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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조선시대 睿眞의 성립과 전개 : 〈연잉군 예진〉을 중심으로*

Abstract

왕자의 초상화인 예진은 숙종대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였으며, 이에 첫 수혜를 입은 왕자는 연잉군, 즉 영조였다. 영조는 이때의 예진을 때에 따라 적극적으로 활용하며 예진이 점차 정치적으로 특별한 의미와 지위를 갖출 수 있도록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숙종대 이후 영조에 의해 정치적 시각물로 활용되며 점차 격상된 지위를 수립하는 예진의 발전 양상에 대해 고찰하였다.
영조는 1714년 <연잉군 예진>을 하사받았으며 이는 지지기반이 약했던 영조에게 정치적으로 유리한 수단이 되어 주었다. 이후 경종대에 세제에 등극한 영조는 1724년 다시금 스스로의 예진 도사를 시도하는데, 이를 통해 달라진 자신의 신분을 시각화하고자 한 것으로 파악된다. 이후 임금이 된 영조는 숙종으로부터 하사받은 자신의 예진을 끊임없이 언급하고 궁궐 내로 이봉하여 봉심케 한다. 또한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후손인 사도세자와 정조에게도 예진을 도사할 기회를 허락함으로써 숙종대에 시작된 예진 전통이 후대로 계승될 수 있도록 하였다. 이처럼 영조는 부왕에 의해 일회적으로 하사된 예진에 특별한 의미와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자신과 이후 왕자들의 지지기반을 확고히 하고자 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예진은 점차 격상된 지위를 획득하며 조선 후기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을 수 있게 되었다.

Abstract

The Portrait of Prince Yeonying was the official prince portrait, or yejin 睿眞, that was commissioned by the king. Prince Yeonying (1694~1776) attended to his prince portrait in person and used it as a statement of his power at the junctures of his political career even after he ascended to the throne to become King Yeogjo (r. 1724~1776). This paper tracks the trajectory of prince portraits acquiring new significance as the visual proclamation of royal authority in the late Joseon. The Portrait of Prince Yeonying was bestowed upon the prince by his father, King Sukjong (r. 1674~1720) in 1714. That event played out politically favorable for the prince for whom the political support was not yet built on a stronghold. When he was appointed as Crown Prince to his brother, King Gyeongjong (1720~1724), Prince Yeonying had his official portrait to be painted once more, and thereby sought to proclaim visually his elevated position in court politics. After his coronation, he continued to turn to his prince portrait, eventually having it moved to the interior of the royal palace so that it could be regularly examined and treated. Furthermore, he allowed his heir apparent, Crown Prince Sado, and grandson, who later became King Jeongjo, to have their official prince portraits, establishing the production of prince portraits as a norm to be observed by later generations. King Yeongjo, in other words, added political significance to his own prince portrait, which was a one-time gift from his father, as a means to bolster the basis of political support for not only himself but also his successors. Through this trajectory, prince portraits came to play a critical role in the visual politics of late Joseon.

Ⅰ. 서론

睿眞은 왕자의 초상화를 말한다.1 왕자는 장차 왕이 될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을 담은 예진은 대부분 체계적인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비공식적으로 제작되었다. 이는 같은 궁중 초상화임에도 임금의 초상인 御眞과는 매우 다른 양상이기에 주목된다. 이렇듯 상이한 양상은 예진의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왕자의 모호한 지위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원자 책봉을 받은 왕자는 대부분의 경우 차기 국왕으로서 유년 시절부터 특별한 교육을 받고, 존귀한 신분으로서의 대우를 받으며 자란다. 하지만 동시에 父王, 즉 현임 임금의 권위를 절대로 넘어서는 안되는 위태롭고 역설적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에 임금일 수도, 신하일 수도 없는 왕자만의 모호한 정체성이 초상화인 예진에도 드러난 것으로 해석된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예진 제작이 확인되는 왕자는 단 아홉 명에 불과하다.2 이 중 4점의 예진은 산발적이기는 하나 비교적 조선 초기에, 나머지 5점은 숙종대 이후인 후기에 제작되었다. 초기에 제작된 예진은 크게 공신도상의 형식으로 제작된 것과 왕자 개인의 취미나 목적 달성을 위해 그려진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3 이 경우 제작 주체와 의도가 산발적인 만큼 왕자의 초상으로서 작품이 지니는 일치된 목적이나 의미는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肅宗代(1674~1720)에 이르러 예진은 이전과 달리 왕자의 상승된 지위를 나타내는 정치적 시각물로서의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러한 양상은 이후의 왕대로 계승되며 한 차례의 도사로 여러 본의 예진을 제작하고, 예진 제작을 위해 따로 도감을 설치하는 등 점차 예진만의 특별한 지위 수립으로 이어지게 되었다.4 숙종대에 단 한 번, 그것도 일종의 하사품의 성격으로 도사되었던 예진이 어떻게 이후의 왕대에서 이렇듯 격상된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을까. 본고는 이러한 예진의 지위 변화의 중심에 英祖(1724~1776)가 있었다는 사실을 주목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진에 대한 선행 연구는 주로 현전하는 작품을 개별적으로 고찰하는 방향으로 이어져 왔으며, 이를 통해 각각의 예진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5 그러나 이는 특정 작품에 대한 개별적인 고찰이었기에 조선 후반기 공통된 함의를 띄고 제작되기 시작한 예진만의 특징과 전체적인 발전 양상에 대해서는 다뤄지기 어려웠다. 이에 본고에서는 앞선 연구들의 성과에 더해 일정한 정치적 함의를 띄며 영조에 의해 점진적으로 그 지위를 격상시켜 온 조선 후반기 예진의 총체적 성격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연잉군 예진〉, 1724년 초본이 도사된 연잉군의 世弟시절 예진 그리고 英祖代의 思悼世子 예진과 정조 예진 관련 기록 및 이에 대한 正祖代의 기록을 차례로 다룰 것이다.6 이중 1714년에 도사된 〈연잉군 예진〉을 제외한 다른 예진들의 경우 작품이 전하지 않아 정확한 도상을 파악할 수 없으며 이는 본 연구의 가장 큰 한계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현 시점에서 발생한 작품의 부재가, 그 작품이 제작되었다는 사실마저 소실케 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당대의 여러 기록을 통해 제작 경위과 봉안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작품의 부재를 부분적으로나마 보완해 볼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로써 조선 후기 지속적으로 제작되었고, 적극적인 정치적 시각물로 활용되며 점차 격상된 지위를 획득한 조선 후기 예진에 대해 조망해보고자 한다.

