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甘露圖에 도해된 여성상과 그 의미 **

The Representation of Women in Kamnodo of the Chosŏn Dynasty and Its Significance*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4;323():37-68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September 30
doi : https://doi.org/10.31065/kjah.323.202409.002
**Head/Exhibition Division, National Museum of Korea
정명희**
**국립중앙박물관 전시과장
*본 논문은 리움미술관과 한국미술사학회, 하버드대학교 한국학연구소가 공동주최한 국제학술대회 〈한국 미술과 젠더〉에서 발표한 논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2023. 9. 22.). 지정 토론과 조언으로 연구의 논지를 보완할 수 있게 해주신 캔자스대 마야 슈틸러, 서울대 이주형 교수님께 감사드린다.
Received 2024 August 25; Revised 2024 September 2; Accepted 2024 September 11.

Abstract

불행한 영혼을 위한 施食 절차를 그린 감로도에는 사부대중의 주요 구성원인 비구니와 우바이를 비롯해 생업에 종사하는 다양한 여성이 도해된다. 유교사회는 여성의 종교 활동을 금지시켰으나, 남녀의 구별 없이 수행을 독려하는 불교의 교리는 여성 신도에게 평등의 가치를 알려주며 서원을 이뤄나가는 성취감과 해방감을 주었다. 현존하는 70여 점의 감로도 중 비구니가 도해된 감로도는 40점 정도로, 비구니를 도해한 귀중한 사례다.

한편 상궁이나 사당처럼 전문직임을 지닌 여성은 감로도의 주요 도상으로 그려졌을 뿐 아니라 실제 감로도 제작의 후원자로 활약했다. 여성신자들의 지속적인 불사 후원은 경전의 내용을 한글로 언해하는 작업이나, 시각적인 재현물을 앞에 두고 경설을 듣는 방식, 즉 감로도와 같은 서사구성을 지닌 불화가 활성화되는데 기여했다. 감로도는 믿음이나 신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세계로 끌어왔다는 점에서 종교화 영역에 속하지만, 기록화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영혼 구제를 위해 제작되었지만 공동체의 이상이나 욕망, 때로는 공포도 담겨 있어 당시의 사회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감로도에 표현된 함의와 변화를 살펴보면서 종교미술에 담긴 젠더 인식의 한 측면을 고찰할 수 있다.

Trans Abstract

In the Buddhist paintings known as Nectar Ritual Painting (Kamnodo 甘露圖), which depicts the ritual of food offering (sesik 施食) for hungry ghosts (agwi 餓鬼), there are various representations of women, including nuns and laywomen, engaged in different roles. Although Chosŏn society was built upon Neo-Confucian ideals that imposed restrictions on women's religious activities, Buddhism, which promote religious practice without gender discrimination, offered female practitioners a sense of equality, fulfillment in their vows, and liberation. Of the seventy known works of Kamnodo, around forty feature depictions of nuns, providing valuable historical evidence about Buddhist nuns and their representation. In addition, women in professional roles within Chosŏn society, such as court ladies (sanggung), female shaman and female entertainer (sadang), are depicted as central figures in Kamnodo. Importantly, these women often acted as patrons for the creation of such painting. The continued Buddhist sponsorship from female devotees contributed to the translation of sacred scriptures into Han'gŭl and fostered the development of narrative painting genres like Kamnodo, which were used as visual aids in Buddhist lectures. While Kamnodo is primarily a religious painting aimed at making intangible spiritual beliefs visible, it also serves as a historical record. Created for the salvation of souls, it reflects the ideals, desires, and, at times, the fears of the community, offering key insights into the social conditions of the time. By examining the meanings and transformations seen in Kamnodo, we can gain a deeper understanding of gender perception in Chosŏn Buddhist art.

Ⅰ. 머리말

불행한 영혼을 위한 施食 절차를 그린 감로도는 풍부한 회화 요소와 서사 구조를 지닌 조선 불화의 특징적인 장르다. 水陸齋, 預修齋, 사찰의 四明日, 盂蘭盆齋, 薦度齋에 이르는 다양한 의식에서 존귀한 존재를 청해 공양한 공덕은 靈魂을 구제할 수 있도록 회향되었다. 감로도는 하단의례의 수요로 주불전에 항상 걸리는 불화가 되었지만, 각종 재난과 불행한 죽음만을 도해한 것은 아니다.1 예배자가 의례에서 마주하는 존재나 불화에 재현하고픈 주제도 현장감 있게 담겼다. 불화를 그리는 畫像法에서 點眼에 이르는 절차는 證明 승려로 대표되는 교단의 요구를 따랐지만, 중요하게 다뤄지는 모티브의 변화나 도상 선택에는 교리 이외의 여러 규범이 작용했다.

본 연구에서는 감로도를 중심으로 불화에 재현된 여성 이미지의 의미와 특징을 살펴보겠다. 감로도는 믿음이나 신념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세계로 끌어왔다는 점에서 종교화 영역에 속하지만 인물이나 장면을 포착한 기록화로서의 성격도 지닌다. 영혼 구제를 위해 제작되었지만 공동체의 이상이나 욕망, 때로는 공포도 담긴다. 감로도에 표현된 함의와 변화를 살펴보면서 종교미술에 담긴 젠더 인식의 한 측면을 고찰할 수 있다.

Ⅱ. 유교사회에서 불교를 믿으며 여성으로 산다는 것

1.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와 불교미술의 젠더

인구의 절반을 차지했던 여성은 역사 기록과 문헌에 이름도 잘 남아 있지 않지만, 과거에 비해 생활사나 문화사 등 여러 방면의 접근이 시도되고 있다.2 실록이나 『일성록』, 『승정원일기』와 각종 문집뿐 아니라 行狀이나 墓誌銘, 祭文, 傳, 遺事에 기반한 자료집 발간으로 그간 알려지지 않았던 자료가 소개되는 추세다.3 물론 사대부 남성이 작성한 기록은 다양한 계층의 여성을 보여주지 않지만, 어머니, 부인, 딸에 대한 정형적인 묘사에서 사회가 요구했던 이상적인 여성상을 인지할 수 있다.

여성은 문헌으로 기록된 사례뿐 아니라 시각화된 경우도 드물다. 비단 종교미술의 영역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조선시대 시각 매체는 주로 남성에 의해 그려졌다. 그렇다 보니 여성이 재현되는 경우가 드물며, 등장하더라도 문헌 기록과 마찬가지로 성별에 따른 특정한 규범이나 은연 중 강조한 鑑戒적 기능을 담고 있다.

왕실이나 종친, 유력자의 어머니와 같은 특정 계층의 여성은 불교 신앙의 강력한 후원자였다.4 왕실의 번영과 자손의 壽福을 기원하며 직접 참여한 불사 이외에 매개자를 둔 사례까지 확장해보면, 제작 주체로서 여성의 기여도는 알려진 이상으로 크다.5 이에 비해 왕실 여성 이외에 승단의 핵심 구성원인 비구니와 여성 신도인 優婆夷에 대한 연구는 본격적으로 진행되지 못했다. 불화에 재현된 사례는 한정적이지만 발원문이나 조상기, 복장물로 납입한 의복 등에서 주체적인 신앙 행위를 한 여성을 발견할 수 있다.

비구니와 우바이는 비구, 남성 신도인 우바새와 더불어 부처의 가르침을 따르는 네 부류의 사람을 일컫는 四部大衆의 중요 구성원이자 신앙인이었다. 조선왕조가 여성의 활동을 가족제도의 울타리 안에 제한했듯이 비구를 중심으로 하는 승려 조직의 보수성은 비구니 승단에도 영향을 미쳤다.6 종단 내의 구분이나 교단의 운영, 조직 체계와 계율에서 비구니는 비구에게 종속된 역할이었지만, 비구니 승단은 어려움 속에서 승가의 교육 체계와 계맥을 유지해왔다.7 조선 전기에는 왕이 타계한 후 왕비나 후궁이 비구니가 되었다. 특히 한양의 비구니 사찰은 도성의 신행 활동의 중심지로, 정업원이나 자수사, 인수사 등은 주요 信行 기구였다.8

조선은 국초부터 여성이 사원을 출입하는 것과 승속이 모연한 불사를 금했다. 『大典通編』 ‘禁制’에는 ‘유생이나 부녀자로서 절에 올라가는 자, 관리 집안의 여인으로서 직접 野祭나 산천제사, 성황제를 지내는 자는 장형 백대에 처한다’고 했다(Fig. 1). 유교 철학에서 이상적인 여성 이미지는 『內訓』, 『三綱行實圖』의 덕목에 초점이 맞춰 있었다.

