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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구례 화엄사 사천왕상과 벽암 각성, 조각승 인균

Abstract

이 글은 정확한 제작 시기와 조각승을 알 수 없는 <화엄사 사천왕상>에 대한 것이다. <화엄사 사천왕상>은 다행히 1628년 <송광사 사천왕상>과 도상, 양식이 유사하여 이들과 비교하여 1635-36년 무렵 조각승 인균이 주관해 조성했을 가능성을 밝혔다. 인균은 송광사, 화엄사, 흥국사, 이 세 사찰에서 모두 불상을 조성했으며, 특히 <송광사 사천왕상>을 응원과 함께 조성했다. 그 경험을 살려 <화엄사 사천왕상>도 인균이 주도하여 조성했을 것으로 봤다.한편, 17세기 전반 전라남도의 세 사찰에만 쥐를 쥔 서방 천왕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지 역시 필자의 궁금증 가운데 하나였다. 호국, 재물의 상징인 쥐는 중앙아시아 호탄에서 시작하여 티베트, 그리고 명나라로 전해져 1431년 목판본으로 제작되었다. 선조의 부마인 신익성이 명의 불교 서적 및 판화를 들여오면서 이 목판본도 함께 조선에 소개되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벽암 각성은 송광사와 화엄사를 재건하면서 명대 판화를 참고하여 ‘호국과 부를 상징하는 쥐’를 서방 천왕이 쥐도록 표현했을 것이다. 이 글에서 필자는 불교 도상이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전설, 신화 등을 통해서도 새롭게 생겨나고 하나의 도상으로 정립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려 했다.

Abstract

This study focuses on the sculptures of the Four Heavenly Kings at Hwaŏmsa. It had been unknown when or by whom they were made, but fortunately, I was able to propose that they were made in 1635-36 under the supervision of the sculptor monk In'gyun, based on their similarities in iconography and style to the Four Heavenly Kings at Songgwangsa, made in 1628. In'gyun participated in the erection of Buddhist sculptures at Songgwangsa, Hwaŏmsa, and Hŭngguksa. In particular, the Four Heavenly Kings at Songgwangsa were made in collaboration with Ŭngwŏn, and it is likely that with this experience, In'gyun was able to lead the project of the Four Heavenly Kings at Hwaŏmsa.
As for the sculpture itself, I have always been curious about the rat in the hand of the King of the West, a motif that appears only in three early-17th-century temples in Jeollanamdo. A symbol of national security and wealth, the rat motif originated in Khotan, Central Asia, passed through Tibet and into Ming China where it was made into a woodcut in 1431. It is likely that Shin Iksŏng, a son-in-law of King Sŏnjo introduced this woodcut print to Chosŏn along with other Buddhist books and prints from Ming. When Pyŏgam Kaksŏng rebuilt Songgwangsa and Hwaŏmsa, he probably consulted Ming prints and put the rat, a symbol of national security and wealth, in the hand of the King of the West. In conclusion, by this study, I have aimed to demonstrate how Buddhist iconographies were not only based on Buddhist scriptures but also created through legends and myths of each region and developed to become a new iconography.

Ⅰ. 머리말

구례 화엄사 사천왕상은 의자 위에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다. 실제로 의자는 없지만, 앉은 자세는 그렇다. 앉은키만 평균 높이 4m이며, 4구 모두 나무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흙을 발라 조성한 소조상이다(Figs. 1, 2) 통상 앉아있는 사천왕상의 밑부분에 복장구를 마련하여 사천왕상 몸통 내부에 복장물을 봉안한다. 그런데 화엄사 사천왕상은 내부에 복장물을 봉안했겠지만, 별도의 복장구를 노출시키지 않아 내부를 확인할 수 없도록 했다. 이는 복장물의 도난을 방지하기 위한 제작자의 특별한 대책이었을 것이다. 4구 모두 마찬가지이다. 이런 이유로 <화엄사 사천왕상>은 조성기가 알려지지 않았고, 화엄사 사적기를 비롯한 관련 문헌 기록에도 천왕문이나 사천왕상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없어 정확히 언제 제작되었는지 파악하기 쉽지 않다.
그러나 화엄사 사천왕상의 도상과 양식은 이 상이 17세기 전반에 제작되었음을 알려준다. 1628년에 제작된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다. 도상, 형식, 양식 모두 유사해 화엄사 사천왕상의 제작 시기를 유추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특히 송광사와 화엄사의 사천왕상은 네 구 가운데 서방 광목천왕의 도상이 특별하다. 왼손에 쥐를 거머쥐고 있기 때문이다(Fig. 3). 통상 조선시대 서방 광목천왕은 거의 예외 없이 오른손에는 승리의 깃발인 당(幢)을 쥐고, 왼손바닥 위에는 작은 탑[寶塔]을 올려 둔다.1 그런데 바로 이곳 화엄사 서방 광목천왕 역시 왼손에 탑이 아닌 작은 쥐를 쥐었다. 같은 도상은 여수 흥국사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처럼 서방 광목천왕이 왼손에 쥐를 쥔 도상은 서로 인접한 세 사찰, 즉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여수 흥국사에 몰려 있다.2
이 글은 크게 세 가지 궁금증에서 시작됐다. 첫째는 구례 화엄사 사천왕상의 제작 시기와 조각승이다. 화엄사 사천왕상은 현재 정확한 제작 시기와 조각승을 알 수 없지만, 유사한 특징을 지닌 1628년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을 비롯해 같은 화엄사의 다른 전각에 봉안된 상과 비교하여 제작 시기와 조각승을 유추해 볼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둘째는 인접한 세 사찰인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여수 흥국사, 이 세 사찰의 서방 천왕이 왼손에 쥐를 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한 것이다. 특히 세 사찰은 거리도 서로 가깝지만, 몇몇 전각의 불·보살상이 조각승을 공유한다는 점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이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셋째는 사찰을 수호하는 강렬한 모습의 사천왕상이 도대체 왜 작은 크기의 쥐를 쥐고 있을까에 대한 것이다. 쥐와 사천왕상은 도대체 무슨 상관관계인지 역시 필자의 궁금증 가운데 하나이다.

