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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6; 2022 > Article
常州畫派의 전개와 惲壽平(1633~1690)의 花卉畫*

Abstract

惲壽平(1633~1690)은 淸代 初期 正統主義 화가 중 한 사람으로 南宗畫風의 山水畫로 회화에 입문하였으나 이후 沒骨設彩法을 구사한 花卉畫로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明末淸初를 살았던 惲壽平은 常州의 문인집안에서 태어나 일찍이 학문에 재능을 보였으나, 혼란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抗淸運動에 참여하였다. 항전 중에는 淸軍의 포로가 되기도 하였으며, 우연한 계기로 헤어진 친부 惲日初를 만나 함께 常州로 돌아오는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惲壽平의 고향인 常州는 일찍이 花卉草蟲畫가 유행한 지역으로, 宋代부터 활동한 常州畫派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훼와 초충을 즐겨 그렸으며, 실제와 유사하게 대상을 표현하였다. 이러한 寫生의 전통은 惲壽平에게까지 이어졌는데, 대부분 工筆을 구사했던 이전의 화가들과 달리 徐熙와 徐崇嗣로 대표되는 沒骨設彩法에 관심을 가지면서 17세기에 걸맞은 문인화풍의 花卉畫를 그려냈다. 그는 1670년대부터 花卉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으며, 寫生과 沒骨設彩法을 바탕으로 宋~明代 화가들의 다양한 화풍을 습득하였다.惲壽平은 이전까지 화원화가들의 전유물로 생각되었던 花卉畫를 문인화가들이 관심을 가지고 그릴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그의 화풍은 18세기 惲氏家門의 화가들뿐만 아니라 궁정화원과 揚州八怪를 거쳐 근대의 화가들에게까지 큰 영향을 미쳤으며, 조선에도 소개되면서 花卉畫史에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Abstract

Yun Shouping 惲壽平 (1633-1690) was one of the Early Qing orthodox masters. He embarked on his artistic career by painting landscapes in the Southern School style, but later gained his reputation for flower paintings in the “boneless” (mogu 沒骨) coloring method, a technique that does not leave traces of outlines on the pictorial surface.
Living in the late Ming and early Qing period, Yun trod on an eventful trajectory of life. He was born to a family of literati and exhibited an aptitude for scholarly exercises during his childhood. As a Ming royalist, he was arrested for his activities against the Manchu rule. During his engagement in the resistance, he was accidentally reunited with his father, Yun Richu 惲日初, with whom he returned home together.
Changzhou, Yun’s hometown, was a region that was particularly known for paintings of flowers and insects. Active since the Song period (960-1279), the Changzhou school developed a style of painting that achieved a lifelike verisimilitude of ordinary flowers and insects. Against this regional backdrop of the vivid and lifelike painting tradition, Yun applied the boneless coloring method to the genre of flower painting. This boneless coloring method allowed Yun’s flower painting to depart significantly from prior generations of Changzhou flower painters whose work relied on meticulous fine brushwork (gongbi 工筆). Yun began his study of flower painting from 1670s, acquired various techniques and styles of painters active from the Song through the Ming periods, and took the genre of flower painting to a level of literati painting.
Prior to Yun, flowers were regarded as a pictorial subject reserved exclusively for academy painters. Yun overturned that perception, charting a new territory of artistic exploration for scholar-painters. His style exerted a far-reaching influence over diverse hosts of painters encompassing not only the Yun clan painters, but also court painters, the Eight Eccentrics of Yangzhou, and even modernists. He also left indelible impacts on the history of Korean flower painting since his work came to be circulated in Chosŏn.

Ⅰ. 머리말

惲壽平(1633~1690)은 淸代 初期 四王吳惲으로 불렸던 正統主義 畫派의 화가로, 山水畫로 회화에 입문하였으나 후에 沒骨設彩法을 사용한 花卉畫를 그리면서 淸代의 대표적인 花卉畫家로 이름을 알린 인물이다. 惲壽平이 태어난 江蘇省 常州는 宋代 이래로 ‘常州畫派’라 불린 花卉草蟲畫의 전통을 지닌 지역으로, 惲壽平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이를 17세기의 미감에 맞게 변용하여 18세기 揚州八怪는 물론 근대 海上畵派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으니, 그의 회화사적 중요성은 자못 크다 할 수 있다.
惲壽平은 明代 末期 常州의 문인가문에서 태어났으나, 혼란으로 점철된 明末淸初라는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가족들과 抗淸運動에 참여하였다. 淸軍과의 항전 중 포로가 된 惲壽平은 淸 總督의 눈에 들어 양자가 되기도 했으며, 우연히 승려가 된 친부를 다시 만나 常州로 돌아오는 등 극적인 삶을 살기도 하였다.
惲壽平에 대한 본격적 연구는 1970년대 홍콩과 대만에서 먼저 시작됐으며, 문인화가 폄하되었던 중국에서는 1980년대가 되어서야 연구가 본격화되었다.1 1983년에 惲壽平 탄신 350주년을 기념해 常州에 惲壽平記念館이 건립된 것을 시작으로, 그의 작품이 전시된 전시로는 2011년 常州博物館에서 열린 <館藏名家花鳥畫精品展>과 2019년 北京故宮博物院에서 개최된 <萬紫千紅- 中國古代花木題材文物特展>을 꼽을 수 있다.2 중국과 대만에서는 초기에 惲壽平의 생애부터 화풍까지 종합적인 연구를 시행하였으며, 최근에는 미시적인 관점에서 惲壽平의 생애와 화풍뿐만 아니라 그에게 영향을 받은 화가들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국내 학계에서는 惲壽平 화풍의 영향을 받은 조선시대 화가들에 대한 연구가 지속적으로 진행되고 있으나, 惲壽平이 花卉畫를 그리게 된 배경과 그의 작품에 관한 시기별 분석은 부족한 편이다.3 또한 중국이나 대만 내에서도 惲壽平의 작품은 기법이나 주제 등을 통한 분석이 주를 이루기 때문에 시기별로 보이는 그의 花卉畫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사료된다.
본 연구에서는 惲壽平의 생애와 더불어 그의 주된 화목이었던 花卉畫를 중점적으로 고찰하고자 한다. 惲壽平의 작품 분석에 앞서 宋代 이래의 常州畫派의 흐름을 요약적으로 살펴 본 후, 그의 花卉畫를 寫生과 沒骨設彩法에 관한 심도 있는 연구를 진행한 1670년대와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宋~明代 화가들의 다양한 화풍을 수용하며 본인만의 풍격을 형성한 1680년대 두 시기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Ⅱ. 惲壽平의 생애

