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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4; 2022 > Article
경주 남산 불교유적의 형성과 성격*

Abstract

경주 남산에는 약 150개소의 불교유적이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남산의 불교유적(이하 유적)은 왕경 중심과 가까운 남산의 북쪽부터 조성되기 시작했다. 초기의 유적은 주로 이동로나 교통로 주변에 입지했고, 그 밀집도는 높지 않다. 그러나 8세기 후반 이후에는 한 계곡 내에서 가까운 거리를 두고 다수의 탑상이 분포하여, 남산 유적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남산의 유적은 다수가 오랫동안 머물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남산에 소규모 유적이 다수 분포할 수 있었던 것은 유적의 성격이 수행처였기 때문이다. 신라시대 조탑과 조상은 수행자가 공덕을 쌓는 가장 큰 행위 중 하나였다. 거대한 암벽과 괴석이 노출된 남산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다. 『삼국유사』 속 남산 관련 승려의 일화나 모습에서도 남산이 가지는 수행처로서의 일면을 찾을 수 있다.남산에 수행처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세 가지로 정리된다. 왕경 중심부와 가깝게 위치한다는 점. 둘째, 자연환경(돌산) 때문에 造塔, 造像을 통한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점. 셋째, 산속에서 세속과 떨어져 수행을 증진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한편 남산의 유적은 왕경의 사찰과 완전히 분리된 것은 아니다. 즉 왕경의 본사와 남산의 수행처가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다. 『삼국유사』 속 충담사의 일화에서 이러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Abstract

It is reported that there are about 150 Buddhist Monuments in Namsan, Gyeongju. The Buddhist Monuments in Namsan mountain began to be constructed from the north of the mountain, which is close to the center of the Silla capital. The early Buddhist Monuments were located near moving roads or traffic routes and their density was not high. However, many pagodas were distributed at close distances within a valley after the second half of the 8thcentury and they show well the characteristics of the Buddhist Monuments in Namsan mountain.
The Buddhist Monuments in Namsan mountain are not a place where many can stay for a long time. Nevertheless, the reason why many small-scaled Buddhist sites were able to be distributed in the mountain was because of the nature of the sites as a place of dhyana practice. In the Silla Dynasty, building pagodas and Buddhist statues were one of the greatest acts of practitioners to accumulate merits. Namsan mountain, where huge rock walls and strange-shaped rocks were exposed, was the best place to build up their virtues. Stories and images of monks related to Namsan mountain in ‘Samgukyusa - the history of the Three Kingdoms’ can be found as an aspect of Namsan mountain for a place of dhyana practice.
Three things could have led to the Establishment of place of dhyana practice in Namsan mountain. First, the mountain is located close to the center of the capital of Silla. Second, the natural environment as a stone mountain led people to accumulate virtues by building pagodas and Buddhist statues. Lastly, people could dhyana practice by being separated from the world in the mountain. However, these Buddhist sites in Namsan mountain were not completely separated from the temples in the capital. In other words, temples of the capital and places for dhyana practices in Namsan mountain were in a close relationship. Their relationship could be understood from the story of Chungdamsa monk in the Samgukyusa.

Ⅰ. 머리말

경주 남산에는 60개 이상 되는 크고 작은 계곡이 분포한다. 계곡 곳곳에는 다양한 유적이 입지하는데 다수가 불교유적이다. 남산의 불교유적은 약 150개소가 있는 것으로 보고되었다.1 남산은 최고봉의 이름을 따 金鰲山 혹은 高位山이라고도 한다. 때로는 남산 앞에 ‘신라불교 문화재의 寶庫’나 ‘천년고도의 노천박물관’과 같은 수식어를 붙여 부른다. 물론 이러한 수식어는 크고 작은 계곡에 산재한 다수의 불상이나 불탑 때문에 생긴 것이다. 그리고 남산은 이러한 특수성 때문에 2000년 세계문화유산(경주역사유적지구, 경주남산)으로 등재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 때문에 생긴 막연한 기대와 동경심은 오히려 남산의 역사적 의미를 알아가고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남산의 유적이 가지는 본질은 무엇일까? 그리고 남산은 신라 당대 사람에게 어떤 장소였고, 또한 어떤 연유로 그렇게 많은 불교유적이 조성되었을까? 이 글은 이러한 개인적인 의문에서 시작되었다.
본고에서는 남산에 분포하는 여러 불교유적을 통해 그 의문을 하나씩 찾아가보려고 한다. 먼저 남산 불교유적의 형성에 대해 살펴보고, 아울러 유적의 구조를 검토해보겠다. 또한 유적의 입지와 구조, 그리고 문헌기록 등을 분석하여 경주 남산 불교유적의 성격을 고찰해보겠다. 한편 본고에서 사용한 불교유적이라는 용어는 절터, 불상, 불탑(석탑), 마애불 등을 포괄하는 의미로 사용했음을 밝혀둔다.

Ⅱ. 불교유적의 형성

1. 불교유적의 현황

남산과 관련된 고대 문헌 기록은 극히 제한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유적의 조성시기나 조성목적, 나아가 그 성격 등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다행히 『三國史記』, 『三國遺事』에는 남산과 관련해 일부 기록이 있어 남산의 유적을 이해하는데 참고할 수 있다. 따라서 본장에서는 불교유적의 형성을 살펴보기에 앞서 문헌에서 확인되는 남산 속 유적의 현황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

1) 문헌기록에서 확인되는 남산의 불교유적

신라는 법흥왕 14년(527) 불교를 공인한 후, 오늘날 경주분지를 중심으로 國刹을 조성했다. 흥륜사, 삼랑사, 영묘사, 남항사, 영흥사와 같은 사찰은 서천 주변(특히 서천 서안)에 자리했고, 황룡사, 천주사, 분황사는 월성 주변에 들어섰다. 물론 비슷한 시기 왕경의 산악에도 불교 유적이 조성된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6세기 후반~7세기 초)이나 선도산 마애여래삼존입상(7세기 중엽)은 삼국시대 산악에 입지한 대표적인 유적이다.2 그렇다면 다수의 신라시대 석불상과 마애불상이 분포한 남산에는 언제부터 불교유적이 들어섰을까?
『三國史記』 진평왕9년(587) 기사에서 ‘南山之寺’라는 용어를 확인할 수 있다. 이 기록은 남산의 불교유적과 관련해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南山之寺’에 대해서는 특정 사찰(‘南山寺’)의 이름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3 ‘남산의 사찰’로 이해하는 것이 더 좋을 듯하다. 이를 참고한다면, 6세기 후반에는 남산 혹은 남산 주변에 어떤 형태로든 불교유적이 조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三國遺事』에는 남산의 유적과 관련한 더 다양한 이야기가 전한다. 먼저 『三國遺事』 塔像 ‘生義寺石彌勒’조에는 선덕여왕 13년(644)에 생의스님이 남산 골짜기 땅속에서 석미륵상을 찾은 뒤 삼화령 위에 불상을 봉안하고 그 자리에 生義寺를 창건했다고 기록한다. 『三國遺事』 感通 ‘憬興遇聖’조에는 신문왕대의 국사인 경흥법사와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는데, 여기서 남산의 文殊寺라는 절을 확인할 수 있다. 『三國遺事』 感通 ‘眞身受供’조에는 효소왕이 望德寺 낙성회에 참석한 일화가 소개되는데, 이 기록 말미에 석가 진신을 위해 남산에 釋迦寺와 佛無寺를 세웠다고 전한다. 신라 유가종의 조사인 太賢스님은 남산의 茸長寺에 주석했었고, 이 절은 조선전기 김시습이 한동안 생활했던 곳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三國遺事』, 『三國史記』에 기록된 남산 혹은 그 주변의 사찰은 약 20개소로 파악할 수 있고, 이중 ‘남산’을 직접 언급한 사례는 12개소 정도이다<table 1>. 그 외 四祭寺, 神印寺,4 禪房寺5는 남산에서 사찰명 기와나 塔誌가 출토된 바 있어, 그 위치를 남산으로 비정하고 있다. 또한 祇園寺, 實際寺, 天官寺는 남산 주변의 평지에 위치했을 것이고,6 金光寺나 菩提寺는 신라 당대 남산에 존재했었는지에 대한 추가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2) 남산의 불상과 석탑[塔像]

앞서 살펴본 대로 문헌기록에서 확인된 남산의 사찰은 그 범위를 넓게 잡더라도 20개소 남짓이다. 하지만 남산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절터가 확인되고, 塔像도 남아 있다. 이미 조사된 내용을 참고하면 불상은 각각의 조각상을 포함해 약 110구(보살상 포함) 정도인 것으로 파악된다.7 석탑은 다수가 도괴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를 확인하기는 어렵지만, 현재 복원되었거나 복원이 가능한 개체만 하더라도 25기 이상이다. 여기에 도괴된 채 흩어져 있는 석탑부재를 포함하면 그 수는 더 늘어날 수 있다.

