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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3; 2024 > Article
대한제국기 親王府 운영과 英親王의 유년기 서화활동

Abstract

본 논문은 대한제국기에 처음으로 도입한 親王制와 親王府의 운영이라는 변화된 제도와 환경이 친왕으로 책봉된 영친왕의 유년기 서화교육과 창작활동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살펴본 것이다. 대한제국기 친왕제는 중국 唐의 황실 봉작제와 官府의 설치를 참고해 운영되었으며, 특히 고종의 의지로 인해 친왕의 교육과 자질양성에 집중한 특성을 보여준다.
평소 서화에 관심이 많았던 영친왕은 어려서부터 스승을 두고 체계적으로 교육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서화활동에 영향을 준 인물은 그동안 金圭鎭만 알려졌던 데에서 반해 이 글에서는 修學院 敎官과 東宮師傅를 지낸 安宅重이라는 인물과 역할에 대해서도 새롭게 조명해 보았다. 현존하는 영친왕의 서화작품은 두 가지 성격으로 극명하게 구분된다. 한 부류는 10세 이전에 제작한 것으로 주로 황실의 전통을 계승한 서예작품에 한정되어 있는 반면, 다른 부류는 근대식 도화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英親王幼年時書畵』이다. 영친왕이 전통과 근대식 서화교육을 모두 전수받은 인물이었음을 고려할 때, 친왕부 시절 그의 서화활동은 대한제국기 황실미술의 성격과 더 나아가 서로 다른 신분층이 접했던 한국근대기 도화교육의 실상과 영향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Abstract

This paper examines how the newly introduced Imperial Prince System (ch'inwangje 親王制) and the management of the Imperial Prince’s Bureau (ch'inwangbu 親王府) in the Korean Empire shaped the early education of calligraphy and painting and artistic activities of imperial prince Yŏng 英親王 (1897~1970). The ch'inwangje system during the Korean Empire was modeled after the Tang dynasty’s royal title system and governmental structures, illustrating Emperor Kojong’s strong interest in the education and cultivation of the prince’s qualities. Imperial prince Yŏng, who developed a notable interest in calligraphy and painting, appears to have received a systemized education from an early age with the guidance of several teachers. While the previous scholarship dealt mostly with Kim Kyu-jin 金圭鎭 (1868~1933) as a primary role in the prince’s education, this study sheds new light on the contributions of An T'aek-chung 安宅重 (1858~1929), who served as a teaching official at the Suhagwŏn Royal Academy and as a tutor to the Crown Prince. Imperial prince Yŏng’s extant work can be categorized into two distinct phases: those produced before the age of ten, which are mostly limited to calligraphy, and works from his later years that demonstrate modern education, as seen in Imperial prince Yŏng’s Childhood Calligraphy and Paintings 英親王幼年時書畵. Considering that Imperial prince Yŏng was trained in both traditional and modern styles of calligraphy and painting, An’s artistic endeavors during his time in the prince’s household offer valuable insights into the nature of court art during the Korean Empire era. Furthermore, they contribute to a broader understanding of the impact of modern art education in Korea across different social strata during this period.

Ⅰ. 머리말

조선왕실에서 封爵制는 국왕의 혈육이나 인척을 예우하는 차원에서 일정한 작위와 이에 따른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王權을 강화하고 왕실을 결속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지속적으로 시행되었다. 이 중 국왕과 왕비, 왕세자는 중국과 조선의 황제국-제후국 관계 속에서 明과 淸의 황제로부터 봉작을 받았고 朝貢의 책무를 수행해야만 했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 간 冊封-朝貢의 관계에서 벗어나 조선의 국왕이 직접 왕비와 왕세자를 책봉하게 된 큰 변화가 있었으니 바로 1897년 고종의 대한제국 선포가 그 계기가 되었다. 고종은 대한제국 황제로 등극한 후 직접 황후, 황태자, 황태자비를 책봉하였고, 이 과정에 앞서 역사상 최초로 親王制를 도입했다.
친왕제는 제후국 입장에서 보면 기존의 大君이나 君에 해당하는 황제의 혈육을 親王으로 격상시켜 책봉하는 것을 말하며, 唐의 봉작제에서 유래한 것이다.1 친왕으로 책봉된 皇子는 親王府에서 생활일체를 관리하였고, 궁궐 밖에 생활공간으로 사용하거나 황실재정을 충당하기 위한 宮家를 건립해 운영토록 하였다.2 대한제국기 동안 친왕으로 책봉되고 친왕부와 궁가가 모두 별도로 설치되었던 인물은 英親王 李垠(1897~1970)이 유일하다(Fig. 1). 그는 1900년(고종 37) 4살이라는 비교적 어린 나이에 친왕[英王]으로 책봉되었고 1907년 12월 11세의 나이에 渡日하기 전까지 유년기3 동안 주로 英親王府에서 통과의례와 교육에 있어 체계적이고 집중적인 예우를 받았다.4 그가 어려서부터 書畵에 남다른 관심과 재능을 보였고 전통과 근대식 미술 교육을 모두 받았음을 보여주는 작품이 다수 남아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친왕부에 대한 연구는 비단 역사적 시각을 넘어 미술사에서도 20세기 전반 황실의 서화제작 환경과 주체, 제도적 변화, 교육체계 등을 파악하는 데 있어 중요한 일면을 차지하고 있다고 본다. 반면, 어린 시절 敞衣를 입고 찍은 모습과 달리 장성한 후 유럽에서 중절모를 쓰고 그림 그리는 그의 모습은 시대적 경계인으로서 뿐 아니라 그의 미술활동에 있어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Fig. 2).
영친왕의 유년시절 도입되어 그의 초년기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친 대한제국기 봉작제에 대해서는 시행 배경과 시·공간적 전개, 관련 인물들에 대해 역사학계에서도 제대로 연구된 바 없으며,5 영친왕의 유년기 서화활동과 연관해 중요성이 있음에도 미술사적 시각에서 지금까지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다만 영친왕의 활동에 대해서는 근래에 들어와 그가 착용했던 복식이라든지 근대체육사에 끼친 영향을 조명한 연구를 비롯해, 일제 강점기 李王家 컬렉션이 형성되는데 공헌한 미술후원자로서 활동에 주목한 성과 등 다양한 분야에서 그의 시대와 삶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는 여지가 생기기 시작했다.6
본 논문에서는 이러한 선행연구를 토대로 다음 두 가지 사항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대한제국기 찬왕부 연구를 위한 필수적인 자료인 『[英親王府]日記』, 『英親王東宮日記』등을 분석해 당시 王府 운영에 따른 영친왕의 책봉과 예우 등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파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유년기 생애사를 구체적으로 살펴 보고자 한다.7 다음으로 친왕부에서 이루어진 황실 서화교육과 관련 인물들, 각종 편액서와 『英親王幼年時書畵』 등 영친왕이 1907년 渡日하기 전·후 시기에 남긴 글씨와 그림을 살펴봄으로써, 대한제국 황실인사 중 한명으로 대표되는 영친왕의 서화활동이 전통과 근대가 교차하던 당시 미술사에서 갖는 의의에 대해 논의하도록 하겠다.

