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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3; 2024 > Article
젠더로 본 한국의 중근세 관음보살상 *

Abstract

동아시아 불교미술에서 대자대비의 상징인 관음보살은 다양한 형태의 존상으로 재현되어 왔는데 특히 자비로운 성격에 모성(母性)과 여성의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여성성이 강조된 사례가 많다. 중국의 〈송자관음〉이나 일본의 〈마리아관음〉 등은 관음보살의 뒤바뀐 젠더를 시각적으로 잘 보여준 사례로, 이러한 관음보살의 이미지는 고착화되어 근래에는 중국이나 서구에서 관음보살을 중국의 여신(女神)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한국의 관음보살상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규범에 따라 조각, 그림, 공예품으로 제작되었지만 관음보살상을 중국이나 일본처럼 젠더적 관점으로 규정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관음보살이 여성으로 모습을 바꾸는 『삼국유사』의 내용이나 관음보살의 전생을 여인으로 묘사한 〈안락국태자전(安樂國太子傳)〉의 내용처럼 한국의 관음보살 역시 여성성과 관련이 매우 깊은 것은 사실이다. 특히 고려시대부터 십일면관음과 천수관음 뿐만 아니라 수월관음(水月觀音)과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유행하면서 관음보살의 여성성이 강조되었다.
고려 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유행한 천의를 걸친 유희좌 자세의 수월관음상으로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맞이하는 모습에서 유래되었다. 그런데 고려시대 수월관음상에는 남성적 특징이 표현되는 동시에 낙산 관음신앙의 유행과 함께 백의관음의 이미지가 중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시각적으로는 쌍죽, 달, 대나무 등이 표현된 수월관음의 모습이 남성적으로 재현되었지만 백의관음의 여성성도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수월관음은 남성과 여성의 이중성, 모호한 젠더를 갖게 된다.
백의관음상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어진 주제로 여성적인 자태도 강조되었다. 14~15세기 백의관음상은 정병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있는 좌상이나 두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 정병을 들고 있는 입상의 조각으로도 제작되었다. 문헌 속의 백의관음은 백의대사(白衣大士), 백의선(白衣仙) 등으로 표현되었고 달이나 대나무 등을 함께 그리기도 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백의관음에 대해서 동시기 문인이 종교적 예경의 대상이 아닌 세속적인 여인, 미인도의 여인상과 같이 인식했다는 점에서 관음에 대한 당시의 인식이 종교적인 관점과 세속적인 관점으로 나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음보살은 구제자의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관음보살의 역할은 어머니의 모성으로도 연결되었다. 특히 고려시대에는 밀교의식과 『천수경』의 확산과 함께 모성 그 자체를 상징하는 천수관음의 등장으로 관음의 존격에 모성의 역할이 강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중근세 불교신앙 속에서 관음은 다양한 성정체성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시각적으로 재현되었지만, 한국의 관음보살상은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조선시대 여성성이나 모성의 표현이 확장되어 극적으로 드러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Abstract

Avalokiteshvara images in Korea, while adhering to traditional Buddhist artistic conventions, exhibit a different approach to gender than their Chinese counterparts, where the feminization of Avalokiteshvara is more explicitly evident. However, historical records such as Samguk Yusa 三國遺事 and The Tale of Prince Anrakkuk 安樂國太子傳, attest to the wide awareness of the femininity of Avalokiteshvara, which determined the identity, visual representation, functions, and roles of Avalokiteshvara images. While the paintings of Water-moon Avalokiteshvara from Mount Potalaka during the Koryŏ period emphasize masculine features in the depiction of the body, they were at times conflated with the femininity that was characteristic of the White-robed Avalokiteshvara, a result of the popular Avalokiteshvara cult at Naksan. This dual visual representation of Water-moon Avalokiteshvara invites more careful interpretation through a gender perspective. In contrast, writings by contemporary literati portray the White-robed Avalokiteshvara as distinctly feminine and characterized by modest and serene features. Additionally, with the spread of esoteric rituals and the circulation of Thousand-hand Sutra (Ch'ŏnsugyŏng 千手經), the roles of Water-moon Avalokiteshvara and Thousand-armed Avalokiteshvara expanded, becoming symbols of motherhood that bestowed and protected children. Avalokiteshvara images of medieval and early modern Korea embodied a range of gender identities and meanings, reaflecting the complex interplay of masculinity and femininity in their religious and cultural roles.

Ⅰ. 머리말

동아시아 불교미술에서 자비의 상징 관음보살은 중국의 당·송대 이후 여성과 모성(母性)의 이미지가 중첩되면서 다양한 형태의 존상으로 재현되었다. 중국의 어람관음(魚籃觀音)이나 송자관음(送子觀音), 일본의 마리아관음 또는 근대 일본의 카노 호가이(狩野芳崖, 1828~1888)의 〈비모관음(悲母觀音)〉(1883년)처럼 관음보살이 명확한 여성의 모습으로 나타난 사례도 있다. 이러한 관음보살의 이미지가 강조되면서 심지어 근래에는 중국이나 서구에서 송대 이후 관음보살을 중국의 여신(女神)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반면 우리나라의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관음보살상은 전통적인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규범에 따라 조각, 그림, 공예품으로 제작되었지만, 중국의 사례와 달리 관음보살의 젠더가 무엇인지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관음보살의 젠더를 구분한다는 것은 시각적인 형상뿐만 아니라 한 사회가 관음보살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의미와 역할을 부여했는지를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로 밝혀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는 과거를 살아간 사람들의 인식을 현재 우리의 시각으로 살펴본다는 한계를 담고 있으며, 남성이 주도하는 종교적 집단에서 젠더의 관점으로 관음보살을 본다는 것이 자칫 관음보살의 여성성에만 주목하게 되는 문제를 낳기도 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문제점을 고려하여 남성성과 여성성의 이분법적 시선에서 벗어나 우리나라의 중근세 관음보살을 젠더적 관점에서 바라보고자 한다. 즉, 관음보살을 동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바라보고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어떻게 시각적으로 재현하고 어떠한 역할을 부여했는지를 살펴보는 글이다. 또한 앞서 언급한 젠더 관점의 연구가 갖는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선행 연구에서의 상에 대한 도상이나 양식 분석을 바탕으로 최근 중국 관음보살상의 젠더 연구에서처럼 문헌기록과 시각자료를 활용하고자 한다.1 먼저 2장에서는 여성성이 부각되는 고려시대부터 조선 초기까지 동시대 사람들이 관음보살상을 어떻게 인식하는지 설화, 문집, 역사적 기록 등 한국 내 문헌 기록과 서술을 검토한다. 이어 한국의 대표적인 관음보살인 수월관음, 백의관음, 천수관음을 중심으로 젠더 관점에서 관음을 어떻게 바라볼 수 있는지 세 가지 시각에서 살펴보았다. 3장에서는 관음의 정체성을, 4장에서는 관음의 시각적 재현을, 그리고 5장에서 관음보살의 역할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큰 흐름 속에서 한국 중근세 관음보살상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젠더적 관점에서 조명해보고자 한다.

