Illustrated Compendium of the Three Realms (Sancai Tuhui 三才圖會). Furthermore, I demonstrate how the so-called ‘Portrait from Nanxun Hall,’ which had been criticized and largely disregarded following Weng Fanggang’s evaluation, was later revived in a different form by Wang Wengao under the name ‘Inland True-Portrait.’ Finally, I elucidate the origins of the iconography associated with these portraits, which has remained ambiguous.
By reevaluating the intellectual circle of Fa Shishan and their arguments, which have received limited scholarly attention, this study presents a fresh perspective and analytical framework that deepens our understanding of the pluralistic literary scene in 19th-century East Asia.
Ⅰ. 머리말
18~19세기 동아시아의 蘇軾(1037~1101) 숭모와 동파상 유통의 확산과 관련해서는 선행연구가 축적되면서 翁方綱(1733~1818)의 핵심적 논리와 역할, 그리고 그 영향이 어느정도 드러난 바 있다.1 그러나 이를 넘어선 연구는 아직 시작 단계에 머물고 있다.2 이에 본고는 그동안 미술사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法式善(1753~1813) 일파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옹방강과 동 시기 자극을 주고받으며 활동하면서 상대적으로 구분되는 논법을 정립하였던 법식선 등의 활동은 옹방강 일파로 대표되는 단선적 흐름으로 이해되어 왔던 소식 숭모와 동파상 유통 확산 현상이 색깔을 달리하는 흐름들의 보다 큰 복합적 총체였음을 밝혀줄 것으로 기대된다.
고증학자로서 옹방강의 평생에 걸친 노력은 1782년에서 1803년 사이에 결실을 맺게 되는데, 송나라 李公麟(1049~1106)의 필적에서 참된 동파상을 찾는다는 ‘眞像論’과 그것이 19세기 동아시아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는 부분적이나마 논의된 바 있다.3 북경 문단내에서 옹방강과 직간접적으로 교류했던 법식선은 진상론의 큰 틀은 수용하면서도, 전혀 다른 방법론에 입각하여 새로운 논리를 발전시켰다. 후에 옹방강의 수제자인 李彦章(1794~1836)이 스승의 뜻을 ‘宋本眞像’으로 해석할 때, 법식선의 후계자인 王文誥(1764경~?)는 다음과 같이 ‘海內眞像’을 제기한 바 있다.
“듣자하니, 자금성 안의 남훈전에 수장된 것이 원명대 이래로 지금까지 갈마들며 전하여 가장 핍진하다 하나, 세상에서는 볼 수가 없었다. 1802년 법식선이 편찬을 비교하고 처음 모사하여 얻은 것이 전하여 옹방강에게 흘러들어가 蘇齋에 공물로 걸렸던 일이 내가 경사를 나온 이후로 있었다는데, 이것이 해내에 있어서 진상으로 알려진 것이다.”4
그는 옹방강의 진상론을 두가지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수정하였다. 그것은 고증의 초점을 이공린이라는 동시대 화가에서 남훈전이라는 권위있는 콜렉션으로 전환하는 한편, 소식의 절정기를 ‘笠屐’으로 상징되는 해외 시기에서, ‘玉堂’과 ‘赤壁’으로 대변되는 해내시기로 치환한 것이다.5 필자는 본고에서 이를 남훈전본 해내진상론으로 명명하고, 이하에서 구체적인 논리의 전개와 그 실체를 조명해보고자 한다.
Ⅱ. 법식선과 남훈전본의 비밀
남훈전은 舜임금이 「남풍가」에서 제왕의 선정을 비유하며 노래한 ‘南風之薰’에서 유래한 말로, 청나라에서 역대 제후와 공신의 도상을 봉안하던 전각으로 사용되었다. 현재는 고궁박물원내 회화관으로 사용중인 武英殿 남서측에 위치하고 있다(Fig. 1).6 『高宗朝實錄』 및 「御制南薰殿奉藏圖像記」 등 기록을 면밀히 연구한 라이 위지[賴毓芝]에 따르면, 건륭제는 1747년 10월 內務府庫에 보관중이던 일군의 제후공신상의 장황을 검수케 하여 약 3개월만에 장황수복을 마무리하고, 1749년 새로 낙성한 남훈전에 그 화상들을 이장했는데,7 이 때 수복된 역대 화상의 규모는 太皥伏羲로부터 제후, 공신을 망라하여 모두 족자 68권, 책자 7권, 권자 3권에 달했다 한다.8
건륭제는 공자와 같은 성현상을 역대제왕상과 함께 남훈전으로 이장함으로써 유가성현의 제왕화 혹은 군주의 성인화를 기도하였으며, 제왕의 治統을 성현의 道統으로 합리화하는 정교합일을 꿈꾸었다.9 이후 남훈전으로 옮겨진 역대제후상의 대부분은 대만으로 옮겨져 2021년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에서 특별전이 개최되기도 했다.10
법식선은 청대 저명한 문인 관료로서11 西涯 李東陽(1447~1516)을 숭모하여 서애의 ‘後身’을 자처하고 그의 고택이 있던 서애 옛터를 발굴했을 뿐만 아니라, 1798년부터 매년 6월 9일마다 이곳에서 서애아집을 개최한 것으로 유명하다.12 옹방강의 문인이기도 했던 그는 태상황제로서 실권을 지녔던 건륭제의 명으로 『宮史』를 찬수하는 과정에서 1802년 3월 8일 남훈전 및 내고의 책자 17, 권자 3, 족자 100개 규모의 옛 화상을 조사한 뒤 「남훈전고상기」를 남겼다.
