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23; 2024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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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근정전정시도〉에 대한 정보와 선행연구로는 다음 참조. 서울역사박물관, 『한양의 상징대로, 서울의 육조거리』 (서울역사박물관, 202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영조대왕자료집』 6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3), pp. 24-25; 윤진영, 「科擧관련 繪畵의 현황과 특징」, 『대동한문학』 40 (2014), pp. 229-269; 정지수, 「영조대《親臨光化門內勤政殿庭試時圖屛》연구」, 『한국문화』 106 (2024), pp. 285-314.
3) 서울역사박물관 소장, 〈궁중행사도〉는 〈한양의 상징대로, 육조거리〉(서울역사박물관, 2021.11.16~2022.3.27) 전시를 통해 최근 공개되었다. 전시 도록(서울역사박물관, 앞의 책, p. 29)에서는 이 그림을 18세기에 그린 경복궁의 궁중행사도라고 소개하였다.
4) 의령남씨 가문의 화첩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 참조. 박정혜, 「조선시대 의령남씨 가전화첩」, 『미술사연구』 2 (1988), pp. 23-50; 동저, 『조선시대 사가기록화, 옛 그림에 담긴 조선 양반가의 특별한 순간들』 (혜화, 2022), pp. 453-463; 유미나, 「조선시대 궁중행사의 회화적 재현과 전승: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경이물훼》 화첩의 분석」, 『국립문화재연구소 소장 조선왕조 행사기록화』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pp. 112-127.
7) 〈기성입직사주도〉에 대해서는 이태호, 「예안 김씨 가전 계회도 석점을 중심으로 본 16세기의 계회산수」, 『만남과 헤어짐의 미학-조선시대 계회도와 전별시』 (학고재, 2000), pp. 108-110.
8) 〈비변사계회도〉의 실경 재현에 대해서는 윤진영, 「기록화로 보는 한양」, 『박물관 유물로 보는 서울Ⅲ-서울역사박물관 소장 보물들』 (서울역사박물관, 2020), pp. 3-15.
9) 金時敏, 「同堂伯, 入故宮, 煮艾, 道長追至, 抽老杜韻共占」, “新春物色舊池臺, 兄弟相羊有酒杯. 滿苑滄茫芳草意, 深林早晩雜花開, 樓墟古柱山俱立, 郭外孤雲鳥幷因, 採艾作羹炊白飯, 詩翁更自北溪來” 최완수, 앞의 책, pp. 161-162 재인용.
11) 『영조실록』 21권, 영조 5년(1729) 3월 27일 신미; 『영조실록』 40권, 영조 11년(1735) 5월 25일 갑자. 화평옹주의 제택 사업에서도 경복궁의 소나무를 베자 문제가 생겼다. 옛터의 나무는 바람에 쓰러지거나 말라서 떨어진 경우에만 가져다 사용할 수 있었다.
17) 영조대 궁중행사가 가장 많이 행해진 곳은 경희궁이다. 재위 초반기에는 창덕궁과 창경전에서 대비를 위한 진연을 열기도 하고, 창덕궁 편전에서 친림정사를 행하기도 하였다. 영조 36년(1760)에 경희궁에 移御하면서 경희궁은 영조의 거주 공간이자 의례 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이처럼 창덕궁과 창경전이 영조 초기, 경희궁이 영조 후기에 거주와 정무, 연회를 위한 공간이었다면 경복궁은 주로 영조 후기에 오직 특별한 행사를 위해 채택된 공간이었다. 특히 선왕과 특별한 연결 고리를 만들 수 있는 경우에 선택적으로 사용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영조의 경희궁 이용에 대해서는 다음 논문 참조. 윤정, 「영조의 慶熙宮 改號와 移御의 정치사적 의미-恩悼世子 賜死와의 상관성에 대한분석」, 『서울학연구』 34 (2009), pp. 31-63; 장정미, 「英祖의 慶熙宮 移御와 王室 儀禮의 공간적 의미」 (서울시립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4); 이민아, 「영조대 이후 궁궐 내 세자 공간 운용과 변화의 정치적 의미」, 『朝鮮時代史學報』 103 (2022), pp. 437-471.
