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대 경복궁 터에서 행한 행사와 궁중 회화

Royal Ceremonies at Kyŏngbok Palace During the Reign of King Yŏngjo and Their Representations in Court Ceremony Painting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4;323():97-128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September 30
doi : https://doi.org/10.31065/kjah.323.202409.004
*Assistant Professor, Hongik University
유재빈*
*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조교수
Received 2024 August 23; Revised 2024 August 28; Accepted 2024 September 12.

Abstract

연구는 영조대 경복궁에서 행해진 의례를 그린 3점의 행사도를 통해 영조와 참연자에 대한 인식을 살피고자 하였다. 영조는 임란이후 폐허가 된 경복궁을 왕실 의례의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勤政殿庭試圖〉(서울역사박물관)는 1746년 경복궁에서의 첫 행사로서 친림 정시를 기념한 어제갱진시 병풍으로 어명에 의해 제작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宮中行事圖〉(서울역사박물관)는 1763년 영조 70세를 기념한 근정전 진하례를 그린 행사도 계병의 한 폭으로서 당시 참여자에 의한 계병으로 제작되었다. 〈英廟朝久闕進爵圖〉(홍익대학교 박물관)는 『의령남씨가전화첩』의 일부로 1767년 경복궁 진작례에 참여한 사대부의 개인적 입장을 살필 수 있는 사례이다. 이 세 화폭은 모두 경복궁 옛터에서 행해진 행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각각 국왕, 참연자의 신하된 입장, 참여자 가문의 입장에서 제작된 것으로 경복궁과 행사 장면의 재현에서 흥미로운 차이점을 보여준다.

Trans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ree court ceremony paintings to reconstruct the perceptions of King Yŏngjo and the participants in ceremonies held at Kyŏngbok Palace, during his reign. King Yŏngjo repurposed Kyŏngbok Palace, which had been left in ruins after the Japanese Invasion of 1592, as a venue for these court ceremonies. Kŭnjŏngjŏn Chŏngsido 勤政殿庭試圖 commemorates the first court ceremony held at Kyŏngbok Palace in 1746, a royal state examination personally attended by King Yŏngjo. It is believed to have been produced by royal command as part of a commemorative screen marking the occasion. Kyŏngjung Haengsado 宮中行事圖 is the only remaining panel from a multi-panel folding screen. It is presumed to be part of a ceremonial painting depicting the reception ceremony held in 1763 to commemorate King Yŏngjo’s 70th birthday at Kŭnjŏngjŏn Hall. This painting was created by those who participated in the ceremony. The final painting, Yongmyojo Kukwŏlchinjakto 英廟朝久闕進爵圖 in the Ŭiryŏng Nam Family Commemorative Album, offers a personal perspective from the scholar-officials who participated in the 1767 royal ceremony at Kyŏngbok palace. These three paintings depict ceremonies held at the site of the former Kyŏngbok Palace, each reflecting different perspectives: that of the king, the participating officials, and the family of a participant. King Yŏngjo used Kyŏngbok Palace, as a symbolic space that carried on the legitimacy of the early Chosŏn Dynasty. While the first painting specifically emphasized the significance of the location by excluding participants to represent Yŏngjo’s stance, the second painting balanced both the event scene and the background from the perspective of the participating officials. The third painting, though it focused solely on the event rather than the Kyŏngbok Palace background, included additional illustrations in the album depicting episodes of Chosŏn’s founding king, T'aejo, and the ancestors of this family. Whereas Yŏngjo emphasized the connection to the early Chosŏn Dynasty through ceremonies held at Kyŏngbok Palace, this album corresponded to that intention by illustrating how a single family produced officials who served both T'aejo and Yŏngjo closely.

Ⅰ. 머리말

景福宮은 1395년 창건되어 건국 초기부터 왕실의 法宮으로 기능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되었고, 19세기에 중건되기까지 옛 궁궐의 터, 遺趾로 남아 있었다. 英祖(재위 1723~1776)는 경복궁 유지에서 각종 행사와 의례를 행하였다. 선행 연구에서는 영조의 경복궁 행사를 분석하여 영조가 경복궁 유지의 상징성을 활용하여 선왕에 대한 계술을 표방하고 자신의 정치적 권위를 높이고자 하였음을 밝혔다.1 당시 경복궁에는 근정전 월대만 남아 있었고 행사를 진행할 전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영조는 행사에 경복궁의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 어떠한 이미지를 부가하였을까. 그리고 경복궁 터에서 행한 행사는 이후 경복궁 유지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을까. 본 연구는 이러한 질문에 가까이 가기 위해 미술사적 접근을 시도해보고자 한다.

영조대 경복궁 유지에서 행한 행사도는 현재 3점이 전한다. 〈親臨光化門內勤政殿庭試時圖屛〉(서울역사박물관, 이하 근정전정시도)와 〈宮中行事圖〉(서울역사박물관), 〈英廟朝九闕進爵圖〉(홍익대학교박물관, 이하 구궐진작도)이다. 이들은 모두 영조대 경복궁 유지에서 행한 행사를 그린 그림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제작 주체와 형식에서 차이가 있다. 〈근정전정시도〉는 1747년 경복궁 근정전 앞에서 열린 과거시험을 기념하여 그려졌다. 근정전 터를 배경으로 한 그림 한 폭과 영조의 御製 및 신하들의 賡進詩 7폭으로 구성된 병풍이다.2 어명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궁중행사도〉는 지금은 한 폭만 남아있지만 경복궁을 배경으로 진하례를 그린 그림이었다고 추정된다.3 좌목은 남아있지 않지만 참석자들이 공적 차원에서 제작한 계병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구궐진작도〉는 1767년 경복궁 근정전터에서 열린 진작례를 그린 그림으로 宜寧 南氏의 家傳 화첩의 일부로 전한다.4 참석자 중 한 사람이었던 南泰會(1706~1770)가 영조의 진작례에 참여한 영광을 가문의 차원에서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본 연구는 이처럼 서로 다른 배경에서 제작된 그림들이 어떻게 경복궁 유지의 모습과 그 행사를 다르게 재현하였는지 분석해보고자 한다. II장에서는 조선 후기 경복궁의 현황과 인식을 경복궁을 배경으로 한 문학과 회화 작품을 통해 살펴보고, 영조의 경복궁 터의 활용에 대해 간략히 정리하겠다. 이후에는 현존하는 세 점의 영조 연간 경복궁 행사도를 차례로 분석하겠다. 선행 연구에서 각 작품의 내용을 규명하는 데 주력하였다면 이 연구에서는 세 작품의 서로 다른 제작 주체가 경복궁에서의 행사를 재현하는 방식에 대해 주목하고자 한다. 경복궁은 행사가 행해진 장소일 뿐 아니라 행사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는 상징 공간이었다. 이 연구를 통해 기록화에서 행사 배경이 가진 의미와 표현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자 한다.

Ⅱ. 조선 후기 경복궁 현황과 영조의 경복궁 활용

영조대 행사도로 들어가기에 앞서 조선 후기 경복궁의 현황을 기록과 그림으로 간략히 살펴보자. 謙齋 鄭敾(1676~1759)의 〈景福宮圖〉는 18세기 무렵 경복궁의 모습을 보여준다(Fig. 1).5 왼쪽으로 石柱만 남은 慶會樓의 모습과 慶會池 연못, 그리고 그 앞으로 궁궐 관리 시설로 추정되는 집 한 채가 있다. 본래 경회루는 경회지 안의 섬에 건설되었는데, 그림에서는 석축과 연못이 서로 분리되어 있다. 경회루 뒤로는 소나무 숲이 우거져있다. 건국 초부터 형성된 후원의 松林이 조선 후기에도 잔존하였음을 알 수 있다.6

Fig. 1.

정선, 〈경복궁도〉 Chŏng Sŏn, Illustration of Kyŏngbokkung Palace, Mid-18th century, Color on Silk, 16.7×18.1cm, Korea University Museum (Ch'oe Wansu, Kyŏmjae Chŏngsŏn chin'gyŏng sansuhwa, p. 203)

정선의 <경복궁도>는 소실되기 전 경복궁을 담은 조선 전기의 계회도와는 여러모로 다르다. 조선 전기 계회도인 〈備邊司契會圖〉(1550)와 〈騎省入直賜酒圖〉(1581)는 육조거리 뒤로 펼쳐지는 경복궁의 모습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7 그 중 〈비변사계회도〉를 살펴보면, 경복궁 안을 자세히 묘사하지는 않았지만, 지붕만으로 광화문, 홍례문, 근정문, 근정전을 하나의 축에 두었음을 볼 수 있다(Fig. 2).8 그 축의 가장 북쪽에는 경복궁의 주산이었던 白岳山을 두었다. 이와 비교하면 정선의 〈경복궁도〉는 경복궁의 실제 배치와 어긋날 뿐 아니라 백악산에서 내려오는 축을 고려하지 않았다. 정선이 주목한 것은 경회루 석주나 대문의 석축처럼 옛터의 잔해들과 무성하게 자라난 나무들이다.

Fig. 2.

〈비변사계회도(부분)〉 Gye Gathering of the Border Defense Council (detail), 1550, 49.5×61cm, Seoul Museum of History (Seoul Museum of History, https://museum.seoul.go.kr)

경복궁 옛터의 잔해는 쓸쓸하고 고즈넉한 분위기를 이끌어내었다. 경복궁 터를 방문한 문인들의 시에서도 이러한 분위기를 찾아낼 수 있다. 金時敏(1681~1747)은 1709년 봄, 사촌과 함께 경복궁 터에 들어가 시를 지었다. 시 속에서 궁궐은 각종 잡풀과 꽃으로 우거지고, 경회루의 석축은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김시민은 궁궐 터에서 쑥을 캐어 가지고 와 쑥국을 끓여 먹었다. 경복궁터가 한양 문인들에게 봄을 맞는 遊賞處로 이용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새봄 물색어린 옛 못가에, 형제 서로 함께 술을 마신다. 궁궐 뜬 방초로 푸르름 가득하니, 조만간 수풀 속에 잡화 피리라.

