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21; 2024 > Article |
|
1) 19세기 말 이후 진행된 일본의 중국 요업 관여 정황은 오늘날 당사자였던 일본과 중국의 관점에서 핵심 기구였던 만철의 경영방식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만철을 전문으로 다루는 연구학술지(『滿鐵研究』 (中國近現代史史料學學會滿鐵資料研究分會))를 발간하는 등 만철연구에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다만 만주 요업의 경우 만철 중앙실험소 활동을 제외하면, 자국의 근대요업 상징이자 ‘항일’ 활동을 펼쳤던 두중원과 그가 설립한 봉천조신요업공사에 대하여 관심을 두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행적과 업적 소개에 그치고 있는 실정이다. 관련 연구로 다음을 참조. 須永德武, 「満洲の窯業」, 『立教経済學研究』 第59巻 第3號 (2006), pp. 63-99; 加藤昭子, 「戦時期,陶磁器企業の満州進出について」, 『愛知県立大学大学院国際文化研究科論集』 第10號 (2009), pp. 113-135; 張誌強·徐建東, 「杜重遠與奉天肇新窯業公司」, 『遼寧大學學報』 第2期 (1984), pp. 86-90; 周曉紅, 「杜重遠與肇新窯業公司」, 『蘭臺世界』 第2期 (1999), pp. 42-43; 吳艷, 「滿鐵窯業試驗機構的活動及影響研究」, 『黑龍江社會科學』 第3期 (2020), pp. 148-153.
4) [淸] 光緖22年(1896) 正月, 「江西紳商請辦小火輪, 瓷業及蠶桑學堂折」, “現擬集股興辦,惟成本鉅而運費多,必須官為扶持乃能興鼓舞,擬請除中式瓷器經行關卡仍照例完稅抽厘外,其有創造洋式瓷器統歸九江關出口,援照煙台製造外洋果酒之例,暫免稅厘數年,數年以後,如銷廣利倍,再按海關進出口稅則及內地釐金辦法酌量徵收,並援製造果酒之例,準於江西一省,定限十五年,只準華人附股,不准另行設局.”
5) [淸] 柯逢時, 光緒29年(1903) 5月初4日, 「開辦江西瓷器公司折」, “奏為開設景德鎮瓷器公司派員經理以振工藝而保利權恭折仰祈聖鑑事...即經委辦瓷器公司,籌撥銀十萬兩,以為之創,餘由該道自行集股.”
8) [淸] 劉錦藻, 『清朝續文獻通考』 卷383, 「實業六·工務」,“江西景德鎮磁器公司,原擬官商合辦, 至今未有實際辦法,去年李嘉道來滬集股,與上海道瑞澄會商,該公司不如改歸商辦,較有把握擔任發起,定名為商辦江西磁業有限公司,議集股二十萬元,每股五元計四萬股,發起人認一萬五千股,俟批准後再招二萬五千股⋯今該道等自行集股設立公司,多用機器仿造外磁,洵足振興實業、 挽回利權.”
10) [淸] 端方, 光緒33年(1907), 「奏改江西瓷業公司為商辦」, “既而景德鎮之官窯亦歸該公司經營,於是以景德官窯為總廠,鄱陽官窯為分廠.” 詹偉鴻, 「江西瓷業公司與清御窯廠關係新發現史料及分析」, 『中國陶瓷』 第53卷 第11期 (2017), p. 40에서 재인용.
11) 강서자업공사가 설립된 이후, 청 왕실의 관요였던 어요창이 귀속된 점 때문에 강서자업공사가 청 왕조의 마지막 관요로 알려져 있다. 다만 강서자업공사가 어요창의 시설을 일부 임대하여 자기를 생산한데다가 운영도 관에서 민간으로 넘어왔기 때문에 마지막 청 관요로 보는 견해에 이견도 존재한다. 江西省輕工業廳陶瓷研究所, 앞의 책, p. 271; 詹偉鴻, 위의 논문, pp. 41-43.
13) 藤江永孝, 「清國景徳鎭磁器視察報告」,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92號 (1900), pp. 274-283; 同著, 「清國景徳鎭磁器視察報告(承前)」,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93號 (1900), pp. 305-340.
14) 加藤助三郎, 「清國窯業視察談」,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89號 (1900), pp. 153-162; 同著, 「清國陶磁器産地視察報告」,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93號 (1900), pp. 314-323; 同著, 「清國陶業視察追加報告」,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8卷 第95號 (1900), pp. 389-394.
15) 藤江永孝, 「支那の輸出磁器に就て」,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7卷 第84號 (1899), p. 433; 前﨑信也, 「明治期における清国向け日本陶磁器」, 『デザイン理論』 第60號 (2012), p. 79에서 재인용.