Ⅱ. 문헌으로 보는 관음보살상과 젠더 인식

한국에서 젠더적 관점에서 관음보살상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관음보살의 정체성과 시각적 재현을 어떻게 인식했는지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다. 여성들이 작성한 발원문 가운데 ‘다음 생에는 남성으로 태어나서 성불하기를 기원한다’는 문구를 생각해본다면,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을 충분한 자격을 갖춘 관음보살의 정체성은 기본적으로 남성성에 기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시각적 재현을 신체적 측면에서만 살펴본다면 남아있는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관음보살상에는 어김없이 수염과 같은 남성의 생물학적 신체 표현이 명확히 표현된다는 점에서 시각적 재현 역시 남성성에 기반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종교적인 이미지에 부여된 정체성이나 전통적 규범에 따른 시각적 재현과는 별도로 시대마다 사람들이 이를 받아들이고 인식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전통적인 규범에서 관음보살의 재현은 남성성에 기반하고 있지만 동시에 종교적·신앙적 측면과 세속적인 측면에서 관음보살에는 여성성이 내재되어 있음을 기록과 문헌에서 확인해볼 수 있다.
국내에서 관음보살의 여성성과 관련된 기존 연구는 주로 관음보살이 여성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관음 설화의 내용을 대상으로 하며 특히 『삼국유사(三國遺事)』의 내용을 가장 오래된 관음 설화의 사례로 분석하고 있다.2 『삼국유사』의 「三所觀音 衆生寺」,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廣德嚴莊」, 「憬興遇聖」에서 여성으로 현현한 관음은 아이를 점지하거나 돌보는 존재 또는 비속한 처지의 여인이지만 승려나 백성에게 깨우침을 주고 조력자의 역할로 나타난다는 공통점이 있다.3 『삼국유사』에서 관음은 수행자나 여성으로 현현하는데, 중생사(衆生寺) 관음은 아들을 점지해주고 전쟁 통에 놓고 간 아이를 씻기고 젖을 먹여 키웠다는 점에서 관음에 대한 모성을 잘 보여주는 신이한 이야기이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원효(元曉) 대사가 만난 여인들은 세속의 시각에 머물러 있는 승려에게 깨달음을 주는 존재이고, 승려 조신과 엄장이 만난 여인들은 세속적인 욕망을 다스리고 수행에 정진하게 하는 관음의 현신이다.4 『삼국유사』를 집필한 일연(一然, 1206~1289)이 13세기 인물이라는 점에서 설화 속 관음보살의 여성성이나 모성은 고려시대에도 관음의 주요 속성으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중세에 등장한 관음보살의 여성성에 대한 인식은 관음보살 전생에 대한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삼국유사에 관음보살의 현신으로서 여성이 나온다면, 「안락국태자전(安樂國太子傳)」은 관음보살의 전생을 보여주는 불교 서사이다. 「안락국태자전」은 1459년 간행된 『월인석보(月印釋譜)』 제8에 수록된 안락국태자(安樂國太子) 이야기로 그 연원은 고려 후기 또는 고려말로 보고 있다. 이 시기 위경(僞經) 계통의 변문, 속강이나 설화 등 송(宋)·원대(元代) 강창 문학의 영향이 보이는 불전이 등장하였으며 불교 포교를 위한 불교서사가 유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5 안락국태자(安樂國太子) 이야기는 일종의 본생담으로 주인공 태자의 아버지 사라수대왕(沙羅樹大王)은 아미타불의 전생, 어머니인 원앙부인(鴛鴦夫人)이 관음보살의 전생, 태자는 대세지보살의 전생으로 등장한다.6 사라수왕과 함께 서역으로 가는 도중에 원앙부인은 중도에서 아이를 가진 채 종으로 팔려가 태자인 안락국을 낳게 된다. 안락국은 서역으로 아버지를 찾아 가서 만난 후 다시 돌아오지만 이미 원앙부인은 죽어 뼈만 남게 되었다. 안락국이 돌아와 원앙부인을 소생시키고 원앙부인은 관음보살이 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안락국태자전의 내용은 관음보살의 전생이 묘선(妙善) 공주였다는 중국의 설화처럼 관음의 여성성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묘선공주와 원앙부인은 당시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고 활동에 제약이 있던 시대적 상황에서도 공덕을 쌓아 고난을 이겨내고 궁극적으로는 관음보살이 된다는 점이 공통점이다. 묘선공주 설화가 송대에 확인되는 것처럼 중국에서 관음보살의 여성성을 시각적으로 재현하는 것도 송대를 기점으로 늘어났다.7 13세기에 집필된 『삼국유사』나 『안락국태자경』의 유통 시기 등을 고려하면 한국의 중세에 해당하는 고려시대부터 관음보살의 여성적인 면모가 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7세기 경 힌두교의 여성신 숭배 신앙과 변화관음의 유행의 영향으로 중국 당대(唐代)부터 관음의 여성화가 진행되었다. 이후 특히 송대에 시각적으로도 여성성이 강조된 관음보살이 등장하면서 동아시아 관음보살상의 이미지가 고려시대 관음보살상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 후기에는 불사에 참여했던 여성들의 기록이 늘어나고 후원자로서의 역할이 커졌다는 점도 이와 관련이 깊을 것으로 보인다.
『삼국유사』나 「안락국태자전」이 관음보살의 종교적 설화에서 보이는 여성성을 보여준다면 실제 불교조각이나 불교회화로 관음보살을 마주했을 때 동시기 사람들의 인식은 어떠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문집에서 관음보살상을 종교적인 상 이외에 젠더적인 관점으로 기록한 사례는 많지 않지만 1364년 발간된 고려 후기의 학자 이곡(李穀, 1298~1351)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는 당시 사람들의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있다.
멋진 정자가 어찌 속객의 방문을 허용하랴 亭好那容俗客過
바람 부는 난간 사면에 연꽃이 가득하네 風軒四面滿池荷
다음에 올 때는 꽃 피는 시절에 맞추어서 重游要趁花時節
미녀의 노래 한 곡조를 취해서 들어야지 醉聽靑娥一曲歌
새로 얽은 아담한 서재 이웃도 없이 적막할 뿐 小齋新構寂無隣
조촐한 탁자 밝은 창가에 한 점의 티끌도 없어라 淨几明窓絶點塵
찻잔을 섬섬옥수에게 받들게 할 것 있소 茶椀莫敎纖手捧
마루 안에 진작부터 백의진이 대기하는걸 堂中自有白衣眞8
여기서 백의진(白衣眞)은 흰옷을 걸친 백의 관음보살상을 의미하는데 백의관음은 백의진인(白衣眞人), 백의대사,(白衣大士), 백의선인(白衣仙人) 등의 또 다른 표현이다. 이 시구의 내용에서 주목할 것은 섬섬옥수를 지닌 여인에 비견되는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처럼 관음보살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집 안에 조각, 도자기 또는 그림의 형태로 관음보살상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고, 관음의 이미지가 종교적인 신앙의 대상뿐 아니라 세속적인 관상의 대상으로도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문학적인 표현이지만, 당시 사람들이 관음보살상의 성정체성을 어떻게 인식했는가를 보여주는 단편적 사례이다.
이러한 백의관음에 대한 인식과는 또 다른 표현이 『태종실록(太宗實錄)』에서도 나타난다. 1408년(태종 8년) 태종이 명나라 사신 황엄(黃儼), 전가화(田嘉禾)와 함께 경복궁에 가서 처녀들을 선발한 후 말한 대목이다. 당시 선발한 사람은 모두 5명으로 순위를 매겼는데 고 전서(典書) 권집중(權執中)의 딸이 첫째이고, 전 전서(典書) 임첨년(任添年), 전 지영주사(知永州事) 이문명(李文命), 사직(司直) 여귀진(呂貴眞), 수원 기관(水原記官) 최득비(崔得霏)의 딸이 차례로 등수를 기록했다. 그리고 태종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내용이 있다.
임금이 환궁하여 대언(代言)들에게 이르기를, “황엄이 선정(選定)한 고하(高下) 등제(等第)가 틀렸다. 임씨(任氏)는 곧 관음상(觀音像)과 같아서 애교와 태도가 없고, 여씨(呂氏)는 입술이 넓고 이마는 좁으니, 그게 무슨 인물이냐?”하였다.9
이 내용은 애교가 없는 목석같은 여인의 모습을 관음보살상에 비유하는 것으로 관음보살상을 여인으로 인식한다기보다는 관음보살상의 이미지를 세속적인 여인상에 빗대 표현한 것이다. 15세기 당시에도 불교의 여러 존상 가운데 특별히 관음보살이 지닌 여성성을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태종이 떠올린 관음보살상은 이곡이 시구에서 말한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형상이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결론적으로 역사서나 문집 등의 기록을 살펴볼 때 관음보살에 관한 일부 설화뿐만 아니라 실제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사람들도 관음보살의 형상을 여성처럼 인식했음을 알 수 있다.