Ⅱ. 정치적 함의를 지닌 예진 전통의 시작

1. 왕자의 위상 강화를 위한 예진 제작: 〈연잉군 예진〉

숙종은 잘 알려져 있듯 조선 후기 어진 체계를 다시금 세운 왕이다.7 그는 양난으로 인해 소실된 선대왕들의 어진과 진전을 복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어진까지 제작하는 당시로서는 매우 파격적인 행보를 보인다. 어진은 이제껏 영정으로서의 의미가 강했기에 살아있는 왕을 대상으로 초상을 그려 봉안하는 일은 신하들로 하여금 큰 반발을 샀다. 그러나 숙종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신의 어진을 도사하고 이후 강화도 長寧殿에 봉안까지 강행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숙종이 단순히 초상화에 취미가 있어 한 행동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는 현임 군주로서 자신의 모습을 시각화하여 곳곳에 봉안함으로써 임금의 존재를 더욱 강력히 드러내고자 하였고 그 수단으로 어진을 활용한 것이다.8 이러한 숙종에게 예진은 어진만큼이나 정치적 상징물로써 큰 의미를 지녔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는 세 아들 중 왕세자를 제외한 두 아들 延礽君(1694~1776 이후 英祖)과 延齡君(1699~1719)에게 각각 예진을 하사하였고 이 이례적인 도사는 이후의 왕대로 이어지며 조선 후반기 예진 전통의 시초로 작용하였다.
숙종은 자신의 병간호에 매진해 준 두 아들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에서 예진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9 그런데 이 특별한 선물이 숙종의 세 아들 중 단 두 아들, 그것도 세자가 아닌 나머지 왕자군들만을 향하고 있어 의아함을 자아낸다. 기록대로 예진을 하사한 이유가 병간호에 대한 보답일 뿐이라면 景宗(재위 1720~1724)은 동생들과 달리 부왕의 간호에 참여하지 않았어야 하겠지만, 그 역시 아들로서 최선의 도리를 다한 것으로 보인다.10 그렇다면 왕자 중 가장 신분이 높은 세자이면서 동생들과 동일하게 병간호에도 힘썼을 경종의 예진은 어떤 이유에서 제작되지 않은 것일까. 본 논문에서는 이를 왕자들의 당시 정치적 입지와 관련지어 해석해보고자 하였다.
예진을 도사하던 시기는 숙종의 재위가 약 40년에 이르던 때로, 수차례의 환국으로 인한 당파 간의 갈등이 그 어느 때보다 심해지던 시기였다. 이러한 양상은 숙종이 연로해지면서 점차 숙종 사후의 왕위계승문제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11 더불어 어진의 하사를 명했던 1713년은 『家禮源流』의 원작자 문제로 노론과 소론이 다시 한 번 크게 대립하며 시비하였는데, 이러한 정국은 숙종 연간 말기에 가장 큰 골칫거리이자 다음으로 어떤 왕자가 왕위에 오르더라도 또 다른 붕당의 시작을 예고하는 것이었다.12 따라서 숙종은 자신의 아들들을 필두로 삼은 노론, 소론 각각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장치를 심어주고자 했다고 보이며 이에 한 수단으로 예진을 활용한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다.
한편 세자인 경종의 편에 섰던 소론은 전례 없는 장기집권을 거듭하며 세력을 키워나가고 있었는데, 그들이 당시 어느 정도로 강한 힘을 가졌고 또 이를 과시하였는지는 경종의 장인이었던 魚有龜(1675~1740)의 상소를 통해 짐작해볼 수 있다.13
御容을 沁都에 奉安하는 일은 애초에 聖世의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이제 또 都監을 설치하여 그 일을 떠벌려서 어진을 引對하는 것은 圖本을 살펴보는 일에 지나지 않고, 大臣에게 자문하는 바는 정치의 방법을 강론하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니, 신은 전하께서 항상 억제하고 두려워하는 자세를 가지시어 겸양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은 外飾이요 내심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14
이는 예진을 도사하기 한 해 전인 1713년,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도사하려 하자 이에 대해 어유구가 올린 疏의 내용이다.15 임금이 이미 행한 일에 대해 ‘애초에 아름다운 일이 아닌데’ 그걸 또 ‘떠벌려서’ 한다고 말한 이 상소는 실록을 기록한 사관의 입장에서 보아도 무례하였는지 사관이 어유구가 이런 말을 한 것을 기이하게 여겨 따로 기록해 둘 정도였다.16 이에 그치지 않고 위의 상소 사건 바로 다음 날 임금의 새로운 어진 제작을 추천하고 그 과정을 총괄 지휘하였던 이이명은 사직소를 올리기에 이른다.17 좌의정이 사직의 뜻을 밝혀야 할 만큼 어유구의 상소는 매우 불경스럽게 여겨졌던 것이다. 이에 대해 임금은 그의 사직을 말리며 어유구가 딱히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니라며 포용적인 태도를 보인다.18 상소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답을 하지 않고 묵과한다. 그러나 그해 11월 왕자들에게 예진 하사를 명할 때, 어유구와 정치적 뜻을 같이할 수밖에 없었던 사위 경종이 완벽히 배제된 것은 이 무례한 상소에 대한 가장 강력한 답이 되었으리라 추정해볼 수 있다.
이렇듯 어유구를 필두로 한 소론은 원자인 경종을 지지하며 노론을 견제하였다. 반면 노론은 왕세자의 출신 성분을 문제 삼으며 淑嬪 崔氏(1670~1718)의 소생인 연잉군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19 이들은 모두 자신의 안위를 위해 왕자를 내세운 것이다.
따라서 숙종에게 있어 왕세자를 등에 업고 득세한 소론의 횡포를 잠재우는 동시에 두 당파 모두에게 왕과 왕자 즉 왕족에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는 것은 임금으로서의 마지막 과업이었다 할 수 있다. 이전이라면 환국을 통해 정세를 뒤집거나 붕당의 갈등에 직접 개입하여 판결하는 등 적극적 행동을 취했겠지만, 연로해진 숙종에게 있어 이는 무리였다고 판단된다. 그렇기에 그는 매우 빠른 과정을 거쳐 어진을 제작하고 뒤이어 왕자군의 예진 제작에까지 착수했다고 보인다. 즉, 숙종은 병간호라는 표면적 이유를 앞세워 예진 제작을 명했으나 그 이면에는 불안한 지위를 지닌 두 왕자에게 지지를 표하고 더 나아가 편중된 권력의 일부를 분배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던 것이다.

