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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19세기 조선왕실 능·원의 천봉(遷奉)과 석물의 제작*

Abstract

조선 후기의 왕실 예전인 『국조속오례의』 에는 조선 전기와 달라진 예제를 적용하면서 ‘천장의’를 추가하여 무덤을 천봉할 때의 과정을 담았다. 이처럼 조선 후기는 전기와 달리 천봉이 본격적으로 행해지는데 이는 생전의 왕의 뜻과 달리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15세기 태조, 태종과 세종은 왕후가 먼저 승하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수릉의 조성 및 능침사찰의 관리까지 관여하였다. 16-17세기는 예학에 맞게 추존을 중심으로 능을 천봉하여 예우하였고, 사친과 관련된 인물 무덤을 주로 천봉하였다.반면에 19세기의 천봉은 사왕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철종 대에 천봉된 무덤은 대체로 순조, 순조의 사친,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의 무덤이었고, 두 번씩 천봉하면서 영조와 정조처럼 세자가 탄생하기를 기원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인하여 19세기의 능 석물은 새롭게 조성되는 경우가 드물고 기존에 능역에서 사용하였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으며, 새로 만드는 경우에도 조형미가 떨어진 형상을 보여 왕조 말기 미술의 해체적인 양식을 드러낸다.

Abstract

Kukchosogoryeŭi, the book of protocols for the late Chosŏn royal court, lists some rituals that have changed since early years of the dynasty. Ch’ŏnjangŭi, the process of relocating tombs is one of them. In late Chosŏn, royal tombs were actively relocated, unlike in early Chosŏn and mostly not in accordance with the dead monarch’s wishes.
In the 15th century, T’aejo, T’aejong, and Sejong all outlived their queens and were able to prepare their own tombs and the management of the annexed Buddhist temples.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most relocated tombs were of posthumously honored monarchs, who were the birth parents of reigning monarchs.
In contrast, 19th-century transfers were directly related to dynastic successions. Tombs that were relocated during the reign of Ch’ŏlchong were those of King Sunjo, Sunjo’s birth mother, and the Crown Prince Hyomyŏng, the son of Sunjo. In even moving some tombs twice, Ch’ŏljong was looking to the precedence of Yŏngjo and Chŏngjo and hoping to beget a son. In the 19th century, it was rare for royal tomb sculptures to be newly made and sculptures from original tombs were reused instead. Although some were newly made, they generally do not hold up to the quality of the sculptures of the past and betray the falling standards of art at the royal court in late Chosŏn.

Ⅰ. 머리말

조선왕릉은 자연 지형을 바탕으로 삼아 목조와 석조 건축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 명·청대의 황제릉은 피장자를 안장한 곳이 목조물인 침전(寢殿)으로 두었고, 그 아래에 피장자를 매장하는 방식이었던 반면에 조선왕릉은 제례의 공간인 정자각(丁字閣)과 침전은 목조물로 만들었고, 피장자가 안장된 곳은 높은 지대에 곡장과 석물을 이용하여 꾸몄다. 이러한 조선왕릉의 구조적 특징으로 인하여 능상의 봉분은 자연의 영향을 그대로 받았고, 침략과 약탈의 대상이 되기 쉬웠다.
조선왕릉의 위치는 주로 도성 주변에 분포되었으며, 단릉과 쌍릉 등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졌다. 삼국시대의 왕릉은 모두 수도 인근에 조영되었으며, 단릉(單陵)으로 구성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또한 통일신라와 고려에서도 왕릉을 조성할 때 수도 인근에 대체로 단릉으로 만들었으며, 이러한 흐름은 조선왕릉까지 이어진다. 능을 조성한 후에 옮기는 천봉(遷奉)은 삼국과 고려 시기에 대체로 나타나지 않는다. 고려 무신난으로 경주에서 죽음을 맞은 의종 희릉(毅宗禧陵)을 수도인 개경으로 옮겨져 장사하였다는 기록이 나타날 뿐이다.1 그에 비하여 조선왕릉은 다른 시기에 조성된 능에 비하여 천봉(遷奉)1이 자주 일어났다.
천봉을 하는 경우 입지를 다시 탐색하고, 석물 옮기거나 새로 조성하며, 재궁(梓宮)을 이동하는 일련의 과정은 국장을 다시 하는 것만큼의 공력이 필요했다. 조선 후기에 편찬된 국가의 예식을 담은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에는 천릉 절차를 기록한 ‘천릉의(遷陵儀)’가 있을 만큼 조선 전반에 걸쳐서 천장이 자주 이루어졌고, 이를 의례로 정리하기에 이르렀다.
조선왕릉 가운데 해당 능의 석물이 피장자가 죽음을 맞은 해에 조성되지 않은 사례는 다수 나타난다. 조선 후기에 천봉이 자주 이루어지면서 새롭게 능을 조영할 때에도 석물을 다시 만들거나 옮겨서 쓰는 사례도 다수 나타난다. 조선 왕실 무덤의 천봉은 왕의 의견에 따르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천봉되는 지역이 멀리 있는 경우에는 석물을 새로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까지 조선 왕실의 능·원·묘의 천장에 관한 연구는 개별적인 무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조선 예전(禮典)의 변화 및 능제(陵制)에 다루기도 하였고,3 조선 전기의 천봉에 대하여 다루거나4 조선 후기 개별 능·원에 대한 천장의 원인과 결과를 다루기도 하였다.5 본고에서는 기존 연구 성과를 토대로 통시적으로 조선 전 시대에 걸친 능 천봉을 분류하여 시기별 특징을 파악하고, 특히 수차례 천봉이 이루어진 19세기의 정치적 상황과 19세기 능묘 석물의 미술사적 양식 특성을 고찰하도록 하겠다. 논문의 연구 대상은 조선 왕실에서 직접 조성한 무덤이며, 왕의 사친인 모후의 무덤을 포함하였다. 또한 천봉의 원인, 과정과 결과를 분석하여 천봉의 함의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조선 전반에 걸친 천봉의 흐름을 분석하고 그중에서도 잦은 천봉이 행해졌던 19세기를 중심으로 분석한다. 이 시기 조선 왕실 인물의 무덤을 천봉하는 경우에 어떠한 인물의 무덤을 옮겼는지 알아보고, 그로 인한 능묘 석물의 성격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짚어보도록 하겠다.

