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끼움입사기법의 전개와 기술의 확장: 동제공예품을 중심으로

Development and Dissemination of the kkiumipsa Technique in late Chosŏn, Focusing on Copper Craft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2;316():73-105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2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31065/kjah.316.202212.003
*Korea Culture Research Institute, Ewha Womans University
김세린*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연구교수
Received 2022 October 26; Revised 2022 October 30; Accepted 2022 November 24.

Abstract

본 논문은 조선시대 동제공예품에서 사용되었던 끼움입사의 전개를 기법 유형과 재료, 당시 문화에 따른 소비경향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또 현전하는 유물과 전승되고 있는 무형문화재 보유 기술과 연관해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끼움입사 기술 흐름을 함께 추론해보았다. 끼움입사는 과거부터 이어온 전통 기술에 당대의 여러 환경이 적용되었을 때 기술문화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승, 변화, 확장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공예가 지닌 소비에 작용하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기술 전수와 개량의 주요 축 가운데 하나인 전통의 흐름을 읽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현전하는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조선시대 끼움입사는 고려에서 계승된 기술과 조선 후기 대두된 열을 사용하는 끼움입사 두 유형이 병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Ⅰ유형의 끼움입사는 은입사를 중심으로 왕실과 민간, 사찰에서 두루 사용되었으며, 은 뿐 아니라 오동, 백동, 황동 등 다양한 동합금재가 사회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금속재로 부각되면서 장식재로 적용되었다. 좁은 면이나 얇은 두께를 지닌 동제공예품에 사용된 Ⅱ유형의 끼움입사는 이전과 달리 땜과 열을 장식재 감입에 사용했다. 담뱃대, 침통, 촛대의 대 등 기면이 좁고 두께가 얇은 기물 또는 부품에 사용되었던 이 기법은 당시의 생활문화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울러 현재 이 기술을 계승하고 있는 백동연죽장 분야의 기술 및 전수 계보를 통해 최소 19세기 중~후반을 기점으로 활발하게 적용된 기술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Trans Abstract

This paper studies the development of the kkiumipsa technique used on copper crafts, focusing on the types of the technique, materials, and the cultural consumption of the crafted items. The surviving artifacts and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also provide information on the history of kkiumipsa in the Chosŏn period. kkiumipsa is a representational example that demonstrate how a traditional craft technique can be transmitted, transformed, and disseminated while reflecting contemporary social environment. This study is significant in understanding how the socio-cultural circumstances affect the way craftworks are consumed, and in appreciating the evolvement of traditional ways that are critical in transmission and improvement of craft techniques.

The surviving artifacts show that two types of kkiumipsa technique were used in Chosŏn, one passed down from the Koryŏ period, and the other developed in the late Chosŏn period. The first technique, type I, was mainly employed for silver inlay items that were used by the royal family, private individuals, and Buddhist temples. As not only silver, but different materials of copper alloy such as black copper, nickel copper, and brass were considered precious, they were also used for embellishments. The type II uses heat and soldering to apply the inlay technique on narrow or thin surfaces of copper craftworks, for example, tobacco pipes, acupuncture needle cases, and columns of candlesticks. The use of the inlay technique on these items show that it was a part of the everyday life. The history of copper pipe making artisans (paektong yŏngjuk chang) and the inlay technique that they preserve, show that it was popularly used since the mid- to latenineteenth century at the latest.

Ⅰ. 머리말

금속이나 석재와 같이 경도가 강한 물성을 지닌 재료로 만든 기물의 문양 시문에 활발하게 사용하는 입사기법은 감입(嵌入)이라는 기술 근간을 바탕으로 고대부터 현재까지 여러 사회적 제반 요소와 상호작용하며 발전해왔다. 본 논문의 연구대상인 끼움입사는 입사의 세부 기법 중 하나로 가장 긴 역사를 지니고 있다. 끼움입사는 형태를 완성한 기물 표면에 의도한 문양의 형태를 음각한 후 그 자리에 문양과 동일한 모양으로 성형한 장식재를 넣어 표면을 장식하는 시문기법을 의미한다.

현전하는 조선시대 입사 유물을 보면 철로 제작된 쪼음입사 공예품이 많고 관련 문헌기록도 마찬가지여서 상대적으로 동시대 함께 사용한 끼움입사에 대한 관심은 덜하다. 실제 조선의 입사공예와 관련한 성과를 살펴보면 쪼음입사를 중심으로 한 연구나 기법을 전문적으로 담당했던 장인인 입사장(入絲匠)에 대한 논문이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1 끼움입사는 기법 자체에 대한 연구보다는 금속공예 기종이나 문양을 다룰 때 시문법 중 하나로 언급된 경우가 대다수이다.2

조선의 끼움입사는 고려에서 전승된 공예기법이자 금속공예의 주요 시문기법 중 하나로 동제공예품을 위주로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기존 은입사(銀入絲) 뿐 아니라 동합금이 주요 장식재 중 하나로 부상하면서 장식재의 폭이 넓어졌고, 이를 다루기 위한 끼움입사의 시문기술도 확장되었다. 이러한 재료와 기법의 다종화는 조선의 끼움입사가 쪼음입사나 고려시대 끼움입사에 비해 성행한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조선 사회 내에서 활발한 수요가 유지되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본 논문에서는 끼움입사로 장식된 다양한 성격의 동제공예품 유물이 현전하고 있는 조선 후기를 중심으로 조선의 끼움입사기술과 재료, 시문양상에 대해 분석해보고자 한다. 본 연구에서는 시기를 조선 후기로 한정했지만 끼움입사의 이러한 여정은 공예가 지닌 속성 중 하나인 시간적, 기술적, 문화적 연속성을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본 논문을 통해 과거에서 전승된 전통공예기술이 당대의 경향, 문화, 사회경제적 상황 등 여러 요소와 만나면서 공예품에 적용되어 가는 모습과 기술 문화가 확장되어 후대로 다시 이어지는 일련의 과정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Ⅱ. 조선 후기 끼움입사의 시문양상과 장인

1. 기법의 전개와 시문 양상

조선시대에도 입사로 장식된 금속공예품은 고려와 마찬가지로 활발하게 소비되었다. 현전하는 소수의 조선 전기 유물과 문헌을 살펴보면 입사 시문된 동제공예품의 사용 역시 지속되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청동은입사청곡사명향완>(1397년, 국립중앙박물관, Fig. 1)과 같이 조성과 관련된 내용이나 입사를 한 장인을 파악할 수 있는 명문 유물,3 2021년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된 조선 전기 유물, 1468년 세조(世祖, 재위기간: 1455~1468)에게 청동은입사화로(문헌 내 명칭: 銀入絲靑銅火爐)를 바친 정의공주(貞懿公主: 1415~1477)의 일화와 같은 조선 전기 입사공예품과 연관된 여러 자료들과 유물의 시문 양상은 동제공예품의 표면 장식에 끼움입사를 사용했던 고려의 기술 전통이 조선에 계승되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4

Fig. 1.

<청동은입사청곡사명향완靑銅銀入絲靑 谷寺銘香垸>, Bronze Incense Burner with Silver Inlay from Cheonggoksa Temple, 1397, Chosŏn, W. 38.2cm, H. 39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museum.go.kr)

끼움입사를 시문된 조선시대 동제공예품의 현전하는 유물 수는 많지 않다. 하지만 적은 유물 안에서 여러 기종과 용도가 확인되어 사회 내에서 다방면에 활용된 기법의 양상을 짐작할 수 있다. 끼움입사가 시문된 기종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앙부일구나 나침반(Fig. 3), 자와 같이 표식과 의장을 뚜렷하게 표현해야 하는 계측도구, 화로, 촛대, 벼루나 문진, 행연(Fig. 2), 자물쇠, 연초도구와 같은 생활용품, 사찰의 향로와 향완(Fig. 1)과 같은 공양구, 화승총의 동, 철제 총신(Fig. 4)과 같은 무기류 등 다양한 성격과 쓰임을 지닌 기종이 확인된다. 이 중 무기인 총포류는 불을 놓아야 하는 심지 주변을 야간에도 볼 수 있도록 정확하게 표시해야하는 심지구획선이나 단위, 현(玄)과 같은 표상 시문에 끼움입사가 사용되었는데 철로 만들어진 기물에도 끼움입사를 한 것이 특징이다.5

Fig. 3.

<청동은입사나침반靑銅銀 入絲 輪 圖>, Compass, Late Chosŏn, Bronze with silver inlay, W. 30.7cm, H. 0.3cm, Seoul Museum of History (Seoul Museum of History, http://museum.seoul.go.kr)

Fig. 2.

<청동 은입사행연靑 銅 銀 入絲行硯>, Bronze Haengyŏn with Silver inlay, Late Chosŏn, W. 2.2cm, H. 2 .7cm, L. 18.4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museum.go.kr)

Fig. 4.