Fig. 1.

「禁制」, 『大典通編』 “Kŭmje,” in Taejŏn t'ongp'yŏn, 1785, Chosŏn,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ttps://kdp.aks.ac.kr/)

성호 이익(1681~1763)은 「부녀자에 대한 가르침」에서 글을 읽는 것은 남자의 일이며, 부인은 조석과 때에 맞춰 의복과 음식을 준비하고 제사 지내고 손님을 맞이한다고 했다. 남성은 독서와 학문, 여성은 누에치기와 길쌈이라는 노동으로 구분하고, 여성의 영역을 가족관계 안에 묶어두었다. 그러나 양반가의 경우에도 가내 경제활동의 많은 부분은 여성 주도로 운영되었다. 집은 신발, 옷, 쌀, 술 등이 생산되는 공간이었기에 최근에는 길쌈, 농업과 노비 경영, 상업 활동을 비롯한 여성의 가계 경영권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9

불교계는 유교 가치에 부합하는 신념을 내재화하면서도, 유교가 대신할 수 없는 견고한 신앙 기반이 있었다. 爲政者들은 승속이나 남녀가 신분의 귀천없이 어울리는 것을 경계했으나 여성의 종교 활동을 막을 수는 없었다(Fig. 2). 실제 왕실의 종친과 비빈이 주축이 된 불사에는 일반 신도, 평민, 노비에 이르는 다양한 신분이 참여했다. 공적인 영역의 의사 결정과 사회 시스템은 부계사회로 공고화되었어도, 여성의 신앙 행위는 지속되었다. 출가자이든 재가신도로 수행하든, 남성과 여성 구분 없이 누구든 깨달을 수 있다는 불교의 가르침은 여성의 신앙 활동을 교리적으로 뒷받침했다.10

Fig. 2.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Kim Hongdo, Album of Genre Painting by Tanwŏn, 19th Century, Chosŏn, Ink and Color on Paper, 28×24cm, Treasure,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물론 여성이 여성의 몸 그대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사고도 오랫동안 유지되어. 『묘법연화경』 「제바달다품」은 여성은 남성 몸으로 변해 성불할 수 있다는 전거로 수용되기도 했다.11 그러나 진각국사 혜심(1178~1234)은 깨달음을 이루는 데는 승속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다고 했다.12 고려 말의 몽산덕이, 나옹 혜근, 태고 보우, 백운 경한 등은 여성에게 수행과 참선으로 자신 안의 佛性을 깨달을 수 있 도록 했다.

조선 후기에 유교 가치가 강화되어도 불교는 여성에게 신앙의 주체로서 살아가고자 하는 의지와 화두를 제시했다. 이는 여성의 바깥 출입과 종교 활동을 규제해 온 사회의 이미지와 상충된다. 조선시대 여성은 경전을 필사하거나 불상과 불화 조성을 후원하거나 뜻을 함께할 여성 신도를 모연하고 권면함으로써 불교 미술의 또 다른 제작 주체로 활약했다.

2. 우란분재의 전통과 어머니로서의 여성

전통시대 여성이 그려지는 경우는 일상적인 일이 아니었기에, 다양한 여성 이미지를 담고 있는 점에서도 감로도의 회화사적 의미는 크다. 역대 선왕 선후의 무리에는 왕실 여성이 등장하며, 의식에 봉청된 승려들 무리에는 비구니가 도해된다. 또한 社堂(寺黨)의 演戲나 市井 풍경에는 생업을 영위하며 살아가던 여성들의 일상이 담겼다. 물론 감로도의 여성 이미지에는 사회가 요구한 이상적인 젠더 관점이 깔려 있다. 하단에 도해된 ‘鰥寡孤獨’은 늙어 아내나 남편, 자식이 없는 사람, 혹은 고아처럼 외롭고 의지할 데 없는 사람을 말한다. 이리저리 떠돌며 음식을 구걸한다는 의미의 ‘遊離乞食’ 역시 국가의 통치가 백성 모두에게 미쳐야 한다는 사고에 기반한다. 백년해로를 약속한 부부의 싸움 장면은 지아비를 따르는 순종적인 부인의 모습을 암시한다. 출산과 산모의 죽음은 실제로도 여성 사망률의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는데, 감로도 도상에서도 강조되었다(Fig. 3).

Fig. 3.

〈감로도〉(세부) Nectar Ritual Painting (detail),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Hemp, 200.7×19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어머니로서의 여성은 조선시대 여성에게 부여된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었다. 감로도에는 ‘출가자의 어머니’라는 맥락이 담겨 있어 흥미롭다. 조선시대 出家沙門은 ‘부모를 버리고 인륜을 저버린 자’로 비판받았기에, 효는 불교계가 유교질서 내에서 살아남는 데 있어서도 중요한 개념이었다. 고려에서 조선시대를 거쳐 다양한 판본으로 유포되었던 『佛說大目蓮經』에는 감로도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餓鬼의 출연 연원이 담겨 있다.13

부처의 제자 중 신통력이 뛰어났던 목련존자는 어머니가 아귀도에 빠져 피골이 상접한 모습을 본 후 부처님에게 어머니를 구제할 수 있는 방법을 묻게 된다. 그러나 목련의 노력에도 아귀를 벗어난 어머니는 개로 태어나게 된다. 『불설대목련경』 변상도에 도해된 개는 한때 아귀였던 목련의 어머니다(Fig. 4).14 개로 변한 어머니가 다시 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게 된 것은 목련이 시장에 가서 버들잎과 잣나무 가지를 사와 우란분재를 지냈기 때문이다. 1589년 약센지 소장 〈감로도〉에서 이 장면은 화면 하단에 우두커니 앉은 개 한 마리로 표현된다. 승려가 된 아들은 아귀로 변한 어미니를 구제해낸다.15

Fig. 4.

『불설대목련경』 Sutra of Great Mulian, 1536, Chosŏn, Soyosan Yŏn'gisa Temple,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snu.ac.kr/)

고려시대부터 꾸준하게 설행된 우란분재는 승려들의 夏安居가 끝나고 해제하면서 공양을 올리고 법회를 열어 孤魂를 천도하는 날이었다.16 1106년 예종은 궁궐의 長齡殿에서 숙종의 명복을 빌면서 우란분재를 베풀고 승려를 불러 『목련경』을 강독하게 했다. 중국어 학습서인 『朴通事』(1347년)에는 원나라 수도 大都에 있던 慶壽寺의 우란분재 모습이 전한다. 慶壽寺는 고려 출신의 승려들이 원의 승려나 고위층과 교류하며 불교 의식을 주관하거나 경전을 강설하고 교류했던 곳이다.

7월 15일은 여러 부처님이 解夏하는 날이다. 경수사에서 여러 亡靈을 위하여 우란분재를 한다기에 나도 구경을 갔다. 壇主는 고려 승려인데, 새파랗게 깎은 둥근 머리에 희고 청정한 얼굴로 총명과 지혜가 남달랐다. 唱하고 읊는 소리가 사람들을 압도하였고, 經律論에 모두 통달하고 德行이 뛰어난 승려였다. 『目連尊者求母經』을 說하는데, 僧尼道俗과 선남선녀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모든 사람들이 합장하고 귀 기울여 소리를 듣고 있었다.17

우란분재를 이끈 고려 승려는 『목련경』을 강설했다. 이들 앞에 한 폭의 그림이 걸려 있었다면 훨씬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이다.18 실제로도 매해 음력 7월 15일에 조상의 천도를 위해 집집마다 개최하는 우란분재에 〈백의관음도〉를 걸고 분향했다는 기록이 전한다.19 불교의례를 진행할 때 아미타계통의 불화나 관음보살도처럼 의례의 주존을 그린 불화를 거는 경우와 경전의 내용을 시각화한 그림을 두고 강설하는 두 방식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법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 등 관음계통 경전에서는 火亂, 水亂, 도적에게 위협당하는 盜賊亂, 刑亂 등 어떤 환난을 만나도 관음보살을 염하면 고통을 사라지게 할 수 있다고 했다. 재난을 그린 불화나 변상도는 다라니를 염송하는 방식과 결합되어 인기를 누렸다.