경회루터 옛 기둥 산과 함께 서 있고, 성 밖에서 외로운 구름 새와 함께 돌아온다.

쑥 캐어 국 끓이고 쌀밥 지으니, 시 잘 짓는 늙은이 북쪽 계곡에서 다시 왔구나.9

조선 후기 城市全圖詩에는 경복궁 유지에 대한 다른 어조의 감상을 발견할 수 있다. 朴齊家(1750~1805)의 「성시전도시」의 일부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옛 궁궐 길 푸른 아지랑이 날아오고

지나가는 사람들 임진년 불탄 일 이야기 하네.

사람처럼 서 있는 주춧돌은 못빛에 엷게 비추고,

백로가 날아와 앉으니 소나무 가지 죽었네.10

‘사람처럼 서 있는 주춧돌은’은 경회루의 석주를 얘기하고, 백로와 소나무는 후원의 송림과 백로 군락지를 의미한다. 푸른 아지랑이가 날아오르고, 백로로 인해 소나무 가지가 말라 죽는 일 등은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 쓸쓸한 궁궐터를 연상시킨다.

영조는 문인들의 유상처가 되곤 했던 경복궁 유지를 조종의 법궁으로 활용하였다. 그 대표적인 방식이 경복궁 사적의 관리와 발굴, 그리고 경복궁 유지에서의 의례이다. 조선 후기에 경복궁은 중건되지 않았지만 궁궐지기, 宮監을 두고 지속적으로 관리하였다. 영조대에는 경복궁의 소나무를 수직군들이 함부로 민가에 파는 경우가 있자 이들을 처벌하였다.11 가뭄이 들면 경회루의 연못을 준천하기도 하였다.12 경회지의 준천은 기우제와 함께 실행되었다.13

영조는 경복궁에서 물건과 옛터를 발굴하는 데에도 관심을 가졌다. 1756년, 영조는 대비에게서 선대의 인장을 선물 받았는데, 그중 하나는 경복궁 우물에서 찾은 것이라고 하였다.14 1764년에는 경복궁 터에서 땔감을 채취하던 아이가 경복궁 옛터의 구덩이[石穴]에서 金杯 한쌍과 銅獅子 하나를 찾아서 바쳤다. 경복궁을 지키던 衛將이 이해 가을, 옥으로 만든 토끼와 봉황 조각을 발견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왕자의 胎誌石을 넣은 석함을 찾아 바치기도 하였다. 영조는 경복궁 유물을 바친 이에게 상을 내리기도 하고, 물건의 유래들을 상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경복궁 유지는 선대와 관련된 유물이 묻힌 유적지였고, 유물의 발굴은 유적지의 상징성을 더욱 강화시켰다.

영조는 경복궁 유지를 다양한 행사와 의례의 장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勤政殿의 월대는 차일을 설치하면 국왕이 친림하는 의례를 행하기에 적절한 무대가 되어 주었다. 영조는 근정전 터에서 과거 시험과 陳賀禮, 進爵禮 등의 공식 행사를 거행하였다.15 1767년에는 경복궁 후원에서 중전과 세손빈이 親蠶禮를 열도록 하였다.16 영조가 계술하였던 성종대의 친잠례가 창덕궁에서 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영조는 경복궁 후원을 정리하고 採桑壇을 만들어 친잠례를 열도록 하였다. 경복궁이 선왕의 계술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자리잡았음을 알 수 있다.

경복궁에서의 행사는 대부분 조선 전기 국왕들의 의례를 추술하는 목적을 지녔다. 선왕이 의례를 행한 시기—왕의 나이, 재위년, 간지 등과 의례의 내용을 일치시켜 경복궁에서 행함으로써 마치 조선 전기의 의례를 다시 재현하는 효과를 얻고자 하였다. 예를 들어 영조 정해년(1767년)의 근정전 진작례는 태종대 정해년(1407년) 진작례를 재현하기 위한 것이었다. 영조 70세, 재위 40주년 행사는 태조 70세와 숙종 재위 40주년 행사를 기념하는 의미를 가졌다. 뒤에 더 자세히 살피겠지만 이러한 명목상의 계기는 다소 맞지 않는 경우도 있었다. 당시에 경복궁에서 행하지 않은 행사였거나 기록을 무리하게 끼워 맞춘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경복궁에서의 행사는 현재 왕실의 경사, 국왕의 생신이나 재위 기념을 조선 전기 선왕의 의례와 연결시켜 계술의 의미를 강조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17

영조는 만년에 경복궁 공간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였다. 영조가 경복궁에서 첫 공식 행사를 연 것은 1747년 경복궁에서의 庭試였다. 그러나 한동안 경복궁에서의 의례가 없다가 1763년 이후로 거의 매년 진하, 진작, 과시 등의 행사를 시행하였다. 1770년 이후로는 특별한 행사가 없어도 수시로 경복궁을 찾았다. 이러한 어가의 비공식적 출행은 주로 군신간 마찰이 있을 때 활용하였다. 영조는 경복궁의 思政殿 터나 文昭殿 터에 엎드려 환궁을 거부하는 방식으로 신하들을 긴장시켰다.18 영조는 선조들에게 나라를 위태롭게 만든 자신의 죄를 사죄한다는 이유로 경복궁 터에서 비에 맞거나 찬 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영조의 경복궁에서의 극적인 행위는 신하들이 어쩔 수 없이 물러나게 하는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영조에게 경복궁 유지는 더 이상 특별한 유물로 의미를 부과해야 할 성지도 아니고 특별한 계기를 찾아야 행사를 열 수 있는 장소도 아니었다. 영조는 말년에 경복궁 유지를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수 있는 공간으로 전용하였다고 할 수 있다.

Ⅲ. 어제 갱진시병으로 그려진 경복궁 정시도 : 〈친림광화문근정전정시시도〉(1747년)

영조는 경복궁에서 과거시험, 진작례, 望拜禮, 진하례, 친잠례 등 다양한 행사를 설행하였다. 그중에서 〈친림 광화문 근정전 정시시도〉(이하 근정전정시도)는 1747년, 9월 19일, 경복궁 근정전 터에서 벌인 庭試를 그린 것이다(Fig. 3). 영조는 仁元王后 金氏(1687~1757)의 회갑을 맞아 上尊號를 올렸다. 그리고 대비의 회갑을 경축하는 일환으로 궁궐에서 국왕이 친림하는 과거 시험, 즉 정시를 베풀었다. 영조는 정시의 장소를 직접 경복궁으로 정하였다. 이후 영조는 경복궁에서 17회 이상 과거시험을 열었는데, 이 해가 그 첫 번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Fig. 3.

〈친림근정전정시도〉 Illustrations of the King’s Visit to Kŭnjŏngjŏn Hall, 1747, Each Panel 200.7×73.3cm, Seoul Museum of History (Seoul Museum of History, https://museum.seoul.go.kr)

정시의 장소로 경복궁이 선택된 이유에 대해 정확히 명시된 바는 없다. 아마도 이해 3월에 인원왕후가 영조에게 선조의 옥대를 하사한 것이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인원왕후는 集祥殿에서 우연히 宣祖(재위 1567~1608)의 玉帶를 발견하고는 이를 영조에게 하사하였다. 영조는 마침 선조가 즉위한 지 3주갑을 맞이하였으니 이는 정말 우연이 아니라며 감격해하였다. 영조는 자신도 이 옥대를 두르고 근정전 정시에 참여하겠다고 하였다.

인원왕후가 영조에게 선조의 옥대를 하사하는 행위는 그 자체로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肅宗(재위 1674~1720)의 계비였던 대비가 직접 영조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축원하는 행위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대대로 대비의 거처였던 집상전의 수장품에서 선조의 옥대를 발견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마침 선조의 재위 3주갑이라는 시기도 공교롭다. 우연한 발견과 공교로운 일치, 이는 왕실에서 상서로운 징조나 하늘의 뜻을 드러낼 때 자주 사용하는 수사학이다. 이러한 영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서사를 완성하기 위해 조선 전기의 법궁이었던 경복궁이라는 공간을 선택하였다고 추측할 수 있다.

〈근정전정시도〉는 이러한 경복궁의 상징적 의미를 극대화한 그림이라고 할 수 있다(Fig. 4). 전체적으로 담장을 둘러 경복궁의 구역을 명확히 구획하였다. 일반적인 행사도에서 행사 주변 전각만을 그린 것에 비해 이 그림은 후원까지 포함하여 경복궁 전역을 담으로 둘러쌌다. 실제 경복궁에 비해 매우 축소된 규모이지만, 궁궐 전체와 그 배경을 모두 담고자 취한 방식이다. 경복궁의 북쪽으로는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白岳山(현 북악산)을 두었다. 그 옆에 보이는 산은 백악산의 잔류이자 창덕궁의 주산인 鷹峯이다. 그 사이 산등성이에는 성곽의 일부를 표현하여 한양도성의 범주를 암시하였다. 이처럼 그림 중앙에 한양도성의 主山인 백악산을 배치함으로써 경복궁의 풍수적 길함과 정신적 권위를 강조하였다. 아울러 북악산 옆으로 응봉을 배치하여 조선 전기 왕실과 현재를 시각적으로 연결시켰다고 볼 수 있다.19

Fig. 4.