Ⅲ. 이중의 정체성: 수월관음

동아시아에서 관음보살의 여성화 또는 여신화는 6~7세기 인도 힌두교의 여성신 숭배 신앙의 등장과 밀교의 영향, 그리고 중국 내에서의 민간 설화 및 지역 자생신앙을 기반으로 나타난 복합적인 결과물이다. 당말오대(唐末五代)를 시작으로 10세기부터 수월관음(水月觀音)과 백의관음(白衣觀音)이 유행하였으며, 수월관음의 등장은 천수관음(千手觀音)과 같은 변화관음의 등장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다양한 관음보살 도상이 유행했는데, 특히 독립된 존상으로 수월관음상과 백의관음상도 제작되었고 천수관음(千手觀音)과 십일면관음(十一面觀音), 준제관음(准提觀音) 등 밀교 계통의 변화관음도 신앙의 대상으로 자리잡았다. 이 가운데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관음, 특히 고려시대 수월관음은 조각과 그림으로 많이 남아있는데 젠더의 관점에서는 이분법적 구분이 불가능한 정체성을 갖고 있다.
고려 1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덕수953)은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서 선재동자(善財童子)를 맞이하는 보타락가산(補陀落迦山) 관음보살을 입체적으로 재현한 것이다(Fig. 1). 갸름한 얼굴에 또렷한 이목구비, 가녀린 팔과 다리에 흘러내리는 천의와 옷주름, 섬세한 손끝 표현이 특징이다. 현존하는 고려시대 보살좌상 가운데는 12세기 안동 봉정사(鳳停寺) 목조관음보살좌상(1199년)이나 안동 보광사(寶光寺) 목조관음보살좌상처럼 결가부좌하고 양어깨를 덮는 대의를 입은 형식이 많이 남아있지만, 이 관음보살상은 오른쪽 무릎을 올리고 왼쪽 다리는 아래로 내려뜨린 채 천의를 걸치고 앉아있는 관음보살상이다.
특히 넓은 어깨와 대비되는 좁은 허리 표현이 강조되었고 다른 불상이나 보살상과 달리 복잡하고 섬세한 자세를 표현하기 위해 나무 부재는 상투 형태의 머리 모양, 얼굴, 머리 뒷면과 몸통, 하체, 양 팔다리와 두 손, 오른팔에 걸친 천의의 앞뒷면 등 총 15개의 부재를 결합해서 만들었다. 부재의 너비는 18cm 이하이며 얼굴 앞면을 별도로 만들어 눈에 수정을 감입한 점은 고려 시대 목조 조각의 특징이다.10 여러 금동판을 겹쳐 만든 금동관의 앞면은 초화문과 타출기법으로 문양을 장식하고 화엄보주 장식을 달아 만들었다. 제작기법과 장식 등 고려 보살 보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주며 불상과 동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 철판으로 만든 보관의 뒷면과 나무로 만든 양옆의 길게 늘어뜨린 장식은 조선시대 보수하며 추가된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보살상 제작 당시에는 양옆의 장식이 더 측면에 있어 정면에서는 높은 형태의 보관을 쓴 관음보살상으로 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음보살상의 자세는 윤왕좌(輪王座)와 유희좌(遊戲座)가 합쳐진 일종의 ‘변형 유희좌’ 자세로 10세기 중국 오대(五代) 수월관음도를 시작으로 11~13세기 요, 금, 송대 불상에서 이러한 관음보살상이 활발히 제작되었다.11 가장 대표적인 관음상 중의 하나가 현재 미국 넬슨-앳킨슨(Nelson-Atkinson) 박물관에 있는 관음보살상으로 갸름한 얼굴에 가늘고 길면서도 섬세하고 안정적인 신체 표현이 특징이다. 목조관음보살좌상은 이러한 동아시아 수월관음도상의 유행 속에 제작된 것으로 이 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건칠보살좌상(덕수2253)과 금강산에서 발견된 금동관음보살좌상(본관10328), 평양조선역사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과 선재동자상 등 일련의 수월관음상이 남아있다(Fig. 2).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건칠보살좌상 역시 왼쪽 팔을 경상이나 어딘가 기대고 있는 자세를 표현하였다.12 이러한 보타락가산에 있는 수월관음의 모습은 기본적으로 『화엄경(華嚴經)』 「입법계품(入法界品)」에 기반하여 화엄의 선지식(善知識) 중 하나로 선재동자에게 가르침을 전하는 지혜의 상징이다.
중국에서는 수월관음 도상을 멋진 남성, 백의관음을 아름다운 여성에 비유하기도 하여 관음의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하기도 한다.13 그러나 고려시대 기록에는 수월관음과 백의관음의 이분법적인 구분이 쉽지 않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관음상을 그려 점안하는 기원문이 남아 있는데, 여기에는 당시 그린 ‘수월관음’의 모습이 곧 ‘백의’, 즉 ‘백의관음’과 비슷하다고 기록하였다.
…(전략)… 이에 단청(丹靑)의 손을 빌어서 수월관음(水月觀音)의 용모를 모사하오니, 아! 그림 그리는 공인이 역시 우리 백의(白衣)의 모양을 비슷하게 한지라, 지극한 정성을 다 피력하여 우러러 눈동자를 점안합니다 …(후략)….14
중국에서도 기존의 『화엄경』에 근거한 지혜의 상징인 보타락가산의 수월관음상 형상과 『법화경』에 근거한 구제자로서의 면모가 강조된 백의관음 도상이 각각 존재하였다. 10세기경부터 수월관음도상에 백의관음이 투영되기도 하고 송대에는 수월관음도상과 백의관음 도상이 융합되기도 하였다.15 이와 마찬가지로 13세기 고려에서도 수월관음과 백의관음 도상이 일부 겹쳐진 것으로 보인다.
수월관음의 정체성을 이분법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점은 한국의 보타락가산 관음보살에는 백의관음에게서 발견되는 여성으로서의 정체성도 부가되었기 때문이며, 이는 『삼국유사』의 낙산사(洛山寺) 관음 설화와 관련이 깊다. 삼국유사가 집필되기 전부터 한국의 대표적인 관음신앙의 성지는 바로 의상(義湘) 대사가 창건한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였다. 낙산은 관음보살의 주처인 보타락가산(普陀洛伽山)의 줄임말로 불교신자들에게는 순례지의 하나였고 관음보살상은 송나라 사신의 방문 요청을 거절할 정도로 중요한 존상이었다.16 그런데 『삼국유사』에 따르면 백의대사(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물러 있어 낙산을 소백화(小白華)라고 이름했다는 대목이 있어 보타락가산에 주재하는 관음을 백의관음으로 칭했음을 알 수 있다.
옛날 의상(義湘)법사가 처음으로 당나라에서 돌아와 관음보살[大悲]의 진신(眞身)이 이 해변의 굴 안에 산다고 듣고, 이로 인하여 낙산(洛山)이라고 이름하였으니, 대개 서역(西域)의 보타락가산(寶陁洛伽山)이 있는 까닭이다. 이것을 소백화(小白華)라고 하는 것은 백의보살[白衣大士]의 진신이 머물러 있는 곳이므로 이를 빌어 이름 지은 것이다. …(중략)… [관음보살이] 말하기를, “자리 위의 산정에 한 쌍의 대나무가 솟아날 것이니, 그 땅에 불전을 지음이 마땅하리라”고 하였다. 법사가 그 말을 듣고 굴 밖으로 나오니 과연 대나무가 땅에서 솟아나왔다. 이에 금당을 짓고 [관음] 상을 빚어 모시니 원만한 모습과 고운 자질은 엄연히 하늘이 낸 듯 하였다. 그 대나무는 다시 없어졌다. 그제야 그 땅이 [관음] 진신의 주처임을 알았다. 이로 인해 그 절 이름을 낙산이라고 하고, 법사는 받은 두 구슬을 성전에 모셔두고 떠났다.17
의상 법사는 관음의 진용을 본 후 한 쌍의 대나무[雙竹]가 솟아난 곳에 사찰을 짓고 관음보살상을 만들었는데 ‘하늘이 낸 듯 원만하고 고운 모습[圓容麗質儼若天生]’이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낙산사 관음보살을 묘사한 ‘원용려질(圓容麗質)’이라는 표현은 백의관음의 모습이나 복식이 언급된 9세기 돈황(燉煌) 문서 「啓淸白衣觀自在文」(P.3927)에 나와 있는 관용구 ‘補他洛伽山 素服衣冠 圓容麗質身掛輕羅自在足躡大地’ 에도 표현되어 있다(Fig. 3).18 앞서 언급하였듯이 『삼국유사』에서는 원효대사가 낙산에 가던 길에 흰옷 입은 여인을 만나 이런저런 농을 하였는데, 실은 이 여인이 낙산사 관음보살이었다는 일화도 있다.
『삼국유사』의 위 내용을 살펴보면 보타락가산의 관음은 쌍죽과 관련이 있는 수월관음인 동시에, 흰옷을 입은 백의관음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월관음과 백의관음의 이미지가 중첩되었다는 점은 일연이 『삼국유사』를 집필하던 13세기 고려시대 관음신앙을 반영하고 있다.19
낙산사 당대 방문 기록에 대한 연구 결과에 따르면 12세기 후반 낙산사는 폐허가 되다시피 했고, 12세기 말에는 관음보살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다. 13세기 전반 외적의 침략으로 훼손되어 다시 복장물을 제작하여 납입되었고 13세기 후반에는 사찰이 전소되어 다시 소상(塑像)을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20 낙산사 관음보살상이 훼손되기 이전에는 어떤 모습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3세기 기록을 살펴보면 천마산 관음굴에 있었다는 개성 관음사 관음보살상(북한 국보)이나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형상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천마산 관음굴의 보살상은 총 2점으로 화불이 새겨진 높은 보관을 쓰고 있어 관음보살상임을 알 수 있는데, 송대 보살상과의 형식과 양식을 비교해볼 때 고려 11~12세기 경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21 이 관음보살상은 돈황문서 「계청백의관자재문」에 언급된 것처럼 천의와 화려한 장신구를 걸치고 있는데, 한쪽 다리는 내린 유희좌 자세로 표현되었다(Fig. 4). 13세기 전반 작성된 고려 승려 익장(益莊)의 기록에 따르면 낙산사 불전 안에 용이 바친 옥으로 불상을 만들어 봉안했다는 설명이 있어 이 역시 개성 관음사 관음보살상처럼 견고하면서도 고운 하얀 석조 관음상을 연상시킨다.22 관음굴 관음보살상의 자세는 14세기 고려불화 가운데 투명한 사리를 몸에 걸친 수월관음의 반가좌 자세를 연상시키는데 수월관음도가 낙산사나 천마산 관음굴의 전통도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Fig. 5). 현재 양양 낙산사(洛山寺)에 남아있는 고려후기에서 조선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건칠관음보살좌상은 이운된 상이며, 결가부좌한 자세나 수인의 형태가 개성 관음사 관음보살상과 다르지만, 높은 보관을 쓰고 천의를 걸치며, 옷자락이 다리 위로 흘러내리고 있어 중국 보타산 관음상에서 유래된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 향후 낙산사 관음보살상의 원 모습에 대해서는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23
이처럼 고려시대 관음보살상은 지혜의 상징이자 보타락가산의 관음보살로서 콧수염이나 가슴 표현에서 남성적인 표현이 시각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여성성이 강조된 백의관음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음보살의 이중의 정체성은 당시 사람들의 인식 속에는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관음보살상이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흥미롭게도 대승불교에서는 지혜를 어머니, 자비를 아버지의 특성으로 보는데 정작 동아시아에서는 관음의 지혜라는 속성을 남성성으로, 자비라는 속성을 여성성으로 이해하기도 했다.24 이는 종교적인 존상에 대한 젠더 관점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르게 수용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Ⅳ. 여성성의 시각적 재현: 백의관음

