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21; 2024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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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러한 형태의 박산향로는 중국내 출판된 각종 도록 및 보고서에서 ‘鳥踏龜’, ‘朱雀龜座博山爐’, ‘朱雀玄武博山爐’, ‘龜鶴座博山爐’, ‘鳳鳥立龜’ 등의 명칭이 사용되었다. 본고에서 ‘봉조입귀좌’ 박산향로라고 지칭한 것은 노좌의 새를 봉황으로 특정하였기 때문인데 이는 현재 캐나다 로얄 온타리오 박물관(Royal Ontario Museum)에 소장된 <Phoenix Lamp>의 등잔 기면에 새겨진 명문인 河平元年(B.C.28)에 왕실 공방의 장인이 中宮에서 일하는 관료를 위해 “銅鳳凰燈”을 제작하였다는 것에 기인한 것이다(“河平元年工護中造銅鳳凰燈重一斤十四兩護 而霸廣護王必省中宮內者第二受內者,” The Royal Ontario Museum, Chinese Art in the Royal Ontario Museum (Toronto: The Royal Ontario Museum, 1972), p. 102).
2) Susan N. Erickson, “Boshanlu-Mountain Censers of the Western Han Period: A Typological and Iconological Analysis,” Archives of Asian Art 45 (1992), pp. 13, 16-20; 김자림, 「中國 古代 博山香爐의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문화재학협동과정 석사학위 논문, 2003), pp. 39-40, 43-47, 55; 李根枝, 「漢代薰爐與燈淺議」, 『中原文物』 第4期 (2014), pp. 82-85; 胡雪竹, 「漢代鳥龜組合圖像的形式及意蘊」, 『碑林集刊』 21 (2015), pp. 198-211; 陳春婷, 「“鳳鳥立龜”造型在漢代的出現及其原因初探」, 『華夏考古』 第3期 (2016), pp. 87-94.
3) 江西省文物考古硏究所·南昌市博物館·南昌市新建區博物館, 「南昌市西漢海昏侯墓」, 『考古』 第7期 (2016), pp. 45-62; 彭明瀚, 『劉賀藏珍: 海昏侯國遺址博物館十大鎭館之寶』 (北京: 文物出版社, 2020), pp. 1-2; 2011년부터 고고학적 발굴이 진행되어 자금성 성터와 해혼후 묘원 등의 중요 유적이 발견되었고, 2015년에 해혼후묘(M1)가 본격적으로 발굴되어 다량의 유물이 출토되면서 그해 중국 고고학 10대 새로운 발견에 선정되었다(國家文物局 主編, 『2015中國重要考古發現』 (北京: 文物出版社, 2016), pp. 106-111). 2016년 북경의 수도박물관에서 개최된 ‘남창한대 해혼후국의 고고학적 성과 보고회’에서는 묘주가 유하임이 확인되었다(江西省文物考古硏究所·首都博物館編, 『五色炫曜: 南昌漢代海昏侯國考古成果』 (南昌: 江西人民出版社, 2016) p. 11). 2017년에 남창 한대 해혼후국 유적은 국가고고유적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9년 2월까지 대략 1만여 건의 유물이 출토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南昌漢代海昏侯國遺址博物館 編著, 『金色海昏: 漢代海昏侯國歷史與文化展』 (北京: 文物出版社, 2020)). 현재 해혼후 묘원 인근에 ‘南昌漢代海昏侯國遺址博物館(http://www.hhhmuseum.cn/)’이 건립되어 해혼후국에 대한 연구와 발굴이 이어지고 있다.
