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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9; 2023 > Article
조선후기 왕실 국혼(國婚)용 백자용준의 조형와 성격 영국박물관 소장 ‘傳之于金氏子孫’명 백자운룡문호를 중심으로*

Abstract

본 연구는 조선시대 왕실 혼례에서 주준(술항아리)와 화준(꽃항아리)로 사용한 백자용무늬항아리(백자용준)의 조형양식과 신분별 사용방식을 파악하고, 이를 기반으로 영국박물관에 소장된 백자용준 한 점의 제작경위를 구체적으로 밝힌 연구이다.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국혼용 주준인‘백자청화주해’는 왕과 왕세자의 동뢰연에서 주준으로 꾸준히 사용되었다. 그 가운데 조선후기의 백자청화주해는 50cm 이상의 높이를 가진 청화백자호 중 일정한 조건의 문양구성(다섯 발톱을 가진 쌍용, 경부의 당초문, 견부의 여의두문, 저부의 산형연판문)을 갖추고 있다. 이에 비해 왕세자가 아닌 왕자와 왕녀의 혼례에서는 백자청화주해의 사용이 제한되었다. 다만 18세기 전기(1721년~1753년)에‘청화용화준’이란 명칭의 백자용준을 주준이 아닌 화준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영조의 절검정책이 보다 강화되면서 1764년(영조40), 청화용화준을 백준으로 다시 교체시켜 청화용화준 사용의 하한연대가 드러났다. 청화용화준은 백자청화주해의 조형양식과 거의 동일하되, 크기가 30cm대로 상대적으로 작아지고 용의 발톱수가 4개로 줄어든 백자용준들로 파악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영국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철화운룡문‘전지우김씨자손’명호〉가 제작된 배경과 관련 인물들을 조사한 결과, 1732년(영조8)에 혼례를 올린 화순옹주와 김한신의 화준일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 백자용준은 외손의 출생을 간절하게 바란 영조의 바램을 담은 화준으로 화순옹주 부부의 자손인 김이주, 김노영, 김노경, 김정희 등 김씨후손들에게 전해졌을 것으로 추정했다.

Abstract

The aim of this study is to analyze the designs of chujun(rice wine jar) and hwajun(flower vase), white porcelain vessels used in Chosŏn’s royal marriage ceremonies, and to identify how their use differed according to the status of the person being married. Furthermore, I propose the circumstances under which the paekchayongjun(white porcelain jar with dragon design) stored at the British Museum was produced.
paekchach’ŏnghwajuhae, a type of white porcelain jar for rice wine with decoration of dragons in underglaze cobalt blue, stands out among white porcelain vessels used in royal marriages as it was reserved for the king or the crown prince. Those made in late Chosŏn are taller than fifty centimeters in height and decorated with a design of two dragons with five toenails, foliage patterns around the mouth, palm leaf patterns around the shoulders, and lotus petal patterns at the bottom. Originally, the use of blue and white porcelain had not been granted for the marriage of princes and princesses who were not heirs to the throne, but ch’ŏnghwayonghwajun, a type of white porcelain jar with the decoration of dragons in underglaze cobalt blue was permitted as flower vases in the early eighteenth century(1721-1753). However, as King Yŏngjo increasingly advocated frugality, ch’ŏnghwayonghwajuns were replaced with simple white porcelain in 1764, marking the latest date for ch’ŏnghwayonghwajuns. The surviving examples of ch’ŏnghwayonghwajun are almost identical in pattern to paekchach’ŏnghwajuhaes, but are smaller in size — about thirty centimeters tall — and the dragons only have four toenails.
Based on evidences, I propose that the jar stored at the British Museum was likely used at the wedding of Princess Hwasun and Kim Hanshin in 1732, the eighth year of King Yŏngjo’s reign. This vessel likely represents the King’s wishes for the birth of grandchildren by the princess, and was inherited by her descendants, Kim I-ju, Kim Noyŏng, Kim Nogyŏng, and Kim Jŏnghŭi.

Ⅰ. 머리말

조선시대 백자용준(白磁龍樽)은 호(壺)의 기면에 다양한 장식기법을 사용하여 용(龍)문양을 장식한 백자들을 지칭하는 학술용어이다. 문헌사료에는 ‘용준(龍樽)’이란 명칭이 일반적이고, 백자청화주해(白磁靑花酒海), 화룡사준(畫龍沙樽), 화룡준(畫龍樽), 청자준(靑磁樽), 사준(沙樽, 沙尊), 준(樽, 尊) 등 다양한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백자용준은 조선왕실의 의례에서 술을 담는 주준(酒樽)과 꽃을 담는 화준(花樽)으로 사용되었다. 가장 이르게 『세종실록』 「오례」에 가례(嘉禮)용 주준인 ‘백자청화주해’로 실렸고, 이어 『국조오례의』의 길례(吉禮)용 주준인 ‘준, 사준’이 추가되었다.1 그리고 흉례(凶禮) 의례서인 『국조상례보편』의 혼전(魂殿)용 주준인‘청자준’이 순차적으로 실렸다. 이 과정을 통해 조선왕실에서 백자용준을 주준으로 사용하는 의례가 가례, 길례, 흉례 순으로 점차 늘어나면서 필수적인 왕실 의례기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2
학계에서는 1990년대부터 조선시대 백자용준을 주목해왔다. 현재까지 백자용준의 기형, 문양, 제작시기, 용도(酒器, 花器), 안료(靑畫, 鐵畫, 銅畵), 가화준(假畫樽), 사용계층(왕실, 민간), 의례(길례, 가례, 흉례)와의 관계 등 다양한 관점의 연구들이 진행되었다. 초기 연구에서 중요한 연구 관점들(백자청화주해 도설, 明代 白磁靑畵宣德年製銘龍雲文壺와의 관계, 산릉도감의궤 청룡도와의 비교 등)이 제시되고 현전 유물의 조형양식도 분석되었다.3 한동안 연구사적 공백기를 거친 이후, 2010년대부터 조선시대 백자용준을 단독 주제로 삼은 연구성과가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4 이처럼 연구가 활성화된 것은 그동안 박물관 전시를 통해 다양한 유물이 공개되었고, 문헌사료의 DB화가 이루어져 자료 접근이 용이해졌으며, 백자용준이 그려진 기록화 연구도 심화되어 입체적인 연구가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그 결과 구체적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던 주제들(화준, 주준, 가화준, 국가의례와의 관계)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고, 백자청화용준 제작이 재개된 시기를 재고하거나 조형양식 변화를 구체화시키는 등 다양한 관점의 연구들이 전개되고 있다. 백자용준에 대한 선행 연구의 주된 경향을 살펴보면 주로 유물의 제작시기나 조형적 영향관계를 밝히기 위한 양식분석 또는 기록화를 활용한 연향용 화준(花樽)에 집중되었다.5 이에 비해 조선왕실의 큰 경사인 국혼을 위해 사용된 백자용준에 대해서는 아직 본격적인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국혼의례(國婚儀禮)’는 왕실의 혼례로 국왕 그 자신과 직계손(直系親)인 자녀와 손자의 배우자를 왕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의례이다.6 조선시대 왕실용 백자용준은 왕과 왕세자의 혼례에 쓰이는 주준으로부터 발원(發源)하여 점차 다른 의례들의 주준과 화준으로 확장하였다.7 따라서 조선시대 왕실 의례에 쓰인 백자용준의 본질적인 용도와 조형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선 국혼용 백자용준에 대한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 이에 본 글에서는 선행연구 성과를 기반으로 조선후기 왕실의 국혼과 백자용준의 관계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보겠다.
더불어 백자용준이 왕과 왕세자의 혼례를 넘어 왕실 내 다른 구성원의 혼례에서도 사용되었는지에 대해 조사할 필요가 있다.8 국혼은 보통 왕과 비[元妃, 繼妃],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비의 혼례를 가리키지만, 영조 25년(1749)에 편찬된 『국혼정례(國婚定例)』에 따르면 왕과 후궁, 왕자와 왕녀, 세자의 아들과 딸의 혼례도 국혼의 범주에 포함되어 있다.9 조선왕실 구성원의 계서적 차등은 보통 의례절차와 물질적 차이를 통해 가시화된다. 왕실 가족의 신분에 따라 혼례용 백자용준의 조형과 용도를 차등하는 구조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본고에서는 『국혼정례』에서 정한 국혼의 범위를 따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위의 단계적인 논의들을 바탕으로, 영국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철화운룡문 ‘전지우김씨자손(傳之于金氏子孫)’명호〉과 관련된 인물과 구체적인 용도를 추정해보겠다. 조선시대 백자용준 유물이 다수 현전하고 관련 사료들도 풍부한 편이지만 아직 제작시기, 제작목적, 원소유자 등을 구체적으로 판별할 수 있는 유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연구자는 영국에 소장된 백자용준 중 ‘이것을 김씨자손에게 전하노라[傳之于金氏子孫]’라는 의미의 명문이 있는 유물에 주목하고자 한다. 이 유물의 제작배경과 조형적 특징을 추출해, 왕실 구성원의 신분에 따라 ‘백자용준’이라는 기물을 조형과 용도의 측면에서 어떻게 엄격하고도 정교하게 구별했는지 분석하겠다. 더불어 이 유물과 관계된 다양한 인물들의 삶을 함께 조명하여 그 안에 담겨진 서사와 문화적 가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왕·세자 동뢰연 백자용준: 白磁靑畵酒海

조선왕실의 왕과 왕세자의 국혼은 기본적으로 육례(六禮: 納采-納徵-告期-冊妃/冊嬪-親迎-同牢)로 이루어진다.10 그 중 동뢰는 신랑과 신부가 만나 서로 절[交拜]을 하고 술과 음식을 먹는 절차가 핵심이 된다. 이 장에서는 조선왕실 왕과 왕세자 동뢰연에서 사용된 ‘백자청화주해’의 사용방식과 시기적 변화 그리고 조형적 특징을 분석하고 의례기로써의 성격에 대해 살펴보겠다.