2. 〈연잉군 예진〉의 도상 분석

〈연잉군 예진〉은 그가 21세 되던 해 화원 朴東普(1673~1744 이후)에 의해 그려진 것이다(Fig. 1).20 화면의 우측이 화재에 의해 일부 소실되었지만 좌측 상단에 ‘초봉연잉군고호양성헌(初封延仍君古號養性軒)’이라는 표제가 붙어 있어 초상의 주인이 연잉군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Fig. 1-1). 작품 속 연잉군은 烏紗帽에 黑團領 차림을 하고 있는데 이는 문무백관들의 관복과 동일하며 왕자군의 신분에서 궁을 출입할 때 갖추는 복식이다. 이때의 높은 사모는 숙종대의 전형이라 할 수 있으며, 左顔 7분면에 전체적인 몸의 방향은 정면에 가깝게 묘사한 방식 또한 숙종대 초상화 양식의 특징 중 하나이다.21 이와 함께 연잉군이 앉아있는 교의와 그 뒤로 둘러진 호피, 발을 둔 족좌대의 모습은 조선 후기 공신도상과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비록 연잉군이 왕자의 신분임에도 예진은 왕의 어진보다 신하의 초상에 가깝게 그려졌기 때문이며 이를 통해 숙종대의 예진이 철저히 국왕의 신하된 왕자, 즉 임금이 내리는 하사품의 의미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당시 연잉군과 관련된 기록인 『延礽君嘉禮謄錄』 (1712)에서는 예진 속 연잉군의 관복을 관례 중 初嘉 때에 취하는 복식으로 규정하며 옷의 제작 방식과 재료에 대해 빠짐없이 기술하고 있는데 이중 흉배에 관한 부분이 특히 주목할 만하다. 기존의 여러 선행연구를 통해 〈연잉군 예진〉 속 흉배에 등장하는 동물은 흔히 白澤이라 일컬어져 왔다(Fig. 1-2). 그러나 등록에서 기술하고 있는 흑단령의 흉배는 백택이 아닌 麒麟이기에 알려진 것과는 차이가 있다(Fig. 2, 3).22 이에 더해 실제 예진의 흉배 또한 사자의 얼굴을 하고 있는 백택보다는 용의 얼굴을 한 기린의 형상에 가까운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이후 시기 묘사된 흉배의 모습과 비교하였을 때 더욱 확연히 드러난다.
본 논문에서는 정확한 흉배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이후 시기의 작품으로 〈이하응 초상(흑단령포본)〉(1869)(Fig. 4)과 〈의화군 사진엽서〉(19세기)(Fig. 5)를 꼽았다. 이중 〈이하응 초상(흑단령포본)〉의 경우 대군의 기린흉배가 뚜렷이 묘사되어 있고, 〈의화군 사진엽서〉는 비록 초상화는 아니나 비교적 선명한 백택흉배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이하응 초상〉에 묘사된 흉배 속 기린은 용의 얼굴에 사슴과 같은 몸, 말과 같은 갈퀴와 발굽이 특징적이다(Fig. 4-1). 이는 기린 도상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연잉군 예진〉 속 흉배에 묘사된 동물과 그 얼굴 표현에 있어 매우 높은 유사성을 보인다. 특히 입을 벌린 채 측면을 향하는 얼굴과 갈퀴의 표현이 매우 유사하여 예진 속 연잉군의 흉배가 기린일 수 있다는 가정에 더욱 무게를 실어준다.
반면 의화군의 흉배 속 백택은 정면상의 얼굴에 몸통은 측면으로 돌려 다리를 모은 채 앉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Fig. 5-1). 더불어 얼굴 주변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갈퀴와 굳게 다문 입, 고양잇과 특유의 발톱과 자세 표현은 백택 도상의 전형이다. 물론 예진의 흉배에 나타나는 동물의 발톱 모양이 의화군의 흉배에서 확인되는 백택의 발톱 묘사와 상당부분 유사하나, 가장 중요하다 할 수 있는 얼굴의 표현과 전체적인 자세에서는 유사성을 찾아보기 어렵다.
조선 초기부터 기린은 대군의 상징으로, 백택은 군의 상징으로 쓰여 왔기에 군의 신분인 연잉군의 흉배에 기린과 매우 유사한 동물이 수놓아졌다는 사실은 다소 의아하다.23 이는 17세기 후반부터 이미 흉배의 혼란이 시작되었기 때문으로도 볼 수 있을 것이다.24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와 법도를 중시했던 궁에서 신하도 아닌 왕자가 이렇듯 간단히 신분의 예를 어겼다는 사실은 쉬이 납득하기 어렵다. 이에 더해 일상생활 중에는 간혹 흉배를 포함한 복식의 예가 간소화되거나 일부 혼용되었더라도 이를 초상으로 그려 하나의 시각물로 남기는 경우에는 그렇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되는 기록이 있어 더욱 주목된다.
이이명이 또 아뢰기를, “御服 가운데서 법식에 어긋난 것은 마땅히 바로잡아야 합니다.” 하니, 提調 金鎭圭와 閔鎭遠도 모두 거기에 찬동하였으며, 임금이 옳게 여겼다. 뒤에 禮官이 尙方의 提調와 함께 상세히 살펴보고 다만 大帶의 제도만을 고쳐서 겉은 희고 속은 붉게 하여 圖式을 본떠서 만들도록 하였다.25
위의 실록 기사는 1713년 숙종이 자신의 어진을 새로 도사할 때의 기록이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듯 도사를 마친 어진에 대해서도 복식의 예가 법도에 어긋나지 않는지 재차 확인하고 수정하였던 숙종과 화원들이 바로 이듬해인 예진 도사 때에는 이러한 법도를 쉽게 어기고 대충 그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설사 예진을 제작할 당시에는 흉배가 다소 잘못되었더라도 이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분명 예에 맞는 백택으로 고쳐놓았을 확률이 농후하다. 결국 예진 도사 과정에서 연잉군이 기린흉배를 착용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왕의 특별한 허가나 배려가 수반되어야 했을 것이다. 더불어 예진이 도사된 이후에는 기린흉배를 시각화하여도 문제가 없을 만큼의 향상된 지위를 공개적으로 부여받은 것이기에 왕자군이었던 연잉군의 입지에 더욱 힘이 실릴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흉배에 대한 법규가 조선 초기에 정해진 만큼 숙종대에 이르러서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일부 변화를 맞이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듯 기린 형상에 가까운 새로운 유형의 흉배는 후대로 이어졌을 가능성 또한 농후하다. 그러나 앞서 살펴보았던 〈의화군 사진엽서〉를 통해 이후 시기 왕자군 또한 기린이 아닌 정확한 백택흉배를 착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경국대전』을 통해 조선 초기부터 백택으로 지정되어왔던 왕자군의 흉배가 숙종의 아들인 연잉군에게는 적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는 조선 후기의 여러 왕자군 중 숙종대의 연잉군만이 군의 흉배보다 상위 단계인 대군의 기린흉배를 써왔음을 의미하며, 그가 이를 시각물로 남겨도 무방할 정도로 임금의 지지를 얻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게 한다. 이는 재위 기간 내내 어진을 통해 왕권 강화를 꾀했던 숙종이 예진에도 이와 유사한 의미를 투영함으로써 왕자군이 왕족으로서 일정 기준 이상의 지위를 확보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3. 〈연잉군 예진〉(1714)의 봉안처 변화

1714년 예진을 하사받은 연잉군은 이를 자신의 사저인 彰義宮에 봉안하였으며 흔히 이때의 예진이 처음부터 창의궁 내부 藏譜閣에 봉안되었다가 이후 慶熙宮의 泰寧殿과 昌德宮의 璿源殿으로 이안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장보각’이라는 명칭의 어필이 내려지고 이곳에 예진과 더불어 여러 점의 어필 및 서찰이 봉안된 것이 이보다 훨씬 이후인 1765년 11월의 일인 것을 감안한다면 하사받은 직후에는 예진이 장보각이 아닌 창의궁 내의 또 다른 장소에 봉안되어 있었을 것이라 보인다.26
한편 창의궁 내에 봉안되어있던 〈연잉군 예진〉은 1745년 무렵 慶熙宮 太寧殿으로 移安된다.27 본래 태령전은 영조가 1744년(영조 20년) 도사한 자신의 51세 어진 중 일부를 봉안하기 위해 축조되었다.28 영조가 어떠한 이유에서 예진까지 이곳으로 이안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바가 없다. 그러나 약 30년 전 그려진 예진을 특별히 궁 안으로 들인 것에는 신하들로 하여금 이를 자주 봉심케 하고 임금 스스로도 이 시기 자신의 어용에 대해 자주 보며 거론할 수 있게 하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임금이 된 이후 약 10년 주기로 여러 점의 어진을 제작한 영조임에도 1714년의 예진이 다른 어진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남다른 의미를 지녔기에 이렇듯 보다 가까이 봉안하려 하였다고 사료된다.
영조 사후 이 예진은 봉안되어 있던 태령전이 魂殿으로 명해지며 잠시 경희궁 내 景賢堂으로 이안되었다가 정조 2년 창덕궁 구선원전으로 옮겨져 최종 봉안되었다.29 사후 봉안처의 변화는 기존의 선례를 따른 것으로 특별한 의미를 찾아보기는 어렵지만 영조의 의도에 의해 창의궁에서 경희궁의 태령전으로 봉안처가 옮겨진 사실에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조는 재위 이후 숙종대의 진전 전통을 이어 강화도의 長寧殿을 지속적으로 활용하는 한편 궁궐과 일부 도성 내에도 여러 진전을 세워 어진을 봉안하였다. 부왕인 숙종은 창덕궁의 선원전을 비롯하여 강화도의 장녕전에 자신의 어진을 봉안하였고 이는 진전이 있는 곳마다 국왕의 존재를 각인시키는 상징물로서 역할하였다.30 영조는 숙종이 지방 여러 진전에 어진을 고루 안배하여 왕권을 시각화한 양상을 궁궐 내부로 들여와 궐내의 어느 곳이라도 자신의 권위가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음을 공고히 하려 하였다. 더불어 재위 이후에도 영조가 중요한 정책을 결정해야 하거나 출신 성분으로 인해 공격받을 때면 늘 선원전 재실에 거둥하여 선대왕의 권위를 빌려오는 행동을 해왔던 것으로 볼 때 숙종이 특별히 하사한 예진을 부왕과 관련이 깊은 경희궁에 봉안한 행위는 단순한 우연으로 보기 어렵다.31 이는 영조가 자신의 예진이 지니는 정치적 영향력과 의미를 인지하였고 이를 활용하고자 이 같은 이안을 감행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Ⅲ. 예진 전통의 계승과 정치적 의미