이에 비해 1432년 효령대군의 한강 수륙재 기록에 등장하는 ‘觀聽’이나 ‘講說’은 두 번째 방식에 해당한다.20 수륙재에는 ‘천당과 지옥의 고락과 死生과 禍福의 응보를 보여 주는 그림을 보고 觀聽하기 위해’ 귀천과 남녀 논할 것 없이 많은 이들이 모여들었다.21 그림이라는 매체는 신앙 의례를 돕기에 매우 유용했기에 여성들의 신행 활동에서 큰 호응을 받았다. 無主孤魂의 천도를 기원하는 수륙재는 다양한 신앙적 수요와 구제의 서사를 시각화한 감로도의 성행을 가져왔다.

우란분재는 특히 여성들의 참여가 높았다. 성현(1439~1504)의 『용재총화』 에는 ‘7월 15일은 세속에서 百種이라 하는데, 僧家에서는 백 가지 꽃과 과일을 담아 盂蘭盆을 베풀었다. 한양의 비구니 절에서 매우 성행했는데, 부녀자들이 모여들어 미곡을 바치고는 돌아가신 부모의 혼을 불러 제사지냈다’고 했다. 『목련경』, 『우란분경』과 같은 경전의 언해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보여주는 감로도의 확산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불교 경전의 언해는 여성 신도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刊經都監에서 번역된 불경은 비빈, 상궁 등을 통해 여성 신도에게로 확산되었다. 궐내에서 훈민정음 관련 사무를 맡아보던 正音廳이나 책방에서는 불경이 간행되었고, 『王郞返魂傳』 같은 불교계 소설은 문정왕후 등 궁중 여성에게 읽히기도 했다.

불경의 한역은 세종의 아내이자 세조의 어머니 소헌왕후가 타계하면서부터 본격화되었다. 경전을 언해하는 작업에서 여성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음을 간경도감에서 간행한 『능엄경언해』와 『금강경언해』의 御製跋文과 『조선왕조실록』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22 세조가 친히 口訣을 붙이면 貞嬪 韓氏가 御前에서 받아 적었고, 사당 惠瓊, 道然, 戒淵, 信志, 道成, 覺珠, 淑儀 朴氏 등 7명의 여성이 구결을 쓰면서 소리 내어 읽어가면서 교정[唱準]을 보았다.23 ‘唱準’은 소리 내어 읽으며 부자연스러운 부분을 교정한다는 의미다. 구결을 교정한 후에는 한계희와 김수온이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고, 『동국정운』에 의거해 정음을 표기한 번역문은 승려 신미 등의 검토를 거쳐 세조가 확정을 지었다. 그 후에 궁녀 典言 조두대가 임금 앞에서 번역문 전체를 낭독해 내려갔다고 한다.24 왕후 뿐 아니라 사당과 상궁 등 여성이 불경을 언해할 때 구결을 넣고 교정하는 역할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다.

목련존자처럼 비구가 속가의 돌아가신 어머니를 위해 발원한 佛事 기록은 많다. 1729년에 조성된 창원 〈성주사 감로도〉는 비구 태명이 과부로 수절한 모친 朴召史의 영가 천도를 위해 발원했다(Fig. 5). 지장보살과 함께 한 목련존자는 비구가 된 아들의 투영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칠여래 옆에 선 백의관음보살과 상단의 정토 연못은 어머니의 정토왕생을 기원하는 발원내용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어머니를 고통에서 구한 목련존자는 ‘출가는 불효’라는 관념에 대해 불교 교단이 선택할 수 있는 파급력 있는 메시지였다.

Fig. 5.

性澄 등, 〈성주사 감로도〉 Sŏngching and Other Monk Painters, Nectar Ritual Painting of Sŏngjusa Temple, 1729, Chosŏn, Color on Silk, 267×190cm, Treasure, Sŏngjusa Temple (Busan Museum, Ch'iyu ŭi sigan puch'ŏ rŭl mannada, p. 165)

감로도에 도해된 여성 인물 중에 역대 선왕과 왕후가 있다(Fig. 6). 이들은 불교의례에서 宗室壇에 봉청된다. 왕후는 조선 전기 불교 후원의 실질적인 주체였다, 왕실 어른인 경우가 많았음에도 이들의 불교 후원은 관료 계급의 저항을 받았다. 유신들의 반대에 대해 왕은 ‘慈殿이 하시는 일을 어찌 자식이 막는가.’라는 효의 논리로 나갔고, 사간원과 유신은 부모가 잘못된 일을 하는 것을 보고도 막지 않으면 효에 어긋난다며 대립했다.

Fig. 6.

祖文, 〈감로도에 도해된 선왕과 왕후〉 Cho Mun, The Former King and Queen in Nectar Ritual Painting, 1580, Chosŏn, Color on Hemp, 252.7×141.5cm, Private Collection (Hoam Museum of Art, Chinhŭk e p' in yŏnkkot ch'ŏrŏm, p. 58)

불화에는 제석천이나 범왕의 무리를 왕후로 상징되는 여성 모습으로 도해하곤 했다.25 尙宮 俞氏가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간행한 『華嚴經疏注』(1556년)에서도 여성 인물은 天部衆이 수행자를 이끌고 來迎하는 장면처럼 표현되었다. 17세기에 이르면 왕후 이미지는 비중이 축소되고 현실의 시주자나 천도 의례를 의뢰한 인물들로 주제가 바뀐다. 재단 앞에서 절을 하거나 상복을 입은 齋主나 喪主와 같은 인물은 대부분 남성이었지만, 1790년 〈용주사 감로도〉처럼 천도 의례에 참여한 여성을 표현하기도 했다.

Ⅲ. 감로도에 재현된 여성 이미지와 그 의미

1. 비구니: 수행의 주체로서의 여성

불교에 귀의해 佛道를 닦는 여성 출가자인 비구니는 비구와 더불어 종단을 이끌고 가는 핵심 그룹이다.26 이들은 궁중의 嬪·後宮·宮女 및 士族 부녀자의 불교활동을 지지하거나 후원의 매개자가 되었다. 현존하는 비구니 관련 사료는 상류층에 한정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회적 위상이 낮아진 조선 후기에도 비구니의 활동과 역할은 계승되었다. 『천지명양수륙재의범음산보집』의 「孤魂請」이나 「僧魂請」 등 의례에서 비구와 비구니는 하나의 그룹으로 함께 청해진다.

‘일심으로 집을 버리고 승려가 되고 속가를 버리고 비구니가 된 이와, 부모를 포기하고 멀리 떠나 구름처럼 노니는 이와, 친지를 이별하고 참선하고 도를 묻고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경문을 논의하고, 가는 곳 마다 스승을 찾으면서 바랑을 메고 발우를 짊어진 채 주장자를 들고 치달리며, 물을 건너고 산을 오르면서 고달프게 오고 가며 몸을 태우고 팔을 지지면서 법을 위해서는 온몸을 잊고 살다가 성인의 因을 만나지 못하고 헛되이 수고만 하다가 목숨을 잃은 일체 과거 오래된 비구와 비구니 등 대중의 혼령께 귀명하옵고 받들어 청하옵나니, 오직 바라건대 부처님의 신통력을 받들어 이 법회에 강림하여 공양을 받으소서.’27

의식집에는 의례를 진행할 때 이들이 맡는 역할과 위치를 함께 수록했다. 사찰의 큰 행사를 마치고 가마를 다시 봉송하는 절차에도 가마를 위의하는 무리 중 비구니는 비구와 나란히 등장한다. 의식문에서는 이처럼 비구와 비구니의 존재를 차별없이 나타내지만, 그림에서는 비구니는 생략하고 비구만을 그리는 경우가 많다. 『관세음보살보문품』에서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의 몸으로써 제도할 이에게는 비구·비구니·우바새·우바이의 몸을 나타내어 설법’한다는 내용을 도해할 때도 대부분의 판본에서는 비구로 나타냈다. 1550년 인종비 공의왕대비가 발원한 〈도갑사 관음삼십이응신도〉에 도해된 비구니의 표현은 예외적이다(Fig. 7).

Fig. 7.

이자실, 〈도갑사관음삼십이응신도〉(세부) I Chasil, The Thirty-two Manifestations of Avalokitesvara Painting of Togapsa Temple (detail), 1550, Chosŏn, Color on Silk, 235×135cm, Chion-in Temple, Kyoto, Japan (Kyushu National Museum, Uruwashiki inori no bi–Korai·Chosen jidai no Bukkyo bijutsu, p. 45)

감로도의 장면은 의식집에 수록된 의식구나 단계별 절차와 일치해 불화가 실제 의식을 충실하게 담았음을 알 수 있다.28 1589년 〈약센지 감로도〉 등에서 靑衣을 입고 합장한 證師나 금강령을 들고 경상 앞에 앉은 法師를 구분해 표현한 것도 이러한 사례 중 하나다.

