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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조선후기 회화 주문제작의 확산과 영향*

Abstract

조선 후기에는 회화 수요의 확대에 따라 주문자가 화가에게 그림을 부탁하여 그려 받는 주문제작이 확산되었다. 주문자를 명시한 제발문이 그림 매매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화원과 직업화가의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주문과 소비의 양상을 반영한다.
회화의 주문제작은 주문자의 직접 주문, 중개나 서간을 통한 주문 등의 방법으로 성사되었다. 주문제작의 양상을 살펴보면 문인 관료층의 세거지와 명승지 실경의 수요가 높았고 사의산수화의 주문도 두드러졌다. 초상화는 주문제작을 거치는 대표적인 화목이었으며 문인 문화에 대한 향유 의지는 중국 문인을 주제로 한 고사인물화의 소비로 표출되었다. 축수를 기원하는 신선도와 길상성이 뚜렷한 화조영모화, 장식성까지 지닌 화훼화는 수요의 저변 확대에 따라 폭넓게 선호되었다.
주문제작의 관행은 조선 말기와 근대기 화단에도 영향을 미쳤으며 근대적 서화 소비와 유통의 전개를 조선 후기의 회화 주문제작에서부터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Abstract

The late Joseon period witnessed significant growth in the commissioning of paintings. This increased demand for paintings, which led to changes in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paintings, is evidenced by the increased number of painting inscriptions that specified the names of clients. Those painting inscriptions indicate that the client placed an order to the painter in person, via a broker, or through correspondence. They also reveal which pictorial subjects were particularly favored by clients. For instance, demand for paintings of true-view landscape of the client’s family hometown or of famous scenic places was particularly high among scholarofficials, and yet demand for conceptual landscape paintings still remained high. The portrait was emblematic of the genre of paintings that were to be commissioned first. Aspirations to take pleasure in Chinese literati culture were expressed in the consumption of narrative figure paintings. The subject of immortals, which symbolized the wish for longevity, and the subjects of flowers, plants, birds, and animals, which served as auspicious decoration, also gained currency as the basis of demand for painting broadened. The terms of commissioning paintings as formed in the late Joseon continuously shaped the painterly practice even after the fall of the Joseon, heralding the way paintings were distributed and consumed in modern Korea.

Ⅰ. 머리말

朝鮮後期 화단은 사회, 경제, 문화의 발달과 古董書畵 수요의 확대에 따라 다각도로 성장하였다.1 경화사족과 중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수요층은 유명 화가에게 그림을 주문 제작하였고, 이 과정에서 주문자의 요구에 부응할만한 역량 있는 화가의 성장도 두드러졌다.
圖畫署의 畵員들이 그린 그림은 주문자나 수요층의 기호와 요구를 반영할 것이라는 주장이 일찍이 제기되었다.2 그들은 公的·私的 활동을 병행했으며 影幀 모사에서 뛰어났던 화원에게 사대부의 개인적인 초상화 주문도 많았다.3 당시 화단의 수요 양상은 회화 수집과 수장을 추적한 선행 연구를 통해 보다 명확히 밝혀졌다.4 한편 鄭敾(1676∼1759)이 주문을 받고 제작한 작품들이 酬應畵라는 개념으로 해석되면서 조선후기 화단에서 전개된 회화 주문에 대한 흥미와 연구의 필요성도 증가하였다.5
회화의 주문제작은 조선 후기에 쓰인 용어는 아니지만 광의의 측면에서 주문자가 화가에게 원하는 그림을 부탁하여 그려 받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6 이 과정에서 주문자는 화가에게 그림에 대한 경제적 대가도 지급했던 것으로 파악되지만 현존 작품과 매매를 증명하는 기록이 함께 전하는 예는 거의 없다.7 다만 주문이나 매매 사례를 기록한 별도의 문헌 기록들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정도로, 전근대기 회화 작품의 경제적 소비와 유통을 명확하게 규명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오늘날 확인하기 어려운 것이지 회화의 주문제작과 소비 행위가 발생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이러한 연유로 기왕의 연구에서는 문헌 기록이 회화 수요를 증명하는 주요 근거로 제시되었으나, 이를 토대로 현존 작품까지 연결시켜 當代 화단의 제작과 소비 양상을 종합적으로 규명하는 것은 어렵고도 중요한 과제이다.
이 연구에서는 기왕의 연구 성과를 토대로 조선후기 회화 주문제작의 확산과 영향을 현존 작품을 중심으로 하여 고찰할 것이다. 조선후기 회화 작품에서는 화가가 누군가를 위해 그려준다는 내용의 題跋文이 상당수 파악된다. 누군가는 주문자일 수 있지만 화가와 교유하며 書畵를 교환하거나 혹은 선물로 그림을 받은 인물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즉 이러한 경계를 명확히 구분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작품이 지닌 감상의 목적, 소비의 기능에서 주문자의 제작 의도를 파악할 수 있다면 회화 수요의 성격이 작품 제작에 미친 영향과 의미를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회화 수요와 주문제작이 확산되던 조선후기 화단의 상황을 논하고, 회화 주문제작의 방법과 양상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를 토대로 수요층과 화가의 상호 작용 속에서 전개된 회화 주문제작과 소비가 조선후기 및 후대 화단의 발전에 다각도로 기여했음을 밝힐 것이다.

Ⅱ. 조선후기 회화 수요와 주문제작의 확산

조선 후기에 회화의 주문제작이 확산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요인은 수요층의 성장과 대두였다. 한양을 거점으로 관직과 경제적 부를 획득했던 경화사족과 중인층의 문화적 소비력은 회화 주문과 매매의 중요한 기반이었다. 그들은 도화서의 화원이나 민간의 유명 화가에게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주문하며 시각 문화의 소비에 기여했다. 화가에게도 주문제작 활동은 전문적인 기량을 닦아나가는 과정이자, 그림의 매매를 도모하여 생계를 유지하고 화가로서의 삶을 지속하는 필수적인 수단이었다.
가문이나 개인이 필요로 하는 그림을 주문제작했던 정황은 고려시대 문헌에서부터 파악된다. 『東文選』에는 李仁老(1152∼1220)가 畵局의 朴子雲에게 〈二相歸休圖〉를 청해 그리게 했다는 내용이 있어 도화기구의 화가가 문인관료의 주문에 응했음이 확인된다.8 李奎報(1168∼1241)의 『東國李相國集』에도 유명한 화가 韓 아무개에게 〈白衣觀音像〉을 그리게 했다고 전하는 등 민간에서 이름이 알려진 화가가 주문에 기용되었다.9
조선 시대부터는 현존 작품의 제문에서도 주문이나 부탁에 의한 제작이 이루어졌음이 확인된다. 1584년에 그려진 문인화가 金禔(1524∼1593)의 〈寒林霽雪圖〉에는 “만력 갑신년 가을에 양송거사가 안사확을 위해 한림제설도를 그렸다”는 내용의 제문이 전한다(Fig. 1).10 안사확에 대해서 알려진 바는 없지만 김시와 교유하던 문인이거나 이 작품을 요청한 주문자였을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다.
주문제작의 의도나 목적은 조선중기 유명 화원들의 작품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당시에는 李信欽(1570∼1631), 李澄(1581∼1674 이후), 李起龍(1600∼?), 韓時覺(1621∼?)과 같은 화원들과 평양에서 활동했던 曺世傑(1636∼1705 이후)이 別墅圖 및 契會圖 제작에 기용되었다.11 별서도는 가문의 권력과 경제력의 상징인 별서를 그린 것이고 계회도는 문인관료들의 모임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일찍이 집단의 공식적인 의미와 정체성을 시각화하는데 주문제작이 적극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門中의 엄중한 절차를 거쳐 제작되는 先祖의 초상화는 주문제작의 방식으로 완성되는 대표적인 주제였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姜世晃(1713∼1791)은 사람들이 자기의 얼굴을 그릴 때에는 훌륭한 화가를 예를 갖추어 초빙하는데, 화가가 모사를 잘하여 머리털 하나라도 닮지 않은 것이 없으면 비로소 만족하고 즐거워한다고 했다.12 즉 공식적인 繪事에서 적합한 화가를 선별하여 주문을 의뢰하는 예가 많았던 것으로, 초상화 주문제작에 관한 문헌기록이 풍부하게 남아있는 것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기인한 것이다.
강세황의 아들 姜亻寬 도 〈姜世晃 71歲像〉 제작에 李命基(1756∼1802년 이후)를 초빙했던 상황을 상세히 기록한 바 있다.13 그는 이명기가 초상화로 당대에 독보적이었기에 문무고관들이 모두 그에게 초상화를 맡겼다고 했는데, 이명기는 1791년 御眞 圖寫에서 주관화사로 활동하는 등 공과 사로 축적된 주문제작의 경험은 화가의 활동 반경과 역량을 제고시키는 중요한 요인이었다.14
“정유(1777)년에 金弘道(1745~1816 이후), 申漢枰(약 1726~1809 이후), 金應煥(1742~1789), 李寅文(1745~1821), 韓宗一(1740~?), 李宗賢(1748~1803) 등 이름난 화사들이 중부동 감목관 강희언의 집에 모여서 공사간의 주문에 응했다”는 馬聖麟(1727∼1798)의 기록은 유명 화원들이 궁중 繪事 이외의 주문 대응에도 분주했음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잘 알려진다.15 문헌 기록과 현존 작품을 통해 볼 때 當代 최고의 화원이었던 김홍도에게는 개인적인 주문 수요도 상당했다. 그에게 그림을 요청한 주문자는 고위 관료에서부터 규장각 각신, 중인층, 지방 士族, 인적 사항도 알 수 없는 인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파악되어 수요층의 성격과 범위도 확장되던 상황이 짐작된다.
다양화된 회화 수요는 민간에서 유명세를 획득한 화가들을 통해서도 충족되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 李玄煥(1713~1772)은 崔北(1712∼1786년 경)의 집 앞에 사방에서 찾아와 그림을 청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아 최북이 밀려드는 주문에 끝내 염증을 냈다고 회고하였다.16 조선말기 여항문인화가 趙熙龍(1789∼1859)은 김홍도가 돈이 없어 매화나무를 못 사고 있자, 어떤 이가 그림을 요청하는 예물로 돈 3천전을 보내준 일화를 언급하였다.17 여러 문헌 기록을 통해 볼 때 조선후기 주문 수요가 확장됨에 따라 회화의 소비와 유통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Ⅲ. 주문제작의 방법과 양상

