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황실의 가신(家神): 경주백탑 천궁 출토 백의관음상 연구*
The Dynastic Deity of the Liao Imperial Family -The White-robed Guanyin Statue from the Heavenly Palace of the Qingzhou White Pago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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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요사』와 『거란국지』에는 요 황실 백의관음 신앙과 관련된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전하고 있다. 각각은 요태종이 목엽산 흥왕사에 백의관음상을 안치하고 황실의 가신으로 모셨다는 것과 흥종은 이에 더 나아가 국가 최고의 제사 제산의를 지낼 때 가장 먼저 흥왕사 백의관음상을 예배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본문에서는 이상의 기록과 흥종 연간 황실에서 발원한 경주백탑 출토 백의관음상을 연계하여 요 황실 백의관음 신앙의 전체적인 전개 양상, 조형적 특징 및 조형에 반영된 역사적, 신앙적 배경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태종의 백의관음 신앙 도입에는 요 경내 한인들의 민심 안정 목적이 있었으며, 흥종은 백의관음을 최고의 신으로 격상하여 민간은 물론 후기 황실 신앙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하였다. 특히 경주백탑 출토 백의관음상의 백의, 낮은 두관, 연봉오리 표현에는 불교 교리적 내용 이외에도 요 황실의 혈통, 고유 제의 습속과 특수 신앙 및 당대 연경 지역에서 비롯한 봉안 습속이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현존 작품 가운데 요 황실의 가신에 가장 부합하는 형상으로, 황실의 특수한 신앙에 정통했던 선연대사 온규의 고심과 노력이 고스란히 반영되었다 하겠다.
Trans Abstract
The Liao shi and the Qidan guo zhi contain intriguing records about the Liao imperial family’s faith in the White-robed Guanyin. One is that Emperor Taizong enshrined a statue of the White-robed Guanyin at Xingwang Temple in Mt. Muye and honored the bodhisattva as a dynastic deity who guarded over the imperial family. The other is that Emperor Xingzong had the statue worshipped before others during Ji shan yi, the most prestigious sacrificial ritual to Mt. Muye. This study linked these written records with the White-robed Guanyin Statue excavated from the Heavenly Palace of the Qingzhou White Pagoda, commissioned by the imperial family during the reign of Emperor Xingzong, and examined the overall development of the faith in the Liao imperial family and the statue’s style and historical and religious background. Consequently, this examination revealed that Taizong introduced the faith of the White-robed Guanyin to pacify the discontented Han Chinese population within the empire. Xingzong, in turn, elevated the deity to the supreme position. This move profoundly impacted the faith of the people and the imperial family in the late Liao. The statue from the Qingzhou White Pagoda, in particular, with its white robe, low crown, and lotus bud, does not stop at embodying the Buddhist teachings but also represents the intricate union between the Liao imperial family’s lineage, unique ritual customs, distinct faiths, and enshrinement rituals that originated from Yanjing area, present-day Beijing. Among the surviving examples, this statue is one that most closely follows the shape of the dynastic deity of the Liao imperial family, showing that it was likely created under careful considerations of the Great Master Xuanyan Yungui, who was well-versed in the particular faith of the Liao imperial family.
Ⅰ. 머리말
백의관음은 당말·오대 급부상한 신앙 대상이자, 요 초기 황실이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 및 장려했음을 단적으로 알려주는 중요한 존상이다. 『요사(遼史)』와 『거란국지(契丹國志)』에는 요 황실이 백의관음을 황실의 가신(家神)으로 독실하게 신봉한 사실이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샤머니즘을 신봉하던 요 거란인들이 백의관음을 가신으로 급속하게 신앙하게 된 것은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그리하여 일찍이 중국 역사학계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많은 논의가 진행되었다.1 그러나 백의관음이 황실의 가신으로 모셔졌다는 사실에만 주목할 뿐, 정작 황실의 가신으로 모셔졌다고 하는 백의관음상의 조형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리하여 필자는 요대 백의관음의 조상 사례와 기록을 정리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조형과 도상의 특징과 의미를 분석하고, 나아가 고려와 금의 조상에 미친 영향도 살펴보았다.2 그 과정에서 경주백탑 천궁에서 출토된 백의관음상(이하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이 당말·오대 백의관음의 전통적인 도상을 따르고 있지만, 유일하게 조형적으로 다른 특징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Fig. 1). 이 상은 요대 백의관음 신앙이 가장 절정에 이르렀던 흥종 연간 황실에서 직접 발원한 상으로, 매우 중요한 연구 가치를 가지고 있다.
의문이 드는 것은 마땅히 기존의 백의관음 도상을 가장 충실히 따라야 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상과는 확연하게 다른 독자적인 조형과 봉안 특징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현상은 요 황실과 민간에서 각기 유행했던 백의관음 조형이 다소 차이가 있었던 것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황실에서 가신으로 신봉한 백의관음상은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본문에서는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먼저 산재되어 있는 문헌 기록, 석각 자료 그리고 작품 실례를 종합하여 요 황실 내 백의관음 신앙과 발전 양상을 고찰하였다. 뒤이어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의 조형 특징을 세밀하게 분석하였으며, 이와 더불어 이러한 특징이 나타나게 된 역사적, 신앙적 배경을 구체적으로 살펴보았다. 이러한 시도는 요 황실의 백의관음 신앙과 조형의 특수성을 다각적으로 살펴보는 동시에 요 황실의 영향을 받아 장백산을 백의관음의 주처로 신앙했던 금나라 여진족들의 신앙 및 조형의 원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정한 의의가 있다고 생각된다.3
Ⅱ. 요 황실의 백의관음 신앙과 발전 양상
1. 요 태종과 목엽산 흥왕사
요사』 권1 「태조 상」과 『거란국지』의 기록에 따르면, 요 태조는 907년에 용화주(龍化州)에 개교사(开教寺)를 세웠으며,4 909년에는 한지고(韓知古)에게 명하여 용화주에 대광사(大廣寺)를 세웠다.5 또한 927년에는 발해를 평정하였으며, 서루(西樓) 즉, 요 상경에 천웅사(天雄寺)를 세웠다. 태조가 곳곳에 사원을 세운 것은 포로와 유민들이 안정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이민 정책의 일환으로, 요대 주현 배치와도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6 또한 태조가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다는 것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사례이기도 하다. 이러한 가운데 요 초기 황실은 관음을 신앙했으며, 특히 백의관음을 극진하게 신봉했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 두 기록을 통해서 명확하게 확인된다.
