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더 관점에서 20세기 한국자수 고찰*
Rethinking the 20th-Century Korean Embroidery from Gender Perspecti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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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자수에 있어서 단절은 일제강점에 의한 전통자수의 단절이 주로 이야기되지만, 주요 ‘단체’와 ‘운동’ 중심으로 기술되어 온 한국 근현대 미술사 서술에 의한 단절을 부정할 수 없다. 여기에는 자수를 모더니즘 미학이 규정한 ‘순수예술’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포함하여 공예 내 위계, 그리고 전통과 현대, 서양(일본)과 동양(한국), 추상과 구상 등 한국 특유의 다층적인 이분법적 길항이 내재하고, 이 대립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젠더와 무관하지 않다. 본고는 지금까지 한국 미술사에서 주변에 위치한 19세기 말 이후 자수의 역사를 젠더 관점에서 통시적으로 살펴본다. 전통 사회에서 사적(私的)으로 제작, 향유되던 자수는 여성을 대상으로 한 공교육과 전시를 통해 공적(公的) 영역으로 이동하면서 본격적으로 근대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자수는 순수예술로 인정받기 위해 자수 특유의 공예적 특성을 포기하고 회화의 조형언어를 내재화했다. 해방 후 자수는 일제 청산과 민족성 정립, 산업화라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남성성과 결속된 추상자수와, 여성성과 결속된 전통자수로 양분되었다. 20세기 한국의 자수 작가들은 역사적 조건 속에 위치한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특정한 상황으로 인해, 또는 그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수가 지닌 예술적 가치를 신뢰하며 자수를 제작했다.
Trans Abstract
The rupture in the history of Korean embroidery is generally perceived as a severance from the traditional embroidery, made due to the Japanese colonial rule. However, it cannot be denied that the narrative of modern and contemporary Korean art history, mainly constructed around artistic movements and groups, also played a major part. The dispute encompasses the fundamental question of whether embroidery can be seen as a form of fine art from the perspective of modernist aesthetics, and the matter of hierarchy between different crafts. Also inherent are the tensions between contradictory values such as tradition and modernity, Western or Japanese and Eastern or Korean, abstract and figurative, and others peculiar to Korea, and the effects of such binary oppositions are closely related to gender problems. This paper re-examines, from gender perspectives, the chronological history of embroidery since the late 19th century, which had been placed on the periphery of Korean art history until now. In the traditional society, embroidery was produced and enjoyed privately, but moved into the public sphere through education and exhibitions for women during modernization. In the process, in order to be recognized as a form of pure art, embroidery gave up its unique characteristics as craft and took on the formative language of paintings. In the years immediately after liberation from Japanese colonial rule, which was the era of eradication of Japanese influences, establishment of national identity, and industrialization, embroidery was divided into abstract embroidery understood as more masculine, and traditional embroidery considered more feminine. Korean embroidery artists in the 20th century, as women experiencing particular historical contexts, worked with confidence in the artistic value of embroidery due to or despite their specific circumstances.
Ⅰ. 머리말
1971년, 미국의 미술사학자 린다 노클린(Linda Nochlin, 1931~2017)은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Why Have There Been No Great Women Artists?」라는 도발적인 에세이를 발표했다. 페미니즘 미술사의 신호탄이 된 이 텍스트에서 노클린은 미술사에서 위대한 여성 미술가들이 존재하지 않는 이유를 자궁의 여부가 아닌, 의도적으로 여성을 소외시킨 미술사의 남성 중심주의에서 찾았다.1 ‘위대함’, ‘창조성’, ‘천재성’이 철저히 남성 전유물로 담론화되었기에 여성은 미술사에 포함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후 1970년대 많은 페미니즘 미술사학자들이 미술사에서 잊혀진 이름을 발굴하는 데 주력했다면, 1981년 영국의 로지카 파커(Rozsika Parker, 1945-2010)와 그리젤다 폴록(Griselda Pollock, b.1949)은 공동저술한 『여성 거장: 여성, 미술, 이데올로기(Old Mistresses: Women, Art, and Ideology)』를 통해 미술사에서 누락된 여성의 이름을 찾아내고 감상적으로 그녀들에 대해 전기적(傳記的)으로 접근하는 대신 미술사에 내재된 구조적 성차별주의를 비평적으로 분석했다.2 그들은 서양미술사가 여성을 창의성이 부족하고, 반복적인 손기술에 의존하고, 감상적이고, 초상화나 정물화 등 가벼운 작업을 즐기고, 지적으로 왕성한 형태와 선 대신 감각적인 색과 패턴을 선호하는 등 부정적인 이미지로 전형화(‘feminine stereotype’)했다고 비판했다.
주지하듯 미술사에서 위계화된 가치평가 시스템에 토대를 둔 범주화와 차별은 소위 장식미술 또는 응용미술로 불리는 공예에도 적용되었다. 회화나 조각과 같은 순수미술, 고급미술과 달리 유용성이 중시되는 공예는 지적 노력보다 손기술이 필요한 영역으로 간주되며 상대적으로 저평가되었다.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 1834-1896)가 이와 같은 분리, 즉 순수미술과 공예의 구분이 르네상스 이후의 일임을 주목했다면, 두 저자는 여기서 더 나아가 순수미술과 공예의 구분에 젠더가 복잡하게 얽혀있음을 보여주었다. 대표적인 예로 미술과 공예에 대한 구분이 더욱 공고해지기 시작한 때가 여성의 역할에 대한 사회적 규정이 공고하게 된 18~19세기의 일이며, 자수 담론과 실천이 이러한 과정과 깊은 관계가 있음을 폭로했다.
3년 후 로지카 파커는 『여성 거장』에서 한 장만을 할애했던 자수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불온한 바늘땀: 자수와 여성성 만들기(The Subversive Stitch: Embroidery and the Making of the Feminine)』를 발표했다. 그녀는 르네상스에서부터 1970년대에 이르는 영국 자수의 역사 속에서 여성성이 어떻게 구축되었는지 심도있게 살폈다.3 이 책이 출간된 1980년 초 바느질은, 바느질에 저항하는 것이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성에 저항하는 것과 다름없었던 빅토리아 시대와 다른, 다층적인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제2 물결 페미니즘의 소용돌이 속에서 일부 여성 예술가들은 바느질을 포함한 여성적인 공예에서 견고한 가부장적인 억압에 대항하는 전복적인 가능성을 발견했고, 파커는 이 책을 통해 바느질에 내포된 양의성 즉, 억압의 도구이자 동시에 창조와 저항의 중요한 원천으로서의 특징을 강조했다.