Ⅱ. 대한제국기 親王制 도입과 英親王府 운영

1. 義親王·英親王의 책봉에 따른 친왕제 도입

1897년 10월 12일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며 황제로 등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宮人 嚴氏(1854~1911)가 1897년 10월 20일 경운궁 肅雝齋에서 영친왕을 출산하였다.8 영친왕은 1900년 8월 8일 이름을 垠으로 정하기까지 酉吉이라는 兒名이 있었으나 보통 阿只氏 또는 皇三子라고 존칭되었다.9 영친왕 출생 당시 형제로는 훗날 순종이 된 황태자와 皇二子 義和君 李堈(후에 의친왕, 1877~1955) 둘 뿐이었다. 고종과 貴人 張氏 사이에서 태어난 의친왕은 대한제국이 시작된 1897년에 君으로 봉작된 지 6년이 지났고 이미 21세의 장성한 청년이었음에도 아직 친왕으로 책봉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건립 후 황제권 강화를 위해 역대 선왕선후를 추승하고 황족들의 책봉을 단행했던 고종은 영친왕 탄생을 계기로 의친왕과 영친왕 두 皇子를 친왕으로 봉작할 것을 결심한 듯하다. 그는 영친왕이 4세가 된 해인 1900년 8월 5일(음력 7월 11일) 掌禮院에 다음과 같은 조칙을 내렸다.
짐은 이미 天命을 받아 큰 자리에 올랐다. 여러 아들을 책봉하여 황실을 견고히 하는 것은 당연한 법도[彝典]가 있기에 萬世토록 같은 바이다. 皇二子 義和君과 皇三子를 封王하는 儀節을 장례원으로 하여금 典禮를 널리 살펴보게 하여 날을 정해 거행하도록 하라.10
고종의 조칙은 친왕제가 처음 도입된 배경이 자신의 황제로서 등극을 정당화하고, 황실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고자 관련 의례를 구체화하는 데 있었음을 말해준다. 인용문 중 ‘封王’이란 황태자를 제외한 황제의 아들을 한 단계 아래인 왕으로 책봉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곧 친왕을 가리킨다. 이러한 사실은 조칙이 내려진 3일 뒤인 8월 8일 掌禮院卿 李胄榮이 고종에게 “親王을 책봉하는 儀節을 마련해야 하는데…”라고 아뢰면서 ‘친왕’이라는 단어를 언급한 실록기사를 통해서도 확인된다.11
당시에는 명분상 명대 제후국 제도가 아닌 唐代 황실봉작제를 적용했지만, 실제 책봉 절차에 있어서는 기존의 다양한 전례서를 참고해 조선의 전통적인 왕실의례와 명대 책봉의례를 혼합한 방식으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대한제국 친왕이 金冊과 金印을 받은 것은 명대 친왕의 상징물과 유사하지만, 명대 친왕이 九章服을 입은 것과 달리 대한제국 친왕은 조선의 왕세자처럼 七章服을 하사받았다.12
고종은 조칙을 내린 후 8월 17일 경운궁 중화전에서 의친왕과 영친왕을 친왕으로 책봉하고 頒詔文을 공표하였다.13 그러나 당시 책봉식은 완전한 모습이었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었다. 의친왕은 전년도부터 미국 유학 중이었기 때문에 행사에 참여하지 못했고, 영친왕은 너무 어려 직접 현장에 나올 수 없었기에 처소였던 西宮에서 관리를 통해 대신 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대한제국기 친왕제는 법령화된 제도가 아닌 의례적 성격에 더 가까웠고 『大韓禮典』에도 정식으로 수록되지 않았다. 비록 처음부터 정교하게 준비된 것은 아니었지만, 「冊拜親王儀」처럼 친왕 중심의 책봉의례가 만들어졌고, 별도의 親王旗를 제작했으며,14 친왕부를 설치하는 등 황제국에 걸맞게 봉작제를 새롭게 적용하고 정비해 나아가는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1907년 12월 선진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영친왕이 볼모의 신세가 되어 일본으로 떠났고, 3년 뒤에는 한일강제병합으로 인해 황실이 王公族으로 강등됨에 따라 대한제국 친왕제는 더 이상 유지되지 못하고 전무후무한 사례로 남게 되었다.

2. 英親王府의 설치와 운영

대한제국 황실은 친왕의 생활일체를 감독·보좌하고, 친왕부 운영의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 1900년 8월 8일 宮內府官制 중 皇太子妃宮 아래 親王府를 증설하기로 하고 관련 규정을 세분화시켰다.15 아울러 布達 제60호를 통해 府令 1인(奏任)과 典衛 2인(判任)을 두었고 이들의 봉급표를 궁내부 주임관의 봉급 규정에 첨가해 친왕부의 사무 및 소관 회계, 업무를 관장할 직원에 대한 직제를 공포했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02년에 공포한 포달 제78호에서는 친왕부의 기능과 직원의 역할, 인원수가 더욱 상세하게 명시되었다.16 관보의 내용을 일부 제시하면 아래와 같다.
• 친왕부는 친왕의 輔翼, 講學, 護從의 일을 관장하며, 府務 및 소관 회계를 관장한다. 직원을 다음과 같이 둔다.
• 總辦 1인(勅任), 贊尉 1인(奏任), 典讀 1인(判任), 典衛 2인(判任)
• 총판은 칙임관으로 친왕의 보익, 강학, 호종의 책무를 전담하며, 친왕부 안의 일체 사무를 관리하고 소속 관리들을 지휘, 감독한다.
• 찬위는 총판의 직무를 보좌하고 府務를 조력[贊理]함
• 전독과 전위는 상관의 지휘를 받아 府務에 종사함
위 규정에 의하면 친왕부는 친왕의 保衛와 학습, 호종을 전담했던 관청으로, 조선시대 세자시강원과 유사한 기능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처음 설치했을 당시에는 부령 1인, 전위 2인 등 총 3명의 소략한 조직에서 출발했지만, 2년 뒤에는 총판, 찬위, 전독, 전위 등 총 5명으로 확대되었고, 업무 일체를 총괄하는 칙임관인 총판이 신설되어 친왕부의 위상이 이전보다 한층 높아진 상태였다. 아울러 조선시대 세자의 호위를 맡았던 世子翊衛司와 유사한 親王府武官 官制를 이어서 공표하였다.17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대한제국기 책봉된 황자는 의친왕과 영친왕이었기 때문에 친왕부 역시 義親王府와 英親王府 두 곳만 설치되었다. 의친왕은 그가 의화군으로 봉작되면서 하사받은 종로 寬仁坊의 宮家에서 생활했고 1905년 미국에서 돌아온 후에는 별도의 왕부 건립 없이 이곳을 본격적으로 義親王府로 겸용해 사용했다.18 반면, 영친왕부는 영친왕의 이름과 책봉 의례를 논의하던 중인 1900년 8월에 설치되어 府令과 典衛가 이미 임명된 상태였기 때문에 의친왕부보다 먼저 운영되고 있었다. 또한 의친왕부가 궐밖에 있었던 것과 달리 영친왕부의 건물은 경운궁 안에 마련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英親王府]日記』 1902년 3월 16일조에 “영친왕부를 경운궁 내에 신설함. 本府 수리비용과 신설비용 삼백원은 慶善宮에서 특별히 하사함”이라고 기록된 내용을 통해 확인된다.19 즉 영친왕부를 경운궁 안에 새로 건립하면서 일부는 기존의 건물을 이용하고 일부는 새로 지었으며, 영친왕의 모친 嚴妃가 고종으로부터 하사받은 宮號이자 실질적인 宮房이었던 경선궁에서 비용을 조달한 사실을 알 수 있다. 경선궁은 전국에 토지를 많이 보유해 英親王宮과 더불어 대한제국기 황실재정을 보조한 대표적 궁방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재정적 지원도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한다.20
그렇다면 영친왕부는 경운궁(현 덕수궁) 내 어디에 있었을까. 이와 관련해서는 1904년 4월 경운궁 대화재가 있기 직전 같은 해에 작성된 『The Korean Review』에 실린 경운궁 전각의 배치도를 참조할 수 있다(Fig. 3). 이 배치도에는 주요 건물이 번호로 표기되었는데 26번으로 표기된 엄비의 처소인 永福堂 옆에 24번 건물의 명칭을 “Crown Prince’s Apartment”라고 지칭한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바로 영친왕의 처소이자 영친왕부로 사용된 전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듯 위치상 가까운 두 건물의 배치는 모친 엄비가 자신의 처소 근처에 영친왕의 처소이자 관부를 두고 직접 어린 아들을 특별하게 보호했을 것이라는 추정을 가능케 한다.21
기록에 의하면 영친왕부의 공식적인 운영기간은 1900~1907년에 이르는 약 7년의 짧은 기간에 해당한다. 그러나 영친왕이 일본에서 유학 중이었던 1910년대까지 영친왕부에서 그의 동정을 기록한 일기를 계속 작성한 것으로 보아, 최소한 1910년까지는 비공식적으로 유지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곳의 사무를 매일 기록한 업무일지인 『[英親王府]日記』에 따르면, 영친왕부는 1900년에 처음 조직이 마련되었고 1902년 궁내부관제 개정에 따른 확대·개편으로 정식으로 건물을 갖추었으며, 영친왕이 1907년 8월 7일 황태자로 지명되고 8월 16일 대한제국 육군보병 參尉에 임명되자 더 이상 운영의 명분이 없었는지 1907년(융희1) 8월 21일 순종의 명에 의해 공식적으로 철폐되기에 이르렀다.22 이때 의친왕부 소속 總辦 이하 관리들을 해촉하고 각종 물품은 內藏司로, 서책 등은 侍講院으로 옮겼다.
비록 존속기간은 길지 않았으나, 영친왕부 관리들은 매일 영친왕의 기체와 안부를 확인해 기록으로 남긴 한편 冠禮(1907.3.6)와 황태자 책봉(1907.9.7) 등 그의 친왕시절 유년기 인생사에 있어 굵직한 업무를 예장원 등 관청과 협력해 진행시켰다. 그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업무는 바로 講學과 書筵이었다.23 1902년 고종의 명으로 친왕의 강학과 교육을 담당하는 典讀 職을 새로 만들어 영친왕부에 배속한 것 역시 이러한 기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한편 영친왕은 다른 황실 자제들에 비해 강학을 비교적 일찍 시작했는데, 이는 그의 타고난 소양과도 연관 있어 보인다. 예를 들어 1901년 議政府議政 尹容善이 고종에게 올린 상소에서, 영친왕이 비록 5세밖에 되지 않았지만 모든 면에서 성숙하고 이미 官府[영친왕부]를 설치했으니 문자를 익히고 善行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한 것처럼, 영친왕은 어린 나이에도 품성과 공부에 대한 자질이 뛰어난 것으로 평가받았다.24 그는 1902년을 전후로 『童蒙先習』과 『小學』등 初學者들이 배우는 교재를 학습하기 시작했고, 1906년 고종의 명으로 친왕부 관리를 강독관으로 임명하고 강학절차를 규례로 정함으로써 더욱 체계적인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이러한 영친왕부에서의 교육은 영친왕의 서화학습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의가 있다. 그가 친왕 교육의 일환으로 서화에 대한 관심과 소양을 기른 것과 아울러 당시 한중일 동아시아 미술교육의 흐름 중 하나였던 근대식 도화교육을 동시에 수학했고 이러한 과정을 반영한 작품들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다음 장에서는 영친왕의 서화학습의 과정과 양상은 어떠했는지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Ⅲ. 親王府 시절 英親王의 서화교육과 작품활동