첫째, 『요사』 권3 「태종 상」에 의하면, 태종은 935년 흥복사(弘福寺)에서 황후를 위해 반승을 했으며, 아버지 태조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 어머니 순흠황후(淳欽皇后) 그리고 형 야율배(耶律陪)가 함께 보시한 관음 화상을 목도했다.7 이에 태종은 가족들과 함께 예배했던 옛 기억을 떠올렸으며, 세월이 흘러 혼자 관음상을 예배하게 된 것을 매우 슬퍼했다.8 비록 회상의 방식으로 서술되었지만, 요 황실이 관음을 신봉했음을 알려주는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둘째, 『요사』 권37 「지리지1」과 권49 「예지1」에 따르면, 태종은 꿈에서 본 신인(神人)으로부터 후진의 석경당(石敬瑭)을 중국 황제로 삼으라는 계시를 받았다.9 그후 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북경의 대비각(大悲閣)에서 신인의 모습과 닮은 백의관음상을 보았으며, 이를 목엽산(木葉山) 흥왕사(興王寺)에 모시고 황실의 가신으로 공경하였다.10 이와 비슷한 내용은 『거란국지』 권2에도 실려 있다.11 다만 태종이 유주성(幽州城)에서 대비보살상을 목도했다고 한 점이 『요사』 기록과 다소 다르다.12 두 기록은 모두 꿈을 매개로 전통적인 관음 신앙과 요 거란 황실 고유의 제의 습속을 결합하고 있다. 전체적인 내용은 매우 그럴듯하고 흥미롭지만, 현재까지도 규명하기 어려운 다음 두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먼저, 태종이 백의관음상을 옮겼다고 하는 목엽산의 실제 위치이다. 목엽산은 거란 민족의 성산이자 발원지로, 그곳에는 거란 시조의 사당이 건립되어 있었다. 요나라 역대 황제들은 모두 목엽산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친히 이곳에 행차하여 국가 최고의 제사인 제산의(祭山儀)를 지냈다. 『요사』권37 「지리지」1에 따르면, 승천황태후(承天皇太后)가 영주(永州)를 설치하였으며, 목엽산은 황하(黄河)와 토하강(土河江)이 합류하는 영주에 위치하고 있다.13 80년대 중국 학계는 이를 단서로 실제 목엽산 위치를 찾기 위한 많은 논의를 진행했다. 당시 거론된 곳은 내몽고의 옹우특기 해금산(翁牛特旗 海金山)14과 아로과이심기 동천산(阿魯科爾沁旗 東天山)15이다. 전자는 시라무렌강(西拉木倫河)과 라오허강(老哈河)의 합류처 부근에 위치하며, 후자는 오리지에무룬강(烏力吉木倫河)과 하헤이얼강(哈黑兒河) 합류처 근처에 있다. 이외에도 내몽고 파림좌기 조릉(祖陵)의 흑룡문 맞은 편의 만기알산(漫歧嘎山)이 거론되었으며,16 이는 태조를 목엽산에 안장했다는 『거란국지』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다.17 2000년 이후 중국학계는 목엽산의 실제 위치에 다시 주목하였으며, 기존의 후보지 외에 내몽고의 오한기 대흑산(敖漢旗 大黑山)18, 아로과이심기 천합융(天合隆)의 토산19, 파림좌기 해랄금산(巴林左旗 海拉金山)20과 길림성 쌍요대산(吉林省 雙遼大山)21 등이 추가적으로 거론되었다. 현재 학계에서 총 10곳이 거론되고 있으며, 정확한 위치를 찾기 위한 관련 연구와 노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Fig. 2).22
또 다른 하나는 태종이 연경 사원에서 친히 백의관음상을 목도했는가 하는 것이다. 이는 필자가 처음 제기한 문제로, 태종이 유주 대비각에서 백의관음상을 목도했다는 기록은 사실일리가 없다. 이는 백의관음상은 당말·오대 급부상한 신흥 도상으로, 당시 중원과 연경 즉 지금의 북경에서 유행한 백의관음은 두부에 백의를 덮어 쓰고, 양 손을 교차하여 염주를 든 모습이었기 때문이다.23 현존 이른 작품 사례로는 오대 시기의 항주 연하동 백의관음상이 있다(Fig. 3). 만약 상술한 두 문헌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적어도 937년 태종이 후진의 석경당을 황제로 책봉하기 전에 꿈에서 신인의 계시를 받았으며, 황제 책봉 후 노주(潞州)에서 돌아가는 길에 연경의 한 사찰을 들른 셈이 된다. 이는 916년 요가 건립되고 20년도 채 되지 않은 시기이다. 태종이 대비각에서 정말로 백의관음을 목도했다면, 그 상은 요대 새로 출현한 유형이 아니라 당말 오대 유행한 두 손을 교차하여 염주를 든 모습의 백의관음상이어야 한다. 게다가 태종이 정말로 그 조상을 목엽산 흥왕사에 안치했다면, 이 역시 동일한 모습이었을 것이다. 나아가 요 황실의 비호 아래 연경의 백의관음상을 모방한 조상이 요 전역에 제작 및 유행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 요 경내에서 유행한 백의관음상은 염주가 아니라 왼손에 연봉오리를 받쳐든 모습이었다. 현존 가장 이른 요대 백의관음상으로는 요 상경 한성 천웅사지 출토 백의관음상이 있다(Fig. 4)24. 현재 이 백의관음상의 두부는 유실된 상태이나, 20세기 초에 촬영된 사진을 보면, 두부에 원통형의 방한모(風帽)를 착용한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 앞에는 부채꼴 형태의 연주문(連珠纹)이 층층이 장식되어 있으며(Fig. 5),25 또한 발 아래에는 연화좌가 아닌 귀부좌가 설치되어 있었다. 전체적으로 전통적인 당·오대 백의관음상의 조형과 조금씩 차이를 보이고 있으며, 이러한 형상은 요 초기 황실에서 가신으로 모셨던 백의관음을 모방한 것이 아닌가 한다.26 이처럼 문헌 기록과 실제 정황이 불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태종의 꿈 고사는 단순히 전언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다만 전언은 태종이 목엽산 흥왕사에 백의관음상을 봉안한 사실에 기초하였기 때문에 당시 요나라 사람들도 이를 믿었으며, 후세 에도 이와 같이 전해졌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당시 왜 이러한 전언이 생산되었는가? 이와 관련하여서는 당시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태종이 이 존상을 목도한 시기는 바로 936년 태종이 석경당을 황제로 책봉하고, 그 대가로 연운16주를 할양받았을 때이다. 당시 연운 16주의 한인들은 거란의 통치에 격렬하게 항거하였으며, 이는 이후 8년이나 지속되었다.27 『자치통감(資治通鑒)』 권218과 권 282에 관련 기록이 남아 있으며, 이를 시간 순서대로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937년 태종이 운주(雲州), 즉 지금의 대동시 일대를 지날 때, 운주 판관 오만(吳巒)이 투항하지 않았으며, 운주성의 백성도 그를 지지하였다.28 오만은 태종의 명을 거부하고 성문을 잠갔으며, 태종은 여러 차례 성을 공격하였으나 매번 실패하였다. 또한 응주 마군도지휘사(馬軍都指揮使) 곽숭위(郭崇威) 역시 투항하지 않았다.29 941년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 안중영(安重榮) 역시 투항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겼으며, 거란 사신이 경내를 지나갈 때마다 다리를 쭉 벋고 앉는 예의 없는 자세인 기거(箕踞)를 하게 하였으며, 혹은 암암리에 죽여버렸다.3 이외에도 권284에 의하면, 941년 거란이 부주(府州)를 직접 통치하기 위해 지역 주민을 요동으로 옮기려 하였고, 이에 절종원(折從遠)이 이를 단호히 거절하고 되려 후진으로 귀부하였다.31 다음 해 석경당이 죽고, 그의 아들 석중귀가 후진의 황제로 등극하자 상황은 더욱더 악화되었다. 석중귀는 선제와 달리 거란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였으며, 이에 태종은 출병하여 후진을 공격하였다. 이와 같이 연운16주를 할양받은 이후 민심이 흉흉한 상황에 봉착하게 되자, 태종은 신인과 한인들이 신앙했던 백의관음을 동등하게 여겼으며, 이에 백의관음을 매개로 하여 흉흉한 민심을 가라앉히고자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현재 상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구체적인 내막은 알 수 없지만, 태종의 목엽산 흥왕사 백의관음 안치는 요 황실 고유의 습속은 물론 당시 정치적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정교한 선택이 아니었나 한다.
2. 요 흥종과 제산의
『요사』 권47 「예지 1」에 따르면, 태종을 시작으로 역대 황제들은 봄, 가을에 목엽산에서 제산의를 행할 때마다 흥왕사 백의관음에 재를 지냈다. 이는 태종이 국가 최고 제사인 제산의에 흥왕사 백의관음에 재를 올리는 예보살당의(詣菩薩堂儀)를 추가했기 때문이다.32 제산의는 목엽산 신수(神樹)를 지나 예보살당의를 행하고, 요하신(遼河神), 지신(地神) 등의 신을 예배하는 순으로 진행되었다.33 이렇게 요 초기 백의관음은 요 황실이 본래 신앙했던 샤만신과 함께 예배되었다.34 『요사』에 따르면, 역대 황제들은 총 33차례 목엽산 제사를 지냈으며, 그중 25번은 직접 목엽산에 행차하여 제산의를 지냈다.35 성종과 흥종은 이와 별도로 흥왕사 보살당에 친히 행차하여 백의관음을 참배했다. 성종은 983년 5월36과 1021년 1월에 흥왕사에 친히 행차하였으며,37 흥종은 1047년 11월에 흥왕사에 친히 행차했다.38 비록 남아 있는 기록은 적지만, 실제 참배 횟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처럼 역대 황제들의 흥왕사 백의관음상 참배가 제산의와 연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아, 백의관음은 황실은 물론 국가의 안녕과도 직접적으로 관련된 필수불가결한 숭배의 존상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요나라 황제 중에서도 이러한 백의관음을 가장 중시했던 이는 바로 흥종이었다. 흥종은 기존의 제산의 순서를 고쳐, 여러 샤만신 중에서도 백의관음에 가장 먼저 예배하도록 하였다.39 즉 흥종은 백의관음을 최고의 샤만신으로 승격했던 것이다.40 그리하여 1047년 서하와의 전쟁에 직접 참전하기 전에 앞서 목엽산 흥왕사의 백의관음상을 예배하였다.41 또한 죽기 1년 전인 1054년 10월에는 개태사(開泰寺)에 은관음상을 주조하고, 상경의 죄수들을 풀어주었다.42 흥종이 재위기간 내내 백의관음을 절대적으로 신봉했던 것을 고려하면, 개태사은관음상은 마땅히 백의관음상이 아닌가 한다. 이와 관련하여 『요사』 권62 「형법지 하」에는 흥종이 불교에 탐닉하여 은혜를 베푸는데 힘쓰고, 자주 조서를 내려 죄수를 사면하였다고 전하고 있다.43
