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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21; 2024 > Article
조선 초기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시기와 배경*

Abstract

선각·박지분청자(線刻·剝地粉靑瓷)는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양자기[彩瓷] 중 하나로 전라도 서, 남해안에 인접한 가마터를 중심으로 15세기 2/4분기 후반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16세기 전반까지 생산이 지속되었다. 15세기 조선에서는 각종 문양자기를 정치, 외교, 의례 등 다양한 목적에서 활용하였는데 선각·박지분청자 또한 주로 관변적(官邊的) 영역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선행연구에서 선각·박지분청자는 중국 자주요계 북방자기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것으로 이해되었으나 이 글에서는 내, 외면을 가득 채워 인화문을 시문하는 공납용 인화분청자의 제작 과정에서 그릇의 전면을 분장하고 이를 걷어내는 방식으로 가시성이 높은 문양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선각·박지분청자가 전라도 서남해안에 인접한 지역을 중심으로 제작된 것은 관요가 성립하기 이전까지 조선 왕실에서 활용한 자기를 한양으로의 운송이 편리하고 왕실의 내용(內用) 재산이 분포한 전라도를 중심으로 제작하였기 때문으로 추정하였다. 추후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양상과 더불어 소비 양상 및 조형 특징을 종합적으로 살펴보고 그 성격을 구체화하기 위한 연구를 지속하고자 한다.

Abstract

The “punch’ŏng ware with incised and sgraffito designs” stands as a hallmark of early Chosŏn ceramics. Its production began in the latter part of the fifteenth century, primarily centered around kilns along the southwestern coasts of Chŏlla province. This tradition persisted until the mid-sixteenth century. In the fifteenth-century Chosŏn era, a variety of decorated ceramics found application across a spectrum of functions, including politics, diplomacy, and religious rituals. It is assumed that this particular type of punch’ŏng ware was similarly used in bureaucratic and official contexts.
Previous research has suggested that the “punch’ŏng ware with incised and sgraffito designs” may have been influenced by ceramics from northern China. However, this paper proposes a different perspective: the punch’ŏng ware production, utilizing incise and sgraffito techniques, could have its origins in the crafting of tributary wares, characterized by stamped patterns covering their entire surface. Additionally, it is hypothesized that the production of “punch’ŏng ware with incised and sgraffito designs” was concentrated in regions adjacent to the southwestern coast of Chŏlla Province. This geographical focus may be attributed to the ease of transporting ceramics used in the royal court to Hanyang before the establishment of official kilns and the concentration of royal properties in the Chŏlla region. My future research will aim to comprehensively understand the characteristics of “punch’ŏng ware with incised and sgraffito designs” by analyzing its consumption patterns and stylistic features.

Ⅰ. 머리말

선각·박지분청자(線刻·剝地粉靑瓷)는 태토(胎土) 위에 백토(白土)를 분장하고 백토면을 선 또는 면으로 긁어내어 문양을 시문한 자기로 조선 초기를 대표하는 문양자기[彩瓷, Patterned Ceramics] 중 하나이다.1 선각·박지분청자를 아울러 연구주제로 삼은 것은 선각기법과 박지기법을 별개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각기법이 문양의 윤곽선을 조각칼 등으로 긁어내어 시문하는 것이라면 박지기법은 선각 후 그 외면의 분장토(粉粧土)를 긁어내는 과정이 추가되는 것으로 큰 범주에서 동일한 계통의 시문기법이다. 즉 박지분청자의 제작을 위해서는 선각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하며 선각분청자는 박지분청자의 시문 과정 일부가 생략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조선 초기 도자사에 관한 연구에서 선각·박지분청자는 개론에서 분청자의 시문 기법 중 하나로 간략하게 소개되거나 가마터, 기종, 문양에 관한 연구에서 부분적으로 다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구체적인 제작 시기와 배경, 성격 등에 관한 접근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2 또 일반적으로 민간에서 생산 및 소비되었으며 조형적 특징 또한 민간의 취향을 반영한 것으로 인식되었고 고졸하고 천진한 미감의 측면에서 감상되었다.
그러나 선각·박지분청자는 백토분장기법의 탄생 배경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며 통념과 달리 관변적(官邊的) 범위에서 생산 및 소비된 것으로 파악된다. 또한 선행 연구에서 중요한 선각·박지분청자 편년유물로 다루었던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 소장 <분청자박지연화어문호>의 제작 시기에 관한 새로운 견해가 제시되고 새로운 편년유물이 보고되면서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시기와 배경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이 글은 선각·박지분청자의 성격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에 앞서 그 제작 시기와 배경을 상세히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제작 시기는 발굴조사가 진행된 선각·박지분청자 생산유적의 출토품과 편년유물을 통해 파악해 볼 것이다. 그리고 조선 초의 자기 제작 상황과 시대 배경, 자기 생산 관련 기록을 포괄적으로 살펴봄으로써 선각·박지분청자가 생산된 배경을 파악해보겠다. 특히 기술적 배경과 관련하여 선행연구를 통해 지속적으로 제기된 중국 자주요계북방 자기문화와의 관련성을 재고(再考)하고 조선 초기 상감청자 제작의 연장에서 선각·박지기법이 탄생하였다는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지역적으로는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이 전라도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원인을 추론해 볼 것이다.