<화승총火繩銃> 동입사 부 분, Matchlack Rif le, Late Chosŏn, Iron gun barrel with bronze inlay, L. 102cm (total lenght), D. 1.4cm (caliber), 2.3cm (barrel), GRASSI Museum of Ethnography Leipzig in Germany (Korean Art Collection GRASSI Museum fur Volkerkunde zu Leipzig Germany, p. 1155)

선과 면을 고루 활용하면서 때에 따라 중심문양에 판 형태의 장식재를 감입한 시문 양상은 문양의 형태와 배치에 따라 장식재의 형태를 달리 적용했던 고려의 시문법을 전승한 것으로 보인다. 또 나침반이나 해시계의 눈금은 선으로 표식하고 향완의 옴마니반메훔과 같은 범자문 은 크기나 폭이 작아도 판형으로 장식재를 문자의 성형해 감입하는 것이 일부 기종에서 보이는 일정한 양상은 용도나 규범에 따라 끼움입사가 달리 적용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한편 조선 후기 유물에서는 기존의 금, 은과 함께 오동, 백동과 같은 동합금이 새로운 장식재로 등장해 동제공예품 내에서 구현되는 입사의 색채와 질감이 한층 다채로워졌다. 이는 사회 내 입사공예품의 성행과 연동된 것으로 보이며 사용자 취향도 적극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함께 조선 후기 고가의 재료나 정교한 장식을 활용한 공예품을 사용해 자신의 부와 계층을 부각시키고 차별화시키려는 욕망과 맞물린 사회적 경향이 극대화되면서 소비자의 취향에 맞춰 점차 비싼 재료나 세밀한 기술을 요하는 기법을 활용한 기물을 경쟁적으로 제작해 판매하는 현상이 사회 전반에 만연했다. 끼움입사 유물이 가장 많이 전해지는 기종 중 하나인 담뱃대를 보면 대통과 물부리에 적용된 백동, 오동과 같은 고급 금속재와 장식, 과한 대의 길이 등 주요 구성 요소에서 나타나는 양상을 통해 이러한 사회상을 확인할 수 있다. 19세기 중~후반에 이르면 이러한 현상이 극에 달했던 것으로 보이며 사회적 문제로까지 대두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 10년(1873)에는 담뱃대의 금, 은, 오동 조이(雕刻)장식 금제를 명했는데 여기에는 조이장식 중 하나이자 당시 동으로 제작된 담뱃대 대통과 물부리 장식에 사용한 주요 기법 중 하나인 입사도 포함되었던 정황이 관련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6 아울러 해당 기사에서는 당시 담배 관련 연초도구를 둘러싼 사회적 분위기와 함께 오동장식을 한 연초도구도 사치품으로 지목했다. 이는 당시 오동을 감입한 입사공예품도 금, 은을 장식재로 사용한 입사공예품만큼은 아니지만 고급품 중 하나로 인식되었음을 시사한다.

조선 후기 동합금을 장식재로 사용한 것과 관련해서는 선후관계를 보다 면밀히 파악해봐야한다. 다만 Ⅲ장에서 분석할 입사 시문시 열을 사용해 감입하는 기술이 담뱃대와 침통 등 기벽이 얇고 공간이 작은 기물을 중심으로 사용될 수 있었던 것에는 이와 같은 장식재의 다종화도 영향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2. 끼움입사를 다룬 장인

조선시대 공예품의 끼움입사 시문은 입사장과 금속 관련 장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4세기 고려의 향완 명문을 중심으로 명칭이 확인되었던 기법을 다루는 전문 장인인 입사장(入絲匠)이7 조선시대에는 1485년 편찬된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중앙관청인 공조(工曹)와 상의원(尙衣院) 소속 관장(官匠)으로 공식 편제되었다. 이 체제는 조선 말 법전인 『대전통편(大 典通編)』까지 이어졌다.8 입사를 전문으로 하는 장인의 제도권 내 편입은 조선 사회에서 입사기법의 공적 수요가 그만큼 컸음을 의미한다. 실제 의궤를 비롯한 문헌을 살펴보면 동과 철로 형태를 만들고 입사로 문양을 표현한 가마 장식이나 자물쇠, 건축물의 장식구, 칼 등 다양한 기종이 등장하고 있어 공적으로 사용된 입사공예품의 양상을 보여준다.

또 공역에서 입사 물품 제작할 때 도감에 배속된 입사장에게 담당한 제작품에 따라 입사천은(入絲天銀; Ag), 입사은(入絲銀; Ag), 숙동철(熟銅鐵; Cu), 연동철(鍊銅鐵; Cu), 정철(正鐵; Fe) 등 끼움, 쪼음입사와 관련된 장식재와 바탕재로 사용할 제련된 동, 철재를 지급된 것이 확인된다. 이는 조선시대 입사장이 최소 공적으로 수행하는 제작활동에서는 끼움입사와 쪼음입사 작업을 포괄해 수행했음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며 때에 따라 입사가 시문될 금속 기물 제작까지 담당했음을 짐작하게 한다.9

공역의 효율성을 높이고 제작품의 균일하고 정교한 품질을 위해 공정이나 다루는 재료에 따라 정밀한 분업을 했던 조선시대 왕실 공역의 제작 운영 특징을 생각해보면 상대적으로 분업이 덜했던 민간에서는 금속세공술을 일정 수준으로 보유했던 장인이 입사 기법도 활용했을 가능성이 있다. 실제 왕실 공역에 참여한 입사장 중에는 사장(私匠)도 있었는데 이들 중에는 보유 기술에 따라 다른 공역의 조각장(雕刻匠)이나 쇄약장(鎖鑰匠) 등 금속과 관련한 다른 직무를 수행하기 위한 장인으로 재 차출 되는 사례도 여럿 있어 금속공예 기술을 갖춘 민간의 사장 중 입사를 아울러 했던 장인이 실제 존재했음을 보여준다.10 관장(官匠) 역시 유사한 사례들이 있어 입사를 다루는 장인은 끼움입사를 포함한 금속 관련한 제반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11

Ⅲ. 고려의 끼움입사기법 계승과 새로운 기술의 전개

끼움입사의 기본적인 시문 원리는 기물 표면에 문양의 형태를 음각한 후 그 음각홈 안에 장식재를 끼워 넣고 기면과 장식재의 높이를 균일하게 맞추어 이질감 없이 마치 색채의 대비를 가진 하나의 면과 같은 효과를 내는 것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기물 표면의 문양 형태 음각, 문양 형태로의 장식재 가공, 기물 음각면에 장식재 감입이 기법을 구성하는 주된 공정이라 할 수 있다.

고려시대까지는 음각 홈에 장식재를 그대로 끼워 박는 수법을 사용했으며 조선 후기에는 전술한 기법과 함께 기면에 문양 형태를 뚫어내듯 음각한 후 문양형태와 동일하게 만든 장식재를 끼운 후 열을 가해 고정하는 기법이 병용되었다. 본 장에서는 조선 후기 사용된 끼움입사의 세부기법을 고려에서 전승된 전자를 Ⅰ유형, 조선 후기에 새로 등장한 후자를 Ⅱ유형으로 구분해 논하고자 한다. 분석 기술의 범위는 장식재를 실 또는 판형으로 성형해 바탕재에 끼워 감입하는 기술로 한정했다. 장식재를 액체나 박 형태로 가공한 뒤 문양 음각부에 바르며 채우거나 열로 흡착하는 방식은 재료의 형태와 가공, 시문 원리가 약간 다르기에 다른 논고를 통해 밝히고자 한다.

1. Ⅰ유형: 고려의 기술을 전승한 끼움입사

형태가 완성된 기물의 바탕면에 문양의 형태로 음각 한 후 동일한 형태의 장식재를 끼우고 망치와 다질정으로 두드려 면을 잡아 마감하는 Ⅰ유형의 끼움입사는 입사의 세부기법 중 가장 오래된 시문기술이다. 고대부터 사용되어 삼국시대 환두대도(環頭大刀)나 백제의 칠지도(七支刀)와 같은 유물이 전해지고 있으며, 한국은 물론 입사를 사용한 세계 여러 문화권에서 고대부터 관련 유물이 확인된다. 조선의 Ⅰ유형 기법은 <Table. 1>과 같이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 사용된 전통적 기법이 활용되어 유사한 시문효과를 보인다.

<고려의 끼움입사와 조선의 Ⅰ유형 끼움입사 양상> Comparison Between Koryŏ’s kkium Inlay and Chosŏn’s kkium Inlay Type Ⅰ

고려에서 전승된 조선의 Ⅰ유형 끼움입사는 표현하고자 하는 문양의 형태나 의장의 필수적 규범과 같은 제반 요소에 따라 고려와 동일하게 감입되는 장식재의 형태를 판(版; 면)형 또는 선(線; 실絲)형으로 달리 가공해 사용했다. 그리고 장식재의 형태에 따라 Ⅰ유형 내에서도 감입 방식의 차이가 존재한다. 현재 국가무형문화재 조각장 분야에서 전승되고 있는 전통적인 Ⅰ유형의 끼움입사 시문법을 장식재의 형태에 따라 구분해 살펴보면 감입수법의 차이를 보다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다.