Fig. 3의 1폭, First Panel of Fig. 3 (Photograph by the author)

〈근정전정시도〉에서 경복궁 안의 공간은 의례 공간과 의례 밖의 후원으로 구분할 수 있다. 벽을 이룬 상단의 의례용 장막이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 그 장막 밖 상단은 경복궁의 ‘옛터’, 구지를 재현한 공간이다. 이곳은 경회루 석주와 소나무 숲으로 이루어졌다. 이 둘은 앞서 살펴 보았듯이 당시 경복궁의 옛터를 묘사할 때 흔히 언급되는 도상이다. 실제로 황량한 공간이 더 넓게 펼쳐졌지만 그림에서는 경회루 석주와 소나무 숲만으로 옛터를 압축적으로 표현하였다.

〈근정전정시도〉의 의례 공간은 의례를 암시하면서도 실제로 행사 장면은 그리지 않은 독특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 장면에서 가장 집중적으로 표현된 것은 국왕의 존재이다. 근정전 터 위에 설치한 차일 아래에는 御座가 놓여있다. 어좌 주변에 항상 두는 오봉병이나 시위 의장이 없다. 오직 어좌만 실제보다 과장된 크기로 그려져 있다. 어좌 아래로는 국왕의 의례 대기 공간인 御幕次가 있다. 어도 중앙에 놓인 위치상 임금이 輿에서 내리시는 降輿所로 보인다. 永濟橋를 건너면 어도가 이어진다.20 당시 어도가 얼마나 정비된 상황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림에서는 어도를 뚜렷이 표현하기 위해 어도 양측에 나무와 풀을 그려 넣었다. 문에는 두 개의 紅箭門이 있다. 정선의 〈경복궁도〉를 참고하면 광화문은 석주만 3개 남아 있었고, 그 옆으로 실제 다니는 쪽문을 내어 둔 상태였다. 그림에서는 석주 대신에 홍살문을 그려 넣어 임금의 행차임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근정전정시도〉의 의례 장면에서는 행사 장면이나 인물 없이 주로 국왕의 어좌, 어도, 막차 등만이 강조되었음을 볼 수 있다.

다만 두 개 정도의 시설을 통해 과거 시험 장면임을 짐작할 수 있다. 하나는 근정전 양측에 차일을 둔 공간들이다. 어좌의 동쪽으로 2개, 서쪽으로 1개가 놓여있다. 의주를 살피면 시험을 주관하는 讀券官과 對讀官의 절하는 자리[拜位]가 동쪽에, 문과 응시자인 擧人의 절하는 자리가 동서에 나누어 설치되었다고 한다. 참석자가 그려져 있지 않아서 확정할 수 없지만 이들은 문과 시험의 감독관과 응시자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21 월대 양측의 독권과, 대독관, 응시자의 배위가 문과 과시를 암시한다면, 왼쪽 하단의 3개의 과녁은 武科 과시를 암시한다. 이날 있었던 무과 과시는 본래 모화관에서 열릴 예정이었으나 문과 무과 모두 친림으로 진행하다는 것이 공평하다는 주장이 제기되었고, 근정전 앞 뜰로 변경되었다.22 과녁 3개는 무과 시험에 사용된 3종의 과녁—遠侯, 中侯, 近侯를 의미하거나 혹은 당시 참석한 무관들의 試射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근정전정시도〉는 근정전에서 열린 과거 시험이 계기가 되었지만 정작 과거 시험 장면에 대해서는 극히 제한된 정보만을 제공하고 있다. 이 그림은 경복궁과 국왕, 이 두 주제에 집중하고 있다. 삼각산에서 시작하여 백악산으로 흐른 축은 경회루와 송림이 있는 옛터를 지나 근정전의 어좌와 광화문의 홍살문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공간의 축은 시간의 흐름과도 상통한다. 백악산 아래에 도성을 건설한 창업의 시기부터 경복궁이 궁궐로 사용되던 조선 전기를 거쳐 지금 의례가 행해지는 현재에 이르게 되기 때문이다. 의례 공간 역시 이러한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교차시키고 있다. 월대만 남은 근정전의 어좌나 흔적만 남은 광화문 앞에 놓인 홍살문, 영제교 앞에 놓인 막차가 그러한 예이다. 현실적인 의례 장면을 생략하였기 때문에 오히려 경복궁 옛터의 의미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효과가 있다.

영조는 경복궁을 창업과 중흥의 공간으로 인식하였다. 이는 이날 영조가 지은 어제시에서 뚜렷이 찾아 볼 수 있다. “창업과 중흥은 만세의 법이요, 청룡과 백호가 걸터앉은 한양성이다(創業中興萬世法, 龍蹲虎踞漢陽城).”23 이 시에서처럼 경복궁은 창업의 공간이자 곧 중흥의 공간이었다. 영조는 숙종에 이어 태조 관련 사적을 복원하였다.24 함흥과 개성이 창업 사적이라면 경복궁은 창업과 중흥을 함께 말할 수 있는 공간이다. 영조가 ‘중흥조’라고 여겼던 中宗(재위 1506~1544)과 宣祖가 모두 근정전에서 즉위하였기 때문이다.25 영조는 이날 과거에 앞서 두 영의정 좌의정을 소견하였는데, “지난해는 중종께서 중흥하신 해이고, 금년은 선조께서 용비하신 해이다”라고 언급하였다.26 즉 작년이 중종 즉위 4주갑, 올해가 선조 재위 3주갑 임을 언급한 것이다. 올해는 또한 중종이 반정으로 즉위한 뒤 처음으로 근정전에 나아가 친림 정시를 펼친지 4주갑이 되는 해이기도 하였다.27 결국 영조는 선조의 옥대를 하고, 중종의 의례를 재현하고 있는 셈이라고 할 수 있다.

영조는 제신들에게 어제에 대한 갱진시를 지어 올리라고 하였다. 〈근정전정시도〉 병풍에는 이날 입참한 제신 50명의 갱진시가 수록되어 있다. 인원은 의정부, 승정원, 홍문관, 오위 등 국왕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기관의 근신들로 구성되어 있다.28 이들의 갱진시를 살피면 이 해, 경복궁 행사에서 중종과 선조를 언급한 자들이 종종 있다. 예를 들어 한성판윤 柳儼(1692~?)은 “(선조께서) 즉위하신지 주갑을 맞이하여, (중종께서) 나라를 안정시키고 크게 도모하신 것을 (영조) 임금의 마음에 깊이 새기도다”고 하였고,29 부사직 李喆輔(1691~1775)는 “옥대는 정묘년의 경사[선조 즉위]를 다시 보고, 용포는 병인년의 영화[중종 즉위]를 아득하게 감응한다”고 하였다.30 영조의 어제시처럼 창업과 중흥을 함께 이야기한 갱진시도 있다. 예문제학 趙觀彬 (1691~1757)은 “처음 이 궁에 거하심에 옛 성세의 공을 이루시고, 동쪽 나라를 중흥하심에 지금의 맑음이 되었도다”고 하였다.31

이처럼 영조의 어제는 조선의 창업과 중흥을 언급하고, 신하들은 그러한 선대의 업적과 현재를 연결시키고 있다. 이는 이 병풍이 일반적인 행사도가 아니라, 경복궁 터만을 그린 그림과 어제 갱진시병의 형식을 띤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 〈근정전정시도〉는 정시를 계기로 그려졌으나 과거시험 장면을 직접 그리지 않았다. 대신 경복궁 유지와 여기에 친림한 영조의 존재만이 강조되었다. 경복궁은 창업과 중흥의 상징적인 공간이었다. 영조는 이러한 공간의 권위를 빌려 자신을 중흥조와 일치시키고 있다. 이러한 일치는 경복궁 옛터에 자리한 영조의 존재로 시각화되고, 영조의 어제를 통해 문자화되었으며, 갱진시를 통해 반복되었다. 이처럼 행사 장면이 생략되는 기록화는 행사의 참석, 그 자체에 의미를 두는 일반 계병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방식이다. 이러한 특징으로 볼 때 이 병풍은 참석자 발의가 아닌 영조의 어명에 의해 제작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32

Ⅳ. 계병으로 그려진 경복궁 진하도 : 〈궁중행사도〉(1763년 추정)

1763년 영조는 70세와 재위 40주년을 맞아 경복궁 근정전에서 진하를 받고 訓諭를 반포하였다.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궁중행사도〉는 이날의 행사를 그린 한 폭일 것으로 추정된다(Fig. 5).33 경복궁 옛터에서의 진하례는 영조 연간 두 번 행해졌다. 그중 하나는 1763년 1월 1일 칠순기념 진하이고, 다른 하나는 1767년 3월 10일 친잠례 이후 행해진 진하이다. 〈궁중행사도〉는 그 중 전자의 행사로 추정된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우선 하단의 궤장을 든 노인이 발견되는데 이는 이 행사가 영조의 70세를 기념한 행사였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더 자세하게 서술하겠지만 1763년에는 기로신과 80세 이상의 양인들을 위한 우대 의식이 설행되었다. 두 번째로 그림 속 앙상한 나뭇가지가 겨울을 배경으로 하는 점이 그 이유이다. 신년 진하례는 음력 1월 1일, 친잠례는 3월 10일 행해졌다. 친잠례는 시기적으로 봄에 설행되었을 뿐 아니라, 친잠례의 의미상으로도 봄을 강조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두 가지 이유로 〈궁중행사도〉는 1763년 근정전에서 열린 진하례를 그린 장면의 일부로 추정된다. 그림에 대해 더 자세하게 들어가기 전에 이 행사의 의미와 과정을 짚어 보자.

Fig. 5.