Ⅱ.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시기

1. 가마터 출토 현황

현재까지 발굴조사가 진행된 조선 초기 가마터 중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이 확인된 곳은 40여 곳으로 전라도 서남해안을 중심으로 분포한다(Fig. 1).3
선각·박지분청자의 출토량이 많고 생산 양상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대표적인 생산유적으로는 광주 충효동 가마터와 고창 용산리 가마터가 있고 고흥 운대리 가마터, 영암 상월리 가마터, 공주 학봉리 가마터에서도 상당한 수량의 선각·박지분청자가 출토하였다. 그 중 광주 충효동 가마터는 발굴조사를 통해 가마터의 운영 기간과 개별 유구 및 층위의 편년이 비교적 명확하게 규명되었으며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개시 양상과 시간의 경과에 따른 변화 양상이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따라서 그 발굴 성과를 중심으로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시기를 파악해 보겠다.4
광주 충효동 가마터에서는 조사된 모든 층위에서 선각·박지분청자가 출토하였다. 상대적으로 이른 시기에 운영된 1호, 2호 가마와 관련된 E2, E1, W1 지역 및 W3 하층 퇴적에서는 상감기법으로 시문되던 문양이 점차 선각·박지기법으로 대체되는 양상이 확인되며 특히 박지기법의 활용이 두드러진다. 이는 선상감에 비해 시문과정이 번거롭지만 문양의 가시성(可視性)이 높은 면상감이 박지기법으로 우선 대체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또한 하나의 그릇에 상감기법과 선각·박지기법을 함께 사용하는 예도 있는데 이는 상감기법에서 선각·박지기법으로 시문방식이 이행(移行)하는 과도기의 생산 특징으로 판단되며 비교적 면적이 좁고 문양이 단순한 보조문양에는 상감기법을 활용하고 주문양은 박지기법으로 시문한 경우가 많다(Fig. 2). 따라서 선각·박지 분청자는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문양자기를 생산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제작이 시작된 시점은 광주 충효동 가마터 1호, 2호 가마의 운영시기로 파악해 볼 수 있다.
1호, 2호 가마의 운영시기는 관련 퇴적인 E2, W1, W3 지역에서 출토한 ‘茂珍內贍’명의 공납용 인화분청자를 통해 파악해 볼 수 있다. 무진(茂珍)은 1430년부터 1451년까지 사용된 광주의 지명으로 이를 통해 해당 지명이 새겨진 그릇의 생산 시기를 한정할 수 있다.5 더하여 2호 가마 폐요 이후 운영된 4호 가마 퇴적에서는 1451년 다시 변경된 읍호인 광주목을 의미하는 ‘光’의 명문이 확인되어 1호, 2호 가마의 운영시기를 1430년에서 1451년을 전후한 시기로 볼 수 있으며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개시 또한 이 기간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1호, 2호 가마 이후에 운영된 4호 가마의 퇴적인 W2지역에서는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양상 변화가 확인된다. W2-6층은 ‘丁閏’명의 자기편이 출토하여 1477년경 형성된 층위로 파악되는데 그 이전의 층위에서는 적은 양일지라도 박지분청자가 출토하였으나 그 이후로는 선각분청자의 제작만 확인된다. 따라서 광주 충효동 가마터에서 박지분청자가 생산되는 것은 15세기 3/4분기까지이며 15세기 4/4분기에는 선각분청자의 제작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또 다른 주요 생산 유적인 고창 용산리 가마터에서는 선각·박지기법으로 어문, 연화문, 초화문, 연판문, 사엽화문 등 정형화된 문양을 장식한 병, 편병, 자라병, 장군 등 대형 및 특수 기종을 집중적으로 생산하였다. 조사된 모든 층위에서 선각·박지분청자가 출토하며 선상감, 면상감 기법의 청자는 출토하지 않았고 상감기법이 선각·박지기법으로 대체되는 시문기법의 변화도 확인할 수 없다. 따라서 이미 자기의 시문기법으로 완성된 선각·박지기법이 외부에서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상정해 볼 수 있다.6
고창 용산리 가마터는 운영시기를 특정할 수 있는 편년자료는 출토하지 않았으나 광주 충효동 가마터와 비교 및 ‘玄’명 관요 백자의 출토 사실 등을 통해 1450년대 후반에서 16세기 초반까지 운영된 것으로 파악된다. 한편 퇴적층과 시문기법에 따른 출토 유물의 수량을 상세하게 제시한 분청자 병과 대호의 경우를 보면 백자의 생산량이 분명하게 증가하여 가장 늦은 시기에 운영된 것으로 판단되는 4호 가마 관련 퇴적에서는 박지기법의 유물이 출토하지 않았다. 따라서 고창 용산리 가마터에서는 1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선각·박지분청자를 생산하였으며 가마 운영 후반에는 박지분청자의 생산이 크게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외 생산 유적의 경우 출토 유물을 통해 대략의 운영 시기를 추정할 수 있지만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개시 시점이나 시문 기법의 변화 양상은 분명하게 파악되지 않는다. 다만 전반적인 출토 양상을 살펴보면 선각·박지분청자를 생산한 가마터는 대체로 1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박지분청자는 광주 충효동 가마터와 고창 용산리 가마터를 포함한 주요 생산 유적을 중심으로 전라도 일부 가마터에서만 확인되는 반면 선각분청자는 전라도 뿐 아니라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제작되었다. 시기적으로도 박지분청자가 15세기 3/4분기를 중심으로 확인되는 것에 비해 선각분청자는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도 제작이 지속된다. 이는 선각기법이 백토 분장이 보편화되는 시점에 문양을 장식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이고 수월한 방식이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2. 편년유물

현재까지 알려진 선각·박지분청자 편년유물은 7점이다. 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편년유물은 예종(睿宗, 1450~1469)의 태항아리 외항 뚜껑으로 사용된 <분청자박지모란문뚜껑>이 다(Fig. 3). 예종은 1450년에 태어났고 장태(藏胎)는 1462년에 이루어졌으므로 늦어도 1462년 이전에는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태항아리 일괄 유물의 제작과 갖춤이 탄생과 장태 중 어느 시점에 이루어졌는지는 명확하지 않은데 비슷한 시기의 왕실 태항아리와 양식 비교를 통해 좀 더 구체적인 제작 시점을 추론해 볼 수 있다.
예종과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거나 장태가 이루어진 왕실 인물로는 월산대군(月山大君, 1454~1488, 장태 傳 1462), 성종(成宗, 1457~1494, 장태 1458), 인성대군(仁城大君, 1461~1463, 장태 1462)이 있다(Table 1). 만약 장태 시점에 태항아리가 제작되었다면 1458년에 장태가 이루어진 성종의 태항아리가 가장 이른 양식을 보이며 예종, 월산대군, 인성대군의 태항아리는 서로 비슷한 모습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종의 태항아리는 내, 외항 및 뚜껑이 모두 백자로 제작된 반면 예종과 월산대군의 태항아리 및 인성대군의 태항아리 외항 뚜껑은 청자와 분청자로 제작되어 비교적 이른 양식을 보인다. 오히려 탄생일을 기준으로 본다면 1450년과 1454년에 태어난 예종과 월산대군의 태항아리 외항은 인화분청자로 비교적 고식이며 1457년과 1461년에 태어난 성종과 인성대군의 태항아리 내, 외항은 비슷한 형태의 백자로 왕실의 태항아리가 점차 정형화되는 단계의 유물로 파악되어 그 선후가 적합하다.7 따라서 태항아리 일괄 유물의 제작 및 갖춤은 장태보다는 탄생 시점과 연관되었을 개연성이 높고 그렇다면 <분청자박지모란문뚜껑>의 생산 시기는 1450년경 혹은 그 이전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더하여 왕실에서 태항아리 외항으로 인화분청자가 사용된 경우는 앞서 살펴본 월산대군과 예종 이외에 문종(文宗, 1414~1452)의 사례가 확인되고 세조(世祖, 1417~1468)와 화의군(和義君, 1425~?)의 경우 인화분청자 발이 태항아리 갖춤의 일부로 활용되었다.8 이러한 사례를 통해 15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왕실 태항아리 갖춤에 인화분청자가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이는 예종의 태항아리 일괄 유물 또한 15세기 전반 이미 왕실에서 비축하고 있던 자기일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다음으로 현재 실물은 확인할 수 없으나 일제강점기의 유리건판 사진을 통해 전라남도 순천 송광사의 <고봉화상탑(高峰和尙塔)>에서 출토한 것으로 알려졌던 <분청자박지연화어문호>가 있다(Fig. 4). 고봉화상(高峰和尙, 1350~1428)은 1428년에 입적(入寂)하였고 1430년에 승탑이 건립되었기 때문에 <분청자박지연화어문호>는 늦어도 1430년 이전에 제작된 가장 이른 시기의 선각박지분청자 편년유물로 여겨졌다.9 그러나 한성욱과 엄기표의 근래 연구를 통해 <분청자박지연화어문호>가 <고봉화상탑>이 아닌 <보조국사감로탑(普照國師甘露塔)>에서 출토한 사리기임이 알려졌으며 <보조국사감로탑>의 이건 내력을 상세히 고찰한 결과 1477년 감로탑의 위치를 옮기는 과정에서 <분청자박지연화어문호>가 매납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었다.10 따라서 그 생산 하한은 1477년으로 볼 수 있다.
다만 송광사의 위치와 장식된 문양의 특징을 고려할 때 <분청자박지연화어문호>는 광주 충효동 가마터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1477년은 충효동 가마터에서 박지분청자의 제작이 더 이상 확인되지 않는 시점이다. 한편 이와 같은 형태의 선각·박지분청자 입호는 대체로 높이 30cm 이상의 대호인 경우가 많아 <분청자박지연화어문호>가 처음부터 사리기로 제작되었을 가능성은 낮으며 다른 용도로 사용되다가 미상의 이유로 인해 사리기로 재활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라 사료된다. 그렇다면 그 생산 시기는 1477년보다는 다소 앞설 것으로 볼 수 있다.
성종비 윤씨(成宗妃 尹氏, 1455~1482)의 태항아리 외항 뚜껑 장식에도 선각기법이 활용되었다(Fig. 5). 성종비 윤씨의 태항아리 외항은 윤씨가 왕비가 된 이후 형식을 갖춰 태실을 새로 가봉한 1478년, 태실이 위치한 경상북도 예천 인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형태적으로는 15세기 후반 왕실의 태항아리와 유사하지만, 뚜껑의 장식이나 귀의 형태 등 세부 장식에서 차이가 있고 크기도 훨씬 커 왕실 태항아리의 연장에서 생산되었으나 제작지는 달랐을 개연성이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백자와 유사하게 그릇의 표면을 두껍게 분장하고 선각기법으로 문양을 장식한 사례는 경상남도 하동과 창원에서 출토한 것으로 알려진 두 점의 분청자와 고령 사부리 가마터 출토품 등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된다(Fig. 6~8).11 따라서 그 생산 시기는 1478년경으로 파악되며 15세기 4/4분기에는 선각분청자의 생산이 전라도 서남해안 이외의 지역에서도 부분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한편 피장자의 생몰년을 통해 대략의 제작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묘지(墓誌)나 분묘 출토 유물 중에도 선각·박지기법이 활용된 사례가 있다. 상, 하부의 장식문양을 선각기법으로 시문한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청자상감‘成化柒年’명입비형묘지>는 명문을 통해 1471년 8월경에 제작되었으며 진무부위(進武副尉)이자 광주목(光州牧)의 전(前) 호장(戶長)인 경연(庚連)과 그의 아내 장흥 오씨의 위(位)임을 알 수 있다(Fig. 9). 진무부위는 정9품의 무관 품계로 낮은 벼슬이지만 호장은 지방 실무행정을 총괄하였던 직책으로 지방 사회에서 일정한 권한을 행사하였을 것이며 피장자가 대표적인 선각·박지분청자의 생산지인 광주목의 호장이었다는 점에서 묘지의 제작지는 광주 충효동 가마터로 짐작할 수 있다. 더불어 시문된 초화문의 형태는 광주 충효동 가마터에서 출토하는 발, 접시, 뚜껑, 표형병 등에 장식된 문양과 매우 흡사하다.
숙명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 <분청자선각‘成化十七年’명묘지>는 이영유(李永蕤, 1422~1481)의 묘지이며 그의 몰년을 바탕으로 1481년경 제작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Fig. 10).12 백토 분장은 두껍고 균일하며 예리한 선각기법으로 명문과 당초문을 시문하였는데 이영유의 본관이 경상북도 성주이고 장식된 문양의 형태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상감당초문병>(동원 207)과 흡사하다는 점에서 상감백자 제작 경험이 있는 경상도 일대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고령 사부리 가마터나 합천 장전리 가마터에서는 상감백자와 선각분청자가 함께 출토하여 이러한 추정을 가능케 한다.13
또 김자성(金子省, 1435~1490)의 묘에 부장되었던 <분청자선각화문호>는 분묘를 이장하는 과정에서 출토되었는데 최초 매장 이후 개장(改葬)에 관한 기록이나 흔적은 확인할 수 없어 피장자의 사망 시점을 바탕으로 1490년 이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Fig. 11).14 생산지는 특정할 수 없지만 김자성의 묘가 논산 호암리에 위치했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15세기 4/4분기에는 충청도 지역에서도 선각분청자가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선각·박지분청자의 생산 하한과 관련한 유물로는 류세화(柳世華, 1504~1554)의 묘에서 출토한 <분청자선각파선문호>가 주목된다(Fig. 12). 류세화의 생몰년을 고려할 때 이 유물은 16세기 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대부분의 선각·박지분청자 편년유물이 15세기 후반에 집중되는 것과 비교하면 이례적이다. 더불어 16세기는 자기 생산의 중심이 청자와 분청자에서 백자로 이행하는 시기로 류세화의 묘에서도 다수의 백자 반상기와 번백옥(燔白玉)이 함께 출토하였다. 따라서 선각 분청자의 생산은 매우 제한적인 범위에서 지속되었을 것으로 보이며 특히 <분청자선각파선문호>는 구연부가 전을 이루고 저부는 평저(平底)이며 동체에는 간략한 파선문을 시문하는 등 외형적 특징이 도기와 흡사하여 도기 생산의 연장에서 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15