“1802년 3월 8일 법식선이 『宮史』를 찬수하며, 삼가 남훈전 및 內庫(茶葉庫)소장 역대 제왕 및 명신상을 볼 수 있었는데, 무릇 책자가 17, 권자가 3, 족자가 100개였다. 고종 순황제가 명하여 조정 신하들을 소집했는데 궁부의 창고에 쌓여 소장된 것들이었다. … 내가 요행히 『宮史』를 찬수하는 역할을 맡아 황실 소장품을 남김없이 목도할 수 있었으니, 유생으로서 이보다 영광스러운 때가 있겠는가?”13
그가 여기서 남김없이 목도했다고 자랑한 것은 과장은 아니었다. 그는 다른 곳에서 남훈전과 다엽고에 소장되어 있던 화상목록을 상세히 기록한 바 있다.14 모두 17책, 권3권, 100축에 달하는 조사 대상품 중 남훈전 소장품은 15책, 3권, 75축에 달하는데, 그 중 동파상이 포함된 남훈전의 화첩만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Table 1).15
남훈전고상을 기록한 다른 사람도 있지만 이렇게 구체적 내역을 남긴 것은 법식선이 유일하다. 목록에서 소동파상이 수록되었을 것으로 유력시되는 화첩은 《역대성현상》, 《지성성현상》, 《역대성현명인상》 3책으로 추정되었는데, 《역대성현명인상》은 내역과 현존 여부가 확인되지 않고, 《지성선현상》은 총60엽 120장의 화상 중 〈소동파상〉이 없었으나, 다행스럽게도, 《역대성현상》에서 이를 찾을 수 있었다.
국립고궁박물원에 ‘역대성현반신상책’으로 등록된 이 화첩의 표지에는 ‘歷代聖賢像’이라는 해서체의 제목과 함께 ‘乾隆戊辰年 重裝’이라 연기가 있어서 1748년 건륭제가 개장하여 남훈전에 이장한 것을 알 수 있다(Fig. 2). 모두 31엽에 양면으로 화상을 배치하여 倉頡에서 許衡(1209~1281)까지 모두 62명의 화상이 있어서, 법식선이 남훈전에서 열람하고 목록에 남겼던 바로 그 화첩임이 확인된다.16
매 폭은 좌하각에 유상을 그리고 우상각에 찬문을 썼는데, 그중 47번째에 〈소동파상〉이 실려있다. 그 도상은 깃이 너른 심의에 뒤가 접힌 동파건을 쓴 右顔7分面의 반신좌상이다(Fig. 3). 성근 수염에 봉황의 눈매를 갖춘[疏眉鳳眼] 얼굴은 趙孟頫(1254~1322)의 〈소식상〉을 닮았다(Fig. 4). 그러나 붉은색 윤곽선 위에 담황과 담홍을 칠하고, 백색과 먹선으로 마무리한 채색법이나, 관모 끝단이 儒巾처럼 접혀 뒤로 내려뜨려진 모습에서 차이가 있어 직접 비교는 어렵다.
너른 깃의 심의에 뒤가 접힌 동파관을 쓴 도상은 보다 직접적으로 《역대고인상찬》과 비교된다(Fig. 5). 더구나 양자는 찬문이 기본적으로 유사하다. 찬문 중간 중간 누락된 문구를 포함하여 원문 거의 그대로를 《역대고인상찬》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은 그 도상의 원류가 어디에 있는지를 짐작케 한다(Table 2).
옹방강은 오른편 관골 위에 별자리 모양의 점이 찍힌 것을 진상의 결정적 증거로 보았는데(Fig. 6), 법식선이 보았던 남훈전본에는 그런 점이 보이지 않는다.17 남훈전본은 명각본 중에서도 끝단이 접힌 동파건에 심의를 입은 우안7분면상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으며, 얼굴 위에 점이 표시된 일부 명각본과는 계통을 달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옹방강 주변에서 제작된 많은 동파상 중에서 정작 이러한 도상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새로운 의문을 제기한다. 법식선이 남훈전본을 모사하여 옹방강에게 전했다는 대사건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청조 자금성의 관료체계를 감안할 때 황제의 비장품을 몰래 빼돌려 베낀다는 것이 과연 현실적으로 가능할까? 남훈전본 동파상의 재발견은 꺼꾸로 남훈전본 유출설에 근본적 의문을 제기해준다. 이제 비밀에 다가가 보자.
Ⅲ. 법식선의 몽선거사본 고증
법식선은 자신이 古像을 모사했음을 시사하는 글을 썼는데 그것이 정확히 남훈전본인지에 대해 일정정도 고의적인 모호함을 남김으로써 오해의 여지를 남겼다. 사실 법식선은 자신의 글에서 옛 화상의 모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내 일찍이 〈古聖賢像〉의 옛 자취를 옮기고 또 태학 대성전의 〈周彝器圖〉를 모사하여 사방의 시인들이 다투어 제영하니, 큰 족자로 장황을 완성한 것이 벌써 오래되었다. 을묘년(1795) 4월 단비가 개이고 내 친구 夢禪居士 英和(1777~1840)을 방문했을때 桑陰老屋에서 소장하던 《歷代帝王名臣遺像》 수 책을 보았다. 화공의 성씨가 씌어있지는 않았으나 청초 화가의 모본으로 짐작되었다. … 오호라 보배로구나. 이에 荆溪畫師 潘大琨(활동: 18C말)에게 청하여 여러 폭을 모사하고 해를 넘겨 완성되었다. 제1∼5책은 寧化 伊秉綬(1753~1815)가, 제6∼8책은 靈石 何道生(1766~1806)이 그림 끝에 서명했다. 글씨가 두 사람에게 나온 고로 상세하고 간략한 것이 같지 아니하며, 목차는 대개 『宮史』에 의거한 고로 원본과도 좀 다르다. … 화상은 모두 292건인데 그 품등과 유형이 같지 않다.”18
여기서 법식선이 가지고 있던 모사본의 원본은 몽선거사 소장본(이하 몽선본)이었이다. 참여화가는 반대곤, 서예가는 이병수와 하도생으로 모사는 1796년 완료되었다. 원본은 《역대제왕명신유상책》이었는데, 모두 292건을 8책으로 장황했음도 확인된다.