흥종의 독실한 신앙은 황실은 물론 민간에도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는 1034년의 「진왕발원기념비(秦王發願紀年碑)」를 통해 명확히 확인된다(Fig. 6).44 여기서 진왕은 순흠황후의 아우 소아고지(蕭阿古只)의 5세손이자, 흥종의 생모 흠애황후의 동생 소효목(蕭孝穆)이다. 흥종과는 삼촌과 조카 사이면서, 동시에 아내 인의황후(仁懿皇后)의 아버지이다. 일찍이 여러 전장에서 공을 세웠으며, 흥종이 즉위하면서 진왕으로 봉해졌다. 절대권력을 누리던 황실 가문의 사람임에도 매사에 겸손하고 신중하여 국보와 같은 신하라 평가 받았다.45 두 아들 지족(知足)과 무곡(無曲)은 아버지의 병 쾌차를 기원하기 위해 연경의 사찰에 분향을 하고 관음상을 발원하였다. 그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의 병이 쾌차하자, 이를 기리기 위해 발원기념비도 세웠다. 비문에는 구체적인 존격이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두 손을 교차하여 염주를 든 백의관음상이 새겨져 있어 이들이 백의관음상을 발원했음을 알 수 있다.(Fig. 6)
3. 요 도종, 천작제 그리고 요 황성 서산 언덕 불사 유적
요 도종 역시 호불군주였다. 불교를 적극적으로 장려하였을 뿐 아니라 직접 교리를 연구하였으며, 『화엄경수품찬(華嚴經隨品讚)』 10권46과 『발보리심계본(發菩提心戒本)』 권을 저술하였다.47 그리하여 당시 금하사(金河寺) 고승 도진(道㲀)은 『현밀원통성불심요집(顯密圓通成佛心要集)』에서 도종이 말법시대에 현밀 양종을 유통하는 보살국왕이라 칭송하였다.48 도종 역시 백의관음을 신봉하였으며, 흥종이 개정한 제산의 순서대로 가장 먼저 흥왕사 백의관음을 예배하였다. 『요사』에 의하면, 도종은 1058년 10월,49 1074년 9월,50 1080년 9월에는 목엽산에서 친히 제산의를 지냈으며,51 1091년 11월에는 목엽산을 향해 제산의를 지냈다.52
비록 4건만 전하고 있지만, 도종이 흥왕사 백의관음상을 예배한 실제 횟수는 이보다 더 많을 것으로 생각된다. 2012년 요상경 황성의 서산 언덕 대탑 유적에서 출토된 백의관음상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입증해주는 중요한 실물 증거이다. 서산 언덕 유적은 황성 내에서 지대가 높은 곳으로, 오랫동안 초기 궁전인 일월궁(日月宮)으로 추정되었다.53 그러나 발굴을 통해 북원(北院)의 3개 건축 유적지 모두 불탑지임이 확인되었다.54 대탑을 중심으로 남북 양쪽에 두 좌의 소탑이 배치되어 있었으며, 모두 육각탑이었다(Fig. 7). 그 가운데 대탑 후실에서 두부, 하반신, 가슴 앞에 두 손이 소실되고 상반신만 남은 보살상이 출토되었다(Fig. 7).55 보존 상태가 양호하지 않지만, 세부 특징을 통해서 존명과 제작시기도 확인된다.56 보살상의 두 손목은 모두 복부 앞에 있으며, 가슴 앞에는 타원형의 파손된 흔적이 남아 있다. 이는 존상이 본래 왼손에 연봉오리를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이를 감싸고 있는 자세의 백의관음상이었기 때문이며, 요대 전 시기 이러한 백의관음이 압도적으로 유행했다. 이외에도 목에 걸린 목걸이와 백의 주름 표현이 도종 연간에 제작된 요녕성 요양 출토 백의관음상과 매우 흡사하다(Fig. 8).57 이것으로 도종 연간 대탑에 백의관음상을 봉안했으며, 백의관음 관련 불사 활동을 자주 거행했음을 알 수 있다. 제산의는 목엽산을 바라보면서도 거행되었으며, 대탑이 속한 황실 사원은 목엽산 제사를 지냈던 여러 특수 장소 중의 하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도 다음 두 석각을 통해서 도종이 직접 백의관음상을 발원하였음이 확인된다. 각각은 「대호천사 건사공덕주 전보살계 묘행대사행장비(大昊天寺建寺功德主傳菩薩戒妙行大師行狀碑)」와 「중도 대호천사 묘행대사비명병서(中都大昊天寺妙行大師碑铭并序)」58이다. 양자는 동일 비석의 앞뒤에 새겨져 있으며, 글이 새겨진 시기는 1180년(金 大定二十一年)이다. 그러나 전자는 1108년(乾统八年)에 저술되었으며, 후자보다 내용이 더 상세하다. 이에 따르면, 묘행대사 지지(志智)는 황족 출신의 거란 고승으로, 국구대승상 초국왕(國舅大丞相 楚國王) 소사온(萧思温)의 친족이었다. 말문이 트이지도 않은 3세의 나이에 이웃이 세운 불상 앞에 엎드려 경건하게 합장하여 범상치 않은 면모를 드러냈다. 1038년 15세가 되는 해에는 입궁한 보국대사 사효(輔國大師 思孝)에게 큰 가르침을 받고 출가하기로 결심했다.59 진월국대장공주(秦越國大長公主)가 출가를 강하게 반대하였지만, 그의 결연한 의지를 꺽지 못했다. 그리하여 1043년에 각 화도(覺華岛)로 건너가 사효를 스승으로 섬겼으며, 다음 해 구족계를 받고 정식으로 출가하였다. 또한 당해 진월국대장공주의 간언 덕택으로 흥종은 지지에게 계품을 주는 것을 허락하였다. 그 후 20년간 전국을 주유하였으며, 엄격한 수행 생활을 이어갔다. ‘묘행(妙行)’이라는 호는 이러한 수행태도에서 비롯된 것으로, 그는 세상의 명리에 구속받지 않았다. 심지어 도종이 자의가사를 하사겠다는 것도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059년 연경으로 돌아와 대장공주가 시주한 연경 자택에 사찰을 세웠다. 도종과 의덕황후(懿德皇后)가 18만관(贯)을 시주하였으며, 도종이 친히 ‘대호천사(大昊天寺)’라 쓴 편액을 하사하였다. 1067년 사찰에 화재가 발생하였으나, 의덕황후의 후원으로 재건하였으며, 사세는 한층더 높아졌다. 1093년 대사는 사찰 내에 6층 팔각 전탑을 세웠으며, 탑 안에 장육은불을 안치하고자 하였다.60 그러나 자금 부족으로 숙원을 이루지 못하고 원적에 들었다. 그러자 도종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등신의 금동관음상을 제작하여 안치하도록 했으며, 사찰에서는 남은 동을 가지고 동종도 제작하였다.61 마지막 황제 천작제는 바로 이 사찰에 천도단(超度壇)을 설치하여 도종을 추선하였다.62 비문에는 관음상의 구체적인 존격이 기술되어 있지 않지만, 요 황실에서 백의관음이 가신이자 국가의 안녕 과 직결된 중대하면서도 특수한 역할을 담당했던 것을 고려하면, 도종이 마땅히 백의관음상을 발원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이러한 소식은 민간에 널리 퍼졌으며, 경쟁적으로 백의 관음상을 제작하는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1099년(壽昌五年)의 「옥석관음창화시(玉石觀音唱和詩)」를 통해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63 이에 따르면, 1099년 흥중부의 천경사는 옥관음상 2존을 발원하였으며, 사문 지화(智化)를 포함한 25명의 인사들이 이를 찬탄하는 시를 짓고 읊었다. 그중 초정목(超庭睦)은 관음의 신력이 불가사의하여, 온세상이 기이함에 귀의하고, 사람들은 앞다투어 금으로 상을 만든다 하였다.64 또한 정약우(郑若愚)는 도종이 은관음상을 발원하였으며, 이에 고결한 이들(高人), 즉 천경사 읍사도 2존의 옥관음상을 제작하였다 하였다.65 이것으로 도종의 관음상 발원이 천경사 관음상 제작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음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당시 천경사가 발원한 관음상은 백의관음상 1구와 수월관음상 1구였다. 현재 백의관음상만 잔존하여 요녕성 조양시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Fig. 10).66 두부와 두 손에 든 지물은 파손되어 새로이 보수된 상태이다. 수월관음상은 이미 소실되었으나, 맹초(孟初)가 읊은 시 중에 “물은 달빛을 흔들어 주대를 비추고, 양류가지 하나가 빛을 엄하게 가리네”라 하여, 수월관음상임을 암시하고 있다.67 요 황실의 백의관음 신앙은 천작제 연간에서도 지속되었으며, 천작제 역시 제산의에서 가장 먼저 흥왕사 백의관음을 예배하였다. 1107년 11월에 친히 목엽산에 행차하여 제산의를 지냈으며68, 1110년 11월에는 목엽산을 행해 제산의를 지냈다.69
Ⅲ. 백의관음상의 조형적 특징과 배경
필자가 조사한 요대 백의관음상 사례는 31점이다<Table. 1>.70 제작 시기는 요 초기부터 요 말기까지 다양하며, 요 경내 각지에 광범위하게 분포하고 있다. 그중 경주백탑 백의관음상과요 상경 황성 서산 언덕 대탑 출토 백의관음상은 황실에서 발원 제작했다. 특히 전자는 요대 백의관음 신앙이 가장 고조에 이른 시점에 제작된 작품으로, 조형적으로 백의관음상의 보편적인 특징과 황실 특유의 독자적인 특징을 모두 가지고 있다.
경주백탑은 1047~1049년에 건립된 팔각7층누각식전탑으로, 장성황태후가 발원하였다. 건립 기간 내내 다수의 대형 공양불사가 거행되었으며, 불탑 완공 전의 거행된 불사에서 탑찰부에 다량의 장엄구와 공양물이 안치되었다. 그중에서도 천궁 5실에는 1좌의 사리탑과 108좌의 법사리탑이 출토되었으며, 조상으로는 유일하게 남실에서 석가불좌상과 백의관음상이 각각 1구씩 출토되었다. 백의관음상은 총 7cm 높이의 소상으로, 자색 빛을 내는 호박을 재료로 제작되었다(Fig. 1). 둥글고 앳된 얼굴에 가늘고 길게 눈을 뜨고 있으며, 오똑한 코에 작은 입술을 한 모습은 온화하고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또한 이마에 백색의 진주로 만든 백호가 감입되어 있어 광채를 발산하고 있는 듯하다. 두부에는 백의를 걸쳐 입었으며, 가슴 앞에서 왼손은 연봉오리를 받쳐 들고 오른손은 이를 감싸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요대의 다른 백의관음상과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세속적인 화려함은 적지만 대신 경건함이 증폭되어 있다. 또한 같이 안치된 수염이 표현된 남성적인 모습의 석가모니불좌상과 묘한 대비를 이루고 있다. 뿐 아니라 조상으로는 특이하게도 용이 새겨진 통형 대좌 위에 세워졌으며, 대좌 내부에는 인쇄본 다라니와 경권이 안치되어 있었다.73 이는 당시 거행된 의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며, 아쉽게 도 인쇄본은 출토된 이후 현재까지 공식적으로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다. 그리하여 본문에서는 백의 주름, 두부의 보관, 가슴 앞 연봉오리 표현 순으로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의 조형 특징과 조형에 내포된 역사적, 신앙적 배경을 분석해보고자 한다.