〈궁중행사도〉 Illustration of a Royal Occasion, 18th century, 137×54.8cm, Seoul Museum of History (Seoul Museum of History, https://museum.seoul.go.kr)

영조는 1763년 1월 1일, 영조의 칠순을 기념하여 진하례가 행해졌다. 이전부터 신하들이 여러 차례 진하를 청하였으나 영조는 기근이 계속되는 것을 이유로 거절하였다. 그러다 영조는 근정전에서 교서를 반포할 것을 계획하면서 진하례도 아울러 진행하라고 허락하였다.34 근정전에서의 진하례가 태조와 숙종을 동시에 기념할 수 있는 의례였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태조는 영조를 제외하고 건국 이래 유일하게 70세를 맞이한 왕이며 숙종은 영조 이전 가장 긴 재위 기간을 가진 왕이었다.35 영조는 태조가 70세를 맞아 근정전에서 唱榜하고, 숙종이 재위 40주년을 맞아 숭정전에서 진하를 받은 것을 본받고자 하였다. 영조가 근정전에서 받은 진하는 태조의 옛 터에서 숙종의 고사를 재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1763년 새해 첫날 근정전의 진하례는 국왕의 교서 반포, 頒敎를 중심으로 행해졌다.36 진하례는 국왕에게 송덕을 올리는 신하들의 致詞와 그에 응답하는 국왕의 宣敎, 그리고 이에 대한 신하들의 감사를 담은 宣箋 의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날 진하례에서 영조는 치사에 답하는 교서를 먼저 선포하라고 하였다.37 치사관이나 치사문에 대한 기록은 없는 것으로 보아 생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진하례의 외형을 갖추었으나 사실상 국왕의 윤음을 頒赦하는 행사로 전용한 것이다. 진하례의 箋文은 태학의 유생이 올렸다. 일반적으로 전문은 대신과 종친이 담당하는데 성균관 유생이 전문을 올린 것은 드문 일이었다. 영조는 진하례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70세 이상 관원과 80세 이상 양인에게 품계를 올려주는 推恩을 명하였다. 국왕의 70세 경사를 맞아 노인을 우대하는 뜻을 펼친 것이다.38

〈궁중행사도〉는 1763년의 진하례를 그린 그림이다(Fig. 5). 행사의 왼쪽 부분만을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참연자의 배치와 복식으로 보아 진하례임을 확인할 수 있다. 진하례에서는 어도를 중심으로 우측에 문관이 좌측에 종친과 무관이 자리하며 북측을 향해 앉았다.39 또한 진하례에서 종 4품이상 관원은 금관조복을 입고 참여하였다. 이는 진연·진찬도에서 관원들이 단령에 사모를 입고 좌우로 마주보고 앉은 것과 비교된다. 이 그림은 현존하는 진하례를 그린 병풍으로는 가장 이른 사례로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40

〈궁중행사도〉는 진하례 장면 중 서쪽 부분에 해당한다. 진하례 배설도에 의거하면 그림 속 참연자는 종친과 무관에 해당한다(Fig. 6).41 그림 속 7열의 참연자 중 앞의 2열의 금관조복을 입은 자들은 종4품 이상 관원, 뒤의 3열의 흑단령을 착용한 자들은 정5품 이하 관원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뒤의 2열은 일반적으로 진하례에 참석하는 종친과 무관이 아니다. 제6열에는 유건을 쓰고 푸른 복식을 한 자들이 있다. 유건[연라건]과 청단령은 성균관 유생이 공식 행사에 착용하던 복식이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이 날 진하례에서 箋文을 올리기 위해 참석하였다. 마지막 열에는 갓, 흑립을 쓴 자들이 앉아 있다. 사모는 1품부터 9품까지 관복에 착용하는 모자였다. 흑립을 쓴 자들은 사모를 쓸 수 없는 자들, 즉 관직을 받지 못한 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아마도 추은을 받은 80세 이상 士庶人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시위 의장 밖으로 궤장을 들고다니는 인물들도 그려졌는데, 이들 역시 정식으로 행사에 초대되지는 못했으나 추은을 받은 80세 이상 양인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Fig. 6.

Fig. 5의 부분, Details of Fig. 5

〈궁중행사도〉는 경복궁의 배경적 요소와 진하례의 의례적 요소가 균형 있게 자리하고 있다. 〈근정전정시도〉가 경복궁의 공간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례를 위한 의장과 인물을 모두 생략하였던 것과는 다르다. 〈궁중행사도〉는 배경과 의례가 어우러져 있다. 의례 공간과 배경을 자연스럽게 구분 짓는 것은 의례용 막차들이다. 소나무 배경 옆으로 검은 지붕의 막차가 늘어서 있다. 붉은 봉우리를 가진 어막차를 비롯해 의례 준비를 위한 막차들이다. 어막차 옆으로는 임금의 가마, 輿가 대기하고 있다. 가마 위로는 근정전의 월대 일부와 석수가 보인다. 월대와 차일의 왼쪽 끝자락 사이의 간격이 크다. 어좌는 직접 볼 수 없지만, 이로 미루어 볼 때 어좌 주변 공간이 크게 자리 잡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의례용 막차와 차일의 바깥으로는 경복궁 배경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있다. 〈궁중행사도〉는 경복궁의 공간적 특징을 이전보다 고증적이고 사실적으로 드러내었다. 그 대표적인 부분이 경회루 석주이다(Fig. 7). 慶會池에는 3개의 섬이 있는데 그 중 동쪽에 있는 큰 섬에 경회루를 세웠다. 앞서 〈근정전정시도〉에서는 경회지 한 가운데에 석주가 물에서 솟아난 듯 그려져 있었다. 그에 비해 〈궁중행사도〉에서는 연못 오른쪽 섬에 석축을 쌓고 그 위에 열을 맞추어 석주를 그려 넣었다. 왼쪽의 작은 두 바위 섬이 그려진 것도 사실 그대로이다. 경회루로 가기 위해서는 3개의 다리를 건너야 한다. 19세기에 경복궁 복원을 위해 작성된 〈경복궁도〉(국립민속박물관 소장)에 따르면 19세기에 재건되기 이전에는 3개의 다리 간격이 일정하지 않았다.42 〈궁중행사도〉는 〈경복궁도〉에서와 같이 남쪽의 두 다리가 더 가깝게 그려져 있다(Fig. 8).

Fig. 7.

Fig. 5의 부분, Details of Fig. 5

Fig. 8.

〈경복궁도(경회루 부분)〉 Illustration of Kyŏngbokkung Palace (detail of Kyŏnghoeru Pav ilion), 65.5×51.2c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https://www.nfm.go.kr)

경회루 아래에는 관리자의 숙소와 石臺가 있다(Fig. 7). 숙소는 이전 〈근정전정시도〉에서도 왕의 대차로 사용되며 간략하게 그려진 것이다. 〈궁중행사도〉에서는 “ㄱ 자 건물 구조와 돌담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석대는 천문 관측 기구인 小簡儀를 올려두었던 소간의대로 추측된다.43 실록에 따르면 세종연간 소간의를 제작하여 하나는 千秋殿 서쪽에 두고, 다른 하나는 書雲觀에 두었다고 하였다.44 천추전은 경회루의 동남쪽에 있었으므로, 천추전 서쪽에 둔 것이 바로 이 석대라고 할 수 있다.45

〈궁중행사도〉는 주변의 시설물 뿐 아니라 자연 배경도 최대한 사실적으로 반영하려고 노력하였다. 북쪽을 매운 일군의 소나무는 경복궁 후원에 형성된 소나무 숲을 상징한다. 그러나 근정전 마당에는 소나무와 활엽수를 고루 배치하였다. 가지만 앙상한 나무는 이 행사의 계절적 배경을 잘 드러내주고 있다. 한편 화면의 하단에서 시작하여 왼쪽으로 돌아 석대 앞까지 이어진 길이 있다. 이는 경복궁의 서쪽 편에 흐르던 水路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궁중행사도〉는 당시의 진하례 장면과 경복궁의 시설과 자연을 사실적이고 정확하게 재현하였다. 이는 앞서 〈근정전정시도〉가 경복궁 터의 상징성을 부각하기 위해 의례적 요소를 생략한 것과는 매우 다른 특징이다. 그렇다면 〈궁중행사도〉는 어떤 계기로 누구에 의해 발의된 계병일까. 이 병풍과 관련된 직접적인 기록은 찾을 수 없었다. 가장 유력한 집단은 기로신이다. 이날 영조는 70세를 맞아 영수각에 전배하고 기로소에 어제를 내렸다.46 이어제와 11명 기로신의 갱진시는 현재 『耆英閣詩帖』(1763, 동아대학교 박물관)으로 전해진다.47 기로소에서 『기영각시첩』과 함께 진하례 계병을 그렸다는 정확한 기록은 없다. 다만 기로소에서 2년 뒤 갱신시첩과 계병을 함께 그린 유사한 사례가 있어서 참고할만하다.48 1765년 기로소 방문을 기념하여 제작된 화첩 『靈壽閣頌』, 『親臨宣醞圖』(이상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소장)과 기로소의 계병, 〈英祖乙酉耆老宴·景賢堂受爵宴圖〉(서울역사박물관 소장)이다.49 1763년 1월 1일에도 기로소 갱진시를 모은 『기영각시첩』과 진하례를 그린 〈궁중행사도〉가 계첩과 계병으로 그려졌다. 2년 간격으로 행해진 두 작품의 유사한 제작 관행을 볼 때, 〈궁중행사도〉 역시 기로소에서 제작한 것이 아닐까, 추정해볼 수 있다.

