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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1; 2024 > Article
다산 박영철의 고서화 수집과 박물관 인식*

Abstract

일제하의 고위 관료이자 실업가였던 多山 朴榮喆(1879~1939)은 경성제국대학에 자신의 고서화 수집품을 기증하여 진열관의 성립에 기여하였던 수장가였다. 박물관의 계획과 대규모 고미술품의 기증은 동시대 수장가들과 박영철을 구분 짓는 뚜렷한 차별점이다. 본 연구는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박영철의 기증품, 이른바 多山文庫에 기초하여 수장가로서 박영철의 면모와 박물관 인식을 조명하였다.
박영철은 1928년경에 고미술 수집을 시작하였으며 이후 10여 년 동안 집중적으로 실행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본 연구에서는 그의 고미술 수집의 계기로서 1928년에 참여하였던 유럽 시찰과 서구의 공공박물관에서 받은 충격을 주목하였다. 박물관이라는 대중적 공간에 전시된 고미술품은 역사적인 유물의 향유와 보존이 문명의 한 척도임을 일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식민지기는 사적인 영역으로 한정되었던 고미술품이 공적인 문맥 위에 재배치되고 새로운 의미를 성립시켰던 시기이다. 박물관 설립을 목적으로 고미술 컬렉션을 형성하고 이를 기증한 박영철은 문화유산에 발생한 공공성을 향한 인식의 전환을 대변하는 인물일 것이다.

Abstract

Pak Yŏngch’ŏl (1879-1939) was a high-ranking government official, businessman and prominent art collector during the modern period. After Pak’s passing in 1940, his family donated Tasan mun’go (the Tasan Collection) to Keijō Imperial University in accordance with his will. The collection was comprised of 115 artworks, which included calligraphy, paintings, and craft items, along with a fund of 20,000 won. Pak’s financial support laid the foundation for the establishment of the Keijō Imperial University Museum two years later. Both the donation of his collection and the subsequent founding of the museum distinguish Pak Yŏngch’ŏl from contemporary Korean collectors. This study sheds light on Pak Yŏngch’ŏl’s character as an art collector and his perception of the museum based on a detailed investigation of the Tasan Collection housed at the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ak Yŏngch’ŏl did not actively participate in the appreciation and collection of art until the age of fifty. He began collecting art around 1928, coinciding with his appointment as the vice president of Chosŏn Commercial Bank. Pak then spent the next decade focused on building his collection. This study focuses on Pak Yŏngch’ŏl’s inspection tour of European countries in 1928, which was the catalyst that spurred his considerable devotion to the collection of art. During the tour, Pak Yŏngch’ŏl had the opportunity to experience various museums symbolizing modern civilization in Europe. The Louvre Museum in particular, which was first opened to the public and renown for its outstanding collection, seemed to have informed Pak of the value of art. The cultural treasures exhibited in the public spaces of museums would have reminded Pak that the preservation of historical artifacts is one of the indicators of civilization.
In the pre-modern period, the appreciation and collection of calligraphy and painting were typically private activities limited to the individual’s personal domain. However, the political and social changes brought about in the modern period redefined art collecting within a public context. Pak Yŏngch’ŏl, who formed a collection and donated it with the purpose of establishing a museum, epitomizes the shift in perceptions of art collection in Colonial Korea.

Ⅰ. 서론

多山 朴榮喆(1879~1939)은 근대기에 활동하였던 고서화 수장가의 한 명이다. 박영철은 일본의 대륙 침략이 노골화되던 시기에 남다른 출세 가도를 달린 인물이었다. 대한제국의 마지막 시기에 일본육군사관학교에서 엘리트 군인 교육을 받은 박영철은 1904년 발발한 러일전쟁에 참전하였으며 그 공로로 勳6等 瑞寶章을 수여 받았다. 조선에 귀국한 그는 일본 군인으로서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무관으로서 승승장구하였다.1 일제 치하에서 조선 사회의 빠른 변화를 목도한 박영철은 군인에서 관료로 전환하였으며 익산군수에 부임하였다. 일제의 식민지 정책에 따라 익산 신도시 개발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박영철은 총독부의 신임을 받으며 초고속의 승진을 거듭하였다. 1927년 함경도 도지사를 사임한 그는 부친 朴基順(1857~1935)이 한일 합자로 설립한 三南銀行의 頭取, 즉 은행장에 취임하였다. 이듬해 삼남은행이 조선상업은행에 병합되자 이곳의 부두취에 취임하며 은행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였다. 1933년에는 총독의 자문기관인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으며 1937년에는 초대 駐京滿洲國總領事에 임명되었다. 몰락한 향반 출신으로서 조선인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위치에 서게 된 박영철의 사회적 성취는 시대를 보는 안목과 개인적 능력의 소산만으로 돌리기 어렵다.2 당시에 유력 인물을 소개하던 한 신문 사설에서는 군인, 목민관, 은행가로 변화해 온 그의 이력을 주목하며 이러한 진폭은 근대화하는 조선 사회의 과도기적 일면을 반영하는 현상임을 지적하기도 하였다.3 박영철이 보여준 눈부신 행로의 이면에는 일제에 의한 식민통치와 전통사회의 해체라는 근대의 정치문화적 조건이 작동하고 있었다(Fig. 1).
식민 치하에서 30여 년간 고위 관료이자 실업가로서 활동한 박영철은 역사에 친일 부역자로서 먼저 기억되는 인물이다.4 박영철을 고서화 수집가로서 부각시킨 사건은 京城帝國大學에 자신의 수집품과 기금을 기증하여 박물관의 일종인 陳列館 설립을 도모한 일이다. 1920~1930년대 조선 사회에는 다수의 미술품 애호가들이 활약하고 있었으며 이들은 대규모의 고서화 컬렉션을 형성하였다. 그러나 이들 중 수집품의 경제적 가치에 구애받지 않고 공적 기관에 기증하여 박물관 설립을 도모한 인물은 보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박영철의 고서화 기증은 근대기의 고서화 수집과 인식에 나타난 변화를 이해하기 위하여 주목해야 할 사건임이 분명하다.
박영철이 문화계에 남긴 행적은 고서화 수집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朴趾源(1737~1805)의 『燕巖集』을 처음으로 활자화하여 출간한 인물이었다.5 아울러 근대의 화가 卞寬植(1899~1976)의 금강산도 전람회 및 신조선사의 『與猶堂全書』 출판기념회의 발기인으로 이름을 올리는 등 다양한 문화사업의 후원인으로도 활약하였다. 이러한 박영철의 문화적 기여에 대하여 한 원로학자는 ‘일본 훈장과 《槿域書彙》, 《槿域畵彙》, 『燕巖集』과 같은 민족문화 창달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혼란스럽다.’라고 평가하였다.6 이러한 혼란스러움은 고미술품은 민족정신의 표상이며 그 수집 행위는 민족의식의 표출로 여기는 우리의 통념에서 비롯할 것이다.
1929년 50세를 맞은 박영철은 그간의 생애를 정리한 자서전 『五十年の回顧』를 출간하였다. 그 외에도 시문집과 여행기를 저술하였으며 시국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출간하기도 하였다. 박영철이 남긴 다양한 저술 속에서는 조선의 문화적 전통과 제도를 향한 노골적인 부정적 인식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그는 조선 사회를 비판하는 데 그치지 않았으며 조선은 자력으로 문명 국가가 될 수 없다는 신념을 지닌 인물이었다. 이러한 사유의 견지에서 일제의 내선융화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조하며, “조선인은 무능하기 때문에 자립할 수 없고 선진 이웃인 일본의 지도를 바라며 반만년의 전통문화를 지닌 이천만 민중이 일본제국의 신민이 되기에 이른 것이다. 일본인은 조선인의 부족한 점을 책망하기에 앞서 이를 지도개발하는 책임을 가지지 않으면 안된다.”라 주장하였다. 이것이 일본인을 대상으로 하는 발언이었음을 고려하여도 박영철이 조선을 대하는 시각은 일본 제국주의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7 조선에 대한 일본 통치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던 그의 역사 인식은 사실상 식민권력의 시각을 내재화한 것이다. 조선인으로서 지닌 태생적인 자의식이 전혀 없지 않았지만, 박영철의 사상적 궤적에 비추어 보면 그의 고서화 수집과 고문화의 보호란 민족의식의 발로가 아니었음은 분명하다.
본 연구는 박영철의 수장가로서 특징을 조명하고 경성제국대학진열관 설립으로 이어졌던 그의 박물관 인식을 조명하고자 한다. 박영철은 자신의 경험과 시국에 관한 여러 저서를 남기고 있으며 이에 관하여 문학 방면에서의 고찰이 이루어져 왔다. 미술사에서도 박영철의 생애와 고서화 수집가로서의 면모가 김상엽에 의하여 조명된 바 있다.8 박영철이 남긴 풍부한 저술과 기존의 연구 성과에 더하여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기증품에 관한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수집의 과정과 내용을 재구성하고자 한다. 박물관과 고미술을 둘러싼 동시대의 담론을 참고하여 고미술의 기증과 진열관 설립의 이면에 위치한 수장가의 경험과 인식에 접근하고자 한다.