1. 백의 주름 표현과 회흘 마니교
백의는 백의관음의 가장 중요한 표식으로, 경전에 조형적 근거를 두고 있다.74 선무외(善無畏)가 한역한 『대비로자나성불신변가지경(大毗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75과 일행(一行)이 쓴 『대비로자나성불경소(大毘盧遮那成佛經疏)』76에는 백의관음이 두부에 깨끗한 비단(純錦) 혹은 백의를 두른다고 한다. 중당시기 지엄(智儼)과 온고(温古)등이 새로이 정리한 『대일경의석(大日經義釋)』에는 백의관음의 백색이 청청한 보리심을 상징한다고 한다.77 당말·오대부터 백의를 덮어쓴 모습의 백의관음이 조성되었으며, 요대 백음관음 역시 이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다만 실제 작품에서 백의는 백색이 아닌 재료 본연의 색으로 표현된 예가 많다.78 즉, 백색은 아니지만 백색이라고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경주백탑 백의관음상 역시 예외는 아니며, 백색이 아닌 재료 자체의 호박색으로 표현되었다.
요대 백의관음상은 대부분 얼굴 길이의 두 배 정도 높이의 원통형 고관을 쓰고 있다. 그 위에 덮어쓴 백의는 보관 정면에서 几자형의 각진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이는 백의를 먼저 보관 위쪽에서 접은 뒤, 그 양쪽을 다시 접어 생긴 주름으로, 당말 오대 백의관음상의 뒤집어진 U자형 주름에서 변화 발전한 것이다. 현존 사례를 보면, 각진 几자형 주름 표현은 요대 처음 나타나 후대에도 계속적으로 사용되었다. 요대 후기 백의관음상은 각진 几자형 주름 외에 세부 잔주름도 추가되며, 이러한 사례로 북경 수도박물관 소장 백의관음입상(Fig. 11)과 동경에 새 겨진 백의관음입상이 있다.
백의로 가려진 보관 사이로 보이는 화불, 운기문, 보상화문 등은 요 특유의 패기와 운치를 한껏 드러내고 있다. 특히 보관 하단의 양쪽으로 올라가는 운기문은 요대 백의관음상에서 자주 발견되는 중요한 표식 중의 하나이다.79 흥미로운 것은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에는 이러한 특징이 전부 생략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 존상은 요대 백의관음상 중 유일하게 고관을 쓰지 않은 모습이다. 측면에서 보면 두부에 대의만 걸친 것처럼 보일 정도의 낮은 관은 쓰고 있다(Fig 12).80 백의는 낮은 관을 전부 뒤덮고, 일자형으로 이마까지 가리고 있으며, 위쪽에는 반원형의 깊은 외줄 주름이 패여 있다(Fig. 13). 요대 백의관음상에서 백의는 대부분 보관 정면에서 각진 几자형 주름을, 후부에는 포물선의 중첩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81 이를 고려하면,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의 주름 처리가 요대 다른 작품과 현격하게 다르다는 것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그렇다면,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의 이러한 독특한 표현은 어디에서 기인하였으며,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두부의 반원형 주름 표현은 독일 베를 린박물관 소장 9세기 고창 회흘의 마니교 여신도의 모습에서 발견되어 매우 주목된다. 고창 교하고성(交河古城) α유지에서 출토된 직물에는 8명의 마니교 여신도들이 상하로 그려져 있다(Fig. 14). 모두 마니교도의 전형적인 복장인 백색의 옷과 관을 착용하고 있다. 백의는 관의 양쪽을 정점으로 하여 반원형의 주름이 중첩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비록 두부에 착용한 관이 백의에 완전히 가려져 있지만, 경주백탑 백의관음상 역시 동일한 주름이 형성된 것으로 보아 양자는 높이만 다른 동일한 구조의 관을 착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82 이외에도 고창 K 유적 출토 번 중에 그려진 회흘공주 역시 두부에 백관을 착용하고 있다(Fig. 15). 또한 얼굴의 양쪽에 머리카락을 늘어뜨리고 있으며, 이러한 표현은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에서도 발견된다. 고창 회 흘시기 작품 중에 그려진 백의관음상에서는 정작 이러한 특징이 발견되지 않아,83 회흘 마니교 도와 요대 백의관음상 간의 관련성이 더욱더 주목되는 바이다(Fig. 16).84
그렇다면, 이러한 두부 표현은 우연의 일치인가? 이와 관련하여 태조 아율아보기의 비인 순흠황후가 회흘 출신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요사』 권71 「후비」에 의하면, 순흠황후의 고조는 회흘인 유사(糯思)였다. 그의 후예는 거란에서 사리(舍利), 매리(梅里), 아잘할지(阿扎割只)등의 관직을 역임했다.85 회흘 출신의 순흠황후는 과단성이 있고 웅대한 지략이 있어, 전쟁 책략을 세우는 데 자주 참여하였다. 친히 군대를 지휘하여 황두(黄头), 취박(臭泊), 그리고 이실위(二室韦)를 공격하기도 했다.86 그리하여 황후는 일찍부터 큰 명성을 떨쳤으며, 후진왕 이존욱(李存勗)은 원조를 받으려 숙모로 섬기기까지 했다.87 무엇보다 태조가 사방을 개척하고 발해를 평정하는데 큰 힘을 보탰다.88 태조 사후에는 순사하려 하였으나, 백관들과 친척들이 극구 저지하여 오른팔을 끊어 관속에 넣어 태조릉에 안치하였다. 목종을 제외하고 역대 황제의 황후는 모두 순흠황후의 후손이었다.89 경주백탑을 발원한 흠애황후는 순흠황후의 아우 소아고지의 5세 손녀이다. 비록 문헌에는 구체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요 중기 황실 작품에 여전히 회흘적인 요소가 나타나는 것은 역대 황후의 혈통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외에도 요 상경성의 남문 동쪽에는 회골영이 설치되어,90 많은 회골 상인들이 상경에 거주하면서 거란인들과의 빈번한 교류를 한 것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91
2. 고관의 미착용과 고승 온규의 선택
『요사』에는 백의관음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보관을 착용했는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이에 반해 『거란국지』 권2 「태종사성황제 상」에는 태종이 유주성에서 대비보살을 목도하였으며, 두부에 관면(冠冕)을 착용하고 있었으며, 복색은 꿈에서 본 신인과 달랐다고 한다.92 이것으로 보아 요대 신인과 백의관음의 형상은 본래 완전히 일치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요 황실에서 실제 발원한 백의관음상과 요 초기 민간에서 널리 유행했던 백의관음상은 어느 정도 조형적 차이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현존 요대 백의관음상 중에서 경주백탑 출토 존상이 유일하게 두부에 높이가 낮은 관을 착용하고 있다. 측면에서 보면, 마치 두부에 아무런 보관을 착용하지 않은 듯하다. 필자는 이러한 모습이 바로 요 흥종연간 황실이 가신으로 받아들였던 백의관음 형상이 아닌가 한다.
주목되는 것은 이러한 모습이 조양북탑 천궁에 안치된 소형 보살상에서도 발견된다는 점이다.93 양자의 보관 표현은 매우 흡사하여 직접적인 연관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조양북탑은 1041년에 현 조양지역이 패주(霸州)에서 흥증부(興中府)로 승격되면서, 4년간 대중수된 불탑이다. 당시 흥종이 파견한 상경승록 온규(上京僧录 蕴珪)의 주도하에 여러 차례 성대한 공양불사가 열렸으며, 조양북탑 천궁에 각종 사리기와 공양물이 안치되었다.94 그중에는 본래 불탑에 안치되었던 것을 재안치한 3구의 보살상도 포함되어 있다. 각각은 북조 말기, 수말 당초, 그리고 당대 시기에 제작된 것이다.95 이중 수말 당초 시기의 보살상은 오른손에 양류가지를 들고, 왼손은 십엽형 보주를 쥔 모습을 하고 있다(Fig. 17).96 경주백탑 백의관음상과 마찬가지로 앳된 얼굴을 하고 있으며, 이마 중심에는 백호가 표현되어 있다. 또한 경주백탑 백의관음상과 마찬가지로 낮은 관을 쓰고 있으며, 머리에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있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수말 당초 보살상이 이러한 특징을 갖고 있는 것은 요대에 두부만 보수되었기 때문이다. 두부에 금박이 여전히 남아 있어 이러한 사실은 한눈에도 확인된다(Fig. 18).