1763년 1월 1일의 진하례에 참여한 제신들은 문무백관에서 종친, 기로신, 유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였다. 이는 영조의 전교문이 반사된 범위를 보면 그 방대함을 알 수 있다. 영조의 전교는 선조들의 업적을 드높인다는 의미로 『揄揚盛烈錄』이라는 책자로 제작되었다.50 규장각에 소장된 『유양성열록』은 副護軍 權導에게 내린 內賜記를 가지고 있다. 반사 범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종4품 오위 부호군까지 넓게 하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궁중행사도〉의 발의자가 누구인지, 혹은 어명에 의한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영조대의 한 행사를 여러 집단에서 발의한 전례를 보았을 때 기로신 외에도 진하례에 참석한 다양한 계층과 소속의 신하들이 발의자로 추정 가능하다.51

Ⅴ. 가전화첩으로 그려진 경복궁 수작례 : 〈영묘조구궐진작도〉(1767년경)

영조는 1767년 경복궁에서 진작례를 행하였다. 〈구궐진작도〉는 당시 우참찬으로 진작례에 참여한 남태회의 집안에서 제작한 것이다. 영조의 경복궁 행사에 대해 私家에서는 어떻게 인식하였으며 그림으로 남겼는지를 살필 수 있는 사례이다. 우선 영조의 행사 취지를 살피고 이어서 의령 남씨 집안의 회화 제작에 대해 알아보겠다.

영조는 1767년 3월 이미 경복궁 후원에서 친잠례를 열고 진하례도 받았다. 조선 전기에만 몇 번 행해졌던 친잠례의 전통을 복원한 것이다.52 12월이 되자 영조는 해가 가기 전 다시 한번 ‘정해년’을 기념할 수 있는 사례를 찾고자 하였다. 상고할 만한 특별한 이유가 없는데도 영조는 춘추관 당상을 史庫로 보내 건국 초 정해년의 실록을 찾아 오라고 하였다.53 영조가 특별히 주목한 ‘정해년의 기록’은 태종 7년(1407) 9월 20일의 기사였다.54 태종은 태조 말년에 그의 거처인 덕수궁으로 문안하였으나 태조를 직접 알현할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런데 이날은 특별히 태조가 태종을 침전으로 불러 술을 권하고 취하기에 이르렀다. 태종은 매우 기뻐하며 “내가 피리를 불리며 돌아가고자 한다”고 신하에게 말했다. 태종이 마침내 태조의 마음을 얻었음을 피리로 축하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영조는 이 기사를 읽고 크게 감동하였다. 대신과 예조 당상 등을 입시하라고 하고 기사관에게 기사를 다시 읽게 하였다. 그리고 장악원의 笛工를 불러 ‘피리를 불었다’는 대목에서 與民樂·步虛詞를 부르게 하였다.55 영조는 태종이 이어서 12월 16일 편전에서 小酌를 열었다고 하였다. 자신도 이를 추모하여 경희궁 편전에서 소찬을 베풀겠다고 하였다.56 영조는 다음 날 규모를 확대하여 경복궁 근정전에서 소작례를 열고, 문무과 정시를 행하겠다고 하였다. 실록을 상고한지 며칠 만에 급하게 연 소작례였다. 미리 계획된 행사가 아니라 이 기사에 감흥하여 이를 의례화한 것이다.

영조는 태종의 진작을 계술하였지만 사실상 그가 추모한 것은 태조였다. 영조는 내년이 태조가 서거한지 360년, 6주갑이 된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태조를 추모하기 위해 이미 11월부터 앞으로 1년 동안은 음악을 정지할 것을 명령하였다.57 여러 신하들이 지나치다고 말렸지만 오히려 이해하지 못한다고 화를 내었다. 12월 16일 경복궁에서의 소작연에서도 영조는 궁중 악대를 허락하지 않았다. 다만 태종이 태조의 마음을 얻고 기뻐 피리를 불었던 고사에 의거하여 피리만을 허락하였다.58 영조는 대신들의 축수를 받고는 악공에게 피리를 불라고 명하였다. 그리고 사관에게 ‘임금이 경복궁에 나아가 여러 신하와 함께 飮福하고서 선조의 뜻을 계술하고, 피리를 불게 하여 임금이 듣고 눈물을 흘렸다[上詣景福宮與諸臣飮福述先志令吹笛上聞隨涕下].’ 21자를 쓰게 하였다.

영조는 그 해초 종묘에 술을 올리며 10년 이상 지속되었던 금주령을 해제하였다. 영조가 소작연에서 신하들과의 음주를 ‘음복’이라고 한 것은 이날의 행사를 일반적인 향음주례와 차별화하고 조종을 추모하는 목적을 강조한 것이다. 이처럼 연회와 제사에 빠지지 않는 술과 음악을 영조는 철저히 제한하였다. 자신이 의미를 부여한 방식으로만 사용하게끔 규율한 것이다.

宜寧 南氏 집안에서 제작한 〈구궐진작도〉는 사대부의 입장에서 제작한 그림이다(Fig. 9). 〈구궐진작도〉는 《의령남씨가전화첩》의 일부로 전해진다. 의령남씨 집안에서는 중종, 명종, 선조 연간 조상의 공적을 기념한 화첩이 전해지고 있었다. 남태회는 기존에 전해지던 화첩을 모사하고 그 앞뒤로 자신이 참석한 영조 진작례와 5세손 南在(1351~1419)가 관여한 태조의 고사를 추가하였다. 당시 제작한 것과 가장 가까운 본이 홍익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의령남씨가전화첩》이다.59

Fig. 9.

〈영묘조구궐진작도〉, 《의령남씨가전화첩》 “An Intimate Royal Gathering Hosted by King Yŏngjo at Kyŏngbokkung Palace,” from Ŭiryŏng Namssi kajŏn hwach'ŏp [Album of Paintings by the Ŭiryŏng Namssi Family], 1767, Color on Paper, 42.7×59.4 cm, Hongik University Museum (Hongik University Museum, Chayŏn kŭrigo sam: Chosŏn sidae ŭi hoehwa, pp. 184-185)

〈구궐진작도〉는 이전과 비교하여 경복궁임을 나타내는 표지가 적다. 경복궁의 특징으로는 무성한 소나무 배경과 월대를 들 수 있다. 월대에는 지금도 존재하는 두 마리의 동물상이 표현되어 있다. 〈구궐진작도〉가 근정전 뒤편의 배경 묘사를 생략한 것은 아마도 이 화첩의 다른 폭들과의 연계성을 두기 위한 것이라 보인다. 같은 화첩에 수록된 〈명묘조서총대시예도〉와 비교해보면 서총대의 월대에 차일을 치고 국왕 앞에 신하들이 도열한 구도가 근정전 진작도와 유사함을 발견할 수 있다(Fig. 10). 이 화첩에는 경복궁을 배경으로 그린 〈중묘조서연관사연도〉도 포함되어 있다(Fig. 11). 경복궁이 훼손되기 이전에 근정전 전정에서 열린 사연도이다. 〈구궐진작도〉는 경복궁을 배경으로 한 사연도보다 서총대를 배경으로 하였지만 국왕의 친림 의례를 그린 시예도와 유사한 구도를 선택하였다.

Fig. 10.

〈명묘조서총대시예도〉, 《의령남씨가전화첩》, “A Celebration at the Royal Archery Range Hosted by King Myŏng-jong,” from Ŭiryŏng Namssi kajŏn hwach'ŏp [Album of Paintings by the Ŭiryŏng Namssi Family], Color on Paper, 42.5×57.3cm, Hongik University Museum (Hongik University Museum, Chayŏn kŭrigo sam: Chosŏn sidae ŭi hoehwa, pp. 176-177)

Fig. 11.

〈중묘조서연관사연도〉, 《의령남씨가전화첩》, “Royal Banquet Hosted by King Chungjong in Honor of the Prince’s Teachers,” from Uiryŏng Namssi kajŏn hwach'ŏp [Album of Paintings by the Ŭiryŏng Namssi Family], 1535, Color on Paper, 42.6×57.4cm, Hongik University Museum (Hongik University Museum, Chayŏn kŭrigo sam: Chosŏn sidae ŭi hoehwa, pp. 174-175)

〈영묘조구궐진작도〉가 경복궁이라는 배경보다 이 의례가 국왕이 친림한 행사였다는 점에 더 주목하였다는 사실은 의례 장면의 상세한 묘사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Fig. 12). 중앙에 영조의 어좌와 오봉병을 두고 그 앞에 두 좌석이 있다. 중앙의 것은 영조가 어좌에서 내려와 잔을 받는 자리이고, 오른쪽의 것은 세손의 자리이다.

Fig. 12.