1. 왕·세자 동뢰연 주준과 화준

왕과 왕세자의 국혼은 출신이 달랐던 신랑과 신부가 같은 신분이 되어 왕실의 영속을 기약하는 경사스러운 과정이다. 그 가운데 동뢰는 신랑 신부가 교배(交拜)의식을 마치고 마주 앉아 술과 찬을 함께 나누어 먹는 절차로, 부부는 동등한 몸이므로 생(牲)을 같이하여 존비를 같이한다[合體同尊卑]는 뜻을 담고 있다(Fig. 1).11
조선왕실의 국혼에서 신랑(왕, 왕세자)과 신부(왕비, 왕세자빈)가 마시는 술을 담는 항아리는 백자에 청화안료로 용문양을 그린 항아리인 백자청화용준을 사용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12 이 기물을 특별히 ‘백자청화주해’라고 불렀고, 『세종실록』 「오례」와 『국조오례의』를 비롯해 이후의 국가전례서의 가례 준작도설에 꾸준히 실렸다(Fig. 2).3 뿐만 아니라 현전하는 모든 가례도감의궤에도 ‘백자청화주해 한 쌍’이란 기물명이 빠짐없이 등장한다(Table.1).14 특히 가례도감의궤에서 백화청화주해가 실린 항목이 동뢰연 주기(酒器)들을 열거한 ‘대례시 국조오례의 준작도설 기명질[大禮敎是時五禮儀尊爵圖器皿秩]’이라는 점은 백자청화주해가 곧 동뢰연 주준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결국 국가전례서와 가례도감의궤에 기록된 백자청화주해는 서로 동일한 기명인 것이다.15
한편 왕과 왕세자의 동뢰연 주준으로 백자청화주해를 사용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양란 이후 물력이 부족하여 부득이 ‘백준가화(白樽假畫)’로 대체하기도 했다.17 선행연구에서 가화용준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이 이루어졌으나, 국혼용 백자청화주해와 가화용준의 관계는 아직 구체적으로 논의되지 못했으므로 이에 대해 살펴보겠다.
국혼용 백자청화주해와 가화용준의 관계는 가례도감의궤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소현세자가례와 인조장렬왕후가례는 ‘가화백준(假畫白樽)’을 사용한 의례로 알려져 있는데, 의궤에서 서로 다른 내용이 눈에 띈다.
우선『소현세자가례도감의궤』(1627) 중 동뢰연에 필요한 각종 물종들을 기록한 부분을 보면 백자청화주해가 동뢰연 물목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 업무를 감결(甘結)한 부분에는 다른 내용이 실렸다. 즉 왕세자 화룡준을 진배할 때 만약 사옹원에서 화준을 마련하지 못할 경우 이전의 연례와 천사연향 때처럼 가화준(假畫樽)으로 진배하겠다는 내용이 별도로 실렸다.18 마찬가지로『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1638) 중 동뢰연 주기들을 열거한 부분에도 백자청화주해가 포함되었다. 그러나 의궤의 뒷부분에는 ‘호조가 사온 회회청은 있지만 동절기라 장인이 부족하고 대례(大禮)가 임박하니 부득이 (백자청화주해를 대신해) 백준가화일쌍(白樽假畫一雙)으로 진배하겠다’는 설명을 덧붙였다.19 즉 소현세자와 인조의 가례 때 백자청화주해를 마련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의궤의 앞부분에는 마치 완전하게 갖춘 것처럼 기록하고, 의궤의 뒷부분에는 백자청화용준 대신 가화용준으로 대체한다는 내용을 첨부했다.20 이러한 정황을 통해 『국조오례의』에 근거한 백자청화주해가 동뢰연을 상징하는 필수 기물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더불어 국혼용 주준의 역할을 한 가화용준의 모습이 백자청화주해의 조형양식, 즉 흰 백자에 푸른 색 용을 그린 모습을 모방했을 것이라는 점도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국혼에서 가화용준을 동원해서라도 백자청화주해의 모양을 갖추려고 했던 상황은 동시기 중국 사신을 위한 연향에서 가화용준 사용을 중지하고 백자철화용준(일명, 石間朱龍樽)으로 바꾸기로 한 결정과 대조된다. 즉 1634년(인조12) 중국 사신을 대접하는 연향을 준비하면서, 이전의 사신 연향에서 가화용준(假畫龍樽)의 그림이 벗겨져 ‘석간주로 그린 화룡준을 구워 만들어[以石間朱起畫, 燔造龍樽]’사용했다고 아뢰는 사료가 등장한다. 이어 이번 사신연향에도 (석간주)용준을 사용하기를 청하여 인조의 윤허를 받는다.21 이에 비해 4년 후인 1638년(인조16)의 인조장렬왕후 국혼용 주준을 ‘검붉은색 용을 그린 석간주용준’으로 교체하지 않고 ‘푸른색 용을 그린 가화용준’을 사용하는 방식을 고수했다. 이를 통해 사신연향과 달리 국혼에서는 흰 색 바탕에 푸른 색 용이 장식된 가화용준을 꾸준히 사용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마침내 1651년 현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부터 백자청화주해를 진설한 이후 대한제국기까지 백자청화용준을 왕과 왕세자의 동뢰연 주준으로 꾸준히 사용했다(Table 1). 이를 통해 왕과 왕세자의 국혼용 백자용준은 석간주용준으로 대체할 수 없는 특별한 요소, 즉 ‘푸른색 용’이 그려진 백자호라는 조건이 필수적이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22 이러한 원칙은 왕실 의례의 전범이 되는 국가전례서의 영향력이 강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동뢰연 공간에 설치된 화준의 조형과 성격에 대해 주준과 간단히 비교해보겠다. 현전하는 가례도감의궤 중 동뢰연도(同牢宴圖)가 실린 의궤들(6건)을 모두 찾아본 결과, 화준으로 다양한 조형의 백자들(백자가요문 병, 백자청화초화문호, 백자무문호)이 사용된 것으로 확인된다(Fig. 1).23 이 중에 백자용준이 그려진 사례는 없었다. 물론 동뢰연도에 그려진 기물이 실제를 정확하게 반영한 모습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국혼용 화준은 주준처럼 특별히 준수할 조형적 원칙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24 이 점은 국가전례서에 실린 백자청화주해의 명칭과 조형에 최대한 맞춰서 제작한 주준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2. 백자청화주해의 조형과 성격

조선후기 백자 가운데 높이가 50cm 이상에 달하는 대형호에 다섯 개의 발톱이 달린 용 두 마리를 청화안료로 그려 장식한 일군의 백자용준들이 있다. 조선시대 제작된 백자청화용준은 다수 전해지거나 출토되고 있지만, 이 가운데 50cm 이상을 넘긴 대형호는 드문 편이다. 높이 50cm 이상의 대형 청화백자호 중 네 가지 문양요소, 즉 다섯 발톱의 오조를 갖춘 쌍룡, 하부의 산형연판문, 견부의 여의두문, 경부의 경부의 당초문을 모두 갖춘 유물수는 현재까지 약 20점(완형 기준)으로 파악된다(Table 2).25 본 글에서는 편의상 위의 요건들을 모두 갖춘 백자용준을 ‘A유형’이라고 칭하겠다.
현전하는 조선후기 A유형의 백자용준들은 준작도설에 실린 백자청화주해의 조형양식적 요소들을 충실하게 갖추고 있다. 가례 준작도설의 백자청화주해는 왕과 왕세자의 국혼용 주기를 도설로 실은 것이므로, A유형도 본질적으로 동뢰연용 주준의 용도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큰 것으로 보인다. A유형 백자들의 제작이‘개시’된 시기에 대해 학계의 의견은 세 가지 학설, 즉 17세기說, 18세기 전반說, 18세기 후반說로 나뉜다. 필자는 A유형과 같은 조건을 가진 백자들이 18세기 전반부터 제작되었다고 생각하며 이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27
첫째, 17세기 초반 왕실은 국혼용 백자용준 제작을 서둘러 재개했다. 양란 직후 가화준에 관한 내용을 보더라도, 왕실에서는 회회청을 확보하려 노력한 것은 다름 아닌 백자용준을 제작하기 위해서였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1619년(광해군11) 회회청이 국내에 확보되었다. 또 1638년(인조16) 인조장렬왕후가례를 위한 주준과 화준 제작을 위해 호조에서 회회청을 지급했으나 추워진 날씨 때문에 백자청화용준을 제작하지 못하기도 했다. 그 이후로는 가화준에 대한 기록이 더 이상 등장하지 않았으며, 1651년(효종2) 현종명성후가례부터는 동뢰연 주준으로 백자청화주해를 온전하게 갖추게 되었다(Table. 1).28
이후 약 50년이 지난 18세기 전기에 이르면, 양질의 백자청화용준을 제작하는 여건이 충분히 마련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한 예로 1719년(숙종45) 59세가 된 숙종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간 경사를 기록한 그림을 보면, 대형의 청화백자용준을 주준과 화준으로 진설한 모습이 확인된다(Fig. 3). 기록화에 다소의 왜곡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더라도 그림 속 백자청화용준의 크기, 형태, 색, 문양은 이 시기 비교적 안정적 수준으로 제작할 여건이 마련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Fig. 3). 이처럼 백자용준은 국혼을 포함한 다양한 왕실 의례에서 왕권을 상징하고 실내를 장엄하는 의장물로써 적극적으로 사용되었으므로 동시기 다른 청화백자에 비해 최우선으로 제작되었다. 그리고 18세기 전기에 이르면 A유형에 속하는 백자청화용준들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
둘째, 조선왕실의 백자용준에 그려진 용문양은 조선전기부터 가례용 준작도설을 통해 그 조형양식이 마련되었고 왕실 화원들이 숙련된 솜씨로 그릴 수 있는 문양이었다. 국초부터 백자청화용준 도안이 이미 존재했기 때문에 시대마다 유행을 따르거나 새로운 조형양식을 기초단계부터 고안할 필요가 없었다. 물론 양란 직후 용문양을 그릴 화원이나 장인이 부족하여 제작의 어려움이 존재했지만, 17세기 중반부터는 비교적 안정된 제작수준의 용문양을 그릴 수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어 17세기 산릉도감의궤의 사수도(四獸圖) 중 청룡도(靑龍圖)에서 숙련된 화법의 쌍룡문이 꾸준히 그려졌다(Fig. 5).29 17세기 전반은 회회청을 마련했더라도 제작상황이 불안정하여 어려움이 발생(예: 인조장렬왕후 국혼)하기도 했지만, 17세기 후반에는 백자청화용준을 제작하는 상황이 크게 개선되었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30
17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백자용준 중 A유형 백자와 조형적으로 친연한 유물로, 오사카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백자청화운룡문호〉을 들 수 있다(Fig. 4). 이 유물이 백자청화주해로 사용되었는지는 확언할 수 없지만 A유형 백자용준의 조형적 조건을 갖추기 이전의 과도기적 성격을 갖고 있다고 추정된다. 이처럼 A유형의 백자용준의 조형양식에 근접하지만 아직 A유형의 조건들을 완벽하게 갖추지는 않은 백자용준들이 현전하는데, 이 유물들의 제작시기를 대체로 17세기 후반으로 상정할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용 백자청화용준은 국가전례서에 실린 백자청화주해를 모본으로 삼아 제작되므로 전체적인 조형양식이 비슷하고 큰 변화가 일어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기별 제작여건과 취향의 변화에 따라 용의 표현이나 보조문양들의 요소들이 조금씩 바뀌면서 점차 조선의 미감을 갖춘 문양구성이 완성되었다. A유형의 백자용준은 국혼용 백자청화주해 조형양식의 마지막 완성단계라고 여겨진다. 물론 A유형의 백자용준들 사이에도 표현상 차이가 존재하지만 모든 조건들(높이 50cm 이상, 백자청화용준, 4가지 문양요소)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하나의 군(群)으로 분류할 수 있다.
셋째, 18세기 전반에 백자청화용준은 동시기 청화백자들과는 다른 왕실의 보호와 관리 속에서 안정적으로 제작되었다. 백자청화용준은 왕실이 끊임없는 검약 정책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제작될 수 있었던 유일한 백자였다. 검약을 강조한 영조가 청화백자 제작을 금지시키는 조치를 단행하는 와중에도 화룡준만큼은 예외로 두기도 했다.31 이처럼 18세기 전반 청화백자용준은 새로운 조형을 기초 단계부터 고안해야하는 과정을 건너뛰고, 청화안료 사용에도 제재를 받지 않으면서 왕실의 보호 속에 제작되었다. 그 결과 동시기 제작된 다른 청화백자와 비교할 때 조형양식적 측면에서 이질적이라고 여겨질 만큼 다른 수준의 완성도를 갖출 수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넷째, A유형 백자용준들의 보조문양(만자형운문, 변형연판문, 여의두문 등)은 조선중기의 타 공예품에서도 이미 활용되는 문양들이었다(Fig. 6, Fig. 7). 예를 들어 50cm 이상의 백자용준들에서 자주 나타나는 하부의 산형연판문은 영조의 연잉군 시절 모습이 그려진 초상화(1714년作) 속 백택흉배의 산문(山文) 장식과 유사하다(Fig. 7). 또 18~19세기 백자용준의 문양요소로 인식되는 만자형(卍字形) 운문, 여의두문, 보문(寶文)은 이미 17세기부터 청룡도, 흉배, 단령 등 회화와 복식의 장식소재로 사용되던 문양이었다(Fig. 5, 6).32 왕실 의례기의 도안을 설계하고 견양을 그리는 일은 주로 화원의 역할이었으므로, 18세기 전반기 화원 또는 화공들이 백자청화주해의 문양을 그리는 작업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충분히 조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33
한편 A유형의 백자용준들이 국혼용 주준으로 사용된 이후 왕실의 다양한 가례에서 주준 또는 사준으로 사용되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34 이를 뒷받침 하는 근거는 우선, 화준에 꽃가지를 세우기 위해 내부에 가득 채운 것은 흙이 아니라 쌀과 콩이었으므로 주준으로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고 여겨진다.35 그리고 연향의궤에 도설로 실린 주준과 화준의 조형을 비교해보면 거의 동일할 뿐만 아니라 도설 속 화준에 불필요한 뚜껑까지 덮여 있다(Fig. 8, Fig. 9). 더불어 주준용 백자용준과 화준용 백자용준을 구별해서 따로 관리했다는 기록은 현재까지 확인된 바 없다. 따라서 A유형 백자용준의 애초 용도는 국혼용 백자청화주해일 것으로 여겨지나, 동뢰연을 마친 이후에는 왕실의 다양한 가례에서 주준 또는 화준으로도 사용되었을 수 있다는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이상의 내용을 정리하면, 조선전기부터 왕실의 보호와 관리 속에서 국가전례서의 ‘백자청화주해’도설을 모본(模本)으로 삼은 백자청화용준이 꾸준히 제작되었다. 백자청화주해는 국혼 중 왕과 왕세자의 동뢰연 주준으로, 조선후기에 제작된 높이 50cm 이상의 대형 청화백자호 중 4가지 조형요소를 갖춘 유물들(A유형)이 이에 해당된 것으로 보았다. 본고에서 A유형 백자용준을 분류한 기준은 제작시기가 아니라 ‘용도’이다. A유형 백자용준(현전유물과 멸실유물 포함) 제작이‘개시’된 시기에 대해 연구자는 18세기 전반부터로 보았고 표현방법이 다소 변화하기는 하지만 조선 말까지 꾸준히 제작된 것을 확인하였다(Fig. 12).