(1) 불상

남산의 불상은 삼국시대(신라 중고기)와 신라 통일기(신라 중대, 하대) 불상으로 시기 구분을 할 수 있다. 먼저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과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삼국시대 조성된 대표적인 石佛像이다. 두 불상의 조성시기는 관련연구자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대체로 7세기 전반~중엽 경으로 추정된다.8 특히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은 앞서 언급한 『三國遺事』 ‘生義寺石彌勒’條에 나오는 미륵불상과 존격이 동일하고 조성시기도 비슷해 학계에서는 동일 불상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9 장창곡 불상과 배동 불상은 삼존불로 조성되었는데, 이는 비슷한 시기(혹은 전시기) 조성된 황룡사 금당의 장육석가삼존불상(584), 단석산 신선사 마애여래삼존입상(6세기 말~7세기 초), 서악동 마애여래삼존입상(7세기 중엽) 등과 같은 형식을 보인다. 한편 동남산에 입지한 불곡 마애여래좌상은 자연암반을 파 인공의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불상을 조각한 磨崖佛像이다. 이 불상의 존격이나 조성시기에 대해서는 최근 들어 연구자마다 이견이 있지만,10 그동안 통상적으로는 삼국시대 7세기 불교존상으로 이해해왔다.11
신라 중대 불상으로는 8세기 초에 조각된 칠불암 마애불상군과 왕정곡 석조여래입상, 8세기 전반에 조성된 삼릉 입곡(삿갓곡) 석조여래입상 등이 있다. 칠불암 마애불상군의 본존상은 현존하는 항마촉지인 도상 중 가장 이른 시기 불상으로 추정된다(fig. 1). 신라에서 항마촉지인을 한 불상은 8세기 중엽 조성된 석굴암 본존상이 가장 대표적인데,12 학계에서는 칠불암의 본존상을 이보다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 인정한다.13 한편 입곡(삿갓곡) 석조여래입상은 현재 상체, 하체, 대좌가 모두 분리될 만큼 파손이 심한 상태다. 이 불상과 관련한 단독의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불상의 크기와 조각 양식을 비교한다면 장항리사지 석조여래입상과 같은 통일신라 전성기(8세기 중엽~후반) 작품으로 이해할 수 있다.14
경주 남산에는 8세기 후반부터 계곡 곳곳에 다수의 불상이 조성되었다. 이 시기 불상 중에는 촉지인을 한 丸彫像이 주목된다. 대표적으로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열암곡 석조여래좌상, 약수곡 석조여래좌상 등이 있다. 또한 용장계 법당곡 석조약사여래좌상(국립경주박물관 이관),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국립중앙박물관 이관), 용장계 사곡 석조약사여래좌상 등은 촉지인을 결한 약사불상이다. 이러한 촉지인 도상은 석굴암 본존상이 조성된 이후부터 왕경에서 특히 유행했던 것으로 추정된다.15 한편 신라 하대 불상 중에는 선각이나 저부조로 조각된 마애불상도 남아있는데, 삼릉계곡 선각육존불(fig. 2)을 비롯해 삼릉계곡 마애석가여래좌상(상선암 마애불), 배리 윤을곡 마애여래좌상, 약수계곡 마애여래입상, 부흥곡 선각마애여래좌상 등이 대표적이다.

(2) 석탑

남산의 탑은 현재 도괴된 사례가 많아 명확한 수량을 파악하기가 힘들다. 특히 탑 부재 중 일부는 민가나 묘지 조성 등에 재활용되면서 원위치에서 이탈된 경우도 있다. 현재 제자리에 복원되었거나 복원 가능한 석탑은 약 30기로 파악된다<table 2>.
남산에는 다양한 형식의 석탑이 잔존한다. 남산의 석탑은 대부분 삼층으로 조성되었으나, 포석계 6사지(늠비봉) 석탑처럼 오층으로 구성된 특징적인 예도 있다(fig. 3) 16. 용장계 지곡 제3사지 삼층석탑(보물)과 남산동 동삼층석탑(보물)은 기단과 옥개석이 모전석탑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어 특징적이다. 창림사지 삼층석탑(보물), 남산동 서삼층석탑(보물)은 상층기단 면석에 팔부중 조각이 있고,17 승소곡 삼층석탑은 1층 면석에 사천왕상을 조각했다.18 용장사지 삼층석탑(fig. 4), 지암곡 제3사지 삼층석탑, 비파곡 제2사지 삼층석탑은 자연암반이나 거칠게 다듬은 괴석 위에 단층기단을 마련하고 탑재를 쌓아 올린 것이 특징이다.19
한편 승소곡 삼층석탑과 삼릉계 제6사지 삼층석탑은 일제강점기 총독부박물관 경주분관으로 이전 복원되어 현재는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 중이다. 염불사지 동삼층석탑은 1963년 불국사역 앞에 세워진 석탑 조성에 부재 일부가 사용되었다가 2009년 다시 원자리로 돌아왔다. 이후 동·서삼층석탑 주변을 발굴한 후 새롭게 복원했다. 창림사지·천룡사지·탑곡의 삼층석탑은 주변에 흩어져 있던 탑재를 모아 복원한 석탑이다. 한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계곡에 도괴되어 있던 지암곡2사지, 지암곡3사지, 국사곡4사지, 지곡3사지, 비파곡2사지, 기암곡2사지, 포석곡6사지 등 석탑 7개소를 발굴하여 복원한 바 있다. 최근 창림사지 발굴에서는 복원된 삼층석탑 서편 아래서 별개의 쌍탑지가 새롭게 확인되었고, 이와 함께 팔부중을 새긴 상층기단의 면석이 발굴되었다.20
남산의 석탑은 불상과 마찬가지로 관련기록이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명확한 조성시기를 판단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관련연구자가 양식 분석을 통해 비교 검토한 석탑 편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대략 8세기 전·중엽부터 석탑이 조성되었고, 9세기 이후에는 크고 작은 석탑이 계곡 곳곳에 다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21

2. 시기별 불교유적의 분포

남산 불교유적의 위치와 분포를 지도상에 표시해 보고, 시기별 분포상과 입지적 특징을 검토해보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신라 중대까지 경주 남산의 유적 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대다수의 유적은 신라 하대, 즉 8세기 후반 이후에 입지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크게 두 시기(전기·후기)로 나누어 유적의 분포와 그 변화를 살펴보고자 한다.