Fig. 9의 진작 의례 부분, Details of Fig. 9

이처럼 신하가 임금과 대면하여 엎드려 잔을 올리고 받는 장면이 채택된 것은 매우 드물다. 모든 연회에서 잔을 올리는 의식이 있지만, 대부분 그림은 궁중 무용인 呈才 장면을 선택한다.60 이 그림에서 진작의식을 강조한 것은 이 날의 진작의식이 매우 예외적이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정식 진연에서는 이 그림처럼 왕과 대면하여 잔을 직접 올리지 않는다. 매번 임금 옆에 선 제조가 진작관으로부터 잔과 찬을 받아 대신 임금의 상에 올렸다.61 그러나 이번 소작례에서는 임금이 자리에서 내려와 바닥에 앉아 직접 신하의 헌수를 받았다.62 격식을 차리지 않고 군신간 거리를 좁힌 것이다. 이날의 예외적인 소작례에 대해서 舊闕進爵圖序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아, 신하가 군부에게 술잔을 올림이 어찌 제한이 있으리오. 주고 받음을 집안 사람들의 예[家人禮]와 같이 하였고, 술잔을 주고 받음을 주인과 손님이 즐거워하는 듯이 하였으니 지난 기록을 고증하여도 (이러한 의식을 나는) 보지 못하였다.63

참연자였던 남태회 역시 이 진작 의식을 가장 특별하게 여겼다. 임금에게 술잔을 올리기를 마치 집안 사람들 사이에서 주고 받는 것처럼 격식 없이 치러졌기 때문이다. 이 날의 행사는 많은 인원이 참가하고 악대를 동반한 대규모 행사는 아니었다. 소작연이라는 이름도 처음 만들어져 시행되었다. 그러나 소규모의 대신과 근신만 참석한 행사였기에 오히려 참석이 허락된 자들에게는 특권과 같은 자리였다. 영조는 태조가 태종과의 거리를 허물고 술잔을 건넨 사실에 깊이 감동하였다. 이날 영조가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들과 직접 잔을 주고 받은 것은 이처럼 오해를 넘어선 긴밀한 관계가 군신 간에도 이루어져야 함을 보여주고 있다. 특정한 계기 없이 즉흥적으로 설행된 진작례였지만 여기에 참여하게 된 소수의 신하들에게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지닌 행사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태회는 경복궁 배경을 자세히 그리지 않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의례가 태조를 향해있음을 알고 있었다. 남태회는 자신의 선조였던 남재와 태조와의 일화를 가장 앞에 〈太祖忘憂嶺駕行圖〉라는 이름으로 추가하였다(Fig. 13). 이 그림의 서문에 의하면, 태조가 자신의 능지를 찾지 못해 근심하자 남재가 자신의 장지로 정해두었던 터로 인도하였다. 태조가 이 터를 無學大師에게 보이니, ‘이 지역이라면 국가와 더불어 종신토록 복을 누릴 것’이라고 하였다. 태조는 이곳을 자신의 수릉지(살아 생전 미리 준비해 놓는 능지)로 정하고 남재에게는 근처 줄곡에 묏자리를 마련해주었다. 그리고 능지를 정함에 근심을 잊었다 하여 이 고개를 ‘忘憂嶺’이라고 이름하였다. 당시 태조가 수릉을 찾고 있었으며, 경기도 廣州에 鄭道傳(1342~1398)과 남재 등을 보내 살피게 한 사실은 실록에 전한다.64 그러나 태조와 남재가 함께 행차하였다거나 태조가 남재의 묏자리를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이는 남재의 문집과 의령남씨 집안의 기록에서 전해져 올 뿐이다.65 〈태조망우령가행도〉의 서문은 특히 의령남씨의 선조인 남재가 단순히 능지의 선정에 공을 세웠을 뿐 아니라 태조와 묏자리를 바꾼 특별한 관계임을 강조하고 있다.66

Fig. 13.

〈태조망우령가행도〉, 《경이물훼》, “An Excursion of the Royal Burial Plot by King T'aejo Yi Sŏng-gye and His Subjects,” from Kyŏngimurhwe, Late 19th century,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태조망우령가행도〉의 그림은 태조의 행차와 ‘망우령’ 두 가지를 주제로 삼기 위해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왼쪽에는 태조의 어좌가 있고 주변을 신하들이 둘러싸고 있다. 어좌 오른쪽으로 가까이 다가온 사람이 남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왼쪽 아래로는 말을 탄 호위병사를 그려 어가 행차가 장대하였음을 재현하였다. 이 그림에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오른쪽의 산등성이이다. 화가의 재량이 부족하여 지세가 명확하게 표현되지는 못하였으나, 실경을 재현하려고 고심한 흔적이 있다. 아마도 망우령, 그리고 거기에서 내려다 본 健元陵 주변의 지세를 표현하려고 한 것처럼 보인다. 영조는 여러 차례 건원릉으로 행차하였다. 남태회가 어가를 배종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의 선산이 주변에 있었기에 건원릉의 지세는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건원릉은 조종의 복이 이어지는 능지였다. 남태회는 이 그림에서 건원릉 터를 중심에 둠으로써 국가의 성세에 자신의 집안이 기여한 바를 강조하고자 한 것이다.

남태회가 남재와 태조의 고사를 가져온 것은 선조의 공을 다시 인정받기 위함이 아니었다. 영조는 여러 차례 ‘世臣’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67 신하들에게 당파에 휘둘리는 신하가 아니라, 대를 이어 조종을 섬긴 세신이야말로 국가에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남태회는 자신의 집안이 태조부터 중종, 명종, 선조 그리고 영조 연간에 이르기까지 섬겼음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영조의 세신임을 강조하기 위해 태조의 고사까지 거슬러 올라간 것이다. 〈영묘조구궐진작도〉는 영조가 직접 술잔을 건네준 소작례를 강조하기 위해 화면을 확대하였다. 그 과정에서 경복궁 배경은 상대적으로 생략될 수 밖에 없었다. 남태회는 가전화첩에 태조의 사례를 추가함으로써 그림 밖에서 경복궁 진작례의 의미를 적극적으로 구현하였다고 할 수 있다.

Ⅵ. 맺음말

영조는 문인들의 유상처로 기억되던 경복궁을 조종의 법궁으로 활용하였다. 경복궁 행사를 다룬 세 개의 행사도는 영조뿐 아니라 행사에 참연한 신하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1746년 친림 정시를 기념한 〈근정전정시도〉는 영조의 어명으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어제갱진시 병풍이다. 친림 정시는 영조대 경복궁에서 행해진 첫 행사였다. 어제와 갱진시를 통해 이 행사가 단순한 과거 시험이 아니라 조종의 창업을 추모하고 영조의 중흥 의지를 되새기는 자리가 되었다. 〈근정전정시도〉는 갱진시의 의미를 그림으로 강화하고 있다. 행사의 인물과 내용은 생략함으로써 오히려 배경이 되었던 근정전 옛터와 영조와의 관계가 크게 부각되었다. 백악산과 근정전 터, 그리고 영조의 어좌가 한 축에 이어짐으로써 영조의 정통성과 계술 의식이 강조되었다.

경복궁에서의 행사도는 계병으로도 제작되었다. 〈궁중행사도〉는 1763년 근정전에서의 진하례를 그린 행사도의 일부라고 추측된다. 이 해의 근정전 진하례는 영조 70세와 재위 40주년을 맞이한 행사였다. 태조는 70세를 맞아 근정전에서 창방하고 숙종은 재위 40주년을 맞아 숭정전에서 진하를 받았는데, 영조는 이를 본받아 태조의 옛 터에서 숙종의 고사를 재현한 것이다. 〈궁중행사도〉는 행사를 법식에 맞추어 재현하면서도 경복궁 배경 묘사 또한 소홀히 하지 않았다. 경복궁 근정전 주변의 모습이 고증적으로 그려진 것은 경복궁이라는 공간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영묘조구궐진작도〉는 행사에 참여한 사대부의 개인적 입장을 살필 수 있는 사례이다. 1767년의 경복궁 진작례에 참여하였던 남태회는 〈영묘조구궐진작도〉를 그리게 하여 전해져 오던 의령남씨 가전화첩의 일부로 포함시켰다. 이 그림은 경복궁 배경은 거의 생략하는 대신 의례 중 헌수 의식을 강조해서 그렸다. 이날의 소작연은 일반적인 진연과 달리 국왕이 자리에서 내려와 신하의 잔을 직접 받았기 때문이다. 태조와 태종의 거리를 좁힌 술자리의 장면을 영조가 그의 신하들과 재현하고자 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남태회는 이 화첩의 가장 앞에 자신의 선조인 남재와 태조의 고사도를 추가하였다. 경복궁 배경 대신 태조 고사도를 통해 국초의 계승성을 강조한 것이다. 남태회는 자신의 가문이 태조부터 이어온 세신임을 이 화첩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였다. 영조가 경복궁 행사를 통해 강조한 國祖 계술의식이 신하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조대에는 경희궁, 창덕궁 등 다수의 궁궐에서 행사가 펼쳐졌다. 그 중 경복궁은 주로 국조 태조와의 연관성, 중흥조인 중종, 선조의 연관성을 강조한 의례의 공간으로 채택되었다. 경복궁은 평소에 왕이 거주하지 않고 오직 행사 목적으로 선택되었다는 점에서 의례에 특별한 의미를 부가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행사 공간으로서 경복궁의 중요성은 그림에서 배경의 중요성과도 연결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기록화에서 배경은 행사의 현장성을 보여주는 구체적인 장소이자 의식의 상징성을 체계화한 의례 공간으로 기능한다. 위의 세 사례 중에서는 두 번째 〈궁중행사도〉는 배경의 두 기능을 충실히 갖춘 전형적인 사례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근정전정시도〉는 경복궁을 배경이 아닌 주인공으로 삼았다. 의례보다 의례의 공간에 방점이 찍힌 행사였기 때문이다. 〈영묘조구궐진작도〉는 행사 장면을 확대하느라 경복궁 배경이 미처 담기지 못했다. 그러나 화첩 내에 태조 고사를 추가함으로써 경복궁이 가진 의미를 적극적으로 해석하였다. 의례 장소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그 자체로 내용이 된 것이다. 영조는 궁궐 외에도 성균관, 기로소, 사옹원, 청계천 등에 행차하여 행사를 가졌다. 영조대 궁중 기록화의 다양한 공간적 의미에 대해서는 후속 연구로 삼고자 한다.

Notes

1)

윤정, 「18세기 경복궁 유지의 행사와 의례-영조대를 중심으로」, 『서울학연구』 25 (2005), pp. 191-225.

2)

〈근정전정시도〉에 대한 정보와 선행연구로는 다음 참조.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상징대로, 서울의 육조거리』 (서울역사박물관, 202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영조대왕자료집』 6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 pp. 24-25; 윤진영, 「科擧관련 繪畵의 현황과 특징」, 『대동한문학』 40 (2014), pp. 229-269; 정지수, 「영조대《親臨光化門內勤政殿庭試時圖屛》연구」, 『한국문화』 106 (2024), pp. 285-314.