백의관음은 말 그대로 흰옷을 걸친 관음보살로 연화좌 위에 앉아 한손에는 연화를 다른 한 손에는 정병을 들고, 높이 올린 머리부터 흰천으로 몸을 덮고 있다.25 『법화경(法華經)』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 따르면 관음은 고난에 처한 중생의 부름에 중생이 가장 잘 인식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여러 모습 가운데 유독 여성성이 강조된 백의관음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많이 재현되었다. 자비, 구제, 여성성, 세속에 물들지 않은 깨끗한 이미지가 합쳐지면서 백의관음은 독자적인 도상으로 자리 잡았다. 이 도상은 특히 선종화에 애용되는 소재였는데, 수묵화로 그린 백의관음 그림은 공(空) 사상과 선종의 가르침을 나타내는 데 유용했다. 동시에 문인이나 사대부에게는 번잡스럽지 않고 담백한 그림으로 호응을 받았다. 특히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문집에서 달, 물, 강을 배경으로 관음보살을 백의대사, 수월 등으로 칭하며 문학적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았고 세속적인 여성화된 표현이 확대되었다. 수월관음이 남성적인 면모에 여성적인 속성을 갖게 되어 이중적 정체성을 지닌 관음이라면, 백의관음은 여성성이 시각적으로 강조된 존재이다.
아래 고려의 문인인 이규보(李奎報, 1168~1241)가 먹으로 관음보살을 그린 그림에 찬한 내용을 살펴보면, 대나무를 배경으로 흰옷을 걸친 관음보살과 선재동자의 모습을 상상해볼 수 있다.
관세음자(觀世音子)는 관음대사(觀音大士)로세. 觀世音子 觀音大士
백의(白衣)의 청정한 상은 마치 달이 물에 비친 듯하네. 白衣淨相 如月映水
두 그루 대나무 마른 잎에 향기의 근원을 알고 卷葉雙根 聞熏所自
죽림(竹林)에 조용히 참선하며 마음을 비우고 이에 의탁하였네. 宴坐竹林 虛心是寄
동자는 무엇을 구하는가 무릎을 굽히고 절을 한다. 童子何求 曲膝拜跽
만약 법을 구한다면 법은 또한 너에게 있느니라. 若云求法 法亦在爾
상을 그린 자는 누구인가 한자(韓子)라는 사람일세. 畫像者誰 韓子是已
정군(丁君)이 대를 그렸으니 할 일 이미 다했네. 丁君寫竹 能事畢矣
내가 다시 찬을 지으니 거기에 혹을 붙이는 셈이군.26 予復贊之 疣贅於三
이와 같은 그림에 대한 묘사는 미국 넬슨-앳킨슨박물관의 송대 〈수월관음도〉나 대만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조혁(趙奕)의 〈관음도〉(1313년)와 같은 장면을 연상시킨다(Fig. 6). 관음의 모습이 지극히 단아하고 곱게 묘사되어 있는 그림들로 평온한 정취는 일본 다이도쿠지(大德寺)에 남아있는 중국 남송대 목계(牧谿)의 〈백의관음도〉처럼 수묵으로 그린 백의관음을 떠올리게 한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관음보살상 가운데 정병을 두 손에 받쳐 들고 있는 좌상이나 두 손을 앞으로 가지런히 모은 채 정병을 들고 있는 입상은 이러한 백의관음 도상을 재현한 것으로 보인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 보살좌상(덕수3946)은 고려말~조선초에 제작된 불상으로 중수발원문을 통해 18세기에는 대승사(大乘寺) 고향각(古香閣)에 봉안되어 있었다(Fig. 7).27 보관은 남아있지 않으며, 동그란 얼굴 형태는 고려말 보살상의 특징을 보여주는데 대의를 입고 있다. 앞으로 포갠 두 손 위에는 원형의 판이 마련되어 있는데, 이는 관음보살상의 지물인 정병이 놓였던 자리이다. 1478년경 조성된 무위사 아미타삼존불 가운데 관음보살상 역시 정병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덕3946)의 원래 모습은 손에 정병을 받쳐 들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Fig. 8). 강원도 통천군 화장사(華藏寺)에서 발견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관음보살좌상(본관10330) 역시 비슷한 자세의 백의관음 모습이며, 1628년 제작된 수종사(水鍾寺) 금동관음보살좌상에도 이러한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Fig. 9).
그렇다면 앞서 살펴본 이곡(李穀)의 문집인 『가정집(稼亭集)』에서 미녀를 대신해 정취를 더해줄 백의관음은 어떤 모습이고 어떤 의미를 지녔을까? 백의관음에 관한 아래 시구에서는 종교적 예경의 대상으로서의 관음보살의 모습보다는 마치 한 폭의 고사인물도나 신선도를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밝은 달을 배경으로 연잎 위 관음보살이 있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푸른 산은 문에 닿아 푸른빛 드는 듯하고 靑山當戶光如滴
밝은 달은 처마에 닿아 빛이 또한 곱구나 明月低簷色更娟
누각 위 백의의 신선은 말을 하려 하는데 樓上白衣仙欲語
순풍 속의 연잎이 배보다 평온하구려 順風蓮葉穩於船28
지금은 남아있지 않은 강원도 고성군의 유점사(楡岾寺) 목조백의관음보살입상이 아마도 이러한 정취를 보여주는 관음상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Fig. 10). 일제강점기 촬영 유리건판을 살펴보면 이 백의관음상은 네 겹의 연꽃잎 위에 오른손으로 왼손 팔목을 잡고 있으며 끈으로 연결한 정병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러한 입상의 표현이나 겹겹의 연꽃 대좌 표현은 주로 고려시대 확인된다는 점에서 백의관음은 고려말부터 조선 초기 사이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백의관음의 자세나 복식은 송대 절강성 항주(杭州) 연하동(煙霞洞) 관음보살입상(940년)의 전통에서 이어져 온 것으로 조각이나 회화 뿐 아니라 도자기와 거울 등에 다양한 시각적 형태로 재현되었다. 전북 강진 무위사의 1476년 후불벽의 백의관음도는 이러한 전통을 보여준다(Fig. 11, 12). 이는 원명대 수월관음, 해수관음(海水觀音) 등이 법당 안의 본존 후불벽 뒷벽에 봉안된 점과 상통한다.29 고려시대에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금동보살입상(신수 1172, 덕수2750)처럼 송대의 영향으로 긴 신체 비례를 보여주는 보살상이 다수 남아있는데 이러한 전통에 기반하여 높이 올린 머리부터 발끝까지 몸 전체를 흰옷으로 덮고 있는 백의관음이 수용된 것으로 보인다.
관음보살상과 백의관음은 도자기로도 제 작되었는데, 신안 해저에서 발견된 중국 원대 제작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 관음보살좌상(신도 1722, 신도 2304)의 높은 보관과 가늘고 긴 신체 위에 온몸을 덮는 복식 형태는 중국의 미인도 또는 사녀도(士女圖)를 연상시킨다(Fig. 13, 14). 백의관음과 준제관음(准提觀音)이 앞뒷면에 새겨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거울(덕수 800)은 『반야바라밀다심경(般若波羅蜜多心經)』이 새겨진 앞면에 두 손 을 모아 연꽃을 들고 있는 여성화된 백의관음이 묘사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선재동자와 신장상이 그려져 있다(Fig. 15).30 이 경상은 중국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동아시아 백의관음의 여성화가 고려에 유입된 것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이다. 고려에서 제작된 백의관음의 다양한 모습은 조선시대로 이어져 다양한 백의관음의 도상이 활용되었다.

