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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2; 2021 > Article
Yu: 17~18세기 코로만델 칠병풍의 제작과 소비 양상*

Abstract

코로만델 칠병풍(Coromandel lacquer screen)은 17세기경부터 중국에서 제작된 목칠(木漆) 병풍이다. 대체로 12폭으로 구성된 칠병풍은 높이가 약 250cm 정도이고 한 폭의 너비는 45~50cm로 전체 길이가 약 5m에 달한다. 칠병풍은 칠면에 도안을 투각하고 얕게 파낸 후 채색을 하는 관채 기법으로 제작되어 중국에서는 관채칠병풍(款彩漆屛風)으로 불린다. 본래 명말청초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제작되던 것으로 중서교류가 빈번하여지던 시기에 유럽 무역 거점지였던 인도 코로만델 해안 지역을 거쳐 유럽에 수출되면서 오늘날 코로만델 칠병풍이라는 다소 이국적인 명칭으로 불리게 되었다.
본 논문은 그 동안 수출품으로 인식되었던 코로만델 칠병풍의 미술사적 가치를 조명하며 칠병풍의 제작과 소비 과정을 역사·문화적 측면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휴식록(髹飾錄)』과 칠병풍의 명문(銘文)을 통해 칠병풍의 제작 기법, 제작 시기, 목적에 대해 알아본다. 그리고 현전하는 칠병풍을 종합하여 화면을 장식하고 있는 주요 주제를 분류하고 각 주제별 화면 구성과 의미에 대해 밝힌다. 마지막으로 칠병풍이 유럽에 전해진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유럽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소비된 형태와 양상을 알아본다. 이를 통하여 그동안 수출품의 일종으로만 여겨졌던 칠병풍의 미술사적 가치를 재평가하며 제작과 소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의의가 있다.
오늘날 코로만델 칠병풍은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약 250여 점 이상이 전해지며 소수이지만 중국과 홍콩에도 소장되어 있다. 칠병풍은 17세기부터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현전하는 칠병풍은 대부분 청 강희(淸 康熙, 1662~1772)연간에 제작된 것이다. 칠병풍에 명문이 있는 경우 정확한 제작 시기를 확인할 수 있으며, 이 외에는 기년작을 기준으로 크기, 화면 구성, 주제 등을 비교하여 시기를 판단하였다. 칠병풍은 전통적으로 칠기가 제작되었던 강남 지역에서 제작되었으며 양주(楊州)와 안휘(安徽) 일대에서 특화되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남겨진 명문을 통해서 지역 관리나 부호의 생일이나 퇴직을 축하하기 위한 진상품으로 제작되고 소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칠병풍은 양면이 모두 장식되었으며 중앙에 직사각형 공간을 구획하고 주요 주제를 조각하고 채색하였다. 칠병풍의 주제는 인물, 산수, 화조영모 주제로 나눌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 주제는 <곽자의축수도>와 <군선경수도> 칠병풍이 있는데 대중에게 잘 알려진 서사에 기반한 내용으로 길상을 염원하고 축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읽을 수 있다. 소수이지만 사냥과 행렬 중인 유럽인의 모습을 묘사한 <유럽인수렵도>와 <유럽인행렬도> 칠병풍도 전해진다. 산수 주제는 명승지를 묘사한 것으로 대표적으로 <서호도>와 <무이구곡도> 칠병풍이 있으며 산수 판화와 화면 구성과 세부 표현에서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화조영모 주제는 주로 배면에 사용되었으며 새들 무리 중에 있는 봉황을 그린 <봉황도> 칠병풍과 사슴 한 쌍과 소나무를 묘사한 <송록도> 칠병풍이 전해지며 공통적으로 상징적 의미를 지닌 새와 꽃나무를 조합하여 장식성과 길상 의미를 강조하였다.
아시아로 향하는 신항로가 개척됨에 따라 유럽은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중서무역을 추진했다. 칠기는 중국과 유럽이 무역을 시작한 이래로 애호되던 수출품이었다. 중국 칠기는 주로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가 유럽에 수입하였으며 코로만델 칠병풍도 이들을 통해 유럽에 전해졌음을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당시 유럽에서는 이국 문화를 향유하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가 크게 유행하여 중국 상품에 대한 수요가 매우 높았다. 유럽으로 전해진 칠병풍은 본래 병풍 형태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유럽 소비자의 취향에 부합하는 형태로 변형되어 소비되는 양상을 보인다. 칠병풍은 실내 장식에 사용되었는데 주로 벽장식이나 가구로 변형되었다. 칠병풍을 해체하여 벽 전체에 붙여 라커룸(lacquer room)을 만들거나 병풍을 여러 조각으로 잘라 유럽식 가구 제작에 사용하였다. 이후 18세기 후반부터 시누아즈리 유행이 사그라지고 칠병풍을 대체할 수 있는 대체품이 등장하게 됨에 따라 칠병풍의 유럽 수요는 감소하게 된다. 코로만델 칠병풍은 격변하는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중국과 유럽이라는 서로 다른 문화에서 각각의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한 형태로 소비되었으며, 이를 통해 두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매체로 가치가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Abstract

Coromandel lacquer screen is a Chinese folding screen made from the 17th century to 19th century in China. The screen is usually about 250cm high, 600cm width and consisting of twelve panels. Although these screens were made in China during the Qing dynasty, they received their name from India’s Coromandel coast, where they were transshipped to Europe in the late 17th and early 18th centuries by merchants of the English and Dutch East India companies. The Dutch traders carried these screens from Bantam in Java, and in early accounts they were frequently called Bantam screens as well as Coromandel screens.
This paper examines Coromandel lacquer screen's art historical significance in the incising global interaction and consumer culture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It first discusses historical and cultural background of production in China which have been little known about. The primary sources focus on the record of Xiu Shi lu, the 16th century book about lacquer, and the inscriptions left on the screens. They will give information about when the screens were produced, what was the purpose of them, and the technique of decoratively incising lacquer and adding polychrome to the voids, called kuan cai in Chinese.
The lacquer screen features a continuous scene run through all twelve panels, just like a hand-scroll painting with variety of colours. The prominent subjects for decoration are human figures, landscape and bird-and-flower. The narrative theme with human figures, such as Birthday Reception for General Guo Ziyi and the World of Immortals were shaped by literature or play. Also, the parallels between the lacquer screens and the paintings on the same theme are found. The scenes with Europeans are rare but bring various interpretations within the historical context of the time. The landscape themes, such as the Scenes of Lake Xihu and the Nine Bend in Mountain Wuyi, were depicted famous scenic spots in China. The composition and expression of the screens were probably inspired by landscape woodblock prints, it’s because the technique of lacquer screen and woodblock cutting are similar. Lastly, bird-and-flower theme has a long tradition of wishing longevity, happiness and peace in one’s life and produced in various medium.
Thanks to the enormous progress in navigation and discovered sea roots in the 16th century, Dutch and England East India Companies imported quantities of Chinese lacquerworks in the 17th century. As Chinoiserie gain popularity all over Europe, Chinese objects were consumed in various ways. Imported Coromandel lacquer screens were incorporated into European interiors. They were cut into a number of panels, which mounted within wood paneling on walls and inserted into contemporary furniture. The lacquer screen also inspired European’s imitation of Asian lacquer known by a variety of names.
This paper surveys Coromandel lacquer screen’s domestic production, exploding consumption and global conquest from the 17th century to 18th centuries, when the screen was explosively made. The lacquer screen is an active participant in cross-cultural interaction, not merely a passive commodity of china. Investigating the material culture of the lacquer screen, it was originally created in chinese domestic background concerned with social prestige, in Europe, consumed to show off exotic luxury and triggered a new stylistic changes in chinoiserie.