Ⅱ. 구례 화엄사 천왕문, 벽암 각성, 그리고 신익성

구례 화엄사는 임진왜란(1592~1598)과 정유재란(1597~1598) 당시 큰 피해를 보았다. 전소되다시피 한 화엄사의 재건을 주도한 이가 바로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이다(Fig. 4).3 벽암 각성과 화엄사에 대해 언급한 17세기 사료는 현재 4건이 알려져 있으며(table 1), 이 가운데 표1의 ①, ②, ④에는 벽암 각성의 화엄사 재건 시작 시기에 대해 적고 있다. 1636년에 간행된 <표1의 ①>에는 벽암 각성이 1630년부터 화엄사에 머물며 정유재란 때 무너진 화엄사를 중창하는 데 앞장섰다고 적었다.4 그런데 24년 후의 기록인 <표1의 ②> 「벽암각성행장」에는 1632년부터 화엄사 재건이 시작됐다고 적고 있어 ①의 내용과는 2년의 차이가 있다. 즉 ②「벽암각성행장」에 “임인년(壬申年, 1632년, 인조10)에 화엄사를 개수하려 하자 돈을 내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으며 성대하게 총림(叢林)이 되었다”고 했기 때문이다.5 <표1의 ②>가 벽암 각성의 제자들이 스승의 행장에 대해 기록한 것이니 조금 더 면밀하게 적었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표1의 ①>의 기록은 재건을 마치고 바로 적은 기록이어서 역시 신뢰도가 높다. 두 기록을 모아보면, 1630년 화엄사 재건의 발원이 이뤄졌고 1632년부터 본격적으로 모연하여 일을 도모했던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겠다.6
벽암 각성은 입적 후 네 곳에 비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표1의 ③>이다.8 <표1의 ③>은 1660년 벽암 각성 입적 3년 후인 1663년에 화엄사 금강문 앞에 세운 비석의 비문이다. 이 비문에는 화엄사 재건의 시작이 언제인지에 대한 언급은 없지만,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전한다. “여러 산과 뭇 정원에 절을 혹은 창건하고 혹은 수리했으니, 쌍계사의 동쪽 사찰, 화엄사의 거대한 규모, 송광사의 가람 등이 바로 그 대표적인 것들이며, 나머지는 생략한다.”9 화엄사의 재건 시기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비를 세울 당시 화엄사 승려와 벽암 문도를 파악할 수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10 비문에는 화엄사 대웅전 불상의 조각승인 인균(印均, 활동 1615~1655)의 이름을 찾아볼 수 있어 흥미롭다. 인균은 1628년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 조성에도 참여했고, 1634~35년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이하 <화엄사 삼신불좌상>), 여수 흥국사 불상에 이르기까지 많은 불상 조성에 참여했다. 이와 관련해서는 뒤에서 다시 서술하려 한다.
아쉽게도 표1의 17세기 화엄사 재건 관련 사료에는 화엄사를 재건했다는 내용은 있지만, 어디를 어떻게 재건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은 없다. 다만 관련 연구자는 사찰을 재건할 때 통상의 사례로 미루어 보아 대웅전 영역과 보제루 및 천왕문을 잇는 중심 동선상의 시설만 복구되었으리라 추정한다.11 실제로 구례 화엄사 천왕문은 순천 송광사 천왕문과 마찬가지로 다포 형식 또는 유사 다포 형식으로 건축되어 있어 화엄사 천왕문이 1630년부터 1636년까지 재건과정에서 세워졌다고 봐도 큰 문제는 없다.12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심인 대웅전 영역을 가장 먼저 재건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사천왕상을 포함한 천왕문은 가장 늦은 1635~36년 무렵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한다.
물론 벽암 각성 혼자 화엄사 재건을 이뤄낸 것은 아니다. 그가 중심이 되기는 했지만, 왕실 일원들의 후원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에 순조롭게 잘 진행될 수 있었다. 대표적 후원자로는 의창군 이광(義昌君 李珖, 1589~1649)과 동양위 신익성(東陽尉 申翊聖, 1588~1644)을 꼽을 수 있다. 이광과 신익성, 그리고 소현세자(1612~1645) 내외는 실제로 <화엄사 삼신불좌상>을 조성할 때도 「시주질」에 이름을 올렸다.13 이광은 선조(宣祖, 재위 1567~1608)의 여덟째 아들이자 인조(仁祖)의 숙부이며, 화엄사에서 그의 흔적은 1636년 대웅전과 일주문을 완성하고 내 건 현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14
이광과 함께 신익성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Fig. 5). 신익성은 이광과 처남·매부 사이다. 벽암 각성은 조정의 공경대부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특히 제14대 왕 선조의 사위였던 동양위 신익성과 친분이 두터웠다.15 그와의 친분이 시작된 것은 벽암 각성의 나이 37세, 신익성의 나이 24세 때인 1612년 무렵부터이다.16 선조는 12살에 부마가 된 신익성을 특별히 여겼다고 한다.17 당시 조선에는 왕의 사위는 관직에 나아갈 수 없다는 제약이 있기는 했지만, 대신 그들에게 왕실의 다양한 예술과 최고의 문화를 누릴 수 있는 특권을 줬다.18 신익성은 개인의 자금으로 조각공을 기용하여 목판본의 책을 만들기도 했으며, 특히 중국 명나라의 책과 그림에 관심이 많았다.19 신익성이 자신의 신분을 이용해 명나라를 드나들거나, 드나드는 사람을 통제하면서 각종 책을 사들였다고 하니, 그를 통해 당시 명나라에서 유행했던 불교 판본이 조선에 유입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신익성은 <표1의 ③>을 쓴 이경석(李景奭, 1595~1671)과도 친분을 유지했다.20 이러한 인연으로 이경석이 벽암 각성의 비명을 쓰게 됐을 것이다. 신익성은 친불교적이어서 벽암 각성과 각별했을 뿐만 아니라 불교와 관련된 많은 일을 했다. 특히 1631년, 그의 나이 49세 때 금강산 여행을 하다가 마하연에서 본 승려 지공(指空)의 초상화를 수리하여 사찰로 돌려보내며 발문을 지었다는 일화도 있다.21
이광, 신익성과 친분이 두터웠던 벽암 각성 역시 불서 판각에도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지리산 능인암, 지리산 화엄사, 순천 송광사, 태인 용장사 등에서 불서를 교정(校正), 각자(刻字), 시주, 대시주, 공덕주(功德主), 판질(板秩), 연판(鍊板)에 관여했다.22 화엄사 재건과 깊은 관련이 있는 벽암 각성과 신익성은 불서 판각과 목판본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히 신익성이 명나라 불교 판본에 대한 깊은 관심은 뒤에서 이야기할 쥐를 쥔 사천왕상 도상의 조선 유입과도 관련 있다고 본다.

