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6; 2022 > Article |
|
1 2013년 강세황 탄생 300주년을 기념한 국립중앙박물관의 특별전 부제인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및 같은 해 한국 미술사학회 주최의 학술대회의 성과물을 모은 책의 부제인 ‘조선후기 문인화가의 표상’은 강세황이 그 시대 문예의 선구자 및 대표자였다는 인식을 반영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편, 『표암 강세황-탄신 300주년 기념 특별전 시대를 앞서 간 예술혼』 (국립중앙박물관, 2013); 한국미술사학회 편, 『조선후기 문인화가의 표상』 (경인문화사, 2013).
3 李麟祥(1710~1760)은 절필과 유사한 일화를 지니고 있다. 그와 절친했던 黃景源(1709~1787)에 의하면 이인상은 사근도 찰방에 제수되자 馬政에 해가되지 않을까 걱정하여 그림을 모두 꺼내 불태웠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절필을 거론하지 않았지만, 관직에 나가며 그림을 태우는 행위는 이후로 그림을 그리지 않겠다는 의지를 의미할 것이다. 黃景源, 『江漢集』 卷7, 「送李元靈麟祥序」, “景源友人李元靈, 喜畵山水, 日執筆揮灑不厭. 及爲察訪沙斤驛, 盡出其畵而焚之, 恐害於政也.”
4 강세황의 생애와 안산 이주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변영섭, 『豹菴姜世晃繪畵硏究』 (일지사, 1988), pp. 8-36[개정판: 변영섭, 『표암 강세황 회화 연구』 (사회평론 아카데미, 2016)]; 이경화, 「강세황 연구」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6), pp. 39-64 참고.
6 姜世晃, 「豹翁自誌」, 『豹菴遺稿』 (정신문화연구원, 1979), pp. 463-472; 강세황, 『豹菴遺稿』 (지식산업사, 2010), 김종진 역, p. 650. “癸未仲子俒中第. 聖上念舊臣忠貞之篤, 追先王眷遇之隆, 恩敎鄭重. 筵臣奏賤臣以能文章善書畫, 上特敎曰: 末世多忮心, 恐人或有以賤技小之者, 勿復言善畫事. 盖聖意受惜微臣, 曲加覆護, 乃出尋常至此. 臣承是敎, 伏地警號泣涕三日, 目爲之腫.”
7 『병세재언록』 화주록은 강세황의 절필에 관한 다른 사정을 전하고 있다. 강세황이 영조대에 어용을 모사한 후 노년까지 절필했다는 내용이다. 실제로 1763년은 영조의 70세 어진 도사가 있었던 해이다. 이 해 1월에 시행된 70세 어진 제작은 제작 과정에 관한 기록이 상세하게 남아 있지 않지만, 변상벽이 주관화사로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규상이 전하는 내용은 윤두서·조영석의 사건과 유사하여 세간에 회자되던 이야기들이 착종되었을 가능성도 보인다. 이규상, 앞의 책, p. 147; 진준현, 「영조·정조대 어진도사와 화가들」, 『서울대학교박물관 연보』 6(1994. 12), pp. 19-72.
8 강빈이 지은 행장은 강세황, 앞의 책(1979), p. 494; 강세황, 앞의 책(2010), pp. 664-665 참조. “人心多忮, 易有以賤技小之者, 勿復言善畫事. 向來徐命膺言, ‘此人有此技,’ 予之不答有意也.”
12 金壽恒, 『文谷集』 卷28, 「寄業兒」. 김창업은 젊은 시절부터 그림으로 사대부 사회에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었다. 부친 김수항은 김창업의 과도한 회화 수응을 알고 ‘一刀斷割,’ 즉 단칼로 베어버리 듯 그림을 그만둘 것을 권고하였다. 김창업은 비록 절필을 표방하지는 않았지만 일생동안 자신의 재능을 마음껏 발휘하지 못하였다. 당시 정국을 이끄는 안동김문의 일원이라는 지위는 그에게 餘技로서 회화를 즐기는 일조차 어렵게 만들었던 것으로 보인다.
