漢代 海昏侯墓 출토 향로 연구: 鳳鳥立龜座博山香爐를 중심으로*

Study on the Incense Burners Unearthed from the Tomb of Marquis of Haihun of the Han Dynasty: Focusing on Boshanxianglu with Phoenix and Tortoise Design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4;321():69-100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4 March 31
doi : https://doi.org/10.31065/kjah.321.202403.003
**Research professor, The Institute for Humanities Research of Duksung Women’s University
최국희**
**덕성여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연구교수
*이 논문은 2021년 대한민국 교육부와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임(NRF-2021S1A5B5A17048445).
Received 2023 November 24; Revised 2023 December 28; Accepted 2024 March 5.

Abstract

본고는 중국 江西省 南昌市 新建區 墎墩山에서 새롭게 발견된 前漢 海昏侯 劉賀墓(B.C.92∼B.C.59) 출토품을 포함한 전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의 기형적 특징과 조형적 의미를 분석하여 그 용도와 소비계층 및 유행 배경에 대해서 논의한 것이다.

유하는 武帝의 손자이자 昌邑王, 廢帝 그리고 해혼후를 두루 지낸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이다. 그의 무덤에서 출토된 16점의 동제 향로는 당시 왕실을 비롯한 신선사상의 유행에 따른 승선에 대한 희구와 열망의 표현이기도 하다. 특히 봉조입귀형 박산향로에 표현된 봉황과 거북은 이들이 가진 신성이 극대화되어 장수 혹은 불멸을 향해 생성된 혼합체로서 선계로의 승천을 표현한 박산향로에서 핵심적인 구성 요소였다. 따라서 후한대에 이르러 유교에 기반한 합리주의가 대두되고 지성이 우선시되면서 승천에 대한 관념이 변화함에 따라서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는 서서히 소멸하게 된다. 그리고 이 향로는 고위층 남성들의 서재 혹은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에서 출토되어 주로 남성들의 사용하던 전유 기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반도에 설치된 한사군 중의 하나였던 낙랑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향로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계속하여 사용되었는데 석암리 9호분에서 발견된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도 그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따라서 낙랑 사회에서도 향이 사용자의 취향과 용도 및 소비 양상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Trans Abstract

This paper explores the stylistic features and artistic significance of the “Boshanxianglu with Phoenix and Tortoise Designs” unearthed from the recently discovered Han dynasty burial site (92~59 BCE) of Liu He, the Marquis of Haihun, located in Nanchang, Jiangxi Province, China. It discusses the incense burner’s function, consumer group, and cultural context that contributed to its widespread adoption.

Liu He, the grandson of Emperor Wu, held the titles of King of Changyi and Marquis of Haihun. He was also deposed as an emperor. The sixteen bronze incense burners found in his tomb are a testament to the prevalent beliefs in immortality and the aspirations of the royal family. The symbolism of the phoenix and tortoise on the “Boshanxianglu with Phoenix and Tortoise Designs” encapsulates the themes of longevity and immortality, hinting at a journey to the celestial realm. As Confucianism-based rationalism gained traction during the later Han dynasty, notions of ascension evolved, leading to a decline in the popularity of incense burners adorned with phoenix and tortoise motifs. This type of incense burner was discovered in upper-class males’ study chambers or reception areas, suggesting their predominant usage among men.

In Nangnang, a Han commandery on the Korean Peninsula, various incense burners influenced by Chinese styles were used. The standout discovery of the “Boshanxianglu with Phoenix and Tortoise Designs” at the Sŏgamni No. 9 site, suggests a tailored approach to incense selection and usage based on individual preferences, purposes, and consumption habits within Nangnang society.

Ⅰ. 머리말

2011년, 중국 江西省 南昌市 新建區 大塘坪鄕 觀西村 墎墩山에서 前漢 海昏侯 劉賀墓가 새롭게 발견되었다. 유하(B.C.92∼B.C.59)는 武帝의 손자로 昌邑國의 제후왕이었다가 昭帝 사후에 왕위에 올랐으나 27일 만에 廢帝가 되었고 이후 해혼후국의 열후로 봉해졌던 인물이다. 그의 무덤에서는 대략 1만여 점의 진귀한 유물이 출토되었고 그중에 동제 향로 16점도 포함되어 있다. 중국에서 향은 춘추시대부터 악취나 병균의 증식을 억제하기 위해 사용되었고 전한대 신선사상이 대두되면서 분향이 크게 유행하였다. 특히 한대 왕실의 구성원이었던 유하의 무덤에서 이처럼 다량의 향로가 발견된 것은 당시 왕실의 향에 대한 인식과 애호를 잘 보여줄 뿐만 아니라 한대 향문화 양상을 살펴볼 수 있는 지표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다.

해혼후묘에서 발견된 향로 중에 노좌가 봉황과 거북의 조합으로 된 鳳鳥立龜座 박산향로는 전한 중기에서 말기까지 주로 북방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가 후한대는 거의 출현하지 않는다.1 이같이 봉조입귀형 박산향로가 특정 시기에만 등장한 것은 당시 사람들이 가진 장수 혹은 불멸을 위한 승선에 도달하기 위해 봉황과 거북이 가진 신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반도 서북부에 존속했던 낙랑지역에서도 동일한 유형의 향로가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는 한대 향문화가 한반도까지 전해졌다는 것을 뜻하며 낙랑의 향문화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줄 것이다.

지금까지 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에 대한 연구는 주로 관련 기물에 대한 수집과 분류 및 도상 해석에 치중되어 있다.2 특히 봉조입귀좌 박산향로가 해혼후묘에서 발견된 것은 이 유형의 향로가 왕실에서도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향로의 소비계층을 파악하는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이에 본고에서는 해혼후묘의 발굴 과정 및 출토 현황을 개괄하고 해혼후묘출토품을 포함한 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의 기형과 조형적 특징, 소비계층과 용도 및 유행 배경에 대해서 고찰하고자 한다. 더 나아가 석암리 9호분 출토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를 비롯한 낙랑 출토 향로를 분석하여 낙랑지역에서 수용한 향문화 양상에 대해서도 함께 살펴보고자 한다.

Ⅱ. 漢代 海昏侯 劉賀墓와 출토 향로

1. 해혼후 유하묘의 발굴과 특징

중국 강서성 남창시 신건구 곽돈산에 위치한 해혼후묘는 도굴의 위험을 감지한 지역 주민들의 잇따른 제보에 따라 급히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그 결과 해혼후국의 도읍이었던 紫金城 유구, 해혼후 묘원, 그리고 귀족과 평민들의 무덤이 발견되어 문헌 기록으로만 남아 있던 전한 해혼후국의 전모가 밝혀졌다.3

해혼후 유하는 무제(재위 B.C.141∼B.C.87)의 손자이자 昌邑哀王 劉髆(재위 B.C.97∼B.C.87)의 아들이다.4 그는 山東 창읍(현 菏澤 巨野縣)에서 태어나 다섯 살이었던 始元元年(B.C.86)에 아버지의 왕위를 계승하여 제2대 昌邑王으로 봉해졌다.5 元平元年(B.C.74)에 소제(재위 B.C.86∼B.C.74)가 후사 없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의 조카뻘인 유하가 열아홉 살의 나이에 霍光의 천거와 황후 上官氏의 명에 따라 왕위에 올랐다.6 그러나 황제로 즉위한 지 27일 만에 ‘음탕한 짓에 미혹되어 제왕으로서의 예의를 잃고 한나라의 제도를 어지럽혔다’ 라는 죄명을 뒤집어 쓰고 다시 곽광에 의해 폐위되어 봉지인 창읍으로 되돌아가 서민으로 강등되었다.7 이후 스물 아홉 살이었던 元康三年(B.C.63)에 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宣帝(재위 B.C.73∼B.C.49)에 의해 해혼후로 봉해진 후 서른네 살에 열후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다.8

곽돈산 정상에 위치한 해혼후 묘원은 사다리꼴형이고 남북으로 141-186m, 동서로 233-248m이며 총면적은 대략 46,000㎡(14,000평)이다. 묘원 안에는 해혼후묘(M1), 그의 부인묘(M2), 합장묘 7기(M3∼M9), 거마갱 1기(K1) 및 완비된 도로와 배수시설 등이 갖추어져 있다. 해혼후 부부묘는 이혈합장묘로 동서로 배열되어 있으며 남북으로 40m, 동서로 1,000m이고 총면적이 4,000㎡(1,200평)이다. 그 주위에는 침전(F1), 사당(F2), 양측 곁채(F13, F14) 등의 건축물 유구가 남아 있다(Fig. 1).9

Fig. 1.