惲壽平은 江蘇省 常州 출신으로, 삼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本名은 格이며, 字는 惟大, 壽平이었으나, 1660년대 초에 正叔으로 변경하였다. 號는 南田, 南田草衣生, 東園, 東園生, 東園外史, 園客, 橫山樵, 白雲外史, 白雲溪外史, 甌香散人 등이 있다.4
常州의 惲氏家門은 대대로 복고주의를 지향하던 집안이었다. 증조부인 惲紹芳(1528~1579)은 “文은 반드시 西漢, 詩는 반드시 盛唐을 본떠야 한다.”라 주장한 後七子와 교류했으며, 부친 惲日初(1612~1678)는 國子監生으로 北京에 머물며 문학적 결사 단체인 復社에 참여하였다. 이러한 집안에서 자란 惲壽平에 대하여 18세기 초에 활동한 惲鶴生은 「南田先生家傳」에 “惲壽平이 부친에게 글을 배우자 곧바로 解義가 가능했다.”고 하며 그가 학문에 뛰어났다고 기록하였다.5 이렇듯 惲壽平은 일찍이 문인으로서 자질을 보였으나 1643년경에 일어난 淸의 침입으로 인해 부친을 따라 天台山에 은거했으며, 이후 抗淸運動에 참여하였다.6
1645년 경 惲壽平은 가족들과 福建省 建寧에서 활동하는 王祈의 군대에 들어가 다수의 전쟁에 참여하였다. 하지만 1648년에 일어난 전쟁에서 王祈가 사망한 뒤 惲日初가 이어서 군대를 이끌고자 했으나 결국 와해되었다. 당시 함께 참전했던 장남 惲禎은 전쟁 중 사망하였으며, 차남 惲桓과 惲壽平은 각각 淸軍의 포로가 되었다.
포로가 된 惲壽平은 힘든 생활을 견디기 위해 시를 짓거나 그림을 그렸다. 그의 그림은 浙閩總督 陳錦(?~1652) 妻의 눈에 들었으며, 이후 惲壽平에게 관심을 가진 이들 부부는 1649년에 그를 양자로 입적한다. 1652년 陳錦이 자객에게 살해되자 그의 妻는 惲壽平과 함께 북방으로 갈 계획을 세웠으며, 이동 중에 杭州 靈隱寺를 방문하였다. 당시 이 사찰에는 전쟁 중에 헤어진 惲日初가 은거하고 있었는데, 靈隱寺 寺主 諦暉의 도움으로 惲壽平이 절에 남게 되면서 두 사람은 재회하였다.7
惲壽平과 惲日初는 1654년에 다시 고향인 常州로 돌아왔으며, 이후 백부인 惲向(1585~1655)과 교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惲向은 1606년에 국자감에 들어가 약 30년 동안 수도에서 지내다 1644년에 常州로 돌아와 화가가 된 인물이다. 惲向은 董源과 黃公望(1269~1354), 倪瓚(1301~1374)의 화풍을 따랐는데, 惲壽平의 『甌香館集』에는 그가 董源에 대해 평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香山翁(惲向)은 “北苑(董源)의 禿鋒에 대해 나는 심히 놀라고도 남음이 있다. 이는 수탉이 춤추는 것과 같은 기세가 있으며, 보는 사람의 두 눈동자를 똑바로 비추니 내가 그 장소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라 했다. …… 香山翁은 北苑에 대해 조예가 깊은 사람이나 다만 필치가 지나치게 강해 昔人의 韻을 상하게 하는 실수를 면하지 못했다.8
위의 글을 통해 惲壽平은 惲向이 董源에 대한 이해도가 높았던 것을 알고 있었으며, 또한 惲向의 필법이 가진 단점도 파악했던 것을 확인할 수 있다.
抗淸運動 이후 惲壽平의 집안은 가세가 크게 기울었기 때문에 그는 생계를 부양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림을 매매하기도 하였다.9 淸代 中期에 활동한 문인화가 張庚(1685~1760)은 惲壽平이 그림을 매매한 것에 대해 “正叔(惲壽平)은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면 한 달이 걸려도 그림을 그렸으나 그렇지 않으면 백금을 보고도 하찮은 것이라 여겨 꽃 한 송이, 잎 하나도 팔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는데, 이는 惲壽平이 어려운 상황이었으나 문인적인 면모를 잊지 않으려 했음을 알 수 있다.10 또한 惲壽平이 본명인 ‘格’ 대신 ‘壽平’을 사용하게 된 것 역시 그림과 관련되어 있는데, 이는 上海博物館 소장 惲壽平 《詩稿冊》에 唐宇肩(1648~1718)이 쓴 글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어렸을 적 遜庵惲先生(惲日初)를 만나러 갔는데, 正叔이 옆에서 모시고 있었다. 時는 正叔 …… 이름은 格, 字는 惟大이다. 辛醜年(1661) 겨울 …… 그때 字를 正叔으로 고치고 款書는 壽平, 簡劄에는 원명인 格을 썼는데, ‘天壽平格’에서 의의를 취했다.11
이 글을 통해 惲壽平이 이름을 바꾼 시기는 1661년경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惲壽平이 簡劄에는 여전히 본명인 ‘格’으로 기록하고, 款書에는 바꾼 이름인 ‘壽平’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이는 개명한 이름이 화가로 활동하기 위한 필명이었을 것으로도 추측할 수 있다.
惲壽平은 1660년대 중반부터 杭州에서 毛稚黃(1620~1688), 袁於令(1592~1672)을 비롯한 여러 인사들과 교류했으며, 주로 莫雲卿(?~?)의 거처인 東園高雲에서 머물렀다. 이 시기부터 惲壽平이 제작한 작품에는 東園, 東園客, 東園生, 東園草衣生 등 “東園”과 관련된 號가 자주 등장하는데, 이는 莫雲卿이 그의 후원자일 가능성을 보여준다.12
이렇듯 惲壽平은 당시 여러 사람들과 교류하였으며, 그중에서도 王翬(1632~1717), 唐宇昭(1602~1672)와 친분이 두터웠다. 王翬는 惲壽平과 함께 正統主義 화가라 일컬어지는 인물로, 두 사람의 친분은 1655년에 <摹雲林漁莊秋霽圖>를 합작했다는 기록이 있어 오랜 기간 알고 지냈던 것으로 보인다.13 王翬는 山水畫에서 탁월한 기량을 발휘한 화가로 惲壽平 역시 초기에는 南宗畫風의 山水畫를 즐겨 그렸다. 그러나 1670년대 이후부터 花卉畫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는데, 그 연유에 대해 張庚은 “惲壽平이 王翬의 山水畫를 본 이후 자신은 그를 따라가지 못한다고 평가하면서 花卉로 눈을 돌렸다.”라고 『國朝畫徵錄』에 기록하였다.14
또 다른 친우는 常州의 수장가이자 서화가인 唐宇昭(1602~1672)이다. 惲壽平의 「南田畫跋」에는 “石穀子(王翬)가 毘陵(常州)에 있으면서 筆墨之契에 걸맞은 이는 오직 半園 唐先生(唐宇昭)과 南田이다. ……”라 기록되어 있어 세 사람의 친분이 두터웠음을 알 수 있다.15 唐氏家門은 惲氏家門과 함께 常州의 대표적인 문인집안이었기 때문에 교류가 활발하였으며, 惲壽平과 唐宇昭도 일찍부터 친분이 있었다. 唐宇昭는 趙孟頫(1254~1322), 倪瓚, 董其昌(1555~1636) 등의 고서화를 수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惲壽平과 王翬는 그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다.
惲壽平은 唐宇昭의 아들인 唐宇光(1626~1690)과도 상당한 친분이 있었다. 唐宇光과 惲壽平은 함께 花卉畫에 대해 연구했는데, 특히 沒骨設彩法과 寫生에 관심을 가졌다. 두 사람이 1671년에 합작한 <紅蓮綠藻圖>에 기록된 惲壽平의 제발에 따르면 “沒骨法은 자연과 조화를 이뤄야 그릴 수 있는데, 본디 徐崇嗣를 꼽았으나 오늘날에는 唐宇光이다.”라 하여, 몰골은 익히기 어려우나 오늘날 唐宇光이 높은 경지에 도달했음을 밝혔다.16
1670년부터 1675년까지 惲壽平은 王翬, 笪重光(1623~1692), 楊晉(1644~1728) 등과 함께 鎮江, 常熟, 宜興, 杭州, 蘇州, 南京 등지를 유람했으며, 대부분의 시간은 常州에 머무르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17 또한 그는 1675년부터 약 일 년 동안 揚州에 머물며 程邃(1605~1691), 孫默(1613~1678), 査士標(1615~1698), 汪懋麟(1639~1688), 禹之鼎(1647~1716) 등과 친분을 나눴는데, 이들은 惲壽平의 작품 제작과 매매에 도움을 주기도 하였다.18
1678년 惲日初가 세상을 떠나자 惲壽平은 약 2년간 상을 치렀으며, 1680년에는 王時敏(1592~1680)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王翬와 함께 江蘇省 太倉으로 향한다. 惲壽平과 王時敏이 실제로 대면한 적은 이때가 처음이었는데, 王翬가 王時敏과 王鑑의 문하생으로 있으면서 正統畫派 화가들과 교류했던 것과 달리 惲壽平은 王翬를 통해 이들과 서신이나 그림을 주고받으며 제한된 교제를 맺었다. 惲壽平이 王時敏에게 보낸 서신에는 그와 만날 날을 기다린다고 밝혔다.
서신을 千尺이나 적으면서 한 글자 한 글자마다 王太常(王時敏)을 잊지 않았다. 그리워하는 마음이 동쪽을 향하는데 海雲은 하늘가에 떠서 바라만 본다.19
王時敏 또한 “나는 그와 친분을 맺기를 원하며 여러 해 교유하기를 바랐으나, 그의 행방이 묘연하여 벌어진 사이가 말년까지 계속되었다.”라 하여, 惲壽平과 일찍부터 교류하길 원했던 것으로 보인다.20
1683년에는 常州 남부에 위치한 白雲으로 이사해 ‘甌香館’이란 화실을 짓고 본격적으로 花卉畫를 제작하였다.21 이 시기에 태어난 아들이 1년 만에 천연두에 걸려 사망하자 杭州와 虞山 등지를 떠돌았으며, 1686년에 아들 念祖가 태어나고 나서야 충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2
1689년 겨울 惲壽平은 가족들과 함께 杭州로 이주하고, 惲日初의 묘지를 새로 단장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는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杭州를 방문했는데, 1690년 초에 그가 집으로 보낸 서신에는 당시 상황이 잘 나타난다.
杭州에서 벌써 좋은 땅을 찾았는데, 두 곳이 있다. 땅값을 마련할 방법을 찾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李且翁이 나를 위해 부담해주기로 했다. 그 값이 百金보다 많아, 준비한 여러 筆墨을 전부 다 팔아야 비로소 일이 진척될 수 있겠다. 기쁜 것은 인정이 매우 좋고 좋아하는 자가 많으니, 급하게 준비하면 안정적으로 이룰 수 있을 것 같다. 다만 유감스러운 것은 현재 도와줄 사람이 없고, 병에 걸린 상태여서 아침저녁으로 약을 복용해야하기 때문에 모든 일에 응답하기가 매우 어렵다. …… 2월 초에 杭州로 이주할 준비한다.23
이렇듯 말년에 惲壽平은 杭州에서 이사할 땅을 찾고 친우의 도움과 그림을 판매하여 자금도 어느 정도 모았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抗淸運動 때 얻었던 지병이 악화되면서 이사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1690년 常州의 거처에서 타계하였다. 당시 아들은 너무 어렸고 집안은 喪을 치르기 힘들 정도로 궁핍했기 때문에 王翬와 여러 친우들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었다.24
이렇듯 惲壽平은 일찍이 복고주의적인 집안 가풍과 王翬, 唐宇昭 등 그와 교류했던 인물들을 통해 옛 화가들의 명작들을 두루 섭렵하면서 일찍이 南宗畫風의 山水畫를 즐겨 그렸으나 1670년경부터 唐宇光과 함께 花卉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다. 그가 花卉畫를 연구하게 된 연유로는 張庚이 밝힌 바와 같이 그의 山水畫가 王翬의 것에 미치지 못했던 것도 있겠으나, 당시 花卉草蟲畫가 유행했던 常州畫壇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Ⅲ. 淸代 이전 常州畫派의 화풍과 惲壽平

