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23; 2024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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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각승 승호와 경옥은 불석만을 다루는 불석 전문 조각승이며, 이들에 대해서는 조선 후기 조각승 연구의 일환으로 아래와 같은 다양한 선행 연구가 진행된 바 있다. 선행 연구는 대체로 승호, 경옥 등 조각승 유파의 양식적 특징을 파악하고 조각승을 추론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대표적인 논고로는 김길웅, 「彫刻僧 勝浩가 제작한 불상」, 『문화사학』 27 (2007), pp. 881-894; 최선일, 「17세기 후반 조각승 승호(彫刻僧勝浩)의 활동과 불상 연구」, 『선문화연구』 8 (2010), pp. 83-119; 조태건, 「17세기 후반 조각승 勝浩 作 十王像 硏究」, 『불교미술사학』 12 (2011), pp. 171-200; 김희경, 「17세기 후반 영남 조각승 승호(勝湖) 작 나한상 연구」, 『미술사와 문화유산』 1 (2012), pp. 87-118; 송은석, 「조선 후기 불석제佛石製 불상과 조각승 승호勝湖·경옥敬玉」, 『국학연구』 34 (2017), pp. 131-191; 최선일·조태건, 「고성 옥천사 명부전 불상과 조각승 경옥」, 『선문화연구』 26 (2019), pp. 373-407; 이희정, 「고성 옥천사 대웅전 불석제(佛石製) 불상 연구」, 『석당논총』 80 (2021), pp. 223-250 등이 참고된다.
2) 불석제 불상의 원재료인 불석의 수급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경주 일대의 지리적 특징을 주목하였으며, 이희정, 「조선후기 경상도지역 佛石製 佛像의 등장과 유행」, 『불교미술사학』 14 (2012), pp. 41-44; 송은석, 위의 논문 (2017), pp. 140-144; 이희정, 위의 논문 (2021), pp. 231-236 등 선행 연구에서는 각종 문헌 기록들을 분석하여 불석의 수급처를 경주 불령산, 골굴산과 기림사 인근으로 추정한 바 있다. 본 논문에서 불석의 수급처에 대한 논지 역시 위의 선행 연구를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3) 전통적으로 불상을 조성할 때 필요한 재화를 모집하는 역할을 지시하는 용어로는 ‘募緣’이라는 단어를 사용하며, 불상의 이동 및 봉안에 관련한 용어로는 ‘移安’이나 ‘奉安’, 불상 제작자인 조각승에게 조상을 요청하는 용어로는 ‘敬請良工’ 등이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용어들은 불상이 가지는 종교적 상징물로서의 특징에 기인하며, 용어에서 확인되듯 불상 조성의 의뢰와 봉안은 일반적인 재화의 거래 양상과는 큰 차이가 있다. 때문에 본문에서 사용한 ‘수요 계층’과 ‘공급 계층’, ‘유통’ 등 재화의 경제적 교환을 함의하는 용어들은 조선 시대 불상을 조성할 때 사용한 용어들과 엄밀한 의미에서 일대일로 합치하는 개념은 아니다. 그럼에도 본고에서는 불상 조성 재료의 수요와 공급이라는 관점에서의 접근을 강조하기 위하여 부득이하게 해당 용어를 선택하였음을 밝힌다.
4) 나흠이 조성한 양산 원효암 석조불좌상에 대해서는 이희정, 앞의 논문 (2012), pp. 44-45를 참조. 영색의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불좌상에 대해서는 이승희, 「조선 후기 울산 신흥사 석조아미타여래삼존좌상」, 『미술사연구』 38 (2020), pp. 222-228이 참조되며, 해당 상의 발원문 내용은 「2021년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제6차 회의자료」, pp. 180, 186에서 인용하였다.