Ⅱ. 조선 왕실 능묘 천장의 배경과 과정

1. 15-16세기 수릉(壽陵)의 선정과 천봉

조선이 개국한 직후부터 태조, 태종, 세종과 세조까지 자신이 묻힐 무덤인 수릉지(壽陵地)을 보러 여러 지역을 다녔던 기록이 전한다. 이는 왕들이 자신의 무덤 위치에 선정하는 것에 관심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조선이 건국한 이후 가장 먼저 조영된 능은 신덕왕후 정릉(貞陵)이며, 가장 먼저 천봉된 능 역시 신덕왕후 정릉이다. 정릉은 태조가 본인의 수릉으로 여긴 곳으로 본래 도성 내 현재의 정동 지역인 취현방(聚賢坊) 북쪽에 조성되었으나6 1408년 태조가 승하한 후 현재 구리 지역인 양주(楊州) 검암(儉巖)에 태조의 무덤인 건원릉(健元陵)을 만들었고,7 1409년 신덕왕후 정릉은 도성 밖으로 이장하였다.8
도성 내에 있었던 신덕왕후 정릉은 본래 태조의 수릉지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는 본인의 수릉 위치를 정하는데 심혈을 기울여 신덕왕후가 승하한 후 무덤의 위치를 정하고, 그 주변에 능침 사찰을 크게 세웠다. 태조는 여러 지역을 직접 다니다가 도성 안 신덕왕후의 무덤 정릉을 본인의 수릉으로 삼았다.
이처럼 신덕왕후 정릉이 태조 연간에 위치를 정하고, 태종 연간에 천릉하게 된 점은 정치적인 의도와 관련된다. 신덕왕후 정릉이 위치한 곳은 경복궁의 남쪽에서 육조거리가 끝나는 지점인 서쪽 구릉으로, 도성의 중심지였다. 태조가 이곳에 정릉과 흥천사(興天寺)를 조성한 점은 신덕왕후가 조선을 창업할 때 함께한 수비(首妃)로의 지위를 보여줄 뿐 아니라, 태조와 신덕왕후의 아들인 이방석(李芳碩)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표상하는 것이기도 하였다.9
신덕왕후 정릉의 능제와 석물 양식은 고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현릉·정릉(玄陵·正陵)에서 비롯되었으며, 이후 신의왕후 제릉(齊陵), 태조 건원릉(健元陵), 정종 후릉(厚陵)과 태종 헌릉(獻陵) 등에 계승 및 변화되는 제도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10 이후 태조와 신의왕후의 아들인 이방원이 왕으로 즉위하면서 처음에는 정릉에 제례를 지내기도 하였지만,11 정릉의 조역(兆域)이 넓다는 이유로 능 100보(步) 밖에는 집을 짓도록 하였고,12 태조가 승하한 후 1409년에는 제왕의 능묘가 모두 도성 밖에 있고 사신의 관사(館舍)와 가깝다는 이유로 정릉을 결국 천장하였다.13 이처럼 신덕왕후 정릉의 천릉은 태종의 왕권을 대외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성이 있을 뿐 아니라 또 다른 한편으로는 왕실 인물이라고 하더라도 후손의 사후 평가에 따라 무덤도 강등되거나 혹은 승급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신덕왕후 정릉 이후에 천릉한 능은 함흥 지역으로 옮겨진 덕릉(德陵)과 안릉(安陵)이다. 태조의 고조부 목조, 고조모 효공왕후의 덕릉과 안릉은 본래 1274년 두만강 지역인 경흥(慶興)에 위치하였고, 1410년 여진족의 침입을 피하기 위하여 현재의 지역인 함흥(咸興)으로 천장하였다.14 덕릉과 안릉을 천봉할 때에는 정릉을 옮길 때와 다르게 천릉도감(遷陵都監)을 설치하고 『예기(禮記)』 「단궁(檀弓)」을 참고하여 공자와 주자의 이론에 맞추어 능제를 구성하고자 하였다.15
조선 전기에 왕이 자신의 무덤인 수릉지를 살펴보고 정하는 경우는 다수 있었으며 주로 15세기에 수릉을 살펴보았다는 기록이 집중되어 있다. 태조는 도성 주변으로 수릉지를 탐색하다가 결국 도성 내에 수릉을 조성하였고, 태종과 세종은 광주 지역을 수릉지로 정하였다. 세종은 1438년 본인의 수릉지로 사친의 무덤인 태종과 원경왕후 헌릉 지역으로 정하였고,16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1446년에 승하하자 대모산(大母山) 일대인 헌릉 지역에 석실로 된 영릉을 최초의 합장릉 형식으로 구성하여 자신의 현궁(玄宮) 자리까지 만들어두었다.17
그러나 세종이 승하한 1450년부터 예종이 즉위한 1468년까지 18년의 짧은 시간 동안 문종과 단종, 세조를 거치고 예종이 즉위하자 신숙주(申叔舟)가 세종 영릉 천봉에 대하여 논하였고,18 옮길 영릉의 위치를 이계전(李季甸)의 분묘로 삼았으며19 예종이 왕위로 즉위한 지 1년도채 되지 않았던 1469년에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을 현재의 위치로 천장하였다.20 세종 영릉 천릉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인물은 원로대신인 한명회(韓明澮), 신숙주, 서거정(徐居正) 등이고, 영릉이 천봉된 지역인 여흥(驪興)은 한명회의 근거지이다. 영릉이 천봉된 이후 여흥은 여주목(驪州牧)으로 승격되고, 대농장을 점유하는 등 한명회는 정치적·경제적 혜택을 누렸다.21
다시 성종대에 들어서 생전에 수릉을 정하는 것에 대하여 논의가 일어난다. 성종 재위 초에 수렴청정하던 정희왕후는 원릉(園陵)의 위치를 미리 정하고자 하였다가22 후일에 의논하기로 하였다.23 다시 일부 대신들은 수릉을 미리 정하자고 하였으나,24 예조판서 이승소(李承召)가 수릉을 정하는 것을 반대하였는데 이때 문종 현릉을 세종 영릉 인근에 만들려고 했다가 다시 정하였던 사례가 있고, 제후의 장사는 5개월이라는 넉넉한 시간이 있으며, 세조가 장사를 박하게 하도록 하였다는 이유를 들었다.25 이렇게 조선왕릉은 15세기 전반까지는 수릉을 정하는 전통을 이어갔다가 15세기 후반부터 왕의 생전에 능지를 직접 정하지 않았다.
요컨대 태조, 태종과 세종은 모두 왕보다 왕후가 먼저 승하하면서 왕이 수릉지를 정하는데 적극적이었다. 특히 태조는 도성 주변으로 여러 수릉지를 보러 다녔다가 신덕왕후가 먼저 승하하면서 도성 내에 정릉을 조영하며 자신이 묻힐 곳으로 상정하였고, 원찰을 크게 세워 조선의 창업자로 입지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결국 태조의 뜻대로 본인의 무덤이 정릉에 함께 조성되지 못하였고, 도성 밖에 태조 건원릉이 조성되었다. 또 태종과 세종은 본래 태조가 관심을 가졌던 광주 지역을 본인의 수릉지로 삼아 왕후의 승하에 따라 원경왕후의 헌릉과 소헌왕후의 영릉을 같은 지역에 조성하여 태조 건원릉과 다른 지역에 능을 정하였다. 이후 문종 현릉을 조성할 위치로 처음에 헌릉과 영릉 지역으로 정하였다가26 영릉 주변으로 돌과 물이 나와서27 광주 지역이 능군(陵群)으로 확대되지 못하였고, 문종 현릉은 태조 건원릉 인근에 안장되면서 조선왕릉의 위치가 양분되었다. 15세기 태조, 태종과 세종이 수릉 위치 선정에 관여했던 모습을 살펴보면 결코 천봉을 염두에 두었다고 볼 수 없다. 무덤의 천봉은 후손의 뜻에 의하여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전에 무덤 위치를 정하는데 적극적으로 관여했다고 하더라도 예측하기 어려운 일이다.
태조뿐 아니라 태종, 세종은 모두 본인의 무덤이 되는 헌릉과 영릉의 조영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였다. 태조는 정릉 주변으로 흥천사를 창건하여 관리에 주력하였던 반면에 세종은 석물의 구성과 형태를 정하는데 적극적인 모습을 보인다. 세종은 실록에 능 규모와 형태를 상세하게 기록하였고,28 이는 『국조오례의』의 기초로 이어진다. 태조, 태종과 세종의 초창기 능은 봉분 내부가 석실로 구성되어 있고, 정자각 옆에는 대형의 신도비를 설치하는 등 고려의 전통을 이어간다.
15세기 조선왕릉을 천릉하는 경우는 태종이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드러내기 위하여 신덕 왕후 정릉을 옮기거나, 북부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이루어지는 경우가 있었으며, 세종과 소헌왕후의 영릉은 풍수를 근거로 옮겨진다. 즉 이 시기의 조선왕릉 천릉은 정치적·군사적·풍수 등 다양한 원인으로 옮겨졌으며, 덕릉과 안릉, 세종 영릉은 먼 거리에 천봉되면서 석물을 새로 조영하였다.
이후에도 조선왕릉의 천봉은 꾸준하게 이루어졌다. 조선왕릉 천봉의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전쟁으로 인한 이장, 둘째, 종통의 계승을 위한 풍수학적 접근, 셋째, 피장자의 추존에 따른 천봉, 넷째 기존 지역의 석물 훼철에 따른 천봉, 마지막으로 도시 확장으로 인한 이장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조선 전반에 걸쳐서 일어난 천봉의 주요 이유는 풍수에 따른 천릉과 추존으로 인한 이장이 가장 많았다. 본격적으로 풍수에 따른 천봉이 일어난 경우는 16세기 중종대부터이다. 반정(反正)으로 즉위한 중종은 정통성 회복을 위한 선대 왕과 왕후의 추존과 천릉을 시행하였다. 한편, 1562년 중종 정릉을 옮긴 이후 1563년 명종의 아들인 순회세자, 1565년 중종의 비 문정왕후, 1567년 명종이 차례로 죽음을 맞는다. 심지어 명종은 중종 정릉을 천봉한 후에 나라에 길한 일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기도 하였고,29 그 이후에도 옮겨진 중종 정릉은 사실은 풍수에 취약하였으며, 왜적이 정릉을 약탈하기도 한 것은 무리한 천릉때문이라고 여기기도 하였다.30
조선 건국 시 도읍을 정하거나 도성의 위치를 선정할 때 풍수에 밝은 이의 의견을 청취하였으며,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위하여 풍수학(風水學) 관원, 지리학(地理學) 관원, 상지관(相地官) 등 여러 관직도 있었다. 왕은 풍수에 대하여 신뢰하기도 하였고,31 한편으로는 신중한 경우도 있었다.32 풍수에 의하여 천봉하는 실질적인 이유는 자손들의 기복에 따른 것33으로 이는 왕실에서 천봉하는 경우는 왕자의 탄생을 기원한 것과 관련이 깊다. 조선 전기에는 이를 위하여 천장할 때 풍수가의 의견을 들으며 적극적으로 참고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러나 16세기 풍수로 인한 천장의 결과가 나라의 흥망과 후손의 성쇠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을 확인한 후에는 능묘의 위치를 정하거나 천봉하는데 크게 관여하지 않았다.

