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석제 불상의 조성과 이운을 통해 본 경상 지역 조선 후기 불상 조성의 일면

Zeolite Stone Buddha Sculptures (pulsŏkche) in the Kyŏngsang Province during the Late Chosŏn Dynasty: Production and Transportation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4;323():69-95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September 30
doi : https://doi.org/10.31065/kjah.323.202409.003
*Cultural Affairs Team Leader,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유대호*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 문화재팀장
Received 2024 April 30; Revised 2024 June 3; Accepted 2024 September 11.

Abstract

조선 후기 불석제 불상이 유행하면서, 사찰과 조각승들은 각각 새로운 양상에 직면하게 되었다. 이는 재료의 운반이 어렵고, 산지가 한정되었던 불석의 특징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기존의 목조, 소조불이 사찰이라는 한 장소에서 조성된 것과 대조적으로, 불석제 불상의 경우 제작처와 봉안처 간에 공간적인 거리가 생겨나게 되었다.

불석제 불상의 조성 장소를 지칭하는 ‘佛像所’, ‘造像處’ 등의 용어는 불석 산지 인근에 불상을 조성하는 장소가 존재하였음을 함의한다. 이로 미루어, 불석제 불상의 경우 불상의 조각까지를 경주 인근의 공방에서 완료하고, 이후 봉안처로 이운하여 점안 의식을 행하고 불전에 봉안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이러한 공간적 간극이 발생함에 따라, 불석제 불상의 조성에서는 ‘증명’의 역할이 상당부분 한정되는 반면, ‘화원’의 역할은 원재료의 수급부터 조각, 불복장의 납입까지 확대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또, 목조불의 조각승이 불상뿐 아니라 대좌, 불패 등의 제작에 전체적으로 관여한 반면, 불석 조각승의 경우는 오직 불상의 조성에만 집중하는 경향 역시 확인된다.

Trans Abstract

The rising popularity of zeolite stone Buddhist sculptures (pulsŏkche) during the late Chosŏn Dynasty meant that temples and monk-artisans encountered new challenges. The material properties of stone, difficult to transport and limited by regional availability, posed logistical difficulties. Unlike traditional materials like wood or clay, which artisans could work with directly at the temple, stone Buddha statues often required production at a separate location from their enshrinement site. Dedicated workshops, referred to as pulsangso 佛像所 (Buddha statue production site) and chosangch'ŏ 造像處 (statue manufacturing place), were established near stone quarries for the purpose of producing these statues. This indicates that artisans likely completed the sculpting process in these workshops, particularly in ones near Kyŏngju, before transporting the sculptures to their final destinations for eye-opening ceremonies and installation in the main hall. This separation between production and enshrinement reshaped the roles and task delegation among monk-artisan groups. The responsibilities of the chŭngmyŏng (證明, the monk overseeing Buddhist projects and the ritual of depositing votive objects) became increasingly limited in stone Buddha production. On the other hand, monks involved in the image-making process took on a broader range of tasks, from procuring the raw material to carving, to depositing offerings inside the statues. Unlike those who primarily worked with wood and managed the entire production of Buddha images, pedestals, and votive plaques, the monk-artisans working with zeolite stone focused exclusively on the creation of the stone images.

Ⅰ. 머리말

불석(沸石/佛石, Zeolite)이라는 재료는 규산염 광물의 일종으로 흡습성이 강하여 수분을 공급하면 경도가 약해지며, 마른 후에는 단단해지는 특징이 있다. 불석은 대체로 조선 초기부터 불상의 재료로 사용되어 온 것으로 생각되나 불석제 불상이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은 임진왜란 이후이며, 특히 불석의 산지인 경상 지역을 중심으로 불석제 불상의 조성은 크게 유행하였다. 불석이라는 재료의 등장과 확산은 17세기 전반 목조, 소조상을 주로 조성하던 다수의 조각승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특히, 17세기 후반에는 승호, 경옥 등 불석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조각승이 등장하였고 이는 조선 후기 불교조각사의 주목할만한 특징 중 하나이다.1

불석이라는 새로운 재료의 등장으로 인해 당대의 불상 조성에 관여한 수요 계층, 그리고 공급 계층은 각각 새로운 양상에 직면하게 되는데, 이는 불석이라는 재료가 가지는 두 가지 큰 특징에서 기인한다. 첫 번째는, 불석의 산지가 현재의 경주 인근으로 한정되어 있다는 점이다.2 두 번째는, 재료의 무게가 흙, 나무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겁다는 점이다. 불석의 경우 원재료의 산지가 한정적이며 무게로 인해 원거리 운반에 상대적 제한이 있어 불상의 제작 및 유통에 있어 차별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는 불상의 봉안처인 사찰 주변에서 원재료의 수급과 가공이 가능한 목조불이나 소조불과는 구별되는 별도의 제작 공정이 필요했음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사찰 경내에서 상을 완성하는 목조, 소조불과 달리 불상의 제작처와 봉안처 간에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거리가 생겨난 것 역시 전술한 불석제 불상의 재료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본고에서는 불석이라는 재료의 특징들에 기인하여 불석제 불상의 제작과 이운, 봉안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기존의 불상들과 차별점을 가지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나아가 제작 장소와 봉안 장소의 공간적 분리로 인해 불석제 불상의 봉안 절차 등이 기존의 목조, 소조불과 차이를 가지게 되는 측면에 대해서도 고찰해 볼 것이다. 이를 위해 먼저 불석제 불상의 전반적인 제작 및 유통 과정에 대하여 선행 연구와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추정해보고, 다음으로 불석제 불상이 가진 양식적 특징과 함께 발원문에 대한 분석, 혹은 불석제 불상의 봉안에 수반되는 대좌의 제작 등을 전반적으로 살펴 발원자와 제작자의 역할이 변화하는 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3

Ⅱ. 경상 지역 불석제 불상의 제작과 유통 과정

여러 선행 연구에서 밝혀진 바와 같이 불석의 수급처는 경주 인근일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불석제 불상 중 가장 이른 시기의 예로는 1648년 懶欽이 조성한 양산 원효암 석조불좌상, 1649년 英賾이 조성한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불좌상 등이 있다. 나흠과 영색은 모두 청헌, 청허 등 목조 조각승의 아래에서 수련기를 걸쳤다는 공통점이 있는 점도 주목되며,4 불석제 불상 조성 유행의 시작이 청헌 계로부터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5 특히,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좌상의 발원문에서는 해당 불상을 현재의 포항 오천읍인 於川 叱谷에서 조성하여 배를 통해 이운하였으며, 신흥사로 모셔 복장물을 납입하고 불사를 회향하였음을 밝히고 있다.6 이는 불석제 불상의 경우 제작 초기부터 불석의 산지에서 불상의 조성을 완료한 후 이운하는 공정이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17세기 후반에 이르면 목조와 불석제 불상의 제작을 병행하는 조각승 뿐 아니라, 불석제 불상의 제작에 특화된 불석 전문 조각승이 나타나는데, 이와 관련한 대표적인 기록 자료들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① “…嘆在天仰悲願稽首待有欲成如子憶母如渴者思水就地造像處慶尙左道慶州東嶺山乃谷至造成于佛影寺安邀…”7

② “…此時壬戌之仲春自樑山郡地至慶州東面川洞造石像靈山會三尊訖功於夏三之初 因而點眼安于本郡西嶺鷲栖山新興寺…”8

③ “…適有厥寺百務雖完所乏者惟十王等像也於是師子其發大願時値黑狗之歲孟夏自本縣以至慶尙道慶州東面川洞佛像所敬請良工地藏道明無毒十王所率幷爲二十一尊 不數月間畢勣而因以點眼即爲西浮大洋水路載運于本縣玆山是寺奉安焉…”9

④ “…佛像造成塗金事蹟記 慶尙右道龜城南嶺飛鳳山鳳谷寺法堂佛像三尊獻金記文 康熙九年庚戌孟夏初吉 化主戒一敬請良工三應與同志七八人詣慶州佛靈山削玉素像奉安于本寺…”10