반면, 남훈전본과 관련해서는 목록 이상의 모사를 뒷받침하는 기록이 어디에서도 발견된 바 없다. 법식선 스스로도 명시적으로 남훈전본을 모사했다는 진술을 남긴 적이 없다. 청조 황실의 삼엄한 경비를 감안할때, 남훈전본은 풍문과 달리 그림이 아니라 단지 목록으로만 존재했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안타깝게도 법식선이 옮겼다는 몽선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본 고찰 과정에서 그 모습을 유추할 단서가 새롭게 발견됬다. 그것은 바로 《三才圖會》의 인물도상이다. 《삼재도회》 인 물도상에서 석가모니와 같은 종교적 도상이 실린 인물9권 이하를 제외하면 인물1권부터 인물8권까지 〈盤古像〉에서 명대 〈海忠介像〉까지 역대 제후 및 명신 화상이 모두 8권 292명 293장이다.19 이는 몽선 본을 중모하여 모두 8권 292장으로 만들었다는 기록과 일치한다. 법식선은 몽선본에 누락된 10명의 인명을 거명한 바 있는데, 이는 삼재도회본 인물도상에서도 실제로 누락되어 있음이 확인되어 양자의 연관성이 다시 한번 뒷받침된다.20
그럼 이제 삼재도회본이 남훈전본과 얼마나 흡사한지 비교해보자. 남훈전본의 동파건은 자세히 관찰하면 이중구조를 하고 있는 점에서 여타 명각본과 차이를 보이는데, 이렇게 끝단이 뒤로 접힌 이중 동파건의 제도는 《삼재도회》에서도 확인된다. 《삼재도회》는 의복1권에서 ‘동파건’의 제도를 소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Fig. 7), 인물7권에서 〈소자첨상〉을 싣고 있는데, 끝단이 뒤로 접힌 이중 동파건 디자인의 유사성은 《삼재도회》가 남훈전본의 도상적 범본이 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Fig. 8).
종합하면, 법식선이 실제로 모사해 가지고 있던 몽선본이나, 그가 열람만 하고 실제로 베끼지는 못했던 남훈전본 모두 《삼재도회》를 범본으로 한 동일 도상, 즉 끝단이 뒤로 접힌 동파건을 공유했으리라는 추정이 도출된다. 이미 1796년 몽선본 모사에서 확인했던 소식의 모습과 대동소이한 모습을 1802년 남훈전본 열람에서 확인했을 때, 그가 느꼈을 흥분과 희열을 우리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법식선이 남훈전본을 모사한 적이 없음에도 짐짓 베껴서 이를 가지고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던 것은 자신이 가진 몽선본이 남훈전본과 거의 동일한 것이라는 인식이 바닥에 깔려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이었다.
심지어 신자료를 통해 몽선본의 취약점이 드러난 이후에도 그의 몽선본에 대한 인식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그는 孫承恩(1482~1561)의 《古像贊》 발견을 이렇게 기록했다.
“내가 남훈전 화상을 삼가 열람하였음은 이미 기록한 바 있다. 우연히 孫承恩의 『瀼溪草堂稿』를 검토하는데, 《고상찬》 1권이 있었다. 이는 내가 빌리어 옮긴 《몽선거사가장본》과 대체로 합치했다. 내가 옮긴 책은 명나라로 내려올수록 인물의 수효가 비교적 많은 반면, 손승은의 찬은 송나라의 寇準(962경~1023), 王旦(957~1017), 晏殊(991~1055), 韓琦(1008~1075), 劉敞(1019~1068), 程璃(활동: 12C전반), 吕希哲(1036~1114), 朱緯(1059~1129), 李侗(1093~1163), 饒鲁(1193~1264) 등 곧 내 책에서 누락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거듭하여 베끼다보니 틀린 것이 많은 듯하다. 때문에 남훈전 소장 《역대제왕성현상책》을 취하여 이를 상세히 고찰해보니, 3본이 각각 같지 아니하지만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근원은 곧 하나였다.”21
《고상찬》의 발견 시기는 남훈전본을 열람한 1802년 이후부터 책이 발간된 1807년 사이로 추정되는데, 그 연도는 분명치 않다.22 그는 여기서 찬문 위주로 고증을 시도했다. 기존의 ‘몽선본’을 새로 발견한 ‘고상찬본’과 비교하여 누락을 찾아낸 그는 ‘남훈전본’(목록)을 기준으로 3본을 종합검토하여 상대적인 장단점을 파악하고 있다.23 손승은의 《고상찬》은 盤古에서 원대 虞集(1272~1348)까지 역대 제왕과 성현 206명의 유상을 4언시의 像贊과 함께 싣고 있다(Fig. 9). ‘고상찬본’ 〈동파상〉은 ‘몽선본’의 범본으로 추정되는 ‘삼재도회본’과 비교할때, 끝단이 뒤로접힌 동파건의 모티프는 공통되지만, 유건같은 띠가 어깨 위에 드리워진 점이나 인물을 왼쪽에서 포착한 방향에서 다른점도 발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식선은 이 새로운 206개의 화상을 모사하지 않았으며, 단지 그 서문만을 열람할만한 자료로 거론하였다.24 이는 새로운 자료의 출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소장한 ‘몽선본’에 대한 인식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법식선이 옹방강에게 자랑하며 글을 청탁한 것은 남훈전본도 고상찬본도 아닌 몽선본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옹방강의 증언을 검토해보자.