4) 창읍국 애왕 유박(?∼B.C.87)은 무제와 李夫人사이에서 태어났으며 協律都尉 李延年과 貳師將軍 李廣利가 외숙이다. 그는 元鼎6년(B.C.111)에서 太初元年(B.C.104) 사이에 태어난 것으로 추정되며 天漢4년(B.C.97)에 창읍국의 제후왕으로 봉해졌다가 후원원년(B.C.87)에 20대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辛德勇, 『海昏侯劉賀』 (北京: 生活·讀書·新知三聯書店, 2019), pp. 8-10). 산동 거야현 동남쪽인 紅土山에 위치한 그의 무덤은 1970년대에 발굴이 진행되었다. 무덤은 도굴되지 않은 대형의 崖墓로, 동기, 옥기, 철기, 도기 등의 유물이 대략 1,056점 출토되었다. 묘실의 제기와 출토된 동기의 刻文 및 玉印의 명문이 박락되어 묘주를 특정할 만한 자료가 부족했지만, 동시기 제후묘와의 비교를 토대로 한 묘제형식, 부장기물, 문헌자료의 분석을 통해 유박의 무덤으로 확정되었다(山東省渮澤地區漢墓發掘小組, 「巨野紅土山西漢墓」, 『考古學報』 第4期 (1983), pp. 471-499).
6) 『漢書』 卷8 「宣帝紀」 “元平元年四月, 昭帝崩, 毋嗣. 大將軍霍光請皇后徵昌邑王. 六月丙寅, 王受皇帝璽綬, 尊皇后曰皇太后.”; 『漢書』 卷63 「武五子傳」 “子賀嗣, 立十三年, 昭帝崩, 無嗣, 大將軍霍光徵王賀典喪. …王受皇帝璽綬, 襲尊號.”
7) 『漢書』 卷8 「宣帝紀」 “六月丙寅, …癸巳, 光奏王賀淫亂, 請廢.”; 『漢書』 卷63 「武五子傳」 “卽位二十七日, 行淫亂. 大將軍光與羣臣議, 白孝昭皇后, 廢賀歸故國, 賜湯沐邑二千戶, 故王家財物皆與賀.”; 『漢書』 卷68 「霍光金日碲傳」 “賀者, 武帝孫, 昌邑哀王子也. 旣至, 卽位, 行淫亂. …荒淫迷惑, 失帝王禮誼, 亂漢制度. …太后詔歸賀昌邑, 賜湯沐邑二千戶.”
9) 기록상 한대 열후도 황제나 제후왕과 같이 묘원을 설치했던 것으로 전해졌으나 그동안 고고학적 실례가 발견되지 않았다(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編著, 『中國考古學·秦漢卷』 (北京: 中國社會科學出版社, 2010), p. 371). 그러나 해혼후 묘원의 발견으로 열후도 완전한 묘원을 갖추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게 되었다.
15) 동기와 칠기에 새겨진 명문에 표기된 ‘창읍’이라는 지명뿐만 아니라 당시 비교적 궁벽한 남쪽의 변방이었던 강서의 해혼후국은 상당히 부유한 지역에 속했던 산동의 창읍국보다 생활 수준이 현저하게 떨어졌을 것이다. 따라서 유하묘에서 출토된 동기, 칠기, 금은기 중의 상당수는 창읍에서 가져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辛德勇, 앞의 책, pp. 188, 249-251.
22) 해혼후묘에서 출토된 향로는 博山爐 11점, 熏爐 2점, 托盤爐 3점 등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江西省文物考古硏究·中國人民大學歷史學院考古文博系, 앞의 논문, pp. 18, 20-22.
24) 屈盛瑞, 「山西朔縣西漢幷穴木槨墓」, 『文物』 第6期 (1987), pp. 53-60; 江蘇省文物管理委員會·南京博物院, 「江蘇鹽城三羊墩漢墓淸理報告」, 『考古』 第8期 (1964), pp. 393-402; 程長新, 「北京市揀選古代靑銅器續志」, 『文物』 第12期 (1984), pp. 35-39.
26) 본 장은 최국희, 「낙랑고분출토 금속공예품에 관한 연구: 석암리9호분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04), pp. 60-65를 토대로 수정·보완한 것이다.
29) 南京市博物館, 「南京象山5號,6號,7號墓淸理簡報」, 『文物』 第11期 (1972), p. 29; 南京市博物館·南京市雨花臺區文化局, 「南京雨花臺石子崗南朝磚印壁畫墓(M5)發掘簡報」, 『文物』 第5期 (2014), p. 21.