5) 영색과 나흠은 모두 청헌이 수화승으로 제작한 1635년 구례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상, 1639년 하동 쌍계사 삼불사보살상의 조성에 참여하였으며, 청허가 수화승으로 제작한 1644년 경산 경흥사 목조아미타불좌상, 1645년 상주 남장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원문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다. 관련하여, 이희정 역시 기장 안적사 석조석가여래삼존좌상에 대한 최근 연구에서 영색, 나흠이 모두 청헌 계의 조각승임에 주목하고 그 활동의 양상을 분석한 바 있다(이희정, 「기장 안적사 석조석가여래삼존불좌상 연구」, 『향도부산』 44 (2022), pp. 228-234).
6) “其寺老僧戒英者引勸爲主者則遠願寺佛像三尊後新興寺佛像阿彌陀佛一尊造成也北三百里於川叱谷也而其地本以稱丹土積之佛身而曰不常瑞也其地造成一尊水來海口於仙上舟檝於入寺也”(「2021년 문화재위원회 동산문화재분과위원회 제6차 회의자료」, p. 180).
7) 「蔚珍 佛影寺 應眞殿 石造羅漢坐像 造成發願文」 1677년 7월 10일(송은석, 「蔚珍 佛影寺의 佛像과 彫刻僧 : 尙倫, 卓密」, 『동악미술사학』 17 (2015), p. 373의 석문을 재인용).
12) 이보다 후대의 사례이긴 하지만 해남 대흥사 천불전에 모셔진 불석제 불상 역시 경주에서 조성하여 해로를 통해 이운하였음이 알려져 있다. 특히 대흥사 천불전 중 일부 존상의 경우 불상을 모신 배가 표류하여 일본에 경유하게 된 것으로도 유명하며, 당시 불상 조성의 책임을 맡았던 楓溪賢正은 이를 『日本漂海錄』이라는 기록으로 남기기도 하였다.
13) “願文」太淸康熙三十八年己巳之冬十二月全羅左道昇平府東嶺靈鷲山興國寺」五十三佛造成化主淸信士金汝重年來四十之餘無(忽然)師自發心靑春朱夏聚落」求化召良工運美石敬造如來像...鍊石畵工秩 印戒比丘 思敏比丘 哲明比丘 雷暈比丘 弘運比丘」六淸比丘」演敏比丘…” 『한국의 사찰문화재-광주광역시·전라남도 자료집』 (문화재청·(재)문화유산발굴조사단, 2006), p. 244.
14) 소영 신경은 편양 언기의 법맥을 이은 환적 의천(1603~1690)의 제자로 단응, 탁밀 등이 수조각승으로 참여한 보덕사 목조아미타삼존좌상(1687), 봉황사 삼세불상(1692), 광흥사 목조지장시왕상(1692), 예천 대곡사 석가삼존십육나한상(1694), 쌍계사 사천왕상(1705) 등의 주요 불사에 증명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용문사 목각아미타구품도(1684)의 경우 ‘증명’에는 종현이 이름을 올리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영 신경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음이 알려져 있다. 소영 신경이 관련 기록의 맨 앞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유일 것이다(소영 신경이 참여한 불사와 각 불사에서의 역할은 한길중, 「朝鮮後期 木刻說法像 硏究」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18), pp. 125-126 참조). 다만 용문사, 대승사 목각아미타구품회도의 경우 증명으로 宗現이 이름을 올리고 있는데, 종현은 소영 신경의 제자일 것으로 추정되며, 실질적인 불사의 지휘는 신경이 주도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한길중, 위의 논문, p. 130). 특히 1692년 제주 영조사 소장 목조아미타여래삼존불감 발원문에는 단응이 소영 신경의 門人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에 허형욱은 단응과 소영 신경의 관계에 대하여 단순한 승려 문중 개념이 아닌 인맥망을 포함한 유연한 관계망의 일종일 것이라는 견해를 제시한 바 있다(허형욱, 「조선 후기 조각승 端應의 造像 活動과 性格에 관한 고찰」, 『동악미술사학』 32 (2022), p. 185).