이처럼 두 조상이 두부 표현에서 매우 유사성을 보이는 것은 동일 인물, 즉 선연대사 온규가 두 불탑의 공양불사를 주관한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는 1042~1044년에 상경승록의 신분으로 조양북탑의 대중수에 참여하였으며, 1047~1049년에는 경주백탑승록으로 경주백탑의 건립에 참여하였다. 두 불탑의 중수와 건립은 각각 요 흥종과 장성황태후가 발원한 황실 불사이다. 양자의 관계는 1034년 모후 장성황태후가 흥종을 폐위하려다 도리어 경주 칠괄궁에 유폐되면서 악화된 바 있다. 5년 후에 관계가 회복되어 장성황태후는 황궁으로 환궁하게 된다.97 두 불탑의 중수 및 건립은 장성황태후가 황궁으로 돌아온 이후에 진행된 대형 불사이다. 선연대사 온규는 양자로부터 시종일관 두터운 신임과 지지를 받았으며, 두 불사에 모두 주요 책임자로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두 불탑에서 출토된 주요 사리장엄구와 경전에는 모두 온규의 제기가 발견되었다. 구체적으로, 조양북탑 천궁에서 출토된 경탑 내부 3번째 금통에는 “重熙十二年四月八日午时藏, 像法只八年, 提点上京僧录宣演大師賜紫沙門蕴珪記”라 새겨져 있다.98 또한 지궁에서 출토된 석함에는 “提点前上京僧录宣演大师赐紫沙门蕴珪记”라 새겨져 있다.99 경주백탑 복발 내벽에서 출토된 『대승장엄보왕경육자대명다라니(大乘莊嚴寶王經六字大明陀羅尼)』에도 “上京僧录宣演大師賜紫沙門蕴珪施”라고 인 쇄되어 있다100 당시 온규의 직책, 이상의 장엄구와 경전이 불사에서 차지한 비중을 고려할 때, 선연대사 온규가 두 불탑 내 봉안 의식을 전체적으로 설계한 것이 명확하며, 이러한 이유로 인해 두 존상 사이에 도상의 연속성이 이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실제 조양북탑 대중수 불사에 온규의 제자들이 승장(僧匠)으로 참여하였으며, 천궁 석함 문판과 지궁 내 전석에는 이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101 이것으로 보아, 조양북탑 천궁 출토 보살상의 두부는 경주백탑 출토 백의관음상의 전신(前身)이라 할 수 있겠다.
3. 연봉오리, 불사리 및 육자대명다라니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은 가슴 앞쪽에서 오른손에 연봉우리를 들고 왼손으로 이를 감싸는 듯한 자세를 하고 있다. 이러한 표현은 일찍이 미국 프리어 갤러리 소장 북제시기 석조 보살상(Fig. 19)102과 펜실베니아대학 박물관 소장 북제 나한상과 보살상에서도 나타난다(Fig. 20).103 다만 이에 대해서는 이렇다할 구체적인 해석이 없으며,104 경주백탑 백의관음상 연봉오리 표현이 동일한 의미를 계승하였는지도 알 수 없다. 확실한 것은 역대 많은 관음보살상이 손에 연화를 든 모습으로 표현되었지만, 가슴 앞에 연봉오리를 든 백의관음은 요대 처음 나타났다는 사실이다. 필자가 조사한 31점 가운데 16점의 요대 백의관음상이 가슴 앞에 연봉오리를 들고 있다<Table. 1>. 이것으로 요대에 연봉오리를 든 백의관음상이 압도적으로 유행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요대 백의관음상이 가슴 앞에 연봉오리를 받쳐 들고 있는 의미를 무엇일까? 경전 중의 연화와 연봉오리는 광범위한 비유 및 상징 의미를 가지므로, 특정한 의미로 한정짓기 힘들다.105 게다가 현재 요대 백의관음상의 연봉오리에 관해서는 어떠한 구체적 기록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러한 가운데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의 연봉오리는 불사리와 관련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양자의 연결 고리는 백의관음상과 같은 남실에서 출토된 원목소선사리탑(原木素旋舍利塔)이다(Fig. 21). 원통형 단층소탑 형식으로, 탑신에는 어떠한 장식도 없다. 상륜부 역시 노반, 복발, 5개의 보륜 그리고 찰주로 비교적 단순하게 구성되어 있다.106 사리탑의 외면은 매우 소박하지만, 내부에는 사리가 담긴 연봉오리 형태의 사리병이 안치되어 있었다(Fig. 22).107 주목되는 것은 사리병의 기형이 백의관음상의 연봉오리와 완전히 일치하며, 재료 역시 호박으로 동일하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양자를 동일시하게 되며, 마치 백의관음이 가슴 앞에 사리를 안치한 연봉오리 형태의 사리병을 들고 있는 듯 하다.108 필자는 양자를 같은 곳에 안치한 것에는 당시 거행된 불사 의례의 특별한 의도가 반영되었다고 생각된다. 실제로 천궁 남실에는 석가불좌상 1구, 칠불이 새겨진 목제 법사리소탑 25좌도 같이 안치되어 있었다.109 즉, 경주백탑 천궁 5실 중에서도 남실은 사리, 법사리, 여러 조상이 함께 안치된 매우 특수한 공간이었다.110
현재 관음보살과 불사리 조합 관련 특정한 도상과 의궤는 알려진 바 없다. 이상의 특별한 안치는 특정한 경궤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요 중기 황실의 특수한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이외에도 백의관음상의 통형 대좌에는 「불형상중안치법사리기(佛形象中安置法舍利記)」과 「불설반야바라밀다심경(佛說般若波羅蜜多心經)」가 안치되어 있었으며, 현재 모두 전체 내용이 공개되지 않은 상태이다.111 백의관음상이 연봉오리 사리병을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대좌에는 법사리를 안치한 것은 흥종연간 백의관음의 위상이 최고의 신으로 높아진 상황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한다. 또한 이러한 안치를 결정한 사람은 바로 황실 신앙에 정통했으며, 흥종과 장성황태후로부터 동시에 추앙을 받았던 선연대사 온규였다. 실제로 대좌에 안치된 「불설반야바라밀다심경」에는 “慶州僧錄宣演大師 散施 麹舜鄉雕”라 하여, 온규가 경주승록의 신분으로 직접 보시하였음을 알려주는 제기가 새겨져 있다.112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은 선연대사 온규가 경주백탑의 복발 내벽에서도 1장짜리 『대승장엄보왕경육자대명다라니』도 안치했다는 점이다(Fig. 23)113 이는 온규가 경주백탑 건립에 앞서 상경승록으로 재직시 조판 및 인쇄된 것이다.114 여기에는 육자대명다라니를 서사 및 지송하게 되면 얻게 되는 공덕이 기술되어 있다. 이는 북송의 천식재(天息災, ?~1000년)가 한역한 『불설대승장엄보왕경(佛說大乘莊嚴寶王經)』권3의 내용을 압축 표현한 것이다.115 또한 오른쪽에는 서천대사 즉 천식재의 범탑과 이를 바라보는 아미타불이 그려져 있다. 범탑의 앞쪽에는 한자로 육자대명다라니 “唵(引)麼抳鉢訥銘(二合引)吽(引)”가 적혀 있다. 『불설대승장엄보왕경』권 3에 따르면, 육자대명다라니는 관음보살의 미묘한 본심으로, 만약 어떤 사람이 이를 지니고 염송하면, 셀수 없는 많은 수의 불·보살, 용왕, 삼십삼천, 사천왕, 야차, 제천신이 모두 모여서 염송자를 보호한다고 한다.116 온규가 이를 안치한 것으로 보아, 육자대명다라니가 당시 황실의 백의관음 의례와 연계되어 긴요하게 사용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비록 비공개 상태이지만, 백의관음상의 통형 대좌에 안치된 「불형상중안치법사리기」에도 육자대명다라니가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경주백탑 천궁 5실에서 출토된 105좌의 목제 법사리탑 내부에 조판시기와 분량이 다른 3종류의 「불형상중안치법사리기」가 안치되었으며, 그 중 2종류에 모두 육자대명다라니가 포함되어 있다.117
그러나 백의관음상과 불사리가 함께 조합된 것은 여전히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서는 이와 유사한 초기 형태의 신앙이 당나라 시기 연경의 민충사에 이미 형성되어 있었으며, 요대에 들어 황실과 민충사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가운데 요 후기까지 신앙이 지속적으로 심화 발전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요 초기 연경은 불교 문화수준이 가장 높았던 지역으로, 요 황실은 연경지역 사찰에 자주 행차하여 반승을 거행했다.118 민충사는 요 황실이 자주 반승을 거행했던 연경의 주요 사찰 중의 하나로, 『요사』에는 1042년 흥종과 흠애황태후가 성종의 모후인 선헌황후(宣獻皇后)의 기일에 민충사, 연수사, 삼학사에 반승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119 민충사를 중심으로 형성된 초기 신앙 형태과 요대 후기 심화된 신앙의 모습은 후술할 당대 석각과 1094년(大安十年) 요대 사문 선제(善制)가 쓴 「연경 대민충사 관음보살지궁사리함기(燕京大悯忠寺觀音菩薩地宫舍利函記)」를 통해서 명확히 확인된다.120 이에 따르면, 1094년 민충사 사문 선제는 대규모 읍사를 조직하여, 관음전 수월관음상의 지궁 내에 1만립의 사리를 안치하였다(Fig. 20). 수월관음상에 지궁이 설치되어 있다는 것이 다소 기이하게 들리지만, 이는 존상의 크기를 고려하면 쉽게 수긍이 된다. 「사리함기」에 따르면 수월관음상은 장중한 위엄과 기세가 있었으며, 높이가 100척에 달했다. 묘행대사 지지가 생전에 대호천사에서 건립했던 13층 석탑의 높이가 200여척에 달했다는 것을 고려하면, 대략 그 절반 정도에 달하는 수월관음상은 상당한 규모라 할 수 있다.121 이러한 수월관음상의 지궁에 사리를 안치하는 것은 요대 민충사 읍사의 숙원이었다. 883년(景福元年) 「중장사리기(重藏舍利记)」에 따르면, 수월관음상은 883년 민충사 관음각이 건립시 조성되었으며, 당시 수월관음상 앞에는 사리를 안치한 석함이 놓여져 있었다.122 또한 이 사리는 본래 602년 유주절작 보항(幽州节作窦抗)이 건립한 오층 목탑 내 안치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목탑은 834년 화재로 소실되었으며, 회창 폐불을 5-6년 겪으면서 복원되지 못했다. 846년 선종(宣宗)이 즉위하면서 불사리는 민충사 다보탑 내에 안치되었으며,123 892년에 민충사 다보탑에서 관음각 내로 이전되었다. 또한 이듬해 새로이 얻게 된 인수사리 1립을 유리병에 넣어 다른 불사리와 함께 관음상 앞 석함에 안치했다고 한다.