2. 17-18세기 왕실 능·원의 천봉

17세기 조선왕릉의 천봉은 주로 왕위 계승자의 정통성 확보를 위한 선대의 추존, 석물의 훼손, 풍수적 요인 등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반정으로 즉위한 인조는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통성을 세우는 데 주력하였다. 16세기에 중종이 현덕왕후를 종묘에 부묘(祔廟)하고, 그 무덤 현릉(顯陵)을 문종의 무덤과 함께 조성하면서 유교적 정통성을 세운 것과 달리, 17세기 인조는 먼저 사친인 정원군을 추존하며 그 무덤을 천장하였고, 선조 목릉을 천장하면서 왕위 계승의 명분을 확보하였다. 인조의 사친인 정원군(定遠君)의 무덤은 1619년에 양주 곡촌리(谷村里)에 있었다가34 인조 반정 이후로 1626년 정원군의 부인인 계운궁 구씨가 졸하자 그 무덤 위치를 김포로 정하였고,35 무덤의 이름을 육경원(毓慶園)이라고 하였다.36 그리고 원(園) 제도의 세분화에 따라 정원군의 무덤의 이름도 흥경원(興慶園)으로 정해졌다.37
그 후 정원군 흥경원은 광해군 연간에 급하게 조성되었다는 이유로 김포에 있는 계운궁 육경원으로 이장되었다(Table 2). 1627년 흥경원을 이장하는 내용을 다룬 의궤에 따르면 김포에 옮기는 흥경원의 석물은 조계동(曹溪洞), 충주, 양주 개화에서 석물을 떠왔으며, 조계동에서는 상석, 고석, 표석의 농대석38과 사대석 등을 가져왔고, 충주(忠州)에서 혼유석, 향좌아, 표석을, 양주 개화(陽川 開花)에서 하박석과 사대석 등을 가져왔다.39 그리고 1632년에 정원군과 그 부인이 시호를 올리면서 무덤의 명칭도 기존의 흥경원에서 장릉(章陵)으로 올렸다.40
17세기 인조가 자신의 사친 무덤을 올리는 위하여 먼저 원(園) 제도를 참작하여 원호(園號)를 올렸고, 왕으로 즉위하기 이전에 조성된 대원군의 무덤과 즉위 후에 조성한 군부인의 무덤을 합친 후에 직접 친제를 올려 추존을 위한 기반을 다졌다. 그 후 인조는 사친의 시호와 능호를 갖추어 종묘에 부묘(祔廟)하는데 집중하였고,41 그 무덤을 능에 맞추어 치장하는데 주력하지는 않았다. 따라서 김포에 있는 원종 장릉(章陵)은 묘제와 능제가 섞여 있는 형식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1630년에 인조는 풍수상의 이유로 선조 목릉(穆陵)을 천봉하였다. 심명세(沈命世)가 세종 영릉의 사례를 들어 대모산 근처에 영릉이 있을 때에는 문종의 재위가 짧았고, 단종은 양위(讓位)하였으며, 덕종은 오래 살지 못하였는데, 여주로 영릉을 옮긴 후에 나라가 힘입게 되었다며 목릉을 이장하기를 주장하였다.42 그 후 인조는 이를 예조에 지시하여 천장하였다. 이처럼 인조는 사친인 원종과 조고(祖考)인 선조의 무덤 천장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다. 이는 자신의 왕위 계승을 정통성을 보여주는 현창 사업 중 하나이다. 이때 선조 목릉은 병풍석에 파손이 있었기 때문에 1630년 새롭게 능을 옮길 때에는 석인상, 석수 등은 다시 사용하였지만 병풍석과 난간석은 새로 제작하여 사용하였다.43
1659년 10월, 효종 영릉(寧陵)이 태조 건원릉 인근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설치된 형태로 조성되었는데 이듬해 7월에는 영릉 봉분의 난간지대석과 상석 사이가 꺼지고 틈이 생기는 일이 발생하였다.44 이에 대해 송시열(宋時烈)이 세종 영릉의 경우는 봉분 주변으로 난간석만 설치해도 튼튼하고, 검소하므로 효종 영릉의 봉분도 병풍석을 철거하기를 논하였고, 송준길(宋浚吉)은 급한 수리만 진행할 것을 요청하였다.45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해 12월에 또다시 석물이 허물자46 다시 보수하였고,47 다시 석물에 문제가 생겨 보수하였다.48 이처럼 수차례 효종 영릉의 병풍석 보수를 진행하자 이익수(李翼秀)가 상소하여 천릉을 주장하였다.49 이에 따라 1673년에 효종 영릉을 세종 영릉 인근으로 천장할 때 세종 영릉과 세조 광릉의 예를 따라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두는 형상으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현종은 두 능의 석물 척수를 살펴본 후에 그 제도보다 조금 더 크게 만들도록 하였다.50
1698년에 숙종은 무덤의 잦은 천장의 문제를 거론하면서 사대부 묘의 이장을 가급적 금하고, 왕실 인물이나 공신이라고 하더라도 이장 시에는 왕실에서 지원하는 예장(禮葬)을 허락하지 않도록 하여 천장을 축소하도록 하였다. 또한 숙종은 지나친 풍수설에 경도되는 세태를 문제 삼아 인조 장릉(長陵)의 천봉을 반대하였지만51 인조 장릉은 영조대에 들어서 파주 교하(交河)로 천봉되었다. 1731년 인조 장릉을 대신들이 봉심하니 병풍석에 아홉 마리의 뱀이 출몰하여 부득이하게 천장이 결정되었다.52
특히 18세기에는 능을 옮기는 천릉(遷陵)뿐 아니라 천원(遷園)도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Table 3). 영조 연간에 궁원제(宮園制)가 확립된 이후53 정조 재위시 장헌세자의 추존과 그 무덤 현륭원(顯隆園)의 천원 논의가 이루어졌다. 1786년 6월, 정조와 의빈 성씨 사이에 태어난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고, 같은 해 7월부터 정조의 사친인 장헌세자(莊獻世子)[사도세자, 장조] 영우원(永祐園)[현륭원] 천원에 대한 논의가 본격화되었다. 박명원(朴明源)은 당시 영우원의 사초가 말라 죽고, 청룡에 구멍이 있는 등 무덤 형상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1786년 5월과 9월의 변고를 이어서 언급하였다. 이 변고는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와 정조의 후궁인 의빈 성씨의 죽음을 뜻하며, 왕실 종통 승계에 대한 우려를 드러내는 모습이다. 또한 박명원은 영조가 인조 장릉을 천장한 덕을 보았기 때문에 더욱더 영우원을 천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54 이 기록은 천봉의 원인은 후사(後嗣)에 대한 점임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로 인하여 정조가 영우원을 현륭원으로 명칭을 바꾸어 사친의 무덤을 수원 지역으로 옮기게 되었고 1789년 정조가 현륭원을 완성하여 1795년 사친의 회갑을 맞아 대대적인 왕실 행행(幸行)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1731년 영조가 인조 장릉은 천장한 후 1735년에 장헌세자가 탄생하였다. 장헌세자의 탄생은 1728년에 영조의 첫 번째 왕세자인 효장세자가 죽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자가 이어진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었다. 또한 정조는 1789년 장헌세자 현륭원을 천봉하고나서 이듬해 세자인 순조가 탄생하였다. 김종수(金鍾秀)는 화성기적비(華城紀蹟碑)의 비문에 현륭원 천봉으로 인하여 원자가 태어난 것으로 연관지어 기술하기도 하였다.55 이는 조선 왕실 무덤의 천장과 원자 탄생과 관련성을 보여주는 주요한 사례가 되었다.

Ⅲ. 19세기 조선 왕실 무덤의 천봉과 석물의 특징

1. 19세기 왕실 무덤 천봉의 원인

19세기는 순조, 헌종, 철종이 재위한 시기로 일명 세도정치의 시기이다.56 왕후와 대비의 영향력이 강해진 이 시기에는 18세기에 영조가 『국조상례보편』에서 제도적으로 마련한 천장 제도를 적극적으로 적용하였다. 먼저 1800년에 조성된 정조 건릉(健陵)이 1820년에 한 차례 천봉되었고, 1830년 서거한 효명세자의 연경묘(延慶墓)가 1834년 헌종이 즉위한 후 익종 수릉(綬陵)으로 승격되어 1846년 용마봉 지역으로 천봉되었다가 1855년 태조 건원릉이 있는 곳으로 두 번째로 천장되었다. 그리고 1834년 승하한 순조는 그 무덤 인릉(仁陵)이 본래 교하(交河)에 위치하였다가 1856년에 현재의 위치인 태종 헌릉 근처로 옮겨졌다. 또한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낳은 유빈 박씨(綏嬪 朴氏)가 1822년 세상을 떠나자, 양주 배봉산 옛 장헌세자 영우원이 있던 지역에 휘경원(徽慶園)이 조성되었다. 유빈 박씨 휘경원은 철종 연간에만 두 차례 이장하였는데 첫 번째는 1855년에 배봉산(拜峯山)에서 남양주 순강원(順康園) 지역으로 옮겨졌고, 두 번째로 1863년 양주 달마동(達摩洞)으로 옮겨졌다(Table 3).
19세기 철종 연간에 천봉된 조선 왕실의 무덤은 대체로 무덤을 조성한 지 불과 20년 내외로 천봉하였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16세기와 17세기에 왕의 직계인 인물의 무덤을 중점적으로 천봉하였고, 18세기에 숙종을 비롯한 영조와 정조는 무분별한 천봉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철종 재위 연간인 19세기에는 천봉한지 얼마 되지 않은 무덤은 또다시 천봉하였다. 특히 19세기 순조 인릉(仁陵), 문조 수릉(綏陵), 유빈 박씨 휘경원(徽慶園)은 짧은 시간 동안 먼 지역으로 천봉되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순조(純祖)는 정조의 아들로, 19세기 왕실 종통을 시작한 인물이다. 문조(文祖)는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사친으로 19세기 왕실 종통을 승계하는 인물이며, 유빈 박씨는 순조의 사친이다. 즉 19세기 잦은 천장이 이루어진 무덤의 주인공은 모두 순조와 직접적으로 관련되어있다.
19세기에는 능 천장이 다섯 차례, 원은 두 차례 옮겨졌고, 그중에서도 문조 수릉과 유빈 박씨 휘경원은 천봉한지 20년이 되지 않은 상태로 두 번 천봉되었다(Table 3). 19세기 조선 왕인 순조, 헌종, 철종은 모두 재위 기간이 짧다. 순조의 아들인 효명세자[익종, 문조]는 일찍 서거하였고, 헌종과 철종도 왕위를 이을 자손이 없었다. 그래서 수차례 능원을 천봉하며 자손의 번성을 기원하였다. 이에 대한 직접적인 기록은 없지만 특히 18세기 영조와 정조가 각각 인조 장릉과 장조 융릉을 천봉한 이후 세자가 탄생하는 일이 있었기 때문에 후사 승계의 일환으로 19세기에도 세자의 출생을 바라면서 천봉한 것으로 여겨진다.
헌종이 후사 없이 갑자기 승하하자 순조 비 순원왕후가 방계(傍系)인 이원범(李元範)을 왕으로 즉위하도록 하였다.57 이렇게 즉위한 철종이 가장 먼저 능행을 간 곳이 순조 인릉이다. 일반적으로 사왕(嗣王)은 선왕의 능침이 완성되면 가장 먼저 선왕의 능부터 가는데 반하여 철종은 헌종 경릉을 먼저 방문하지 않고, 순조 인릉부터 능행을 시작하였다. 뿐만 아니라 철종이 재 위한 14년 동안 가장 많이 방문한 능 역시 순조 인릉이다.58 그리고 철종은 순조를 돌아가신 아버지를 뜻한 황고(皇考)로 칭하였는데,59 이러한 점은 순조의 비 순원왕후의 영향력이 철종 연간에 컸던 점을 드러내는 모습이며, 철종이 왕위가 승계된 인물이 헌종보다는 순조에게 비롯된 것으로 파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철종이 즉위한 지 2년이 지난 1852년에는 철종의 왕위 승계 대상을 순조로 보는지, 헌종으로 보는지 관심이 집중된 신해조천의(辛亥祧遷議)가 진행되었고, 철종이 순조의 아들로 여기는 세력이 우세함에 따라 헌종 및 풍양 조씨가 실권하며 왕이 계승의 종법(宗法)도 해체되기 시작하였다.60 철종이 헌종의 능을 천봉하고자 계획한 적은 없었으며, 오히려 순조, 순조의 사친, 순조의 아들 무덤을 옮기는 일에 집중한 점도 철종이 본인이 정통성을 헌종이 아닌 순조로 상정한 점을 알 수 있다. 19세기 철종 재위시 행해진 능원의 천봉은 순조와 관련된 왕실 무덤을 주요 대상으로 하며, 18세기와 비교해보면 왕위를 계승할 세자의 탄생을 염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철종은 1863년 유빈 박씨 휘경원의 두 번째 천장 지역을 결정할 때 이전에 순조 인릉의 천봉지로 직접 간심하였던 달마동(達摩洞)을 휘경원의 천봉지로 정하여61 위치 선정에 적극적이었다. 반면에 철종은 천봉하면서 석물을 새로 제작하거나, 혹은 숙종, 영조와 정조처럼 석물의 구성과 크기, 수량과 문양 등에 의견을 내지 않아 무덤을 옮기는 데에만 집중하였다.