Ⅴ. 관음의 역할과 모성의 발현: 수월관음과 천수관음

관음의 정체성과 시각적인 재현에 더해 젠더의 관점에서 관음을 바라보는 또 하나의 시선은 관음보살의 역할과 관련되어 있다. 동아시아의 관음보살은 환란과 재난에서 중생을 구제하는 자비로운 존재로 각인되었기에 관음보살상을 조성하거나 그리는 궁극적인 이유 가운데 하나는 고난에서 벗어나고 해탈에 이르기 위함이다. 『묘법연화경』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에는 중생이 고난에 빠졌을 때 관세음보살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중생을 고난에서 벗어나게 한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의 관음보살 모습이 『화엄경』 「입법계품」에 나타난 보타락가산 관음보살과 선재동자에서 유래하였으나, 관음보살에는 중생 구제의 역할이 강조된 「보문품」의 이미지가 투영되어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수월관음도에 「보문품」의 내용이 간략하게 도상으로 남은 사례들은 이러한 관음의 역할을 보여준다.31
그런데 고려시대 관음보살과 관련한 시각적 재현과 관련해서는 「보문품」뿐만 아니라 『천수천안관자재보살광대원만무애대비심대다라니경(千手千眼觀自在菩薩廣大圓滿無礙大悲心大陀羅尼經)』(이하 『천수경』) 역시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살펴본 『동국이상국집』에는 외적을 물리치기 위해 수월관음의 모습을 그리며 쓴 기원문이 있었는데, 이 기원문에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다.
삼가 대비다라니신주경(大悲陀羅尼神呪經)을 상고한 결과 거기에 이르기를, “만약 환란이 바야흐로 일어나거나, 원적(怨敵)이 와서 침범하거나, 전염병이 유행하거나, 귀마(鬼魔)가 설쳐 어지럽히는 일이 있거든, 마땅히 대비(大悲 관세음보살)의 불상을 만들어 모두가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을 기울이며, 당번(幢幡)과 개(蓋)로 장엄하고 향과 꽃으로 공양하니, 그렇게 한다면 저 적들이 죄다 스스로 항복하여 모든 환란이 아주 소멸되리라.”32
기원문을 살펴보면 환란과 재난 극복을 위해 『천수경』에 따라 수월관음을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천수경』에는 천개의 손과 천개의 눈으로 중생을 보살피는 관세음보살에 대한 신앙이 담겨 있지만, 실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불화와 조각으로 남아있는 천수관음상의 수량은 상대적으로 적고 수월관음상이 더 많이 남아있다. 『천수경』의 다라니인 대비주(大悲呪)가 청각적인 다라니라면, 수월관음도는 일종의 이를 시각화한 다라니, 시각적인 부적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 수월관음도부터 작은 불감 안에 감입한 수월관음상까지 수월관음은 중생을 재난으로부터 지켜주는 수호와 보살핌의 기능을 갖고 있었다(Fig. 16).33
이러한 수호자 또는 구제자의 역할은 어머니의 모성(母性)을 보여주는 관음보살의 역할로 연결된다. 관음보살상이 갖는 모성의 역할은 고려시대 복령사(福靈寺)의 수월관음상처럼 아들을 점지해주거나 아이를 보호하는 역할이다.34 『삼국유사』나 여러 문헌에는 관음에게 기도하고 아들을 얻었다는 내용과 관음이 맡겨진 아이를 돌봐준 내용도 전해온다. 이러한 관음보살에 대한 구자(求子) 신앙은 지혜를 전달하는 관음보살과 지식을 구하는 선재동자의 관계를 보호자로서의 관음보살과 보호 받는 아이로 확장시켰다.35 중국에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아들을 점지해주는 송자관음(送子觀音)이나 기독교의 성모자상을 형상화한 성모관음상처럼 관음의 여성화가 진전되어 모성을 새로운 도상으로 시각화하기도 했다(Fig. 17).36
관음에 대한 구자신앙은 선재동자와 관련하여 도상의 연원을 새롭게 해석한 종교 이미지의 세속화와 관련이 깊다. 앞에서 살펴본 미국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수월관음도〉(Fig. 5)와 일본 다이도쿠지(大德寺) 소장 〈수월관음도〉 하단에는 공양인물상이 있는데 귀자모(혹은 나찰녀)와 특유의 머리띠를 쓴 손오공(孫悟空) 등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37 또한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소장 〈수월관음도〉에는 공양물을 든 용왕과 보화를 든 귀부인, 나찰 같은 인물이 하단에 등장한다. 이러한 인물은 원명대 확립된 소설 『서유기』 중 요괴 나찰녀(羅刹女)와 홍해아(紅孩兒) 모자(母子)의 이야기처럼 설화적 내용이나 세속적인 내용이 관음보살도에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서유기』 의 요괴 나찰녀(羅刹女)는 여러 아이를 낳은 귀자모와 같은 존재로 등장하는데 현장법사와 손오공 일행이 그 아들 홍해아(紅孩兒)의 화공(火攻)을 이길 수 없어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러자 관음보살이 정병의 감로수로 주변을 물바다로 만들고 36자루의 칼로 연화대좌를 만들어 홍해아를 사로잡았다. 이 때 관음의 모습은 종종 백의관음으로도 나타나는데 이러한 서유기의 내용은 고려 1348년에 건립된 경천사(敬天寺) 석탑의 부조로도 남아있다(Fig. 18).38 홍해아는 잘못을 뉘우치고 남해 관음보살에게 귀의하여 선재동자가 되며 관음보살은 어린 홍해아를 거둔다는 것이 이야기의 결말이다. 나찰녀 역시 사람을 잡아먹는 존재이지만 『법화경』에서 부처의 설법을 듣고 감화받아 수호신이 되는 존재이기도 하다. 나찰녀와 아이 두 모자관계 또는 모성의 이미지는 선재동자를 거둔 관음보살에게 투영되고 기존의 수월관음 또는 백의관음 도상이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도상을 탄생시킨 것으로 보인다.
비록 고려시대에는 중국의 송자관음이나 성모관음과 같은 관음보살상의 명확한 여성화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 시기 아이를 점지해주고 보호해주는 존재로서 관음이 신앙의 대상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서 살펴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려 13세기 〈목조관음보살좌상〉의 머리 부분에서는 『대수구다라니경(大隨求陀羅尼經)』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진언을 한 자와 실담자로 병기해 판각한 것으로 원통형 금속물체와 오색실을 싼 상태였다.39 하복부 복장물로는 나무로 만든 매병 형태의 오보병(五寶甁)과 종이에 싸인 각종 한약재와 사리를 포함한 후령통 등이 발견되었다. 『대수구다라니』 판본은 고려시대 종이에 찍은 판본으로 『오대진언(五大眞言)』 또는 『밀교대장(密敎大藏)』 판본과 매우 유사하다. 다라니의 내용은 왕이 아들을 점지받거나 상인의 아들이 목숨을 구하는 등 현세 구복과 재난 구제에 효험이 있는 다라니에 관한 내용으로 관음보살의 복장물에도 이러한 다라니의 효험을 함축적으로 반영하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송대부터는 밀교 다라니가 활용되면서 중생을 구제하는 관음보살의 능력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천수천안관음보살상(千手千眼觀音菩薩像)이 크게 유행하였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천수천안관음보살이 조각과 회화로 남아있는 사례가 많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밀교적 의식에 사용된 거울에서 천수관음이나 준제관음을 새긴 사례 등이 남아있다(Fig. 15, 19, 20).40 천수관음은 42개나 40여 개의 팔, 준제관음의 경우는 세 개의 눈과 18개의 팔을 가진 형상으로 삼세제불의 어머니로서 그 자체가 모성(母性)을 상징한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천수천안관음보살·비사문천경(덕수5157)처럼 서로 다른 존격이 양면에 새겨지기도 하는데 고려시대 유행한 관음·비사문천 도상의 조합을 보여준다. 『삼국유사』에서 분황사 좌전 북벽에 그려진 천수대비 앞에 나아가 노래를 불러 눈먼 아이를 고쳤다는 내용과 자장의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 천부관음(천수관음)에게 아들 하나 낳기를 기원했다는 내용은 삼국유사가 집필되던 당시의 천수관음에 대한 구자 신앙과도 연관된 것으로 보인다.41

