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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7; 2023 > Article
북방루트를 통한 兜率天 說法圖像의 전개와 聖衆으로서의 思惟像*

Abstract

兜率天 說法圖像은 석가의 입멸 후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미륵보살이 兜率天에 머무르면서 聖衆에게 설법하고 있는 『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上生經』)의 내용을 도해한 것으로, 그 기원은 카피사를 비롯한 간다라 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 도솔천 설법도는 이후 북방루트를 따라 중앙아시아와 중국으로 전래되었는데, 키질석굴에서 미륵보살은 중앙에 교각좌세로 앉아 주위 성중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으며 간다라 지역보다 성중상의 비중이 전체 도솔천 설법도의 구도 안에서 상당히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간다라에서 교각자세나 양발을 모은 좌상의 형태로 표현된 사유하는 포즈의 성중상이 키질석굴에서는 반가사유상으로 정립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이때 가장 하단에 위치한 반가사유상은 『상생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사유하는 성중’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도솔천 설법도상이 중국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교각의 미륵보살상은 규모가 커지지만 주위에 배치된 협시의 성중상의 숫자가 줄어드는 경향이 확인된다. 특히 교각미륵보살상의 좌우에 반가사유상이 협시로 배치되어 주로 삼존상으로 제작된 점은 간다라와 중앙아시아 지역과는 다른 『상생경』에 대한 중국식의 해석을 확인할 수 있다. 더불어 도솔천 궁전의 표현이 중국식의 목조 건축물로 바뀌고 있다는 점 등에서도 전반적으로 중국화의 과정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북위 후기의 반가사유상의 명문 중에 ‘사유상’이 다수 확인되는 것은 당시 중국에서 반가사유상이 도솔천 설법도의 ‘사유하는 성중상’으로 널리 제작되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반가사유상의 성격에 대해서는 불전에서의 태자사유상 뿐만 아니라 도솔천 설법도상의 전개에 따라 ‘성중 사유상’으로도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Abstract

The iconography of Maitreya preaching in Tuṣita Heaven illustrates the contents of Foshuoguan Milepusa Shangsheng Doushuaitian jing(hereafter, Shangsheng jing) in which Maitreya, who was promised that he will attain Buddhahood after Sakyamuni’s nirvana, preaches in Tuṣita Heaven. It originated from Gandhara region that includes Kapisa and was introduced to Central Asia and China by the Northern Route. In the Kizil Caves, there are Maitreya images sitting cross-legged and preaching to the heavenly multitude. Compared to the examples found in the Gandhara region, the heavenly multitudes here are depicted with increased importance. Moreover, the multitudes seating cross-legged or with two feet drawn together in the art of Gandhara region became pensive bodhisattvas in the Kizil Caves, and those in the lower rows in the cave also seem to represent the pensive multitude mentioned in Shangsheng jing.
As the iconography was introduced to China, the heavenly multitude who stood with attending bodhisattvas were reduced in size whereas images of Maitreya became more dominant. The fact that cross-legged Maitreya is usually attended by pensive bodhisattvas to form a triad shows that the Chinese perception of Shangsheng jing differed from that of Gandhara and Central Asia. The palaces of Tuṣita Heaven that resemble the wooden architectures of China show that the iconography has been Sinicized.
There are many inscriptions on the pensive bodhisattvas of late Northern Wei that include the word ‘pensive image,’ suggesting that they were made to represent pensive heavenly multitude listening to the preaching of Maitreya in Tuṣita Heaven. Accordingly, it can be deduced that the images of pensive bodhisattva reflect not only Sakyamuni meditating when still Prince Siddhartha, but also pensive heavenly multitude in accordance with the iconography of Maitreya preaching in Tuṣita Heaven.

Ⅰ. 머리말

兜率天 說法圖像은 석가의 입멸 후 미래에 성불하리라는 약속을 받은 미륵보살이 兜率天에 거주하면서 聖衆에게 설법하며 하생할 때를 기다린다는 『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이하, 『上生經』)의 내용을 도해한 것으로, 그 기원은 카피사를 비롯한 간다라 지방에서 찾을 수 있다. 머리를 위로 묶거나 상투를 튼 채 왼손에 수병을 쥐고 주로 단독상으로 등장하던 미륵은 도솔천 설법도에서는 교각좌세로 중앙에 앉아 주위 성중들에게 설법하는 모습으로 표현되었다.
이후 교각보살상은 북방루트를 통하여 키질석굴과 감숙지역의 초기 석굴군을 비롯하여 화북지방의 운강석굴과 용문석굴에서도 제작되었으며, 일부 단독상으로 제작된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 상생경이 묘사하고 있는 도솔천의 정경 안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 미륵보살상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도솔천 설법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교각보살상은 다수의 선행연구가 입증하고 있는 바와 같이, 남북조시대 미륵 도상의 전개와 중국화라는 측면에서 북조왕조의 주요 도상으로 손꼽을 수 있다.1
그런데 도솔천 설법도상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중앙의 교각미륵보살상 이외에도 설법을 듣고 있는 다수의 상들이 좌우 공간인 도솔천에 표현된 것으로 확인된다. 지금까지 교각보살상 주위의 군상에 대해서는 설법도의 공간을 채우는 부수적인 도상으로 보고 크게 주목하지 않았지만, 이들 군상 가운데 ‘사유를 하고 있는 상’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도솔천 설법도 중 군상에 대한 검토는 동아시아 반가사유상의 해석에 있어서도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도솔천 설법도상의 전개에서 중앙의 교각보살상과 좌우에 聖衆像2이라고 부르는 이들 군상과의 관련성에 관하여 소의 경전과 대조해보고, 이와 동시에 도솔천 설법도가 지역에 따라 어떠한 구성과 의미로 표현되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또한 성중상 중 사유하는 자세의 상이 확인됨에 따라 그 의미에 대해서도 검토하고자 한다.