Ⅰ. 머리말

코로만델 칠병풍(Coromandel lacquer screen)은 17세기경부터 중국에서 제작된 목칠(木漆) 병풍이다. 대체로 12폭으로 구성된 칠병풍은 높이가 약 250cm 정도이고 한 폭의 너비는 45~50cm로 전체 길이가 약 5m에 달한다. 코로만델 칠병풍은 조각과 채색을 함께 사용하는 관채(款彩) 기법으로 제작되어 관채칠병풍(款彩漆屛風)으로도 불린다. 칠병풍의 전면(前面)과 배면(背面)이 모두 장식되었고 연폭(連幅)을 활용하여 가로로 긴 화면에 도안을 그린 후 얕게 투각하고 여러 색으로 채색하였다.
17세기 중국에서 제작된 칠병풍은 오늘날 코로만델 칠병풍이라는 다소 이국적인 이름으로 불린다. 코로만델은 인도 남동부 해안에 위치한 동서무역의 거점지이며 유럽에서 중국제 수출품을 총칭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칠병풍은 반탐 라커(Bantam lacquer)로도 불렸는데, 반탐은 인도네시아 자바섬 인근에 위치한 오래된 무역 거점지로 향신료 무역의 중심지 중 하나이다.1 중국 칠병풍이 동서무역의 거점지명으로 불린 것은 칠병풍이 코로만델이나 반탐을 거쳐 유럽에 전해졌으며 더불어 당시 중국, 인도, 아시아의 개념이 명확치 않았던 유럽인에게 비교적 익숙한 지명을 사용하여 이국에서 온 물건이라는 의미를 전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필자의 조사에 따르면 오늘날 코로만델 칠병풍은 약 250여 점 이상이 전한다.2 주로 프랑스,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 유럽과 미국의 박물관 및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으며, 소수이지만 중국과 홍콩에서도 확인된다. 병풍 외 가구와 벽장식 형태까지 더한다면 수량은 더 늘어날 것이다. 현전하는 코로만델 칠병풍의 수량이 적지 않으며 대다수가 유럽과 미국의 대형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을 때 선행 연구는 다소 적고 단조로운 편이다. 선행 연구는 유럽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며 동서교섭사와 시누아즈리의 맥락에서 중국 수출품 중 하나로 칠병풍을 소개하였다.3 대만에서는 안휘성박물관 소장 <한궁춘효도(漢宮春曉圖)> 칠병풍의 주제를 밝히고 관채 기법과 판화의 연관성을 제시한 연구가 발표되었다.4 중국에서는 2000년대 들어 지방 박물관에 소장된 칠병풍에 대한 간략한 연구가 이루어졌으나 이전 연구를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한계점을 지닌다.5 한편 국내에서는 중국 회화 주제 연구 중 칠병풍의 일부 주제가 소개되었다.6
코로만델 칠병풍은 동서문화교류를 보여주는 의미 있는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도자나 회화와 같은 수출품에 비해 연구가 미진한 편이다. 칠병풍은 유럽에서 오랫동안 수출품으로 인식되었고 오늘날에도 경매 시장에서 거래되고 있으며, 중화권에서는 전해지는 수량이 적어 주요 연구대상으로 인식되지 못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본 논문은 그동안 골동품 또는 수출품으로 인식되었던 코로만델 칠병풍의 미술사적 가치를 조명한다. 대부분의 선행 연구는 코로만델 칠병풍이 유럽에 소장되어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고 그 결과 칠병풍은 유럽 수출용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칠병풍은 본래 중국 내 소비를 위해 제작된 목칠 병풍이며 명청대 중국에서 애호되던 주제들로 장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주제는 길상적 성격을 지닌 것들이 다수이고 화면 구성은 동시대 회화나 판화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관채에 대한 최초 기록이 등장하는 『휴식록(髹飾錄)』을 통해 제작 기법, 시기, 지역에 대하여 유추해본다. 또한 칠병풍에 남겨진 명문(銘文)을 통해 제작 목적에 대해 살펴본다. 그리고 현전하는 칠병풍 중 가장 많은 수량이 전해지고 전형이 되는 주제를 분류하고 각 주제별 화면 구성과 의미에 대해 살펴본다. 칠병풍은 기법적으로 판화와 유사하며 연폭에 채색을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인하여 동시대 유행하던 시각매체의 영향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주요 주제의 의미와 성격을 명청대 문화적 맥락 속에서 짚어보며 표현의 특징을 살펴본다. 마지막으로 칠병풍이 유럽에 수출된 시대적 배경과 유럽이라는 새로운 환경에서 소비된 양상을 알아본다. 이를 통하여 그동안 수출품의 일종으로만 여겨졌던 칠병풍의 미술사적 가치를 재평가하며 제작과 소비에 대한 이해를 심화하는 데 의의가 있다.

Ⅱ. 코로만델 칠병풍의 제작

코로만델 칠병풍은 17세기 초부터 19세기까지 중국에서 제작된 칠병풍으로 본래 중국 내 소비를 위하여 제작되었으나 대외무역이 증가하면서 수출품으로 유럽에 전해졌다. 현전하는 칠병풍을 종합하여 보면 17세기 중엽부터 18세기 말까지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었고 그 이후 제작 수량이 점차 줄어들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제작연도가 남아있는 칠병풍 중에는 1637년에 제작된 <화훼도> 12폭 칠병풍이 가장 오래 된 것으로 확인되었다(Fig. 1). 현전하는 칠병풍은 대부분 청 강희연간(康熙年間, 1662~1772)에 제작된 것이며, 제작 시기에 대한 명문이 남아있지 않은 경우 기년작을 중심으로 형식과 화면 구성을 비교하여 시대를 추론하였다. 강희연간에 제작된 칠병풍을 기준으로 보면 18세기 말부터 병풍의 크기가 작아지고 폭 수도 6폭 이하로 줄어드는 경우도 볼 수 있다. 크기가 줄어듦에 따라 화면 구성이 간략해지고 건물구성과 등장인물 수가 줄어들며 여러 겹 둘러지던 장식 테두리도 생략된다.
코로만델 칠병풍은 조각과 채색을 함께 사용하는 관채 기법으로 제작되었다.7 관채는 명대(明代) 안휘성(安徽省) 출신 칠장(漆匠) 황성(黃成, 1567~1572 활동)이 집대성하고 양명(楊明)이 주석을 쓴 칠공예서 『휴식록』(1625)에 처음 등장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8
  • 관채(款彩): 관채에는 칠색(漆色)이 있고, 유색(油色)이 있다. 칠색은 건조하여 메우는 것이 적당하며, 유색은 안료로 바탕 칠하는데 적당하다. 금과 은을 사용하여 무늬를 넣은 것은 사치스러운 아름다움을 더욱 성하게 한다. 여러 가지 색을 사용한 것도 있고, 금과 은을 섞어 쓴 것도 있다. 양명의 해석에 따르면 문양과 그림을 음각하기를 마치 인쇄판에 새기기 같이하고, 그곳을 여러 색으로 메워서 관채라 하였다. 그러나 각각 한 가지 색으로 메운 것은 채(彩)라고 할 수 없고, 그 메운 색깔로 명명할 수 있다.9

『휴식록』에서 관채는 조각 기법의 일종으로 분류된다. 토회칠(土灰漆)과 흑칠(潶漆)을 마친 칠면(漆面) 위에 도안을 그리고 얕게 투각한 뒤 파낸 공간을 채색한다. 인쇄판에 투각하는 것과 같다는 내용을 통하여 문양의 테두리는 양각(陽刻)으로 남겨 놓고 나머지 공간은 음각(陰刻)으로 파내고 파인 곳을 금과 은 등 여러 가지 색으로 채색한 것을 알 수 있다. 채색할 때 안료가 양각 윤곽선을 넘지 않으며 상감 기법과 같이 면을 채우거나 칠면을 평평하게 연마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관채에 대한 기록이 『휴식록』에서 처음 등장한다는 점으로 인해 이 기법이 명대 생겨났으며 황성과 양명이 활동하던 안휘성 휘주(徽州) 일대에서 시작되었을 가능성이 제시된 바 있다.10 중국에서 칠기는 전통적으로 기후가 습윤한 강남 지역에서 제작되었고 명청대에는 강소(江蘇), 안휘(安徽), 절강(浙江), 복건(福建) 지역이 칠기 제작 중심지였다. 명말청초 장적(匠籍)제도가 와해되고 요역 대신 은(銀)으로 대납하게 되면서 장인들은 자유로운 활동할 수 있게 된다. 이들은 인력을 고용하여 공방을 운영하였고 독립적인 기술을 개발하기도 했다. 청대에는 수공업이 지역별로 세분화되었고 특화 기법이 발달하였다. 강소성 양주(揚州)는 금, 은, 옥, 상아 등을 박아 넣는 백보감(百寶嵌)이 발달하였으며 ‘양주각회(揚州刻灰)’라고 칭해진 것을 보아 관채가 특화 기법 중 하나였음을 추론할 수 있다.11 소주(蘇州)에서는 여러 겹 칠한 뒤 문양을 조각하는 조칠(雕漆)이 발달하여 황실용 주칠(朱漆) 칠기가 제작되었다. 안휘성 휘주에서는 다양한 기법이 발달하였는데, 나전, 조칠, 관채로 유명했다는 기록이 전한다.12 바다와 접하고 있는 복건성은 나전에 뛰어났고 채색을 하는 칠기가 제작되었다. 오늘날 전해지는 관채 칠기의 수량이 적은 점으로 보아 관채는 널리 사용되던 기법이 아니었으며 양주나 휘주와 같은 일부 지역이나 특정 공방에 한정되었던 기법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코로만델 칠병풍의 제작 목적에 관하여는 현전하는 칠병풍이 대부분 유럽에 소장되어있어 유럽 수출을 위해 제작되었다고 알려졌다. 그러나 칠병풍에 남겨진 명문을 살펴보면 본래 중국 내에서 진상품으로 제작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팰헴갤러리 소장 1681년 作 <곽자의축수도> 12폭 칠병풍은 광동(廣東)과 광서(廣西) 관리들이 광동성 고주부(高州附) 통판(通判)이었던 곽헌대(郭憲臺)에게 진상하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Fig. 2). 배면의 명문은 살펴보면 곽헌대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제작한 것으로 그의 능력으로 적의 침입이 잦고 도외시되었던 고주부가 안정을 찾은 것을 칭송하고 장수를 축원하였다.13 칠병풍은 본래 지방 관리나 부호의 생일, 퇴직을 기념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으며, 중서 교섭이 증가하던 시기에 상인의 손에 유럽으로 수출되면서 유럽에서는 왕실과 상류층을 중심으로 이국 취향을 드러내는 장식품으로 각광을 받았던 것을 알 수 있다.