Ⅵ. 맺음말

우리나라의 중근세 관음보살상은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상대적으로 관음의 여성화가 표면적으로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대 사람들이 관음보살을 종교적 경외의 대상만이 아니라 문학적 소재이자 세속적인 여성에 비유했다는 점에서 관음보살에 대한 젠더적 시각이 단일하지 않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독립된 상이나 그림으로 제작되어 예경의 대상이 되었던 수월관음은 기암괴석 위에 걸터앉은 남해 보타락가산의 관음이었지만 낙산의 관음신앙이 유행하자 백의관음과 중첩되는 양상을 보여주기도 한다. 보타락가산의 관음은 달, 물, 대나무 등 수월관음의 요소를 갖춘 동시에 백의관음으로 지칭되며, 시각적으로는 남성으로 재현되지만 여성의 정체성도 내포한다. 이 점에서 수월관음은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중성, 모호한 젠더를 갖게 된다.
반면 백의관음은 흰옷과 여성적인 자태가 강조된 모습으로 재현되며 고즈넉한 정취를 보여주는 문학적 소재가 되기도 한다. 정병을 양손에 들고 앉아있는 모습이나 여인처럼 두 손을 모으고 정병이나 연꽃을 들고 있는 모습은 시각적으로도 세속적인 여성적인 재현을 염두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음보살은 재난 극복과 현세 구복적인 목적을 위해 조성되기도 하는데, 이 구제자로서의 면모가 관음보살에게 어머니의 역할을 부여하기도 하였다. 관음보살상의 유행은 여러 밀교의식 수행과 『천수경』의 확산도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존재 자체가 모성을 상징하는 천수관음이나 준제관음의 등장으로 관음의 존격에 모성의 역할이 강조되는 등 당시 종교적 세속화라는 동아시아 불교 신앙이 반영된 결과이기도 하다.
동아시아 불교신앙의 흐름 속에 한국의 중근세 불교신앙은 다양한 성정체성을 바탕으로 관음을 시각적으로 재현하였고 어머니로서의 성역할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한국의 관음보살상은 중국의 송자관음이나 일본의 마리아관음상, 귀자모상(鬼子母像)과는 달리 모성을 직접 시각적으로 잘 드러내지 않았다. 이러한 차이점은 관음보살이 여신처럼 인식되는 중국의 명청대에 우리나라에서는 유교를 국가적 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이 건국하면서 여성성이 더이상 확산되지 않았기 때문은 아닌지 추정해본다. 향후 이와 같은 한국만의 특징에 대한 면밀한 조사와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Notes

1) 중국 관음보살에 관한 기록과 시각자료 속에 관음보살의 변화상을 고찰하고 명청대 여성 재가신도의 신앙과 관음의 관계를 젠더 관점에서 분석한 연구는 다음과 같다. Chun-Fang Yu, Kuan-yin : the Chinese Transformation of Avalokiteśvar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01); Yuhang Li, Becoming Guanyin : Artistic Devotion of Buddhist Women in Late Imperial China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20).

2) 한국의 관음 설화의 여성성과 관련한 기존 연구는 문학사와 종교학 관점에서 다루어졌다. 미술사 연구는 관음보살상에 한정하기 보다는 불교미술 속의 여성 이미지 또는 여성 후원자에 초점을 맞추었다. 문학사와 종교학적인 연구로는 김헌선, 「불교 관음설화의 여성성과 중세적 성격 연구」, 『구비문학연구』 9 (1999), pp. 21-50; 조현설, 「동아시아 관음보살의 여신적 성격에 관한 시론」, 『東아시아 古代學』 7 (2003), pp. 61-80; 박상란, 「관음설화에 나타난 여성상-成佛誘導形을 중심으로」, 『佛敎語文論集』 8 (2003), pp. 31-46; 최정선, 「관음설화의 여성화 전략과 형상화의 의미」, 『인간연구』 10 (2006), pp. 117-147; 강희정, 『동아시아 불교 미술 연구의 새로운 모색: 불교 미술 속의 여성과 내세』 (학연문화사, 2011).

3) 『三國遺事』 卷 第3 第4 塔像 「三所觀音 衆生寺」,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南白月二聖 努肹夫得 怛怛朴朴」, 咸通 第七 「廣德嚴莊」, 「憬興遇聖」; 『三國遺事』의 관음의 역할에 대해서는 김헌선, 앞의 논문, p. 33.