17) 해당 불사에 투삼은 “比丘透三領募衆緣刻此一卷”으로, 색난은 “色難施租十九石助刊此經”이라 하여 각각 간행에 시주한 사실을 밝히고 있으며(조선시대 불서인명 DB(https://kabc.dongguk.edu/)), 주지하듯 낙안 징광사는 벽암대사의 법맥을 계승한 백암 성총이 머물며 『가흥대장경』을 편집 판각한 사찰이기도 하다. 이로 미루어 투삼과 색난은 모두 벽암 문중과 깊은 관계 하에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18) 1673년 소재사 석조석가삼존상 원문 “佛像緣化秩 證明 無學和尙 懶翁和尙 志空和尙 持殿 寶益 比丘 畵員 敬坦 比丘 印全 善英 弘察 道宗 大熙 法惠 學連 供養主印岑 比丘 斗英 比丘 來往 覺信…”; 1675년 소재시 시왕상 명문 “緣化秩 證明 誌公和尙 無學和尙 懶翁和尙 持殿 宝軒 別座淸學 來性弘正 供養主灵坦 畵員 守日 仅唯 道堅 精日 印玄 敬運 浄王 宝灵 祖悅 淸學 㕵堅 仁發…”
19) “緣化秩 證明誌公和尙 持殿 尙文比丘 畵員 勝湖比丘 尙倫比丘 學淨比丘 卓文比丘 天潭比丘 宝藏比丘 呂岑比丘 竺令比丘 禪俊比丘 法眼比丘 處屹比丘 守衍比丘 處行比丘 儀淨比丘 法宗比丘 敏俗比丘 天龍 保体 海發 保体 供養主 玉熙比丘 玉定比丘 海玉比丘 別座 熙尙 比丘 金唜立兩主 化主 凞卞比丘”
20) 지공 화상의 본래 한자명은 指空으로 위의 발원문들에서 나타나는 志公. 誌公과는 한자 표기에서 차이가 있으나, 나옹화상, 무학화상과 같이 명기된 것으로 미루어 이 역시도 고려의 고승인 指空을 포함한 삼화상을 의도한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21) 목조불 혹은 소조불의 발원문에서는 ‘증명’을 생략하는 사례 역시 드물다. 다만, 1680년 보성 개흥사 관음보살좌상의 조성 시에는 ‘증명’을 생략하고 대신 조각승 색난의 소임을 ‘腹莊所入五甁五寶五香五葉兼施主良工’으로 기입하고 있다. 이에 따르면 해당 불사 시 조각승 색난은 불복장 납입에 필요한 각종 물목을 준비하여 시주하고, 더불어 조각승으로도 참여한 것으로 보여 흥미롭다. 다만, 증명을 생략하는 사례는 색난의 불상 조성, 혹은 17세기 후반의 불상 조성 사례 중에서도 드문 사례에 해당한다. 특히, 개흥사 상의 사례는 불복장 물목의 거의 전체를 조각승이 준비하는 경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불석제 불상의 예들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인다. 발원문의 내용은 최성은, 「보성 開興寺 목조관음보살좌상을 통해 본 조선후기 조각승 色難」, 『한국사학보』 62 (2016), pp. 104-150에서 인용하였다.
22) 조선 후기 삼화상의 추념이 두드러지는 경향과 관련하여, 임진왜란 이후 國家再造의 과정에서 태조 이성계와 더불어 무학대사, 그리고 무학의 스승인 나옹과 지옹 화상의 위상 역시 재고되었으며 이것이 17세기 이후 삼화상에 대한 추념으로 나타난다는 견해가 제시된 바 있다. 연구에 따르면 무학대사의 위상 재고와 더불어 불교계 고승들의 삼화상 추념은 17세기 전반 이후 확산되며, 이에 따라 17세기 이후의 불교 의식집에서도 삼화상의 위상은 점차 두드러지게 되었다(황인규, 「조선시대 三和尙(지공·나옹·무학)의 위상과 추념」, 『정토학연구』 27 (2017), pp. 126-134).