“(전략) 王羲之(303~361)는 서신에서 ‘잘 그리는 자를 구해 오제 이래 화상을 모사하고 싶다.’고 하였으며, 杜甫(712~770)는 「適江陵詩」에서 ‘기쁘게도 天皇寺 가까우니,우선 옛그림 펼쳐 그린다.’ 했다. 이는 대저 사찰 안에 張僧繇(활동: 6C)가 그린 〈孔子像〉, 〈顏子像〉, 〈十哲像〉이 있었음을 지칭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韓愈(768~824)는 ‘지금 세상을 보면 그림을 잘 하는 자가 없다.’고 하였으니 왕희지와 두보가 말한 것만 쫒아 어찌 古本이라고 모두 정묘하다 할 것이며 반드시 믿을 수 있다 할 것인가? 그 뒤의 賢士들의 글에 보이는 것으로는 예컨대, 소식이 기록한 〈唐名臣像〉 및 王世貞(1526~1590)이 기록한 〈大禹治水圖〉, 〈唐十八學士圖〉,〈中唐十子圖〉,〈廬陵五君子圖〉가 있는데, 대체로 그 사람됨을 상상하여 형모를 나타냈을 뿐이니 꼭 남김없이 고본진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다. 법식선은 박학하고 옛것을 좋아하여 선현의 유물을 볼 때마다 굶주림과 목마름을 마다않는데 그치지 아니하고 오매불망 그를 좇아 기어이 시를 삼곤 하였다. 이미 〈陶潛像〉, 〈王維像〉, 〈孟浩然像〉, 〈韋應物像〉, 〈柳宗元像〉 등을 그린 바 있는데, 지금 다시 그 친구의 서재에 따라가 《古帝王名臣像》 293폭을 모사하고 8책으로 표장하였다. (중략) 선현을 숭모하는 지극한 정성이면 간혹 그를 뵙는 듯도 할 것이니, 어찌 그림의 공교함과 서투름, 닮음과 닮지 않음을 가지고 논쟁을 할 것인가? 주제넘게 삼가 이를 쓰노라.”25
《고제왕명신상》은 남훈전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옹방강은, 법식선이 친구의 서재에서 얻은 것이라고 분명히 하였다. 8책 293장의 장황 분량은 몽선본과 일치하므로, 친구가 다름 아닌 몽선거사임도 확인된다. 옹방강의 평소 어법을 감안하면, 소동파 진상의 출현에 대해 대서특필했어야 마땅하나 여기서는 그러한 흥분이나 기쁨을 찾을 수 없다. 비록 옛 글을 인용한 것이지만, 고본이라고 다 정교하지는 않으며, 형모가 근사해도 모두 고본진적이라 볼 수 없다는 논지에서는 옹방강의 냉랭한 시각마저 드러나고 있다. 비록 마지막에 다소 누그러뜨리는 어조로 법식선을 위로하는 듯하지만, 실질적으로는 감평을 거절하는 뜻이 담겨있어서 새로운 도상의 몽선본에 대해 내심 부정적이었던 옹방강의 인식을 추정할 수 있게 한다.26
법식선이 1802년 남훈전 소장 화상들을 남김없이 본 것은 맞지만, 그가 가진 남훈전본은 그림이 아니라 단지 목록본이었다. 그리고 옹방강에게 전해준 8책 293폭의 화상첩은 삼재도회 계열의 몽선본이었다. 옹방강이 논쟁을 피하기 위해서 남긴 찬문은 사실상 감평거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법식선의 남훈전본 신화는 반쯤 허구임이 드러난다.
Ⅳ. 왕문고와 해내진상의 신화
남훈전본은 법식선에 의해 그 존재가 알려졌지만 널리 확산되지 못했다. 남훈전본 소동파상을 해내진상으로 정립하여 확산시킨 것은 법식선이 아니라 왕문고였다. 그는 옹방강과 법식선 사후, 남훈전본 해내진상론을 제기했는데, ‘진상’의 권위를 받은 것은 법식선이 남훈전에서 보았던 것과 달랐다. 그것은 왕문고가 발굴한 왕문고본에 불과했다.
놀랍게도 진짜 남훈전본을 조사했던 법식선과 달리 왕문고는 이를 직접 보지 못했고, 옹방강의 서재에 걸린 것도 본인이 확인한 것은 아니었다. 그가 들었던 것은 다만 풍문이었다.27 법식선의 몽선본 동파상은 옹방강의 냉랭한 평가와 함께 자취를 감췄지만, 이를 알 리 없던 왕문고는 풍문에 의지하여 자신이 발간할 책에 이를 싣고자했다. “일찍이 도문의 창에 방을 붙여 이를 물색했으나, 임술년(1802)부터 지금까지 벌써 20년이 지나도록 흔적도 없고, 사람들이 돌연 바뀌어 옛 자취로 거론됨을 보니 대체로 진본을 구하기는 이미 늦어버린 것 같다.”고 좌절도 한다. “시집 중에 朱從延(17C말 활동)이 판각한 조맹부본으로 전하는 것이 있는데, 靈洲山에 원대에 새긴 것과 서로 비슷하니 이쯤이면 (진상을 찾는 것) 또한 족히 멈출 일”이라며 “이를 모사하고 찬을 써서 책권 끝에 붙이며, 끝내 다시는 진상 찾는 것을 일삼지 않으려 한다”고 심경을 토로하였다.28
그래서 먼저 선택된 것은 소식의 황주 유배시기 적벽부를 상징하는 책장도 계열 〈유상〉이다(Fig. 10).29 이는 조맹부의 〈동파책장상〉(Fig. 4)에서 유래한 주종연의 《소동파시집주》 판본을 참고한 것이다(Fig. 11). 나중에 출판의 성공과 함께 왕문고본 동파유상도 확산되었다(Fig. 12).30
보다 중요한 것은 발간 직전 남훈전본 〈진상〉의 출현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작년 제야에 … 꾸벅 졸았는데, 옛 의관을 헌걸차게 입은 키 큰 사람이 내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 일어나 뉘신지 급하게 물어보려는데, 갑자기 폭죽이 터지며 깜짝 놀라 깨면서 이미 날이 밝았음을 깨닫게 되었다. 3일 후 오래된 족자를 끌고 와서 문 앞에 멈춘 자가 있어 내가 나가보았는데, 〈宋蘇文忠公像〉이라 첨제가 붙어있어 급하게 펼쳐보니 곧 꿈속에서 보았던 분이 완연했다. … 다시 4일이 지나서 甘泉의 江鄭堂이 端溪에서 이르러 꾸짖어 가로되, ‘이것은 동파공 생시의 상으로 소재에서 누차 보았는데 그대는 어떻게 이를 얻었는가?’하고는 마치 개탄해 마지않은 표정을 지으니 이 일이 우연이 아님을 알게 되었고, 이에 법식선이 모사한 것에서 함께 나온 1본임을 깨달았다.”31
20년 넘게 못찾았던 진상이 꿈같이 저절로 나타났는데, 나흘 뒤 강정당의 증언을 통해 남훈전본 풍문이 사실임을 확인했다는 내용이다. 물론, 추가적 고증을 진행하고 있지만, 해내진상 출현과정에 점철된 풍문, 꿈, 우연한 증언 등 입증 곤란한 불투명한 요소들은 현재의 시각에서 다소 의외이다.