3. 제작 시기

이상 가마터 출토 현황과 편년유물을 통해 선각·박지분청자는 전라도 서남해안 일대 가마터를 중심으로 15세기 2/4분기 후반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1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생산되었고 제한적이나마 16세기 전반까지도 만들어졌음을 파악할 수 있다. 박지분청자는 광주 충효동 가마터와 고창 용산리 가마터 등 주요 생산 유적을 중심으로 15세기 3/4분기에 집중적으로 제작되었고 15세기 4/4분기 이후에는 선각분청자 위주의 생산이 이루어지는데 문양은 점차 간략해지고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뿐 아니라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의 일부 지역에서도 제작 양상이 확인된다. 이는 선각기법이 백토 분장이 점차 보편화되는 시기에 자기에 문양을 장식할 수 있는 가장 직관적이고 수월한 방식이었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한편 15세기 3/4분기를 기점으로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양상이 크게 변화하는 것은 1467년경 경기도 광주에 관요가 설치되고 1480년경 관요 백자 생산이 안정화되는 시기와 결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Ⅲ장에서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으나 선각·박지분청자는 조선 왕실이 관변적(官邊的) 범주에서 활용하기 위해 제작한 그릇으로 추정되는데, 조선 왕실과 조정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그릇의 생산이 관요로 일원화되면서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목적과 양상이 점차 변화하였고 따라서 15세기 4/4분기 이후에는 시문과정이 간략한 선각분청자만이 민간을 중심으로 생산 및 활용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선각분청자의 생산 또한 16세기 전반에는 크게 감소하는 것으로 보이며 16세기 후반에는 제작 양상이 확인되지 않는데, 조선의 전반적인 자기 문화가 청자와 분청자 중심에서 백자로 이행하는 시대적 흐름에 따른 것으로 파악된다. 다만 류세화의 묘 출토 <분청자선각파선문호>와 같이 형태와 문양이 도기와 유사한 사례를 볼 때 선각분청자 중 일부는 도기와 병행(竝行)하여 생산되거나 도기로 대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구체적인 분청자의 소멸 과정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Ⅲ.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배경

선각·박지기법은 한반도에서 보편적으로 활용된 자기의 시문기법이 아니었으므로 선행연구에서는 대체로 중국 북방 자주요계(磁州窯系) 분장자기나 고려 상감청자와 비교를 통해 그 원류(原流)을 파악하고자 하였다. 더하여 선각·박지분청자는 15세기 후반 전라도 서남해안 일대의 가마터를 중심으로 제작되어 시대적, 지역적인 편중이 분명하다. 따라서 시대적, 지역적, 기술적 측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배경을 입체적으로 파악해 보고자 한다.