조선 후기에 다채롭게 전개된 회화 주문제작의 확산과 그 영향을 주문제작의 방법과 양상을 살펴봄으로써 구체적으로 논의하도록 하겠다.

1. 주문제작의 방법

조선후기 회화의 주문은 크게 주문자의 직접 주문, 중개인과 같은 제3자를 통한 주문, 書簡을 통한 주문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첫째, 주문자는 화가에게 직접 그림을 주문하였다. 주문자가 화가를 방문하여 그림을 요청하거나 단기간 혹은 장기간에 걸쳐 거처와 숙식을 제공하며 그림을 그려 받는 것은 전통 사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주문 방식이었다.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한 韓宗裕(1737∼?)가 그린 〈姜世晃肖像〉에는 다음과 같은 제문이 전한다(Fig. 2).
신축년 9월 11일 내가 어용도사 감동관으로서 규장각에 가서 화사 한종유에게 부탁하여 부채 위에 나의 작은 초상화를 그리게 하였다.18
주문자인 강세황은 어용도사 감동관의 일을 맡아 궁중에 머무르던 중 한종유를 찾아가 자신의 초상을 그려 달라고 직접 요청했던 것이다. 소나무 아래 野服 차림으로 등장하는 문인의 이미지가 뚜렷한 이 작품은 주문자인 강세황이 원했던 자아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주문자가 유명 화가를 직접 방문하여 그림을 요청했던 사실은 여러 문헌 기록에 다채롭게 전한다. 申光洙(1712∼1775)의 「崔北雪江圖歌」에는 최북이 한양에서 그림을 파는 화가인데 “추운 날씨에 헤진 담요 위에 손님을 앉힌다”는 구절이 등장한다.19 여기서 손님은 화가의 집으로 그림을 청하러 온 주문자를 의미할 것이다. 그림 잘 그리기로 명성이 자자했던 최북에게 병풍과 족자를 들고 와서 그림을 요청하는 사람은 매우 많았고, 그는 바람처럼 소매를 휘둘러 잠깐 사이에 그림을 완성했다고 한다.20 직업화가로 활동한 李在寬(1783~1838 이후)에게는 欣涓館이라는 畵所가 있었는데, 그의 교우였던 조희룡은 흔연관을 방문했을 때 이재관이 이웃의 스님을 위해 觀音像을 그리고 있었다고 회고하였다.21 이처럼 주문자가 화가의 집이나 작업 공간으로 찾아와 그림을 부탁하는 것은 보편적인 관행이었다.
또한 주문자는 화가를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거처와 숙식을 제공하며 그림을 요청하기도 했다. 조선 후기의 문인 鄭克淳(1700∼1753)이 卞相璧(1726 이전∼1775)을 초대하여 고양이 그림을 주문했던 사실은 다음과 같이 알려진다.
위항인 변씨는 약관에 고양이 그림에 능하여 서울에서 명성을 날렸다. 문에 이르러 맞으려는 자가 매일 백 명을 헤아렸다. (중략) 병인년 겨울, 내가 힘써 오게 하여 이틀을 머물게 하고 고양이 그림을 얻었다.22
규장각 검서관으로 활동했던 李德懋(1741∼1793)가 1788년 4월 2일, 父親의 생신연에 김홍도를 집으로 초대했던 것도 그림 주문을 위해서였다.23 이덕무는 이 자리에서 파초, 국화, 매죽, 壽星 등의 소재를 그려줄 것을 요청함으로써 연회에 참가한 지인들에게는 그림 감상의 기회를 제공하고, 부친께는 祝壽를 기원하는 〈壽星圖〉를 선물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주문자는 주문과 제작 과정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자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시하였다.
둘째, 조선 후기에 그림 주문이 제3자의 중개를 통해서도 이루어진 점은 양반 출신 黃胤錫(1729~1791)이 쓴 일기인 『頤齋亂藁』를 통해 확인된다. 황윤석은 1771년 4월, 宗簿寺 直長으로 재직 중이던 尹在德이 와서 최북의 그림 8첩을 보내겠다고 약속하자, 자신이 假帖 6丈을 다시 부탁했다고 기록했다.24 황윤석과 최북 사이에서 의사 전달을 했던 윤재덕은 小科 합격자를 뜻하는 ‘上舍’로 표기되어 있어 그림 중개를 전문으로 하기 보다는 필요에 따라 일을 맡아 수행하지 않았을까 한다.
셋째, 주문제작에서 書簡은 口頭로 설명하기 모호한 구체적이고 상세한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1726년 화원 奏再奚(1691~1769)가 〈柳綏(1678∼?) 肖像〉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보낸 서간이 남아 있는데, 진재해는 초상화 완성에 더 필요한 채색을 다음과 같이 요청했다.
각종 재료는 모사하러 들어올 때, 약간 가지고 온 것이 있으나 그 중 주홍 두 색분은 빼놓고 와서 얻을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습니다. 감히 외람된 말씀이지만 색분 6~7가지나 혹 주홍분이 있으시면 곧 당홍이든 왜홍이든 간에 1돈만 이편에 부쳐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25
위의 편지글에 의하면 진재해는 주문 의뢰를 받고 초상을 그릴 재료를 미리 준비해왔지만 주홍색 분을 빼놓고 온 사실을 확인하고 서신으로 주문자에게 연락을 취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후기 서화 감평에 참여했던 成大中(1732∼1812)도 김홍도에게 서간을 보내 ‘연꽃 여러 대궁을 부서진 파초 잎 하나가 덮고 있는 그림’을 주문하였다. 당시 성대중은 자신이 직접 그린 畵本을 서간에 동봉해 보내며 원하는 그림의 이미지를 화가에게 요구하였다.26
이처럼 주문제작은 주문자나 화가의 상황과 필요에 따라 직접적인 방법과 중개를 통하는 방법, 서간을 보내는 방법 등 다양한 경로로 성사되었다. 그러나 각기 방법이 다르더라도 주문자가 제작의 요청에서부터 완성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의사와 요구를 적극적으로 제시한 점에서 주문제작이 주문자의 특정한 의도나 목적을 관철시키며 그림을 제작하기 위해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2. 주문제작의 양상

