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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8; 2023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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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동주, 〈金 檀園이라는 화원〉, 월간《亞細亞》(1969. 3)에서 처음으로 이 작품의 존재가 언급되었다. 이동주, 『우리나라의 옛 그림』 (학고재, 1995), pp. 94-163에 재수록. 그 실물은 학고재에서 열린 <遊戲三昧-선비의 예술과 선비 취미>展 (2003)에서 최초로 공개되었고 전시 도록에 도판이 게재되었다. 유홍준·이태호 편, 『遊戲三昧-선비의 예술과 선비취미』 (학고재, 2003), 도 67.
2) 김광국의 수집 활동과 관련하여 〈채녀적완도〉를 다룬 선행 연구로는 박효은, 「김광국의 《석농화원》과 18세기 후반 조선 화단」, 유홍준·이태호 편, 앞의 책, pp. 125-157 참조. 조선 후기 한일 교섭의 측면에서 〈채녀적완도〉를 다룬 선행 연구로는 홍선표, 「一七·一八世紀의 韓·日間 繪畵交涉」, 『미술사학연구』 143·144 (1979), pp. 22-46; 同著, 「조선후기 韓日間 畵蹟의 교류」, 『미술사연구』 11 (1997), pp. 3-22; 박은순, 「繪畵를 통한 疏通: 朝鮮에 전해진 日本繪畵」, 『미술자료』 91 (2017), pp. 15-44가 있다. 미인도로서의 〈채녀적완도〉에 대한 선행 연구로는 임미현, 「조선후기 미인도와 일본 에도시대(江戶時代, 1603-1867) 우키요에 미인화와의 관계성 고찰」, 『역사와 담론』 88 (2018), pp. 269-305 참조.
4) 김광국과 《석농화원》에 대한 가장 집중적인 연구는 박효은에 의해 이루어졌다. 박효은, 「홍성하 소장본 金光國의 『石農畵苑』에 관한 고찰」, 『온지논총』 5 (1999), pp. 235-288; 同著, 「18세기 朝鮮 文人들의 繪畵蒐集活動과 畵壇」, 『미술사학연구』 233·234 (2002), pp. 139-185; 同著, 「《石農畵苑》을 통해 본 韓·中 繪畵後援 硏究」(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3); 同著, 「《石農畵苑》과 17-18세기 한국화단의 後援 문제」, 『숭실사학』 34 (2015), pp. 97-152; 同著, 「개인의 취향: 조선 후기 미술후원과 김광국의 회화비평」, 『한국문화연구』 29 (2015), pp. 61-103. 이 외에 이원복, 「『畵苑別集』考」, 『미술사학연구』 215 (1997), pp. 57-79; 황정연, 「石農 金光國(1727-1797)의 생애와 書畵收藏 활동」, 『미술사학연구』 235 (2002), pp. 61-85; 同著, 『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 (신구문화사, 2012); 同著, 「조선시대 수장(收藏)과 수장가(收藏家): 미술사적 의미와 전개양상을 중심으로, 『미술이론과 현장』 33 (2022), pp. 5-35 등도 참조.
5) 김광국의 증손자인 金憲章(1820~1860) 대에 이르러 가계가 기울면서 화첩이 팔려나가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유홍준, 「석농화원의 해제와 회화사적 의의」, 유홍준·김채식, 『김광국의 석농화원』 (눌와, 2015), pp. 65-66.
7) 유복렬, 『한국회화대관』 (문교원, 1973), pp. 509, 527; 국립중앙박물관, 『한국서화유물도록 제6집』 (1996); 유현재, 『幽玄齋選 韓國古書畵圖錄』 (1996), 도 141, 518, 519; 선문대학교박물관, 『鮮文大學校博物館 名品圖錄Ⅱ 繪畵篇』 (2000), pp. 227-248; 유홍준·이태호 편, 앞의 책, pp. 87-91; 황정연, 앞의 책, 표 28; 박효은, 앞의 논문(2013), 附錄Ⅰ과 附錄Ⅱ; 同著, 「《石農畵苑》과 17-18세기 한국화단의 後援 문제」, 표 2; 유홍준·김채식, 위의 책; 간송미술 문화재단, 『보화수보(寶華修補)-간송 문화재의 수리와 보존』(2022), pp. 12-49 등을 참고하여 확인하였다. 연구자 마다 작품 목록이 다르고 작품을 세는 방식도 다르기 때문에 수량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본고에서는 그림과 제발문 외에 서문과 표지, 표제, 목차도 각 1건으로 포함시켰고 그림과 발문이 함께 남아있는 것은 1건 2점으로 계산하였다.