<海昏侯墓園 分布圖> Distribution Map of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Cemetery Park (Jiangxisheng wenwu kaogu yanjiusuo, “Nanchangshi xihan haihunhoumu,” Kaogu 7, p. 47)

2015년에 발굴을 마친 해혼후묘(M1)는 묘실 안의 내관에서 발견된 “劉賀”명 옥인을 비롯하여 대량의 진귀한 유물과 명문이 새겨진 칠기, 청동기, 도장 및 죽간이 발견되어 묘주가 한나라의 폐제이자 해혼후국 제1대 해혼후 유하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확인되었다.10 해혼후묘의 봉토는 복두형으로 대략 7m이다. 묘장은 남향의 甲자형으로 묘도와 묘실로 구성되고 묘실은 남북으로 17.2m, 동서로 17.1m, 깊이는 8m이며 총면적은 대략 400㎡(120평)이다. 묘실은 중앙에 자리한 주곽실을 藏槨이 둘러싸고 주곽실과 장곽 사이에는 회랑형 복도가 있으며 주곽실과 묘도 사이에는 통로인 용도가 있다. 주곽실은 묘주의 관이 놓여 침실[寢]에 해당하는 東室과 탁상, 병풍, 連枝燈, 박산로, 漆案 등의 물품이 놓여 서재[堂]에 해당하는 西室로 나뉘고 그 중간에 門道가 있다. 동실과 서실의 남쪽에는 모두 창문과 문이 있다. 동실의 동북쪽에 자리한 목관은 이중관으로 뚜껑이 비교적 완전하고 측면에 용 모양의 帷帳고리가 있다. 내·외관의 뚜껑에는 칠화와 방직품의 흔적이 남아 있고, 외관 뚜껑에는 옥璏 3점이 놓여 있었으며 내·외관 사이의 남쪽에서는 다량의 금기, 옥기, 칠기가 발견되었다. 내관 안에 잔존한 유골의 머리는 남쪽을 향하였고 그 남쪽에는 貼金漆盒이 있었으며 얼굴에는 옥벽이 상감된 칠기 가면이 덮여 있었다. 유골 위에는 크고 작은 옥벽이 가지런히 배열되어 있었고 허리에는 玉劍, 書刀 각각 1점과 대구, 패옥 그리고 옥인 등이 놓여 있었다. 유골 밑에는 도금한 실로 꿰어 고정한 유리 자리가 깔려 있었고 그 아래에는 각 5개로 구성된 20조의 金餠이 놓여 있었다. 주곽실의 북·동·서측을 둘러싼 장곽에는 주로 부장품이 매장되어 있었는데 기물의 기능적 특징에 따라 분류되어 배치되었다. 북쪽의 장곽에는 錢庫, 糧庫, 樂器庫, 酒具庫, 서쪽의 장곽에는 衣笥庫, 武庫, 文書檔案庫, 娛樂用具庫, 동쪽의 장곽에는 廚具庫(食官庫)가 있었다. 남쪽에 있는 용도의 중앙에는 樂車庫가 있었고 그 양측에는 車馬庫가 있었다(Fig. 2).11

Fig. 2.

<海昏侯墓(M1) 平面圖> Plan of the Haihun Principality Tomb (Jiangxisheng wenwu kaogu yanjiusuo, “Nanchangshi xihan haihunhoumu,” Kaogu 7, p. 49)

해혼후묘에서는 대략 1만여 점의 부장품이 출토되었는데 종류별로 금기 478점, 청동기 3천여 점, 옥기 5백여 점, 칠목기 3천여 점, 죽간 5천여 점, 목독 2백여 점, 도자기 2백여 점과 소량의 은기, 철기 등이 있다. 그중에서 동기는 생활용기, 악기, 무기, 거마기, 도장, 동경 그리고 동전 등이 있고 일부 기물에는 제작자의 이름과 기관, 기물의 크기와 무게, 제작 시기 등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12 그중에 ‘太始元年(B.C.96)’, ‘昌邑’, ‘神爵3년(B.C.59)’ 등이 있어 산동의 창읍국과 강서의 해혼후국 시절에 사용된 기물이 혼재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13 그러나 창읍국 시절부터 사용된 동기가 상대적으로 많고 다량의 칠기 잔편에도 ‘昌邑7년(B.C.80)’, ‘昌邑9년(B.C.78)’, ‘昌邑11년(B.C.76)’ 등의 명문이 남아 있다.14 따라서 해혼후묘에서 출토된 기물은 대부분 그가 산동에 존속했던 창읍국에서 사용했던 물건이자 한대 북방지역에서 제작되고 유통되었던 것으로, 유하가 남창으로 이주하면서 가져왔던 것으로 짐작한다.15 또한 금병(385점), 麟趾金(25점), 馬蹄金(48점) 및 금판(20점) 등을 포함한 다량의 금화와 500여 점의 옥기가 발견되었고, 흉노와 문화적 친연성을 보이는 은제 마구도 출토되었다.16 특히 공자와 다섯 제자들의 초상화와 생애를 기록한 <孔子徒人圖漆衣鏡>은 중국내 가장 이른 시기의 공자의 화상 및 서왕모와 동왕공의 조합을 보여준다. 또한 목독 200점과 죽간 5000점 중에는 1800여년 전에 失傳된 것으로 알려진『論語』의『齊論』이 발견되어 선진시대에서 한대까지『논어』의 판본을 정리하는데 상당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한다.17

해혼후 유하는 끝내 열후의 신분으로 생을 마감했지만 무덤의 규모나 구조 및 출토품의 수량과 수준으로 보았을 때 단순히 한대 낙후된 남방 지역의 열후가 아니라 산동의 제후왕이자 더 나아가 전한대 왕으로서의 문화적 혜택을 충분히 누렸던 인물로 그것이 그의 무덤 속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 해혼후 유하묘 출토 향로현황

한대 왕실은 향을 상당히 애호하여 王侯가 封地로 나갈 때 그들에게 박산향로를 하사하였고,18 제후왕과 열후들은 사후에 박산향로를 무덤 안에 부장하는 관행을 따랐다.19 한대 제후왕과 열후묘에서 출토된 향로의 수량은 河北 滿城 中山靖王 劉勝부부묘(6점)와 廣州 南越王墓(14점)을 제외하면 대개 1~2점이다.20 이에 비해 해혼후묘에서는 동제 향로가 16점이나 발견되어 지금까지 알려진 한대 왕실 구성원 중에서 가장 많은 향로가 출토된 셈이다. 이는 묘주의 독특한 이력이 반영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대다수의 향로는 주곽실의 서실 남쪽에서 발견되었고,21 뚜껑이 결실된 향로도 포함되어 있지만 동시기 유사한 향로와의 비교를 통해서 본래 박산형이었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 향로는 뚜껑의 형태에 따라 크게 豆形과 박산형으로 나눌 수 있다.22

1) 두형 향로

두형 향로는 형태가 고대 제기인 豆와 유사하며 반구형의 뚜껑과 노신 그리고 나팔형의 노좌로 이루어져 있다. <금동향로(M1:1482)>는 뚜껑의 정수리 부분이 눌려서 변형된 상태로 발견되었다. 뚜껑과 노신은 모두 내·외층의 이중 구조로 되어있고 외층에는 용들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이 투조로 표현되어 있다(Fig. 3). 전진하는 듯한 神獸가 구름 문양으로 장식된 노좌를 받치고 그 아래로 바닥이 평평하고 얕은 원형의 승반이 달려 있다. 이같이 뚜껑에 용들이 서로 얽혀 있는 형상은 한대 전형적인 두형 향로의 특징이지만 뚜껑과 노신이 모두 이중 구조로 된 형태는 거의 발견된 바 없다.

Fig. 3.

<금동향로(M1:1482)>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12.9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 zhan, p. 127)

2) 박산형 향로

두형의 노신과 뾰족한 산모양의 뚜껑으로 구성된 박산형 향로는 노좌의 조형적 특징에 따라 세 가지 유형으로 세분할 수 있다.

