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5; 2022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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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진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연구는 조선미에 의해 이루어졌다. 조선미, 「조선왕조시대의 초상화연구」 (홍익대학교 대학원 미학미술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1980); 同著, 『韓國의 肖像畵』 (열화당, 1983); 동저, 『한국의 초상화 : 형(形)과 영(影)의 예술』 (돌베개, 2009); 또한 동저, 『어진, 왕의 초상화』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를 통해 원종 초상에 대한 연구도 추가 보완된 바 있다.
2) 예진 및 왕자 초상화 제작이 확인되는 9명의 왕자는 각각 安平大君(1417~1453), 益安大君(?~1404), 孝寧大君(1396~1486), 元宗(1580~1619), 延礽君(1694~1776 후의 英祖), 延齡君(1699~1719), 思悼世子(1735~1762), 孝明世子(1809~1830), 純宗(재위 1907~1910)이다.
3) 숙종대 이전 공신도상의 형식으로 제작된 예진 중 작품이 현전하는 사례는 영조대에 移模된 〈益安大君 肖像〉 (1734)과 〈元宗 肖像〉 (1872, 1935)가 있다. 한편 왕자의 사적 취미와 목적에 의해 제작된 예진은 기록만이 전해지는 안평대군 초상과 작품만이 현전하는 〈孝寧大君 肖像〉 (조선 후기 이모)이 있다.
4) 숙종, 영조대 이후 예진의 지위는 크게 격상된 것으로 확인된다. 이에 대한 근거로는 純祖代(1800~1834)의 孝明世子(1809~1830)와 高宗代(1863~1907)의 純宗(1907~1910) 예진의 제작 경위를 들 수 있다. 먼저 효명세자의 경우 선대와 동일하게 비공식적인 제작과정을 거쳤으나 각기 다른 복식의 예진 총 4점을 제작하며 기존에 일회적인 국왕의 하사품으로서의 성격을 극복한 모습을 보인다. 이후 고종대의 순종 예진은 효명세자의 예와 유사하게 한 차례의 도사로 무려 6점의 예진을 제작하였으며 도사의 과정 또한 어진과 동일하게 공개적으로 도감을 설치하고, 『高宗御眞純宗睿眞圖寫都監儀軌』 (1902)를 제작하여 기록하는 등의 모습을 통해 어진의 지위만큼이나 상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5) 사도세자를 제외한 8점의 예진에 대한 가장 이른 시기의 연구는 각주1에서 언급하였듯 선행연구자 조선미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이를 통해 조선 초기부터 산발적으로나마 제작되어왔던 예진의 양상과 이후 후기에 이르러 정치적으로 발전, 계승되는 예진의 변화를 망라할 수 있었다. 한편 사도세자의 예진이 존재하였음은 정조대의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日省錄』, 정조 20년 병진(1796) 1월 24일(신미). 이와 더불어 사도세자 死後에도 예진이 봉안되고 일정한 주기로 봉심을 받았음은 유재빈, 「正祖代 宮中繪畫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6a); 윤진영, 「화령전 正祖 御眞의 移奉 내력」, 『朝鮮時代史學報』 87(2018), pp. 223-255; 이성훈, 「군복본 정조어진의 제작과 봉안 연구」, 『미술사와 시각문화』 25(2020), pp. 135-136를 통해 상세히 연구되었다.
6) 본 논문에서 다루는 〈연잉군 예진〉의 소장처는 국립고궁박물관이다. 소장처에 따르면 작품의 공식 명칭은 〈연잉군 초상〉이다. 이는 함께 소장하고 있는 영조의 51세 어진과의 구분을 위해 고안된 명칭으로서 타당성을 가진다. 그러나 이와 같은 명칭은 초상이 제작되던 때 대상의 신분이 왕자였다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이에 본고는 왕자의 초상이라는 작품의 특징을 강조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각각의 작품을 소장처의 정식 명칭 대신 ‘연잉군 예진’으로 바꾸어 칭하였다.