13 姜希孟, 「仁齋姜公行狀」, 『晉山世藁』 (景仁文化社, 1976)(景仁文化社, 1976), pp. 134-136; 조선 초기의 회화관에 관해서는 홍선표, 「朝鮮 初期 繪畵의 思想的 기반」, 『조선시대회화사론』 (문예출판사, 1999), pp. 192-230.
15 『英祖實錄』 卷81, 英祖 30年(1754) 4月 5日. 金祖淳, 『楓皐集』 卷16, 「題謙齋畫帖」. 1729년 영조가 정선을 의금부도사에 임명했을 때 이와 유사한 반발이 발생했다. 정선이 제수 받은 의금부도사는 종6품의 관직으로 당시의 반발은 1754년만큼 강하지 않았다.
16 안대회, 「조선 후기 自選墓誌銘 연구」, 『韓國漢文學硏究』 31(2003), pp. 237-266; 정민, 「18세기 우정론의 맥락에서 본 이용휴의 生誌銘攷」, 『한국학논집』 34(2000), pp. 301-325.
18 영조 말년에 시행된 세손의 대리청정에 대해서는 『英祖實錄』 英祖 51年(1775) 11月 20日; 오갑균, 「정조초의 왕권 확립과 시벽론」, 『청주교육대학논문집』 36(1999), pp. 119-190 참조.
20 문신정시: 조선시대에 임금의 특명으로 당상관 이하 문신에게 보게 하던 과거시험. 문신정시의 시행과 의미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차미희, 「17~18세기 전반기 문과 급제자의 6품 관직 승진」, 『韓國史學報』 47(2012), pp. 75-108 참조.
21 사직은 五衛, 부총관은 五衛都摠府에 소속된 서반의 관직이었다. 중앙의 수비를 담당하였던 오위와 오위도총부는 임진왜란 이후로 유명무실화되었다. 소속 관직은 이름만 남겨졌으며 실무는 거의 없었다.
23 《부안실경도》의 상세한 내용에 관하여는 변영섭, 「豹菴 姜世晃의 〈禹金巖圖〉와 「遊禹金巖記」」, 『美術資料』 78(국립중앙박물관, 2009), pp. 24-60; Burglind Jungmann·Liangren Zhang, “Kang Sehwang’s Scenes of Puan Prefecture- Describing Actual Landscape Through Literati Ideals.” Arts Asiatiques, Vol. 65 (2010), pp. 59-78 참조. 기문의 내용은 강세황, 「유우금암기」, 앞의 책(1979), pp. 271-274; 강세황, 앞의 책(2010), pp. 395-401 참조. 변영섭은 앞의 논문에서 작품 전체를 〈우금암도〉로서 명명하였다. 그러나 우금암은 이 작품 내에 그려진 장면의 한 장면으로 지칭에 혼동이 따르기도 한다. Jungman과 Zang은 ‘Scenes of Puan Prefecture’로 명명하였으며 이는 ‘扶安縣圖’로 번역할 수 있다. 부안현도는 우리말의 관습상 부안의 행정지도라는 의미에 가깝다. 본고에서는 회화사의 관행을 고려하여 작품 전체를 《부안실경도》로 명명하고 각 장면의 제목은 화면에 적힌 지명을 따르고자 한다. 《부안실경도》의 각 장소에 대한 고증, 기문의 분석 등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내용은 변영섭과 Jungman의 글에서 상세하게 논증하였으므로 본고에서는 이를 참고하고 중복된 설명은 생략한다.
25 「표옹자지」가 수록된 《정춘루첩》에는 소조상과 초본의 초상화 두 점이 수록되어 있다. 이 서화첩은 소장자의 사정으로 공개되지 않고 있기 때문에 필자는 기존 연구자들의 연구결과를 전적으로 따르고자 한다. 소조상의 제작 시기는 연구자에 따라 자전의 집필과 같은 1766년으로 보기도 하고, 화첩이 성첩된 1773년으로 보기도 한다. 변영섭, 앞의 책(1988), pp. 30-36; 강관식, 「표암 강세황 초상화의 실존적 맥락과 의관 도상학」, 『표암 강세황 조선 후기 문인화가의 표상』 (한국미술사학회, 2013), pp. 141-161.