먼저 판(면) 형태로 성형한 장식재 시문은 기면에 의도한 문양 형태로 윤곽과 면을 파낸 후 장식재가 바닥면과 잘 밀착되도록 음각한 부분의 바닥을 반복적으로 십(十)자로 흠을 낸다. 그리고 음각부의 양쪽 하단 부분을 쳐 단면을 역사다리 꼴로 만들고 장식재를 끼워 넣는다. 장식재를 넣은 후에는 입사 장식재 밖으로 솟아 나오지 않고 기면과 동일한 높이가 될 수 있도록 망치로 두드려 면을 잡고 숫돌로 갈아 최종 마감한다.12 선(실) 형태의 장식재 감입은 기물 면에 문양 형태를 음각한 뒤 음각한 홈을 따라 선을 박아 끼워 넣는다. 마지막으로 입사 장식재가 튀어 나오지 않고 기면과 동일한 높이가 될 수 있도록 시문된 부분을 다질정으로 촘촘하게 두드려가며 면을 맞춘다.13

이러한 Ⅰ유형의 시문법을 활용한 유물은 조선시대 계측도구, 생활용품, 불교공양구를 중심으로 확인된다. 이 중 본 논문에서는 왕실과 관청에서 사용한 시계, 자 등 계측도구를 중심으로 최근 발굴성과를 소개하며 유물의 양상을 분석하고자 한다. 먼저 조선 전기에 제작된 동제 끼움입사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은 시간 계측 도구인 일성정시의를 들 수 있다. 세종 19년(1437) 국왕의 명으로 처음 제작된 시계로 낮과 밤의 모든 시간을 측정하고 자격루의 시각을 교정하기 위해 만들어졌다.14 서울 인사동에서 출토된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조선 전기,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Fig. 5)는 세종 연간 제작품인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출토지에 근거하여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일성정시의는 해시계의 역할을 하는 일구백각환(星晷百刻環), 별시계의 역할을 하는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 정확한 측정을 위한 보정 역할을 하는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울 인사동 출토 <일성정시의>는 구성품 중 완형의 주천도분환과 성구백각환 및 일구백각환 일부가 확인되었다.15 출토품의 각 고리 계측 눈금은 은입사로 표시되어 계측기기에 사용된 끼움입사 양상을 보여준다(Fig. 6). 유사한 성격과 시문 스타일이 나타나는 유물로는 백동으로 제작된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소일영(小日影)>(조선 전기, Fig. 7)이 있다. 장식재가 많이 박락되었지만 남은 부분을 통해 계측선, 십이간지 등 구성요소를 모두 은으로 끼움입사 했음을 알 수 있다(Fig. 8).

Fig. 5.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Sun-and-star time determining Instrument, Early Chosŏn, Excavated in Insa-dong, Seoul. Brass, W. 41.1cm, National Palace Museum (Encounter with the Brilliant Scientific Technology of the Chosŏn Dynasty, 2022, p. 40)

Fig. 6.

Detail of a metal inlay of the Sun-and-star time determining Instrument (Encounter with the Brilliant Scientific Technology of the Chosŏn Dynasty, 2022, p. 41)

Fig. 7.

<소일영小日影> Simplified sundial, Early Chosŏn, Brass, W. 41.2cm, nickel, National Palace, National Palace Museum (National Palace Museum, http://gogung.go.kr)

Fig. 8.

Detail of a metal inlay of the Simplified sundial (National Palace Museum, http://gogung.go.kr)

아울러 해시계인 앙부일구에서도 Ⅰ유형의 끼움입사를 찾아볼 수 있다. 세종 16년(1434) 처음 제작된 이후 대한제국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던 앙부일구는 현재 전해지는 동으로 만든 유물 대다수가 단위와 계측을 위한 시각선과 계절선, 24절기의 선과 글씨를 모두 은으로 끼움입사 한 것이 확인된다.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앙부일구(仰釜日晷)>(1713년 이후, Fig. 9)는 유동으로 형태를 제작한 후 구성요소를 은입사를 한 것으로 장식재 박락면의 형태와 평정질이 없는 표면 상태로 볼 때 끼움입사로 시문되었음이 파악된다. 바깥 테두리에 적은 한양의 위도인 ‘북극고 37도 39분 15초(北極高三十七度三十九分一十五秒)’ 역시 은을 사용해 끼움입사했다. 『국조역상고(國朝曆象考)』에 따르면 시문된 위도 값은 1713년(숙종39) 새로 측정한 한양의 북극고도로 이 앙부일구가 1713년 이후에 제작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16 시간 계측용 기기의 주요 요소를 끼움입사로 시문해 표식한 것은 조선은 물론 대한제국기 유물에서도 나타나고 있어 입사가 명확한 표식을 위한 수단으로 꾸준히 활용되었음을 보여준다.17

Fig. 9.

<앙부일구仰釜日晷> Hemispherical sundial, After the 18th century, Chosŏn, Brass, W. 24.3cm, H. 10.0cm, National Palace Museum (http://gogung.go.kr)

이와 함께 왕실에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길이를 재는 자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건륭6년명중국척>(1741, Fig. 10, 11)은 유동인 진유(眞鍮)로 형태를 만들고 길이 측정을 위한 눈금과 명문을 은으로 끼움입사 한 사례이다. 진유척의 기형은 주조로 만들었으며 형태를 완성한 후 사면에 각각 건초척(建初尺), 주척(周尺), 영조척(營造尺, 1741년 청 단위 기준), 포백척(布帛尺, 송대 기준) 표시와 눈금을 선각한 후 은을 감입한 것으로 판단된다.

Fig. 10.

<건륭6년명중국척乾隆六年銘中國尺> Ruler with Four Traditional Chinese Rules, 1741, Chosŏn, Brass, L. 31.0cm, W. 1.9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museum.go.kr)

Fig. 11.

Detail of a metal inlay (Fig. 10)

현전하는 유물을 살펴보면 조선후기에는 앞서 본 계측도구와 함께 촛대나 합, 화로와 같은 일상생활용품, 연적이나 문진, 행연과 같은 문방구류, 담배합과 같은 연초도구 동으로 제작된 다양한 기종에서 끼움입사가 확인된다. 장식재는 은과 함께 오동, 백동과 같은 동합금이 새로운 재료로 등장해 함께 사용되었다. 재료가 지닌 물성이나 색의 차이를 이용해 문양을 부각시키는 입사의 시문효과를 최대한 활용했다. 이에 <Table. 2>와 같이 유동제 기물의 문양시문을 백동으로 하거나 백동제 공예품의 길상문 시문에 오동으로 사용함으로써 나타내고자 하는 문양을 뚜렷하게 표현했다. 또, 생활용품이나 개인 휴대용품을 중심으로 사용되어 조선 후기 유행했던 문자문이나 길상문, 태극문 등이 주요 문양 소재로 등장한다.

<동합금 장식재를 사용한 Ⅰ유형 끼움입사의 양상> kkium Inlay Type Ⅰ Using Copper Alloy

한편 불교공양구는 고려와 마찬가지로 향로(香爐)류를 중심으로 확인되나 동제입사공예품 내 비중으로 볼 때 고려보다 확연히 감소했다. 이는 조선시대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한 불교의 전반적 위축과 당시 불교공양구의 경향이 복합적으로 작용된 결과로 보인다.18 현재 전해지는 유물 중 입사가 시문된 동제공예품은 거향로(居香爐)의 일종인 향완이 가장 많다. 향완은 고려의 기법과 형식을 계승한 개국 초 유물부터 확인되고 있어 조선의 끼움입사 전통이 고려 국초인 1397년 태조가 계비인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제작한 <청동은입사청곡사명향완>(국립중앙박물관, 1397), <강희13년명청동은입사향완>(해인사, 1674, Table. 1 도판) 등은 조선 전기 끼움입사 양상을 보여준다.19 동국대학교 와이즈캠퍼스 박물관 소장 <순치10년 동화사명청동은 입사향완>(1653)과 같이 기존 향완의 문양 배치가 변화하는 모습도 감지되지만 입사 시문 형태는 고려에서 계승한 기술을 유지하고 있다.

2. Ⅱ유형: 열과 땜을 사용한 끼움기법

조선 후기에는 담뱃대의 대통이나 침통, 장도의 보래와 같이 좁은 면을 가진 기물이나 동제기물에 색이 다른 동을 감입할 때 열과 땜(汗音)을 이용한 끼움입사 기법이 나타나 고려에서 전승된 Ⅰ유형과는 다른 유형의 끼움입사 기술이 확인된다. 본 논문에서는 이를 Ⅱ유형으로 구분해 다루고자 한다.

Ⅱ유형은 바탕재에 문양과 동일한 형태로 거의 타공(打孔)하듯 음각한 후 바탕재와 동일한 형태로 만든 판형의 장식재를 타공 부위에 땜을 넣고 그 위에 장식재를 끼워 넣고 열을 가해 문양을 바탕재에 고정시키는 기법이다<Table. 3>. Ⅰ유형과 비교해보면 기물 표면에 문양의 형태로 음각한 후 장식재를 음각면에 감입하는 시문 원리는 동일하다. Ⅰ유형과의 차이는 장식재의 고정을 위해 바탕재와 장식재 사이에 얇게 가공한 땜금속을 넣고 열로 장식재를 고정시킨다는 점이다.