위의 기록들에 따르면, 불상의 제작지는 경주 동령 산내곡, 경주 동면 천동 등으로 기록되며, 원재료인 불석의 산지는 불령산 등으로 적혀 있다. 선행 연구에 따르면 해당 인용문들에서 지칭되는 불석의 산지는 현재의 기림사 인근 지역으로 추정된다.11 불석제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들은 함령산, 불석산 등으로 칭해지는 불석의 산지에서 원재료인 불석을 채취하였으며, 불석의 산지에서 멀지 않은 인근 지역에서 이를 가공하여 불상을 조상한 것으로 생각된다. 즉, 불석제 불상의 경우 원재료의 수급, 그리고 원재료를 가공하여 불상을 조성하기까지의 과정을 산지인 경주 인근에서 완료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불석제 불상의 조성과 관련하여 특히 주목되는 사실은, 위 기륵들에서 佛像所, 造像處 등 불상을 제작한 일종의 공방이 있었음을 함의하는 용어들이 나타난다는 점이다. 먼저 불영사 불상의 발원문(①)에는 경주 동면 산내곡에 있는 ‘조상처’에서 불상의 조성을 완료하고, 이를 불영사로 이운하여 맞이하였다고 기록하였다. 또, 〈선운사 참당암 명부전 불상〉(Fig. 1)의 원문(③)에서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을 비롯한 21존의 상을 경주 동면 천동의 ‘불상소’에서 조성하였다고 적시하고 있다(Fig. 2). 양산 신흥사 불상 발원문(②)의 경우에는 조상처, 불상소 등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없지만, 경주 동면 천동에 도착하여 석조영산회삼존상을 조성하였다고 명확히 밝히고 있어 마찬가지로 불상의 조성은 경주 인근에서 행해졌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기록들은 불석의 산지인 경주 동면 인근 등에 불석제 불상의 제작에 특화된 장소가 존재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불석제 불상의 조각승들은 조상처, 불상소 등으로 지칭되는 이 장소에서 원재료의 채취와 가공, 불상의 제작까지 공정을 진행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듯 산지 인근에 일종의 불상 제작 공방이 위치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전술하였듯 원재료인 불석의 무게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운 과정에서 불석의 부피와 무게를 최대한 감소시키기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조각까지를 완료한 후 이운하는 방식을 택한 것으로 짐작된다. 발원문에 불상의 조성 장소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적시하지 않은 다른 경상 지역 불석제 상들의 경우에도 일반적으로는 위와 같이 불상의 제작까지 경주 인근에서 완료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Fig. 1.

승호,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 Sŭngho, Seated Stone Kshitigarbha at Sŏnunsa Temple, Ch’amdangam, Kochang, 1684, Chosŏn, H. 79cm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2.

〈고창 선운사 참당암 명부 존상 발원문 세부〉 Detail of Votive Inscription of Seated Stone Kshitigarbha at Sŏnunsa Temple, Ch’amdangam, Kochang, 1684, Chosŏn (Photograph by Jeong Eun Woo)

마지막으로, 불상을 단순한 조각품이 아닌 예경의 대상으로 전환하기 위한 점안 의식의 경우, 기록에 따르면 불상을 이운한 후 봉안처에서 행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는 불상을 여법한 봉안 공간 위에 안치한 후 최후의 의례로 진행하는 점안 의식의 고유한 기능 때문일 것이다. 양산 신흥사 발원문(②)이나 선운사 참당암 발원문(③)은 모두 경주 동면의 불상소 등에서 불상의 조성을 완료한 후 이를 봉안처인 사찰로 이운하여 점안을 행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특히 참당암과 같이 지리적 거리가 먼 경우에는 해로를 통해 이운하였음을 더불어 밝히고 있기도 하다.12 즉, 불석제 불상은 재료의 수급과 불상의 제작까지는 경주 인근에서 완료하고, 이후 육로 혹은 해로를 통해 완성된 불상을 봉안처로 이운하며 봉안처에 모시기 전 점안 의식을 행함으로서 불상의 조성 불사를 회향하게 된다.

그런데 불석제 불상의 이러한 조성 과정은 목조불, 혹은 소조불의 조성 및 봉안 과정과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바로 공급처라 할 수 있는 조각승의 공방과 수요처라 칭할 수 있는 사찰 사이에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간극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목조불이나 소조불을 조성할 경우에는 봉안처인 사찰의 경내에 일종의 임시 제작소를 설치하며, 원재료라 할 수 있는 나무나 흙의 가공, 때로는 재료의 수급까지도 봉안처 인근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혹 원재료를 외부에서 별도로 가져올 경우에도 재료의 가공과 불상의 제작 공정은 봉안처인 사찰의 경내에서 진행된다. 또한 불상의 봉안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불복장의 봉안과 관련 의례의 설행, 그리고 마지막으로 점안 의식 역시도 경내에서 진행되어, 재료의 수급부터 성상의 봉안까지가 대체로 사찰이라는 하나의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관련하여 목조 조각을 주로 제작했던 인계가 불석을 재료로 하여 상을 조성한 경우, 불석제 불상임에도 목조불의 제작 공정을 따르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인계는 전라 지역에서 주로 활동하였던 조각승 응혜의 제자로 주로 응혜, 계찬 등이 조성한 목조불의 조성 불사에 보조화승으로 참여한 조각승이다. 인계는 1689년 수조각승으로서 〈여수 흥국사의 53불〉(Fig. 3)을 조성하면서 기존과 달리 불석을 재료로 택하였는데, 이는 아마도 53불이라는 다수의 불상을 조성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을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해당 상의 발원문에는 良工을 청하고 美石을 운반하여 상을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원재료인 불석 자체를 사찰로 옮겨왔음을 알 수 있다.13 또한, 인계를 지칭할 때에도 畵員이라는 일반적 명칭 대신 鍊石畵工이라 칭하여 사찰 경내에서 불석을 가공하여 상을 조성한 조각승임을 정확하게 밝히고 있다(Fig. 4). 이처럼 재료 자체를 봉안처로 가져와 불상을 만드는 것은 목조불의 제작 공정에 해당하며, 인계의 경우 아마도 익숙한 목조불의 제작 공정에 맞추어 원재료 자체를 옮겨왔을 가능성이 높다. 혹은 인계와 같이 목조불과 불석제 불상의 조성을 병행한 조각승들은 불석만을 다루는 전문 조각승들과 달리 경주 인근에 별도의 제작 공방이 존재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마찬가지로, 승일, 색난, 충옥, 마일 등 17세기 중후반부터 18세기 전반까지 목조각과 불석 조각을 병행한 조각승들 역시 유사한 방식으로 사찰 경내에 제작소를 설치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불석의 산지 근처에 일종의 공방을 설치하고 보다 전문적으로 불상을 제작한 승호, 경옥 등 경상 지역 불석 전문 조각승들과의 차이점으로 이해된다.

Fig. 3.

인계, 〈여수 흥국사 석조여래좌상〉 In’gye, Seated Stone Buddha at Hŭngguksa Temple, Yŏsu, 1689, Chosŏn, H. 41.8cm (Korea Heritage Service and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Jeolla namdo 2, p. 23)

Fig. 4.

〈여수 흥국사 석조여래좌상 발원문〉 Votive Inscription of Seated Stone Buddha at Hŭngguksa Temple, Yŏsu, 1689,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정리하면, 불상을 조성할 때에는 원재료의 수급과 가공, 불상의 조성, 마지막으로 불복장 및 점안 의식을 통한 예경 대상으로서의 전환이라는 일련의 과정을 거친다. 그리고 목조불 혹은 소조불을 조성할 경우의 불사는 불상을 봉안할 사찰로 조각승을 청해 원재료의 수급부터 점안 의식까지를 완료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반면, 불석제 불상의 경우 불석의 전술한 특징으로 인해 제작 공정에 차이가 발생한다. 즉, 원재료의 수급부터 불상의 조각까지를 경주 인근에서 완료하고, 이후 사찰로 이운하여 전각에 봉안하고 점안 의식을 행함으로서 불사를 회향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불석제 불상의 경우 불상소, 조상처 등으로 지칭되는 공급처와, 수요 계층이자 불상의 최종 봉안처인 사찰이 각각 분리되는 양상이 발생한다.