백인 여성에 의해 쓰여진 위의 텍스트들은 아쉽게도 비서구의 맥락까지 다루지 못했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들이 세상에 나온 무렵 한국의 자수 담론과 실천은 어떠했는가? 이 시기 한국에서 자수는 페미니즘 운동과 무관하게 다음 주요 사건들이 암시하듯 전통의 맥락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허동화(許東華, 1926~2018)가 미술사학자 최순우(崔淳雨, 1916~1984), 민화연구가 조자용(趙子庸, 1926~2000)으로부터 조언을 받으며 1960년대부터 수집해 온 전통 자수, 보자기 등을 토대로 1976년 한국자수박물관을 세웠고, 이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구성된 《한국의 자수》 전시가 1978년 국립중앙박물관에서, 《한국의 옛자수(韓國の古刺繡)》 전시가 이듬해 일본에서 개최되었다. 목기나 자기만큼 열기가 뜨거웠던 것은 아니지만 앞의 전시를 기획한 최순우의 영향으로 이대원(李大源, 1921~2005), 김종학(金鐘鶴, b.1937) 등 화가들이 인사동과 장한평 등지에서 조선시대 자수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혼수와 예단으로 자수병풍 등이 인기를 끌었고, 1984년 한상수(韓尙洙, 1935~2016)가 국가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장으로 지정되고, 당시 진의종 국무총리의 부인 이학(李鶴, 1922~2004)을 회장으로 추대한 한국자수문화협회가 설립되는 등 일제강점 동안 맥이 끊기다시피 한 전통자수는 해방 후 ‘동양자수’로 불리며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이는 당시 자수 실천의 반쪽에 지나지 않는다. 20세기 초 이후 전통자수의 자리에는 서양과 일본 자수의 영향을 받은 근대자수가 들어섰고, 해방 후 자수는 급변하는 미술계의 흐름에 발맞추어 회화와 조각 못지않게 부단히 새로운 형식과 재료를 실험했다. 이러한 변화는 국내 유일하게 개설된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가 주도했다(Fig. 1). 이화여대 자수과는 1980년 ‘섬유예술과’로 그 명칭과 커리큘럼을 대폭 바꾸게 되는데, 이는 소위 포스트모던 시대의 도래와 함께 자수의 형식과 내용 역시 무한히 확장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이화여대 자수과가 국내 고등교육기관 내 최초의 자수 전공으로만 언급되지만, 실은 최초의 공예·디자인 또는 응용미술 교육이었고, 현대공예 교육의 시초로 간주되는 1960년 전후 공예·디자인 교강사 대부분이 타전공자(특히 회화)였던 것에 비해 자수과는 모두 자수 전공자였던 점을 고려한다면,4 자수과의 위상은 생각보다 중요하고 자수과의 통폐합은 현대자수의 사망 선고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미술대학에 자수 전공이 사라지자 섬유예술 내에서 자수가 차지하는 위상은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20세기 중후반 제작된 자수 작품 및 작가 연구는 진행되지 못했다.5 이에 비해 일제강점기에 제작된 자수에 대한 연구는 김철효가 실시한 일본 여자미술학교(이하 조시비(女子美)) 출신 작가 구술채록을 토대로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왔다.6 하지만 전해지는 작품이 드물고 소장처가 불분명하여 아쉽게도 대부분 사료 연구에 머무는 한계를 지닌다. 자수에 있어서 단절은 일제강점에 의한 전통자수의 단절만 주로 이야기되지만 실은 주요 ‘단체’와 ‘운동’ 중심으로 기술되어 온 한국근현대미술사에 의한 단절도 엄연히 존재한다. 여기에는 자수를 모더니즘 미학이 규정한 ‘순수예술(fine art)’에 포함시킬 수 있는가라는 기본적인 문제를 포함해 공예 내 위계, 그리고 전통과 현대, 서양(일본)과 동양(한국), 추상과 구상 등 한국 특유의 다층적인 이분법적 길항이 내재하고, 이 대립들이 만들어내는 효과는 젠더와 무관하지 않다. 자수는 한국 근대미술사라는 남성 중심적 대서사에서 변방에 위치한다. 하지만 어떤 현상 또는 사건이 일회적 혹은 미미하거나 변방에서 전개되었다고 해서 그것이 전체 역사에서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단정할 수 없다. 크게 드러난 목소리만큼이나 드러나지 않은 목소리들 역시 중요한데, 이 목소리들이 역사 이면의 현실적인 감각과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자수는 한국 근대미술사에서 드러나지 않은 목소리들 가운데 하나다. 자수를 살펴보는 것은 소외된 작가를 발굴하고 재평가하는 것 이상으로 미술사라는 거대서사의 틈새를 발견하고 새로운 맥락에서 서사를 재구성하여 그 지경(地境)을 확장하는 일이라 하겠다.
Ⅱ. 자수의 근대화: 공적(公的) 영역으로의 이동
“한 뜸 한 뜸의 바늘 자국마다 젊은 여인들의 순정이 사무쳐 있는 조선의 자수, 무슨 소망 같기도 하고 기도 같기도 한 절실한 마음이 오색 비단실을 줄 타고 올올이 스며든 곳. 이 조선의 자수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여기 무수한 정념의 바늘을 꽂았을 앳된 조선시대 여인들이 언뜻 내 가까이에서 차분한 숨을 내쉬는 것이다.”7
최근 조선 후기에 중국에서부터 비롯된 새로운 감상문화와 민간 수공업의 발달로 시정(市井)에서 자수를 전문적으로 제작하는 고공(雇工)의 존재나, 19세기 말~20세기 초 전문적인 남성 장인에 의해 제작된 안주수에 대한 연구가 발표되었으나8, 한국 사회에서 자수는 위의 인용에서처럼 일반 여성에 의해 수행되어 온 바느질로 간주된다. 특히 성리학을 기반으로 한 조선시대는 가부장제 아래에서 여성에게 제한된 성역할을 부여했고, 자수는 ‘부덕(婦德)’의 주요 요소 중 하나인 동시에, 장식적인 생활용품을 생산하는 여성의 가사 노동, 생계 수단이자 예술성을 발휘할 수 있는 소수 영역이었다. 궁(宮)에서는 남성 직업화가 또는 화원(畫員)이 그린 수본(繡本)에 침선 또는 수방(繡房) 궁녀가 감상, 의례, 장식 등의 목적으로 수를 놓는 분업이 이루어졌지만, 민간에서 자수는 대개 여성들의 생활공간인 안채, 즉 규방에서 제작되었다. 이 때문에 자수는 규방이라는 격리된 공간에서 여성들끼리 연대감을 도모하며 제작, 향유되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재료가 귀하고 제작에 많은 시간과 공력이 요구되며 본질적으로 장식적, 잉여적인 속성이 강하기 때문에 자수는 양잠, 길쌈, 봉제처럼 계층과 무관하게 수행된 보편적인 여기(女技)가 아니었다.9 또한 18세기에 완물상지(玩物喪志) 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하면서, 감상용 수첩(繡帖)이나 자수병풍 등을 소장하고 감상하는 행위는 남성에 의해서도 이루어졌다.
자수 제작이 계급과 무관하게 여성들에게 보편화되고, 제작과 향유의 성차(性差)가 공고하게 되는 것은 오히려 근대 이후의 일이다. 자수의 근대화는 도안이나 기법, 재료의 변화만큼이나 그 실천이 공적(公的) 영역으로 이동하는 데 있다. 주로 사적(私的) 영역에서 제작, 사용되고 가정 내에서 할머니와 어머니에 의해 전수되던 자수가, 19세기 말~20세기 초 학교령 공포와 함께 ‘수예(手藝)’ 중 하나로서 남녀 모두가 아닌 여성만을 대상으로 한 공교육의 핵심으로 부각된 것이다(Fig. 2). 당시 여성교육의 목적은 여성 해방과 독립이 아니라 “안으로는 현모양처가 되고 밖으로는 문명을 보완하는 기술자 및 교육자를 양성”하는 것이었고, 자수는 근대국가의 바람직한 국민으로서 여성에게만 부가된 노동이었다.10 당시 다양한 시각매체가 수예 또는 자수는 여성, 여학생의 일이라는 생각을 보편화하는 데 일조했다. 원래 ‘수예’는 수공예 기술 전반을 의미했지만, 1908년 무렵부터 여성의 수공예 특히 자수를 가리키는 말로 축소되면서 아마추어의 취미 활동 정도로 폄하되었다.11 이런 상황 속에서 미술을 공부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여성 대부분은 여자조시비학교 자수과에 입학했는데, 유학의 주된 목적은 전문적인 예술가가 되기보다 좋은 혼처를 얻거나 교사 또는 실용적인 직능인이 되기 위해서였다(Fig. 3). ‘직능인’과 달리 ‘예술가’는 의미상 ‘여성’을 내포할 수 없으므로 ‘여성 예술가’는 생각하기 힘든 존재였기 때문이다. 조시비에서 서양화를 공부한 나혜석(羅蕙錫, 1896~1948)의 조카 나사균(羅似均, 1913~2003)에게 부모가 제시한 일본 유학 조건은 화가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공적 영역으로의 이동은 자수가 전람회에 출품되며 더욱 활발해졌다12.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이하 조선미전)에 기존의 서예부(제3부)가 폐지되고 대신 공예부가 신설된 일은 생산(산업, 기예(技藝))과 창작(예술, 미술공예)의 갈림길에 있던 공예품이 미술공예로 거듭나는데 결정타가 되었다.13 ‘미술’은 문인의 여기(餘技) 또는 장인의 기술이 아니라 개성적인 근대인의 독창적인 표현으로 간주되었고, 그동안 ‘쟁이’로 인식되던 장인들이 공예가, 예술가로 불리면서 자수를 포함한 공예가 회화와 조각과 나란히, 오로지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전시라는 새로운 제도를 통해 대중과 만나게 된 것이다.
자수 제작과 향유가 공적 영역으로 이동하면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가치평가 기준이 적용되었다.