1. 시대적 배경

15세기 전반은 조선이 새로운 국가로서 왕실의 전통을 세우고 각종 예제를 정립하여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시기였다. 그 일환으로 신분과 계층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기물을 한정하는 한편 국가와 왕실의 예(禮)와 의(義)를 표명하는 명시적인 매개체로서 고급 공예품인 문양자기를 활용한 사례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통해 여럿 확인된다.
1430년(세종 12)의 기록에서는 명 황제에게 바치는 젓을 담는 용기로 채문자항(綵紋磁缸), 즉 문양이 있는 자기 항아리를 사용했음이 확인된다.16 비록 용기일 뿐이지만 황제에게 진상하는 물선을 담는 그릇이므로 도기 등을 사용하지 않고 문양이 있는 자기를 사용한 것이다. 1456년(세조 2) 세조(世祖, 재위 1455~1468)는 왕실의 일원이자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에 가담했던 측근 이사철(李思哲, 1411~1456)에게 병문안 차 청화아대종(靑畫兒大鍾)을 내려주었고 1461년(세조 7)에는 신숙주에게 술과 함께 박 덩굴 문양과 어제시가 장식된 술그릇[畫鐘]을 하사하였다.17 또 1489년(성종 20) 성종(成宗, 1469~1494)은 성균관에 화준(畫樽)을 내사하고 항상 설치하여 감상[觀美]하도록 하였다.18
이처럼 각종 문양자기를 진상, 선물, 사여 등에 적극 활용하는 사례는 세종년간 이후에 주로 확인된다. 세종대에는 이전보다 명(明) 사신에 의한 자기의 진상이 빈번했으며 특히 1428년에서 1430년에는 네 차례에 걸쳐 선덕제(宣德帝, 재위 1425~1435)가 조선에 각종 자기를 직접 사여하기도 하였다.19 이러한 경험은 조선 왕실에서 문양자기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도록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을 가능성이 높고 15세기 전반 내내 문양자기에 대한 수요는 지속적으로 발생 및 확대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20
당시 조선에서는 상감청자의 제작이 지속되고 있었지만 15세기 2/4분기 이후 인화기법의 확대와 더불어 상감청자의 문양은 점차 단순화, 도식화하는 경향을 보인다.21 한편 조선산 청화백자의 제작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시점이었고 더욱이 1448년(세종 30)에는 중국산 청화백자의 무역이 금지되고 이러한 기조가 1477년(성종 20)까지 지속되어 중국으로 부터의 문양 자기 수입 또한 이전에 비해 감소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다.22 그 결과 지속적인 문양자기의 수요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자기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상감청자보다는 생산이 수월하지만 높은 시각적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그릇으로서 선각·박지분청자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 기술적 배경

분청자에서 보이는 그릇의 전면을 백토로 분장하고 문양을 시문하는 방식은 중국 북방의 자주요계 자기에서 주로 확인되는 특징으로 이 때문에 많은 선행연구에서 조선의 분청자가 중국 북방 자기문화의 영향을 받아 제작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파악하였다.23 실제 여말선초 시기에는 중국 북방계 유이민의 이주가 빈번했으며 이들이 조선 초 자기 문화에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선각·박지기법이 탄생하는 직접적인 배경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우선 조선 초기 유적에서 출토하는 자주요계 자기는 모두 백지흑화기법으로 장식된 호(壺)이며 한양도성 내 청진동, 도렴동, 관훈동 유적과 여주 신륵사 유적, 김포 양촌 유적, 광주 도마리 1호 가마터 등 경기도 일대에서 한정적으로 출토하였다.24 선각·박지기법과 유사한 획화 및 척화기법의 자주요계 자기의 유입 양상은 확인되지 않으며 선각·박지분청자의 주요 생산지인 전라도 지역에서 중국 북방의 분장자기가 출토한 사례도 없다. 따라서 조선으로 유입된 자주요계 분장자기가 전라도 일대를 중심으로 제작된 선각·박지분청자의 모본이 되었을 가능성은 작다.
그릇이 아니라면 중국 북방지역의 장인이 직접 유입되었을 개연성도 있다. 그러나 중국자주요계 분장자기가 대체로 그릇을 분장토에 담가 분장하는 것과 달리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과정에서는 귀얄기법으로 백토를 발라 분장하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분장 방식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인다.25 이는 나상철의 선행연구에서도 지적된 부분으로 만약 장인의 직접적인 유입을 통해 분장기법이 전해졌다면 이처럼 근본적인 제작 과정의 차이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26
한편 중국 북방계 유이민과 자기문화의 유입이 선각·박지분청자 제작의 직접적인 배경이라면 원명교체기(元明交替期)의 혼란으로 대규모 유이민이 발생했던 14세기 후반부터 분청자의 제작 양상이 확인되어야 한다.27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듯 선각·박지분청자는 15세기 2/4분기 후반부터 제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 시기적으로 차이를 보인다. 또한 향화(向化)한 중국 북방계 유이민은 한반도 동북면(東北面)을 중심으로 다양한 지역에 정착하였는데 만약 이들에 의해 선각·박지분청자의 생산이 시작되었다면 한반도 동북면을 중심으로 전국에서 산발적인 제작 양상이 확인되어야 한다. 그러나 실제 선각·박지분청자의 생산은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확인되고 있어 지역적인 분포에서도 차이를 보인다.28 따라서 중국 북방계 유이민과 자기문화의 유입 또한 선각·박지기법의 직접적인 탄생 배경은 아니었을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보다는 그릇의 내, 외면에 인화문을 채워 시문하는 정형화된 공납용 인화분청자의 생산이 선각·박지분청자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과정은 청자의 표면을 백토로 분장하는 단계와 분장된 백토면을 선 또는 면으로 깎아 시문하는 단계로 나눌 수 있다. 그릇의 표면을 선 또는 면으로 깎아 시문하는 것은 자기에 문양을 장식하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음각, 양각, 상감기법과도 유사한 측면이 있다. 따라서 중요하게 고민해야 할 점은 왜 그릇의 표면을 분장하게 되었는지의 문제이다.
그런데 공납용 인화분청자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그릇의 전면을 분장하는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만 한다. 선상감이나 면상감기법으로 문양을 시문하는 경우에는 조각도 등으로 그릇의 표면에 문양을 음각하고 부분적으로 백토를 감입한 후 문양 외부의 백토를 긁어내는 방식으로 시문하지만 공납용 인화분청자는 그릇의 내, 외면 가득 인화문을 시문하기 때문에 개별 문양에 백토를 감입하는 것이 아니라 귀얄붓을 이용하여 그릇 전면에 백토를 바르는 방식으로 감입하고 건조한 후 전체적으로 백토를 긁어내는 과정을 통해 문양을 시문한다.29 이때 그릇의 전면을 백토로 분장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을 것이고 백토분장을 긁어내는 방식으로 가시성이 높은 문양을 구현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중국의 분장자기와 달리 조선에서 귀얄 기법 위주의 분장이 이루어진 이유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분장이 시작되었기 때문으로 판단된다(Table 2).
정형화된 공납용 인화분청자의 생산은 늦어도 1417년에서 1418년에는 시작되었으며,30 선각·박지분청자의 생산 개시 양상이 분명하게 확인되는 광주 충효동 가마터 1호, 2호 가마 관련 퇴적에서는 완성된 양식의 공납용 인화분청자가 함께 출토하였다. 한편 현재까지 발굴조사된 조선 15세기 가마터 중 정형화된 공납용 인화분청자의 제작에 앞서 백토분장을 적극 활용한 분청자의 생산이 확인된 사례는 없다.
또한 상감기법으로 문양을 시문하는 경우 ‘음각→백토감입→걷어냄’의 세 단계가 필요하지만 선각·박지기법의 경우 ‘백토분장→걷어냄’의 두 단계만으로 비슷한 시각적 효과를 구현할 수 있다. 문양자기의 사용자에게 중요한 것은 시문기법의 종류가 아니라 가시성이 높은 문양자기의 획득이었을 것이고 사기장은 문양자기의 생산 요구가 확대됨에 따라 비교적 적은 노력으로 가시성이 높은 문양자기를 제작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 결과 선각·박지분청자가 상감청자를 점진적으로 대체하며 생산이 확대되었을 것으로 파악된다.