Ⅲ. 구례 화엄사 사천왕상의 조각승 인균 제작 가능성

화엄사 사천왕상 제작을 주도한 조각승은 누구일까? 사실 사천왕상은 불·보살상과 달리 조각승에 따라 그 특징을 파악하기 쉽지 않다. 사천왕상 가운데 조각승을 정확히 알 수 있는 사례가 매우 적기 때문이다. 현재 조각승이 알려진 17세기 사천왕상은 1628년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의 수조각승 응원(應圓 혹은 應元, 활동 1600~1636), 17세기 전반 <완주 송광사 사천왕상>의 여인(呂仁, ?~?), 1665년 김천 직지사와 1704년 하동 쌍계사의 사천왕상을 조성한 단응(端應, 활동 1656~1705), 1676년 <홍천 수타사 소조사천왕상>의 여담(汝湛, ?~?) 정도이다.23
다행히도 화엄사 사천왕상은 제작 시기가 분명한 1628년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이하 송광사 사천왕상)과 도상과 양식이 매우 유사하다(Fig. 6).24 송광사와 화엄사의 사천왕상은 북방 다문천이 비파를, 동방 지국천이 검을, 남방 증장천이 용과 여의주를, 서방 광목천은 당과 쥐를 쥐었다(Fig. 3, 7). 쥐를 쥔 서방 광목천을 제외하고 나머지 세 천왕은 조선시대 사천왕상의 일반적인 도상을 따랐다.25 쥐를 쥔 서방 광목천 도상과 관련해서는 다음 장에서 좀 더 자세히 살펴보려 한다.
송광사와 화엄사 사천왕상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사하다. 재료가 흙이라는 점도 그렇고, 4m라는 크기도, 앉은 자세를 비롯해 보관과 복식도 기본적으로 같다. 4구 모두 머리에는 화려한 보관을 썼는데, 보관은 봉황, 용, 학, 구름, 불꽃 등으로 장식되어 있다. 몸에는 갑옷을 걸쳤으며, 어깨 위에 두른 천의는 등 뒤에서 위로 솟구쳐 머리 뒤에서 둥근 원을 그린다. 머리 뒤로 치솟은 천의의 가장자리에는 불꽃을 표현하여 천의가 두광 역할을 하도록 했다. 코가 뭉툭하며, 미간에는 굵은 가로 주름을 두었다. 그 위로는 V자형 주름이 있고, 이마에는 길고 짧은 세 줄의 얕은 선각 주름을 새겨 두었다. 특히 뭉툭한코, 미간과 이마의 독특한 주름은 송광사와 화엄사 사천왕상의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흥미롭게도 같은 도상과 특징은 여수 흥국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여수 흥국사 사천왕상>(이하 흥국사 사천왕상)도 송광사, 화엄사와 마찬가지로 각 방위의 지물이 같고, 보관, 갑옷도 기본적으로 같으며, 얼굴 모습 역시 앞서 본 화엄사 사천왕상과 매우 유사하다(Fig. 8, 9).
순천 송광사, 구례 화엄사, 여수 흥국사, 이 세 사찰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조각승은 인균(印均, 활동 1615~1655)이다. 우선 1628년 송광사 소조사천왕상을 제작할 때 인균은 사과(司果)로 참여했다.26 사과는 조선시대 오위(五衛)의 정6품 관직이다. 송광사 사천왕상 조성의 수조각승은 응원이었고, 인균은 사과의 신분이면서 보조 조각승으로 참여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 제작하기 4년 전인 1624년에도 응원과 인균은 함께 <순천 송광사 광원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을 조성했다. 당시에도 응원이 수화승이고, 인균은 보조 화승이었다.27 응원과 인균은 1628년 송광사 사천왕상을 완성한 후 1634년 함께 이곳 화엄사로 자리를 옮겨 <화엄사 삼신불좌상>을 조성하기 시작했다.28 물론 <화엄사 삼신불좌상>은 응원과 인균, 이 둘이서 조성한 것은 아니며, 청헌, 응원, 인균을 비롯한 18명의 조각승이 분업하여 제작했다.29
3구의 <화엄사 삼신불좌상> 가운데 중앙의 비로자나불상과 우협시불인 석가모니불은 청헌(淸憲, 활동 1626~1643)이 이끄는 청헌파가, 노사나불은 응원과 인균이 주도하여 제작했을 것으로 추정한다.30 1634년 3월에 응원과 인균은 <화엄사 삼신불좌상> 가운데 노사나불상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같은 해 8월에 일을 마쳤다.31 노사나불상 조성 이후로 응원의 이름을 더는 찾아보기 어렵다. <화엄사 노사나불상>은 응원의 이름이 등장하는 마지막 작품이자, 인균이 응원보다 앞서 이름이 등장하는 첫 작품이기도 하다.32 특히 노사나불은 응원보다는 인균의 특징이 더 많이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33 또 <화엄사 삼신불좌상> 조성 직전인, 1633년 <김제 귀신사 영산전 석가모니불좌상>을 조성할 때 이미 인균은 수조각승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능력은 갖춰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화엄사 삼신불좌상> 조성 당시 실질적인 작업은 인균이 했고, 응원은 관리 감독 역할을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34 응원의 지도로 인균이 <화엄사 노사나불좌상>을 조성했고, 이후 응원에서 인균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지고, 인균은 수조각승으로서 독자 노선을 걸었을 것이다.
화엄사에서 인균의 이름은 네 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첫째, <화엄사 삼신불좌상> 조성기, 둘째, 대좌 묵서, 셋째, 『화엄사사적기』<표1의 ④>, 넷째는 화엄사에 세워진 벽암각성의 비 <표1의 ③>이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기록은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으며, 세 번째 『화엄사사적기』에서는 인균의 이름이 응원에 앞서 등장한다.35 네 번째 화엄사에 세워진 <화엄사 벽암대사비>에서도 인균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화엄사 벽암대사비>의 음기는 크게 3단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아랫단에 200명가량의 승도 명단을 적었다. 인균은 가장 아래 승도 명단에서 찾을 수 있다.36
위와 같은 화엄사와의 인연을 고려하면 사천왕상을 주관한 조각승은 인균일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특히 조각승 인균은 이미 1628년에 송광사에서 사천왕상을 조성한 경험이 있어 <화엄사 사천왕상> 조성을 수조각승으로 도맡아서 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과 마찬가지로 화엄사 사천왕상도 응원이 주관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앞서도 이야기한 것처럼 응원은 1634년에 <화엄사 삼신불좌상> 가운데 노사나불좌상을 조성한 이후 더는 작품 활동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서는 <화엄사 삼신불좌상> 이후로 어디에서도 응원의 이름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37
실제로 인균이 제작한 <화엄사 노사나불좌상>과 <화엄사 사천왕상>의 보관은 매우 유사하다. 특히 보관 좌우에 붙어있는 2줄의 관대 장식이 바람에 흩날리는 모양은 같은 조각가의 솜씨임을 알려준다(Fig. 10). 노사나불의 보관은 테두리 윗부분을 꽃잎 모양으로 만들고, 가장자리에 구슬 장식을 덧붙였으며, 표면에는 넝쿨무늬를 얕게 새겼다. 별도로 조성한 꽃무늬와 불꽃무늬를 그 위에 부착해 화려하게 보관을 조성했다. 이러한 보관 형태는 <화엄사 사천왕상>은 물론이고, <흥국사 사천왕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화엄사 노사나불좌상>과 <화엄사 사천왕상>은 서로 귀 모양도 같다(Fig. 11). <화엄사 삼신불좌상> 가운데 조각승이 다른 <화엄사 석가불좌상>의 귀 모양과 비교해 보면 그 차이가 분명하게 드러난다(Fig. 12).
흥미롭게도 인균의 이름은 여수 흥국사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흥국사 사천왕상 역시 흙으로 조성했으며, 화엄사와 마찬가지로 사천왕상 내부에 봉안되어 있는 복장물을 확인할 수 없는 상태이다.38 실제로 인균 역시 이곳 흥국사에 와서 몇몇 불상 제작에 관여했다. 인균은 1648년 흥국사 무사전(無私殿) <목조지장보살좌상>, 1655년 흥국사 응진당 <목조삼세불좌상>을 수화승으로서 조성했다.39 흥미롭게도 인균이 조성한 이 상들의 귀 모양도 <화엄사 노사나불좌상>, <화엄사 사천왕상>과 같아 화엄사 사천왕상의 제작자가 인균임을 입증해 준다. 인균뿐만 아니라 삼인(三忍)의 이름도 송광사, 흥국사 불상 조성에서 찾아볼 수 있다. 1628년 송광사 사천왕상 제작에 참여한 14명 중 12번째에 그의 이름이 등장한다.40 또 1655년 여수 흥국사 나한전 <목조삼세불좌상>을 조성할때도 수화승 인균 다음에 차화승으로 그의 이름을 찾을 수 있다. 짐작건대 삼인도 인균을 도와 사천왕상을 조성하는데 힘을 보탰을 것이다.
정리하면 1628년 송광사 사천왕상은 응원과 인균이 함께 만들었고, 이후에 제작된 화엄사와 흥국사의 사천왕상은 인균이 주도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응원과 인균은 선후배 관계였다고 추정한다. 송광사 사천왕상은 응원이 주도해서 만들었지만 이후 화엄사에서는 불상 조성의 주도권을 서서히 인균에게 넘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듯 나이가 많은 응원의 행적은 화엄사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특히 화엄사와 흥국사의 사천왕상은 얼굴 모습이 매우 유사하여 조각승이 같았음을 잘 알려준다. 어깨 위로 늘어진 머리카락 끝을 위로 솟구치게 표현하여 역동감을 준 것도 같다(Fig. 9). 앞서 언급한 것처럼 통상 사찰을 재건할 때 주불전을 먼저 건립하고 난 후에 천왕문과 같은 부속 건물을 세우는 것이 일반적임을 고려하면 화엄사 사천왕상은 1635~36년 무렵에 제작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41 인균은 이미 1634년 8월에 <화엄사 노사나불좌상>의 제작을 마쳤기 때문에 늦어도 1635년에는 <화엄사 사천왕상> 제작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본 것이다.