Ⅱ. 도솔천 설법도상의 성립

도솔천 설법도3로 해석되는 가장 이른 예는 카피사(Kapisa)4 지방에서 출토된 부조상을 들 수 있다. 그 중 2~3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교각보살상과 찬탄자의 부조>(Fig. 1)는 가운데 교각상이 천개 아래에 앉아 오른손을 들고 왼손에는 수병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그 주위에는 공간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군상들이 등장하고 있다. 본 부조에서 확인되는 교각상은 쿠샨조 왕후의 모습에서 유래하는 것으로 세속의 공양자도 유목민의 복식을 한 것으로 보아 쿠샨 왕조시기에는 미륵신앙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쇼톨락(Shotorak) 출토의 <도솔천 설법도 부조>(Fig. 2)에서도 중앙에는 교각상이 사다리꼴(梯形) 형태의 난간 아래 앉아 전법륜인을 취하고 있고, 바로 좌우에는 발목을 안으로 모은 자세로 미륵보살의 설법을 경청하거나 생각하는 모습의 성중상이 표현되어 있다. 또한 난간의 위쪽에도 상반신을 내밀고 미륵의 설법을 지켜보고 있는 성중상이 표현되었으며, 특히 하단에 묘사된 성중상 중 우측상은 일반적인 반가사유상의 형식은 아니지만, 사유하는 자세를 표현한 도상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끈다.
그리고 라호르 박물과 소장의 <도솔천 설법도·대신변도 부조> 상단의 경우(Fig. 3), 반원형 중앙에 표현된 교각보살상은 오른손을 들어 손바닥을 안으로 향한 채 왼손은 수병을 들고 천개 아래에 앉아 있다. 좌우에는 성중상이 몸을 뒤로 젖혀 미륵보살을 보고 감탄하는 듯이 보이고 양 끝에는 사유하고 있는 상이 대칭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도솔천 설법도의 구성을 반원형에 맞추어 교각미륵보살은 가운데 가장 크게 묘사하고 좌우로 가면서 좁아지는 화면에 맞게 의도적으로 좌상의 사유상을 배치한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카피사 지방 출토의 부조에서 확인되는 초기 도솔천 설법도상에서 좌우에 등장하는 성중상은 입상으로 출현하기도 하지만 반원형의 구도와 사다리꼴 불감의 형식에서는 다리를 모으고 주로 앉아있는 좌상으로 제작되었다. 이들 성중상은 크기나 역할로 보아 미륵보살의 행위에 주목하고 감탄하는 장면에 등장하면서도 성중상의 배치나 표정, 행동 등 세부 표현에 대해서는 개성적인 표현이 확인되며, 무엇보다 카피사 지방의 부조에서 주목할 점은 교각미륵보살상의 좌우에 사유하는 포즈의 성중상이 반복적으로 출현하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도솔천 설법도는 서역북로상의 쿠차에 위치한 키질석굴5에서는 한층 서사적으로 변화한다. <Table 1>을 보면 현재 키질석굴에 총 13점 정도의 도솔천 설법도가 있는 것으로 확인되는데 벽화라는 특성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카피사 출토의 부조에 비해 도솔천의 공간적 표현과 성중상의 비중이 커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제38굴(Fig. 4)의 경우 쇼톨락 출토의 <도솔천 설법도 부조>(Fig. 2)에서는 난간 위에 배치되었던 성중상이 교각보살상의 좌우에 1, 2열로 나누어 배치되었으며, 교각보살상의 좌우에 있었던 사유상은 반가사유상의 형식으로 아랫단의 좌우에 그려져 있다(Fig. 5, Fig. 6). 그 외에도 카피사 부조에서 확인되는 사다리꼴 모양의 난간은 키질 석굴의 반원형 구조에서 아치형의 난간으로 표현되고 있다. 제38굴 이외에 17굴(Fig. 7)과 224굴에서 도솔천 설법도의 경우에서도 반원형의 공간 안에 오른손 시무외인, 왼손 정병, 혹은 전법륜인을 결한 교각보살상이 중앙에 배치되고, 성중상은 그 좌우 1, 2열로 나뉘어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성중상은 공통적으로 중앙의 교각미륵보살을 향하여 합장한 채 설법을 경청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彌勒六部經6 중 『상생경』7에서는 미륵보살에 관해 기술되어 있는데, 벽화에서도 미륵보살은 호화로운 방형의 대좌에 장엄을 하고 앉아 있으며 성중상도 천의를 걸치고 보관과 영락으로 장식되어 있다. 『상생경』에 의하면 도솔천8은 여의주 구슬이 만든 49겹의 보배궁전 등이 서 있고 궁전의 난간에는 연꽃과 보배구슬로 장식되어 있으며 많은 천녀들이 음악을 연주하고 춤을 추는 호화로운 곳으로 묘사되어 있는데,9 키질석굴에서 확인되는 반원형 양측의 아치형 건물장식이나 화려하게 바닥을 묘사한 것을 통해 이곳이 호화로운 도솔천 궁전이라는 점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게다가 다수의 성중상을 교각보살상의 바로 좌우에 배치해서 도솔천 설법도상에서 미륵보살 뿐 만 아니라 성중상의 역할이나 의미가 한층 강조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러한 표현을 통해 예배자들이 『상생경』의 내용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시각화 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도솔천 설법도가 그려진 위치에 있어서도 예배자들을 의식하여 배치한 것이라 판단된다. 도솔천 설법도는 키질석굴 중 대부분 중심주굴10에서 확인되는데 예배자들은 감실의 불상을 예배한 후, 右繞에 따라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중심주굴 후실 정벽의 열반도와 주변의 열반 관련 불전도를 지나게 된다. 이어서 예배자들이 主室로 나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시선이 문 위 상부에 장엄하게 묘사된 도솔천 미륵설법도와 마주하게 된다(Fig. 8). 이렇게 키질석굴에서 도솔천 설법도는 대부분 석굴 후실의 열반상을 비롯한 열반관련 도상과 같이 등장하기 때문에 시간의 흐름상 석가의 입멸 후 도솔천 설법도를 통해 佛法이 끊기는 것이 아니라 미륵보살에 의한 救濟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연속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38굴의 경우에 도솔천 설법도가 반원형의 공간에만 표현된 것이 아니라 아래의 문 위 공간까지 확대되는 가운데 양 끝에 반가사유상이 배치되어 주목을 끌고 있다.11 이를 통해 앞서 살펴본 도솔천의 호화로운 모습에 관한 묘사 이외에도 『상생경』에서는 특별히 미륵보살의 설법에 대하여 부처가 주위 성중들에게 당부하는 정황과 관련성이 깊다고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 우바리에게 말씀하셨다.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생각하여라. 여래·응공·정변지는 이제 이 대중들에게 미륵보살마하살에 대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설명해 주리라…(중략)
…부처님께서 다시 말씀하셨다. “만약에 어떤 비구와 일체 대중이 생사를 싫어하지 않고 천상에 왕생하기를 좋아하는 이거나 위없는 보리심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이로서 미륵의 제자가 되려고 한다면 마땅히 이렇게 관(觀)할지니, 이렇게 관하는 자로선 5계와 8계재와 구족계를 지녀 몸과 마음으로 정진하되 일부러 번뇌 끊을 것을 구하지 않고, 10선법을 닦아서 낱낱 도솔타 천상의 그 훌륭하고도 묘한 쾌락을 생각해야 할지니라. 이렇게 관하는 것을 바른 관이라 하고, 다르게 관하는 것을 삿된 관이라 하느니라”…(중략)
…또 부처님 형상을 생각하고(염하고) 미륵의 이름을 부른다면, 이러한 무리들도 한 찰나 사이나마 8계재를 받고 청정한 업을 닦아 큰 서원을 냄으로써 목숨이 끝난 뒤에는 마치 장사가 팔을 한 번 굽혔다 펴는 그러한 찰나에 곧 도솔타천에 왕생하여 연꽃 위에서 결가부좌하고 있으리라…(중략)
…부처님께서 우바리에게 말씀하셨다. “부처님이 열반한 뒤에 4부 제자나 천·용·귀신으로서 도솔타천에 왕생하려는 자는 마땅히 이렇게 관하여 전일하게 도솔타천을 사유하고 염(念)12하되, 부처님 금계를 지녀 하루 내지 이레 동안 열 가지 선한 행과 열 가지 선한 도를 생각할 것이며13…(중략)
이와 같이 『상생경』에는 관경에 어울리는 관상하는 모습과 경청할 것을 당부하고 있고, 특히 반복해서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의 설법을 듣고 사유할 것을 언급하고 있다.14 따라서 키질석굴의 제38굴 도솔천 설법도상에서 반가사유상이 등장하는 것은 ‘사유하는 성중’의 모습으로서 이 도상이 적합했기 때문에 취사선택한 결과이며, 반가사유상의 등장으로 인해 『상생경』의 내용이 시각적으로도 충분히 재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상 키질석굴에 전해진 도솔천 설법도를 제38굴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는데 교각보살이 설법하는 장면에서 등장하는 성중상의 비중이 커지면서 강조되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쇼톨락 출토 상 등 일부 부조에서 교각보살상의 좌우에 배치되었던 ‘사유상’이 키질석굴에서는 교각보살상으로부터 멀어지면서 ‘반가자세를 취한 사유상’의 형식으로 정립되는 흐름에 대해서는 이후 중국에서 전개되는 도솔천 설법도상과 관련하여 중요한 변화라고 할 수 있다.