7) 숙종대를 비롯한 조선 전 시기 어진에 대해 폭넓게 고찰한 가장 이른 시기 연구로는 조선미, 「朝鮮王朝時代에 있어서의 眞殿의 發達」, 『고고미술(현 미술사학연구)』 145(1980), pp. 10-23; 同著, 『韓國의 肖像畵』 (열화당, 1983)가 있다. 또한 동저, 『한국의 초상화: 형(形)과 영(影)의 예술』 (돌베개, 2009); 동저, 『어진, 왕의 초상화』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2019)에서는 앞선 연구에 수정 및 보완을 더하였다. 이와 더불어 이성미, 『어진의궤와 미술사 조선국왕 초상화의 제작과 모사』 (소와당, 2012)은 어진과 관련 기록을 상세히 고찰하였다. 이외에도 조선 후기 어진에 보다 구체적으로 주목한 연구로는 유재빈, 「조선후기 어진 관계 의례 연구: 의례를 통해 본 어진의 기능」, 『미술사와 시각문화』 10(2011), pp. 74-99; 동저, 「正祖代 宮中繪畫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고고미술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6a); 윤진영, 「화령전 正祖 御眞의 移奉 내력」, 『朝鮮時代史學報』 87(2018), pp. 223-255; 정두희, 「조선 후기 어진의 제작기법 연구- 의궤 및 현존 유물을 중심으로 -」, 『미술문화연구』 2(2013), pp. 201-243 등이 있어 숙종대 이후로 재개된 조선 후기 어진의 제작 양상과 배경에 대한 폭넓은 이해를 가능케 하였다.
9) “지금 내가 병으로 자리에 누워 있는데 너희들이 여덟 달 동안을 밤낮으로 곁에 시중들면서 수고했던 일은 참으로 잊을 수가 없다. 그리하여 특별히 너희들의 초상을 그려 주고(모두 박동보에게 명하여 그리게 했다.), 또 廏馬를 내리노니 가거든 잘 받아 두어라.”(列聖御製肅宗大王) 오세창, 『근역서화징 下』 (시공사, 1998). p. 661. 한편 1714년 〈연잉군 예진〉이 제작될 당시 동생인 延齡君(1699~1719)도 함께 예진을 하사받았으나, 본 논문에서는 영조에 의한 예진의 제작과 활용 양상에 더욱 집중하기 위하여 연령군의 예진과 관련한 내용은 다루지 않았다.
10) 경종이 연잉군, 연령군과 동일하게 병간호에 참여했음에 대한 기록은 『肅宗實錄』 卷 55, 숙종 40년 4월 9일 경진 1번째 기사. 또한 그가 여러 해 동안 숙종의 시탕을 도맡아왔음에 대한 기록은 『肅宗實錄』 卷 65, 숙종 46년 6월 10일 을사 5번째 기사.
13) 어유구는 숙종대의 문신으로 1718년 수원부사를 거쳐 병조참지로 있을 때, 딸이 세자빈(후의 宣懿王后)이 되며 그 해에 대사간에 오르고 이어 승지가 되었다.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國舅로서 咸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어영대장이 되어 訓局의 관장을 겸하였다.
14) 『肅宗實錄』 卷 53, 숙종 39년 5월 11일 정해 6번째 기사. 御容之奉安沁都, 初非聖世之美事, 而今又設置都監, 張大其事, 景賢引對, 不過看審圖本, 延英諮訪, 未聞講論治體, 臣知殿下所以常存抑畏, 示以撝謙者, 外也, 非內也, 而竊恐深宮燕安之中, 警戒已弛, 怠忽漸乘, 終無以成實德而著實效也.
15) 숙종은 1695년(숙종 21년) 처음으로 자신의 어진을 그린 뒤 江華府 長寧殿에 봉안하였다. 당시에는 현임왕이 자신의 어진을 제작하는 선례가 조선시대 극 초기를 제외하고는 전무하였으므로 도감도 설치하지 않은 채 신속히 어진을 제작하고 봉안도 마무리하였다. 그러나 1713년은 어진 제작의 선례를 이미 만든 후이기에 반대의 여론이 적었고 이에 숙종도 도감을 설치하여 체계적으로 자신의 어진 도사에 나섰던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다. 이에 비추어 보았을 때 어유구의 반대 상소는 조정의 대다수가 동의하는 의견은 아니었을 것이며, 임금에 대해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자 한 행위라 볼 수 있다.
16) 『肅宗實錄』 卷 53, 숙종 39년 5월 11일 정해 6번째 기사. 史臣은 논한다. 어유구의 상소는 진실로 없을 수 없는 것인데, 임금의 하교에서 현저히 좋아하지 않는 기색을 보였으니, 어떻게 마음에 거슬리는 말을 받아들일 수가 있겠는가. 史臣曰: "有龜疏, 誠不可無者, 而聖敎顯示訑訑之色, 何以來逆心之言乎.”
22) 『연잉군가례등록』의 기록 외에도 이주미, 「조선 후기 왕자 관례·가례 복식 고증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박사학위 논문, 2018)을 통해 연잉군이 백택과 기린 두 무늬의 흉배를 혼용하여 착용했을 것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이주미는 숙종의 아들 중에는 대군 신분이 없었기에 군 신분의 연잉군도 금으로 수놓은 기린흉배를 착용할 수 있었을 것이라 주장하였다.