17) 黒田政憲, 「清國窯業視察復命書」,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10卷 第14號 (1902), pp. 169-175; 同著, 「清國視察談」,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20卷 第236號 (1912), pp. 293-311.
18) 이시구로 히데히사의 보고서는 1906년 14巻 166號를 시작으로 총 4회(1906년 14~15卷 166~169號)에 걸쳐 출판되었다. 石黒秀久, 「清國上海陶磁器業練習調査報告」, 『大日本窯業協會雑誌』 第14卷 第166號 (1906), pp. 745-752; 第14卷 第167號 (1906), pp. 800-805; 第14卷 第168號 (1906), pp. 843-848; 第15卷 第169號 (1906), pp. 10-16.
21) 대련전자그룹[大連電瓷集團] 홈페이지(https://www.insulators.cn/%E5%A4%A7%E7%93%B7%E8%AE%B0%E5%BF%86), 2023년 9월 20일 검색.
24) 민국시기 중국 내의 수입자기 중 유럽산(영국과 독일) 자기는 남방지역에서 주로 유통되며 인기가 많았고, 일본자기는 북방을 중심으로 판매되었다. 陳重民, 『今世中國貿易通』 (上海: 商務印書館, 1927), p. 104.
28) 일본 및 외세 요업에 대항하기 위해 경덕진 요업의 근대화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민국 정부는 1929년 경덕진과 강서성의 성도 남창(南昌)에 각각 강서도무국(江西陶務局)과 도업시험소(陶業試驗所)를 설립하였다. 쑨원도 요업진흥의 계획을 추진했던 만큼, 강서성 지방정부는 당시 일본에서 선진요업기술을 익히고 돌아온 두중원을 경덕진으로 초빙하여 근대식 요업교육을 일임하는 등 전통 도자기 산업의 생산과 조직을 현대적으로 개선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불안정한 전쟁 환경과 실질적인 권한이 없는 도무국의 운영 시스템으로 인하여 실패한다. 관련 연구로 다음을 참조. 黃誌繁·胡小紅, 「民國時期杜重遠景德鎮瓷業改革述論」, 『贛南師範學院學報』 第31巻 第4期 (2010), pp. 199-123.
30) 平野耕輔, 앞의 논문, p. 112. 그 밖에 푸순에서의 도자 원료 및 연료의 발굴은 고려청자의 발견으로 인해 고려청자 도요지가 천금채(千金寨)에 존재한다는 정보를 통해 양질의 도자원료(점토, 점판암(粘板岩), 경사암(硬砂巖), 장석, 석회석 등)의 채굴 및 조사가 실시된 바 있다. 森勇三郎, 「清國撫順陶磁器業의 古蹟其他」, 朝鮮總督府 農商工 部 編, 『官立工業傳習所報告』 第1回 (京城: 農商工部, 1909), pp. 82-94.
43) 당시 마루야먀 도자기[丸山陶器]회사는 미국시장을 중심으로 도자기를 수출하였지만, 일본정부의 기업 동제로 공장이 군용창고로 사용되어 생산이 중단된 상황이었다. 加藤昭子, 앞의 논문, p. 126.
46) 코모리 시노부는 일본 근대 도예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도예가이자 중국 도자 연구가였다. 1911년 교토도자기시험소(京都陶磁器試験所)에 입사하여 도자기 산업 기술의 기초적인 연구를 하면서 중국 고전 도자기 연구, 특히 유약에 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1917년 만철 요업부로 이직하여 교토 시절부터 연구한 중국도자기 연구에 몰두하였다. 이후 1921년 중앙시험소를 나와 대련시에 코모리도자기연구소(小森陶磁器研究所)를 설립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각지의 고대 도자기를 연구하였고, 이는 일본인이 중국도자를 본격 연구한 최초의 사례 중 하나이다. 木田拓也, 「大連における中国陶磁の研究-大正期の小森忍と匋雅会のネットワーク」, 『東京国立近代美術館研究紀要』 21 (2017), p. 13.
47) 현 연구성과에 따르면, 청대 말기 일본에서 수입된 일본자기의 80%는 중저품질의 미노와 세토산 자기가 절대 다수를 이루었으며, 품질이 뛰어난 히젠자기나 사츠마, 쿠타니 생산품은 소량만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前﨑信也, 앞의 논문, p. 81). 청말 유입된 일본자기의 생산지 분포는 공개된 자료로 판단컨대 만주국 건국 이후에도 크게 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만주국 시기 만주도자기주식회사가 설립된 배경 중 하나로 히젠자기와 같이 품질이 뛰어난 일본산 자기의 수입가격이 비쌌기 때문에 현지에서 생산된 저렴한 도자기를 공급하려는 의도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