Ⅲ. 대군 이하 왕자·왕녀 동뢰연 화준: 靑畵龍花樽

조선시대 왕실 혼례에서 왕세자가 아닌 왕자(대군 이하 왕자)와 왕녀의 혼례는 왕과 왕세자의 국혼과 차등을 두어 진행되었다. 혼례의 각 절차에 사용되는 기물들의 재질, 문양, 개수도 신분에 따라 다르게 규정되었다. 신분의 계서적 차등을 물질을 통해 구체화하는 것은 의례의 보편적 방식이기 때문에, 대군 이하 왕자들과 왕녀들은 왕, 왕세자와 다른 주준과 화준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영조대 편찬된 『국혼정례(國婚定例)』와 숙종대~고종대의 가례등록(嘉禮謄錄)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36
우선 『국혼정례』를 살펴보면, 왕과 왕세자 가례에서 사용하는 주준을 ‘白磁靑畫酒海’라는 특정한 명칭으로 기록한 것에 비해 화준은 별다른 정보가 없는‘花樽’으로만 기록하였다. 앞서 동뢰연도에 나타난 바대로 화준은 한 가지로 정해지기 보다는 다양한 종류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비해 대군 이하 왕자들과 왕녀들의 주준은 뚜껑을 갖춘 백자준[白酒樽蓋具]으로 기록했고 화준은 청화안료로 그림을 그린 준[靑畵龍花樽, 畵龍花樽]으로 구체적인 명칭을 정해두었다. 즉 『국혼정례』가 편찬된 시기인 1749년 경에는 대군 이하 왕자와 왕녀의 주준으로 백자호를, 화준으로 백자청화운룡문호를 사용한 것이다. 이는 왕과 왕세자 외에 혼례용 주준으로 백자용준을 사용하는 것은 불허하지만, 화준으로 사용하는 것은 허락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백자용준의 용도(주준, 화준)를 구분하는 방식은 왕실 내 백자용준 사용체계의 엄격함과 정교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후 살펴보겠지만 용도 뿐만 아니라 조형적 차이로도 연결된다.
한편 조선후기 가례등록은 왕자와 왕녀들의 혼례에서 사용된 백자용준을 알 수 있는 또 다른 자료들이다(Table 3). 현전하는 21건의 가례등록들을 살펴보면 1749년에 작성된 『국혼정례』의 내용과 달라지는 상황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연잉군 혼례(1715)부터 동뢰연에‘청화용화준(靑畵龍花樽)’한 쌍을 사용했다는 기록이 등장한다(Table 3). 이후 숙종과 영조대에 걸쳐 총 7명의 왕자와 왕녀들의 동뢰연에서 청화용화준을 1쌍을 설치했다. 즉, 연잉군(1712), 연령군(1707), 화순옹주(1732), 화평옹주(1738), 화협옹주(1743), 화완옹주(1751), 화유옹주(1753)의 혼례에 청화용화준을 사용했다. 그리고 돌연 화령옹주의 혼례(1764)때부터 청화용화준 대신 백준으로 교체하였다. 이미 연잉군 혼례(1715) 이래로 백자용화준을 꾸준히 사용했고『국혼정례』(1749)에서도 대군 이후 왕자와 왕녀들에게 청화용화준을 사용하도록 정했는데, 왜 갑자기 화령옹주 혼례때부터는 청화용화준 대신 백준을 사용하게 된 것일까?
우선, 영조의 검약정책과 관련이 있다. 영조는 통치기간 내내 재정 지출의 감축과 왕실 의례의 축소를 추진하였다. 나라 안의 사치풍조가 만연하다고 여긴 영조는 ‘용준을 그리는 것 외에는 회청 사용을 일체 엄금하라’는 조치를 내리기도 했다.38 통치기간 내내 검약을 강조한 영조의 정책이 결국 왕자와 왕녀들의 혼례용 화준에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1764년부터 1767년 사이 혼기가 찬 왕자들과 왕녀들의 혼례가 여섯 차례나 이어진 것도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왕자와 왕녀들의 혼례를 무작정 미룰 수는 없었고, 이들의 혼례는 왕실 재정에 부담을 주었다.39 마침내 1764년(영조40) 영조는 ‘지금 같은 때에는 국혼을 먼저 절약해야 하니… 화준은 백준을 쓰고, 사화봉(絲花鳳)은 지화(紙花)로 하고… 또한 사치스럽게 하지 말고…’라며 이제부터 화준으로 백준을 사용하라고 명한다.40 실제로 이 해의 화령옹주 혼례부터 백준을 화준으로 사용했고, 그 이후의 왕자와 왕녀들도 혼례용 화준으로 청화용화준 대신 백준을 사용했다. 이상의 내용을 근거로, 조선후기 청화용화준을 사용한 인물은 총 7명, 즉 연잉군, 연령군, 화순옹주, 화평옹주, 화협옹주, 화완옹주, 화유옹주로 추려볼 수 있다.
요약하면, 조선시대 왕실의례용 백자용준은 왕실의 권위를 표상하면서 동시에 의례 주인공의 신분적 서열을 상징하는 기물로 사용되었다. 이를 가시화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용도, 크기, 용의 발톱수 등)이 고안된 가운데, 신분에 따라 주준(왕, 왕세자)과 화준(대군 이하 왕자, 왕녀)으로 구분하는 방식도 행해졌다. 애초에 대군 이하 왕자와 공주들은 동뢰연 주준으로 백자청화주해를 사용하지 못하고 백준을 사용했다. 하지만 18세기 전반에는 이들도 ‘청화용화준’이란 명칭의 백자청화용준 한 쌍을 동뢰연용 화준으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고 이와 관련한 7명의 왕자와 왕녀들도 파악했다. 이후 영조의 절검정책이 강화되면서 영조40년(1764)부터 백자용화준이 백준으로 교체되었고 이 정책은 조선 말까지 유지됐다.

Ⅳ. ‘傳之于金氏子孫’명 백자용준과 화순옹주의 혼례

앞의 논의를 통해 18세기 전반기 대군 이하 왕자와 왕녀들의 혼례에서 화준으로 백자청화용준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이를 기반으로 현재 영국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한 점의 백자용준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겠다. 이 유물은 높이 34.8cm의 백자용준으로, 기면에 청화안료와 철화안료로 그려진 쌍룡운문이 장식되었고 기물의 하부에‘傳之于金氏子孫[이것을 김씨 자손에게 전하노라]’이란 명문이 쓰여 있다. 본 장에서는 백자용준의 조형과 명문을 분석하여, 이 유물과 관련된 인물, 제작시기, 용도를 구체적으로 추정하고자 한다.