3. 지리적 배경

공납용 인화분청자의 제작은 전국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선각·박지분청자는 전라도의 특정 가마터를 중심으로 생산되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생산지를 선택한 결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조선 초기 전라도 지역의 자기 생산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파악된다.
조선 초 전라도의 자기 생산과 관련하여 먼저 살펴볼 것은 1413년(태종 13) 전라도 도관찰사에게 명하여 해마다 자기를 진상(進上)하도록 하였다는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이다.31 1413년은 이미 전국에서 자기의 공납이 이루어지는 시점이지만 전라도에 추가로 자기를 진상하도록 한 것은 정기적인 공납 이외에 별도의 자기를 생산할 이유가 있었고 이에 적합한 지역으로 전라도를 선택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분명히 알 수는 없으나 장인(匠人)과 원료, 운송, 재원(財源)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했을 것이다. 전라도 일대는 충청도 내륙이나 경상도에 비해 수로를 통한 한양으로의 물자 운송이 수월한 편인데 그중에서도 서남해안 일대를 중심으로 주요 자기 생산 유적이 입지하는 것은 수로를 통한 물자 운송의 편의성을 고려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편 1417년(태종 17)에는 전국에서 장흥고(長興庫)로 일괄 공납되던 자기를 각 관사별로 나누어 공납하게 하였는데32 당시의 공안(貢案)이 남아 있지 않아 어떤 기준으로 공납 자기의 생산이 분정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현재까지의 발굴 성과를 볼 때 전라도 지역에서는 내자시(內資寺)와 내섬시(內贍寺) 소용의 자기를 주로 생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33 관련하여 박경자는 1392년(태조 1) 10월에 상정된 임신공안(壬申貢案)에서 호(戶)를 기준으로 분정된 자기 공납이 1417년(태종 17)의 조처를 거치면서 도(道)와 군현(郡縣)을 기준으로 분정되는 체계로 변화하였고 이 변경 사항이 세종 재위 직후인 1418년에서 1419년의 공안 개정을 거쳐 『세종실록(世宗實錄)』「지리지(地理志)」단계에서 군현 단위의 자기소로 기재되었다고 판단하였다. 즉 1417년 이후 공납 자기의 생산이 도 단위로 구분되었으며 내자시와 내섬시 소용의 공납 자기 생산은 전라도 지역에 분정된 것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따르면 내자시와 내섬시는 모두 정 3품의 관청으로 내자시는 궐내에 공급하는 각종 식재료와 궐내의 연향 및 직조에 관한 일을 관장했으며 내섬시는 각 궁(宮)과 전(殿)에 대한 공상 및 2품 이상의 관리에게 하사하는 술과 왜인 및 야인에게 공급하는 음식물과 직조에 관한 일을 관장하였다.34 다만 이는 법률상 규정된 역할로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살펴보면 내자시와 내섬시는 왕실의 각종 연향과 사신 접대, 제사를 담당했으며 왕실의 내용(內用) 재산을 관리하는 어고(御庫)로 기능하였음을 알 수 있다.35
내자시와 내섬시는 공식적으로 담당한 업무의 범위을 볼 때 다양한 종류의 그릇을 소용하였을 것이고 또한 왕실의 어고로서 기능하였으므로 공납되는 자기뿐 아니라 왕실에서 필요로 하는 다양한 종류의 그릇을 조달받아 사용하였을 것이다. 앞서 1413년(태종 13) 매년 전라도에서 자기를 진상하도록 한 조처를 고려한다면 1417(태종 17)의 조처에서 내자시와 내섬시에 공납되는 자기의 생산을 전라도에 분정함으로써 왕실이 직, 간접적으로 활용한 자기 생산을 전라도로 일원화하여 왕실의 자기 수요에 적절히 대응하도록 하였을 개연성이 있고 선각·박지분청자 또한 그 일환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전라도에서 왕실이 직, 간접적으로 활용한 자기의 생산이 일원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다른 사례로 영지형(靈芝形) 운문(雲紋)과 화당초문(花唐草紋)이 시문된 청자의 생산을 들 수 있다. 영지형 운문은 명 관요에서 생산된 황실 소용의 자기에서 확인되는 문양이며36 화당초문은 『세종실록』「오례(五禮)」에 수록된 각종 의례기의 문양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Fig. 13~15). 일반적으로 그릇의 중앙에는 화당초문을 배치하고 측면에는 영지형 운문을 음각 기법으로 장식하는 일관된 시문 양상이 확인는데 조선 왕실에서 명 황실 소용 자기의 영향을 받아 의례기로서 제작한 별격의 자기로 추정된다.37 이들은 완주 화심리, 곡성 구성리, 광주 충효동, 나주 운봉리, 영암 상월리, 영광 청전리, 화순 쌍옥리 가마터 등 대체로 공납용 인화분청자를 제작한 전라도 일대의 가마터에서 생산되었고38 생산지 인근의 사찰과 관청 및 한양도성 내 소비유적을 중심으로 출토하여 제한적인 소비 범위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39
한편 공예품의 생산에는 인적, 물적 재원이 필요하므로 왕실 소용의 자기 생산을 전라도로 일원화한 것에는 왕실 재원의 분포 상황도 고려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초기 왕실의 내용 재산을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문건은 현재 남아 있지 않아 상세한 내용은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 초기 전라도 지역에서 왕실의 불사가 집중적으로 이루어진 점이나40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내자시 및 내섬시 소속 외거노비(外居奴婢)의 거주지가 대체로 전라도에서 확인되는 점을 고려할 때41 왕실의 내용 재산이 전라도 지역에 다수 분포하였을 가능성이 있고 이를 바탕으로 왕실 불사나 공예품의 제작 등이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더하여 이 글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못하였으나 선각·박지분청자는 주요 생산지가 위치하는 전라도 일대의 관청 및 사찰 유적과 한양도성을 중심으로 소비되었다. 또한 전세품과 소비지 출토품을 두루 살펴볼 때 기종으로는 주기(酒器)로 볼 수 있는 병과 편병, 대형 저장기인 호가 많은 수량 제작되었고 문양은 왕실의 권위를 상징하는 모란문과 군신연락(君臣宴樂)을 의미하는 어조문(魚藻紋)이 주로 장식되었는데 특히 병과 편병에는 어조문이 시문된 양상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소비 양상과 조형 특징을 제작 배경과 함께 고려한다면 선각·박지분청자는 군신간의 연향(宴饗)과 선온(宣醞) 혹은 각종 물품의 사여(賜與) 등을 위한 상징적인 문양자기로서 제작되기 시작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42

Ⅳ. 맺음말

이 글은 조선 초기 제작된 대표적인 문양자기인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시기와 배경을 구체적으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주요 생산유적과 편년유물을 살펴본 결과 선각·박지분청자는 전라도 서남해안 지역을 중심으로 15세기 2/4분기 후반에 제작되기 시작하여 1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생산되었고 16세기 전반까지 부분적으로 제작이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박지기법은 주요 생산 유적을 중심으로 15세기 3/4분기까지 존속하였으며 선각기법은 15세기 4/4분기 이후까지 자기의 시문기법으로 저변화하여 비교적 넓은 지역에서 활용되었다.
한편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배경을 시대적, 기술적, 지리적 관점에서 입체적으로 파악하고자 시도하였다. 15세기 2/4분기 이후 조선 왕실에서는 명 황제에 의한 청화백자의 사여를 계기로 정치, 외교, 의례 등에 문양자기를 활발히 활용하였다. 근본적으로는 청화백자를 제작하여 활용하고자 하였겠으나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제작과 소비는 매우 한정적으로 이루어졌으므로 확대된 문양자기 수요를 청화백자만으로 모두 충당하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따라서 관요 성립 이전까지 조선 왕실 소용의 자기 생산을 주로 담당했던 전라도 지역의 가마터를 통해 문양자기의 생산을 도모하였고 이 과정에서 광주 충효동 가마터와 고창 용산리 가마터 등 특정 생산지에 문양자기 생산 요구가 집중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보다 효율적인 방식으로 가시성이 높은 문양자기를 생산하고자 하였을 것이고 공납용 인화분청자의 생산 과정에서 그릇의 전면을 분장하고 이를 걷어내는 과정을 통해 상감기법보다 수월한 제작방식으로 비슷한 시각적 효과를 구현할 수 있음을 인지하게 되면서 선각·박지기법이 발생하였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러나 관요의 운영이 점차 안정화되고 조선 왕실 소용의 자기 제작이 관요로 일원화 되면서 전라도 지역의 왕실 소용 자기 생산은 축소되었을 것이다. 그 결과 선각분청자에 비해 문양의 가시성은 높지만 시문 과정은 복잡한 박지분청자의 생산은 크게 감소하였고 선각분청자의 생산은 부분적으로 지속되다 청자와 분청자 중심의 자기 문화가 백자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점차 소멸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선각·박지분청자의 제작 시기와 배경을 조형 특징 및 소비 양상과 함께 살펴보지 못한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 선각·박지분청자는 대체로 한양도성과 생산지 인근의 관청 및 사찰을 중심으로 소비되었으며 공납 및 진상과 관련된 명문이 시문되거나 왕실과 관련된 모란문, 어조문이 장식되는 등 관변적 성격이 분명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추후 이러한 특징을 포괄적으로 살펴본다면 선각·박지분청자의 성격을 보다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될 것이라 기대한다.