Ⅱ. 경성제국대학 기증품을 통해 본 박영철 컬렉션의 특징

1940년 6월 13일 『每日新報』는 박영철의 유족들이 ‘고인의 유지’에 따라 고서 130권으로 구성된 ‘多山文庫’와 ‘도서관 건립비용’ 2만원을 경성제국대학에 기증하였다고 전하였다.9 기증에 앞서 1939년 3월 박영철은 총독부 학무국에서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졸도한 후 사망에 이르렀다.10 전후의 사정을 돌아보면 박영철은 생전에 직접 고서화 기증을 준비하였으며 유족이 그를 대신하여 기증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2년 뒤인 1942년 9월 『京城帝國大學學報』에서 유족들의 참관하에 진열관의 개관식이 거행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진열관은 4개의 전시실을 갖춘 2층 건물이었다. 4개의 전시실 중 하나는 그의 기여를 기념하여 ‘박영철 기념실’로 명명되었다. 해방 이후 서울대학교의 설립과 함께 다산문고는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남게 되었으며 한국전쟁과 같은 역사의 격동기에도 큰 수난 없이 보존될 수 있었다.11 박영철은 생전에 한 인터뷰에서 ‘수천 점’의 고서화를 모았다며 자신의 수집품을 향한 자부심을 드러낸 적이 있었다. 그가 상당한 규모의 고미술품을 수집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부분이 산일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현재로서는 그 소장품의 전모를 재구성할 방법은 없다. 다만 서울대학교박물관 내에 경성제국대학 시기의 기증품이 보존되고 있어 수집품의 일부에 접근할 수 있다(Fig. 2).
1940년 5월 10일 법문학부 제1회의실에서는 다산문고의 기증을 기념하는 전람회가 열렸다.12 이 전람회를 위해서 만들어진 『故朴榮喆氏寄贈書畵類展觀目錄』(이하 『목록』)에 의하면 실제 기증품은 모두 115점으로 크게 朝鮮之部, 支那之部, 日本之部로 분류되었다(Fig. 3). 각 부의 수량을 헤아려 보면 가장 높은 비중을 차지하는 조선지부는 71점으로 書 34점, 畵 27점, 工藝 10점으로 구성되었다. 지나지부는 총 27점으로 서 16점, 화 11점이며 일본지부는 총 17점으로 서 7점, 화 10점이다.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확인되는 기증품은 모두 113점으로 『목록』과 2점의 차이가 있다. 『목록』과 기증품을 보다 면밀하게 비교하면 2점의 결손 외에도 2점의 유물이 목록과는 다른 유물임을 확인할 수 있다. 70여 년의 세월 동안 일부 유물에서 발생한 출입이 관찰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기증품은 큰 변화를 겪지 않은 채 보관되고 있다.13
박영철이 기증한 서화 중에는 보존 수리와 전시에 활용되는 과정에서 원래의 형태를 잃어버린 경우들이 있다. 화첩은 낱장으로 파첩되기도 하였으며 두루마리가 액자 형태로 전환된 경우도 있다. 이러한 변화를 겪은 대표적인 사례가 《근역서휘》일 것이다. 吳世昌(1864~1953)이 역대 인물 1,119명의 필적을 모은 《근역서휘》는 본래 서첩의 형태였으나 현재는 낱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수의 기증품은 기증 당시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화 유물은 오동나무로 제작한 유물 상자에 보관되어 있는데, 상자의 대부분은 박영철의 수장 당시부터 사용되었던 것이다(Fig. 4). 일부 기증품과 보관용 유물 상자에서는 수장 내력을 반영한 附箋紙가 부착되어 있다. 기증품에는 모두 2종류의 부전지가 사용되었다. 그 하나는 1에서 115에 이르는 일련번호가 적힌 작은 부전지이다. 이 번호는 기증품의 수량과 일치하여 기증을 위하여 붙여진 일련번호로 판단된다. 주목이 필요한 것은 박영철이 자신의 이름을 인쇄하여 사용한 전용 부전지이다. 기증품에서는 ‘多山藏書畫’, ‘多山珍藏附箋’이라는 그의 호인 ‘多山’이 적혀 있는 2가지 종류의 부전지가 관찰된다. 부전지에는 ‘朴榮喆印’과 ‘多山’, 혹은 ‘多佳山人藏書印’의 인장이 남아 있는데, 다산은 그의 고향인 전주의 多佳山에서 유래한 이름이었다. ‘다산장서화’의 크기는 4×5cm으로 품명, 번호, 비고의 3칸으로 구성되었다. ‘다산진장부전’은 5×6cm의 크기에 품명, 번호, 구입, 전소지자, 비고의 다섯 칸으로 구성되었다(Fig. 5, 6). 부전지에는 유물의 명칭과 더불어 번호가 기입되었으며, 구입 일시 등의 정보가 나타나는 경우가 있다. 기중품 중 가장 낮은 번호를 지닌 유물은 柳成龍(1542~1607)의 필적인 〈西厓手札〉로서 번호는 5번이며 구입 시기는 1931년 5월 5일이다(Fig. 6). 가장 높은 번호를 지닌 유물은 진흥왕순수비의 하나인 황초령 순수비를 탁본한 〈新羅王定界碑 拓本〉으로 번호는 321번이다. 이 탁본의 부전지에는 구입 일시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보관상자에는 무‘ 인년(1938) 봄 북경 유리창에서 구입하였다.’는 내력이 정확히 적혀 있다(Fig. 5, 7).14 공예품에는 별도의 기록이 부착되지 않아 부전지는 서화에 한정하여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입수 시기와 비교하면 전용 부전지에 표기된 번호는 박영철이 소장품을 수집하는 동안 구입 순서에 따라 부여한 일련번호로 파악된다.