Ⅲ. 코로만델 칠병풍의 주요 주제

코로만델 칠병풍은 대체로 12폭으로 구성되었으며 각 폭에는 철제 고리가 있어 낱폭을 연결하거나 분리하여 사용할 수 있다. 칠병풍 중앙에는 직사각형 공간을 구획하여 주요 주제를 그려 넣었고 1~3겹의 장식 테두리를 둘렀다. 중앙 직사각형 공간은 인물, 산수, 화조영모 주제로 장식되었다. 칠병풍은 양면이 모두 장식되었으며 주로 전면에는 인물이나 산수가 배치되었고, 배면은 화조영모도, 명문, 백납도 등으로 장식되었다. 전면에 등장하는 인물 주제는 대중에게 익숙하며 길상(吉祥) 의미를 지닌 주제가 다수이다. 소수이지만 유럽인을 묘사한 것도 있어 주목할 만하다. 산수는 실경(實景)을 소재로 하며 전면과 배면에 모두 사용되나 주로 전면에 배치되는 경향이 있다. 꽃나무와 새 또는 동물을 조합한 화조영모 주제는 장식적인 특징으로 인하여 배면을 장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1. 인물 주제

인물 주제는 대중에게 익숙한 서사에서 기인한 것으로 주로 고사나 문학에 연원한 것이 많다. <곽자의축수도(郭子儀祝壽圖)>, <한궁춘효도(漢宮春曉圖)>, <군선경수도(群仙慶壽圖)>, <서원아집도(西園雅集圖)>, <삼국지연의도(三國志演義圖)>, <수호전도(水滸傳圖)> 등이 전해지며, 소수이지만 유럽인을 묘사한 <유럽인행렬도>, <유럽인수렵도>도 볼 수 있다. 본고에서는 가장 많은 수량이 전해지는 <곽자의축수도>, <군선경수도>와 유럽인을 소재로 한 <유럽인수렵도>, <유럽인행렬도>를 대표적 예시로 살펴본다.
<곽자의축수도> 12폭 칠병풍은 당나라 명장 곽자의(697~781)가 호화로운 분양왕부에서 가족들과 연회를 즐기고 있는 장면이다(Fig. 3). 화면 중앙에 위치한 외전에서 곽자의가 가족과 함께 무희의 공연을 관람하고 있으며, 화면 오른쪽 대문 밖으로는 손님들이 줄지어 오고 있고 화면 왼쪽에 위치한 내전에는 부인과 여러 명의 여인, 아이들이 유희 활동 중인 모습이다. <곽자의축수도> 칠병풍은 건축물을 짜임새 있게 구성하였으며 화려한 건물과 잘 꾸며진 정원을 세밀하게 묘사하였다. 건물을 수평 또는 평행하게 배치하는 방법에 따라 2~3가지 도안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건물을 평행하게 배치하는 경우 부감시를 사용하여 건물의 외관과 내부 전경이 한눈에 보이게 구성하였고 계화(界畫) 기법으로 건물을 정교하고 비례에 맞게 묘사했다는 특징을 보인다(Fig. 4). 화면 속에 표현된 화려한 건축물과 많은 인물은 곽자의가 누린 부귀영화를 시각적으로 드러낸다.
명청대 곽자의는 복록의 상징으로 자리 잡으며 저택에서 연회를 즐기는 도상이 빈번하게 그려졌다. 노인 곽자의가 분양왕부에서 가족과 손님을 맞는 도상은 칠병풍 외에도 회화, 도자, 목조각, 자수 등에서도 발견되어 다양한 매체에서 애호되던 소재임을 알 수 있다. 곽자의의 생애는 문학으로도 생산되었는데 「만상홀(滿牀笏)」과 「타금지(打金枝)」가 인기있었으며, 특히 「타금지」는 노인 곽자의의 경수연 장면으로 끝을 맺는다.14 팰헴갤러리 소장 <곽자의축수도> 12폭 칠병풍의 명문에는 생일을 맞은 곽헌대를 곽자의에 비유하였고 동일한 부귀공명, 수복장생, 자손번창을 누리길 기원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인물 주제 중에는 여러 신선의 회합 장면을 묘사한 것이 전해진다. 팔선(八仙)이 수노인(壽老人)을 첨앙하는 것을 보아 <군선경수도> 칠병풍임을 알 수 있다(Fig. 5). 화면 중앙 소나무 아래에 수노인이 앉아 있으며 화면 왼쪽에서는 마차를 탄 서왕모(西王母)가 반도(蟠桃)를 든 시녀들과 함께 중앙을 향하고 있고, 화면 오른쪽에는 동왕공(東王公)과 청우(靑牛)를 탄 노자(老子)도 수노인을 향하고 있다. 화면 우측 하단은 바다로 신선들이 파도치는 바다를 건너는 모습인데 상륙한 팔선은 수노인을 향해 복숭아와 꽃 선물을 진상하는 모습이다. 화면 곳곳에서 삼성(三星), 유해섬(劉海蟾), 습득(拾得), 바둑 두거나 학이나 용을 타고 있는 신선을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신선을 주제로 한 그림은 단독으로 신선을 그리거나 신선 설화에 근간을 한 것이 대부분으로 칠병풍처럼 다양한 신선을 한자리에 모은 화면은 드물다. <군선경수도> 칠병풍은 화면 중앙에 수노인을 배치하였고 모든 신선이 수노인을 향하고 있어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유추할 수 있다. 명대에는 다양한 신선이 등장하는 경수극(慶壽劇)이 생일축하 행사로 공연되었고 신선 주제는 경수와 축수의 의미로 확장되었다.15 경수극 중에는 여러 신선이 함께 등장하여 생일인 사람에게 복과 수를 누리라고 말을 건네고 축원했다. 이와 같은 신선극의 유행은 다양한 신선이 한 자리에 모인 장면을 표현할 수 있는 배경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중국에서는 생일을 맞은 노인을 수노인에 비유하기도 하였다는 점을 생각해 본다면 <군선경수도> 칠병풍은 받는 이의 생일을 축하하고 장수를 기원하는 목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소수이지만 유럽인을 묘사한 칠병풍도 전해진다. 유럽인 주제는 두 가지 유형으로 각각 수렵과 행렬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유럽인수렵도>와 <유럽인행렬도>로 부르기도 한다.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유럽인수렵도> 12폭 칠병풍은 유럽인들이 창살과 장총을 가지고 호랑이, 사슴, 토끼, 새를 사냥 중인 장면이다(Fig. 6). 화면 오른쪽에 성 벽이 있고 왼쪽 해안가에는 선박이 정박되어 있어 성 밖에서 대기하며 사냥 중인 것으로 보인다. 정박한 배에는 돛을 정비하거나 배 안 창문에서 밖을 내다보는 인물들도 있다. 유럽인 외에도 어두운 피부색의 인물도 묘사되었는데 이들은 일산(日傘)을 씌워주거나 사냥한 동물을 옮기고 있다. 사냥 중인 인물들의 역동적인 모습을 잘 포착하였고, 각 인물의 복식과 장신구를 비롯하여 복식의 문양까지도 세밀하게 묘사한 것을 볼 수 있다.
덴마크 국립박물관 소장 <유럽인행렬도> 12폭 칠병풍은 화면 오른쪽에 있는 기와를 올린 건물에서 출발하여 해안가에 정박한 배로 향하는 행렬 중인 모습이다(Fig. 7).16 화면 중앙에는 행렬의 중심으로 보이는 인물이 흰 코끼리를 타고 있으며 용이 그려진 깃발을 든 선발대와 함께 배로 향하고 있다. 그 뒤로는 보석, 상아, 산호 등 진귀한 물건을 든 무리가 따르는데 낙타나 호랑이를 비롯하여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신수도 볼 수 있다. 행렬의 종착지로 보이는 선박에는 “화란조공(和蘭朝貢)”이라고 쓰인 붉은 깃발이 달려있다. 네덜란드를 뜻하는 화란을 통해 칠병풍이 네덜란드와 관계 있음을 추측할 수 있으나 화면만으로는 조현(朝見)의 대상을 명확하게 판단하기 어렵다.
유럽인 주제 코로만델 칠병풍은 유사한 도안을 차용하여 화면을 구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로리앙 동인도회사 박물관 소장 <황가수렵도(皇家狩獵圖)> 12폭 칠병풍은 만주 팔기군의 수렵 장면 묘사하였는데 화면 구성과 인물의 배치가 <유럽인수렵도> 칠병풍과 유사하다(Fig. 8). 두 칠병풍 모두 해안가에서 무리를 지어 사냥 중인 모습으로 화면 오른쪽 하단에 다리를 건너는 인물의 표현과 무리를 지어 사슴을 쫓고 호랑이를 사냥 중인 구성이 동일하다. 세부 표현에서 인물의 역동적인 자세와 사냥 중인 동물의 묘사, 그리고 반복되는 선으로 바위를 표현한 점이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차이점은 인물이 각각 중국인과 유럽인이라는 점으로 중국인 대신 유럽인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유럽인 도안을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외국과 교류가 증가하던 청대에는 유럽인 묘사가 형식화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청 초기부터 황실을 중심으로 유럽인을 그림으로 시각화하기 시작했고 건륭연간(乾隆年間, 재위 1736~96)에는 유럽을 포함한 조공국의 남녀 인물상을 집대성한 《황청직공도(皇淸職貢圖)》가 제작되었다. 그중 영국인을 살펴보면 남성은 모자를 쓰고 긴 재킷에 스타킹을 신고 칼을 차고 손에 도자기를 들고 있으며 여성은 풍성한 드레스를 입은 모습이다(Fig. 9). 이와 같은 유럽인 묘사는 도상으로 정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색만 다른 동일한 복식을 입은 남녀 인물은 수출용 도자 문양으로도 다수 발견되며 도자를 든 영국인 남성은 수출화로도 제작되어 전해진다. 《황청직공도》가 완성된 이후 여러 판본이 생겨났고 판화로도 제작되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이를 기반으로 유럽인 묘사가 형식화되었고 다양한 매체에 활용되었던 것을 생각해 볼 수 있다.