2. 19세기 조선 왕실 무덤 석물의 특징

19세기에 왕실 무덤의 천봉이 잦아지면서 능원 석물은 새로 조성하기 어려웠고, 추가되어 부설되거나 조선 전기에 사용한 능 석물을 재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18세기 조성된 현종 숭릉(崇陵)의 석물도 효종 영릉(寧陵)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사례이다.62 이는 숙종의 어머니인 명성왕후가 효종 영릉을 천봉하면서 묻어둔 석물이 있으니 민력의 고갈을 막기 위하여 재사용을 명한 것이다.63 명성왕후는 현종의 비이기 때문에 본인의 무덤에 재사용한 석물이 사용되는 것을 인지하면서 옛 석물을 사용하도록 지시했다는 점에서 민본적인 사상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19세기의 능원의 조성은 민력을 염려하여 천봉을 축소하거나 석물을 재사용하기 보다는 신속한 무덤 조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특히 1855과 1856년에 천봉이 집중되면서 가까운 거리로 천봉하는 경우는 석물을 옮겨서 사용하였지만 멀리 위치한 경우는 옛 능지를 사용하도록 하며 신속하게 석물 재사용을 지시하였다. 먼저 순조 인릉(仁陵)은 1835년 교하에 조성하였을 때 능 석물을 새롭게 갖추었지만, 1856년에 천봉하면서 표석64을 제외한 기존 석물을 묻고, 1446년 소헌왕후 영릉(英陵)과 1515년 장경왕후 희릉(禧陵)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다.65 의궤에서는 구 영릉과 희릉 석물을 구분하고 있어 석물의 양식을 바탕으로 시대 구분이 가능했던 점을 볼 수 있다. 현재 인릉 봉분의 난간석과 망주석, 석수 등은 1856년에 새로 만들었고, 석인상과 장명등 일부는 소헌왕후 영릉과 장경왕후 희릉 석물을 사용하였다. 그래서 현재 순조 인릉에는 15세기, 16세기, 19세기의 석물이 다양하게 혼재되어 있다(Table 4).
현재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사친인 문조의 능, 수릉(綏陵)은 두 차례 천봉되었다. 문조 수릉은 1830년에 경종 의릉(懿陵) 인근에 세자의 묘로 조성되었고, 1846년에는 수릉으로 승격되어 용마봉으로 옮겨졌으며, 마지막으로 1855년 현재의 지역인 건원릉 지역으로 옮겨졌다. 문조 수릉 석물은 1830년 연경묘(延慶墓)로 조성하였던 석물 가운데 문석인, 혼유석, 장명등 등을 지속적으로 사용하였고, 1846년 천봉할 때 무석인과 석수를 능제에 맞게 추가하여 추존된 왕릉으로의 지위를 보완하였다. 새로 만든 수릉 무석인의 안면 표현과 크기는 기존에 만들었던 문석인과 어울리게 조성하였다. 그리고 1855년 수릉을 현재 위치로 천봉할 때 봉분 난간석주를 새로 만들었고66, 1890년 신정왕후가 합장되면서 죽석만 다시 교체하였다.67
수릉에는 표석이 두 기 있으며, 하나는 1835년에 헌종이 즉위하며 익종 수릉으로 표기한 석물이고, 이는 1846년 천봉과 1890년 합봉에 따라 추가된 내용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또 다른 한 기의 표석은 1902년 고종연간에 대한제국의 국호와 추숭된 묘호 등을 표기한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수릉은 능상 석물은 1830년, 1835년, 1846년, 1855년과 1890년, 1902년에 제작된 석물이 혼재되어 있다(Table 5).
유빈 박씨 휘경원에는 봉분 하단에 사대석이 설치되어 있다(Fig 1). 휘경원을 세 번에 걸쳐서 조성하는 동안 사대석의 석재는 매번 불암산(佛巖山)에서 가져왔다.68 휘경원 봉분에 난간석은 없지만 사대석의 면석을 12각으로 맞추었고, 사대석을 받치는 지대석으로 각각 12개의 우석과 면석을 두었다. 이는 17세기에 조성된 의창군 묘(義昌君 墓)와 비교해보면 19세기에 방위를 더 명료하게 드러냈으며, 난간석이나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아 원제의 형태를 갖추었다.
한편 휘경원의 표석(表石)은 크기가 상당히 커, 조선 왕실 능원묘에 설치된 표석 중에서도 가장 큰 크기다(Fig. 2). 의궤를 살펴보면 처음 휘경원을 조성할 때부터 표석의 비신 높이가 7尺9寸[약237cm]이었다.69 이처럼 휘경원 표석의 크기가 큰 이유는 유빈 박씨는 순조의 사친이기 때문에 다른 원과 위계를 달리했던 부분이다. 유빈 박씨가 정조의 후궁으로 순조를 낳았고, 문조, 헌종까지 이어지는 시초에 있어 주요한 인물이기 때문에 그 무덤에 대형의 표석을 설치한 것으로 여겨진다. 휘경원 표석은 두 번의 천봉을 겪으면서 내용이 달라지는데, 현재의 휘경원 표석은 농대석(籠臺石)과 가첨석(加簷石)은 1823년부터 사용하였던 것이고, 비신(碑身)은 1863년에 고쳐서 다시 사용하였다.70 표석의 크기는 천봉하면서도 계속 같은 크기이며, 현재 비신의 실측 높이는 220cm이다. 비신 후면에는 1857년에 순종을 순조(純祖)로 추숭한 묘호까지 작성하였다.
영조 연간에 조선 후기 실정에 맞도록 왕실 상장례를 정리한 『國朝喪禮補編』에 비의 크기를 규정하였다. 능에 설치하는 비신의 크기는 크기 5尺4寸5分[약 163cm]이고, 묘 비신의 크기는 5尺 [150cm]로 규정하였던 것71에 반하여 휘경원에 2m가 넘는 비석을 설치한 것은 피장자인 유빈 박씨의 지위가 조성 당시에 크게 작용한 것으로 풀이된다. 반면에 원의 능상 석물은 더 크게 치장하지 않아 상대적으로 왕실의 관심이 떨어지는 점을 볼 수 있다.
현재의 휘경원 능상 석물은 대부분 1762년 옛 장헌세자 묘의 석물이다. 처음 휘경원이 조성된 1863년에 휘경원 석물은 ‘옛 석물’을 다듬어서 사용하였다고 전한다. 휘경원 관련 의궤에서 명확하게 수은묘의 석물이라고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수은묘 석물의 크기와 휘경원 석물의 크기를 비교하고, 양식적 특성을 파악해보면72 같은 석물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처럼 휘경원 봉분 석물과 능상 석물은 원제(園制)를 갖추었으며, 표석의 크기와 구조는 능제(陵制)에 가까워 천장을 하면서 위상을 높였다고 볼 수 있다.
헌종과 두 왕후가 안장된 경릉은 조선왕릉 가운데 유일하게 삼연릉(三連陵) 형식을 갖추었는데, 경릉 이전의 왕과 두 명의 왕후가 있는 경우는 단릉 형식이나 동원이강릉 형식을 따랐던 점과 비교하면 이 시기에는 시간적인 단축과 경제적인 효용을 위하여 세 기의 봉분이 이어진 형식을 만들었다. 경릉 봉분의 형상은 단릉에서 쌍릉으로, 쌍릉에서 삼연릉으로 변화하면서 난간석과 혼유석은 지속적으로 추가되었다. 처음에 효현왕후의 봉분과 난간석을 가장 먼저 만들었고, 1849년 헌종의 봉분이 더해지고, 1903년 효정왕후의 봉분이 추가되면서 난간석이 추가되었다. 난간석을 잇는 고삭석주는 50년 이상의 시간 차이를 두고 제작되었는데, 고삭석주의 받침 부분이 부채꼴과 사각형으로 다르게 구성하였다(Fig. 3).73 일반적으로 기존에 만들었던 석물과 유사하게 제작하는 대신에 다양한 모습이 혼재되어 있다. 이는 19세기 이후에 조성된 능묘 석물이 정교함이 저하되는 경향을 여실히 보여준다.
헌종 경릉의 석물은 대체로 1843년 효현왕후(孝顯王后)가 승하하여 경릉을 처음 조성할 때 제작한 것이다. 경릉의 석인상은 팔의 입체성을 표현할 수 없어서 형식화된 의습(衣褶)으로 대체하였고, 목이 몸통에 매몰되는 모습이며 홀을 들거나 칼을 짚고 있는 석인상의 손가락 표현을 곡선으로 나타내 인체의 구성과 묘사의 구체성이 떨어진다(Fig. 4).74
경릉에는 표석이 한 기만 남아 있는데, 이는 다른 능과 비교해보아도 격이 낮은 구성이다. 문조 수릉의 비각에는 표석이 두 기가 있는데 한 기는 1835년에 세워서 1846년에 천봉시 음기를 다시 쓰고, 1890년 신정왕후가 승하한 후에 음기를 고쳐쓴 것이고, 다른 한 기는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1902년 존호를 올리면서 제작한 것이다(Table 5).75 반면에 헌종 경릉에는 세 명의 왕과 왕후가 안장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기의 표석만 남아 있다(Table 6).
본래 경릉의 표석은 1843년에 제작하였고76, 1849년 헌종이 승하하면서 가첨석과 농대석은 기존의 것을 사용하고 비신만 높이 8尺에 달하는 것으로 교체하였다.77 이후 1904년 효정왕후가 승하하여 다시 기존의 표석을 다시 갈아서 사용하였다.78 그리고 대한제국 순종이 진종, 헌종, 철종을 추존하면서 표석을 또다시 갈아서 사용하였다.79 이때 표신의 높이는 6尺1寸, 너비 2尺1寸, 두께가 1尺5寸5分으로 현재의 크기인 높이 191.9cm, 너비 65.7cm, 두께 47cm로 대체로 일치하며, 기존의 표석을 다시 사용하였음을 기록하였다. 또한 의궤 기록에 따르면 현재 헌종 경릉 비각 내에 있는 표석은 농대석과 가첨석이 1843년에 제작한 것으로 비신은 1849년에 세웠던 것을 1904년과 1908년에 걸쳐 깎아 내어 사용하였다. 일반적으로 대한제국 시기에 존호가 추상된 경우에 표석을 추가로 제작하여 장조 융릉처럼 두 기, 진종 영릉처럼 세 기의 표석을 설치하였던 것에 반하여 경릉의 표석은 한 기에 불과하여 상대적으로 조촐하게 구성하였다. 표석을 추가하는 방법보다는 경릉은 처음 조성되었던 때부터 꾸준하게 한 기의 표석만 잔존시켜 왕실의 관심에서 벗어나 있던 점을 파악할 수 있다.
1864년에 조성된 철종 예릉 석물은 옛 중종 정릉(靖陵)과 순조 인릉(仁陵) 석물을 재사용하였다.80 고종 대에 철종 예릉을 조성할 때 인릉, 수릉과 휘경원의 사례를 비추어보아 새 능지에 그 전에 사용하였던 석물과 기와가 있으므로 철종 예릉도 옛 석물을 파내어 사용하도록 하였다.81 현재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은 문석인과 무석인, 석수, 망주석 대석이 1537년 장경왕후 희릉의 석물을 다시 사용한 것이고, 예릉의 난간석과 망주석 주신, 상석과 표석은 고종 연간에 새로 만들었다(Table 7).
19세기 이전의 조선왕릉이 천봉하는 경우는 대체로 봉분을 비롯하여 곡장 안팎에 있는 석물을 새로 만들었다. 반면에 19세기 이후에 조선 왕실의 능원을 천봉하는 경우는 15세기, 16세기, 18세기 석물을 다시 사용하게 되는데, 이는 왕실 재정의 곤궁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일 뿐 아니라 시급하게 옮겨지면서 석물을 새로 제작할 시간이 부족했던 점을 알려준다. 기존의 천봉은 능을 조성하는 것만큼 공역이 필요하기 때문에 오랜 논의를 통하여 진행하였지만 19세기 천봉은 풍수에 따라 옮기는 행위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특히 18세기 후반 영조와 정조의 사례를 통해 왕실 종통의 승계가 이어지기를 기원하면서 천봉이 행해졌고, 이는 석물의 형식과 제작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로써 다양한 시대 양식이 혼재된 석물로 구성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Ⅳ. 맺음말