惲壽平은 일찍이 산수, 화훼, 영모, 어조 등 다양한 주제를 그렸는데, 그중에서도 그의 주요 畫目은 단연 화훼였다. 그가 화훼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는 그의 고향인 常州에서 일찍부터 제작되어온 花卉草蟲畫의 영향도 있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常州는 揚子江 하류에 위치해 예부터 온화하고 화창한 기후를 지녀 다양한 동식물들이 번성하던 지역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 때문에 常州의 화가들은 그 지역에서 자생하는 화훼나 초충을 즐겨 그렸으며, 南宋代 시인이자 常州太守를 지낸 楊萬裏(1127~1206)가 “常州의 草蟲은 천하에 진기하다.”라 극찬할 정도로 유명하였다.25
常州 花卉草蟲畫의 시작은 北宋代에 활동한 화가 居寧으로, 진적이 남아있지 않아 화풍을 확인하기 어려우나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郭若虛의 『圖畫見聞志』에서 대략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승려 居寧 …… 풀과 벌레를 정교하게 잘 그려 명성이 매우 높았다. (그가 그린) 水墨草蟲을 보았는데 …… 화제에 적혀 있기를 “거연이 취해서 쓴 필적이 비록 대체를 손상시키고 제 모습을 잃었지만 필력이 힘차고 뛰어나 드물게 기이하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 호사가들이 부채 하나를 얻을 때마다 보물로 여겼다.26
이러한 居寧의 화풍은 이후 常州에서 花卉草蟲畫를 그리던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대표적으로 南宋代에 활동한 許迪이 있다.27 그의 <野蔬草蟲圖>는 배추와 나비, 잠자리, 메뚜기를 주제로 한 작품으로, 화면을 네 구역으로 나누어 각각의 대상을 배치하였다(Fig. 1). 배추는 잎맥까지 세세하게 그리고 주변에 보이는 곤충은 실제와 유사하게 나타냈는데, 이렇게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은 常州에서 제작된 花卉草蟲畫의 주요한 특징이 되었다.28
許迪과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於子明은 荷花圖에 일가견 있는 화가였다. 그가 그린 <蓮池水禽圖>는 각기 다른 형태로 피어있는 다섯 송이의 연꽃과 하단에 오리와 물고기를 배치한 작품이다(Fig. 2). 연꽃은 끝부분으로 갈수록 진한 붉은색을 띠고 있으며, 바람에 흩날리듯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당시 강남을 중심으로 한 남방지역에서는 연화를 재배하고 감상하는 풍조가 형성되었는데, 이러한 현상을 따라 常州를 위시한 강남지역 화가들은 연꽃과 물고기, 새를 함께 나타낸 蓮池水禽圖를 즐겨 그렸다.29
이렇듯 宋代부터 시작된 常州의 花卉草蟲畫는 明代까지 지속적으로 그려져 왔다. 14세기에 활동한 常州 출신 화가 呂敬甫는 徐熙와 方君瑞 등에 영향을 받았으며, 居寧의 작품을 모방한 草蟲圖를 그린 인물이다.30 그가 제작한 <瓜蟲圖>는 화면 가운데 수박을 그리고 주변에 나비와 잠자리, 메뚜기 등을 배치한 작품이다(Fig. 3). 呂敬甫 또한 앞선 常州의 화가들처럼 대상을 사실적인 형태로 표현하려 하였으나 필선의 사용이 훨씬 간략해진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대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常州의 花卉草蟲畫는 日本에 소개되기도 하였는데, 日本에서는 이 작품들을 “紅白川”이라 부르며 애호하였다.31
이렇듯 常州에서 花卉草蟲畫를 그리던 화가들은 宋代부터 이어져온 화풍을 따르면서도 자신만의 풍격을 가미하려 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변화를 나타낸 인물은 宣德年間(1425~1435)에 활동한 孫隆이다. 明末淸初에 활동한 徐沁(1626~1683)의 『明畫錄』에는 孫隆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孫隆, …… 어릴 적부터 재능이 남달랐으며, 선인과 같은 풍격을 지녔다. 영모와 초충을 그리면 전부 색채의 渲染이라 徐崇嗣와 趙昌의 沒骨圖法을 얻었으며, 生趣가 있다.32
위의 기록에 따르면, 孫隆은 宋代부터 常州에서 유행했던 화풍이 아닌 徐崇嗣와 趙昌에게 영향받은 沒骨畫風에 관심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그가 제작한 <芙蓉遊鵝圖>는 강남 춘월강 둔치의 모습을 그린 작품으로, 거위는 세필을 사용해 사실적으로 나타낸 반면에 부용꽃과 바위는 간결하고 사의적으로 표현하였다(Fig. 4). 孫隆은 明代 宮廷花卉畫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으면서도 문인화가 가진 정취를 강조한 독특한 형식을 구사하였으나, 그의 화풍은 당대 常州에서 활동한 다른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후대의 화가인 惲壽平이 본인의 작품에 남긴 제발에서 “근래의 화가들이 대부분 黃筌의 화풍을 따른다.”고 밝힌 바가 있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묘사했던 常州의 화가들에게 沒骨을 사용해 간결하게 표현하는 孫隆의 화풍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으로 사료된다.33
惲壽平은 주로 常州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이러한 작품들을 자주 접했을 것으로 보이며, 그가 花卉畫에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 중 하나로 사료된다. 惲壽平은 본인만의 정원을 가꾸면서 각각의 화훼가 가진 형태나 특징, 색을 정확히 연구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이는 앞선 宋代부터 시작된 常州 花卉草蟲畫의 전통에서 한 단계 나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常州에서 유행하던 工筆畫風을 그대로 구사하기보다는 明代 孫隆에 의해 그려졌던 沒骨을 다시 연구하였다. 惲壽平과 孫隆은 徐崇嗣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潑墨에 가까운 沒骨法을 구사했던 孫隆과 달리 惲壽平은 화려한 색감을 사용해 대상의 특징을 정확히 표현하는 沒骨設彩法을 연구하였다. 이는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것이 특징인 宋~明代 常州畫派의 화풍과 문인적인 화풍을 구사하려 노력한 惲壽平의 연구가 결합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Ⅳ. 惲壽平의 花卉畫

본 장에서는 惲壽平의 花卉畫를 寫生과 沒骨設彩法을 연구하며 화풍을 익힌 1670년대와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화가들의 화풍을 수용하여 본인만의 풍격을 형성한 1680년대로 나누어 분석하고자 한다.