구체적으로 왕문고가 발굴한 〈진상〉을 확인해보자(Fig. 13). 4언절구 찬시가 상단에 있다.32 사슴[麋鹿]이나 팽산은 초야의 은둔 선비같았던 소식의 인품을 찬양하는 과장된 문학적 수식이며, 귀밑머리[揷髩]와 북두칠성[羅星]은 그의 용모를 지칭하는 표현의 하나인데, 정작 화상 자체에는 별자리 모양의 점이 보이 지 않는다.33 전체적인 도상은 남훈 전본, 몽선본으로 이어지는 삼재도 회본의 관인초상화 전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뒤로 접힌 동파건의 실루엣이 이를 잘 보여준다.
왕문고본 진상만의 가장 큰 특징은 동파건의 뒤쪽에서 양어깨로 흘러나온 두 줄의 띠에 있다. 마치 유건 위에 방건을 겹쳐 쓴 듯한 인상을 준다. 동파건과 연결된 2줄의 띠는 실제 남훈전본이나 몽선본, 즉 삼재도회본에서는 물론 다른 명각본 도감류에서도 찾아보기 힘들다(Fig. 3, 5, 6, 8).
이렇게 특이한 도상의 원류를 지금 지목하기는 어렵지만, 《만고제회도상》과의 유사성만은 지적할 수 있겠다(Fig. 14).34 이 상은 끝단이 접힌 동파건과 그 아래 달린 끈의 모티프에서 왕문고본과 완전히 일치한다. 묵서에는 ‘三才圖意’라고 하여 삼재도회본을 범본으로 시사하고 있으나 293폭의 삼재도회본보다는 좀 더 고본을 범본으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만고제회본은 각 책 20명씩 총10권에 태고의 반고씨부터 원대 오징에 이르기까지 194명의 역대 제왕과 성인, 명신의 화상을 담고 있어서, 역시 반고에서 원대 우집까지 206명을 수록한 고상찬본과 그 내용과 분량이 유사하다(Fig. 9).35
결론적으로, 왕문고본의 띠는 《역대고인상찬》이나 《삼재도회》 등 명각본 관찬 도감류와는 계통을 달리하는 《고상찬》, 《만고제회도상》 등 일각의 비주류 도감류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소위 해내진상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띠는 궁실이나 관각의 공신력 있는 교감을 통과한 것이 아님에도, 왕문고는 풍문, 꿈, 증언 등 우연한 조합을 근거로 이를 남훈전본으로 인식했고 해내진상의 이름하에 널리 유포시켰던 것이다.
왕문고본의 다소 신비하고 모호한 출현배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저작물에 대한 높은 문학사적 평가와 함께36 왕문고본은 남훈전본으로 오인되었고, 마침내 해내진상의 영예를 얻게 되었다. 중국 문단의 오도된 남훈전본에 대한 인식, 즉 해내진상론은 1852년에 이르면 李尙迪(1804~1865)을 통해 조선으로도 수용된다.37 程祖慶(1819경~?)의 〈소동파상〉은 이상적이 수용했을 남훈전본 해내진상의 실체를 보여준다(Fig. 15). 화면 오른편 아래로 ‘남훈전본’이라는 묵서는 도상의 권위를 직설적으로 과시한다. 두터운 심의에 뒤가 접힌 동파건을 갖춘 오른편 얼굴 반신상으로 동파건에서 양 어깨로 흘러내려온 띠의 모습은 전형적인 왕문고본의 모습이다.
19세기 왕문고본의 확산은 《景蘇園帖》을 통해서도 확인된다(Fig. 16).38 전체 126개 석각중 소식의 서예 72건이 포함되어 있는데, 앞에 〈소동파상〉과 그 찬문이 있다. 경소원첩은 왕문고본 해내진상의 영향력이 19세기 말까지 지속되었음을 확인해준다. 진짜 남훈전본은 물론 법식선과도 관련이 없던 왕문고본은 이렇게 19세기 해내진상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 신화의 탄생은 이렇게 이뤄졌던 것이다.
