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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7; 2023 > Article
청양 본의리 가마 출토 백제 소조 대좌: 언제, 어떻게, 왜 만들었나?

Abstract

본의리 대좌상은 거대한 크기와 명확한 출토지를 가진 중요한 백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연구성과는 턱없이 부족한 현실을 안타까워하며, 필자는 재조사와 재검토를 진행하였다. 그 과정에서 “언제, 어떻게, 왜 제작되었는지”라는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해답을 추적한 결과 기왕의 연구성과와 다른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첫째, 본의리 상현좌 양식은 기왕의 남조를 강조하던 내용과는 달리 백제와 남조의 전통양식과 7세기 수·초당대 신양식이 혼합되어 새롭게 탄생한 백제화된 양식으로 보았다. 둘째, 본의리 대좌의 제작기법에 대해 고찰한 결과 성형과정에서 기왕의 점토띠 사용이라는 연구결과와는 달리 일정한 크기의 점토판을 쌓아가며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7세기대 백제 대형 소조상의 전체적인 제작기법은 사비기 와도겸업의한 단면을 유추하게 하였으며, 7세기 후반 능지탑 소조상을 대표로 하는 신라 대형 소조상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판단하였다.
셋째, 본의리 대좌는 백제 그 당시 불좌상과 광배, 대좌가 모두 갖추어진 완전한 불상을 계획한 후 대좌만 별도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불상의 양 무릎폭과 불상 높이를 기준으로 원래 대좌 위에 모셔졌을 좌불상은 장육상을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백제에서 발견된 각종 소조상과의 비교분석을 통해, 본의리 대좌는 부여 금강사지 금당에 봉안될 것을 계획하고서 제작된 것으로 짐작하였다.

Abstract

Although the Clay Pedestal found at Ponŭi-ri is a remarkable item as it is large in size and has an accurate provenience, it has been mostly neglected academically. I have re-examined the pedestal to question when and why it was made, and have come to a conclusion that differ significantly from those of previous studies.
Firstly, the pedestal covered with Buddha’s skirt was previously known to have its origins only in the sculptures of the Southern Dynasties, but it is more reasonable to understand it as a style newly developed by combining the traditions of Baekje and the Southern Dynasties, and the novel methods of 7th century Sui and early Tang.
Secondly, it is likely that the pedestal was made by stacking same-sized clay tablets, not by using cords of clay. The use of this technique suggests that during the Sabi period in Baekje, roof tiles and pottery were made in the same workshops. It is also probable that the clay figures made in Baekje influenced large clay statues of Silla, for example, the late 7th century statue found near Nŭngji pagoda.
Thirdly, I have found that the pedestal was originally a part of a seated Buddha statue with a halo that was made separately and put together. Judging by the width of the pedestal, the completed statue was possibly a changyuksang, meaning that it measured around 230 cm in height. Moreover, comparisons between the pedestal to other clay statues of Baekje, reveal that the statue was likely made to be enshrined inside the Geumdang Hall at Kŭmgangsa site in Buyŏ.

Ⅰ. 머리말

1986년 청양군 본의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소조대좌상은 크기면에서 우리의 시선을 압도한다(Fig. 1). 대좌의 정면 넓이는 260cm, 높이 95cm, 두께는 40~50cm이며 총 무게는 600kg에 달한다.1 지금까지 정림사지, 능산리사지 등 백제 사원지에서 발견된 소조상은 그 수량은 많으나 복원 높이가 100cm를 초과하지 않는 것이 주를 차지한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본의리 대좌는 거대한 크기의 백제 소조상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본의리 소조상은 대형 사이즈라는 특수한 조건으로 인해, 가마에서 한 번에 소성하기 힘든 결과를 초래하였으며 그 결과 분할, 소성, 재조립이라는 독특한 제작기법을 낳게 하였다.2 무엇보다 이 대좌상의 제작기법은 신라 능지탑 소조상과 비교 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흙을 다루었던 백제 장인의 기술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에 더 나아가 현존하는 중국, 일본 대형 소조불상의 제작기법은 본의리 대좌와는 큰 차이를 보이는 배경으로 인해, 본의리 대좌의 제작기법을 과연 “백제화”라는 단어로 압축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고민해 보아야 할 시점에 이르렀다고 생각된다.
사실 본의리 대좌에서 읽어낼 수 있는 “백제화”라는 개념은 제작기법 이외에 상현좌의 양식에서도 동일하게 찾아낼 수 있다. 본의리 상현좌의 양식은 군수리 불좌상, 남경 서하산석굴 제19굴 무량수불좌상과의 유사성이 지적된 이후,3 지금까지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남조와의 연관성을 막연하게 이야기하고 있는 분위기이다. 그러나 그 양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5세기 후반~6세기 전반 남조 상현좌와의 유사성도 확인되지만 둘 사이에는 차이점도 크게 발견된다. 또한 본의리 대좌의 제작시기는 양식 이외에 가마 인근에서 수집된 연화문 와당의 상대편년을 통해 7세기대로 추정되기 때문에,4 남조 사례와는 100여 년이라는 시간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따라서 본의리 상현좌는 양식적인 관점에서 조성연대를 포함한 그 특징과 기원에 대해 재검토해 보아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본의리 대좌의 상현좌는 말 그대로 불상이 걸친 의복, 즉 佛衣가 대좌 아래로 드리워진 대좌를 의미한다. 이 말은 본의리 상현좌의 위쪽에는 원래 불좌상을 안치할 것을 염두에 두고서 대좌를 제작했던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본의리 상현좌와 불좌상을 제작한 의도와 이유는 무엇이었는지 일차적인 의문이 생긴다. 다시 말해 거대한 불상과 대좌를 만들고자 하였던 이유는 무엇이었으며, 이렇게 완성된 소조불상과 대좌는 어떤 지역, 어떤 사찰, 어떤 건물에 봉안될 것을 목표로 설계되고 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역시 의문이 생긴다. 따라서 본고는 위에서 제기한 의문점들과 연구의 필요성, 즉 제작기법, 상현좌 양식, 봉안장소를 중심으로 제작연대, 백제화, 제작의도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Ⅱ. 상현좌 양식: 언제 만들었나?