4) 『三國遺事』에서 관음화신의 역할은 배금란, 「한국 불교에서 여성을 보살로 호칭하는 문화 원형에 대한 시론-『삼국유사』의 여성형 관음 화신의 역할과 기능을 중심으로」, 『문화사학철학』 61 (2020), pp. 180-207.

5) 안락국태자전승 연원 및 성립에 대해서는 사재동, 「「安樂國太子經」의 硏究」, 『인문학연구』 13 (1984), pp. 5-57; 김진영, 「안락국태자전승의 서사 계통과 장르적 변용」, 『어문연구』 110 (2021), p. 135; 사걸연, 「안락국태자전승의 세속화와 문학적 변화 양상-「안락국태자전」과 「안락국전」을 중심으로, 『한국언어문학』 123 (2023), pp. 90-91. 1328년 고려 충숙왕 때 이루어진 불교(佛敎) 서사단편(敍事短篇) 모음집인 『釋迦如來十地修行記』에 관해서는 신은경, 「『釋迦如來十地修行記』 第7地 〈金犢太子傳〉의 성립 과정에 대한 검토: 운문 제시어를 중심으로」, 『한국학』 36-2(2013), pp. 189-213.

6) 사재동, 「「안락국태자전」 연구」, 『어문연구』 5 (1967), pp. 99-128.

7) 묘선공주에 관한 설화는 장지기(蔣之奇, 1031~1104)의 「대비보살전」을 1100년에 새긴 비석 명문에서 핵심적 내용이 확인되고 있어 송대에 이미 잘 알려져 있던 설화이다. Chun-Fang Yu, 앞의 책, pp. 291-298.

8) 『稼亭集』 卷 第20, 律詩 題竹坡趙先生所居 (한국고전번역원 이상현 역. 2007), 2024년 8월 23일 접속,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014A_0210_010_0310_2003_A003_XML.

9) 『太宗實錄』 권16 태종 8년 10월 11일 조, 2024년 8월 23일 접속, https://sillok.history.go.kr/id/kca_10810011_002.

10) 관음보살상에 대한 구조와 제작방법에 대해서는 신소연·이용희·박승원·노지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조사보고 Ⅰ』 (국립중앙박물관, 2014), pp. 102-107.

11) 유희좌, 윤왕좌, 변형 유희좌 자세와 사례에 대해서는 송은석, 「麗末鮮初 補陀落迦山 觀音의 信仰과 美術」, 『불교미술사학』 28 (2019), pp. 262-264. 중국 사찰과 미국·유럽 박물관 내 11~13세기 수월관음상에 대해서는 Petra Rosch, Chinese Wood Sculptures of the 11th to 13th centuries: Image of Water-moon in Northern Chinese Temples and Western Collections (Stuttgart: Ibidem, 2007).

12) 양희정, 「건칠보살좌상의 계측 결과 및 형상」,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조사보고 Ⅲ』 (국립중앙박물관, 2018), pp. 155-157.

13) 10세기 孫光憲이 기록한 『北夢瑣言』에 따르면 매우 잘생긴 인물에 대한 별명이 수월관음이었으며, 송대 승려 道誠의 『釋氏要覽』에서는 당대부터 섬세한 필치로 아름답고 여성화된 보살상을 그려서 사람들이 기녀를 보살에 비견하기도 했다. Chun-Fang Yu, 앞의 책, pp. 247-248 재인용.

14) 『東國李相國集』 卷 第41, 釋道疏 崔相國攘丹兵畫觀音點眼疏 (한국고전번역원 이진영 역, 1979), 2024년 8월 23일 최종 접속,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004A_0430_010_0070_2003_A002_XML.

15) 宋本榮一, 「水月觀音圖考」, 『國華』 36-8, pp. 205-213.

16) 『高麗史節要』 卷 第6, 獻宗恭殤大王 乙亥 元年.

17) 『三國遺事』 卷 第3 第4 塔像 洛山二大聖觀音正趣調信 條, 2024년 8월 23일 최종 접속, https://db.history.go.kr/ancient/level.do?levelId=sy_003r_0020_0190_0010.

18) 「啓淸白衣觀自在文」, P. 3927. 兩耳長垂 玉珠樓洛(瓔珞) 大悲大慈大聖大慈聖 白衣觀自在 菩薩摩訶薩 …(중략)…補他洛伽山 素服衣冠 圓容麗質身掛輕羅自在足躡大地, 2024년 8월 23일 최종 접속, https://archivesetmanuscrits.bnf.fr/ark:/12148/cc120578f.

19) 『삼국유사』의 「낙산이대성」 배경은 7세기 후반이지만 13세기 고려 사회의 인식이 투영된 기록으로 보는 견해는 최선아, 「『동문선』에 나타난 고려시대 낙산 관음 신앙」, 『역사와 현실』 129 (2023), p. 131.

20)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卷 第25 雜著, 洛山觀音腹藏修補文; 『東文選』 卷 第110 疏 金坵(1211~1278), 洛山觀音慶讚疏; 낙산사 방문기록과 관음보살상의 보수 및 조성에 대해서는 최선아, 위의 논문, pp. 142-152.

21) 천마산 관음굴 관음보살상은 긴 눈에 코가 짧고 입술이 작은 고려 전기 보살상의 이목구비를 보여주며 높은 보관 형태와 의장, 송대 조각과 양식성 친연성이 있어 고려 11~12세기 제작된 상으로 추정된다. 관음굴 관음보살상의 제작연대와 관련하여 고려전기로 보는 견해는 정은우, 「高麗前期 金銅菩薩像 硏究」, 『미술사학연구』 228·229(2001), pp. 29-32; 관음보살상을 고려 후기로 보는 견해는 최성은, 「북한 소재 고려시대 불교조각의 연구현황」, 『인문과학연구』 32 (2021), pp. 156-157.

22)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4 高麗僧益莊記.

23)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과 유사한 도상을 보여주는 고려중기 안동 봉정사(鳳停寺) 관음보살상과 보광사(普光寺) 관음보살상의 도상을 중국 보타산 관음 성지의 관음보살상 도상과 관련하여 살펴본 연구는 최선아, 「중국 보타산 불긍거관음상(不肯去觀音像)과 고려 중기 보살상-봉정사,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의 연원과 관련하여」, 『미술사학연구』 302 (2019), pp. 67-99; 양양 낙산사 건칠관음보살좌상과 관련한 연구는 이분희, 「양양 낙산사 원통보전 건칠관음보살상 연구」, 『강좌미술사』 61 (2023), pp. 37-64.

24) 리위향, 「중국의 관음 표현과 형상화」,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호암미술관, 2023), pp. 355-357.

25) 백의관음의 흰옷에 대해서는 밀교적인 영향으로 보는 견해와 중국의 지역적 전통에서 탄생한 견해로 나뉜다. 대승불교의 반야와 자비를 밀교에서는 각각 남성형과 여성형으로 상징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티베트 불교에서 관음의 여성형 배우자가 백색 타라(Tārā)이므로 ‘백의’를 이에 대한 번역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있다. 이에 반해 흰색은 깨달음의 상징으로 중국 자생의 경전, 기적 이야기, 미술 등의 영향으로 탄생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Chun-Fang Yu, 앞의 책, pp. 248-251.

26) 『東國李相國集』 卷 第11, 贊 幻長老以墨畵觀音像求豫贊 (한국고전번역원, 신호열 역, 1968), 2024년 8월 23일 접속,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1365A_0530_030_0140_2002_005_XML.

27) 신소연·이용희·박승원·노지현, 앞의 책, pp. 146-147.

28) 『牧隱詩藁』 卷 第7 詩 自詠 四首 (한국고전번역원, 임정기 역, 2001), 2024년 8월 23일 접속, http://db.itkc.or.kr/inLink?DCI=ITKC_BT_0020A_0140_010_0610_2008_002_XML.

29) 전통적인 수월관음의 자세로 물 위에 떠 있거나 배와 함께 표현되는 관음보살을 해수관음이라고 하는데 조선시대 이후에는 물 위에 있는 백의관음이 표현되어 무위사 후불벽화의 백의관음과 같은 도상을 해수관음으로 간주하기도 한다. 해수관음과 관해서는 강희정, 「한국 해수관음의 전통과 새로운 관음 성지 조성」, 『한국고대사탐구』 44(2023), pp. 37-68.