(1) A유형

A유형은 노좌가 두형과 같이 나팔형으로 된 형태이다. 먼저 <금동박산향로(M1:1433)> 의 뚜껑에는 구불구불한 산봉우리 사이로 구름이 떠다니고 그 속에 사람과 동물들이 출몰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으며 향을 태운 연기가 피어오르도록 곳곳에 연공이 뚫어져 있다(Fig. 4). 노신은 반구형으로 바닥이 둥글고 볼록하며 구연에는 선대가 둘러져 있고 기면에는 다소 도식화 된 구름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노좌는 나팔형이고 바닥에 서로 얽혀 있는 용들이 역동적인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다. 향로와 못으로 연결된 원형의 승반은 깊고 안쪽의 중심에는 이중의 원형이 둘러져 있으며 그 바깥쪽에는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이와 유사한 향로는 만성 중산정왕 유승(?~B.C.113)묘에서 출토된 <금동박산향로(1:5182)>가 유일하다(Fig. 5).23 이 향로는 노신과 박산형의 뚜껑이 완벽히 조화를 이루었고 뚜껑에 중첩된 험준한 산의 형태나 생생히 살아있는 듯한 인물과 동물들의 모습 그리고 배경으로 묘사된 나무의 형상이 극히 세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더욱이 유승묘 출토품은 금도금하여 전체적으로 화려한 것에 비해서 해혼후묘 출토 향로는 문양이나 장식이 다소 도식화되어 있다. 이 두 점의 향로는 표현 방식에서 다소 차이를 보이지만 동일한 형태와 도상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같은 왕실 공방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Fig. 4.

<금동박산향로(M1:1433)>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3.1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zhan, p. 125)

Fig. 5.

<동박산향로(1:5182)>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6cm, Excavated at the Tomb of the Liu Sheng, Prince Jing of the Kingdom of Zhongshan, Heibei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동박산향로>는 두형의 노신 위에 간략화된 산형 뚜껑이 얹힌 형태로 되어있다. 뚜껑에 표현된 산모양에는 빗금을 그어 중첩된 산세를 나타내었고 향연이 배출되도록 불규칙적인 형태의 연공도 뚫려 있다. 노신은 바닥이 둥글고 볼록하며 기면에 시문된 문양은 없다. 나팔형으로 된 노좌는 짧고 굵으며 받침대에 구름 문양이 장식되어 있고 따로 승반은 없다(Fig. 6).

Fig. 6.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0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zhan, p. 126)

<동박산향로>는 비록 뚜껑이 결실되었지만 山西 朔縣3M2(3M2:1), 江蘇 鹽城 三羊墩M2 등의 전한말에서 후한초 시기의 무덤에서 출토되거나 北京에서 수집된 동일한 형태의 향로와의 비교를 통해 본래 뚜껑이 박산형이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24 노신은 볼록하고 구연에 선대가 둘러져 있으며 한쪽 끝에 손으로 잡기 편하도록 손잡이가 달려 있다. 노좌는 나팔형이고 받침대에 세 마리의 용이 휘감아 둘러싸고 있는 모습이 고부조로 장식되어 있다(Fig. 7).

Fig. 7.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The Western Han Dynasty, H. 12.5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zhan, p. 224)

(2) B유형

B유형은 노좌가 신수와 인물로 이루어진 형태이다. <동박산향로(M1:800)>는 뚜껑이 분실된 채 노신과 노좌만 남아 있다. 볼록한 형태의 노신에 장식된 문양은 없고 구연에 선대가 둘러져 있으며 뚜껑을 끼울 수 있도록 접합부가 돌출되어 있다(Fig. 8). 노좌의 바닥에 사지로 지탱하며 엎드린 채 목을 뻗어 고개를 하늘로 향하고 있는 신수(혹은 용)의 등을 밟고 서 있는 인물이 한쪽 팔을 높게 들어 향로를 떠받치고 있다. 그 아래에는 깊이가 얕은 원형의 승반이 노좌와 연결되어 있다. 이 향로는 유승의 부인 竇綰(?~B.C.104)묘에서 출토된 <동박산로(2:3004)>와 매우 유사하며 해혼후묘 출토품도 뚜껑이 박산형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Fig. 9).25 두관묘 출토 향로에 표현된 신수와 인물상이 사실적이고 자연스럽다면 해혼후묘 출토품은 다소 과장되고 투박하다.

Fig. 8.

<동박산향로(M1:800)>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15.9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zhan, p. 223)

Fig. 9.

<동박산향로(2:3004)>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32.3cm, Excavated at the Tomb of the DouWan, Spouse of Prince Jing of the Kingdom of Zhongshan, Heibei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3) C유형

C유형은 노좌가 봉황과 거북으로 이루어진 형태이다. 유하묘에서는 주곽실의 서실 남쪽에서 <동박산향로> 2점이 발견되었는데 그중에 공개된 1점(M1:790)은 노신과 봉황의 형상이 뒤로 휘어진 상태로 변형된 채 출토되었다. 뚜껑은 비록 결실되었지만 당시 봉조입귀좌 향로의 뚜껑이 대부분 박산형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향로도 박산향로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Fig. 10).

Fig. 10.

<동박산향로(M1:790)>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13-18.7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Jiangxisheng wenwu kaogu yanjiuyuan, “Jiangxi nanchang xihan haihunhou liuhe mu chutu tongqi,” Wenwu 11, p. 22)

Ⅲ. 漢代 鳳鳥立龜座博山香爐의 특징과 의미26

1. 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의 기형적 특징

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는 뾰쪽한 산형의 뚜껑과 볼록한 노신 그리고 봉황과 거북이 함께 결합된 노좌로 이루어진 형태로 승반이 동반되는 경우가 많다. 대부분 동으로 제작되었고 총 높이가 20cm 이상이다. 뚜껑에는 중첩된 산봉우리 사이로 사른 향연이 흘러나오도록 만든 구멍이 뚫어져 있다. 구불구불하게 선각하여 험준한 산세를 표현한 산속에는 동물이나 사람의 모습도 등장한다. 향을 담아 태우는 노신은 볼록하고 깊으며 기면에 장식 문양은 없고 굵은 선대가 둘러져 있다. 노좌의 거북은 원형의 승반 중앙에 사지와 꼬리를 펴고 납작 엎드린 채 목을 힘껏 빼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바짝 들고 있다. 거북의 등 위로는 봉황이 양쪽 날개를 활짝 펴고 가슴을 앞으로 내민 채 당당하게 서 있는 모습이다. 이들의 얼굴과 몸통 및 깃털 등의 세부 형상은 가는 선으로 세밀하게 새겨 넣어 생동감을 더하였다. 승반은 둥글고 얕으며 굽이 없고 납작하다. 봉조입귀좌는 처음부터 통째로 주조되었다기보다는 뚜껑, 노신, 봉황, 거북, 승반 등을 각각 따로 만든 후에 못으로 서로 접합시켰다.

현재까지 알려진 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는 대략 19점이 알려져 있다(Table 1). 이들 향로는 봉황 형상의 차이에 따라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 Hill-Shaped Censer with the Phoenix Standing on Tortoise of the Han Dynasty

1) A유형

A유형은 거북의 등 위에 두 날개와 꼬리를 활짝 펴고 서 있는 봉황이 정수리로 노신을 받치는 형태이다. 이 유형은 하북 陽原 北關M2, 隆化, 강소 徐州 碧螺山M5, 儀征 龍河, 陝西 西安 西關 南小巷, 산동 濟南 魏家庄M55, 湖北 宜城 跑馬堤M9, 섬서 藍田 宋代 呂氏가족묘, 낙랑 석암리 9호분 출토품과 일본 天理大學附屬天理參考館 소장품 등이 있다. 이 유형은 하북 양원과 서안 남소항 주거유적 출토품과 같이 향로 뚜껑에 장식된 산의 형상과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물이나 금수의 모습이 생생하게 묘사되기도 했지만 점차 장식된 문양이 간략해지는 양상을 보인다(Fig. 11).