24) 숙종대에 이미 흉배가 법도와 다르게 혼용되어 쓰이고 있었음에 대한 내용은 『肅宗實錄』 卷 23, 숙종 17년 3월 19일 을사 1번째 기사. 而慕華館閱武時, 東西換班, 此宜有一定之規. 且文武官團領(胸禙)〔胸褙〕, 各有定制, 文用飛禽, 武用走獸. 而今則混雜無章, 亦宜申飭.
25) 『肅宗實錄』 卷 53, 숙종 39년 5월 5일 1번째 기사. 頤命又白: “御服中違式者, 當釐正.” 提調金鎭圭, 閔鎭遠, 竝贊之, 上可之. 後, 禮官與尙方提調, 竝看詳, 只改大帶之制, 表白裏紅, 倣圖式爲之.
28) 『英祖實錄』 卷 60, 영조 20년 8월 20일 갑자 2번째 기사. 上引見右議政趙顯命, 禮曹判書李宗城, 出示御容二幅曰: “此予四十歲時所摸也. 中夜思之, 永久之圖, 無如眞殿, 今示微意矣.” 宗城曰: “江華 長寧殿, 無狹窄之理, 當宁御容, 同爲奉安, 恐無不可也.” 上曰: “禮判所達, 正合予意. 予亦有思於長寧殿矣.” 上仍製下泰寧殿重修上樑文, 殿卽御容奉安處也.
32) 영조가 세제 시절인 1724년 예진을 제작한 사실은 『正祖實錄』 卷 12, 정조 5년 8월 26일 1번째 기사를 통해 확인된다. 본 기록은 영조가 1714년과 1724년 두 번에 걸쳐 예진을 제작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한편 영조가 1724년 제작한 예진에 대해 다룬 연구는 극히 드물며 조선미와 진준현의 논고가 대표적이다. 두 선행 연구자 모두 영조가 潛邸 시 2번의 예진 도사가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이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조선미, 앞의 책(2019), p. 158; 동저, 「조선 왕실의 어진」, 『조선왕실의 어진과 진전 특별전』 (국립고궁박물관, 2015), p. 203. 진준현, 「영조, 정조대 어진도사와 화가들」, 『서울대학교 박물관 연보 6』 (1994), p.21.
34) 영조가 자신의 80세 어진을 제작하며 정조의 예진 제작을 명하였음은 『日省錄』, 정조 5년 신축(1781) 8월 19일(기축). 한편 고종이 자신의 어진 제작과 순종의 예진 제작을 동시에 진행하였음은 『高宗實錄』 卷 41, 고종 38년 11월 7일 양력 1번째 기사; 『高宗實錄』 卷 41, 고종 38년 11월 8일 양력 1번째 기사.
40) 영조가 책례 때 복식을 자신의 의도대로 바꾸었음은 『英祖東宮日記』 1冊, 1721년 9월 25일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노관범, 「『英祖東宮日記』로 보는 王世弟의 書筵과 微視政治」, 『奎章閣』 33(2008), pp, 51-52.
43) 실제 경종의 병세가 심해진 뒤로 영조는 하루에도 여러 차례 반복되는 시탕과 문안으로 인해 세제의 서연이나 강연조차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렇듯 시강원 주재의 중심 활동인 서연도 이루어질 수 없는 상황에서 세제가 따로 예진을 도사하는 일은 더더욱 불가능에 가까웠을 것이다. 경종의 환후에 의해 세제의 활동에 제약이 있었음은 노관범, 위의 논문, pp. 58-59.
44) 1900년 화재로 인해 선원전은 큰 피해를 입었는데 이때 소실된 어진은 그해 바로 모사되었으며 모사의 내용과 과정은 『影幀摹寫都監儀軌』 (1901)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때 어진이 소실 및 훼손된 것으로 기록된 임금은 총 8명으로 각각 太祖, 肅宗, 英祖, 正祖, 純祖, 文祖, 憲宗이다. 이중 思悼世子나 莊獻世子자라는 시호는 물론이고 莊祖라는 추존명도 확인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사도세자의 예진이 본 화재로는 피해를 입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46) 『日省錄』, 정조 20년 병진(1796) 1월 24일(신미). 昔年溫幸時駕過本府而服色例用軍服伊時有影幀草本而色渝不敢移模近來園幸服色之用軍服者亦此意而圖寫御眞藏于園所齋殿以寓瞻依之思第三句及之仍敎諸臣曰庚辰溫幸御軍服在於儀注摸寫一本亦以其時服色而每以未及移摸耿耿于中己酉以後園幸必用軍服蓋出於追述之意而年前摸御眞二本一則以謁廟時服色藏于閟宮 望廟樓一則以軍服藏之園所齋殿以寓一分瞻依之思. 한편, 정조는 위의 일성록 기록과 관련한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이와 관련한 기록은 『弘齋全書』, 제7권, 詩 3.