23) 관련하여, 1769년 『제반문』의 경우 조선 전기부터 간행되어 온 『제반문』의 체제와 내용을 새롭게 정비하고 변화를 주었다는 선행 연구가 있으며, 연구에서는 변화의 배경에 대하여 당시 새롭게 부상한 환성 문중이 시도한 새로운 변화로 지적하기도 하였다(이용윤, 「조선후기 鞭羊문중의 佛事와 僧侶匠人의 활동」, 『미술사연구』 32 (2017), pp.152-153). 그렇다면 삼화상이 爲作證明으로서 의례집에 수록되는 것 역시 조선 후기 각지에서 설행되던 의식들을 취합, 정비하고 일신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의례집에 수록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5) 조각승 守衍의 경우, 1619년 조성한 서천 봉서사 목조아미타여래삼존자상과 같이 證明과 화원의 역할을 겸한 예가 있다. 다만, 수연은 1625년 조성한 나주 다보사 16나한상의 일부 발원문에서 화원과 증명으로 동시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반면, 같이 조성된 또 다른 나한상의 발원문에서는 證明에 靈慧比丘라는 별도의 인물을 표기하고 있다(김희경, 「수연(守衍) 作 나주 다보사 영산전 16나한상(1625)과 그 의의」, 『미술사와 문화유산』 3 (2014), pp. 118-119). 이 외에 1636년 강화 전등사 명부 존상 중 오도전륜대왕의 발원문에서도 수연이 화원질과 동시에 ‘兼證明’이라고 적혀 있는 동시에, 동반 조성된 지장보살좌상과 오관대왕상 발원문에서는 증명에 坦悟라는 스님이 나타난다(최선일, 「강화 전등사 木造地藏菩薩坐像과 조각승 守衍」, 『인천학연구』 18 (2013), pp. 214-215). 초강대왕상, 염라대왕상, 변성대왕상 등의 발원문에서도 수연의 앞에는 별도로 ‘證明坦悟’라고 적혀 있다(『한국의 사찰문화재-전국편』 (문화재청·(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14), pp. 196-199). 특히 본고에서 논하는 불석제 불상을 제외하고 수연 외에 조각승이 증명을 겸하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으며, 때문에 기존의 연구에서는 수연을 당시까지 알려진 조선 후기 발원문 중에 유일하게 증명과 화원을 동시에 맡은 것으로 보기도 하였다(최선일, 『17세기 조각승과 불상 연구』 (한국연구원, 2009), pp. 27-58). 즉, 조각승이 증명과 화원을 겸하는 것은 매우 특수한 양상이며, 이는 아마도 조각승 수연이 가지는 특징 중 하나일 가능성도 있다. 17세기 전반 수연이 증사와 화원으로서 수행한 각각의 역할 등에 대해서는 본고의 주제와는 별개로 보다 심도 깊은 검토가 필요할 것이다. 또한, 수연의 활동 시기 역시 불석제 불상이 유행하기 이전으로 불석제 불상에서 조각승이 증명을 겸하는 것과는 시간적 간극이 있는 것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26) 봉황사 목조삼불좌상의 경우 불상 내부의 묵서명을 비롯하여, 대좌, 불패 등에서 다양한 묵서가 발견되었다. 소영 신경의 증명과 수화승 단응을 비롯한 화원들의 명칭, 대좌를 조성한 탁린 등 소임자들의 역할과 이름은 대부분 일치힌다. 다만, 삼존상과 본존불 대좌는 1692년에, 좌우 협시불의 대좌는 1694년에 각각 조성하여 2년의 간극이 있다. 이러한 시간적 격차에 대해서는 조성 당시 松禁令 등으로 인한 목재 부족과 동시기 진행된 광흥사 명부전 불사 등을 원인으로 지목한 선행 연구가 있으며, 본 발표에서 대좌와 전패 등의 기록 등도 해당 논고를 참고하였다(고선영·임영애, 「端應의 安東 鳳凰寺 三世佛坐像 및 三殿牌 연구」, 『美術史學』 42 (2021), pp. 21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