3)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궁중행사도〉는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서울역사박물관, 2021.11.16~2022.3.27) 전시를 통해 최근 공개되었다. 전시 도록(서울역사박물관, 앞의 책, p. 29)에서는 이 그림을 18세기에 그린 경복궁의 궁중행사도라고 소개하였다.

4)

의령남씨 가문의 화첩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 참조. 박정혜, 「조선시대 의령남씨 가전화첩」, 『미술사연구』 2 (1988), pp. 23-50; 동저,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 (혜화, 2022), pp. 453-463; 유미나, 「조선시대 궁중행사의 회화적 재현과 전승: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경이물훼》 화첩의 분석」,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조선왕조 행사기록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pp. 112-127.

5)

정선의 〈경복궁도〉에 대해서는 최완수, 『겸재의 한양진경』 (동아일보사, 2004), pp. 157-163 참조.

6)

세종대에는 백악산 앞과 경복궁 주변에 지세를 보강하기 위해 풍수적 이유로 소나무를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세종실록』 39권, 세종 10년(1428) 1월 6일 기축.

7)

〈기성입직사주도〉에 대해서는 이태호, 「예안 김씨 가전 계회도 석점을 중심으로 본 16세기의 계회산수」, 『만남과 헤어짐의 미학-조선시대 계회도와 전별시』 (학고재, 2000), pp. 108-110.

8)

〈비변사계회도〉의 실경 재현에 대해서는 윤진영, 「기록화로 보는 한양」, 『박물관 유물로 보는 서울Ⅲ-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보물들』 (서울역사박물관, 2020), pp. 3-15.

9)

金時敏, 「同堂伯, 入故宮, 煮艾, 道長追至, 抽老杜韻共占」, “新春物色舊池臺, 兄弟相羊有酒杯. 滿苑滄茫芳草意, 深林早晩雜花開, 樓墟古柱山俱立, 郭外孤雲鳥幷因, 採艾作羹炊白飯, 詩翁更自北溪來” 최완수, 앞의 책, pp. 161-162 재인용.

10)

박현욱, 『성시전도시로 읽는 18세기 서울-13종 성시전도시 역주』 (보고사, 2015), p. 69 재인용.

11)

『영조실록』 21권, 영조 5년(1729) 3월 27일 신미;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1735) 5월 25일 갑자. 화평옹주의 제택 사업에서도 경복궁의 소나무를 베자 문제가 생겼다. 옛터의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거나 말라서 떨어진 경우에만 가져다 사용할 수 있었다.

12)

『영조실록』 57권, 영조 19년(1743) 4월 16일 기해; 『영조실록』 59권, 영조 20년(1744) 5월 10일 정해.

13)

『영조실록』 31권, 영조 8년(1732) 6월 14일 기사; 『영조실록』 79권, 영조 29년(1753) 5월 21일 병자.

14)

『영조실록』 88권, 영조 32년(1756) 9월 5일 경오.

15)

윤정, 앞의 논문, pp. 199-211.

16)

『영조실록』 108권, 영조 43년(1767) 1월 20일 을유.

17)

영조대 궁중행사가 가장 많이 행해진 곳은 경희궁이다. 재위 초반기에는 창덕궁과 창경전에서 대비를 위한 진연을 열기도 하고, 창덕궁 편전에서 친림정사를 행하기도 하였다.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에 移御하면서 경희궁은 영조의 거주 공간이자 의례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창덕궁과 창경전이 영조 초기, 경희궁이 영조 후기에 거주와 정무, 연회를 위한 공간이었다면 경복궁은 주로 영조 후기에 오직 특별한 행사를 위해 채택된 공간이었다. 특히 선왕과 특별한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있는 경우에 선택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조의 경희궁 이용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조. 윤정, 「영조의 慶熙宮 改號와 移御의 정치사적 의미-恩悼世子 賜死와의 상관성에 대한분석」, 『서울학연구』 34 (2009), pp. 31-63; 장정미, 「英祖의 慶熙宮 移御와 王室 儀禮의 공간적 의미」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4); 이민아, 「영조대 이후 궁궐 내 세자 공간 운용과 변화의 정치적 의미」, 『朝鮮時代史學報』 103 (2022), pp. 437-471.

18)

『영조실록』 117권, 영조 47년(1771) 7월 12일 경술; 『영조실록』 119권, 영조 48년(1772) 7월 21일 갑인; 『영조실록』 121권, 영조 49년(1773) 11월 20일 을해.

19)

“동국여지비고 제1권”,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B001A_0030_020_0010.

20)

永濟橋는 세종대 명명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잊혀졌다. 영제교 양 옆의 石獸는 조선 후기에 남아있었다. 유득공의 『春城遊記』에서는 이를 天鹿이라고 기록하였으며,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팔하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현도, 「「경복궁도」 제작 시기와 배경 연구」, 『건축역사연구』 32 (2023), p. 59.

21)

‘문과전시의’에 대해서는 『國朝五禮儀』 권3, 文科殿試儀; 『국조오례의』 v.2 (법제처, 1981), pp. 238-243; 『문종실록』 권4, 문종 즉위년 10월 6일 丙子 참조. 정지수는 이 차일을 의례의 실무를 담당하던 典儀, 通贊, 奉禮郎의 자리라고 보았다. 정지수, 앞의 논문, p. 306. 그러나 기록화에서 전의, 통찬, 봉례랑 등과 같이 단지 의례의 집행을 돕는 집사자들의 자리는 중요하게 표시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편 정전 양쪽에는 국왕의 시제를 적은 시제판이 놓이기도 한다. 어좌, 어막차와 같은 푸른색 차일로 미루어 국왕의 시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있다.

22)

『承政院日記』 1021책, 영조 23년 9월 16일 癸卯. 정지수, 앞의 논문, p. 306.

23)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1747) 9월 19일 병오.

24)

숙종과 영조의 태조 관련 사적 복원에 대해서는 윤정, 『국왕 숙종, 잊혀진 창업주 태조를 되살리다』 (여유당, 2013) 참조.

25)

영조의 ‘중흥’에 대한 인식은 다음 연구 참조. 윤정, 「英祖의 ‘中興’ 인식과 ‘祛黨’의 모색」, 『역사와 실학』 48 (2012), pp. 73-114. 영조는 탕평을 직접 내세우기보다 선왕의 사적과 자신을 연결하면서 정당성을 확보해나갔다.

26)

『영조실록』 66권, 영조 23년(1747) 9월 17일 갑진.

27)

윤정, 앞의 책, p. 282.

28)

50명의 인적 구성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조현명, 서명빈 등 탕평파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대거 포진하였음을 볼 수 있다. 영조는 신유대훈 이후 소론을 기용하면서도 노론과 탕평파 등용을 추진하였다. 정만조, 「영조대 정국추이와 탕평책」, 『영조의 국가정책과 정치이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 pp. 48-49. 한편 정지수는 갱진시를 좌목의 형식으로 보고 이들을 제작주체라고 생각하였다. 인적 구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정지수, 앞의 논문, pp. 293-301 참조.

29)

飛龍舊歲 回周甲 靖國弘謨 軫聖情-漢城判尹 柳儼.

30)

玉帶重瞻 丁卯慶 龍袍遥感 丙寅榮-副司直 李喆輔.

31)

始御此宫 功昔盛 重興東土 化今淸-藝文提學 趙觀彬.

32)

지금까지 국왕이 그림의 제작을 직접 지시한 것이 분명한 가장 이른 사례는 영조 36년(1760년)의 『준천계첩』이다; 박정혜, 『18세기 후반의 궁중행사도』 (일지사, 2000), pp. 270-273. 이 병풍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 취지를 통해 볼 때, 어명에 의한 제작으로 『준천계첩』에 선행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3)

〈궁중행사도〉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등록된 작품명이다. 본고에서는 소장처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행사의 의미를 되살려 〈궁중행사도〉를 〈(영조)근정전진하도〉 혹은 〈(영조)경복궁진하도〉 등으로 명칭을 바꿀 것을 제안해본다.

34)

『영조실록』 100권, 영조 38년(1762) 11월 8일 병인; 『영조실록』 100권, 영조 38년(1762) 11월 11일 기사.

35)

영조가 자신의 70세를 기념하며 태조와 숙종의 고사를 언급하는 것은 『御製七旬興懷錄』 (장서각, K4-4981)과 『揄揚盛烈錄』 (규장각, 古5120-25)에서 반복적으로 보인다.

36)

『영조실록』 101권, 영조 39년(1763) 1월 1일 기미. 영조는 근정전에서의 진하례에 앞서 도성 곳곳에서 새해맞이 행사를 하였다. 신하들에게 권농윤음을 내리고, 종묘와 영녕전, 기로소, 육상궁을 배알하였다.

37)

『승정원일기』 1214책, 영조 39년(1763) 1월 1일 기미.

38)

『영조실록』 101권, 영조 39년(1763) 1월 1일 기미.

39)

『國朝續五禮儀』, 卷之二 「親臨頒敎陳賀儀」 『국조오례의』 5 (법제처, 1982), pp. 149-155.

40)

지금까지 진하도로는 정조 7년(1783)의 행사를 그린 〈진하도〉(국립박물관소장)가 가장 이른 예로 알려져 있었다. 유재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陳賀圖〉의 정치적 성격과 의미」, 『동악미술사학』 13 (2012), pp. 181-200.

41)

『國朝續五禮儀 序例』, 〈仁政殿朝賀時排設圖〉 참조.

42)

〈경복궁도〉, 126×68.5cm, 국립민속박물관 소장. 홍현도, 앞의 논문, pp. 59-60.