1. 영국박물관 소장 김씨자손명 백자용준

현전하는 백자 중에서 A유형의 백자용준들과 유사한 문양구성을 갖추고 있으면서도 크기가 ⅔로 작은 백자용준들이 존재하여 주목되는 바, 본 절에서는 이 유물들을 B유형이라고 명명하겠다. A유형과 B유형의 조형요소를 비교하면 흥미로운 점들이 있다. B유형의 문양 구성과 배치는 A유형과 거의 동일하다. 하지만 크기가 30cm대로 작아져, 마치 A유형의 백자용준을 그대로 축소시켜 놓은 듯하다. 백자용준의 높이가 50cm 이하인 경우 대체로 쌍룡문이 아닌 단룡(單龍)문으로 장식되고 보조문양 중 일부(산형연판문, 당초문)가 사라지는데 비해, B유형은 기면이 좁은데도 불구하고 A유형의 요건들을 모두 갖추고 있고 완성도도 높다. 이 부분은 B유형의 백자용준들이 높이 50cm 이하의 다른 백자용준들과 구별되는 부분이다.
B유형과 A유형 백자용준의 차이는 높이 외에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용의 발톱 개수로, B유형 백자용준의 용문양은 발톱이 5개인 오조룡이 아닌 4개인 사조룡(四爪龍)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B유형은 A유형과 마찬가지로 왕실 의례용 백자용준일 가능성이 크지만, 작아진 크기(높이 30cm 대)와 줄어든 발톱 개수(4개)를 고려해 보았을 때 A유형보다 상대적으로 낮은 위계에 속한 백자용준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 B유형에 속하는 백자용준은 총 4점이 확인되었고, 그 중 2점의 백자용준이 조형양식상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Fig. 10, Fig. 11).
지금부터 살펴볼 B유형의 백자용준은 영국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철화운룡문‘傳之于金氏子孫’명호〉이다(Fig. 10).41 이 유물은 직선으로 세워진 구연 아래로 비교적 부푼 어깨를 갖고 있고, 동체에서 저부로 1/3 내려간 지점에서 급격한 곡선을 그리며 좁아지다가 저부에서 약간 외반하는 기형을 이룬다. 작은 크기에 비해 동체의 상부가 커짐으로써 기형의 곡선이 부각되어 부피감을 준다. 동체의 중앙에는 날아가는 용 두 마리를 배치하였는데 A유형에 비해 문양을 그릴 기면이 좁은데도 불구하고 문양의 크기를 줄여서 A유형 백자용준의 모든 문양요소들을 적절하게 배치해 장식했다. 안정된 기형 위에 균형있는 문양 배치와 섬세한 표현이 조화롭게 어우러진 유물이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A유형에 비해 작은 용 두 마리가 구름 사이를 날며 여의주를 쫓는 모습이 세밀한 필치로 그려져 있다. 문양을 청화안료로 그린 후 그 위에 여의주, 쌍룡의 코, 혀, 앞발과 발가락에 철화안료를 추가적으로 그렸다. 백자청화용준 중 철화나 동화를 함께 사용한 사례가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기법이 조야한 것에 비해 이 유물의 문양은 두 종류의 안료를 사용해 섬세한 필치로 그려졌다. 비록 번조과정에서 철화안료가 흘려내려 의도한 장식효과를 얻지 못했으나, 다른 안료들을 함께 사용했을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 이 백자용준에서 철화안료가 칠해진 위치들은 사수도의 청룡이나 관왕묘 병풍 뒤의 구룡(九龍) 등 회화에 그려진 용의 세부표현들과 일치한다(Fig. 5, Fig. 10). 따라서 이 유물에서 철화로 장식한 부분은 임의적인 장식이 아니라 왕실 회화 속 용의 형태를 이해한 이가 그린 문양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용의 발가락 아래의 주름진 살을 규칙적인 짧은 선으로 그린 방식은 A유형의 용문의 특징으로 다른 백자용준들에서는 찾기 어렵다. 따라서 이 유물은 A유형과 매우 친연하여 마찬가지로 왕실용 기물일 수 있다는 가설에 무게를 실어준다.
더불어 이 유물의 동체에 그려진 쌍룡들의 발가락이 4개라는 사실은 사용계층을 짐작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분명 A유형에 비해 작은 크기의 호이지만 A유형에 장식된 모든 문양 요소를 일정하게 축소시켜 밀도있게 채워넣었다. 동시에 백자용준의 주인을 은유적으로 암시하듯 용의 발톱을 4개로 줄였다. 발톱의 개수는 이 유물의 주인이 왕이나 왕세자가 아니라 대군 이하의 왕자나 왕녀라는 가설을 세울 수 있는 근거가 된다. 특히 하부의 산형연판문대 일부에‘김씨자손에게 전하노라’는 의미의 ‘傳之于金氏子孫’명문이 세로 방향으로 쓰여 있다(Fig. 10). 이는 조선시대 백자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별한 사례이므로, 다음 절에서 명문의 내용을 통해 이 유물을 심층적으로 조사해보겠다.

2. 영조대 화순옹주의 혼례용 화준

조선 21대 임금인 영조의 자식은 모두 14명으로 그 중 딸이 12명이었다. 영조의 딸 들 가운데 7명(화순옹주·화평옹주·화협옹주·화완옹주·화유옹주·화령옹주·화길옹주)만 관례를 치르고 혼인을 하였다(Table 3).42 그 중 화순옹주(和順翁主, 1720~1758)는 13세때 동갑인 경주 김씨 판돈녕 김흥경(金興慶, 1677~1750)의 넷째아들 김한신(金漢藎, 1720~1758)과 혼례를 올렸고 김한신에게는 월성위(月城尉)라는 부마의 작호가 내려졌다.
본 절에서는 영국박물관 소장 백자용준의 조형분석 그리고 명문 내용에 기반해 이 백자용준이 화순옹주와 월성위 김한신이 1732년 올린 혼례의 동뢰연에서 사용한 화준이었을 가능성이 있다는 점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이러한 가설은 다음과 같은 단계적 추론과 논증을 거쳤다.
첫째, 이 유물은 A유형의 백자용준과 밀접한 조형양식과 제작수준을 갖추었으므로 왕실 의례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만약 왕실용 백자라면, ‘김씨자손에게 이것을 전하노라’는 내용의 명문은 ‘李氏’姓을 가진 왕족이 아닌 ‘金氏’가문에 내려진 물건을 의미한다. 둘째, A유형의 백자용준 보다 크기가 작고 발톱 수가 줄어들었다. A유형의 높이(50cm 이상)보다 작은 높이(34.8cm)이고, 발톱의 개수도 4개로 줄어든 사실을 통해 사용자를 추정해볼 수 있다. 즉 왕과 왕세자를 위한 A유형 백자용준이 아닌 그 아래 신분, 예를 들어 대군 이하의 왕실 가족을 위한 백자용준일 수 있다는 추정을 해볼 수 있다. 셋째, 조선후기 국혼에서 사용되는 백자용준이 궐 밖으로 하사될 수 있는 경우는 군, 공주, 옹주, 군주의 혼례라고 할 수 있으며, 혼례를 통해 태어난 왕실 후손은 부마(駙馬)의 성을 따르므로 공주, 옹주, 군주와 관련된 기물일 가능성을 제시할 수 있다. 이에 조선후기 숙종대부터 고종대까지의 왕실 공주, 옹주, 군주의 혼인과 배우자의 성씨를 살펴본 결과, 18세기~19세기 동안 조선왕실 국혼에서 왕녀들 중 김씨 가문에 하가한 왕녀는 영조대의 화순옹주(월성위 김한신), 청연군주(광은위 김두성), 순조대의 명온공주(동녕위 김현근), 복온공주(창녕위 김병수) 4명으로 압축되었다(Table 3). 넷째, 현전하는 가례등록들에서 왕녀의 동뢰연에서 사용한 주준과 화준을 모두 살펴본 결과, 김씨 가문에 하가하면서 동시에 백자용준을 화준으로 사용한 인물은 화순옹주가 유일하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Table 3. 밑줄 친 굵은 글씨체). 명온공주와 복온공주도 김씨 가문에 하가하였지만 이때는 화준으로 백준을 사용했다.
이상의 가설과 단계적 조사를 통해, 조선후기 김씨가문에 하가한 왕녀 중 백자용준을 사용한 여성은 화순옹주가 유일하다는 점에서 영국박물관 소장 백자용준은 화순옹주와 월성위 김한신을 위한 백자용준라는 가설을 제시해 볼 수 있다. 이 가설은 조선시대 왕실 혼례에서 사용한 주준과 화준에 대한 다양한 기록들 그리고 A유형과 B유형 백자용준의 조형을 비교분석한 결과 도출되었다. 그렇다면 왜 영조는 백자용준의 하부에 이례적인 문구를 남기도록 지시한 것일까?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화순옹주와 김한신에 관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들을 근거로 삼아 제시해보고자 한다.
영조대는 당쟁의 갈등이 심했던 시기로 옹주의 배우자가 될 부마를 간택하는 일은 매우 민감한 정치적인 사안이었다. 영조는 공주, 옹주들의 배우자를 고를 때 당파를 가리지 않은 탕평책을 펼쳤으며 당대 가문들 중에서 권세가 있는 가문에 딸들을 모두 하가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43 이와 같은 배경에서 영조는 딸들 중 처음으로 시집보내는 화순옹주를 권세있는 노론계열 김흥경 집안의 출중한 자제와 혼인을 맺게 해 탕평기반을 구축하고자 했다.
특히 영조는 일곱 부마 중 김한신에게 각별하게 마음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화순옹주는 연잉군 시절에 정빈이씨(靖嬪 李氏, 1694~1721)가 낳은 딸로, 화순옹주의 언니인 화억옹주가 어린 시절에 세상을 떠났으므로 영조에게는 맏딸과 같았다. 영조는 화순옹주에게 좋은 배필을 맺게 해주고자 삼간택 전부터 세간의 평판이 좋은 김한신을 부마로 내정했다.44 또 영조는 서장녀인 화순옹주와 첫 사위인 김한신의 출합을 위한 사저를 내려주고, 어제로 종덕제 수은정에 대한 시를 지어 내리며, 매죽헌 세자를 써서 외헌에 편액을 거는 등 옹주의 출합을 손수 챙기기도 했다.45
사실 영조의 기대와 관심은 옹주와 부마 사이에서 태어날 왕실의 혈통을 향해 있었다. 세손 외에 손자가 없었던 영조가 화순옹주의 혼례에 가졌던 기대감은 다음의 구절에 잘 드러나 있다. “나는 이제 막 월성위를 얻었으니 기대하는 바가 오직 외손(外孫)에 있다”고 하였고 “원자(효장세자)가 살아 있다면 꼭 손주를 바라 볼 때인데 지금은 할 말이 없다. 내 나이가 이미 마흔을 넘었는데 부마 하나만 얻었으니, 외손을 보고자 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라며 외손에 대한 기대감을 누차 내비쳤다.46 영조의 첫 아들인 효장세자(孝章世子, 화순옹주의 동복오라버니, 1719~1728)가 훙서(薨逝)한 이후로 7년이 지난 1735년이 되어서야 사도세자(思悼世子, 1735~1762)가 출생하였다. 따라서 화순옹주가 혼례를 올린 1732년은 영조에게 왕통(王統)을 이을 세자도 그리고 세손도 없는 상황이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傳之于金氏子孫’명 백자용준은 외손의 출생을 기다리는 영조의 바램을 담아 맏딸 부부에게 내린 선물이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여겨진다.47
만약 이 백자용준이 화순옹주와 월성위의 혼례용 화준이라는 필자의 논지와 추론이 사실이라면, 이 화준의 명문에 담긴 영조의 바램은 실현되었다. 영조의 7명 부마 가문 중 유일하게 3대에 걸쳐 내리 과거에 급제하는 명망있는 ‘김씨자손’들이 배출되었기 때문이다. 즉 김한신의 양아들인 김이주(金頤柱, 1730~1797)를 비롯해 김노영(1747~1797, 장남이자 추사 김정희의 양부), 김노경(金魯敬, 1766~1837, 四男이자 추사 김정희의 생부), 그리고 추사 김정희(秋士 金正喜, 1786~1856)가 명문 속‘김씨자손’이 된 것이다.48 화순옹주와 월성위의 후손들은 크게 현달하여 영조~순조대 정계에서 왕의 최측근으로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했으나 세도정치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정계에서 축출되었다.49
이상의 역사적 사실들과 연구자의 분석을 종합해 볼 때, 영국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철화 ‘전지우김씨자손’ 운룡문호〉는 화순옹주와 김한신의 혼례에서 사용된 화준이자, 영조가 왕실의 후손이 태어나기를 고대하며 부부에게 내린 선물이었을 가능성을 앞으로 학계에서 진지하게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