1. 영조의 주체적인 예진 도사와 활용

영조는 숙종 사후 더욱 활발히 예진을 도사하고 활용한다. 이중 특히 주목되는 것은 그가 세제 시절인 1724년 또 한 차례 예진 도사를 시도하였다는 사실이다.32 안타깝게도 본 예진은 현재 도상 확인이 불가하며 당시에도 초본만 그렸을 뿐 완성되지는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1714년의 예진이 전적으로 숙종의 의지에 의한 하사품이었던 것에 반해, 10년 뒤인 1724년의 예진은 영조 자신의 의지로 제작을 시작했다는 데에 큰 의미가 있다.
이 시기 영조의 예진은 도상은 물론 이에 대한 기록도 매우 제한적이기에 정확한 제작 배경과 주체를 단언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1724년본의 예진이 영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 추정하는 근거로는 예진 제작 전 선행되는 경종 어진 도사의 기록이나 세제를 향한 특별한 하사의 기록이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앞서 언급하였듯 1714년의 예진은 숙종이 왕자들에게 내리는 하사품이었다. 그러나 단순히 하사만을 위해 새로이 화원을 선발한 것은 아니며 이보다 한 해 전인 1713년 숙종의 어진 도사 시 방외화사로 추천되었던 박동보에게 예진을 그리게 하며 어진 제작과 예진 제작은 일종의 연속성을 갖게 된다.33 이러한 선례는 이후 시기로 이어져 영조는 1773년 자신의 80세 어진을 제작하며 정조의 예진 제작을 명하였고, 고종은 1902년 자신의 어진과 순종의 예진을 동시에 제작하는 모습을 보인다.34 따라서 만약 경종의 하명만으로 예진 제작이 시작되었더라면, 도사의 과정이 오로지 예진 단독으로 진행되기에는 무리가 있고 경종의 어진 도사와의 연속 선상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경종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단 한 차례도 자신의 어진을 도사하지 않았고 선왕의 어진을 모사한 기록 또한 없다. 이에 본 논문에서는 1724년의 예진이 임금인 경종의 뜻과는 별개로 영조 스스로의 의지에 의해 제작되기 시작하였을 것이라 추정하였다.
두 번째 예진을 도사한 1724년은 영조가 더 이상 연잉군이 아닌 王世弟로서 궐내에 거처할 때이다. 이에 그는 자신의 지위 변화를 효과적으로 시각화할 목적으로 예진을 활용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경종 재위 1년만인 1721년 왕세제에 책봉되었으며 1722년부터는 대리청정을 시작할 만큼 매우 안정적으로 권력을 향상시키고 있었다. 세제라는 단어의 생경함만큼 궁에서도 세제만을 위해 마련된 제도나 법규는 전무하였고 영조는 ‘왕위를 잇기 위한 후계자’라는 공통점에 의거하여 칭호 외에는 왕세자와 동일한 대우를 받았다.35 이는 거처부터 복식에 이르기까지 생활의 모든 부분에 변화를 불러왔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선행연구에서는 1714년과 1724년의 예진 모두 冠帶 차림으로 그려졌다고 밝힌 바 있다.36 그러나 본고에서는 같은 관대이더라도 왕세제와 왕자군의 관대는 전혀 다른 모양을 하고 있음에 주목하고자 한다.
먼저 왕자군의 관대는 앞서 살펴본 〈연잉군 예진〉에서 확인할 수 있듯 黑團領, 紗帽이다.37 반면 왕세자의 관대는 袞龍袍와 翼善冠으로 영조도 세제 시절에는 이와 같은 차림을 관대로 하였을 것이다.38 이러한 복식의 변화는 그가 세제로 책봉된 직후부터 적용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왕세제 입궁 시 관복에 대해 영의정 金昌集(1648~1722)이 ‘관은 翼善冠을 쓰고 옷은 時服을 입는 것이 좋을 것’이라 언급하고 경종이 이를 윤허한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39 이렇듯 1724년의 영조는 세제로 상승된 자신의 지위와 이를 효과적으로 나타내주는 복식의 변화를 시각화하고자 재차 예진 제작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영조는 입궐 직후의 행사인 冊禮 때에도 갑작스레 기존의 吉服을 두고 視事服을 고집하기도 하였는데, 이 역시 복식을 통해 자신의 변화된 지위를 시각화하려는 의도가 드러나는 행동이다.40 길복은 문무백관들이 國喪이후 일정 시간이 지나면 입는 평상복을 의미한다. 이는 예조를 통해 절목으로 정해진 내용이며 경종대에도 변함없이 이 절목을 따랐다.41 그러나 숙종 생전의 왕세자였던 경종의 경우 신료들이 길복을 입을 시기에도 視事服을 입어 승하한 부왕에 대한 예를 다하였다.42 시사복은 비록 거친 생포를 사용하긴 했어도 이를 착용한 자가 새로운 왕위 계승자임을 나타내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는 素翼善冠을 포함한 복식이었는데 이는 숙종 승하 이전 군 신분에 머물렀던 영조로서는 착용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영조가 어떠한 의도에 의해 자신의 책례 복식을 시사복으로 바꾸었는지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자신이 세제로 참여하는 첫 행사에 예조의 절목을 어기는 무리를 감행하면서까지 익선관 차림의 시사복을 강조하였음은 그가 지위 변동에 의해 달라지는 복식의 변화와 이에 따른 시각적 효과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짐작케 한다.
이렇듯 영조는 초상화로 표현되는 자신의 모습이 정치적으로 얼마나 큰 영향력을 지니는지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왕자군으로는 이례적으로 이미 한 본의 예진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세제가 된 자신의 모습을 그려 봉안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본 예진이 어떤 이유에서 초본을 그린 것에만 그치고 이후 완성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의 부재로 정확한 파악이 어렵다. 그러나 1724년이 경종이 승하하던 때임을 감안하여 보았을 때 예진을 제작하던 중 경종의 병세가 급격히 악화되자 도사를 더 진행하지 못하고 중단한 것으로 짐작해 볼 수 있다.43