본의리 상현좌는 위·아래로 3단을 이룬 복판 연화문과 그 위를 덮고 있는 佛衣의 끝단으로 구성되어 있다(Fig. 1). 대좌 정면에는 U자형을 이룬 옷주름선이 중복적으로 아래로 늘어져 있으며, 그 좌우로는 Ω형의 형태를 이룬 옷주름이 위·아래로 중복된 채 흘러내린다. 다시 그 좌우에는 U자형과 Ω자형의 옷자락이 연화대좌를 2단으로 덮고 있다. 정면과 측면의 옷자락 아래에는 끝단이 살짝 올라간 U자형의 옷자락이 한 층 더 표현되어 있다.
본의리 상현좌의 옷자락과 옷주름선의 전체적인 모습은 언뜻 보면 군수리 목탑지에서 발견된 납석제 여래좌상과 흡사한 것으로 보인다(Fig. 2). 그러나 둘을 자세히 관찰하면, U자형을 이룬 옷주름의 표현과 위치를 비롯하여 Ω자형 옷자락의 층수 등 차이점이 크게 발견된다. 그렇다면 백제의 또 다른 상현좌의 사례로 유명한 예산 사방불 불좌상의 상현좌와는 그 양상이 어떠할까(Fig. 3). 2단을 이루고 있는 Ω자형 옷자락은 서로 유사하나 U자형을 이룬 옷주름의 크기와 위치에서 역시 둘의 차이점이 지적된다.
본의리 상현좌와 연대적으로 가장 가까운 7세기 전반의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의 상현좌와 비교해 보면(Fig. 4),5 옷자락의 형태를 비롯하여 층수 등등 전체적으로 유사한 듯 보인다. 그러나 연동리 상현좌의 경우 연꽃이 없는 단순한 사각형 대좌라는 사실과 옷자락이 겹쳐진 모습 등 본의리 대좌와는 서로 다른점도 확인된다. 그러나 현존 수량이 많지 않은 백제 상현좌의 사례로서는 익산 연동리 상현좌가 그나마 본의리 상현좌와 가장 유사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결론적으로 위에서 서술한 내용을 종합하면, 본의리 상현좌는 백제 상현좌 사례에서는 동일한 양식과 형태를 발견할 수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그렇다면 본의리 상현좌와 동시대 고구려, 신라 상현좌와는 그 양상이 어떠할지 계속해서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안타깝게도 고구려와 고신라 역시 상현좌의 현존 사례는 많지 않다. 고구려의 경우 원오리사지 출토 불좌상과 평양 토성리 출토 토범의 상현좌(Fig. 5)를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할 수 있다. 대좌를 덮고 있는 옷자락은 세로 주름이 중복되거나 혹은 정면 중앙의 U자형 반복 옷주름선과 두 무릎을 덮은 옷자락은 끝이 뾰족한 V자형을 이룬 형태를 하고 있다. 상현좌의 옷주름 표현만을 기준으로 살펴본다면, 5~6세기 원오리 불좌상과 평양 토성리 출토품은 본의리 상현좌와는 유사한 면을 크게 찾을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신라의 경우 7세기 후반 조성된 군위 석굴 본존불을 상현좌의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할 수 있다(Fig. 6). 군위석굴 본존상의 상현좌는 옷주름선과 옷 끝단 형태만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예산 사방불과의 유사성을 지적할 수 있을 뿐 본의리와는 차이점이 좀 더 강하게 확인된다.
결국 본의리 대좌는 대좌를 덮고 있는 옷자락의 표현과 연화대좌 그 자체로는 현존하는 한반도 내 고대 불상과는 동일한 양식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그렇다면 비교자료에 대한 시야를 넓혀, 중국 불좌상의 상현좌와는 그 관계가 어떠한지 고찰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우선 본의리 상현좌와 유사성이 지적되어온 남경 서하산석굴 제19굴 본존상과의 연관성부터 살펴보고자 한다(Fig. 7-①). 5세기 후반 개착되기 시작한 서하산 제19굴은 남조 석굴(마애불)의 사례로서는 연대가 가장 오래되고 규모 역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져 온다.6