Ⅴ. 맺음말

본 연구에서 조선시대 왕실 구성원의 ‘신분’에 따른 국혼용 백자용준의 ‘조형양식’ 및 ‘용도’의 상호관계를 분석한 결과, 신분별(왕, 왕세자/대군 이하 왕자와 왕녀)로 백자용준의 조형양식(높이, 용의 발톱수 등)과 용도(주준, 화준)가 달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조선시대 국가전례서 가례준작 도설에 실린 ‘백자청화주해’는 왕과 왕세자의 국혼용 주준인 백자청화용준을 의미한다. 백자청화주해는 조선초부터 왕과 왕세자의 혼례를 위한 필수적인 의물로 사용되었고, 양란직후 부득이 가화용준으로 대체된 적이 있으나 다시 서둘러 제작되었다. 왕실의 노력으로 17세기 중기부터 백자청화주해의 제작이 재개되어 18세기 전기에 이르면 높이 50cm 이상의 대형의 백자청화호를 안정된 기형으로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중 일정한 문양 요소(쌍오조룡문+경부 당초문+견부 여의두무+저부 산형연판문)를 갖춘 호를 본 연구에서는 A유형으로 분류하고, 왕과 왕세자를 위한 국혼용 주준으로 파악하였다. 이에 비해 왕세자가 아닌 왕자들과 왕녀들의 혼례에서는 백자청화주해를 사용하지 못했다. 대신 18세기 전기 동안 이들도‘청화용화준’이란 명칭의 백자청화용준(B유형)을 사용한 사실을 새롭게 확인했다. B유형은 A유형과 거의 동일하나 높이가 30cm대로 작아지고 사조룡문이 장식되었다는 점에서 A유형과 조형적 차이가 있다. 왕자와 왕녀들의 가례등록을 전수조사한 결과 청화용화준을 사용한 인물들은 총 7명으로, 숙종의 아들인 연잉군과 연령군, 영조의 딸들인 화순, 화평, 화협, 화완, 화유옹주이다. 한편 화유옹주의 혼례(1753) 이후 영조의 지속적인 검약조치가 이어지고 왕실 혼례가 연이어지자, 영조는 화령옹주 혼례(1764)부터 청화용화준을 백준으로 다시 바꾸도록 지시하였다. 이로써 ‘청화용화준’을 사용한 시기의 하한(1764)도 드러났다(Fig. 12). 왕과 왕세자의 ‘백자청화주해’가 최고의 위상과 정통성이 부여된 백자용준이라면, 대군 이하 왕자와 왕녀의 ‘청화용화준’은 백자청화주해와 비슷한 조형양식을 공유하여 왕실 혼례의 권위를 갖고 있으면서, 동시에 용도(화준)와 세부요소(사조룡, 크기)를 달리해 왕실 가족간의 신분적 차이를 드러낸 기물이라고 할 수 있다. 왕실 가족의 신분에 따라 백자용준의 크기와 용문양의 발톱수에 차이를 두는 방식은 백자용준의 제작과 사용체계가 엄격하면서도 섬세하게 설계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조의 절검정책 속에서 ‘청화용화준’이 다시 ‘백준’으로 바뀌게 되면서, 백자청화주해가 독점한 불변의 위상과 정통성이 거듭 확인되었다. 이 외에도 국혼을 치른 이후 백자청화주해가 왕실 연향의례에도 사용되었을 가능성 등을 논거를 들어 새롭게 제시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영국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철화운룡문‘전지우김씨자손’명호〉를 분석한 결과, 이 기물이 1732년(영조8)에 혼례를 올린 화순옹주와 김한신을 위해 영조가 하사한 화준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화순옹주가 백자용화준을 사용한 왕녀 중 김씨 집안에 하가한 유일한 옹주였을 뿐만 아니라, 화순옹주 하가 당시 왕통을 이을 세자나 세손이 없던 영조가 외손의 출생을 바랬던 정황이 사료로 확인되기 때문이다. 이 기물의 명문 중 ‘김씨자손’이 화순옹주와 월성위 김한신의 자손일 수 있다는 연구자의 해석이 사실과 부합한다면, 그 자손들은 김이주, 김노영, 김노경 그리고 김정희가 된다. 한 점의 유물에서 조선후기 왕실용 백자청화용준의 제작 배경과 시기를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당대 인물들과의 관계까지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추가적인 논의가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이처럼 본고에서는 조선시대 국혼용 백자용준의 사용체계를 왕실 가족내 신분과 연결하여 살펴보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왕자와 왕녀들의 혼례용 백자용준에 대해서 새롭게 확인하였다. 더불어 현전하는 조선시대 백자용준 중 왕실 인물과 관련된 구체적인 사례를 발굴하고자 시도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를 두고자 한다.

Notes

1) 『世宗實錄』 「五禮」嘉禮 尊爵圖說; 『國朝五禮儀序例』 嘉禮 尊爵圖說; 『國朝五禮儀』 吉禮 祭器圖說.

2) 『國朝喪禮補編』 「圖說」 返虞. 이후의 국가전례서인 『國朝五禮通編』, 『春官通考』, 『大韓禮典』에도 길례, 가례, 흉례의 주준용 백자용준이 모두 실렸다. 뿐만 아니라 현전하는 조선후기 연향의궤에도 주준용 또는 화준용의 백자 용준 도설이 실렸다.

3) 백자용준에 관한 초기연구에서는 일찍이 『세종실록』 「오례」 의 백자청화주해을 주목해왔다. 정양모, 「조선백자 청화백자」, 『한국미술사의 현황』 (예경, 1992), pp. 403-404; 윤용이, 「조선초기도자의 양상」, 『조선백자요지 발굴조사 보고전』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1993), p. 80; 강경숙, 「분원성립에 따른 분청사기 편년 및 청화백자 개시 문제」, 『이기백선생고희기념 한국사학논총(하)』 (일조각,1994), pp. 1494-1495; 김영원, 『조선전기 도자의 연구』 (학연문화사, 1995), pp. 140-141; 장기훈, 「朝鮮時代 白磁龍樽의 樣式變遷考」, 『미술사연구』 12 (1998); 방병선, 「雲龍文 분석을 통해 본 조선 후기 백자의 편년체계」, 『미술사학연구』 220 (1999). 이후에도 조선전기 백자청화주해 도설의 조형 양식이나 중국과의 영향관계에 대한 논의는 윤효정(2002), 전승창(2009), 김은경(2020), 오영인(2022)의 연구 등을 통해 심화되고 있다.

4) 신승인, 「朝鮮後期 王室 宴享用 白磁 花樽 硏究: 酒樽과의 比較를 中心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 학위 논문(2012); 최건, 「大阪市立東洋陶瓷美術館 소장 李秉昌컬렉션 〈白磁靑畵龍樽〉에 관하여」, 『東岳美術史學』 14 (2013); 최건, 「청화백자에서 龍樽이 갖는 의미-특히 17, 18세기를 중심으로-」, 『동양미술사학』 3 (2015); 송인희, 「조선 17세기 전반의 ‘假畵龍樽’」, 『미술사논단』 38 (2014); 구혜인, 「조선시대 酒樽용 白磁龍樽의 문양과 왕실 의례와의 관계」, 『미술사학보』 48 (2017); 최윤정, 「朝鮮時代 民窯 鐵畵雲龍文壺 性格 考察」, 『미술사연구』 33 (2017); 이군무, 「조선 18세기 백자청화운룡문대호 연구: 문양의 특징과 용도 구분을 중심으로」, 『미술사와 문화유산』 8 (2019). 그 외 조선시대 백자 관련 단행본, 도록, 학위논문 등에서도 백자용준에 관한 다양한 논의가 꾸준히 다루어졌다. 지면 한계상 관련 연구들은 참고문헌으로 대체하고자 한다.

5) 화준(花樽)과 화준(畫樽)을 한자 병기 없이 ‘화준’으로 쓸 경우 오독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후 이 글에서 언급하는 화준은 모두 꽃을 담는 花樽을 의미한다는 점을 미리 밝힌다.

6) 가례는 국혼 외에 다른 의례들(관례·책봉·조회·존호·하례·연향 등)도 포괄하므로 본고에서는 다른 가례들과의 혼동을 피하기 위해‘국혼’이란 용어를 선택하겠다. 또 역사, 복식사, 서지학 분야에서 국혼을 주제로 한 연구가 많이 이루어졌으나 지면의 한계상 연구사 정리는 생략하겠다.

7) 이에 관한 자세한 논의는 필자의 졸고를 참고할 것. 구혜인, 앞의 논문(2017), pp. 10-13.

8) 조선왕조는 국왕의 자녀 가운데 아들을 ‘王子’, 딸을 ‘王女’라고 불렀다. 다만, 적서의 구분에 따라 正宮이자 嫡室인 왕비에게서 난 아들과 딸을 ‘大君’, ‘公主’로 부른 반면에 後宮이자 庶女에게서 난 아들과 딸을 ‘王子君’ 또는 ‘君’, ‘翁主’라고 불렀다.

9) 국혼은 국가기관의 주관하에 국가예산을 운용하여 치르는 혼례이다. 따라서 왕과 세자 뿐만 아니라 왕자와 왕녀들의 혼례도 국가예산으로 거행되었으므로 국혼에 포함된다. 왕실 가족 구성원의 혼례는 절차와 규모에 차등이 있기는 하지만 士大夫禮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王朝禮로서 거행되었다. 임민혁, 「조선후기 공주와 옹주, 군주의 가례(嘉禮) 비교 연구」, 『온지논총』 33 (2012), p. 285.

10) 조선시대 육례 중 납채는 신부를 채택하는 의식이고, 납징은 예물을 보내는 의식이며, 고기는 혼례 날짜를 알려주는 의식이다. 이어 책비나 책빈은 혼례 상대방을 왕실 배우자의 격에 맞게 책봉하는 의식이고, 친영은 왕(왕세자)이 왕비(왕세자비)를 맞아오는 절차이다. 마지막으로 동뢰는 궁에 들어온 신부와 신랑이 절을 하고 술을 나누어 먹는 의식으로, 동뢰연을 치른 후 합방에 든다.

11) 『禮記』 「昏義」.

12) 가례 준작도설의 백자청화주해가 국혼의 동뢰연 절차에 사용된 주준을 증명하는 구체적인 내용은 필자의 졸고를 참고할 것. 구혜인, 앞의 논문(2017), pp. 16-18.

13) 국가전례서 도설에 실린 백자청화주해들의 전체적인 형태는 서로 유사하나 세부요소에서 차이가 있다. 예를 들어 용의 발톱수가 도설마다 3개(세종실록오례의)-5개(국조오례의)-4개(국조오례통편)-3개(춘관통고)-4개(대한예전)로 변한다. 이 외에도 다양한 요소(얼굴형, 눈의 형태, 머리털의 방향, 코와 턱수염의 모양, 몸의 형태 등)에서 불규칙적인 변화를 보이고 있다. 구혜인, 앞의 논문(2017), pp. 10-12 참고. 따라서 사료와 회화를 통해 백자용준의 조형을 참고하고 추정할 수는 있지만, 완벽한 정보로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측면이 있다.

14) 본고의 지면을 빌어 기존 연구의 오류를 수정하는 양해를 구하고자 한다. 필자의 졸고(2017) 중 ‘백자청화주해를 반드시 1쌍 혹은 2쌍 진설했다’는 문장을 ‘백자청화주해를 반드시 1쌍씩 진설했다’로 정정하겠다. 구혜인, 앞의 논문(2017), p. 17.