30) 경상에 대한 내용은 郭東錫, 「准提觀音·白衣觀音線刻方形鏡像의 圖像解釋-中國 准提觀音圖像의 新解釋」, 『美術資料』 48 (1991), pp. 7-100.

31) 개인소장 고려 13세기 〈수월관음도〉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고 이건희 회장 기증 고려 14세기 〈천수천안관음보살도〉, 일본 사이후쿠지(西福寺) 소장의 조선 15세기에 제작된 〈수월관음도〉에는 보문품의 각종 재난구제 장면이 그려져 있다.

32) 『東國李相國集』 卷 第41, 釋道疏 崔相國攘丹兵畫觀音點眼疏 條 (한국고전번역원, 이진영 역, 1979), 2024년 8월 23일 최종 접속, http://db.itkc.or.kr/inLink?DCI=ITKC_MO_0004A_0430_010_0070_2003_A002_XML.

33) 수월관음상 가운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월관음상(덕수6303)처럼 높이 2~3cm의 작은 상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이는 성냥갑처럼 작은 금속함에 넣고 다니던 호신불들이다.

34) 고려 복령사(福靈寺) 수월관음의 아들 점지 기원에 대해서는 정은우, 『고려후기 불교조각 연구』 (문예출판사, 2004), pp. 156-157.

35) 고려시대 수월관음도에 표현된 관음의 전신을 감싼 투명한 베일과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관음의 자애로운 모습에서 수월관음도의 ‘관음과 모성’ 이미지가 나타난다고 보는 연구는 박은경, 「관음과 모성: 고려후기-조선 전기 수월관음도」, 『진흙에 물들지 않는 연꽃처럼』 (호암미술관, 2023), pp. 291-293.

36) Chun-Fang Yu, “Venerable Mother; Kuan-yin and Sectarian Religion in Late Imperial China,” 앞의 책, pp. 449-486.

37) 〈수월관음도〉 하단 도상에 관해서는 박은경, 앞의 논문, p. 289.

38) 경천사 석탑과 원각사 석탑의 서유기 부조에 관해서는 신소연, 「원각사지 십층석탑의 서유기 부조 연구」, 『미술사학연구』 249 (2006), pp. 79-112와 「경천사십층석탑의 기단부 도상 연구」, 『경천사십층석탑: Ⅱ 연구 논문』 (국립문화재연구소, 2006), pp. 73-111. 서유기 관련 내용은 吳承恩의 『西遊記』 40-42回; 『朴通事諺解』 紅孩兒怪.

39) 『普遍光明淸淨熾盛如意寶印心無能勝大明王大隨求陀羅尼經』 T.1153.

40) 경상은 밀교의식에 사용되었는데 수행 장소인 경단(鏡檀)에서 수행자가 거울을 관상(觀想)하면 불보살이 거울에 나타나는 일련의 절차에 활용되었다. 경상에 사용된 가장 많은 도상은 수월관음이다. 우주옥, 「高麗時代 線刻佛 像鏡과 密敎儀式」, 『미술사학』 24 (2010), pp. 7-38 부록 2.

41) 『三國遺事』 卷 第3 塔像 第4 「芬皇寺千手大悲盲兒得眼」, 意解 第5 「慈藏定律」.

Fig. 1.
〈觀音菩薩坐像〉 Avalokiteshvara, 13th Century, Koryŏ, Gilded Wood and Gilt-bronze, H. 67.65cm, Accession no. duk 953,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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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觀音菩薩坐像〉 Avalokiteshvara, From Late Koryŏ to Early Chosŏn, Dry-lacquered, H. 50.96cm, Accession no. duk 2253,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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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啓淸白衣觀自在文」 Qi qing baiyiguanzìzaiwen, 9th Century, China, Paper, 30.5×5.4cm, P.3927, National Library of France (National Library of France, https://archivesetmanuscrits.bnf.fr/ark:/12148/cc120578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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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觀音菩薩坐像〉 Avalokiteshvara, 11th to 12th Century, Koryŏ, Stone, From Kwanŭmsa Temple in Kaesŏng, H. 113cm, National Treasure of North Korea, Korean Central History Museum, P'yŏngyang (National Museum of Korea, Pungnyŏk ŭi munhwa yusan, p. 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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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水月觀音圖〉 Water-moon Avalokiteshvara, 14th Century, Koryŏ, Color on Silk, 114 . 5×55.6cm, Accession no. 14.76.0,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https://www.metmuseum.org/art/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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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趙奕, 〈觀音圖〉 Zhaoyi, Guanyin, 1313, Yuan, Color on Silk, 108×54.8cm,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https://npm.gov.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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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觀音菩薩坐像〉 Avalokiteshvara, 14th to 15th Century, Koryŏ to Chosŏn, Gilded Wood, H. 50.5cm, Accession no. duk 3946,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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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觀音菩薩坐像〉 Avalokiteshvara of Amitabha Triad, 1478, Chosŏn, Gilded Wood, Treasure of the Republic of Korea, Muwisa Temple in Kangjin-gun County, South Chŏlla-do Province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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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觀音菩薩坐像〉 14th to 15th Century, Koryŏ to Chosŏn, Gilt-bronze, H. 10.8cm, Accession no. bon 10330, T'ongch'ŏn-gun County, Kangwŏn-do Province,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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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白衣觀音菩薩立像〉 White-robed Avalokiteshvara, Koryŏ, Wood, Yujŏmsa Temple in Kosŏng-gun County, Kangwŏn-do Province, Gelatin Dry Plates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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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觀音菩薩立像〉 Avalokiteshvara, 10th Century (c. 940), Northern Song, Yanxiadong Cave in Hangzhou (Ogawa, Hiromitsu, and Noritomo Yuba, ed., Sekai Bijutsu Daizenshu Toyohen vol. 5, p. 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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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白衣觀音圖〉 White-robed Avalokiteshvara, c. 1476, Chosŏn, Mural Painting, Treasure, Kŭngnakchŏn Hall at Muwisa Temple in Kangjin-gun County, South Chŏlla-do Province (Korea Heritage Service, https://www.khs.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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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觀音菩薩坐像〉 Avalokiteshvara, Late 13th to Early 14th Century, Yuan, Porcela in with Transparent Glaze, Jingdezhen Ware, Excavated from the Sinan Shipwreck, H. 22.5cm, Accession no. sindo 1722,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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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白衣觀音坐像〉 White-robed Avalokiteshvara, Late 13th to Early 14th Century, Yuan, Porcela in with Transparent Glaze, Dehua Ware, H. 21.2cm, Accession no. sindo 2304,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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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白衣觀音·准提觀音〉 White-robed Avalokiteshvara (Left) and Cundi (Right), Ming, 9.7cm×6.7cm, Accession no. duk 800,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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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觀音菩薩坐像〉 Avalokiteshvara, Koryŏ, Gold, H. 4.0cm, Accession no. duk 2629,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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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送子觀音像〉 Avalokiteshvara the Bringer of Sons, 18th Century, Qing, Porcela in with Translucent Glaze, Dehua Ware, H. 18cm, The Palace Museum, Beijing (The Palace Museum, https://intl.dpm.org.cn/searchs/keywords/song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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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敬天寺石塔 西遊記 浮彫 紅孩兒〉 Scene of Honghaier Episode in Xiyouji Relief from Kyŏngch'ŏnsa Temple Pagoda, 1348, Koryŏ, National Treasure, Kaep'ung-gun County, Kaesŏng,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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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千手千眼觀音〉 Thousand-armed and Thousand-eyed Avalokiteshvara, Koryŏ, Gilt-bronze, H. 81.3cm, Accession no. 4046,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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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千手千眼觀音〉 Thousand-armed and Thousand-eyed Avalokiteshvara, 14th Century, Koryŏ, 93.8×51.2cm, Colors and Gold on Silk, Bequest of I Kŏnhŭi, Treasure,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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