부전지의 기록과 유물에 직접 적은 관서에 의거하여 입수 시기를 추적할 수 있는 유물 중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경우는 표지에 1928년이라는 시기가 적힌 《謙玄神品帖》이다. 《겸현신품첩》은 파첩된 화첩으로서 부전지는 전하지 않는다. 그러나 표지의 제첨에는 ‘戊辰初冬’, 즉 1928년 10월이라는 시기가 적혀 있다(Fig. 8). 그 다음 차례는 심사정의 그림과 이광사의 글씨를 엮은 《玄圓合壁帖》으로 제첨에는 ‘庚午小春’, 즉 1930년 10월이라 적혀 있다. 두 화첩의 제첨에 글씨를 쓴 인물은 모두 근대의 서화가인 李漢福(1897~1940)이며 이한복과 박영철의 인장이 함께 남아 있다. 가장 많은 고서화를 구입한 시기는 1931년으로 27점이 이 해에 입수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다수의 유물이 1935년 이전에 구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박영철이 1930년대 전반에 적극적으로 수장품의 규모를 확대해 갔음을 알 수 있다.
부전지가 남아 있거나 구입 시기를 알 수 있는 유물은 113점 중 45~50여 점 사이로 제한적이다. 구입 시기를 알 수 없는 고서화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지만, 부전지에 남겨진 정보는 컬렉션 형성의 과정을 대략적으로나마 그려볼 수 있는 유용한 근거를 제공한다. 구입 기록을 종합하면 박영철은 《겸현신품첩》을 입수 한 1928년경, 혹은 그보다 약간 앞선 시기부터 고서화 수집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며 1930년대 초에는 본격적으로 수장가의 면모를 갖추어 갔다. 러일전쟁에 참전한 후 조선에 돌아온 직후부터 그는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활약하였으며, 이후에는 지방 행정을 담당하는 관료로서 소임에 따라 익산, 함경도, 강원도 등지를 이동하며 거주하였다. 1928년은 함경북도지사를 마지막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조선상업은행 부행장에 취임한 해였다. 취임과 동시에 박영철은 서울에 정착하였으며 본격적으로 은행가이자 명사로서의 삶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이력에 비추어 보면 1928년 겨울은 그가 고미술 수집을 시작할 수 있는 적절한 시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기증 서화 중 마지막 번호인 〈신라왕정계비 탁본〉의 번호가 321이며 구입 시기가 사망 한 해 전인 1938년이었음을 고려하면 박영철의 고서화 소장품은 대략 350건 내외를 기록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반면에 115건의 기증품 중 서화의 수량은 105건으로서 이는 그의 고서화 수집품의 약 1/3 정도에 해당하는 수량으로 추산된다. 기증품을 제외한 박영철 소장의 고미술품은 이미 여러 경로를 통하여 흩어졌다. 그 일부는 여전히 후손을 통해서 전하고 있다.15 서울대학교박물관은 박영철의 부전지가 부착된 서화 작품을 시중에서 직접 구입한 사례가 있으며 현대의 수집가 중 ‘다산진장’의 부전지가 부착된 작품을 소유한 경우도 발견되고 있다. 이처럼 소장품의 일부가 추가적으로 확인되고 있지만, 본래의 컬렉션을 온전히 재구성하는 일은 불가능할 것이다. 박영철의 동시대인들이 남긴 단편적인 기록에 따르면 그의 수장품은 기증품 외에도 높은 가치를 지닌 고서화를 다수 포함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박영철은 金弘道(1745~1806 이후)의 〈四民圖〉, 金正喜(1786~1856)의 〈溪山無盡〉 편액, 혹은 50여 폭이 넘는 古畫가 부착된 대형 백납병풍, 閔泳翊(1860~1914)의 난초 7점 등을 소장하였다고 한다.16 그렇다면 기증품, 이른바 다산문고는 그의 소장품 전체에서 어느 정도의 위상을 지녔을까?
1939년 2월 발간한 『多山詩稿』라는 시문집은 박영철의 컬렉션 내에서 기증품의 가치를 추정하는 데 참고가 되는 내용을 담고 있다(Fig. 9). 『다산시고』는 박영철의 한시를 모은 시문집이다. 『다산시고』는 1932년 초판이 출간되었으며 7년이 지난 후 내용을 증보하여 다시 발간되었다. 1932년의 초간본과 달리 만년에 재간행된 시집에는 여러 점의 권두 사진이 수록되었다.17 권두 사진에는 소장품을 촬영한 사진 4장이 포함되었다. 시집에 수록된 소장품은 《근역서휘》, 〈신라왕정계비탁본〉, 〈龍尾月石硏〉, 이왕직미술제작소의 〈桐木火爐〉 등이다. 이 중 가장 주목이 필요한 부분은 수장가와 소장품을 함께 촬영한 《근역서휘》라는 제목의 사진이다. 일본식 도코노마가 설치된 사진 속의 실내에는 여전히 서책 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근역서휘》가 진열되어 있다. 《근역서휘》는 《근역화휘》와 더불어 다산문고의 역사적인 의미를 결정하는 대표적인 유물이다. 이와 더불어 卞相璧의 〈猫雀圖〉, 〈용미월석연〉 등의 소장품이 함께 확인된다(Fig. 10).18 이 사진 속의 고미술품은 모두 기증품에 포함되었다. 수장가로서의 자부심을 반영하고 있는 사진은 박영철이 각별히 중요하게 여긴 소장품이 무엇이었는지를 말해 준다. 아울러 이 소장품들이 모두 기증품에 포함되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기증에 부여한 의의를 가늠해 볼 수 있다.
경성제국대학에 기증된 고서화는 박영철 소장품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소장품 중 역사적·예술적 가치가 높은 고서화를 다수 포함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박영철에게 십여 년간 자본과 열정을 기울여 고미술품을 수집하도록 하였으며 공들어 수집한 애장품을 기증하도록 이끈 동기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Ⅲ. 박영철의 유럽 시찰과 박물관 경험