Ⅳ. 보탑(寶塔)이 아닌 쥐[寶鼠]를 쥔 서방 광목천왕, 그 이유

화엄사 사천왕상 가운데 서방 천왕은 오른손에는 승리의 깃발인 당(幢)을, 왼손에는 쥐를 쥐었다.42 한국 사천왕상 가운데 처음으로 쥐가 등장하는 예는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이다(Fig. 6, 7).43 앞서 화엄사 사천왕상의 도상, 보관 형태, 미간과 이마의 주름 등으로 미루어 송광사 사천왕상 조성에 관여했던 조각승 인균이 화엄사의 사천왕상을 주도해서 만들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쥐를 쥔 서방 천왕은 여수 흥국사 사천왕상도 마찬가지다(Fig. 13).
이 세 사찰은 인접해 있다. 전라남도에 모여 있으며, 40-50km 반경 안에 있다. 거리도 가깝지만, 서방 천왕이 쥐를 쥐고 있는 도상도, 사천왕상의 기본형도 같다. 물론 이 세 사찰의 쥐 모양이 완전히 같지는 않다. 이는 여러 차례 보수하면서 덧칠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사천왕상의 얼굴 모습이 서로 같아 세 사찰의 사천왕상이 서로 관련있음을 부정하기는 어렵다(Fig. 8). 흥미로운 사실은 앞서도 언급했지만, 송광사 사천왕상 제작에 관여했던 조각승 인균이 화엄사 대웅전과 흥국사의 불상 조성에 관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이 세 사찰은 지리적으로도 가깝고, 인균이라는 조각승을 공유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한편 쥐를 쥔 사천왕상은 티베트와 중국 명나라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흥미롭게도 티베트에 남아있는 예가 가장 많다(Fig. 14). 어떤 이유로 티베트의 사천왕상은 손에 쥐를 쥐기 시작했을까. 그 이유는 티베트와 교류가 잦았던 중앙아시아 호탄(Khotan 于闐)의 전설에서 찾을 수 있다. 관련 기록은 640년 무렵 호탄을 방문했던 현장(玄奘, 602~664)의 『대당서역기』에 있다.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호탄의) 사막에 사는 쥐 가운데 큰 것은 고슴도치만 한데 그 털 빛깔은 금빛과 은빛이 섞인 듯 이채로왔다. 옛날에 흉노가 수십만의 병사를 거느리고 호탄에 노략질 왔는데, 쥐가 이들의 공격을 막아주었고, 호탄왕은 그 뒤로 쥐의 큰 은혜를 고맙게 생각하여 사당을 세우고 제단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대대로 이들을 존경하면서 특별히 진귀하게 여겼다. 지극한 정성을 다하여 기도하면 많은 이들이 복과 이익을 얻었지만,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곧 재난을 당했다.”44
이후 쥐는 복과 재물을 가져다줄 뿐만 아니라 나라를 지켜주는 호국의 신이 되었다.45 이 이야기는 중앙아시아 호탄의 단단 윌릭(Dandan Oilik) 사원지에서 발견된 판회(板繪)에서도 그대로 찾아볼 수 있는데, 판회의 왼쪽에는 호탄왕이, 오른쪽에는 호탄의 수호신인 쥐왕이 서로 같은 크기로 그려져 있다.46 이는 쥐왕의 지위가 호탄왕과 같은 수준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호탄과 교류가 잦았던 티베트 불교사원에서 쥐를 쥔 천왕을 만나는 일은 어렵지 않다. 남아있는 사례 가운데 가장 유명한 예는 15세기 무렵 조성된 팔초사원[Palcho Monastery, 白居寺), 조캉사원[Jokang Monastery, 大昭寺]의 천왕이다(Fig. 14). 우리나라의 천왕과 마찬가지로 오른손에 당을 쥐고, 왼손에는 쥐를 쥐었다. 재물을 상징하는 쥐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보석을 토해내는 모습이 표현된다. 잘 알려진 것처럼 호탄과 티베트는 지리적으로 인접해 있어 일찍부터 왕래했다. 티베트에 호탄의 역사와 불교에 대해 기록한 문헌이 적지 않게 남아있어 이를 입증한다. 티베트 대장경 안에만 4편의 호탄 불교 사료가 수록되어 있을 정도로 호탄과 티베트는 관계는 특별했다.47 아쉽게도 이들 문헌 자료에는 쥐 전설에 대한 내용은 찾을 수 없지만, 나라를 지켜주고, 재물과 복을 가져다 주는 쥐왕 전설은 분명히 호탄에서 티베트로 전해졌다. 앞서 본 팔초사원과 같은 사례가 그 증거이다.48
천왕이 쥐를 쥔 도상은 중국 명나라(1368~1644)로도 전해졌다. 중국 명나라 1431년에 제작된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諸佛菩薩妙相名號經呪)』의 변상판화에 같은 도상의 사천왕상이 등장한다(Fig. 14).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는 1431년 중국 북경에서 간행된 것이다. 이 경전에는 모두 63폭의 판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 가운데 앞의 3폭 판화에는 제목이 없고, 이후 60폭의 판화에는 각각의 판화마다 한문, 란자나 문자(Rañjanā script, 蘭札體 梵文), 티베트 문자, 그리고 몽골 문자, 이 네 가지 문자가 쓰여 있다.49 판화의 크기는 26.4×17.5cm이다.50 명나라 판화이지만, 화면 안에 티베트에서 사용하던 문자가 두 가지나 쓰여있어 티베트와 관련 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 명나라 판본에는 판화마다 정확한 명칭을 적어두었는데, 바로 쥐를 쥔 상에 서방 천왕이라고 적혀 있다(Fig. 15). 17세기 전반 화엄사의 쥐를 쥔 천왕 역시 서방 천왕이어서 이 판화와 명칭이 같아 명나라 판본과 관련 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51
그렇다면 이 세 사찰은 어떻게 서방 천왕이 쥐를 잡은 1431년 명나라 판본의 영향을 받을 수 있었을까.52 그 주역은 앞서 언급한 대로 바로 벽암 각성과 신익성이었을 것이다.53 앞서 이야기한 대로 벽암 각성은 신익성과 각별했다.54 벽암 각성은 신익성과 같은 왕실 인사의 후원으로 전쟁으로 사라져 버린 사찰을 재건했을 뿐만 아니라 불상, 불화를 비롯해 각종 불교 목판화 작업에도 깊이 관여했음은 앞서 이야기했다.55
화엄사에서 새로운 도상은 사천왕상의 쥐만이 아니다. 인균이 제작한 <화엄사 노사나불좌상> 역시 보관을 쓴 보살형 노사나불인데, 우리나라에서 조각으로는 유일한 보관노사나불이다(Fig. 16의 왼쪽). 양손을 옆으로 벌린 손 모양은 불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것이어서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러나 보관은 썼지만, 몸에 장식이 없는 노사나불은 매우 드물다. 보관을 쓰고, 팔목에 팔찌는 둘렀지만, 이를 제외하고는 몸에 장신구를 걸치지 않은 노사나불은 흥미롭게도 벽암 각성이 공덕주, 교정, 시주를 담당한 『대방광불화엄경소주(大方廣佛華嚴經疏注)』 변상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Fig. 16의 오른쪽). 『대방광불화엄경소주』는 1634년 2월부터 1635년 5월까지 1년 4개월에 걸쳐 순천 송광사에서 김제 귀진사본(1556.6.~1564.봄)을 모본으로 번각한 것이다.56 <화엄사 노사나불좌상> 조성 시작이 1634년 3월에 시작해 같은 해 8월에 완성하여 서로 제작 시기가 겹치는 데다가, 변상도도 노사나불도 모두 벽암 각성이 주관한 불사라는 점에서 『대방광불화엄경소주』 변상도가 <화엄사 노사나불좌상>의 모본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한다. 특히 보관에 부착된 각종 장식으로 가려져 잘 보이지는 않지만, 보관 테두리에 구슬 장식이 붙어있는 것도 역시 같은 모양이다.
벽암 각성이 목판화 작업에 관여하면서 신익성을 통해 새로운 명나라 판본을 구해보는 일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명나라 판본은 결국 불상 제작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며, 실제로 그가 관여한 송광사, 화엄사에 쥐를 쥔 서방광목천왕이라든지, 보관노사나불상 등 새로운 도상이 보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벽암 각성의 생각은 조각을 담당한 조각승 응원과 인균에게 그대로 전해졌고, 그 결과 이 세 곳 사찰에 새로운 도상인 쥐를 쥔 서방 천왕이 등장하게 되었을 것이다.
한편 17세기 전반의 사천왕상 도상에 1431년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이 영향을 주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1654년 속초 보광사의 <목조지장보살좌상>의 사례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광사의 <목조지장보살좌상> 복장물에서 200년도 더 앞선 1417년의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諸佛如來菩薩名稱歌曲)』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57 필자는 이전 연구에서 명의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이 조선시대 사천왕상 도상에 크게 관여했음을 밝혔다.58 대부분의 조선시대 사천왕상은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의 도상을 따라 조성했겠지만, 조각승 인균과 관련있는 송광사, 화엄사, 흥국사의 사천왕상은 서방 광목천왕의 도상을 바꾸었다. 이전까지의 보탑이 아닌 쥐를 왼손에 쥔 것이다. 이는 신익성 등 왕실 인사가 새로 들여왔을 가능성이 큰 1431년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와 같은 경전과 관련있다고 추정했다. 물론 현재로서는 1431년 명나라에서 간행된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가 조선에 유입되었음을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도상의 유입은 불서, 각종 판본에 특별히 관심이 많았던 벽암 각성, 그리고 그와 친분이 깊은 신익성의 역할이 컸으리라 생각한다.

