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21; 2024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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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선각(線刻)은 조화(彫花), 음각(陰刻) 등의 용어와 혼용되어왔다. 선각은 근본적으로 음각이라 할 수 있지만 태토면을 깎아 시문하는 기법과 분장한 백토면을 긁어 시문하는 기법은 구분하여 지칭할 필요가 있고, 박지기법과 비교하여 ‘선’으로 문양을 시문한다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음각, 양각(陽刻) 등 조각칼 등으로 문양을 새겨 그릇을 장식하는 시문방식을 대체로 ‘각(刻)’으로 표현하므로 용어의 형식적 통일성을 고려하여 이 글에서는 ‘선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한편, 조선 초에 제작된 일군의 자기는 고유섭(高裕燮, 1905~1944)에 의해 ‘분장회청사기(粉粧灰靑沙器)’로 명명되었고 이를 축약한 ‘분청사기(粉靑沙器)’라는 용어가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 고유섭, 『고려도자와 이조도자』 (온이퍼브, 2019), p. 12. 다만 용어의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청자(靑瓷), 백자(白瓷)와 같은 형식의 분청자(粉靑瓷)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것이 타당하다는 윤용이의 견해가 적합하다고 판단하여 이 논문에서는 ‘분청자’라는 용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윤용이, 『한국도자사연구』 (문예출판사, 1993), p. 327.
2) 선각·박지분청자에 관한 단독연구로는 나상철, 「15세기 剝地粉靑沙器 硏究」 (충북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10)이 있다. 그는 박지분청자가 중국 북방계 자기의 영향으로 15세기 1/4분기에 생산을 시작하여 3/4분기에 소멸한 것으로 파악하였으며 조선 전기의 사회적 정황을 반영하는 중요한 자기로 평가하였다. 그 외 선각·박지분청자에 관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최순우, 「이조(李朝)의 공예(工藝)」, 『문화재』 1 (1965), p. 38; 김영원, 「朝鮮前期 粉青과 象嵌白磁에 관한 硏究-文樣과 器形을 中心으로」, 『美術史學硏究』 153 (1982), pp. 2-4; 정양모, 『한국의 도자기』 (문예출판사, 1991), pp. 82, 117-118, 347-349, 370-371; 윤용이, 앞의 책 (1993), pp. 36-37, 330-333; 강경숙, 『한국 도자사』 (예경, 2012), pp. 327-329 등이 있으며, 선각·박지기법은 분청자의 다양한 시문 기법 중 하나로 간략히 소개되었다.
3) 이 지도는 최서윤, 앞의 논문, p. 4 <지도 1>을 재인용 한 것이며 추가로 확인한 선각·박지분청자 생산지인 나주 만봉리 가마터와 영광 길용리 가마터를 추가하였다. (재)해동문화재연구원, 『나주 만봉지구 농업용저수지 둑높이 기사업지구 내 羅州 萬峰里 遺蹟』 (2017); 민족문화유산연구원, 『영광 길용리 분청사기 요장 발굴조사 보고서』 (2022); 지도상 같은 색으로 표시된 가마터는 비슷한 생산 양상을 보이는 곳이며 굵은 획으로 쓰여진 곳은 박지분청자의 생산이 확인되는 곳이다.
4) 국립중앙박물관, 『光州 忠孝洞窯址—粉靑沙器, 白磁가마 퇴적층 조사』 (1992); 국립광주박물관, 『무등산 충효동 가마터』 (1993); 국립광주박물관, 『광주 충효동 요지(사적 제141호) 발굴조사 50주년 기념 특별전 무등산 분청사기』 (2013).
9) 강경숙, 『粉靑沙器硏究』 (일지사, 1986), pp. 40, 56; 나상철, 앞의 논문, p. 68; 고봉화상의 생애에 관해서는 다음 논문 참고. 엄기표, 「高麗後期 松廣寺 出身 16國師의 石造浮屠 研究」, 『文化史學』 29 (2008), pp. 74-77.