Notes

1) 선각(線刻)은 조화(彫花), 음각(陰刻) 등의 용어와 혼용되어왔다. 선각은 근본적으로 음각이라 할 수 있지만 태토면을 깎아 시문하는 기법과 분장한 백토면을 긁어 시문하는 기법은 구분하여 지칭할 필요가 있고, 박지기법과 비교하여 ‘선’으로 문양을 시문한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음각, 양각(陽刻) 등 조각칼 등으로 문양을 새겨 그릇을 장식하는 시문방식을 대체로 ‘각(刻)’으로 표현하므로 용어의 형식적 통일성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선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한편, 조선 초에 제작된 일군의 자기는 고유섭(高裕燮, 1905~1944)에 의해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로 명명되었고 이를 축약한 ‘분청사기(粉靑沙器)’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유섭, 『고려도자와 이조도자』 (온이퍼브, 2019), p. 12. 다만 용어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청자(靑瓷), 백자(白瓷)와 같은 형식의 분청자(粉靑瓷)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윤용이의 견해가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이 논문에서는 ‘분청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윤용이, 『한국도자사연구』 (문예출판사, 1993), p. 327.

2) 선각·박지분청자에 관한 단독연구로는 나상철, 「15세기 剝地粉靑沙器 硏究」 (충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0)이 있다. 그는 박지분청자가 중국 북방계 자기의 영향으로 15세기 1/4분기에 생산을 시작하여 3/4분기에 소멸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조선 전기의 사회적 정황을 반영하는 중요한 자기로 평가하였다. 그 외 선각·박지분청자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최순우, 「이조(李朝)의 공예(工藝)」, 『문화재』 1 (1965), p. 38; 김영원, 「朝鮮前期 粉青과 象嵌白磁에 관한 硏究-文樣과 器形을 中心으로」, 『美術史學硏究』 153 (1982), pp. 2-4; 정양모, 『한국의 도자기』 (문예출판사, 1991), pp. 82, 117-118, 347-349, 370-371; 윤용이, 앞의 책 (1993), pp. 36-37, 330-333; 강경숙, 『한국 도자사』 (예경, 2012), pp. 327-329 등이 있으며, 선각·박지기법은 분청자의 다양한 시문 기법 중 하나로 간략히 소개되었다.

3) 이 지도는 최서윤, 앞의 논문, p. 4 <지도 1>을 재인용 한 것이며 추가로 확인한 선각·박지분청자 생산지인 나주 만봉리 가마터와 영광 길용리 가마터를 추가하였다. (재)해동문화재연구원, 『나주 만봉지구 농업용저수지 둑높이 기사업지구 내 羅州 萬峰里 遺蹟』 (2017);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영광 길용리 분청사기 요장 발굴조사 보고서』 (2022); 지도상 같은 색으로 표시된 가마터는 비슷한 생산 양상을 보이는 곳이며 굵은 획으로 쓰여진 곳은 박지분청자의 생산이 확인되는 곳이다.

4) 국립중앙박물관, 『光州 忠孝洞窯址—粉靑沙器, 白磁가마 퇴적층 조사』 (1992); 국립광주박물관, 『무등산 충효동 가마터』 (1993); 국립광주박물관, 『광주 충효동 요지(사적 제141호) 발굴조사 50주년 기념 특별전 무등산 분청사기』 (2013).

5) 김덕진, 「15세기 光州牧 邑號陞降과 喜慶樓」, 『조선시대사학보』 91 (2019), pp. 9-21.

6) 호남문화재연구원, 『高敞 龍山里窯址』 (2004).

7) 이욱, 「조선시대 왕실의 안태와 가봉 의식」, 『조선왕실 아기씨의 탄생 나라의 복을 담은 태항아리』 (국립고궁박물관, 2018), pp. 286-287.

8) 국립고궁박물관, 앞의 책, pp. 312-314.

9) 강경숙, 『粉靑沙器硏究』 (일지사, 1986), pp. 40, 56; 나상철, 앞의 논문, p. 68; 고봉화상의 생애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 참고. 엄기표, 「高麗後期 松廣寺 出身 16國師의 石造浮屠 研究」, 『文化史學』 29 (2008), pp. 74-77.

10) 한성욱, 「順天 曹溪山 松廣寺 慈靜國師·高俸和尙 舍利器」, 『佛敎考古』 5 (2005), p. 108; 엄기표, 「순천 松廣寺普 照國師 甘露塔과 甘露塔碑에 대한 고찰」, 『美術史學硏究』 305 (2020), pp. 15-16.

11) 대동문화재연구원, 『高靈 沙鳧里窯址 : 高靈 88올림픽高速道路 擴張區間(第14工區)內 遺蹟 試·發掘稠査報告書 (第2區域)』 (2012), pp. 304-306.

12) 이영유의 생몰년은 ‘향년 60세에 사망하였고 1481년 12월에 장례를 치렀다’는 묘지의 명문 내용을 토대로 파악하였다. 한편, <분청자선각‘成化十七年’명묘지>와 제작연대가 같고 형태와 문양이 흡사한 이영유의 동생 이영분(李永蕡, 1448~1513)의 묘지가 개인소장으로 전한다. 작품을 실견하지 못하여 묘지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사진이 수록된 부산시립박물관의 도록에는 <‘成化十七年’銘白磁象嵌墓誌>로 명명되어 있다. 다만 이영분은 1513년에 사망하였는데 왜 묘지가 성화17년, 즉 1481년에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고 해당 유물이 실제 백자인지 혹은 분청자인지도 명확하지 않아 이번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釜山市立博物館, 『開館展圖錄』 (국제신문, 1979), p. 82; 국립중앙박물관, 『삶과 죽음의 이야기 조선 묘지명』 (통천문화사, 2011), p. 30.

13) 이규영, 「조선 초기 상감백자 연구」 (명지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22), pp. 23-26.

14) 공주대학교박물관, 『高靈金氏 松庵公派 寄贈遺物圖錄』 (2004), pp. 4-11, 26-30.

15) 전북대학교박물관, 『완주 둔산리 전주유씨 선산 분묘조사 조선시대 무덤과 껴묻거리』 (2000), pp. 17-20, 38-39, 74-88, 120-123; 전주대학교박물관, 『전주류씨 진학재공파와 그 문화유산 : 무덤 조사 20주년 기념 도록』 (2019), pp. 32-43.

16) 『世宗實錄』 卷50, 12年(1430) 11月 14日.