조선 후기에 회화의 주문제작이 확산되던 양상은 현존 작품의 제발문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제발문은 작품 제작의 동기나 목적, 제작과 관련된 내용을 자유롭게 기술하는 것으로 중국 元代(1271∼1368) 문인화의 발달과 함께 활발하게 창작되었다.27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그렸다(爲作/寫)”와 같이 특정 인물의 號나 이름을 명시하는 간략한 형식의 제문이 그림 매매를 기반으로 활동했던 화원과 직업화가의 작품에 많이 나타나는 것은 주문제작 및 매매, 소비의 확산을 시사한다.
회화의 주문제작은 산수화, 인물화, 화조영모화 등 다양한 화목에 걸쳐 이루어졌다. 산수화는 실경산수화와 사의산수화로 나누어 주문 양상을 살펴볼 수 있고, 인물화에서는 고사인물화와 신선도가 주문의 주를 이루었다. 화조영모화는 화훼화와 더불어 수요의 확장과 저변화에 부합하는 화목으로 각광받았다.
산수화 중 실경산수화는 문인층이 점유한 권세나 學統을 상징하는 세거지에 대한 수요가 높았고, 문인들의 出仕와 관련된 부임지 유람과 명승 유람 문화의 확대에 따른 명승지의 시각화가 주문의 주를 이루었다.
첫째, 세거지로서의 실경에 대한 주문 사례로 “겸재가 직보에게 그려준다(謙齋寫與直甫)”는 제문이 쓰여 있는 정선의 〈白岳山圖〉를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Fig. 3). 직보는 한성부 庶尹을 지낸 金貞謙(1709~1767)으로, 그는 정선의 후원자였던 金昌翕(1653~1722)의 친족이다.28 정선이 안동 김문의 세거지였던 청풍계를 여러 차례 그려 남긴 것은 잘 알려져 있으며 백악산은 특히 궁궐의 빛을 더하는 산으로 여겨졌다.29 궁궐 바로 뒤에 자리하는 백악산의 우뚝 솟아오른 봉우리는 관료사회의 상서로운 기상을 연상시키고, 또 요직을 거쳤던 주문자의 사회적 성공과 영달에 부합하는 상징성을 지닌다.
둘째, 문인관료 주문자층의 유람 문화는 조선 후기에 여러 명승지 실경이 활발하게 제작되는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명 화원들이 주문에 기용되어 주문자와 함께 명승을 유람하고 실경산수화첩을 제작했다. 화원 金夏鐘(1793~1878)은 1815년 경화사족 李光文(1778~1838)의 주문으로 《海山圖帖》을 제작했는데, 그는 이광문의 금강산 유람에 함께 참여해 실제 경관을 寫生하며 화첩을 완성했다. 당시 이광문은 자신이 김하종에게 주문을 요청한 연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풍악산을 유람하는데, 內閣供奉인 김하종 군이 따라갔다. 그림을 잘 그리고 산수에 뛰어난 자라 그 높은 뜻이 나와 함께 딱 맞아떨어졌다.30
여기서 ‘그 높은 뜻이 나와 함께 딱 맞아떨어졌다’는 부분은 주문자가 자신의 제작 의도에 적합한 화가를 발탁했음을 시사한다. 아마도 김하종의 화가로서의 위상과 산수화풍이 이광문이 화첩 제작에서 원했던 요건이나 취향에 부합했기 때문일 것이다.
명승지 중에서도 주문 수요가 높은 소재는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유연한 방식으로 소비되었다. 상당한 경제력을 지니고 서화를 애호했던 역관 金漢泰(1762~1823)는 김홍도에게 《乙卯年畵帖》을 주문했다. 그런데 이 화첩은 관동팔경의 대표적 명승인 〈叢石亭圖〉와 더불어 다양한 소재의 그림이 함께 전해 실경산수화첩과는 차이를 보인다.31 아마도 총석정은 실제 유람과 사생을 기반으로 그려진 것이 아니라 유명 명승지를 화첩에 포함하기 위해 잘 알려진 명소의 시각적 이미지로 채택된 것으로 보인다. 최북이 觀生庵主人에게 그려준 〈金剛全圖〉는 정선이 정립한 금강전도의 도상이 토대를 이루는데,32 김응환이 김홍도에게 그려준 〈金剛全圖〉 역시 정선의 도상이 참고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Fig. 4-5).33 수요가 높은 명승지 묘사에서는 특정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활용되었고, 이러한 관행은 실경산수화의 대중적인 소비와 유통을 가능하게 하였다.
회화 감상과 소비가 주문제작의 확산을 부추겼던 점은 본래 문인들이 뜻을 그려내기 위해 그리던 사의산수화가 주문자를 위한 감상용 작품으로 제작되었던 점에서도 확인된다. 이를 가능하게 한 것은 일차적으로 중국 유명 화보의 유통이었다. 최북의 〈山水圖〉는 “정묘년 겨울 길보 형에게 그려준다(丁卯冬 爲吉甫兄寫)”는 제문이 전해 길보라는 자를 썼던 안산의 儒生 崔仁祐를 위해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Fig. 6).34 수변가를 배경으로 人家가 모여 있는 고즈넉한 산수 경관은 『芥子園畫傳』의 「仿黃一峰富春山」과도 유사하다(Fig. 7). 조선후기 중국 문인화의 수용이 黃公望(1269~1354)과 倪瓚(1301~1374)의 양식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은 잘 알려져 있는데, 화보에 수록된 황공망과 예찬의 도상은 주문 대응에서 중요하게 참고가 되었을 것이다.
이인문이 白下申童에게 그려준 〈數間茅屋圖〉와 李義聲(1775~1833)이 萍湖居士에게 그려준 〈疏林茅亭圖〉는 茅亭과 수목을 중심으로 간일한 산수 경관이 펼쳐지는 예찬의 화풍을 토대로 한 것임이 분명하다(Fig. 8).35 예찬 양식이 완연한 김응환의 〈秋樹一茅圖〉는 주문자가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남종화의 묘결을 그 누가 전했던가, 가을 나무 몇 그루에 띠로 이은 정자 하나”라는 詩句가 쓰여 있어 당시 이와 같은 화풍이 남종화로 여겨지며 선호되었음을 알 수 있다(Fig. 9).36 특히 먹을 위주로 간결하게 구사하는 예찬의 화풍은 빠른 시간 내에 완성할 수 있는 양식적 특징을 지녀 신속한 주문 대응에 적합했을 것이다.37
인물화에서는 얼굴과 신체 묘사를 통해 주문자의 내면과 삶의 모습을 표현하는 초상화가 꾸준히 주문제작되었고, 문인 취향의 고사인물화와 長壽를 기원하는 신선도에 대한 수요가 뚜렷했다. 주문자의 제작 의도를 엿볼 수 있는 초상화의 예로 김홍도와 이명기의 합작으로 완성된 〈徐直修 肖像〉(1796)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다. 徐直修(1735~?)는 초상이 완성되자 다음과 같은 평을 적어 넣으며 출세는 등한시하고 詩書畵로 평생을 즐겼던 자신의 삶을 반추하는 기회를 가졌다.
이명기는 얼굴을 그리고, 김홍도는 몸을 그렸다.
두 사람은 그림으로 이름이 있었지만 정신을 그려내지는 못했다.
아깝도다. 어찌 산속에서 도를 닦지 않고 명산잡기를 보느라 심력을 낭비했는가?
그 일생을 대략 이야기한다면 ‘속되지 않은 것을 귀하게 여겼다’할 것이다.
병진년 여름 십우헌 62세옹이 자평한다.38
서직수의 경우처럼 조선후기 고동서화 향유 문화는 식자층의 일상에 깊숙이 자리하고 있었고, 이러한 당시의 사회상은 文人 문화를 시각적으로 재현한 고사인물화의 제작에도 중요한 동기가 되었다. 특히 北宋代 王詵(1048∼1104)의 西園에서 있었던 모임을 주제로 한 西園雅集의 인기가 높았음이 현존 작품에 잘 드러난다. 김홍도의 〈西園雅集圖〉는 역관 李敏埴에게 그려준 것으로, 문인의 고아한 일상에 대한 동경은 중인층에까지 파급력을 미쳤음을 알 수 있다(Fig. 10). 강세황은 김홍도가 제작한 《西園雅集圖屛風》(1778)에 畵評을 남기기를 자신이 본 아집도가 무려 수십 본이라고 했는데 이인문의 〈西園雅集圖〉, 이재관의 〈文人雅集圖〉, 李義陽(1768∼?)의 〈春宵雅集圖〉, 이명기에게 전칭된 〈雅集圖〉 등은 문인 아집의 장면이 화원과 직업화가에 의해 빈번하게 그려져 유통되었음을 잘 보여준다.39
이와 관련하여 중인층의 詩社 활동의 증가가 詩會圖(혹은 雅會圖)의 활발한 주문으로 이어졌던 점도 중요하다.40 마성린의 기록에는 1779년 詩會가 벌어지자 화원 尹道行이 금방 달려왔다는 내용이 있어, 시회 현장에 화가가 참석하여 모임 장면을 그려주는 일이 다반사였음을 알 수 있다.41 이인문의 〈松石園詩會圖〉와 김홍도의 〈松石園詩社夜宴圖〉는 1791년 6월 15일, 千壽慶(1757~1818)의 松石園에서 열린 시회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것이다(Fig. 11). 당시 천수경을 제외한 참석자는 모두 규장각 서리 출신이었는데, 시회도를 제작한 것은 그들의 결속과 회합을 도모하기 위해서 였다.42 김홍도가 그린 〈檀園圖〉(1781)와 이인문이 그린 〈樓閣雅集圖〉(1820)는 각자의 동류 모임을 주제로 한 것으로, 시회도 주문 대응의 경험은 화가 개인의 自傳的인 의미가 담긴 그림 창작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신선도의 주문에서는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현실적인 바람이 투영되는 면이 컸다.43 문인화가 尹德熙(1685~1766)의 〈南極老人圖〉(1739)는 崔昌億(1679~1748)의 회갑에 바친다는 내용의 제문이 있어 祝壽를 기원하는 선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44 김홍도가 1788년에 이덕무 부친의 생신연에서 수성노인을 그렸음을 앞서 살펴보았다. 그런데 그는 1779년에 이미 역관 이민식을 위해 《神仙圖八帖屛風》을 제작한 바 있어 여러 차례 신선도 주문에 응했음을 알 수 있다(Fig. 12).45 이 병풍에는 신선이 사슴과 함께 등장하는데, 당시 이와 같은 소재 구성의 신선도가 많이 유통되었던 사실은 조선 후기의 실학자 柳得恭(1748~1807)의 『京都雜誌』에서도 확인된다. 『경도잡지』는 한양의 다양한 세시풍속을 자세히 기술한 것으로 그 중 ‘벽에는 종규가 귀신을 잡는 그림(鐘馗捕鬼圖), 신선이 사슴을 탄 그림(仙人騎鹿圖)’을 건다는 내용은 벽사용·길상용 그림에 대한 민간 수요가 상당했음을 시사한다.46
이상 살펴본 초상화, 고사인물화, 신선도 이외에 개인의 성공과 복록을 재구성한 平生圖나 여성적인 분위기가 완연한 仕女와 같은 새로운 소재가 주문되었던 점도 당시 확장된 수요와 관련하여 주목을 요한다.47
화조영모화는 꽃과 새, 동물의 소재가 지닌 길상성이 주문에 투영되는 면이 뚜렷했다. 기쁜 소식을 전해주는 까치, 노년의 편안함을 상징하는 蘆雁, 과거 급제를 염원하는 게 그림 등이 빈번하게 그려진 것은 저변화된 수요층의 현실적인 바람이 회화 제작과 소비로 충족되었음을 반영한다.
최북이 金氏 친구와 李氏 친구에게 그려준 〈梅下雙雉圖〉의 꿩은 선비의 절개와 청렴을 상징하는 소재였다(Fig. 13).48 최북은 제문에서 이 작품을 요청했던 두 인물을 김씨와 이씨 친구라고 언급했는데, 이는 주문자에 대한 친근한 표현일 수 있다.49 沈師正(1709~1769)이 三玄이라는 인물에게 그려준 〈魚躍迎日圖〉는 입신출세를 상징하는 등용문 고사를 그린 것으로, 장지문에 붙일 魚躍龍門圖는 광통교에서 매매될 정도로 수요가 높았다(Fig. 14).50 김홍도가 안동 지역의 士族 李宜秀(1745~1814) 및 柳氏 노인에게 그려준 게 그림 또한 과거 급제를 상징한다(Fig. 15).51 이처럼 조선 후기에 관직 진출의 寓意를 지닌 그림이 많이 소비된 것은 사회적 성공과 출세를 지향하던 사회상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화훼화는 꽃의 소재가 지닌 길상성에 꽃의 형태와 색감에서 우러나는 화려함이 장식성을 더하면서 폭넓게 각광받았다. 국화는 長壽花로 유명했으며, 부귀영화를 뜻하는 牡丹은 병풍에서부터 축화, 소폭의 화첩에 이르기까지 다변화된 수요에 부응하는 소재였다. 조선 말기의 직업화가 許鍊(1808∼1893)은 허모란으로 불릴 정도였는데, 이는 높은 수요와 주문에 반복적으로 응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유명세가 형성된 결과일 것이다(Fig. 16).
조선후기 회화 주문제작의 확산 양상은 다양한 신분과 성격의 주문자층이 거의 모든 화목에 걸쳐 그림을 주문했던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주문제작된 작품이라고 해서 화단의 흐름과 구별되는 상이한 특징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문제작의 양상과 성격의 고찰은 사회문화의 발달, 주문자층의 대두, 화가군의 성장에 따라 주문자 개인의 특정한 의도나 광범위한 수요층의 보편적 요구가 회화의 주문제작을 통해 소비로 표출되던 상황을 확인시켜준다는 점에서 當代 회화사 이해에 매우 중요한 관점을 제시해준다.