10) 한성욱, 「順天 曹溪山 松廣寺 慈靜國師·高俸和尙 舍利器」, 『佛敎考古』 5 (2005), p. 108; 엄기표, 「순천 松廣寺普 照國師 甘露塔과 甘露塔碑에 대한 고찰」, 『美術史學硏究』 305 (2020), pp. 15-16.
12) 이영유의 생몰년은 ‘향년 60세에 사망하였고 1481년 12월에 장례를 치렀다’는 묘지의 명문 내용을 토대로 파악하였다. 한편, <분청자선각‘成化十七年’명묘지>와 제작연대가 같고 형태와 문양이 흡사한 이영유의 동생 이영분(李永蕡, 1448~1513)의 묘지가 개인소장으로 전한다. 작품을 실견하지 못하여 묘지의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사진이 수록된 부산시립박물관의 도록에는 <‘成化十七年’銘白磁象嵌墓誌>로 명명되어 있다. 다만 이영분은 1513년에 사망하였는데 왜 묘지가 성화17년, 즉 1481년에 제작되었는지 알 수 없고 해당 유물이 실제 백자인지 혹은 분청자인지도 명확하지 않아 이번 논문에서는 다루지 않았다. 釜山市立博物館, 『開館展圖錄』 (국제신문, 1979), p. 82; 국립중앙박물관, 『삶과 죽음의 이야기 조선 묘지명』 (통천문화사, 2011), p. 30.
15) 전북대학교박물관, 『완주 둔산리 전주유씨 선산 분묘조사 조선시대 무덤과 껴묻거리』 (2000), pp. 17-20, 38-39, 74-88, 120-123; 전주대학교박물관, 『전주류씨 진학재공파와 그 문화유산 : 무덤 조사 20주년 기념 도록』 (2019), pp. 32-43.
17) 『世祖實錄』 卷4, 2年(1456) 7月 28日; 『世祖實錄』 卷24, 7年(1461) 6月 4日; 다만, 이때 화종(畫鐘)은 그림이 있는 술그릇을 포괄적으로 이르는 단어이므로 자기가 아닌 금속기 등 다른 재질의 공예품일 가능성도 있다.
19) 전승창, 「조선 초기 명나라 청화백자의 유입과 수용 고찰」, 『美術史學硏究』 264 (2009), p. 38 <표 1>. 특히 선덕제의 자기 사여는 조선에서 중요하게 인식되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1428년(세종 10) 의 사은표전에서는 황제가 각종 자기를 보낸 것에 대한 감사를 표하였고 세종의 부고를 명에 알리는 글에서도 선덕제가 각종 사기그릇을 하사하였던 것에 대해 언급하였다(『世宗實錄』 卷41, 10年(1428) 7月 25日; 『世宗實錄』 卷127, 32年(1450) 2月 22日).
20) 명나라의 청화백자 사여와 조선 왕실의 문양자기 활용 확대에 관해서는 이미 선행연구에서 지적된 바 있다. 윤효정, 「朝鮮 15·16세기 靑畵白磁의 製作과 使用 : 문헌자료와 요지출토품을 중심으로」, 『美術史學硏究』 205·251 (2006), pp. 324-335; 김귀한, 「조선 세조~성종대 관요의 설치와 정비」, 『석당논총』 82 (2022), pp. 279-284. 윤효정은 의례기로서 청화백자의 사용 확대에 주목했으며 김귀한은 왕권 강화의 측면에서 관요 백자와 청화백자의 활용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제작과 소비는 매우 한정적으로 이루어졌다. 관련하여 한양도성 내에서 출토한 청화백자를 바탕으로 조선 전기 청화백자의 활용 양상을 파악한 근래의 연구를 참고하면, 청화백자로 주로 제작된 기종은 호와 전접시 정도이고 그 수량도 매우 적어 왕실을 중심으로 한정된 계층에서만 소비되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박정민, 「한양도성 내 ‘天·地·玄·黃’명 백자와 조선 전기 청화백자 출토 양상」, 『美術史學硏究』 319 (2023), pp. 89-96. 따라서 문양자기의 소비 확대를 청화백자만으로 충당하는 것은 불가능하였고 비교적 제작이 용이했던 선각·박지분청자를 비롯한 기타 문양자기가 그 대체품으로 활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15세기 후반을 중심으로 경기도 광주 관요 및 경상도 지역에서는 상감백자, 전라도 지역에서는 선각·박지분청자, 충청도 지역에서는 공주를 중심으로 철화분청자 등 다양한 문양자기의 제작이 시도된 것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23) 대표적인 연구는 다음과 같다. 김영원, 앞의 논문; 나상철, 앞의 논문; 김윤정, 「조선 15세기 중국 북방 자기 문화의 유입과 분청사기에 미친 영향」, 『美術史學硏究』 312 (2021).