“작품의 대부분이 기술이 오히려 작품을 죽이는 것 같은 감이 있다. 순정 예술의 입장을 떠나서 오직 수지의 숙련으로만 제작하기 때문에 형체의 구성이며 문양의 고안이며 색채의 조화 등의 ‘디자인’이 몰각되고 표면의 고운맛(小キレナ)만을 내려고 노력하니 결국 작품을 잡고 만다.”14
평면적인 바탕 위에 선과 색으로 구성되는 자수는 회화와의 근친성으로 인해 도자, 금속공예, 목공예 등 다른 공예 장르보다 예민하게 회화를 인식할 수밖에 없었고, 회화에 필적하는 의장력과 독창성을 요구받았다. 전통적으로 자수는 새로운 도안과 기법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전형화된 도안과 기법을 반복적으로 사용해왔으나,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한 서구 모더니즘 미학이 보편적인 가치로 작동되면서 자수의 미적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특유의 정교한 솜씨나 기법, 색감, 용도 등은 고려되지 않았다.
때문에 근대 이래 자수 작가들은 미술공예로서 새로운 기준에 부합하는 사생, 창작 능력을 갖추고자 노력했고, 본인의 작품을 기존 도안을 그대로 사용한 작품이나 전통자수 등과 차별화시킴으로써 순수미술이 강조한 기준을 내재화했다. 이러한 태도는 학생 본인이 밑그림을 그리도록 가르쳤던 조시비의 자수 교육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소위 ‘조시비 자수’는 메이지유신 이후 구미 수출용으로 발달한 회화와 같이 세밀한 자수, 즉 ‘자수회화’를 모태로 삼았지만, 조시비 자수교육은 궁극적으로 당시 장인들이 분업하던 자수 제작의 모든 과정을 혼자서 행할 수 있는 인재 육성이 목표였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만큼이나 사생과 도안 창작 능력을 중시했다.15 그럼에도 당시 도쿄미술대학 교수이자 조시비에서 일본화를 가르쳤던 유키 소메이(結城素明, 1875~1957)의 <공작도>를 바탕으로 조시비 학생들이 공동제작한 자수작품이 샌프란시스코 만국박람회(1914)에서 수상한 사실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조시비에서는 화가가 자수 밑그림을 그리는 일에 종종 참여했다(Fig. 4). 이러한 분업은 19세기 중후반 수출용 자수 수요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제품의 질을 높이기 위해 유명 화가가 밑그림을 그린 일에서도 발견된다. 특히 시조파(四條派)나 마루야마파(円山派) 등 교토 화단의 일류 일본화가들이 밑그림뿐 아니라 수를 놓는 단계까지 감독하기도 했고, 이들의 참여는 해외에서 일본 근대자수의 위상이 높아지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조시비 자수 교육을 통해 전통을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세련되고 깔끔한 세필(細筆)의 사실적인 신일본화풍 자수가 보급되었을 뿐만 아니라, 화가에게 밑그림을 의뢰해 작품의 가치를 높이려는 태도 역시 수용되었다.16
대표적인 예로 숙명고등여학교 졸업반 학생들이 3년에 걸쳐 공동제작한 대형 자수작품 <등꽃 아래 공작>(1939)의 밑그림은 당시 그 학교 도화교사로 재직한 이영일(李英一, 1904~1984)이 지도했다(Fig. 5).17 그는 사실성과 장식성을 융합시킨 근대적인 화조화로 유명한 일본의 관변작가 이케가미 슈호(池上秀畝, 1874~1944)를 사사했는데, 슈호는 조선미전을 통해 시조파 화풍의 공작도를 조선에 유행시킨 인물이다.18 시조파 화풍의 공작도는 메이지기부터 수출용 자수의 대표적인 소재 중 하나였고, 공작도를 포함한 시조파 화풍의 화조도는 국내에 작품이 현전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조시비 비공식 졸업 사진으로 확인한 바, 조시비에서 그리고 당시 한국의 여학교에서 자수로 즐겨 제작되었다.19 이러한 맥락에서 조시비 사범과 자수부를 졸업한 박을복(朴乙福, 1915~2015) 역시 화가에게 밑그림을 의뢰했다. 아래 인용은 그녀가 회화와 자수를 완전히 독립된 영역으로 분리시킴으로써 회화에의 종속성을 인정하는 대신 둘 간의 위계질서를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20
“자수를 할 때 그 본은 여러 곳에서 뜨기도 하고 남한테 그림을 받아서 하기도 한다. 나는 그림 그리는 전문가가 따로 있는데, 자기 그림을 가지고 한다는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서, 그림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에게 밑그림을 맡겼다. 조선미술전람회에 냈던 <국화와 원앙>도 일본의 유명한 화가와 의논하여 제작한 것이다(Fig. 6).”21
20세기 초 서양에서는 표현주의자 칸딘스키(Wassily Kandinsky, 1866~1944)와 뮌터(Gabriel Münter, 1903~1920), 다다이스트 아르프(Hans Arp, 1887~1966)와 소피 태우버(Sophie Taeuber, 1889~1943)의 협업처럼 자본주의에 의해 촉발된 분절된 개인주의를 극복하고 순수미술과 장식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있었다.22 반면 위의 분업은 조선 시대 수사(繡師)와 화원과의 분업에 더 가깝다. 이는 당시 자수 전공자들이 순수예술(회화)과 공예(자수)의 위계라는 낯선 서구의 근대미학과 전통 사이에서 양가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해방 후에도 자수 작가들은 이상범(李象範, 1897~1972), 이석우(李錫雨, 1928~1987), 장운상(張雲祥, 1926~1982) 등 화가에게 밑그림을 받아 작업하기도 했다. 국가 무형문화재 1대, 2대 자수장 한상수, 최유현(崔維玹, b.1936) 역시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 추상이 미술계의 주류였던 시절에 그들 역시 추상 자수를 시도했고 김구림(金丘林, b.1936), 서세옥(徐世鈺, 1929~2020) 등이 그린 회화를 바탕으로 수를 놓았다(Fig. 7).
한편 자수가 여성 교육의 주요 과목으로 수용되면서 자수 도안집이 출판되기도 했는데, 이로 인해 자수를 배우는 학생들이 직접 밑그림을 그리는 일에 대한 부담을 덜 수 있었지만, 동일한 도안이 반복적으로 사용됨으로써 자수가 독창적인 예술로서 위상을 획득하는 데 걸림돌이 되기도 했다. 현재 김의식(金義植)이 집필한 『실용 자수임본(一)』(경성활문사, 1924), 김예식(金藝植)이 집필한 『자수임본』(동아부인상회, 1929) 등이 전해지는데, 형제 사이인 두 저자는 제1회 조선미전에서 사생력이 돋보이는 수려한 금강산 풍경으로 수상한 바 있는 동양화가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김의식이 국내에 최초로 설립된 미술학교인 경성여자미술학교를 세웠다(1926)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경성여자미술학교의 전신인 ‘여자미술강습원’의 설립 목적이 “조선여자의 가정부업과 수공장려”인 데서 알 수 있듯이 이 학교는 창의성보다는 기술 육성을 중시했고, 김의식 외에 조시비에서 자수와 동양화를 전공하고 갓 귀국한 장선희(長善禧, 1893~1970)와 경성여고보 기예과를 졸업한 박용일(朴容日)이 도화, 편물, 자수, 조화(造花)를 가르쳤다.23 정식 미술학교로 인가받은 후 교사진과 커리큘럼이 확충되어 김예식, 이영일, 도쿄미술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김주경(金周經, 1902~1981), 조시비에서 자수를 전공한 정희로(鄭嬉魯) 등이 도화, 동양화, 서양화, 미술사, 자수, 재봉 등을 가르쳤고, 매년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하는 전람회를 열어 대중에게 공개했다. 이들이 출간한 『자수임본』은 자수 도안집이면서 동시에 도화 및 동양화 교과서이기도 했다(Fig. 8). 도안은 난이도별로 수록되어, 1권(1, 2학년용)은 대나무, 난, 목단 등에서 백합, 양귀비, 나팔꽃 등 일본화에 종종 등장하는 화초들로 구성되었고 2권(3, 4학년용) 마지막은 금강산 만물상으로 마무리되었다. 여기서 근대기 회화(특히 동양화) 교육의 순서(사군자-화조-산수)가 자수에도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회화와 자수와의 근친 관계를 재확인할 수 있다.24
Ⅲ. 추상 자수: 남성적 영역에의 도전
순수예술로 인정받기 위한 공예계의 노력은 해방 후에도 계속되었고, 1970년 국전에서 공예부를 제외시키려는 움직임이 보이자 공예부 추천작가들이 이에 저항해 다음과 같은 건의서를 발표한 데서 정점에 이른다.