1. 전통적인 서화학습과 書寫

영친왕은 불과 8세였던 1904년에 〈英王書室〉이라는 글씨를 써서 서재에 걸어두었을 정도로 독서에 대한 열정과 자신의 글씨에 대한 자신감이 남달랐던 것으로 보인다(Fig. 4). 그의 서실이 어디에 있었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영친왕동궁일기』의 1910년(융희4) 항목에 영친왕이 일본에 유학간 후 本宮에 있던 서책을 규장각으로 옮겼다는 내용으로 보아 아마도 영왕서실은 英親王宮에 딸린 서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5
영친왕이 어려서부터 현판글씨를 비롯해 서화에 특별한 조예를 보였던 것은 할아버지 흥선대원군을 비롯해, 고종, 순종에 이르기까지 황실인사들이 御筆 현판을 자주 서사한 전통이 있었고, 황실이 도화업무에 참여했던 서화협회, 서화미술회 소속 화가들을 후원하는 등 서화애호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던 것도 한 가지 요인이 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26 특히 고종의 경우 궁궐현판과 陵誌碑文을 다수 남기는 등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궁중 書寫의 전통을 면면히 계승한 대표적 인물이었다. 따라서 영친왕의 서화에 대한 관심은 어려서부터 이 방면의 재주를 알아본 고종의 특별한 배려 역시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을 잘 보여주는 사례로 영친왕이 11세 때인 1907년 渡日하기 직전, 서울 YMCA 건물의 중건을 기념해 고종이 하사금(흙손)을 내려주었고 영친왕이 건물의 초석에 새길 목적으로 〈一千九百七年〉이라고 건립연대를 즉석에서 써서 준 일화를 들 수 있다. 황실의 자제가 여러 관료와 대중 앞에서 글씨를 쓰는 모습은 그전에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별한 장면으로 인식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당시 호기심어렸던 분위기는 영친왕이 제복을 입고 軍帽를 쓴 채 묵묵히 글씨를 써 내려가는 모습을 대서특필하고 촬영한 신문기사를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오고 있다(Fig. 5, 5-1). 국제적인 조직이었던 YMCA는 조선에 신문물을 전해주고 청년들에게 민족주의 정신을 고취시킨 단체였다는 점에서 고종이 하사금을 내리고 영친왕이 직접 방문해 주초석의 글씨를 썼다는 사실은 여러모로 의미심장한 행위였다고 판단된다.27
고종의 특별한 관심과 애정 속에서 자란 영친왕은 유아기때부터 서화를 익혔으며, 그중 고종으로부터 글씨를 잘 쓰기로 인정받았던 海岡 金圭鎭(1868~1933)이 그의 서화스승으로 알려져 있다. 김규진은 1896년부터 궁내부 主事로 봉직했고 일본에서 사진술을 배워온 후 예식원과 시종원에서 근무하면서 영친왕에게 서화를 가르쳤다. 아래 『매일신보』 기사는 영친왕의 서화교육이 어렸을 때부터 이루어졌음을 보여줌과 동시에 그의 이 방면에 대한 취미도 엿볼 수 있다.
[영친왕]이 네 살 되셨을 때 해강 김규진씨에게 처음으로 [글씨]를 배웠는데 金海岡의 말을 들으면 전하의 필치는 어렸을 때부터 비범한 것이라 하며, 그림에도 취미가 있어 장래에 한국에 계셔서 수양을 하옵시면 成家를 하시기에 넉넉하실 것이라 하며…28
김규진은 영친왕이 어린 나이였음에도 계속 서화를 연마하면 大成하리라 생각했을 정도로 그가 서화에 재능이 있다고 여겼던 것으로 보인다. 서화로 맺어진 두 사람의 친분을 상징하듯 영친왕은 9세 때인 1905년 김규진에게 시문을 써 주었고, 김규진은 영친왕이 渡日한 후 국내에 간혹 왔을 때마다 서화를 정성스럽게 만들어 헌상하였다(Fig. 6)29.
영친왕의 서화스승으로 김규진 외에 그에게 신식학문과 서예를 가르쳤을 것으로 생각되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바로 安宅重(1858~1929)이라는 인물로, 그 역시 영친왕에게 학문과 글씨를 전수해 주었을 가능성이 있다. 안택중은 安往居라는 필명으로 더 잘 알려진 인물로서, 유학자이자 侍醫, 詩人이었다. 1908년 이후에는 애국계몽단체인 嶠南學會를 결성하고 詩會인 ‘辛亥唫社’를 주도해 이름을 떨쳤다고 한다.30 안택중은 문학가 이전에 황실에서 봉직한 관료이기도 했다. 그는 1903년 법관양성소 교관으로 등용된 후 1905년 한성사범학교 부교관, 1906년 외국어학교 교관을 거쳐 1907년에는 修學院敎官 겸 東宮師傅로 임명받은 경력이 있다.31 修學院은 대한제국 황실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신식교육을 하던 관청으로, 영친왕이 1906년 수학원에서 입학했으므로 안택중에게 배웠을 가능성이 있다.
동궁사부는 世子師傅라고 일컫기도 했으며 황태자나 왕세자를 가까이에서 보좌하고 가르침을 전수한 스승을 말한다. 따라서 동궁사부와 황태자 또는 왕세자는 비단 지식의 전수뿐 아니라 생활전반을 공유했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조선시대 동궁사부의 보편적인 역할을 감안할 때, 안택중은 영친왕에게 자신의 특장이었던 古典과 문학뿐 아니라 서예도 가르쳤을 가능성이 클것으로 생각한다.
안택중이 영친왕에게 글씨를 어떻게 가르쳤는지, 반대로 영친왕은 어떤 자료를 가지고 글씨를 연마했는지 알 수 있는 기록이나 실물은 알려진 사례가 거의 없으며, 이 역시 김규진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만, 영친왕의 學書 과정에 대해 한가지 단서를 제공해 주는 유일한 작품이 있으니 바로 그의 어렸을 적 그림과 글씨를 모은 『영친왕유년시서화』에 포함된 〈臨書 九成宮醴泉銘〉 이다(Fig. 7). 〈구성궁예천명〉은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려시대에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오늘날까지 서예의 古典으로 인식되고 있는 唐 歐陽詢의 글씨이다(Fig. 8). 영친왕의 <臨書 九成宮醴泉銘>은 전체가 아닌 일부만 남아 있는 낱장이지만, 왼쪽 하단에 ‘二月二十六日’이라는 날자가 써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다양한 서풍을 익히고자 임서한 글씨가 또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영친왕의 글씨를 보면, 약간 아래위로 細長한 글꼴에 단정한 필획, 정확한 결구가 특징인 구양순체를 최대한 비슷하게 임서하고자 노력했음을 보여준다. 이 작품은 영친왕 역시 많은 조선의 서예가들처럼 중국 법첩을 토대로 글씨를 연습한 과정을 거쳤음을 보여준다.
이렇듯 유년시절부터 명서가들의 글씨를 임서했던 영친왕은 스스로 자신의 글씨를 남기는 것을 즐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전통적인 서화학습을 통해 남아 있는 작품들을 보면 그림보다는 서예작품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것도 이러한 영향 때문이 아닌지 생각된다.
지금까지 영친왕의 글씨는 대략 20점 내외가 전해지고 있으며, 일본에 가서 성인이 되었을 때 쓴 작품을 제외하고 국내에 남아 있는 작품은 대부분 10세 전후로 제작한 것이다.32 이 중 연대가 가장 이른 작품은 6세 때인 1902년에 쓴 〈守眞志滿〉 편액이다(Fig. 9). 군자가 마음속에 진실을 지키면 뜻이 충만해진다[守眞志滿 逐物意移]는 千字文의 문구를 쓴 것으로, 필획이 정제되지 않아 어린아이 글씨다운 천진함이 느껴진다. 반면 2년 후인 1904년(8세) 때 쓴 작품인 〈萬壽無疆〉 편액을 보면, 글자의 크기와 행간의 조율이 비교적 안정되었고 字體의 모양도 정리된 양상을 보여준다(Fig. 10).