1) 전기(7세기~8세기 중엽)

전기에 조성된 불교유적으로는 장창곡 석조미륵여래삼존상(장창곡사지), 배동 석조여래삼존입상(선방사지), 불곡 마애여래좌상, 봉화곡의 칠불암 마애불상군, 입곡(삿갓곡) 석조여래입상, 왕정곡 석조여래입상 등이 있다. 이 불상들은 남산의 어느 한 계곡에 집중되었다기보다는 각기 다른 계곡에 위치하여 매우 산발적인 분포 양상을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불상 중 다수가 남산의 북록에 입지한 것은 매우 특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남산의 북록은 신라 왕궁인 월성과도 멀지 않으며, 진평왕13년(591)에는 이곳에 남산 신성이 축조되었다. 신라 초기 기록의 객관성에 대해서는 문제가 있지만, 시조인 박혁거세 거서간의 탄강설화가 깃든 羅井이 남산북록에 위치한다(fig. 5). 남산의 북단과 이어지는 오늘날 탑동에는 혁거세거서간을 비롯한 신라 초기 왕·왕비의 무덤으로 전해지는 오릉이 있다.22 또한 오릉 동편에 위치한 탑동유적(천원 마을)에서는 최근 다양한 墓制의 신라 고분이 발굴되어 주목된다. 원삼국시대 목관묘부터 삼국시대 목곽묘, 적석목곽묘, 석곽묘 등 180여기의 분묘가 확인되었다(fig. 6). 더욱이 대부분의 고분들은 6세기 말 혹은 7세기부터 점차 폐기되고 대신 그 자리에 건물, 도로와 같은 왕경의 도시 시설이 들어서는 것으로 밝혀졌다.23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남산북록과 오늘날 탑동 주변은 신라 정치·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공간이었던 같다. 특히 신라 왕경의 구조가 새롭게 개편되는 6세기 중엽 이후 그 공간은 왕경 중심부(월성)와 남산을 연결하는 매개공간이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24 따라서 남산 북록에 남산신성을 비롯해 초기 불교유적이 입지하는 것은 왕경 전체 구조에 있어 어쩌면 당연한 시도라 할 수 있다.
한편 이 시기 남산에 불교유적이 입지한 곳은 대부분 이동로와 관련되어 주목된다. 먼저 장창곡사지는 남산신성, 장창지와 매우 인접하는데, 월성 혹은 왕경 중심부에서 월정교나 춘양교를 건너 남산신성으로 올라가는 최단거리 상에 위치한다(fig. 7). 『三國遺事』 ‘生義寺石彌勒’조에는 선덕여왕 때 생의스님이 ‘道中寺’에 거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최근 월정교 건너편에 위치한 인왕동사지에서는 ‘道仲(寺)’명기와가 발굴되었다(fig. 8).25 물론 사찰명 기와가 1점 출토되었다고 해서 그곳을 ‘도중사’라고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월성과 남산을 잇는 공간에서 ‘도중사’명 기와가 발굴된 것은 고고학적으로 충분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특히 寺刹名에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절은 남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관계되었을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도중사’라는 사찰이 월성과 남산 사이 인근에 위치했을 가능성이 높으며,26 이 사찰은 왕궁인 월성, 월정교(일정교), 남산으로 이어지는 길과 가까운 곳에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선방사지와 입곡(삿갓곡)사지는 오늘날 경주 중심부에서 내남면 방향으로 연결되는 도로 상에 위치한다. 이 길에는 오릉, 천관사지, 나정, 포석정 등의 신라시대 유적이 시기를 달리하여 들어섰고, 신라 초기 사찰인 기원사와 실제사도 이 길과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것으로 전한다. 이 길은 왕경 중심부에서 오늘날 울산, 언양 방향으로 이어지는 신라시대 간선도로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27 마지막으로 봉화곡사지(칠불암)는 남산의 동남쪽에 입지한다. 이 유적은 앞서 살펴본 서남산 계곡 초입에 위치한 유적(선방사지, 삿갓곡사지)과는 달리 산중턱의 능선 상에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 유적 역시 동남산과 서남산을 잇는 주요 경로 상에 위치해 앞서 살펴본 유적과 입지적 특징이 유사하다. 즉 오늘날 서남산의 내남면에서 동남산의 남산동으로 가기 위해서는 계곡이 완만한 봉화계곡이 최적의 경로로 볼 수 있다. 물론 오늘날에도 여전히 봉화곡은 남산 남단을 횡단하는데 주요경로로 이용된다.

2) 후기(8세기 후반~10세기)

8세기 후반부터 남산의 불교유적은 폭발적으로 그 수가 늘어난다. 이러한 양상은 비단 남산에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신라 사찰의 분포양상을 봤을 때, 신라하대에는 오늘날 경주 외곽 지역으로 중소규모의 사찰이 다수 조성된 것으로 확인된다.28 따라서 이 시기 불교유적의 증가는 신라 왕경 사찰의 분포변화와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신라하대 왕경 사찰의 증가는 애장왕7년(806) 사찰 창건과 佛事에 대한 禁令까지 제정하는 사태를 낳았다.29
신라 하대 경주 남산 불교유적에 있어 가장 큰 변화는 한 계곡에 다수의 유적을 조성한다는 점이다. 즉 앞선 시기의 유적은 주요계곡에 하나만 조성되었고, 그 계곡은 주로 이동로와 관계된 것으로 추정했다. 그런데 신라하대에는 한 계곡의 초입부터 정상부까지 다수의 유적이 일정거리를 유지하면서 조밀하게 들어선다. 이러한 분포양상은 앞선 시기에서는 보이지 않던 새로운 현상이다. 삼릉계는 서남산에서 가장 큰 계곡 중 하나인데, 계곡의 초입부터 정상부까지 다양한 유적이 곳곳에 분포하고 있다(fig. 9). 2~3m(불상+대좌)이상 되는 환조의 석불좌상을 비롯해 높이 5m이상 되는 마애불상, 선각으로 표현한 6존상(삼존불입상, 삼존불좌상)까지 유적의 형태나 구조도 다양하다. 이러한 현상은 많고 적음의 차이는 있겠으나, 남산의 주요계곡에서 확인되는 공통된 특징이다. 서남산의 용장계곡, 포석계곡, 동남산의 오산계곡, 남산 남록의 백운계곡 등 주로 큰 계곡을 중심으로 이러한 양상이 두드러진다(fig. 10).
남산의 유적은 일부 예외가 있으나, 기본적으로 계곡 초입이나 능선 상에 먼저 조성되고 점차 정상부까지 확산되는 양상을 보인다.30 또한 남산 대부분의 불상, 특히 마애불은 불상의 방향이 계곡 아래를 향한다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동남산의 불상은 기본적으로 동쪽(동남, 동북)을 향해 있으며, 서남산의 불상은 대부분 서쪽(서남, 서북)을 향해 있다. 이를 통해 보면 동남산과 서남산에 분포한 유적은 각각의 방향성을 가지고 조성되었고, 이와 함께 출입 방향 역시 동쪽과 서쪽으로 각각 구분되었을 것이다.

Ⅲ. 불교유적의 구조

본장에서는 경주 남산 불교유적의 구조를 살펴보고자 한다. 남산에는 다양한 종류의 유적이 남아 있다. 계곡 말단부에는 넓은 경역을 마련하고 금당, 석탑, 회랑 등을 갖춘 사찰이 입지했다. 최근까지 발굴한 창림사지가 대표적이고, 전)염불사지, 전)양피사지(남산동 동서삼층석탑)도 주변 지형을 고려했을 때 비슷한 예로 추정된다. 남산과 인접한 인왕동 사지, 천관사지도 탑, 금당, 회랑을 갖춘 사찰이다. 다만 이 유적들은 가람배치나 공간 구조를 고려했을 때 평지에 입지한 사찰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남산 깊은 계곡의 능선이나 정상부에는 남산 불교유적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유적이 많이 남아있다. 석불상 혹은 마애불이 있는 유적이 있고, 포석곡6사지(늠비봉)처럼 정상부에 석탑만 잔존하는 유적도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부분의 유적은 정밀발굴이 이뤄지지 않아 그 규모나 구조, 형태 등을 이해하는데 한계가 있다. 다행스럽게도 최근 남산에서 불상(불두)이 새롭게 발견되어 복원이 이뤄졌고, 이와 함께 해당 유적에 대한 학술발굴이 몇 차례 추진되었다.31 본 장에서는 최근 발굴된 유적 2개소에 대한 구조적 특징을 살펴보겠다.