18) 『영조실록』 117권, 영조 47년(1771) 7월 12일 경술; 『영조실록』 119권, 영조 48년(1772) 7월 21일 갑인; 『영조실록』 121권, 영조 49년(1773) 11월 20일 을해.
19) “동국여지비고 제1권”, 한국고전종합DB, https://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B001A_0030_020_0010.
20) 永濟橋는 세종대 명명하였으나 조선 후기에는 잊혀졌다. 영제교 양 옆의 石獸는 조선 후기에 남아있었다. 유득공의 『春城遊記』에서는 이를 天鹿이라고 기록하였으며, 『(경복궁) 영건일기』에는 ‘팔하석’으로 기록되어 있다. 홍현도, 「「경복궁도」 제작 시기와 배경 연구」, 『건축역사연구』 32 (2023), p. 59.
21) ‘문과전시의’에 대해서는 『國朝五禮儀』 권3, 文科殿試儀; 『국조오례의』 v.2 (법제처, 1981), pp. 238-243; 『문종실록』 권4, 문종 즉위년 10월 6일 丙子 참조. 정지수는 이 차일을 의례의 실무를 담당하던 典儀, 通贊, 奉禮郎의 자리라고 보았다. 정지수, 앞의 논문, p. 306. 그러나 기록화에서 전의, 통찬, 봉례랑 등과 같이 단지 의례의 집행을 돕는 집사자들의 자리는 중요하게 표시되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편 정전 양쪽에는 국왕의 시제를 적은 시제판이 놓이기도 한다. 어좌, 어막차와 같은 푸른색 차일로 미루어 국왕의 시제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있다.
25) 영조의 ‘중흥’에 대한 인식은 다음 연구 참조. 윤정, 「英祖의 ‘中興’ 인식과 ‘祛黨’의 모색」, 『역사와 실학』 48 (2012), pp. 73-114. 영조는 탕평을 직접 내세우기보다 선왕의 사적과 자신을 연결하면서 정당성을 확보해나갔다.
28) 50명의 인적 구성에 대해서는 더 연구가 필요하지만 조현명, 서명빈 등 탕평파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이 대거 포진하였음을 볼 수 있다. 영조는 신유대훈 이후 소론을 기용하면서도 노론과 탕평파 등용을 추진하였다. 정만조, 「영조대 정국추이와 탕평책」, 『영조의 국가정책과 정치이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 pp. 48-49. 한편 정지수는 갱진시를 좌목의 형식으로 보고 이들을 제작주체라고 생각하였다. 인적 구성의 성격에 대해서는 정지수, 앞의 논문, pp. 293-301 참조.
32) 지금까지 국왕이 그림의 제작을 직접 지시한 것이 분명한 가장 이른 사례는 영조 36년(1760년)의 『준천계첩』이다; 박정혜, 『18세기 후반의 궁중행사도』 (일지사, 2000), pp. 270-273. 이 병풍은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그 취지를 통해 볼 때, 어명에 의한 제작으로 『준천계첩』에 선행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33) 〈궁중행사도〉는 현재 서울역사박물관에 등록된 작품명이다. 본고에서는 소장처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나, 행사의 의미를 되살려 〈궁중행사도〉를 〈(영조)근정전진하도〉 혹은 〈(영조)경복궁진하도〉 등으로 명칭을 바꿀 것을 제안해본다.
35) 영조가 자신의 70세를 기념하며 태조와 숙종의 고사를 언급하는 것은 『御製七旬興懷錄』 (장서각, K4-4981)과 『揄揚盛烈錄』 (규장각, 古5120-25)에서 반복적으로 보인다.
36) 『영조실록』 101권, 영조 39년(1763) 1월 1일 기미. 영조는 근정전에서의 진하례에 앞서 도성 곳곳에서 새해맞이 행사를 하였다. 신하들에게 권농윤음을 내리고, 종묘와 영녕전, 기로소, 육상궁을 배알하였다.
40) 지금까지 진하도로는 정조 7년(1783)의 행사를 그린 〈진하도〉(국립박물관소장)가 가장 이른 예로 알려져 있었다. 유재빈,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陳賀圖〉의 정치적 성격과 의미」, 『동악미술사학』 13 (2012), pp. 181-200.