24) 한성백제박물관, 『자기에 입힌 세상만사 자주요』 (2018), pp. 202-205; 김윤정, 「한반도 유입 磁州窯系 瓷器의 양상과 그 의미」, 『야외고고학』 39 (2020), pp. 58-62; 박정민, 「한양도성 내 조선 시대 유적의 시기별 중국 자기 출토 양상과 변화」, 『인문과학연구논총』 43 (2022), pp. 272-274.
25) 조선에서도 덤벙기법의 분청자가 제작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귀얄기법에 비해 시기적으로 후행하며 고흥 운대리 가마터나 보성 도촌리 가마터의 경우처럼 굽 안바닥까지 백토를 분장하여 외형적으로 백자와 구별할 수 없는 백색의 자기를 제작하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이 있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문양의 시문 과정으로서 백토를 분장하는 경우와 구분된다.
28) 이원택, 「조선 전기의 귀화와 그 성격」, 『서울국제법연구』 8 (2001), pp. 227-232; 김호철, 「조선초기 여진 귀화인 연구」, 『朝鮮時代史學報』 107 (2023), pp. 231-241, 257-260.
29) 인화분청자 제작 과정에서의 백토분장에 관해서는 박경자의 선행연구에서도 주목된 바 있다. 박경자, 「朝鮮 粉粧粉靑沙器의 變遷과 特徵」, 『동북아 분장분청사기의 변천과 고흥 운대리 분장분청사기의 의미』 (고흥군·민족문화유산연구원, 2017), p. 5.
30) 정형화된 양식의 공납용 인화분청자란 내, 외면에 문양의 단을 구획하고 인화문을 꽉 채워 시문한 것으로 대체로 발과 접시의 기종을 중심으로 확인된다. 박경자, 「공납용 분청사기의 통일된 양식과 제작배경」, 『미술사논단』 27 (2008), pp. 108-110; 공납용 인화분청자의 제작 시기에 관해서는 박경자와 김윤정의 견해를 참고하였다. 박경자, 「조선 초 인화기법 분청사기의 계통과 의의」, 『미술사학』 27 (2013); 김윤정, 「고려말·조선초 供上用 銘文靑瓷의 이행 과정과 제작 배경」, 『石堂論叢』 55 (2013).
37) 선행연구에서 오영인은 조선 초기에 제작된 일련의 음각운문청자를 전라도 일대에서 공납용 인화분청자를 제작한 가마에서 공납 혹은 상위 계층의 소비를 염두하고 제작된 지방색과 개성이 뚜렷한 양질의 자기로 보았으며 한양도성 및 지방의 관청과 사찰 등 한정된 공간에서 소비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오영인, 「음각운문청자의 제작현황으로 본 조선시대 관요의 설치와 지방 가마」, 『헤리티지 : 역사와 과학』 50 (2017), pp. 44-45. 다만 오영인이 만(卍)자형 운문으로 파악한 문양은 중앙의 꽃봉오리와 이를 휘돌아 감싸는 형태의 당초문이 함께 구성된 화당초문으로 국가의 의례서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는 문양이며 명 황실 소용 자기에 시문되는 영지형 운문과 함께 일정한 양식으로 시문된다는 점에서 필자는 운문청자를 지방색을 반영한 자기가 아닌 조선 왕실의 필요에 따라 제작된 별격의 자기로 추정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최서윤, 앞의 논문, pp. 144-147 참조.