앉은 키가 2m 30cm에 이르는 제19굴 본존상은 소위 말하는 八字형 대좌를 가진다.7 불좌상이 착용한 통견식 불의는 대좌 정면에서 U자형으로 중복되게 표현되어 있으며, 그 좌우에는 Ω자형 옷자락이 위아래로 2중으로 겹쳐져 있다. 또한 이와 같은 불의 아래에 또 다른 옷자락이 확인된다. 서하산 제19굴의 상현좌 양식은 제18굴 정벽 우측 불좌상 등 동일한 시대에 조성된 다른 굴감에서도 유사한 사례들이 발견된다. 이처럼 제 19굴 상현좌의 치마가 드리워진 전체적인 모습은 본의리 대좌와 유사한 면이 확인된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차이점 역시 크게 지적되는데, 예를 들면, 본의리 상현좌의 U자형으로 반복된 옷자락은 정면과 좌우에서 세 부분으로 구분되는데 비해 서하산 제19굴 상현좌는 정면 중앙에만 U자형 옷주름선이 표현되었다. 또한 서하산 제19굴 대좌의 Ω자형 옷자락은 정면 좌우에 각각 3개씩 2층을 형성한 것에 비해 본의리 상현좌의 경우 정면 좌우에 각각 1개씩 2층으로 표현되었다. 다시 말해, 서하산 남조 불상 상현좌에서 Ω자형 옷자락이 본의리 상현좌의 사례보다 더욱 많고 복잡하다. 무엇보다 본의리 대좌는 연화좌인데 비해 서하산 제19굴은 아무런 장식문양이 없는 사각형 대좌이므로 둘 사이에는 차이점이 크게 발견된다.
중국 학자 천웨신(陳悅新)은 비록 서하산 남조 불상의 상현좌 그 자체에 대한 논증은 없었으나 불의 유형에 대한 도면을 제시하였다. 그녀가 제공한 도면을 참고하면 남조 상현좌의 양식을 파악할 수 있는데,8 5세기 후반~6세기 중반 서하산석굴을 중심으로 한 남경지역 불좌상의 상현좌는 크게 두 종류로 구분해 볼 수 있다. 하나는 위에서 언급했던 서하산 제19굴의 상현좌 형태이고 또 다른 종류는 서하산 제22, 24굴 등에서 확인되는 형태이다(Fig. 7-②). 즉 오른쪽 발이 밖으로 드러난 채 옷자락이 오른쪽 발목 위를 지나 아래로 늘어뜨러져 있으며, Ω자형 옷자락이 좌우와 위아래로 중첩된 모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서하산 제24굴에서 확인되는 상현좌는 북위 용문석굴 빈양중동 본존불, 공현석굴의 상현좌와 서로 유사한 면이 많이 확인된다는 점이다(Fig. 7-③, 7-④). 비록 천웨신은 상현좌 자체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으나 남경과 성도지역에서 확인되는 남조 불상의 불의 착용법은 북조 불상에 영향을 준다고 보고 있다.9 이와 같이 서하산 제24굴에서 확인되는 상현좌는 5세기 후반~6세기 중반 남조 뿐 아니라 북조에서도 성행한 양식으로 남북조에서 동시에 유행한 것으로 볼 수 있지만, 현존하는 백제 불상에서는 이러한 상현좌는 거의 확인되지 않는 아이러니한 양상을 보인다.
2021년 남경시 서영촌 목탑지에서 출토된 소형 소조불좌상은 불상 자체의 양식을 포함한 공반 유물과의 관련성 속에서 조성연대가 5세기 중후반으로 조심스럽게 추정되고 있는 배경으로 인해, 지금까지 남경에서 발견된 불상 중 가장 연대가 이른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Fig. 8).10 서영촌 소조불좌상의 상현좌 양식은 서하산 제19굴과는 다르며, 평양 토성리에서 출토된 불좌상 도범의 모습과 유사성이 지적된다. 서영촌 출토 소조불좌상의 상현좌 양식은 6세기 제작된 백제 군수리 불좌상과는 친연성을 읽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이보다 시기가 늦은 본의리 대좌와도 양식적으로 연결성을 전혀 찾을 수 없다.
위에서 서술한 내용을 요약하면, 본의리 상현좌는 양식 그 자체를 기준으로 판단하면, 현존하는 고구려와 신라 상현좌와는 유사한 내용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본의리 상현좌는 백제 대좌와 비교하여 비록 다소의 차이는 존재하였으나 연관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또한 본의리 상현좌는 중국 북조 사례와는 유사성이 확인되지 않았으나 남조와는 전체적으로 연관성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본의리 상현좌는 남조 자료와도 세부적으로는 차이점이 발견되었다. 그런데 필자는 본고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수대~초당대 상현좌에서 유사한 면모를 발견할 수 있었다. 특히 용문석굴 빈양남동 정벽 본존불좌상(Fig. 9), 잠계사동 정벽 본존상 등 초당대 불상의 상현좌와 서로 유사성이 크게 발견되었다.11
용문석굴 초당대 상현좌는 대좌 중앙으로 U자형 옷주름선이 반복되게 중첩되어 있으며 그 좌우에 Ω자형 옷자락이 상하로 2층을 이루고 그 양측으로는 또다시 U자형 의습선과 Ω자형 옷자락이 반복적이고 순차적으로 배열되었다. 특히 대좌를 덮고 있는 불의는 정면은 물론이고 대좌 좌우면에서도 아래로 늘어뜨려져 있다. 이러한 상현좌는 남북조시대 상현좌와는 다르다. 결론적으로 본의리 대좌의 상현좌는 백제적인 요소와 남조적인 전통 그리고 새로운 초당대 양식 등이 복합적으로 혼합되어 7세기대 백제에서 새롭게 탄생한 상현좌 양식으로 판단할 수 있다.