영친왕의 또 다른 글씨로 그가 황태자에 오른 후 1907년 일본으로 가기 직전 侍從卿 閔丙奭에게 〈常侍輔弼〉 네 글자를 써서 준 橫被가 있다(Fig. 11). 아교포수한 우유빛 비단 위에 또박또박 쓴 필치로, 여전히 붓놀림이 조심스럽고 행간이 높이가 서로 맞지 않지만, 누구보다도 꾸준히 글씨를 연습한 영친왕의 信心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글씨를 그가 1951년(55세)에 쓴 작품과 비교하면, 장년의 의친왕은 어렸을 적 필치와는 확연히 다른 활달하고 자신감 있는 서풍을 구사했음을 보여준다(Fig. 12). 이 작품은 그가 일본에서 崔孝七이라는 인물에게 써 준 것으로, 1951년 당시에는 일본이 이미 패망했고 한국이 광복한 후였기 때문에 왕공족의 지위가 사라진 평민 ‘李垠’으로서 남긴 글씨이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영친왕의 글씨는 전문 서예가로서 쓴 것이 아니므로 작품의 수준을 깊이 논할 수 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의 유년기 서풍뿐 아니라 의친왕부에서 친왕을 대상으로 진행한 서화학습의 양상과 그 결과를 시각적으로 증명해 준다는 점에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2. 근대식 도화학습과 『英親王幼年時書畵』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영친왕은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까지는 조선에서 유래된 전통적인 學書 과정을 거쳤고 실제로 여러 현존 서예작품은 그가 황실의 서예전통을 충실하게 계승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가 살던 1900년대 초반은 아동교육에 있어 전통적으로 四子小學에 뿌리를 둔 講學式 교육뿐 아니라 數理나 외국어, 圖案이 주요 교과목인 서구식 교육이 공존하던 시기였다. 대한제국 황실 역시 시대 변화에 부응해 교육제도를 혁신하고자 했으며, 1895년 고종이 「敎育立國詔書」를 반포함으로써 본격적인 궤도에 오르기 시작했다.33
고종은 「교육입국조서」를 통해 “책을 읽고 글자를 익혀 古人의 찌꺼기만 주워 모으고 시대의 큰 형국에 어두운 자는 문장이 고금보다 뛰어나더라도 쓸모가 전혀 없는 書生이다. 이제 짐은 교육하는 강령을 제시하여 虛名을 제거하고 실용을 높인다.”라며 근대식 교육을 실시하기로 천명하였다.34 이러한 고종의 의지와 시대적 변화는 영친왕의 교육과 서화학습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앞서 그는 김규진, 안택중으로부터 전통적인 방식으로 서화를 연마했다면, 1906년 修學院에 입학한 뒤로는 산수, 외국어를 비롯해 새로운 圖畵 교육을 이수하였다. 당시 한중일 동아시아에서는 수공기술의 하나로 美術이라는 개념이 도입되면서 근대식 미술교육을 통해 사물을 정확히 묘사하는 능력을 기르는 도화교육이 유행하고 있었다.35 우리나라 아동교육에 있어 ‘圖畵’라는 이름으로 교과목이 채택된 시기는 1895년 學部에서 공포한 小學校令 이후부터이다. 교육대상은 8세부터 15세까지 남녀 모두 해당하며 이 令에 근거해서 전국에 소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36 대한제국기에는 일본에서 출간한 학생용 도화교재가 국내로 유입되었으며, 이러한 자료를 참고해 1907~1908년에 걸쳐 學部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교과서인 『圖畵臨本』을 간행하기에 이르렀다.
영친왕이 이러한 도화교재를 보고 그림 연습을 했음을 보여주는 작품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英親王幼年時書畵』라는 제목의 책자형태로 남아 있다. 속지에 의하면 이 자료는 1958년 창덕궁 선원전 창고에서 純宗의 祕傳文書 속에서 발견했다고 한다. 지금의 모습은 원형이 아니라 후대에 낱장으로 남겨진 작품들을 모아 1973년에 改粧한 것이며, 제목 역시 후대에 다시 쓴 것이다(Fig. 13).
내지와 빈 면을 제외하고 총 19면에 걸쳐 새, 나무, 화초, 동물, 가방, 모자, 풍경 등의 사물을 單線의 선묘 위주로 臨畵했으며, 마지막 면에는 서예작품 1점을 별도의 봉투에 넣어 첨부하였다. 화면의 왼쪽 또는 오른쪽 구석에 작성한 날짜가 적혀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현존하는 분량보다 더 많이 남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Table 1).
작품을 자세히 보면 연필로 먼저 윤곽선을 옅게 그리고 먹으로 그 위를 따라 다시 선명하게 그린 후 연필선은 지웠음을 확인할 수 있다(Fig. 14). 당시에는 이처럼 먹을 재료로 붓으로 윤곽을 그린 그림을 毛筆畵, 연필에 기초해 명암 처리를 하면서 그린 그림을 鉛筆畵라고 불렀다.37 영친왕이 그린 연필화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으나, 서양화에 심취했던 그의 畵歷으로 보아 연필 화본을 참조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본다.
『영친왕유년시서화』의 존재는 전시도록을 통해 이미 알려졌지만,38 미술사 자료로서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고 이로 인해 제작연대 등에 관해서도 구체적으로 검토된 바가 없다. 이 책자의 제작시점과 관련해서는 책의 후반부에 실린 〈기하학 도안〉이 시기를 추정하는데 도움이 된다(Fig. 15). 〈기하학 도안〉은 상하 점선으로 네모칸을 만든 후 일부에만 원형, 다이아몬드형, 마름모 형의 기하학적인 문양을 반복해 그려 넣었고, 나머지에는 바둑판식 점선을 긋고 일부를 옅은 노란색 물감으로 면을 채웠다. 이 문양은 대한 제국에서 발간한 『도화임본』에는 수록되어 있지 않고 1904년 일본에서 발간된 『毛筆畵手本』에 포함된 〈기하학도안〉과 형태와 색감 모두 일치한다(Fig. 16). 따라서 영친왕은 이 도안을 그리는데 있어 『도화임본』이 아닌 『모필화수본』을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며 이를 토대로 『영친왕유년시서화』의 제작시기는 1904년 이후로 설정할 수 있다. 그러나 1904년은 영친왕이 불과 8세인 때로 이 책에 수록된 臨畵나 도안제작의 전반적인 수준으로 볼 때 어느 정도 수련과정을 거친 나이 때 그린 것으로 판단된다.
제작시기와 연관하여 『영친왕유년시서화』 수록된 또 다른 그림 중 엄지손가락을 앞으로 길게 펴고 가리키는 모습을 측면에서 그린 〈手指〉를 살펴보도록 하겠다(Fig. 17). 우선, 영친왕의 그림과 『도화임본』 속 〈手指〉를 비교해 보면 손바닥의 구도와 각도, 손금의 표현 등에 있어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다(Fig. 18). 영친왕이 『도화임본』을 보았고 臨本이라는 교재의 목적에 입각해 그렸다면 마땅히 동일하게 그렸을 것이다. 오히려 영친왕의 그림은 1910년 일본에서 발간한 『毛筆畵帖』에 수록된 〈手指〉와 매우 유사하다(Fig. 19). 손의 각도와 주름뿐 아니라 각이 진 손가락 표현까지 동일해 그가 어느 시기엔가 이 『모필화첩』을 참고해 임화했음을 말해준다.
지금까지의 내용을 통해 보면, 영친왕의 그림은 대한제국기에 발간된 『도화임본』보다는 『모필화수본』(1904)이나 『모필화첩』(1910)처럼 일본에서 발간된 도화교재를 참조해 그렸을 확률이 크다. 따라서 『영친왕유년시서화』의 제작시기를 『모필화본』의 간행시기에 근거해 1910년 이후로 설정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당시 간행된 도화교재가 이전 교재에 실렸던 동일한 畵本을 재수록하거나 변형된 화본을 추가하면서 지속적으로 발간되었다는 점을 상기하면, 『영친왕유년시서화』를 반드시 1910년에 그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대한제국황실에서 발간한 『도화임본』 역시 그 전에 일본에서 출간된 도화교재를 참고해 제작되었을 정도로 당시 국내에 일본 도화교재가 수입되어 있었다는 점, 『영친왕유년시서화』가 궁중에 전래되어 창덕궁에서 발견되었다는 점, 그리고 영친왕이 1906년 대한제국황실에서 운영한 修學院에 입학해 근대식 도화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을 종합해 볼 때, 그의 그림은 1907년에서 1910년 사이에 그려졌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생각된다. 이 시기는 친왕부가 운영되던 시기로 시대적 변화에 따른 영친왕 서화교육의 다양성을 말해 준다고 하겠으나, 한편으로는 그가 일본에서도 이와 유사한 근대식 도화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영친왕유년시서화』의 좀 더 정확한 제작시기에 대해서는 20세기 전반 국내 및 일본에서 출간된 도화교재에 대한 전반적인 비교검토 후에 확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몇가지 추정에도 불구하고 『영친왕유년시서화』는 비록 영친왕의 개성 넘치는 작품은 아닐지라도 미술애호가로서 활동한 그의 생애 전반을 고려했을 때, 10대 이전까지 친왕부 시절 전수받은 전통서화에서 수학원 입학 후 순수미술로 전향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즉 그가 받은 이러한 근대식 도화교육은 일본에 건너간 후 서양화에 대한 관심으로 확장되어 제국미술전람회 등 일본에서 개최된 각종 미술대전에서 입상한 작품을 구입함으로써 향후 이왕가컬렉션이 형성되는데 일조한 측면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39