“공예가 ‘순수예술’이 아니라는 이유로 국전에서 제외하고자 하나 회화와 조각이 순수미술이라면 공예 역시 순수공예, 순수미술이다. 각각은 모두 다른 차원에서의 순수조형이다…국전의 공예는 일품공예, 순수공예로서 미술가와 마찬가지로 공예가의 조형충동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며, 발상에서 완성에 이르기까지 공예가 자신의 감성과 의지로 이루어지는 예술 활동인 것이다.”25
이 시기 순수예술의 규범은 ‘추상’이라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은 가장 진보적이고 현대적인 시각언어로서 세계적인 동시대성을 획득했고, 한국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서양화는 물론, 동양화, 조각, 그리고 공예 분야에서도 추상이 대세를 이루었다. 추상은 동시에 일제강점기의 관학풍 사실주의와 일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길이기도 했다. 특히 해방 후 전통의 계승을 숙명처럼 짊어진 동양화단에서 일제 청산은 다른 분야보다 절실한 과제였다.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이 탈피해야 할 일본색으로 거론한 특성 가운데 “하등의 감 정도 억양도 없는 인조 견실 같은 선조(線條)”가 당시 유행한 자수의 기본적인 특징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지 않더라도, 앞서 살펴본 것처럼 당시 자수는 회화, 특히 동양화(일본화)와 유사한 성격을 지녔기 때문에 해방 후 동양화의 향방은 자수 실천의 전개를 살펴보는 데 중요하다.26 동양화단에서는 채색이 왜색과 동일시되면서 수묵담채가 대안으로 떠올랐고, 대범하고 자유로운 필선이 강조되었으며 시대성이 요구되었다. 시대성은 내용적으로는 당대의 현실적 모티프의 선택, 형식적으로는 서구의 현대적 조형성, 즉 추상으로 구현되었다.27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가는 선’과 ‘다채로운 색’이 조형의 기본요소가 되는 자수가 선택한 길은 추상화(化)였다. 자수의 추상화는 자수 장르의 내적필연의 결과, 그리고 당대 서양이나 일본 자수의 영향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민족정체성의 회복’, ‘왜색 탈피’, ‘현대화’, ‘전통의 현대적 계승’ 등이 화두가 된 당시 특수한 시대적 맥락 속에서 순수예술과의 경합 과정에서 나타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1950~60년대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이하 국전)에 출품된 자수는 기법, 재료, 색채 등이 다양해지고, 십장생 등 전통적인 소재를 단순화시키거나 선(線)의 중첩, 화면 분할 등 당시 서양화와 동양화 분야에서 소위 ‘한국적 큐비즘’이라 불린 양식과 유사한 반(半)추상이 주를 이루게 되었다(Fig. 9). 1925년에 조선여자기예원을 설립하고 해방 후 이화여대에서 자수를 가르쳤던 장선희가 국전에서 주로 심사위원으로 활동했다면, 박을복 이외에도 조시비 출신 박여옥(朴呂玉, 1912~?), 김태숙(金泰淑, 1915~1997), 류충희(柳忠姬, 1918~?), 그리고 각각 이화여대와 숙명여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조정호(趙正鎬, 1914~1980), 김학기(金鶴基, 1917~1981) 등과28 이들보다 아래 세대로 서울대학교와 홍익대학교에서 응용미술을 전공한 이신자(李信子, b.1931)가 비교적 활발하게 국전에 참여했다(Fig. 10). 다음 기사를 통해 이들의 자수 작품이 도안, 구성은 물론 기법과 재료에 있어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글 구성>은 그 구도가 퍽 독특하였다.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여…재래식 메우기 위주의 자수법은 없었다. 그림 전체를 고운 숫실로 메워나가는 일은 시간을 너무 소비하게 하였고 새맛이 없는 것이라고. 여기서는 시간을 절약하여 미를 창조한다는 템포성과 현대감각에 호응하는 회화성을 강조하고 있다. 수는 삼각수, 육각수, 횡십자수 등을 구사하여 엉성한 가운데 여운의 미를 찾고 있다. 바탕천도 검은 공단 같은 비단만을 주로 삼던 것을 데크롱, 나이롱, 울 등…아프리케와 자수를 혼용한 기법도 재미있으며 <원의 구성> 같은 구도도 색다르다.”29
1960년대 이후 자수는 국전에서 점차 퇴조하기 시작했지만, 국전 밖에서는 추상실험이 보다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박을복은 올 간격이 넓은 삼베 원단에 굵고 거칠게 꼰 실을 사용해 마치 추상표현주의의 즉흥적인 붓질(stroke)과 드리핑(dripping) 효과를 연상시키는 작품을 선보였고, 이신자는 면, 마 등에 자수, 아플리케, 염색을 혼합하여 ‘섬유예술’이라는 용어가 없던 시절에 ‘자수’라 부르기 힘든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해 나갔다. 또한 이화여대에서도 조시비 출신 주순목(朱順穆, ?~2007), 이산옥(李珊玉, 1922~?)에 이어 김인숙(金仁淑, 1926~2020), 엄정윤(嚴丁潤, b.1927), 김혜경(金惠卿, 1928~2006) 등 자수과 1회 졸업생들이 같은 과 교수가 되면서 조시비풍에서 반추상으로, 그리고 더 나아가 특정한 외부 대상을 모티프로 하지 않는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화면 구성과 털실, 비즈 등을 사용한 풍성한 질감, 다양한 기법의 절충적 사용 등 다채로운 형식 실험을 도모했고, 녹수회(綠繡會), 현수회(現繡會) 등 활동을 통해 특유의 스타일을 공유하기도 했다(Fig. 11).