2. 사도세자와 정조로 이어진 예진 전통

예진에 대한 영조의 관심은 그가 왕위에 오른 이후에도 지속되며 그의 후손인 思悼世子 (1735~1762 후의 莊祖 추촌)와 正祖(1776∼1800)에게까지 영향을 미쳤다. 영조대에 이르러 예진은 꾸준히 제작되었고,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여러 차례 공식적으로 언급되며 점차 그 중요성과 지위를 높여간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제작되었을 것으로 사료되는 사도세자와 정조의 예진은 현재 작품이 전해지지 않는다. 사도세자의 예진은 영조대에 2점이 도사된 뒤 정조대에 이르러 모사되었으나 1796년 무렵 경모궁과 현륭원에 각각 봉안된 이후 특별히 移安되지 않았고, 이후 洗草나 模寫의 기록도 없다. 더불어 이후의 『御眞圖寫事實』 (1872)과 『影幀摹寫都監儀軌』 (1901), 『璿源殿影幀修改謄錄』 (1935) 등에서도 관련 기록을 확인할 수 없고 고종대 선원전 화재로 소실된 어진에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한국전쟁 당시 망실된 것으로 추정된다.44 반면 정조의 예진은 1773년 영조의 80세 어진 도사 시 초본이 제작되었으나 정조 스스로 이를 마음에 차지 않아하여 세초했다는 기록이 확인된다.45 정조의 경우 초본을 바로 세초하였기에 완성본의 예진은 존재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되나 당시 초본이 제작되기까지의 경위와 배경을 살펴봄으로써 영조대의 예진이 어떠한 성격과 지위를 지니고 있었는지 고찰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먼저 사도세자 예진의 경우 도사의 경위나 이후 봉안 내력에 대해 전해지는 바가 거의 없으나 일정 기간 동안 예진이 존재하였고 이를 궁궐 내부와 현륭원 재실에 봉안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 확인된다.
옛날 온천에 행행하실 때 어가가 본부를 지났는데, 복색은 으레 군복을 입으셨다. 그때 影幀의 초본이 있지만 색이 바래 감히 옮겨 模寫하지 못했다. 근래 園幸의 복색으로 군복을 입는 것도 이러한 뜻이며 어진을 그려 원소의 재전에 보관하고 우러러 의지하는 마음을 부쳤는데, 제6구에서 이것을 언급하였다.”하고, 이어 여러 신하에게 하교하기를, “庚辰年(영조36) 온천에 행행하실 때 군복을 입으신 것이 儀註에 있고 모사본 하나도 그때의 복색인데 미처 옮겨 모사하지 못하여 매양 마음에 불안하였다. …(중략)… 몇 해 전에 어진 2본을 모사하여 한 본은 종묘에 배알하실 때의 복색으로 閟宮(경모궁)의 望廟樓에 보관하고 한 본은 군복을 입으신 것으로 원소의 재전에 보관하여 우러러 의지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부쳤다.46
위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 사도세자의 예진은 군복본과 면복본 총 2본이 존재했으며 아들인 정조대에 이르러 모사된 뒤 각각 경모궁 망묘루와 현륭원 재실에 봉안된 것으로 보인다.47 물론 즉위 후 줄곧 아버지의 追崇을 꾀했던 정조이기에 사도세자 사후 초상이 追寫되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만약 정조대에 추사하였더라면 위에서 언급하는 것처럼 예진이 모사하기 어려울 정도로 손상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한 정조는 즉위와 동시에 사도세자의 사당인 垂恩墓를 개건하고 이를 경모궁이라 개칭하였는데, 이후 이곳을 찾아 여러 번 어진을 봉심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어 주목된다.48 경모궁이 오직 사도세자만을 위해 지어지고 궁으로 개칭된 장소였던 만큼 이곳에 봉안된 예진 역시 사도세자를 대상으로 하였을 것이다. 이를 토대로 볼 때 사도세자의 예진 2점은 그의 생전에 이미 도사된 뒤 궁궐 어딘가에 보관되어 있다가 사후 경모궁에 이안된 것으로 사료된다. 비록 도사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조선 후기 대다수 왕자의 예진이 공식 기록 없이 제작된 뒤 후대에 알려진 것을 감안할 때 사도세자 역시 이와 비슷한 선례를 따랐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사 이후 사도세자의 예진은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보관 상태가 좋지 못해 색이 바랠 만큼 훼손되었고 이에 정조대에 모사된 것으로 보인다. 모사와 관련한 정확한 시기나 경위를 확인할 수는 없으나 위 일성록의 기록에서 언급하듯 사도세자의 예진은 1796년을 기준으로 이보다 몇 해 전 모사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정조는 사도세자의 예진뿐만 아니라 자신의 어진 도사와 영조의 어진 모사를 함께 추진하기도 했는데 이는 정조 5년(1781)의 일로 재위 후 자신의 첫 어진을 제작하며 함께 진행되었다.49 주목할 만한 것은 당시 정조의 어진 1본은 완성된 뒤 규장각에 봉안까지 마쳤으나, 함께 모사하기로 계획한 영조의 어진에 대해서는 그 과정이나 이후 봉안 절차에 대한 기록이 전무하다는 점이다.50 이는 정조가 꼭 해당 어진의 모사가 필요하여 이를 진행했다기보다는 현임 왕의 어진 도사와 함께 선대 어진을 모사하는 선례를 만들고자 이러한 작업을 꾀했다고 해석된다. 정조는 이후 1791년 자신의 두 번째 어진을 도사하며 총 4점의 어진을 제작하였고, 그 중 2본은 소본으로 제작하여 각각 경모궁과 현륭원 재실에 봉안하였다.51 그런데 소본을 봉안한 두 봉안처 모두 사도세자의 예진이 봉안되었던 장소와 동일하여 주목된다.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도세자의 예진은 정조대 이전부터 경모궁에 봉안되어 있었다. 또한 현륭원이 정조 13년(1789)에 완공되었음을 감안하여 볼 때 최소 완공 이전까지는 군복본 예진도 경모궁에 함께 보관되어 왔을 가능성이 짙다.52 즉, 영조대에 도사된 사도세자의 예진 두 점은 모두 경모궁에 봉안되어 있다가 1796년이 되기 몇 해 전 모사된 뒤 각각 경모궁과 현륭원에 나누어 이안되었는데, 현륭원의 축조 시기가 1789년임을 고려하였을 때 모사와 이안은 1789년에서 1796년 사이에 이루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주목할 점은 이 기간에 해당하는 1791년, 정조가 자신의 어진 도사를 실시하였고 이때 이례적으로 소본의 어진을 제작하여 경모궁과 현륭원에 봉안하였다는 사실이다. 물론 두 번째 어진 도사 시 사도세자의 예진을 모사하였다는 기록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이미 자신의 첫 어진을 도사하며 선대 어진을 함께 모사하는 선례를 만든 정조가 자신의 두 번째 어진을 도사하며 아버지 사도세자의 예진을 모사하였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다. 또한 봉안처의 축조 시기와 함께 봉안된 정조 어진의 복식 및 형태로 미루어보아 이 시기 사도세자의 예진이 함께 모사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그렇다면 정조는 왜 이렇듯 복잡하고 비밀스러운 과정을 거쳐 사도세자의 예진을 모사하고 이안한 것일까. 이는 분명 훼손된 예진을 수리하고자 한 목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에 더해 아버지 사도세자의 지위와 권위가 공격받지 않고 정식 왕세자로 인정받던 시절의 예진을 복구함으로써 그를 온전히 추숭하고자 하려는 의미 또한 내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아버지의 예진을 이렇듯 중요하게 여겨 모사한 정조는 정작 자신의 예진은 완성하지 않고 세초하여 의아함을 남긴다. 조선 후기 예진이 제작되기 시작한 이래 예진에 부여되는 왕자의 지위와 권위 향상이라는 상징은 줄곧 공고해져 왔고 이는 이후의 순조대와 고종대에서도 익히 확인할 수 있는 양상이다. 이러한 특징은 정조의 예진을 제작하던 영조대에도 동일하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정조가 예진을 완성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확단하기는 어려우나 당시 이러한 정치적 상징물을 지니는 것이 정조로 하여금 대단히 어렵고 위험한 일이었고 다른 왕대의 왕자들과는 달리 강한 권력을 드러내는 것이 오히려 그에게 해가 되었기 때문이라 추정해 볼 수 있다.
정조가 예진의 초본을 그리던 때는 영조의 80세 어진을 제작하던 시기로 정조는 왕세손으로서 봉심과 이후의 賡進에 까지 참여하였다.53 어진을 제작한 1773년은 선대왕인 숙종의 두 번째 어진을 제작한지 60주년이 되는 해이기에 더욱 의미가 깊었고 영조 스스로도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사를 실시한다고 밝힌 바 있다.54 앞서 살펴보았듯 영조는 60년 전인 1713년 숙종의 어진 도사 과정에 참여하였고 그 이듬해 예진을 하사받았기에 선대왕의 계술을 앞세워 진행하는 도사 작업에서 왕세손에게도 예진을 하사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왕실 내부에서 어진을 도사하고, 임금의 장수를 축하한 것과는 반대로 조정의 신료들은 분열의 조짐을 보이며 또다시 붕당을 야기하고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 영조는 재위 기간 내내 탕평을 꾀했다.55 그러나 壬午禍變(1762) 이후 조정은 노론 대신들만을 위주로 구성되며 기형적 형태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조정의 균형이 무너지자 임오화변에 대한 崔益男(1724~1770) 등의 상소와, 노론의 淸名黨事件(1772), 金龜柱(1740~1786)가 蔘의 유통을 문제 삼아 洪鳳漢(1713~1778)을 공격하는 일 등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들이 연달아 불거졌다.56 이는 당파 간의 문제이나 실상은 탕평책의 실효성을 의심하고 영조의 약해진 국정 장악력을 드러내는 상황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때에 왕세손이자 차기 국왕의 지위를 지닌 정조가 예진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과도하게 시각화하는 행위는 자칫 당파 간의 또 다른 갈등을 종용할 우려가 높다. 이에 정조는 영조의 하명으로 예진을 제작하여 자신의 위치와 권위를 시각화할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에 따르지 않고 다만 국왕의 어진 제작을 돕는 신하된 위치로서 자신의 지위를 감추려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는 작품과 기록이 부재한 가운데 고안한 가정이다. 그러나 정조가 재위 시기 세자의 지위를 시각화하기 위해 계병을 제작하고, 세초한 자신의 예진을 회상하며 숙종대부터 이어지는 왕위 정통성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하는 것으로 보아 그가 당시 예진이 지닌 시각적 권위를 여실히 인지하였기에 오히려 세초를 통해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지 않으려 한 것이라 추정해볼 수 있다(Fig. 6).57

