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23; 2024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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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김울림, 「翁方綱의 金石考證學과 蘇東坡像」, 『美術史論壇』 18 (2004); 同著, 「元代 復古主義와 蘇東坡 이미지」, 『인문과학연구』 34 (2022.12); 김현권, 「추사 김정희가 수용한 翁方綱 소장 蘇軾 진영」, 『도시역사문화』 4 (2006); 姜慶姬, 「조선후기 崇蘇熱과 東坡笠屐圖」, 『中國語文學論集』 65 (2010); 정민, 「19세기 동아시아의 慕蘇열풍」, 『韓國漢文學硏究』 (2012).
2) 옹방강과 무관하게 확산된 소동파에 대한 도교적 해석과 그 도상의 의미에 대해서는 최근에야 연구가 시작된 바 있다. 김울림, 「매체로서의 금석과 18-19세기 소동파상: ‘건륭기유’명 월동본 〈소문충공유상〉을 중심으로」, 『미술사학보』 61 (2023), pp. 87-109.
4) “向聞內府藏於南薰殿者. 自元明遞傳至今. 最爲偪肖. 而世不可見. 嘉慶壬戌, 梧門法氏差赴編纂 始橅得之, 轉遺覃溪翁氏, 縣供蘇齋事, 在予出京後. 此海內知爲眞像者也.” 王文誥, 「蘇文忠公眞像記」, 『蘇文忠公詩編注集成』 卷3 眞像考, p. 1b.
5) 개념상 海內는 黃州 및 惠州 유배시기를 포함하는데, 황주 雪堂을 무대로 한 〈적벽부〉는 특히 유명하다. 반면, 海外는 海南, 즉 儋州를 지칭하는 것으로, 옹방강은 특히 이 시기 입극도를 중심으로 소식 사상을 해석한 바 있다. 따라서, 왕문고의 이러한 발언은 해외에서 해내로의 프레임 전환 의도로 해석될 수 있다.
6) 현재 자금성내 보존된 소수의 명대 전각중의 하나로서, 너비 5칸 규모의 장방형 부지위에 황색 유리와를 얹은 팔작지붕을 갖춘 단독 건축물이다. 전각 안에는 주홍칠의 5층 木閣을 세워 역대제왕상을 봉안했는데, 동쪽 방에는 역대 황후를 서쪽 방에는 명대 제후를 모셨다. 남훈전의 건축과 관련해서는 胡南斯, 「北京紫禁城南熏殿建筑形制与修缮设计研究」 (清华大学碩士學位論文, 2014).
9) 南薰殿과 소장 圖像에 대한 소개는 黎晟, 「清宫南薰殿圖像考述」, 『南京藝術學院學报: 美術與設計』 6期 (2017), pp. 68-76 참고; 乾隆帝에 의한 남훈전 재정비와 관련해서는 賴毓芝, 「文化遺產的再造 : 乾隆皇帝對於南薰殿圖像的整理」, 『故宮學術季刊』 26卷 4期 (2009), pp. 75-110 참고.
11) 內務府 正黃旗 소속 몽골인으로, 성은 伍堯, 본명은 運昌,자는 開文,호는 時帆 혹은 梧門이다. 1780년 진사출신으로 1785년 고종에게 명을 받아 개명했는데, 法式善은 만주어로 큰 공적을 의미한다. 四庫全書提調와 國子監祭酒를 지낸 관료이자 문학가로 京師에서 활동하였다.
12) 법식선과 서애아집에 대해서는 강관식, 「藝術的 崇拜의 雅會圖」, 『강좌미술사』 41 (2013), pp. 100-108 및 李淑岩, 『法式善詩學活動研究』 (哈爾濱: 黑龍江大學出版社, 2013) 참고.
13) “嘉慶七年三月初八日, 法式善以纂修宮史, 得敬觀南熏殿暨內庫所藏歷代帝王及諸名臣像, 凡為冊者十七, 為卷者三, 為軸者百蓋. 我高宗純皇帝命廷臣裹集, 宮府庫司所儲而藏諸者也. 其像之作于何代, 無款識可辨. 以縑素筆墨度之, 蓋唐時所存者至少, 宋南渡以後畧備, 然其紙墨之剝落亦多矣. 惟宋明帝后暨唐宋功臣像, 稱完善意, 當時奉詔敕為之者, 觀其冠裳制度, 可以見古今沿革損益. 某幸以承乏宮史之役, 得悉覩內府所藏, 此於儒生之際, 遇榮幸為何如.(後略)” 法式善, 「南熏殿古像記」, 『存素堂文集』 卷4, p. 21b-22b.