Fig. 11.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5cm, Excavated at the Nanxiaohang of the Xi’an, Shaanxi (Xi’anshi wenwu baohu kaogusuo, Xi’an wenwu jinghua: Qingtongqi, p. 213)

2) B유형

B유형은 노좌의 봉황이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부리를 크게 벌려 구슬을 물고 있는 상태로 노신을 받치는 형태이다. 봉황이 두 날개는 활짝 펴고 있으나 꼬리를 위로 말아 올려 머리에 닿도록 하여 전체적으로 유연하고 안정적인 모습이다. 이 유형은 산서 朔縣GM187, 內蒙古 呼和浩特 格爾圖, 남창 해혼후묘, 산서 襄汾 吳興庄 한묘, 하북 萬安北沙城 懷安 한묘, 광주 橫枝崗M22, 三門峽向陽M119, 三門峽向陽M48 출토품 및 섬서역사박물관 소장품 등이 있다(Fig. 12). 뚜껑에 표현된 박산의 형태가 A유형보다 소략해져서 B유형이 A유형보다 이후에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Fig. 12.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4.5cm, Excavated at Tomb No. 187 of the Han Dynasty at Shuox ian, Shanxi (Zhongguo qingtongqi quanji bianji weiyuanhui, Zhongguo qingtongqi quanji no. 12, p. 129)

출토 현황으로 보았을 때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는 黃河 중하류(섬서, 산서, 하남, 하북, 산동)와 揚子江 유역(호북, 안휘), 그리고 珠江 유역(광동)에서 발견되었지만 북방지역에 많이 분포하는 편이다.27 시기적으로는 전한 초기에 출현하여 전한 중기(소제, 선제)와 말기에 크게 유행했지만 후한대는 석암리 9호분 출토품 이외에는 거의 발견되지 않아 차츰 소멸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초기에는 뚜껑에 표현된 산속의 인물이나 동물들이 생동감있게 묘사되고 산의 정상에 새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점차 산모양이 단순해지고 인물, 동물, 새 등이 거의 나타나지 않거나 간략화되어 그 양식적 변화가 전형적인 박산향로와 일맥상통한다.

한편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는 서안 남소항의 귀족층 주거유적을 비롯하여 양원 북관M2, 융화 전한 중기묘, 서주 벽라산 전한 중기M5, 남창 해혼후묘, 석암리 9호분과 같이 신분을 추정할 수 있는 도장이나 옥기가 함께 발견되어 소비계층을 추정해 볼 수 있다. 그중에서 양원 북관M2, 남창 해혼후묘, 낙랑 석암리 9호분 등은 모두 남성묘로 봉조입귀좌 박산향로가 고위층 남성들의 전용 기물이었을 것으로 상정할 수 있다. 더욱이 이 향로가 해혼후묘 주곽실의 서실에서 출토된 정황은 이 기물의 주요 용도를 알려주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서실은 탁상을 중심으로 병풍을 비롯한 칠안·반·이배와 박산향로, 연지등과 侍俑이 발견되어 묘주의 서재이자 손님을 맞이하고 연회를 베풀었던 장소로 추정되었다.28 따라서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는 묘주가 사적으로 책을 읽거나 시문을 지을 때 사용되었거나 공적으로 연회를 열어 손님을 모시는 자리에서 두루 애용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듯 서재라는 공간에서 향을 사용하는 전통은 南朝로 이어졌고 실제로 강소 南京 象山 東晉M7과 雨花臺 石子崗 남조M5에서 도제 향로가 案几, 憑几, 벼루, 먹, 이배, 반, 唾壺 등과 함께 한자리에 배치된 상태로 발견된 바 있다.29 이처럼 시대적 흐름에 따라 구비된 향로는 다르겠지만 개인의 서재 혹은 문인들이 만나는 공간에서 향을 사용한 전통은 이후 당·송대 독서분향으로 이어졌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2. 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의 조형적 의미

중국에서 새와 거북이 함께 등장하는 모습은 일찍이 신석기 앙소문화기의 하남 汝州 洪 山廟W84 출토 옹기에 그려진 <雙鳥戱龜圖>에서 찾아볼 수 있다.30 새와 거북이 조합된 도상은 한대에 유행하면서 四川 南溪 長順坡M1 석관, 하남 新野 화상전 그리고 湖南 長沙 馬王堆M1 백화 등에서 새가 거북의 등 위에 서 있는 형상으로 종종 나타났다.31 여기에 등장하는 새는 봉황 혹은 주작 이외에 백로, 짐새, 올빼미, 삼족조 등으로 구별되었고 거북과 조합되는 새의 종류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해석되기도 했다.32

봉조입귀좌 박산향로에 거북과 함께 표현된 새가 주작이라는 견해는 이미 개진되었다.33 주작(혹은 봉황)과 거북은 고대 중국인들이 숭상한 전설상의 신령스럽고 상서로운 동물을 상징하는 四靈에 속하는 신수이다.34 이들은 전국시대에 유행한 오행설에 입각한 천문·방위·색채관의 개념과 결합하여 공간과 기물에 방위별로 수호와 벽사를 목적으로 장식되었다. 다시 말해서 주작은 붉은색을 상징하고 남쪽을 수호하였다면 검은색을 뜻하는 거북은 뱀과 결합된 현무의 형상으로 북쪽을 지키는 동물로 인식되었다. 한편 終始五德說에 따라 火德에 해당하는 주나라를 주작(봉황)에 빗대고 水德의 기운을 가진 한나라를 거북이에 대응시켜 한 초기에는 화와 수의 대립으로 보았지만,35 전한 중기 이후에 양자 간 충돌이 약해지고 조화를 이루며 일체화 된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36 그러나 한대는 사신의 조합에 대한 정립이 불완전했던 시기로 당시 문헌 기록과 기물에 나타난 사신(혹은 사령)에 대한 조합이 완벽하게 일치하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하북 만성의 두관묘 출토 <동박산로(2:3004)>와 산서 삭현의 <사신문 온주로>에 표현된 사신의 조합이 다르다.37 특히 거북의 형상은 섬서 咸陽 秦代 궁정과 서안 한대 長安城에서 각각 발견된 사신문의 <공심전>과 <와당>에 장식된 거북이 뱀과 한데 얽힌 龜蛇交尾形이지만,38 동시기 봉조입귀좌 박산향로에서는 단독의 거북이 바닥에 납작 엎드린 형태로 표현되어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현무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봉조입귀좌 박산향로의 노좌는 봉황과 거북의 조합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고대 중국에서 봉황은 성군이 선정을 베풀어 태평성대를 이루면 출현한다는 상상 속의 吉鳥이다.39 그 생김새는 여러 동물의 외형적 특징이 한데 집약된 모습으로,40 신체의 각 부분이 德, 義, 禮, 仁, 信을 지녔다고 하여 상서로운 이미지를 갖추게 되었다.41 특히 상서의 하나로 인식되었던 봉황이 한대에 이르러 점차 황제의 권위를 상징하는 존재로 부각되었고 더욱이 소제와 선제시기에는 봉황이 산동에 해당하는 魯齋지역에 집중적으로 나타났다고 기록되기도 했다.42

거북도 고대 중국인의 관념 속에 장수와 불멸을 상징하는 영물로 신성한 곳에 기거하고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인식되었다.43 무너져 버린 하늘을 女媧가 거북의 네 발로 지탱하도록 하거나,44 동쪽 바다 위에 떠다니는 五神山을 帝가 북방의 신 禺彊에게 명하여 거북이 열다섯 마리가 번갈아 가며 머리로 짊어지고 있는 임무를 담당하게 된 고대 신화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45 이렇듯 거북이는 딱딱하고 평평한 등껍질을 가진 외형적인 특징으로 인하여 무거운 것을 떠받치는 역할을 부여받았고 고대 기물에 천지, 산, 새, 사람, 비석 등을 받치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게 된다.46 이에 박산향로 노좌에 표현된 거북(혹은 자라)도 바다 가운데 이상향인 해중신산을 형상화한 박산향로를 받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했다.47

고대 중국에서 신성한 동물은 인간과 신의 세계를 연결하는 역할을 담당한다고 여겨졌다.48 그중에서 새는 하늘과 땅을 왕래하는 존재로 망자의 영혼을 선계로 인도하는데 특히 봉황은 서왕모가 타고 다니는 교통수단이자 신선 세계의 일원이기도 했다.49 게다가 거북도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우주축의 중요한 구성 요소로서 인간의 승선을 돕는 영물이었다.50 따라서 ‘봉조입귀좌’ 도상은 한대인들이 봉황과 거북이 가진 신성이 합쳐져 한층 더 강화되기를 바라는 바람과 본질적인 장수 혹은 불멸에 대한 희구와 열망이 담겨 생성된 혼합체로서 선계로의 승천을 표현한 박산향로의 핵심적인 모티브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51