43) 정연식, 「조선시대 觀天臺와 日影臺의 연혁-창경궁 일영대와 관련하여」, 『韓國文化』 51 (2010), pp. 270-273. 『頤齋亂藁』에 1769년 경복궁에서 간의대와 첨성대를 보았다고 하였는데, 첨성대는 소간의가 놓였던 대로 추측된다. 『漢京識略』에도 간의대가 경회루 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45) 『이재난고(頤齋亂藁)』(1791)에서는 경회루 부근의 석대를 ‘첨성대’라고 하고, 『한경지략(漢京識略)』에서는 ‘간의대’라고 지칭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소간의가 사라지고 석대만 남자 그 용도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였던 듯하다. 이 밖에 월대의 石獸가 자세하다. 이에 대해 유득공의 『春城遊記』에서 石犬이라하며 이에 얽힌 고사를 언급하였다.
47) 유시영, 「영조대 기로연도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21), pp. 42-56. 『기영각시첩』은 별도의 어명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나 기로소에서 영조의 어람을 전제하고 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49) 이들 유물에 대해서는 다음 참조. 박정혜, 「영조의 기로소 행차와 기로소 계첩」, 『靈壽閣頌과 親臨宣醞圖』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8), pp. 30-45; 유시영, 앞의 논문, pp. 57-70; 김양균, 「영조을유년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병의 제작배경과 작가」, 『문화재보존연구』 4 (서울역사박물관, 2007), pp. 44-69; 박정혜, 앞의 논문 (2008), pp. 43-44.
50) 『揄揚盛烈錄』 (규장각, 古5120-25)에서 진하례의 교서는 「御製勤政殿受賀日答致詞敎」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이 책에는 진하례에 앞서 행차한 종묘, 사직, 육상궁 등 사당에 올린 告由文과 대소신료와 기로신 그리고 백성에게 내리는 교서(「御製敎中外大小臣僚耆老軍民閑良人等書」)도 포함되었다.
51) 물론 기로소 외 다른 집단에 의해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1765년 수작연은 기로소 외에 금위영에서도 계병으로 제작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경현당수작도기〉는 이 해의 수작연을 그린 병풍에 대한 기문이다. 이처럼 영조대에는 같은 행사를 여러 집단에서 발의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박정혜, 『궁중기록화 연구』 (일지사, 2001), p. 77.
52) 영조의 친잠례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 참조. 윤정, 앞의 논문, pp. 212-216; 임혜련, 「조선 영조대 親蠶禮 시행과 의의」, 『장서각』 25 (2011), pp. 112-135.
56) 『태종실록』에는 12월에 편전에서 술자리를 열었다는 기록이 없다. 대신 덕수궁에서 태종의 생신인 10월 11일에 헌수하였고, 11월 21일에 향연을 베풀었다.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1765) 10월 11일 신묘; 『태종실록』 14권, 태종 7년(1765) 11월 21일 신미.
59) 의령남씨 가문의 화첩은 홍익대학교박물관의 〈의령남씨가전화첩〉(이하 홍대본), 고려대학교박물관의 〈남씨전가경완〉(이하 고대본), 국립고궁박물관의 〈경이물훼〉(이하 고궁본) 등이 알려져 있다. 고대본은 영조와 태조의 고사를 포함하고 있지 않아서, 18세기 이전에 제작된 것을 19세기에 이모한 것으로 보인다. 홍대본은 18세기 영조의 진작례와 가장 가까운 시기에 제작되었다고 보이며, 고궁본은 홍대본의 19세기 말 이모본으로 추정된다. 이본과 관련해서는 유미나, 앞의 논문, 120-126; 박정혜, 앞의 책 (2022), pp. 455-463. 다만 유미나는 홍대본의 제작 시기를 진작례와 남태회의 몰년 사이인 1767년에서 1769년으로 보았고, 박정혜는 남태회의 몰년과 서문을 옮겨 쓴 남은로의 몰년 사이인 1770에서 1786년 사이로 보았다.
60) 드물게 술이나 찬을 올리는 모습이 보이기도 한다. 숙종연간의 〈진연도첩〉(1706년경, 국립중앙도서관)의 경우이다. 옆으로 선 신하가 무엇인가를 전해 올리는데, 정확히 헌수 장면이라 보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