Ⅴ. 맺음말
법식선과 왕문고의 남훈전본 해내진상론과 그 실제를 검토했다. 1802년 남훈전에서 법식선이 모사하여 옹방강에게 전했다는 해내진상론은 반쯤 허구의 신화였다. 법식선이 남훈전을 열람한 적은 있지만 그가 만들어 옹방강에게 전한 화첩은 몽선본이었고, 옹방강의 사실상 평가 거절과 함께 자취를 감추었다. 법식선과 옹방강 사후, 풍문을 접한 왕문고는 꿈과 전언의 우연한 조합을 근거로 새로 발굴한 상을 남훈전본으로 확신하였다. 왕문고본만의 특징적인 두 줄의 띠는 권위있는 관찬도감이나 남훈전본 원본에서도 볼 수 없는 비주류적 모티프임에도, 출판의 성공과 함께 왕문고본은 남훈전본의 이름으로 확산되었고 마침내 해내진상의 신화는 완성되었다.
법식선을 따른 왕문고의 남훈전본 해내진상론은 옹방강의 수제자를 자처한 이언장의 이공린본 송본진상론과 함께 19세기 문단의 양대 진상론의 하나가 되었다. 양대 진상론은 소동파 숭모의 선두주자라 할 법식선과 옹방강 사후, 왕문고와 이언장을 중심으로 한 차세대 문인의 대두와 보이지 않는 경쟁을 시사하여 주목된다. 청조 진상론의 분화와 함께 조선에서는 진상론에 대한 안티테제로서의 백동파론이 확산하는 등, 19세기 동아시아에서는 소동파 숭모를 둘러싼 논의가 꽃피었다. 이는 파공생일제의 확산과 진상론의 교조화에도 불구하고 청조와 조선에서 동파상이 더욱 다채롭게 전개되어 나타난 역설을 이해할 수 있는 또 다른 열쇠를 제공해준다.
Notes
김울림, 「翁方綱의 金石考證學과 蘇東坡像」, 『美術史論壇』 18 (2004); 同著, 「元代 復古主義와 蘇東坡 이미지」, 『인문과학연구』 34 (2022.12); 김현권, 「추사 김정희가 수용한 翁方綱 소장 蘇軾 진영」, 『도시역사문화』 4 (2006); 姜慶姬, 「조선후기 崇蘇熱과 東坡笠屐圖」, 『中國語文學論集』 65 (2010); 정민, 「19세기 동아시아의 慕蘇열풍」, 『韓國漢文學硏究』 (2012).
옹방강과 무관하게 확산된 소동파에 대한 도교적 해석과 그 도상의 의미에 대해서는 최근에야 연구가 시작된 바 있다. 김울림, 「매체로서의 금석과 18-19세기 소동파상: ‘건륭기유’명 월동본 〈소문충공유상〉을 중심으로」, 『미술사학보』 61 (2023), pp. 87-109.
김울림, 「‘蘇文忠公宋本眞像’과 19세기 蘇軾 이미지」, 『미술사학보』 46 (2016.6), pp. 91-111.
“向聞內府藏於南薰殿者. 自元明遞傳至今. 最爲偪肖. 而世不可見. 嘉慶壬戌, 梧門法氏差赴編纂 始橅得之, 轉遺覃溪翁氏, 縣供蘇齋事, 在予出京後. 此海內知爲眞像者也.” 王文誥, 「蘇文忠公眞像記」, 『蘇文忠公詩編注集成』 卷3 眞像考, p. 1b.
개념상 海內는 黃州 및 惠州 유배시기를 포함하는데, 황주 雪堂을 무대로 한 〈적벽부〉는 특히 유명하다. 반면, 海外는 海南, 즉 儋州를 지칭하는 것으로, 옹방강은 특히 이 시기 입극도를 중심으로 소식 사상을 해석한 바 있다. 따라서, 왕문고의 이러한 발언은 해외에서 해내로의 프레임 전환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현재 자금성내 보존된 소수의 명대 전각중의 하나로서, 너비 5칸 규모의 장방형 부지위에 황색 유리와를 얹은 팔작지붕을 갖춘 단독 건축물이다. 전각 안에는 주홍칠의 5층 木閣을 세워 역대제왕상을 봉안했는데, 동쪽 방에는 역대 황후를 서쪽 방에는 명대 제후를 모셨다. 남훈전의 건축과 관련해서는 胡南斯, 「北京紫禁城南熏殿建筑形制与修缮设计研究」 (清华大学碩士學位論文, 2014).
賴毓芝, 「文化遺產的再造 : 乾隆皇帝對於南薰殿圖像的整理」, 『故宮學術季刊』 26卷 4期 (2009), pp. 79-81.
“爰命工重加裝潢, 自太皥伏羲氏而下帝后圖像, 為軸者六十有八, 為冊者七, 為卷者三, 先聖名賢圖冊五.” 「御製南薫殿奉藏圖像記」, 『國朝宮史』 卷11, p. 43a.
南薰殿과 소장 圖像에 대한 소개는 黎晟, 「清宫南薰殿圖像考述」, 『南京藝術學院學报: 美術與設計』 6期 (2017), pp. 68-76 참고; 乾隆帝에 의한 남훈전 재정비와 관련해서는 賴毓芝, 「文化遺產的再造 : 乾隆皇帝對於南薰殿圖像的整理」, 『故宮學術季刊』 26卷 4期 (2009), pp. 75-110 참고.
國立故宮博物院, 『權力的形狀: 南薰殿帝后像特展』 (臺北: 國立故宮博物院, 2021).
內務府 正黃旗 소속 몽골인으로, 성은 伍堯, 본명은 運昌,자는 開文,호는 時帆 혹은 梧門이다. 1780년 진사출신으로 1785년 고종에게 명을 받아 개명했는데, 法式善은 만주어로 큰 공적을 의미한다. 四庫全書提調와 國子監祭酒를 지낸 관료이자 문학가로 京師에서 활동하였다.
법식선과 서애아집에 대해서는 강관식, 「藝術的 崇拜의 雅會圖」, 『강좌미술사』 41 (2013), pp. 100-108 및 李淑岩, 『法式善詩學活動研究』 (哈爾濱: 黑龍江大學出版社, 2013) 참고.