한대 봉조입귀좌 도상은 박산향로 이외에 기물의 좌대로도 활용되었다. 섬서 서안 范南村 전한 초기M92와 M120에서 각각 출토된 도제 <鳳鳥龜座俑>은 편종이나 편경을 거는 목제 받침대의 좌대로 사용되었다.52 또한 캐나다 로얄 온타리오 박물관 소장 <銅鳳凰燈>를 비롯하여 산서 太原, 安徽 天長 전한 중기M19, 산동 日照 海曲M107, 하남 新鄕市 獲嘉縣 등지에서 출토된 동제 등구에도 봉조입귀좌 조형이 나타났다(Fig. 13).53 특히 이들 등구 좌대의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거북이의 등 위에 새가 두 발로 서서 부리 혹은 정수리로 등잔을 받치고 있는 형상은 박산향로와 매우 유사하다. 따라서 한대 봉조입귀좌 도상이 향로나 등구 등의 일상 기물에 활용되어 일시적으로 전한 중기에서 말기에 집중적으로 유행한 것은 당시 사람들의 승선에 대한 강한 염원을 담은 표현으로 볼 수 있겠다. 그런데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는 이렇게 전한대에 크게 유행하다가 후한대에 이르러 서서히 소멸하게 된다. 이것은 후한대에 유교에 기반한 합리주의가 대두되고 지성이 우선시되면서 영원한 삶을 위한 신선 세계로의 승천에 대한 관념이 차츰 변화함에 따라 박산향로의 제작이 줄어들고 도상도 함께 사라지는 계기가 된 것이다.54 혹은 실질적으로 전한대 청동제 위주의 박산향로가 후한대에 이르러 점차 도기제 박산향로로 전환되면서 봉조입귀좌 박산향로의 제작공정이 쉽지 않았던 점에 기인했을 수도 있다.

Fig. 13.

<동등> Bronze Lamp, Western Han Dynasty, H. 16.6 cm, Excavated at Tomb No. 19 of the Han Dynasty at Tianchang, Anhui (Zhongguo guojia wenwuju, Qin Han–Luoma Wenmingzhan, p. 216)

Ⅳ. 樂浪 石巖里 9호분 출토 鳳鳥立龜座박산향로

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는 현재 북한 평양의 대동강 일대에 자리했던 낙랑고분군에서도 출토되어 주목된다. 낙랑군은 무제가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하고 한반도 서북부에 설치한 한사군의 하나로 313년까지 존속하였다. 낙랑지역에서는 봉조입귀좌 박산향로가 출토된 석암리 9호분을 비롯하여 정백동 88호분, 석암리 219호분, 201호분에서 청동제 향로가 출토되었고 정오동 24호분과 남정리 53호분에서는 녹유제 박산향로가 발견되었다. 그중에서 정백동 88호분과 석암리 219호분은 모두 기원전 1세기 후반에 축조되었지만, 각각 두형 향로와 박산향로가 출토된 바 있다.55 이는 동시기 전한과 마찬가지로 낙랑 사회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향로가 유입되어 사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사용자의 취향과 용도 및 소비 양상에 따라 취사선택하였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밖에 국립중앙박물관, 경북대학교 박물관 및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오구라 컬렉션 중에도 낙랑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해지는 청동제 및 녹유제 박산향로가 있다.56

낙랑의 향로는 출토 유적의 축조연대를 기준으로 보면 기원전 1세기 후반(정백동 88호분, 석암리 219호분)부터 기원후 1세기(석암리 9호분, 201호분), 2세기(정오동 24호분)를 거쳐 3세기 이후(남정리 53호분)까지 계속하여 출토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향로의 재질과 기형은 한대와 마찬가지로 청동제에서 점차 도기제로 전환되었고 기형 역시 간략한 형태의 박산향로가 주를 이루고 있다. 이같이 현재 전하는 낙랑의 향로는 소량이지만 낙랑이 한반도에 존속하는 동안 향이 계속 사용되었다는 것과 한나라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받았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실존하는 낙랑의 향로가 극히 적고 출토 상황에 관한 전반적인 정보를 습득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서 현재 낙랑만의 독특한 향문화를 밝히는 것에는 다소 어려움이 있다.

한편, 봉조입귀좌 박산향로가 출토된 석암리 9호분은 居攝三年(8)銘의 칠기 파편과 連弧 紋鏡이 발견되어 1세기 초기에 조성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덤의 규모와 <금제용문대구>를 비롯한 <‘永壽康寧’명 귀뉴옥인>, 옥, 청동, 칠기, 그리고 유리구슬류 등의 다채롭고 호화로운 유물이 출토되어 당시 낙랑 고위층의 무덤으로 추정되었다.57 석암리 9호분 출토 <동제 박산향로>는 총 높이가 20.3cm이고, 산모양의 뚜껑과 노신, 봉황과 거북이 조합된 노좌 및 승반으로 이루어져 있다(Fig. 14). 산형 뚜껑에는 중첩된 산봉우리가 극히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을 뿐 인물이나 동물은 등장하지 않는다. 산봉우리 사이와 그 아래로 향을 태운 연기가 흘러나올 수 있도록 설계된 구멍은 모양이 일정하지 않다. 노신은 아래로 내려갈수록 볼록하고 상단에 한 줄의 굵은 선대가 둘러져 있다. 노신을 떠받치고 있는 노좌에는 봉황과 거북이가 함께 어우러져 있는데, 승반의 중앙에 납작 엎드린 거북이는 목을 힘껏 빼고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다. 거북이 등 위에 두 다리로 꼿꼿하게 서있는 봉황은 양 날개와 꼬리를 활짝 펴고 가슴을 내민 모습이다.58 특히 석암리 9호분 출토품이 한대 동형의 향로와 다른 점은 노신과 뚜껑을 지도리로 연결하여 뚜껑을 여닫기 편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이렇게 지도리를 사용한 박산향로가 한대에 자주 등장하였으나 봉조입귀좌 향로는 석암리 9호분 출토품이 유일하다.

Fig. 14.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1st Century, Nangnang, H. 20.3cm,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graph by the author)

석암리 9호분의 묘주는 무덤의 규모뿐만 아니라 동경, 한식의 청동용기, 토기가 다량으로 출토되어 당시 한나라와 친연성이 강한 고위층으로, 피장자의 허리 부근에서 <금제용문대구>와 칼 장식구가 발견되어 남성으로 추정된 바 있다. 비록 무덤은 기원 이후에 조성되었으나 대부분의 봉조입귀좌 박산향로가 전한대 무덤에서 출토되어 석암리 9호분 출토품도 역시 전한대에 제작된 후 묘주 생전에 사용되다가 부장되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Ⅴ. 맺음말

중국 강서성 남창시 신건구 곽돈산에서 발견된 해혼후묘는 전한의 창읍왕, 폐제, 해혼후를 두루 지냈던 유하의 무덤으로, 묘원을 제대로 갖추었고 대략 1만여 점에 달하는 부장 유물이 묘주의 독특한 이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무덤에서 출토된 16점의 향로는 당시 향이 단순히 악취나 병균을 없애는 보건적 용도 외에 신선 사상의 유행에 따른 승선을 희구하고 열망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중에서 봉조입귀형 박산향로는 봉황과 거북이 가진 신성이 극대화되어 본질적인 장수 혹은 불멸을 향해 생성된 혼합체로서 선계로의 승천을 표현한 박산향로에서 핵심적인 구성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후한대에 이르러 유교에 기반한 합리주의가 대두되면서 지성이 우선시되고 신선 세계로의 승천에 대한 관념이 희박해지면서 서서히 사라져갔다. 봉조입귀형 박산향로는 주로 남성묘에서 출토되었고 그들의 개인공간인 서재 혹은 손님들을 맞이하는 연회의 공간에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한반도에 설치된 한사군 중의 하나였던 낙랑지역에서도 다양한 형태의 향로가 중국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계속 사용되었고, 석암리 9호분에서 발견된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도 그 중의 하나였다. 이같이 낙랑 사회에서도 향은 사용자의 취향과 용도 및 소비 양상에 따라 취사 선택하여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Notes

1)

이러한 형태의 박산향로는 중국내 출판된 각종 도록 및 보고서에서 ‘踏龜’, ‘朱雀龜座博山爐’, ‘朱雀玄武博山爐’, ‘龜座博山爐’, ‘鳳鳥立龜’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본고에서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라고 지칭한 것은 노좌의 새를 봉황으로 특정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현재 캐나다 로얄 온타리오 박물관(Royal Ontario Museum)에 소장된 <Phoenix Lamp>의 등잔 기면에 새겨진 명문인 河平元年(B.C.28)에 왕실 공방의 장인이 中宮에서 일하는 관료를 위해 “銅鳳凰燈”을 제작하였다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河平元年工護中造銅鳳凰燈重一斤十四兩護 而霸廣護王必省中宮內者第二受內者,” The Royal Ontario Museum, Chinese Art in the Royal Ontario Museum (Toronto: The Royal Ontario Museum, 1972), p. 102).