<국가무형문화재 백동연죽장 보유자 황영보의 Ⅱ유형 시문 공정 일부> Detail of a Nickel-Copper Pipe Making Process Demonstrated by Hwang Yŏngpo (The national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holder for Paektong Yŏnjukchang)20

땜은 조선시대 의궤에서도 한음(汗音) 또는 한음은(汗音銀)으로 확인된다. 현재도 무형문화재 금속공예 관련 분야에서 사용하는 용어이다. 일반적으로 땜은 바탕재와 장식재에 비해 녹는점이 낮고 물성이 연해 열을 가해도 바탕재와 장식재의 열 손상을 최소화 하며 흡착된다. 땜 형태의 금속을 활용하는 Ⅱ유형 공정 특징은 실제 조선 후기 유물에서 나타나는 흔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Ⅱ유형 수법으로 입사된 태극문, 수복문 등의 주변에 구획선이라고 보기에는 금속이 약간 퍼지거나 열로 인해 눌린 자국들을 볼 수 있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기술 공정과 땜을 사용했을 때 나타나는 특징을 생각해보면 이는 한음(땜)이 바탕재와 장식재 사이에 들어가 둘을 결합시키는 과정에서 생긴 땜의 흡착 흔적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실제 열을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Ⅱ유형 끼움입사가 시문된 공예품의 장식부 주변을 살펴보면 구획 같지만 금속이 열로 인해 퍼졌다가 굳어진 것과 같은 흔적이나 선이 확인 된다.

시문 후 마감 과정도 Ⅰ유형과 차이가 있다. Ⅰ유형은 기본적으로 기벽의 두께가 있는 편이기에 시문을 하기 위해 음각을 하더라도 뒤가 볼록 튀어나오거나 뚫리지 않는다. 반면 Ⅱ유형은 거의 종이와 같거나 이보다 약간 두껍다고 여겨질 정도로 얇기에 문양의 형태로 음각하거나 모양정으로 기면을 때렸을 때 뒷면이 기면 높이보다 불룩하게 올라온다. 이에 장식재 감입 후 시문을 마감할 때 앞, 뒷면을 숫돌로 갈아내 장식재와 튀어나온 바탕재를 기면 높이와 균일하게 맞춘다. 이렇게 뒷면을 마감하는 이유는 주로 두께나 폭이 얇은 기물이나 부품에 사용하고, 용도에 따라 시문까지 완료된 금속을 둥글게 말아 땜을 해 원통형을 완성하고(Fig. 12) 기물에 장착하기 때문이다. 바탕재와 장식재를 마치 하나의 금속처럼 평탄화를 시키지 않을 경우 시문된 금속을 원하는 형태로 성형하는 과정에서 장식재가 뜯어지거나 튀어나와 박락될 우려가 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마감을 거쳐 장식재와 바탕재를 거의 한 금속과 같이 완성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Fig. 12.

<담뱃대煙竹> Tobacco Pipe, 19th century, Chosŏn, Bronze, Bamboo, Bronze with black bronze inlaid, L. 52.7cm, Horim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It shows a trace of making a cylinder shape by welding a plate after decorating it with a type II method.

이 기법의 시작은 언제인지는 구체적으로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현재 이 기법을 계승 하고 있는 국가무형문화재 백동연죽장 분야의 전승 과정을 근거로 살펴볼 때 최소 조선 말인 19세기 중~후반을 이미 시문에 활용되고 있었음을 추론해 볼 수 있다.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1대 보유자 추옥판(秋玉判: 1927~1991)이 19세기 말-20세기 초 남원 장시 일대에서 담뱃대 제작을 배워 해방 이후 명인으로 명성을 떨친 박상근(朴相根: 1891~1954)에게 기술을 전수 받아 활동했으며, 같은 남원 지역에서 활동했지만 계열이 다른 현 보유자 황영보의 경우 조부인 황찬서(黃贊西: 1873~1919)가 담뱃대 제작에 간여했고 이후 아버지인 황용구와 현 보유자 황영보가 기술을 계승했다.20 조부인 황찬서의 생몰년과 활동을 생각해 볼 때 담뱃대 제작 및 장식기술은 최소 19세기 후반 이후에는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전국 각지에 분포된 담뱃대 유물과 남원의 백동연죽장 기술 전수 내력을 종합해보면 기술 자체는 이 시기 전국의 여러 지역에 이미 확산되어 있었기에 장시에 유통될 수 있었을 것이다. 국가무형문화재 백동연죽장에서 제작하고 있는 입사장식 담뱃대의 감입 형태는 현전하는 Ⅱ유형의 조선 후기 입사장식 담뱃대와 거의 유사하다.

Ⅱ유형은 조선 후기 유물에서 확인되며 19세기로 추정되는 것이 많다. 기종은 담뱃대의 대통, 토리, 물부리부분, 장도의 원장석 등이 주를 이룬다. 주로 장식재로 두 종류 이상의 동합금을 사용한 소형 기물 또는 기면의 폭이 좁거나 기벽이 얇은 기물, 감입 후 둥글게 말아 가공하거나 다른 곳에 장착해야 하는 부품을 위주로 나타난다. 전반적인 크기는 자물쇠를 제외한 대부분의 기물이 철로 형태를 만들고 쪼음입사로 문양을 장식한 왕실의 가마 장식구보다도 작은 편이다. 얇고 작은 바탕재 내에서 최대한 장식재와 밀착시켜 결실을 방지하면서도 끼움입사를 감입하기 위한 방편으로 Ⅱ유형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된다.

현재 전승되고 있는 백동연죽장의 시문기술도 상황에 따라 약간 변화된 도구 등은 있지만 유물과 전승 작품을 비교해 볼 때 전반적으로는 조선 후기 시문 기술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현전유물에 비해 관련 기록이 거의 없고 고려 및 중국의 입사에서 일부 관계성만을 찾을 수 있어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또 국가무형문화재 백동연죽장의 현재 전승기술과 계보로 19세기 말부터의 기술 전개 정황을 파악할 수 있는 상태이다. Ⅱ유형 끼움입사 기법의 구체적인 연원과 사용 양상, 세부 제작기술에 대한 검토는 추후 연구를 더 진행하고자 한다.

Fig. 13.

<담뱃대煙竹> Tobacco Pipe, Late Chosŏn, Bronze, Bamboo, L. 33.5cm, Nation Folk Museum of Korea (Nation Folk Museum of Korea, http://www.nfm.go.kr)

Fig. 14.

Detail of Taet’ong (inlaid)

Fig. 15.

<자물쇠> Lock, Late Chosŏn, Bronze, W. 5.8cm, Nation Folk Museum of Korea (Nation Folk Museum of Korea, http://www.nfm.go.kr)

Fig. 16.

Detail of the pattern (Copper inlaid)

Fig. 17.

<장도粧刀> Encased Ornamental Knife, Late Chosŏn, Iron, persimmon tree, L. 13.0cm, Jeonju University Museum (e-museum: http://emuseum.go.kr)

Fig. 18.

Detail of decorations (Copper inlaid)

한편 조선시대 끼움입사는 동과 철제공예품에 모두 활용되었지만 쪼음입사는 철제 기물을 중심으로 나타나 입사의 세부기법 내에서도 기물 바탕재에 따라 기법을 다르게 사용했음이 확인된다. 이러한 적용 배경에는 기법의 필수 공정에 따라 필요한 재료의 경도 조건이 반영된 것으로 생각된다. 쪼음입사는 본격적으로 장식재를 감입하기 전에 기물의 표면 전체를 4회 이상 쪼음질(평정질) 해야 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렇기에 바탕재가 금속이라 하더라도 기벽이 얇게 성형된 상태에서 이를 견딜 수 있는 강한 경도가 필수적이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한국 뿐 아니라 쪼음입사를 사용하는 일본, 중국, 유럽, 서아시아 등 다른 문화권의 유물에서도 쪼음입사 공예품의 바탕재는 철이 주로 등장한다. 이와 관련해서는 문헌, 과학기술적인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지만 사용 가능한 바탕재 소재와 연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Ⅳ. 장식재의 다양화

1. 전통적 재료의 계승: 은

은은 고려시대에 이어 끼움입사의 대표적인 장식재로 꾸준히 활용되었다. 어찌보면 Ⅰ유형 기법과 결을 같이해 기술과 장식재가 함께 전승된 재료라 할 수 있다. 먼저 왕실 및 중앙관청에서 제작된 동제공예품의 끼움입사 장식재는 천은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은의 유통을 호조에서 관리했는데 순도에 따라 품등을 천은(天銀; 十品銀), 지은(地銀; 九成銀; 九品銀), 현은(玄銀; 八成銀; 八品銀), 황은(黃銀)으로 구분되어 있으며 천은(天銀)은 어용기물(御用器皿)에 사용했다고 전한다.21 이러한 정황들은 왕실 주도로 만든 계측도구에도 순도 높은 고품질의 천은(십품은)이 사용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의궤에서는 입사공예품 제작을 위해 입사장에게 순도 높은 은을 지급한 기록들이 있는데 이 중에 수는 많지 않으나 입사은자(入絲銀子),22 입사은(入絲銀),23 입사천은(入絲天銀)24과 같이 시문에 사용할 은을 재료 명칭에 반영한 경우도 있다. 입사장에게 지급된 은은 대부분 천은급이었기에 이들 입사용 은 역시 같은 품질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에는 동제 끼움입사와 철제 쪼음입사 등 은을 사용해 장식한 기물이나 은제공예품이 유행하면서 국내산 은과 일본산 은이 사회 내에서 혼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은 또는 부산 동래를 통해 들어온다 하여 내은(萊銀)25이라 부르기도 했던 일본산 은은 생산량이 풍부해 국내산 은에 비해 가격이 저렴했다. 홍대용의 『담헌서(湛軒書)』에서는 국내산인 천은 345냥을 일본산 정은(錠銀)으로 바꾸려면 천은 한 냥당 정은 1냥 4전씩 계산되어 483냥의 정은이 필요하다는 계산값을 낼 정도로 정은과 왜은의 가격 차이는 분명했다.26 이러한 조선 후기 왜은(倭銀) 유통 확산은 부를 축적한 계층 중심으로 은입사를 한 끼움입사와 쪼음입사 공예품 성행에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입사 내에서도 은의 종류가 명확하게 규정된 왕실공예품과 달리 민간 입사공예품은 국내산, 일본산 등 다양한 종류의 은이 입사공예품에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생활용품이나 개인의 휴대용품 등과 같은 다양한 기종에 끼움입사를 포함한 은의 장식재 사용 확산을 수반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조선 후기에는 은이 독일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 <곽산석담배합>,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석제은입사담배합>과 같이 돌로 제작된 개인용품의 입사 장식 재료로도 사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조선 후기 개인용품의 제작에 있어 사용자가 지닌 부와 취향이 반영된 장식과 재료의 사용이 입사공예품의 제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이는 조선 후기 개인용 쪼음입사공예품에서도 유사한 현상이 보인다.27