2. 산수 주제

산수 주제 코로만델 칠병풍은 실재하는 지역의 이름난 승경(勝景)을 묘사하였다. 전해지는 산수 주제는 약 20여 점으로 항주(杭州) 서호(西湖), 복건(福建) 무이산(武夷山), 천주(泉州), 광서(廣西) 계림(桂林), 광주(廣州), 남오섬(南澳島), 팽호군도(澎湖群島) 등을 소재로 한다. 공통적으로 지역 경관이 잘 드러낼 수 있도록 조감 시점을 사용했으며 지형지물의 위치와 구체성이 드러날 수 있도록 명소의 특징을 포착하여 묘사하고 이름을 부기(付記)하였다.
산수 중에 가장 많은 수량이 전해지는 소재는 서호이다. <서호도(西湖圖)> 12폭 칠병풍은 임안성에서 바라본 서호를 표현하였다(Fig. 10). 화면 상단에 북고봉과 남고봉이 솟아 있고 소제(蘇堤)가 호수를 가로지르고 있으며 호수 안에는 田자 모양 인공섬 소영주(小瀛洲)와 세 개의 석탑 삼담(三潭)을 볼 수 있다. 화면 우측은 고산(孤山)으로 대불사(大佛寺)와 영은사(靈隱寺)가 험난한 산세 가운데 위치하였다. 화면 전반에 수목(樹木)을 풍성하게 그려 넣고 호수에서 고기를 잡거나 유람 중인 인물을 더해 회화적인 느낌을 준다.
<서호도> 칠병풍의 제작에는 지방지 삽도와 같은 판화가 활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서호는 천하제일의 경치라고 칭해지면 문학과 회화 주제로 애호되었으며, 유람 문화와 산수 판화의 흥기에 따라 서호도는 다양한 판화집에 포함되었다. 산수 판화의 효시로 여겨지는 『삼재도회(三才圖會)』 「지리」권에서는 <서호도>가 포함되어 있다. 낱장으로 구성된 <서호도>를 이어붙이면 전도식(全圖式)으로 구성되며 가로로 긴 화면에 표현된 서호의 모습은 칠병풍과 매우 유사하다(Fig. 11). 북고봉과 남고봉이 상단에 위치하며 호수 내에 소제, 소영주, 삼담, 뇌봉탑와 같은 주요 경물의 외형적 특징을 묘사하고 이름을 부기하였다. 또한 세부표현에서 호수에 뜬 나룻배의 지붕에 올라가 노를 젓거나 물고기를 잡는 인물의 묘사가 동일하게 발견된다.
실경을 묘사한 칠병풍 중에는 무이산을 소재로 한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 칠병풍도 전해진다. 무이산은 남송(南宋) 주희(朱熹, 1130~1200)가 은거하며 후학을 가르쳤던 곳으로 오랫동안 문학과 예술의 주제가 되었다. <무이구곡도> 12폭 칠병풍은 높은 곳에서 조망한 무이구곡을 표현하였다(Fig. 12). 화면 중앙을 가로지르는 계곡을 중심으로 상·하단에는 기하학적 산봉우리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풍광을 볼 수 있다. 이름난 봉우리나 정자 등에는 명칭이 부기되었으며 겹겹이 쌓인 층암절벽 사이로 나룻배가 떠다니고 산을 오르는 등 다양한 인물도 포함되었다.
<무이구곡도> 칠병풍에서도 판화와 연관성을 읽어낼 수 있다. 명 말기 무이산을 주제로 한 판화집이 발간되었는데 이 중 칠병풍과 일치하는 부분이 발견되어 주목할 만하다. 1619년 서표연(徐表然)이 간행한 『무의지략(武夷志略)』 중 일곡(一曲)에 간헐정(問津亭) 부분은 <무이구곡도> 1 2폭 칠병풍의 세부와 일치한다(Fig. 13). 두 인물이 정자 계단에 서서 마주보고 서있는 모습으로 강기슭에는 배 한 척이 정박해 있으며 배 위에 인물이 짐을 나르고 또 다른 인물은 배에서 내리고 있다. 주변에 숲이 우거진 모습으로 바위 위에서 나무가 뻗어나는 묘사도 동일한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구곡(九曲)에서도 <무이구곡도> 칠병풍과 동일한 부분이 발견된다. 기하학적 모양의 촛대 바위 두 개가 나란히 서 있고 그중 하나의 꼭대기에는 작은 정자가 있는데, 동일한 촛대 바위는 <무이구곡도> 칠병풍의 11폭 하단에 묘사되었다.
산수 주제 칠병풍은 이름난 명승지나 지역 명소를 주제로 하며 서호나 무이산과 같이 중국 전역에서 널리 이름 난 곳도 있었으며 지역 명소도 포함하고 있다. 산수 주제는 구성과 표현 면에서 판화 삽도와 유사한 점을 다수 볼 수 있었다. 풍광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조감식으로 구성하였으며 명소의 이름을 부기하여 지리 정보를 반영하였다. 칠병풍의 세부 부분에서는 판화에 보이는 도상을 그대로 차용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코로만델 칠병풍의 제작 기법은 판화와 유사하며, 비슷한 시기에 제작 지역도 일치하는 부분이 있어 제작 과정에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된다.