Ⅴ. 맺음말

이 글은 정확한 제작 시기와 조각승을 알 수 없는 <화엄사 사천왕상>에 대한 것이다. <화엄사 사천왕상>은 아쉽게도 조성기가 밝혀지지 않았지만, 다행히 인근의 <송광사 사천왕상>, <흥국사 사천왕상>과 도상, 양식이 유사하여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1635~36년 무렵 조각승 인균이 주관해 조성했을 가능성을 밝혔다. 인균은 송광사, 화엄사, 흥국사, 이 세 사찰에서 모두 불상을 조성했으며, 특히 1628년 <송광사 사천왕상>을 응원과 함께 조성했다. 사천왕상 조성에 참여했던 경험을 살려 <화엄사 사천왕상>을 비롯해 <흥국사 사천왕상>도 인균이 주도하여 조성했을 것으로 추정한 것이다. <화엄사 사천왕상>의 제작 시기는 <화엄사 노사나불상>을 완성하고 난 후인 1635~1636년으로 무렵이었을 것이라 보았다.
한편, 17세기 전반 전라남도의 세 사찰에만 쥐를 쥔 서방 천왕이 등장한 이유가 무엇인지 역시 필자의 궁금증 가운데 하나였다. 호국, 복(福)과 재물의 상징인 쥐 전설은 처음 중앙아시아 호탄에서 시작됐고, 이후 호탄과 가까웠던 티베트로 전해져 쥐를 쥔 새로운 사천왕상 도상을 만들어냈다. 이 도상은 다시 티베트에서 중국 명나라로 전해져 1431년 목판본으로 제작되었다. 조선 제14대 왕의 사위인 신익성이 명나라의 불교 서적 및 판화를 들여오면서 이 목판본도 함께 조선에 소개되었을 것이라 추정했다. 신익성은 자신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던 전라도 승려 벽암 각성이 송광사와 화엄사를 재건할 때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다. 사찰 재건을 맡은 벽암 각성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버린 송광사와 화엄사를 재건하면서 새로운 명대 판화를 참고하여 서방 천왕에 ‘호국과 부를 상징하는 쥐’를 표현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그러나 세 사찰의 쥐를 쥔 사천왕상 도상은 그 외의 지역에까지 넓게 영향을 주지 못했다. 세 사찰의 사천왕상 제작을 주도했던 응원과 인균, 특히 인균의 활동 영역이 전라남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화엄사 사천왕상>의 제작 시기와 조각승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됐지만, 이와 함께 ‘쥐를 쥔 사천왕상’이라는 작은 주제를 통해 불교미술에서 도상이 어떻게 새롭게 시작하며, 새롭게 시작된 도상은 또 어떻게 주변으로 전파되고, 나아가 어떻게 국제적으로 공유되는지를 알아보려 한 것이다. 지금까지 불교 도상은 불교 경전과 관련지어 그 관계성 속에서 연구되어왔다. 그러나 이 글에서 필자는 불교 도상이 불교 경전뿐만 아니라 각 지역의 전설, 신화 등을 통해서도 새롭게 생겨날 수 있으며, 하나의 도상으로 정립될 수 있음을 이야기하려 했다.

Notes

1) 고려시대까지는 보탑을 든 상이 북방 다문천왕이었지만, 조선시대에는 보탑을 든 상이 서방 광목천왕이다. 이와 관련한 연구 성과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임영애,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의 방위문제와 조성 시기」, 『서지학연구』 10 (2005), pp. 73-95; 이승희, 「고려말 조선초 사천왕도상 연구」 『미술사연구』 22 (2008), pp. 117-150; 임영애. 「북방 多聞天과 그의 持物 寶塔-원과 고려이전 양상-」, 『미술사와 시각문화』 9 (2010a), pp. 86-115; 임 영애. 「조선시대 사천왕상 존명의 변화」, 『미술사학연구』 265 (2010b), pp. 73-104; 박은경·한정호, 「사천왕상 배치 형식의 변화 원리와 조선시대 사천왕 명칭」, 『미술사논단』 30 (2010), pp. 273-302; Lim Young-ae. “The Four Heavenly Kings of Jikjisa Temple Dated to 1665 of the Joseon Period and Their Significances,” Korea Journal 57-2 (2017), pp. 129-152; 임영애, 「천왕문의 등장: 한국 사천왕상의 봉안 위치와 역할 변화」, 『신라문화』 52 (2018), pp. 45-70.

2) 1676년에 조성한 홍천 수타사 사천왕상 역시 서방 광목천왕이 쥐를 쥐었다. 그러나 수타사 사천왕상의 배치가 통상의 조선 후기 사천왕상과 다르고, 쥐를 쥔 손도 왼손이 아니라 오른손이다. 이 글에서 이야기하는 세 사찰과는 제작 시기, 지역, 도상에 차이가 있어 논의 대상에서 제외한다. 1688년 예천 용문사 사천왕상, 17세기 후반-18세기 전반 무렵 안성 칠장사 사천왕상 역시 오른손에는 幢을 들었지만, 왼손에는 탑을 들지 않고 손을 왼 허리춤에 대고 있다. 얼핏 보면 쥐를 잡은 것처럼 보이지만, 쥐는 없고 옷자락을 잡거나 손을 왼 허리춤에 올려 둔 것이어서 역시 논의의 대상이 아니다.

3) 17세기 전반 화엄사 불전의 재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이강근, 「화엄사의 불전과 17세기 재건역」, 『불교미술』 14 (1997), pp. 80-89; 이강근, 「17세기 벽암 각성의 해인사·화엄사 재건에 대한 연구」, 『강좌미술사』 52 (2019), pp. 75-97.