Ⅲ. 유통 과정의 차이에서 비롯한 불석제 불상의 특징

1. ‘증명’과 ‘화원’의 역할

목조, 소조불과 달리 불석제 불상의 제작 장소가 사찰과 멀리 떨어지게 됨으로 인해, 불석제 불상의 발원문에서는 참여자, 후원자의 역할이 미묘하게 변화하는 양상이 감지된다. 그 중에서도 흥미로운 것은 ‘證明’과 ‘畫員’의 역할과 관련한 부분이다.

주지하듯, 불상의 발원문에 등장하는 참여자들은 크게 후원 활동에 동참한 시주자를 나열한 施主秩과 불사의 기획 및 진행자들을 기록한 緣化秩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중에서 ‘證明’ 소임의 경우, 말 그대로 해당 불사가 불교적인 교리와 법식에 알맞게 진행되었음을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러한 ‘증명’ 소임의 상징성과 중요성 때문에, ‘증명’의 경우 연화질의 맨 앞부분에 기록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한 ‘증명’의 소임에는 문중, 사찰 혹은 불사 참여자 중의 최고 어른에 해당하는 스님이 상징적으로 자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는 ‘증명’이라는 소임 자체가 佛菩薩을 대리하여 불사의 여법함을 상징하고 불상의 종교적 성상으로서의 역할을 확인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때문에 ‘증명’의 소임을 맡은 스님들은 상황에 따라 불상을 조성하기 위한 기획부터 불상의 제작 전반에 이르기까지를 주도하는 권한을 가질 수 있다. 특히 17세기 후반에 영호남에서 각각 활약한 대표적 조각승인 단응과 색난의 경우 증명 소임을 맡은 스님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으며, 이들이 맡은 불사는 거의 ‘증명’과 ‘화원’의 공동 기획에 가까울 정도로 치밀한 관여와 상호 소통 하에 진행되었다. 예를 들어 조각승 단응의 불사에는 대표적으로 소영 신경과 그의 문인으로 추정되는 종현이 ‘증명’을 맡았음이 잘 알려져 있다.14 소영 신경은 각각의 불사에 대하여 자신의 수행관, 불교관에 입각하여 적극적으로 도감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이해된다. 유명한 용문사와 대승사의 〈목각아미타여래설법상〉에는 단순한 정토왕생을 넘어 念佛禪이라는 소영 신경의 수행관이 반영되어 있고, 그것이 단응과의 협동 작업을 통해 조각상으로 화현하였던 것으로 이해된다(Fig. 5).15 즉, 단응의 불사에서 소영 신경은 불사 전체의 기획자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였으며, 목각아미타구품회도, 소위 목각탱의 경우 소영 신경과 단응이 협업하여 창안한 새로운 조각의 한 유형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Fig. 5.

단응,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 설법상〉 Tanŭng, Wooden Amitabha Buddha Altarpiece at Taesŭngsa Temple, Mun’gyŏng, 1675, Chosŏn, H. 347cm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heritage.go.kr/)

동 시기 활약했던 색난이나 색난 유파의 경우도 벽암 문중과의 긴밀한 유대 관계 하에 각종 불사를 진행하였음이 잘 알려져 있다. 화엄사 각황전에 봉안된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Fig. 6)은 벽암 문중에서 주창해 온 화엄 신앙과의 깊은 맥락 하에서 의도적으로 선택된 도상의 사례이기도 하다. 화엄사 삼불사보살상의 복장 내부에서 발견된 기록에 따르면, 화엄사 각황전의 창건은 그 자체가 벽암 대사의 화엄사 중창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으며, 당대 벽암 문중의 대표적 스님이었던 계파 성능 등이 불사를 주도하였다. 또한 석가불, 아미타불, 다보불의 삼존 구성 역시도 벽암 문중의 주도로 편찬한 『오종범음집』의 의식문에 도상적 기반을 두고 있다.16 그 밖에도, 1687년 김해 은하사 명부 존상 조성의 경우에는 透三이 증‘ 명’으로, 색난이 조각승으로 각각 이름을 올렸는데, 투삼은 1700년 낙안 징광사 『대방광불화엄경소초』의 시주자로 색난과 함께 참여한 예가 있다.17 이 역시 증명과 화원이 같은 문중의 일원으로서 유대를 형성하며 불상을 조성한 사례에 해당한다.

Fig. 6.

색난·충옥·일기,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Saengnan, Ch’ungok, and Ilgi, Wooden Sakyamuni Buddha Triad and Four Wooden Standing Bodhisatt vas at Hwaŏmsa Temple, Kurye, 1703, Chosŏn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heritage.go.kr/)

또한, ‘증명’은 불상을 예경의 대상으로 전환하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불복장 의식과 점안 의식의 증명 역할 역시 수행하였을 것이다. 현재 우리가 보는 발원문은 불상의 조성 불사에 관여한 사람들을 전체적으로 명기한 것이기 때문에, 발원문의 작성은 대체로 불상 조성과 관련된 모든 공정을 완료한 후 행하였을 것이 분명하다. 조성이 완전히 완료되어야만 참여자와 후원자 각각의 역할과 책무, 참여 여부 등에 관한 사실을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작성된 발원문은 복장 물목을 납입하고 불복장 의식을 거행하는 시점에 맞추어 불상의 내부에 봉안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발원문에 명기된 ‘증명’은 불사의 총도감으로서의 역할과 더불어, 불상의 신성성을 담보하는 불복장 및 점안의식의 증명자로서의 역할 또한 병행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증명’ 소임이 불사 전반에 미치는 이러한 영향 때문에, 거의 모든 발원문에는 ‘증명’ 소임을 기입하는 것이 원칙이다. 반면, 불석 전문 조각승의 불상에서는 동시기 단응, 색난 등에서 보이는 ‘증명’과 ‘화원’과의 유기적인 관계는 잘 드러나지 않으며, 오히려 ‘증명’이 생략된 경우도 있어 주목된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증명’ 란에 현전하는 고승대덕의 명호 대신 지공, 무학, 나옹의 소위 삼화상을 적어 넣은 사례이다. 수조각승 敬坦이 참여한 1673년 〈소재사 석조석가삼존상〉의 원문(Fig. 7)에는 불상연화질의 첫머리에 증명으로 “無學和尙 懶翁和尙 志空和尙”이 등장하며, 2년 뒤 守日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1675년 〈소재사 시왕상〉의 원문(Fig. 8)에서도 마찬가지로 연화질에 “誌公和尙 無學和尙 懶翁和尙”이 나타난다.18 조각승 승호가 조성한 1681년 창원 성주사 지장시왕상의 원문에서도 “緣化秩 證明 誌公和尙”이라는 기록이 보이며,19 이 경우 나옹, 무학화상의 명호는 생략되었지만 대체로 삼화상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20 이렇듯 불상 제작의 총도감이자 불복장 및 점안의식의 증명자인 ‘증명’에 지공, 나옹, 무학 등 소위 三和尙의 명호를 기입하는 방식은 이전 시기 혹은 같은 시기 제작된 목조, 소조불에서는 거의 확인된 바가 없다.21 즉, 발원문의 ‘증명’ 란에 삼화상을 기입하는 방식은 불석만을 전문으로 다루는 경상 지역 조각승의 불상에서 확인되는 특징이라는 점이 주목된다.

Fig. 7.