15) 김울림, 「18·19세기 동아시아의 蘇東坡像 연구 : 淸朝 考證學과 관련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8), pp. 158-159 [표 1] 및 [표 2] 수정 보완.
17) 옹방강에게 관골 위의 점은 이공린본 진상의 필수요건이었다. 김울림, 「‘蘇文忠公宋本眞像’과 19세기 蘇軾 이미지」, 『미술사학보』 46 (2016.6), pp. 91-111.
18) “王新城尚書謂 六朝人畫多寫古聖賢列女及習禮儀器等圖 此如漢儒注疏多詳干制度名物也. 余嘗摹古聖賢像舊蹟, 又摹太學大成殿周彝器圖, 四方能詩之士爭爲題詠, 裝成鉅軸久矣. 歲乙卯四月 時雨初晴 訪吾友 夢禪居士於桑陰老屋 見所藏歷代帝王名臣遺像數冊. 不署畫工姓氏 度為國初人摹本. 墨頹紙壞 精氣特存惟其間殘缺 殊甚 年代先後 復多訛舛. 借歸展對 取詩龕石墨 卷軸印註 頗能相合 其不合者 亦可以補 予所未備 嗚呼可寶也. 已爰倩荆溪畫師潘大琨 摹諸縑素 越歲始成. 署名幀端者 一冊至五冊 寧化伊員外秉綬, 六冊至八冊 靈石何貝外道生 書出兩人故詳簡不同. 其序次多依官史, 故與原本亦稍異. 近余課士太學間試以古文 因舉所繪像為題. 分譔頌讚銘說考 諸體具有可觀. 余既別錄存之 而諸生亦願各留其共蹟, 遂參差雜書於帙. 像几二百九十有二 其間品類不同 要其術業 皆可傳世 原闕者無考未及續繪 異日者倘遇于荒祠畵壁 斷楮殘縑或摹搨或臨寫 則所闕者或不至終闕乎[王惕甫曰膠情古趣流露行墨]” 法式善, 「歷代帝王名臣遺像記」, 『存素堂文集』 卷4, pp. 22b-23b.
19) 《三才圖會》 人物圖像 人物8卷 내에는 人物又8卷이 숨겨져 있다. 제후상(1~3권) 뒤에 성현상(4~8권)를 배치했는데 종합적으로 인물1권 22명, 2권 28명, 3권 21명, 4권 31명(32장), 5권 26명, 6권 46명, 7권 39명, 8권 49명, 우8권 30명, 도합 292명 293장이다. 인물4권의 〈先聖像〉, 〈先聖別像〉은 공자 1명을 그린 것이므로 인명수보다 화상수가 1장 더 많다.
20) ‘文簡贊中 若宋之 寇公準 王公旦 晏公殊 韓公琦 劉公敞 程公璃 吕公希哲 朱公韋 李公愿中 饒公仲元等 則又余冊所闕者.’ 法式善, 「孫文簡古像贊跋」, 『存素堂文集』 卷3, p. 19a.
21) “余既恭閱南薰殿藏像而記之矣. 偶檢明孫文簡瀼溪草堂稿 有古像贊一卷 與余(鬟?)所借撫 夢禪居士家藏本 畧合 惟余冊内 益以明代人為數較多 文簡贊中 若宋之 寇公準 王公旦 晏公殊 韓公琦 劉公敞 程公璃 吕公希哲 朱公緯 李公愿中 饒公仲元等 則又余冊所闕者. 輾轉傳寫 遺誤遂多 因取南薰殿藏歷代帝王聖賢像冊 詳核之. 三本各有不同 溯其源則一而已 當是宋南渡後 畫院所製 元明人增損之耳 若夫鑒別之 真議論之 確則 文簡 集古 像序 古像贊小引 二文 足資學士覽觀焉. 余不贅 [汪瑟莽曰有關考證之文 愈瑣細愈佳.]” 法式善, 「孫文簡古像贊跋」, 『存素堂文集』 卷3, pp. 19a-19b.
22) 「孫文簡古像贊跋」 바로 다음에 실린 글이 「翁覃溪先生臨文待詔書跋」인데 문장 중 ‘先生今年六十有八’이라고 하여 옹방강 86세에 해당하는 1801년을 확인할 수 있다. 남훈전본을 열람한 1802년 이전이므로, 목차가 시간순에 따른 것이 아님이 확인된다.