현존하는 70여 점의 감로도 중 비구니가 도해된 작품은 40점에 달한다.29 승려의 진영을 비롯해 일반 불화에서도 비구니가 그려진 예는 드물기에, 감로도에 도해된 비구니는 귀중한 사례다.

1580년에 제작된 감로도는 ‘下壇幀’으로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는 가장 오래된 예다. 비구니는 주로 범패승 무리에서 확인할 수 있다(Fig. 8).30 금강령을 든 노승을 선두로 小金, 鉢鑼, 磬子, 법고를 치는 범패승을 표현했다. 비구니는 안면을 백색과 분홍색 안료로 채색해 비구니임을 나타냈고, 검정이나 짙은 회색조가 들어간 복건 형태의 모자를 착용했다. 이는 비구를 그릴 때는 없던 방식이다. 긴 눈썹이나 수염을 표시하기 위해 안면에 옅게 먹으로 바림을 한 비구와는 명확하게 구별된다.

Fig. 8.

祖文, 〈감로도〉(세부) Cho Mun, Nectar Ritual Painting (detail), 1580, Chosŏn, Color on Hemp, 252.7×141.5cm, Private Collection (Hoam Museum of Art, Chinhŭk e p' in yŏnkkot ch'ŏrŏm, p. 59)

리움 소장 감로도에서도 비구와 비구니 그룹을 각각 도해했다(Fig. 9). 비구니는 16세기부터 표현되기 시작해 18세기에는 널리 그려지게 된다. 그러다 점차 1755년 〈국청사 감로도〉처럼 방제에는 ‘比丘比丘尼’로 기재했으나 비구니는 그리지 않고 비구만이 확인된다.

Fig. 9.

〈감로도에 도해된 비구니〉 Buddhist Nuns in Nectar Ritual Painting,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265×294cm, Leeum Museum of Art (Leeum Museum of Art, https://www.leeumhoam.org/leeum)

의식집의 절차를 기록한 매뉴얼이나 텍스트에서도 비구니는 비구와 더불어 의식에 참여했다. 사부대중의 일원으로 분명히 존재하며 역할을 수행했으나 그리지 않는 도상이 된 것이다. 의례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는 왜 일어나는 것일까. 조선 후기에 유교 사회로의 진입이 가속화되고 比丘尼院 폐찰이나 비구니 강제 환속과 같은 정책이 시행되었기 때문일까.

여성 신도를 기반으로 하는 불교계에서 비구니는 교육이나 포교, 신행 활동을 왕성하게 지속해 왔다. 몰락한 왕실 여성이나 사족 집안 출신의 여성 뿐 아니라 사회적 신분이 미천한 출신의 여성 출가 역시 계속되었다. 조선 후기에도 비구와 비구니 승단 간에는 단일 승가라는 결연이 있었다. 백곡 처능(1617~1680)이 현종의 척불정책에 상소하는 「諫廢釋敎疏」를 짓게 된 것도 서울의 비구니들을 대상으로 취해진 정책에 항거한 것이다.31

여성을 그린다는 것 자체와 어떤 모습으로 그리느냐의 선택에는 그 시대의 젠더 관점이 담긴다. 비구니는 16세기 감로도에서부터 나타나 18세기 이후에는 점차 사라지는 추세지만, 재를 준비한 인물이나 연희를 베푸는 사당 무리, 현실의 장면을 묘사한 다양한 소재 중 여성의 비중은 전체적으로 증가한다. 감로도의 주제가 다양화되면서 비구니 도상의 중요도는 사라지고, 다른 테마가 강조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교단 내에서도 비구 무리만으로 승려 그룹을 대표하는 이미지로 충분하다고 인식되었는지 비구니의 재현은 점차 사라지게 된다.

2. 상궁: 왕실후원의 매개자에서 주체로

조선왕실의 의궤에 등장하는 기행나인, 상궁, 향차비, 시녀 등의 궁녀는 왕실의 주요 구성원이다(Fig. 10). 內命婦에 소속되어 女官으로도 불렸는데, 양반 관료 조직에 대응해 정1품 빈부터 종4품 숙원까지는 내관, 정5품부터 종9품까지는 상궁층으로 궁관이라 했다. 『經國大典』에는 궁녀 조직의 서열, 업무, 품계만 규정하고 정원이나 선발원칙과 같은 구체적인 운영은 궁중에서 하도록 했기에 궁녀에 관한 독립된 기록은 적다(Fig. 11). 그러나 이들은 궁중의 일상을 지탱하는 중요 구성원으로, 왕실의 법도와 예의를 익혀 왕과 왕실 가족의 비서 역할을 수행했다.

Fig. 10.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세부) Yŏngjo Chŏngsun wanghu karye togam ŭigwe (detail), 1759, Chosŏn, Ink and Color on Paper, 47.3×33.6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11.

『경국대전』 Kyŏng guk Taejŏn, 1485, Chosŏn, 32.5×21.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1586년 〈백자청화 김상궁묘지〉에서도 이러한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Fig. 12). <김상궁 묘지>에는 선조가 어린 시절부터 자신을 보살펴온 상궁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녀는 덕흥대원군의 궁녀였다가 선조의 유모를 맡았으며 선조가 즉위한 해에 상궁이 되었다

Fig. 12.

〈김상궁 묘지〉 Tombstone Record of Upper Court Lady Kim, 1586, Chosŏn, Blue and White Porcela in, 25.6× 17.8×1.0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상궁은 생업에 종사하는 여성 중 주목되는 존재이다.32 통상 13세 무렵 궁에 들어와 입궁 후 30년이 지나면 상궁이 되는데, 고립된 환경으로 독실한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경국대전』 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들은 국가기관의 주요 구성원들처럼 품계를 지니고 국가로부터 월급을 받았다.

조선 문반과 무반 합한 총인원 5,000명 중 궁녀는 500~600명이었다고 하니, 전체 관료 조직의 10%에 달하는 큰 비중이었다. 1895년 각 처소 궁녀들의 월급 목록인 <乙未年粉料件記>를 보면, 월급은 쌀, 콩, 북어의 현물로 지급되었다. 궁녀는 1년에 10가마의 곡식을 보장받았고 상궁이 되면 매년 수십 가마의 쌀 받을 수 있었다. 예상 외로 높은 수입을 올리는 여성 노동자로 재산 증식에 열심인 궁녀도 있었다.

1681년 〈불영사 감로도〉는 3명의 상궁을 대시주자로, 8명의 여성 신도가 동참해 조성했다(Fig. 13). 16세기 이전의 상궁 시주는 왕실의 대비전하 등이 주최하는 불사에 참여하는 방식이었다면, 점차 상궁이 주도해 일반 신도를 모연하게 된다.33 국왕의 배우자인 후궁이나 비빈이 유교적 생활관을 바탕으로 엄격한 제한과 규율 속에 살았듯이, 상궁 역시 궁궐에 살면서 정신적인 부담과 외로움을 느꼈을 것이다.

Fig. 13.

哲玄 등, 〈불영사 감로도〉 Ch'ŏrhyŏn and other Monk Painters, Nectar Ritual Painting of Puryŏngsa Temple, 1681, Chosŏn, Color on Hemp, 183.5×184.5cm, Treasure, (formerly) Uhak munhwa chaedan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

1626년 『묘법연화경』, 『참경』, 『약사경』, 『장수경』, 『지장경』, 『금강경』을 필사한 상궁 최혜원의 사례 역시 중요하다. 그녀가 필사한 『법화경』의 발문에는 ‘원컨대 (사경의) 공덕으로 다음 생에는 남자로 변하여 부처님의 도량에 들어가 부처님을 뵈옵고, 듣지 못한 법문을 듣고 보지 못한 진리를 보아 영원히 번뇌로부터 벗어나 마침내 부처를 이루게 하소서.’라는 서원이 적혀 있다(Fig. 14).34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깨닫고자 경전을 사경한다는 신앙 주체로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Fig. 14.