8) 목록집 『석농화원』은 2013년 12월 화봉갤러리 경매를 통해 세상에 처음 알려졌고 2015년에 영인번역본이 발간되었다. 유홍준·김채식, 위의 책. 반면 이 목록집에 대한 더욱 신중한 접근과 면밀한 검토의 필요성을 제안한 연구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박효은, 「『석농화원』목록집의 정선 회화를 통해 본 목록집의 문제점」, 『숭실사학』 48 (2022), pp. 175-212 참조.
10) 조선 왕실에 유입된 일본 금병풍과 그 현전작 및 이모본에 대해서는 홍선표, 앞의 논문(1997), pp. 12-17; 권주영, 「조선 후기 왜물의 유입과 인식: 『通信使謄錄』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31 (2016), pp. 94-98; 박은순, 앞의 논문, pp. 20-32를 참조.
11) 仁興君(1604~1651)이나 麟坪大君(1623~1658)이 일본 병풍을 소장했던 정황이 있어 일본 화적이 왕실 바깥으로 나가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던 듯하다. 박은순, 위의 논문, p. 34. 그러나 인흥군과 인평대군은 종친이므로 이들에게 하사된 것을 민간으로의 유출과 동일선상에서 논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13) 일본에서는 근세 초 모모야마시대(桃山時代)의 기록에서 회화 및 공예 전반에 관련된 다양한 기성품을 판매하는 에야(繪屋)라는 직종의 존재가 이미 확인된다. 에야 자체는 에도시대 초기에 이르러 소멸했던 것으로 보이나 각종 출판물이나 서화의 매매는 도시를 중심으로 더욱 활성화되었다. 村重寧, 「桃山時代の町繪と琳派樣式の形成」, 『美術史硏究』 5 (1967), pp. 97-102 참조.
14) 김동철, 「조선 후기 동래지역의 유통기구와 상품」, 『역사와경계』 97 (2015), pp. 226-231; 이현주, 「조선후기 동래지역 화원 활동과 회화적 특성」, 『역사와경계』 83 (2012), p. 62.
18) 초기 우키요에 미인도에 대해서는 菊地貞夫, 『出光美術館選書 9 肉筆浮世繪』 (東京: 出光美術館, 1976), pp. 17-36; 小林忠, 「浮世繪の成立」, 『日本美術全集 22 風俗畵と浮世繪』 (東京: 學習硏究社, 1979), pp. 131-138; 樽崎宗重, 『日本の美術 248 肉筆浮世繪Ⅰ』 (東京: 至文堂, 1987), pp. 24-61, 71-80; 東京國立博物館, 『東京國立博物館所藏 肉筆浮世繪』 (1993), pp. 6-12 등을 참조.
20) 〈채녀적완도〉의 좌측 고소데와 같이 오비를 기준으로 상반신과 하반신의 문양이 각기 다른 것을 上下模樣이라 하고, 우측 고소데와 같이 상반신은 거의 무문으로 두고 하반신에만 문양을 넣은 것은 腰模樣이라 한다. 이처럼 고소데에서 오비를 기준으 로 상하의 문양이 달라지는 것 또한 오비의 폭이 증대되는 겐로쿠~교호 연간부터 등장하는 경향이다. 長崎巖, 『日本の美術 514 帶』 (東京: 至文堂, 2009), pp. 38-46.
21) 유젠조메는 염색으로 문양을 시문하는 기법인 모요조메(模樣染)의 일종으로, 문양의 윤곽에 풀을 먹여 물들지 않게 하고 그 내부를 刷毛로 칠해 물들이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회화적인 문양을 만들어내기에 용이했다. 小山弓弦葉, 『小袖ー江戶デザインの粹』 (東京: 東京國立博物館, 2019), p. 23.