17) 『世祖實錄』 卷4, 2年(1456) 7月 28日; 『世祖實錄』 卷24, 7年(1461) 6月 4日; 다만, 이때 화종(畫鐘)은 그림이 있는 술그릇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단어이므로 자기가 아닌 금속기 등 다른 재질의 공예품일 가능성도 있다.

18) 『成宗實錄』 卷230, 20年(1489) 7月 22日.

19) 전승창, 「조선 초기 명나라 청화백자의 유입과 수용 고찰」, 『美術史學硏究』 264 (2009), p. 38 <표 1>. 특히 선덕제의 자기 사여는 조선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428년(세종 10) 의 사은표전에서는 황제가 각종 자기를 보낸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였고 세종의 부고를 명에 알리는 글에서도 선덕제가 각종 사기그릇을 하사하였던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世宗實錄』 卷41, 10年(1428) 7月 25日; 『世宗實錄』 卷127, 32年(1450) 2月 22日).

20) 명나라의 청화백자 사여와 조선 왕실의 문양자기 활용 확대에 관해서는 이미 선행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다. 윤효정, 「朝鮮 15·16세기 靑畵白磁의 製作과 使用 : 문헌자료와 요지출토품을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05·251 (2006), pp. 324-335; 김귀한, 「조선 세조~성종대 관요의 설치와 정비」, 『석당논총』 82 (2022), pp. 279-284. 윤효정은 의례기로서 청화백자의 사용 확대에 주목했으며 김귀한은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관요 백자와 청화백자의 활용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제작과 소비는 매우 한정적으로 이루어졌다. 관련하여 한양도성 내에서 출토한 청화백자를 바탕으로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활용 양상을 파악한 근래의 연구를 참고하면, 청화백자로 주로 제작된 기종은 호와 전접시 정도이고 그 수량도 매우 적어 왕실을 중심으로 한정된 계층에서만 소비되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박정민, 「한양도성 내 ‘天·地·玄·黃’명 백자와 조선 전기 청화백자 출토 양상」, 『美術史學硏究』 319 (2023), pp. 89-96. 따라서 문양자기의 소비 확대를 청화백자만으로 충당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비교적 제작이 용이했던 선각·박지분청자를 비롯한 기타 문양자기가 그 대체품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1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경기도 광주 관요 및 경상도 지역에서는 상감백자, 전라도 지역에서는 선각·박지분청자, 충청도 지역에서는 공주를 중심으로 철화분청자 등 다양한 문양자기의 제작이 시도된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1) 안유정, 「조선 전기 상감청자(象嵌靑瓷)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21), pp. 200-205.

22) 『世宗實錄』 卷119, 30年(1448) 3月 3日; 『成宗實錄』 卷77, 8年(1477) 閏2月 13日.

23)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김영원, 앞의 논문; 나상철, 앞의 논문; 김윤정, 「조선 15세기 중국 북방 자기 문화의 유입과 분청사기에 미친 영향」, 『美術史學硏究』 312 (2021).

24) 한성백제박물관, 『자기에 입힌 세상만사 자주요』 (2018), pp. 202-205; 김윤정, 「한반도 유입 磁州窯系 瓷器의 양상과 그 의미」, 『야외고고학』 39 (2020), pp. 58-62; 박정민, 「한양도성 내 조선 시대 유적의 시기별 중국 자기 출토 양상과 변화」, 『인문과학연구논총』 43 (2022), pp. 272-274.

25) 조선에서도 덤벙기법의 분청자가 제작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귀얄기법에 비해 시기적으로 후행하며 고흥 운대리 가마터나 보성 도촌리 가마터의 경우처럼 굽 안바닥까지 백토를 분장하여 외형적으로 백자와 구별할 수 없는 백색의 자기를 제작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문양의 시문 과정으로서 백토를 분장하는 경우와 구분된다.

26) 나상철, 앞의 논문, p. 34.

27) 이옥빈, 「조선시기 북방계 향화인의 원거주지와 이주시기—1609년 울산호적을 중심으로」, 『역사와경계』 96 (2015), pp. 122-124.

28) 이원택, 「조선 전기의 귀화와 그 성격」, 『서울국제법연구』 8 (2001), pp. 227-232; 김호철, 「조선초기 여진 귀화인 연구」, 『朝鮮時代史學報』 107 (2023), pp. 231-241, 257-260.

29) 인화분청자 제작 과정에서의 백토분장에 관해서는 박경자의 선행연구에서도 주목된 바 있다. 박경자, 「朝鮮 粉粧粉靑沙器의 變遷과 特徵」, 『동북아 분장분청사기의 변천과 고흥 운대리 분장분청사기의 의미』 (고흥군·민족문화유산연구원, 2017), p. 5.

30) 정형화된 양식의 공납용 인화분청자란 내, 외면에 문양의 단을 구획하고 인화문을 꽉 채워 시문한 것으로 대체로 발과 접시의 기종을 중심으로 확인된다. 박경자, 「공납용 분청사기의 통일된 양식과 제작배경」, 『미술사논단』 27 (2008), pp. 108-110; 공납용 인화분청자의 제작 시기에 관해서는 박경자와 김윤정의 견해를 참고하였다. 박경자, 「조선 초 인화기법 분청사기의 계통과 의의」, 『미술사학』 27 (2013); 김윤정, 「고려말·조선초 供上用 銘文靑瓷의 이행 과정과 제작 배경」, 『石堂論叢』 55 (2013).

31) 『太宗實錄』 卷26, 11年(1411) 7月 16日.

32) 『太宗實錄』 卷33, 17年(1417) 4月 20日.

33) 박경자, 「고려 말-조선 초 공납자기 생산체계의 변화」, 『한국중세고고학』 10 (2021), pp. 155-156.

34) 『經國大典』 「吏典」京官職 正三品衙門.

35) 『太宗實錄』 卷21, 11年(1411) 1月 20日; 『世宗實錄』 卷15, 4年(1422) 3月 4日.

36) 김영미, 「朝鮮時代 官窯 靑磁硏究」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4), p. 32.

37) 선행연구에서 오영인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일련의 음각운문청자를 전라도 일대에서 공납용 인화분청자를 제작한 가마에서 공납 혹은 상위 계층의 소비를 염두하고 제작된 지방색과 개성이 뚜렷한 양질의 자기로 보았으며 한양도성 및 지방의 관청과 사찰 등 한정된 공간에서 소비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오영인, 「음각운문청자의 제작현황으로 본 조선시대 관요의 설치와 지방 가마」, 『헤리티지 : 역사와 과학』 50 (2017), pp. 44-45. 다만 오영인이 만(卍)자형 운문으로 파악한 문양은 중앙의 꽃봉오리와 이를 휘돌아 감싸는 형태의 당초문이 함께 구성된 화당초문으로 국가의 의례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문양이며 명 황실 소용 자기에 시문되는 영지형 운문과 함께 일정한 양식으로 시문된다는 점에서 필자는 운문청자를 지방색을 반영한 자기가 아닌 조선 왕실의 필요에 따라 제작된 별격의 자기로 추정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최서윤, 앞의 논문, pp. 144-147 참조.

38) 국립광주박물관, 『全南地方 陶窯地 調査報告Ⅱ』 (1988); 국립광주박물관, 앞의 책 (1993); 전남문화재연구원·곡성군, 『谷城 龜城里 陶窯地』 (2005); 전북문화재연구원, 『完州 花心里 遺蹟 : 완주 오케이골프장 조성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2008); 민족문화유산연구원, 『靈巖 上月里 柳泉 4號, 5號 窯場』 (2016); 문화재청·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호남의 자기소, 도기소 장흥도호부』 (2022).