〈달성 소재사 석조석가삼존상 발원문 세부〉 Detail of Votive Inscription of Seated Stone Sakyamuni Buddha Triad at Sojaesa Temple, Talsŏng, 1673,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Fig. 8.

〈달성 소재사 석조시왕상 발원문 세부〉 Detail of Votive Inscription of Stone Ten Kings at Sojaesa Temple, Talsŏng, 1675,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중요한 것은, 『조상경』에 의한 불복장 의식에서 지공, 나옹, 무학의 삼화상이 의례의 증명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주지하듯 지공은 중국을 거쳐 고려에 입국하여 법을 설한 인도 출신의 승려로, 이후 나옹 화상, 무학 대사로 이어지는 세 고승은 각각 사제 관계로 법을 전하며 여말선초 불교의 중흥과 확산에 지대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들은 소위 삼화상이라는 명칭으로 칭송되었으며, 특히 17세기 후반부터는 삼화상을 추념하고 예경하는 의례와 의식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22 이에, 삼화상을 한 화면에 그린 진영을 제작하여 전각에 봉안하는 등 삼화상에 대한 신앙적 개념은 조선 후기부터 본격적으로 정립되고 확산되기 시작하는 것으로 보인다(Fig. 9). 특히 1769년 봉정사 간 『제반문』 등 의식집에서 삼화상은 爲作證明의 대상으로 자리잡게 되어, 증명으로서의 상징과 역할을 명시적으로 부여받게 되었다(Fig. 10).23 더욱이 불복장 의례와 관련하여 1824년에 간행된 유점사 본 『조상경』의 복장단 의식에는 證明位目에 증명법사로 지공대화상, 나옹대화상, 나옹대화상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으며(Fig. 11), 『작법귀감』의 불상 봉안 의식에서도 삼화상에 대한 별도의 증명청이 나타난다.24 오늘날 설행되는 불복장 의식에서도 삼화상이 의식 전체의 ‘증명’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Fig. 9.

〈의성 대곡사 삼화상 진영〉 Portrait of Three Great Masters (Chigong, Naong, and Muhak) at Taegoksa Temple, Ŭisŏng, 1782, Chosŏn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heritage.go.kr/)

Fig. 10.

〈안동 봉정사 간행 제반문〉 Chebanmun [Budhhist Ritual Book] published at Pongjŏngsa Temple, A ndong, 1769, Chosŏn, Wŏn’gaksa Temple, Koyang (Archives of Buddhist Culture, https://kabc.dongguk.edu/)

Fig. 11.

〈유점사 간행 조상경〉 Chosanggyŏng [Sutras on the Production of Buddhist Images] published at Yujŏmsa Temple, 1824, Chosŏn, Wŏn’gaksa Temple, Koyang (Archives of Buddhist Culture, https://kabc.dongguk.edu/)

이렇듯 불복장 의례의 위작증명이 되는 삼화상이 유독 불석제 불상의 발원문에서 ‘증명’으로 등장하는 것은, 아마도 불복장 의식을 설행한 장소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전술하였듯 불석제 불상의 경우 목조, 소조불과 달리 제작 장소와 봉안 장소가 각각 개별적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불상의 제작 공정까지는 제작처에서 완료하고 이후 이운하여 봉안처에서 점안 의식을 행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렇다면 점안 의식 이전에 불상 내부에 복장 물목을 납입하는 불복장 의식의 경우 어느 장소에서 행하였는지에 대하여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본 발원문들의 내용에 따르면, 불석제 불상 중 일부의 경우는 복장 물목의 납입과 발원문의 작성 및 납입까지도 불상의 제작처에서 행하였을 가능성을 함의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된다. 고승대덕을 증명으로 모시고 불복장과 점안 의식을 봉안처인 사찰 경내에서 행할 경우에는 실제 ‘증명’ 역할을 수행한 스님의 명호를 기입하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불복장 의식에서의 증명이자, 당대에 이미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은 고승인 삼화상을 발원문에 기입하는 것은, 아마도 ‘증명’ 소임자가 제작 장소로 이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불복장 납입을 여법하게 행하였음을 증명하기 위한 의례적 절차의 일환이었을 것이다.

즉, 경상 지역에서 조성된 불석제 불상 중 일부의 경우 점안 의식 이전 불복장의 납입까지 모든 절차를 제작처에서 완료하고 봉안처로 이동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관련하여 1682년 〈양산 신흥사 석조석가삼존좌상의 발원문〉(Fig. 12)에서 승호가 畫員秩에 “證明兼勝湖比丘”로 등장하는 기록도 흥미로운데, 발원문의 형식을 보면 ‘證明兼’이라는 글자는 발원문에 추가로 기입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는 불상을 조성한 승호가 증명, 즉 불복장 납입 과정의 증명을 겸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처럼 이례적으로 화원이 증명을 겸하게 되는 것 역시 불복장의 납입 등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25 이러한 경향은 제작처와 봉안처 간의 거리가 멀어짐으로 인해 불사의 기획자인 ‘증명’의 관여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는 것에서 연유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에 따라 기존 ‘증명’ 역할의 일부까지 ‘화원’이 폭넓게 관여하게 되는 양상으로 이해된다. 즉, 불석제 불상의 경우 거리적 한계로 인해 ‘증명’과 ‘화원’의 협동 작업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최대한 불교적인 예법과 의례적 절차를 준수하기 위하여 제작 장소에서 점안 의식 이전까지의 절차를 마무리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즉, 불석제 불상의 경우 목조불이나 소조불과 달리 거리상의 한계로 인해 기획자의 관여가 상대적으로 적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으로, 그 제작의 양상은 협동 작업이라기보다는 수요 계층이 공급 계층에 불상 조성을 의뢰하여 공방에서 자체적으로 제작하는 것에 가까워 보인다.

Fig. 12.

〈양산 신흥사 석조석가삼존좌상 발원문 세부〉 Detail of Votive Inscription of Seated Stone Sak yamuni Buddha Triad at Sinhŭ ngsa Temple, Yangsan, 1682,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2. 불석제 불상의 크기와 대좌의 제작 문제

제작처와 봉안처가 멀어진다는 것은 곧, 수요 계층인 사찰 측과 공급 계층인 조각승 간의 상시적이고 긴밀한 소통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찰의 입장에서는 불상의 제작 현황에 대한 즉각적인 파악이 쉽지 않으며, 조각승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로 봉안처에 해당하는 전각의 현상과 우발적 변화 등을 바로 인지하기가 어렵고, 사찰 측의 요청 사항을 즉각 반영하기도 쉽지 않다.

불상 조성에 있어서의 다양한 고려 사항 중에서도 중요한 사항 중 하나는 불상의 스케일, 즉 크기와 관련한 문제이다. 목조, 소조불상의 경우 불상의 제작과 봉안이 사찰 경내라는 같은 장소에서 진행되므로 봉안 사찰과 조각승 간에 상의 크기에 대한 다양한 고려와 논의가 가능하다. 반면, 봉안처를 수시로 확인하기 어려운 불석제 불상의 경우 목조불 등에 비해 불상의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규격화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중에서도, 불전의 규모가 다양한 주불전에 비해, 영산전, 명부전 등 전각의 규모가 상대적으로 작고 내부에 다량의 불보살상이 모셔지는 경우 크기가 어느 정도 규격화되는 양상이 확인된다. 나한상이나 시왕상 등의 경우 일정한 크기와 도상, 형식 등이 반복되는 경향이 두드러진다. 물론 동일한 시기 목조불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확인되지만 불석제 불상의 경우 상의 규모가 거의 비슷하며 도상적으로도 반복 재생산되는 경향이 강하다. 예를 들어 조각승 승호가 조성한 1678년 작 〈청도 덕사 시왕상〉(Fig. 13), 1681년 작 〈창원 성주사 시왕상〉(Fig. 14), 1684년 작 〈기장 장안사 시왕상〉(Fig. 15)을 살펴보면, 상의 크기가 120cm 내외로 거의 유사하며, 상의 도상적 특징 역시도 대체로 반복되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특징은 불석 자체의 재료적 특성에서 비롯되었기도 하지만, 독립된 제작처에서 ‘화원’의 주도로 불상을 조성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변화 중 하나일 수도 있다.