Ⅲ. 도솔천 설법도상의 중국적 수용

1. 초기석굴의 예

불교 東漸의 비교적 이른 시기에 북방루트인 하서회랑을 따라 유입된 교각보살상은 돈황을 비롯한 감숙지역의 초기 석굴에서 확인된다. 이 경우 주로 하나의 소감 안에 단독상 또는 협시보살과 함께 삼존상을 이루거나 혹은 다른 군상과 함께 제작되는 경향이 확인되며, 앞서 살펴본 키질석굴의 ‘도솔천 설법도’처럼 상생경의 내용을 직접적으로 도해한 벽화는 확인되지 않는다.
그런데 중국에 있어서 초기 석굴 중 돈황 막고굴 제275굴(Fig. 9)은 도솔천 설법도와 관련하여 중요한 예시를 보여준다. 제275굴의 교각미륵보살상은 양쪽에 사자좌를 두고 서벽 중앙에 3m가 넘는 큰 규모로 조성되었다. 교각미륵보살상의 좌우에는 경전에서 묘사된 다양한 형태의 성중이 그려져 있고, 남벽과 북벽 상단에는 2구의 교각상과 맨 끝에 한 구의 반가사유상이 각각 배치되어 있다(Fig. 10). 지금까지 남벽과 북벽에 조각된 대칭의 교각상과 반가사유상의 구성이나 해석에 관해서는 별다른 언급이 없었지만 제275굴을 ‘도솔천 설법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능하다.15
먼저 서벽의 경우, 도솔천에서 설법을 하고 있는 교각미륵보살상을 중심으로 설법을 듣는 성중은 뒷부분에 일부 표현되었지만, 키질석굴에서 반원형의 도솔천상의 설법도와 비교해 보면 『상생경』을 묘사한 성중의 중요도에 비해 다소 축소된 느낌을 준다. 그러나 275굴에서 성중상을 남·북벽에 각 2구의 교각보살상과 반가사유상까지 포함해서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표현하고자 했던 ‘도솔천 설법도’는 상당히 의도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275굴이 넓이 3.34m, 남·북벽의 길이가 5m에 이르는 장방형이고 규모가 작은 단실이라는 점을 들어 구조적인 문제로 생각해 볼 수도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서벽의 교각미륵보살상을 현재보다 소규모로 제작하고 주존 주위에 키질석굴과 같이 성중상의 비중이 큰 도솔천 설법도를 묘사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제275굴에서 서벽의 교각미륵보살상을 가장 크게 제작한 것에 비해 『상생경』에서 강조하는 미륵의 설법을 듣고 ‘사유’ 하는 성중으로서 역할을 하는 반가사유상을 가장 바깥쪽에 배치한 것을 감안한다면(Fig. 11, Fig. 12), 이는 바로 도솔천 설법도를 기존의 반원형의 평면적인 구조에서 입체적인 구조로 확장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제275굴의 구성은 『상생경』에서 표현하고 있는 도솔천 설법도의 내용을 서벽을 중심으로 좌우 남벽과 북벽에 걸쳐 유기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의도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도솔천 설법도의 시점에서 본다면, 서벽과 남·북벽에 걸쳐 입체적인 공간이었던 제275굴에 들어간 예배자는 교각미륵보살상 앞에 마주 하는 순간 미륵보살의 설법이 저절로 들리게 되며 주위 벽에 표현된 성중상과 일체감을 느끼게 된다(Fig. 13). 이러한 과정을 거쳐 예배자를 포함하여 미륵보살과 성중상들이 있는 제275굴의 공간은 자연스럽게 ‘도솔천’이 되는 것이다.16
이와 같이 공양자들에게 열반에서 도솔천으로 불법의 연속성을 표현한 키질석굴과는 달리 돈황석굴에서는 제 275굴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솔천’을 입체적으로 구현하여 공양자가 그 공간 안에서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구성하고자 했으며, 그렇기 때문에 가장 끝에 배치된 반가사유상은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바로 이점이 ‘도솔천 설법도’에 대한 중국적인 해석이 이루어진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2. 중국화의 예

460년부터 개착이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雲岡石窟의 경우 미륵상은 교각의 미륵보살상, 교각의 여래상, 의좌의 여래상, 보살입상, 반가사유상 등과 함께 다양한 구성을 보이지만 그 중 도솔천 설법도에서 확인되는 교각의 미륵보살상은 주로 반가사유상과 함께 삼존상을 이루고 난간 위에 성중상을 배치한 형태로 나타난다.17
예를 들어 제17굴의 명창 동측벽에 위치한 惠定 불감(Fig. 14)의 경우, 2단으로 나누어진 불감의 하단에는 석가, 다보의 이불병좌상을 배치하였고, 상단에 교각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우 반가사유상이 확인된다. 난간 위쪽으로는 상당수 파손되었지만 도솔천 설법을 듣고 있는 성중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혜정 불감은 조상기에 의하면 太和 13년, 즉 489년 비구니 혜정이 석가, 다보, 미륵 3구를 조성함으로써 자신의 건강과 현세의 평화로운 삶을 염원한 것으로,18 하단의 석가다보를 제외한 상단의 교각보살상은 확실히 미륵으로 인식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각미륵보살상의 좌우의 ‘입상’이 ‘반가사유상’으로 바뀌고, 도솔천 설법도상 아래에 석가다보의 설법장면이 함께 표현되는 것은 도솔천 설법도에 대한 또 다른 중국적인 이해를 보여 준다.19 또한 제16굴 남벽과 明窓 사이에서 확인되는 兜率天宮의 묘사(Fig. 15)에서도 중국식의 목조 건축구조가 사다리꼴 불감의 위에 표현되는 등 적극적인 중국화가 진행되고 있다.
한편 북위 왕조의 낙양천도 무렵에 개착된 龍門石窟에서도 도솔천 설법도가 확인된다. 운강석굴과 마찬가지로 교각보살상 좌우에는 반가사유상 혹은 보살입상이 배치되는 형태로 나타난다. 그런데 반가사유상을 좌우로 배치한 도솔천 설법도는 고양동의 경우 북벽 121감20과 156감(Fig. 16) 및 남벽의 제 209감의 단 3건에 불과할 정도로 북위 전기에 비해 현저하게 줄어들고 있다. 또한 간다라에서부터 운강석굴에 이르기까지 규칙적으로 지켜지던 오른쪽 다리를 바깥으로 교차한 미륵보살의 자세가 고양동 북벽의 太和 22년(498)명 北海王元詳龕(Fig. 17)과 景明 3년(502)명의 惠感龕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용문석굴에서는 왼쪽 다리를 바깥으로 해서 교차하는 방식으로 바뀌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洛陽遷都(494년)무렵부터 나타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북위 후기에 개착된 용문석굴의 皇甫公洞과 魏字洞이나 낙양 근교에 개착된 鞏縣石窟에서 미륵보살상은 다리를 교차한 교각자세에서 점차 결가부좌로 바뀌는 새로운 경향이21 확인됨과 동시에 이 무렵 중국에서는 교각미륵보살상을 중심으로 한 도솔천 설법도상의 제작도 감소한 것으로 추정된다.

Ⅳ. 도솔천 설법도상을 통해 본 반가사유상의 성격

이상 중국으로 유입된 도솔천 설법도상의 전개과정에서 본다면 반가사유상은 중국에서도 여전히 사유하는 자세의 성중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그동안 선행연구에서 논의되었던 반가사유상의 성격 중 태자사유상이나 미륵보살상 이외의 성격이 있었을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으며, 이와 관련하여 반가사유상에 대한 중국인들의 의식을 살펴볼 수 있는 상이 있어 검토하자 한다.
현재 大阪市立美術館 소장의 <여래삼존상>22은 정면에 여래좌상을 중심으로 좌우 보살 입상이 있고(Fig. 18), 후면에는 중앙에 도솔천 미륵설법도와 아래 부분에 선정인 여래상을 중심으로 한 삼존상이 線刻되어 있다(Fig. 19). 특히 후면의 경우, 교각보살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반가사유상이 배치되어 운강이나 용문석굴에서 확인되는 중국식의 도솔천 미륵설법도가 표현되어 있으며 윗부분에는 성중들이 생략된 채 日月과 三足烏, 두꺼비 등 이른바 한족 특유의 전통적인 도상들이 좌우로 새겨져 있다.23 그리고 교각상과 우측 반가사유상의 경우, 구획을 나누어 그 사이 공간에 각각 종횡으로 ‘開思惟佛光明主王伏奴’와 ‘開彌勒佛光明主孟莫問’의 명문을 새겨 넣었다(Fig. 20). 좌측의 반가사유상에도 종횡으로 쓴 ‘開思惟佛光明主申洪景’의 명문이 추가적으로 확인된다.24 명문에 의해 맹막문(孟莫問)이 발원한 교각상은 ‘미륵불’로, 왕복노(王伏奴)와 신홍경(申洪景)이 발원한 반가사유상은 ‘사유불’로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불상의 존격 뒤에 각각 공양자의 이름을 새기는 것은 북조시대 불상에 흔히 보이는 현상으로, 이러한 행위를 통해 造像을 매개로 공양자 자신이 부처와 연결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은 것으로 추정된다.25
이와 같이 <여래삼존상>은 앞에서 살펴본 운강이나 용문석굴의 도솔천 설법도상과는 달리 북위 후기에 중국화 된 도솔천 설법도상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자료라고 생각한다. 상단의 日月 등 전통적인 도상 표현은 중국인들에게 인식되었던 ‘天’26의 세계관과 그 하단의 삼존상은 ‘도솔천 설법도상’을 중국식으로 표현하고 있으며, 그 외에도 반가사유상에 대해서도 ‘사유불’로서 구체적인 성격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중요한 예시라고 할 수 있다.
한편 1953년 하북성 曲陽의 修德寺址에서는 2000여구에 이르는 북위에서 당대에 이르는 다량의 白玉像(白大理石像)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반가사유상의 성격을 알 수 있는 명문이 다수 확인되었다.27 그 중 隋代까지의 명문을 정리해 보면, 수덕사지 출토상에는 ‘太子思惟28’나 ‘龍樹思惟29’ 보다는 단순히 ‘思惟像’이라고 존명을 밝힌 경우가 총 21구로 가장 많이 확인된다.30 지금까지 ‘사유상’ 존명에 대해서는 경전에 근거하여 ‘태자사유상’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지만,31 본고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도솔천 설법도상이 전개되는 흐름에서 본다면 ‘사유상’의 흐름에는 태자사유상만이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32 명문의 내용 그대로 ‘사유’에 초점을 맞춘다면 중국인들에게 ‘사유상’인 반가사유상은 도솔천에서 교각미륵보살의 설법을 듣고 사유하는 역할을 묘사한 ‘성중으로서의 사유상’을 의도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Ⅴ. 맺음말