1. 1670년대 花卉畫

현존하는 惲壽平의 작품 중 沒骨設彩法으로 그린 가장 이른 시기의 花卉畫는 1671년 작 <紅蓮綠藻圖>이다(Fig. 5). 이 작품은 王翬의 40세 생일을 기념하여 唐宇光과 합작한 것으로, 唐宇光이 홍련을 그리고 惲壽平이 하단의 녹조를 그렸다. 끝부분을 붉게 물들인 연꽃은 각기 다른 형태로 피어있는데, 이는 南宋代 於子明의 <蓮池水禽圖>와 닮아있어 당시 宋代부터 시작된 常州의 蓮花圖가 淸代까지 이어져 내려왔음을 확인할 수 있다(Fig. 2). 여백에는 惲壽平과 唐宇光, 王時敏, 王鑑, 笪重光이 王翬의 생일 축하와 그림에 대한 찬사를 적었으며, 그중 작품 하단에 위치한 惲壽平의 제발에서 그들이 沒骨을 연구하게 된 이유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唐匹士(唐宇光)와 더불어 寫生을 깊이 생각한다. 매번 黃荃은 지나치게 工麗하고 趙昌은 刻畫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평가하였다. 徐熙는 고증할 길이 없어서 그 화법을 취하기가 어려웠기에 오직 정당한 沒骨을 구하고자 하였다. 고금의 이론을 따르고 조화를 관찰하여 장단점을 찾아내었다. 匹士가 蓮을, 나는 여러 卉草를 그렸다. 그림을 보면 나는 두 사람을 숭상한 것을 알 수 있는데 先匠과 합쳐짐이 있기를 바란다. 오래된 바위에서 증거를 찾았는데, 손가락으로만 법도를 익혀 슬프다.34
惲壽平이 느끼기에 黃荃은 아름다움이 너무 지나치며, 趙昌은 단지 형상화에 치중되어 있기 때문에 몰골을 익히기 위해 노력했다고 밝혔다. 또한 그는 이 글에서 두 사람을 숭상한다고 하였는데, 이는 앞서 언급한 徐熙와 그가 여러 작품에서 화풍을 따랐다고 밝힌 바가 있는 徐崇嗣일 것으로 사료된다.
惲壽平이 黃荃보다 徐熙를 높게 평가한 연유에는 淸初 正統畫派의 구심점인 董其昌(1555~1636)의 이론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董其昌의 『畫禪室隨筆』에는 黃荃과 徐熙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한때 西蜀 黃筌의 그림이 衆體의 妙를 겸했다고 알려져 있었다. 후에 강남의 徐熙가 나타나 水墨畫를 그리자 神氣가 솟아오르는 것과 같고, 生意를 지녔다. ……35
董其昌은 黃筌보다 徐熙의 화풍을 더 높게 보았으며, 이러한 견해에 따라 惲壽平 또한 徐熙의 풍격을 익혀 문인적인 화풍을 구사하고자 하였다.
1672년 작 《花卉山水圖合冊》은 王翬가 그린 山水畫 6葉과 惲壽平의 花卉畫 6葉으로 구성된 작품이다. 그중 第2葉 <牡丹圖>는 세 송이의 모란을 그린 작품으로, 홍색과 자색의 모란은 색채의 농도를 달리해 표현했으며, 흰 모란은 잎과 잎 사이를 어둡게 나타내었다(Fig. 6). 모란은 꽃이 가지고 있는 화려함과 호화로운 분위기 때문에 꽃 중의 왕, 부귀화로 불리면서 부귀나 번영의 상징으로 큰 인기를 구가하였다. 또한 모란은 惲壽平 花卉畫의 대표 주제 중 하나로, 그는 당시 “惲牡丹”이라 불릴 정도로 뛰어났다.36 모란 주변을 둘러싼 푸른 이파리는 잎맥까지도 채색했는데, 徐崇嗣의 작품으로 알려진 <玉堂富貴圖>와 비교해 보면 볼륨감이 훨씬 부각되어 보인다(Fig. 7). 王翬는 이 작품에 제발을 적어 牡丹圖에 대한 본인의 의견을 밝혔다.
牡丹은 저속하게 되기가 가장 쉬워 붓을 대기가 어렵다. 요즘의 화공들은 붉은색과 초록을 칠하여 天花萬蘂를 모두 한 가지 형세로 만드니 神明이 전혀 없다. 오로지 北宋의 徐熙 부자와 趙昌, 王友의 무리만이 創意가 새롭고 變態가 갖추어져 그 채색한 것이 매우 아름답고 기운이 두텁다. 모두 진부한 법칙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造化를 스승으로 삼으니 고로 傳神이라고 칭할 수 있다. 南田의 이 그림을 보면 곱고 자세하며 沒骨을 써서 變態를 얻었으니, 그는 陳淳, 陸治 및 많은 사람들을 능가할 뿐만 아니라 北宋의 諸家들을 따라 잡았다.37
王翬는 이 글에서 모란은 그리기가 어려워서 근래 좋은 그림이 등장하지 않았으나, 惲壽平이 이 그림을 통해 여러 대가들을 따라잡았다고 평가하였다.
惲壽平의 모란은 1675년 작 《山水花鳥圖冊》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화책에는 ‘乾隆御赏之宝’, ‘石渠宝笈’ 등 乾隆帝시기 궁정 소장품이란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인장이 찍혀 있으며, 모든 작품에는 乾隆帝가 쓴 제시가 있다. 그중 第2葉 <牡丹圖>는 붉은색과 흰색의 모란을 대각선 끝에 배치하고 그 사이를 푸른 잎으로 채워 색의 대비를 아름답게 나타낸 작품으로, 1672년 <牡丹圖>보다 색채의 사용이 자연스러우며 대상을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Fig. 6, 8). 惲壽平이 그린 적색과 백색 모란에 대해 18세기 감정가인 方薰(1736~1799)은 “白墨에 脂를 섞은 후 渲染으로 표현한 화법은 惲壽平이 독자적으로 구사한 것”이라 하였는데, 이는 惲壽平이 과거의 대가를 따르면서도 독창적인 방식을 창조하였단 것을 시사한다.38
또한 惲壽平은 예부터 常州畫派들이 중요시 여겼던 寫生을 연구하였다. 1673년에 제작된 《摹古圖冊》의 第9葉 <秋花圖>는 바위 주변에 도라지꽃, 전추라 등 여러 종류의 화훼가 피어있는 형상을 묘사한 작품으로, 그가 寫生을 중요시했단 것을 알 수 있다(Fig. 9).
北堂에 살면서 꽃에 물을 주고 약초를 심어 가을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시를 읊으니 眞氣가 충만하고, 온갖 것에 뜻이 존재한다. 바라건대 勝華와 道隱의 사이를 견주어 보니 답답함이 없다.39
이 글에 따르면 惲壽平은 본인만의 정원을 가꾸면서 花卉를 연구했으며, ‘勝華’와 ‘道隱’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그중 勝華는 五代 蜀에서 활동한 화가인 滕昌祐로, 寫生을 중요시한 인물이라 평가된다. 惲壽平은 『甌香館集』에서 “滕昌祐는 거처에 핀 여러 화훼들을 주제로 했는데, 본인 역시 화원인 南田을 가지고 있어 화훼마다 존재하는 색을 연구하였다.”라고 밝혔는데, 이렇게 그가 화훼를 보다 깊이 이해하기 위해 정원을 가꾼 것은 滕昌祐에게 영향을 받았단 것을 알 수 있다.40 <秋花圖>의 왼쪽 아래 붉은 꽃을 보면,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과 자연스러운 가지의 표현이 寫生을 통해 그린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寫生은 앞서 밝힌 常州에서 제작된 花卉草蟲畫의 특징이었다. 惲壽平 이전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훼나 곤충들을 화폭에 담았다면, 惲壽平은 거기에서 더 나아가 직접 정원을 가꾸면서 본격적으로 각각의 대상들이 가진 특징들을 심도 깊게 연구하였다.
寫生에 대한 惲壽平의 견해는 1677년에 제작한 《花卉圖冊》의 第11葉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Fig. 10).
寫生에는 두 가지 길이 있다. 勾花, 範葉, 細染, 細開는 黃筌의 신품이다. 필묵을 사용하지 않고 전부 오채로 물들이는 것을 沒骨이라 하는데, 徐崇嗣만이 유일하게 입성했고 일컫는다. 후대의 寫生家 중 어느 정도 글을 쓸 줄 아는 자는 모두 조상이 黃法을 따랐으니, …… 徐崇嗣의 沒骨은 알려진 바가 없었다. 鉤勒을 사용하지 않으니 …… 그 법을 정밀히 연구한 자는 드물다. …… 寫生에는 沒骨이 있는데, 이는 마치 음악에는 鍾呂가, 의상에는 黼黻이 있는 것과 같으니, …… 진정으로 繪事의 淵泉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연유를 헤아려서 沒骨을 숭상해야 한다.41
이 글에 따르면 惲壽平은 寫生의 방법으로 黃筌과 徐崇嗣의 화풍이 있다고 한다. 당시 대부분의 화가들은 黃筌의 화풍을 따랐는데, 徐崇嗣의 화풍이 鉤勒을 사용하지 않아 익히기가 어려웠기 때문으로 보았다. 하지만 회화에서 徐崇嗣를 따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沒骨을 숭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惲壽平은 1670년대에 唐宇光과 함께 花卉畫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일찍이 常州에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화훼나 초충을 주제로 그리던 화가들이 많았는데, 惲壽平 역시 이러한 寫生을 통해 그리는 것을 중요시 여겼다. 또한 그는 흔히 볼 수 있는 화훼를 연구하는 것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정원을 가꾸면서 본격적으로 화훼에 관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는 심도 있게 연구한 화훼들을 徐熙와 徐崇嗣로 대표되는 沒骨設彩法을 사용해 화폭에 그려냈는데, 이는 앞선 明代 화가 孫隆이 구사한 사의적이고 자유분방한 형태가 아닌 대상을 정확히 표현해 내는 것이었다. 그가 沒骨設彩法을 선택한 것에는 正統主義 화가들의 구심점이었던 董其昌의 이론도 영향을 미쳤으며, 常州의 문인가문 출신으로 南宗畫風의 山水畫를 그리던 惲壽平이었기 때문에 花卉畫를 그림에 있어서도 문인적인 화풍을 구사하려 하였다.