Ⅲ. 제작기법: 어떻게 만들었나?

앞 장에서 본의리 대좌는 그 형태와 양식을 통해, 남조와 수·초당 양식 그리고 백제 전통 양식이 서로 혼합되어 7세기 백제화된 양식을 이룬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렇다면 대좌 양식을 기준으로 백제화를 읽을 수 있었다면, 흙이라는 재질을 사용해 만든 대형 소조상의 제작기법에서도 백제화된 기술을 읽어 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사실 지금까지 본의리 대좌의 제작기법에 대해 언급한 논저로는 1993년 발표된 안병찬의 논문이 유일하다.12 본의리 대좌는 7세기를 대표할 수 있는 조각양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제작기법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이유는 대좌 내부를 자유롭게 관찰할 수 없는 현실적인 제약 때문이었다. 이 대좌는 1986년 150여 편으로 발견되고 수습된 후 수리·복원되어 현재 국립공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이유로 인해 내부를 자유롭게 조사하는 작업은 불가능하였다.
그런데 2022년 국립부여박물관에서 개최한 특별전을 계기로 대좌 외부는 물론이고 내부까지 관찰할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 필자는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대좌 내부를 육안으로 직접 관찰할 수 있었으며, 그 결과 기존의 안병찬이 주장한 내용과는 다소 차이가 나는 부분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에 본문의 지면을 빌어 제작기법에 대해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본의리 대좌를 만드는데 사용된 태토는 전체적으로 모래(석영)가 조금 혼입된 입자가 고운 점토인 것으로 확인된다.(Fig. 1) 점토를 두 번 혹은 세 번 붙여가며 전체적인 형태를 만들었는데, 1차에서부터 3차까지의 성형과정에서 입자가 고운 흙을 전체적으로 사용하였다는 것이 특징적이다. 이와 같이 본의리 대좌에 사용된 고운 입자의 태토는 백제 사비기 사원지에서 출토된 크기가 작은 소조상의 내용과는 다르다. 능산리사지, 부소산사지 등 백제 사비기 목탑지에서 발견된 크기가 작은 소조상들은 일반적으로 가장 바깥면은 불순물이 없이 입자가 곱고 깨끗한 점토를 사용한데 비해 그 안쪽으로 갈수록 모래가 섞이거나 혹은 거칠고 조잡한 흙을 사용하여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3
성형과정에서 백제 목탑지 출토 소형 소조상과 본의리 대좌의 또 다른 차이점은 골조의 유무이다. 손빚기 기법으로 제작된 백제 소형 소조상은 흔히 나무 혹은 갈대류를 묶어 만든 골조를 준비한 후 이 골조에 거친 흙을 붙여가며 대략적인 형태를 만든 후 그 바깥쪽에 다시 입자가 고운 흙을 여러 겹 붙여가며 세부 형체를 완성하였다(Fig. 10).14 사실 본의리 대좌의 경우 그 중심에 나무 혹은 기타 재질의 골조가 존재하였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는 쉽지 않다. 그러나 현존하는 대좌 내부를 관찰하면 골조와 같은 구조물에 의존하여 점토를 붙여 제작한 흔적은 찾기 힘든 실정이라고 조심스럽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중심 골조 혹은 중심 구조체가 없이 대형 소조상을 만들었다면 어떻게 제작하였던 것일까.
안병찬은 높이 약 3cm, 길이 30cm 정도로 둥글게 만든 점토띠가 하나의 테를 이루며 이 테들을 위·아래로 연결하여 대좌를 성형한 것으로 보았다(Fig. 11).15 다시 말해 본의리 대좌는 점토띠 쌓기로 만들어졌으며, 30여 개의 띠를 쌓아 올려 완성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는 바깥쪽의 점토면을 먼저 만든 후 안쪽의 점토면을 제작하였으며, 이 두 점토면이 합쳐져 대좌의 기본판을 이룬 것으로 보았다. 또한 이러한 기본판을 만드는 과정에서 점토띠 쌓기 후 타날을 하였으며, 박자는 7×17cm의 장판과 5×15cm의 단판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기본판 위에 또 다시 점토를 두·세겹 붙여가며 불상의 의습 혹은 연판을 만들었음을 강조하였다.
우선 그가 본의리 대좌의 성형기법으로 추정한 점토띠 쌓기는 필자의 조사결과와는 다르다. 즉 필자가 육안으로 관찰한 바로는 점토띠를 쌓아 만든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일정한 크기의 점토판을 사용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되었다. 대좌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한 결과, 그가 말한 것처럼 점토띠를 쌓아 올린 후 타날을 한 것이 아니라 타날이 가해진 점토판을 가지고 와서 위로 그리고 옆으로 붙여 가며 형체를 만들었던 것으로 판단되었다(Fig. 12). 도면 12의 가장 아래쪽을 자세히 관찰하면, 장방형을 이룬 점토판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붙여가며 성형한 사실이 발견된다. 이와 같은 필자의 추정안은 내면에 붙어 있는 손잡이를 관찰하면 좀 더 쉽게 설득력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일부의 손잡이는 손잡이를 만든 이후 타날을 가한 것이 아니라 타날이 이미 이루어진 점토판의 일부를 가지고 와서 손잡이로 만든 것이 확인되었다.(Fig. 13). 물론 손잡이 이외의 점토판은 점토판과 점토판을 서로 붙인 이후 도구를 이용하여 표면을 정면 조정하였거나 혹은 다시 타날작업을 진행한 곳도 발견되기도 한다.
여기서 한 가지 강조하고 싶은 내용은 점토판과 점토판 사이에서 확인되는 마포 흔적이다. 대좌 내부의 점토판에서 확인되는 마포 흔적은 성형제작 이전 점토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점토판을 잘 떼어내기 위해 설치된 마포의 흔적으로 짐작된다. 또한 본의리 대좌 내부는 현재 거칠고 조잡한 상태로 남아 있는데, 이는 신라 대형 소조상의 성형기법과는 다른 내용으로 주목해야 할 것 같다. 필자가 판단한 본의리 대좌의 성형과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Fig. 14). 우선 태토를 사용하여 일정한 크기의 점토판을 만든다. 점토판을 만들 당시 타날을 가하여 내구성과 밀착력을 높인 후 점토판을 떼어 내어 성형의 기본 재료로 준비한다. 점토판을 가지고 와 손으로 직접 빚어 올리며 형체를 만들어 간다. 또 다른 점토판을 붙여가며 박자로 타날하거나 도구로 정면 조정을 한다. 어느 정도 건조가 이루어지면 또 다른 점토판을 계속해서 붙여가며 전체적인 형태를 만든다.