이상 도솔천 설법도상의 성립과 전개에 따른 포괄적인 흐름을 살펴보았다. 이하 본고에서 중점을 둔 내용을 한 번 더 정리하면서 결론을 맺고자 한다.
첫째, 카피사 등 간다라 지방에서 유래한 도솔천 설법도상은 키질석굴에서 다수 확인되는 바와 같이 북방루트를 따라 전래되었으며 유행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서역북로에 위치한 쿠차의 키질석굴에서는 『상생경』의 내용을 충실히 시각화하는 과정에서 간다라 지역보다 성중상의 비중이 전체 도솔천상의 미륵설법도의 구도 안에서 상당히 커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간다라에서 교각자세나 양발을 모은 좌상의 형태로 표현된 사유하는 포즈의 성중상이 키질석굴에서는 반가자세를 취한 사유상으로 정립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때 가장 하단에 위치한 반가사유상은 성중상 중 ‘사유하는 성중’의 모습을 표현한 것을 알 수 있었다.
둘째, 도솔천 설법도상은 중국의 초기 석굴의 경우 돈황석굴 제275굴에서 확인되는 바와 같이, 『상생경』에서 표현하고 있는 도솔천 설법도의 정경을 보다 입체적으로 표현함으로 인해 미륵보살과 성중상들이 있는 ‘도솔천’의 공간을 구현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중국의 화북으로 전개되는 과정에서 교각의 미륵보살상은 규모가 커지고 강조되지만 주위에 배치된 협시의 성중상의 숫자가 줄어들면서 바로 좌우에 반가사유상이 협시로 배치되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는 간다라와 중앙아시아 지역과는 다른 도솔천 설법도에 대한 중국식의 해석을 반영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도솔천궁의 표현에 있어서도 사다리꼴의 불감이나 반원형의 공간 구성과는 달리 중국식의 목조 건축물 양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점 등에서 전반적으로 중국화의 과정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중국에 있어서 도솔천 설법도의 전개가 감숙이나 화북지역에 따라 다소 다르게 확인된다는 점에 관해서는, 그 배경이 시기적인 차이인지 아니면 각 지역별로 이해가 달랐던 것인지, 또는 다양한 도솔천 설법도가 중국에 유입되었기 때문인지에 대해서는 문제점을 인식하고 이후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함을 알 수 있었다.
셋째, 중국의 도솔천 설법도상에서 확인되는 반가사유상이 ‘사유불’로 지칭되었음을 확인하여 이후 단독으로 제작되는 상의 명문 중 ‘사유상’이 많은 것은 이 반가사유상들이 도솔천 설법도의 ‘사유하는 성중상’으로서 인식되었기 때문이라고 해석하였다. 따라서 반가사유상의 성격에 대해서는 불전에서의 태자사유상 뿐만 아니라 도솔천 설법도상에서는 ‘성중 사유상’으로서의 제작흐름이 있었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상 본고에서는 도솔천 설법도의 전개와 흐름을 살펴보는 것을 중심으로 중국에서 확인되는 도솔천 설법도상의 관점에서 반가사유상을 살펴보았지만, 이후 한반도와 일본으로 전개되는 반가사유상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전개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시대와 지역별로 보다 실증적인 자료를 통해 포괄적이면서도 구체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향후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반가사유상에 관한 연구를 계속 진행하고자 한다.

Notes

1) 남북조시기 미륵의 도상 전개에 관해서는 이하의 선행연구가 참조된다. 大村西崖, 『支那美術史彫塑篇』 (仏書刊行会図像部, 1915); 水野清一·長廣敏雄, 「雲岡図像学」, 『雲岡石窟 第8·9巻』 (京都大学人文科学研究所, 1953); 上野照夫, 『弥勒像の図像学的考察』 (塚本博士頌寿記念仏教史学論集, 1961); 東山健吾, 「敦煌莫高窟北朝期尊象の図像的考察」, 『東洋学術研究』 24-1 (1985); 石松日奈子, 「中国交脚菩薩像考」, 『佛敎藝術』 178 (1988), pp. 55-83; 同著, 「弥勒像坐勢研究-施無畏印·倚坐の菩薩像を中心に」, 『Museum』 502 (東京国立博物館, 1993), pp. 4-26 (이후 『北魏仏教造像史の研究』, ブリュッケ, 2005에 수록); 宿白, 「南朝龕像遺迹初探」, 『考古学報』 1989-4 (『中国石窟寺研究』 수록, 文物出版社, 1996); 강희정, 『관음과 미륵의 도상학』 (학연문화사, 2006), pp. 165-255; 徐男英, 「河北藁城出土の北斉河清元年銘白玉二仏坐像について-「弥勒破坐」銘の解釈を中心に」, 『美術史』 60 (日本美術史學會編, 2011), pp. 313-330; 李玉珉, 「南北朝弥勒図像與信仰」, 『故宮学術季刊』 30-2 (2012); 齋藤理恵子, 「弥勒菩薩の諸相」, 『仏教美術の研究』 (里文出版, 2014); 石松日奈子, 서남영 역, 「중국 북조기 미륵상의 재검토-하생신앙과 미륵상」, 『동양미술사학』 9 (2016), pp. 5-100; 肥田路美,「弥勒仏の信仰と倚坐形如来像―五世紀から則天武后期以前まで―」, 『中央アジア仏教美術の研究-釈迦·弥勒·阿弥陀信仰の美術の生成を中心にー科学研究費補助金基盤研究(B)研究報告書』 (龍谷大学, 2018), pp. 47-63.

2) ‘聖衆’은 불교에서 예배대상이 되는 聲聞, 緣覺, 菩薩, 佛의 집단을 가리키는데, 보통은 정토교에서 왕생자를 구하기 위해서 내영하는 불, 보살, 비구중이나 그를 따르는 모두를 가리킨다. 그동안 도솔천상의 미륵설법도에서 미륵보살 주변의 등장인물상에 관해서는 청중, 권속, 성중 등으로 인용하고 있지만, 그 해석에 관한 논고는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이 중 ‘聽衆’은 ‘듣고 있는 무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실제 도솔천 설법도에서 등장하는 무리들의 경우, 듣는 행위로만 한정할 수 없기 때문에 미륵보살주변의 등장인물에 대해서는 성중상이라고 부르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徐男英, 「龍門石窟古陽洞半跏思惟像試論-左右対称配置と制作時期検討を中心に」, 『京都美学美術史学』 7 (2008), pp. 97-129에서 반가사유상을 비롯해 미륵보살상 주위의 군상에 관해 ‘聖衆像’이라고 비정한 바 있다. 이외에 ‘聖衆像’이라고 부른 예로는 宮治昭의 『涅槃と弥勒の図像学』(吉川弘文館, 1992, p. 331)에서 “간다라 부조 중에 転法輪印을 결하고 蓮華座 위에 結跏趺坐하는 부처상이 예배상과 같이 크게 표현되었고, 그 주위에는 불, 보살, 공양자 등 많은 聖衆을 배치한 일종의 대신변도가 있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이는 존격에 한정하지 않고 등장인물을 지칭하는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다만 龍谷大学編纂, 『仏教大辭彙』 第二巻(1992), p. 2207에 의하면, 聖衆은 眷属聖衆의 菩薩로도 말할 수 있으며, 浄土門에서는 주존에 부수적으로 등장하는 많은 聖者를 말하고 있다.