Ⅳ. 회화 주문제작의 의의와 영향

조선 후기에 주문자가 유명 화원이나 직업화가를 기용해 원하는 그림을 제작했던 관행은 조선 말기와 근대기까지 지속되며 영향을 미쳤다. 조선 말기를 대표하는 화원이었던 李漢喆(1808~1889)이 1885년에 尹拯(1629~1711) 가문의 주문으로 윤증의 초상화와 더불어 세거지를 상징하는 종택을 묘사한 〈酉峯全圖〉를 제작한 점은 조선 후기의 양상과도 유사하다(Fig. 17).52 그는 1892년에 《花鳥圖12幅屛風》을 제작하면서 公務로 바빠 주문에 제때 응하지 못했음을 한탄했는데, 여기서도 화원들이 공·사의 활동을 지속했음을 알 수 있다.53
그러나 1894년 갑오개혁의 시행으로 도화서가 폐지된 이후에는 공적 활동의 공백을 대체할 수 있는 주문 대응과 매매가 더욱 중요해졌을 것이다.54 張志淵(1864~1921)은 白殷培(1820~1901)가 매일같이 병풍을 만들어 달라 청하는 사람들의 요청에 응해 그림 그려주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하였다.55 劉淑(1827~1873)에 관한 詩에도 “집집마다 와서 그림을 그려 달라 조르니 어쩌자는 말이냐. 자네 이름 또 (劉)松年 같이 높아짐을 알게 되었네”라는 구절이 등장하는 등 높은 주문 수요와 대응은 화가에 대한 평가를 형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56
조선말기 이후에는 권세와 부를 겸비한 주문자가 특정 화가를 발탁하여 장기간 지속적으로 주문을 의뢰했던 점도 주목된다. 19세기의 화가 허련은 武臣이자 외교가였던 申觀浩(1810~1884)를 비롯하여 고위 관직을 역임했던 權敦仁(1783~1859), 개화사상가 閔泳翊(1860~1914)의 집에 머무르며 주문에 응했다.57 조선 말기의 대표적인 직업화가 張承業(1843∼1897)도 수표교에 있던 李應憲의 집에서 寄食하고, 또 북경 역관 출신으로 한성판윤을 지낸 卞元奎의 집에서 고용살이를 하는 등 권세가의 후원을 받으며 주문에 응함으로써 명성을 쌓아나갔다.58 이러한 사례들은 주문자가 화가에게 장기간 거처와 숙식을 제공하며 주문을 알선한 것으로, 마치 주문자가 화가를 고용하여 지속적인 주문과 매매를 도모하는 양상을 보인다.
조선 말기에 田琦(1825∼1854)와 같이 서화 중개를 전문으로 하는 인물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도 회화 유통과 소비의 상업적인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한다. 전기는 藥鋪를 운영하며 서화를 중개했는데, 필요한 약재를 구하는 편지글에 누군가 부탁했던 허련의 그림이 완성되어 보관 중임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간청드릴 말씀은, 귀댁의 약재료를 담당국에서 받아쓰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 국이 이미 문을 닫았다고 하니 혹시 저의 점포에서 쓸 수 있겠는지요? (중략) 일찍이 부탁한 열 그림 가운데 허소치(許小癡)의 그림 세 폭은 달포 전에 벌써 보내왔으니 마땅히 모여서 감상해야겠습니다. 두서없이 올립니다. 상제 전기 올림.59
당시 약포는 약재를 파는 가게일 뿐 아니라 권세가가 즐겨 찾고 서민들의 만남의 장소로 애용되는 등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던 곳이었다.60 전기가 소문의 진원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을 서화 중개의 거점으로 활용했던 것과 관련하여 장승업도 경성의 한약국에서 심부름을 했다는 언급이 있다.61 19세기에 서화 중개 및 거래가 약포와 같이 人的 교류가 활발한 장소를 통해 상업화되었을 가능성이 파악되는 것이다. 장승업이 1890년대 서화 시장의 중심이었던 광통교의 육교 화방에서 활동했던 사실에서도 회화의 유통과 매매가 신속하게 전개되던 화단의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62
회화 주문제작의 관행은 근대기의 회화 작품에서도 파악된다. 금강산을 여행하고 스케치했던 金奎鎭(1868~1933)은 〈天下奇絶圖〉에 “금강산을 그려 구옥주인에게 준다(爲金剛飴龜屋主人)”는 제문을 써 넣었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주문자를 명시하던 표현이었다(Fig. 18).63 또한 근대기 이후에는 “누군가에게 鑑正·淸鑒·屬正·雅正을 바란다”와 같이 그림을 잘 감상하고 올바른 평가를 부탁한다는 내용의 제문도 새롭게 등장하였다. 직업화가 趙錫晋(1853∼1920)의 〈魚蟹圖〉에는 “궐은 인형에게 청람을 바란다(厥隱仁兄淸鑒)”는 제문이, 〈群鯉圖〉에는 “1919년 음력 10월에 궐은의 부탁으로 그렸다(時己未小春作爲厥隱仁兄雅囑)”는 제문이 있는데 궐은은 조석진에게 여러 차례 그림을 주문했던 인물이다(Fig. 19).64
주문자의 이름이나 號 뒤에 등장하는 兄이나 仁兄은 조선말기 중인층 서화가 사이에서 同類 의식의 표현처럼 사용되기도 했지만, 화가와 주문자의 상호 관계가 상당히 수평적으로 변화되었음을 생각하게 해준다. 나아가 조선 후기에 “화가가 주문자를 위해 그렸다”는 표현이 주를 이룬 반면 조선 말기와 근대기에 “형(인형)의 부탁으로 그렸다”는 제문이 많이 쓰인 점은 회화 창작 활동에서 화가가 다소 우위를 차지하는 변화가 있었음을 시사한다. 화가의 주문제작 활동은 주문자를 위한 피동적인 성격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문자의 부탁을 수락하여 결정한 주체적이고 능동적인 행위로 전개되었다고 하겠다.
『대한매일신보』의 1908년 10월 18일자 ‘한성서화관’ 광고에는 서화관의 관주가 조석진을 전속 화가로 고용하여 그림을 전문적으로 판매한다는 내용이 등장해 주문과 매매가 상업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65 李道榮(1884∼1933)의 〈器皿折枝圖〉에는 “계해년 소만에 일정 인형의 부탁으로 그리니 법가의 교정을 바란다(癸亥小滿節 爲日亭仁兄 雅囑拜希 法家斤政)”는 제문이 있는데, 日亭은 서화협회의 명예회원이었던 白寅基(1882~1942)로 추정된다(Fig. 20).66 1921년에 창립된 서화협회에서는 고객의 의뢰를 받아 화가와 연결해 작품을 제작해주는 依囑製作을 시행했는데, 이는 개인적 주문제작이 조직적인 형태로 변화한 것이다.67 이와 같은 일련의 근대적 방식의 회화 소비와 유통, 서화 시장 형성의 근본적 토대를 조선후기 회화 주문제작에서부터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은 전통 화단이 어떻게 근대적으로 변모해갔는가를 이해하는데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Ⅴ. 맺음말