15) 국혼은 왕실의 경사를 대표하므로 嘉禮로도 불리고, 국혼의 전과정을 일컬어 大禮라고도 불렸다. ‘대례시 국조오례의 준작도설 기명질’은 국조오례의에 수록된 국혼용 각종 酒器들을 열거한 것으로 두 종류의 문헌들에 실린 잔, 병, 주해 등의 물종의 명칭이 서로 일치한다. 후대로 갈수록 「대례교시오례의준작도설기질」에 기록된 주기들이 점차 다른 종류로 대체되었으나 백자청화주해만큼은 변함없이 사용되었다.

16) 이 표는 왕과 왕비의 혼례기록인 가례도감의궤(19건)와 왕과 후궁의 혼례기록인 『경빈김씨가례청등록』(1건)을 대상으로 하였다. 표의 가독성을 위해 기록 중 주준과 화준의 명칭이 같은 경우 표의 여러 칸을 합쳐 한 칸에 적고, 명칭이 다르거나 추가된 정보(예: 백준가화 등)가 있는 경우는 칸을 구분하여 적고 별도 표시(*)를 하였다.

17) 사료에서 가화준이 假畫樽, 白樽假畫, 假畫龍樽, 龍樽以假畫 등 여러 가지 용어로 기록되어 있고, 학계에서는 대체로 가화준을 가화용준으로 부르고 있다. 『光海君日記』, 光海10年(1618) 閏4月 3日; 『承政院日記』 4冊, 仁祖3年(1625) 2月 14日; 『承政院日記』 14冊, 仁祖4年(1626) 閏6月 13日; 『承政院日記』 43冊, 仁祖12年(1634) 5月 18日 등. 가화용준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과 분석은 다음의 연구들을 참고할 것. 신승인(2012)의 앞의 연구, pp. 37-40; 송인희, 앞의 연구(2014) 등.

18) 『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 「三房儀軌」 「三房各樣器皿物件數」; 『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 「三房儀軌」 「啓辭·甘結帙」.

19)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大禮敎是時五禮儀尊爵圖器皿秩」; 당시 호조에서는 화준 1쌍과 백자청화주해 1쌍의 문양을 그릴 ‘회회청 7戔 어치’를 사옹원에 지급할 계획이었다.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三房器皿色」 戊寅十月初九日. 더불어 1619년(광해군11)에 회회청을 무역해 온 李弘虬에게 시상한 사례가 있어 17세기 초부터 국내에서 청화백자 제작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은 기존 연구들에서 누차 언급된 사실이다. 『光海君日記』, 光海君11年(1619) 4月 17日. 그러나 1626년(인조4)에 사신행차에 따라가는 역관에게 품질이 좋은 화룡준 한 쌍을 골라 사오라고 명하는 내용으로 보아 광해군~인조대 동안 국내로의 청화수급은 여전히 불안정한 측면이 있었다. 『承政院日記』, 仁祖4年(1626) 閏6月 13日.

20) 『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 「三房器皿色」;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三房器皿色」

21) 『承政院日記』, 仁祖12年(1634) 5月 18日.

22) 최건은 연구(2015)에서 ‘제왕 전용의 대례 진연용 대형 쌍용준 보다 태평관의 용준과 장렬왕후 가례용 화준의 위계가 낮아 가화나 석간주로 대체할 수 있었다’고 해석하였다. 최건, 앞의 연구(2015), p. 96. 大禮, 賓禮, 嘉禮의 輕重과 청화, 철화, 가화의 관계를 비교하는 해석으로 주목된다. 필자도 의례와 장식기법의 상호관계에 대해 동의하면서, 세부적으로 다른 견해를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가례 중 孝가 강조된 진연도 중요하지만 왕실 후손을 기약하는 국혼이 가장 중시되었다. 이에 국혼만을 특별히 ‘가례’나 ‘대례’로도 불렀다. 따라서 국혼을 진연이나 빈례와 동일한 위계로 보기 어렵다. 또 인조장렬왕후가례에서 주준을 석간주백준(백자철화용준)이 아닌 가화백준으로 대체한 것은 국혼의 위계가 낮기 때문이 아니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국혼용 주준만큼은 가화백준을 써서라도 『국조오례의』의 권위있는 전통, 즉 백자청화주해와 가장 가깝게 갖추려고 노력한 결과로 해석할 수 있다.

23) 『[仁祖莊烈后] 嘉禮都監儀軌』; 『[純祖純元后]嘉禮都監儀軌』; 『[憲宗孝顯后]嘉禮都監儀軌』; 『[哲宗哲仁后]嘉禮都監儀軌』; 『[高宗明成后]嘉禮都監儀軌』; 『[純宗純明后]嘉禮都監儀軌』.

24) 이는 연향 관련 의궤에서 연향용 화준으로 백자용준과 唐畵樽을 번갈아 사용하던 방식과 유사하다. 신승인, 앞의 논문(2012), pp. 22-25. pp. 52-55; 송인희, 앞의 논문(2014), pp. 93-100.

25) 기존 연구들에서는 백자용준의 하부장식을 변형연판문, 규형연판문, 규형판문, 검형연판문 등으로 명명했다. 연구자는 왕실 흉배, 향합 등에 장식된 용문과 산문의 형태를 살펴본 결과, 백자용준의 경우 전통적인 연판문에 산문이 결합된 문양이라고 판단해‘산형연판문’으로 부르고자 한다. 산형연판문에 대한 필자의 기존 견해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할 것. 구혜인, 앞의 논문(2017), pp. 20-21.

26) 기존 연구나 도록에서 이 유물의 높이를 47.2cm로 소개되었으나, 현 소장처인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높이가 52.5cm인 것으로 확인했다

27) 선행연구들에서는 백자청화용준 가운데 A유형에 포함되는 일부 유물의 제작시기를 분석한 바 있다. A유형의 출현을 가장 이르게 보는 관점은 17세기說로 청화백자 제작의 제반여건이 충분히 복구되었고 이 시기 청화백자도 제작되었다는 점을 근거로 들어 17세기 중반부터 제작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최건, 앞의 연구(2015); 이슬찬,「조선 17세기 청화백자의 제작과 확산」,『미술사학연구』(2019), pp. 153-164. 주석63 참조. 더불어 동일한 이유를 근거로 하되 청화안료의 공급이 보다 안정된 시기인 17세기 후반부터 A유형 백자용준의 제작되기 시작했다고 해석한 연구도 있다. 신승인, 앞의 연구(2012), pp. 78-80. 18세기 전반說은 A유형 백자용준 용문양 중 몸이 肥厚한 용들에 대해 18세기 전반의 산릉도감의궤 청룡도와의 유사성을 근거로 18세기 전반부터 제작된 것으로 분석했고, 그 이전에도 A유형과 같은 백자청화용준이 제작되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겼다. 최경화, 「조선후기 분원리 시기 관요백자 연구-1752~1895년을 중심으로」, 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2014), p.193, 주석539. 18세기 중반說을 제시한 연구에서는 제작여건, 조형양식, 산릉도감의궤 청룡도와 『원행을묘정리의궤』 화준과의 비교를 통해 A유형 백자용준에 포함된 유물의 제작시기를 분석했다. 장기훈, 앞의 연구(1998),. p. 105; 방병선, 앞의 연구(1999), pp.58-59; 방병선, 『조선후기 백자 연구』, (일지사, 2002), pp. 286-296. 이처럼 학계에서는 A유형 백자용준의 제작이 ‘개시’된 시기를 17세기 중반부터 18세기 중반의 시기 내의 어느 기점으로 다양하게 보고 있다. 필자는 17세기 중반부터 백자청화용준이 제작되는 가운데, A유형 백자용준은 18세기 전반부터 제작이 개시되었다고 판단한다. 그리고 A유형의 백자용준은 높이 50cm 이상의 백자청화용준에 4가지 문양요소들은 유지하되 문양의 표현방식이 점차 변형되면서 19세기까지 제작된다고 본다(Table 4). 본고에서 백자청화용준에 대해 편년이 아닌 ‘용도’를 다루고 있고, 〈Table. 2〉의 A유형 백자용준의 분류기준이 제작시기가 아닌 ‘용도(국혼용 주준)’이므로, A유형 백자용준들의 구체적인 조형양식 분석과 편년추정은 후속논문을 기약하겠다.

28) 『顯宗明盛王后嘉禮都監儀軌』. 17세기 후반에는 총 4차례의 국혼(왕가례 1회, 세자가례 3회)이 있었고 더 이상 가화용준이 아닌 백자청화주해가 마련되었다.

29)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 (1631, 인조9); 『孝宗寧陵山陵都監儀軌』 (1659, 현종14); 『孝宗寧陵遷陵都監儀軌』(1674); 『仁宣王后寧陵山陵都監儀軌』 (1674, 숙종 즉위); 『顯宗崇陵山陵都監儀軌』 (1674, 숙종 즉위); 『仁敬王后翼陵山陵都監儀軌』 (1681, 숙종7); 『明聖王后崇陵山陵都監儀軌』 (1684); 『莊烈王后徽陵山陵都監儀軌』 (1689); 『端宗莊陵封陵都監儀軌』 (1699, 숙종25) .

30) 17세기 후반 개인의 묘지석 제작 등 私燔이 이루어지고 민간에 청화백자가 상당수 보급되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 사료와 연구를 참고할 것. 金昌協,『農巖集』卷26, 贊銘, 雜器銘; 방병선, 앞의 책(2002), p.79.

31) 『英祖實錄』 1754年 (英祖30) 7月 17日.

32) 조선시대 흉배에 나타난 문양들의 양식변화나 조선중기 공예품의 칠보문 장식에 대해서는 다음 연구들을 참고할 것. 김미경, 「조선시대 공신초상을 통한 관복제도 연구」 (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융합콘텐츠학 박사학위 논문, 2020); 이다란, 「조선후기 청화백자를 통해 본 칠보문의 구성과 활용」, 『미술사학연구』 313 (2022), pp. 70-72.

33) A유형 백자용준 문양들의 표현방식에서 보이는 차이를 제작시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지만 여러 명의 화원(화공)이 참여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화풍의 차이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본다. 물론 A유형의 백자용준들이 동시기에 한꺼번에 제작된 것이 아니므로 분명히 제작의 선후관계가 존재하지만, 필법과 수준이 다른 화공이 비슷한 시기에 백자용준을 제작했을 가능성도 충분히 고려해볼 수 있다. 따라서 A유형 백자용준의 제작시기를 구분하기 위해 문양의 세밀한 양식분석이 필수적이고 문양표현의 변화도 분명히 유의미하지만, 세부적인 요소들(여의두문 상하반전, 하부종속문의 개수, 구름표현 방식의 차이 등)의 변화가 제작시기를 판별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기는 어렵다고 보인다. 또한 사료와 회화에 그려진 용문양이 제작시기 추정을 위한 귀중한 자료임에는 분명하지만, 제작체계, 목적, 조건, 재료가 다르다는 사실도 고려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백자용준의 용문양은 백자들뿐 만이 아니라 동시기 다른 공예품과의 종합적인 비교고찰이 병행될 필요가 있다. 본 연구가 A유형 백자용준의 조형과 용도의 관계를 밝히고자 시도하는 연구이므로, 유물들의 구체적인 제작시기와 선후관계에 대해서는 추후 연구를 기약하겠다.