Fig. 13.

승호, 〈청도 덕사 석조시왕상〉 Sŭngho, Seated Stone King of Hell at Tŏksa Temple, Ch’ŏngdo, 1678, Chosŏn, H. 124c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Taegu, Kyŏngbuk 1-2, p. 392)

Fig. 14.

승호, 〈창원 성주사 석조시왕상〉 Sŭngho, Seated Stone King of Hell at Sŏng jusa Temple, Ch’angwŏn, 1681, Chosŏn, H. 127c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Pusan, Ulsan, Kyŏngnam 2-2, p. 446)

Fig. 15.

승호, 〈기장 장안사 석조시왕상〉 Sŭngho, Seated Stone King of Hell at Changansa Temple, Kijang, 1684, Chosŏn, H. 113c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Pusan, Ulsan, Kyŏngnam 2-1, p. 312)

특히, 조각승 승호가 1678년 조성하여 영산보전과 명부전에 각각 봉안한 청도 덕사의 〈아난존자입상〉(Fig. 16)과 〈도명존자입상〉(Fig. 17)을 보면, 두 상은 거의 도상적 구분이 불가능할 정도로 유사하여 흥미롭다. 주지하듯, 아난존자입상과 도명존자입상은 모두 젊은 스님의 형상이라는 도상적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만, 각각 상의 봉안 장소, 종교적 역할, 존상의 구성 등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때문에 많은 조각승의 경우 실제로 두 도상을 존상으로 조성할 경우 도명존자에게 석장 등의 지물을 취하게 하거나, 손의 자세 등에 변화를 주어 각각 도상적인 구분을 두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반면 덕사 상의 경우는 거의 도상의 구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동일한 도상으로 보여진다. 이는 제작처에서 어느정도 규격화된 상의 조형 양식이 확립되고 이것이 반복되는 하나의 사례일 수 있을 것이다.

Fig. 16.

승호, 〈청도 덕사 석조아난존자입상〉 Sŭngho, Standing Stone Venerable Ananda at Tŏksa Temple Yŏngsanbojŏn, Ch’ŏngdo, 1678, Chosŏn, H. 84.5c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Taegu, Kyŏngbuk 1-2, p. 387)

Fig. 17.

승호, 〈청도 덕사 석조도명존자입상〉 Sŭngho, Standing Stone Venerable Domyeong at Tŏksa Temple Myŏngbujŏn, Ch ’ŏngdo, 1678, Chosŏn, H. 111.5 c 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Taegu, Kyŏngbuk 1-2, p. 391)

불석제 불상의 봉안과 관련한 또 다른 고려 사항은 대좌와 불패 등 불상의 조성에 수반되는 목조 공예품들에 관한 것이다. 17세기 후반의 불사에서 일반적으로 불전을 건립하고 불상을 안치할 때 닫집과 수미단의 경우에는 별도의 소목이 조성하였으며, 조각승의 경우 불상과 불상의 대좌, 그리고 대좌 사이에 놓이는 불패까지를 조성하는 것으로 역할을 분담한 것으로 생각된다. 대표적으로 조각승 단응의 경우 1692년 봉황사 목조여래삼불좌상을 조성하였는데, 불상이 봉안된 대좌 바닥에는 묵서명이 남아있어 소영 신경의 증명으로 단응을 비롯하여 덕륜, 상념, 혜륜, 탄옥, 탁린 등의 조각승이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대좌, 불패 등에 적힌 명문(Fig. 18)들에 따르면 좌대의 조성은 불상 조성의 5위 보조화승인 탁린이 맡았다고 하여 조각승 집단 내 분업의 정황이 확인되며, 삼전패 역시 또한 대좌와 마찬가지로 탁린이 조성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26 이처럼 조각승의 역할은 불상과 대좌 등 불단 위에 안치되는 공예품의 제작 전반에 걸쳐 있으며, 때로는 마곡사 칠불좌상 대좌에서도 확인되듯 대좌 혹은 불패를 조각할 때에도 각각의 상징 요소들을 통해 조각승 나름대로의 불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한다.27

Fig. 18.

〈안동 봉황사 목조 불패 밑면 묵서〉 Handw ritten Record underneath Wooden Tablets for the Buddha Triad of Ponghwangsa Temple, A ndong, 1692,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반면, 불석제 불상의 경우 불상의 제작처와 봉안처가 대체로 떨어져 있어 불전 내부의 현황에 대하여 실시간으로 상황을 공유할 수 없으며, 수미단 혹은 닫집의 높이와 크기 등에 대해서도 즉각적인 파악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불석을 전문으로 다루는 조각승의 특성 상 목조로 별도의 대좌와 불패 등을 조성하는 것 역시도 번거로운 측면이 있었을 것이다. 불석을 이용하여 대좌와 불패 등을 조성하는 것 역시도 재료적 한계로 인해 어려움이 따랐을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근 발견된 〈군위 인각사 석조아미타삼존좌상의 목조 대좌 내부 묵서〉(Fig. 19)가 주목된다. 해당 기록에서는 인각사 금당 불상삼존의 대좌를 조성하였다는 내용과 함께 참여자의 이름을 나열하였으며, 대좌를 조성한 畫員의 이름은 淸風衲子 覺修 比丘라고 기록하였다.28 그런데, 각수의 경우 불석제 불상의 조성에 참여한 조각승으로는 이름이 확인되지 않으며, 오히려 불연 제작에 참여한 사례가 확인된다.29 그렇다면 아마도 대좌를 조성한 각수 스님의 경우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 집단과는 다른 계보로 목조를 전문으로 다루는 조각승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이는 하나의 사례이기는 하나, 불석제 불상에서 불상을 조성한 조각승 집단과 목조대좌를 조성한 목조 조각승이 각각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Fig. 19.

〈군위 인각사 목조대좌 내부 묵서〉 Handwriting Record inside Wooden Buddha Pedestal at In’gaksa Temple, Kunwi, 1688, Chosŏn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특히, 현전하는 불석제 불상을 모신 봉안 전각의 내부에는 대체로 대좌나 불패 등 불상 조성에 따르는 공예품들이 부재한 경우가 상당수이다. 그렇다면 불석제 불상을 조성한 경상 지역 조각승들의 경우, 대좌나 불패 등 불단의 상단을 구성하는 각종 요소들 전체를 관여하기보다는 상대적으로 불상의 조성에 집중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 경우 인각사 상의 조성 사례에서 보이듯 대좌나 불패의 제작은 목조를 전문으로 다루는 별도의 조각 집단에 의뢰하였을 것이다. 혹은 영산전, 명부전 등 전각 내에 다수의 상을 봉안하는 경우에는 개별 대좌의 제작 등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정리하면, 목조불 조성의 경우 조각승이 수미단, 닫집 등 불전 내부의 구성과 배치 현황을 파악하고 조율하여 적당한 크기의 대좌와 불패를 조성하는 등 불전 구성에 전체적으로 관여하였다. 반면, 불석제 불상의 경우 상대적으로 대좌와 불패 등 목조 공예품의 조성에 관여하기보다는 불상의 조성 및 이운에 집중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역시 새로운 재료의 등장이 불러온 조각승들의 역할 변화의 일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Ⅳ. 맺음말

본고에서는 경상 지역 불상 제작에 있어 불석이라는 새로운 재료가 등장하고 그 사용이 확산되면서 나타나는 변화 양상에 대하여 고찰해 보았다. 불석은 생산지가 경주 인근으로 한정되어 있고 무게가 무거워 이운이 쉽지 않은 특성이 있으며, 이에 따라 재료의 산지 인근에 불상을 조성하는 일종의 제작 공방이 설치, 운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로 인해 기존의 목조불이나 소조불과 달리 불석제 불상의 경우 수요자이자 봉안처인 사찰과, 제작자 혹은 공급자인 조각승의 공간이 각각 분리되는 결과가 초래되었다. 이렇게 사찰과 제작 장소의 공간이 물리적으로 멀어지게 되면서 불석제 불상의 경우 불상의 제작이나 유통, 나아가 불상 조성에 참여하는 각종 참여자의 소임과 역할까지 일정 부분 변화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되며, 이는 불석이라는 신재료의 사용이 확산되면서 나타나는 변화로도 이해할 수 있다.