〈상궁 최혜원이 쓴 서원〉, 『묘법연화 경』, The Prayer Text Written by Upper Court Lady Ch'oe Hyewŏn, in Saddharma Pundarika Sutra, 1626, Chosŏn, Ink on Paper, Wŏnhyosa Temple, Ŭijŏngbu (Photograph by the author)

또 다른 상궁의 후원 사례로 1764년 개심사 명부전 불사를 들 수 있다.35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와 월성위 김한신이 大施主者로 참여한 〈지장보살도〉에 상궁들이 등장한다. 그런데 김한신과 화순옹주는 불화가 제작되기 6년 전에 이미 세상을 떠났다.36 화기를 살펴보면 이름을 앞세우지 않은 상궁 金成梅가 이 불사의 실질적인 시주자로, 화순옹주와 관련 깊은 인물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상궁은 돌아가신 자신의 아버지를 위해 불화를 조성하면서 화순옹주와 부마를 시주자로 올렸다.

상궁이 불교미술의 후원자로서 주체적인 활동을 이어나가는 경향은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1883년 〈개운사 감로도〉에서 시주에 참여한 26명의 상궁은 모두 불교식 法名을 지니고 있다. 1887년 〈경국사 감로도〉, 1890년 〈불암사 감로도〉 역시 상궁들이 주도하고 淸信女로 기재된 여성 신도가 연합해 조성한 사례다. 이처럼 조선시대 불사의 후원 주체로 활약했던 매개자 중 경제력을 기반으로 한 상궁의 활동을 주목할 수 있다.

3. 무녀, 사당: 생업에 종사하는 여성

19세기 감로도에는 주막과 대장간, 포목전, 어물전 등 상업에 관련한 시장의 활기찬 풍속이 담겼다(Fig. 15). 소달구지에 짐을 싣고 가는 상인, 놀이 장면과 구경하는 인물들, 도시 주변 유곽 문화에서 여성은 주막이나 장시에서 일하는 모습으로 남성과 더불어 자연스럽게 표현된다. 사찰 행사에 참석한 인물 중에는 머리에 가리마를 쓴 여성에 주목할 수 있다(Fig. 16). 이들은 주로 의녀나 기녀와 같은 특수직 여성이다. 평양에 부임한 관찰사를 위한 연향 장면을 그린 〈평안감사향연도〉 등에서도 가리마를 쓴 기녀를 볼 수 있다(Fig. 17).

Fig. 15.

漢峰 瑲曄 등, 〈봉은사 감로도 속 주막, 장시에서 일하는 여성〉 Han Pong Ch'angyŏp and Other Monk Painters, The Women Working in the Tavern and Market in the Nectar Ritual Painting of Pongŭnsa Temple, 1892, Chosŏn, Color on Silk, 200×316.5cm, Pongŭnsa Temple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

Fig. 16.

漢峰 瑲曄 등, 〈봉은사 감로도 속 가리마를 쓴 여인〉 Han Pong Ch'angyŏp and Other Monk Painters, The Women Wearing a Karima in the Nectar Ritual Painting of Pongŭnsa Temple, 1892, Chosŏn, Color on Silk, 200×316.5cm, Pong ŭnsa Temple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

Fig. 17.

〈평안감사향연도 속 가리마를 쓴 기녀〉, The Courtesans Wearing a Karima in Welcoming Banquet for the Governor of P'yŏngan,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71.2×196.9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감로도의 다양한 인간군상은 수륙재에서 영향을 받았다. 수륙재에서 모든 영혼을 평등하게 천도한다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봉청했다면, 감로도에는 의식문에 등장하는 孤魂 뿐 아니라 도량에 모인 현실의 인물을 재현했다. 군중이 밀집한 행사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연희꾼은 ‘解愁樂士’, ‘師巫神女’, ‘散樂伶官’의 방제로 기록되었다. 이는 ‘정해진 거처 없이 돌아다니며 근심을 풀어주는 이’, ‘귀신을 불러주는 일을 하는 이’를 뜻한다.

의식집에는 ‘法界一切의 큰 무당과 신녀, 산악과 주관 악사와 같은 외로운 영혼’이나 ‘업보가 깊고 무거워 앞으로 받을 가보 역시 가볍지 않은 맹인 점쟁이, 地官, 귀신을 불러내어 섬기는 큰 무당과 신녀, 신선의 단약을 정제하고 달이는 법을 분명히 알지 못해 헛고생하는 도인, 도사와 女官, 시골 마을이나 성안에도 머무르지 않고 정처 없이 떠돌며 기이한 말과 행위로 세상 시름 풀어주는 악사, 시방법계의 온갖 삿되고 전도된 견해를 믿어 고통 속에서 죽은 영혼과 그 권속들’을 받들어 청한다고 했다.

감로도에는 사회의 한 축을 담당했지만 기록에는 남지 않은 여성의 모습이 담긴다. 이중 ‘師巫神女’는 巫業에 종사하는 여성을 말한다(Fig. 18). 조선은 한양의 무녀들을 活人署 주변에 모여 살게 하고 제도권 안에서 관리했다. 활인서는 역병에 걸린 사람을 돌보고 굶주린 백성을 구휼하는 업무에서 臨終까지 담당했다.37 무녀들은 재앙을 쫓고 복을 빌기 위해 지내는 국가 祈禳祭나 王家의 복을 비는 祈恩祭, 각 司에 소속된 공식 의례를 주재했다. 또한 한편으로는 사대부의 災厄招福이나 치병의례 같은 비공식적인 의례도 맡았다. 무녀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활동한 그룹 중 사당이 있다.

Fig. 18.

〈감로도에 재현된 巫女〉 The Shaman Depicted in Nectar Ritual Painting,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265×294cm, Leeum Museum of Art (Leeum Museum of Art, https://www.leeumhoam.org/leeum)

대둔사 종사를 지낸 蓮潭 有一(1720~1799)의 『釋典類解』에는 사부대중을 설명하며 ‘비구는 남승, 비구니는 여승, 우바새는 거사이며 우바이는 사당’이라고 정의했다. 우바새와 우바이의 어원은 출가하지 않은 재가신도이지만, 각종 歌舞戱로 생계를 유지하는 예인집단인 거사와 사당을 지칭하기도 했다. 리움 소장 〈감로도〉에 도해된 ‘우바새 우바이’ 역시 사찰의 불교행사를 이끄는 사당과 거사이다(Fig. 19). 그림 속 사당이 착용한 모자는 의원군 이혁의 부인 안동 권씨(1664~1722)묘 출토 복식처럼 실제 여성들이 착용한 모자로 출토된다. 이들은 여러 지역을 떠돌며 교역이 활성화된 場市에서 활동했으며 사찰과 밀접한 관련을 지녔다. 각종 재나 불교 행사에도 이들의 기예와 곡예는 인기가 높았다. 1682년 〈안성 청룡사 감로도〉는 사당패 근거지 인근에서 제작된 만큼 사당패의 묘사를 강조했는데, 공연과 연희는 18세기 이후 감로도의 주된 소재 중 하나였다.

Fig. 19.

〈감로도에 재현된 사당〉 The Shrine Depicted in Nectar Ritual Painting,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265×294cm, Leeum Museum of Art (Leeum Museum of Art, https://www.leeumhoam.org/leeum)

사당은 경제력을 기반으로 경전을 간행하거나 불상과 불화를 조성하거나 사찰을 중수하는 불사에 참여했다38 특히 한양 明月舍堂의 활동이 전국적으로 확인된다. 명월사당 출신이 참여한 경우, 사찰에서는 이들을 ‘京畿都城內’, ‘京內居住者‘, 때로는 ‘宗廟前 連三契 居住’로 기록했다. 이곳은 현재의 종로구에 해당한다. 서울에는 才人이 거주하는 지역이 있었는데 연희자들은 ‘京中優人’, ‘京中男女才人’ 등으로 불리며 상당한 특권을 누렸던 것으로 보인다.39

1705년 〈예천 용문사 괘불〉 조성을 발원한 妙淨 역시 명월사당 출신이다. 그녀는 인근 지역의 불사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는데 1709년에 〈용문사 천불도〉와 〈팔상도〉를 만들 때는 ‘大大施主者’로 기록되었고, 이 불사가 자신의 평생 서원이었다고 강조했다.40 다음 해인 1710년 〈안동 봉정사 괘불〉을 조성할 때도 각종 채색 비단을 후원하고 대시주자로 참여했다(Fig. 20). 사당이 주관한 불사에서 모연이나 화주, 대시주자를 맡은 이들 역시 사당이었다. 전국 범위의 불사에 참여한 사당의 행적이나 京城化主가 주도한 불사의 사례는 점차 학계에 보고되고 있다. 감로도에서 사당의 표현이 적극적으로 강조되는 경향은 사당의 경제력과 불사의 주체로서의 위상이 확장된 현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41

Fig. 20.