2. 동합금의 장식재 활용

조선 후기에는 유물과 문헌기록을 통해 기물 바탕재의 주요 재료로 활용되었던 동합금이 끼움입사의 장식재로도 활용된 것이 확인된다. 이는 기 구축된 동합금 기술과 백색, 적색, 황색 등 동합금재가 지닌 다양한 발색과 질감, 당시의 사회상이 작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 현재 유물을 통해 확인되는 끼움입사 장식재로 사용한 동합금은 황동(구리+아연), 오동(구리+금), 백동(구리+니켈)이 있다. 이 중 황동과 백동은 바탕재로도 병용되었다.

오랜 옛날부터 동은 사회 내에서 사용되는 금속기의 주재료 중 하나였다. 동은 자연 상태의 순동을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물성이 너무 물러 주로 합금을 해 사용했다. 이런 연유로 합금술은 꾸준히 발달해왔다. 조선시대에도 충청도, 황해도,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서 동을 생산했는데 경상도 울산에서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백동(白銅)이 산품으로 기록되어 합금동이 한 지역의 대표적 산출물로 꼽히기도 했다.28 동의 생산량이 15세기에 비해 감소한 17세기 유형원의 『동국여지지(東國輿地志)』 (1656)에는 『세종실록지리지』만큼은 아니지만 당시 동 생산지를 알 수 있다.29 조선 후기 동 산출량은 이전에 비해 대폭 감소해 부족분을 일본에서 수입했는데 동 뿐 아니라 동합금의 주요 재료 중 하나인 아연(Zn, 倭鉛)과 같은 광물도 함께 수입했다. 동 부족은 가격 상승을 수반했다. 관련 기록을 살펴보면 생동 1칭이 은화 10냥에 불과했던 생동이 이 시기에 이르면 18, 19냥까지 가격이 급등해 화폐 주조시 이익도 감소한다는 호조의 보고가 있을 정도로 국내산 동의 가치가 상승한 사례도 보인다.30 이러한 동 가격 상승은 동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데도 일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동의 가치 상승과 당시 보유하고 있던 합금술은 끼움입사의 장식재에 동이 적용되는 요인이 된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당시 동합금은 매우 중요한 기술이었기에 조정에서도 매우 신경을 써 관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영조 16년(1740) 『비변사등록(備邊司謄錄)』에는 당시 생동을 주로 수입했었던 상황에서 강원도 영월에 광산이 발견됨에 따라 이를 채굴해 시험 삼아 유납(鍮鑞), 상납(常鑞), 함석(含錫)을 합금해 그릇을 만들었던 기록이 있다.31 동 합금술은 민간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어 서유구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이규경의 『오주서종박물고변(五洲書種博物考辨)』 등 조선 후기 문헌에는 적동, 백동, 오동 등의 합금법이 기록되어 있다. 합금동 제법 중 입사에 사용된 오동, 청동, 적동, 백동 및 형태 주조에 사용하는 주동(퉁쇠) 제법에 대해 두 문헌을 비교 정리하면 조선 후기 사용된 합금법을 짐작할 수 있다<Table. 4>. 이러한 합금술의 발전과 재료의 사회적 가치 상승, 성분에 따라 재료가 낼 수 있는 다양한 발색은 동합금이 조선후기 끼움입사의 장식재 중 하나로 활용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오주서종박물고변』,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조선 후기 동합금 제법> The Method of Casting Copper Alloy in the Chosŏn Recorded in Ojusŏjong bangmulgobyŏn and Imwŏn’ Kyŏnjeji [32]

위의 합금술 대부분은 현재 금속을 다루는 무형문화재 분야들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특히 백동연죽장 분야에서는 위의 문헌에 등장하는 ‘진오동(眞烏銅)’, ‘가오동(假烏銅)’이라는 명칭을 구분해 사용하고 있다. 이는 오동을 제작할 시 들어가는 합금재에 따라 구분한 것이다. 진오동은 금과 구리를 1:6~1:10 비율로 넣어 합금한 오동을 의미하며, 가오동은 은을 합금해 만든 오동으로 은과 구리의 비율을 1:6으로 해서 만든 오동을 뜻한다. <Table. 4> 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금이 함유된 진오동이 더 높은 가치로 여겨져 비싼 가격에 판매되었고, 이러한 진오동-가오동의 가치 위계는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와 함께 문헌에는 합금에 사용한 금을 엽자금(葉子金)이라 지칭했다. 엽자금은 나뭇잎처럼 얇게 가공한 금을 의미한다. 이와 동일하게 얇게 성형한 은은 엽자은(葉子銀)이라 불렀다. 엽자금과 엽자은은 조선시대 의궤를 포함한 다른 문헌에서도 확인되고 있으며, 현재 백동연죽장을 포함한 무형문화재 분야에 명칭과 용례가 전승돼 사용하고 있다.

조선 후기 동이 입사의 주요 장식재 중 하나로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 중에는 합금에 함유되는 금속 중에는 금과 같이 당시 고급 재료로 인식되었던 것이 사용된 까닭도 있었을 것이다. 이에 같은 오동이라 하더라도 함유된 재료와 발색에 따라 진오동과 가오동처럼 종류와 층위를 다시 한 번 구분 했으며 시장 내에서도 가격의 차이가 있었다.43 이 중 오동은 Ⅱ장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합금 중에서도 높은 가치의 재료로 취급받아 화려한 장식재 중 하나로 여겨져 금제 논의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44 또, 구리에 비상을 더하는 백동 역시 고가의 재료로 인식되었다. 이는 입사공예품에 사용했던 동합금재가 금속재 가운데 고급 재료에 속했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된다.45 당시의 사회풍조에서 부를 축적한 개인의 기물을 중심으로 오동과 백동이 주요 바탕재와 장식재로 사용된 요인 중 하나로 작용했음을 보여준다.

한편 『오주서종박물고변』과 『임원경제지』는 유동이 한국에서 제조된 황동의 다른 말로 구분했다. 당시 황동은 입사공예품의 바탕재는 물론 각종 식기와 생활용품 등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금속재 중 하나였다. 두 문헌의 공통된 유동에 대한 서술은 당시 사회에서 황동과 유동에 대해 동일하게 인식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임원경제지』에는 적동(赤銅)이 일본에서 나는 노감석에서 온 것으로 현재 쓰는 적동이 국내산이 아니라고 밝히기도 했다.46 두 문헌은 일본과 중국의 합금동 제조법에 대해서도 소개하고 있는데 이는 중국, 일본과의 무역으로 원자재와 공예품 등이 유입되던 당시 양국의 동합금술을 조선에서 인지하고 있었으며 기술 교류가 있었음을 시사한다.47 이와 같은 조선 후기 동합금 기술의 발전과 재료에 대한 인식 확산은 동제공예품과 끼움입사 재료로서 기존 은과 함께 동합금이 대두되는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생각된다.

Ⅴ. 맺음말

이상 조선시대 동제공예품에서 사용되었던 끼움입사의 전개를 기법 유형과 재료를 중심으로 공예기술사적 측면에서 살펴보았다. 또 현전하는 유물과 전승되고 있는 무형문화재 보유 기술과 연계해 조선시대 사용되었던 끼움입사 기술 흐름을 함께 추론해보았다.