1929년 50세를 맞은 박영철은 『五十年の回顧』라는 자서전을 출간하였다. 이 자서전에서 그는 출신, 교육 과정, 관료 시절의 활약 등 격동의 시대와 더불었던 자신의 인생 경험과 소회를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그러나 자신에 관한 서술에서 미술과 문화를 향하여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은 거의 목격되지 않는다(Fig. 11). 자서전의 출간 시기를 참고하면 1920년대 말까지도 그의 고미술 수집에 관한 관심은 크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기증품에 반영된 수집의 내력을 살펴보아도 그는 오랜 기간 미술에 흥미를 가지고 수집을 실천해왔던 인물은 아니었다. 박영철이 1920년대 말부터 사망 직전까지 10여 년에 걸친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고미술 수장가로서 명성을 얻은 점으로 미루어 그가 상당한 열정과 자본을 기울여 수집에 매진하였음은 분명하다. 비록 젊은 시절부터 고미술 감상 취미가 있었다 해도 군인과 지방 관료로서 살았던 시절에는 현실적인 제약으로 인하여 적극적인 흥미를 표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여기에서 고미술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박영철을 고미술 수집에 전념하며 대수장가에 이르도록 만들었던 동기는 무엇인가라는 의문이 발생한다.
일차적인 동인로서 1930년대에 유행하였던 골동품 수집의 열기를 들 수 있다. 박영철이 고서화 수집에 열중하였던 1930년대에서 1940년대는 우리나라 고미술 시장사에서 ‘호황기’로 불리는 시기이다. 이 때는 한국 사회의 경제적 성장과 더불어 고미술 거래를 중심으로 하는 미술 시장이 양적인 성장을 거듭하던 시기였다. 경성에서는 활발히 활약하는 골동상이 30여 개소 이상이었으며 이들은 매월 고미술 교환회 및 경매회를 개최하였다.19 고미술 거래에 참여하였던 주요 조선인 수집가로서 全鎣弼(1906~1962), 金性洙(1891~1955), 崔昌學(1891~1959), 韓相億(1898~1949), 白麟濟(1899~1950), 咸錫泰(1889~?) 등을 들 수 있다. 고미술 수장가의 다수는 당시 조선의 재벌로서 순위에 드는 인물들이었다. 상업은행장 시절 박영철은 공식적으로 재계 10위를 넘나드는 재벌로 손꼽히는 인물이었다.20 더구나 박영철은 재력뿐 아니라 조선인으로서는 드물게 함경도지사라는 고위직에 오른 인물이었다. 그는 일상생활과 주변의 일화마저 『삼천리』와 같은 잡지의 단골 소재가 되었던 명사이기도 하였다. 이런 재력과 사회적 명성을 바탕으로 단기간에 집중적으로 고서화를 수집하였던 것이다.
눈여겨볼 특징 하나는 식민지기 고서화 수집가의 대다수는 전통적으로 예술 애호가층을 형성하였던 세족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경성방직의 김성수, 광산업을 주도한 최창학, 외과 의사인 백인제 등의 신흥 자본가 계층이 고서화 수집의 주축을 구성하고 있다. 박영철 일가 역시 식민지기 일제의 식민지 개발 사업에 편승하여 부를 확장한 집안이었다.21 그의 부친 박기순은 익산과 삼례 일대에 대토지를 소유한 이른바 ‘토지왕’이었다. 총독부는 호남평야에서 산출되는 미곡의 일본 수출을 위하여 익산을 중심으로 교통체계를 완비하고자 하였으며 박기순은 도로와 철도용의 토지를 기부하며 적극적으로 이 사업에 관여하였다. 당시 총독부에서 익산 지역의 개발 책임자로서 선택한 인물이 전주 출신으로서 이 지역의 사정에 밝았던 박영철이었다. 박기순은 이후에 일본 자본과 함께 삼남은행을 설립하였으며 이는 박영철이 중앙 재계로 도약하는 발판이 되었다. 일제에 의해 전개된 조선의 산업화 정책은 전통적인 토지자본과는 다른 형태의 산업자본을 형성하였다. 그 과정에서 조선인 출신의 신흥 부호들이 등장하였으며 그들의 자본 일부가 고미술 시장으로 유입되어 1930년대 고미술의 호황기를 이끌었던 것이다.
박영철은 조선의 신흥 자본가들이 고미술 수집에 열중하였던 1930년대의 사회 분위기에서 영향을 받았음이 분명하다. 앞에 열거된 근대 수장가들의 수집품 중 일부는 현재 공적 기관에 기증되거나 박물관을 건립하여 소장된 경우들이 있다. 그러나 호고 취미나 자본 투자 등의 사적인 목적 외에 박물관과 같은 공적인 활용을 목적으로 고미술 수집을 진행한 인물은 아직까지 드러나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박영철이 유독 박물관 설립에 기여하는 데 영향을 미친 특별한 배경과 계기가 있었던 것일까?
이러한 의문과 관련하여 박영철의 자서전 마지막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1928년 참가하였던 3개월간의 ‘歐洲視察’, 즉 유럽 여행이었다22. 이 유럽 시찰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제9회 올림픽대회의 참관을 목적으로 하였다. 오사카 每日新聞社가 주체가 되어 일본 선수단의 응원을 겸한 유럽 대도시 방문 시찰단을 조직하였다. 유럽 사회의 곳곳을 관찰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던 이 여행에는 102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참여하였다. 조선상업은행 부행장으로 갓 취임한 박영철은 얼마간의 휴가를 얻어 유럽 시찰에 참가하였다. 박영철은 유럽 여행의 이듬해에 출간된 자서전에 이 여행의 경과와 방문한 도시에 관한 상세한 기록을 남겼다.23 그의 여행기를 바탕으로 유럽 여행의 경험을 재구성하고자 한다(Fig. 12).
구주시찰단은 일본인의 해외여행을 담당하였던 영국 여행사인 토마스쿡(Thomas Cook)사가 운영한 일종의 해외 관광 여행이었다. 참가비는 1인당 3,500원으로 기차는 2등, 기선은 1등석을 이용하였다. 6월 28일 경성역을 출발한 시찰단은 유럽과 아시아의 12개국 시찰을 마치고 9월 23일 고베에 도착하였다. 시베리아를 가로지르고 모스크바를 통과해 유럽으로 들어가는 출국 일정은 1916년 개통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이용하였다. 시찰단의 여정은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 당시 유럽의 강대국을 망라한 것이었다. 귀국 길에는 나폴리에서 일본의 歐洲航路船인 하쿠산마루(白山丸)에 승선하였으며 이집트, 수에즈 운하, 인도, 홍콩, 중국 등지를 거쳐 고베에 상륙하였다.