33) John Major, “New Light on the Dark Warrior,” Journal of Chinese Religions 13·14 (Fall 1985·1986), p. 73.
34) 四靈은 四神, 四象, 四維, 四宮, 四獸라고도 하며, 사령의 개념이 완전히 확립되기 전에는 기린이 백호를 대체하기도 했다(『禮記』 禮運第九, “何謂四靈, 麟鳳龜龍, 謂之四靈.”). 현재 사령을 가리키는 동물들의 조합이 ‘청룡, 백호, 주작, 현무’로 정해진 것은 『三輔黃圖』를 따른 것이다(『三輔黃圖』 卷3 “未央宮 … 蒼龍·白虎·朱雀·玄武, 天之四靈, 以正四方, 王者制宮闕殿閣取法焉.”). 한대는 문헌마다 사령의 조합이 달랐던 만큼 사령의 형태가 가장 복잡한 단계였다(倪潤安, 「論兩漢四靈的源流」, 『中原文物』 第1期 (1999), p. 83). 이에 대해 이들의 조합이 동일한 시기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청룡·백호’, ‘주작·현무’라는 구성이 오랫동안 병존해 있다가 뒤늦게 결합된 것으로 판단되기도 했다(李成九, 「四神의 形成과 玄武의 起源」, 『中國古中世史硏究』 19 (2008), p. 2).
35) 終始五德說은 전국시대 騶衍이 주창한 것으로 각 왕조는 오행에 대응하는 五德(木德, 火德, 土德, 金德, 水德)의 운행 논리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흥폐가 교체된다고 하는 것이다. 진나라도 수덕에 해당하지만 왕조 기간이 극히 짧아서 한나라가 수덕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으로 보았다.
37) 하북 만성 두관묘(M2)의 박산향로에서는 사신이 청룡, 백호, 주작, 낙타로 구성되어 있고, 산서 삭현의 온주로에는 청룡, 백호, 주작, 현무으로 이루어져 있다. 中國靑銅器全集編輯委員會 編, 『中國靑銅器全集: 第12卷 秦·漢』 (北京: 文物出版社, 1998), 도 77, 128.
38) Zhixin Jason Sun, Age of Empires: Art of the Qin and Han Dynasties (New York: Metropolitan Museum of Art, 2017), p. 100, fig. 23b; 曾布川寬·谷 豊信,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2卷 秦·漢』 (東京: 小學館, 2001), p. 10 도 5.
39) 『淮南子』 卷6 「覽冥訓」 “鳳皇之翔至德也, 雷霆不作, 風雨不興”; 『史記』 卷1 「五帝本紀」 第1 “唯禹之功爲大, …於是禹乃興九招之樂, 致異物, 鳳皇來翔. 天下明德皆自虞帝始.”
40) 『說文解字』 卷4 “鳳, 神鳥也, 天老曰鳳之象也, 鴻前麐後, 蛇頸魚尾, 鸛顙鴛思, 龍文龜背, 燕頷雞啄, 五色備擧, 出於東方君子之國, 翶翔四海之外, 過崐崙飮砥柱, 濯羽弱水, 莫宿風穴, 見則天下大安寧.”
41) 『山海經』 卷1 「南山經」 “又東五百里, 曰丹穴之山, 其上多金玉. 丹水出焉, 而南流注于渤海. 有鳥焉, 其狀如雞, 五采而文, 名曰鳳皇, 首文曰德, 翼文曰義, 背文曰禮, 膺文曰仁, 腹文曰信. 是鳥也, 飮食自然, 自歌自舞, 見則天下安寧.”
42) 소제와 선제대 노제지역에서 봉황의 잦은 출현은 서상의 관념을 이용하여 입지를 다지려는 산동의 方士집단과 이들을 활용하여 황제 권력의 정당성과 위엄을 과시하려는 정치적 필요에 의해 이루어진 과시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견해가 피력되었다. 이수덕, 「아무도 보지 못한 새-한대 봉황의 출현을 통해 본 서상의 역할과 의미」, 『역사와 경계』 89 (2013), pp. 253-258.