3. 화조영모 주제

화조영모 주제 칠병풍은 꽃, 새, 동물을 조합하여 화면을 구성하였다. 화면 중앙에 동물 암수 한 쌍을 배치하고 주변에 여러 종류의 새, 꽃나무, 바위를 조합하여 길상 의미를 담았다. 화면 중앙에 봉황, 학, 사슴 중 하나를 꽃나무와 함께 묘사하였고 주변에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나무 사이에서 자유롭게 날아드는 모습이다. 모두 상징적 의미를 지닌 새와 꽃나무를 조합하여 화면을 구성하였다. 화조영모 주제는 주로 칠병풍의 배면을 장식하였으며 전술한 인물과 산수보다는 보조적인 주제로 여겨졌던 것으로 보인다.
화조영모 주제 중 가장 많은 수량이 전해지는 <봉황도(鳳凰圖)> 칠병풍은 꽃나무로 가득한 정원을 배경으로 봉황 한 쌍을 묘사하였다(Fig. 14). 봉황은 모란이 핀 괴석 위로 올라서거나 오동나무 아래서 고개를 뻗어 우는 듯하며, 주변으로는 여러 종류의 새들이 꽃나무에 봉황을 둘러싼 모습이다. 학, 공작, 꿩, 원앙, 오리 등을 볼 수 있는데 매우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묘사되었으며 대부분 암수 한 쌍으로 짝을 이루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란, 목련, 연꽃, 매화 등 각양각색의 나무들에는 꽃이 만개하였고, 괴석 사이로 패랭이 꽃, 맨드라미, 수선화 등 다양한 꽃을 볼 수 있다.
봉황은 태평성세를 상징하는 서조(瑞鳥)로 여겨지며 예로부터 회화, 조각, 공예 등 다양한 매체에서 사용되었다. <봉황도> 칠병풍은 봉황을 ‘새 중의 왕’으로 묘사하고 있어 백조조봉도(百鳥朝鳳圖) 도상임을 알 수 있다. 백조조봉도는 모든 새들이 봉황을 따른다는 옛 문헌을 기반으로 형성된 도안으로 봉황은 유교 사회의 성군(聖君)을 상징하며 이상적인 통치자 아래 현신들이 모여든 모습을 의미한다.17 봉황 주변에 있는 학, 꿩, 오리 등은 장수, 신의, 부부애와 같은 길상을 의미하며 모두 한 쌍을 이루고 있다. 더불어 정원을 채우고 있는 모란, 대나무, 매화, 연꽃도 상징 의미를 지니고 있는 꽃나무들로서 화면 전체의 의미를 더욱 풍부하게 만든다.
<봉황도> 칠병풍과 화면 구성이 유사한 <송록도(松鹿圖)> 칠병풍은 봉황을 사슴으로 대체하였다(Fig. 15). 화면 중앙에는 소나무 아래 사슴 한 쌍이 앉아 있으며 주변은 꽃나무와 새들로 가득하다. 중국에서 사슴은 ‘록(祿)’과 소리가 유사하여 출세를 의미하였으며 신선과 함께 묘사되어 장수를 뜻하기도 하였다. 사슴은 항상 소나무, 괴석과 함께 그려지며 학, 사슴, 소나무와 같이 장수를 누리긴 바란다는 내용이 명문으로 새겨져 축수의 의미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화조영모 주제 칠병풍은 상징성 있는 동물을 화면 중심에 배치하고 주변으로 꽃나무와 새를 조합하여 각각이 지닌 길상의 의미를 기원하였다. 화면에 묘사된 꽃, 새, 동물은 모두 장수, 부귀, 출세, 다산 등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들로 다양한 소재의 조합을 통해 상징성을 부각시켰으며 세밀한 묘사와 화려한 채색은 장식적 효과를 더하였다.
이와 같이 코로만델 칠병풍은 각 주제별로 화면구성이 동일한 것을 보아 몇 개의 도안을 바탕으로 대량 생산하였고 내수용과 수출용을 분리하여 제작하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명문 등을 통해 내수용으로 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칠병풍은 대다수 인물 주제로 <곽자의축수도>와 <군선경수도>가 절반 이상을 차지하며, 배면은 화조영모 주제나 명문으로 장식되었다. 17~18세기 제작 직후 유럽으로 수출된 것이 확실한 칠병풍도 마찬가지로 인물과 화조영모 주제가 많다. 유럽에서 <곽자의축수도>나 <한궁춘효도> 칠병풍이 다량 전해지는데, 주제가 지닌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였을지라도 시각적으로 중국 인물과 누각이 어우러지고 상상의 동물인 봉황과 꽃으로 장식된 화면은 이국 취향을 선호하는 유럽인의 미감에 부합하였을 것이다.

Ⅳ. 코로만델 칠병풍의 수출과 소비

1. 동서무역과 코로만델 칠병풍의 수출

1498년 포르투갈인 바스코 다가마(Vasco da Gama, 1469~1524)가 희망봉을 거쳐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개척하면서 유럽과 아시아 더 나아가 신대륙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지역이 해로(海路)로 연결되었다. 15세기부터 세계 곳곳을 누빈 포르투갈은 중국의 문호를 두드렸고 16세기 중반 마카오 체류를 허락 받았다.18 유럽에서 향신료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자 네덜란드와 영국도 직접 해상무역에 나선다. 네덜란드와 영국은 각각 1602년과 1600년도에 동인도회사를 설립하여 해외 팽창에서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초기 동인도회사의 주요한 수입 품목은 후추와 향신료였으며 이후 중국과 일본의 차, 비단, 도자, 칠기, 가구 등으로 확대되었다.
17~18세기 중국의 대외무역은 조공(朝貢)과 해금(海禁)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사무역은 허락되지 않았다. 명나라는 강력하게 해상교역을 금지하였고 해금은 청나라 초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금지에도 불구하고 감시가 느슨한 해안 지역에서 밀무역이 성행하였다. 중국 상인들은 상업 활동을 위해 해외로 이주하거나 해적과 손을 잡기도 한다.19 해외 거주하는 중국 상인들은 중국 연안을 오가며 비밀리에 교역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광동과 복건 상인들이 이주한 인도네시아 팔렘방(Palembang)이나 바타비아(Batavia)는 동인도 회사의 거점지였던 곳이기도 하다. 1619년 네덜란드가 공식적으로 바타비아를 거점으로 삼기 이전부터 중국인이 거주했으며 이들은 이후 네덜란드 상관에서 일하기도 하였다.
수출품 중 칠기는 포르투갈을 통해서 유럽에 소개되었다.20 16세기 포르투갈 인이 일본에 처음 상륙하였고 나가사키 무역을 통해서 외교 선물로 칠기가 유럽 황제와 교황에게 전해졌다. 포르투갈이나 에스파냐 수출용으로 제작된 칠기는 남만칠기(南蠻漆器)로 불리며 나전이나 마키에 기법으로 제작되었고 주로 가톨릭 종교적 의례를 위한 유럽식 소형 가구 형태이다. 일본 칠기는 품질이 뛰어났지만 이미 생산지에서도 다른 수출품에 비해 가격이 높았으며 운송 및 보관료 등으로 인해 판매되지 않았을 경우 손해가 컸기 때문에 대중적인 수출품으로 정착되지 못하였다.21
중국 칠기는 주로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가 유럽에 수출하였다. 칠병풍의 이름으로 명명된 코로만델은 인도 동남부 지역으로 1608년경부터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상관을 설치하였고, 뒤이어 영국 동인도회사가 1619년부터 1622년까지 거점으로 삼았던 곳이다. 또 다른 주요 거점지인 반탐은 인도네시아 자바섬 서북부에 위치한 곳으로 17세기 초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회사의 상관이 세워졌다. 특히 반탐은 지리적 요충지로 유럽이 도착하기 이전부터 이슬람, 아라비아, 중국 상인이 드나드는 국제적 도시였으며 중국 상인이 거주하였던 지역이기도 하다. 칠병풍은 중국과 동남아시아를 오가는 중국 상인을 통해 코로만델이나 반탐으로 전해졌고 이곳에서 유럽 상인과 거래가 성사되어 유럽으로 수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청나라가 세워지고 강희제가 일시적으로 개항을 하였으며 이후 건륭제가 일구통상(一口通商) 정책으로 광주(廣州)에서 해외무역을 허락함에 따라 칠병풍은 광주 양행(洋行)을 통해 유럽에 판매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유럽 동인도회사가 코로만델 칠병풍을 수입한 기록을 관련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바타비아에서 중국 칠기를 상선한 기록이 전해지는데, 1677년 암스테르담에 도착한 Hollantze Thuyn 선박에는 “바타비아에서 480길더(guilder)의 가치가 있는 중국 칠병풍 3점 상선되었으며,23 이 중 2점은 1678년까지 판매되지 않았다.”23 유사한 내용은 영국 동인도회사 기록에서도 발견된다. 1697년 런던 지부는 중국에서 12폭 병풍 20점을 수입할 것을 지시하며 두껍고 양쪽이 모두 조각 장식된 병풍을 수입할 것을 요구하였다.24
암스테르담에서 발행되던 신문 Amsterdamse Courant에는 상인들이 수입한 물건에 대한 광고와 물품 목록이 실렸다. 물품 목록을 통해 영국 동인도회사가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까지 매년 칠병풍을 수입한 것을 알 수 있다. 매년 적게는 1점에서 최대 198점까지 수입되었으며, 1687년부터 1702년까지 대략 500점 이상이 수입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25 또한 1696년에서 1707년 사이 런던에 칠병풍 54점이 도착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26 당시 동인도 회사의 공식적인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밀무역이 성행하기도 하였으며, 동인도회사 직원들은 개인적으로 일정량의 물건을 수입할 수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본다면 유럽으로 수입된 칠병풍의 수량은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2. 유럽 내 소비 양상