1.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 유적

이 유적은 삼릉계곡의 북쪽 능선에 위치한다(fig. 11). 2007년 4월부터 8월까지 석불좌상과 그 주변일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고, 훼손되어 있던 석불좌상을 새롭게 보수·정비했다(fig. 12). 발굴 결과, 불상 하부의 기초시설 및 석탑지, 주변 건물지, 석축 등이 확인되었고, 아울러 석탑부재, 석등부재, 기와, 자기편이 함께 출토되었다. 불상 하부에서는 자연암반 위에 조성된 기초시설이 노출되었다. 기초부의 적심은 불상 규모에 비해 매우 엉성하게 구축했는데, 이는 기초 암반자체가 안정되고 튼튼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확인된 기초시설은 불상의 하중을 지탱하기보다는 균형을 맞추는데 더 큰 목적을 둔 것으로 볼 수 있다.32 한편 불상 앞쪽에서 소형 석탑지가 확인되었는데, 발굴조사 결과 일제강점기 박물관으로 옮겨진 삼층석탑의 자리로 밝혀졌다.
삼릉계 유적은 계곡 기슭에 위치해 주변 지형이 험하고, 주변에는 평탄한 대지가 거의 없다. 물론 축대를 쌓아 일부 공간을 평지로 이용한 듯하나, 그 면적은 매우 협소하다. 발굴결과, 불상주변에서 일부 석축이 확인되었고(fig. 13), 건물지로 추정하는 곳에서도 일부 석축이 노출되었다.33 한편 불상을 봉안한 건물은 발굴조사에서 전혀 확인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대로 불상 주변은 석축 외에는 건물과 관련된 초석이나 적심이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불상이 자리한 공간도 별도의 건물이 들어서기에는 너무 협소하다. 따라서 발굴결과를 통해 볼 때 이 불상은 전각 안에 봉안되었기보다는 원래부터 노천에 노출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황룡사, 분황사, 사천왕사, 감은사, 불국사 등 발굴이 이루어진 평지의 절터를 살펴보면, 불상을 봉안하는 전각뿐만 아니라 승려나 불자가 생활하는 공간의 흔적도 분명히 확인된다. 이와 비교해 남산의 유적에서는 그러한 공간, 즉 생활공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유적에서는 신라시대 건물지가 확인되지 않았다. 물론 고려시대 소형 건물지가 확인된 바 있어, 같은 위치상에 신라 통일기 건물이 중복했을 수도 있다.34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굴된 고려시대 건물지는 그 규모나 형태가 매우 협소하고 불안하여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생활하기는 적합하지 않은 공간이다(fig. 14). 더욱이 이곳은 산기슭 내 계곡과 인접한 곳에 위치해 낙석이나 홍수에 있어 결코 안전한 지대가 아니다. 발굴에서도 시기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고려시대 건물이 중첩되게 확인되었는데, 매몰층 위에 바로 재건한 것으로 추정했다. 이를 통해 볼 때 건물의 피해나 훼손은 비교적 잦았을 것이다. 따라서 이 유적은 주변 환경이나 건물의 배치와 구조 등을 고려해 볼 때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거주하며 생활했던 자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2. 열암곡 석조여래좌상·마애여래입상 유적

열암곡 석조여래좌상 유적은 2006년 불두가 새롭게 발견되면서 보수·정비 사업이 추진되었고, 이에 여래좌상과 그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가 이뤄졌다. 발굴 중 여래좌상 남동쪽으로 약 30m 떨어진 계곡 사면에서 마애여래입상이 새롭게 발견되었다. 이후 여래좌상과 마애여래입상의 주변에 대한 발굴조사가 동시에 이뤄졌고, 이에 유적에 대한 전반적인 구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발굴결과, 여래좌상을 봉안한 건물지, 부속건물지, 석축 등이 주변에서 확인되었으며, 기와편과 토기·자기편이 함께 출토되었다.
이 유적은 앞서 살펴본 삼릉계 유적보다는 경역이 크고 넓다(fig. 15). 하지만 계곡의 지형 특성상 평탄대지가 없기 때문에, 역시 축대를 쌓아 사역의 공간을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유적에는 조성시기가 비슷한 석조여래좌상과 마애여래입상이 있고, 석탑의 흔적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곳에서는 앞선 삼릉계 유적과는 달리 불상을 봉안하는 건물지가 확인되었다. 발굴결과, 최소 2개 이상의 건물이 시기를 달리하여 중복했던 것으로 보인다.35 보고서에 따르면, 건물지②는 정면과 측면이 각각 3칸인 정방형 건물인 것으로 밝혀졌고, 그 중심에 불상을 봉안했다(fig. 16). 불상 아래 기초부는 깊이 60cm 내외의 방형 구덩이를 파고 최하부에 돌과 흙을 각각 2번씩 교차해 성토 다짐했다.36 불상의 크기(광배포함 약 4m)에 비해 건물의 규모나 내부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물론 이 유적이 산지 계곡에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건물 내부 공간의 활용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즉 이 건물은 많은 사람이 동시에 들어가 예불하는 공간이 될 수 없다. 한편 부속건물지로 알려진 건물지④는 석불좌상 남쪽에 있는 동서로 이어진 축대 바로 아래에서 확인되었다. 현재 확인된 건물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역시 크지 않은 규모다. 건물지④는 앞서 살펴본 삼릉계 유적의 부속건물지와 비슷한 성격으로 볼 수 있으며, 건물의 위치나 규모·형태로 봤을 때 다수가 장기간 머물면서 생활하기에는 적합하지 않다.
열암곡 유적은 남산의 불교유적 중 비교적 큰 규모에 해당한다. 물론 앞서 살펴본 계곡 말단부에 위치한 정형가람의 사찰과는 비교할 수 없지만, 계곡 능선이나 산 정상부에 위치한 유적 중에서는 규모가 큰 유적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삼릉계 유적과는 달리 여래좌상을 봉안하는 殿閣까지 마련했다는 점에서 더 의미가 있다. 하지만 발굴된 건물의 규모나 형태 등을 고려했을 때, 이 유적은 평지의 사찰처럼 다수가 실제 거주하고 생활하며 예불을 드리는 공간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건물지 주변에서 등잔이나 소병과 같은 신라시대 容器가 소량 발굴되어 생활의 흔적이 확인된다. 하지만 그 수량이 미미해 다수가 장기간 거주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볼 때 남산의 불교유적은 왕경의 평지사찰이 가지는 예불, 강설[修學], 의례, 생활 등이 상시적으로 운영되는 시스템과는 다른 시각으로 접근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Ⅳ. 남산 불교유적의 성격

남산 불교유적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왕경 가까이에 위치한 단일 산록에 다수의 유적이 밀집·분포한다는 점이다. 하나의 계곡에 다수의 유적이 짧은 거리를 두고 각각 위치하는 것은 다른 장소에서는 볼 수 없는 매우 이례적인 현상이다. 특히 어떤 유적의 경우는 도저히 사람이 거주하거나 생활하기 어려운 장소에 입지해 있다. 발굴로 확인된 삼릉계나 열암곡 유적은 다수가 장기간 머물면서 예불이나 강설, 의례 등을 할 수 있는 환경 조건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산의 유적은 왜 평지가 아닌 험한 산지를 선택했고, 왜 하필 남산에 그 많은 塔像을 조성했던 것일까?