4) ①중관 해안의 『화엄사사적』에는 “自庚午(1630)大師之來六七年間”라고 적혀 있다.

5) 白谷 處能, 임재완 옮김, 「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 『大覺登階集』 2 (동국대학교 출판부, 2015), p. 295; “壬申 修葺華嚴寺 薦貨者塡衢 藹爲䕺林”(ABC, H0165 v8, p. 330c04-c05).

6) 벽암 각성은 화엄사 동오층석탑의 중수도 했다. 화엄사 동오층석탑 중수기에 아쉽게도 중수연대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대공덕주로 벽암 각성이 등장한다. 화엄사의 동오층석탑 중수기에 대해서는 이철호, 「구례 화엄사 동·서 오층석탑 출토 사리장엄구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1), pp. 137-138 참조.

7) 이하 <화엄사 벽암대사비>라 한다.

8) <표1의 ②>에는 벽암 각성의 탑이나 탑비가 건립된 사찰은 지리산 화엄사, 조계산 송광사, 가야산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라고 적었다. ABC, H0165 8:331a. 그런데 <표1의 ②>와 달리 <표1의 ③>에는 가야산 해인사가 아니라 지금의 완주 송광사에 탑이 세워진 것으로 적고 있어 차이가 있다. 네 곳에 세워진 비 가운데 현재는 화엄사와 법주사의 비문만이 전한다. 비문의 전문은 이지관 편, 「법주사벽암당각성대사비명」, 「화엄사 벽암대사비문」, 『한국고승비문총집』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pp. 174-177, 180-184를 참조하기 바란다.

9) 번역문은 국립중앙박물관, 『화엄사의 불교미술』, 불교미술연구 조사보고 제2집 (국립중앙박물관, 2010), p. 191(고경 스님 조사 및 감수)을 참조했다.

10) 「화엄사 벽암대사비문」, 앞의 책, pp. 180-184; 고영섭, 「벽암 각성의 생애와 사상 - 李景奭 撰 「華嚴寺 碧巖堂 覺性大師碑文」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52 (2019), pp. 50-56; “癸巳 松雲 薦休于朝 檄致陣上 師亦仗劒”; 손성필, 「조선중후기 고승 傳記類 자료의 성격: 碧巖 覺性의 碑銘과 行狀을 중심으로」, 『佛智光照: 청계정인스님정년기념논총』 (논총간행위원회, 2017), pp. 686-712; 손성필, 「17세기 浮休系 僧徒의 碑건립과 門派 정체성의 형성」, 『조선시대 사학보』 83 (2017), pp. 129-171.

11) 이강근, 앞의 논문 (1997), p. 89.

12) 순천 송광사와 구례 화엄사의 천왕문이 다포 형식 또는 유사 다포 형식으로 건축되었다는 연구 성과는 류성룡, 「17세기 사천왕상 天王門의 건축형식 展開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21-5 (2012), pp. 69-82를 참조하기를 바란다. 한편 벽암 각성이 중창을 주도한 사찰에 대형 사천왕상이 조성된 점을 두고 벽암 각성으로 인해 ‘호국’과 관련한 사천왕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노명신, 「조선후기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 『미술사학연구』 202 (1994), p. 105; 노명신, 「송광사 사천왕상에 대한 고찰」, 『강좌 미술사』 13 (1999), p. 95; 정은우, 「조선후기 대형 소조사천왕상의 구조와 제작기법 연구」, 『불교미술사학』 22 (2016), p. 153. 이와 관련하여 필자는 17세기 재건 사찰에 천왕문과 대형 사천왕상을 조성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들을 모두 ‘벽암 각성의 호국정신’과 관련짓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물론 순천 송광사와 화엄사의 천왕문과 사천왕상은 벽암 각성과 관련 깊지만, 그 외의 사찰도 모두 동일선상에 두고 이야기하기는 어렵다고 본 것이다. 사찰의 천왕문은 이미 13세기 후반부터 건립하기 시작했으나 전란으로 소실되었고, 이후 17세기에 같은 형식으로 재건했다고 보았다. 다만 전란 후 ‘천왕문과 대형 사천왕상’이 특별히 유행했던 것처럼 보인 이유는 재건한 천왕문이 지금까지 잘 유지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영애, 앞의 논문 (2018), pp. 45-70.

13) <목조석가불좌상> 시주질을 통해 1320명이 참여했으며 이 가운데 승려는 580명임을 알 수 있다. 장찬, 「구례 화엄사 대웅전 木造毘盧遮那三身佛坐像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 논문 (2021), pp. 11-13. 시주질 분석은 유근자, 「화엄사 목조비로자나삼신불좌상의 조성기 「施主秩」 분석」, 『미술자료』 100 (2021), pp. 112-139 참조.

14) 대웅전 현판에는 “崇禎九年歲舍丙子仲秋義昌君珖書 숭정9년(1636) 병자년 8월 의창군 이광이 쓰다”라고 되어 있다. 이종수, 「구례 화엄사 의승병의 구국 활동과 사찰 재건」, 『남도문화연구』 47 (2022), pp. 177-207.

15) “경과 사대부 중에 대사와 교류한 사람이 많았는데, 특히 동양위 (신익성)와 친했다. 卿士大夫多與之 東陽尉特相善 未幾南歸.” 「화엄사 벽암대사비문」, 앞의 책, p. 181; 「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韓佛全』 8, p. 330 下), “明年壬午(1642) 辭歸海; 申翊聖, 「贈義賢序」, 『樂全堂集』 5, “나는 각성과 평소 친분이 있어 한두 가지 일을 물어보곤 하였는데, 그 또한 불경에 깊이 통달하여 옳은 듯한 설법으로 불도를 수식할 수 있었고 그 재주는 스스로 웅대해질 만하였으니 이른바 정신과 역량이 남들보다 뛰어난 사람이었다”; 김은정, 「東陽尉 申翊聖의 駙馬로서의 삶과 문화활동」, 『열상고전연구』 26 (2007), pp. 215-254.

16) 각성은 1612년 투옥되었다가 방면된 후 봉은사에 머물렀는데, 각성은 봉은사에서 많은 사대부와 교유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신익성과 친밀하게 지내게 되었다. 李景奭 撰, 「화엄사 벽암대사비문」(표1-③), 이지관 편, 『韓國高僧碑文總集』(가산연구원출판부, 2000), p. 181.

17) 申翊聖, 「樂全居士自敍」, 『樂全堂集』 序, “나는 열두 살에 부마가 되었는데 선조께서 특별히 사랑하여 궁중을 거침없이 출입하도록 허락하였다”; 신익성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김은정, 앞의 논문 (2007), pp. 215-254.

18)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 이징(1581-?)이 그림을 그리고, 신익성이 서문을 지은 <이징 필 산수화조도첩>도 있다. 벽암 각성의 비문을 작성한 이경석도 이 그림의 제화시를 작성하고 있어 벽암 각성, 신익성, 이경석과 오랜 인연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이경석은 영의정을 역임한 최고위 관인이면서 당대의 명문장가로 잘 알려져 있다. <이징필 산수화조도첩>에 대해서는 오세현, 「조선 중기 사대부들의 詩畫를 통한 교유에 관한 試論: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李澄 筆 山水花鳥圖帖》(보물 1985호)을 중심으로」, 『규장각』 58 (2021), pp. 439-474 참조.

19) 김은정, 앞의 논문 (2007), pp. 222-227; 이태호, 「17세기, 仁祖 시절의 새로운 회화경향 -東淮 申翊聖의 寫生論과 實景圖, 肖像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31 (2008), pp. 103-152.