끼움입사는 과거부터 이어온 전통 기술에 당대의 여러 환경이 적용되었을 때 기술문화가 어떠한 양상으로 전승, 변화, 확장하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이는 공예가 지닌 소비에 작용하는 사회문화적 환경과 기술 전수와 개량의 주요 축 가운데 하나인 전통의 흐름을 읽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다. 현전하는 유물을 중심으로 살펴보았을 때 조선시대 끼움입사는 고려에서 계승된 기술과 조선 후기 대두된 열을 사용하는 끼움입사 두 유형이 병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고려에서 전승된 Ⅰ유형의 끼움입사는 기물의 음각면에 문양의 형태를 음각하고 장식재를 끼워 넣는 기법으로 은입사를 중심으로 왕실과 민간, 사찰에서 두루 사용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기존 은 뿐 아니라 오동, 백동, 황동 등 동합금이 장식재로 사용되면서 다채로운 금속의 색이 동제공예품의 장식에 적용되었다. 조선 후기 유물에서 확인되는 Ⅱ유형 끼움입사의 시문 근간은 Ⅰ유형과 동일하나 바탕재의 음각면에 땜금속을 넣고 장식재를 올려 열을 가하는 시문법을 취해 장식재를 기물에 고정하는 방식이 Ⅰ유형과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조선 후기 끼움입사의 전개는 과거에서 전승된 기술에 당대의 기술이 더해져 기법의 유형과 시문법이 확장되어가는 일련의 단계를 보여준다.

한편으로는 현재 Ⅱ유형 기술을 계승하고 있는 백동연죽장 분야의 기술 및 전수 계보를 통해 최소 19세기 중~후반을 기점으로 활발하게 적용된 기술임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당 기술에 대한 문헌 기록이 거의 없어 기술의 고안과 초기의 전개, 전승 흐름을 모두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은 Ⅱ유형 연구의 한계로 남았다. 이와 관련해서는 조선 후기 금속공예 기법의 대외교류와도 연관되기에 추후 조선 후기 동제공예품 관련 기술과 교류를 연결한 심화 연구를 통해 논문으로 밝히고자 한다.

Notes

1)

조선시대 쪼음입사 관련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설혜강, 「조선시대 포목상감 문양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5); 同著, 「조선시대 포목상감 제작기법에 관하여」, 『역사와 실학』 20(2000); 이선진, 「조선후기 철제입사공예품 연구」 (동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同著, 「조선후기 철제입사공예품 연구」, 『동악미술사학』 17(2015); 박수지, 「쪼음입사의 기원 고찰」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7); 김세린, 「의궤를 통해 본 숙종~영조 연간(1674~1776) 상존호도감 보록 철제입사자물쇠의 시문기술과 금속재료」, 『한국문화연구』 40(2021) 등이 있다. 조선시대 입사장 관련 연구 성과는 다음과 같다. 김선정, 「조선시대 은입사기법의 현대적 전승에 관한 연구」(한국예술종합학교 전문사학위논문, 2015); 김세린, 「조선시대 입사장의 역할과 작업범주의 재해석」, 『무형유산』 3(2017); 김세린, 「조선시대 관영수공업에서 입사장의 직무유형과 역할」, 『문화재』 54-2(2021) 등이 있다.

2)

한국 전 시대의 입사기법에 대해 아우른 성과는 다음과 같다. 김선정·변지선, 『입사장』 (국립문화재연구소; 민속원, 2008); 최응천, 『한눈에 보는 입사』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2016) 등이 있다. 또 조선시대 기종 및 문양 등의 연구 주제 내에서 시문기법 중 하나로 입사를 다룬 연구는 다음과 같다. 김창균, 「한국청동은입사향완의 연구」(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5); 同著, 「韓國靑銅銀入絲香垸의 硏究」, 『불교미술』 9(1988); 이용진, 「동국대학교 박물관 소장 <태백산 부석사명 철제은입사향완>」, 『불교미술』 18(2007); 同著, 「한국 불교향로 연구」 (동국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김세린, 「조선 후기 연초문화와 철제입사담배합의 양상」, 『미술사논단』 49(2019) 등이 있다.

3)

“大明洪武三十年丁丑 朝鮮國開國祖聖朝 中宮神德王后 本鄕晋陽大都護府裨補禪刹靑谷寺 寶光殿香 敬造靑谷重刱比丘尙聰 全爲百分常住僧堂所大藏印 成商轉法輪廣度衆生 同願駕 洛府院君金師幸贊成事金溱入絲金信剛靑銅夫金” 신덕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조성되었다는 내용과 김신강(金信剛)이라는 인물이 입사를 담당했으며, 청동으로 만들었다는 명문이 있다.

4)

『世祖實錄』 卷45 세조14년(1468) 1월 26일, “丁亥/貞懿公主獻銀入絲靑銅火鑪一事, 賜京倉米三百五十石以償之.”

5)

현재 조선 후기 조총 등과 같은 무기 중 화기류에 이를 상징하기 위한 문자인 현(玄)을 끼움입사로 시문한 유물이 다수 전해지고 있다. 철에도 입사의 세부기법 중 끼움입사를 적용한 것은 균일한 기벽 두께와 정밀한 총포 구경 및 경도 확보를 위함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표면 정질이 많은 쪼음입사의 공정을 생각하면 단편적인 이유가 추론되지만 보다 면밀한 검토가 필요하다.

6)

『각사등록』은 금제를 취하기 전 금제의 필요성을 논하기 위해 당시 담뱃대의 사치풍조를 논하며 금제를 건의하는데 여기에 오동이 포함되었다. 『各司謄錄』 統制營關牒, 고종10년(1873) 8월 초6일, “煙臺一種言之, 金雕銀飾, 爭相奇巧 … 以後煙臺之金銀烏銅雕飾自, 先者産各處, 而一切通禁…” 그리고 실제 8월 21일 금제를 취했다. 『各司謄錄』 統制營關牒, 고종10년(1873) 8월 21일. “煙臺之金銀烏銅雕飾者, 一切通禁.…”.

7)

“…入絲匠徐勉造…” <지정28년명 향완> (표훈사, 1368). 이 외에도 고려시대에는 청동장인이 만들었다거나(지정6년 상원사명 향완, 1364), 누공(縷工, 지정12년 용장선사명 향완, 1352), 누수(縷手, 지정4년명 중흥사 향완, 1344) 등 입사를 다룬 장인을 지칭한 명칭이 명문에 등장하며, 당대의 기법명이 확인되는 사례도 있다.

8)

『經國大典』 工典; 『大典續錄』 工曹 工匠條 (1491); 『典錄通考』 工匠條, 續錄, 工曹, (1706); 『大典通編』 工典 京工匠條 本曹 (1785); 『大典會通』 公典 京工匠條, 京工匠定額, 尙衣院(1865)

9)

김세린, 「조선시대 금속공예 입사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9), pp. 42-89. 현전하는 17-20세기 초 의궤 중 입사가 활용된 의례 대부분에서 확인되기에 입사장에게 지급된 끼움, 쪼음입사 관련 재료와 도구에 대한 근거 사료는 방대하다.

10)

사례로 18세기 경종, 영조대 사장 최창업(崔昌業)은 입사장, 쇄약장으로 차출된 바 있다. 최창업의 전문 분야에 대한 기록이 없어 구체적인 특기를 알 수는 없으나 최창업의 사례는 금속을 다루는 장인 중 입사기술을 지니고 있어 이를 포괄해 작업한 장인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최창업이 참여한 공역은 다음과 같다. 『肅宗國葬都監儀軌』 (1720, 入絲匠), 『景宗國葬都監儀軌』 (1725, 入絲匠), 『宣懿王后國葬都監儀軌』 (1731, 入絲匠), 『莊祖世子愛冊時冊禮都監儀軌』 (1736, 鎖鑰匠). 조선시대 장인 관련 선행 연구 성과에 따르면 왕실 공역은 장인의 신상과 특기 등이 정리된 성책(成册)을 마련해 공역의 특성과 장인의 기술에 맞춰 장색을 분업 했었던 것이 파악된다. 장경희, 「조선시대 철물 제작 장인 연구」, 『한국공예논총』 17-1(2014), p. 58. 따라서 사장, 관장을 막론하고 금속을 다루는 사장 중 입사 기술을 갖추고 있다면 도감의 상황에 따라 입사장이나 보유 기술에 의거해 다른 장색의 금속 장인으로 배속되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11)

여러 사례 중 의궤를 통해 1621~1649년까지 활동이 확인되는 상의원 소속 입사장 안인남(安仁男: 생몰년 미상)에 대해 살펴보면 9개의 공역에 참여했으며 기본적으로 상의원 소속 입사장이지만 공역에서 입사장은 물론 조각장(雕刻匠), 조각장 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안인남이 참여한 공역 및 장색이 기록된 의궤는 다음과 같다. 『光海朝尊崇都監儀軌』 (1620, 入絲匠), 『昭顯世子嘉禮都監儀軌』(1627, 入絲匠), 『元宗禮葬都監儀軌』 (1627, 彫刻匠), 『仁穆王后山陵都監儀軌』 (1632, 彫刻匠), 『仁祖壯烈后嘉禮都監儀軌』 (1638, 雕刻匠), 『昭顯世子禮葬都監儀軌』(1645, 入絲匠), 『孝宗王世子及嬪宮冊禮都監儀軌』 (1645, 入絲匠), 『昭顯世子廟號都監儀軌』 (1645, 大桴石所 彫刻匠邊首), 『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 (1649, 大桴石所 彫刻匠邊首).

12)

김세린, 「삶의 풍경과 기술의 이음을 담은 공예, 입사(入絲)」, 『상감-이질적인 것들의 어우러짐』 (호림박물관, 2022), p. 227.

13)

김세린, 앞의 논고(2022), p. 228.