道文 등, 〈용문사 천불도〉 Tomun and Other Monk Painters, The Thousand Buddhas Painting of Yongmunsa Temple, 1709, Chosŏn, Color on Silk, 168×234cm, Treasure, Yongmunsa Temple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

Ⅳ. 맺음말

이상에서 감로도를 중심으로 종교회화에 재현된 여성 이미지와 특징을 살펴보았다. 유교 사회는 여성의 종교 활동을 금지시켰으나, 남녀 구별 없이 수행을 독려하는 불교의 교리는 여성 신도에게 평등의 가치를 알려주며 서원을 이뤄나가는 성취감과 해방감을 주었다. 효를 중요시하는 유교적 가치관은 도상적으로도 강조되었다. 『목련경』으로부터 연원한 ‘목련존자의 어머니 구출기’는 ‘출가는 불효’라는 관념에 대해 불교교단이 선택할 수 있는 파급력있는 메시지였다. 현존하는 70여 점의 감로도 중 비구니가 도해된 감로도는 40점 정도다. 18세기 이후가 되면 화면에 문자로 기입하는 방제에는 비구니를 기록했으나 시각적으로 재현할 때는 비구만을 그리게 된다. 수륙재를 비롯한 의식집에서도 비구니는 비구와 더불어 의식에 참여했지만, 분명히 존재했던 비구니를 그리지 않게 된 것이다. 의례 텍스트와 이미지 사이의 이러한 불일치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는 좀더 정밀하게 살펴볼 문제이다.

한편 감로도에는 사부대중을 이루는 비구니와 우바이뿐 아니라 일상의 모습에 여성 이미지가 도해되었다. 부부싸움, 노년에 의지할 때가 없는 외로움과 같은 장면이나 출산 과정에서 사망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던 현실의 장면도 주요 도상으로 유지되었다. 생업에 종사하는 여성도 비중있게 도해되는데, 민화나 풍속화의 소재로 다양한 계층이 등장하면서 종교 미술의 모티브에도 영향을 주게 된다. 본 연구에서는 최상위 계층의 여성 이외에도 시주자나 화주로 활동하며 불사를 이끈 상궁이나 사당 등 전문직임을 지닌 여성에 주목했다. 여성신자들의 지속적인 불사 후원은 경전의 한글 언해 작업이나, 시각적인 재현물을 앞에 두고 경설을 듣는 방식, 즉 감로도와 같은 서사구성을 지닌 불화가 활성화되는데 기여했다. 젠더적 관점으로 감로도를 살펴본 본 연구는 조선 사회의 여성의 역할 변화를 고찰하기 위한 시론으로, 향후 다양한 연구가 활성화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Notes

1)

강우방·김승희, 『甘露幀』 (예경, 1995); 이경화, 「조선시대 감로탱화 하단화 풍속장면 고찰」, 『미술사학연구』 220(1998), pp. 79-107; 윤은희, 「감로왕도 도상의 형성 문제와 16, 17세기 감로왕도 연구: 수륙재 의식집과 관련하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3); 박은경, 「일본 소재 조선 16세기 수륙회 불화, 甘露幀」, 『조선시대 감로탱-감로』 (통도사성보박물관, 2005); 연제영, 「조선시대 감로탱화 하단장면과 사회상의 상관성」, 『한국문화』 49(2010); 김정희, 「감로도 도상의 기원과 전개-연구 현황과 쟁점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47 (2016), pp. 143-181; 박정원, 「조선시대 감로도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20).

2)

정해은, 「조선시대 여성사연구 동향과 전망 2007~2013」, 『여성과 역사』 19 (2013), pp. 25-65; 정해은, 「조선시대 여성사 연구에 대한 몇 가지 질문-2000년 이후 연구성과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105 (2023), pp. 143-176.

3)

『17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 1~4책 (보고사, 2006); 『18세기 여성생활사 자료집』 1~8책 (보고사, 2010); 『19세기·20세기 초 여성생활사 자료집』 1~9책 (보고사, 2013).

4)

정우택, 「조선왕조시대 전기 궁정화풍 불화의 연구」, 『미술사학』 13 (1999), pp. 51-71; 김정희, 「문정왕후의 중흥불사와 16세기의 왕실 발원 불화」, 『미술사학연구』 231 (2001), pp. 5-39; 강희정, 「조선 전기 불교와 여성의 역할-불교미술의 조성기를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313 (2002), pp. 269-297; 박은경, 「조선 전기 불화의 제 양상」, 『조선 전기 불화 연구』 (시공아트, 2008); 유경희, 「조선 말기 왕실발원 불화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5); 박아연, 「1586년 德嬪 尹氏를 위한 불사, 문경 봉암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연구」, 『강좌미술사』 60 (2023), pp. 197-222; 왕의 어머니, 부인, 딸이라는 신분을 기반으로 불사를 후원하고 불교미술 수준을 끌어올린 의미에 대해서는 김정희, 『조선왕실의 불교미술』 (세창출판사, 2020).

5)

여성 후원자라는 측면에서 나아가 일본 불교 발전의 원동력으로서 여성을 다룬 전시는 〈女性と佛敎〉 (奈良國立博物館, 2003); 동아시아 관점에서 조망한 전시로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호암미술관, 2024).

6)

비구니가 비구에게 지켜야 하는 공경법을 뜻하는 尼八敬戒는 최초로 출가한 비구니이자 붓다의 養母였던 마하파자파티로부터 유래한다. 붓다가 여성의 출가를 인정하면서 제시한 조건은 100년 된 비구니라고 해도 바로 그날 자격을 얻은 비구에게 먼저 합장하고 예를 올려야하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비구를 욕하거나 꾸짖어서는 안 된다는 내용 등으로 이루어져있다. 이수창, 「비구니팔경법에 대한 고찰」, 『불교학연구』 15 (2006), pp. 187-222.

7)

황인규, 『조선시대 불교계 고승과 비구니』 (혜안, 2011); 미리엄 레버링 등, 『동아시아 비구니: 여성 출가수행의 사회적 맥락과 의미』 (민속원, 2022).

8)

황인규, 「조선 전기 정업원과 비구니 주지」, 『한국불교학』 51 (2008), pp. 103-130; 민덕식, 「조선시대의 정업원」, 『문학사학철학』 53 (2018), pp. 49-84.

9)

한효정, 「17세기 전후 양반가 부인의 경제활동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7); 한효정, 「공인문기를 통해 본 조선 후기 여성의 상업 활동과 소유의식」, 『조선시대사학보』 69 (2014); 김경미, 「조선후기 여성의 노동과 경제활동: 18-19세기 양반여성을 중심으로」, 『한국여성학』 28-4 (2012); 정창권, 「추사 한글편지에 나타난 남성들의 살림참여 양상」, 『국어문학』 70 (2019).

10)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고려 아미타불상의 발원문, 1302년 창녕군부인 장씨 발원문에서 조선 전기 흑석사 불상에 이르기까지 여성 발원자의 서원에서 이러한 전통은 유지되었다. 특히 ‘정토에서 태어나기를 기원하나, 정토에 태어나지 못한다면 인간의 생을 잃지 않고 중국의 바른 집안에서 태어나되 남자의 몸을 얻게 해주소서’라며 남자의 몸을 얻기를 바라는 것은 아마타불의 48대 서원 가운데 하나였다. 아미타불의 자비력을 받들어 임종시 극락왕생하고 깨달음을 얻은 후에는 다시 세속으로 돌아와 미혹한 중생을 제도하길 서원하는 방식은 40권본 『화엄경』의 「보현행원품」 내용과 일치한다. 정은우·신은제, 『고려의 성물 불복장』 (경인문화사, 2017).

11)

사갈라 용왕의 딸인 여덟 살의 용녀는 문수보살이 설법하는 법화경을 듣고 깨달아 부처가 되는데, 여성의 몸으로는 성불할 수 없다는 사리불존자를 반박하면서 보배 구슬을 부처님께 바친 후 남자의 몸으로 변해 성불했다. 김영미, 「고려 말 여신성불론과 그 영향」, 『한국사상사학』 41 (2012), pp. 165-200.