유럽 시찰 동안 박영철이 가장 관심을 가지고 살펴본 부분은 유럽 여러 국가의 정치, 산업, 경제, 제도와 같은 현실적인 부분이었다. 그는 혁명 이후 러시아의 정치적 실험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동시에 공산주의를 향한 강한 혐오와 자본주의를 긍정하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러시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과 달리 독일, 영국, 프랑스와 같은 자본주의 국가의 사회 제도에 대해서는 극찬을 보였다. 그의 여행기에서 눈에 띄는 부분은 유럽의 박물관, 도서관, 동물원, 식물원, 역사 고적 등을 방문한 기록이 다수 포함된 점이다. 그가 유럽의 문화를 직접 살펴보는 데에도 적지 않은 관심을 기울였음이 보인다. 박영철의 여정 속에서 박물관, 혹은 이와 유사한 미술관, 도서관 등과 관련하여 언급된 장소는 다음과 같다.
• 러시아 노보시비르스크 박물관 등
• 모스크바 혁명박물관, 트렌치야코프스카야미술관
• 독일 베를린 제실미술관, 카이제르 박물관, 국립도서관, 무기박물관 등
• 영국 런던 박물관
•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국립도서관, 토라카테루 박물관
• 이탈리아 로마의 각종 박물관, 미술관
모스크바, 베를린, 런던, 파리, 로마 등 시찰단이 방문한 도시는 유럽 강대국의 수도들로서 정치경제의 중심이자 중요 박물관이 위치한 곳이기도 하였다. 시찰단은 방문하는 국가마다 각국의 문화와 역사를 대표하는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을 두루 참관하였다. 박영철이 박물관을 설명하는 태도를 방문 순서에 따라 살펴보면 러시아의 혁명박물관에서는 농민들이 직접 만든 세공품을 관람하고 구입할 수도 있다고 간단히 설명하였다. 그는 패전국인 독일이 예상밖으로 번영하는 모습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독일의 장래를 희망적으로 예상하였다. 베를린에서도 여러 박물관을 관람하였지만 방문 사실만 기록하였을 뿐 특별한 감회를 기록하지는 않았다. 영국 런던에 도착한 박영철은 이곳에서도 박물관을 방문하였지만 다양한 역사적인 유적과 영국 사회의 당면한 문제를 기록하는 데 주력하였다. 시찰단은 짧은 여행 기간 동안 수많은 명소를 방문하였으며 모든 장소에 관하여 상세한 기록을 남기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박영철이 유럽에서 견문한 사실 중 가장 중점적으로 기록한 부분은 무엇보다 각국의 정치·경제와 같은 현실적인 내용이었다. 그러나 프랑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서는 조금 다른 태도를 보이며 이곳에서 받은 인상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Fig. 13, 14).24
루브르 박물관은 각국의 미술관이나 박물관과 비교하여도 정신을 잃을 정도로 뛰어나다. 파리의 수정이라 불릴 정도로 참으로 훌륭하였다. 루이 14세 이하 여러 황제가 돈과 권위를 가지고 세계에서 조각물, 회화, 미술 공예품 등을, 고대에서 근세에 이르기까지 망라하여 모으고 진열한 것이기 때문에 세계적인 대작, 진기한 물건, 걸출한 품목이 풍부하며, 예술가가 침을 흘리고 추구하고 우러르기에 적합한 것뿐이다. 이 루브르 박물관은 12세기 말에 처음으로 건축되어 현재까지 남았다. 건물은 16세기에 만들어진 부분이 있고, 지금 어떤 건물은 루이 14세가 증축하였으며 나폴레옹이 보수하였다고 한다. 웅장하지만 미려하지는 않았다.
이전에 방문한 박물관과 달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박영철은 예외적으로 그 유래와 소장품의 수준에 관하여 상세한 기술을 남기고 있다. 각국의 박물관과 비교하여도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는 표현에서 그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받은 인상의 깊이가 그려진다. 아울러 고대부터 현대를 망라하는 수준 높은 컬렉션 앞에서 느꼈던 경이로움이 목격된다.
박영철이 유럽을 방문한 1920년대는 서구를 여행하는 조선인 여행자들이 점차 증가하던 시기였다. 동시대 여행자들의 기록을 참고하여 그의 간단한 루브르 박물관의 경험을 보다 구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화가인 羅蕙錫(1896~1948)과 경제학자인 李順鐸(1897~?)은 이 시기에 르브르 박물관을 방문한 또 다른 조선인이었다. 루브르의 예술품 속에서 나혜석은 ‘別有天地非人間’, 즉 ‘별도의 천지가 있어 인간의 세계가 아닌 것 같다.’라며 현실을 벗어난 듯한 감정적 고양을 경험하였다고 묘사하였다. 이순탁은 “나 같은 사람도 여기에 들어서면 예술의 위대함과 숭고함에 눌림과 동시에 그에 대한 세상 사람들의 신앙과 신념을 비로소 이해할 수가 있다.”라고 자신의 감동을 설명하였다.25 박영철이 느낀 정신을 잃을 것 같은 경험과 이들이 박물관의 미술품에서 느낀 감동의 성격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조선에서 온 이들 여행객들의 반응은 단순한 과장이나 처음 접하는 근대 문명에 대한 감탄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동양인의 서구 여행이 시작된 19세기 말부터 이미 박물관은 여행자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던 장소였다. 루브르 박물관은 어느 박물관보다도 깊은 인상을 남겼던 장소였다. 형성 단계에서부터 황실과 사원의 소장품을 확보하였던 루브르 박물관은 유럽 전체가 부러워할 만한 수준 높은 컬렉션을 형성하였다. 이곳은 대중의 지성을 일깨우고자 하였던 서구의 계몽사상과 프랑스 혁명의 이념을 상징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소장품을 대중적으로 공개함으로써 루브르는 박물관의 공공성이라는 가치와 이론이 정립되는 데에도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루브르 박물관은 예술의 전시장이며 동시에 근대 문명의 표상이기도 하였다. 이곳을 방문한 관람객은 뛰어난 예술품 속에서 자연스럽게 역사상 가장 문명화되고 선진적인 문화의 향유자로서 자신을 자각하게 되었던 것이다.26 박영철이 참가한 유럽 시찰은 올림픽대회의 응원과 참관을 표방하였지만 근본적인 목적은 근대 문명이 집약된 서구 사회의 실체를 직접 관찰하는 데 있었다. 동양 사회가 어느 정도 산업화에 성공한 1920년대에도 서구는 여전히 유효한 배움의 대상이었다. 서구 사회를 배움과 교훈의 대상으로서 바라보았던 박영철에게 서구의 역사와 문화를 대변하는 박물관의 경험은 예술의 가치를 향한 확신을 주었을 것이다. 아울러 과거의 유산을 대하는 태도가 문명의 한 척도임도 깨닫게 하였을 것이다.