정리하면, 당대 민충사는 자체적으로 관음상과 불사리가 조합된 독특한 봉안 습속이 있었다. 요 황실관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민충사의 이러한 신앙은 요 흥종연간 백의관음상과 불사리가 조합된 특수한 신앙에 일정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 경주백탑 천궁 5실에서 출토된 목제법사리탑에서 1007년(統和二十五年)에 조판된 <불형상중안치법사리기>가 안치되었으며, 이를 필사한 이가 바로 민충사의 무애대사(無礙大師) 전요(詮曉)의 제자 지광(智光)이었다.124 1007년 조판본은 나머지 두 종류의 <불형상중안치법사리기>의 모본이 되었기 때문에, 이것으로 민충사와 요 중희연간 황실과의 긴밀한 관계가 명확하게 확인되는 바이다. 또한 민충사의 관음상과 불사리 조합 신앙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요 도종 연간에는 민충사 관음전 수월관음상의 아래에 지궁을 설치하고 불사리를 안치하는 형태로 심화 발전되었다. 현재 수월관음상은 소실되고, 지궁에 안치했던 사리석함만 남아 있으며, 이를 통해 고조된 요나라 신앙의 한 단면을 알 수 있다(Fig. 24) .
Ⅳ. 맺음말
본 논문은 기록이 남아 있음에도 학계에서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요 황실에서 가신으로 신봉되던 백의관음상의 모습과 성격을 규명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 먼저 흩어져 있던 요대 백의관음 관련 문헌 기록, 석각, 작품들을 종합 고찰하였으며, 이를 기초로 요 황실 내 백의관음 신앙의 전개와 발전의 주요 양상을 파악하였다. 또한 요 황실 내 백의관음 신앙이 가장 고조에 이른 요 중희 연간 황실에서 발원한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을 중심으로 황실 가신으로서의 조형적 특징과 이에 반영된 역사적, 신앙 의례적 내용을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요대 백의관음 신앙에는 기존의 불교 교리적 내용 외에 요 거란 황실의 혈통, 고유 제의 습속과 특수한 신앙, 그리고 당대 연경지역에서 비롯된 신앙이 황실과의 긴밀한 교류를 통해 정교하게 결합되어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특수한 조형과 신앙의 시작점이 된 목엽산 흥왕사 백의관음상이 현존하지 않고, 신앙의 성격을 분명하게 알려줄 수 있는 경주백탑 백의관음상 대좌에 안치된 다라니집선과 경전이 공개되지 않아 연구의 한계가 있었다. 본문에서 부족한 점은 차후에 자료가 공개되면 보다 진일보 된 심화 연구를 진행해보고자 한다.
Notes
요대 백의관음 신앙에 관해서는 松井宏, 「契丹人の信仰」, 『满鲜地理歷史研究报告』 第八(東京帝國大學文學部, 1921), pp. 177-213;이용범은 『요사』 권37 「지리지」와 「성종 본기」의 기록에 의거하여 요대 백의관음은 황실의 가신과 군신(軍神)의 성격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하였다. 이용범, 「遼代春游考」, 『東國史學』 제5호 (1957, 1), pp. 37-38;이용범, 「遼朝與回鹘人」, 『歷史學報』 11 (1959, 12), pp. 49-82; 陳述, 「遼代宗教史論證」, 『紀念陳垣誕生百周年·史學論文集』(北京師範大學出版社, 1981), pp. 300-339; 馮家昇, 「契丹祀天之俗與其宗教神話風俗之關係」, 『馮家昇論著輯粹』(中華書局, 1987), pp. 299-339; 박원길, 「거란(요)·여진(금)의 샤머니즘」, 『유라시아 초원제국의 샤머니즘』(민속원, 2006), pp. 201-235; 이외 백의관음 조형에 관한 논문은 潘亮文, 「白衣觀音像についての一考察」, 『佛教藝術』 231 (1997, 6), pp. 105-137; 李玉珉, 「中國觀音的信仰與圖像」, 『觀音特展』(故宫博物院, 2000), pp. 10- 39;Gridley, Marilyn Leidig, “A White-robed Guanyin as the embodiment of a Liao Ideal”, Orientations 32, no. 2(2001), pp. 47-50; 王振芬, 「耶律德光引进白衣观音辨識」, 『遼金歷史與考古國際學術研討會論文集(上)』(遼寧出版社, 2013), pp. 388-398; 成敘永, 「遼代白衣觀音造像研究」, 『東亞都城和帝陵考古與契丹遼文化國際學術研討會文集』 (科學出版社, 2016), pp. 427-461.
2013년 8월 <東亞都城和帝陵考古與契丹遼文化國際學術研討會>에서 「요대 백의관음조상 고찰(遼代白衣觀音造像考察)」의 전체 내용을 발표하였으며, 2016년에 논문집이 출판되었다. 成敘永, 위의 논문, pp. 427-461.
금대 백의관음 조형 및 장백산 백의관음 신앙은 위의 논문, pp. 449-452.
(元)脱脱, 『遼史』(中華書局, 2016), p. 2.
위의 책, p. 4.
野上俊静, 『遼金の佛教』(平樂寺書店, 1953), pp. 8-9.
“…幸弘福寺為皇后飯僧, 見觀音畫像, 乃大聖皇帝、 應天皇後及人皇王所施…(중략)…昔與父母兄弟聚觀于此, 歲時未幾, 今我獨來!, 悲歎不已…”. (元)脱脱, 앞의 책, p. 39.
918년 요 태조는 요 상경을 건설하고, 그곳에 공자묘, 사찰 그리고 도관을 세웠다. 이는 국가 사업의 일환이었으며, 홍복사 역시 이 기간에 건립된 사찰 중의 하나로 생각된다. 1930년 일본 고고학자 도리이 류조(鳥居龍藏)가 파림좌기 찰간합달공사 합바기(巴林左旗 查干哈达公社 哈巴氣)에서 흥복사 유적과 무구정광다라니경당을 발견하였다. 鳥居龍藏, 「遼上京城の南、 伊克山上の遼代仏剎」, 『鳥居龍藏全集』 第6卷 (朝日新聞社, 1976), pp. 166-175; 金永田, 「遼上京城址附近佛事遗址及火葬墓」, 『内蒙古文物考古』 3 (1984, 6), p. 94.
“…我夢神人令送石郎為中國帝…”. 脱脱, 앞의 책, p. 504.
“…太宗幸幽州大悲閣, 遷白衣觀音像, 建廟木葉山, 尊為家神……”. 위의 책, p. 929.
(南宋)葉隆禮, 『契丹國志』(中華書局, 2014), pp. 21-22.
『거란국지』의 기록은 『기이록(紀異錄)』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다. 또한 원대 웅몽상(熊夢祥)이 정리한 『절진지집일(析津志輯佚)』에 의하면, 『요사』에서 태종이 백의관음을 목도했다고 하는 대비각은 당대에 건립되었다. 요 성종이 이곳에서 비를 피한 인연으로 성은사(聖恩寺)로 이름이 바뀌고 중수가 이루어졌다. 이후 금 1149년에 재건되었으며, 원 1264-1294년에 중수되어 대비관음보살을 봉안했다고 한다. 두 문헌의 명칭 차이와 의미는 成敘永, 앞의 논문, pp. 428-429.
“…永州, 永昌軍, 觀察, 承天皇太后所建…(중략)…東黃河, 南土河, 二水合流, 故稱永州, …(중략)…有木葉山…”. (元)脱脱, 앞의 책, p. 504.
姜念思·馮永謙 외, 「遼代永州調查記」, 『文物』 7 (1982), pp. 30-34과 43;陳曉偉, 「契丹木葉山地望新探——兼談遼太祖阿保機葬所之傳」, 『漢學研究』(2017), pp. 291-312.
張柏忠, 「遼代的西遼河水道與木葉山, 永, 龍化, 降聖州考」, 『歷史地理』 12 (上海人民出版社, 1995), pp. 41-53.
赵評春, 「遼代木葉山考」, 『北方文物』 1 (1987), pp. 93-95;陳永志, 「關於遼代木葉山的再考察」, 『中國古都研究』 18 (2001), pp. 258-269.
“……九月, 葬太祖於木葉山…”. (南宋)葉隆禮, 앞의 책, p. 9.
葛華廷, 「遼代木葉山之我見」, 『北方文物』 3 (2006), pp. 77-86.
烏拉熙春, 「满文『遼史』の誤訳から論ずる— 「都庵山」 と 「陶猥思氏族部」を中心に」, 『爱新覺羅烏拉熙春女真契丹學研究』(松香堂書店, 2009), pp. 219-220.
王石莊, 「木葉山地望考」, 『社會科學輯刊』 2 (2013), pp. 69-172.
李鹏, 「遼代永州王子城, 龍化州與木葉山通考」, 『内蒙古民族大學學報』 6 (2016), pp. 1-8.
陳曉偉, 앞의 논문, pp. 291-295; 王禹浪·王俊铮, 「遼代木葉山地望研究述評」, 『满族研究』 1 (2018), pp. 58-63.