Ⅳ. 맺음말

영조는 연잉군의 신분이던 1714년 숙종으로부터 한 점의 예진을 하사받았다. 이 과정에서 숙종은 지지기반이 미약한 왕자가 왕족으로서의 권위를 회복할 수 있도록 특별히 본래의 신분보다 상위의 의미를 갖는 기린흉배를 사용할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때의 예진은 숙종대의 일회적인 하사품에 불과할 수도 있었으나, 연잉군에 대한 부왕의 지지를 시각화하고 왕자로서의 권위를 드러내는 데에는 매우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주었다. 이후 연잉군은 세제로, 또 임금으로 여러 번의 지위 변화를 맞이하였는데 세제로 등극하였을 때에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시각화하기 위해 다시금 예진 도사를 감행하기도 하였다.
임금이 된 영조는 정치적으로 부왕의 권위를 필요로 할 때마다 수차례 예진을 언급하고, 그 봉안처 또한 궁궐 내부로 삼으며 점차 예진이 왕실 내부의 왕자 초상으로서 특별한 권위를 지닐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그는 예진 제작의 전통이 후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자신의 세자와 세손에게도 도사의 기회를 허락하였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를 통해 비록 어진만큼 공식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는 않으나 궁궐 내부에서 왕자의 예진이 제작되는 행위는 점차 하나의 의례로 여겨졌으며 이후의 왕자들에게까지 자연스레 이어질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본고는 그동안 왕실 초상화 안에서 하나의 범주로 인식되지 못하였던 예진을 특정한 정치적 목적성을 지닌 하나의 장르로서 재고찰하고 이를 도사 당시 왕자의 지위와 정치적 맥락에 연관 지어 이해하였다. 그 과정에서 예진의 가장 큰 수혜자이자 이후로의 계승을 꾀한 주도자로 활약하였던 영조의 역할에 보다 주목해 보았다. 영조는 국왕의 일회적인 하사품으로 제작되었던 예진이 점차 일정한 정치적 함의를 지닌 상징물로서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이는 이후 왕대에 하나의 전통으로 자리 잡으며 예진의 지위가 점진적으로 상승될 수 있도록 하였다.

Notes

1) 예진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연구는 조선미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미, 「조선왕조시대의 초상화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980); 同著, 『韓國의 肖像畵』 (열화당, 1983); 동저, 『한국의 초상화 : 형(形)과 영(影)의 예술』 (돌베개, 2009); 또한 동저, 『어진, 왕의 초상화』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를 통해 원종 초상에 대한 연구도 추가 보완된 바 있다.

2) 예진 및 왕자 초상화 제작이 확인되는 9명의 왕자는 각각 安平大君(1417~1453), 益安大君(?~1404), 孝寧大君(1396~1486), 元宗(1580~1619), 延礽君(1694~1776 후의 英祖), 延齡君(1699~1719), 思悼世子(1735~1762), 孝明世子(1809~1830), 純宗(재위 1907~1910)이다.

3) 숙종대 이전 공신도상의 형식으로 제작된 예진 중 작품이 현전하는 사례는 영조대에 移模된 〈益安大君 肖像〉 (1734)과 〈元宗 肖像〉 (1872, 1935)가 있다. 한편 왕자의 사적 취미와 목적에 의해 제작된 예진은 기록만이 전해지는 안평대군 초상과 작품만이 현전하는 〈孝寧大君 肖像〉 (조선 후기 이모)이 있다.

4) 숙종, 영조대 이후 예진의 지위는 크게 격상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純祖代(1800~1834)의 孝明世子(1809~1830)와 高宗代(1863~1907)의 純宗(1907~1910) 예진의 제작 경위를 들 수 있다. 먼저 효명세자의 경우 선대와 동일하게 비공식적인 제작과정을 거쳤으나 각기 다른 복식의 예진 총 4점을 제작하며 기존에 일회적인 국왕의 하사품으로서의 성격을 극복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 고종대의 순종 예진은 효명세자의 예와 유사하게 한 차례의 도사로 무려 6점의 예진을 제작하였으며 도사의 과정 또한 어진과 동일하게 공개적으로 도감을 설치하고, 『高宗御眞純宗睿眞圖寫都監儀軌』 (1902)를 제작하여 기록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어진의 지위만큼이나 상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사도세자를 제외한 8점의 예진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연구는 각주1에서 언급하였듯 선행연구자 조선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 초기부터 산발적으로나마 제작되어왔던 예진의 양상과 이후 후기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발전, 계승되는 예진의 변화를 망라할 수 있었다. 한편 사도세자의 예진이 존재하였음은 정조대의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日省錄』, 정조 20년 병진(1796) 1월 24일(신미). 이와 더불어 사도세자 死後에도 예진이 봉안되고 일정한 주기로 봉심을 받았음은 유재빈, 「正祖代 宮中繪畫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6a); 윤진영, 「화령전 正祖 御眞의 移奉 내력」, 『朝鮮時代史學報』 87(2018), pp. 223-255; 이성훈, 「군복본 정조어진의 제작과 봉안 연구」, 『미술사와 시각문화』 25(2020), pp. 135-136를 통해 상세히 연구되었다.

6) 본 논문에서 다루는 〈연잉군 예진〉의 소장처는 국립고궁박물관이다. 소장처에 따르면 작품의 공식 명칭은 〈연잉군 초상〉이다. 이는 함께 소장하고 있는 영조의 51세 어진과의 구분을 위해 고안된 명칭으로서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명칭은 초상이 제작되던 때 대상의 신분이 왕자였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에 본고는 왕자의 초상이라는 작품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각각의 작품을 소장처의 정식 명칭 대신 ‘연잉군 예진’으로 바꾸어 칭하였다.

7) 숙종대를 비롯한 조선 전 시기 어진에 대해 폭넓게 고찰한 가장 이른 시기 연구로는 조선미, 「朝鮮王朝時代에 있어서의 眞殿의 發達」, 『고고미술(현 미술사학연구)』 145(1980), pp. 10-23; 同著, 『韓國의 肖像畵』 (열화당, 1983)가 있다. 또한 동저, 『한국의 초상화: 형(形)과 영(影)의 예술』 (돌베개, 2009); 동저, 『어진, 왕의 초상화』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에서는 앞선 연구에 수정 및 보완을 더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성미, 『어진의궤와 미술사 조선국왕 초상화의 제작과 모사』 (소와당, 2012)은 어진과 관련 기록을 상세히 고찰하였다. 이외에도 조선 후기 어진에 보다 구체적으로 주목한 연구로는 유재빈, 「조선후기 어진 관계 의례 연구: 의례를 통해 본 어진의 기능」, 『미술사와 시각문화』 10(2011), pp. 74-99; 동저, 「正祖代 宮中繪畫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6a); 윤진영, 「화령전 正祖 御眞의 移奉 내력」, 『朝鮮時代史學報』 87(2018), pp. 223-255; 정두희, 「조선 후기 어진의 제작기법 연구- 의궤 및 현존 유물을 중심으로 -」, 『미술문화연구』 2(2013), pp. 201-243 등이 있어 숙종대 이후로 재개된 조선 후기 어진의 제작 양상과 배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케 하였다.