목조불, 소조불 등의 조성은 원재료의 수급부터 가공, 불상의 조각, 불복장 및 점안 의식을 통한 예경 대상으로의 전환이라는 일련의 과정이 한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반면, 불석제 불상의 경우 원재료의 수급부터 불상 조각의 완료까지가 ‘불상소’ 등 제작처에서 진행되며, 이후 불상을 이운하고 봉안처에서 점안 의식을 행하는 것으로 제작 공정이 변화한다. 특히 제작처와 봉안처 간에 공간적 간극이 발생하면서, 불석제 불상의 조성에서는 총도감이라 할 수 있는 ‘증명’의 역할이 상당부분 한정되는 반면, ‘화원’의 역할은 원재료의 채취부터 조각과 이운, 불복장의 납입까지 넓게 확대되는 양상이 나타난다. 반면, 기존 목조불을 조성하는 조각승의 경우, 불상 뿐 아니라 대좌, 불패 등 불전 내부 구성요소의 조성을 전체적으로 관장했다면 불석 조각승의 경우는 이러한 목조 공예품의 조성에서는 상대적으로 관여도가 적으며 오직 불상의 조성에만 집중하는 경향 역시 확인된다.

오늘날의 불사에 비유하자면, 목조불상의 불사는 기획자와의 긴밀한 논의 하에 조성하는 협동 제작에 가까운 반면, 불석제 불상의 불사는 조각가에게 필요한 聖像의 내용과 수량 등을 의뢰하고 완성된 불상을 전달받는 것에 보다 가까워 보인다. 이는 조선 후기 불사의 수요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봉안 사찰과 공급 계층이라 할 수 있는 불상 조각승의 처소가 분리되는 불석제 불상의 특징에 기인한 것으로 생각된다.

Notes

1)

조각승 승호와 경옥은 불석만을 다루는 불석 전문 조각승이며, 이들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조각승 연구의 일환으로 아래와 같은 다양한 선행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선행 연구는 대체로 승호, 경옥 등 조각승 유파의 양식적 특징을 파악하고 조각승을 추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논고로는 김길웅, 「彫刻僧 勝浩가 제작한 불상」, 『문화사학』 27 (2007), pp. 881-894; 최선일, 「17세기 후반 조각승 승호(彫刻僧勝浩)의 활동과 불상 연구」, 『선문화연구』 8 (2010), pp. 83-119; 조태건, 「17세기 후반 조각승 勝浩 作 十王像 硏究」, 『불교미술사학』 12 (2011), pp. 171-200; 김희경, 「17세기 후반 영남 조각승 승호(勝湖) 작 나한상 연구」, 『미술사와 문화유산』 1 (2012), pp. 87-118; 송은석, 「조선 후기 불석제佛石製 불상과 조각승 승호勝湖·경옥敬玉」, 『국학연구』 34 (2017), pp. 131-191; 최선일·조태건, 「고성 옥천사 명부전 불상과 조각승 경옥」, 『선문화연구』 26 (2019), pp. 373-407; 이희정, 「고성 옥천사 대웅전 불석제(佛石製) 불상 연구」, 『석당논총』 80 (2021), pp. 223-250 등이 참고된다.

2)

불석제 불상의 원재료인 불석의 수급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경주 일대의 지리적 특징을 주목하였으며, 이희정, 「조선후기 경상도지역 佛石製 佛像의 등장과 유행」, 『불교미술사학』 14 (2012), pp. 41-44; 송은석, 위의 논문 (2017), pp. 140-144; 이희정, 위의 논문 (2021), pp. 231-236 등 선행 연구에서는 각종 문헌 기록들을 분석하여 불석의 수급처를 경주 불령산, 골굴산과 기림사 인근으로 추정한 바 있다. 본 논문에서 불석의 수급처에 대한 논지 역시 위의 선행 연구를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3)

전통적으로 불상을 조성할 때 필요한 재화를 모집하는 역할을 지시하는 용어로는 ‘募緣’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불상의 이동 및 봉안에 관련한 용어로는 ‘移安’이나 ‘奉安’, 불상 제작자인 조각승에게 조상을 요청하는 용어로는 ‘敬請良工’ 등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용어들은 불상이 가지는 종교적 상징물로서의 특징에 기인하며, 용어에서 확인되듯 불상 조성의 의뢰와 봉안은 일반적인 재화의 거래 양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 때문에 본문에서 사용한 ‘수요 계층’과 ‘공급 계층’, ‘유통’ 등 재화의 경제적 교환을 함의하는 용어들은 조선 시대 불상을 조성할 때 사용한 용어들과 엄밀한 의미에서 일대일로 합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본고에서는 불상 조성 재료의 수요와 공급이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을 강조하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해당 용어를 선택하였음을 밝힌다.

4)

나흠이 조성한 양산 원효암 석조불좌상에 대해서는 이희정, 앞의 논문 (2012), pp. 44-45를 참조. 영색의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불좌상에 대해서는 이승희, 「조선 후기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미술사연구』 38 (2020), pp. 222-228이 참조되며, 해당 상의 발원문 내용은 「2021년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제6차 회의자료」, pp. 180, 186에서 인용하였다.

5)

영색과 나흠은 모두 청헌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1635년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 1639년 하동 쌍계사 삼불사보살상의 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청허가 수화승으로 제작한 1644년 경산 경흥사 목조아미타불좌상, 1645년 상주 남장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원문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관련하여, 이희정 역시 기장 안적사 석조석가여래삼존좌상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영색, 나흠이 모두 청헌 계의 조각승임에 주목하고 그 활동의 양상을 분석한 바 있다(이희정, 「기장 안적사 석조석가여래삼존불좌상 연구」, 『향도부산』 44 (2022), pp. 228-234).

6)

“其寺老僧戒英者引勸爲主者則遠願寺佛像三尊後新興寺佛像阿彌陀佛一尊造成也北三百里於川叱谷也而其地本以稱丹土積之佛身而曰不常瑞也其地造成一尊水來海口於仙上舟檝於入寺也”(「2021년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제6차 회의자료」, p. 180).

7)

「蔚珍 佛影寺 應眞殿 石造羅漢坐像 造成發願文」 1677년 7월 10일(송은석, 「蔚珍 佛影寺의 佛像과 彫刻僧 : 尙倫, 卓密」, 『동악미술사학』 17 (2015), p. 373의 석문을 재인용).

8)

양산 신흥사 대광전 석조여래삼존상 중 우협시 보살상 원문(1682년).

9)

고창 선운사 참당암 명부전 발원문(1682년).

10)

「金泉 鳳谷寺 石造三世佛坐像 重修發願文」 1685년 5월(송은석, 앞의 논문 (2017), p. 142의 각주 3에서 재인용).

11)

송은석, 앞의 논문 (2017), pp. 143-144; 이희정, 앞의 논문 (2021), pp. 233-235.