20) 申翊聖, 「觀海示以銀臺唱酬之什次韻奉白洲雙溪兩詞伯」, 『樂全堂集』 3.

21) 申翊聖, 「書指空畫像軸」, 『樂全堂集』 8.

22) 박도화, 「碧巖 覺性 發願 順天 松廣寺刊 大方廣佛華嚴經疏 變相圖」, 『강좌미술사』 52 (2019). pp. 143-171.

23) 18세기로 넘어가면 1718년 양산 통도사 목조사천왕상의 進悅도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의 조각승에 대해서는 「順天 松廣寺 塑造四天王坐像 造成記」, 1628년 (綺山錫珎 編, 『曹溪山松廣寺史庫』 下, 1929, p. 641), “大明崇禎元年戊辰月日四天王新造成 …畫員 應圓 高閑 釋湖 法海 戒雄 釋森 懷澗 天翼 離幻 天然 性悅 三忍 信懷 法端 司果洪有智印均….” 참조할 것; 단응이 조성한 사천왕상에 대해서는 Lim Young-ae, 앞의 논문 (2017), pp. 129-152 참조.

24)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 역시 실물 조성기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1929년에 간행한 『曹溪山松廣寺史庫』에 「순천 송광사 소조사천왕좌상 조성기」가 수록되어 있어 1609년 천왕문을 중수하고, 1628년 응원을 대표로 하여 모두 13명의 조각승이 함께 사천왕상을 제작했음이 밝혀졌다(이 글의 위 각주 참조). 같은 내용은 북방 다문천이 들고 있는 비파의 뒷면 묵서명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 대해서는 임영애, 앞의 논문 (2005), pp. 73-95 참조.

25) 홍천 수타사, 고흥 능가사와 같은 예외 사례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상이 일치한다.

26) 이 글의 각주 23; 임영애, 앞의 논문 (2005), pp. 89-93. 조각승 응원과 인균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손영문, 「조각승 인균파 불상조각의 연구」, 『강좌미술사』 26-1 (2006), pp. 53-82; 송은석, 「조선 후기 應元·印均派의 활동: 應元, 印均, 三忍」, 『한국문화』 52 (2010), pp. 219-249.

27) 송은석, 위의 논문 (2010), pp. 224-227.

28) <화엄사 삼신불좌상>의 제작 시기는 기록마다 조금씩 다르다. 석가모니불 복장 시주질은 1634년 3월-1635년 가을, 노사나불상 복장 시주질은 1634년 3월-1635년 가을, 노사나불 대좌 내부 묵서명에는 1634년 3-8월, 『화엄사 사적』(표1-④)은 1636년이라고 적었다.

29) “…畵員秩 淸憲 應元 印均 法現 省根 英頤 元澤 善允 天曉 印希 善見 懶欽 学浩 法密 雲密 智学 尙日 尙仅” <화엄사 삼신불좌상>의 조각을 18명의 조각승이 분업했다는 견해는 송은석, 「조선 17세기 彫刻僧유파의 합동작업」, 『미술사학』 22 (2008a), pp. 94-103, pp. 99-102; 송은석, 「17세기 전반 曹溪山 松廣寺와 彫刻僧: 覺敏, 應元, 印均」, 『보조사상』 29 (2008b), pp. 311-322 참조.

30) 송은석, 앞의 논문 (2008a), pp. 94-103, 99-102; 송은석, 앞의 논문 (2010), p. 231.

31) 노사나불 대좌와 시주질의 기록에 1년의 차이가 있다(이 글의 각주 28 참조). 노사나불 대좌의 묵서를 기준으로 하면 일을 마무리한 때가 1634년이고, 시주질을 기준으로 하면 1635년에 공사를 마친 것이 된다; 화엄사 대웅전 불상과 조각승에 대해서는 최성은, 「화엄사 대웅전 목조비로자나삼신 불좌상에 대한 고찰」, 『미술자료』 100 (2021), pp. 140-171; 장찬, 앞의 논문, pp. 1-160을 참조할 것.

32) 표1-④의 『화엄사사적』에는 “만력 21년(1636) 大化士 懶黙과 希寶가 畵員 淸憲, 英頤, 印均, 應元 등을 요청하여 조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33) 손영문, 앞의 논문, pp. 62-69; 송은석, 앞의 논문 (2008a), pp. 84-86 참조.

34) 손영문, 위의 논문, pp. 62-69; 송은석, 앞의 논문 (2010), p. 235; 장찬, 앞의 논문, p. 74.

35) 이 글의 각주 32 참조.

36) 1664년에 세워진 보은 법주사 벽암당 「각성대사비문」에서는 응원과 인균의 이름을 찾을 수 없으며(이지관 편, 「보은 법주사 벽암당 각성대사비문」, 『한국고승비문총집』 (가산불교문화연구원, 2000), pp. 174-177), 법주사 사천왕상 역시 화엄사 사천왕상과는 도상, 양식에서 차이가 크다.

37) 손영문, 앞의 논문, p. 69.

38) 여수 흥국사 사천왕상 역시 정확한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다. 다만 천왕문이 1645-46년 흥국사의 중문 및 봉황루가 건립될 때 함께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사천왕상 역시 대략 그 무렵에 조성한 것으로 본다.

39) 여수 흥국사의 무사전과 응진당 불상에 대해서는 손영문, 앞의 논문, pp. 58-60 참조.

40) 이 글의 각주 23 참조.

41) 지금까지는 이 글의 표1-② 「벽암각성행장」의 화엄사 중건 시작 시기를 근거로 화엄사 사천왕상의 제작 시기를 1632년으로 기술해 왔다. 문화재청, 『구례 화엄사 대웅전 정밀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13), p. 43.

42) 서방 광목천왕이 왼손에 쥐고 있는 동물의 생김새로 보면 쥐보다 몽구스(Mongoose)에 가깝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대당서역기』를 비롯한 漢譯 경전에서는 寶鼠라고 번역하고 있어 이 글에서는 쥐로 서술한다. T51 2087:0944a21.

43) 순천 송광사 사천왕상에 대해서는 임영애, 앞의 논문 (2005), pp. 73-95; 임영애, 앞의 논문 (2010). pp. 73-104 참조.

44) 『大唐西域記』 T51 2087:0944a21.

45) 『大唐西域記』 T51 2087:0944a21.

46) 영국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木板繪를 참조하기 바란다.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A_1907-1111-68.

47)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기를 바란다. William Woodville Rockhill. The Life of the Buddha and the Early History of His Order (London: Trübner & Co. 1982), pp. 233-237. Rockhill은 티베트 대장경의 호탄불교 관련 내용을 최초로 소개했다. 이외에도 R. E. Emmerick, Tibetan Texts Concerning Khotan (London: Oxford University Press, 1967), pp. 48-49; H. W. Bailey, Khotanese Buddhist Text, revised edition (Londo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1, p. 52 참조; 차상엽, 「티벳문헌에 기술된 호탄불교」, 『불교학보』 70 (2015), pp. 123-141.

48) 티베트에서는 ‘쥐를 쥔 천왕’을 북방 천왕으로 인식했다. 이는 중앙아시아 호탄지역에서 스스로 북방에 거주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북방 다문천(비사문천)만을 나라의 수호신으로 삼은 것과 관련있다고 생각한다. T51 2087:0943a25. 호탄의 영향을 받은 티베트에서도 쥐를 쥔 천왕을 북방에 두었다. 그러나 ‘쥐를 쥔 천왕’이 명나라로 전해진 후 명나라에서는 티베트, 즉 西藏에서 온 도상이라고 인식하여 서방 천왕이라 명명했다고 본다.