8) 숙종대에 이르러 달라진 어진의 제작과 봉안 과정에 대해서는 조선미, 앞의 책(1983), pp. 119-121 참고.

9) “지금 내가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데 너희들이 여덟 달 동안을 밤낮으로 곁에 시중들면서 수고했던 일은 참으로 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특별히 너희들의 초상을 그려 주고(모두 박동보에게 명하여 그리게 했다.), 또 廏馬를 내리노니 가거든 잘 받아 두어라.”(列聖御製肅宗大王) 오세창, 『근역서화징 下』 (시공사, 1998). p. 661. 한편 1714년 〈연잉군 예진〉이 제작될 당시 동생인 延齡君(1699~1719)도 함께 예진을 하사받았으나, 본 논문에서는 영조에 의한 예진의 제작과 활용 양상에 더욱 집중하기 위하여 연령군의 예진과 관련한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

10) 경종이 연잉군, 연령군과 동일하게 병간호에 참여했음에 대한 기록은 『肅宗實錄』 卷 55, 숙종 40년 4월 9일 경진 1번째 기사. 또한 그가 여러 해 동안 숙종의 시탕을 도맡아왔음에 대한 기록은 『肅宗實錄』 卷 65, 숙종 46년 6월 10일 을사 5번째 기사.

11) 정만조, 「숙종 후반~영조초의 정국과 밀암 이재(李栽)의 정치론」, 『밀암 이재 연구』 24(2001), pp. 288-373.

12) 김연민, 「숙종기 노론의 정치적 이념과 권력관계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과 박사학위 논문, 1993), p. 37.

13) 어유구는 숙종대의 문신으로 1718년 수원부사를 거쳐 병조참지로 있을 때, 딸이 세자빈(후의 宣懿王后)이 되며 그 해에 대사간에 오르고 이어 승지가 되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國舅로서 咸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어영대장이 되어 訓局의 관장을 겸하였다.

14) 『肅宗實錄』 卷 53, 숙종 39년 5월 11일 정해 6번째 기사. 御容之奉安沁都, 初非聖世之美事, 而今又設置都監, 張大其事, 景賢引對, 不過看審圖本, 延英諮訪, 未聞講論治體, 臣知殿下所以常存抑畏, 示以撝謙者, 外也, 非內也, 而竊恐深宮燕安之中, 警戒已弛, 怠忽漸乘, 終無以成實德而著實效也.

15) 숙종은 1695년(숙종 21년) 처음으로 자신의 어진을 그린 뒤 江華府 長寧殿에 봉안하였다. 당시에는 현임왕이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는 선례가 조선시대 극 초기를 제외하고는 전무하였으므로 도감도 설치하지 않은 채 신속히 어진을 제작하고 봉안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1713년은 어진 제작의 선례를 이미 만든 후이기에 반대의 여론이 적었고 이에 숙종도 도감을 설치하여 체계적으로 자신의 어진 도사에 나섰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어유구의 반대 상소는 조정의 대다수가 동의하는 의견은 아니었을 것이며, 임금에 대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자 한 행위라 볼 수 있다.

16) 『肅宗實錄』 卷 53, 숙종 39년 5월 11일 정해 6번째 기사. 史臣은 논한다. 어유구의 상소는 진실로 없을 수 없는 것인데, 임금의 하교에서 현저히 좋아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으니, 어떻게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史臣曰: "有龜疏, 誠不可無者, 而聖敎顯示訑訑之色, 何以來逆心之言乎.”

17) 『肅宗實錄』 卷 53, 숙종 39년 5월 12일 무자 1번째 기사.

18) 『肅宗實錄』, 각주16의 기사와 동일.

19) 성낙훈, 「한국당쟁사」, 『한국문화사대계 Ⅱ』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65), p. 27.

20) 오세창, 앞의 책, p. 661.

21) 조선미, 앞의 책(1983), p. 179.

22) 『연잉군가례등록』의 기록 외에도 이주미, 「조선 후기 왕자 관례·가례 복식 고증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8)을 통해 연잉군이 백택과 기린 두 무늬의 흉배를 혼용하여 착용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이주미는 숙종의 아들 중에는 대군 신분이 없었기에 군 신분의 연잉군도 금으로 수놓은 기린흉배를 착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23) 백택이 왕자군의 흉배 문양으로 규정된 것은 1454년(단종2) 부터이다. 조선미, 앞의 책(2009), p. 79.

24) 숙종대에 이미 흉배가 법도와 다르게 혼용되어 쓰이고 있었음에 대한 내용은 『肅宗實錄』 卷 23, 숙종 17년 3월 19일 을사 1번째 기사. 而慕華館閱武時, 東西換班, 此宜有一定之規. 且文武官團領(胸禙)〔胸褙〕, 各有定制, 文用飛禽, 武用走獸. 而今則混雜無章, 亦宜申飭.

25) 『肅宗實錄』 卷 53, 숙종 39년 5월 5일 1번째 기사. 頤命又白: “御服中違式者, 當釐正.” 提調金鎭圭, 閔鎭遠, 竝贊之, 上可之. 後, 禮官與尙方提調, 竝看詳, 只改大帶之制, 表白裏紅, 倣圖式爲之.

26) 한국학중앙연구원, 『영조대왕』 (한국학중앙연구원, 2011a), p. 30.

27) 조선미, 앞의 책(2019), p. 64.

28) 『英祖實錄』 卷 60, 영조 20년 8월 20일 갑자 2번째 기사. 上引見右議政趙顯命, 禮曹判書李宗城, 出示御容二幅曰: “此予四十歲時所摸也. 中夜思之, 永久之圖, 無如眞殿, 今示微意矣.” 宗城曰: “江華 長寧殿, 無狹窄之理, 當宁御容, 同爲奉安, 恐無不可也.” 上曰: “禮判所達, 正合予意. 予亦有思於長寧殿矣.” 上仍製下泰寧殿重修上樑文, 殿卽御容奉安處也.

29) 『正祖實錄』 卷 1, 정조 즉위년 4월 17일 무오 1번째 기사; 조선미, 앞의 책(2019), p. 256.

30) 김지영, 「영조대 진전정책과 영정모사도감의궤(影幀模寫都監儀軌)」, 『규장각소장의궤 해제집 2』 (2004), p. 544.

31) 김지영, 위의 논문, p. 544. 참고.

32) 영조가 세제 시절인 1724년 예진을 제작한 사실은 『正祖實錄』 卷 12, 정조 5년 8월 26일 1번째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본 기록은 영조가 1714년과 1724년 두 번에 걸쳐 예진을 제작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영조가 1724년 제작한 예진에 대해 다룬 연구는 극히 드물며 조선미와 진준현의 논고가 대표적이다. 두 선행 연구자 모두 영조가 潛邸 시 2번의 예진 도사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조선미, 앞의 책(2019), p. 158; 동저, 「조선 왕실의 어진」,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특별전』 (국립고궁박물관, 2015), p. 203. 진준현, 「영조, 정조대 어진도사와 화가들」, 『서울대학교 박물관 연보 6』 (1994), p.21.

33) 박동보가 1713년 숙종 어진 도사 시 방외화사로 추천되었음은 『承政院日記』 477冊, 숙종 39년 4월 11일 무오 7번째 기사.

34) 영조가 자신의 80세 어진을 제작하며 정조의 예진 제작을 명하였음은 『日省錄』, 정조 5년 신축(1781) 8월 19일(기축). 한편 고종이 자신의 어진 제작과 순종의 예진 제작을 동시에 진행하였음은 『高宗實錄』 卷 41, 고종 38년 11월 7일 양력 1번째 기사; 『高宗實錄』 卷 41, 고종 38년 11월 8일 양력 1번째 기사.

35) 홍순민, 『영조, 임금이 되기까지』 (눌와, 2017), pp. 158-160 참조.

36) 조선미, 위의 책(2019), p. 158; 동저, 위의 논문(2015), p. 203.

37)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조선왕실복식』 (국립고궁박물관, 2012), p. 94.