조선왕릉은 조선을 통치한 왕과 왕후의 무덤으로 추존된 인물의 무덤도 포함되어 있다. 조선왕릉 뿐만 아니라 원과 묘의 위치도 지배층의 의견에 따라 조성되거나 이장되었으며, 왕실 원·묘의 석물도 능을 조성하는데 참여한 장인이 조성하였다. 능호를 갖는 조선왕릉 50기 가운데 천봉한 조선왕릉은 17기로 전체의 34%가 천봉하였다. 능이 천봉하는 이유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며, 15세기에는 전쟁으로 인하여 북도팔릉의 일부가 천장하였고, 17~18세기에는 석물 문제로 인한 천봉이 있었으며, 20세기에는 도시 확장으로 인한 천봉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종통 계승을 위한 풍수학적 접근과 피장자 추존에 따른 이장은 조선 전반에 걸쳐서 행해졌다.
최초의 조선왕릉은 태조의 비 신덕왕후 정릉으로, 태조의 수릉지로 여긴 곳이기 때문에 도성 내에 위치하였고, 대형의 석물을 사용하여 치장하였다. 그러나 태종이 집권하면서 태조의능을 정릉으로 삼지 않고, 도성 밖에 조성하였으며, 신덕왕후 정릉을 천봉하였다. 이처럼 조선 전기의 왕은 수릉지를 적극적으로 탐색하여도 후대에 의하여 수릉지에 안장되지 못하기도 하였고 심지어 본인과 뜻과 다르게 천봉되는 경우도 있었다.
15~16세기에 조선왕릉이 천봉하는 경우는 정치적인 이유와 침략에 따른 이장, 추존이나 강등에 따른 이장 등이 있었다. 예종은 세종과 소헌왕후 영릉의 천장은 왕실의 번영을 기원하며 옮겼고, 연산군은 사친의 추숭에 따라 폐비 윤씨의 무덤을 능으로 승격하며 옮겼으며, 중종은 유교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현덕왕후의 추존하고 현릉을 옮기는 한편, 본인의 비 장경왕후의 희릉을 무리하게 천봉하기도 하였다. 중종의 아들인 명종도 중종 정릉을 장경왕후와 분리하여 천봉을 강행하는 모습을 보인다.
조선 후기의 천봉은 왕의 직계 사친을 추존하거나 관리상 문제가 생긴 경우도 한정 짓는 등 더 심도 깊게 논의되었다. 인조의 경우는 자신의 직계와 관련된 정원군, 선조를 추존하고 그 무덤을 옮겨 자신의 정통성을 드러내었다. 한편 현종과 영조는 봉분 석물에 문제가 생기는 경우 새로운 지역으로 천장하여 석물을 새로 조성하였고, 정조는 자신이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며 왕위를 계승하였기 때문에 사친의 무덤을 새로운 세력지에 조성하여 정치적인 의미를 갖추고 정통성도 드러내었다.
이처럼 조선 전반에 걸친 천봉은 왕실 인물의 재평가에 따른 추존과 강등이 일반적이었다. 특히 사왕(嗣王)은 자신의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위하여 사친의 무덤을 능으로 올리거나 혹은 원으로 조성하면서 천봉하였다. 중종은 본인의 수릉지를 정립하기 위하여 장경왕후의 능을 천장하였고, 이후 왕위를 계승한 명종이 중종 정릉을 분리하기 위하여 천봉하였다. 17세기 이후에는 봉분 석물에 문제가 생겨 천봉하였고, 정치적인 근거지에 힘을 싣기 위하여 천봉하는 경우도 있으나 모두 충분한 논의 끝에 국장의 절차에 준하여 진행되었다. 이는 풍수에 의한 천장으로 기록하였지만 선대 무덤의 관리는 왕위를 승계한 자의 정당성과 지지를 확보하는 과정이었다.
19세기 조선왕릉의 천봉은 기존과 달리 왕의 직계와 관련된 인물의 무덤으로 한정한 반면에 두 차례 옮기는 경우가 처음으로 발생하였다. 영조와 정조는 왕릉 석물의 규격과 형태, 문양과 의미를 파악하여 천봉하는 능에 적용하였지만 철종 연간에 천봉된 왕릉은 15세기와 16세기에 사용하였던 석물을 재사용할 뿐 아니라 제도와 규범을 지키지 않았다. 게다가 철종은 순조, 순조의 사친인 수빈 박씨, 순조의 세자인 효명세자 무덤을 옮기면서 철종 자신의 직계 인물을 순조로 여겼던 점이 드러난다.
철종은 순조 인릉은 먼 지역으로 천봉하면서 기존의 석물을 묻고, 15세기 세종대의 석물을 다시 사용하였다. 그리고 문조 수릉은 두 번 천봉하면서 석물을 추가하여 능제를 보완하였다. 또한 유빈 박씨 휘경원은 역시 두 번 천봉하였는데 휘경원의 봉분의 석물은 대부분 본래부터 영우원의 석물을 재사용하면서 봉분 둘레의 사대석만 제작하여 사용하였다. 그리고 휘경원의 표석은 왕릉보다 더 큰 크기의 표석을 사용하여 위계를 중요시 여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달리 헌종 경릉은 천봉도 없고, 능제를 갖추었지만 간소화된 모습을 보이는데, 세 명의 피장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릉이나 동원이강 형식이 아니라 삼연릉의 간단한 모습이며, 표석도 지속적으로 재사용하여 상대적으로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다.
특히 19세기 철종은 순조와 관련된 인물의 능·원을 천봉하면서 철종의 근간을 순조로 삼았으며, 이와 동시에 왕위 계승의 정통성을 강화하고 후사의 승계를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로 인하여 19세기에 조성된 능·원은 다른 시대에 제작된 석물이 유독 많아졌다. 19세기에 조성된 능·원은 15세기와 18세기에 정립한 제도를 따르지 않아 새로운 형식이 창출되었고, 다양한 시대성을 보여 구성이 해체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 과도기적 형상을 드러낸다.