38) 국립광주박물관, 『全南地方 陶窯地 調査報告Ⅱ』 (1988); 국립광주박물관, 앞의 책 (1993); 전남문화재연구원·곡성군, 『谷城 龜城里 陶窯地』 (2005); 전북문화재연구원, 『完州 花心里 遺蹟 : 완주 오케이골프장 조성부지내 문화유적 발굴조사』 (2008); 민족문화유산연구원, 『靈巖 上月里 柳泉 4號, 5號 窯場』 (2016); 문화재청·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호남의 자기소, 도기소 장흥도호부』 (2022).
39) 순천대학교박물관, 『靈巖 天皇寺 Ⅱ』 (1995); 목포대학교박물관, 『도갑사 대웅보전』 (2007); 중원문화재연구원, 『동대문 운동장 유적 : 동대문 역사문화공원 부지 발굴조사』 (2011); 겨레문화유산연구원, 『서울 효자동 유적』 (2015); 한울문화재연구원·강진군, 『康津 全羅兵營城 城內部 遺蹟 Ⅲ』 (2017); 동신대학교 문화박물관, 『금성관Ⅱ』 (2019); 청구고고연구원, 『서울 세운유적Ⅱ』 (2021) 등.
40) 조선 초기의 왕실 불사는 대체로 한양도성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일부 지방에서도 수행되었는데, 금강산 유점사(楡岾寺)나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월정사(月精寺) 등을 제외하면 대체로 전라도의 사찰에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사찰로는 영암 월출산의 도갑사, 월산사, 무위사, 화순 쌍봉사, 김제 금산사, 강진 만덕산 백련사, 부안 능가산 실상사 등에서 왕실 불사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목포대학교박물관, 『雙峯寺』 (1996), pp, 19-21; 김정희, 「孝寧大君과 朝鮮 初期 佛敎美術—後援者를 통해 본 朝鮮 初期 王室의 불사」, 『미술사논단』 25 (2007); 인용민, 「효령대군이보(孝寧大君李補)(1396~1486)의 불사(佛事) 활동(活動)과 그 의의(意義)」, 『禪文化硏究』 5 (2008); 엄기표, 「朝鮮 世祖代의 佛敎美術 硏究」, 『한국학연구』 26 (2012); 국립나주박물관, 『월출산』 (2015), pp. 91, 118-120; 김정희, 「조선시대 王室佛事의 財源」, 『강좌미술사』 45 (2015); 황인규, 「조선시대 금산사의 역사적 전개와 사격」, 『佛敎學報』 73 (2015).
41) 현재 조선 초기 왕실 내용 재산에 관한 정보는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특히 조선왕조실록의 15세기 기사를 보면 관청의 폐지와 합속(合屬) 등을 통한 재산 변동이 매우 빈번하였음을 알 수 있어 내섬시와 내자시 역시 비슷한 상황이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만 대략의 분포를 파악하고자 조선왕조실록의 15세기 기사 중 내자시와 내섬시의 노비 관련 내용을 정리하였으며, 외공노비의 거주지를 분명히 알 수 있는 사례는 3건으로 남원, 광주, 제주의 지명을 확인하였다. 『端宗實錄』 卷12, 2年(1454) 12月 7日; 『成宗實錄』 卷198, 17年(1486) 12月 1日; 『燕山君日記』 卷40, 7年(1501) 1月 30日. 극히 부분적인 정보이지만 전라도에 속하는 지명만 확인되어 내자시, 내섬시 소속의 노비 중 많은 수가 전라도 일원에 거주하였던 것이 아닌가 추정해 보았다. 왕실의 불사나 공예품의 생산 모두 재원의 확보는 중요한 문제이며 그 인적, 물적 토대가 갖춰진 지역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