2)

Susan N. Erickson, “Boshanlu-Mountain Censers of the Western Han Period: A Typological and Iconological Analysis,” Archives of Asian Art 45 (1992), pp. 13, 16-20; 김자림, 「中國 古代 博山香爐의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협동과정 석사학위 논문, 2003), pp. 39-40, 43-47, 55; 李根枝, 「漢代薰爐與燈淺議」, 『中原文物』 第4期 (2014), pp. 82-85; 胡雪竹, 「漢代鳥龜組合圖像的形式及意蘊」, 『碑林集刊』 21 (2015), pp. 198-211; 陳春婷, 「“鳳鳥立龜”造型在漢代的出現及其原因初探」, 『華夏考古』 第3期 (2016), pp. 87-94.

3)

江西省文物考古硏究所·南昌市博物館·南昌市新建區博物館, 「南昌市西漢海昏侯墓」, 『考古』 第7期 (2016), pp. 45-62; 彭明瀚, 『劉賀藏珍: 海昏侯國遺址博物館十大鎭館之寶』 (北京: 文物出版社, 2020), pp. 1-2; 2011년부터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어 자금성 성터와 해혼후 묘원 등의 중요 유적이 발견되었고, 2015년에 해혼후묘(M1)가 본격적으로 발굴되어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그해 중국 고고학 10대 새로운 발견에 선정되었다(國家文物局 主編, 『2015中國重要考古發現』 (北京: 文物出版社, 2016), pp. 106-111). 2016년 북경의 수도박물관에서 개최된 ‘남창한대 해혼후국의 고고학적 성과 보고회’에서는 묘주가 유하임이 확인되었다(江西省文物考古硏究所·首都博物館編, 『五色炫曜: 南昌漢代海昏侯國考古成果』 (南昌: 江西人民出版社, 2016) p. 11). 2017년에 남창 한대 해혼후국 유적은 국가고고유적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9년 2월까지 대략 1만여 건의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南昌漢代海昏侯國遺址博物館 編著, 『金色海昏: 漢代海昏侯國歷史與文化展』 (北京: 文物出版社, 2020)). 현재 해혼후 묘원 인근에 ‘南昌漢代海昏侯國遺址博物館(http://www.hhhmuseum.cn/)’이 건립되어 해혼후국에 대한 연구와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4)

창읍국 애왕 유박(?∼B.C.87)은 무제와 李夫人사이에서 태어났으며 協律都尉 李延年과 貳師將軍 李廣利가 외숙이다. 그는 元鼎6년(B.C.111)에서 太初元年(B.C.104)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天漢4년(B.C.97)에 창읍국의 제후왕으로 봉해졌다가 후원원년(B.C.87)에 20대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辛德勇, 『海昏侯劉賀』 (北京: 生活·讀書·新知三聯書店, 2019), pp. 8-10). 산동 거야현 동남쪽인 紅土山에 위치한 그의 무덤은 1970년대에 발굴이 진행되었다.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대형의 崖墓로, 동기, 옥기, 철기, 도기 등의 유물이 대략 1,056점 출토되었다. 묘실의 제기와 출토된 동기의 刻文 및 玉印의 명문이 박락되어 묘주를 특정할 만한 자료가 부족했지만, 동시기 제후묘와의 비교를 토대로 한 묘제형식, 부장기물, 문헌자료의 분석을 통해 유박의 무덤으로 확정되었다(山東省渮澤地區漢墓發掘小組, 「巨野紅土山西漢墓」, 『考古學報』 第4期 (1983), pp. 471-499).

5)

『漢書』 卷63 「武五子傳」 “昌邑哀王髆天漢四年立, 十一年薨, 子賀嗣.”

6)

『漢書』 卷8 「宣帝紀」 “元平元年四月, 昭帝崩, 毋嗣. 大將軍霍光請皇后徵昌邑王. 六月丙寅, 王受皇帝璽綬, 尊皇后曰皇太后.”; 『漢書』 卷63 「武五子傳」 “子賀嗣, 立十三年, 昭帝崩, 無嗣, 大將軍霍光徵王賀典喪. …王受皇帝璽綬, 襲尊號.”

7)

『漢書』 卷8 「宣帝紀」 “六月丙寅, …癸巳, 光奏王賀淫亂, 請廢.”; 『漢書』 卷63 「武五子傳」 “卽位二十七日, 行淫亂. 大將軍光與羣臣議, 白孝昭皇后, 廢賀歸故國, 賜湯沐邑二千戶, 故王家財物皆與賀.”; 『漢書』 卷68 「霍光金日碲傳」 “賀者, 武帝孫, 昌邑哀王子也. 旣至, 卽位, 行淫亂. …荒淫迷惑, 失帝王禮誼, 亂漢制度. …太后詔歸賀昌邑, 賜湯沐邑二千戶.”

8)

『漢書』 卷8 「宣帝紀」 “其封故昌邑王賀爲海昏侯.”; 『漢書』 卷63 「武五子傳」 “其明年春, …其封故昌邑王賀爲海昏侯, 食邑四千戶. …賀就國豫章.”

9)

기록상 한대 열후도 황제나 제후왕과 같이 묘원을 설치했던 것으로 전해졌으나 그동안 고고학적 실례가 발견되지 않았다(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編著, 『中國考古學·秦漢卷』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0), p. 371). 그러나 해혼후 묘원의 발견으로 열후도 완전한 묘원을 갖추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10)

江西省文物考古硏究所·首都博物館 編, 앞의 책, pp. 11, 124.

11)

江西省文物考古硏究所·南昌市博物館·南昌市新建區博物館, 앞의 논문, pp. 48-51.

12)

江西省文物考古硏究所·南昌市博物館·南昌市新建區博物館, 앞의 논문, pp. 51-62.

13)

江西省文物考古硏究院·中國人民大學歷史學院考古文博系, 「江西南昌西漢海昏侯劉賀墓出土銅器」, 『文物』 第11期 (2018), pp. 4-26.

14)

江西省文物考古硏究院·北京師範大學, 「江西南昌西漢海昏侯劉賀墓出土漆木器」, 『文物』 第11期 (2018), pp. 37, 55.

15)

동기와 칠기에 새겨진 명문에 표기된 ‘창읍’이라는 지명뿐만 아니라 당시 비교적 궁벽한 남쪽의 변방이었던 강서의 해혼후국은 상당히 부유한 지역에 속했던 산동의 창읍국보다 생활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유하묘에서 출토된 동기, 칠기, 금은기 중의 상당수는 창읍에서 가져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辛德勇, 앞의 책, pp. 188, 249-251.

16)

이송란, 「중국 前漢 海昏侯墓의 <銀製一角獸文裝飾>과 흉노의 벨게트 구르스(Belget Göroos)」, 『숭실사학』 45 (2020), pp. 343-365.

17)

김경호, 「전한시기 『논어(論語)』의 전파와 그 내용-새로운 출토문헌 『논어』의 『제론』설과 관련하여」, 『역사와현실』 107 (2018), pp. 491-521.

18)

呂大臨, 『考古圖』 卷10 “博山香爐 … 按漢朝故事諸王出閣則賜博山香爐.”

19)

Susan N. Erickson, 앞의 논문, p. 20.

20)

한대 제후왕 및 열후묘에서 출토된 향로의 현황은 최국희, 「滿城漢墓출토 香具를 통해 살펴본 한대 香文化」, 『東洋美術史學』 10 (2020), p. 79 <표 2> 참고.

21)

江西省文物考古硏究所·首都博物館 編, 앞의 책, pp. 82-83, 85.

22)

해혼후묘에서 출토된 향로는 博山爐 11점, 熏爐 2점, 托盤爐 3점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江西省文物考古硏究·中國人民大學歷史學院考古文博系, 앞의 논문, pp. 18, 20-22.

23)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河北省文物管理處, 『滿城漢墓發掘報告』 (北京: 文物出版社, 1980), pp. 63-65; 최국희, 앞의 논문 (2020), p. 86.