Ⅳ. 맺음말

이상으로 대한제국기에 처음 등장한 봉작제인 親王制의 도입 배경과 親王府의 운영 상황을 파악하고 이러한 변화된 환경 속에서 친왕으로 책봉된 영친왕의 유년기 서화학습의 성격과 현존 작품에 대해 살펴보았다. 영친왕은 1897년 출생해 1907년 12월 볼모의 몸이 되어 일본으로 떠날 때까지 그의 유년시절은 대한제국이 존속한 시기(1897~1910)와 운명을 같이 했다고 해도 무리가 없을 정도로 이 시기의 정치·사회·제도적으로 급변하는 정세에 노출되어 있었다.
본 논문은 영친왕처럼 대중적 인지도에 비해 인물사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대한 제국 황실인사들의 생애와 그들의 예술활동에 끼친 시대적 여건과 제도적 변화 등 외적인 환경을 다각도로 파악하기 위한 試論에 해당한다. 본 논문의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유년기 영친왕이 처했던 대외적인 환경을 규명하는 차원에서 대한제국기 친왕제 도입에 따른 친왕부 운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영친왕은 고종과 순원황귀비 엄비의 비호 속에서 이러한 제도를 가장 온전하게 수혜받은 유일한 인물이었다. 황제로 등극한 고종은 영친왕의 출생과 책봉을 계기로 친왕제를 도입했으며, 경운궁 안에 英親王府를 건립해 영친왕의 위호와 교육 등을 치밀하게 관리하였다. 특히 영친왕부의 업무를 기록한 일기자료를 통해 1900년 이후 두 번에 걸친 직제개편을 통해 위상을 강화했고, 무엇보다 영친왕의 講學과 교육에 가장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영친왕부에서 이루어진 영친왕의 서화학습에 대해 살펴보았다. 어려서부터 서화에 관심과 재능이 있었던 영친왕은 고종의 배려로 이 방면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는 당대 유명 서화가였던 海岡 金圭鎭을 스승으로 삼아 매우 친밀하면서도 인간적인 관계를 지속하였다. 지금까지 영친왕의 서화스승으로 김규진만 알려졌으나, 본 논문에서는 1907년 4월 修學院 교관으로 임명되어 東宮師傅를 역임한 安宅重(1858~1929)이라는 인물 역시 그에게 古典과 문학, 서예를 가르쳤을 가능성을 새롭게 제시하였다. 안택중이 1907년 잠시동안 이었지만 영친왕이 교육받은 수학원의 교관과 친왕의 강학을 담당한 동궁사부로 임명되어 활동했기 때문에 영친왕의 스승으로서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다만 그가 당대 명망있던 한학자이자 문학가였다는 점에 비추어 앞으로 안택중이 서화 분야에 있어 영친왕에게 구체적으로 어떠한 예술적 영향을 끼쳤는지 밝히는 것이 과제로 남아 있다.
마지막으로, 영친왕이 10세를 전후로 한 유년기에 제작한 서화작품을 통해 전문예술가는 아니지만, 신분적으로 친왕 또는 황태자라는 최선의 환경에 놓여 있던 그가 접했던 20세기 전반 미술교육과 학습은 어떠했는지 파악해 보았다. 영친왕은 1907년 12월 일본으로 떠나기 전까지 전통적인 서화교육을 받고 이와 연관된 활동을 유지하였다. 특히 어려서부터 서예작품을 다수 남겼으며, 그 중 유독 편액서가 많다는 점은 흥선대원군, 고종, 순종으로 이어진 황실인사들이 즐겨 쓴 편액서의 전통에서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반면 『영친왕유년시서화』는 그가 1906년 대한제국 황실이 운영한 수학원에 입학해 근대식 도화교육을 받았을 가능성을 알려주는 유일한 자료이다. 더 나아가 이를 바탕으로 그가 이전에 추구했던 전통적인 서화가 아닌 서양화로 관심사를 돌려 스스로 작품을 창작하고, 동시기 서양화가들의 작품을 구입함으로써 향후 이왕가컬렉션의 일부를 형성하는데 계기를 마련해 준 자료로서 의의가 있다.