14)

일성정시의는 낮에 태양 뿐 아니라 밤에는 북극을 중심으로 행성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한다는 사실을 적용해 시간을 측정할 수 있도록 고안되었다. 북극을 향하는 정극환을 중심으로 가장 안쪽에는 성구백각환, 가운데는 일구백각환, 바깥쪽에는 주천도분환이 있다. 일구백각환과 성구백각환에는 12시와 100각 눈금이 새겨져 있다. 주천도분환에는 365.25도인 주천도수가 새겨져 있다. 가운데에 위치한 일구백각환은 고정되어 있고, 나머지 2개의 환은 각각 십자받침 위에서 회전한다. 출처 - 한국천문학회, 위키천문백과사전: http://wiki.kas.org/index.php/일성정시의(검색일 2022. 11. 29.)

15)

국립고궁박물관, 『인사동 출토유물 공개전』 (국립고궁박물관, 2021), p. 41.

16)

국립고궁박물관, 『나라 밖 문화재의 여정』 (국립고궁박물관, 2022), p. 61.

17)

대한제국까지 앙부일구 제작이 이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유물로는 1899년 제작된 <앙부일구>(국립고궁박물관)가 있다. 조선의 Ⅰ유형 끼움입사로 주요 요소를 시문했는데 밑면에 음각으로 “光武三年己亥 仲秋. 臣 姜湕 謹製”라는 명문이 있어 강건(姜湕, 1843~1909)이라는 장인이 앙부일구를 제작했음이 확인된 사례이다. 1899년 앙부일구는 해시계에 끼움입사를 한 전통이 대한제국에서도 유지되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18)

이용진, 「고려시대 청동은입사향완의 범자 해석」, 『역사민속학』 36(2011), p. 9.

19)

향로인 <해인사청동은입사정형향로> (1490, 해인사성보박물관)의 장식도 고려 끼움입사와 동일한 시문법을 취하고 있다.

20)

국립문화재연구소, 『백동연죽장』 (민속원, 2006), pp. 164-170.

21)

『萬機要覽』 財用編4, 金·銀·銅·鉛, “…戶曹銀有四名. 曰天銀, 地銀, 玄銀, 黃銀. 天銀用於御用器皿. 地銀用於支勑禮單. 玄銀, 黃銀用於諸般經用. 一年所捧不能當所下. 故天銀, 地銀. 以價磨鍊. 逢授白木廛. 使之貿銀吹鍊. 臨時取用.”

22)

입사은자가 확인되는 의궤는 다음과 같으며 17세기를 중심으로 나타난다. 『懿仁王后尊號大妃殿上尊號中宮殿冊禮王世子冊禮冠禮時冊禮都監儀軌』 (1609), 『宣祖大王懿仁王后祔廟都監儀軌』 (1610), 『光海君私親追崇都監儀軌』 (1610), 『宣祖懿仁王后恭聖王后追崇都監儀軌』 (1616), 『光海君尊崇都監儀軌』 (1621), 『宣祖懿仁王后恭聖王后尊號都監儀軌』 (1621), 『仁祖莊烈后嘉禮都監儀軌』 (1638), 『肅宗仁顯后嘉禮都監儀軌』 (1680). 『顯宗明聖王后嘉禮都監儀軌』 (1651).

23)

입사은이 확인되는 의궤는 다음과 같으며 17세기부터 대한제국기인 20세기 초까지 고루 확인된다. 『孝宗王世子及嬪宮冊禮都監儀軌』 (1645), 『明聖王后冊禮都監儀軌』 (1661), 『別三房儀軌』 (1661), 『肅宗王世子冊禮都監儀軌』 (1667), 『肅宗仁敬王后嘉禮都監儀軌』 (1671), 『別三房儀軌』 (1677), 『景宗王世子冊禮都監儀軌』 (1690), 『玉山大嬪陞后受冊時冊禮都監都廳儀軌』 (1690), 『肅宗仁顯王后冊禮都監儀軌』 (1694), 『景宗端懿后嘉禮都監儀軌』(1696), 『愍懷嬪復位宣諡都監儀軌』 (1718), 『端懿嬪禮葬都監都廳儀軌』 (1718), 『英祖王世弟受冊時冊禮都監儀軌』 (1721), 『別三房儀軌』 (1722), 『孝章世子冊禮都監儀軌』 (1725). 『別三房儀軌』 (1726), 『宣懿王后國葬都監儀軌』(1731), 『賢嬪玉印造成都監儀軌』 (1735), 『思悼世子冊禮都監儀軌』 (1736), 『端敬王后復位祔廟都監儀軌』 (1739), 『孝宗加上諡號都監儀軌』 (1740), 『思悼世子嘉禮都監儀軌』 (1744), 『懿昭世孫冊禮都監儀軌』 (1751), 『孝純賢嬪禮葬都監儀軌』 (1752), 『英祖貞純王后嘉禮都監儀軌』 (1759), 『正祖孝懿王后嘉禮廳儀軌』 (1762), 『英祖國葬都監儀軌』 (1776), 『莊獻世子上諡封園都監儀軌』 (1776), 『眞宗追崇都監儀軌』 (1777), 『文孝世子冊禮都監儀軌』 (1784), 『正祖國葬都監儀軌』 (1800), 『純祖純元王后嘉禮都監儀軌』 (1802), 『貞純王后國葬都監儀軌』 (1805), 『孝明世子嘉禮都監儀軌』 (1819), 『孝懿王后國葬都監儀軌』 (1821), 『孝明世子葬禮都監儀軌』 (1830), 『純祖國葬都監儀軌』(1835), 『孝顯王后國葬都監儀軌』 (1843), 『憲宗孝定王后嘉禮都監儀軌』 (1845), 『憲宗國葬都監儀軌』 (1849), 『純元王后國葬都監儀軌』 (1857), 『哲宗國葬都監儀軌』 (1865), 『神貞王后國葬都監儀軌』 (1892). 『明成皇后國葬都監儀軌』 (1898), 『純明妃國葬都監儀軌』 (1904), 『純宗純貞皇后嘉禮都監儀軌』 (1906).

24)

입사천은이 확인되는 의궤는 다음과 같으며 18-19세기에 확인된다. 『貞聖王后冊禮都監儀軌』 (1726), 『仁元王后淑嬪英祖貞聖王后尊崇都監儀軌』 (1756), 『顯宗明聖王后英祖貞聖王后貞純王后上號都監儀軌』 (1773), 『莊獻世子上諡封園都監儀軌』 (1776), 『孝懿王后冊禮都監儀軌』 (1778), 『貞純王后尊崇都監儀軌』 (1778). 『英祖貞聖王后眞宗孝純王后祔廟都監儀軌』 (1778), 『貞純王后莊獻世子惠嬪尊號都監儀軌』 (1783), 『英祖貞聖王后貞純王后莊獻世子惠嬪尊號都監儀軌』 (1784), 『貞純王后加上尊號都監儀軌』 (1787), 『貞純王后孝懿王后尊崇都監儀軌』 (1802), 『綏嬪葬禮都監儀軌』 (1823).

25)

『湛軒書內集』 卷2, 日記, 桂坊日記. “…今云礦銀萊銀何謂. 臣曰. 礦銀者. 天銀也. 我國銀店所煉也. 萊銀者. 倭銀之來自東萊者. 所謂錠銀也…”

26)

『湛軒書』 外集 卷4, 籌解需用內編 上, “…天銀三百四十五兩. 每兩換錠銀一兩四錢. 問錠銀幾何. 答曰. 四百八十三兩.…”

27)

김세린, 「조선 후기 연초문화와 철제입사담배합의 양상」, 『미술사논단』 49(2019), pp. 153-154.

28)

『世宗實錄』 卷150 地理志, 경상도 경주부 울산군, “…鐵場在郡北達川里, 産白銅, 鐵, 水鐵, 生鐵.”

29)

『동국여지지』 (1656)에는 경기도 영평, 호서의 공주와 진잠, 호남의 순창, 창평, 흥양, 진산, 영광, 강진, 해남, 영남의 영해, 거제, 관동의 평창, 금성, 해서의 수안, 장연, 관서의 구성, 삼등 등에서 동이 생산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유형원의 『동국여지지』를 인용하며 국내에 구리가 나는데도 일본에서 수입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하기도 했다.

30)

『備邊司謄錄』 74冊 경종3년(1723), “… 而在前則生銅一稱價銀不過十兩, 今則銅價漸貴幾, 至於十八九兩之多云, 以此言之,…”

31)

『備邊司謄錄』 107冊 영조16년(1740), “生銅非我國所産, 故凡公私之用, 遠貿於倭國, 每患苟簡矣, 向者江原監司, 以寧越地所産銅鐵, 上送備局, 故自本曹試令鑄器, 則無欠造成, 品亦精好, 實爲多幸, 蓋生銅取用之法, 添入鍮鑞, 則爲鍮鐵, 添入常鑞, 則爲鑄鐵, 添入含錫, 則爲豆錫, 生銅一物, 鎔鑄器用, 其路甚廣, 今此銅脈, 若其豐盛, 則有用之物…”

32)

청동과 주동은 『오주서종박물고변』에만 기록되어 있어 해당 문헌만 표에 넣었다.

33)

『五洲書種博物考辨』 卷1 靑銅類, 制靑銅法.

34)

『오주서종박물고변』 卷1 黃銅類, 制黃銅法.