불공이 한역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대비심다라니(千手千眼觀世音菩薩大悲心陀羅尼)』에서 염주는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의 불구 중의 하나로 기술되어 있으며, 성당 시기 돈황석굴 205호 석굴의 서벽에 염주를 지물로 든 관음이 그려져 있다. 현존 당대 백의관음상 중 염주를 든 사례가 없으며, 12세기 일본 승려 심 각(心覺)의 도상집 『별존잡기(別尊雜記)』에 염주를 든 백의관음상 형상이 임모되어 있으며, 존명도 기록되어 있다. 당·오대 및 요 ·금대 염주를 든 백의관음 사례 및 기록은 成敘永, 앞의 논문, pp. 445-446과 451-452.
『요사』 권1 「태조 아율아보기 상」에 의하면, 천웅사는 요 태종이 두 곳의 제련소를 정벌하고, 승문(崇文)을 비롯한 그곳의 발해 승려 50인을 데려와 기거하게 했던 곳이다. 또한 요 초기 황실과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사찰로, 열고선간황제(烈考宣簡皇帝), 즉 태조 부친의 유상(遺像)이 봉안되어 있었다. 成敘永, 앞의 논문, pp. 442-443.
위의 논문, p. 443.
鳥居龍藏(1976), 위의 책, pp. 78-79
서병국, 『거란제국사연구』(한국학술정보, 2006), pp. 82-105.
“契丹主自上黨過雲州…(중략)…節度使判官吳巒…(중략)…眾推巒領州事, 閉城不受契丹之命, 契丹攻之, 不克…”. (北宋)司馬光, 『資治通鑒』(中華書局, 1976), p. 9169.
“…應州馬軍都指揮史金城郭崇威亦恥臣, 挺身南歸…”. 위의 책, p. 9169.
“…成德軍節度使安重榮耻臣契丹, 見契丹使者, 必箕踞慢罵, 使過其境, 或潛遣人殺之……”. 위의 책, p. 9222.
“……契丹慾盡徙河西之民以實遼東, 州人大恐, 從遠因保險絕之, 及帝與契丹絕, 遣使諭從遠使攻契丹…”. 위 의 책, p. 9273; 李裕民, 「折氏家族研究」, 『陝西師範大學學報』 2 (1998), p. 56.
“…於拜山儀過樹之後, 增詣菩薩堂儀一節, 然後拜神…(중략)…興宗有事于菩薩堂及木葉山遼河神, 然後行拜山儀, 冠服節文多所變更, 後因以為常…”. 脱脱, 앞의 책, pp. 928-929.
위의 책, pp. 928-929.
위의 책, p. 929.
김위현, 『거란사회문화사론』(경인문화사, 2004), p. 80 표3;山根弓果, 「遼諸皇帝の佛教受用の祭天地」, 『龍谷大學大學院文學研究科紀要』 33 (2011), pp. 60-68 표2.
(元)脱脱, 앞의 책, p. 1160.
위의 책, p. 1167.
위의 책, p. 1178.
위의 책, p. 929
이용범은 백의관음을 거란의 모든 샤먼신보다 우위에 둔 흥종 연간의 이러한 절차 개정이 요 거란 종교 상의 일 대변혁이라 하였으며, 절차 개정 이후 백의관음을 요 거란 최고의 신이라 하였다. 이용범(1957), 앞의 논문, p. 37 과 이용범(1959), 앞의 논문, p. 67.
성서영, 「망자의 추복과 국가 수호- 요 경주백탑 77좌 ‘무구정광소탑’과 근본다라니(根本陀羅尼) -」, 『동아시아불교문화』 48, 2021, pp. 329-330.
(元)脱脱, 앞의 책, p. 281
위의 책, p. 1045
陳育丞, 「記遼代石刻秦王發願紀事碑」, 『文物』 4 (1966), pp. 31-32.
(元)脱脱, 앞의 책, pp. 1465-1466.
위의 책, p. 303
『大正藏』 第55册, p. 1066a;『大藏經補編』 第26册, p. 126a
“…今居末法之中, 得值天佑皇帝菩薩國王, 率士之內流通二教…”. 『현밀원통성불심요집』, T1955, 46: 1004b
(元)脱脱, 앞의 책, p. 291
위의 책, p. 314.
위의 책, p. 323
위의 책, p. 338
金永田, 「九層台日月宫及太祖廟」, 『遼金史研究』 1 (2003), pp. 181-183
발굴 간략 보고서에 따르면, 대탑은 요대 처음 건립된 이래 두차례 중수를 거쳤으며, 금대 이후에 폐기되었다고 한다. 董新林 외, 「内蒙古巴林左旗遼上京皇城西山坡佛寺遗址考古获重大發現」, 『考古』 1 (2013), pp. 3-6
이외에도 대탑 전실에서 극사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는 얼굴 모습을 갖춘 소조 나한상 13점이 출토되어 2013년 중국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현재 정식 보고서가 출간되지 않은 상태이며, 나한상의 양식과 봉안 의미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고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현재 백의관음상 사진은 중국 고고 사이트가 발표한 2012년 11월 28일자 「遼上京考古重大發現——皇城西山坡確認佛教寺院遺址(2)」에만 공개되어 있다. http://www.kaogu.cn/cn/kaoguyuandi/kaogusuibi/kaoguhuaxu/2013/1025/33920.html
Gridley, Marilyn Leidig, 앞의 논문, p.47.
陳述 編, 앞의 책, pp. 299-302.
“…遇海山守司空輔國大師赴闕, 因得參覲, 及蒙訓教…(중략)…懇祈出家…(중략)…遂撒手渺雲海滄浪升鼇島, 依司空為師…”, 위의 책, p. 300.
“…大安九年, 於寺中庭, 師欲隨力崇建佛塔…(중략)…六簷八角, 高二百餘尺,…(중략)…先師在時, 欲於塔內鎔鑄丈六銀佛, 用五萬纔及萬餘, 所願未果而終…”, 위의 책, p. 302.
“…聖孝皇帝旨曰, 先師造像之銀, 朕欲鎔範等身觀音, 姑以金銅易像…(중략)…像成之日, 銅貨有餘, 復詔郢匠, 陶冶洪鐘, 銅斤巨萬…”, 위의 책, p. 302.
“…乾統初, 天祚皇帝以先師神速勝緣, 尚欠餘債, 其年, 追薦道宗仙度壇其所得貲八萬餘繈…”. 위의 책, p. 302.
위의 책, pp. 260-264.
“…觀音神力不思議, 舉世歸依頗異哉, 人各爭奇金作像…”. 위의 책, p. 261.
위의 책, p. 260.
필자는 2015년 10월 <遼代唱和詩 國際會議>에서 요대 백의관음 조상에 관한 발표를 한 바 있다. 당시 주아리(周亞麗) 선생님께서 천경사 백의관음의 사진을 제공해주셨다. 조양시립박물관은 수년간 폐관되어 조상을 전혀 실견할 수 없었던 차에 매우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셨으며, 이에 다시 한번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水摇白月晃珠台, 一支杨柳光嚴住…”, 위의 책, p. 262.
(元)脱脱, 앞의 책, p. 361.
위의 책, p. 362.
2013년 논문 「요대 백의관음조상 고찰」에서 25점의 작품 사례를 정리하였으며, 본 논문 <Table. 1>에서는 6점의 사례를 새로이 추가하였다. 각각은 요양박물관 소장 백의관음상, 조양시립박물관 소장 백의관음상, 객라심기(喀喇沁旗) 문물국 소장 백의관음상, 요 상경 황성 서산 언덕 출토 백의관음상, 길림성 백청시(白城市)와 유수시(榆樹市)에서 출토된 백의관음상이 있다. 요양박물관 소장 백의관음상은 요양시 서마봉진(西馬峰鎮)에서 촌민이 발 견 한 것이며, 관련 서적 및 정보는 요양박물관의 이지욕(李智欲) 연구원이 알려주셨으며, 지면을 빌어 다시 한 번 감사드린다. 馮永謙 외,『燈塔市歷史與文化』(遼寧出版社,2011),p.203과 도 86.
본 논문과 「遼代白衣觀音造像研究」 중의 도판 번호를 함께 표기하였다. 이전 논문의 도판은 괄호를 사용하여 표기하였으며, 나머지 도판은 지면의 한계로 출처를 표기하지 못했다.
본래 福井岡島紀念館(Fukui Okayama Memorial Museum of Japan)에 소장되어 있었으나, 1980년대 폐관되어 소장품이 日本福井県立美術館으로 이관되었다.
德新·張漢君·韩仁信, 「内蒙古巴林右旗慶州白塔發現遼代佛教文物」, 『文物』 12 (1994), pp. 20-23.
백의 표현과 의미 관련 수·당대 경전 기록과 당·오대, 북송 시기의 작품 사례는 成叙永, 앞의 논문,pp. 434- 435.
“…住於白處尊, 髮冠襲純帛…”.『대비로자나성불경신변가지경』, T848, 18: 6b.
“…譯云白處, 以此尊常在白蓮花中, 故以為名, 亦戴天髮髻冠, 襲純素衣…”. 『대비로자나성불경소』, T1796, 39: 632a.
“…右白處尊真言此是蓮華部母白是本淨菩提心…”. 『대일경의석』, X438, 23: 382b.
필자가 조사한 총 31구의 요대 백의관음상 가운데, 실제 백의가 백색으로 표현된 예는 각산사탑 1층 북면에 그려진 백의관음상이 유일하다. 이외에 비록 대부분 탈색되었지만, 숭복사 삼보전(崇福寺 三寶殿)에 있었던 백의관음상의 두부에는 백색으로 채색했던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상은 요대 삭주 시방원(朔州 十分院)에 있었던 상으로, 후대에 숭복사 삼보전으로 옮겨졌으며, 현재 산서성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상은 시방원의 도승정 운약(雲擢)과 신도들이 운제(雲齊)를 위해 발원한 상으로, 상의 뒷면에 관련 제기가 남아 있다. 成敘永, 앞의 논문, p. 432 와 도8
成敘永, 앞의 논문, pp. 439-441.