1. 탑상을 만들어 공덕을 쌓다

남산의 불교유적은 개개의 사찰로 이해하더라도 그 곳에 많은 사람이 거주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험한 산지 계곡이라는 지형적 특성 때문에 대규모 사역을 조성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러한 주변 환경을 생각한다면 남산의 유적은 매우 개인적인 공간이면서 또한 속세와는 분리된 장소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남산의 유적이 단순히 불자의 예불을 목적으로 조성되었다면 한 계곡에 굳이 다수의 탑상을 조성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즉 불자는 기왕에 만들어진 塔像에 예불을 드리면 되지, 굳이 가까운 거리에 새로운 탑상을 만들 필요가 없다.37
남산의 수많은 유적은 끊임없이 塔像을 만들어가야 할 필요성에 의해 생긴 현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황룡사지, 사천왕사지, 분황사지와 같은 왕경의 절터를 발굴하면, 흙으로 만든 작은 탑[小塔]이 종종 출토된다(fig. 17). 발굴된 소탑 중에는 매우 정성스럽게 만든 탑도 있지만, 거칠고 투박한 모습을 한 탑도 적지 않다. 이러한 소탑은 그 조형성이나 예술성에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즉 공덕을 쌓기 위한 造塔 행위 자체가 핵심이므로, 그 모양이 다소 투박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 이러한 조탑신앙은 680년경에 한역된 『造塔功德經』이나,38 704년에 한역된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영향을 받아 실제 왕경 내 많은 탑을 조성하게 했다.39 더욱이 창림사 석탑에서 발견된 것으로 전하는 「國王慶應無垢淨塔願記」(855)에는 탑을 건립하는 것이 큰 공덕이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 당대 造塔 자체가 공덕을 쌓는 행위라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fig. 18).40
『三國遺事』 義解 ‘良志使錫’조 말미에는 향가 ‘風謠’가 전해진다.41 ‘風謠’는 영묘사의 장육상을 조성할 때 성 안의 성인남녀가 진흙을 나르면서 불렀던 노래로 알려져 있다. 여기서는 장육상을 만들기 위해 그 불사에 참여하는 것을 ‘공덕을 닦는 행위’로 설명한다. 즉, 이러한 조상 행위 역시 공덕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남산에 조영된 수많은 불상과 불탑도 공덕을 쌓기 위한 수행으로 이해하면 좋을 듯하다. 남산의 수많은 탑상을 수행의 과정이나 결과로 생각한다면, 산지나 계곡의 험한 환경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개인의 종교적 염원이나 깊은 불심은 최소한의 공간만 허락해도 그 장소에 탑상을 조성할 수 있는 충분한 배경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남산은 ‘돌산’이다. 계곡 지척에는 수많은 화강암 괴석과 암벽이 노출되어 있다. 이러한 자연환경은 수행자가 저비용으로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다. 즉 造塔, 造像을 위한 재료가 산천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종교적 염원만 있으면 얼마든지 공덕을 쌓을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된다. 더불어 산은 속세와 분리되어 있어 수행의 장소로서 더할 나위 없이 최상의 조건이다. 이러한 환경과 조건을 염두에 둔다면, 남산에 분포한 탑상 중 많은 수는 수행자가 공덕을 쌓기 위한 수행과정의 결과물이며, 또한 이 탑상을 禪觀하는 수행도 이어졌을 것이다.

2. 수행처, 남산

최근 일본학계에서는 수행과 법회를 위해 산속에 지은 불당, 사원을 ‘山林寺院’이라 부르고 평지에 있는 사찰과는 구분한다.42 이 산림사원의 특징은 두 가지로 정리할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불교적 수행이고, 두 번째는 평지가람과의 유기적인 관계이다. 즉 평지가람에서는 修學을 통해 깨달음을 얻고자 한다면, 산림사원에서는 깨달음을 위해 불교적 수행이 행해졌다. 평지가람에서의 수학과 산림사원에서의 수행이 각각의 것이 아니라, 서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한 달의 절반은 깊은 산속에서 수행을 한다면, 나머지 절반은 본사에서 수학 증진을 한다.43 일본의 산림사원은 주로 승려의 수행처로서의 기능과 성격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산림사원은 기본적으로 당탑을 가지고 있으며 회랑을 갖춘 사찰도 있다. 반면 平城京 春日山系 호산 정산부에 있는 이존석불상이나 지옥곡 성인굴의 선각마애불, 나라시대 일부 산악의 석불이나 마애불과 같은 유적은 대부분 산림이나 고지에 입지해, 남산의 유적과 비교할 수 있다. 일본학계에서는 이러한 불상도 산림수행과 관련한 존상으로 이해한다.44 따라서 경주 남산의 불교유적도 일본의 산림사원과 같은 승려의 수행과 관련한 장소로 접근해 볼 필요가 있다.
한편 『三國遺事』, 『三國史記』의 기록 중 남산과 관련한 이야기 속에 수행과 관련한, 혹은 수행을 연상할 만한 장면이 있어 주목된다. 먼저 『三國史記』 新羅本紀 眞平王9년(587) 기사 속에는 大世와 仇柒에 대한 세속의 외면과 그들의 깨달음에 대한 염원 등이 감지된다. 대세는 어려서부터 세속을 떠날 뜻이 있었다. 그는 명산에서 깨달음을 얻고, 평범한 인간에서 벗어나 神仙을 배우려고 했다. 그는 함께할 친구를 구하다가 처음 淡水를 만났지만 끝까지 같이하지 못했고, 이후 그와 같은 뜻을 품은 仇柒을 만나 바다로 향해 함께 떠났다.45 흥미로운 것은 깨달음을 얻고자 했던 두 사람이 처음 찾아 간 곳이 바로 ‘남산의 절[南山之寺]’이라는 점이다. 또한 그곳에서 그들은 각자의 품은 뜻을 서로 확인했다. 물론 이 이야기 속에서 수행의 직접적인 행위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일본의 사례를 비춰볼 때 이야기 속 ‘남산의 절’은 배움과 관련한 修學의 장소라기보다는 깨달음과 관련한 수행의 장소에 더 무게를 둘 수 있다.
장창곡 석조미륵삼존불상과 『三國遺事』 塔像 ‘生義寺石彌勒’조에 기록된 미륵불상은 동일한 불상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최근 이 상과 관련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었는데, 불상의 도상(미륵의좌상)과 석실(석굴) 봉안과 같은 특징을 고려했을 때 이 불상은 禪觀修行의 목적으로 조성했다는 주장이다.46 승려의 여러 수행법 중 하나인 선관은 특정한 대상을 觀하여 수행하는 것이다. 선관은 몇 가지 수행단계를 거치지만, 결국 부처(미륵불)의 친견이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석실 안에 봉안된 불상, 불상 앞에 앉아 있는 참선에 잠긴 수행자의 모습, 이는 남산 불교유적의 성격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다. 『三國遺事』 ‘生義寺石彌勒’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선덕여왕 때 生義라는 스님이 항상 道中寺에 거주하였다. 꿈에 스님이 그를 데리고 남산으로 올라가 풀을 묶어서 표를 하게하고, 산의 남쪽 마을에 이르러서 말하길, “내가 이곳에 묻혀있으니 스님은 꺼내어 고개 위에 안치해주시오”라고 하였다. 꿈을 깬 후 친구와 더불어 표시해 둔 곳을 찾아 그 골짜기에 이르러 땅을 파보니 석미륵이 나오므로 三花嶺 위에 안치하였다. 선덕왕 13년(갑진)에 절을 짓고 살았으니 후에 生義寺라 이름하였다.”(『三國遺事』 卷第三塔像 ‘生義寺石彌勒’條)
먼저 이야기 속 생의스님은 평소 道中寺에 거주했다. 그는 꿈에서 알려준 대로 남산에 올라가 석미륵상을 찾은 뒤 삼화령 위에 그 불상을 봉안하고, 선덕왕13년(643 혹은 644) 그곳에 생의사라는 사찰을 만들었다. 즉 생의스님은 원래 왕경의 ‘道中寺’의 승려였는데, 이 일을 계기로 남산에 절을 짓고 거처를 옮긴 것이다 특히 ‘생의사’라는 寺名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절은 지극히 생의스님을 위한, 생의스님에 의한 사찰임이 감지된다. 한편 이 이야기는 흥미롭게도 『三國遺事』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조로 이어진다.
“3월 3일(765년)에 왕이 歸正門의 누 위에 나가서 좌우의 측근에게 말하기를, “누가 길거리에서 威儀있는 승려 한 사람을 데려올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이때 마침 위의가 깨끗한 고승 한분이 배회하고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내가 말하는 위의 있는 승려가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물리쳤다. 다시 한 승려가 납의를 입고 앵통(혹은 삼태기)을 지고 남쪽에서 오고 있었는데 왕이 보고 기뻐하여 누각 위로 맞이했다. 통 속을 보니 다구가 들어 있었다. 왕이 물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승려는 충담이라고 했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승려가 답하기를 “소승은 매해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달여서 남산 삼화령 미륵세존께 공양하는데 지금도 드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三國遺事』 卷第二 紀異 ‘景德王·忠談師·表訓大德’條)
이 이야기는 충담스님이 미륵세존에게 차를 공양하기 위해 남산에 올라갔다가 돌아오고 있는 장면이다. 충담스님은 매해 3월 3일과 9월 9일에 차를 공양하러 남산에 다녀온다고 했다. 부처님께 차를 공양하는 것 역시 하나의 수행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이야기 속에서 충담스님은 남산에 기거하는 것이 아니라, 왕경 사찰에 거주하는 것으로 비춰진다. 즉 스님의 本寺는 왕경의 평지사찰이고, 남산에는 특정시기(삼짇날과 중양절)에 올라가 수행하고 돌아오는 것이다. 이러한 구성에서 평지사원과 남산 유적의 유기적인 관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47
한편 『三國遺事』 기사 속 남산과 관련한 인물(승려)들의 묘사가 흥미롭다.
“…한 거사(혹은 사문)가 행색이 남루하고 손에 지팡이를 짚고 등에 광주리를 이고 와서 하마대위에서 쉬고 있었는데 광주리 안을 보니 마른 생선이 있었다. (경흥법사의) 시종이 그를 꾸짖어 “너는 중의 옷을 입고 있으면서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지고 있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중이 말하기를 “그 살아 있는 고기를 양 넓적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과 삼시의 마른 생선을 등에 지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이냐”라고 하고, 말을 마치고는 일어나 가버렸다. …중략…남산 문수사의 문밖에 이르자 광주리를 버리고 사라졌다. …중략…경흥은 그것을 듣고 한탄하여 “大聖이 와서 내가 짐승을 타는 것을 경계하였구나”라고 하고 죽을 때까지 다시 말을 타지 않았다.”(『三國遺事』 卷第五 感通 ‘憬興遇聖’條)
“8년 정유에 (망덕사)낙성회를 베풀었는데 왕이 친히 가마를 타고 와서 공양하였다. 한 비구가 있었는데 외양이 남루하였다. 몸을 움츠리고 뜰에 서서 또한 재를 보겠습니다.”라고 청하였다. 왕이 평상의 끝에 나아가는 것을 허락하였다. 장차 재가 끝나려 하니 왕이 그를 희롱하여 말하였다. “어느 곳에 주석하는가?” 중이 비파암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제 가면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공양하는 재에 참석했다고 하지 말라”라고 말하니 중이 웃으면서 “폐하도 역시 사람들에게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하지 마십시오”라고 하고 말을 마치고는 몸을 솟구쳐 하늘에 떠서 남쪽을 향해 갔다. …중략… (남산의) 비파암 밑에 釋迦寺를 세우고, 모습을 감춘 곳에 佛無寺를 세워 지팡이와 바리를 나누어 두었다.”(『三國遺事』 卷第五 感通 ‘眞身受供’條)
첫 번째 이야기에서는 경흥법사의 사치스러움과 비교해 남산에 기거하는 거사는 마치 남루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묘사한다. 두 번째 이야기 역시 망덕사 낙성회에 참석한 효소왕과 비교해 남산 비파암으로 떠난 비구(석가진신)의 모습은 볼품없고, 남루하다. 또한 앞서 소개한 충담사의 이야기에도 威儀있는 승려와 비교해 충담사는 납의를 걸치고 앵통(또는 삼태기)을 지고 있는 초라한 모습이다. 물론 세 이야기가 전적으로 사실에 근거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 속에서 감지되는 남산과 관련한 승려의 모습은 모두 유사하게 묘사되고 있어 주목하게 된다. 즉 이야기 속 승려들은 마치 頭陀行을 실천하는 수행자의 모습처럼 그려졌다. 이는 당시 남산 불교유적이 가지는 성격의 일면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생각한다.
남산은 곧 승려의 공간이면서, 수행의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승려는 험한 산지계곡에서 공덕을 쌓기 위해 조탑과 조상을 통한 수행을 감행했고, 이렇게 만들어진 불교유적은 승려가 명산에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산림수행의 장소로 이용되었을 것이다.