12)

이보다 후대의 사례이긴 하지만 해남 대흥사 천불전에 모셔진 불석제 불상 역시 경주에서 조성하여 해로를 통해 이운하였음이 알려져 있다. 특히 대흥사 천불전 중 일부 존상의 경우 불상을 모신 배가 표류하여 일본에 경유하게 된 것으로도 유명하며, 당시 불상 조성의 책임을 맡았던 楓溪賢正은 이를 『日本漂海錄』이라는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13)

“願文」太淸康熙三十八年己巳之冬十二月全羅左道昇平府東嶺靈鷲山興國寺」五十三佛造成化主淸信士金汝重年來四十之餘無(忽然)師自發心靑春朱夏聚落」求化召良工運美石敬造如來像...鍊石畵工秩 印戒比丘 思敏比丘 哲明比丘 雷暈比丘 弘運比丘」六淸比丘」演敏比丘…” 『한국의 사찰문화재-광주광역시·전라남도 자료집』 (문화재청·(재)문화유산발굴조사단, 2006), p. 244.

14)

소영 신경은 편양 언기의 법맥을 이은 환적 의천(1603~1690)의 제자로 단응, 탁밀 등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보덕사 목조아미타삼존좌상(1687), 봉황사 삼세불상(1692), 광흥사 목조지장시왕상(1692), 예천 대곡사 석가삼존십육나한상(1694), 쌍계사 사천왕상(1705) 등의 주요 불사에 증명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용문사 목각아미타구품도(1684)의 경우 ‘증명’에는 종현이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영 신경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음이 알려져 있다. 소영 신경이 관련 기록의 맨 앞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소영 신경이 참여한 불사와 각 불사에서의 역할은 한길중, 「朝鮮後期 木刻說法像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8), pp. 125-126 참조). 다만 용문사, 대승사 목각아미타구품회도의 경우 증명으로 宗現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종현은 소영 신경의 제자일 것으로 추정되며, 실질적인 불사의 지휘는 신경이 주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한길중, 위의 논문, p. 130). 특히 1692년 제주 영조사 소장 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감 발원문에는 단응이 소영 신경의 門人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허형욱은 단응과 소영 신경의 관계에 대하여 단순한 승려 문중 개념이 아닌 인맥망을 포함한 유연한 관계망의 일종일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허형욱, 「조선 후기 조각승 端應의 造像 活動과 性格에 관한 고찰」, 『동악미술사학』 32 (2022), p. 185).

15)

이용윤, 「조선 후기 경상도 지역에서 제작된 觀經十六觀變相圖와 念佛禪」, 『미술사논단』 36 (2013), pp. 80-81.

16)

오진희, 「華嚴寺 覺皇殿 七尊佛像의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4), pp. 8-17, 26-27.

17)

해당 불사에 투삼은 “比丘透三領募衆緣刻此一卷”으로, 색난은 “色難施租十九石助刊此經”이라 하여 각각 간행에 시주한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조선시대 불서인명 DB(https://kabc.dongguk.edu/)), 주지하듯 낙안 징광사는 벽암대사의 법맥을 계승한 백암 성총이 머물며 『가흥대장경』을 편집 판각한 사찰이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 투삼과 색난은 모두 벽암 문중과 깊은 관계 하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18)

1673년 소재사 석조석가삼존상 원문 “佛像緣化秩 證明 無學和尙 懶翁和尙 志空和尙 持殿 寶益 比丘 畵員 敬坦 比丘 印全 善英 弘察 道宗 大熙 法惠 學連 供養主印岑 比丘 斗英 比丘 來往 覺信…”; 1675년 소재시 시왕상 명문 “緣化秩 證明 誌公和尙 無學和尙 懶翁和尙 持殿 宝軒 別座淸學 來性弘正 供養主灵坦 畵員 守日 仅唯 道堅 精日 印玄 敬運 浄王 宝灵 祖悅 淸學 㕵堅 仁發…”

19)

“緣化秩 證明誌公和尙 持殿 尙文比丘 畵員 勝湖比丘 尙倫比丘 學淨比丘 卓文比丘 天潭比丘 宝藏比丘 呂岑比丘 竺令比丘 禪俊比丘 法眼比丘 處屹比丘 守衍比丘 處行比丘 儀淨比丘 法宗比丘 敏俗比丘 天龍 保体 海發 保体 供養主 玉熙比丘 玉定比丘 海玉比丘 別座 熙尙 比丘 金唜立兩主 化主 凞卞比丘”

20)

지공 화상의 본래 한자명은 指空으로 위의 발원문들에서 나타나는 志公. 誌公과는 한자 표기에서 차이가 있으나, 나옹화상, 무학화상과 같이 명기된 것으로 미루어 이 역시도 고려의 고승인 指空을 포함한 삼화상을 의도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1)

목조불 혹은 소조불의 발원문에서는 ‘증명’을 생략하는 사례 역시 드물다. 다만, 1680년 보성 개흥사 관음보살좌상의 조성 시에는 ‘증명’을 생략하고 대신 조각승 색난의 소임을 ‘腹莊所入五甁五寶五香五葉兼施主良工’으로 기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해당 불사 시 조각승 색난은 불복장 납입에 필요한 각종 물목을 준비하여 시주하고, 더불어 조각승으로도 참여한 것으로 보여 흥미롭다. 다만, 증명을 생략하는 사례는 색난의 불상 조성, 혹은 17세기 후반의 불상 조성 사례 중에서도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개흥사 상의 사례는 불복장 물목의 거의 전체를 조각승이 준비하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불석제 불상의 예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발원문의 내용은 최성은, 「보성 開興寺 목조관음보살좌상을 통해 본 조선후기 조각승 色難」, 『한국사학보』 62 (2016), pp. 104-150에서 인용하였다.

22)

조선 후기 삼화상의 추념이 두드러지는 경향과 관련하여, 임진왜란 이후 國家再造의 과정에서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무학대사, 그리고 무학의 스승인 나옹과 지옹 화상의 위상 역시 재고되었으며 이것이 17세기 이후 삼화상에 대한 추념으로 나타난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연구에 따르면 무학대사의 위상 재고와 더불어 불교계 고승들의 삼화상 추념은 17세기 전반 이후 확산되며, 이에 따라 17세기 이후의 불교 의식집에서도 삼화상의 위상은 점차 두드러지게 되었다(황인규, 「조선시대 三和尙(지공·나옹·무학)의 위상과 추념」, 『정토학연구』 27 (2017), pp. 126-134).

23)

관련하여, 1769년 『제반문』의 경우 조선 전기부터 간행되어 온 『제반문』의 체제와 내용을 새롭게 정비하고 변화를 주었다는 선행 연구가 있으며, 연구에서는 변화의 배경에 대하여 당시 새롭게 부상한 환성 문중이 시도한 새로운 변화로 지적하기도 하였다(이용윤, 「조선후기 鞭羊문중의 佛事와 僧侶匠人의 활동」, 『미술사연구』 32 (2017), pp.152-153). 그렇다면 삼화상이 爲作證明으로서 의례집에 수록되는 것 역시 조선 후기 각지에서 설행되던 의식들을 취합, 정비하고 일신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의례집에 수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4)

문상련, 「증명삼화상(證明三和尙)의 형성 배경과 불교적 위상」, 『보조사상』 61 (2021), pp. 141-143.