Notes

1) 『新增東國輿地勝覽』 卷5 開城府下 陵寢 毅宗陵.

2) 무덤을 천장할 때에는 그 종류에 따라서 천릉(遷陵), 천원(遷園), 천묘(遷墓)라고 칭하였으며, 왕실에서 조성한 무덤을 옮기는 경우 천봉(遷奉), 천장(遷葬) 혹은 천조(遷厝)라고도 하였다. 조선 왕실 무덤을 옮길 때 설치된 임시 관청은 천릉도감(遷陵都監), 천원도감(遷園都監), 천묘도감((遷墓都監), 천봉도감(遷奉都監) 등이 설치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천릉과 천원을 함께 다루기 때문에 이를 포괄하는 왕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용어인 천봉(遷奉)을 주로 사용하며, 무덤의 구분에 따라 천릉과 천원을 언급하도록 하겠다.

3) 황정연, 「임진왜란 이후 새로운 능제(陵制)의 도입과 그 영향」, 『인문사회과학연구』 15-3 (부경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2014); 박수정, 「『국조오례의』 의례 시행과 개정 논의」, 『한국학』 40-2 (한국학중앙연구원, 2017).

4) 김민규, 「朝鮮 王陵 長明燈 硏究」, 『미술사학연구』 274 (한국미술사학회, 2012 6); 김이순, 「세종대왕 ‘구 영릉(舊 英陵)’ 석물 연구」, 『한국학』 3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신재훈, 「조선 전기 천릉(遷陵)의 과정과 정치적 성격」, 『조선시대사학보』 58 (조선시대사학회, 2011); 안경호, 「세종대왕 초장지(舊 英陵)에 대한 재론(再論)」, 『한국학』 31-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5) 이희중, 「17, 8세기 서울 주변 왕릉의 축조, 관리 및 천릉 논의」, 『서울학연구』 17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1); 김충현, 「효종(孝宗) 영릉(寧陵)의 조성과 능제(陵制)의 변화」, 『역사문화논총』 7 (역사문화연구소, 2012); 이현진, 「1789년(정조 13) 永祐園에서 顯隆園으로의 遷園 절차와 의미」, 『서울학연구』 51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 연구소, 2013); 차문성, 「인조 舊 長陵의 위치비정과 석물에 관한 고찰」, 『민족문화』 44 (한국고전번역원, 2014); 신병주, 『조선왕실의 왕릉조성』 (세창미디어, 2017); 김민규, 『융건릉: 정조대왕 서거 220주기 기념출판』 (수원박물관, 2021); 이현진, 「1855년(철종 6) 徽慶園의 遷園과 그 성격」, 『동양고전연구』 88 (동양고전학회, 2022).

6) 『태조실록』 권11, 1397년(태조 6) 1월 3일.

7) 『태종실록』 권15, 1408년(태종 8) 6월 27일.

8) 『태종실록』 권17, 1409년(태종 9) 2월 23일.

9) 윤정, 「태조대 정릉 건설의 정치사적 의미」, 『서울학연구』 37 (서울시립대학교 서울학연구소, 2009), pp. 157-179.

10) 정해득, 「조선초기 왕릉제도의 정비과정」, 『조선시대사학보』 63 (조선시대사학회, 2012), p. 10.; 황정연, 「조선 태조비 신덕왕후 정릉의 조성과 봉릉 고찰」, 『서강인문논총』 46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6), p. 252;

11) 『태종실록』 권1, 1401년(태종 1) 4월 1일.

12) 『태종실록』 권11, 1406년(태종 6) 4월 7일.

13) 『태종실록』 권17, 1409년(태종 9) 2월 23일.

14) 『태종실록』 권19, 1410년(태종 10) 2월 10일; 『春官通考』卷之十六.

15) 『태종실록』 권20, 1410년(태종 10) 9월 22일.

16) 『세종실록』 권83, 1438년(세종 20) 10월 1일.

17) 『세종실록』 권113, 1446년(세종 28) 7월 19일; 해당 기사에서 석실 구성과 봉분 주변의 석물 구조에 대하여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고, 이 내용은 『세종실록』오례의와 『국조오례의』흉례 치장조에 그대로 이어진다(전나나, 「조선왕릉 봉분의 구조적 특성에 대한 일고」, 『문화재』 45-1 (국립문화재연구원, 2012), pp. 54-55).

18) 『예종실록』 권2, 1468년(예종 즉위년) 11월 29일.

19) 『예종실록』 권2, 1468년(예종 즉위년) 12월 27일.

20) 『예종실록』 권4, 1469년(예종 1년) 3월 6일.

21) 신재훈, 앞의 논문, pp. 48-52.

22) 『성종실록』 권4, 1470년(성종 1) 4월 18일.

23) 『성종실록』 권4, 1470년(성종 1) 4월 20일.

24) 『성종실록』 권100, 1479년(성종 10) 1월 10일.

25) 『성종실록』 권100, 1479년(성종 10) 1월 13일.

26) 『단종실록』 권1, 1452년(단종 즉위년) 5월 23일.

27) 『단종실록』 권2, 1452년(단종 즉위년) 7월 24일.

28) 『세종실록』 권9, 1420년(세종 2) 9월 16일; 『세종실록』 권17, 1422년(세종 4) 9월 6일; 『세종실록』 권113, 1446년(세종 28) 7월 19일; 『세종실록』 권134, 오례 흉례 의식, 치장조를 통해서 세종은 각각 헌경왕후 승하에 따른 헌릉의 조성과 태종 승하에 따른 쌍릉의 조성, 소헌왕후 영릉을 합장릉으로 조영하는 형식을 제도화하였고, 세종실록 오례의에서 봉분 내부는 석실이고 외부는 합장릉으로 규정하였다.

29) 『春官志』 卷1 「陵寢」 中宗恭僖大王靖陵…文定王后喪 明廟傳敎曰 遷陵之後 國無吉事 至於別卜泰陵.

30) 『重訂南漢志』 卷11 「三陵紀事」…中廟初葬高陽 禧陵同塋宅兆不吉尹元衡力贊 文定王后遷于漢濱卑湫之地人莫敢言世傳遷 陵時哭聲自壙中出役者無不聞之翌年順懷世子卒越二年 文定后薨又明年 明宗升遐人謂遷陵之咎至壬辰被倭賊掘發之變臣民之痛尙忍言哉.

31) 『중종실록』 권21, 1514년(중종 9) 10월 14일.

32) 『세종실록』 권103, 1444년(세종 26) 12월 22일.

33) 『燃藜室記述』別集 第二卷, 祀典典 山陵, 英陵初在廣州 獻陵局內 世祖朝議者云非吉地當遷 世祖召徐居正問之居正對曰以山水方位爲子孫禍福臣未知也且世之遷葬求獲福也王者更有何望哉.

34) 『광해군일기』 권147, 1619년(광해군 11) 12월 29일.

35) 『인조실록』 권11, 1626년(인조 4) 2월 9일.

36) 『인조실록』 권11, 1626년(인조 4) 3월 15일.

37) 『인조실록』 권11, 1626년(인조 4) 4월 1일.