38) 왕세자 복식에 대한 내용은 국립고궁박물관, 위의 책(2012), p. 74.

39) 『景宗實錄』 卷 4, 경종 1년 8월 22일 경진 3번째 기사.

40) 영조가 책례 때 복식을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었음은 『英祖東宮日記』 1冊, 1721년 9월 25일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노관범, 「『英祖東宮日記』로 보는 王世弟의 書筵과 微視政治」, 『奎章閣』 33(2008), pp, 51-52.

41) 『景宗實錄』 卷 1, 경종 즉위년 6월 13일 무신 2번째 기사.

42) 『景宗實錄』, 위의 기사.

43) 실제 경종의 병세가 심해진 뒤로 영조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는 시탕과 문안으로 인해 세제의 서연이나 강연조차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렇듯 시강원 주재의 중심 활동인 서연도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세제가 따로 예진을 도사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경종의 환후에 의해 세제의 활동에 제약이 있었음은 노관범, 위의 논문, pp. 58-59.

44) 1900년 화재로 인해 선원전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소실된 어진은 그해 바로 모사되었으며 모사의 내용과 과정은 『影幀摹寫都監儀軌』 (1901)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어진이 소실 및 훼손된 것으로 기록된 임금은 총 8명으로 각각 太祖, 肅宗, 英祖, 正祖, 純祖, 文祖, 憲宗이다. 이중 思悼世子나 莊獻世子자라는 시호는 물론이고 莊祖라는 추존명도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도세자의 예진이 본 화재로는 피해를 입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45) 『日省錄』, 정조 5년 신축(1781) 8월 19일(기축).

46) 『日省錄』, 정조 20년 병진(1796) 1월 24일(신미). 昔年溫幸時駕過本府而服色例用軍服伊時有影幀草本而色渝不敢移模近來園幸服色之用軍服者亦此意而圖寫御眞藏于園所齋殿以寓瞻依之思第三句及之仍敎諸臣曰庚辰溫幸御軍服在於儀注摸寫一本亦以其時服色而每以未及移摸耿耿于中己酉以後園幸必用軍服蓋出於追述之意而年前摸御眞二本一則以謁廟時服色藏于閟宮 望廟樓一則以軍服藏之園所齋殿以寓一分瞻依之思. 한편, 정조는 위의 일성록 기록과 관련한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이와 관련한 기록은 『弘齋全書』, 제7권, 詩 3.

47) 위의 각주46의 일성록 기록 외에도 사도세자의 예진 복식에 군복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正祖實錄』 卷 53, 정조 24년 3월 17일 기사 1번째 기사.

48) 경모궁 개건과 개칭에 대한 내용은 박용만, 「효장세자 및 사도세자의 생애와 그 자료」, 『영조자손자료집 1』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a), p. 70. 한편, 정조가 경모궁에서 어진을 봉심한 일에 대한 기록은 『日省錄』, 정조 4년 경자(1780) 3월 15일(갑오); 정조 5년 신축(1781) 3월 6일(기묘); 정조 6년 임인(1782) 1월 6일(계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재빈, 앞의 논문(2016a), 각주 392 재인용.

49) 정조 어진 도사와 관련한 내용은 『正祖實錄』 卷 12, 정조 5년 9월 1일 경자 4번째 기사. 또한 영조의 어진 모사가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正祖實錄』 卷 12, 정조 5년 9월 3일 임인 1번째 기사.

50) 유재빈, 위의 논문(2016a), p. 107.

51) 정조는 1791년 어진 도사 당시 총 4점의 어진을 제작하였으며 이는 각각 강사포본 대, 소본과 군복본 대, 소본이다. 이성훈, 앞의 논문(2020), pp. 135-136. 한편 이때 현륭원에 봉안되었던 군복본 소본은 순조 1년(1801년) 華寧殿으로 이봉되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純祖實錄』 卷 2, 순조 1년 1월 6일 계미 4번째 기사.

52) 현륭원 완공 시기에 대한 기록은 『正祖實錄』 卷 28, 정조 13년 10월 16일 무진 1번째 기사.

53) 영조 어진 제작과정 중 봉심에 정조가 함께 하였음은 『英祖實錄』 卷 120, 영조 49년 1월 22일 임자 1번째 기사; 『日省錄』, 영조 49년 계사(1773) 1월 9일(기해); 영조 49년 계사(1773) 1월 18일(무신); 영조 49년 계사(1773) 1월 22일(임자)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어진 완성 뒤 정조와 신하들이 갱진시를 올려 이를 축하하였음은 『英祖實錄』 卷 120, 영조 49년 1월 18일 무신 2번째 기사; 『承政院日記』 74冊, 영조 49년 1월 18일 무신 14번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54) 『英祖實錄』 卷 120, 영조 49년 1월 22일 임자 1번째 기사.

55) 영조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2』 (아름다운날, 2007), pp. 141-197;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2) 참고.

56) 최익남은 1770년 당시 영의정 金致仁(1716~1790)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죄가 큼을 논하고, 세손으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하게 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후 그는 대신들의 탄핵을 받게 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고, 형장을 받다 죽었다. 『英祖實錄』 卷 115, 영조 46년 11월 10일 임자 3번째 기사; 『正祖實錄』 卷 31, 정조 14년 10월 3일 경술 3번째 기사. 또한 청명당 사건은 척신 세력과 반척신 세력이 나뉘어 분열한 것으로 당시 김치인, 김종수도 대표되던 반척신 세력이 노론 중심의 정국을 이어가고자 하자 이에 척신 세력들이 반발하고 이로 인해 조정에서 축출된 사건을 말한다. 최성환, 「正祖代 蕩平政局의 君臣義理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9), pp. 90-91 참고. 한편, 김귀주가 홍봉한의 인삼 납품을 비난하며 공격하였음에 대한 내용은 『英祖實錄』 卷 119, 영조 48년 7월 21일 갑인 2번째 기사.

57) 정조는 1748년 《문효세자보양청계병》을 제작하여 문효세자의 보양관 상견례를 기념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보양관 상견례 관련 궁중 기록화이기에 주목된다. 文孝世子(1782~1786)는 정조와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 해 바로 원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783년 8월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 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문효세자보양청계병》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유재빈, 「정조의 세자 위상 강화와 《문효세자책례계병》(1784)」, 『미술사와 시각문화』 17(2016b), pp. 90-117. 한편 정조는 영조대 세초하였던 자신의 예진에 대해 재위 시기 여러 번 언급하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日省錄』, 정조 5년 신축(1781) 8월 19일(기축).

Fig. 1.
박동보, <연잉군 초상> Pak Tongbo, Portrait of Prince Yeoning, 1714, Chosŏn, color on silk, 213.2×97.7cm, 150.1× 77. 6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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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연잉군 초상> 표제 부분 Detail of the title, Portrait of Prince Yŏ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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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연잉군 초상> 흉배 부분 Detail of an insignia, Portrait of Prince Yŏ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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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백택흉배 繡本, Insignia with a Paekt'aek, Chosŏn, ink stick on oil paper, 23.5×25.6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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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기린흉배 繡本, Insignia with a Kirin, Chosŏn, ink stick on oil paper, 21.7×22.8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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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이한철, 유숙, <이하응 초상 (흑단령포본)>, I Hanch’ŏl, Yu Suk, Portrait of Lee Haŭng, 1869, Chosŏn, color on silk, 170.5×75cm, Seoul Museum of Hi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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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1.
<이하응 초상 (흑단령포본)> 흉배 부분 Detail of an insignia, Portrait of Lee Haŭ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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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의화군 사진 엽서>, Photograph of Prince Ŭihwa, 19c, Chosŏn, print on paper, 14.1×9.0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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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1.
<의화군 사진 엽서> 흉배 부분 Detail of an insign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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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文孝世子輔養廳契屛》, Crown Prince Munhyo having introduction ceremony with Boyanggwan (輔養官 Tu t or of Crown prince)at Poyangch’ŏng, 1784, Chosŏn, folding screen, color on silk, 110×421cm,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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