Ⅳ. 박영철의 박물관 설립 계획과 인식

박영철이 활약하던 당시 조선에는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존재하였으며 그 중심에는 총독부로 대변되는 식민권력이 있었다. 조선총독부는 정책적이고 체계적인 고적·보물 조사 사업을 시행하였으며 그 과정에서 모인 유물은 총독부박물관의 수장품이 되었다. 박물관에 수집된 고미술품은 조선 통치의 성과로서, 그리고 일제의 지배를 정당화하고 선전하는 수단으로서 전시되었다.
또 하나의 중심은 그 대척점에서 활약하였던 조선의 개인 수장가들이다. 조선인 수장가 중 가장 모범적인 전형으로 간주되는 인물은 간송미술관의 설립자인 전형필이다. 해방 이전 전형필은 자신의 고서화 수집의 이유나 목적에 관하여 뚜렷하게 밝힌 적이 없었다. 전형필이 자신의 고서화 수집 내력을 서술하고 있는 「蒐書漫錄」을 보면 “뜻있는 친우와 선배들이 그대가 기왕 꽤 많은 서적을 모았으니 한걸음 더 나아가서 지금 그대가 열심히 하고 있는 고미술품 수집의 일부분으로 나날이 흩어져가는 우리나라 고서적도 함께 수집하되 …… 전문인들의 협력을 얻어서 좋은 문고를 하나 만들어 보라는 간곡한 권고를 받았다.”라고 하였다.27 이 글에서 뜻있는 친우와 선배들이란 吳世昌(1864~1953)과 高羲東(1886~1965)을 포함하여 전형필의 주위에서 그의 고서화 수집을 도왔던 권위자들을 가리킬 것이다(Fig. 15). 이는 비록 고서적의 수집에 관련된 회고이기는 하였으나 전형필의 고미술 수집의 전반적인 지형을 보여주는 언급이기도 할 것이다. 일본인 수장가들과 경쟁하며 일본인의 소장품이 되었거나 불법적으로 유출된 국보급의 미술품을 되찾아 왔던 그의 활약은 단순한 고미술 애호나 후원의 수준을 넘어서는 것이었다. 전형필의 열정적인 고미술 수집은 그에게 ‘민족문화의 수호자’라는 명예로운 이름을 남겨 주었다.
박영철은 “古畵를 완상할 때나 詩席에 앉아 청풍명월을 읊조릴 때는 속세의 모든 괴로움이 사라져 매우 유쾌합니다.”라며 자신의 고서화 취미를 과시하곤 하였다. 그의 고서화 수집의 일차적인 목적은 예술을 완상하는 데서 오는 정신적 여유를 누리는 데 있었다. 그러나 박영철에게 완상이라는 미적 취미는 고서화 수집의 궁극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1930년대 후반에 이루어진 몇 차례의 인터뷰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자신의 고서화 수집에 관한 생각을 직접 밝혔다.
나는 ‘도서관 같은 것’을 하나 마련하고 싶습니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우리 조상들이 끼쳐준 희귀한 古書를 아무쪼록 많이 수집하고 있습니다. 고서뿐 아니라 고려자기 같은 미술 공예품, 또 그림 같은 것도 벌써 모아 놓은 것만 수천 점이 됩니다(1935. 9).
우리의 고문화를 보존하고 그 산일을 막는 의미에서 古文書畵를 중심으로 한 ‘박물관’ 같은 것을 만들 생각을 가졌다(1937. 5).28
1935년의 좌담에서 박영철은 자신이 도서관을 만들고자 하는 기획하에 고서를 수집하였으며 막대한 양의 고미술을 함께 수집하였다고 하였다. 고서화 수집을 시작한 지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은 1935년경에 고서를 비롯하여 수천 점의 서화를 수집하였으며 그 배경에는 ‘도서관과 같은 것’을 설립하려는 계획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년 뒤에는 명확하게 고문서화 중심의 ‘박물관’을 만들고자 하는 의지를 밝히고 있다. ‘도서관과 같은 것’을 말하는 그의 청사진 속에서 도서관과 박물관을 뚜렷하게 구분하지 않는 모습도 일부 관찰된다. 기증을 보도하던 『매일신보』의 기사에서도 ‘도서관’을 설립할 계획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도서관과 박물관을 명확하게 구분하지 않는 인식 태도는 이들 제도가 유입되던 시기에 종종 관찰되는 것이다. 박영철이 의도하였던 도서관과 같은 것이란 실상 ‘박물관’과 유사한 의미로 이해해도 무방할 것이다.
박영철이 고서화 수집의 이유로 제시한 ‘고문화를 보존하고 그 산일을 막고자 한다.’는 언명은 일견 ‘나날이 흩어져 가는 우리나라 고서적을 수집’하고자 하였다는 전형필의 경우와 유사해 보인다. 그러나 총독부가 표방한 문화재 정책의 목적 또한 고적과 고물의 산실을 막는 데 있었음을 고려하면 박영철의 고서화 수집을 식민 지배를 향한 대항 의지로서 규정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박영철에게서 목격되는 동력은 무엇보다 ‘박물관 설립’ 자체였다. 심지어 비교적 수집의 초기부터 박물관 설립을 전제로 고미술품을 수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전후의 사정을 돌아보면 그는 유럽을 시찰을 계기로 고금의 미술품을 전시하는 박물관 설립이라는 목표를 세우게 되었으며 이를 위하여 고서화 수집을 진행하였던 것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박영철이 남긴 간단한 언명만으로는 그가 박물관에 대하여 어떤 인식을 지녔는지까지는 상세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다. 이러한 한계를 보완하기 위하여 근대기 조선에서 박물관을 주목하고 사회적 인식을 주도했던 지식인들의 박물관 경험과 인식으로 시야를 확장하여 시대적 상황을 살펴보고 그 위에서 박영철의 박물관 기획을 이해하고자 한다.
우리나라 박물관의 역사는 20세기 이후 일본의 식민지 통치와 문화적 영향하에 성립되었다. 그러나 조선인의 박물관 경험과 인식 형성의 기원을 찾으면 그 시작은 개항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1876년 병자수호조약 이후 일본, 미국, 유럽에 파견된 조선 사절단의 기록 속에서 박물관의 경험과 그 인식의 시작이 목격된다.29 조선의 근대적 개혁을 앞두고 일본 사회를 파악하고자 하였던 사절들에게 박물관은 이국적인 문물로서 관심을 끌었다.30
朴泳孝(1861~1939)가 일본에 망명 중이던 1888년 무렵 작성한 「建白書」에서는 박물관에 대한 진전된 인식이 등장한다. 「건백서」는 조선이 근대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담은 개혁상소문이었다. 박영효는 이 글에서 백성에 대한 근대적인 교육을 위한 제도개혁의 대책으로서 ‘박물관의 설립’을 주장하였다. 그가 박물관을 완물이나 勸業을 위한 본보기를 제공하는 장소가 아니라 대중의 지식을 넓히기 위하여 필요한 근대적인 ‘교육 제도’의 하나로 이해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31
일본을 통해 박물관을 경험한 시찰단과 달리 유길준은 서구의 박물관을 직접 경험하고 이를 조선에 알렸던 최초의 인물이었다. 2년여의 유럽 경험을 바탕으로 저술한 『서유견문』(1889년 탈고, 1895년 간행)의 「박물관·동식물원조」에서 그는 박물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32
박물관은 세계 각국의 고금 물산들을 크거나 작거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가리지 않고 일제히 거둬 모아 사람들의 견문과 지식을 넓히기 위하여 설치한 곳이다. …… 박물관과 박물원에 여러 가지 물건을 수집하고 보관하는 일은 한 사람의 힘만으로 경영할 수가 없다. …… 정부와 국민이 힘써 행하는 이유는 기이한 종류를 거둬 모으려는 것만이 아니다. 국민의 견문을 넓히고 학자들의 연구를 도와 그들이 연구한 이치가 나라를 이롭게 하고 국민들에게 편리함을 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유길준은 박물관을 국민의 견문을 넓히고 학자들의 연구를 도와 나라를 이롭게 하고 국민을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제도로서 이해하였다. 박물관의 궁극적인 목적은 국민에게 공평한 배움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며, 그 주체는 정부가 되어 공적으로 설립·운영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밝히고 있다. 이전 지식인들의 서술과 비교하여 유길준의 글에서는 박물관의 기능, 종류, 운영에 관한 이해가 구체화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진전은 그가 오랜 기간 서구 사회와 박물관을 직접 돌아본 경험에서 비롯하였을 것이다. 정부가 주체가 되어 국민이라는 불특정한 다수를 대상으로 견문과 지식을 전달한다는 견해는 역사의 유물을 사적인 소유물로 한정하지 않으며 박물관을 공적인 영역으로 보는 공공성의 개념과 직접 맞닿아 있다.
이후 조선에는 이왕가박물관, 조선총독부박물관, 종합박물관 등의 공공박물관이 등장하였다(Fig. 16). 1924년에는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1889~1961)와 아사카와 다쿠미(浅川巧, 1891~1931)의 주도하에 공예품 중심의 조선민족미술관이 설립되기도 하였다. 식민통치와 함께 시작된 박물관 설립은 일본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그들의 입장을 반영하고 있었다. 한편으로 박물관이라는 공간에서 대중의 시야에 역사적인 미술품을 공개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유산이 개인에 한정되지 않는 공동체의 것이라는 인식이 도출되기도 하였다. 박영철의 고서화 기증과 관련하여 눈여겨볼 사건은 1929년 연희전문학교의 박물실 설치이다. 박물실의 신설을 알리는 『조선일보』의 사설에는 다음과 같은 제언이 등장하고 있다.33
고서화 고기물 내지 기타 진품을 소유한 이는 이것을 홀로 완상하기보다 학문의 연구를 위하여, 또는 미에 대한 희열을 같이하기 위하여 민중에게 공개하는 것이 예술을 애호하는 본의에 적합할 뿐만 아니라 보물이면 보물일수록 영구히 보관할 필요가 있으므로 개인의 私藏보다도 이런 박물실에 기증하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사설의 필자는 고서화를 개인이 소장하기보다 박물관에서 대중에게 공개하는 편이 예술 애호의 본의에 적합하다며 소장품의 기증을 권하고 있다. 연희전문학교 박물실의 설치 목적은 일차적으로 학문 연구를 위한 것이었다. 특히 연전의 박물실은 1920년대부터 대두하였던 조선의 문화를 재평가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조선학 연구를 위한 참고품의 수집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는 식민권력이 주도하는 공공박물관 설립과는 다른 입장에서 조선인에 의한 박물관 건립이라는 점과 더불어 대학박물관의 효시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 사건이었다. 이후에 등장하는 교육기관의 박물실 설치는 조선 사회 저변에서 박물관의 필요성에 대한 요구가 높아졌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고미술의 기증을 권하는 사설은 고서화, 고기물과 같은 과거의 유산이 공공의 영역이 되어야 한다는 인식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이것은 수신사의 일본 방문 이후로 60여 년에 걸쳐 꾸준히 진행되어온 박물관의 경험과 공공성에 관한 인식이 확대된 결과라 할 수 있다. 박영철이 기획하였던 박물관 설립은 고서화라는 역사의 산물을 사적인 소유물로 국한하지 않고 공공의 영역으로서 이해하게 되었던 시대적 상황 속에서 이해되어야할 것이다.