이 무렵 자수의 추상화에 있어 누구보다 주목한 만한 활동을 보인 이는 통영 출신으로 훗날 무형문화재가 되는 최유현과 함께 부산에서 1년 남짓 권수산(權壽山, 1903 이후~?)을 사사한 송정인(宋丁仁, b.1937)이다. 별도의 고등교육을 받지 않은 그녀는 부산에서 활동한 송혜수(宋惠秀, 1913~2005)에게서 회화의 기본을 배우고 대형 추상 자수를 제작해 국전과 상공미전에서 연이어 수상했다. 시인 조향(趙鄕, 1917~1984)은 송정인의 개인전(1966)을 관람하고 “자수예술계에서 하나의 ‘에폭’을 그을 수 있는 전람회라고 생각한다…전위적인 수법으로 처리된…송양의 그 대담한 운침(運針)이 드디어는 자수를 현대 예술의 광장에다 갖다 놨다”며 높이 평가했다.30 송정인은 ‘전통을 찢어버리는 자수’라는 비판을 받으면서도, 비단 대신 철망, 마대 등을 바탕으로 삼고 바탕천에 다양한 천조각을 이어 붙이고 그 위에 색실과 함께 밀집, 그물, 노끈, 쇠, 못 등 낯선 재료와 파격적인 기법을 사용해 “자연 풍경을 재현하기보다 정신풍경을 표현”하는 현대적인 자수를 제작하고자 했다.31 그녀는 “현대라는 극한상황에 놓여있는 인간은 이름 지을 수 없는 고독감, 그리고 불안과 위기의식, 초조와 부조리, 이율배반의 소용돌이 속에서 호흡하고 실재해 나가고” 있기 때문에 “유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현실을 응시하며 시간적인 여유를 갖지 못하는 예술가는 정적인 것에서 동적인 것으로 표현방법을 옮기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고, 다양한 색채의 삼각형, 사각형, 원 등 기하학적 형태들과 비정형적인 형태들이 다차원의 시공(時空)을 생성하는 듯한 2, 3백호 크기의 거대한 자수 작품을 발표했다(Fig. 12).32 송정인은 ‘작가의 뚜렷한 개성’과 ‘새로운 시대감각’을 내포하고, “뚜렷한 주제의식 밑에서 화면 구성의 적절한 처리, 그리고 시공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 또한 참신한 소재의 선택, 정발(精拔)한 테크닉 등”을 지닌다면 자수도 엄연히 현대예술의 한 장르임을 강조하면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으나, 안타깝게도 1991년 롯데백화점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6회)을 마지막으로 미술계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한국 근현대 미술에서 1950년대 중반 재야의 청년화가들이 반(反)국전을 내세우며 탄생시킨 무정형의 추상회화=앵포르멜이 혁명의 시대정신을 배태한 행위의 결과로 간주된다면, 이후 민족주의 이데올로기를 바탕으로 탄생한 소위 한국적 모더니즘=단색화로 불리는 추상과 전통 수묵화의 현대화를 꾀한 수묵 추상은 문인 정신의 현대적 발현으로 간주된다(Fig. 13).33 즉흥, 우연, 직관, 격정적인 붓질=남성적 제츠쳐 등이 강조된 전자의 형식과 태도를 따르자니, 가는 실을 사용해 사전에 준비된 밑그림의 면을 꼼꼼하게 메우는 자수는 제작에 기본적으로 필요한 정교함과 섬세함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34 또 추상이 단지 양식 문제가 아니라 우주 만물의 섭리를 깨치고 인격을 수양하는 문인 정신의 계승으로 이해되는 순간, 전통사회에서 사의적인 문인화의 주체가 될 수 없었던 여성의 공예, 즉 기교와 화려한 색감, 장식성, 실용성이 중시되는 자수의 추상화는 성립이 쉽지 않다.35 예술의 순수성, 자율성을 강조하는 모더니즘 미술, 특히 추상미술의 시대에 자수는 다른 공예보다 불안한 위치에 있었고 실제로 다른 전공에 앞서 대학에서 통폐합 대상이 되었다. 이화여대 자수과는 결국 “섬유의 종합적 조형성을 추구하는 시대적 변화에 따라” 1981년 섬유예술과로 명칭이 바뀌었고 자수는 미술계에서 점차 사라졌다.36 이는 장르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재료와 기법이 다양해지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동시에, “부계혈통의 내적 결속”을 토대로 세워진 추상 미학이 한국 미술계의 양식장(場)을 장악한 상황에서 오랫동안 여성의 활동으로 인식된 자수가 생존하기 어려웠음을 암시한다.37 예술창작의 근원적인 두 성향으로 ‘추상’과 ‘감정이입’을 논한 보링어(Wilhelm Worringer, 1881~1965)를 인용하지 않더라도, 추상은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럼에도 당시 한국 미술계에서 가치평가의 기준, 권력이 된 (한국적) 추상은 젠더 이데올로기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추상과 무관하게 전개된 전통자수만 공예로서 명맥을 유지한 점이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Ⅳ. 경제개발 시대 자수: 전통과 여성성의 결속
흥미롭게도 송정인은 전위적인 자수뿐만 아니라 전통자수에도 능했고, 오히려 후자로 어렵지 않게 가계를 꾸렸고 해외에서 초대전을 열기도 했다. 그녀는 결혼 직후 서울로 거처를 옮긴 1970년대 초, 한남동 자택에 ‘美수예실’이라는 소규모 자수교실을 열어 내국인은 물론 당시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 여성들에게 전통자수를 가르쳤고, 1976년에는 인사동에 ‘꽃가마’라는 전통공예화랑을 열어 본인의 전통자수 작품뿐만 아니라 칠보, 매듭, 나전칠기, 도자 등의 보급에 나섰다. 20세기 초 베를린 다다의 멤버 중 한 명이자 포토몽타주의 창시자였던 한나 회흐(Hannah Höch, 1889~1978)가 성차별, 인종차별, 정치적 부조리에 대항하는 다다이스트로서 활동하는 동시에 유명한 상업출판사에서 출간하는 자수·레이스 패턴 디자이너로 활동했던 것과 유사하게, 송정인은 추상자수와 전통자수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그리고 성공적으로 줄타기를 했다(Fig. 14). 그녀는 현대적인 자수작품은 회화와 마찬가지로 ‘독창성’과 ‘개성’을 표현하는 매체라 간주했기 때문에 철저히 혼자 작업하고 서명을 남겼다. 반면 전통자수, 특히 병풍, 활옷 등 대규모 작업은 작가가 기본적인 구성과 디자인을 지시하면 제자들이 몇 개월에 걸쳐 공동제작하고 끝마무리를 그녀가 맡는 분업 형태로 이루어졌고, 여기에는 작가가 별도의 서명을 넣지 않음으로써 전위적인 자수와 전통자수를 분명하게 구별했다.
주지하듯 근대 이후 미술작품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있어 제작자의 존재와 그 위상이 작품만큼이나 중요하다. 서명은 작품을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단순한 확인에 그치지 않고 작가 개인의 독창성을 담지한 작품과 작가를 동일시하는, 신성한 권위 부여 행위라 할 수 있다. 이 시기 제작된 전통자수의 경우 무명의 장인에 의해 제작된 조선시대 자수처럼 공동제작자들의 이름이 남아있는 예가 드물지만, 소위 ‘수모(繡母)’ 역할 여성의 서명이 표시된 경우는 종종 발견할 수 있다. 보통 기존 도안을 그대로 사용할 경우 보통 서명하지 않지만,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최유현은 이른 시기부터 창작자수, 전통자수 무관하게 낙관 형태의 서명을 사용했고, 조시비를 졸업하고 대구와 부산에서 전통자수 보급에 힘썼던 박순경(朴舜敬, 1914~2016)은 당시 유명한 동양화가의 산수화를 모방해 제자들이 수를 놓은 작품에도 마지막에는 자신의 서명을 남겼다. 수예학원, 자수학원 또는 자수협회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던 유명한 수방이나 이름 없는 수방에서조차, 수모가 전체적인 질과 디테일을 철저하게 관리했기 때문에, 동일한 밑그림을 사용했을 경우라도 색의 조화나 자수 테크닉 등이 각 수방마다 특징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미묘한 차이는 사소한 것으로 인식되었다.
당시 전통자수는 ‘동양자수’라 불리며 수출용, 혼수 및 예단용, 기념품용, 장식용 등 국내외로 수요가 매우 높았다. 전후(戰後) 제조업 발전에 필수적인 생산설비가 부족하고 내수사업이 침체된 상태였기 때문에 수출을 통해 외화를 확보하는 일이 우선시되었고, 정부는 조국근대화라는 기치 아래 단순 노동력에 의해 생산 가능한 소비재 중심의 경공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가내수공업을 장려했다. 자수를 포함한 전통공예는 지방 경제를 살릴 수 있는 지방특산품이자 한국적 정체성을 드러내는 관광상품이라는 점에서 주요한 수출 품목으로서 제작이 독려되었다.39 1966년 최초로 개최된 전국기능대회에 자수 종목이 포함되었고, 1980년대에 중국과 동남아 국가들이 저렴한 인건비를 무기로 자수 산업에 참여하고 기계자수가 들어서기 전까지 자수 기능인이 3000명 이상으로 추산될 정도로 자수 산업이 활기를 띄었다.39
국가무형문화재 자수장 한상수와 최유현도 시작은 전통자수 기술자 양성과 보급 및 자수상품 판매였다. 한상수는 부산 피난 시절에 조시비 출신 조정호를 사사하고 자수계에 발을 들이고, 종묘제례악이 제1호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지 20여 년이 지난 1983년 “여성들의 취미 정도로 취급받은 자수를 공예예술의 반열에 올려놓은 공을 인정받아” 자수장(80호)이 되었다. 그녀는 기능인을 양성하려는 국가의 장려에 따라 1961년 조계사 인근에 한상수 수공예학원(1963년 수림원(繡林苑) 사립직업훈련소로 개칭)을 설립했고(Fig. 15), 1970년대부터 전통자수 유물과 관련 자료를 수집해 연구서를 발간하고 기법의 명칭을 정리했으며 불교자수를 비롯해 궁중자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유물을 재현했다. 한편 부산 혜화여중 등에서 수예교사로 재직하던 최유현도 교직을 떠나 1963년 부산 광복동에 수예학원(최유현 자수연구소)을 개원했다. 같은 해 개최한 전시가 성황을 이루자 관광객을 대상으로 원생들이 제작한 전통공예품을 판매하는 부산민예사를 운영하게 되었고, 국가 차원의 관광업 활성화에 힘입어 1972년 경주에 신라민예사로 재개장하는 등 사업은 계속 번창했다.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병행하던 그녀는 1970년대 중반부터 언론인이자 민속학자인 예용해(芮庸海, 1929~1995) 영향으로 한국 문화예술의 정수가 불교에 있음을 깨달으면서 불교자수에 눈을 돌리게 되고, 1980년대에는 불교자수로 대한민국 전승공예대전에서 여러 차례 수상했다. 그리고 자수에 입문한 지 50여 년이 지난 1996년 국가 무형문화재로 인정받는다.