3) 도솔천 설법도에 관한 최신 연구로는 이하가 참조된다. 泉武夫, 「兜率天弥勒と兜率天宮図の系譜」, 『兜率天往生の思想とそのかたち』 (平成19(2007)年度-平成22(2010)年度科学研究費補助金 (基盤研究(B))研究成果報告書, 2011); 同著, 「印度·中国·日本的弥勒信仰与美術-兜率天的菩薩像及其源流」, 『中国美術研究』 29 (東北大学, 2019); 田辺勝美·前田耕作責任編集, 『世界美術大全集 東洋編 第15巻 中央アジア』 (小学館, 1999), p.296.

4) 카피사 지방은 현재 아프카니스탄 북동부에 위치한 州로 옛 간다라 지방에 속하는 지역이다. 주요 출토지로는 쇼톨락 등이다.

5) 서역북로상의 쿠차에 개착된 키질석굴은 현재 총 236굴까지 편호되어 있으며 이 중 벽화가 남아있는 것은 약 70여 굴이다. 키질석굴의 개착 시기에 관해서는 諸說이 있지만, 대체로 300년 전후에 시작되어 8세기 중반 경에 쇠락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중 도솔천 설법도상은 300~500년대의 주로 중심주굴의 석굴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키질석굴에 관한 자료 중 본고의 내용과 관련해서는 이하의 자료를 참조했다. 新疆ウイグル自治区文物管理委員会, 拝城県キジル千仏洞文物保管所編, 『中國石窟 キジル石窟』 1, 2, 3 (平凡社·文物出版社共編, 1983-1985); 강민정, 『키질석굴의 <도솔천 미륵설법도>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0); 宮治昭, 肥田路美, 板倉聖哲 監修, 『アジア仏教美術論集 中央アジア1 ガンダーラ〜東西トルキスタン』 (中央公論美術出版, 2017) 등.

6) 미륵경전에는 통상 이하의 경전을 미륵육부경이라고 한다. ①『佛說彌勒來時經』 譯者不明 (T.14, No.457), ②『佛說彌勒下生經』 (일명 『下生經』) 西晋 竺法護 譯 (303年)(?) (T.14, No.453), ③『佛說彌勒下生成仏經』 後秦 鳩摩羅什 譯 (402年)(?) (T.14, No.454), ④『佛說彌勒大成佛經』 後秦 鳩摩羅什 譯(402年) (T.14, No.456), ⑤『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일명 『上生經』) 北涼 沮渠京声 譯(455年)(?) (T.14, No.452), ⑥『佛說彌勒下生成佛經』 唐 義浄 譯(701年) (T.14, No.455) 이 중 ②④⑤를 彌勒三部經이라고 부르고, 상생신앙은 ⑤『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에 기술되어 있다.

7) 『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上生經』)은 455년 北涼王 沮渠蒙遜의 從弟에 해당하는 沮渠京聲이 한역한 것으로 투르판 부근에서 성립되었거나 편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성립시기에 관해서는 상생경에서 “도솔타천에 있으면서 낮밤으로 항상 이 법을 설하여 여러 천자들을 제도하고 염부제의 歲數로는 56억만 년을 지낸 뒤에라야 다시 염부제에 下生하리니, 彌勒下生經에서 설한 것과 같다”고 이미 『下生經』을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上生經』이 하생경보다 후대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상생경』에서 부처는 미륵보살이 도솔천에 왕생해 성불할 것이란 수기를 내린 뒤 도솔천에서 중생을 어떻게 구제하는가에 관해 설법하고 있는데, 미륵보살은 도솔천에서 천인들과 더불어 세속의 시간으로 56억 7천만동안 설법 한 후 사바세계에 내려온다고 전한다. 다만 『상생경』 성립이전에 간다라나 중국에서는 이미 미륵 상생신앙이 널리 퍼져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는 梁 慧皎 撰 『高僧傳』이나 梁 僧祐 撰 『出三藏記集』에 간다라 지방에서 배운 인도 승려나 중국의 승려 등이 미륵 신자로 깊은 선정에 들어 도솔천에서 미륵보살을 친견한다는 이야기나 사후에 도솔천 왕생을 바라는 이야기 등이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중국에 있어서 최초의 미륵신앙자로 알려져 있는 釋道安(314~385)이 제자들과 도솔천 왕생을 바라고 있는 점에서 일찍이 상생 신앙을 확인할 수 있다. 본고에서는 미륵의 주요 경전에 관해 이하의 자료를 참조했다. 松本文三郎, 『弥勒浄土論』 (丙午出版社, 1911); 同著, 『弥勒浄土論 極樂淨土論』 (松本文三郎博士主要著書, 平凡社, 2006); 이기영, 「彌勒信仰의 再定立」, 『東國思想』 18 (1985); 石上善應·양은용 역, 「6-7세기 동아세아에 있어서 미륵보살신앙의 동향 -그 배경을 이루는 미륵경전의 원류-」, 『마한백제문화』 16 (2004); 김석근, 「전륜성왕(轉輪聖王), 미륵(彌勒), 그리고 메시아-미륵신앙의 정치적 기능과 함의에 대한 시론적 접근」, 『동양청치사상사』 9 (2010), pp. 5-22; 박민현, 「미륵사상의 발생과 중심사상」, 『정토학연구』 24 (2015). pp. 9-41; 이수창, 「미륵사상의 기원과 전개-초기 경전과 미륵경전을 중심으로」, 『정토학연구』 37 (2022), pp. 45-77.

8) 도솔천은 미륵보살이 하생하기 전까지 설법하는 곳으로, 투시타(Tuṣita)의 음역이다. 의역하면 知足天 즉 ‘만족했다’의 의미로 여기서의 만족이란 주로 五欲의 쾌락에 대한 만족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打本和音, 「兜率天とその役割」, 『印度學佛教學研究』 69 (日本印度学仏教学会, 2020), pp. 467-462 참조.

9) “이미 이 서원을 냄에 따라 이마 위에 저절로 5백억 보배 구슬이 나오는가 하면, 유리·파리 등 일체 빛깔을 다 구족함으로써 붉고 검푸른 마니가 안팎으로 환히 비침과 같은 이러한 마니의 광명이 공중을 빙빙 돌면서 49겹의 미묘한 보배 궁전을 변화로 만드는데, 그 낱낱 난간이 만억의 깨끗한 마니 보배로 합성되어 있고, 낱낱 난간 사이에는 9억의 천자와 5백억의 천녀가 저절로 화생하며, 낱낱 천자의 손 안에는 한량없는 억만의 7보 연꽃이 화생하고, 낱낱 연꽃 위에는 한량없는 억 광명이 있느니라. 旣發願已,額上自然出五百億寶珠、 琉璃、 頗梨,一切衆色無不具足,如紫紺摩尼表裏映徹。 此摩尼光迴旋空中,化爲四十九重微妙寶宮,一一欄楯萬億梵摩尼寶所共合成。 諸欄楯閒自然化生九億天子、 五百億天女,一一天子手中化生無量億萬七寶蓮華,一一蓮華上有無量億光” 劉宋 沮渠京声 譯, 『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T.14 No.452), p. 419a