이는 2013년 필자가 파림우기박물관 답사시 경주백탑 출토 유물을 소개하는 전시장 영상의 한 장면을 촬영한 것이다.
후부에 포물선 주름이 표현된 요대 백의관음상으로는 북경고궁박물관 소장 백의관음좌상, 일본 빈송시(濱鬆市) 미술관 소장 백의관음입상, 미국 펜실베니아 박물관 소장 백의관음입상이 있다. 成敘永,앞의 논문, pp. 437-438.
A.V.Gabain는 베를린아시아박물관 소장 고창 α유적 출토 잔편에 그려진 마니교 여신도의 고관을 “Schleier v erhllte Kappe”(베일을 덮어 쓴 모자)라 하였다. Gabain, Annemarie von, Das Leben im uigurischen Königreich von Qoco(850-1250)(Harrassowitz in Komm, 1973), p.120; ‘Fez’는 일부 이슬람국가의 남성들이 쓰는 평평하지만, 술은 있고, 챙은 없는 빨간 둥근 모자를 말한다. Z. Gulacsi는 직물에 표현된 회흘 마니교 여성 신자들의 백의 주름 으로 보아, 이들이 Fez-like cap을 착용한 것으로 추측했다. Z. Gulacsi, Manichaean Art in Berlin Collections(Brepols, 2001), pp.182-183.
고창지역의 백의관음 작품 사례는 潘亮文, 위의 논문, pp. 125-128.
Wittfogel과 馮家昇은 Chavannes, P.Pelliot, Jackson의 마니교 연구 성과를 인용하여 요대 백의관음과 마니교의 관련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Chavannes와 P.Pelliot은 송대 마니교신도들이 백의관음을 마니처럼 여겼다고 한다. 이외에도 Jackson은 마니교의 12시간이 황도12궁에서 비롯되었으며, 『거란국지』에서 황후의 꿈 속에 출현한 12 동물은 마니교의 12시간과 관련 있다 하였다. 관련 연구 성과 내용과 출처에 관해서는 成敘永, 앞의 논문, p.456 각주 54
(元)脱脱, 앞의 책, p. 1319.
위의 책, p. 1320.
위의 책, p. 1320.
위의 책, p. 1320.
李符桐, 『回鹘與遼朝建國之關係』(京印書館, 1968), pp. 37-46; 蔡美彪, 「遼代后族與遼季后妃三案」, 『歷史研究』 2(1994), pp. 43-61.
(元)脱脱, 앞의 책, p. 499.
이용범, 「遼朝與回鶻人」, 『歷史學報』 11 (1959, 12), pp. 49-82; 杨富學, 「回鹘文献與回鹘文化』(民族出版社, 2003), pp. 22-23.
“…後至幽州城中, 見大悲菩薩佛相, 驚告其父母曰, 此即向來夢中神人, 冠冕如故, 但服飾不同耳…”. (北宋) 葉隆禮, 앞의 책, pp. 21-22.
遼寧省文物考古文物所·朝陽北塔博物館 編, 『朝陽北塔: 考古發掘與維修工程報告』(文物出版社, 2007), pp. 76-77.
조양북탑 천궁과 지궁에서 출토된 유물은 위의 책, pp. 63-106.
위의 책, p. 76.
위의 책, pp. 76, 78 도26.
(元)脱脱 等, 앞의 책, p. 250.
遼寧省文物考古文物所·朝陽北塔博物館 編, 앞의 책, p. 69.
위의 책, p. 85.
德新·張韓君·韩仁信, 앞의 논문, p. 31; 王珊·李曉岑·陶建英·郭勇, 「遼代慶州白塔佛經用紙與印刷的初步研究」, 『文物』 2 (2019), pp. 76-93, 96.
藤原崇人, 『契丹佛教史の研究』(法藏館, 2015), pp. 150-151과 171; 성서영, 「경주백탑 초층 탑신 팔대영탑 연구」, 『한국불교학』 13 (2022), pp. 186-187.
이와 관련하여 김리나는 프리어 갤러리와 펜실베니아 박물관 소장 보살상은 모두 보주 혹은 연봉오리 형태의 지물을 들고 있으며, 동일 계열의 두 북제 조각은 남조 양대에 많이 보이던 봉보주 자세의 보살상 형식의 맥을 이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전해져 아스카 시대와 사례라 하였다. 또한 이러한 형식은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 백제에서 유행하였으며, 한국화된 양식이 다시 일본으로 전해져아스카 시대와 하쿠호 시대 봉보주 보살상 양식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하였다. 김리나, 『한국고대불교조각사연구』(일조각, 1997), pp. 123-124.
後藤大用은 연화의 속성과 인도의 습속을 연결하여 연화의 상징 의의를 해석하였다. 後藤大用, 『觀世音菩薩の研究』(山喜房書林, 1976), pp. 100-104. 後藤大用의 관점을 빌어 요대 백의관음이 든 연봉오리가 아직 피지 못한 불성이라고 해석한 바 있다. 이외에도 연봉오리를 지물로 든 일부 요대 백의관음 좌상의 지물 표현과 자세가 『불공견삭신변 진언경(不空羂索紳變眞言經)』권8에 기술된 백의관음상의 내용과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成叙永, 앞의 논문, pp. 427-461.
石陽 編, 『文物載千秋』(内蒙古人民出版社, 2012), p. 218.
德新·張韓君·韩仁信, 앞의 논문, pp. 12-13; 石陽 編, 위의 책, p. 94.
경주백탑 백의관음상은 전체 높이 7센티미터이며, 손에 든 연봉오리 지물은 대략 1cm 미만으로 매우 작다. 이러한 이유로 동일한 형상과 재질의 사리병을 별도로 제작하여, 그 안에 불사리를 안치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연봉오리 사리병은 높이 9센티이며, 복부 지름은 4센티이다. 이외 2개의 사리병이 더 출토되었으며, 그 가운데 천궁 북실에서 출토된 장병사리은병(長瓶舍利銀瓶)의 높이 역시 9센티이다. 이외에도 천궁 5실에 안치된 107좌의 목제 법사리탑 중 18좌는 다라니 인쇄본 외에도 영감사리가 출토되었다. 이는 德新·張韓君·韩仁信, 위의 논문, pp. 12, 15와 25.
위의 논문, p. 29 표1.
위의 논문, p. 7 도 7.
간략보고서에서는 양자를 함께 무축다라니(無軸陀羅尼)라 명명하고 있다. 이는 함께 출토된 목제법사리탑 내부에서 자동(紫銅) 혹은 금동판을 축으로 하여 사리기와 다라니 인쇄본을 둥글게 말아놓은 기둥형의 장간다라니(棖竿陀羅尼)가 출토되었기 때문이다. 위의 논문, pp. 20-23과 31.
위의 논문, pp. 25-26과 31.
王珊·李曉岑·陶建英·郭勇, 「遼代慶州白塔佛經用紙與印刷的初步研究」, 『文物』 2 (2019), pp. 76-93와 96.
주 77.
『불설대승장엄보왕경』, T1050, 20: 59b.
“…此六字大明陀羅尼, 是觀自在菩薩摩訶薩微妙本心, …(중략)…若有人能而常受持此六字大明陀羅尼者, 於是持誦之時, 有九十九殑伽河沙數如來集會…(중략)…如是無數百千萬俱胝那庾多龍王而來衛護是人…”.『불설대승장엄보왕경』, T1050, 20: 59b.
경주백탑 천궁 5실에서 출토된 105좌의 목제법사리탑 내에서 「상륜당중다라니주」, 「사대주다라니주」, 「불형상중안치법사리기」로 구성된 장간다라니가 발견되었다. 이중 「불형상중안치법사리기」는 제목은 같지만, 조판 시기와 분량이 다른 것이 총 3종류로, 각각은 1007년(統和二十五年), 1021년(開泰十年) 그리고 1047~1049(重熙十六-十八年)에 조판되었다. 1007년에 조판된 1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체 내용이 공개된 상태이며, 모두 육자대명다라니가 포함되어 있다. 德新·張韓君·韩仁信, 앞의 논문, p. 31; 浙江省博物館 編, 『遠塵離垢:唐宋時期的寶篋印經』(中國書店, 2014), pp. 148-159; 성서영, 「요 경주백탑 천궁 출토 칠불법사리탑의 유형과 봉안 의미」, 『禪文化硏究』 32 (2022, 6), pp. 335-336 주7.
요대 연경의 불교는 野上俊靜, 앞의 책, 92-120
“…以宣献皇后忌日, 上與皇太后素服, 飯僧于延寿, 憫忠, 三學三寺…”. 脫脫, 앞의 책, p. 260.
陳述 编, 앞의 책, pp. 244-245.
“…秦越大長公主發心造十三級石浮圖一座, 高二百尺, 昊天寶塔…”. 위의 책, pp. 176과 301.
“…内藏一粒仁壽舍利也…(중략)…今又有二粒舍利…(중략)…今同收函內…(중략)…重閟于此觀音像前, 谷變陵摧, 猶憑刊石…”. 中國佛教圖書文物館 编, 『法源寺』(法源寺流通處, 1981), pp. 50-54.
비문에 따르면, 불사리는 각각 인수사리 1립, 탑함(塔函) 내의 1립, 금합 내의 2립, 유리병 내의 90여립이었다. 위의 책, p. 51
德新·張韓君·韩仁信, 앞의 논문, p. 31 요대 민충사, 무애대사 그리고 <불형상중안치법사리기>의 관계에 관해서는 별도의 논고에서 논의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