35)

『임원경제지』 贍用志 卷4 工制總纂 黃銅.

36)

『오주서종박물고변』 卷1 烏銅類, 制烏銅法.

37)

『오주서종박물고변』 卷1 烏銅類, 制假烏銅法.

38)

『임원경제지』 贍用志 卷4 工制總纂 烏銅.

39)

『오주서종박물고변』 卷1 白銅類, 制法.

40)

『임원경제지』 贍用志 卷4 工制總纂 治銅.

41)

주동은 주물한 구리를 의미하지만 본 책에서는 구리-아연 합금(Cu-Zn)인 황동이나 구리-납 합금(Cu-Pb)를 의미한다. 이규경 저, 최주 역, 『오주서종박물고변』 (학연문화사, 1998), p. 93. 주동 주석1.

42)

『오주서종박물고변』 卷1 鑄銅類 制鑄銅法.

43)

『임원경제지』 贍用志 卷4 工制總纂 烏銅; 『임원경제지』 贍用志 卷4 工制總纂 治銅.

44)

『各司謄錄』 統制營關牒, 고종10년(1873) 8월 초6일, “煙臺一種言之, 金雕銀飾, 爭相奇巧 … 以後煙臺之金銀烏銅雕飾自, 先者産各處, 而一切通禁…”

45)

『임원경제지』 贍用志 卷4 工制總纂 治銅, “…用砒升者爲白銅, 工費倍難, 侈者事之.…”

46)

『임원경제지』 贍用志 卷4 工制總纂 銅, “…赤銅來自日本爐甘石, 貿之中國, 煉成黃銅, 其實我國所用黃, 赤銅, 皆非土産…”

47)

『오주서종박물고변』 卷1 烏銅類, 制烏銅法; 『오주서종박물고변』 卷1 白銅 한편 『조선왕조실록』에는 15세기 이후 관이 주도한 중국, 일본과의 장인 및 기술 교류와 관련된 기록들이 존재한다. 조선 후기에는 당시 사회상으로 미루어 볼 때 전기보다 민, 관의 기술 교류가 보다 활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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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3.

<담뱃대煙竹> Tobacco Pipe, Late Chosŏn, Bronze, Bamboo, L. 33.5cm, Nation Folk Museum of Korea (Nation Folk Museum of Korea, http://www.nfm.go.kr)

Fig. 14.

Detail of Taet’ong (inlaid)

Fig. 15.

<자물쇠> Lock, Late Chosŏn, Bronze, W. 5.8cm, Nation Folk Museum of Korea (Nation Folk Museum of Korea, http://www.nfm.go.kr)

Fig. 16.

Detail of the pattern (Copper inlaid)

Fig. 17.

<장도粧刀> Encased Ornamental Knife, Late Chosŏn, Iron, persimmon tree, L. 13.0cm, Jeonju University Museum (e-museum: http://emuseum.go.kr)

Fig. 18.

Detail of decorations (Copper inlaid)

Fig. 1.

<청동은입사청곡사명향완靑銅銀入絲靑 谷寺銘香垸>, Bronze Incense Burner with Silver Inlay from Cheonggoksa Temple, 1397, Chosŏn, W. 38.2cm, H. 39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museum.go.kr)

Fig. 2.

<청동 은입사행연靑 銅 銀 入絲行硯>, Bronze Haengyŏn with Silver inlay, Late Chosŏn, W. 2.2cm, H. 2 .7cm, L. 18.4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museum.go.kr)

Fig. 3.

<청동은입사나침반靑銅銀 入絲 輪 圖>, Compass, Late Chosŏn, Bronze with silver inlay, W. 30.7cm, H. 0.3cm, Seoul Museum of History (Seoul Museum of History, http://museum.seoul.go.kr)

Fig. 4.

<화승총火繩銃> 동입사 부 분, Matchlack Rif le, Late Chosŏn, Iron gun barrel with bronze inlay, L. 102cm (total lenght), D. 1.4cm (caliber), 2.3cm (barrel), GRASSI Museum of Ethnography Leipzig in Germany (Korean Art Collection GRASSI Museum fur Volkerkunde zu Leipzig Germany, p. 1155)

Fig. 5.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 Sun-and-star time determining Instrument, Early Chosŏn, Excavated in Insa-dong, Seoul. Brass, W. 41.1cm, National Palace Museum (Encounter with the Brilliant Scientific Technology of the Chosŏn Dynasty, 2022, p. 40)

Fig. 6.

Detail of a metal inlay of the Sun-and-star time determining Instrument (Encounter with the Brilliant Scientific Technology of the Chosŏn Dynasty, 2022, p. 41)

Fig. 7.

<소일영小日影> Simplified sundial, Early Chosŏn, Brass, W. 41.2cm, nickel, National Palace, National Palace Museum (National Palace Museum, http://gogung.go.kr)

Fig. 8.

Detail of a metal inlay of the Simplified sundial (National Palace Museum, http://gogung.go.kr)

Fig. 9.

<앙부일구仰釜日晷> Hemispherical sundial, After the 18th century, Chosŏn, Brass, W. 24.3cm, H. 10.0cm, National Palace Museum (http://gogung.go.kr)

Fig. 10.

<건륭6년명중국척乾隆六年銘中國尺> Ruler with Four Traditional Chinese Rules, 1741, Chosŏn, Brass, L. 31.0cm, W. 1.9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museum.go.kr)

Fig. 11.

Detail of a metal inlay (Fig. 10)

Fig. 12.

<담뱃대煙竹> Tobacco Pipe, 19th century, Chosŏn, Bronze, Bamboo, Bronze with black bronze inlaid, L. 52.7cm, Horim Museum (Photograph by the author). It shows a trace of making a cylinder shape by welding a plate after decorating it with a type II method.

Table 1.

<고려의 끼움입사와 조선의 Ⅰ유형 끼움입사 양상> Comparison Between Koryŏ’s kkium Inlay and Chosŏn’s kkium Inlay Type Ⅰ

Table 2.

<동합금 장식재를 사용한 Ⅰ유형 끼움입사의 양상> kkium Inlay Type Ⅰ Using Copper Alloy

Table 3.

<국가무형문화재 백동연죽장 보유자 황영보의 Ⅱ유형 시문 공정 일부> Detail of a Nickel-Copper Pipe Making Process Demonstrated by Hwang Yŏngpo (The national intangible cultural heritage holder for Paektong Yŏnjukchang)20

Table 4.

<『오주서종박물고변』, 『임원경제지』에 기록된 조선 후기 동합금 제법> The Method of Casting Copper Alloy in the Chosŏn Recorded in Ojusŏjong bangmulgobyŏn and Imwŏn’ Kyŏnjeji [32]

Type Record alloy method common material
Bronze 五洲書種博物考辨 When smelting drugs such as pansŏk and ch’osŏk together with copper, it becomes bronze. [33]
Ojusŏjongbangmulgobyŏn
Brass 五洲書種博物考辨 Brass is made by melting Nogamsŏk or zinc into copper. After putting 4 kŭn in the melting pot for every 6 kŭn red copper roots and repeating the melting process, cool it and take it out, it becomes brass. In the old days, people called this Yusŏk. [34] Copper+Zinc
Ojusŏjongbangmulgobyŏn
林園經濟志 Koreans smelted copper to make yellowish bowls. In general, this is called Yugi, but the dialect has been misrepresented. Red copper and Japanese zinc are sometimes cast in a ratio of 6:4 to copper. A bowl called “samhwa hwangdong (三火黃銅)” or “sahwa suktong (四火熟銅)” means that copper and Japanese zinc are mixed in a 7:3 ratio and cast. [35]
Imwŏn’gyŏngjeji
Black copper 五洲書種博物考辨 True black copper(眞烏銅): One nyang of red copper with 5 or 6 pun of thin gold is of good quality. A thin layer of gold with 3 pun in it is considered low quality. [36] Copper+Gold
Ojusŏjongbangmulgobyŏn Fake Black Copper(假烏銅): We mix and match the juices to soak the copper or scorch with sulfur smoke..[37]
林園經濟志 Metal made by adding 30Mok(3nyang) of white lead to 100Mok(10nyang) of copper is called chahŭngmok. Add 3 don gold to 100 Mok chahŭngmok. chahŭngmok and gold are mixed and melted to form a metal. Here, 4 ch’o, 4 iron vitriol, and 1 don of water are boiled and soaked to make the color black. [38]
Imwŏn’gyŏngjeji
Cuproni 五洲書種博物考辨 It is not known where the yellow f lavor comes from. If you smelt yellow incense to make it, it turns white like silver. Copper is soft and can be made into strings, and it hardens when boiled with licorice. [39] Copper+White arsenic
Ojusŏjongbangmulgobyŏn
林園經濟志 Cupronickel is made by mixing copper with emergency, but it is used by people who like luxury because it is expensive and difficult to make. [40]
Imwŏn’gyŏngjeji
Copper for casting [41] 五洲書種博物考辨 Among the cast bowls, those made by mixing red copper and zinc half and half are of poor quality. In severe cases, zinc 6 and copper 4 are mixed. It is made from samhwa hwangdong (三火黃銅) and sahwa suktong (四火熟銅) with good quality, and zinc 3 is blended with 7 copper. [42]
Ojusŏjongbangmulgobyŏ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