22) 덴나 3년의 禁令에 따라 고소데 제작에서 누이하쿠(縫箔), 金紗의 사용과 더불어 옷감 전체를 가노코시보리로 장식하는 이른바 소카노코(總鹿の子)가 금지되었지만 가노코시보리 자체는 제재를 받지 않았다. 小山弓弦葉, 「きものー日本人が着る物」, 『きもの』 (東京: 東京國立博物館, 2020), pp. 11-12.
23) 니혼가미의 발전에 대해서는 橋本澄子, 「江戶時代女子の結髮ー兵庫まげから燈籠びんまでー」, 『MUSEUM』 160 (1964), pp. 25-26; 이미림, 「에도시대 미인풍속화 속 여성의 머리형태에 대하여」, 『일본연구』 52 (2020), pp. 225-228 참조.
29) “日本對馬州喜憲所作風雨驅牛圖 余畵廚中物也 …… 曾於畵苑原帖中倭畵 吾評云云 今觀此帖 筆力遒勁 排鋪雅潔 幾與華人高手相埒 奇絶奇絶 凡物不博觀而肆加雌黃者皆妄 豈特畵也 遂書幅端以爲藏舌之戒” 원문의 띄어쓰기 및 번역문은 목록집 영인번역본에 실린 것을 인용하였다. 유홍준·김채식, 앞의 책, p. 240.
30) 목록집의 총목에 “첩 안에 넣지 않았다. 시랑 유의양의 집에 있다(不載帖中 在柳侍郞義養家).”고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그림을 감상한 김광국의 화평만이 화첩에 수록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31) 목록집에는 〈채녀적완도〉와 〈풍우구우도〉 뒤에 각각 〈俄羅斯畵〉, 〈泰西 樓閣圖〉 및 〈유구 화조도〉가 있지만 이들은 《석농화원》에 그림이 수록되지 않고 김광국이 화평만 남긴 작품들이다. 즉 화첩에 수록된 그림 순서상으로는 일본화가 모두 마지막에 위치한다.
32) 김광국이 중인 신분이면서도 스스로를 문인으로 의식하고 명과 청에 대해 상반된 태도를 갖고 있었던 양상에 대해서는 박효은, 앞의 논문(2013), pp. 266-293 참조.
34) 18세기 말-19세기 초 일본에 대한 조선 지식인들의 인식 변화에 대해서는 강민기, 「近代 轉換期 韓國畵壇의 日本畵 유입과 수용: 1870년대에서 1920년대까지」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05), pp. 16-17, 25-27; 권주영, 앞의 논문, pp. 104-105 참조.
37) 근세초기풍속화와 초기 우키요에의 관계에 대해서는 菊地貞夫, 앞의 책, pp. 7-13; 山口桂三郞, 「初期浮世繪について」, 『MUSEUM』 404 (1984), pp. 4-6; 樽崎宗重, 앞의 책, pp. 17-23; 大久保純一, 『日本の美術 482 美人風俗畵』 (東京: 至文堂, 2006), pp. 18-38; 이미림, 「江戶時代 遊女의 肖像: 寬文美人圖를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0 (2006), pp. 99-104 등을 참조.
38) 유곽의 유녀가 아닌 시정의 평범한 일반 여성을 모델로 한 우키요에 미인도가 등장하는 것은 스즈키 하루노부가 활동하는 메이와 연간 무렵부터이다. 小林忠, 「浮世繪の精華」, 小林忠·小松大秀·淺野秀剛 編, 『日本美術全集 20 浮世繪』 (東京: 講談社, 1991), pp. 150-151 참조.
39) 홍선표, 「화용월태의 표상: 한 국 미인화의 신체 이미지」, 『한국문화연구』 6 (2004), pp. 37-38; 문선주, 「조선시대 중국 사녀도(仕女圖)의 수용과 변화」, 『미술사학보』 25 (2005), pp. 73, 87-88; 고연희, 「美人圖의 감상코드」, 『대동문화연구』 58 (2007), pp. 307-314.
42) 『惺所覆瓿稿』 卷之十三 文部 題跋 「題李澄畵帖後」 “…… 余令澄畵各樣于小帖。 終之洗兒二女。 人曰不及楨。 而細看則豊肌媚笑。 逞其妖嬌態。 咄咄咄逼眞。 亦妙品也。 不欲久展。 久則恐敗蒲團上工夫也。” 원문과 표점은 한국고전종합DB에서 인용하였다. 밑줄은 필자가 표기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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