10) 키질석굴에서 中心柱窟은 主室이 정방형 혹은 장방형에 궁륭형 천장을 이루는데, 後室의 경우, 불감이 있는 中心柱를 만들고 그것을 따라 左廊, 後廊, 右廊으로 연결된다. 이러한 구조는 중심주가 석굴의 붕괴를 막기 위한 기능도 하지만, 중심주 정벽 감실에 불상을 안치해서 예배를 드리는 기능적인 면에서도 적합한 구조를 선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1) 키질석굴 제38굴 이외에도 베를린 국립프로이센 문화유산 박물관(인도미술관)에서도 한 쌍의 반가사유상 단편이 확인된다. 이 반가사유상은 원래 키질석굴 123굴 주실 정벽 좌우 입구 상부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현재 정확한 위치 확인이나 123굴의 전반적인 벽화 상태에 관해서는 파악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한 쌍의 반가사유상이 123굴에 제작된 것은 확실하기 때문에 아마 38굴과 유사한 구조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12) 織田得能著, 『仏敎大辭典』 (大倉書店, 1920), p. 1377에 의하면, 『上生經』에서 ‘念’은 기억해서 잊지 않는 것을 뜻하지만, 『唯識論三』(‘云何爲念. 於会習境. 令心明記不妄’), 『法界次第』(‘念者. 内心存意之異名也’) 혹은 『大乘義章十二』에서는 ‘念’의 의미에 관해 ‘깊이 무엇에 대해 생각에 잠기는 것’으로 해석된다. 따라서 상생경의 ‘念’은 생각한다는 ‘思惟’와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다고 추정된다.

13) “佛告優波離:“諦聽諦聽,善思念之。 如來、 應、 正遍知,今於此衆,說彌勒菩薩摩訶薩阿耨多羅三藐三菩提記… 중략…若有比丘及一切大眾。 不厭生死樂生天者。 愛敬無上菩提心者。 欲為弥勒作弟子者。 當作是観。 作是観者応持五戒八斉具足戒身心精進不求断結修十善法一一思惟兜率陀天上上妙快樂。 作是観者名為正観。 若他観者名為邪観…중략…応当繋念念仏形像称弥勒名。 如是等輩若一念頃受八戒斉。 修諸浄業発弘誓願 念終之後。 臂如壮士屈申臂頃即得往生兜率陀天…중략…佛告優波離:“佛滅度後,四部弟子、 天、 龍、 鬼神,若有欲生兜率陁天者,當作是觀繫念思惟,念兜率陁天,持佛禁戒,一日至七日,思念十善行十善道” 北涼 沮渠京声 譯, 『佛說觀彌勒菩薩上生兜率天經』(『上生經』)T.14, No.452, pp. 418c-420b 참조.

14) 浅井和春, 「半跏思惟像 觀松院」, 『國華』 1116 (朝日新聞社, 1988), p. 24에 의하면, 키질석굴 제38굴의 반가사유상의 표현은 도솔천에 이르는 전제로의 수행자의 사유를 상징적으로 도상화 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사유의 의미에 대해서는 필자의 「동아시아에 있어서 사유상의 특징과 의미고찰」 『미학예술학연구』 42 (2014), pp. 154-156에서도 불전을 통해 초보적인 검토를 하였다. 당시 논고에서는 반가사유상에 초점을 맞추어 단편적으로 검토하는데 그쳐 중앙아시아 이후의 전개과정에 관해서는 고찰하지 못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그간의 연구를 바탕으로 관점을 간다라부터 용문석굴에 이르기까지 확인되는 도솔천 설법도에 맞추어 각 지역에 따른 성중상의 표현 변화와 역할을 살펴보고 특히 중국에서 지역벽로 도솔천 설법도의 전개과정을 구체적으로 살펴보고자 한 점이 다르다.

15) 돈황석굴 제275굴의 경우, 서벽의 대형 교각보살상 이외에도 남, 북벽에 총 4구의 교각보살상이 배치되어 있다. 이들 교각상은 보관과 장식을 걸치고 반가사유상과 규모가 비슷하게 소형으로 제작되어 상단의 소감안에 배치되었는데, 전체 구성에서 본다면 반가사유상-소형 교각상 2구-대형 교각미륵보살상-소형 교각상 2구-반가사유상의 7존 구성이 된다. 이 중 소감의 교각상의 성격에 관해서는 서벽 주존인 교각보살상과의 규모의 차이와 구성을 고려해 볼 때. 키질석굴에서 확인되는 도솔천 설법도에서 중앙의 미륵보살 좌우에 배치되어 미륵보살의 설법에 찬탄하는 성중상의 성격으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만약 미륵보살로 본다면, 당시 중국에서는 미륵보살을 중심으로 한 이러한 7존 구성을 확인하기 어렵고 미륵 상생신앙과 도상이 중국에 전래되었을 초기에는 교각상을 미륵보살상과 성중상의 두 도상과 혹은 두 성격을 혼용해서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이후 교각상은 5~6세기 미륵보살로 정립되어 가지만, 돈황석굴을 비롯한 감숙지역의 초기 석굴에서는 일부 과도기적 현상도 확인되기 때문에 제275굴의 전체 구성에서 소형의 교각상에 대해서는 추후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16) 敦煌硏究所編, 『敦煌石窟 全集 第1卷 莫高窟 第266~275窟 考古報告』 第1分冊 (文物出版社, 2011), pp. 151-238 참조. 그동안 몇 차례 보수가 있기는 했지만 바닥에는 등잔을 놓았던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다. 따라서 제275굴이 돈황석굴 제272굴과 같이 개착 초기에 예배굴로서 당시 『상생경』을 바탕에 둔 도솔천에 대한 신앙을 조형화 했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특히 등잔대가 놓인 위치에서 좌우를 보면 바로 반가사유상과 시선이 마주친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등잔대 옆에 자리하고 있었던 예배자는 자연스럽게 도솔천상에서 정면의 교각미륵보살이 설법을 경청하고 사유하는 수행자와 동일시되는 것을 의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제275굴의 성격을 본고와 같이 도솔천을 시각화 했다는 의견이 있어 참조된다. 주수완,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의 도상학적 재고」, 『한국불교학』 80 (2016), pp. 288-292.

17) 徐男英, 앞의 논문(2008), p. 115, <表1>운강석굴에 있어서 교각상의 좌우 반가사유상 배치에 의하면 운강석굴의 초기부터 낙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개착된 석굴에서도 한쌍의 반가사유상이 교각상과 삼존상을 이룬 구성을 다수 제작한 경향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외 운강석굴 중에서도 7굴과 8굴의 주실 상부 불감에는 이례적으로 의좌상과 교각상을 동반한 5존상의 양 끝에 반가사유상이 배치되는 형식이 등장하기도 한다. 오존상의 해석에 관해서는 현재 曾布川寛, 『雲岡石窟再考』 『東方學報』 83(2008), pp. 1-155를 비롯해서 諸說이 있다. 북위 전반기 미륵보살이 출현하는 도솔천 설법도를 중심으로 검토한다면, 이는 미륵도상의 예외적인 흐름에서 해석해야 될 것이다. 그 외 운강석굴의 전반적인 도상이나 내용에 관해서는 水野淸一·長広敏雄 共著, 『雲岡石窟―西暦五世紀における中国北部仏教窟院の考古学的調査報告』, 全十六卷三二冊 (京都大学人文科学硏究所, 1951~1956)참조.

18) 운강석굴 제17굴의 동벽의 惠定 불감의 조상기는 높이 약 28cm의 방형 안에 총 87자가 새겨져 있다. “太代太和十三年歲/在己巳九月壬寅朔/十九日庚申比丘尼惠/定身愚重患發願造/釋迦多寶彌勒像三/區願患消除願現世/安隱戒行猛利道心/日增誓不退轉以此/造像功德逮及七世/父母累劫諸師兂邊/衆生咸同斯慶”, 水野淸一·長広敏雄共著, 앞의 책, 第十二巻:第十七洞および第十八洞(本文), 1954, p. 46 참조. 태화 13년 기사년 9월 19일 경신일 삭망 때 비구니 혜정이 중병에 걸렸는데 그녀는 석가, 다보, 미륵 3구의 불상을 조성하면서 자신의 건강과 현세의 평화로운 삶을 기원하였다. 혜정은 계율을 준수하고 수행하여 신심이 나날이 깊어졌으며 계속할 것을 서원하였다. 이에 불상 조상 공덕이 7대 조상과 부모에까지 이르기를 원했다. 대대로 모든 스승과 중생들에게도 가은 공덕이 이르기를 기원하였다는 내용이다.