Ⅴ. 결론

식민지 시기 고미술의 대수장가였던 박영철은 1920년대 말부터 사망에 이르는 1939년까지 막대한 양의 고미술을 수집하였다. 이른바 수천 점에 이른다고 하였던 그의 고미술 수집품의 중요 부분은 경성제국대학에 기증되어 진열관을 설립하는 기반이 되었다. 본 연구는 서울대학교박물관에 소장된 기증품인 다산문고를 중심으로 박영철의 고서화 수집의 내용과 과정을 재구성하고자 하였다. 동시에 박영철이 박물관 설립 계획 하에 고서화 수집을 진행하였던 인물이 라는 사실에 주목하여 그의 박물관의 경험과 인식을 조명하고자 하였다.
박영철의 고서화 수집은 그의 사회적 이력이 정점에 달하였던 1920년대 말부터 10여 년에 걸쳐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1928년에 참가한 유럽 시찰에서 박영철은 여러 박물관을 경험하였으며 루브르 박물관과 같은 서구 문명을 상징하는 공공박물관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던 것으로 나타난다. 조선 사회의 각성과 문명화를 요구하였던 박영철에게 서양의 공공박물관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한 대상이었다. 물론 그의 고서화 수집과 기증을 이 하나의 이유로 소급하여 설명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1930년대에 조선인 부호들의 고서화 수집 열기를 이끌었던 다양한 사회문화적 상황, 혹은 수장가 개인이 처하였던 정치경제적 요인들 또한 박영철의 고서화 수집을 이해하기 위하여 고려되어야 하는 조건들이다. 그러나 시찰 직후부터 적극적으로 고서화 수집에 나섰던 상황을 참고하면 양자의 직접적인 관계는 간과하기 어렵다.
전근대 시기의 서화 감상은 일차적으로 지식인의 정신적 수양과 정서적 함양의 수단이었으며 수집 또한 그 연장선에서 이루어졌다. 소장품의 보존과 전시의 기능을 겸비한 藏書樓를 소장한 인물도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수집품은 어디까지나 소장자의 계층 내에서 회자되며 그들의 취향과 문화를 대변하였다. 근대의 고미술 수집가들의 수집 행위 근저에도 예술의 향유에서 얻는 정서적 목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식민지기에 발생한 정치사회적 변화는 고미술의 향유 방식, 즉 가치 평가, 감상, 수집 태도 등에 변화를 불러왔다. 무엇보다 식민권력의 주도하에 고미술은 통치의 도구로서 활용되는 한편, 그 대척점에서는 이를 민족문화의 결정체로서 여기며 민족적 자부심과 결부시키는 의식이 싹트기도 하였다.
박영철의 고서화 수집은 민족의식에 기반하는 저항 행위는 아니었으며 식민통치를 위한 것으로 규정하기도 어렵다. 이러한 박영철의 수장 행위를 고찰하며 본고에서 주목하였던 부분은 박물관 설립을 목적으로 고미술 컬렉션을 형성하였으며 자신의 소장품을 기증하는 방식이다. 그 행위의 기저에서는 자신의 컬렉션을 사적인 차원을 넘어 공공의 영역으로 인식하는 태도를 발견할 수 있다. 고미술품에서 공공의 가치를 발견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태도는 식민지기에 고미술의 주위에서 상호 경합하였던 주체들에게서 발견되는 공통의 태도이다. 박영철은 근대의 전환과 함께 등장한 문화유산을 향한 새로운 태도, 공공성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 인물이라 할 것이다.

Notes

1) 박영철의 생애의 대략에 관하여는 朴榮喆, 『五十年の回顧』 (京城: 大阪屋號書店, 昭和4[1929]), pp. 739-744 참고.

2) 박영철은 조선 중기의 문인 관료인 사암(思菴) 朴淳(1523~1589)의 후손으로서 본래 양반 출신이었다. 그의 가문은 7대조대에 전주로 이거하였으며 그의 선대까지 전주에 세거하였다. 그는 당시에 가세가 심하게 기울어 조부대에는 양반으로서의 체면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였다고 회고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부친인 박기순이 미곡 매매에 종사하며 본격적으로 부를 일구었다.

3) 「半島を切り拓く人人-朝鮮商業銀行頭取 朴榮喆」, 『釜山日報』 (1937. 5. 7).

4) 박찬승, 「박영철 다채로운 이력의 전천후 친일파」, 『친일파 99인』 2 (돌베개, 1993), pp. 152-158.

5) 김혈조, 「燕巖集 異本에 대한 고찰」, 『한국한문학연구』 17 (1994), pp. 157-189.

6) 유홍준, 「안목 13: 수호자·친일파·투자가」, 『경향신문』 (2016. 12. 5).

7) 朴榮喆, 『內鮮融和策私見. 昭和4年5月』 (昭和4[1929]), pp. 8-9. 박영철의 이 글은 1929년 일본의 척식성 설치에 대한 조선의 의견을 전달하기 위하여 조선인 대표의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하였을 당시에 저술되었다.

8) 구사회, 「박영철의 『多山詩稿』와 친일시」, 『평화학연구』 11 (2010), pp. 307-326; 구사회, 「일제강점기 다산 박영철의 세계기행과 시적 특질」, 『열상고전연구』 42 (2014), pp. 351-377; 김상엽, 「제국주의의 협력자이자 문화 애호가 박영철」, 『미술품 컬렉터들』 (돌베개, 2015), pp. 159-179.

9) 「城大에 多山文庫 故朴榮喆氏의 古書寄贈」, 『每日新報』 (1940. 6. 13). 서울대학교박물관에는 박영철의 기증품을 별도의 표식 없이 일정한 방식으로 관리하고 있다. 박영철의 기증품은 컬렉션의 역사성을 되살려 ‘다산문고’로서 다시 규정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10) 「朴榮喆氏長逝 昨夜六十一歲를 一期로」, 『每日新報』 (1939. 3. 10).

11) 경성제국대학진열관의 설립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이경화, 「다산 박영철과 경성제국대학진열관」, 『거두다 간직하다 돌아보다』 (서울대학교박물관, 2018), pp. 149-158 참조.

12) 京城帝國大學庶務課, 『京城帝國大學學報』 159號 (1940. 6. 5). 전람회는 기증품의 소개를 위한 것이었으며 2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13) 『목록』의 기증품에 관하여는 선행 연구에 소개되었으며 본고에서는 지면의 부족으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였다. 필자는 서울대학교박물관에 남아 있는 박영철 기증품 전체에 걸친 면밀한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후속 논고를 통해서 자세한 내용을 알리고자 한다. 김상엽, 「『故朴榮喆氏寄贈書畵類展觀目錄』을 통해 본 多山 朴榮喆(1879-1939)의 수장활동」, 『문화재』 44 (2011), pp. 70-85.

14) “戊寅春購於北京琉璃廠.” 〈신라왕정계비탁본〉은 본래 金有淵(1819~1887)이 연행 동안 청나라 문인 董文燦(1839~1876)에게 선물한 것이었다. 이경화, 「신라왕정계비 탁본과 19세기 조청 문인의 만남」, 『불후의 기록』 (서울대학교박물관, 2019), pp. 302-309.

15) 이 부분은 후손의 전언에 따른 것으로서 후손가의 소장품 일부는 서울대학교박물관에 기증되기도 하였다.

16) 滄浪客, 「百萬長者의 百萬圓觀」, 『삼천리』 7권 8호 (1935), pp. 44-52; 「盛况이 期待되는 古書畵珍藏品展」, 『東亞日報』 (1930. 10. 10).