해양 진출로 다양한 이국 물건이 유입되었고 17세기 유럽에서는 시누아즈리(Chinoiserie)로 불리는 중국풍(中國風)이 유행하였다. 시누아즈리는 중국에서 유입된 작은 오브제 또는 중국풍의 문양이나 형태를 사용하여 만들어진 장식물을 의미하는 용어였으며, 점차 동양 물건, 이미지, 이국 취향을 차용하여 만든 작품이나 장식을 모두 지칭하는 용어로 확장되었다.27 이국 문화를 수집하는 열풍이 불면서 수집 물건을 진열하기 위한 공간이 만들어졌고 호기심의 방(Cabinet of curiosities)으로 불렸다. 중국 물건을 수집하고 소비하는 유행은 코로만델 칠병풍의 수요를 촉진시키는 주요 요인이었을 것이다. 시누아즈리가 유럽 사회를 풍미하던 시기는 칠병풍이 다량 유럽으로 수입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유럽에 전해진 칠병풍은 그 자체로 감상되기도 하였으며 유럽인의 취향에 부합하는 형태로 변형되어 소비되었다.
시누아즈리의 영향으로 실내 공간을 이국 요소로 장식하는 것이 유행하였다. 당시 집 안에 아시아 풍 방(房)을 만드는 것이 유행하였는데 칠병풍은 벽장식으로 사용되었다. 칠병풍의 양면을 분리하여 전체를 연폭으로 벽에 걸거나 붙였으며, 낱폭을 작게 조각내어 벽에 붙여 장식하기도 했다. 이러한 공간은 라커룸(lacquer room) 또는 차이니즈 룸(Chinese room)으로 불리며 도자와 같은 이국 물건을 진열하는 사교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라커룸은 17세기 중반에 네덜란드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가장 이른 시기 라커룸은 1654년 지방 총독(總督) 프레드릭 헨드릭(Stadholder Frederik Hendrik of Orange, 1584~1647)이 헤이그 하우스텐보스 궁(Huis ten Bosch)에 만들었으며, 이후 1687년 건축가 네코데무스 테신(Nicodemus Tessin, 1654~1728)이 두 개의 라커룸을 추가로 제작하였다.28
오늘날 하우스텐보스 궁의 라커룸은 전해지지 않지만 이를 실견한 기록이 전해진다. 1677년 12월 13일 이탈리아 볼로냐 여행가 보비노 형제(Guido, Giulio de Bovino)는 하우 스텐보스 궁을 방문하고 “… 매우 웅장하고 호화로우며 완전하게 중국 목제로 덮여 있었고 중국식으로 채색되어 있다”고 기록을 남겼다. 동일한 곳을 1695년 방문한 탐험가 윌리엄 몬터규(William Montague)는 방의 벽장식이 캐비닛이며 인도나 일본에서 온 서랍장을 분리해서 만든 것이라는 것을 기록하였다.29 위의 기록을 통해 라커룸은 칠병풍이나 칠가구를 분리해 벽에 붙이는 형태로 장식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라커룸은 네덜란드에서 시작하여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 베를린, 뮌헨, 드레스덴까지 퍼지게 된다.30
오늘날 전해지는 대표적인 라커룸은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 전시된 것으로 본래 1695년경 네덜란드 북부 레이우아르던(Leeuwarden)에 위치한 지방 총독의 궁전에 설치되었던 것이다(Fig. 16).31 벽 세 면이 칠병풍으로 장식되었는데 마주보는 두 벽은 동일한 <한궁춘효도> 12폭 칠병풍, 나머지 벽면에는 <서호십경도> 7폭 칠병풍을 배치했다.32 1598년 건립된 영국 버튼 아그네스(Burton Agnes) 저택에는 오늘날까지 원형에 가까운 라커룸이 전해진다(Fig. 17). 1715년경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라커룸은 <곽자의축수도> 10폭 칠병풍을 중심으로, 좌우에는 각각 <봉황도> 8폭 칠병풍으로 장식했다. 이외에도 영국 햄프턴 궁전(Hampton Court)과 버글리 하우스(Burghley House)에도 1690년경 라커룸이 제작되었다는 기록을 확인할 수 있다.
칠병풍은 라커룸 외에도 유럽식 가구 제작에 사용되었다. 가구는 병풍보다 유럽인의 생활방식에 더 부합하는 형태이며 칠병풍 한 점을 해체하여 여러 점의 가구를 제작하면 많은 수익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18세기 초부터 파리 상인 마르상-메르시에(Marchand-Mercier)가 주축이 되어 칠병풍으로 캐비닛(Cabinet), 코모드(Commode), 세모꼴 궤(Encoignure)와 같은 가구로 제작했다(Fig. 18). 칠병풍의 양면을 분리하여 필요한 부분을 두께 3mm 이하로 얇게 잘라내고 불룩하게 휘게 만들어 가구 표면에 부착했으며 오르물루(Ormulu)로 불리는 테두리를 둘러 장식성을 강조하였다. 가구에는 중국풍 취향을 드러낼 수 있는 인물과 화조 소재가 선호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궁춘효도> 칠병풍이나 <곽자의축수도> 칠병풍의 일부로 보이는 그네를 타거나 뱃놀이를 하는 여성을 볼 수 있으며 화조영모도의 꽃나무와 새도 볼 수 있다.
유럽인의 취향에 부합하기 위해 현지 가공 과정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18세기 중반 이후부터 칠병풍의 수입이 감소하기 시작한다. 이는 유럽인의 취향과 유행의 변화, 대체품의 등장 같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시누아즈리의 유행은 칠병풍 수입에 영향을 주는 가장 큰 요인이었을 것이다. 시누아즈리가 비교적 짧게 유행했던 영국에서는 18세기 중반부터 칠병풍을 포함한 칠기의 수입이 감소하였으며, 반면 비교적 유행이 오래 지속했던 프랑스에서는 19세기 초까지도 칠병풍을 활용한 장식이 유행하였다. 특히 라커룸 제작 감소에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에 제작된 칠병풍은 높이가 180cm 정도로 작아지고 폭 수도 4~6폭으로 줄어드는 경향을 볼 수 있다.33 이는 칠병풍이 벽장식 용도로 사용되는 경우가 줄어들면서 대형 칠병풍의 수입이 감소하고 칠병풍의 크기도 줄어들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유럽과 중국의 상업 교류가 증가함에 따라 수출품의 종류가 다양해졌고 칠병풍을 대체할 수 있는 상품도 등장했다. 18세기 중엽부터 중국 광동에서는 유럽 수출을 위한 벽지가 제작되었다. 중국 원림, 인물, 꽃과 새 등을 소재로 하며 종이에 목판으로 윤곽선을 찍고 채색하였다(Fig. 19). 벽지는 병풍처럼 여러 폭으로 제작되었다. 벽지를 바로 벽에 붙이기도 했으며 또는 목재 프레임에 붙인 후 벽에 걸기도 했다. 벽지는 원하는 디자인을 주문할 수 있었으며 칠병풍보다 무게가 가볍고 부피가 작아서 운반비용도 비교적 적게 들어 대체품으로 적합하였을 것이다.
18세기에는 ‘재페닝(Japanning)’으로 불리는 유럽식 칠 기법이 발명된다. 아시아의 칠을 모방한 기법은 유럽에서 구할 수 있는 셸락(Shellac)과 같은 천연수지에 식물유를 혼합하여 도료를 만들어 광택을 흉내냈다. 프랑스 기욤 마르탱(Guillaume Martin, 1689~1749)을 중심으로 마르탱 일가가 개발하여 베르니 마르탱(Vernis Martin)라고도 불렸으며 1744년에 독점적인 사용권을 인정받았다. 모방칠 기법이 대중화되고 공장형 공방이 설치되면서 유럽 내에서도 다양한 칠기가 제작되었다. 하프시코드의 흰 바탕칠에 그림을 그리고 광택이 나는 칠로 마무리하였는데 <한궁춘효도> 칠병풍에서 볼 수 있는 중국 여인들의 유희 활동을 그려 넣은 것을 보아 중국 칠기 장식을 모티브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Fig. 20). 이와 같이 유럽 취향과 생활양식에 부합하는 대체품의 등장은 칠병풍의 수요 감소에 큰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Ⅴ. 맺음말