39) 순천대학교박물관, 『靈巖 天皇寺 Ⅱ』 (1995); 목포대학교박물관, 『도갑사 대웅보전』 (2007);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 :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부지 발굴조사』 (2011); 겨레문화유산연구원, 『서울 효자동 유적』 (2015); 한울문화재연구원·강진군, 『康津 全羅兵營城 城內部 遺蹟 Ⅲ』 (2017);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금성관Ⅱ』 (2019);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유적Ⅱ』 (2021) 등.

40) 조선 초기의 왕실 불사는 대체로 한양도성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일부 지방에서도 수행되었는데,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나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월정사(月精寺) 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전라도의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찰로는 영암 월출산의 도갑사, 월산사, 무위사, 화순 쌍봉사, 김제 금산사, 강진 만덕산 백련사, 부안 능가산 실상사 등에서 왕실 불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포대학교박물관, 『雙峯寺』 (1996), pp, 19-21; 김정희, 「孝寧大君과 朝鮮 初期 佛敎美術—後援者를 통해 본 朝鮮 初期 王室의 불사」, 『미술사논단』 25 (2007); 인용민, 「효령대군이보(孝寧大君李補)(1396~1486)의 불사(佛事) 활동(活動)과 그 의의(意義)」, 『禪文化硏究』 5 (2008); 엄기표, 「朝鮮 世祖代의 佛敎美術 硏究」, 『한국학연구』 26 (2012); 국립나주박물관, 『월출산』 (2015), pp. 91, 118-120; 김정희, 「조선시대 王室佛事의 財源」, 『강좌미술사』 45 (2015); 황인규, 「조선시대 금산사의 역사적 전개와 사격」, 『佛敎學報』 73 (2015).

41) 현재 조선 초기 왕실 내용 재산에 관한 정보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15세기 기사를 보면 관청의 폐지와 합속(合屬) 등을 통한 재산 변동이 매우 빈번하였음을 알 수 있어 내섬시와 내자시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대략의 분포를 파악하고자 조선왕조실록의 15세기 기사 중 내자시와 내섬시의 노비 관련 내용을 정리하였으며, 외공노비의 거주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례는 3건으로 남원, 광주, 제주의 지명을 확인하였다. 『端宗實錄』 卷12, 2年(1454) 12月 7日; 『成宗實錄』 卷198, 17年(1486) 12月 1日; 『燕山君日記』 卷40, 7年(1501) 1月 30日. 극히 부분적인 정보이지만 전라도에 속하는 지명만 확인되어 내자시, 내섬시 소속의 노비 중 많은 수가 전라도 일원에 거주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보았다. 왕실의 불사나 공예품의 생산 모두 재원의 확보는 중요한 문제이며 그 인적, 물적 토대가 갖춰진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42) 선각·박지분청자의 소비 양상과 조형 특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최서윤, 앞의 논문, pp. 49-53, 75, 106-115, 147 참조.

Fig. 1.
<선각·박지분청자 생산 유적의 분포> A Distribution of Kiln Sites of Incised and Sgraffito Punch’ŏng-Ware (Illustrated map drawn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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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분청자선각박지모란당초문접시편> Shard of Punch’ŏng-Ware Dish with Incised and Sgraffito Peony and Scroll Design, 15th century, Chosŏn, H. 4.3cm, Excavated from Kwangju Ch’unghyo-dong Kiln Site, Gwangju National Museum (Gwangju National Museum, Mudŭngsan Punch’ŏngsagi, p. 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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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분청자박지모란문뚜껑>, Punch’ŏng-Ware Lid with Sgraf fito Peony Design, c. 1450, Chosŏn, Jeonju National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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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분청자박지연화어문호>, Punch’ŏng-Ware Jar with Sgraffito Lotus and Fish Design, Before 1477, Chosŏn, Size Unknown, Songgwangsa Temple, Sunch’ŏn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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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분청귀얄대호> Punch'ŏng-Ware Jar with White Slip-Brushed Design, c. 1478, Chosŏn, H. 58.8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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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분청자선각연화당초문병편> Shard of Punch’ŏng-Ware Bottle with Incised Lotus and Scroll Design, 15th century, Chosŏn, H. 20cm, Excavated from Ha-dong in Gyeongsangnam-do,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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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분청자선각모란문병> Punch’ŏng-Ware Bottle with Incised Peony Design, 15th century, Chosŏn, H. 23.1cm, W. 19.6 cm, Excavated from Ch’angwŏn in Gyeongsangnam-do,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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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분청자선각연판문호저부편> Shard of Punch’ŏng-Ware Jar with Incised Lotus Petal Design, 15th century, Chosŏn, H. 20cm, Excavated from Koryŏng Sabu-ri Kiln Site (Daegu National Museum, https://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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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청자상감‘成化柒年’명입비형묘지> Celadon Epitaph Tablet with Inlaid Inscription ‘The Seventh Year of Chenghua 成化柒 年,’ 1471, Chosŏn, H. 21.0 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s://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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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분청자선각‘成化十 七年’명묘지> Punch’ŏng-Ware Epitaph Tablet with Incised Inscription ‘ The Seventeenth Year of Chenghua 成化十 七年,’ 1481, Chosŏn, H. 20.6cm, Sookmyung Women’s University Museum (Sookmyung Women’s University Museum, https://home.sookmyung.ac.kr/sites/museum/index.d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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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분청자선각화 문호> Punch'ŏng-Ware Jar with Incised Flower Design, Before 1490, Chosŏn, H. 33cm, Excavated from Kim Chasŏng’s Tomb in Nonsan Hoam-ri, Kongju National University Museum (Kongju National University Museum, Koryŏnggimssi Songamgongp’a Kijŭngyumultorok, p.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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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분청자선각파선문호> Punch’ŏng-Ware Jar with Incised Wave Design, Before 1554, Chosŏn, H. 15.9cm, Excavated from Ryu Sehwa’s Tomb in Wanju Tunsan-ri, Jeonbuk National University Museum (Jeonbuk National University Museum, Chŏnjuryussi Chinhakchaegongp'awa kŭ Munhwayusan,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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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백자청화운봉문반> White Porcelain with Phoenix and Cloud Design in Underglaze Cobalt Blue, Reign of Emperor Xuande, Ming, H. 4.2cm, W. 20.3cm, National Palace Museum (National Palace Museum, https://www.npm.gov.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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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궁대> Illustration of an Arrow Sheath, in Kullye Sŏrye Pyŏnggi in “Orye,” Sejong shillok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https://sillok.history.go.kr, Editied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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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청자 음각화당초운 문접시> Celadon Dish with Incised Flower, Scroll and Cloud Design, 15th century, Chosŏn, H. 4.3cm, W. 15.6cm, Excavated from Wanju Hwasim-ri Kiln Site, Jeonju National Museum (Jeonju National Museum, https://www.e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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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예종, 월산대군, 성종, 인성대군의 태항아리 구성 비교> A Comparison Bet ween the Components of Placenta Jars A scribed to Ye-chong, Wŏlsan-Taekun, Sŏng-chong and Insŏng-Taek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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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2.
<상감청자와 인화분청자의 제작 과정 비교> A Comparison Between the Processes of Making Inlaid Celadon and Inlaid Stamped Punch'ŏng-Ware
* 경기공예창작지원센터(www.csic.kr), https://youtu.be/UM2gqysaWK4/ https://youtu.be/i-mTtSK4Srs 중 일부 발췌
* Stills taken from videos produced by the Gyeonggi Craft Center: (Left) The Process of Making Inlaid Celadon in https://youtu.be/i-mTtSK4Srs and (Right) The Process of Making Inlaid Stamped Punch'ŏng-Ware in https://youtu.be/UM2gqysaWK4 (Kyŏnggi kongye ch'angjak chiwŏn sent'ŏ, www.cs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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