17) 朴榮喆, 『多山詩稿』 (京城: 朱白印刷所, 昭和14[1939]), p. ⅰ-xviii. 이 책의 권두 사진에는 페이지가 없으며 필자가 임으로 표기함.

18) 吳世昌 編, 『槿域書彙』 1~5 (서울대학교박물관, 2016).

19) 20세기 초 고미술 시장과 고서화 수장가에 관한 전반적인 내용은 김상엽, 앞의 책, pp. 49-62 및 119-136 참고.

20) 1931년 『삼천리』의 「朝鮮最大財閥解剖」라는 연재 기사에서는 박영철을 閔泳徽(1852~1935), 崔昌學, 金性洙를 이어 4번째 재벌로서 기록하였다. 기사의 필자는 박영철의 자산을 최소 200에서 최대 500만원 사이로 추정하며 근대산업에 투자한 금융자산이 많아 추산이 어렵다고 설명하였다. 朱潤, 「2百萬圓의 銀行王 朴榮喆氏-朝鮮商業銀行, 米穀倉庫等에 關係」, 『삼천리』 14 (1931. 4), pp. 44-45.

21) 김경남, 「일제하 식민도시 개발과 조선인 자본가형성의 특징-전북지역 박기순·박영철 일가를 중심으로」, 『嶺南學』 30 (2016), pp. 188-231.

22) 朴榮喆, 앞의 책 (1929), pp. 629-712.

23) 구사회, 앞의 논문 (2014), pp. 351-377.

24) 박영철, 앞의 책 (1929), pp. 670-671.

25) 나혜석, 「꽃의 巴里行, 歐米巡遊記 續」, 『신천지』 5권 4호 (1933), pp. 80-82; 이순탁, 「滿目, 藝術의 精」, 『朝鮮日報』 (1933. 9. 14).

26) 김한결, 「혁명기 프랑스 박물관의 공공성 원칙 확립의 역사적 배경에 대한 고찰」, 『미술이론과 현장』 27 (2019), pp. 5-25; 캐롤 던컨, 김용규 역, 「군주의 갤러리에서 공공미술관으로」, 『미술관이라는 환상: 문명화의 의례와 권력의 공간』 (경성대학교출판부, 2015), pp. 56-105.

27) 『간송 전형필』 (보성중고등학교, 1996), pp. 286-290.

28) 滄浪客, 앞의 글 (1935. 9); 金東煥, 「財界 巨頭가 돈과 사업을 말함, 諸氏 韓相龍, 閔奎植, 金基德, 朴興植, 朴榮喆 5씨」, 『삼천리』 9권 4호 (1937. 5), pp. 3-6.

29) 목수현, 「일제하 李王家博物館의 식민지적 성격」, 『미술사학연구』 227 (2000), pp. 81-104; 최석영, 『한국 근대의 박람회·박물관』 (서경문화사, 2001).

30) 1881년의 조사시찰단은 개화정책을 추진하고자 하는 고종의 명령으로 일본의 문물을 조사하기 위하여 독자적으로 파견되었다. 조사로서 파견된 인물은 박정양을 비롯한 12인으로 이들은 시찰한 결과를 「聞見事件」으로 작성하여 정부에 제출하였다. 조사의 대부분은 박물관에 관하여 기록을 남기고 있다.

31) 박영철은 김옥균과 같은 개화사상가들에게 깊은 유대감을 지녔으며 유학 시절 일본에 망명중이던 박영효와는 직접 교류하였다. 박영효의 건백서는 『日本外交文書』에 수록되었다. 이 개혁 방안은 고종에게 상정되는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대외적으로 공개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박영철, 앞의 책 (1929), pp. 96-98; 김현철, 「朴泳孝의 政治思想에 관한 硏究: ‘國政改革에 관한 建白書’에 나타난 富國强兵論」, 『군사』 34 (1997), pp. 237-273.

32) 유길준, 『서유견문』 (서해문고, 2004), pp. 471-474.

33) 「延專의 博物室新設」, 『朝鮮日報』 (1929. 1. 14).

Fig. 1.
<강원도지사 박영철> Pak Yŏngch’ŏl, the Governor of Kangwŏn-do Province (Pak Yŏngch’ŏl, Tasan shigo, p.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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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경성제국대학진열관> Keijō Imperial University Museu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Yŏnpo 1, p. 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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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故朴榮喆氏寄贈書畵 類 展觀目錄』> Cover of the Ko Pakyŏngch’ŏlssi gijŭngsŏhwaryujŏn gwanmongnok, 1940, 22.6×15.6cm (Kim Sangyŏp, “Ko Pakyŏngch’ŏlssi gijŭngsŏhwaryujŏn gwanmongnok ŭl t’onghae pon tasan Pak Yŏngch’ŏl ŭi sujang hwaltong,” Munhwajae 44, p.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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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서울대학교박물관 수장고 내의 박영철 기증품> The Collection of Pak Yŏngch’ŏl in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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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신라왕정계비>의 유물 상자에 부착된 부전지들> Pak Yŏngch’ŏl‘s Private Information Cards Attached on the Storage Box of Sillawang jŏnggyebi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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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서애수찰>과 다산진장부전> Sŏae such’al (Left) and its Information Card (Right), 1595, Ink on Paper, 38×54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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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신라왕정계비 탁본>과 箱書> Ink Rubbing of Sillawang jŏnggyebi (Left) and the Storage Box with Manuscript (Right), 19th Century, Ink on Paper and Wood, 112×58cm (rubbing),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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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1.
<《겸현신품첩》의 제첨> Cover Title of Kyŏmhyŏn shinp’umch’ŏp, Ink on Silk, 27×7.7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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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2.
정선, <만폭동도>, 《겸현신품첩》 Chŏng Sŏn, Manp’oktong-do in Kyŏmhyŏn shinp’umch’ŏp, 18th century, Ink and Color on Silk, 33.0× 22.1c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Seoul National University Museum, Han’guk chŏnt ’ong hoehwa, p.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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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多山詩稿』> Cover of Tasan shigo, The Chinese Poetry Book of Pak Yŏngch’ŏl, 1939 (Pak Yŏngch’ŏl, Tasan shi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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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박영철과 그의 소장품> Pak Yŏngch’ŏl and His Collections (Pak Yŏngch’ŏl, Tasan shigo, p. 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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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五十年の回顧』> Cover of Kojyunen no kaik’o, 1929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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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歐洲視察團 獨逸國桂陵寺院 撮影> A Group Photograph Taken in Germany during the Tour of Europe in 1928 (Pak Yŏngch’ŏl, Tasan shigo, p. 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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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루브르 박물관> Paris-Le Nouveau Louvre, 1887~1900, Paper-albumen Print, 20.9×27.4 cm, Rijksmuseum (Rijksmuseum, https://www.rijksmuseum.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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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20세기 초의 루브르 박물관 갤러리> Paris-Louvre, Galerie d'Apollon France, 1870~1910, Paper Cardboard-albumen Print, 20.8×27.8 cm, Rijksmuseum (Rijksmuseum, https://www.rijksmuseum.n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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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북단장에서 보화각 개관 기념일에 이상범·박종화·고희동·안종원· 오세창·전형필·이순황 등 제씨> Chŏn Hyŏngp'il and His Guests Gathered at the Opening Anniversary of Pohwagak in Puktanjang in 1938 (Posŏng junggodŭng hakkyo p’yŏn, Kansong Chŏn Hyŏngp’il, p. 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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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조선총독부박물관 본관 6실> Display of Paintings at the 6th Gallery in the Main Building of the Government-General Museum of Chōsen, Print from Dry Plate, 115× 160 cm, Kŏnp'an no. 029523,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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