24) 법식선의 발문은 인명의 증감만을 기록할 뿐 화상의 좌우가 바뀐 점에 대해 전혀 언급이 없다. 그가 열람한 것이 《고상찬》 목록본인지, 아니면 화상까지 포함된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25) “昔屈子稱楚先王廟及公卿祠畫古賢聖事曰 : 馮翼惟像, 何以識之? 王右軍與人書, 欲求能畫者, 摹五帝以來畫像. 杜少陵適江陵詩曰 : 喜近天皇寺, 先披古畫圖. 蓋謂寺有張僧繇畫孔子及顏子十哲像也. 而昌黎韓子曰 : 見今世無工畫者. 豈右軍、少陵所稱, 必皆古本精妙而後為信歟? 其見於後賢之文者, 若東坡所記唐名臣像, 弇州所記大禹治水圖, 唐十八學士圖, 中唐十子圖, 廬陵五君子圖, 皆因形皃以想其為人而已, 非必盡古本真迹也. 梧門司成博學嗜古, 每見前賢遺蹟, 不啻飢渴, 寤寐從之. 其於為詩也, 既繪陶王孟韋柳諸像矣. 今復從其友人齋中摹得古帝王名臣像二百九十三幅, 裝為八冊, 晨夕焚香晤對, 視其繪唐詩人之意, 更有進焉. 屬為書數語於其冊. 愚則深愛魏鶴山題古像之銘曰 : 言忠信, 行篤敬 ; 行顧言, 言顧行. 此四言者, 蓋自顓孫子書紳以來, 羹牆前哲之誠, 如或見之 ; 而豈以畫工與不工, 形似與不似為齗齗耶? 敢敬書以志之.” 翁方綱, 「書梧門藏古像冊後」, 『復初齋文集』 卷33, pp. 1a-1b.
26) 옹방강은 소식 얼굴 위에 별자리 모양의 점을 진상의 증거로 보았다. 그의 차가운 태도는 몽선본 〈동파상〉에 그러한 점들이 없었음을 반증한다. 실제 몽선본과 같은 계열로 추정되는 남훈전본에도 그러한 점들이 없다.
28) ‘逮予刊此書成, 頗以像闕爲憾, 嘗寓書都門屢物色之, 而壬戌迄今已二十載, 人代飄忽, 擧爲陳跡, 蓋已不可求其本矣. 因念詩刻諸像, 有朱從延傳趙松雪本, 與靈洲山元時刻差近, 仍之亦足以迄事. 爲橅贊之, 弁於卷端, 遂不復以識眞爲嚮往矣.’(필자표점), 王文誥, 「蘇文忠公眞像記」, pp. 1b-2a.
29) 조맹부의 〈동파책장상〉이 황주유배기 설당을 배경으로 적벽부의 문학적 주인공으로서의 소식을 형상화하고 있음은 김울림, 「元代 復古主義와 蘇東坡 이미지」, 『인문과학연구』 34 (2022), pp. 414-415 참조.
30)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이 작품은 왕문고의 자찬문이 그림 위에 있으나, 《소문충공시편주집성》에 따로 실린 유상의 그림과 진상의 찬문을 한 화면에 짜집기한 것으로 왕문고 자신의 필적 보다는 후대에 미친 영향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31) “去年除夜守歲, 韻山堂較閱新刻, 漏五下方, 合眼坐俄, 有古衣冠頎, 而長者立於前, 予欲起詢遽爲四隣, 爆竹所震驚, 而寤, 則已遲明時矣. 越三日有攜古曩軸, 止於門屋者, 予出適見之, 籤題宋蘇文忠公像, 急展視之, 則宛然夢中所見. (中略) 又四日, 甘泉江君鄭堂自端溪至, 吒曰: 此坡公生像, 向屢見於蘇齋, 君何自而得之耶? 相與慨歎不已, 以爲事非偶然, 於是始悟梧門所摹同出一本.” 王文誥, 앞의 논문, pp. 2a-2b.
35) 194폭의 《만고제회도상》이나 206폭의 《집고상찬》 모두 인물의 활동연대가 원대를 하한으로 하고 있는 점은 그 범본의 최초 찬집 시기가 원대임을 시사한다. 물론 인물을 포착한 방향이 오른편과 왼편으로 상반되므로 그 차이에도 유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