“嘉慶七年三月初八日, 法式善以纂修宮史, 得敬觀南熏殿暨內庫所藏歷代帝王及諸名臣像, 凡為冊者十七, 為卷者三, 為軸者百蓋. 我高宗純皇帝命廷臣裹集, 宮府庫司所儲而藏諸者也. 其像之作于何代, 無款識可辨. 以縑素筆墨度之, 蓋唐時所存者至少, 宋南渡以後畧備, 然其紙墨之剝落亦多矣. 惟宋明帝后暨唐宋功臣像, 稱完善意, 當時奉詔敕為之者, 觀其冠裳制度, 可以見古今沿革損益. 某幸以承乏宮史之役, 得悉覩內府所藏, 此於儒生之際, 遇榮幸為何如.(後略)” 法式善, 「南熏殿古像記」, 『存素堂文集』 卷4, p. 21b-22b.
法式善, 「南薰殿藏古帝后像」 및 「茶葉庫藏歷代功臣像」, 『陶廬雜錄』 卷1, 2a-3b.
김울림, 「18·19세기 동아시아의 蘇東坡像 연구 : 淸朝 考證學과 관련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8), pp. 158-159 [표 1] 및 [표 2] 수정 보완.
‘歷代聖賢像一冊, 自蒼頡起, 至許衡止, 凡三十一葉.’ 法式善, 「南薰殿藏古帝后像」, 『陶廬雜錄』 卷1, 3a.
옹방강에게 관골 위의 점은 이공린본 진상의 필수요건이었다. 김울림, 「‘蘇文忠公宋本眞像’과 19세기 蘇軾 이미지」, 『미술사학보』 46 (2016.6), pp. 91-111.
“王新城尚書謂 六朝人畫多寫古聖賢列女及習禮儀器等圖 此如漢儒注疏多詳干制度名物也. 余嘗摹古聖賢像舊蹟, 又摹太學大成殿周彝器圖, 四方能詩之士爭爲題詠, 裝成鉅軸久矣. 歲乙卯四月 時雨初晴 訪吾友 夢禪居士於桑陰老屋 見所藏歷代帝王名臣遺像數冊. 不署畫工姓氏 度為國初人摹本. 墨頹紙壞 精氣特存惟其間殘缺 殊甚 年代先後 復多訛舛. 借歸展對 取詩龕石墨 卷軸印註 頗能相合 其不合者 亦可以補 予所未備 嗚呼可寶也. 已爰倩荆溪畫師潘大琨 摹諸縑素 越歲始成. 署名幀端者 一冊至五冊 寧化伊員外秉綬, 六冊至八冊 靈石何貝外道生 書出兩人故詳簡不同. 其序次多依官史, 故與原本亦稍異. 近余課士太學間試以古文 因舉所繪像為題. 分譔頌讚銘說考 諸體具有可觀. 余既別錄存之 而諸生亦願各留其共蹟, 遂參差雜書於帙. 像几二百九十有二 其間品類不同 要其術業 皆可傳世 原闕者無考未及續繪 異日者倘遇于荒祠畵壁 斷楮殘縑或摹搨或臨寫 則所闕者或不至終闕乎[王惕甫曰膠情古趣流露行墨]” 法式善, 「歷代帝王名臣遺像記」, 『存素堂文集』 卷4, pp. 22b-23b.
《三才圖會》 人物圖像 人物8卷 내에는 人物又8卷이 숨겨져 있다. 제후상(1~3권) 뒤에 성현상(4~8권)를 배치했는데 종합적으로 인물1권 22명, 2권 28명, 3권 21명, 4권 31명(32장), 5권 26명, 6권 46명, 7권 39명, 8권 49명, 우8권 30명, 도합 292명 293장이다. 인물4권의 〈先聖像〉, 〈先聖別像〉은 공자 1명을 그린 것이므로 인명수보다 화상수가 1장 더 많다.
‘文簡贊中 若宋之 寇公準 王公旦 晏公殊 韓公琦 劉公敞 程公璃 吕公希哲 朱公韋 李公愿中 饒公仲元等 則又余冊所闕者.’ 法式善, 「孫文簡古像贊跋」, 『存素堂文集』 卷3, p. 19a.
“余既恭閱南薰殿藏像而記之矣. 偶檢明孫文簡瀼溪草堂稿 有古像贊一卷 與余(鬟?)所借撫 夢禪居士家藏本 畧合 惟余冊内 益以明代人為數較多 文簡贊中 若宋之 寇公準 王公旦 晏公殊 韓公琦 劉公敞 程公璃 吕公希哲 朱公緯 李公愿中 饒公仲元等 則又余冊所闕者. 輾轉傳寫 遺誤遂多 因取南薰殿藏歷代帝王聖賢像冊 詳核之. 三本各有不同 溯其源則一而已 當是宋南渡後 畫院所製 元明人增損之耳 若夫鑒別之 真議論之 確則 文簡 集古 像序 古像贊小引 二文 足資學士覽觀焉. 余不贅 [汪瑟莽曰有關考證之文 愈瑣細愈佳.]” 法式善, 「孫文簡古像贊跋」, 『存素堂文集』 卷3, pp. 19a-19b.
「孫文簡古像贊跋」 바로 다음에 실린 글이 「翁覃溪先生臨文待詔書跋」인데 문장 중 ‘先生今年六十有八’이라고 하여 옹방강 86세에 해당하는 1801년을 확인할 수 있다. 남훈전본을 열람한 1802년 이전이므로, 목차가 시간순에 따른 것이 아님이 확인된다.
인용문은 그가 남훈전본 그림을 가진듯한 인상을 풍기지만, 이미 검토했듯이 그가 가진 남훈전본은 단지 목록이었다.