19) 운강석굴에서 이러한 경향은 비단 석굴에서만 확인되는 것이 아니라 당시에 제작된 불비상에서도 다수 확인된다. 예를 들어 교토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神龜 3년(520)명 <교각보살비상>의 경우, 불제자 翟蠻이 돌아가신 부모를 위해 ‘彌勒像’을 발원한 것을 확인할 수 있으며, 그 외 조상기는 없지만 네즈미술관 소장의 불비상 등 다수의 불비상에 교각미륵보살상과 좌우 반가사유상의 삼존 구성을 확인할 수 있다.

20) 현재 고양동 북벽의 121감의 경우 교각보살상과 우협시 반가사유상은 파손되어 부분적으로 남아있지만, 大村西崖, 『支那美術史彫塑篇』 (佛書刊行會, 1915) 圖版 474에서 확인된다.

21) 石松日奈子, 앞의 논문(1988), pp. 55-83 참조.

22) 오사카시립미술관 소장의 <여래삼존상>은 높이 163cm의 석회암으로 제작된 삼존상이다. 주존은 결가부좌를 한 여래좌상으로 시무외, 여원인을 결하고 있으며, 좌우 협시는 세장한 보살입상이다. 보살상의 대좌가 우협시의 경우 地神이 연화좌를 받치고 있으며, 좌협시의 경우에는 사자가 연화좌 밑에 표현되어 있다. 본 상은 기년명이 없어 정확한 제작연대는 알 수 없지만, 여래좌상과 보살상 및 광배의 천인상 등 전제적인 양식으로 볼 때 낙양천도 이후인 북위말 하남지방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23) 불상에 표현된 한족 특유의 전통적인 도상의 제작배경에 관해서는 이하의 논고가 참조된다. 八木春生, 「北魏時代後期の仏(道)教造像に見られる漢民族の伝統図像について」 『佛敎藝術』 245 (1999), pp. 13-47; 八木春生, 『中国仏教美術と漢民族化-北魏時代後期を中心として』 (法藏館, 2004); 강희정, 「南北朝時代 佛敎美術의 漢族 傳統」, 『美術史學硏究』 237·238 (2003), pp. 35-56; 同著, 「북위 불교미술을 통해 본 탁발선비의 문화포용력」, 『中央아시아 硏究』 25 (2020), pp. 29-46.

24) <如来三尊像>의 명문에 관해서는 大阪市立美術館編, 『中国の石仏─荘厳なる祈り』 (大阪市立美術館, 1995), p. 146참조. 명문은 후면 뿐 만 아니라 정면 여래좌상 주위에서도 확인되는데, 주존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되는 大佛光明主王顯宗을 비롯해서 좌우 보살상과 광배의 칠불을 발원한 인명이 새겨져 있다. 후면 명문의 경우, 松原三郎의 『中国仏教彫刻史論』 本文編 (吉川弘文館, 1995), p. 118에서 「開思惟仏光明主申洪景」을 「開思惟仏光明主 景」로 언급하고 있지만, 현지조사에서 인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한편 <여래삼존상>에서 교각상과 반가사유상은 성도를 이룬 존격이 아님에도 ‘佛’로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북위 명문에서 종종 확인되는 사례이다.

25) 불비상에서 확인되는 공양자의 인명과 관련된 제작배경에 관해서는 倉本尚徳, 『北朝仏教造像銘研究』 (法藏館, 2016), p. 73 참조.

26) 久野美樹, 「造像背景としての生天, 託生西方願望-中国南北朝期を中心として」, 『佛敎藝術』 187 (1989), pp. 25-59; 강희정, 「중국 남북조시대 ‘생천(生天)’ 원망(願望)금동불에 보이는 ‘천(天)’의 개념」, 『미술사와 시각문화』(2003); 김진숙, 「고대 중국 불상 조상기와 정토신앙」 『불교연구』 43 (2015), pp. 137-173 참조.

27) 곡양 수덕사지 출토상에 관해서는 楊伯達著, 松原三郎訳·解題, 『埋もれた中国石仏の研究 : 河北省曲陽出土の白玉像と編年銘文』 (東京美術, 1985); 馮賀軍, 『曲陽白石造像研究』 (紫禁城出版社, 2005); 胡国強主编, 故宫博物院编, 『曲阳造像-你应该知道的200件』 (紫禁城出版社, 2009); 故宮博物院编, 『河北曲阳修徳寺遗址出土佛教造像』 (紫禁城出版社, 2011); 李靜杰·田軍編著, 『定州白石佛像』 (覺風佛教藝術文化基金會, 2019) 등 참조.

28) 태자사유에 관한 경전상의 근거는 『過去現在因果經』 卷第二 중에 “太子今在閻浮樹下. 時王即便與諸群臣, 往彼樹所, 未至之間, 遙見太子端坐思惟” (T.3, No. 189, p. 629a)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修行本起經』 등 석가모니의 일생을 기술한 경전에서는 “今在閻浮樹下, 一心禪定”(T.3, No. 184, p. 467b) 즉 염부수하에서 선정에 들어간다고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염부수하에서 태자가 사유하는 도상은 이후 여러 경로에서 반가사유상으로 정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宮治昭, 「半跏思惟像を読み解く―アジア的視点からみた菩薩信仰の一断面―」, 『日本仏教綜合研究』 16 (日本仏教綜合研究学会, 2018), pp. 1-28이 참조된다.

29) 현재 ‘龍樹思惟像’의 명문이 확인되는 예는 東魏 武定5년(547) 豊樂七帝二寺邑義人等造白玉龍樹思惟像(河北定縣民衆敎育館 소장, 京都大學人文科學硏究所 考古資料 14-015)과 北齊 天保 10년(559) 백대리석상(東京國立博物館)이 확인된다. 다만 모두 대좌만 남아있기 때문에 주존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지만, 명문상 주존은 사유상이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외 수덕사지에서 출토된 龍樹思惟像은 총 3구로 북제 天保3년(552)명상(李靜杰·田軍編著, 앞의 책, 圖162)과 天保6년(555)명상(李靜杰·田軍編著, 앞의 책, 圖200)의 경우 부분적으로 파손이 되기는 했지만 주존이 반가사유상으로 확인되며, 天保9년명상(李靜杰·田軍編著, 앞의 책, 圖238)은 반가사유상의 하반신과 대좌만 확인된다. 이 외에 ‘龍樹坐像’의 명문도 확인되는데, 이 경우 주존은 교각보살상(天保9년명)이다. 본고에서는 지면상 龍樹思惟에 관해 미륵여부의 해석이나 제작배경에 대해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못했지만, 추후 별고를 통해 논의하고자 한다.

30) 馮賀軍, 앞의 책, p. 83, 표 13참조. 곡양 수덕사지 출토상 중에서 太子思惟의 명문은 동위~수대에 각 1구씩 총 3구이며 龍樹思惟는 북제에서만 3구가 확인된다. 이에 반해 思惟銘은 동위:4, 북제:10, 수:7, 총 21구로 다수 확인된다.

31) 대표적으로 水野淸一는 반가사유상이 도상의 성립기부터 마지막까지 태자사유상으로 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水野淸一, 『中国の佛敎美術』 (平凡社, 1968), p. 248.

32) 선행연구 중 미륵보살이나 도솔천상의 석가보살의 협시로 등장하는 사유형 보살상이 보살 일반의 존격으로서 주존의 설법을 듣는 청중의 성격을 갖는 보살로 표현되었을 가능성이 높지만 그 배경에 관해서는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어렵다고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제작배경에 관해서는 미제로 남겨두었다. 윤용진, 『중국남북조시대의 사유형 보살상 도상 연구-존명을 중심으로』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05), p. 26. 한편 고혜련의 경우에는 반가사유상을 “수행자상”이라 하였는데 이는 석가여래의 일생에서 여래가 되기 이전의 수행하는 태자상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필자와는 견해를 달리한다. 고혜련, 「북위 사유상 도상」, 『中國史硏究』 72 (2011), p. 33; 同著, 『미륵과 도솔천의 도상학』 (일조각, 2011) 참조. 그리고 하북지방과 가까운 산동지방의 북제 반가사유상에 관한 검토를 통해 명문분석과 제작배경을 고찰한 논고가 참조된다. 산동지역은 한반도와도 밀접한 관련성을 보이는 지역이므로 향후 한반도에 있어서 반가사유상의 전개를 고려할 때 중요한 자료이다. 양은경, 「中國 山東省 出土 東魏∼北齊代 半跏思惟像에 대한 硏究」, 『강좌미술사』 38 (2012), pp. 285-308.