Ⅴ. 맺음말

본고에서는 경주 남산 불교유적의 형성과 성격에 대해 살펴보았다. 남산은 오늘날 ‘신라 불교문화재의 보고’라는 수식어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하지만 이러한 수식어로 경주 남산의 본질이나 성격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아울러 개개의 유적만으로 남산 불교유적의 정체성을 찾기도 쉽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남산의 불교유적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남산의 성격을 고찰하였다.
신라시대 남산은 ‘수행자의 공간’이라 정의할 수 있다. 남산에 이러한 수행처가 형성할 수 있었던 것은 ①왕경의 중심부에서 멀지않은 장소라는 점이고, ②자연환경(돌산) 때문에 조탑, 조상을 통한 공덕을 쌓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③명산과 산천에서 세속과 떨어져 수행을 증진할 수 있다는 점 등이 가장 큰 이유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남산의 불교유적이 왕경의 평지사찰과 완전히 분리되어 운영되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일본의 산림사원과 유사하게 평지의 本寺와 산지의 수행처가 유기적인 관계에 놓여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즉 앞서 살펴본 충담사의 일화처럼 승려는 평소 본사에 기거하면서 특정 시기나 기간에만 남산의 유적에 올라가 수행 증진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네트워크에 관해서는 앞으로 더 면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한다.

Notes

1 문화재청·불교문화재연구소, 『한국의 사지-대구·경북 경주시 사지 분포현황』 (2012), pp. 79-500.

2 양은경, 「신라 단석산 마애불-공양주와 조성시기를 중심으로-」, 『역사와 경계』 62(2007), pp. 73-100; 최선아, 「신라 陵墓와 추선 佛事Ⅰ: 서악동 고분군과 선도산 아미타삼존불입상」, 『新羅文化』 59(2021), pp. 357-390.

3 朴方 龍, 「新羅 王京의 寺刹造營」, 『미술사학』 13(1999), pp. 120-121.

4 朝鮮總督府, 『慶州南山の佛蹟』 (1940), p. 65.

5 黃壽永, 『韓國金石遺文』 (일지사, 1986), p. 165; 박방룡, 「新羅 禪房寺塔誌에 對한 淺見」, 『불교고고학』 3(2003), pp. 13-23.

6 기원사와 실제사의 위치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후기 안정복의 『東史綱目』에 수록된 ‘鮑石亭 奏樂詞’(崔匡裕) 에는 포석정 주변에 위치한 것으로 묘사된다. 천관사는 경주시 탑동에 절터가 전해지며, 절터에는 삼층석탑이 현 존한다(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천관사지 발굴조사보고서』 (2004), pp. 244-245).

7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2002), p. 25.

8 文明大, 「禪房寺(拜里) 三尊石佛立像의 考察」, 『美術資料』 23(1978), pp. 1-14; 朱秀浣, 「新羅에 있어서 北齊·周 彫 刻樣式의 展開에 관한 一考察-禪房寺와 三花嶺의 三尊石佛을 중심으로-」, 『강좌미술사』 18(2002), pp. 185-205.

9 黃壽永. 「新羅南山三花嶺彌勒世尊」, 『韓國의 佛像』 (문예출판사, 1989), pp. 327-333; 배재호, 「경주 남산 長倉谷 출토 석조미륵불의좌상과 禪觀 수행」, 『미술사학연구』 289(2016), pp. 38-39.

10 김창호, 「경주 불상2예에 대한 이설」, 『경주문화』 9호(2003), pp. 135-14 4; 朴兄國, 「古代韓國の女神信仰と現存女神 像について」, 『佛敎藝術』 278(2005).

11 姜友邦, 「慶州 南山論」, 『圓融과 調和』 (열화당, 1996), pp. 397-398; 文明大, 「慶州南山佛蹟의 變遷과 佛谷龕室佛 坐像考」, 『新羅文化』 10·11(1994), pp. 26 -27.

12 김동하, 「신라왕경 사찰 불상의 재료 변화」, 『新羅文化』 59(2021), pp. 246-249.