2. 1680년대 花卉畫

1670년대 寫生과 沒骨을 중심으로 花卉畫를 연구한 惲壽平은 1680년대에 들어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으며, 옛 화가들의 다양한 화법을 수용하여 본인만의 풍격으로 정립하였다. 또한 난초나 대나무 등 일찍이 문인적인 소재로 여겨져 주로 수묵으로 그려지던 주제들을 채색을 사용해 더욱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惲壽平이 1680년 王時敏을 만나기 위해 婁東에 방문했을 때 제작한 <菊花圖>는 장수와 길상적 상징인 국화를 주제로 그렸다(Fig. 11). 국화 좌측의 제발에는 “婁東客館에 머물면서 탁자 위 꽃병에 꽂힌 국화를 보고 그렸다.”라고 하여, 寫生을 한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42 1670년대에 제작된 대부분 화려한 색채를 사용한 반면, 이 시기에는 낮은 채도를 사용하며 농담이 더욱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이러한 변화는 惲壽平이 화풍이 정립되어가고 있음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 당시 그의 상황과도 연관 지어 생각해 볼 수 있다. 부친 惲日初가 1678년에 사망하고, 2년 뒤에는 正統主義 화가들의 지주인 王時敏도 세상을 떠났는데, 惲壽平의 삶과 화풍에 큰 의미를 차지하던 두 사람의 사망은 그의 화풍의 변화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사료된다.
1680년대 초에 제작된 《花卉山水圖冊》의 <竹石叢花圖>는 水墨과 淡彩를 적절히 사용해 그린 작품으로, 1673년에 제작된 <秋花圖>와 유사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Fig. 9, 12). 두 작품의 바위 표현을 비교해 보면 <秋花圖>에서는 색의 번짐을 사용하여 몰골로 형태를 표현한데 반해, <竹石叢花圖>에서는 준법을 사용해 산수화를 그리듯 표현하였다. 또한 대나무의 표현에 있어서도 대상을 간략하게 표현한 <秋花圖>와 달리 <竹石叢花圖>에서는 마디까지 사실적으로 그려 더욱 발전된 양상을 보인다. 惲壽平은 작품에 제발을 남겨 元代에 활동한 管道昇(1262~1319)의 영향을 받았다고 밝혔다.
일찍이 管夫人의 綠竹을 보았는데, 외손인 王叔明(王蒙)이 破石을 그리고 마지막으로 松雪翁(趙孟頫)이 몇 떨기의 꽃과 苔草를 채워 넣으니 三絶이라 칭하기에 충분하다. 그 모습에서 약소하게나마 뜻을 배우다.43
위의 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惲壽平은 管道昇과 趙孟頫, 王蒙이 합작한 작품을 보고 이 그림을 제작했다. 惲壽平은 이 세 명이 합작한 작품을 三絶이라 칭하며 극찬했으며, 이들이 가진 깨끗하고 청렴함을 배웠다고 언급하였다.
1680년대 중반에 제작된 <九蘭圖>는 일찍이 水墨花卉畫로 즐겨 그려지던 난을 채색으로 변형시킨 대표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Fig. 13). 이 작품의 주제는 澹遠堂의 주인이 惲壽平에게 선물한 建蘭이며, 惲壽平은 그림에 “선물 받은 난화를 집에 가져와서 보니 먼지가 소복이 쌓이긴 했으나 향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에 기뻐하여 建蘭을 그리고 답가를 적었다.”라고 기록하였다.44 본디 난은 군자의 고고한 절개와 충성심을 상징하는 문인화의 대표 소재로 趙孟堅의 <墨蘭圖>처럼 먹을 사용해 사의적으로 나타냈으며, 난꽃의 표현보다 잎 자체의 묘사를 더욱 선호하였다(Fig. 14). 하지만 惲壽平의 <九蘭圖>는 오로지 난꽃만을 나타내어 옛 화가들이 그린 墨蘭圖와 차별되며, <九蘭圖>에 보이는 갈색의 가지 위 먼지가 앉은 꽃과 그 떨어진 꽃잎의 표현은 寫生을 통해 그린 것임을 보여준다.
이렇듯 惲壽平은 화훼를 그리면서 색의 사용을 중요시 여겼는데, 이는 1685년에 제작한 <菊花圖>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그림은 황색과 자색의 국화를 그린 작품으로, 각각의 국화가 대각선상에 위치하고 그 사이를 푸른 잎으로 채운 구도는 1675년에 제작된 <牡丹圖>와 유사하다(Fig. 8, 15). 또한 이 작품은 1680년에 제작된 <菊花圖>와 비교하면 꽃잎의 표현이 훨씬 명확하게 표현되었다(Fig. 11). 惲壽平은 이 작품에 다음과 같은 제발을 남겼다.
국화에서 黃色이 가장 높으며, 紫色은 그 다음이다. 모란에서도 姚黃, 魏紫, 紅, 白諸種 순이며, 비록 花王者가 많을지라도 필히 姚魏를 높여야 한다.45
惲壽平은 이 글에서 국화는 황색과 자색 순이며 모란은 요황, 위자, 홍, 백제 순으로 중요하다고 밝혔다. 이는 惲壽平이 화훼를 그리면서 각각의 대상이 가진 색의 중요도를 생각하여 화면에 배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惲壽平은 『甌香館集』에서 화훼들이 가진 색을 자연스럽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俗人들은 그림을 논하면서 모두 設色을 쉽다고 하니, 어찌 渲染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겠는가. 그림은 著色까지 도달하면 마치 불에 수많은 달굼을 가하는 것과 같아서, 불의 세기와 시간이 조금이라도 차이가 나면 앞선 공이 모두 허사가 된다. ……46
이 글에서 惲壽平은 당시 사람들이 設色을 쉽게 생각하나 渲染을 구사하기란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이를 정확히 표현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였다.
1687년 작 <雙淸圖>는 매화와 수선을 함께 그려 두 대상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작품이다(Fig. 16). 화면의 하단에 활짝 핀 수선을 그리고 그 위에 매화나무 일부분을 배치했는데, 앞선 작품들과는 달리 필선의 사용이 많다. 惲壽平은 제발을 남겨 이 그림이 楊無咎와 趙孟堅을 따랐다고 밝혔으며, 두 사람의 필선은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고 하였다.47 王翬 또한 제발을 적어 이 작품의 제작 배경과 평을 남겼다.
매화는 逃禪老人(楊無咎)이 첫째이다. 나는 일찍이 白門(南京)에서 장권을 구입했는데, (楊無咎가) 스스로 지은 「柳梢青」 10수가 후미에 쓰여 있으니 참으로 둘도 없는 진귀한 물건이다. 南田은 이 그림으로 逃禪을 심도 있게 익혀 筆意를 얻었는데, 이른바 玉面鼠須와 같다.48
이 글에 따르면 惲壽平은 王翬가 南京에서 구입한 楊無咎의 梅花圖를 보고 매화를 배웠다고 한다. 北京故宮博物院이 소장한 楊無咎의 <四梅圖>를 보면, 후미에는「柳梢青」10수가 기록되어 있고 王翬와 惲壽平의 친우인 笪重光(1623~1692)이 쓴 拜觀記와 惲壽平의 낙관이 있어 王翬가 구매한 작품과 유사한 것으로 보인다(Fig. 17).49 <四梅圖>는 꽃이 피기 전부터 질 때까지 네 가지 상태의 매화나무를 그린 작품으로, 그중 두 번째 매화나무에서 굵은 가지가 V자 형태로 벌어지고 활짝 핀 꽃과 봉오리가 함께 있는 모습이 <雙淸圖>와 유사하다(Fig. 18). <四梅圖>가 오로지 먹을 사용하여 서예적인 필법으로 그렸다면, <雙淸圖>는 색의 농담을 통해 대상을 자연스럽게 나타냈다.
1689년에 제작된 《花鳥圖冊》 第1葉 <荷花圖>는 시들어가는 연꽃을 그린 작품이다(Fig. 19). 앞선 작품들과 달리 어두운 채도의 색을 사용했으며, “낙엽은 가을바람에 부서지고, 밤을 지내는 원앙새는 놀라서 일어난다.”란 惲壽平의 제발은 쓸쓸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킨다.50 이러한 연꽃의 표현은 같은 시기에 그린 《花卉圖冊》 第4葉 <荷花圖>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惲壽平은 대부분 가장 아름답게 핀 모습을 그렸기 때문에 위의 두 작품은 이례적인 것으로 보인다(Fig. 20). 연꽃은 강인한 생명력을 상징하기 때문에, 惲壽平이 그린 바스러진 연꽃은 극심한 생활고와 지병으로 고통 받았던 개인적인 상황과 연관되는 듯하다.
이렇듯 惲壽平은 1670년대에 花卉畫를 연구한 결과물을 바탕으로 1680년대에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는 寫生과 沒骨設彩法을 바탕으로 이전 시기에 활동한 화가들의 화풍을 두루 섭렵하면서 본인의 화풍을 정립하였다. 또한 이전부터 문인들 사이에서 수묵으로 그려지던 화훼들을 채색을 사용해 그리면서 본인만의 花卉畫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당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惲壽平 또한 이를 알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최근 들어서 많은 寫生家들이 나의 沒骨花圖를 본받으니, 매우 아름다운 풍습으로 변화하여 時目이 되었다.51
그는 『甌香館集』에 당시에 사생가들 사이에 본인이 구현한 沒骨畫가 인기가 많았으며 그의 화풍을 따르는 것이 풍습이 되었다고 기록하였는데, 이를 통해 당대 화가들 사이에서 惲壽平의 화풍이 어떤 입지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惲壽平은 기존의 화가들 사이에 잊혀갔던 沒骨設彩法을 새로이 연구하여 이후 화가들 사이에 주류적인 화풍 중 하나로 자리 잡게 하였으니 花卉畫史에 큰 업적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Ⅴ. 맺음말