법식선의 발문은 인명의 증감만을 기록할 뿐 화상의 좌우가 바뀐 점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그가 열람한 것이 《고상찬》 목록본인지, 아니면 화상까지 포함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昔屈子稱楚先王廟及公卿祠畫古賢聖事曰 : 馮翼惟像, 何以識之? 王右軍與人書, 欲求能畫者, 摹五帝以來畫像. 杜少陵適江陵詩曰 : 喜近天皇寺, 先披古畫圖. 蓋謂寺有張僧繇畫孔子及顏子十哲像也. 而昌黎韓子曰 : 見今世無工畫者. 豈右軍、少陵所稱, 必皆古本精妙而後為信歟? 其見於後賢之文者, 若東坡所記唐名臣像, 弇州所記大禹治水圖, 唐十八學士圖, 中唐十子圖, 廬陵五君子圖, 皆因形皃以想其為人而已, 非必盡古本真迹也. 梧門司成博學嗜古, 每見前賢遺蹟, 不啻飢渴, 寤寐從之. 其於為詩也, 既繪陶王孟韋柳諸像矣. 今復從其友人齋中摹得古帝王名臣像二百九十三幅, 裝為八冊, 晨夕焚香晤對, 視其繪唐詩人之意, 更有進焉. 屬為書數語於其冊. 愚則深愛魏鶴山題古像之銘曰 : 言忠信, 行篤敬 ; 行顧言, 言顧行. 此四言者, 蓋自顓孫子書紳以來, 羹牆前哲之誠, 如或見之 ; 而豈以畫工與不工, 形似與不似為齗齗耶? 敢敬書以志之.” 翁方綱, 「書梧門藏古像冊後」, 『復初齋文集』 卷33, pp. 1a-1b.
옹방강은 소식 얼굴 위에 별자리 모양의 점을 진상의 증거로 보았다. 그의 차가운 태도는 몽선본 〈동파상〉에 그러한 점들이 없었음을 반증한다. 실제 몽선본과 같은 계열로 추정되는 남훈전본에도 그러한 점들이 없다.
각주 4 참조.
‘逮予刊此書成, 頗以像闕爲憾, 嘗寓書都門屢物色之, 而壬戌迄今已二十載, 人代飄忽, 擧爲陳跡, 蓋已不可求其本矣. 因念詩刻諸像, 有朱從延傳趙松雪本, 與靈洲山元時刻差近, 仍之亦足以迄事. 爲橅贊之, 弁於卷端, 遂不復以識眞爲嚮往矣.’(필자표점), 王文誥, 「蘇文忠公眞像記」, pp. 1b-2a.
조맹부의 〈동파책장상〉이 황주유배기 설당을 배경으로 적벽부의 문학적 주인공으로서의 소식을 형상화하고 있음은 김울림, 「元代 復古主義와 蘇東坡 이미지」, 『인문과학연구』 34 (2022), pp. 414-415 참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 작품은 왕문고의 자찬문이 그림 위에 있으나, 《소문충공시편주집성》에 따로 실린 유상의 그림과 진상의 찬문을 한 화면에 짜집기한 것으로 왕문고 자신의 필적 보다는 후대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去年除夜守歲, 韻山堂較閱新刻, 漏五下方, 合眼坐俄, 有古衣冠頎, 而長者立於前, 予欲起詢遽爲四隣, 爆竹所震驚, 而寤, 則已遲明時矣. 越三日有攜古曩軸, 止於門屋者, 予出適見之, 籤題宋蘇文忠公像, 急展視之, 則宛然夢中所見. (中略) 又四日, 甘泉江君鄭堂自端溪至, 吒曰: 此坡公生像, 向屢見於蘇齋, 君何自而得之耶? 相與慨歎不已, 以爲事非偶然, 於是始悟梧門所摹同出一本.” 王文誥, 앞의 논문, pp. 2a-2b.
‘壽骨揷髩, 信如公詩. 負斗羅星, 羌芌見之. 華堂坐照, 麋鹿之姿. 彭山蒼蒼, 公其似之.’ 王文誥, 「蘇文忠公眞像贊」, 『蘇文忠公詩編注集成』 卷3 眞像考, p. 1a.
옹방강의 송본진상에서 별자리 모양의 점이 핵심적인데, 왕문고본 해내진상에서는 찬시에만 보일 뿐 그림에는 표현되어 있지 않다.
제1책 목차 여백에 쓰인 묵서를 통해 1854년 고람 전기가 모사했음은 잘 알려져있다. ‘古藍山人抄畵三才圖意 敬贈心齋徐侍郞筦正 歲甲寅淸秋之下浣’.
194폭의 《만고제회도상》이나 206폭의 《집고상찬》 모두 인물의 활동연대가 원대를 하한으로 하고 있는 점은 그 범본의 최초 찬집 시기가 원대임을 시사한다. 물론 인물을 포착한 방향이 오른편과 왼편으로 상반되므로 그 차이에도 유의해야 한다.
王文誥의 저작의 영향력에 대해서는 蘇軾 著, 王文誥 輯註, 孔凡禮 點校, 柳種睦 譯註, 『(완역)蘇軾詩集』 (서울대학교출판부, 2005)의 역자 서문 참조; 최근의 비판적 검토는 김보경, 「王文誥 《蘇文忠公詩編註集成》의 註釋에 대한 평가 문제에 관하여」, 『중국문학』 119 (2024), pp. 119-148 참조.
‘咸豐壬子冬, 程君序伯自嘉定手撫坡公象, 見寄且識其尾云.’ 李尙迪, 「題蘇文忠公笠屐像」, 『恩誦堂集』 續卷2, pp. 12a-b.
1890년 황주에서 楊壽昌(?~?)이 찬집하고 劉維善(?~?)이 모각하였으며 금석학자 楊守敬(1839~1915)이 감정한 탁본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