그런데 본의리 대좌의 제작기법 중 성형 단계에서 일정한 크기의 점토판이 사용되었다는 점과 손으로 이 점토판들을 서로 붙여가며 만들었다는 사실은 흥미로운 내용이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제작기법은 백제 사비기 토기와 기와의 제작과정에서도 유사하게 확인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비기 토기는 녹로 위에 토기판을 올려 놓고 점토띠 혹은 점토판을 쌓아 구형으로 제작 및 타날을 하였다.16 사비기 평기와 역시 와통에 점토판을 붙여 제작한 기법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17
사비기 토기, 기와, 대형 소조상은 제작기법면에서 서로 공통된 양상을 찾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이들을 만든 공인집단이 같았을 가능성이 높았던 것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청양군 왕진리 4호 가마에서 소조상은 와전류, 토기와 함께 발견된 사실과 왕진리, 관현리, 용정리 요지에서 백제 사비기 와도겸업 체제를 증명할 수 있는 유물들이 출토된 것은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18 중국에서도 북위 토기와 기와를 제작한 공방에서 소조상을 함께 만들었다는 사실과 심지어 진시황 병마용의 도용을 만든 공인 중에는 토기, 기와, 벽돌도 함께 생산한 사례가 있다는 것은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19 7세기 중후반 신라에서 활동한 양지 스님 역시 소조장육상을 비롯하여 탑 부재와 기와까지도 함께 만들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흙을 능수능란하게 다룬 공인집단의 존재를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사실 본의리 대좌에서 관찰되는 성형→ 건조(반건조)→ 분할→ 소성→ 재조립의 제작과정은 지금까지 발견된 백제 소조상에서는 유사한 사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제작기법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물론 중국 진시황 병마용의 도용은 점토띠 쌓기로 머리, 손, 팔, 다리 등을 따로 성형한 후 조합하였으며 건조, 소성을 거쳐 완성하였다(Fig. 15).20 중국 진나라의 도용 제작과정은 본의리 대좌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으나 결정적으로 병마용의 도용의 경우, 성형으로 완성된 것을 분할하여 재조립은 하지 않았기 때문에 본의리 대좌와는 차이점도 크게 발견된다.
도용 이외에 중국 남북조~초당대 소조상으로는 돈황 막고굴을 대표로 하는 석굴 소조상을 언급할 수 있으며, 제작기법은 일반적으로 목심 혹은 철심을 골조로 하여 점토를 붙인 후 건조시켜 완성하였다.21 일본의 경우 대형 소조상은 다이마데라(當麻寺) 금당에 봉안된 미륵본존상과 호류지(法隆寺) 제석천상을 대표로 하며 중국과 동일하게 목심 혹은 석심을 심목(芯木)으로 하여 이 심목에 서로 다른 재질의 점토를 붙인 후 건조시켜 완성하였다.22 이와 같이, 지금까지 알려진 중국과 일본 대형 소조상의 제작기법은 본의리 대좌와는 차이점이 명확하게 확인된다.
그렇다면 본의리 대좌의 제작기법은 “백제화된 소조상 제작기법”으로 개념화할 수 있을까. 사실 성형→ 건조(반건조)→ 분할→ 소성→ 재조립으로 제작된 본의리 대좌의 전체적인 제작기법은 7세기 후반 신라 능지탑의 대형 소조상에서도 발견된다. 필자는 과거 능지탑 북편 소조상을 직접 조사할 기회를 가졌는데, 본고에서는 당시 조사한 내용을 중심으로 간략하게 제작기법을 언급하고자 한다. 북편 소조상 중 “西方仏”명 파편에서는 일정한 높이의 점토띠를 쌓아 성형한 것이 확인되었으며, 와도와 같은 도구를 사용해 전체적으로 과감한 깎기로 정면 조정한 것이 발견되었다(Fig. 16). “西方齊下”명 파편의 경우 앞뒤로 2겹으로 점토판이 확인되었으며 단면에도 타날흔적이 보였다.
능지탑 소조상과 본의리 대좌의 성형-건조(반건조)-분할-소성-재조립이라는 전체적인 제작공정은 서로 일치한다. 또한 입자가 고운 점토를 전체적으로 사용했다는 점과 손빚기 성형, 2~3겹의 점토 성형, 과감한 깎기를 가한 정면 조정, 건조 당시 균열이 생긴 곳을 도구로 문질러 없애는 등 세부적인 제작기법 역시 둘 사이에는 유사한 점이 많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능지탑 소조상은 결정적으로 본의리 대좌에서 활용된 점토판이 아닌 점토띠 쌓기로 성형되었으며(Fig. 17), 신체 각 부위 내부에 명문을 새긴 점, 정면조정이 고르고 균일하게 진행된 점 등 차이점도 발견된다. 결국 7세기 후반 제작된 능지탑 소조상의 제작기법은 7세기 전중반 백제 본의리 소조상과 비교하여 유사한 면도 확인되지만 기술 수준이 업그레이드 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싶은 내용은 백제와 신라 대형 소조상의 성형기법 간 차이점이 조선시대 전통 옹기 제작에서도 동일하게 확인된다는 것이다. 경상도를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는 타림, 배기타림으로 명명되는 소위 점토띠 쌓기로 옹기를 성형한 것에 비해 전라도는 다른 지역과 확연하게 다른 방법, 즉 쳇바퀴타림기법으로 불린 점토판을 제작하여 성형하였다.23 삼국시대 대형 소조상과 조선시대 대형 옹기의 성형기법 사이 유사성은 우연의 일치인지 아니면 전통의 계승인지 본고에서는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7세기대 백제는 대형 소조상을 제작하는 자체적인 기술이 이미 존재하였으며 이러한 백제화된 기술은 신라까지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Ⅳ. 봉안장소: 왜 만들었나?