조선 후기에는 고동서화 수요 확대에 따라 주문자가 화가에게 그림을 부탁하여 그려 받는 주문제작이 확산되었다. 화단의 회화 수요와 관련해서는 문헌 기록을 통해 상당 부분이 밝혀졌지만, 이 연구에서는 그와 같은 수요에 부응한 결과로서 주문제작의 확산 양상과 영향을 문헌 기록과 현존 작품을 토대로 종합적으로 살펴보았다.
조선후기 회화의 주문제작은 주문자의 직접 주문, 중개인과 같은 제3자를 통한 주문, 書簡을 통한 주문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주문자는 화가를 직접 방문하거나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원하는 그림을 요청하였다. 혹은 중개인이 주문자와 화가 사이의 상호 의사를 전달하는 방법이 활용되기도 하였다. 주문 의뢰나 제작 과정 중의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서간으로도 전달되는 등 주문제작은 주문자와 화가의 상황과 선택에 따라 다양하게 성사되었다.
조선후기 그림 주문과 관련해서는 기록이 많이 전할 뿐 아니라 화가가 누군가를 위해 그려준다는 내용의 제발문이 산수화, 인물화, 화조영모화 등 거의 모든 화목의 현존 작품에 전해 전반적인 양상의 파악이 가능하다. 실경산수화에서는 문인관료층의 세거지와 명승 유람과 관련된 주문이 주를 이루었다. 유명 명소의 실경은 주문자의 개입 정도에 따라 실제 사생을 기반으로 그려지기도 했지만, 대중적인 수요에 부응하여 특정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소비되기도 하였다. 주문제작에 나타나는 소비의 양상은 중국 화보의 유통에 따라 사의산수화가 수요층의 감상을 위한 작품으로 제작된 점에서도 확인된다. 인물화에서는 초상화가 꾸준히 주문제작 되었으며 조선후기 문인 문화에 대한 관심 확대에 따라 중국 유명 문인의 삶을 주제로 한 고사인물화의 주문과 소비가 두드러졌다. 장수를 상징하는 신선도를 비롯하여 길상성이 뚜렷한 화조영모화 및 화훼화가 광범위하게 소비된 점은 저변화된 수요에 따른 주문제작의 확산을 반영한다.
조선후기 회화 주문제작의 관행은 조선 말기와 근대기 화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명 화원들은 공적 업무 이외에도 개인적 주문 대응으로 여전히 분주했으며, 갑오개혁 이후 도화서가 폐지되면서부터는 오히려 사적인 영역의 주문 및 매매의 비중이 더 커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조선 후기에는 화가가 주문자를 위해 그렸다는 제문이 쓰인 반면 조선말기 이후 화가가 주문자의 부탁으로 그렸다는 제문이 새롭게 등장한 점은 화가의 위상 제고 및 화가와 주문자의 수평적인 관계로의 변화를 시사한다.
높은 주문 수요는 화가의 영향력을 가늠하는 평가의 기준으로 작용하였고 회화 주문이나 중개, 매매는 한층 상업적인 성격으로 변화되어갔다. 근대기에는 회화의 유통과 시각 매체의 소비가 상업적·조직적 방식으로 전개되었는데, 본격적인 서화 시장 형성의 토대를 조선후기 회화 주문제작에서부터 추적할 수 있다는 점은 전통 화단의 근대적 변화를 이해하는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전근대기 회화 작품의 경제적 소비와 유통을 명확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이 연구에서는 문헌 기록과 현존 작품을 토대로 조선후기 회화 주문제작의 확산 양상과 영향을 다각도로 살펴보았다. 앞으로 새로운 자료가 더 확보되고 개별적인 주문제작 사례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된다면 조선후기 회화의 제작과 소비의 성격을 보다 깊이 있게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주문의 양상을 화가, 주문자, 화목이나 주제별로 나누어 고찰한다면 회화 주문제작이 화가의 활동에 어떤 요인으로 작용했는지, 수요층의 요구와 어떻게 상호 작용하며 화단에 영향을 미쳤는지, 회화 작품의 감상과 소비문화에 어떤 변화를 야기했는지 등을 다각도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연구의 쟁점들을 해결하는 것은 앞으로의 중요한 연구 과제라 할 수 있으며, 조선후기 회화 주문제작의 확산과 영향을 거시적·종합적으로 살펴본 이 연구가 조선후기 회화사를 사회경제적 맥락에서 새롭게 이해하고 해석하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Notes

1) 조선 후기는 안휘준의 시기 구분에 따라 약 1700년부터 약 1850년까지로 설정한다. 安輝濬 著, 『韓國繪畵史』 (일지사, 1980), pp. 211-286 참조.

2) 李東洲, 『우리나라의 옛그림』 (박영사, 1975), pp. 58-59 참조.

3) 김지영, 「18세기 畵員의 활동과 畵員畵의 변화」, 『한국사론』 32(1994), p. 25 참조. 강관식은 도화서 화원들이 공과 사의 양면에서 중층적·복합적으로 활동하였고, 差備待令畵員을 선발하기 위한 녹취재가 화원들의 작화 활동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논하였다. 강관식, 「정조대(正祖代) 규장각(奎章閣)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녹취재(祿取才)의 인물화(人物畵) 화제(畵題)」, 『간송문화』 57(1999), p. 78 참조.

4) 황정연은 조선시대 서화 수장을 시기에 따라 궁중, 종친, 사족, 중인층 등 수장의 주체별로 구분하여 논하였다. 황정연, 『조선시대 서화수장 연구』 (신구문화사, 2012). 박효은은 회화 주문에 부응했던 직업화가들로 최북, 김응환, 김홍도, 신한평, 이재관, 허련, 장승업 등을 언급하며 조선후기 회화 후원의 영향과 의의를 논하였다. 박효은, 「《石農畵苑》과 17∼18세기 한국화단의 後援 문제」, 『숭실사학』 34(2015), pp. 97-152 참조.

5) 장진성은 정선이 밀려드는 주문에 응대하기 위해 빠른 속도로 그려낸 그림들을 수응화의 범주에서 해석하였다. 장진성, 「정선과 수응화」,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사회평론, 2006), pp. 264-288. 정선이 특정 주문자를 위해 심혈을 기울여 제작한 작품들은 수응화와는 구별되는 注文畵의 성격을 지닌다는 논의는 김가희, 「鄭敾과 李春躋家門의 繪畵 酬應 硏究: 《西園帖》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1), pp. 1-6. 대만의 石守謙은 明代 吳派의 문인화가 沈周(1427∼1509)가 교우들을 위해 그려준 그림을 통칭해 應酬畵라 규정했다. 그는 문인화가와 직업화가에 따라 응수화의 성격이 달라지는데, 직업화가의 응수화는 일반 수요층을 위해 매매용으로 제작된 것이라고 구분 지었다. 石守謙, 「沈周的應酬畵及觀衆」, 『從風格到畵意: 反思中国美術史』 (臺北: 石頭出版, 2010), pp. 227-230 참조.

6) 이 연구에서는 주문자의 주문과 그에 응한 화가의 제작 활동에 걸친 일련의 과정을 주문제작이라는 개념으로 포괄하여 파악해보고자 한다. 주문제작 회화의 의미에 대해서는 이연주, 앞의 논문, pp. 63-67 참조.

7) 조선후기 주문자는 화가에게 금전 이외에도 숙식 및 비단과 같은 사치품, 음식, 생필품 등 다양한 현물로 그림에 대한 경제적 비용을 지급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와 관련해서는 장진성, 「조선시대 도화서 화원의 경제적 여건과 사적 활동」, 『화원: 조선화원대전』 (삼성미술관 Leeum, 2011), pp. 296-307 참조.

8) 徐居正 編, 『東文選』, “李仁老 二相歸休圖贊序曰……爰請畵局朴子雲 作二相歸休圖 爲朝家之盛事.” 吳世昌, 『국역 근역서화징』(상) (시공사, 1998), pp. 95-96 참조.

9) 李奎報, 『東國李相國集』, “先是 嘗使畵家名手韓某 摸白衣觀音像 其傍所立雙竹 則不令其人畵之 乃就丁學士而安 固乞掃焉 盖丁公墨竹 妙絶一時故爾.” 吳世昌, 앞의 책(상), pp. 113-114 참조.