43) 『史記』 卷128 「龜策列傳」 第68 “龜者是天下之寶也, …生於深淵, 長於黃土. 知天知道, 明於上古. …壽蔽天地, 莫知其極. …明於陰陽, 審於刑德. 先知利害, 察於禍福.”; 『山海經·中次九經』 “又東北三百里, 曰岷山, 江水出焉, 東北流注于海, 其中多良龜, 多鼉.”
44) 『列子·湯問』 “然則天地亦物也. 物有不足, 故昔者女媧氏練五色石, 以補其闕, 斷鼇之足, 以立四極.”; 『淮南子·覽冥訓』 “往古之時, 四極廢, 九州裂, 天不兼覆, 地不周戴 …於是女媧煉五色石以補蒼天, 斷鼈足以立四極.”; 『論衡·談天』 “夫天本以山爲柱, 共工折之, 代以獸足, 骨有腐朽, 何能立之, 且鼈足可以柱天, 體必長大, 不容於天地.”
45) 『列子·湯問』 “其中有五山焉 …而五山之根, 無所連著, 常隨潮波上下往還, 不得暫峙焉. 仙聖毒之, 訴之於帝. 帝恐流於西極, 失君聖之居, 乃命禺疆使巨鼇十五擧首而戴之. 迭爲三番, 六萬歲一交焉.”
47) 趙容重, 「海中神山에 관한 文獻과 圖像 硏究」, 『美術資料』 63 (1999), pp. 19-25; 朴景垠, 「博山香爐의 昇仙圖像 硏究」, 『미술사학연구』 225·226 (2000), p. 70 참조.
50) 『楚辭』 5 「遠遊」 “時瞹曃其曭莽兮, 召玄武而分屬.”; 『楚辭』 15 「九懷」 “玄武步兮水母, 與吾期兮南榮.”; Susan N. Erickson, 앞의 논문, p. 16.
52) 西安市文物保護考古所, 『西安龍首原漢墓(甲編)』 (西安: 西北大學出版社, 1999), pp. 121-123, 142-144; 陳春婷, 앞의 논문, pp. 87-88, 93, 주3 참고.
53) 山西省博物館, 『山西省博物館館藏文物精華』 (太原: 山西人民出版社, 1999), p. 55; 天長市文物管理所·天長市 博物館, 「安徽天長西漢墓發掘簡報」, 『文物』 第11期 (2006), pp. 4-21; 謝治秀主編, 『山東重大考古新發現』 (山東: 山東文化音像出版社, 2003), p. 147; 唐愛華, 「介紹兩件館藏靑銅器」, 『中原文物』 第1期 (1981), p. 64.
55) 文化財管理局·文化材硏究所, 『北韓文化財調査書 제3冊: 北韓文化遺蹟發掘槪報』 (文化財管理局, 1991), p. 52, 그림 73; 리순진, 『평양일대 락랑무덤에 대한 이해』 (도서출판 중심, 2001), p. 110.
56) 국립중앙박물관, 『낙랑』 (솔, 2001), pp. 116-117; 사회과학원 고고학연구소, 『고고학자료집』 5 (과학,백과사전출판사, 1978), p. 8; 梅原末治·藤田亮策, 『朝鮮古文化綜鑑』 2 (京都: 養德社, 1948), p. 43; 리순진·김재용, 『락랑구 역일대의 고분발굴보고』 (백산자료원, 2003), pp. 486-487;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국립중앙박물관, 1986), p. 226; 경북대학교, 『경북대학교 박물관 소장유물도록』 (경북대학교 박물관, 2003), p. 40; 국립문화재연구소, 『오구라 컬렉션 한국문화재: 일본 도쿄국립박물관 소장』 (국립문화재연구소, 2005), p. 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