앞 장에서 본의리 대좌는 양식과 제작기법을 기준으로 판단하면, 7세기 전중반 백제식 기술로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런데 본의리 대좌에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내용은 건조 당시 터진 부분을 보수한 흔적이 여러 곳에서 발견될 뿐 아니라 결정적으로 가마 안에서 그대로 폐기된 채 버려졌다는 점이다. 소성의 실패로 가마와 대좌는 폐기되게 되었다는 내용에서 필자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의문이 생겼다. 첫째, 만일 소성에 성공하였다면 이 대좌는 어디에 모셔졌을지, 즉 어느 사찰 어느 건물에 봉안되었을지 라는 의문이다. 둘째, 넓이 250cm, 높이 95cm에 달하는 대형의 대좌를 만들었다는 것은 대좌 위에 모셔졌을 대형 불상과 대형 광배도 함께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음을 시사하는데, 이와 같은 대형 소조 불상을 만들었던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본의리 대좌를 자세히 관찰하면, 대좌 위쪽의 정면 양측으로는 조금 휘어져 올라가 있는 부분이 있는데, 이 부분은 결가부좌한 좌불상의 양 무릎이 닿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내용은 백제 장인이 대좌를 제작할 당시 불상이 대좌 위에 모셔질 것을 미리 염두에 두고서 대좌를 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본의리 대좌에 안치되었을 불좌상의 높이는 과연 어느 정도이었을지 궁금하다. 애석하게도 필자의 궁금증을 해결시켜 줄 비교자료가 거의 없어 불좌상의 높이를 추정하는 작업은 쉽지 않지만 군수리 출토 석불상, 능지탑 불좌상(Fig. 18), 다이마데라 불좌상(當麻寺, Fig. 19) 등을 참고한다면 대략적인 높이는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우선 군수리 석불상은 대좌 높이: 좌불상 높이=1:1.5, 두 무릎 넓이: 좌불상 높이=1:1.5 정도의 비율로 계산된다(Fig. 2). 이 공식에 본의리 대좌를 대입하면 전자의 경우는 95cm:143cm 이며 후자의 경우는 110:165cm로 산출된다. 전자와 후자의 평균값을 계산해 보면, 대략적으로 150cm 정도로 산출되기 때문에 본의리 대좌에 안치된 불좌상의 높이는 150cm 정도이며, 대좌와 좌상을 합친 총 높이는 250cm 전후로 추정할 수 있다. 7세기대 백제 연동리 좌불상의 높이는 230cm 정도로 산출된다. 본의리 대좌 양식 자체는 연동리 불상의 대좌와 유사한 점이 강하게 지적되었던 배경으로 인해, 본의리 불좌상의 높이 역시 연동리 불좌상과 비슷하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신라 능지탑 북쪽 불좌상의 양 무릎폭은 176cm이며, 이를 기준으로 좌불상의 앉은 키 높이를 추정하면 230cm로 짐작된다(Fig. 18).24 일본 다이마데라(當麻寺) 소조불좌상(Fig. 19)의 높이 역시 222.8cm로 능지탑 불좌상과 유사한 범위로 판단할 수 있다. 본의리 대좌를 최초로 조사·연구한 박영복은 두 무릎 사이의 폭이 110cm인 것을 기준으로 불좌상 자체의 높이는 140cm 이상이며, 대좌를 포함한 불상의 전체 높이는 240cm로 추정하였다.25
본의리 불좌상의 구체적인 높이에 대한 토론은 잠시 접어두고서, 연동리, 능지탑, 다이마데라의 230~240cm라는 불좌상 높이를 산출하는 과정에서 필자의 머릿속에는 일순간 “장육상”이라는 단어가 스쳐 지나갔다. 다시 말해, 본의리 대좌와 그 좌불상은 제작 당시 어떠한 의미이든 장육상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짐작된다(Fig. 20). 이와 같은 추정안은 『일본서기』 권 19 흠명기 5년 9월조의 기록을 통해 다시 한번 더 입증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본서기 기록의 핵심은 545년 백제 성왕이 장육불상을 조성하였다는 것이며,26 이 기록을 통해 6세기대 백제는 이미 장육상을 제작할 수 있는 기술을 보유하고 있던 것으로 판단된다.27 결국 본의리 대좌는 장육불상을 최종 목표로 하여 제작된 장육 소조불상의 한 구성품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좌불상으로 제작된 장육상의 높이는 입불상의 절반으로 추정해 볼 수 있기에, 230cm 정도로 계산된다. 만약 남조척(24cm)이 적용되었다면 192cm로 복원되며, 당척(29.7cm)이면 대략적으로 237cm로 산출된다.
그렇다면 장육불상의 한 부분이었던 본의리 대좌는 최종적으로 어느 사찰에 안치될 것을 계획에 두고서 제작되었던 것일까. 우선 본의리 가마의 위치를 살펴보면, 본의리에서부터 공주 공산성까지는 21km, 부여 관북리유적까지는 26km, 익산 왕궁리유적과는 80km 정도 떨어져 있다. 7세기대 대형 소조상을 봉안할 수 있는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위치적인 면을 모두 종합해서 고려한다면, 본의리 대좌는 부여지역 사찰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부여 사원지에서 출토된 소조상 중 크기도 크고 소성을 거친 소조상은 정림사지 출토품, 금강사지 출토품이 대표적이다.28 그런데 이들 소조상편 중 나발편은 금당에 소조 본존불상이 봉안되어 있었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정림사지 출토 나발의 높이는 1.3cm인데 비해 금강사지 나발은 3.5~5.5cm에 이른다. 신라의 경우 능지탑의 남쪽 소조상 주변에서 나발편이 다수 출토되었는데, 그 높이는 2.4cm, 직경은 2.2cm로 확인된다. 지금까지 발견된 소조나발편의 크기로 판단하면, 본의리 대좌의 주존 불상과 대좌는 금강사 금당에 봉안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특히 금강사지의 소조상과 공반된 와당들은 7세기 전중반으로 추정되는 이유로 인해,29 본의리 대좌의 조성시기와 가장 가깝다고 볼 수 있다.