27 Fig 4~7은 『한국의 미: 산수화』 하편에 함께 게재되었다. 이들은 각각 《산수대련》 (Ⅰ), 《산수대련》 (Ⅱ)로 소개되었다. 이 중 《산수대련》 (Ⅱ)는 〈초옥한담도〉와 〈강상조어도〉라는 제목으로 통용되고 있다. 개인소장의 《산수대련》(Ⅰ)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의 이건희 기증품에 포함되어 있으며, 각 폭의 도상을 따라 〈계산기려도〉 및 〈계산허정도〉라는 이름이 새롭게 붙여졌다. 『한국의 미』에 기재된 두 작품 크기에 오류가 있으며 〈초옥한담도〉, 〈강상조어도〉와 더불어 4점의 산수화는 비슷한 크기로 확인되었다. 두 작품의 소장 사항에 관하여는 조지윤, 이재호 학예사의 조언을 받았다. 중앙일보사, 『한국의 미: 산수화』 하 (중앙일보, 1982), pl. 105. 106, 107 및 108.
28 강세황의 《右軍小楷帖》에는 王羲之의 〈孝女曹娥碑〉와 〈黃庭經〉 탁본이 장첩되어 있다. 그가 이 탁본을 입수한 사정은 마지막에 첨부된 발문에 나타나며, 이 글은 그의 문집 권5에 「題曹娥黃庭帖後」로 수록되었다. 필자는 소장자의 도움으로 《右軍小楷帖》을 살펴볼 수 있었다. 지면을 빌어 조사에 도움을 주신 김영복, 고연희, 박정애 선생님들께 감사드린다. 姜世晃, 「題曹娥黃庭帖後」, 앞의 책 권5(1979), pp. 325-326.
29 한국국제문화협회 편, 『해외소재 한국문화재 Ⅰ: 미국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한국국제문화협회, 1989), p. 194; 변영섭, 앞의 논문(2009), p. 49 Fig. 16 참고.
33 조영석이 제작한 조정만상은 기존에 1738년에 제작되었으며 전하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최근 이 그림이 京都大學校總合博物館에 〈松下安息圖〉라는 제목으로 소장되어 있음이 알려졌다. 조정만이 그림을 요청한 것은 1731년경이었지만, 조영석이 요청에 수응하여 그림을 제작한 시기는 조정만이 판서로 재직한 1735~1737년 사이로 파악된다. 본고에서는 어진 도사의 거부라는 절필의 계기, “그림을 그리지 않은지 오래되었다.”는 언급 등을 두루 참고하여 제작 시기를 조정만이 호조판서였던 1737년 무렵으로 판단하였다. 조영석의 회화 수응 및 절필에 관하여는 유홍준, 『화인열전』 1 (역사비평사, 2001), pp. 158-159; 이경화, 「조영석이 그린 이지당 조영복 초상: 연거복본의 제작과 함의를 중심으로」, 『한국문화』 95(2021), pp. 325-358; 이성훈, 「조영석 작 〈조정만 송하안식도〉 연구: 초상화에 투영된 ‘은일 의식’」, 『미술사와 시각문화』 29(2022), pp. 114-157.
36 강세황 만년의 서간과 문서에서는 喜安, 長喜, 匊喜 등 희자 돌림의 이름이 지속적으로 발견된다. 강세황이 71세 초상화를 제작할 때 주관한 자손이 ‘喜安’이었는데 이 역시 족보에서는 찾을 수 없는 이름이다. 강세황가의 후손이신 강우식 선생님은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어려서 집안의 아명으로 ‘喜’자를 사용하였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37 강이면은 1774년 생으로 강세황의 손자대의 인물 중 유일하게 유사한 연령을 보인다. 晋州姜氏竹窓公 后雪峯 白閣公派譜編纂委員會, 『晉州姜氏(죽창공・설봉공・백각공)世譜』 (광일사, 1987), p. 8.
42 『조선왕조실록』에는 1542년 校書館에서 『안씨가훈』을 직접 교정·간행하고자 한다는 기사가 수록되어 있다. 조선에서 다시 간행될 정도로 이 책은 사대부들에게 널리 보급되었던 유교 수신서였다. 안지추, 『안씨가훈』, 임동석 역주 (고즈윈, 2004), pp. 449-4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