12)

이승희, 「조선전기 관경십육관변상도에 보이는 고려 전통의 계승과 변용」, 『문화재』 51 (2018), pp. 126-147.

13)

아귀에게 공양하는 법을 다룬 『佛說救拔焰口餓鬼陀羅尼經』 역시 감로도의 조성 연원 중 하나다. 아난이 자신의 목숨이 다해 곧 아귀도에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묻게 된다. 강소연, 「대승보살로서 아귀의 조형적 표현과 상징」,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67 (2016), pp. 121-154.

14)

강영철, 『조선시대 수륙재와 감로탱: 종교의례의 시대도상』 (꽃피는 아몬드나무, 2023).

15)

김승희, 「한국 불교회화의 판타지:감로도의 아귀상」, 『미술사학』 50 (2018), pp. 7-31.

16)

『佛祖統紀』에 의하면 중국에서는 六朝시대부터 설행되어 점차 민속화된 행사로 정착되었다. 일본 승려 圓仁(794~864)의 『入唐求法巡禮行記』에서도 음력 7월 15일의 百中에 우란분재가 정형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의 많은 기록에서 우란분재에 先亡父母를 위해 『목련경』을 강하였다.

17)

강호선, 『신앙과 사상으로 본 불교 전통의 흐름』 (두산동아, 2007); 『朴通事諺解』 권하 (서울대학교 규장각, 1943), pp. 280-283.

18)

〈熊野觀心十界圖〉는 구마노[熊野] 비구니가 포교에 사용한 불화로, 그림을 두고 도해된 내용을 설명해주는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시사점이 있다. 西山克, 「熊野歓心十界図とはなにか-朝鮮「甘露幀」の受容をめぐる精神史」, 『日本史硏究』 551 (2008), pp. 30-47; 정명희, 「조선시대 불교의식의 삼단 의례와 불화 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13); 정명희, 「1653년 영수사 영산회 괘불탱을 중심으로 살펴본 조선시대 야외의식과 괘불」, 『동아시아불교문화』 40 (2019), pp. 105-131; 김자현, 「熊野觀心十界圖의 도상과 연원에 관한 검토」, 『동양문화연구』 34 (2021), pp. 233-263.

19)

‘盂蘭盆法出西天 震旦翻爲解倒懸 擧國奔馳唯恐後 愧吾流落尙如前 兩甁花蘂眞無幾 一穟香烟徧大千 幸得祖堂新粳米 日中拜獻白衣仙’, 「驪興吟」, 『牧隱詩稿』 35권.

20)

‘歲在壬子之春, 大設無遮之會, 僧徒雲合, 濱於漢水, 經日浹旬, 窮奢極侈, 幡蓋蔽日, 鍾鼓動地, 畫天堂地獄之苦樂, 示死生禍福之報應. 於是無論貴賤男女, 率皆企聳觀聽, 都市爲之一空, 關津爲之不通’,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64권, 세종 16년(1434. 4.11) 기사.

21)

박정원, 「조선전기 水陸會圖의 일본 수용과 인식에 대하여」, 『동악미술사학』 23 (2018), pp. 67-92.

22)

탁효정, 「조선 전기 왕실불교의 전개양상과 특징」, 『불교와 사회』 10 (2018), pp. 185-219; 불경 번역에 참여한 여성의 사례와 그 의미를 다룬 논문은 전영숙, 「조선 초 불경언해와 불자여성의 참여」, 『선문화연구』 33 (2022), pp. 7-43.

23)

‘親定口訣 貞嬪韓氏 御前書 口訣社堂惠瓊道然戒淵信志道成覺珠 淑儀朴氏書’, 『金剛般若波羅密經(諺解)』, 天順八年(1464)春二月日孝寧大君臣補奉敎謹跋…天順八年春二月有日判敎宗事興德寺住持都大師臣海超奉敎勤跋…金守溫奉敎謹跋天順八年二月一日…韓繼禧奉敎謹跋天順六年任午(1462)九月…盧思愼奉敎謹跋(불교아카이브 https://kabc.dongguk.edu/). 세조의 구결을 기록한 정빈 한씨(1437~1504)는 昭惠王后 韓氏, 즉 후의 仁粹大妃로 세조의 아들 의경세자(덕종)의 세자빈이자 성종의 모후이다. 그녀는 사대부 여인들의 수신서이자 당시 여성교육의 기본서였던 『內訓』의 편찬자이자, 불교옹호론자였다.

24)

尙宮 조두대는 세종의 5남 廣平大君의 家婢 출신으로, 한문 뿐 아니라 이두와 梵語에도 뛰어났다. 그로 인해 세조에게 발탁되어 입궁한 후 예종, 성종, 연산군에 이르는 40년을 궁에 살며 『석보상절』, 『월인석보』 인출이나 『능엄경언해』, 『내훈』 등 언해본 발간에 기여하며 각종 문건을 書寫했다. 세조가 승하한 후 『내훈』의 발문을 쓸 때는 종7품 典言에서 궁녀로서의 최고품계인 정5품 尙儀에 올랐다. 한희숙, 「조선 초 궁녀 조두대의 생애와 女謁」, 『한국사학보』 87 (2022), pp. 145-175.

25)

박은경, 「조선 전기 불화의 제 양상」, 『조선 전기 불화 연구』 (시공아트, 2008), pp. 294-300; 최엽, 「성주사 감로탱」, 『감로: 조선시대 감로탱』 (통도사성보박물관, 2005), pp. 100-109; 『치유의 시간, 부처를 만나다』 (부산박물관 특별전, 2022).

26)

탁효정, 「조선 전기 정업원의 성격과 역대 주지-조선시대 정업원의 운영실태1」, 『여성과 역사』 221 (2015); 탁효정, 「15-16세기 정업원의 운영실태-새롭게 발견된 단종비 정순왕후의 고문서를 중심으로」, 『조선시대사학보』 82 (2017); 탁효정, 「조선후기 경기 서북부 일대 비구니 사찰과 비구니의 활동-『전등본말사지』에 수록된 비구니 명단을 중심으로」, 『한국불교학』 103 (2022), pp. 133-165.

27)

‘一心奉請 捨家僧行 棄俗離童 或抛父母而遠去雲遊 或別親知而參禪問道 諸方論議 到處尋師 挑囊負鉢而拄杖驅馳 涉水登山而徃來辛苦 致使燒身煉臂 爲法忘軀 不遇聖人 徒勞喪命 一切徃古 鍊行僧尼等衆 惟願承三寶力仗秘密語 今日今時 來臨法會 受沾供養’, 「僧魂請」, 『天地冥陽水陸齋儀梵音刪補集』.

28)

정명희, 「조선시대 불교 의식과 승려의 소임 분화」, 『미술사연구』 31 (2016), pp. 253-291.

29)

박은경, 앞의 책, pp. 330-331; 이향순, 「감로도에 나타난 조선의 비구니승가」, 『한국문화』 49 (2015), pp. 51-72.

30)

김정희, 「감로도 도상의 기원과 전개-연구 현황과 쟁점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47 (2016), pp. 143-181; 박정원, 「한국 개인소장 조선전기 수륙회도 연구」, 『동악미술사학』 30 (2021), pp. 35-63.

31)

현종은 사찰 노비 출신의 비구니가 身役 면제를 청하자, 백성의 출가로 각종 역의 수취에 차질이 빚어질 것을 우려해 비구니를 서울 밖으로 내쫓고 자수원과 인수원을 철폐하고 사찰 재산을 몰수하고 노비를 뺏는 일련의 정책을 시행했다. 처능은 전국의 승려를 대표해 「諫廢釋敎疏」를 지어 불교에 대한 억압을 시정해줄 것과 폐불의 부당성을 언급했다. 자수사와 인수사를 중심으로 한 비구니 중심의 내원당과 봉은사와 봉선사를 중심으로 한 비구 중심의 외원당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이기운, 「백곡 처능의 간폐석교소와 왕실 불교사원의 철폐」, 『동아시아불교문화』 59 (2023), pp. 91-117.

32)

서울역사박물관의 〈한양 여성, 문 밖을 나서다-일하는 여성들〉(2023)은 도성 안팎에서 일하는 다양한 신분 계층의 여성들을 다룬 전시로, 전시의 기반이 된 학술 성과는 『한양의 여성 공간』 (서울역사박물관, 2021).