Ⅴ. 맺음말

본고는 청양군 본의리 가마터에서 발견된 소조대좌상에 대해 고찰하였다. 본의리 소조대좌상은 거대한 크기는 물론이고 출토지가 명확하다는 이유로 인해 그 중요성은 공인되어 왔으며 관련 연구자들로부터 지속된 주목을 받아 오고 있다. 그러나 그 중요성에 비해 연구논저는 턱없이 부족한 현실로 인해 필자는 이번 기회를 빌어 재조사와 재검토를 진행하였다. 이 과정에서 본의리 대좌는 언제, 어떻게, 왜 만들었는지에 대한 일차원적인 의문이 제기되었고 이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본문을 서술하였다. 또한 필자는 본의리 대좌를 분석함에 있어 미술사학과 고고학의 연구방법론을 동시에 적용하여 살펴보았다. 다시 말해, 미술사학에서 애용하는 양식론을 대좌양식에 대입시켜 조성연대를 추정하였으며, 고고학에서 널리 활용되는 실험고고학적인 제작기법을 본의리 대좌상에 적용하여 백제 대형 소조상의 제작기법에 대해 살펴보았다.
첫째, 본의리 대좌는 언제 만들어졌는가에 대해 살펴본 결과 기존 연구성과와는 다른 결론을 도출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본의리 상현좌의 양식은 남조와의 관련성이 강조되는 분위기였으나, 필자는 7세기 백제화된 양식으로 추정하였다. 다시 말해, 본의리 상현좌 양식은 백제와 남조의 전통양식과 7세기 수·초당대의 신 양식이 혼합되어 새롭게 탄생한 백제화된 양식으로 보았다.
둘째, 본의리 대좌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고찰한 결과 기존의 연구성과와는 부분적으로 다른 의견을 제시하였다. 특히 성형과정에서 점토띠를 사용한 것으로 본 기왕의 연구결과와는 달리 일정한 크기의 점토판을 준비한 후 이들을 서로 쌓아가며 형태를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와 같은 7세기대 백제 대형 소조상의 제작기법은 사비기 토기 혹은 기와 제작기법과 유사한 면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와도겸업 생산체제를 읽을 수 있었다. 또한 본의리 대좌를 제작한 기술은 7세기 후반 신라 능지탑의 대형 소조상에서 보이는 점토띠 쌓기 성형방법과는 다른 백제 성형기법으로 판단하였다. 더 나아가 백제 대형 소조상의 전체적인 제작공정은 신라에 영향을 주었으며, 같은 시대 건조식을 위주로 한 중국, 일본의 대형 소조상을 제작한기법과는 다른 것으로 판단하였다.
셋째, 본의리 대좌는 왜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고찰은 과거 관련 분야에서는 연구하지 않았던 내용이다. 대좌 자체에서 불좌상이 안치될 것을 미리 고려한 사실이 발견된 점은 백제 그 당시에는 불좌상과 광배, 대좌가 모두 갖추어진 완전한 불상을 계획한 후 대좌만 별도로 제작되었던 것으로 판단하였다. 또한 불상의 양 무릎폭과 불상 높이를 기준으로 원래 대좌 위에 모셔졌을 좌불상은 장육상을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하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백제에서 발견된 대형 소조상의 분석을 통해, 본의리 대좌는 부여 금강사지 금당에 봉안될 것을 계획하고서 제작된 것으로 짐작하였다. 그러나 본의리 소조대좌상이 최종적으로 금강사 금당에 모셔졌을 것이라는 필자의 추정안은 향후 관련 자료의 축적을 통해 보강 혹은 재수정을 요구할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Notes

1) 朴永福, 「靑陽陶製佛臺座 調査報告」, 『美術資料』 49 (1992), pp. 72-73.

2) 朴永福, 앞의 논문, pp. 75-76; 안병찬, 「청양 도제 불상 대좌의 복원과 제작 기법」, 『미술자료』 51 (1993), pp. 150-163.

3) 金春實, 「三國時代 施無畏·與願印 如來坐像考」, 『미술사연구』 4 (1990), p. 19; 김춘실, 「백제 조각의 대중교섭」, 『백제 미술의 대외교섭』 (예경, 1998), pp. 120-121; 김리나, 「동아시아 고대 불교조각의 흐름에서 한국 삼국시대 불교조각의 變奏」, 『미술자료』 89 (2016), p. 34.

4) 淸水昭博, 「기와의 전래-백제와 일본의 초기 기와생산체제의 비교」, 『백제연구』 41 (2005), p. 178.

5) 연동리 석불상의 조사내용과 연대에 대해서는 金善基, 「益山百濟蓮洞里 寺址 調査硏究」, 『韓國哲學宗敎思想史』 (如山柳炳德博士華甲紀念, 1990), pp. 313-329을 참고.

7) 符永利, 「南朝佛敎造像的考古學硏究」, 『南京大學博士學位論文』 (2012), p. 157.

8) 陳悅新, 「棲霞山石窟南朝佛衣類型」, 『華夏考古』 2 (2010), pp. 83-84.

9) 陳悅新, 「雲岡, 龍門, 鞏縣, 響堂山石窟的佛衣類型」, 『考古』 4 (2009), pp. 68-71.

10) 양은경, 「최신 발굴자료를 통해 본 남조와 백제 소조상-남경 서영촌 목탑지 출토품을 중심으로」, 『백제 기술 흙에 담다』 (국립부여박물관, 2022), pp. 238-251.

11) 溫玉成, 「龍門唐窟排年」, 『中國石窟·龍門石窟』 二 (文物出版社, 1992), pp. 175-177.

12) 안병찬, 앞의 논문, pp. 150-163.

13) 양은경, 「백제 부소산사지 출토품의 재검토와 사지의 성격」, 『백제연구』 52 (2010), pp. 69-74; 이병호, 「백제 사비시기 소조상의 전개과정」, 『동원학술논문집』 14 (2013), pp. 349-351.

14) 양은경, 「최신 발굴자료를 통해 본 남조와 백제 소조상-남경 서영촌 목탑지 출토품을 중심으로」 (2022), pp. 238-251.

15) 안병찬, 앞의 논문, pp. 150-163.

16) 소재윤, 「대부완에 관한 소고」, 『연보2002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2002), pp. 209-210; 朴淳發 외, 『泗沘都城』 (忠南大學校百濟硏究所, 2003), p. 279; 酒井淸治, 「百済泗沘期の風船技法で製作された高台付椀」, 『山下秀樹氏追悼考古論集』 (山下秀樹氏追悼考古論文集刊行會, 2004), p. 267; 김용주, 『백제 대부완 연구』 (충북대석사논문, 2016), pp. 36-47; 이윤섭, 「백제 사비기 유개대부완의 제작기법 및 형성과정」, 『한국상고사학보』 114 (2021), pp. 254-258.

17) 최영희, 「백제 사비기의 조와계통과 생산체제」, 『백제연구』 63 (2016), pp. 164-173.