13 문명대, 「신라사방불의 전개와 칠불암 불상조각의 연구」, 『미술자료』 27(1980), p. 15; 김리나, 「통일신라시대의 항마 촉지인불좌상」, 『한국고대불교조각사연구』 (일조각,1990), p. 346; 서지민, 「경주 남산 칠불암 석주사면불상에 관한 연구」, 『불교미술사학』 25(2018), p. 60; 하정민, 「경주 南山 七佛庵 불교조각과 石經片으로 본 통일신라의 불교신앙 과 의례」, 『한국고대사탐구』 29(2018), p. 320.

14 姜友邦, 앞의 논문(1996), p. 417.

15 김동하, 앞의 논문(2021), pp. 240-242.

16 늠비봉 오층석탑의 조성 시기는 라말여초 혹은 고려 전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17 신용철, 「통일신라 팔부중상의 고찰: 경주 남산 창림사지삼층석탑상을 중심으로」,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24(2003), pp. 137-196; 신용철, 「신라 팔부중 도상 전개에 있어 쌍탑의 역할」, 『한국학』 33(2010), pp. 135-160; 김지 현, 「경주지역 석탑에 부조된 팔부중상과 도상본에 대한 시론」, 『불교미술사학』 28(2019), pp. 55-77; 김지현, 「팔 부중상이 부조된 경주지역 석탑의 선후관계 고찰-동일한 도상본을 활용한 석탑을 중심으로」, 『불교미술사학』 29(2020), pp. 43-81.

18 김지현, 「統一新羅 佛塔의 四天王像과 그 의미」, 『文物硏究』 17(2010), pp. 83-112; 임영애, 「統一新羅 佛塔 塔身 浮 彫像의 推移」, 『선사와 고대』 35(2011), pp. 225-248.

19 신용철, 「경주 남산 자연석 기단 석탑에 대한 고찰」, 『불교미술사학』 28(2019), pp. 79-100.

20 계림문화재연구원, 『경주 배동 경주남산일원내 창림사지 1차 발굴조사 문화재 발굴조사 약보고서』 (2020), pp. 45-49.

21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앞의 책(2002), pp. 55-84; 신용철, 「신라 왕경 불탑에 대한 고찰」, 『新羅文化』 59(2021), pp. 258-261.

22 이근직, 『신라왕릉연구』 (학연문화사, 2012), pp. 150 -169.

23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쪽샘vs탑동』 전시도록 (2020), pp. 130-135.

24 황보은숙, 「월성 이남의 신라왕경 확장」, 『경주사학』 28(2008), pp. 32-34.

2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전)인용사지 발굴조사보고서Ⅰ』 (2013), pp. 457-459.

26 한정호, 「『三國遺事』生義寺石彌勒과 南山 三花嶺」, 『신라문화제학술발표논문집』 37(2016), pp. 80-83.

27 朴方 龍, 「新羅 都城의 交通路」, 『경주사학』 16(1997), pp. 194, 202(도5).

28 김동하, 「신라 사찰의 분포와 왕경의 형성」, 『新羅文化』 57(2020), pp. 80-85.

29 『三國史記』, 卷第十 新羅本紀 哀莊王七年.

30 이근직, 『경주에서 찾은 신라의 불국토』 (학연문화사, 2017), pp. 180-182.

31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과 열암곡 석조여래좌상 등을 복원하면서 주변 발굴을 실시했고, 최근에는 약수계 석 조여래좌상 주변에 대한 발굴이 추진되었다.

32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삼릉계 석불좌상 보수·정비보고서』 (2010), p. 94.

33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앞의 책(2010), pp. 56 -57.

34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앞의 책(2010), p. 94.

35 보고서에 따르면 조사자는 3개의 건물지가 중첩된 것으로 보았다. 건물지③은 열암곡 석조여래좌상을 봉안하기 위한 건물은 아닌 것으로 판단했고, 불상이 조성되기 전 건물로 판단했다. 다만 필자가 검토했을 때 건물지③ 역시 석조여래좌상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논외로 하겠다.

36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경주 남산 열암곡 석불좌상 보수·정비보고서』 (2010), p. 46.

37 장충식, 「경주 남산 석탑의 성격과 보존방안」, 『경주 남산 문화재의 종합적 검토』,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2002), p. 67.

38 김상현, 「新羅의 建塔과 『造塔功德經』」, 『문화사학』 6·7(1997), pp. 250-254.

39 『無垢淨光大陀羅尼經』과 신라 건탑과 관련해서는 다수의 논문이 발표되었다.(金禧庚, 「韓國 無垢淨小塔考」, 『考 古美術』 9(1975), pp. 15-18; 한정호, 「新羅無垢淨小塔 硏究」, 『동악미술사학』 8(2007), pp. 35-58; 신용철, 「신라 불탑 에 있어 『無垢淨光大陀羅尼經』의 영향」, 『불교학연구』 23(2009), pp. 333-374).

40 「國王慶應無垢淨塔願記」 “…聞經之言有爲功德厥數萬端而利物無邊者莫若崇建塔廟伏以…”

41 『三國遺事』 卷第四 義解 良志使錫條 “…來如來如來如 來如哀反多羅 哀反多矣徒良 㓛徳修叱如良来如…”

42 吉川真司, 「平城京東山の宗教的環境」, 『金城의 南山과 平城京의 東山』 (국립경주박물관, 2019), p. 72.

43 吉川真司, 앞의 글(국립경주박물관, 2019), p. 86.

44 藤岡 穣, 「平城京東山の古代石佛」, 『金城의 南山과 平城京의 東山』 (국립경주박물관, 2019), pp. 221-248.

45 『三國史記』 卷第四 新羅本紀 眞平王 九年 “…大世退而求友適遇仇柒者耿介有奇節遂與之遊南山之寺忽風雨落 葉泛於庭潦大世與仇柒言曰, 吾有與君西遊之志今各取一葉爲之舟以觀其行之先後. 俄而大世之葉在前大世笑曰, 吾其行乎. 仇柒勃然曰, 子校勘亦男兒也豈獨不能乎. 大世知其可與密言其志仇柒曰, 此吾願也. 遂相與爲友自南海乘舟而去後不知其所往.”

46 배재호, 앞의 글(2016), pp. 54-55.

47 불국사와 천궁(석굴암)을 왕래한 표훈의 일화에서도 평지의 본사와 산지의 수행처와의 유기적인 관계를 엿볼 수 있다. 특히 8세기 후반부터 소규모 불교유적이 다수 조성되는 것도 의상계 표훈의 화엄사상이나 보현행과 관련되 었을 수 있다(최연식, 「표훈의 일승세계론과 불국사·석굴암」, 『佛敎學報』 70輯(2015), pp. 103-106. 참조).