Notes

1) 당황실은 황제의 형제와 아들을 親王으로 책봉하고 친왕의 적장자는 嗣王, 황태자의 아들은 郡王으로 책봉하였다. 친왕으로 책봉되면 궁을 떠나는 出閤이 원칙이었으며, 이때 별도의 官府인 친왕부가 개설되었고 친왕은 자신의 封地인 親王國을 운영하였다. 唐代 親王制에 대해서는 金澔, 「唐初의 諸王 책봉제」, 『中國史硏究』 125 (2020. 4), pp. 91-119 참조.

2) 대한제국기 동안 생전에 친왕으로 책봉된 인물은 義親王 李堈(고종의 제5남), 英親王 李垠(고종의 제7남), 興親王 李載冕(흥선대원군의 장남, 고종의 친형)이 있으며, 고종의 장남이자 대한제국 건립 이전에 사망한 完和君 李墡(1868~1880)은 完親王으로 추봉되었다.

3) 일반적으로 幼年期는 유아기와 소년기의 중간시기로서, 우리나라에서는 보통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를 포함하는 나이를 말한다(『표준국어대사전』, 2024년 7월 23일 검색, https://stdict.korean.go.kr). 대한국제국 친왕부가 운영된 마지막 시기는 영친왕이 11세에 해당하며 이때는 사전적인 의미의 유년기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영친왕의 어린시절을 ‘유년기’라는 용어로 지칭하고자 한다.

4) 영친왕은 1900년 8월 형 의친왕과 더불어 각각 英王, 義王으로 책봉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영왕과 의왕은 親王의 봉작명으로서, 곧 英親王, 義親王과 같은 의미이다. 당시 실록이나 관찬사료, 신문기사에서는 英王, 英親王을 혼용해 썼으며, 영친왕 자신도 두 가지를 함께 사용한 사실로 볼 때 당시 사람들도 확연하게 구분해서 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에서는 오늘날 영왕보다는 영친왕이라는 봉작명이 더 잘 알려져 있음을 감안해, 英親王으로 통일해 표기하도록 하겠다.

5) 대한제국기 친왕제에 대해서는 조선시대 책봉의례를 다룬 선행연구에서 일부 언급된 바 있다. 이에 관해서는 신명호, 『조선왕실의 책봉의례』 (세창출판사, 2016) 참조.

6) 김민지·이경미, 「영친왕의 육군 복식에 관한 연구」, 『한국복식학회지』 68 (2018. 2), pp. 21-39; 조상우, 「영친왕의 골프 활동에 관한 연구」, 『한국응용과학기술학회지』 37 (2020. 8), pp. 986-995; 조은솔, 「일제강점기 李王家의 미술 후원 연구: 英親王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5); 동저, 「일제강점기 李王家의 미술후원: 英親王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9 (2015. 12), pp. 171-207.

7) 1970년 5월 1일 영친왕이 永眠했을 당시 부고를 전한 대부분의 신문에서 “悲運의 皇太子” 또는 “영욕의 懿愍皇太子”라고 명기한 사실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려서 일본에 볼모로 잡혀간 亡國의 황실인사로서 인상이 각인되어 있었고, 이는 지금까지 크게 변함없어 보인다(『조선일보』 1970년 5월 2일; 『경향신문』 1970년 5월 9일 기사 등). 이후 회고록과 傳記, 각종 영상자료를 통해 영친왕의 일본 및 귀국 후 생활상이 알려지면서 비교적 대중적으로 인지도가 높았음에도 정작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학술적인 정리나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런 의미에서 이 글은 영친왕을 비롯해 일제강점기 황실인사들의 生平과 宮家 등 그들의 활동공간, 예술계와 관련성을 다각도로 파악하기 위한 試考에 해당한다.

8) 『[英親王府]日記』 제1책, 「光武元年陰曆丁酉九月二十五日, 陽十月二十日」. 그밖에 장서각 소장『護産廳小日記』 (1897년)에도 영친왕의 탄생부터 약 열흘 동안의 육아에 관한 기록이 있어 참고가 된다. 본문에서 인용한 날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양력을 기준으로 표기한 것이다.

9) 『王公族譜』 제1책 第二世, 「垠」, 1940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K2-4732).

10) 『義王英王冊封儀軌』, 「詔勅 附 奏本」 庚子七月十一日: “詔曰, 朕旣受天命, 登大位矣. 且封建羣胤鞏固皇室, 厥有彝典, 萬世攸同. 皇二子義和君·皇三子封王儀節, 令掌禮院博攷典禮, 擇日擧行.”

11) 『고종실록』 권40, 37년(1900) 8월 8일(양력). 2024년 8월 24일 검색,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708008_003.

12) 대한제국 친왕책봉의 구체적인 절차는 『義王英王冊封儀軌』(서울대 규장각 소장)에 수록되어 있다. 이 의궤의 내용과 의의에 대해서는 신명호, 앞의 책, pp. 308-320; 김현선, 「1900년 英親王 冊封儀禮와 그 의미」, 『朝鮮時代史學報』 92 (2020), pp. 369-399 참조.

13) 『고종실록』 권40, 37년(1900) 8월 17일(양력). 2024년 8월 24일 검색,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708017_001. 이날 반포한 반조문에서 고종은 조칙에서와 마찬가지로 여러 아들을 책봉한 것은 나라를 더욱 굳건히 하기 위함이며, 황실을 좌우에 있게 함으로써 나라의 만년 기초를 공고히 하려 한다고 밝혔다.

14) 『고종실록』 권42, 39년(1902) 8월 18일(양력): “詔令을 내리기를, ‘御旗, 睿旗, 親王旗를 지금 조성해야 하는데 일이 지극히 중대하니 따로 처소를 설치하고 宮內府, 議政府, 元帥府에서 이 일을 감동하게 하라.’” 2024년 8월 26일 검색,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908018_001.