10) “萬曆甲申秋養松居士爲安士確作寒林霽雪圖.” 安輝濬 著, 앞의 책, p. 187 참조.

11) 이신흠은 조선 중기의 문인 李好閔(1553∼1634), 李景嚴(1579∼1652) 父子의 別墅인 斜川庄의 경관을 묘사한 〈斜川庄八景圖〉 (1617 이전)를 그렸다. 삼성미술관 Leeum 학예연구실 편, 임재완 역주, 『(삼성미술관 Leeum 소장) 고서화 제발 해설집(Ⅲ)』 (삼성미술관 Leeum, 2009), pp. 18-21 참조. 이징은 鄭汝昌(1450∼1504)의 별서도 주문에 기용되어 〈花開縣舊庄圖〉 (1643)를 그린 것으로 전한다. 조규희, 「朝鮮時代 別墅圖 硏究」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6), pp. 172-173 참조. 조세걸이 안동 김씨 金壽增(1624∼1701)의 주문으로 《谷雲九曲圖帖》 (1682)을 제작하고, 宋時烈(1607~1689)과 김수증의 주문을 받고 〈聚星圖〉를 제작한 것도 권세가의 세거지를 이상화하고 정치적 규합을 도모하는 그림에 대한 수요가 높았음을 반영한다. 조규희, 「《谷雲九曲圖帖》의 多層的 의미」, 『미술사논단』 23(2006. 12), p. 256. 강신애, 「조선 후기 〈聚星圖〉의 제작과 그 의미」, 『미술사학연구』 309(2021), pp. 41-77 참조.

12) 姜世晃, 『豹菴遺稿』, 「送金察訪弘道金察訪應煥序」, “凡人之欲傳神寫照者, 禮邀良工, 若能極其傳摹, 無一髮不似, 則方得快意喜樂.” 강세황 저, 김종진·변영섭·정은진·조송식 옮김, 『표암유고』 (지식산업사, 2010), pp. 349-350 참조.

13) 당시의 제작 과정을 기록한 강관의 「癸秋記事」 (1783)에 대해서는 이태호, 「조선 후기 초상화의 제작공정과 비용이명기 〈강세황 71세 초상〉에 대한 「계추기사」를 중심으로」, 『옛 화가들은 우리 얼굴을 어떻게 그렸나-조선후기 초상화와 카메라 옵스큐라』 (생각의 나무, 2006), pp. 157-161 원문과 해석 참조.

14) 중국 明代 궁정 화가들이 관료 후원층과 면밀한 관계망을 형성하며 私的 주문자를 확보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지적은 Richard M. Barnhart, “The Return of the Academy”, Possessing the Past: Treasures from the National Palaces Museum, Taipei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and the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1996), pp. 335-337 참조.

15) 馬聖麟, 『安和堂私集』 下冊(筆寫本), 「平生憂樂總錄」, “丁酉五十一歲……金別提弘道 申萬戶漢枰 金主簿應煥 李主簿寅文 韓主簿宗一 李主簿宗賢 等名畵師會于中部洞 姜牧官熙彦家 而公私酬應. 多有可觀者 余素有愛畫之癖, 自春至冬, 往來探玩或書畫題.” 林榮澤 編, 『李朝後期閭巷文學叢書』6 (驪江出版社, 1991), p. 205. 해석은 진준현, 『단원 김홍도 연구』 (일지사, 1999), p. 26 참조. ‘공사간의 수응에 응했다’는 주문에 응했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酬應의 語義에 대해서는 단국대학교부설 동양학연구소 편, 『漢韓大辭典』 14(1999), p. 35 참조.

16) 李玄煥, 『蟾窩雜著』, 「崔北畵說」, “四方之人 來請畵者 足相躡於其門 王公貴人 甚或使之以畵師 七七終厭之.” 안대회, 『조선의 프로페셔널』 (휴머니스트, 2007), pp. 122-123, p. 414 참조. 「崔北畵說」의 전체 원문과 해석은 국립전주박물관, 『호생관 최북』 (2012), pp. 155-157 참조.

17) 趙熙龍, 『壺山外記』, “一日, 有人售一梅, 甚奇, 無金可易. 適有餽錢三千者, 要畵之贄也.” 趙熙龍, 實是學舍 古典文學硏究會 譯註, 『壺山外記』 (한길아트, 1999), pp. 74-77.

18) “辛丑九月十一日 余以御用圖寫監董官 赴奎章閣 使畵師韓宗裕 圖余小眞於便面上 頗得彷佛 與庶孫彝大.” 변영섭, 『표암 강세황 회화 연구(개정판)』 (사회평론, 2016), p. 70 원문과 해석 재인용. 1781년 正祖의 어진 제작에 강세황이 副摠管으로 임명되고 한종유를 비롯하여 申漢枰(1726~?)과 김홍도가 畵師로 활동했던 사실은 『承政院日記』, 1781년 8월 기사 참조. (국사편찬위원회 승정원일기 검색 사이트 http://sjw.history.go.kr/main.do)

19) 申光洙, 『石北文集』卷6, 「驪江錄」下, 「崔北雪江圖歌」, “崔北賣畵長安中, 生涯草屋四壁空. 閉門終日畵山水, 琉璃眼鏡木筆筩. 朝賣一幅得朝飯, 暮賣一幅得暮飯. 天寒坐客破氈上. 門前小橋雪三寸.” 홍선표, 「崔北의 生涯와 意識世界」, 『미술사연구』 5(1991), p. 6 원문과 해석 참조.

20) 李玄煥, 앞의 글, “七七以善畵鳴于世 人有持屛簇以請者 七七始喜之 奮袂如風 須臾以成 其應若流.” 원문과 해석은 국립전주박물관, 앞의 책, pp. 155-157 참조.

21) 趙熙龍, 實是學舍 古典文學硏究會 譯註, 앞의 책, p. 124.

22) 鄭克淳, 『庶尹公遺稿』, 「卞氏畵記」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刊年未詳), pp. 16-17, “委巷之人卞氏子弱冠以善畵貓名動亰師 踵門邀者日百數……丙寅冬 余力而致之留二日得所爲猫.” 이종묵, 「정극순의 연뇌유고-서양화, 변상벽, 매합에 대한 이야기를 겸하여」, 『문헌과 해석』 36(2006), pp. 92-93. 손병기, 「和齋 卞相壁의 繪畵 硏究」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3), pp. 4-5 참조.

23) 李德懋, 『靑莊館全書』 卷 1 附錄 下 「先考積城縣監府君年譜下」, 戊申年 4월 초1일, “于斯時也, 若非檀園畵蕉, 畵菊, 畵梅竹, 畵壽星, 安能餙此喜哉. 安能餙此喜哉. 酒三行. 或展軸成字. 或傾盃畵醉. 或狂叫亂呼. 或傞傞屢舞. 豪絲急管. 又侑之. 此皆靑莊之所樂. 而諸賓之爲丈丈壽也.” (한국고전종합 DB, http://db.itkc.or.kr/) 이 내용은 진준현, 앞의 책, p. 46에 소개된 바 있다.

24) 『頤齋亂藁』 第3冊, 卷18, 英祖 47年 辛卯(1771), 四月十七日丁亥, 665쪽, “是日, 尹上舍在德, 又自泮齋來, 約以明日送餽崔北畵八帖. 因請假帖六丈. 崔北者, 京城閭巷人, 字七七, 以其名北左右從七故也, 自號豪生館, 謂其筆端資生故也.” 강관식, 「조선 후기 지식인의 회화 경험과 인식」, 『이재난고로 보는 조선 지식인의 생활사』 (한국학중앙연구원, 2007), pp. 498-499, pp. 636-645 참조.

25) “入格種 來時有若干持來者 而其中朱紅粉兩彩 落在其中 無他求得之路 敢以替告 彩六七或朱紅 則唐紅倭紅間一錢 得付此便伏望.” 황정연, 앞의 책, pp. 117-118. 원문과 해석은 경기도박물관, 『초상, 영원을 그리다』 (2008), pp. 141-142 참조.

26) “檀園 棐几 下 雅集靳枉 至今悵恨 日來憂患頓減否 熱益甚 勞念無已 欲得檀園畵 蓮花數柄 一破蕉葉覆之 倩京山篆其首 用華嚴經 身如芭蕉 心似蓮花 一句語 掲之座隅 滌此暍病 委致畵本一張 而不可無贄 謹書陋詩八章 以先之 冀檀園一投揮染 以表同好之意 不備 大中頓首.” 안대회, 「김홍도에게 그림을 부탁하는 편지」, 『문헌과 해석』 53(2010), pp. 253-256 재인용.

27) 중국 元代 회화의 제발문에 대해서는 朴恩和, 「元代의 實地名山水畵 硏究」, 『미술사학연구』 221·222(1999), p. 42, p. 116 참조.

28) 김정겸은 김창흡의 5촌 조카로 알려진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간송문화』 66(2004), pp. 105-106 참조. 金昌協(1651~1708)과 김창흡 형제를 중심으로 한 문인들은 ‘白岳詞壇’으로 불리었으며 이는 백악을 중심으로 거주했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고연희, 『조선후기 산수기행예술연구-鄭敾과 農淵 그룹을 중심으로-』 (일지사, 2001), p. 15 참조.