24)

屈盛瑞, 「山西朔縣西漢幷穴木槨墓」, 『文物』 第6期 (1987), pp. 53-60; 江蘇省文物管理委員會·南京博物院, 「江蘇鹽城三羊墩漢墓淸理報告」, 『考古』 第8期 (1964), pp. 393-402; 程長新, 「北京市揀選古代靑銅器續志」, 『文物』 第12期 (1984), pp. 35-39.

25)

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河北省文物管理處, 앞의 책, pp. 253-257; 최국희, 앞의 논문 (2020), p. 87.

26)

본 장은 최국희, 「낙랑고분출토 금속공예품에 관한 연구: 석암리9호분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4), pp. 60-65를 토대로 수정·보완한 것이다.

27)

陳春婷, 앞의 논문, p. 90.

28)

彭明瀚, 앞의 책, p. 74.

29)

南京市博物館, 「南京象山5號,6號,7號墓淸理簡報」, 『文物』 第11期 (1972), p. 29; 南京市博物館·南京市雨花臺區文化局, 「南京雨花臺石子崗南朝磚印壁畫墓(M5)發掘簡報」, 『文物』 第5期 (2014), p. 21.

30)

徐峰, 「中國古代的龜崇拜-以“龜負”的神話, 圖像與雕像爲視角」, 『中原文物』 第3期 (2013), p. 45.

31)

胡雪竹, 앞의 논문, pp. 201-202 참고.

32)

胡雪竹, 앞의 논문, pp. 203-211.

33)

John Major, “New Light on the Dark Warrior,” Journal of Chinese Religions 13·14 (Fall 1985·1986), p. 73.

34)

四靈은 四神, 四象, 四維, 四宮, 四獸라고도 하며, 사령의 개념이 완전히 확립되기 전에는 기린이 백호를 대체하기도 했다(『禮記』 禮運第九, “何謂四靈, 麟鳳龜龍, 謂之四靈.”). 현재 사령을 가리키는 동물들의 조합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로 정해진 것은 『三輔黃圖』를 따른 것이다(『三輔黃圖』 卷3 “未央宮 … 蒼龍·白虎·朱雀·玄武, 天之四靈, 以正四方, 王者制宮闕殿閣取法焉.”). 한대는 문헌마다 사령의 조합이 달랐던 만큼 사령의 형태가 가장 복잡한 단계였다(倪潤安, 「論兩漢四靈的源流」, 『中原文物』 第1期 (1999), p. 83). 이에 대해 이들의 조합이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청룡·백호’, ‘주작·현무’라는 구성이 오랫동안 병존해 있다가 뒤늦게 결합된 것으로 판단되기도 했다(李成九, 「四神의 形成과 玄武의 起源」, 『中國古中世史硏究』 19 (2008), p. 2).

35)

終始五德說은 전국시대 騶衍이 주창한 것으로 각 왕조는 오행에 대응하는 五德(木德, 火德, 土德, 金德, 水德)의 운행 논리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흥폐가 교체된다고 하는 것이다. 진나라도 수덕에 해당하지만 왕조 기간이 극히 짧아서 한나라가 수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보았다.

36)

陳春婷, 앞의 논문, pp. 92-93.

37)

하북 만성 두관묘(M2)의 박산향로에서는 사신이 청룡, 백호, 주작, 낙타로 구성되어 있고, 산서 삭현의 온주로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으로 이루어져 있다. 中國靑銅器全集編輯委員會 編, 『中國靑銅器全集: 第12卷 秦·漢』 (北京: 文物出版社, 1998), 도 77, 128.

38)

Zhixin Jason Sun, Age of Empires: Art of the Qin and Han Dynasties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7), p. 100, fig. 23b; 曾布川寬·谷 豊信,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2卷 秦·漢』 (東京: 小學館, 2001), p. 10 도 5.

39)

『淮南子』 卷6 「覽冥訓」 “鳳皇之翔至德也, 雷霆不作, 風雨不興”; 『史記』 卷1 「五帝本紀」 第1 “唯禹之功爲大, …於是禹乃興九招之樂, 致異物, 鳳皇來翔. 天下明德皆自虞帝始.”

40)

『說文解字』 卷4 “鳳, 神鳥也, 天老曰鳳之象也, 鴻前麐後, 蛇頸魚尾, 鸛顙鴛思, 龍文龜背, 燕頷雞啄, 五色備擧, 出於東方君子之國, 翶翔四海之外, 過崐崙飮砥柱, 濯羽弱水, 莫宿風穴, 見則天下大安寧.”

41)

『山海經』 卷1 「南山經」 “又東五百里, 曰丹穴之山, 其上多金玉. 丹水出焉, 而南流注于渤海. 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 首文曰德, 翼文曰義, 背文曰禮, 膺文曰仁, 腹文曰信. 是鳥也, 飮食自然, 自歌自舞, 見則天下安寧.”

42)

소제와 선제대 노제지역에서 봉황의 잦은 출현은 서상의 관념을 이용하여 입지를 다지려는 산동의 方士집단과 이들을 활용하여 황제 권력의 정당성과 위엄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과시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견해가 피력되었다. 이수덕, 「아무도 보지 못한 새-한대 봉황의 출현을 통해 본 서상의 역할과 의미」, 『역사와 경계』 89 (2013), pp. 253-258.

43)

『史記』 卷128 「龜策列傳」 第68 “龜者是天下之寶也, …生於深淵, 長於黃土. 知天知道, 明於上古. …壽蔽天地, 莫知其極. …明於陰陽, 審於刑德. 先知利害, 察於禍福.”; 『山海經·中次九經』 “又東北三百里, 曰岷山, 江水出焉, 東北流注于海, 其中多良龜, 多鼉.”

44)

『列子·湯問』 “然則天地亦物也. 物有不足, 故昔者女媧氏練五色石, 以補其闕, 斷鼇之足, 以立四極.”; 『淮南子·覽冥訓』 “往古之時, 四極廢, 九州裂, 天不兼覆, 地不周戴 …於是女媧煉五色石以補蒼天, 斷鼈足以立四極.”; 『論衡·談天』 “夫天本以山爲柱, 共工折之, 代以獸足, 骨有腐朽, 何能立之, 且鼈足可以柱天, 體必長大, 不容於天地.”

45)

『列子·湯問』 “其中有五山焉 …而五山之根, 無所連著, 常隨潮波上下往還, 不得暫峙焉. 仙聖毒之, 訴之於帝. 帝恐流於西極, 失君聖之居, 乃命禺疆使巨鼇十五擧首而戴之. 迭爲三番, 六萬歲一交焉.”

46)

徐峰, 앞의 논문, pp. 43-49.

47)

趙容重, 「海中神山에 관한 文獻과 圖像 硏究」, 『美術資料』 63 (1999), pp. 19-25; 朴景垠, 「博山香爐의 昇仙圖像 硏究」, 『미술사학연구』 225·226 (2000), p. 70 참조.

48)

마이클 로이, 이성규 역, 『古代中國人의 生死觀』 (지식산업사, 1987), p. 34.

49)

『拾遺記』 卷3 “西王母乘翠鳳之輦而來.”

50)

『楚辭』 5 「遠遊」 “時瞹曃其曭莽兮, 召玄武而分屬.”; 『楚辭』 15 「九懷」 “玄武步兮水母, 與吾期兮南榮.”; Susan N. Erickson, 앞의 논문, p. 16.

51)

徐峰, 앞의 논문, p. 45.

52)

西安市文物保護考古所, 『西安龍首原漢墓(甲編)』 (西安: 西北大學出版社, 1999), pp. 121-123, 142-144; 陳春婷, 앞의 논문, pp. 87-88, 93, 주3 참고.

53)

山西省博物館, 『山西省博物館館藏文物精華』 (太原: 山西人民出版社, 1999), p. 55; 天長市文物管理所·天長市 博物館, 「安徽天長西漢墓發掘簡報」, 『文物』 第11期 (2006), pp. 4-21; 謝治秀主編, 『山東重大考古新發現』 (山東: 山東文化音像出版社, 2003), p. 147; 唐愛華, 「介紹兩件館藏靑銅器」, 『中原文物』 第1期 (1981), p. 64.

54)

마이클 로이, 앞의 책, p. 29.

55)

文化財管理局·文化材硏究所, 『北韓文化財調査書 제3冊: 北韓文化遺蹟發掘槪報』 (文化財管理局, 1991), p. 52, 그림 73; 리순진,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이해』 (도서출판 중심, 2001), p. 110.