오늘날 유럽과 미국에 다수 소장된 코로만델 칠병풍은 중국에서 제작된 목칠 병풍이다. 명칭에서 드러나듯 칠병풍은 동인도회사의 무역 거점지였던 인도 코로만델 지역을 거쳐 유럽으로 전해졌다. 이 시기는 유럽의 해양 진출이 본격화되던 때로 여러 유럽 국가가 중국의 문호를 두드렸으며 비단, 차, 도자 등 다양한 물건이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중국 강남 지역을 중심으로 제작되고 유통되던 칠병풍은 수출품으로 무역 거점지를 거쳐 유럽에 전해지면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고 새로운 소비자의 취향과 생활양식에 맞는 형태로 변형되었다.
현전하는 코로만델 칠병풍은 17세기 강희연간에 제작된 것이 다수이며 가장 이른 칠병풍은 1637년에 제작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칠병풍의 기법인 관채에 대한 기록은 안휘성 출신 칠장 황성이 1625년 저술한 『휴식록』에서 발견된다. 명말청초 민영 수공업 발전하면서 지역별로 특화 기법이 발달되었는데 관채는 양주와 휘주 일대에서 특화되어 제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칠병풍 배면의 명문은 제작에 대한 여러 정보를 제공한다. 전해지는 명문을 살펴보면 칠병풍은 주로 지방 관리나 부호의 생일, 퇴직을 축하하기 위한 축하 선물로 제작되고 소비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칠병풍은 본래 중국 내에서 진상 목적으로 제작되어 명청대 애호되던 인물, 산수, 화조영모 주제로 장식되었다. 인물 주제는 <곽자의축수도>와 같이 안락한 삶을 기원하거나 <군선경수도>처럼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유럽인 주제는 당시 변화하던 시대적 상황을 반영한 것으로 의미가 있다. 산수는 실경을 소재로 한 것이 특징으로 <서호도> 칠병풍과 <무이구곡도> 칠병풍에서는 산수 판화와 전반적으로 유사한 구성과 묘사를 볼 수 있었다. 화조영모는 장식적인 성격으로 인하여 주로 칠병풍의 배면을 장식하였으며, 봉황이나 사슴과 같이 상징성을 지닌 동물과 함께 꽃나무와 새로 화면을 가득 채워 장식성과 길상성을 모두 갖추었다.
중국에서 제작된 코로만델 칠병풍은 중서교류가 증가하고 시누아즈리가 유행하던 시기에 유럽에 수입되었다. 유럽에 전해진 칠병풍은 본래 형태 그대로 사용되기도 하였지만 소비자의 취향을 반영한 형태로 변용되기도 한다. 수입 초기에는 궁이나 저택의 벽을 장식하는 용도로 사용되기 위해 낱 폭으로 분리되었고, 이후 유럽식 가구의 표면을 장식하는 형태로 사용되었다. 18세기 후반부터는 코로만델 칠병풍을 대체할 수 있는 상품이 증가하면서 수입이 감소하는 경향을 보인다. 또한 19세기에 제작된 칠병풍은 전체 폭 수가 줄어들고 크기도 작아지면서 화면 구성이 간략해지는 변화를 볼 수 있다. 이는 19세기의 코로만델 칠병풍의 수출입 경향과 관련성이 더욱 예상되는 바, 이 문제는 이어지는 연구에서 밝히고자 한다.
본 논문은 그동안 단편적으로 동서교섭의 수출품으로 소개되던 칠병풍의 제작 배경을 살펴보고 주요 주제를 조명하였으며, 유럽으로 전해진 이후 소비 과정에 대해 알아보았다. 중국 내에서 당대 진상용으로 제작된 코로만델 칠병풍은 격변하는 시대적 변화의 흐름 속에서 유럽에 중국의 특색을 담은 수출품으로 전해졌고 중국과는 다른 역사와 문화 배경으로 인해 본래의 형태와는 다르게 소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칠병풍은 단순한 수출용 상품을 넘어서 중국과 유럽의 문화의 일면을 보여주는 매체로 가치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Notes

1) 코로만델 칠병풍은 코로만델 라커(Coromandel lacquer) 또는 반탐 라커(Bantam lacquer)로 불렸다. 영국에서 사용되던 반탐 라커가 먼저 통용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반탐 라커에 대한 기록은 1688년 영국 공예가 John Star와 George Parker의 A Treatise of Japanning and Varnishing에 등장한다. 코로만델 라커라는 명칭은 프랑스에서 사용되던 것으로 연구자 Camille Gronkowsky가 1782년 파리 옥션 카탈로그에서 “vernis de Coromandel”이 처음 등장한다고 연구한 바 있다. 유럽에서 두 명칭이 함께 사용되다가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코로만델 라커로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John Star and George Parker, A Treatise of Japanning and Varnishing (London: Alec Tiranti, 1688); Camille Gronkowsky, “Le goût chinois en France: les paravents en laque de Coromandel”, Renaissance del’art francai 5(1919), p. 491.

2) 코로만델 칠병풍 조사 목록은 유수경, 「17~18세기 중국의 코로만델 칠병풍 연구」(홍익대학교 미술사학과 석사학위논문, 2018), pp. 127-135 참고.

3) W. De Kesel and Greet Dhot, Coromandel Lacquer Screen (Gent: Art Media Resources Ltd, 2002); Nicole Brugier, Les Laques de Coromandel (Paris: La Bibliothèque des Arts, 2015); Robert Paul Dart, “A Twelve-Fold ‘Coromandel’ Lacquer Screen: Chinese, Seventeenth Century”, Bulletin of the Museum of Fine Arts 43(1945), pp. 4-9; Daniëlle O Kisluk-Grosheide, “The (Ab)Use of Export Lacquer in Europe”, East Asian and European Lacquer Techniques (2000), pp. 27-42; Jan Van Campen, “ ‘Reduced to Heap of Monstruous Shiver and Splinters’; Some Notes on Coromandel Lacquer in Europe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The Rijksmuseum Bulletin 57(2009), pp. 136-142.

4) 周功鑫, 『清康熙前期款彩汉宫春晓漆屏风与中国漆工艺之西传』(台北故宫博物院, 1995).

5) 徐大珍, 「清早期款彩 “漢宮春曉” 漆屏風與徽州漆藝研究」, 『文物天地』 9(2017), pp. 82-86; 朱穎, 「金華市博物館館藏清款彩漆屏風藝術價值初探」, 『中國生漆』 2(2017), pp. 5-10; 陳陽, 「中國財稅博物館收藏的清早期款彩祝壽屏風」, 『東方博物』 1(2013); 聶菲, 「百鳥向西飛:中國款彩漆屏風的西傳—從德國穆恩斯特漆藝博物館展品清康熙黑漆款彩 “百鳥朝鳳” 圖十二牒屏風談起」, 『廣州文博』 1(2017).

6) 김홍남, 「중국 <郭子儀祝壽圖> 연구」, 『미술사논단』 33(2011.12), pp. 186-202; 한정희, 「동아시아에 전래된 서양화법의 원류와 양상: 기독교 주제의 작품을 중심으로」, 『미술사연구』 29(2015.12), pp. 233-256.

7) 중국에서 관채는 각회(刻灰), 대조전(大雕填), 심각(深刻) 등으로 불린다. 본문에서는 『휴식록』을 따라 관채를 사용한다. 長北, 『《髹飾録》 與東亞漆藝: 傅統髹飾體系研究』(人民美術出版社, 2014), p. 188.

8) 양명은 절강성(浙江省) 가흥 서당(嘉興 西塘) 출신 칠공(漆工)으로 휴식록의 서문과 주석을 쓰고 각 항목을 설명했다.

9) 款彩 有漆色者, 有油色者, 漆色宜乾填, 油色宜粉襯. 用金銀為絢者, 倩盼之美愈成焉. 又有各色純用者, 又有金銀純雜者. 楊明註 陰刻文圖. 如打本之印板, 而陷眾色, 故名. 然各色純填者, 不可謂之彩, 各以其色命名而可也. 『髹飾録』. 원문 끊어읽기는 長北, 앞의 책, p. 188 참고.

10) 周功鑫은 명 융경제(明 隆慶帝, 재위 1567~1572) 이전에는 관채에 대한 문헌기록 및 실물자료가 발견된 적 없으며 『휴식록』에서 처음 기술되었다고 주장한다. 周功鑫, 앞의 책, p. 24.

11) 戴斌,「蘇州款彩雕刻工藝與地理, 經濟, 文化的相互影響」, 『大眾文藝』 17期(2016), pp. 122-123.

12) 周功鑫, 앞의 책, p. 15.

13) 1681년 作 <곽자의축수도> 12폭 칠병풍의 명문 전문(全文)과 해석은 유수경, 앞의 논문, pp. 138-147 참고.