43)

정연식, 「조선시대 觀天臺와 日影臺의 연혁-창경궁 일영대와 관련하여」, 『韓國文化』 51 (2010), pp. 270-273. 『頤齋亂藁』에 1769년 경복궁에서 간의대와 첨성대를 보았다고 하였는데, 첨성대는 소간의가 놓였던 대로 추측된다. 『漢京識略』에도 간의대가 경회루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44)

『세종실록』 77권, 세종 19년(1437) 4월 15일 갑술.

45)

『이재난고(頤齋亂藁)』(1791)에서는 경회루 부근의 석대를 ‘첨성대’라고 하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는 ‘간의대’라고 지칭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소간의가 사라지고 석대만 남자 그 용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던 듯하다. 이 밖에 월대의 石獸가 자세하다. 이에 대해 유득공의 『春城遊記』에서 石犬이라하며 이에 얽힌 고사를 언급하였다.

46)

『영조실록』 101권, 영조 39년(1763) 1월 1일 기미.

47)

유시영, 「영조대 기로연도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21), pp. 42-56. 『기영각시첩』은 별도의 어명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기로소에서 영조의 어람을 전제하고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8)

1765년 8월 영조의 망팔을 기념하여 영조는 세손을 대동하고 영수각과 기로소를 방문하였다.

49)

이들 유물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박정혜, 「영조의 기로소 행차와 기로소 계첩」, 『靈壽閣頌과 親臨宣醞圖』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8), pp. 30-45; 유시영, 앞의 논문, pp. 57-70; 김양균, 「영조을유년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병의 제작배경과 작가」, 『문화재보존연구』 4 (서울역사박물관, 2007), pp. 44-69; 박정혜, 앞의 논문 (2008), pp. 43-44.

50)

『揄揚盛烈錄』 (규장각, 古5120-25)에서 진하례의 교서는 「御製勤政殿受賀日答致詞敎」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이 책에는 진하례에 앞서 행차한 종묘, 사직, 육상궁 등 사당에 올린 告由文과 대소신료와 기로신 그리고 백성에게 내리는 교서(「御製敎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도 포함되었다.

51)

물론 기로소 외 다른 집단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1765년 수작연은 기로소 외에 금위영에서도 계병으로 제작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현당수작도기〉는 이 해의 수작연을 그린 병풍에 대한 기문이다. 이처럼 영조대에는 같은 행사를 여러 집단에서 발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박정혜, 『궁중기록화 연구』 (일지사, 2001), p. 77.

52)

영조의 친잠례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 참조. 윤정, 앞의 논문, pp. 212-216; 임혜련, 「조선 영조대 親蠶禮 시행과 의의」, 『장서각』 25 (2011), pp. 112-135.

53)

『영조실록』 109권, 영조 43년(1765) 12월 12일 임신.

54)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1407) 9월 20일 경오.

55)

『영조실록』 109권, 영조 43년(1765) 12월 12일 임신.

56)

『태종실록』에는 12월에 편전에서 술자리를 열었다는 기록이 없다. 대신 덕수궁에서 태종의 생신인 10월 11일에 헌수하였고, 11월 21일에 향연을 베풀었다.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1765) 10월 11일 신묘;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1765) 11월 21일 신미.

57)

『영조실록』 109권, 영조 43년(1765) 11월 21일 신해.

58)

『영조실록』 109권, 영조 43년(1765) 12월 13일 계유.

59)

의령남씨 가문의 화첩은 홍익대학교박물관의 〈의령남씨가전화첩〉(이하 홍대본), 고려대학교박물관의 〈남씨전가경완〉(이하 고대본), 국립고궁박물관의 〈경이물훼〉(이하 고궁본) 등이 알려져 있다. 고대본은 영조와 태조의 고사를 포함하고 있지 않아서, 18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을 19세기에 이모한 것으로 보인다. 홍대본은 18세기 영조의 진작례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보이며, 고궁본은 홍대본의 19세기 말 이모본으로 추정된다. 이본과 관련해서는 유미나, 앞의 논문, 120-126; 박정혜, 앞의 책 (2022), pp. 455-463. 다만 유미나는 홍대본의 제작 시기를 진작례와 남태회의 몰년 사이인 1767년에서 1769년으로 보았고, 박정혜는 남태회의 몰년과 서문을 옮겨 쓴 남은로의 몰년 사이인 1770에서 1786년 사이로 보았다.

60)

드물게 술이나 찬을 올리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숙종연간의 〈진연도첩〉(1706년경, 국립중앙도서관)의 경우이다. 옆으로 선 신하가 무엇인가를 전해 올리는데, 정확히 헌수 장면이라 보기는 어렵다.

61)

『(국역)국조오례의』 5 (법제처), pp. 159-169; 『續五禮儀』 권 2, 進宴儀.

62)

“進爵時 上降龍床地坐”.

63)

〈舊闕進爵圖序〉. 번역과 원문은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조선왕조 행사기록화』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 연구실, 2011), pp. 44-45 참조.

64)

『태조실록』 7권, 태조 4년(1395) 3월 4일 정유; 『태조실록』 8권, 태조 4년(1395) 7월 11일 임인.

65)

남재의 문집에는 태조가 건원릉의 자리를 정한 후 민전을 하사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19세기 이유원의 『임하필기』 ‘망우리조’에도 수록되었다. 유미나, 앞의 논문, p. 114.

66)

서문은 남태회가 작성하고 조카 남은로가 글씨를 썼을 것으로 추정한다. 위의 논문, p. 120.

67)

이경구, 「1740년(영조 16) 이후 영조의 정치 운영」, 『역사와 현실』 53 (2004), pp. 23-44.

References

1. 『국조속오례의』.
2. 『문종실록』.
3. 『세종실록』.
4. 『속오례의』.
5. 『승정원일기』.
6. 『어제칠순흥회록』.
7. 『영조실록』.
8. 『유양성렬록』.
9. 『이재난고』.
10. 『춘성유기』.
11. 『태조실록』.
12. 『태종실록』.
13.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조선왕조 행사기록화』,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 2011.
14. 『국조오례의』 5, 법제처, 1982.
15. 김양균, 「영조을유년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병의 제작배경과 작가」, 『문화재보존연구』 4, 서울역사박물관, 2007.
16. 박정혜, 「조선시대 의령남씨 가전화첩」, 『미술사연구』 2,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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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정선, 〈경복궁도〉 Chŏng Sŏn, Illustration of Kyŏngbokkung Palace, Mid-18th century, Color on Silk, 16.7×18.1cm, Korea University Museum (Ch'oe Wansu, Kyŏmjae Chŏngsŏn chin'gyŏng sansuhwa, p. 203)

Fig. 2.

〈비변사계회도(부분)〉 Gye Gathering of the Border Defense Council (detail), 1550, 49.5×61cm, Seoul Museum of History (Seoul Museum of History, https://museum.seoul.go.kr)

Fig. 3.

〈친림근정전정시도〉 Illustrations of the King’s Visit to Kŭnjŏngjŏn Hall, 1747, Each Panel 200.7×73.3cm, Seoul Museum of History (Seoul Museum of History, https://museum.seoul.go.kr)

Fig. 4.

Fig. 3의 1폭, First Panel of Fig. 3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5.

〈궁중행사도〉 Illustration of a Royal Occasion, 18th century, 137×54.8cm, Seoul Museum of History (Seoul Museum of History, https://museum.seoul.go.kr)

Fig. 6.

Fig. 5의 부분, Details of Fig. 5

Fig. 7.

Fig. 5의 부분, Details of Fig. 5

Fig. 8.

〈경복궁도(경회루 부분)〉 Illustration of Kyŏngbokkung Palace (detail of Kyŏnghoeru Pav ilion), 65.5×51.2cm,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National Folk Museum of Korea, https://www.nfm.go.kr)

Fig. 9.

〈영묘조구궐진작도〉, 《의령남씨가전화첩》 “An Intimate Royal Gathering Hosted by King Yŏngjo at Kyŏngbokkung Palace,” from Ŭiryŏng Namssi kajŏn hwach'ŏp [Album of Paintings by the Ŭiryŏng Namssi Family], 1767, Color on Paper, 42.7×59.4 cm, Hongik University Museum (Hongik University Museum, Chayŏn kŭrigo sam: Chosŏn sidae ŭi hoehwa, pp. 184-185)

Fig. 10.

〈명묘조서총대시예도〉, 《의령남씨가전화첩》, “A Celebration at the Royal Archery Range Hosted by King Myŏng-jong,” from Ŭiryŏng Namssi kajŏn hwach'ŏp [Album of Paintings by the Ŭiryŏng Namssi Family], Color on Paper, 42.5×57.3cm, Hongik University Museum (Hongik University Museum, Chayŏn kŭrigo sam: Chosŏn sidae ŭi hoehwa, pp. 176-177)

Fig. 11.

〈중묘조서연관사연도〉, 《의령남씨가전화첩》, “Royal Banquet Hosted by King Chungjong in Honor of the Prince’s Teachers,” from Uiryŏng Namssi kajŏn hwach'ŏp [Album of Paintings by the Ŭiryŏng Namssi Family], 1535, Color on Paper, 42.6×57.4cm, Hongik University Museum (Hongik University Museum, Chayŏn kŭrigo sam: Chosŏn sidae ŭi hoehwa, pp. 174-175)

Fig. 12.

Fig. 9의 진작 의례 부분, Details of Fig. 9

Fig. 13.

〈태조망우령가행도〉, 《경이물훼》, “An Excursion of the Royal Burial Plot by King T'aejo Yi Sŏng-gye and His Subjects,” from Kyŏngimurhwe, Late 19th century,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