이처럼 자수는 “고전적인 동양 민속을 표현”하는 제품으로 “해외 성과가 점차 높아져” 가는 대표적인 전통공예로 인식되었는데, 특히 매스컴을 통해 “여성 특유의 섬세한 예술”이자 ‘어머니에게서 딸에게로’ 이어지는 ‘고답적’이면서도 ‘우아함과 품위’를 지닌 수공예로서, ‘여성이면 누구나’ 특히 ‘알뜰한 주부’라면 도전할 수 있는 최상의 부업으로 반복적으로 소개되었다.40 1950년대가 전쟁, 가난, 정치사회적 혼란 속에서 많은 여성들이 가장의 빈자리를 대신해 생산 노동에 참여했다면, 1960~70년대는 경제성장과 함께 노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소위 ‘전업주부’가 탄생한 시기였다. “되도록이면 가정주부는 직업을 갖지 않는 것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나 이(利)가 있을망정 해(害)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여성의 사회진출은 아내와 어머니의 직분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했다.41 이때 국가가 의해 독려한 여성의 부업 가운데 자수가 있었는데, 여기서 자수는 일본을 통해 수용된 서구화, 일본화된 근대자수나, 추상화된 현대자수가 아니라 전통자수였다는 점이 흥미롭다.
“수는 다소곳한 안방 예술입니다. 수를 놓는 여인의 남편이나 자기 자녀를 위한 정성이 바늘의 뜸뜸마다 다소곳이 깃들여 있어요. 그것은 바깥으로 내놓기보다 안으로 스며들어가는 정서라고나 할까요.”42
“수천수만의 여염집 딸들과 며느리들의 순정”으로 만들어진 조선시대 자수가 모범으로 제시되었고, 전통자수를 통해 “모든 소녀들에게 필수적인 정신수양”과 ‘숙련된 기술’, 즉 ‘참을성’, ‘세공(細功)의 미덕’, ‘침묵’, ‘성실’, 사랑하는 이들을 위한 ‘봉사’ 등의 자질을 얻을 수 있다고 소개되었으며, 전통자수 제작자들은 대개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모습으로 이미지화되었다.43 이 무렵 자수 제작자는 다양한 계급과 연령층의 여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자질을 지닌 현대적 현모양처로 묘사되었다. 민족문화 중흥을 강조했던 유신 체제 아래서 현대적인 현모양처상은 전통적인 여성을 매개로 구축되었고, 신사임당이 대표적인 인물로 소환되었다.44 신사임당 기념화는 민간차원에서도 이루어져 김활란(金活蘭, 1899~1970)이 이끈 대한주부클럽연합회는 1969년 신사임당의 날을 지정하고, 또 ‘가도(家道)’에 밝고 ‘부덕(婦德)’에 힘쓰며 ‘서화(書畫)’에 능한 여성들에게 심사임당상을 수여했다.45 또한 자수 분야를 포함한 가정주부 대상 기능대회를 현재까지 개최해 오고 있다. 여성의 공적 참여를 통제하는 가부장제 이데올로기 아래에서 전통자수는 여성이 한편으로는 전통에 대한 안목을 갖춘 교양있고 조신한 여성이라는 가부장적 사회가 요구하는 바를 따르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을 부양하고, 특정 기술을 지닌 전문가로서 사회적으로 인정받으며, 국가 및 사회에 대한 책임과 사명을 다하는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는 양가적인 공간이었다.
또한 국가 무형문화재조차 자수가 “하나의 독립된 예술 세계”로, 자수가가 “수놓는 기술자에 그치지 말고 혼을 불어 넣어 주제 의식을 작품에 제대로 구현하는 작가”로 인정받기 위해 여전히 고군분투하고 있음을 고백한 데서 짐작할 수 있듯이,46 전통자수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순수미술 영역뿐만 아니라, 추상자수, 섬유예술 영역과 끊임없이 인정 투쟁의 장에 있었다. 순수미술 영역에서 남성들이 구축한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 의식 없이 여성다움과 여성적 감수성 표현에 머문 여성들의 미술을 이른바 ‘여류미술’이라 칭한 일과 유사하게,47 전통자수는 이중 또는 삼중의 분리와 배제, 중복을 겪어야만 했다.
Ⅴ. 맺음말
20세기 이후 한국에서 자수는 마치 역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처럼 사람들의 관심 밖에 놓였던 것이 사실이다. ‘자수’하면 으레 전통자수를 떠올리기 십상이다. 그리고 무형문화재와 작가 생전 본인의 이름을 내건 자수박물관을 개관한 박을복을 제외하면, 자수 작가는 일찍이 일본 유학을 다녀왔건, 대학에서 가르쳤건, 무형문화재를 사사했건, 기능공이건, 대개 무명의 장인으로 남아있다. 자수 작가의 작업이 미술사가 요구하는 한 편의 모노그래프(monograph) 또는 카탈로그 레조네(Catalogue Raisonné)를 만들 수 있을 만큼 개성적이거나 독창적이지도 않고, 발전성을 가지고 전개되지도 않았기 때문이라고 별 의심없이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20세기 한국자수는 서구 및 일본과 다른 겹겹의 역사적, 문화적, 미적 층위를 지닌 채 한국의 특수한 사회적 상황과 미술계의 흐름에 기민하게 대응하면서 변화해 왔다. 본 연구는 근대 이후 자수 실천이 근대화, 교육, 창작, 노동, 기술, 산업, 직업, 전통 등 주요한 문제들(젠더 이데올로기와 복잡하게 얽혀있는 다양한 사회경제적, 문화예술적 문제들)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역동적으로 전개되었음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20세기 한국 자수가 겪은 불연속적인 역사를 단순히 제도 또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차별과 배제로만 보지 않고 자수 작가들이 주어진 제작 환경과 어떻게 협상, 수용, 절충했는지 고찰했고 이를 젠더 관점에서 해석하고자 했다. 자수 작가들은 서구에서처럼 자수를 투쟁과 저항의 매체로서 사용하지 않았지만, 역사적 조건 속에 위치한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특정한 상황으로 인해, 또는 그 상황에도 불구하고 수를 놓았다.48 투쟁과 저항의 미술만이 유의미하고 가치 있는 예술로 보려는 태도 역시, 미술사를 새로움을 추구하는 진보적인 역사로 간주하는 기존의 규준과 마찬가지로 인간 조건의 다양성을 놓치게 만든다. 자수 작가들은 역사 밖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역사 안의 다른 위치에서 끊임없이 목소리를 내었다. 향후 이 목소리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찾아내 다성(多聲)의 미술사를 구축해야 할 터인데, 이는 무엇보다 정치(精緻)한 작가 연구가 있어야 비로소 가능할 것이다.
Notes
린다 노클린, 이주은 역, 『왜 위대한 여성 미술가는 없었는가? (1971)』 (서울: 아트북스, 2021).
Rozsika Parker & Griselda Pollock, Old Mistresses: Women, Art, and Ideology (1981) (New York: Bloomsbury, 2021).
Rozsika Parker, The Subversive Stitch: Embroidery and the Making of the Feminine (1984) (London: I.B.Tairis, 2010).
허보윤, 「한국 현대공예 교육의 시작과 그 특성」, 『미술사학』 55 (2020), p. 40.
현대자수를 포함해 자수는 회화, 조각은 물론 도자, 금속공예 등에 비해 주목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최공호에 따르면 1945년부터 2007년까지 출판된 공예사 논저 1773편 가운데 대다수가 도자와 금속공예를 다루고, 48편의 섬유공예 관련 연구 중 자수 관련 연구는 12편에 불과하다. 최공호, 「한국 공예사학의 장르관습과 위계구조」, 『한국미술사교육학회지』 21 (2007), p. 377.