14) <곽자의축수도>의 연회 장면은 당시 유행하였던 「타금지」나 「만상홀」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연구된 바 있다. 김홍남, 앞의 논문, pp. 172-180 참고.

15) 명대 신선극의 유행에 관한 상세한 내용은 정원지, 「명대 신선극 연구-원대 신선도화극과 비교를 중심으로」,『중국인문과학』 14(1995), p. 665 참고.

16) 기와를 올린 건물과 건물 안에 인물에 대해 Joan Horny는 유럽인 남녀가 마주보고 있으며 종루에서는 종을 울리고 있어 교회에서 결혼식 중인 장면으로 해석하였고, Tristan Mostert는 무릎을 꿇고 선물을 진상하는 무리와 선박 깃발에 쓰인 ‘화란조공(和蘭朝貢)’에 주목하여 중국에 조공을 온 유럽인을 묘사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Joan Horny, Chinese Lacquerware in the National Museum of Denmark (Copenhagen: University Press of Southern Denmark, 2012), p. 204; Tristan Mostert and Jan Van Campen, Silk Thread: China and the Netherlands from 1600 (Amsterdam: Rijksmuseum, 2015), p. 75.

17) 중국 회화에서 봉황 도상과 의미에 관하여는 고연희, 「韓·中 翎毛花草畵의 政治的 性格」(이화여자대학교 미술사학과 박사학위논문, 2012), pp. 140-154; 김현지, 「한국과 중국 鳳凰圖의 도상과 상징 연구」, 『미술사 연구』 26(2012. 12), pp. 16-31 참조.

18) 1552년 포르투갈 왕실함대 사령관 리오넬 데 소사(Leonel de Sousa)가 중국 연안의 해적과 불법 무역을 소탕하고 광동 지방정부의 신임을 얻어 마카오 체류를 허락받았다.

19) 명대 해금정책으로 인해 광동과 복건 등지에서 활동하던 중국 상인이 동남아시아로 이주하거나 또는 중국으로 돌아오지 못하여 해외 화교 공동체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연구된 바 있다. 주경철, 『대항해 시대』(서울대학교출판부, 2008). pp. 17-20 참고.

20) Julia Hutt, “Asia in Europe: Lacquer for the West,” Encounters: the Meeting of Asia and Europe 1500-1800 (London: V&A Publications, 2004), p. 236.

21) Oliver Impey and Christiaan Jörg, Japanese Export Lacquer 1580-1850 (Amsterdam: Hotei Publishing, 2006) p. 43.

22) T.H. Lunsingh Scheurleer, “Stadhouderlijke lakkabinetten,” Opstellen voor H.van de Waal (1970), p. 167.

23) J.A. van der Chijs(ed.), Dagh-Register gehouden int Casteel Batavia vant passerende daer ter plaetse als over geheel Nederlandts-India Anno 1676 (Hague: Nijhoff, 1903), 331에서 동인도회사 기록 인용.

24) J.W. Adams, Decorative Folding Screens in the West from 1600 to the Present Day (London: Thames and Hudson, 1982), pp. 24-25.

25) Archives of the Dutch East India Company에서 원문 참고; Jan Van Campen, “‘Reduced to Heap of Monstruous Shiver and Splinters’; Some Notes on Coromandel Lacquer in Europe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The Rijksmuseum Bulletin, 57(2009), p. 40에서 Amsterdamse Courant 영문 번역본 참고.

26) 周功鑫, 앞의 책, p. 121; British Library, IOR/G/40/23, ff 78-80.

27) 시누아즈리는 중국을 지칭하는 프랑스어 시누아(Chinois)에서 시작되었는데 18세기 말까지 중국이라는 개념은 동아시아를 포괄적으로 의미하였다. 신상철, 「미술 시장과 새로운 취향의 형성 관계-18세기 로코코 미술과 나타난 쉬느와즈리 양식」, 『미술사학』 25(2011), pp. 155-179.

28) Kisluk-Grosheide Daniëlle O, 앞의 논문, p. 27.

29) 보비노 형제의 기록은 Gisbert Brom, “Een Italiaansche reisbeschrijving der Nederlanden (1677-1678),” Bijdragen en Mededeelingen van het Historisch Genootschap 36(1915), p. 119에서 인용. 윌리엄 몬터규의 기록은 Kisluk-Grosheide Daniëlle O, 앞의 논문, p. 27에서 인용.

30) 독일 베를린에서 제작된 라커룸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I세(Frederick William I, 1620~1688)가 후원하여 1685년경 완성되었으며, 뮌헨에서는 막시밀리안 II세 에마누엘(Maximilian II Emanuel of Bavaria, 1662~1726)가 자신의 궁전에 1963년 첫 번째 라커룸을 설치하고 1695년 두 번째 것을 제작되었다. 마지막으로 드레스덴에 위치한 라커룸은 1701년에 완성되었다.

31) 이 라커룸은 윌리엄 프레드릭(William Frederick, 1613~1664)의 배우자인 알베르틴 공주(Princess Albertine Agnes of Orange and Nassau, 1534~1696)의 방으로 알려졌다.

32)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 소장 <서호십경도> 칠병풍은 본래 12폭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연구되었으며, 오늘날 11폭이 전해지나 현재는 7폭만 전시되어 있다.

33) 18세기 초반부터 코로만델 칠병풍이 유럽 내 칠기 판매용 카탈로그에서 점차 줄어드는 것에 대해 연구된 바 있다. Wolvesperges Thibaut, Le Meuble Francais en Laque au XVIIIe Siecle (Bruxelles: Racine, 2000), p. 52.

Fig. 1.
<화훼도> 12폭칠병풍,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Decorating Flower Painting, 1637, 230×594cm, Christie’s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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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곽자의축수도> 12폭칠병풍 배면, Back of the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with Birthday Celebration of Guo Ziyi, 1681, 271.5×580cm, Pelham Gallery,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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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곽자의축수도> 12폭칠병풍,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with Birthday Celebration of Guo Ziyi, 1637, 250×580cm, Private Colle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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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곽자의축수도> 12폭칠병풍,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with Birthday Celebration of Guo Ziyi, 1682, 269×571cm, Christie’s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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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군선경수도> 12폭칠병풍,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of Immortals Gathering, 1625-50, 250.4×587.5cm, Victoria and Albert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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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유럽인수렵도> 12폭칠병풍,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of European Hunting Scene, late 17th century, Rijks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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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유럽인행렬도> 12폭칠병풍,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of Europeans, mid 17th century, 267×583cm, National Museum of Denm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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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황가수렵도> 12폭칠병풍,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of Hunting Scene, 17th century, 258×588cm, French East India Company’s museum in Lori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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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황청직공도(皇淸職貢圖)>, Depiction of the English people in Qing Imperial Illustrations of Tributaries(Huang Qing zhi gong tu), 1751-75, 33.6×1941.3cm, National Palace Museum, Beij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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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서호도> 12폭칠병풍,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of Lake Xihu, 1674, 274×564cm, Vanderven Oriental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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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삼재도회(三才圖會)』 <서호도(西湖圖)>, The Scene of Lake Xihu in Sancaituhu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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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무이구곡도> 12폭칠병풍,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of Nine Bends of WuYi Mountains, 18th century, 280 ×564cm, Artcurial auction,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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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무이구곡도> 12폭칠병풍 부분과 徐表然, 『武夷志略』 <대왕봉(大王峰)> 부분 비교, A part of Twelve-panel Coromandel Lacquer Screen of Nine Bends of WuYi Mountains (in Anhui Museum) and Xu Biaoran’s Wuyi Zhi lue (in Taipei National Central Library) in compa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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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봉황도> 8폭칠병풍, Eight-panel Coromandel Screen of Hundred Birds Paying Tribute to the Phoenix, Qing dynasty, 254×354cm, Sotheby’s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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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봉황도> 8폭칠병풍, Eight-panel Coromandel Screen of Hundred Birds Paying Tribute to the Phoenix, Qing dynasty, 254×354cm, Sotheby’s Lond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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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네덜란드 레이우아르던(Leeeuwarden)에 위치한 총독 궁전 라커룸, Lacquer Room of Stadholder, before 1695, Rijks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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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버튼아그네스(Burton Agnes) 저택라커룸, Lacquer Room of Burton Agnes House, 1715, Eng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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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Bernard II van Risenburgh, <코모 드>, Commode, 1740-45, 86.4 ×160 ×64.1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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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중국산 벽지>, Chinese wallpaper in Nostell Priory, 1770, 2630×920mm, Ink and watercolors on paper, Guangzh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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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0.
<모방칠 하프시코드>, Lacquered Harpsichord Case, 18th century, Schloss Charlottenburg, Berl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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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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