Fig. 1.
<칠불암 마애불상군> Rock-carved Buddha at Chilburam Hermitage in Mt. Namsan, Gyeongju, 8th Century, H.266cm(the main buddha) (©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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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삼릉계 선각마애육존불>, Rock-carved Standing Buddha Triad and Seated Buddha Triad at Samneunggye valley in Mt. Namsan, Gyeongju, 8~9th Century, H.400cm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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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포석계곡 제6사지 오층석탑>, Five-story Stone Pagoda at the Sixth Temple Site at Poseokgyeogok Valley in Mt. Namsan, Gyeongju, 10~11th Century, H.615cm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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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용장사지 삼층석탑>, Three-Story Stone Pagoda in the site at Yongjangsa Temple in Mt. Namsan, Gyeongju, 8th Century, H.4 41cm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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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Sites distribution between the northern foot of Mt. Namsan and Wolseong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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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Distribution of historical sites in Tapdong (tombs of Three Kingdom era, Walls of the Unified Shilla and Building sites) (Image from Tchoksaem vs T’aptong chŏnsitolok, 2020, p.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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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Distribution of Buddhist historical site in Mt. Namsan, Gyeongju(Mid 7th-8th century) (Image from Kyŏngju namsan, 2002, p. 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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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道仲(寺)’명 기와>, Roof-tile with inscription, Unified Silla, L.20cm, temple site of Inwangdong in Gyeongju, The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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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Distribution of Buddhist historical sites in Samneungyegok valley and Yongjang valley (red dots/end of 8th-9th century) (Image from Kyŏngju namsan, 2002, p. 1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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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Drawing image of historical sites in Osangye valley (Image from kyŏngju namsan kojŏk sullye, 1979, p. 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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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Current image of site where seated stone Buddha statues located at Samneunggye Valley (Image from Kyŏngju namsan samnŭnggye sŏkpulchwasang posujŏngbibogosŏ, 2010, 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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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삼릉계 석불좌상>, Stone Seated Buddha in Samnŭnggye valley, H.287cm, the Unified Silla, Mt. Namsan, Gyeongju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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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Stone constr uction around the seated stone Buddha (Image from Kyŏngju namsan samnŭnggye sŏkpulchwasang posujŏngbibogosŏ, 2010, p.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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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Building site around the seated stone Buddha (Image from Kyŏngju namsan samnŭnggye sŏkpulchwasang posujŏngbibogosŏ, 2010, p.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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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Panorama of the site at Yŏramgok valley (aerial photography)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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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Current image of historical remains around seated Buddha at Yŏramgok valley (Image from Kyŏngju namsan yŏramgong sŏkpulchwasang posujŏngbibogosŏ, 2010, p. 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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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소탑>, Miniature Pagodas, H.6~10cm, the Unified Silla, Hwangnyongsa Temple Site in Gyeongju, The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Gyeo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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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국왕경응조무구정탑원기>, Mugujeongtapwongi (Epitaph), the Unified Silla(885), 22.4×38.2cm, Three-story Stone Pagoda at Changrimsa Temple Site of Mt. Namsan Gyeongju (Image from KeishūNanzan no busseki, 1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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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Name of temples in Mt. Namsan verified in literature records
No. Name of temples Literature records Period (CE) Note
1 Namsanjisa Temple Records on achievements of Silla Kings, The 9th year of the reign of King Jinpyeong in Samguksagi (History of the Three Kingdom) 587 (The 9th year of the reign of King Jinpyeong)
2 Saeng-euisa Temple Buddhist pagoda and statues, ‘Stone Maitreya and Monk Saeng-euisa’ in Samgukyusa (Memorabilia of the Three Kingdoms) 644 (The 13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Seondeok)
3 Munsusa Temple Buddhist pagoda and statues, ‘Monk Gyeongheung met Saints’ in Samgukyusa 681~692 (The King Sinmun)
4 Seoggasa Temple Buddhist pagoda and statues, Sakyamuni provided Dharma body with food’ in Samgukyusa 699 (The 8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Hyoso)
5 Bulmusa Temple Buddhist pagoda and statues, ‘Sakyamuni provided Dharma body with food’ in Samgukyusa 699 (The 8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Hyoso)
6 Cheonlyongsa Temple Buddhist pagoda and statues, ‘Cheonlyongsa Temple’ in Samgukyusa Before the King Munmu
7 Pilisa Temple Stories of hermits, ‘Yeombulsa monk’ in Samgukyusa
8 Namgansa Temple Stories of hermits, ‘Monk Hyetong made dragon gave in’ in Samgukyusa 527 (The 14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Peopheung)
9 Changlimsa Temple Mysterious stories, ‘The founder of Silla, the King Hyeokgeosei’ in Samgukyusa 855 (?) (The King Munseong) Kim Jeongheui ‘Records about the Great Dharani Sutra and history of construction of pagoda’
10 Cheon-eunsa Temple Mysterious stories, The King Munmu Beobmin’in Samgukyusa Before the King Munmu Roof tiles with inscription ‘Cheoneun (天恩)’
11 Yangpisa Temple Mysterious stories, ‘Story that the King Soji shot an arrow at the case of Keomungo (Korean music instrument) to kill a sinner’ in Samgukyusa
12 Yongjangsa Temple Stories of Buddhist masters, ‘Monk Daehyeon from Dharma character school and Monk Peophae from Flower Garland School’ in Samgukyusa Before the King Kyeongdeok
13 Seonbangsa Temple 897 Excavated Memorial stone of Buddhist pagoda
14 Sajesa Temple Excavated roof tiles with inscriptions (To estimate as a temple site)
15 Sin-insa Temple Excavated roof tiles with inscriptions (Around Buddha images on a cliff at Tapgok valley)
16 Cheongwansa Temple Mysterious stories, ‘The King Wonseong’ in Samgukyusa Before the King Wonseong
17 Giwonsa Temple Records on achievements of Silla Kings, The 27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Jinheung in Samguksagi 556 (The 27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Jinheung) ‘Poseokjeong at Juaksa Temple’ of Choi Gwangyu
18 Siljesa Temple Records on achievements of Silla Kings, The 27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Jinheung in Samguksagi 556 (The 27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Jinheung) ‘Poseokjeong at Juaksa Temple’ of Choi Gwangyu
19 Geumgwangsa Temple Enchatment, ‘Monk Myeongrang and the Esoteric Buddhism’ in Samgukyusa 635 (The Queen Seondeok) The Keumgwangji pond in Namsan
20 Bolisa Temple Records on achievements of Silla Kings, The 12th year of the reign of the King Heongang in Samguksagi 886 (The King Heongang) Burial site of the King Heongang
Table 2.
Restored or restorable stone pagoda in Namsan
No. Name State Feature Note
1 Three-story Stone Pagoda at Changnimsa Temple Site Restored Eight Devas
2 East Three-story Stone Pagoda at Ancient Yeombulsa Temple Site Restored Twin pagodas
3 West Three-story Stone Pagoda at Ancient Yeombulsa Temple Site Restored
4 East Three-story Stone Pagodas in Namsan-dong Restored Brick stone pagoda type roof stone Twin pagodas
5 West Three-story Stone Pagodas in Namsan-dong Restored Eight Devas
6 Three-story Stone Pagoda at Cheollyongsa Temple Site Restored
7 Three-story Stone Pagoda in Yongjangsagok Valley Restored A single Gidan(base)
8 Three-story Stone Pagoda at the Second Temple Site in Jiamgok Valley Restored A single Gidan(base)
9 Three-story Stone Pagoda at the Third Temple Site in Jiamgok Valley Restored A single Gidan(base)
10 Three-story Stone Pagoda at the Fourth Temple Site in Guksagok Valley Restored
11 Three-story Stone Pagoda in Yongjanggye Jigok Valley Restored Brick stone pagoda type roof stone
12 Three-story Stone Pagoda at the Second Temple Site in Bipagok Valley Restored
13 Three-story Stone Pagoda at the Second Temple Site in Giamgok Valley Restored
14 Five-story Stone Pagoda at the Sixth Temple Site in Poseokgok Valley Restored
15 Three-story Stone Pagoda at Rock-carved Buddhas in Tapgok Valley Restored
16 Three-story Stone Pagoda at Borisa Temple Restored
17 Three-story Stone Pagoda at Seonbangsa Temple Restored
18 Three-story Stone Pagoda Temple Site in Seunsogok Valley Re-located and restored Four Heavenly Kings
19 Three-story Stone Pagoda at the Sixth Temple Site in Samneunggye Valley Re-located and restored A single Gidan (base)
20 Three-story Stone Pagoda in Cheongwansa Temple Site Restored
21 East Three-story Stone Pagoda Temple Site in Inwang-dong Excavation (remains) Eight Devas Twin pagodas
22 West Three-story Stone Pagoda Temple Site in Inwang-dong Excavation (remains) Eight Devas
23 East Three-story Stone Pagoda at Changnimsa Temple Site Excavation (remains) Eight Devas Twin pagodas
24 West Three-story Stone Pagoda at Changnimsa Temple Site Excavation (remains) Eight Devas
25 Stone Pagoda in Baegungye Yangjoamgok Valley Collapsed
26 Stone Pagoda in Baegungye Byeolcheollyonggok Valley Collapsed
27 Stone Pagoda in Yongjanggye sagok Valley Collapsed
28 Rock-carved Nine-story Pagoda in Tapgok Valley Rock-carved pagoda Nine-story wooden Pagoda (relief) Twin pagodas
29 Rock-carved Seven-story Pagoda in Tapgok Valley Rock-carved pagoda Seven-story wooden Pagoda (reli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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