본디 花卉畫는 明代 吳派에서 그린 소량의 작품을 제외하면 대부분 화원화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다. 그러나 惲壽平은 이전까지 주목받지 못했던 沒骨設彩法을 다시 연구하여 문인들이 花卉畫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惲壽平은 淸代 初期에 활동한 正統主義 화가들이 그러하듯 당시 유행하던 南宗畫風의 山水畫로 시작하였으나, 1670년경부터 花卉에 관심을 가지고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惲壽平 花卉畫의 특징은 宋代부터 시작된 常州畫派의 전통인 寫生과 徐熙와 徐崇嗣에게서 영향을 받은 沒骨設彩法이다. 惲壽平의 고향인 常州는 花卉草蟲畫가 유행한 지역으로, 宋代부터 활동한 常州의 화가들은 주변에서 자생하는 화훼와 초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였다. 惲壽平도 이에 영향을 받아 본인만의 화원을 가꾸면서 각각의 화훼가 가진 색과 특징을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하지만 이전에 활동한 常州畫派들이 대부분 工筆畫風을 선호했던 것과 달리, 惲壽平은 沒骨設彩法을 구사하였다. 그가 沒骨設彩法을 익힌 연유는 《花卉圖冊》 第11葉(1677)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그는 “寫生에는 黃筌과 徐熙의 화풍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徐熙의 화풍을 따르는 것이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하였다. 또한 正統主義 화가들의 구심점이었던 董其昌이 黃筌의 화풍보다 徐熙의 화풍을 높게 평가한 것도 그가 沒骨設彩法을 익힌 배경이라 볼 수 있겠다.
또한 惲壽平은 일찍이 문인적인 소재로 인식되어 수묵으로 그려지던 화훼들을 본인만의 풍격으로 변화시켰다. 1680년대에 제작된 <九蘭圖>는 이전까지 문인적인 주제로 수묵으로 그려지던 난을 寫生과 채색을 통해 이전까지는 잘 볼 수 없었던 구도와 형태를 표현해냈다. 이렇듯 惲壽平은 正統主義 화가 중 한 사람으로서 寫生과 沒骨設彩法을 결합시켜 17세기에 걸맞은 문인답고 담아한 花卉畫의 화풍을 창조해냈다.
이렇듯 惲壽平이 정립한 花卉畫는 이후에 활동한 惲氏家門의 화가들과 18세기 揚州畫派와 궁정화원 그리고 海上畵派 등 근대의 화가들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화가들에게 영향을 미쳤으며, 惲壽平은 山水畫가 유행하던 淸代 初期 화단에 花卉畫의 위치를 확립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므로 그 의의가 크다 할 수 있다.

Notes

1) 惲壽平에 관한 홍콩과 대만의 연구로는 張臨生, 「淸初畫家惲壽平」, 『古宮季刊』 10(1975); 傳抱石·伍稼靑 等 著, 『惲南田參考資料彙編』 (香港: 中山圖書公司, 1974) 등이 있다. 중국에서는 惲新安·顧信, 「惲壽平的家世, 生平事跡及其著述, 石刻考略」, 『南京藝術學院學報』 1981年 1期; 楊臣彬, 「惲壽平早年事跡及年譜簡編」, 『古宮季刊』 1983年 3期; 同著, 『明淸中國畫大師硏究叢書 - 惲壽平』 (長春: 吉林美術出版社, 1996); 蔡星儀, 『惲壽平 硏究』(天津人民藝術出版社, 2000); 朱萬章, 「惲壽平的家族傳人考」, 『中國國家博物館館刊』 2011年 7期; 蔡星儀 主編, 『中國名畫家全集 - 惲壽平』 (天津: 天津人民美術出版社, 2015); 張玉霞, 「隱逸特性在惲壽平沒骨花鳥畫中的體現」, 『常州大學學報』 12(2015); 同著, 「諢壽平字號寓意考辯」, 『美術學報』 2017年 3期; 賈田雪, 「絢爛之極 仍歸自然 - 惲壽平沒骨花卉的藝術特色研究」 (中央美術學院 碩士學位 論文, 2019) 등이 있으며 현재까지도 다양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2) 1983년 惲壽平 탄신 350주년을 맞이하여 常州市에서 惲壽平記念館을 건립하고, 惲壽平의 묘역을 정비하였다. 대만과 중국 내에서 열린 惲壽平에 대한 전시는 소장품전이나 화조화전 등과 같이 다른 화가들의 작품과 함께 출품되는 형태로 진행되었다. 최근에 개최된 전시는 中國美術館의 <甌香傳逸韻 - 中國美術館, 南京博物院藏常州畫派畫家作品展> (2021)으로, 惲壽平과 그의 화풍에 영향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었다.

3) 惲壽平에 관한 국내의 연구로는 이지희, 「惲壽平 硏究」 (서울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86)를 시작으로 정윤희, 「남전 惲壽平의 繪畫硏究」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4); 손홍랑, 「중국 淸代 花鳥畫 연구」(성신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 논문, 2000); 백윤경, 「淸代 남전 惲壽平의 花鳥畫 硏究」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2007)가 있다. 惲壽平의 작품분석은 대부분 宋~明代까지 화가들의 그림을 모본으로 한 작품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에, 본 연구에서는 시기별로 나타나는 惲壽平 花卉畫의 특징을 논하고자 하였다. 惲壽平의 화풍에 영향을 받았다고 언급한 조선시대 화가들에 관한 연구로는 조보민, 「조선말기 淡彩花卉畫 硏究」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2); 고연희, 「申緯의 회화관과 19세기 회화」, 『韓國學論集』 37(2003); 이은하, 「朝鮮時代 花鳥畫 硏究」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2011); 고연희, 「申緯의 감각과 申命衍의 色彩」, 『한국한문학연구』 75(2019); 배진경, 「애춘 신명연(1809~1886)의 화훼화 연구」, 『미술사학보』 53(2019) 등이 있다.