49) 란자나문자는 11세기에서 20세기 중반까지 네팔과 티베트 지역에서 널리 사용된 문자이다. https://www.omniglot.com/writing/ranjana.htm

50) 翁连溪·李洪波 主編, 『中國佛敎版畫全集』 7 (北京: 中國書店, 2014), p. 102. pl. 165.

51) 심사자 가운데 한 분의 다음과 같은 지적이 있었다. “명 1431년의 『제불보살묘상명호경주』 도상과 조선 후기의 송광사, 화엄사, 흥국사 광목천왕상이 손이 쥔 보서는 위축된 모습이거나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하고 있어서 아무래도 광목천왕에게 잡혀 제압당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호탄에서 호국신으로 숭앙되었던 보서가 티베트에서 보물을 토하는 모습으로 표현된 것까지는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도달했을 때는 정반대로 사천왕에게 마치 조복 당하는 듯한 부정적인 이미지로 형상화된 것처럼 보인다. 그 이유나 배경을 이 논문에서 당장 구체적으로 밝히기는 쉽지 않겠지만, 같은 도상이 東傳하면서 출발점과는 상반되는 이미지로 바뀐 변화상 자체에 대한 언급과 함께 그 과정에 대한 견해와 같은 부연 설명을 해주면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 같다.” 심사자의 지적은 타당하며, 그 이유에 대해 이 글에서는 명쾌한 답을 내리기는 어렵지만, 유념해 두었다가 추후 유사 주제의 논고에서 논의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다.

52) 조선시대 사천왕상은 이 외에도 몇 가지 판본의 영향을 받았다. 가장 큰 영향은 명나라 1417년에 제작된 『諸佛菩薩名稱歌曲』이며, 이 판본에서는 서방 천왕이 왼손에 탑을 들었다. 조선시대의 사천왕상은 몇몇 예외를 제외하고는 1417년 판본의 영향을 받았다. 이에 대해서는 임영애, 앞의 논문 (2010), pp. 73-104 참조.

53) 벽암 각성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고영섭, 앞의 논문 (2019), pp. 50-56; 신명희, 「벽암 각성의 행적과 사상」, 『보조사상』 64 (2022), pp. 39-79.

54) 李景奭 纂. 「華嚴寺 碧巖堂 覺性大師碑文」, 『韓國高僧碑文總集』 (가산연구원출판사, 2000), pp. 180-184.

55) 박도화, 앞의 논문 (2019), pp. 143-171.

56) 권12 끝의 간기에 ‘崇禎八年乙亥三月日 全羅道順天府曹溪山松廣寺重刻’이라 기록되어 있다. 박도화, 앞의 논문(2019), p. 152.

57) 속초 보광사 지장보살좌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할 것. 최선일, 「속초 普光寺 <목조지장보살좌상>과 彫刻僧 草安」, 『미술사학연구』 274 (2012), pp. 83-109.

58) 『明史』 志 卷九十八 志第七十四 藝文三 子類十二 釋家類 “成祖御製諸佛名稱歌一卷 普法界之曲四卷 神僧傳九卷”; 『태종실록』 권34 태종 17년(1417) 정유 12월 20일 신축 “11월 초1일 황제가 正殿에 나아가서 『諸佛如來菩薩名稱歌曲』 1백 本과 『神僧傳』 3백 본과 『冊曆』 1백 본을 주므로 신 등이 欽受하고, 초2일에 출발하여 돌아왔습니다.” 조선시대 사천왕상 도상에 미친 『제불여래보살명칭가곡』에 대해서는 임영애, 앞의 논문 (2010b), pp. 80-86 참조.

Fig. 1.
<화엄사 북방 사천왕상(왼쪽)과 동방 사천왕상(오른 쪽)> Northern (left) and Eastern (right) Heavenly Kings of Hwaŏmsa. 1635-1636, Average H. 4m, South Chŏlla Province (Photography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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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화엄사 남방 사천왕상(왼쪽)과 서방 사천왕상(오른 쪽)> Southern (left) and Western (right) Heavenly Kings of Hwaŏmsa. 1635-1636, Average H. 4m, South Chŏlla Province (Photography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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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화엄사 서방 광목천왕의 쥐> 174 Detail of the of Western Heavenly King holding a rat (Photography by the author) ⓒ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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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벽암 각성 초상화> Portrait of Pyŏgam Gaksŏng (1575~1660), 1780, 122.5× 83.3cm, Haeinsa Museum.ⓒ Central Buddhis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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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신익성 초상화> Portrait of Sin Iksŏng (1588-1644), 17th Century, 52.5×29.6cm, Private Collection. (ⓒ Central Buddhis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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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송광사 서방 광목천왕> Western Heavenly King of Songg wangsa, 1628, Sunch ’ŏn, South Chŏlla Province (ⓒ Songg wangsa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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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송광사 서방 광목천왕의 쥐> Detail of a rat, Western Heavenly King of Songg wangsa (Photograph by the author) ⓒ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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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북방 다문천의 얼굴 비교> Detail of the face Nothern Heavenly King statues from Songg wangsa (left), Hwaŏmsa (center), and Hŭngguksa (right) (Photography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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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남방 증장천의 얼굴 비교> Detail of the face, Southern Heavenly King statues from Hwaŏmsa (left) and Hŭngguksa (right) (Photography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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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남방 증장천과 노사나불의 보관 관대 비교> Detail of the crow ns worn by the Western Heavenly King (left) and Rocana Buddha statues (right) of Hwaŏmsa (Photography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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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남방 증장천과 화엄사 대웅전 노사나 불의 귀 비교> Detail of the left ear Western Heavenly King (left) and Rocana Buddha right of Hwaŏmsa (Photography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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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화엄사 대웅전 석가모니불의 귀> Detail of the left ear, Sakyamuni in the main Hall of Hwaŏmsa, 1634-1635 (Photography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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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여수 흥국사 서방 광목천왕의 쥐> Detail of the Western Heavenly King holding a rat, Mid 17th Century, Hŭngguksa, South Chŏlla Province (Photography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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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티베트 팔초사원 북방 천왕과 쥐> Northern Heavenly King with Rat, Palcho Monastery, 15th Century, Tibet (Photography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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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諸 佛 菩 薩 妙相 名號 經 呪 』변상판화> Woodblock print of Zhufupusam iaoxiangminghao jingzhou. 1431 (Zhong guo fojiao banhua quanji 7, 2014. p.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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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화엄사 대웅전 노사나 불과 『大 方廣佛華嚴經 疏注 』 변상도 비교> Rocana Buddha of Hwaŏmsa, 1634 (left) (ⓒ Sach ’al munhwajae yŏn’guso) and Woodblock prints of Buddhist illustrations in Taebang kwangbul hwaŏmg yŏng soju, 1634-1635 (right) (Photography by Pak Tohw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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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17세기 화엄사 관련 문자 자료> The 17th Century Textual Sources on Hwaŏmsa
Year Compiler Title Year of Reconstruction
1636 Chunggwan haean Honamdo kuryehyŏn chirisan daehwaŏmsa sajŏk 1630
中觀 海眼(1567-?) 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
1660 Paekkok ch’ŏnŭng “Sa poŭn ch’ŏn’gyowŏnjo kugiltodaesŏnsa haengjang” 1632
白谷 處能(1617-1680) 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
1663 I kyŏngsŏk “Kugiltodaesŏnsa pimyŏng” ×
李景奭(1595-1671) 國一都大禪師碑銘(Hwaŏmsa)7
1697 (Reprint of ①) Paegam sŏngch’ong Honamdo kuryehyŏn chirisan daehwaŏmsa sajŏk 1630
白庵 性聰(1631-1700) 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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