29) 『東國輿地勝覽』 卷之三, ‘漢城府’條, “北岳後聳 官展增輝.” 李文奎, 「조선후기 서울 市井人의 생활상과 새로운 志向 意識」, 『조선후기 서울의 사회와 생활』 (서울시립대학교부설 서울학연구소, 1988), p. 145 참조.

30) 李光文, 《海山圖帖》, 「又題海山圖帖」, “余之遊楓嶽也, 內閣供奉金君夏鍾從焉. 盖善畵, 而工於山水者, 其志尙, 適與余合.” 朴銀順 著, 『金剛山圖 연구』 (일지사, 1997), p. 101의 해석과 p. 410의 원문 참조.

31) 《을묘년화첩》에 대해서는 진준현, 앞의 책, p. 138 참조.

32) 〈금강전도〉에는 “金剛全圖 歲乙亥 毫生館寫贈 觀生庵主人 金章升”이라는 제문이 쓰여 있다. 변혜원, 「毫生館 崔北(1712~1786년경)의 生涯와 繪畵世界 硏究」 (고려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7), p. 140 참조.

33) 김응환이 방한 〈금강전도〉가 정선의 금강산 그림인 것으로 추측하고, 이를 통해 조선 후기에 정선의 영향을 받은 금강전도가 어떻게 전래되어 갔는지를 파악할 수 있다는 지적은 朴銀順 著, 앞의 책, p. 195 참조.

34) 최인우는 31세에 진사에 합격했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고 안산에 은거하며 학문을 추구했던 인물로 알려진다. 최북과 안산 문인들과의 교유는 권혜은, 「崔北의 花鳥翎毛畵를 통해 본 安山文人들과의 交遊」, 『미술사연구』 26(2012), pp. 139-159. 국립전주박물관, 앞의 책, pp. 106-107 참조.

35) 〈수간모옥도〉에는 “몇 채의 오막살이가 절로 마을을 이루었네. 고송유수관도인이 단원(김홍도)의 책상에서 그려 백하신동에게 준다(數間茅屋自成村 古松流水舘道人 寫于檀園榻 贈白下申童)”는 제문이 전한다. 김소영, 「古松流水館道人 李寅文 硏究」 (명지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5), p. 161 참조. 〈소림모정도〉에는 “찬하관에 비가 갠 뒤, 청류관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써서 평호거사께 바친다(粲霞館霽後 淸流觀寫呈萍湖居士)”는 제문이 전한다. 겸재정선기념관, 『겸재정선기념관 소장유물도록』(2011), 도 13, p. 40 참조.

36) 朴齊家, 『貞蕤閣集』詩集 2, 「金應煥畫 二首」, “誰向南宗傳妙訣 數柯秋樹一茅亭.” 박제가, 정민·이승수·박수밀 외 옮김, 『정유각집』상 (돌베개, 2010), p. 466.

37) 제임스 케힐은 1982년 江蘇省 淮安에서 발견된 15세기 후반경 무덤에서 나온 화원화가들의 그림에서 率略한 화풍이 보이는 점은 그들도 寫意畵 방식으로 작업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지적했다. 또한 그는 사의화가 語義 그대로 ‘생각을 스케치한 그림’으로 그려지기보다 단순하면서도 매우 빠르게 그릴 수 있어 작은 선물용으로 다량으로 제작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제임스 케힐, 장진성 옮김, 『화가의 일상: 전통시대 중국의 예술가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작업했는가』 (사회평론아카데미, 2019), pp. 64-65 참조.

38) “李命基畵面, 金弘道畵體, 兩人名於畵者, 而不能畵一片靈臺惜乎, 何不修道於林下, 浪費心力於名山雜記槪論其平生, 不俗也貴. 丙辰夏日, 十友軒 六十二歲翁 自評.” 문화재청 편, 『한국의 초상화-역사 속의 인물과 조우하다』 (눌와, 2007), p. 230 참조.

39) 김홍도의 《서원아집도병풍》과 강세황의 화평은 진준현, 앞의 책, pp. 511-512 참조. 이상 언급한 작품과 도판은 이연주, 앞의 논문, pp. 156-159, pp. 294-295 참조.

40) 아회도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로 송희경, 『조선후기 아회도』 (다ᄒᆞᆯ미디어, 2008) 참조.

41) 김지영, 앞의 논문, p. 49 참조.

42) 강명관, 『조선후기 여항문학 연구』 (창작과 비평사, 1997), pp. 179-188 참조.

43) 장수와 복록을 상징하는 신선도가 궁중에서 세화로 진상되던 상황에 대해서는 유미나, 「채색 선인도(彩色仙人圖), 복·록·수를 기원하는 세화(歲畵)」, 『강좌미술사』 53(2019), p. 172 참조.

44) 〈남극노인도〉에는 “기미 12월 낙서 산포가 그려 최형 영숙의 회갑에 대한 우의로 바친다(乙未復月 駱西散逋寫 奉以 寓庵崔兄永叔回甲)”는 제문이 있다. 차미애, 『공재 윤두서 일가의 회화』 (사회평론, 2014), p. 157 참조.

45) 이 병풍의 <仙鹿圖>에는 역관 이민식으로 밝혀진 李君 用訥에게 그려준다는 제문이 남아있다. 김홍도의 《神仙圖八帖屛風》에 대해서는 진준현, 앞의 책, pp. 103-104, 도 97-1~8 참조.

46) 국립민속박물관, 『조선대세시기』Ⅲ 경도잡지·열양세시기·동국세시기(2007), pp. 59-60 원문과 해석 참조.

47) 〈慕堂洪履祥平生圖〉 (1781)는 慕堂 洪履祥(1549~1615)의 일생을 묘사한 것으로 이 병풍의 마지막인 회혼식 장면의 윗부분에는 ‘辛丑九月士能畵于瓦署直中’이라고 적혀 있어 김홍도가 제작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朝鮮時代 風俗畵』 (2002), pp. 90-93, pp. 297-298 참조. 김홍도의 〈仕女圖〉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신축(1781)년 4월 사능이 연파관주인을 위하여 그렸다(辛丑四月士能爲煙波觀主人作)”는 제문이 남아있다. 진준현, 앞의 책, p. 28 참조.

48) 〈매하쌍치도〉에는 “정미년 음력 7월에 삼기재 칠칠이 그려 김씨 성을 가진 친구와 이씨 성을 가진 친구에게 준다(丁未年歲 辛未梧月 三奇齋 七七寫 贈金友 次贈李友而貫)”는 제문이 전한다. 국립전주박물관, 앞의 책, p. 162 참조. 조선시대 영모화의 흐름에 대해서는 洪善杓, 「韓國의 花鳥畵」, 『韓國의 美』 18-花鳥四君子(중앙일보, 1985). 최북의 화조영모화에 대해서는 권혜은, 「호생관 최북의 화조영모화」, 국립전주박물관, 앞의 책, pp. 144-150 참조.

49) 김씨와 이씨 친구가 실제 최북의 친구였다면 이와 같이 모호한 호칭을 쓰기보다 친구의 이름이나 호를 구체적으로 명시했을 것이다. 아마도 주문 대응 과정에서 주문자를 친근하게 대하기 위한 의도에서 친구라는 표현을 쓰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50) 〈어약영일도〉에는 “정해년(1767) 2월 삼현을 위해 장난삼아 그렸다(丁亥春仲爲三玄戲艸)”는 제문이 남아 있다. 한국민족미술연구소, 『간송문화』 79(2010), pp. 162-163. 『한양가』에는 “다락벽 鷄犬獅虎, 장지문 魚躍龍門”이라는 구절이 있어 집안의 벽면에 붙이기 위한 벽사용, 길상용 영모화가 광통교에서 유통되었음을 알 수 있다. 金智勇 번역 주석, 『삼도부와 한양가 그리고 한양오백년가』 (명문당, 2011), p. 159 참조.

51) 김홍도가 이의수에게 그려준 게 그림에는 “1784년 여름, 갑진년 6월 단원이 임청각 주인을 위해 그렸다(甲辰流夏 檀園爲臨淸閣主人寫)”는 제문이 있다. 이태호, 「김홍도의 안기찰방 시절 신자료新資料-임청각 주인에게 그려준 단원화첩과 성대중의 편지를 중심으로」, 『朝鮮後期 花鳥畵展』(동산방, 2013), pp. 139-151. 김홍도의 〈게〉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유씨 노인의 행차에 찬수(반찬)로 그려준다(爲柳老贐行饌需 寫贈)”고 쓰여 있다. 진준현, 앞의 책, p. 607 참조.

52) 〈유봉전도〉에는 “숭정기원 후 다섯 번째 을유년(1885) 5월 하순에 희원 이한철이 경승재에서 그렸다(崇禎紀元後五乙酉五月下澣 希園 李漢喆寫 於敬勝齋)”는 제문이 쓰여 있다. 〈유봉전도〉와 이 작품이 수록된 《影堂紀蹟》에 대해서는 문화재청 편, 앞의 책, pp. 306-307, pp. 476-487 참조.

53) 이한철의 《花鳥圖12幅屛風》에 대해서는 오송이, 「조선시대 꿩그림〔雉圖〕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8), p. 59, 도 70-1 참조.