38) 현재 원종 장릉의 표석은 1753년에 희릉, 태릉, 효릉 강릉의 표석과 함께 세웠다.

39) 『禮葬都監儀軌』, 「浮石所所掌」, 1627년(인조 5)(奎13518).

40) 『인조실록』 권26, 1632년(인조 10) 3월 11일.

41) 인조가 사친을 추존하는 과정은 김한신, 「仁祖代 前半期 왕권과 정치질서 재편(1623-1636)」, 『한국사학보』 78 (고려사학회, 2020), pp. 132-139 참조.

42) 『인조실록』 권22, 1630년(인조 8) 2월 4일.

43)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 「穆陵遷葬時山陵都監儀軌」 ‘庚午五月二十八日’.

44) 『현종실록』 권3, 1660년(현종 1) 7월 18일.

45) 『현종실록』 권3, 1660년(현종 1) 8월 5일.

46) 『현종실록』 권3, 1660년(현종 1) 12월 9일.

47) 『현종실록』 권4, 1661년(현종 2) 4월 18일.

48) 『현종실록』 권4, 1661년(현종 2) 12월 8일.

49) 『현종실록』 권21, 1673년(현종 14) 3월 24일.

50) 『承政院日記』 234책, 1673년(현종 14) 7월 1일.

51) 『承政院日記』 337책, 1698년(숙종24) 2월 25일.

52) 『영조실록』 권29, 1731년(영조 7) 3월 16일.

53) 궁원제에 대한 자세한 사항은 정경희, 「朝鮮後期 宮園制의 성립과 변천」, 『서울학연구』 23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2004) 참조.

54) 『정조실록』 권27, 1789년(정조 13) 7월 11일.

55) 『日省錄』 543책, 1796년(정조 20) 9월 10일. 華城紀蹟碑上之十三年 己酉遷奉我顯隆園于水原府之花山移其邑治於柳川越翌年庚戌元子誕降國人胥悅越….

56) 해당 시기에 대한 정치사적 특징은 한국역사연구회, 『조선정치사 1800~1863』 상·하 (청년사, 1990) 참조.

57) 『헌종실록』 권16, 1849년(헌종 15) 6월 6일.

58) 이왕무, 「조선후기 국왕의 陵行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p. 115.

59) 『철종실록』 권1, 1849년(철종 즉위년) 6월 17일.

60) 이영춘, 「철종초(哲宗初)의 신해조천예송(辛亥祧遷禮訟)」, 『조선시대사학보』 1 (조선시대사학회, 1997), pp. 249-252.

61) 『승정원일기』 2661책, 1863년(철종 14) 2월 25일.

62) 신병주, 「조선시대 동구릉의 조성 과정에 관한 연구」, 『조선시대 문화사』 상 (일지사, 2007), p. 122.

63) 『숙종실록』 권1, 1674년(숙종즉위년) 9월 15일.

64) 현재 순조 인릉에는 1857년에 세운 철종 어필 표석과 1900년에 세운 고종 어필 표석이 있다(황정연, 「조선시대 능비(陵脾)의 건립과 어필비(御筆脾)의 등장」, 『문화재』 42-4, 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1857년 인릉에 순원왕후가 합봉한 후에 개수한 이 표석은 본래 1835년에 조성하였던 인릉 표석을 1856년 천봉시 깎아서 다시 사용하였고, 이듬해 합봉한 후에 다시 표석의 음기를 다시 새겼다. 1835년, 1856년, 1857년에 바뀐 인릉 표석 음기를 탁본한 내용이 장서각에 전해진다.

65) 김이순, 「세종대왕 ‘구 영릉(舊 英陵)’ 석물 연구」, 『정신문화연구』 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안경호, 세종대왕 초장지(舊 英陵)에 대한 재론(再論)」, 『정신문화연구』 3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66) 『[文祖]綏陵遷奉山陵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1855년.

67) 『[神貞王后]綏陵山陵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1890년.

68) 『[顯穆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日錄, 1823년; 『徽慶園遷奉園所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日錄 1855년; 『[顯穆綏嬪]徽慶園遷奉園所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日錄, 1863년.

69) 『[顯穆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日錄, 1823년.

70) 『[顯穆綏嬪]徽慶園遷奉園所都監儀軌』 下, 大浮石所, 碑石圖, 1863년.

71) 『國朝喪禮補編』 圖說, 碑.

72) 김이순, 「융릉과 건릉의 석물조각」, 『미술사학보』 31 (미술사학연구회, 2008).

73) 전나나, 「조선왕릉 병풍석과 난간석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21, p. 170.

74) 전나나, 「조선왕릉 석인상 연구」, 『동악미술사학』 12 (동악미술사학회, 2011), pp. 94-96.

75) 문조 수릉의 표석을 각 시기별로 탁본한 유물이 장서각에 전해진다.

76) 『孝顯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 下, 大浮石所儀軌, 表石圖, 1843년.

77) 『憲宗景陵山陵都監儀軌』 下, 大浮石所儀軌, 碑石圖, 1849년.

78) 『孝定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 下, 大浮石所儀軌, 碑石圖, 1904년, 碑卽表石本陵表石仍用前後面磨淨更爲入刻.

79) 『追尊時儀軌』, 表石所儀軌, 1908년 永陵表石新建 景陵舊表石 睿陵舊表石磨淨改建.

80) 김민규, 「조선왕릉 장명등 연구」, 『미술사학연구』 274호 (한국미술사학회, 2012), pp. 63-65; 전나나, 「朝鮮王陵 石人像 硏究」, 『동악미술사학』 12호 (동악미술사학회, 2011), pp. 81-82.

81) 『承政院日記』 2672책, 1864년(고종 1) 1월 8일.