34)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주준용 백자용준과 화준용 백자용준은 서로 구분되는 다른 종류였을 것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신승인, 앞의 논문(2012); 구혜인, 앞의 논문(2017). 그래서 주준과 화준의 조형적 차이점이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이를 밝히려는 연구도 진행되었다. 물론 주준과 화준의 용도가 다르고, 사료에서도 주준과 화준을 구별해 기록했으며, 일부 유물은 주준보다는 화준에 적합한 요소(예: 구연의 높은 목)를 갖추고 있다. 하지만 처음 제작할 때 주준 또는 화준용으로 만들어 사용한 후 백자용준에 담겼던 술과 꽃을 비웠을 경우를 가정하면, 속이 빈 백자용준을 주준과 화준으로 구분해 사용했을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35) 『進宴儀軌』 ‘…花樽二坐 司饔院次知 樽內所實白米司䆃寺進排…’; 『和協翁主嘉禮謄錄』 「各司所掌物目秩」 ‘…軍資監 花樽實入米太各一石…’ 등.

36) 『국혼정례』는 영조 25년(1749)에 昏俗의 사치를 막고 국비의 낭비를 줄이기 위해 궁중 혼수를 감축하여 정례로 만든 책이다. 『明安公主嘉禮謄錄』; 『延礽君冠禮謄錄』; 『延齡君嘉禮謄錄』; 『和順翁主嘉禮謄錄』; 『和平翁主嘉禮謄錄』; 『和協翁主嘉禮謄錄』; 『淸衍郡主嘉禮謄錄』; 『和吉翁主嘉禮謄錄』; 『淸璿郡主嘉禮謄錄』; 『明溫公主嘉禮謄錄』; 『德溫公主嘉禮謄錄』; 『福溫公主嘉禮謄錄』; 『永惠翁主吉禮謄錄』.

37) princes and princesses who died prematurely without a wedding are excluded from the Table

38) 『承政院日記』 英祖30年 (1754) 4月 29日; 英祖30年 (1754) 7月 17日.

39) 이로 인해 청근현주의 삼간택은 1769년에 행해졌으나, 혼례는 3년이 지난 1772년에 비로소 거행되었다.

40) 『承政院日記』 英祖40年(1764) 1月 24日.

41) 이 백자를 수집하여 영국박물관에 기증한 이는 Dr. W. M. Tapp(Tapp, William Munro)으로, 1912~1913년에 그는 한국을 여행하면서 도자기를 구입했다. A유형에 속하는 또 다른 백자용준(높이 51cm)을 영국 V&A에도 기증하여 조선왕실의 백자를 구입할 수 있는 경로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국외 소장된 백자용준의 유형과 반출 경로는 후속연구를 기약하겠다.

42) 화순옹주 위로 향염(이후 화억옹주로 추존)가 있었지만 태어난 이듬해에 사망하여 화순옹주는 영조의 장녀 대접과 각별한 사랑을 받았다. 박 주, 「영조의 딸 열녀 화순옹주의 삶과 죽음」 (『한국사상과문화』, 2012).

43) 신채용, 「영조대 탕평정국과 駙馬 간택」, 『朝鮮時代史學報』 51 (2009).

44) 김한신의 졸기에서 史臣은 “부귀로 생장하였으나 芬華함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의복이 寒士와 같았으며, 출입에 軺車를 타지 아니하고 항상 말을 타며 많은 무리를 물리치고 홀로 다니니, 街路의 사람들이 간혹 도위가 된 것을 알지 못하였다.”라고 하였다. 『英祖實錄』 卷91, 1758 (英祖34年) 1月 4日. 김인경, 「18~19세기 月城尉 金漢藎 가문의 기반 확보와 정치적 동향」 (『조선시대사학보』 97 (2021), p. 246, 주석60 재인용.

45) 金頤柱, 『先府君家狀』 「月城尉行狀」; 韓國古簡札硏究會, 『추사 김정희와 주변인물의 관련유묵』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2006), p. 64 참고, 김인경, 위의 논문 (2021), p. 238 재인용.

46) 『承政院日記』 770冊, 1733年 (英祖9) 12月 18日 乙丑; 『承政院日記』 784冊, 1734年 (英祖10) 8月 16日 己未.

47) 김한신은 영조34년(1758) 1월 4일 39세의 나이에 갑자기 병사하자 화순옹주는 스스로 음식을 끊은 후 14일만에 自盡하였다. 화순옹주와 월성위는 슬하에 자녀가 없어, 김한신은 세상을 뜨기 전 날 자신의 형인 金漢楨의 셋째 아들인 金頤柱(1730~1797)를 양자로 정했다. 영조는 ‘김이주에게 (이미) 아들 셋이 있다고 하니, 나는 증손을 보겠구나.’라고 말하였다.

48) 역사학계의 성과를 빌어 월성위 부마가문에 대한 내용을 덧붙이자면, 화순옹주와 월성위의 사후에도 그 후손들에 위한 왕실의 예우가 이어졌다. 예를 들어 월성위의 손자 김노영이 과거에 합격하자 영조는 용호영의 三鉉을 특별히 내렸고 해조로 하여금 곡식과 피륙을 제급했다. 『英祖實錄』, 英祖50年 8月 28日. 『純祖實錄』, 純祖19年(1819) 閏4月 1日. 김인경, 위의 논문(2021), pp. 252-259 참고 인용.

49) 순조-헌종-철종 연간 세도정치가 본격화되는 과정에서 월성위 가문은 부침을 겪었다. 김노경은 효명세자 사후 안동김씨에 의해 탄핵되었고, 그 여파로 인해 김정희도 탄핵되어 정치에서 축출되었다. 김인경, 앞의 논문(2021), p. 274. 이 백자용준이 화순옹주가 아닌 김이주, 김노영 또는 김노경을 위한 백자용준일 가능성도 고려해볼 수 있으나 이미 김이주는 혼례를 치른 이후 28세의 나이로 양자가 되었으므로 해당되지 않다. 또 김노경의 혼례 즈음에는 이미 왕자와 왕녀들도 백자용화준을 사용할 수 없는 상황이었으므로 김노경에게 하사되었을 가능성도 희박하다. 김노영의 혼례에 영조가 이 백자용준을 하사했을 가능성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김노영 관련 문집을 조사한 결과 그가 백자용준을 하사받은 내용은 확인할 수 없었다.