33)

공의왕대비가 대시주자가 되었고 서원군부인이 협력한 청평사 수륙재의 경우에도 여러 상궁, 시녀들이 잇따라 백미를 보내고 귀중한 패물을 내거나 錦丹의 비단 휘장이나 火龍의 行旗를 수놓는데 참여했다. 나암 보우, 「淸平寺保上春秋水陸齋疏」, 『懶庵雜著』 [『한글대장경』, 동국대학교 역경원]; 김정희, 「文定王后의 中興佛事와 16世紀의 王室發願 佛畫」, 『미술사학연구』 231 (2001), pp. 5-39; 신광희, 「朝鮮 前期 明宗代의 社會變動과 佛畫」, 『미술사학』 23 (2009), pp. 321-346; 김상현, 「문정왕후의 불교중흥정책」, 『한국불교학』 56 (2010), pp. 25-52.

34)

양혜원, 「한양 여성의 종교생활」, 『한양의 여성 공간』 (서울역사박물관, 2021), pp. 150-196.

35)

이용윤, 「18세기 후반 개심사 불화에 반영된 화승집단의 변화」, 『인문과학연구논총』 69 (2022), pp. 275-285.

36)

화순옹주는 1758년 남편 김한신이 세상을 떠나자 곡기를 끊다가 세상을 떠나는데, 왕의 딸 중 烈女가 된 유일한 인물이다. 남편에게 순종하고 정절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열녀는 유교사회의 이상적인 여성관이었다. 『삼강핼실도』가 보급된 이래, 조선 후기에 이르면 지역 『邑誌』에 『효행』, 「열녀」 항목이 들어가고 18~19세기에는 평민이나 천민 중에도 수록되는 비중이 늘었다.

37)

최진아, 「한양 무녀들의 구료·구휼 활동과 활인서」, 『한양의 여성 공간』 (서울역사박물관, 2021), pp. 197-243.

38)

정명희,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조선시대 괘불의 문화적 가치」, 『대형불화 정밀조사 사업 학술 심포지엄: 괘불을 보는 관점과 과제』 (문화재청·성보문화재연구원, 2021), pp. 27-47.

39)

『연희, 신명과 축원의 한마당』 (국사편찬위원회, 2006).

40)

‘康熙四十八年 己丑五月日呂…泉北嶺龍門山唱基寺千佛幀 施主秩 京畿都城內 宗廟前 連三契 居住 平生發願千佛八相禎 婆蕩 供養 布施 陽傘 香囊 各 彩色  引燈 燭獨 兼 大大施主 明月舍堂 妙淨單身 京居平生發願千佛八相幀 大施主舍堂 妙淨單身’.

41)

명월사당 소속 사당의 활동은 1712년 〈익산 혜봉원 석가삼존상〉, 1740년 〈도선사 아미타불상〉, 1750년 〈월정사 비로자나불도〉 조성에서도 찾을 수 있다. 유근자, 「조선 후반기 불상조성기를 통해 본 불상의 조성 배경 연구」, 『강좌미술사』 38 (2012), pp. 4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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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17세기 여성생활사자료집』, 1~4책, 보고사,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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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19세기·20세기 초 여성생활사자료집』, 1~9책, 보고사,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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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디지털 장서각, https://jsg.aks.ac.kr/.
70.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https://kyu.snu.ac.kr/.
71. 국립중앙박물관, https://www.emuseum.go.kr.

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禁制」, 『大典通編』 “Kŭmje,” in Taejŏn t'ongp'yŏn, 1785, Chosŏn,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ttps://kdp.aks.ac.kr/)

Fig. 2.

김홍도, 〈단원풍속도첩〉 Kim Hongdo, Album of Genre Painting by Tanwŏn, 19th Century, Chosŏn, Ink and Color on Paper, 28×24cm, Treasure,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3.

〈감로도〉(세부) Nectar Ritual Painting (detail),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Hemp, 200.7×19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4.

『불설대목련경』 Sutra of Great Mulian, 1536, Chosŏn, Soyosan Yŏn'gisa Temple,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s://kyu.snu.ac.kr/)

Fig. 5.

性澄 등, 〈성주사 감로도〉 Sŏngching and Other Monk Painters, Nectar Ritual Painting of Sŏngjusa Temple, 1729, Chosŏn, Color on Silk, 267×190cm, Treasure, Sŏngjusa Temple (Busan Museum, Ch'iyu ŭi sigan puch'ŏ rŭl mannada, p. 165)

Fig. 6.

祖文, 〈감로도에 도해된 선왕과 왕후〉 Cho Mun, The Former King and Queen in Nectar Ritual Painting, 1580, Chosŏn, Color on Hemp, 252.7×141.5cm, Private Collection (Hoam Museum of Art, Chinhŭk e p' in yŏnkkot ch'ŏrŏm, p. 58)

Fig. 7.

이자실, 〈도갑사관음삼십이응신도〉(세부) I Chasil, The Thirty-two Manifestations of Avalokitesvara Painting of Togapsa Temple (detail), 1550, Chosŏn, Color on Silk, 235×135cm, Chion-in Temple, Kyoto, Japan (Kyushu National Museum, Uruwashiki inori no bi–Korai·Chosen jidai no Bukkyo bijutsu, p. 45)

Fig. 8.

祖文, 〈감로도〉(세부) Cho Mun, Nectar Ritual Painting (detail), 1580, Chosŏn, Color on Hemp, 252.7×141.5cm, Private Collection (Hoam Museum of Art, Chinhŭk e p' in yŏnkkot ch'ŏrŏm, p. 59)

Fig. 9.

〈감로도에 도해된 비구니〉 Buddhist Nuns in Nectar Ritual Painting,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265×294cm, Leeum Museum of Art (Leeum Museum of Art, https://www.leeumhoam.org/leeum)

Fig. 10.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세부) Yŏngjo Chŏngsun wanghu karye togam ŭigwe (detail), 1759, Chosŏn, Ink and Color on Paper, 47.3×33.6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11.

『경국대전』 Kyŏng guk Taejŏn, 1485, Chosŏn, 32.5×21.5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12.

〈김상궁 묘지〉 Tombstone Record of Upper Court Lady Kim, 1586, Chosŏn, Blue and White Porcela in, 25.6× 17.8×1.0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13.

哲玄 등, 〈불영사 감로도〉 Ch'ŏrhyŏn and other Monk Painters, Nectar Ritual Painting of Puryŏngsa Temple, 1681, Chosŏn, Color on Hemp, 183.5×184.5cm, Treasure, (formerly) Uhak munhwa chaedan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

Fig. 14.

〈상궁 최혜원이 쓴 서원〉, 『묘법연화 경』, The Prayer Text Written by Upper Court Lady Ch'oe Hyewŏn, in Saddharma Pundarika Sutra, 1626, Chosŏn, Ink on Paper, Wŏnhyosa Temple, Ŭijŏngbu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15.

漢峰 瑲曄 등, 〈봉은사 감로도 속 주막, 장시에서 일하는 여성〉 Han Pong Ch'angyŏp and Other Monk Painters, The Women Working in the Tavern and Market in the Nectar Ritual Painting of Pongŭnsa Temple, 1892, Chosŏn, Color on Silk, 200×316.5cm, Pongŭnsa Temple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

Fig. 16.

漢峰 瑲曄 등, 〈봉은사 감로도 속 가리마를 쓴 여인〉 Han Pong Ch'angyŏp and Other Monk Painters, The Women Wearing a Karima in the Nectar Ritual Painting of Pongŭnsa Temple, 1892, Chosŏn, Color on Silk, 200×316.5cm, Pong ŭnsa Temple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

Fig. 17.

〈평안감사향연도 속 가리마를 쓴 기녀〉, The Courtesans Wearing a Karima in Welcoming Banquet for the Governor of P'yŏngan,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71.2×196.9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Fig. 18.

〈감로도에 재현된 巫女〉 The Shaman Depicted in Nectar Ritual Painting,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265×294cm, Leeum Museum of Art (Leeum Museum of Art, https://www.leeumhoam.org/leeum)

Fig. 19.

〈감로도에 재현된 사당〉 The Shrine Depicted in Nectar Ritual Painting, 18th Century, Chosŏn, Color on Silk, 265×294cm, Leeum Museum of Art (Leeum Museum of Art, https://www.leeumhoam.org/leeum)

Fig. 20.

道文 등, 〈용문사 천불도〉 Tomun and Other Monk Painters, The Thousand Buddhas Painting of Yongmunsa Temple, 1709, Chosŏn, Color on Silk, 168×234cm, Treasure, Yongmunsa Temple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