Fig. 1.
휘경원 봉분의 사대석 Wrapped Stones of Hwigyŏng wŏn Burial Mound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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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휘경원 표석 Tombstone of Hwigyŏng wŏn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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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1849-1904년 경릉 고삭석주 바닥단면 Cross section of Kyŏngnŭng’s Gosak sŏkju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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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1843년 경릉 문석인 Stone Sculpture of Civil Official of Kyŏngnŭng Royal Tomb, in 1843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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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조선 전기 15-16세기에 천봉한 조선왕릉 A List of Relocated Chosŏn Royal Tombs in the 15th and 16th Centuries
Reigning King Trans ferred Year Name of the King/Queen Name of the Tomb Tomb Type Location Reason for Relocation Former Name of the Tomb
T’aejong 太宗 1409 Queen Shindŏg 神德王后 (1356-1396) Chŏngnŭng 貞陵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Hwanghwabang 皇華坊 → Sahari 沙河里 Political 政治
1410 Mokcho·Queen Hyogong 穆祖·孝恭王后 Tŏngnŭng· Allŭng 德陵·安陵 Unknown 未詳 → Twin Mounds 雙陵 Kyŏnghŭngsŏng 慶興城 → Kap’yŏngsa 加平社 Invasion 侵略
Yejong 睿宗 1469 Sejong 世宗 (1397-1450)·Queen Sohŏn 昭憲王后 (1395-1446) Yŏngnŭng 英陵 Joint Burial Mound 合葬陵 → Joint Burial Mound 合葬陵 Hŏllŭng 獻陵 → Yeoju 驪州 Geomancy 風水
Yŏnsan’gun 燕山君 1497 Deposed Queen Yun [Chehŏn wanghu] 廢妃尹氏 (1455-1482) Hoemyo 懷墓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Changdan 長湍 → Ch’ŏnjangsan 天藏山 Posthumously Honored 追尊
Chungjong 中宗 1513 Queen Hyŏndŏk 顯德王后 (1418-1441) Hyŏllŭng 顯陵 Single Mound 單陵 → Double Mounds on Separate Hills 同原異岡陵 Ansan 安山 → Hyŏllŭng 顯陵 Posthumously Honored 追尊 Sorŭng 昭陵
1537 Queen Changgyŏng 章敬王后 (1491-1515) Hŭirŭng 禧陵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Hyeolleung 獻陵 → Koyang namwŏndangni 高陽 南元堂里 Geomancy 風水
Myŏngjong 明宗 1562 Chungjong 中宗 (1488-1544) Chŏngnŭng 靖陵 Double Mounds on Separate Hills 同原異岡陵 → Single Mound 單陵 Koyang Hŭirŭng 高陽 禧陵 → Kwangju Sŏllŭng 廣州 宣陵 Geomancy 風水
Table 2.
조선 후기 17-18세기에 천봉한 조선 왕실 무덤 A List of Relocated Chosŏn Royal Tombs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Reigning King Transferred Year Name of the King/Queen Name of the Tomb Tomb Type Transferred Location Reason for Relocation Former Name of the Tomb
Injo 仁祖 1627 Chŏngwŏn’gun [Wŏnjong] 定遠君 [元宗] (1580-1620) Hŭnggyŏngwŏn [Changnŭng] 興慶園 [章陵] Single Mound 單陵 → Twin Mounds 雙陵 Kokch’olli 谷村里 → Kimp’o Hugang 金浦 後岡 Posthumously Honored 追尊
1630 Sŏnjo 宣祖 (1552-1608) Mongnŭng 穆陵 Single Mound 單陵 → Double Mounds on Separate Hills 同原異岡陵 Yangju Kŏnwŏllŭng Sŏgang 楊州 健元陵 西岡 → Kŏnwŏllŭng cheigang 健元陵 第二岡 Geomancy 風水
Hyŏnjong 顯宗 1673 Hyojong 孝宗 (1619~1659) Yŏngnŭng 寧陵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Yangju Kŏnwŏllŭng Sŏgang 楊州 健元陵 西岡 → Yŏju Yŏngnŭng Hongjedong 驪州 英陵 弘濟洞 Collapse of Stones 石物 崩壞
Sukjong 肅宗 1719 Lady Hŭibin Chang 禧嬪 張氏 (1659~1701) Taebinmyo 大嬪墓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Yangju Injangni 楊州 茵匠里 → Gwangju Jinhaechon 廣州 眞海村 Political 政治
Yŏngjo 英祖 1731 Injo 仁祖 (1595~1649)·Queen Inyŏl 仁烈王后 (1594~1636) Changnŭng 長陵 Twin Mounds 雙陵 → Joint Burial Mound 合葬陵 P’aju Unch’ŏlli 坡州 雲川里 → Kyoha 交河 Snakes in the Stone Screens 蛇變
Chŏngjo 正祖 1789 Prince Changhŏn 莊獻世子 [莊祖] (1735~1762) Hyŏllyungwŏn [Yungnŭng] 顯隆園 [隆陵]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Yangju Chungnangp’o Paebongsan 楊州 中浪浦 拜峰山 → Suwŏn Hwasan 水原 花山 Posthumously Honored 追尊 Yŏnguwŏn 永祐園
Table 3.
19세기 이후 천봉한 조선 왕실 무덤 A List of Chosŏn Royal Tombs Relocated from the 19th Century Onwards
Reigning King Year Name of the King / Queen Name of the Tomb Tomb Type Location Reason for Relocation Former Name of the Tomb Twice
Sunjo 純祖 1821 Chŏngjo 正祖 (1752-1800) Kŏllŭng 健陵 Single Mound 單陵 → Joint Burial Mound 合葬陵 Hwasŏng Hyŏllyungwŏn Tonggang 華城 顯隆園 東岡 → hyanggyo Site 舊 鄕校基 Geomancy 風水 Geomancy 風水
Heŏnjong 憲宗 1846 Ikchong [Prince Hyomyŏng, Munjo] 翼宗 [孝明世子, 文祖] (1809-1830) Surŭng 綏陵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Ŭirŭng Chwagang 懿陵 左岡 → Yangju Yongmabong 楊州 龍馬峰 Geomancy 風水 Yŏn’gyŏngmyo 延慶墓
1846 Prince Namyŏn 南延君 Myo 墓 Unknown 未詳 → Joint Burial Mound 合葬陵 Yŏnch’ŏn 漣川 → Tŏksan 德山 Geomancy 風水
Ch’ŏlchong 哲宗 1855 Ikchong [Prince Hyomyŏng, Munjo] 翼宗 [孝明世子, 文祖] (1809-1830) Surŭng 綏陵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Yangju Yongmabong 楊州 龍馬峰 → Kŏnwŏllŭng Chwagang 健元陵 左岡 Geomancy 風水
1855 Lady Yubin Park 綏嬪 朴氏 (1770-1823) Hwigyŏngwŏn 徽慶園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Yangju Paebongsan 楊州 拜峯山 → Yangju Sun’gangwŏn Hugang 楊州 順康園 後岡 Geomancy 風水
1856 Sunjo 純祖 (1790-1834) Iillŭng 仁陵 Single Mound 單陵 → Single Mound 單陵 Kyoha 交河 → Hŏllŭng Ugang 獻陵 右岡 Geomancy 風水
1856 Chŏn’gye taewŏn’gun 全溪大院君 (1785-1841) Myo 墓 Single Mound → Joint Burial Mound Yangju Chin’gwan 楊州 津寬 → P’och’ŏn 抱川 Geomancy 風水
1863 Lady Yubin Park 綏嬪 朴氏 (1770-1823) Hwigyŏngwŏn 徽慶園 Single Mound → Single Mound Yangju Sun’gangwŏn Hugang 楊州 順康園 後岡 → Yangju Talmadong 楊州 達摩洞 Geomancy 風水
Kojong 高宗 1906 Hŭngsŏndaewŏn’gun 興宣大院君 (1821-1898) Hŭngwŏn 興園 Unknown Koyang Kongdŏngni 高陽 孔德里 → P’aju Unch’ŏnmyŏn Taedŏktong 坡州 雲泉面 大德洞 Geomancy 風水
1910-1945 1919 Empress Myeongseong 明成皇后 (1851-1895) Hongnŭng 洪陵 Single Mound → Joint Burial Mound Yangju Ch’ŏnjangsan 楊州 天藏山 → Myojŏksan Kŭmgok 妙寂山 金谷 Demise of Emperor 皇帝 昇遐
1926 Empress Sunmyeong 純明皇后 (1872-1904) Yurŭng 裕陵 Single Mound → Joint Burial Mound Yangju Yongmasan Naedong 楊州 龍馬山 內洞 → Hongnŭng Chwagang 洪陵 左岡 Demise of Emperor 皇帝 昇遐
1944 Crown Munhyo 文孝世子 (1782-1786) Hyoch’angwŏn 孝昌園 Single Mound → Single Mound Yangju Yulmoktong 楊州 栗木洞 → Sŏsamnŭng 西三陵
1949 Crown Prince Ŭiso 懿昭世孫 (1750-1752) Ŭiryŏngwŏn 懿寧園 Single Mound → Single Mound Yangju Ahyŏn 楊州 阿峴 → Sŏsamnŭng 西三陵 Development 開發 Uisomyo 懿昭墓
1966 Hŭngsŏndaewŏn’gun 興宣大院君 (1821-1898) Hŭngwŏn 興園 Unknown → Joint Burial Mound P’aju Unch’ŏnmyŏn Taedŏktong 坡州 雲泉面 大德洞 → Namyangju 南楊州 Difficulties in Management
1969 Lady Hŭibin Chang 禧嬪 張氏 (1659-1701) Taebinmyo 大嬪墓 Single Mound → Single Mound Gwangju Jinhaechon 廣州 眞海村 → Sŏorŭng 西五陵 Development 開發
1969 Deposed Queen Yun [Chehŏnwanghu] 廢妃尹氏 (1455-1482) Hoemyo 懷墓 Single Mound Ch’ŏnjangsan 天藏山 → Sŏsamnŭng 西三陵 Development 開發
1970 Lady Yŏngbin Lee 暎嬪李氏 (1696-1764) Sugyŏngwŏn 綏慶園 Single Mound → Single Mound Yangju Yŏnhŭigung Taeyadong 楊州 衍喜宮 大野洞 → Sŏorŭng 西五陵 Development 開發
Table 4.
순조·순원왕후 인릉의 석물 제작 연대 Chronology of Illŭng Stoneworks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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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5.
문조·신정왕후 수릉의 석물 제작 연대 Chronology of Surŭng Stoneworks(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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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6.
헌종· 효현왕후· 효정왕후 경릉 표석의 변천 Development of Kyŏng nŭ ng Royal Tomb ’s Tombstones (The Academy of Korean Studies https://jsg.aks.ac.kr/,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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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7.
철종·철인왕후 예릉의 석물 제작 연대 Chronology of Yer ŭng Stoneworks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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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國朝喪禮補編』.

『承政院日記』.

『新增東國輿地勝覽』.

『燃藜室記述』.

『日省錄』.

『朝鮮王朝實錄』.

『重訂南漢志』.

『春官志』.

『春官通考』.

『禮葬都監儀軌』 1627.

『[顯穆綏嬪]徽慶園園所都監儀軌』 下, 1823.

『徽慶園遷奉園所都監儀軌』 下, 1855.

『[顯穆綏嬪]徽慶園遷奉園所都監儀軌』 下, 1863.

『孝顯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 下, 1843.

『憲宗景陵山陵都監儀軌』 下, 1849.

『孝定王后景陵山陵都監儀軌』 下, 1904.

『追尊時儀軌』, 1908.

김민규, 「朝鮮 王陵 長明燈 硏究」, 『미술사학연구』 274, 한국미술사학회, 2012. 6.

,『융건릉: 정조대왕 서거 220주기 기념출판』, 2021.

김이순, 「융릉과 건릉의 석물조각」, 『미술사학보』 31, 2008.

,「세종대왕 ‘구 영릉(舊 英陵)’ 석물 연구」, 『한국학』 32-1,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김충현, 「효종(孝宗) 영릉(寧陵)의 조성과 능제(陵制)의 변화」, 『역사문화논총』 7, 2012.

김한신, 「仁祖代 前半期 왕권과 정치질서 재편(1623~1636)」, 『한국사학보』 78,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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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osŏn wangjo sillok.

Ch’un’gwanji.

Ch’un’gwan t’onggo.

Chungjŏngnamhanji.

Ilsŏngnok.

Kukcho sangnye pop’yŏn.

Sinjŭng tongguk yŏji sŭngnam.

Sŭngjŏngwŏn ilgi.

Yŏllyŏshil gisul.

Yejang togam ŭigwe(1627).

Hwigyŏngwŏn ch’ŏnbong wŏnso togam ŭigwe(1855).

Hwigyŏngwŏn ch’ŏnbong wŏnso togam ŭigwe(1863).

Hwigyŏngwŏn wŏnso togam ŭigwe(1823).

Hyohyŏn wanghu kyŏngnŭng sallŭng togam ŭigwe(1849).

Hyojŏng wanghu kyŏngnŭng sallŭng togam ŭigwe(1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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