4) 현재까지 밝혀진 惲壽平의 號는 대략 30가지 정도이다. 그 중 南田이 가장 널리 알려져 있으며, 본인 스스로도 가장 즐겨 사용하였다. 臺北故宮博物院이 소장한 1685년 作 《寫生圖冊》 第8葉 <銀杏栗房圖>의 제발에 따르면 南田은 惲壽平이 가꾸던 정원의 이름이라 한다.

5) “父遜庵任理之書, 上口即能解義. ……” 惲鶴生, 「南田先生家傳」, 『惲南田參考資料彙編』 (香港: 中山圖書公司, 1974), p. 9.

6) 朱慧深, 「再記南田少年時事-讀 『賴古齋文集』」, 『惲南田參考資料彙編』 (香港: 中山圖書公司, 1974), p. 53; 惲壽平의 『甌香館集』에는 천태산에서 살던 시절을 회상하며 쓴 글이 있다. 그는 당시 천태산 곳곳을 다니며 본 경치에 대해 시와 그림으로 묘사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아름답다고 평하였다. 惲壽平, 「甌香館集補遺」, 『甌香館集』(杭州: 西泠印社出版社, 2012), p. 146.

7) 惲敬, 「南田先生家傳」, 『甌香館集』 (杭州: 西泠印社出版社, 2012), pp. 371-372.

8) “香山翁雲; 北苑禿鋒, 余甚畏之. 既而雄雞對舞, 雙瞳正照, 如有所入. …… 香山翁蓋於北苑三折肱矣, 但用筆全爲雄勁, 未免昔人筆過傷韻之譏,” 惲壽平, 『甌香館集』 卷11(杭州: 西泠印社出版社, 2012), p. 251.

9) 楊臣彬, 앞의 책, pp. 16-17.

10) “正叔性落 雅尙, 遇知己或匝月爲之點染, 非其人視百金猶土芥, 不市一花片葉也.” 張庚, 『國朝畫徵錄』 卷中(1739), p. 78.

11) “憶童年隨先君子謁遜庵惲先生, 正叔侍側. 時正叔 …… 名格, 字惟大. 辛醜冬, …… 爾時更字正叔, 款書壽平, 簡劄原名格, 取‘天壽平格’義也.” 張玉霞, 앞의 논문, p. 28.

12) 蔡星儀 主編, 앞의 책, p. 14. 惲壽平이 杭州의 東園高雲에서 머무른 시기는 1664년, 1668년, 1673년, 1675년 등으로 확인된다. 惲壽平은 1670년대 중반까지 여러 작품에 ‘東園’과 관련된 號를 적었는데, 이는 그가 東園高雲에 다녔던 시기와 유사하다.

13) 張臨生, 「惲壽平年表」, 『惲南田參考資料彙編』 (香港: 中山圖書公司, 1974), p. 146.

14) 張庚, 앞의 책, p. 76.

15) “石穀子在毗陵稱筆墨之契, 惟半園唐先生與南田生耳. ……” 惲壽平, 「南田畫跋」, 『中國名畫家全集 - 惲壽平』 卷 4(天津: 天津人民美術出版社, 2015), p. 40.

16) “沒骨圖成敵化工, 藥房荷蓋盡含風. 當時畫院徐崇嗣, 今日江南唐長工. 石穀先生屬題, 南田弟壽平.”

17) 楊臣彬, 앞의 책, p. 24.

18) 殷曉珍, 「惲壽平在揚州的藝術經曆及相關問題的研究」 (揚州大學 碩士學位 論文, 2017), pp. 13-16.

19) “雙魚尺素語千尺, 字字毋忘王太常. 無那相思東向立, 海雲天畔望扶桑.” 蔡星儀 主編, 앞의 책, p. 9.

20) “亟思披對興之昵好但屢訂來遊, 而棕跡杳然, 桑楡隙光. ……”. 王時敏이 王翬에게 보낸 편지 부분. 손홍랑, 앞의 논문, p. 28.

21) 惲壽平이 말년에 사용한 號는 白雲外史, 白雲溪外史, 雲溪外史, 雲溪漁父, 甌香館 등 약 10여개 정도로 그가 이사한 지명이나 堂號와 관련되어 있다.

22) 楊臣彬, 앞의 책, p. 31.

23) “在杭州已覓得好地, 有兩處, 地價俱已在此設法, 幸有李且翁爲我承當, 其價須百金之外, 全要在此著力應酬各處筆墨, 方可就緒. 所喜人情甚好, 想慕者多, 急急做去, 定能成就. 只恨眼下竟無幫手, 自身日日病出, 早晚在此服藥, 諸事酬應甚難, …… 打點二月初起身來杭.” 楊臣彬, 위의 책, p. 32.

24) 현재 惲壽平의 墓는 常州市 武進區에 있으며, 부친 惲日初의 墓와 나란히 자리해 있다. 1983년 惲壽平 탄신 350주년을 맞이하여 묘역을 단장하면서 墓碑도 다시 세웠는데, 당시 常州書畫院의 초대 명예원장이었던 劉海粟(1896~1994)이 지은 「重修惲南田墓記」가 새겨져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惲南田, 名格, 字壽平, 一字正叔, 號南田, 又號白雲外史. 武進上店人. 明崇幀六年生, 卒於清康熙二十九年, 終年58歲. 南田詩書畫時譽三絕, 其沒骨花卉清麗雅逸, 師心獨見. 山水畫力遒韻雅, 超邁絕倫, 世稱惲派, 海內親之. 癸亥春爲紀念惲南田誕生350周年, 設紀念館於馬杭, 重修墓宇, 緬懷先賢, 激勵後者, 愛以志之.”

25) 林健, 「試談宋代至明初毗陵草蟲畫及在東亞的影響」, 『榮寶齋』 (2013年 11期), pp. 110-111; 楊衛華·陳淑君, 「常州畫派草蟲畫發展研究」, 『大衆文藝』 (2020年 9期), p. 145.

26) 僧居寧, …… 妙工草蟲, 其名藉甚, 嘗見水墨草蟲, …… 題云, “居寧醉筆, 雖傷大而失眞, 然則筆力勁俊, 可謂稀奇.” …… 好半者每得一扇, 自爲珍物. 곽약허 저, 박은화 옮김, 『도화견문지』 (시공아트, 2005), p. 425.

27) 공육경 저, 홍기용·안영길 옮김, 『중국화파총서1. 黃筌畫派』 (미술문화, 2006), p. 267.

28) Chung Saehyang P, “An Introduction to the Changzhou School of Painting 1,” Oriental art 31, no. 2(1985), p. 150.

29) 유지원, 「13-14세기 중국 滿池嬌 樣式[蓮池水禽紋]의 유행과 고려 유입」, 『미술사학연구』 296(2017), p. 67.

30) Chung Saehyang P, “An Introduction to the Changzhou School of Painting 2,” Oriental art 31, no. 3(1985), p. 293.

31) 당시 일본에서는 常州에서 건너온 화려한 색감의 花卉草蟲畫를 紅白川이라 불렸으며, 이는 이러한 작품을 그리는 常州의 화가들을 통칭하기도 한다. 島田 修二郎, 「呂敬甫の草虫図―常州草虫画について―」, 『美術研究』 150(1948), p. 187.

32) “孫隆……幼穎異, 風格如仙, 畫翎毛草蟲, 全以采色渲染, 得徐崇嗣、 趙昌沒骨圖法, 饒有生趣.” 徐沁, 『明畫錄』 卷6(北京: 中華書局, 1985), p. 57.

33) 孫隆, 이후에 등장한 惲壽平은 당대 화훼화가들이 대부분 黃筌의 화풍이라 불리는 鉤勒을 따르고 있으며, 徐熙의 화풍은 전해진 바가 없어 새롭게 연구한다고 밝힌 바가 있다. 이는 1671년 작 <紅蓮綠藻圖> (Fig. 5)와 1677년 작 《花卉圖冊》 第11葉 (Fig. 10)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34) “余與唐匹士研思寫生, 每論黃荃過於工麗, 趙昌未脫刻畫, 徐熙無近轍可得, 殆難取則, 惟當精求沒骨. 酌論古今, 參之造化, 以爲損益. 匹士工畫蓮, 余雜拈卉草, 壹本斯旨. 觀此圖, 可知余兩人宗尚, 庶幾有合於先匠也. 取證石老, 辛指以繩墨.”

35) “傳稱西蜀黃筌畫兼眾體之妙, 名走一時. 而江南徐熙後出, 作水墨畫, 神氣若湧, 別有生意. ……” 王安莉, 「南北宗論的形成, 1537~1610」 (上海師範大學 博士學位 論文, 2013), p. 103.

36) 崔熙, 「淺析惲壽平沒骨花鳥畫的藝術特色」 (西北師範大學美術學院 碩士學位 論文, 2016), p. 9.