56)

국립중앙박물관, 『낙랑』 (솔, 2001), pp. 116-117;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고고학자료집』 5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8), p. 8; 梅原末治·藤田亮策, 『朝鮮古文化綜鑑』 2 (京都: 養德社, 1948), p. 43; 리순진·김재용, 『락랑구 역일대의 고분발굴보고』 (백산자료원, 2003), pp. 486-487;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1986), p. 226; 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유물도록』 (경북대학교 박물관, 2003), p. 40; 국립문화재연구소,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 p. 35.

57)

최국희, 앞의 논문 (2004), pp. 27-29.

58)

국립중앙박물관, 『日帝强占期 資料調査 報告 30輯-平壤 石巖里 9號墳』 (국립중앙박물관, 2018), pp. 134-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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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海昏侯墓園 分布圖> Distribution Map of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Cemetery Park (Jiangxisheng wenwu kaogu yanjiusuo, “Nanchangshi xihan haihunhoumu,” Kaogu 7, p. 47)

Fig. 2.

<海昏侯墓(M1) 平面圖> Plan of the Haihun Principality Tomb (Jiangxisheng wenwu kaogu yanjiusuo, “Nanchangshi xihan haihunhoumu,” Kaogu 7, p. 49)

Fig. 3.

<금동향로(M1:1482)>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12.9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 zhan, p. 127)

Fig. 4.

<금동박산향로(M1:1433)>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3.1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zhan, p. 125)

Fig. 5.

<동박산향로(1:5182)>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6cm, Excavated at the Tomb of the Liu Sheng, Prince Jing of the Kingdom of Zhongshan, Heibei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6.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0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zhan, p. 126)

Fig. 7.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The Western Han Dynasty, H. 12.5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zhan, p. 224)

Fig. 8.

<동박산향로(M1:800)>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15.9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Nanchang handai haihunhouguo yizhi bowuguan, Jinse haihun: Handai haihunhouguo lishi yu wenhuazhan, p. 223)

Fig. 9.

<동박산향로(2:3004)>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32.3cm, Excavated at the Tomb of the DouWan, Spouse of Prince Jing of the Kingdom of Zhongshan, Heibei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Fig. 10.

<동박산향로(M1:790)>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13-18.7cm, Excavated at the Nanchang Haihun Principality Tomb (Jiangxisheng wenwu kaogu yanjiuyuan, “Jiangxi nanchang xihan haihunhou liuhe mu chutu tongqi,” Wenwu 11, p. 22)

Fig. 11.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5cm, Excavated at the Nanxiaohang of the Xi’an, Shaanxi (Xi’anshi wenwu baohu kaogusuo, Xi’an wenwu jinghua: Qingtongqi, p. 213)

Fig. 12.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Western Han Dynasty, H. 24.5cm, Excavated at Tomb No. 187 of the Han Dynasty at Shuox ian, Shanxi (Zhongguo qingtongqi quanji bianji weiyuanhui, Zhongguo qingtongqi quanji no. 12, p. 129)

Fig. 13.

<동등> Bronze Lamp, Western Han Dynasty, H. 16.6 cm, Excavated at Tomb No. 19 of the Han Dynasty at Tianchang, Anhui (Zhongguo guojia wenwuju, Qin Han–Luoma Wenmingzhan, p. 216)

Fig. 14.

<동박산향로> Hill-Shaped Bronze Censer, 1st Century, Nangnang, H. 20.3cm,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graph by the author)

Table 1.

<한대 봉조입귀좌 박산향로> Hill-Shaped Censer with the Phoenix Standing on Tortoise of the Han Dynasty

Site Period Height Citation
Type A 1 河北 陽原 北關 M2 西漢 中期 24cm Hebeisheng wenwu yanjiusuo, “Hebeisheng yangyuanxian beiguan hanmu fajue jianbao,” Kaogu 4, p. 326
Hebei Yangyuan Beiguan M2 Mid Western Han
2 河北 隆化 西漢 中期 23cm Jiang Du, “Hebei longhua faxian xihanmu,” Wenwu ziliao congkan 4, p. 228
Hebei Longhua Mid Western Han
3 江蘇 徐州 碧螺山 M5 西漢 中期 25cm Xuzhou bowuguan, “Xuzhou biluoshan wuhao xihanmu,” Wenwu 2, p. 39
Jiangsu Xuzhou Biluoshan M5 Mid Western Han
4 江蘇 儀征 龍河 西漢 24cm Yizhengshi bowuguan, Yizheng chutu wenwu jicui, p. 40
Jiangsu Yizheng Longhe Western Han
5 陝西 西安 西關 南小巷 西漢 25cm Xi’anshi wenwu guanli weiyuanhui, “Xi’anshi faxian yipi handai tongqi he tongyuren,” Wenwu 4, p. 8
Shanxi Xi’an Xiguan Nanxiaoxiang Western Han
6 山東 濟南 魏家庄 M55 西漢 後期 23.8cm Jinanshi kaogu yanjiusuo, Jinan weijiazhuang: zhanguo zhi mingqing muzang, p. 25
Shandong Jinan Weijiazhuang M55 Late Western Han
7 湖北 宜城 跑馬堤 M9 西漢 中期 22.2cm Wuhan daxue, Hubei yicheng paomadi dongzhou lianghan mudi, p. 76
Hubei Yicheng Paomadi M9 Mid Western Han
8 陝西 藍田 呂氏墓 西漢 22.8cm Shanxisheng kaogu yanjiuyuan, Lantian Lushi jiazu muyuan, p. 928
Shaanxi Lantian Lü Family Graveyard Western Han
9 北韓 平壤 石巖里 M9 東漢 初期 20.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ngnang, p. 116
Puk’an p’yŏngyang sŏgam-ri M9 Early Eastern Han
10 天理大學 附屬 天理參考館 西漢 23.5cm Tenridaigaku·Tenrikyodoyusha, Hito mono kokoro: Tenri daigaku fuzoku tenrisankōkan zōhin 1 kandai no dōki, p. 32
Tenri taehak pusok Tenri ch’amgogwan Western Han
Type B 1 山西 朔縣 GM187 西漢 中期 24.5cm Pingshuo kaogudui, “Shanxi Shuoxian qinhanmu faxian jianbao,” Wenwu 6, p. 21
Shanxi Shuoxian GM187 Mid Western Han
2 內蒙古 呼和浩特 格爾圖 西漢 中期 15.5cm Neimenggu bowuguan, “Neimenggu Huhehaoteshijiao Geertu hanmu,” Wenwu 4, pp. 11, 13
Neimenggu Huhehaote Geertu Mid Western Han
3 江西 南昌 劉賀墓 西漢 中期 13-18.7cm Jiangxisheng wenwu kaogu yanjiuyuan, “Jiangxi nanchang xihan haihunhou liuhemu chutu tongqi,” Wenwu 11, p. 20
Jiangxi Nanchang Tomb of the Haihun Principality M1 Mid Western Han
4 山西 襄汾 吳興庄 西漢 後期 24cm Xuewen Li, “Shanxi xiangfenxian wuxingzhuang hanmu chutu tongqi,” Kaogu 11, p. 981
Shanxi Xiangfen Wuxingzhuang Late Wastern Han
5 陝西歷史博物館 24.5cm Rongbo Wang, Qinhan wenhua, p. 266
Shanxi History Museum Han
6 河北 萬安北沙城 懷安 23.8cm Chunting Chen, “Fengniaoligui zaoxing zai handai de chuxian ji qi yuanyin chutan,” Huaxia kaogu 3, p. 90
Hebei Wananbeishacheng Huaian Han
7 廣州 橫枝崗 M22 Chunting Chen, “Fengniaoligui zaoxing zai handai de chuxian ji qi yuanyin chutan,” Huaxia kaogu 3, p. 90
Guangzhou Hengzhigang M22 Han
8 三門峽 向陽 M119 西漢 中期 18.8cm Sanmenxiashi wenwu kaogu yanjiusuo, Sanmenxia xiangyang hanmu, p. 19
Sanmenxia Xiangyang M119 Mid Western Han
9 三門峽 向陽 M48 西漢 後期 24cm Sanmenxiashi wenwu kaogu yanjiusuo, Sanmenxia xiangyang hanmu, pp. 119-120
Sanmenxia Xiangyang M48 Late Western H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