삼성문화재단 한국미술기록보존소 편, 「해방이전 일본에 유학한 미술인(Ⅱ), 동경여자미술학교 수학자들」, 『한국 미술기록보존자료집 2』 (2003); 김철효, 「근대기 한국 ‘자수’미술 개념의 변천」, 『한국근대미술사학』 12 (2004); 김주현, 「여성공예와 한국 근대자수: 페미니즘 예술개념을 위한 비판적 분석」, 『한국여성학』 25(3) (2009); 임소영, 「한국 근대 섬유공예 연구: 자수미술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김철효, 「구술사를 통해 본 20세기 한국의 자수 미술가들」, 이화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학센터, 『여성의 눈으로 보는 근대기의 여성 자수』(2011); 최보람, 「한국 근대 자수공예 연구」, 홍익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13); 권혜진, 「한국 근대 자수문화 연구」, 『복장』 63(8) (2013); 김소정, 「한국 근대 자수교육에 관한 연구」, 한국전통문화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권행가, 「미술과 기예의 사이: 여자미술학교 출신의 여성 작가들」, 『신여성 도착하다』 (국립현대미술관, 2017); 이성민, 「한국 근대 자수교육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1).
최순우, 「이조의 자수병풍」, 『여원』 (1964. 4), 「조선의 자수병풍」,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 (서울: 학고재, 1994), p. 40.
양수정, 「18세기 이후 자수와 제작가에 관한 제면모」, 『미술사학』 54 (2020); 김우경, 「근대 자수천수관음보살도의 양상과 조성배경」, 『한국미술사교육학회지』 39 (2020); 김수진, 「19-20세기 평안도 안주 자수의 성쇠와 그 의미」, 『대동문화연구』 119 (2022). 김수진이 논의했듯이 19세기 말~20세기 초 평안남도 안주 지방 남성 자수 장인들의 존재가 갑자기 부상된 것은 교통의 발달과 자수 병풍의 국내 수요 증가 등의 이유도 있겠지만, 만국박람회 등을 통해 근대적 기술 및 상품으로서 자수와 직조의 위상을 재고하게 된 고종이 일본의 예, 즉 메이지(明治) 시기 일본 정부의 식산흥업 정책을 등에 업고 고가의 수출품으로 등극한 소위 ‘자수회화’를 제작한 남성 장인들의 존재를 발견하고 이를 조선에서도 실현하고자 했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20세기 초 조선 왕실 초상 사진 배경에 등장하는 일본식 자수병풍에 대해서는 김수진, 「근대 전환기 조선왕실에 유입된 일본 자수 병풍」, 『미술사논단』 36 (2013) 참조. 당시 일본 수출 자수 중 많은 부분은 교토 다카시마야(高島屋) 백화점 내 자수공방에서 고용한 남성 장인들에 의해 제작되었고, 이러한 역사로 인해 일본에서는 자수를 제작하는 남성의 존재가 한국에 비해 익숙하다. 현재 일본의 자수 인간문화재 역시 남성이다. 20세기 초 자수병풍은 당시 다카시마야에서 수출한 자수병풍일 가능성이 높기에, 향후 19세기 말~20세기 초 조선왕실에 헌상된 안주수와 다카시마야 제작 병풍의 관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일본 메이지기 수출자수, 자수회화에 관해서는 松原史, 「近代’刺繡繪畵’の誕生: 近代的特徵と前近代からの系譜」, 『ART RESEARCH』 13 (2013); 中川麻子, 「明治時代後期における’刺繡’の誕生と發展」, 『デザイン學硏究特輯號』 19-4(76) (2012) 참조.
검약을 숭상하고 여공(女功)을 강조한 조선시대에 “아름답게 무늬를 내고 새기고 아로새기는 자수(錦繡纂組)”는 금제(禁制) 대상이었으므로, 주로 왕실과 지배층의 지위와 권위를 상징하는 의장(意匠)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그 지위에 따라 계서적(階序的)으로 사용되거나 불교의 전례로서 공덕(功德)의 매체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18세기 이후 일부 계층의 호사(豪奢)였던 자수는 점차 계층적으로, 지리적으로 저변화되었다. 양수정, 「조선 17세기 자수그림의 전승과 이행」, 『미술사학보』 48 (2017) 참조.
김철효, 앞의 논문, p. 105에서 재인용.
최공호, 『산업과 예술의 기로에서: 한국근대공예사론』 (서울: 미술문화, 2008), pp. 57-59.
자수가 최초로 전람회에 출품된 것은 제1회 시카고 만국박람회(정식 명칭은 ‘World Columbian Exposition, Chicago’, 1893)로 추정된다. 공식도록에 의하면 조선은 농산물, 수산물, 원예물, 광산물, 교통과 운수, 공예와 제조품, 교육, 임산물 등 분야에 출품했고, 『고종순종실록』에 출품사무대원 정경원(鄭敬源, 1841~?)의 보고에 따르면 이 가운데 천문발, 자개장과 함께 자수병풍이 외국인들에게 크게 관심을 얻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관련해서는 김영나, 「‘박람회’라는 전시공간: 1893년 시카고 만국박람회와 조선관 전시」,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13(2000) 참조. 이후 국내에서 열린 박람회에도 자수품이 전시되었는데, 강씨 집안 내에서 귀하게 전해지던 십장생 자수첩 <전가진완(傳家珍玩)>이 1915년 조선총독부 시정(始政) 5년 기념으로 열린 조선물산공진회에 처음으로 일반에게 공개된 일은 대표적인 예라 하겠다.
근대기 ‘기예’에서 ‘미술공예’로의 변화에 대해서는 최공호, 앞의 책 참조.
선우담, 「혼란, 모순 제12회 朝美展 2부, 3부를 보고(五)」, 『동아일보』 (1933. 6. 3).
조시비의 자수 교육에 관해서는 大﨑綾子, 「'女子美刺繡'硏究: 草創期資料から讀み解く松岡冬の敎育活動」, 『女子美術大學硏究槪要』 52 (2022); 「女子美術學校と刺繡敎育」, 『女子美術大學硏究槪要』 52 (2022); 「女子美術學校における刺繪畵-刺繡技法, 材料, 年代について」, 『服裝文化學會誌』 15(1) (2014) 참조.
세필로 그려진 채색화를 공필화(工筆畵)라 한다. 신일본화의 영향을 받은 중국의 공필화가 가운데 진지불(陳之佛, 1896~1962)은 도쿄미술학교 공예도안과를 졸업하고 도안과 공필화조도 두 방면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는데, 1954년 소주(蘇州) 자수연구소가 세워졌을 때 이곳에서 제작되는 자수품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다수의 공필 화조화 화고(畫稿)를 제공하기도 했다. 배원정은 공필화조화가 단순, 반복, 과장 등 도안적 특성을 갖추기 있었기에 자수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었음을 지적한다. 배원정, 「20세기 중국의 工筆花鳥畵 연구」, 홍익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2017), pp. 154-157.
「고등여학교편 (1)숙명고등여학교」 『동아일보』 (1939. 2. 7). 근대기 도화교사는 서양화 출신이 많았는데, 여학교에는 재봉, 자수 등 여성 교양의 신장에 도움이 될 만한 종류의 도화를 필요로 했기 때문에 일본화 전공자를 채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이영일은 1935년부터 1943년까지 숙명여고에 근무하면서 제자들의 조선미전 출품을 독려하여 입선자를 다수 배출했다. 김소연, 「한국 근대 ‘동양화’ 교육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pp. 102-104.
20세기 한중일 공작도 유행에 관해서는 배원정, 「근대 여성화가 정찬영(1906~1988)의 채색화조화 연구」, 『미술사 학보』 53(2019), pp. 18-25 참조. 해방 후 공작도는 결혼식이나 환갑잔치, 호텔 로비 장식 등을 위한 자수병풍으로 인기있는 소재 중 하나였다. 일례로 미국 스미소니언 협회(Smithsonian Institute) 산하 국립자연사박물관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1960년대 당시 미국 국무장관이었던 러스크(David Dean Rusk, 1909~1994)에게 선물한 것으로 전해지는 백색 공작을 소재로 한 6곡 병풍이 소장되어 있다. 이 병풍에는 공작 한 쌍과 함께 일제 강점기 이후 자수 화조도에 종종 등장하기 시작한 목련이 배치되었다.