15) 『고종실록』 권40, 37년(1900) 8월 8일(양력). 2024년 8월 28일 검색,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708008_005.

16) 『[英親王府]日記』 제1책, 光武四年八月八日 「布達第六十號 第二十六條」; 『[英親王府]日記』 제2책, 光武六年三月二日 「布達第七十八號 第二十六條」.

17) 『宮中錄事』 勅令第十七號, 「親王府武官官制」.

18) 의친왕의 궁가이자 관부였던 의친왕부는 지금의 인사동 일대에 해당하는 지역에 있었으며, 조계사와 가깝다고 하여 당시에는 寺洞宮으로 불렀다. 『고종실록』 권47, 43년(1906) 7월 22일(양력) 기사에 따르면 종2품 閔哲勳을 의친왕부 총판에 임명하고 勅任官 3등에 서임했다고 한다. 영친왕부와 달리 의친왕부의 경우 이곳의 운영을 알려주는 별도의 사료는 알려진 것이 없다. 사동궁에 대해서는 정정남, 「의친왕부 사동본궁을 통해 본 대한제국기 궁가의 특징」, 『건축역사연구』 6 (2014. 11), pp. 119-124 참조.

19) 『[英親王府]日記』 제2책, 「光武六年陰曆壬寅二月初七日戊戌晴, 陽三月十六日」: “英親王府新設于慶運宮內, 本府修理費與新設費三百元, 慶善宮別下.”

20) 순원황귀비 엄씨의 궁방이었던 경선궁은 현재 광화문에 있는 서울시의원회관(구 府民館)을 포함한 넓은 면적의 궁가였으며, 1913년 사당인 德安宮으로 전환되기 전인 1901~1912년까지 운영되었다. 영친왕궁 또한 경선궁의 안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경선궁과 영친왕궁은 풍부한 재원을 바탕으로 사립학교 건립을 지원하는 등 근대식 교육 확산에 기여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박성준, 「대한제국기 신설 宮의 재정 기반과 황실 재정 정리」, 『歷史敎育』 105 (2008), pp. 99-136.

21) 영친왕의 보호자로서 순원황귀비 엄씨의 활동에 대해서는 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45 (2006), pp. 195-239.

22) 『[英親王府]日記』 제9책, 「隆熙元年陰曆丁未七月十四日癸卯陰, 陽八月二十一日」: “…今日撤罷.”

23) 『[英親王府]日記』와 『英親王東宮日記』의 경우 내용 절반 이상이 書筵을 행한 기록이다. 다만, 서연을 할 때 어떠한 자료를 가지고 어떠한 방식으로 강독했는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24) 『고종실록』 권41, 38년(1901) 10월 10일(양력). 2024년 8월 27일 검색,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810010_002.

25) 『英親王東宮日記』, 「隆熙四年一月十日」(장서각 소장본. K2-254). 이날 기록에 따르면 영친왕궁에 보관 중인 서책이 1천 4백 책이 넘었다고 한다. 영친왕의 독서취미는 물론 어린 영친왕의 교육에 힘썼던 고종의 노력도 함께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6) 대한제국기~20세기 전반 황실인사들과 서화단체 소속 화가들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김소연, 「韓國 近代 專門 書畵敎育의 先導, 書畵美術會」, 『美術史論壇』 36 (2013. 6), pp. 117-139; 황정연, 「李王職 관료 朴冑彬의 서화수집과 《書牎淸供》」, 『美術史學硏究』 301 (2019. 3), pp. 37-66 참조.

27) 「이 나라 近代化의 줄기찬 旗手, YMCA」, 『조선일보』, 1963년 10월 27일.

28) 「李王世子殿下(5): 多方面의 御趣味」, 『매일신보』, 1918년 1월 13일. 엄비와 영친왕을 모셨던 金命吉 상궁에 의하면 김규진은 덕수궁 준명당 대청마루에서 어린 영친왕을 등에 태우고 말놀이를 했을 정도로 가까웠으나, 그가 일본으로 떠나자 매우 아쉬워하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金命吉, 『樂善齋周邊』 (중앙일보·동양방송, 1978), p. 110.

29) 「東宮殿下께 書帖獻上」, 『매일신보』, 1916년 10월 26일; 「왕세자전하 구세 때의 필적」, 『매일신보』, 1918년 1월 10일. 이밖에 메이지 천황 역시 영친왕의 재주를 알아보고 학업에 도움이 되도록 여러 귀중한 물품과 생활용품을 선물로 주었다(「明治大帝의 御仁愛」, 『매일신보』, 1918년 1월 10일).

30) 안택중의 활동에 대해서는 신상필, 「근대한문학의 성격과 辛亥唫社」, 『한문학보』 22 (2010), pp. 107-130 참조.

31) 『승정원일기』 3207책, 고종 44년(1907) 4월 신사(21일). 2024년 9월 2일 검색, https://sjw.history.go.kr/search/inspectionDayList.do. 영친왕을 회고한 주변인들의 글을 보면 안택중과 영친왕의 친밀한 사이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증명되지는 않지만 몇몇 일화가 전해오고 있다. 일례로 안택중은 영친왕이 일본에 볼모로 간 후 스스로 동궁사부 직책을 사직했고 고종이 말 한필을 하사해 그간의 고마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영친왕 역시 동궁사부였던 안택중에게 심적으로 많은 의지를 했는지 가끔 歸國할 때면 秘苑으로 불러 同宿하면서 痛恨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일본 체류시 영친왕의 명목상 스승은 伊藤博文이었으며. 영친왕이 황태자로 봉해진 뒤였기 때문에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1909년 그에게 太子太傅의 직책을 내렸다.

32) 어린시절 영친왕이 남긴 현판글씨는 대부분 궁중편액서이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현황은 『조선왕실의 현판』 (문화재청, 2020) 참조.

33) 육수화, 「대한제국기 황실 교육」, 『국학연구』 19 (2011), pp. 609-638.

34) 『고종실록』 권33, 32년(1895) 2월 갑진(2일). 2024년 9월 1일 검색, https://sillok.history.go.kr/id/kza_13202002_001.

35) 한중일 도화교육에 대해서는 문정희, 「中國의 近代 圖畵敎育」,『美術史論壇』 6 (1998. 3). pp. 51-78; 박휘락, 『한국미술교육사』 (도서출판 예경, 1998); 장동호, 「1900-45년에 발행된 한·일 초등미술교과서의 내용 비교-‘圖畵臨本’과 ‘毛筆畵手本’을 중심으로-」, 『초등교육연구』 29 (2018), pp. 205-220 참조.

36) 박명선, 「근대 교육기(1895-1910) ‘도화(圖畵)’와 ‘수공(手工)’ 교과의 성격 연구」, 『기초조형학연구』 15-6 (2014. 12), pp. 161-173.

37) 연필화는 모필화 못지 않게 근대시기 서화가들에게 영향을 끼쳤으며, 그중 이도영은 『鉛筆畵臨本』을 자체적으로 만들어 창작에 응용한 화가로 평가된다. 김예진, 「이도영의 정물화 수용과 그 성격: 사생과 내셔널리즘을 통한 새로운 회화 모색」, 『미술사학연구』 296 (2017. 12), pp. 175-203 참조.

38) 『영친왕유년시서화』는 2002년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특별전 도록(『장서각의 책』, 圖67, 이필기 해설)에서 처음 선보인 후 장서각 발간 자료에서 간간이 언급되었다. 가장 최근에는 국립현대미술관 특별전 도록인 『대한제국의 미술: 빛의 길을 꿈꾸다』(국립현대미술관, 2018, 圖192, 김소연 해설)에 수록되었다.