37) “牡丹最易近俗, 殆難下筆. 如近世工徒, 塗紅抹綠, 雖千花萬蘂, 總一形勢, 都無神明. 惟北宋徐熙父子, 趙昌王友之倫, 創意既新, 變態斯備, 其賦色極妍, 氣韻極厚. 蓋能不守陳規, 全師造化, 故稱傳神. 觀南田此本, 妍精沒骨, 得其變態, 真可上追北宋諸賢, 不僅淩跨有明陳陸數子已也. 壬子十月既望, 劍門王翬書.”

38) “粉筆帶脂, 點後複以染筆足之, 點染同用. 前人未傳此法, 是其獨造……脂丹皆從瓣頭染入, 亦與世人畫法異.” 方薰, 『山靜居畫論』 下卷(北京: 中華書局, 1985), p. 20.

39) “閒居北堂, 灌花蒔藥, 玩樂秋華, 以資嘯吟. 有真氣彌滿, 萬象在旁意, 庶幾竊比於勝華道隱之, 可無悶矣. 壽平自記.”

40) “昔滕昌祐常於所居多種竹石杞菊, 以資畫趣. 所作折枝花果, 並擬諸生. 余亦將灌花南田, 玩樂苔草, 抽毫研色, 以吟春風. 信造化之在我矣.” 惲壽平, 『甌香館集』 卷11(杭州: 西泠印社出版社, 2012), p. 248.

41) “寫生有二途; 勾花、 範葉、 細染、 細開, 黃筌神矣. 不用筆墨, 全以五彩染成, 謂之沒骨, 徐崇嗣獨稱入聖. 後世寫生家稍能操觚者, 悉祖逑黃法, …… 而徐崇嗣沒骨一宗無聞焉. 蓋不用勾勒, …… 故研精其法者鮮也. …… 寫生之有沒骨, 猶音樂之有鍾呂, 衣裳之有黼黻, …… 真繪事之淵泉也. 因斟酌今古, 而定宗於沒骨雲.”

42) “庚申十月婁東客館, 夜坐擁爐, 明窗淨幾, 玩膽瓶豔菊, 經霜未改, 色態猶妍, 戲爲留照. 南田”

43) “曾見管夫人寫綠竹, 其甥王叔明畫坡石, 最後松雪翁補叢花苔草, 足稱三絕, 此景略師其意.”

44) “澹遠堂主人貽我建蘭數枝, 寓齋清芬不散, 塵襟灑然, 喜而制圖. ……”

45) “菊以黃爲尙, 而紫次之, 亦猶牡丹之有姚黃、 魏紫、 紅、 白諸種, 雖繁而稱花王者, 必尊姚魏焉.”

46) “俗人論畫, 皆以設色爲易, 豈知渲染極難. 畫至著色, 如入衆加煆煉, 火候稍差, 前功盡棄. ……” 惲壽平, 『甌香館集』 卷12 (杭州: 西泠印社出版社, 2012), p. 280.

47) “揚補之墨梅, 趙子固水仙, 皆墨林仙品, 千古無與敵者. 其用筆如姑射神人, 獨立天表, ……”

48) “梅花以逃禪老人爲第一, 余曾於白門購得長卷, 自作柳梢青詞十首題於後. 真希世奇珍. 南田此圖能深得逃禪用筆意, 所謂玉面鼠須. ……”

49) 박은화, 「揚無咎의 <四梅圖>: 詞書畫一致의 文人 墨梅畫」, 『미술사학』 41(2021), pp. 103-104.

50) “…… 殘葉破秋風, 驚起鴛鴦宿. ”

51) “近日寫生家多宗余沒骨花圖, 一變爲穠麗俗習, 以供時目. …….” 惲壽平, 『甌香館集』 卷11 (杭州: 西泠印社出版社, 2012), p. 247.

Fig. 1.
許迪, <野蔬草蟲圖>, Attributed to Xu Di, Grass and Insects, Southern Song, Colors on silk, 25.8×26.9cm, National Palace Museum of Taipei (National Palace Museum, https://www.npm.gov.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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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於子明, <蓮池水禽圖> (부분), Attributed to Yu Ziming, Lotus Flowers with Mandarin Ducks (detail), Southern Song, Colors on paper, Chion-in (Tokyo National Museum, https://www.tnm.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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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呂敬甫, <瓜蟲圖>, Lu Jingfu, Melon and Insects, Ming, Colors on silk, 34.6×84.2cm, Nezu Museum (Nezu Museum, https://www.nezu-muse.or.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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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孫隆, <芙蓉遊鵝圖>, Sun Long, Confederate Rose and Goose, Ming, Colors on silk, 159.3×84.1cm, The Palace Museum of Beijing (The Palace Museum, https://www.dpm.org.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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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惲壽平, 唐宇光, <紅蓮綠藻 圖>, Yun Shouping, Tang Yuguang, Lotus and Water-bloom, 1671, Qing, Colors on paper, 135.7×59.0cm, The Palace Museum of Beijing (Gugong bowuyuan, Wanzi qianhong - Zhongguo gudai huamu ticai wenwu tezhan 2, p. 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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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惲壽平, <牡丹圖>, 《花卉山水合圖册》, Yun Shouping, Peonies, Album of Flowers and Landscapes, 1672, Qing, Colors on paper, 28.5×43.1cm, National Palace Museum of Taipei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Yun Shouping 1, p. 1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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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徐崇嗣, <玉堂富貴圖>, Attributed to Xu Chongsi, Peonies and Golden Pheasant, Song, 112 .5× 38.3cm, National Palace Museum of Taipei (National Palace Museum, https://www.npm.gov.t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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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惲壽平, <牡丹圖>, 《山水花鳥圖冊》, Yun Shouping, Peonies, Album of Landscapes, Flowers and Birds, 1675, Qing, Colors on paper, 27.5×35.2cm, The Palace Museum of Beijing (The Palace Museum, https://www.dpm.org.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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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惲壽平, <秋花圖>, 《摹古圖冊》, Yun Shouping, Autumn Flowers, Album of Imitate the Old, 1673, Qing, Colors on paper, 26.3×33.4cm, National Palace Museum of Taipei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Yun Shouping 1, p.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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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惲壽平, 《花卉圖冊》 第11葉, Yun Shouping, Album of Flowers No. 11, 1677, Qing, Ink on paper, 20.4×29.2cm, Shanghai Museum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 Yun Shouping 2, p.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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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惲壽平, <菊花圖> 扇面, Yun Shouping, Chrysanthemums (Fan painting), 1680, Qing, Colors on paper, Shanghai Museum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Yun Shouping 2, p. 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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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惲壽平, <竹石叢花圖>, 《花卉山水圖冊》, Yun Shouping, “Bamboos, Stones and Fowers,” Album of Flowers and Landscapes, 1680s, Qing, Colors on paper, The Palace Museum of Beijing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Yun Shouping 2, p. 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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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惲壽平, <九蘭圖>, Yun Shouping, Nine Orchids, 1680s, Qing, Colors on silk, 23.4×60.8cm, The Palace Museum of Beijing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Yun Shouping 3, pp.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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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趙孟堅, <墨蘭圖> (부분),Zhao Mengjian, Ink Orchids (detail), Song, Ink on paper,34.5×90.2cm, The Palace Museum of Beijing (The Palace Museum, https://www.dpm.org.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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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惲壽平, <菊花圖> (扇面), Yun Shouping, Chrysanthemums (Fan painting), 1685, Qing, Colors on paper, Tianjin Museum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Yun Shouping 2, p. 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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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惲壽平, <雙淸圖>, Yun Shouping, Plums an Ddaffodils, 1687, Qing, Colors on slik, 88.5×54cm, The Palace Museum of Beijing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Yun Shouping 3, p.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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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楊無咎, <四梅圖>, Yang, Wujiu. Four Plums, Song, Ink on paper, 37.2×358.8cm, The Palace Museum of Beijing (The Palace Museum, https://www.dpm.org.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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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楊無咎 <四梅花圖> (부분), Yang, Wujiu, Four Plums (deta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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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惲壽平, <荷花圖>, 《花鳥圖冊》, Yun Shouping, Lotus, Album of Flowers and Birds, 1689, Qing, Colors on paper, 27.2×43cm, The Palace Museum of Beijing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Yun Shouping 3, pp. 264-2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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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惲壽平, <荷花圖>, 《花卉圖冊》, Yun Shouping, Lotus, Album of Flowers, 1689, Qing, 26.7×40.3cm, National Palace Museum of Taipei (Xingyi Cai, ed., Zhongguo minghuajia quanji-Yun Shouping 3, p.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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