현재 경기여고 경운박물관과 강릉자수박물관에는 일본화가 고슌(吳春, 1752~1811), 마츠무라 케이분(松村景文, 1779~1843) 등의 비둘기 소재 회화를 바탕으로 한 학생들의 자수 작품, 경북여자고등학교에는 이토 자쿠추(伊藤若沖, 1716~1800)의 봉황도, 카노 호가이(狩野芳崖, 1828-1888)의 자모관음도를 바탕으로 한 학생들의 자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정무정은 근대자수 작가 연구가 전무한 상황에서 박을복 개인의 자수 미학을 고찰했다. 그는 호미 바바(Homi K. Bhabha)의 혼종성 개념을 매개로 자수가 어떤 매체보다도 전위적이고 급진적인 잠재력을 지니고 있음을 주장했다. 그런데 박을복 자수의 독창성과 전위성을 강조하다 보니 그녀의 <국화와 원앙>이 몽롱한 분위기의 일본화와 달리 화가의 본을 수용하되 그것을 변형시켰다고 해석하는 등, 회화와 다른 자수라는 매체의 특성이나 일제강점기 일본 자수, 해방 후 한국 자수의 시대양식 등을 간과한 점이 아쉽다. 정무정, 「박을복(1915~2015) 작품에 나타난 한국 자수의 위상과 의미」, 『고문화』 90 (2017).
월간미술편집부, 「잊혀진 근대 여성미술가의 복원」, 『월간미술』 (2003. 4).
Bibiana Obler, Intimate Collaborations: Kandinsky and Münter, Arp and Taeuber (London: Yale University Press, 2014).
「여자미술원설립」, 『매일신보』 (1925. 8. 27).
김소연, 앞의 논문, pp. 89-90.
공예부추천작가일동 건의서(1970. 7.), 김철효, 앞의 논문, p. 126에서 재인용.
이외에도 그는 일본색으로 ‘지나친 호분의 사용’, ‘사비의 표현’을 들었다. 김용준, 「제1회 국전의 인상」, 『자유신문』(1949. 11. 27.). 『근원 김용준 전집 5』(서울: 열화당, 2002), p. 289.
1950년대 동양화단의 변화에 관해서는 송희경, 「1950년대 동양화단의 민족성 담론과 그 실체」, 『미술사논단』 50 (2020) 참조.
1886년 설립된 이화학당이 1945년 이화여자대학으로 개편되었을 때 3개원(한림원, 예림원, 행림원) 중 하나인 예림원에 음악과와 미술과가 설치되었고 후자에 동양화, 서양화, 자수 세 전공이 생겼다. 이듬해 종합대학 승격과 함께 체제를 개편하여 예술대학 미술학부 내에 동양화과, 서양화과, 자수과, 도안과가 설치되었고 한국전쟁 중에 염색, 사진, 실내장식 등의 전공이 추가되었다. 숙명여자대학교에도 1947년 미술과가 설치되어 동양화, 서양화, 자수・수예 교육이 실시되었으나, 1953년 서울 환도 후 미술과는 가사과에 병합되었다. 김영기, 「한국 여성 미술 40년사」, 김활란 박사 교직 근속 40주년 기념 논문집 편집위원회 엮음, 『한국여성문화논총』 (서울: 이화여대출판부, 1999), pp. 169-171.
「김학기 여사 자수전 새로운 기법 시도」, 『매일경제』 (1962. 3. 14).
이흥우, 「전위적인 작업과 전통적인 일」, 『選미술』 11 (1981 가을), pp. 110-111에서 재인용.
김강석, 「메아리-송정인 作」, 『新여원』 (1972. 12).
송정인, 「자수가 지닌 예술적 위치와 실생활면에 있어서의 효용성」, 『새시대』 (1967), pp. 68-69.
단색화가 한국적 모더니즘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여성과 여성적인 것을 소외시킨 현상에 대해서는 윤난지, 「단색조 회화의 다색조 맥락: 젠더의 창으로 접근하기」, 『현대미술사연구』 31 (2012) 참조.
즉흥적으로 제작되는 추상자수라 할지라도 “창의와 적극적인 사전준비가 잠정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자수에 있어서는 도안의 형식이 절실하게 요구”될 수밖에 없다. 임홍순, 「자수도안의 조형세계와 그 특수성」, 『繡(이화여자대학교 미술대학 자수학회집)』 2 (1973), p. 14.
구상, 기하학적 추상, 다채로운 색채 등을 ‘한국성’에서 배제시킨 한국의 추상 담론에 내포된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신지영, 「왜 우리에게는 ‘위대한’ 여성 미술가가 없을까?: ‘한국성’의 정립과 ‘한국적’ 추상의 남성성에 대하여」, 『현대미술사연구』 17 (2005) 참조.
차영순, 「이화여자대학교 자수과 커리큘럼 변천사와 자수 포트폴리오 프리젠테이션」, 이화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학센터, 『여성의 눈으로 보는 근대기의 여성 자수』 (2011), p. 58.
윤난지, 앞의 논문, p. 181.
당시 민족주의와 전통문화를 강조하는 문화예술 정책 아래 수출상품으로 제작된 전통공예에 대해서는 졸고, 「1950-1980년대 한국 자수계 동향 연구: ‘전통’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기초조형학연구』 21(4) (2020), pp. 137-141 참조.
「일인(日人)이 고개 숙이는 기모노 예혼(藝魂)」, 『동아일보』 (1993. 10. 10).
「가내공업 가이드 자금지원과 현황 (6)자수」, 『매일경제』 (1966.12.3); 「취미 곁들인 가계 보탬 부업 (1) 동양자수」, 『동아일보』 (1973. 12. 4).
「여원」 (1960. 12.), 장미경, 「1960~70년대 가정주부(아내)의 형성과 젠더정치: 『여원』, 『주부생활』 잡지 담론을 중심으로」, 『사회과학연구』 15(1) (2015), p. 148에서 재인용.
(한상수), 「한국의 수수(手輸), 안방예술 수(繡)」, 『조선일보』 (1976. 12. 18).
최순우, 「서언」, 수림원, 『李朝의 자수』(1974); 예용해, 「최유현 한국 자수전 추천사」, 자수문화연구소 중수원, 『최유현 刺繡史: 바늘과 실로 수놓은 한평생』, p. 13.
국가발전의 주체로 호명된 현모양처는 “유아교육에서 어머니의 역할, 화목한 가정의 배려, 가사의 과학화, 합리화, 국가 산업발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현대여성’을 지칭했다. 김수진, 「전통의 창안과 여성의 국민화: 신사임당을 중심으로」, 『사회와 역사』 80 (2008), p. 236.
김정옥, 「책머리에 부쳐서」, 대한주부클럽연합회, 『불씨』 (서울: 바른사, 1986), 쪽수 없음. 미술분야에서 화가 박래현과 조각가 김정숙이 수상했고, 자수 분야에서는 나사균이 수상했다. 자수문화협회 초대회장인 이학은 서예 부문으로 수상했다.
최유현, 「내가 걸어온 길이 곧 후대의 나침반이 될 것이기에」, 자수문화연구소 중수원, 앞의 책, p. 7.
한국 미술계에서 여성이 작가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이들의 작업은 남성의 창조물보다 열등한 것으로 규정된 ‘여류 미술’로, 자본주의와 가부장제의 억압으로부터 여성 민중의 해방을 부르짖은 ‘여성미술’로, 서구 페미니즘 사상을 도입한 ‘여성주의 미술’로 범주화되어 이해되어 왔다. 이에 대해서는 김현주,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페미니즘 연구사」, 『미술사논단』 50 (2020); 조수진, 「한국 여성미술 연구사: 근대에서 1970년대까지」, 『인물미술사학』 16 (2020) 참조. 1970~80년대 여성 노동 연구에서 수방 여성들의 작업 현실에 대한 논의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본 연구에서는 다루지 않았지만 자수 작가들은 자수를 표현 매체로 삼아 사회비판을 하는 대신 사회활동, 예를 들면 독립운동이나 사회복지, 교육 영역에서 큰 자취를 남긴 경우가 적지 않다. 장선희는 일본 유학 전후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조시비를 졸업한 윤정식(尹貞植, 1900`~2000)은 전통자수를 판매하여 의사 출신 남편이 남긴 유린 보육원을 운영했으며, 향상여자기예학원을 졸업하고 동경 교리츠(工立)미술학교에서 자수를 배웠으며 조선미술 전람회에서 수상한 경력이 있는 이운정(李雲貞, 1903~1992)은 작업을 계속하는 대신 일본인으로부터 기예학원을 인수해 재단법인 동명학원을 세우고 평생을 여학생 교육에 헌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