39) 일본 체류시 영친왕의 미술애호와 서양화 구입은 조은솔, 앞의 논문에 자세하다. 일본에 머무는 동안 영친왕은 서양화가들과 교류하고 많은 작품을 감상했지만, 정작 자신은 多作을 하지 않은 듯하다. 어려서 쓴 서화작품 외, 지금까지 남아 있는 그의 서양화는 약 세 점 정도만 알려져 있고 모두 누드화이다(이구열, 「비운의 황태자 이은의 미술애호」, 『미술세계』 235 (2004. 6), pp. 110-113). 그럼에도 영친왕이 전적으로 서양미술만 선호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는 한국의 전통회화, 공예, 조각품을 수록한 『이왕가박물관소장품사진첩』(1933년 발행) 全卷을 가지고 있었으며, 일반회화, 불화, 불상, 도자기 등 장르별로 구분된 책자 書頭에 작품의 특징을 짧게 촌평한 글을 남기는 등 한국의 전통미술에도 관심이 많았다. 영친왕의 寸評이 있는 도록은 『李王家博物館所藏品寫眞帖』(국립고궁박물관 소장본) 참조.

Fig. 1.
〈어린 시절 영친왕의 모습〉 Prince Yŏngch'in in his Childhood, Date Unknown,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ourtesy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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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1927년 프랑스 여행 중 스케치 중인 영친왕의 모습〉 Prince Yŏngch'in Drawing a Landscape during his 1927 Trip to Franc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ourtesy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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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1904년 당시 경운궁 배치도(화재 전으로 추정)〉 The Layout of Kyŏngun'gung Palace in 1904 (Assumed Before Fire), in The Korean Review 4, April 1904, Yonsei University Library (Courtesy of Yonsei University Libr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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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영친왕, 〈英王書室 현판〉 Prince Yŏngch'in, Hanging Board of Yŏngwangsŏsil, 1904, Ink and Colors on Wood, 45.2×108.2cm, National Palace Museum (Courtesy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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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YMCA 건물 중건을 기념해 휘호를 하고 있는 11세의 영친왕(가운데 軍帽를 쓴 소년)〉 11-year-old Prince Yŏngch'in (Boy Wearing a Military Cap in the Center) Writing Calligraphy to Commemorate the Rebuilding of the YMCA, Seoul in 1907 (National Library of Korea, https://nl.go.kr/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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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1.
〈YMCA 건물 중건을 기념해 영친왕이 쓴 휘호와 고종황제의 하사품〉 Prince Yŏngch'in’s Calligraphy to Commemorate the Rebuilding of the YMCA and Gifts from Emperor Kojong, Seoul in 1907 (National Library of Korea, https://nl.go.kr/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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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영친왕 이 19 05년 9세 때 김규진에게 써준 시(왼쪽)와 김규진이 1916 년 영친왕에게 헌상한 서화(오른쪽)〉 Prince Yŏngch'in’s Poem Presented to Kim Kyujin in 1905 (Left), Kim Kyuchin’s Painting and Calligraphy for Prince Yŏngch'in in 1916 (Right) (National Library of Korea, https://nl.go.kr/news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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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영친왕이 臨書한 九成宮醴泉銘〉 Kusŏnggungyech'ŏnmyŏng, Calligraphic Copy by Prince Yŏngch'in, Early 1900s, Ink on Paper, 18.9×28.4cm, Jangseogak Library (Jangseogak Library, https://jsg.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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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歐陽詢, 〈九成宮醴泉銘 搨本〉 Ou Yangxun, Kusŏnggungyech'ŏnmyŏng, Ink Rubbings from Engraved Stele, 632, Tang, Ink on Paper,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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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영친왕, 〈守眞志滿 편액서〉 Prince Yŏngch ’in, Hanging Board of Sujinjiman, 1902, Ink and Colors on Wood, 81.0×203.0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ourtesy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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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영친왕, 〈萬壽無疆 편액서〉 Prince Yŏngch ’in, Hanging Board of Mansumugang, 1904, Ink and Colors on Wood, 37.3×106.5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ourtesy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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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영친왕, 〈常侍輔弼 편액서〉 Prince Yŏngch ’in, Sangsibop’il, 1907, Ink on Wood, 51.1×206.1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Courtesy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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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이은(영친왕), 〈父母孝道 兄弟和睦〉 I Ŭn (Prince Yŏngch'in), Pumohyodo hyŏngjaehwamok, 1951, Ink on Paper, Private Collection (K-artmarket, https://k-artmarket.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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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영친왕유년시서화』 내지〉 The First Inner Page of Yŏngch'inwang yunyŏn sisŏhwa [Painting and Calligraphy by Young Prince Yŏngch'in], 1907~1910, Ink on Paper, 18.9×28.4cm, Jangseogak Library (Jangseogak Library, https://jsg.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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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영친왕, 〈무〉, 『영친왕유년시서화』 Prince Yŏngch'in, Radish in Yŏngch'inwang yunyŏn sisŏhwa [Painting and Calligraphy by Young Prince Yŏngch'in], 1907~1910, Ink on Paper, 18.9×28.4cm, Jangseogak Library (Jangseogak Library, https://jsg.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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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영친왕, 〈기하학 도안화〉, 『영친왕유년시서화』 Prince Yŏngch'in, Geometrical Design in Yŏngch'inwang yunyŏn sisŏhwa [Painting and Calligraphy by Young Prince Yŏngch'in], 1907~1910, Ink on Paper, 18.9×28.4cm, Jangseogak Library (Jangseogak Library, https://jsg.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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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기하학 도안화〉, 『毛筆畵手本』 Geometrical Design in Mop'irhwa subon, 1904, Ink and Color on Paper, Private Collection (https://www.yetna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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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영친왕, 〈手指〉, 『영친왕유년시서화』 Prince Yŏngch'in, Finger Point in Yŏngch'inwang yunyŏn sisŏhwa [Painting and Calligraphy by Young Prince Yŏngch'in], 1907~1910, Ink on Paper, 18.9×28.4cm, Jangseogak Library (Jangseogak Library, https://jsg.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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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手指〉, 『圖畫臨本』 Finger point in Tohwaimbon, 1908, Ink on Paper, L.23cm, National Library of Korea (National Library of Korea, https://www.nl.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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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手指〉, 『毛筆畵帖』 Finger Poi nt in Mop'il hwach'ŏp, 1910, Ink on Paper (Pak Hwirak, Han'guk misul kyoyuksa, p. 3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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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영친왕유년시서화』의 내용과 작성 시기〉 Contents and Dates of Drawings in Painting and Calligraphy by Young Prince Yŏngch'in
순서 내용 날짜 순서 내용 날짜
Order of Page Content Date of Drawing Order of Page Content Date of Drawing
1 새 bird 11월 10일 11 손가락으로 가리킴 2월 12일
November 10th pointing with one's finger February 12th
2 여지 lychee 11월 13일 12 주전자와 받침 2월 26일
November 13th teapot and saucer February 26th
3 부채 fan 11월 17일 13 모자 hat 2월 19일
November 17th February 19th
4 軸 hanging scroll 11일 24일 14 도끼와 나무 3월 9일
November 24th ax and wood March 9th
5 물고기 fish 11월 27일 15 무 radish 3월 23일
November 27th March 23rd
6 호리병 gourd dipper 12월 4일 16 장미 rose 4월 6일
December 4th April 6th
7 감 persimmon 12월 15일 17 개 dog 4월 17일
December 15th April 17th
8 산 mountain 12월 22일 18 날아가는 기러기 4월 23일
December 22nd flying geese April 23rd
9 붓과 물통 brush and bucket 1월 19일 19 기하학 도안 6월 8일
January 19th geometric design June 8th
10 버섯 mushroom 2월 9일 20 臨書 九成宮醴泉銘 2월 26일
February 9th copy of Inscription on the Sweet Spring in the Chiu-ch'ing Palace by Ou Yangxun February 26th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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