Fig. 1.
〈동뢰연에 진설된 주준과 화준〉, Rice wine jar and flower jar displayed at the Tongnoe ceremony during the royal family wedding, Injoj angnyŏrhu garye togamŭigwe, 1638, Ink and Paper, Kyujanggak (Kyujanggak, http://ky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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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백자청화주해, 白磁靑花酒海〉, Illustration of white porcelain jar with decoration of dragons underglazed with cobalt blue, Sejong sillok oryeŭi, 1451, Drawing on Paper,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https://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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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경현당 석연도(景賢堂錫宴圖)〉, 《기사계첩(耆社契帖)》 Kyŏgyŏndang sŏgyŏndo, Gisag yech’ŏp (left), 1719 -1720, Chosŏn, Painting on Silk, 3.0×66.5cm each, Two types of white porcelain jar with decoration of dragons (right),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Ewha Womans University Museum, http://museum.ewha.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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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백자청화운룡문호〉, White porcelain jar with underglaze with cobalt blue decoration of dragons, H. 34.5cm, Late of 17th Century, The Museum of Oriental Ceramics, Osaka (https://www.moco.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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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청룡도 〉, “ Blue dragon.” llŭng togam ŭigwe 1681,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museum.go.kr/uigw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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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단령 겉감의 운문과 보문, Detail of cloud and treasure patterns on the official’s robe excavated from the tomb of Sin Kyŏngyu (1581-1633), Early 17th Century, Dankook University Seokjuseon Memorial Museum, Tan’guktaehakkyo sŏkchusŏn’ ginyŏm bangmulgwan, Chngsagongsin sin’gyŏngyugong myo ch’ult’oboksik, p.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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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연잉군 초상화 중 백택 흉배에 그려진 백택, 구름, 산, 파도 무늬, Detail of various patterns on the insignia of prince Yeonying, Portrail of Prince Yŏnying, W. 98cm, L. 244cm, 1714,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https://www.gogung.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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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주준용 용준, Ilustration of a wine jar with dragons decoration, Chagyŏng chŏnjinjak chŏngnye ŭigwe, 1827,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ky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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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화준용 용준, Illustration of a flower Jar with dragons decoration, Wŏnhaeng ŭlmyo chŏngni ŭigwe, 1795,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http://kyu.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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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 백자청화철화운룡문호 〉, White porcelain jar with underglazed cobalt blue and iron brown decoration of dragons (left), H. 34.8cm, 1732 (assumed year by the author), British Museum (British Museum, https://www.ritishmuseum.org), Detail of the inscription “chŏn ji kimssi chason” 傳之于金氏子孫 (Bequeath Hand this over to Kim’s descendants) (right)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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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 백자청화운룡문호 〉, White porcelain jar with underglaze with cobalt blue decoration of dragons, Early 18 Century, H. 39. 5cm, Cleveland Museum of Art (Cleveland Museum of Art, https://www.cleveland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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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조선후기 왕실 가족의 신분에 따른 백자청화용준의 쓰임. a: 백자청화주해-왕과 왕세자용 주준, 조선시대 전 기간 사용. b: 청화용화준-대군 이하 왕자와 왕녀, 1712년-1753년 사용. The Use of Two Types of White Porcela in Jars with Underglazed Cobalt Blue Decoration of Dragons According to the Status of the Members of the Royal Family in the Late Chosŏn Dynasty. A: Paekcha ch’ŏngwa juhae (wine jars for kings and crown princes) from 1651 to 1906; B: Ch’ŏnghwa yonghwajun (flower jars for princes and princesses except the Crown Prince, from 1712 to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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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왕, 왕세자, 왕세손, 황태자의 국혼 중 동뢰연에 사용된 주준과 화준 The Rice Wine Jar and flower Vase used in Tongreoyŏn during the Royal Weddings of Kings and Crown Princes
Regime of king Year of marriage/Status of the bridegroom during marriage Groom and Bride Rice wine jar16 (number of its use) Flower jar (Number used)
Injo 仁祖 1627 Crowned prince Prince Sohyŏn 昭顯世子 Rice wine jar with the decoration of blue dragons 白磁靑畫酒海 2 Flower jar 花樽(畵立缸) 2
Minhoebin 愍懷嬪
1638 King King Injo 仁祖 *(Replace with a reproduction, 白樽假畫로 대체) 2 Flower jar 花樽 2
Queen Changnyŏl 莊烈后
Hŏjong 孝宗 1651 Crowned prince King Hyŏnjong 顯宗 Rice wine jar with the decoration of blue-colored dragons 白磁靑畫酒海 2 2
Queen Yŏngsŏng 明聖后
Hyŏnchong 顯宗 1671 Crowned prince King Sukchong 肅宗 2 2
Queen In’gyŏng 仁敬后
Sukchong 肅宗 1681 King King Sukchong 肅宗 2 2
Inhyŏn 仁顯后
1696 Crowned prince King Kyŏngjong 景宗 2 2
Queen Tanŭi 端懿后
1702 King King Sukchong 肅宗 2 2
Queen Inwŏn 仁元后
1718 Crowned prince King Kyŏngjong 景宗 2 2
Queen Sŏnŭi 宣懿后
Yŏngjo 英祖 1727 Crowned prince Chinjong 眞宗 2 2
Queen Hyosun 孝純后
1744 Crowned prince Changjo 莊祖 2 2
Queen Hŏn’gyŏng 獻敬后
1759 King King Yŏngjo 英祖 2 2
Queen Chŏngsun 貞純后
Yŏngjo 英祖 1762 Crowned prince as the king’s grandson King Chŏngjo 正祖 Not recorded 2
Queen Hyoŭi 孝懿后
Sunjo 純祖 1802 King King Sunjo 純祖 Rice wine jar with the decoration of blue dragon 白磁靑畫酒海 2 2
Queen Sunwŏn 純元后
1819 Crowned prince Munjo 文祖 2 2
Queen Sinjŏng 神貞后
Hŏnjong 憲宗 1837 King King Hŏnjong 憲宗 2 2
Queen Hyohyŏn 孝顯后
1844 King King Hŏnjong 憲宗 2 2
Queen Hyojŏng 孝定后
1847 King King Hŏnjong 憲宗 Not recorded Flower jar with the decoration of dragon *畵龍花樽 2
*kyŏngbin 慶嬪金氏
Ch’ŏljong 哲宗 1851 King King Ch’ŏljong 哲宗 Rice wine jar with the decoration of blue dragon 白磁靑畫酒海 2 Flower jar 花樽 2
Queen Ch’ŏrin 哲仁后
Kojong 高宗 1882 Crowned prince King Sunjong 純宗 2 2
Queen Sunmyŏng 純明后
高宗皇帝 Emperor Kojong 1906 Crowned prince King Sunjong 純宗 2 2
Queen Sunjŏng 純貞皇后
Table 2.
A유형에 속하는 백자청화운룡문호 사례 (A) White Porcelain Jar with Underglazed Cobalt Blue Decoration of Dragons Belonging to Type 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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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3.
숙종~순종대 왕자, 왕녀 동뢰연용 주준과 화준 Rice Wine Jar and Flower Jar Used in Tongreoyŏn for the Royal Princes and Princesses during the Reigns of King Hyŏnjong and King Sunjong37
Year of Marriage Status in royal Court Status in Family Bride or Groom from Royal Family Bride or Groom from Non-royal Family Wine Jar Flower Jar
1680 King’s daughter born to the queen 公主 King Hyŏnjong’s third daughter 顯宗 嫡3女 Princess Myŏngan (1667-1687) 明安公主 O T’aeju 吳泰周 (海昌慰, 1668-1716) White porcelain jar with lid(2) 白酒樽蓋具(2) Flower jar(2) 花樽(2)
1704 King’s son born to a royal concubine 君 King Sukchong’s fourth son 肅宗 庶4子 Prince Yŏning (1694-1776) 延礽君 ma’am Kim 金氏 (貞純王后) White porcelain jar with lid(2) 白酒樽蓋具(2) *White Porcelain Jar with Underglazed Cobalt Blue Decoration of Dragons(2) 靑畵龍花樽(2)
1707 King’s son born to a royal concubine 君 King Sukchong’s sixth son 肅宗 庶6子 Prince Yŏn Ryŏng (1699-1719) 延齡君 ma’am Kim 金氏
*1732 King’s daughter born to a royal concubine 翁主 King Yŏngjo’s second daughter 英祖 庶2女 *Princess Hwasun (1720-1758) 和順翁主 * Kim Hansin, 金漢藎 (月城尉, 1720-1758)
1738 King’s daughter born to a royal concubine 翁主 King Yŏngjo’s third daughter 英祖 庶3女 Princess Hwap’yŏng (1727-1748) 和平翁主 Pak Myŏngwŏn 朴明源 (錦城尉, 1725-1790) White porcelain jar with lid for containing rice wine(2) 白酒樽蓋具(2) *White porcelain jar with decoration of dragons underglazed with cobalt blue for containing f lowers(2) 靑畵龍花樽(2)
1743 King’s daughter born to a royal concubine 翁主 King Yŏngjo’s seventh daughter 英祖 庶7女 Princess Hwahyŏp (1733-1752) 和協翁主 Sin’ Kwangsu 申光綏 (永城尉, 1731-1775)
1749 King’s daughter born to a royal concubine 翁主 King Yŏngjo’s nineth daughter 英祖 庶9女 Princess Hwawan (1737-1808) 和緩翁主 Chŏng ch’idal 鄭致達 (日城尉, 1738-1757)
1753 King’s daughter by a royal concubine 翁主 King Yŏngjo’s tenth daughter 英祖 庶10女 Princess Hwayu (1740-1777) 和柔翁主 Hwang Injŏm 黃仁點 (昌城尉, 1732-1802)
1764 King’s daughter born to a royal concubine 翁主 King Yŏngjo’s eleventh daughter 英祖 庶11女 Princess Hwanyŏng (1753-1821) 和寧翁主 Sim Nŭnggŏn 沈能建 (靑城尉, 1752-1817) White porcelain jar with lid(2) 白酒樽蓋具(2) White porcelain jar(2) 白樽(2)
1765 King’s daughter born to a royal concubine 翁主 King Yŏngjo’s twelveth daughter 英祖 庶12女 Princess Hwagil (1754-1772) 和吉翁主 Ku Minhwa 具敏和 (綾城尉, ?-1800)
1765 Prince’s daughter born to his wife 郡主 Prince Sado’s first daughter 思悼世子 嫡1女 Princess Ch’ŏngyŏn (1754-1821) 淸衍郡主 Kim Kisŏng 金箕性 (光恩副尉, 1752-1811)
1766 Prince’s daughter born to his wife 郡主 Prince Sado’s second daughter 思悼世子 嫡2女 Princess Ch’ŏngsŏn (1756-1802) 淸璿郡主 Chŏng chaehwa 鄭在和 (興恩副尉, 1754-1790)
1767 King’s son born to a royal concubine 君 Prince Sado’s first son 思悼世子 庶1子 Prince Ŭnŏn (1754-1801) 恩彦君 Madam Song 鎭川 宋氏 宋樂休의 딸 Not recorded
1767 King’s son born to a royal concubine 君 Prince Sado’s second son 思悼世子 庶2子 Prince Ŭnshin (1755-1771) 恩信君 Madam Hong 南陽 洪氏 洪大顯의 딸
1772 Prince’s daughter born to a royal concubine 縣主 Prince Sado’s second son 思悼世子 庶1女 Princess Ch’ŏnggŭn (1758-1835) 淸瑾縣主 Madam Hong 洪益惇 (唐恩僉尉, ?-?) White porcelain rice wine jar with lid(2) 白酒樽蓋具(2)
1773 Prince’s son born to a royal concubine 君 Prince Sado’s third son 思悼世子 庶3子 Prince Ŭnjŏn (1759-1778) 恩全君 Madam Cho 平壤 趙氏 趙峸의 딸
1804 King’s daughter born to a royal concubine 翁主 King Chŏngjo’s first daughter 正祖 庶1女 Princess Suksŏn (1793-1836) 淑善翁主 Hongyŏnju (永明尉, 1793-185) 洪顯周
1823 King’s daughter born to a queen 公主 King Sunjo’s first daughter 純祖 嫡1女 Princess Myŏngon (1810-1832) 明溫公主 Kiimhyŏn’gŭn 金賢根 (東寧尉, 1810-1868)
1830 King’s daughter by a queen 公主 King Sunjo’s second daughter 純祖 嫡2女 Princess Pogon (1818-1832) 福溫公主 Kimbyŏngju 金炳疇 (昌寧尉, 1819-1853) White porcelain jar with lid(2) 白酒樽蓋具(2)
1837 King’s daughter by a queen 公主 King Sunjo’s third daughter 純祖 嫡3女 Princess Tŏgon (1822-1844) 德溫公主 Yunŭisŏn 尹宜善 (南寧尉, 1823-1887)
1872 King’s daughter by a royal concubine 翁主 King Ch’ŏljong’s first daughter 哲宗 嫡1女 Princess Yŏnghye (1858-1872) 永惠翁主 Pagyŏngsu 朴永曉 (錦綾尉, 1861-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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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ngnyŏl wanghu Hwirŭng sallŭngdogam ŭigwe.

Changjo janggŏnhu karyedogam ŭigwe.

Chŏngjo hyoŭihu karyedogam ŭigwe.

Chinjong hyosunhu karyedogam ŭigwe.

Ch’ŏljong ch’ŏrinhu karyedogam ŭigwe.

Ch’ŏngsŏn kunju karyedŭngnok.

Ch’ŏngyŏn’ kunju karyedŭngnok.

Hwagil ongju karyedŭngnok.

Hwasun ongju karyedŭngnok.

Hwasun ongju karyedŭngnok.

Hwawan ongju karyedŭngnok.

Hwap’yŏn kongju karyedŭngnok.

Hwahyŏ kongju karyedŭngnok.

Hŏnjong hyojŏnghu karyedogam ŭigwe.

Hyŏnjong myŏngsŏnghu karyedogam ŭigwe.

Hyŏnjong sungnŭng sallŭngdogam ŭigwe.

Hyojong yŏngnŭng sallŭngdogam ŭigwe.

Hyojong yŏngnŭng ch’ŏnbongdogam ŭigwe.

In’gyŏngwanghu ingnŭng sallŭngdogam ŭigwe.

Insŏnwanghu yŏngnŭng sallŭngdogam ŭigwe.

Injo jangyŏrhu karyedogam ŭigwe.

Kihae gisagyech’ŏp.

Kukcho oryeŭi.

Kukhonjŏngnye.

Kwanghaegun ilg.

Kyŏngbin’ karyesi karyech’ŏngdŭngnok.

Kyŏngjong danŭihu karyedogam ŭigwe.

Kyŏngjong sŏnŭihu karyedogam ŭigwe.

Kojong myŏngsŏnghu karyedogam ŭigwe.

Tanjong jangnŭng pongnŭngdogam ŭigwe.

Munjo sinjŏnghu karyedogam ŭigwe.

Myŏngsŏngwanghu sungnŭng sallŭngdogam ŭigwe.

Myŏngan’ kongju karyedŭngnok.

Myŏngan’ kongju karyedŭngnok.

Pogon’g kongju karyedŭngnok.

Sejong sillok.

Sŏnjo sillok.

Sŭngjŏngwŏn ilgi.

Sohyŏn seja karyedogam ŭigwe.

Sŏnjo mongnŭng ch’ŏnjang sallŭngdogam ŭigwe.

Sŏnbuŭi gajang Wŏlssŏngwi haengjang.

Suksŏnongju karyedŭngnok.

Sukchong in’gyŏnghu karyedogam ŭigwe.

Sukchong inwŏnhu karyedogam ŭigwe.

Sukchong inhyŏnhu karyedogam ŭigwe.

Sunjo sunwŏnhu karyedogam ŭigwe.

Sunjong sunmyŏnghu karyedogam ŭigwe.

Sunjong sunjongbi karyedogam ŭigwe.

Yŏninggun kwallyedŭngnok.

Yŏllyŏnggun karyedŭngnok.

Yŏnghyeongju killyedŭngnok.

Yŏngjojŏngsunhu karyedogam ŭigwe.

Yŏngjo sill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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