47) 위의 각주46의 일성록 기록 외에도 사도세자의 예진 복식에 군복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기록으로는 『正祖實錄』 卷 53, 정조 24년 3월 17일 기사 1번째 기사.
48) 경모궁 개건과 개칭에 대한 내용은 박용만, 「효장세자 및 사도세자의 생애와 그 자료」, 『영조자손자료집 1』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2a), p. 70. 한편, 정조가 경모궁에서 어진을 봉심한 일에 대한 기록은 『日省錄』, 정조 4년 경자(1780) 3월 15일(갑오); 정조 5년 신축(1781) 3월 6일(기묘); 정조 6년 임인(1782) 1월 6일(계묘)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유재빈, 앞의 논문(2016a), 각주 392 재인용.
49) 정조 어진 도사와 관련한 내용은 『正祖實錄』 卷 12, 정조 5년 9월 1일 경자 4번째 기사. 또한 영조의 어진 모사가 함께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正祖實錄』 卷 12, 정조 5년 9월 3일 임인 1번째 기사.
51) 정조는 1791년 어진 도사 당시 총 4점의 어진을 제작하였으며 이는 각각 강사포본 대, 소본과 군복본 대, 소본이다. 이성훈, 앞의 논문(2020), pp. 135-136. 한편 이때 현륭원에 봉안되었던 군복본 소본은 순조 1년(1801년) 華寧殿으로 이봉되었다. 이에 대한 기록은 『純祖實錄』 卷 2, 순조 1년 1월 6일 계미 4번째 기사.
53) 영조 어진 제작과정 중 봉심에 정조가 함께 하였음은 『英祖實錄』 卷 120, 영조 49년 1월 22일 임자 1번째 기사; 『日省錄』, 영조 49년 계사(1773) 1월 9일(기해); 영조 49년 계사(1773) 1월 18일(무신); 영조 49년 계사(1773) 1월 22일(임자)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어진 완성 뒤 정조와 신하들이 갱진시를 올려 이를 축하하였음은 『英祖實錄』 卷 120, 영조 49년 1월 18일 무신 2번째 기사; 『承政院日記』 74冊, 영조 49년 1월 18일 무신 14번째 기사를 통해 알 수 있다.
55) 영조대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는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 2』 (아름다운날, 2007), pp. 141-197; 이근호, 「영조대 탕평파의 국정운영론 연구」 (국민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2) 참고.
56) 최익남은 1770년 당시 영의정 金致仁(1716~1790)이 사도세자의 죽음에 죄가 큼을 논하고, 세손으로 하여금 사도세자의 묘에 참배하게 할 것을 상소하였다. 이후 그는 대신들의 탄핵을 받게 되어 대정현에 유배되었고, 형장을 받다 죽었다. 『英祖實錄』 卷 115, 영조 46년 11월 10일 임자 3번째 기사; 『正祖實錄』 卷 31, 정조 14년 10월 3일 경술 3번째 기사. 또한 청명당 사건은 척신 세력과 반척신 세력이 나뉘어 분열한 것으로 당시 김치인, 김종수도 대표되던 반척신 세력이 노론 중심의 정국을 이어가고자 하자 이에 척신 세력들이 반발하고 이로 인해 조정에서 축출된 사건을 말한다. 최성환, 「正祖代 蕩平政局의 君臣義理 연구」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사학과 박사학위 논문, 2009), pp. 90-91 참고. 한편, 김귀주가 홍봉한의 인삼 납품을 비난하며 공격하였음에 대한 내용은 『英祖實錄』 卷 119, 영조 48년 7월 21일 갑인 2번째 기사.
57) 정조는 1748년 《문효세자보양청계병》을 제작하여 문효세자의 보양관 상견례를 기념하였다.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보양관 상견례 관련 궁중 기록화이기에 주목된다. 文孝世子(1782~1786)는 정조와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 사이의 아들로 태어난 해 바로 원자로 책봉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1783년 8월 왕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786년 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문효세자보양청계병》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유재빈, 「정조의 세자 위상 강화와 《문효세자책례계병》(1784)」, 『미술사와 시각문화』 17(2016b), pp. 90-117. 한편 정조는 영조대 세초하였던 자신의 예진에 대해 재위 시기 여러 번 언급하는데 이에 대한 내용은 『日省錄』, 정조 5년 신축(1781) 8월 19일(기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