25)

조각승 守衍의 경우, 1619년 조성한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자상과 같이 證明과 화원의 역할을 겸한 예가 있다. 다만, 수연은 1625년 조성한 나주 다보사 16나한상의 일부 발원문에서 화원과 증명으로 동시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반면, 같이 조성된 또 다른 나한상의 발원문에서는 證明에 靈慧比丘라는 별도의 인물을 표기하고 있다(김희경, 「수연(守衍) 作 나주 다보사 영산전 16나한상(1625)과 그 의의」, 『미술사와 문화유산』 3 (2014), pp. 118-119). 이 외에 1636년 강화 전등사 명부 존상 중 오도전륜대왕의 발원문에서도 수연이 화원질과 동시에 ‘兼證明’이라고 적혀 있는 동시에, 동반 조성된 지장보살좌상과 오관대왕상 발원문에서는 증명에 坦悟라는 스님이 나타난다(최선일, 「강화 전등사 木造地藏菩薩坐像과 조각승 守衍」, 『인천학연구』 18 (2013), pp. 214-215). 초강대왕상, 염라대왕상, 변성대왕상 등의 발원문에서도 수연의 앞에는 별도로 ‘證明坦悟’라고 적혀 있다(『한국의 사찰문화재-전국편』 (문화재청·(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pp. 196-199). 특히 본고에서 논하는 불석제 불상을 제외하고 수연 외에 조각승이 증명을 겸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때문에 기존의 연구에서는 수연을 당시까지 알려진 조선 후기 발원문 중에 유일하게 증명과 화원을 동시에 맡은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최선일, 『17세기 조각승과 불상 연구』 (한국연구원, 2009), pp. 27-58). 즉, 조각승이 증명과 화원을 겸하는 것은 매우 특수한 양상이며, 이는 아마도 조각승 수연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일 가능성도 있다. 17세기 전반 수연이 증사와 화원으로서 수행한 각각의 역할 등에 대해서는 본고의 주제와는 별개로 보다 심도 깊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수연의 활동 시기 역시 불석제 불상이 유행하기 이전으로 불석제 불상에서 조각승이 증명을 겸하는 것과는 시간적 간극이 있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26)

봉황사 목조삼불좌상의 경우 불상 내부의 묵서명을 비롯하여, 대좌, 불패 등에서 다양한 묵서가 발견되었다. 소영 신경의 증명과 수화승 단응을 비롯한 화원들의 명칭, 대좌를 조성한 탁린 등 소임자들의 역할과 이름은 대부분 일치힌다. 다만, 삼존상과 본존불 대좌는 1692년에, 좌우 협시불의 대좌는 1694년에 각각 조성하여 2년의 간극이 있다. 이러한 시간적 격차에 대해서는 조성 당시 松禁令 등으로 인한 목재 부족과 동시기 진행된 광흥사 명부전 불사 등을 원인으로 지목한 선행 연구가 있으며, 본 발표에서 대좌와 전패 등의 기록 등도 해당 논고를 참고하였다(고선영·임영애, 「端應의 安東 鳳凰寺 三世佛坐像 및 三殿牌 연구」, 『美術史學』 42 (2021), pp. 211-219).

27)

마곡사 칠불좌상 대좌의 상징 요소들에 대해서는 허형욱, 앞의 논문, pp. 186-194 참조.

28)

“畫員淸風衲子覺修比丘」供養主 普天 比丘」指揮 笁訔 比丘」化師通政大夫禪宗」判事兼寺內風憲」憲比丘…”

29)

조각승 각수는 1720년 경북 청도 대비사 佛輦의 조성에 수화승으로 참여하였다(최선일, 『조선후기승장 인명사전-불교조각』 (양사재, 2007), p.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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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Archives of Buddhist Culture, https://kabc.dongguk.edu/.
64. Database for the Collection of Korean Classics, https://db.itkc.or.kr/.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승호, 〈고창 선운사 참당암 석조지장보살좌상〉 Sŭngho, Seated Stone Kshitigarbha at Sŏnunsa Temple, Ch’amdangam, Kochang, 1684, Chosŏn, H. 79cm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2.

〈고창 선운사 참당암 명부 존상 발원문 세부〉 Detail of Votive Inscription of Seated Stone Kshitigarbha at Sŏnunsa Temple, Ch’amdangam, Kochang, 1684, Chosŏn (Photograph by Jeong Eun Woo)

Fig. 3.

인계, 〈여수 흥국사 석조여래좌상〉 In’gye, Seated Stone Buddha at Hŭngguksa Temple, Yŏsu, 1689, Chosŏn, H. 41.8cm (Korea Heritage Service and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Jeolla namdo 2, p. 23)

Fig. 4.

〈여수 흥국사 석조여래좌상 발원문〉 Votive Inscription of Seated Stone Buddha at Hŭngguksa Temple, Yŏsu, 1689,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Fig. 5.

단응, 〈문경 대승사 목각아미타여래 설법상〉 Tanŭng, Wooden Amitabha Buddha Altarpiece at Taesŭngsa Temple, Mun’gyŏng, 1675, Chosŏn, H. 347cm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heritage.go.kr/)

Fig. 6.

색난·충옥·일기, 〈구례 화엄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사보살입상〉 Saengnan, Ch’ungok, and Ilgi, Wooden Sakyamuni Buddha Triad and Four Wooden Standing Bodhisatt vas at Hwaŏmsa Temple, Kurye, 1703, Chosŏn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heritage.go.kr/)

Fig. 7.

〈달성 소재사 석조석가삼존상 발원문 세부〉 Detail of Votive Inscription of Seated Stone Sakyamuni Buddha Triad at Sojaesa Temple, Talsŏng, 1673,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Fig. 8.

〈달성 소재사 석조시왕상 발원문 세부〉 Detail of Votive Inscription of Stone Ten Kings at Sojaesa Temple, Talsŏng, 1675,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Fig. 9.

〈의성 대곡사 삼화상 진영〉 Portrait of Three Great Masters (Chigong, Naong, and Muhak) at Taegoksa Temple, Ŭisŏng, 1782, Chosŏn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heritage.go.kr/)

Fig. 10.

〈안동 봉정사 간행 제반문〉 Chebanmun [Budhhist Ritual Book] published at Pongjŏngsa Temple, A ndong, 1769, Chosŏn, Wŏn’gaksa Temple, Koyang (Archives of Buddhist Culture, https://kabc.dongguk.edu/)

Fig. 11.

〈유점사 간행 조상경〉 Chosanggyŏng [Sutras on the Production of Buddhist Images] published at Yujŏmsa Temple, 1824, Chosŏn, Wŏn’gaksa Temple, Koyang (Archives of Buddhist Culture, https://kabc.dongguk.edu/)

Fig. 12.

〈양산 신흥사 석조석가삼존좌상 발원문 세부〉 Detail of Votive Inscription of Seated Stone Sak yamuni Buddha Triad at Sinhŭ ngsa Temple, Yangsan, 1682,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Fig. 13.

승호, 〈청도 덕사 석조시왕상〉 Sŭngho, Seated Stone King of Hell at Tŏksa Temple, Ch’ŏngdo, 1678, Chosŏn, H. 124c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Taegu, Kyŏngbuk 1-2, p. 392)

Fig. 14.

승호, 〈창원 성주사 석조시왕상〉 Sŭngho, Seated Stone King of Hell at Sŏng jusa Temple, Ch’angwŏn, 1681, Chosŏn, H. 127c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Pusan, Ulsan, Kyŏngnam 2-2, p. 446)

Fig. 15.

승호, 〈기장 장안사 석조시왕상〉 Sŭngho, Seated Stone King of Hell at Changansa Temple, Kijang, 1684, Chosŏn, H. 113c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Pusan, Ulsan, Kyŏngnam 2-1, p. 312)

Fig. 16.

승호, 〈청도 덕사 석조아난존자입상〉 Sŭngho, Standing Stone Venerable Ananda at Tŏksa Temple Yŏngsanbojŏn, Ch’ŏngdo, 1678, Chosŏn, H. 84.5c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Taegu, Kyŏngbuk 1-2, p. 387)

Fig. 17.

승호, 〈청도 덕사 석조도명존자입상〉 Sŭngho, Standing Stone Venerable Domyeong at Tŏksa Temple Myŏngbujŏn, Ch ’ŏngdo, 1678, Chosŏn, H. 111.5 c m (Korea Heritage Service,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Han’guk ŭi sach’al munhwajae–Taegu, Kyŏngbuk 1-2, p. 391)

Fig. 18.

〈안동 봉황사 목조 불패 밑면 묵서〉 Handw ritten Record underneath Wooden Tablets for the Buddha Triad of Ponghwangsa Temple, A ndong, 1692, Chosŏn (Jogye Order of Korean Buddhism)

Fig. 19.

〈군위 인각사 목조대좌 내부 묵서〉 Handwriting Record inside Wooden Buddha Pedestal at In’gaksa Temple, Kunwi, 1688, Chosŏn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