54) 도화서의 폐지에 따른 화원들의 소속 및 업무의 변화는 박정혜, 「대한제국기 화원畵院 제도의 변모와 화원의 운용」, 『근대미술연구』 (2004), pp. 88-118. 대한 제국기 도화서 화원들의 상황에 대해서는 강민기, 「제국의 황실화가들, 화가에서 ‘시대인’으로」, 『왕의 화가들』 (돌베개, 2012), pp. 222-226 참조.

55) 『每日新報』, 1916년 5월 24일자 1면, 崇陽山人 張志淵이 연재한 松齋漫筆의 逸士遺事. 박준영, 「朝鮮 末期 畵員琳塘 白殷培의 生涯와 繪畵」, 『미술사연구』 25(2011), p. 401 참조.

56) 『紅藥樓續懷人詩錄』, “爭奈家家親索畵 知君聲價又松年.” 吳世昌, 앞의 책(하), pp. 998-1003 참조.

57) 최완수, 「芸楣實紀」, 『간송문화』 37(1989. 10), pp. 46-47. 金相燁, 「小癡 許鍊의 교유관계」, 『동양고전연구』 16(2002. 06), pp. 66-76 참조.

58) 김용준, 『새 近園隨筆』 (열화당, 2009), p. 241. 洪善杓 著, 「張承業의 재조명」, 『朝鮮時代繪畵史論』 (문예출판사, 1999), p. 440 참조.

59) 〈名賢簡牘〉 十一, 「田琦의 書簡」, “懇者 尊庄藥料 曾知入用於擔局 而聞其局今已下簾云 或能移用於敝舖否.…… 曾托諸畵中 許小癡三幅 月前已來到 從當滙鑒也. 不次上 弟 田琦 再拜 上.” 국립광주박물관,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 200년』 (2008), p. 122의 원문과 해석, 도판 57 참조. 전기의 중개 활동에 대해서는 任昌淳, 「解題《杜堂尺素》」, 『서지학보』 3(1990), pp. 167-176. 성혜영, 「19세기의 중인문화와 고람 전기(1825~1854)의 작품세계」, 『미술사연구』 14(2000. 12), pp. 137-174. 전기의 서화 중개를 직업적 행위로 평가한 연구는 황은영, 「古藍 田琦의 繪畵仲介活動」, 『강원사학』 21(2006), p. 121 참조.

60) 李文奎, 앞의 논문, p. 168 참조.

61) 김용준, 앞의 책, p. 241 참조.

62) 광통교의 서화 유통에 대해서는 윤진영, 「조선 말기 궁중양식 장식화의 유통과 확산」, 『조선 궁궐의 그림』 (돌베개, 2012), pp. 338-342, p. 401 참조.

63) 국립고궁박물관, 『창덕궁 희정당 벽화』 (2017), p. 89 참조.

64) ‘厥隱’은 대한제국기 육군 군의로 활동했던 劉秉珌로 알려진다. 〈군리도〉에 대해서는 공아트스페이스, 『택선고집』 (2017), pp. 116-117 참조.

65) “본서화관에서 신구서적(新舊書籍)과 고금서화(古今名畵)를 대발수(大發售, 대발매)이오며 각종 회화류(各種繪畵類)를 수구수응(隨求酬應, 즉시 매매)이오니 육속청구(陸續請求, 계속 청구)하심을 위함(爲望, 바람)-경성 동현(銅峴) 내 33통 8호 한성서화관, 관주 최영호(崔永鎬), 화사 조석진(趙錫晉).” 손영옥, 「한국 근대 미술시장 형성사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미술경영 협동과정 박사학위논문, 2015), p. 91 참조.

66) 국립중앙박물관, 『미술 속 도시 도시 속 미술』 (2016), p. 371 참조.

67) 박나라보라, 「韓國 近代 故事·道釋 人物畵 硏究」 (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0), p. 31 참조.

Fig. 1.
金禔, 〈寒林霽雪圖〉, Kim Si, Snowscape with Figures, 1584, Chosŏn, ink on silk, 52.3×67.2cm, The Cleveland Museum of Art (The Cleveland Museum of Art, http://www.clevelandart.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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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韓宗裕, 〈姜世晃肖像〉, Han Chongyu, Portrait of Kang Sehwang (Fan painting), 1781,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55.0×35.7cm, Private Collection (P’yoam Kang Sehwang: shidae rŭl apsŏ kan yesurhon, 2013, p.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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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鄭敾, 〈白岳山圖〉, Chŏng Sŏn, Mt. Paegaksan, 18th Century,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25.1×23.7cm, Gansong Art Museum (Kansong munhwa 66, Han’guk minjok misul yŏn’guso, 2004, p.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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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崔北, 〈金剛全圖〉, Ch’oe Puk, Complete View of Kŭmgang mountain, 18th Century,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50.7×60.7cm, Pyŏngyang Museum of Korean Art (Puk’an ŭi munhwajae wa munhwa yujŏk, 2002, p. 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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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金應煥, 〈金剛全圖〉, Kim Ŭnghwan, Complete View of Kŭmgang mountain, 1772,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22.3×35.2cm, Private Collection (Uri kangsan ŭl kŭrida: hwaga ŭi shisŏn, Chosŏn shidae shilgyŏng sansuhwa, 2019, p. 1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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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崔北, 〈山水圖〉, Ch’oe Puk, Landscape, 1747,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29.3×40.2cm, National Museum of Korea (Hosaenggwan Ch’oe Puk, 2012, p. 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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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芥子園畵傳』, 「仿黃一峰富春山」, The Mustard Seed Garden Manual of Painting (Shinyŏk kaejawŏnhwabo, 1987, p. 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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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李義聲, 〈疏林茅亭圖〉, I Ŭisŏng, Sorim Thatched Pavillion, 19th Century, Chosŏn, ink on paper, 34×31.5cm, Gyeomjae Jeong Seon Memorial Museum (Kyŏmjae Jŏng Sŏn ginyŏmgwan sojang yumul torok, 2011, p.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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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金應煥, 〈秋樹一茅圖〉, Kim Ŭnghwan, Autumn Landscape, 18 th Century, Chosŏn, ink and light colors on paper, 17.4×22.3cm, Sunmoon University Museum (Sŏnmun taehakkyo pangmulgwan myŏngp’um torok, 2000,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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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金弘道, 〈西園雅集圖〉, Kim Hongdo, Elegant Gathering in the Western Garden (Fan painting), 1778,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27×80.3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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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寅文, 〈松石園詩會圖〉, I Inmun, Poetry Gathering at the Songsŏgwŏn Garden, 1791,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25.6×31.8cm, Private Collection (Misul sok toshi toshi sok misul, 2016, p. 14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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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弘道, 〈仙鹿圖〉, 《神 仙圖八帖屛風》, Kim Hongdo, Paintings of Immortals and Deers, 1779, Chosŏn, ink and light color on silk, 131.5×57. 6cm, National Museum of Korea (National Museum of Korea, http://www.museum.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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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崔北, 〈梅下雙雉圖〉, Ch’oe Puk, Two pheasants under plum blossom, 1751, Chosŏn, Ink and color on paper, 105.2× 56.2cm, National Museum of Korea (Hosaenggwan Ch’oe Puk, 2012, p.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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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沈師正, 〈魚躍迎日圖〉, Sim Sachŏng, Leaping Fish Welcomes the Sun, 18th Century, Chosŏn, light colors on paper, 129.0×57. 6cm, Gansong Art Museum (Kansong munhwa 67, 2004, p. 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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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金弘道, 〈게〉, Kim Hongdo, Crabs, 18~19th Century, Chosŏn, ink on paper, 35×41cm, National Museum of Korea (Chosŏn shidae sansuhwa, 2004, p. 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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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許鍊, 〈墨牡丹圖〉, Hŏ Ryŏn, Peony, 19th century, ink on paper, 98.8× 45.0cm, Paktang Gallery (Namjonghwa ŭi kŏjang Soch’i Hŏ Ryŏn 200nyŏn, 2008, p.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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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李漢喆, 〈酉峯全圖〉, 《影堂紀蹟》, I Hanch’ŏl, Complete View of Yubong, Records of Yŏngdang, 19th centry, Album, ink on paper, 36.3×26.3cm, Yun Wansik Collection (Munhwajaech’ŏng p’yŏn, Han’guk ŭi ch’osanghwa-yŏksa sok ŭi inmul kwa chou hada, 2007, p. 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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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金奎鎭, 〈天下奇絶圖〉, Kim Kyuchin, Extraordinary Scenery, early 20th Century, ink and light color on paper, 18.0×40.0cm, Private Collection (Ch’angdŏkkung Hŭijŏngdang pyŏk’wa, 2017, p. 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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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趙錫晋, 〈魚蟹圖〉, Cho Sŏkchin, Carp, early 20th Century, ink and light color on silk, 58×38.5cm, Private Collection (Han’guk kŭndae hoehwa myŏngp’um, 1995, p. 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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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李道榮, 〈器皿折枝圖〉 (부분), I Toy ŏng, Still Life with Bronze Vessels, Flowers and Fruits (detail), 1923, ink and color on paper, 34.0×168.5cm, National Museum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t (Misul sok toshi toshi sok misul, 2016, p. 2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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