Fig. 1.
<교각보살상과 찬탄자의 부조> Seated Bodhisattva with crossed Ankles and Heavenly Multitude images Relief, 2nd~3rd century, Kapisa, Private collection Europe (Kurita, Isao. Gandhāran art II. The world of the Buddha, 1990, p.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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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도솔천 설법도 부조> Preaching of Tuṣita Heaven Relief, 2nd~3rd century, Shotorak,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Tanabe, Katsumi and kousaku maeda, eds. Sekai Bijutsu Daizenshu Touyouhen dai 15 kan Chuo Ajia, Shogakukan, 1999. p. 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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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도솔천 설법도·대신변도 부조> Preaching of Tuṣita Heaven and Buddha of the Great Miracle Relief, 3rd century, Lahore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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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키질석굴 제38굴 도솔천 설법도> Preaching of Tuṣita Heaven, the main chamber of Cave 38, Kizil, Xinjiang Uighur Autonomous Region (Xinjiangweiwuerzuzhiqu Wenwuguanliweiyuanhui, Baichengxian Keziqianfodong Wenwubaoguansuo, ed. Chugoku Sekkutsu Kijiru Sekkutsu1, Heibonsha, Bunbutsu shuppansha, 1983, pl.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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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키질석굴 제38굴 반가사유상>(왼쪽) Pensive Image(Left), Front wall of Cave 38. Kiz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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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키질석굴 제38굴 반가사유상>(오른쪽) Pensive Image(Right), Front wall of Cave 38. Kiz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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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키질석굴 제17굴 도솔천 설법도> Preaching of Tuṣita Heaven, the main chamber of Cave 17, Kizil, Xinjiang Uighur Autonomous Region (Wenjie Duan, ed. Zhongguo Meishu Fenlei Quanji: Zhongguo Xinjiang Bihua Quanji 2 kezier, Tianjin Renmin Meishu chubanshe, 1995, pp. 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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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키질석굴 제38굴의 구조와 도솔천 설법도> Plan of Kizil Cave 38 and the Preaching of Tuṣita Heaven (Diagram by the author based on Chugoku Sekkutsu Kijiru Sekkutsu1, 1983, p. 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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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돈황석굴 제275굴 전경> General view of the mam wall of cave 275, Mogao caves, Dunhung, Northern Liang (Dunhuangyanjiuyuan, Caves 266-275 of Mogao Grottoes The Dunhuang Caves I-2, 2011, p. 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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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돈황석굴 제275굴 구조와 반 가사유상의 위치> Plan of Cave 275 and location of the Pensive Image, Mogao-caves, Dunhung, Northern Liang (Tonko Bumbutsu Kenkyujo, Chugoku Sekkutsu Tonko Bakokutsu 1, Heibonsha, Bunbutsu Shuppansha, 1980, p. 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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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돈황석굴 제275굴 북벽 반가 사유상> North wall of Pensive Image, in 275 Cave (Dunhuangyanjiuyuan, Caves 266-275 of Mogao Grottoes The Dunhuang Caves I-2, 2011, p. 6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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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돈황석굴 제275굴 남벽 반가 사유상> South wall of Pensive Image, in 275 Cave (Dunhuangyanjiuyuan, Caves 266-275 of Mogao Grottoes The Dunhuang Caves I-2, 2011, p. 6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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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돈황석굴 제275굴 도솔천 설법도 이미지> Image of Preaching of Tuṣita Heaven, in 275 cave main wall, Mogao-caves, Dunhung, Northern Liang (Diagram by the author based on the Dunhuangyanjiuyuan, Caves 266-275 of Mogao Grottoes The Dunhuang Caves I-2, 2011, p. 153, Buddhist Monk image from http://www.kocca.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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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운강석굴 제17굴 惠定 불감> Niche of Huiding, cave 17, Yungang caves, Northern Wei, dated 489, Datong, Shanxi. (Zhang, Zhuo, ed. Yungang Shiku Quanji 14, Qingdaochubanshe, 2017, pl. 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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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운강석굴 제16굴 남벽 동쪽 교각 보살감의 도솔천궁 묘사> Niche Maitreya Bodhisattva preaching, south-east wall of Cave 16, Yungang Grottoes, Northern Wei, 5th century (Zhang, Zhuo, ed. Yungang Shiku Quanji 13, Qingdaochubanshe, 2017, pl. 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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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용문석굴 고양동 북벽 제156감> Niche Maitreya Bodhisattva preaching, Guyangdong, North wall, Niche no. 156, Longmen Caves, Luoyang, Henan, Northern Wei (Liu Jing Long, Guyang cave : Cave 14 43 of LongmenGgrottoes, 2001, p.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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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용문석굴 고양동 태화 22년(498)명 北海王元詳龕> Niche Maitreya Bodhisattva preaching, Guyangdong, North wall, Longmen Caves, Luoyang, Henan, Northern Wei, dated 498 (Liu Jing Long, Guyang cave : Cave 14 43 of LongmenGgrottoes, 2001, 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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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여래삼존상> (정면) Buddha Triad, (front), Late Northern Wei, Osaka City Museum of Fine Arts (Saito, Ryuichi. Chinese Sculpture Osaka City Museum of Fine Arts Yamaguchi Collection, 2013, p. 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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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여래삼존상> (후면) Buddha Triad, (back), Late Northern Wei, Osaka City Museum of Fine Arts (Saito, Ryuichi. Chinese Sculpture Osaka City Museum of Fine Arts Yamaguchi Collection, 2013,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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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여래삼존상> (후면 부분) Buddha triad, back detail (Saito, Ryuichi. Chinese Sculpture Osaka City Museum of Fine Arts Yamaguchi Collection, 2013, p. 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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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Maitreya Preaching in Tuṣita Heaven in Kizil Caves
Cave Number Structure Location Parinirvāṇa Scene Mural style Posture of Maitreya Bodhisattva. Mudra Composition Heavenly Multitude Pensive pose Tuṣita Heaven
14 square front area wall × 2 crossed ankles unknown semicircle R:1
17 with a central Pillar 2 R:abhayamudra R:5, L:5
L: kundika
27 × 2 unknown unknown trapezoid L:8
38 2 crossed ankles dharmacakra mudra semicircle R:4, L:4 left and right symmetry
76 square under the vault unknown 1 v-shape R:2, L:2
77 with a central Pillar the upper leftand right walls of the corridor 1 unknown rectangle R:4, L:4
80 front area wall 2 unknown semicircle R:4
92 square × 2 crossed ankles dharmacakra mudra R:7, L:7
110 2 hells joined together R:4, L:4 main room left wall
171 with a central Pillar 2 R: abhayamudra R:5, L:5
L: kundika
179 2 crossed ankles Dharmacakra Mudra L:1
196 2 unknown R: abhayamudra R:5
L: unknown
224 2 crossed ankles R: abhayamudra R:4, L:4
L: kundika

* 〈Table 1〉 was reorganized by Seo Nam-young to fit the contents of this paper based on p.35 among Kang Min-jung’s master’s papers. As for the Mural style(1~3) by Su, Bai, “Kijirusekkutsu no Keishiki Kubunto sono Nendai.”Chugoku Sekkutsu Kijiru Sekkutsu1, Heibonsha, Bunbutsu shuppansha, 1983, pp. 162-1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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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佛說彌勒下生經』 (『下生經』) (T.14, No.453).

『佛說彌勒下生成佛經』 (T.14, No.454).

『佛說彌勒下生成佛經』 (T.14, No.455).

『佛說彌勒大成佛經』 (T.14, No.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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