18) 김성구, 「扶餘의 百濟窯址와 出土遺物에 대하여」, 『백제연구』 21 (1990), pp. 217-231; 淸水昭博, 위의 논문, pp. 171-180; 김성구·김종만·윤용희, 『청양 왕진리 가마터』 유적조사보고 제14책 (2008).

19) 關口宏次, 「陶俑を燒成した窯」, 『東洋の陶磁』 第1卷 陶俑(平凡社, 1998), p. 142; 小林 仁, 「洛陽北魏陶俑の成立とその展開」, 『美學美術史論集』 14 (成城大學大學院文學硏究科, 2002), pp. 221-246.

20) 富田哲雄, 『中國の陶磁』 第2卷 陶俑 (平凡社, 1998), pp. 93-97.

21) 孫紀元, 「略論敦煌彩塑及其制作」, 『中國石窟·敦煌莫高窟』 3 (文物出版社, 1987), pp. 192-197.

22) 김지호, 「대형 소조상의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석심 소조상론」, 『美術資料』 86 (2014), pp. 24-43.

23) 국립문화재연구소, 『옹기를 만드는 사람들』 (민속원, 2009), pp .252.

24) 강우방, 「능지탑 사방불 소조상의 고찰 -능지탑의 복원시론-」, 『新羅와 狼山』 신라문화제학술발표회논문집 17 (1996), p. 101.

25) 朴永福, 앞의 논문, pp. 77-78.

26) 길기태, 「백제 성왕대 장육불상 조성의 의미」, 『한국고대사탐구』 37 (2021), pp. 104-105.

27) 장육불의 전반적인 의미와 연원, 크기에 대해서는 김세정, 「장육불의 기원과 고대 중국 불교미술에서의 전개」, 『중앙아시아연구』 25 (2020. 6), pp. 25-58; 최선아, 「대불로서의 운강 담요오굴 재고」, 『중앙아시아연구』 25 (2020. 6), pp. 94-99를 참고.

28) 국립박물관, 『금강사-부여군 은산면 금공면 백제사지 발굴보고』 (국립박물관, 1969), p. 115; 이병호, 「부여 정림사지 출토 소조상의 제작기법과 봉안장소」, 『미술자료』 72·73 (2005), pp. 35-37.

29) 이병호, 「백제 사비시기 소조상의 전개과정」, 『동원학술논문집』 14 (2013), p. 345.

Fig. 1.
<청양 본의리 대좌> Buddha’s throne Excavated in Ponŭi-ri, Ch’ŏngyang, Baekje, Terracotta, H.95cm (Buyeo National Museum, Paekche chŏngnimsa Pugwi yŏngnyŏngsa, p. 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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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부여 군수리 석불상> Seated stone Buddha, Excavated in Kunsu-ri, Puyŏ, 6th century, Baekje, H.13.5cm (Paekchein, Torŭl tasŭrida, p. 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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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예산 사방불> Four directional Buddhas from Yesan-gun, 7th century, Baekje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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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익산 연동리 불상> Seated stone Buddha from Yŏndaong-ri, Iksan, 7th century, Baekje (©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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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평양 토성리 출토 범상 소조불좌상> Clay Statue, Excavated in P’yŏngyang, 6th century, Koguryŏ (Natioanl Museum of Korea, Kodae bulgyo chogak taejŏn, p. 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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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군위석굴>, Rock-carved Buddha in Kunwi, 7th century, Unified Silla (© Cultural Heritage Administ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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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서하산석굴 불좌상(좌), 용문석굴 북조석굴 불좌상 (우)> Rock-carved Seated Buddha in ①Qixia Mountin Grottoes 19, ②24 and ③Binyang zhongdong, ④Huangfu gong ku in Longmen Caves, Southern and Northern Dynasties (Chenyuexin, Huaxia kaogu 2, p. 83 [Left] and Wenwu 7, p. 79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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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서영촌 소조불좌상> Clay Statue, Excavated in Xiyingcun temple site, Nanjing, 5th century, Southern Dynasties (Zhongguo kaogu, kaogu.cssn.cn/zwb/ggkg/202205/t20220509_5407391.s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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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빈양남동 불좌상> The Longmen Grottoes, 7th century, Tang (Wenyucheng, Zhongguo shiku·Longmen shiku 2, p. 1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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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소조상 제작과정> Process of making a Clay Statue (Kyōtarō Nishikawa, Nihon no bizuchi 8, p.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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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본의리 대좌 제작기법(안병찬 안)> Method of making Terracotta throne of the Buddha, Excavated in Ponŭi-ri (An Pyŏngch ’an, Misulcharyo 51, p.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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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본의리 대좌 내부> Detail of the inside of the terracota throne, Excavated in Ponŭi-ri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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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본의리 대좌 내부 손잡이> Detail of a handle, Inside of the terracota throne, Excavated in Ponŭi-ri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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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본의리 대좌 제작과정> Process of making terracotta throne of the Buddha, Excavated in Ponŭi-ri (Illustrations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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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진시황 병마용 도용 제작> Method of making terracotta warriors, Excavated in Bingmayong (Tetsuo Tomita, Chyukoku no dougiki 2, p. 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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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능지탑 소조상 내부> Inside the terracotta Buddha excavated in Nŏngji Pagoda Site, Kyŏngju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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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능지탑 소조상 성형기법> Technique Methods of Terracotta Buddha, Excavated in Neongji Pagoda Site, Kyŏngju, Unified Silla (Illustrations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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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능지탑 소조상 북쪽> Terracotta Buddha, North section of Neŏngji Pagoda Site, Kyŏngju, Unified Silla (Kang, Woobang, Shilla wa nangsan, p. 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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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다이마데라(當麻 寺) 불좌상> Seated Buddha, Taima-dera, 7th century (Yanagisawa Takashi etc, Yamato no koji 2: Taima-dera, p.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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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본의리 대좌와 불상 추정 복원도> Restoration of the terracotta throne excavated in Ponŭi-ri (Illustration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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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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