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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1; 2021 > Article
회암사지 출토 석조불상편 고찰

Abstract

여말선초에 가장 중요한 불교사찰 가운데 하나였던 양주 회암사는 지공과 나옹, 무학이 주석하기도 했던 중요한 고려 사찰로 조선 초기에도 왕실 원찰의 기능을 했다. 이색이 기록에 남긴 15척 크기의 불상과 10척의 관음상의 실체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은 전혀 남아있지 않은 실정이다. 현재 회암사지에서 발굴된 소형 석조불두편과 불신편만으로 회암사에 봉안된 불교조각의 실체를 규명하기는 무리이다. 하지만 발굴된 파편과 문헌기록, 양식적 비교를 통해 소형의 석조불상 파편들은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미 이색이 언급한 대형의 불상들이 회암사의 중요 전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효령대군은 불상을 제외한 기와나 부도 건립을 중심으로 불사를 했을 가능성이 크다. 대신 그는 소형의 석불들을 조성하여 중심전각인 보광전이 아닌 다른 전각에 모셨을 것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발굴된 소형 석조불두편의 재료를 응회암이나 사암으로 추정했는데, 실제 암석과 비교해보면 암질, 돌의 입자, 색과 균질성 등에서 차이를 보인다. 회암사지 출토 불두편과 불신편은 화강암으로 조각한 우리나라의 일반 석조 불상과는 달리 드물게 흰빛을 띠고, 입자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고운 암질을 지니고 있다. 그에 따라 고령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향후 이들 석조 조각편들의 재료를 분석하여 보다 정밀한 과학적인 검증을 통해 암석 성분이나 재료를 확정할 필요가 있다. 여말선초 회암사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대형 예배상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는 조선 전기 왕실 자복사로 기능한 회암사에 대한 유생들의 적대감이 컸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양주 회암사에 이어진 왕실의 지원과 종친의 불사, 다른 왕실 불사와의 비교에 대해서 좀 더 후속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Abstract

Hoeamsa Temple in Yangju province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Buddhist temples in the early days of the Joseon dynasty from the late Koryo, which was the place dwelled by Jigong(指空), Naong(懶翁), and Muhak(無學). Even in the early Joseon Dynasty, Hoeamsa Temple served as a royal temple. Yi Saek witnessed the seven Buddha statues of 15-chuck in height and the Bodhisattva Avalokiteshvara image of 10-chuck in Hoeamsa and recorded the marvelous features of the temple in his book, Sujo-gi. However, none of these statues remain in modern days, and only fragments of the small stone Buddha statues and other Buddhist deity sculptures have been excavated at Hoeamsa-ji Temple site. It is difficult to ascertain the substance of the Buddhist sculptures of Hoeamsa temple with only a few fragments of small stone statues. From the historical records and the analysis of styles in those fragments, compared with other sculptures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e can assume that Prince Hyoryeong supported these stone Buddha images. Since the large Buddha statues that Yi mentioned above were already enshrined in the main building of Hoeamsa Temple, Prince Hyoryeong would have been focused on the construction of stupas or making tiles for the renovation of shrines for the Buddha except for the large Buddha statue. Instead, he would have sponsored the artisans to sculpt small stone Buddhas and bring them to buildings or shrines other than Bokwangjeon, the main hall.
Previous research estimated that the materials for those small stone Buddha images were either tuff or sandstone. There are several differences in rock quality, stone particles, color, and homogeneity compared to actual rocks. Unlike the general stone Buddha statues in Korea using granite, the Buddha statues excavated from the Hoeamsa Temple are bright yellowish-white. And the rocks are so fine in quality to make the particles indistinguishable. When we see those pieces of Buddha statues in bare eyes, it looks like kaolin stone. It is necessary to analyze the materials of these stone sculptures and confirm the rock composition or materials through more precise scientific verification. Despite the prestige of the Hoeamsa Temple in the period, the absence of a large Buddha statue is unfortunate. Even if Hoeamsa Temple served as a royal temple, jaboksa,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hostility of the Confucian scholars was enormous. The absence of the Buddha statues and the thorough destruction of the buildings in Hoeamsa proves that Joseon finally became a Confucian country.

Ⅰ. 서 론

고려 말기부터 조선 전기에 걸친 약 200년간 가장 중요한 사찰 가운데 하나였던 양주 회암사에 대해서는 불교사상이나 신앙의 측면에서 다양한 연구가 이뤄졌다. 그러나 그 대부분은 불교사에서의 위상, 나옹화상의 역할, 회암사의 창건과 중창, 폐사에 집중된 연구이며 미술사의 측면에서 그리 활발하게 검토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가장 미술사적 접근을 어렵게 한 것은 불상이나 보살상과 같은 중요한 예배대상이나 그와 관련된 유물들이 발굴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고고학, 미술사, 건축사적 측면에서 회암사 연구는 사찰의 규모와 각 건물지 비정, 부도, 도자 파편, 잡상을 포함한 다양한 조상들, 범자가 새겨진 기와에 중점을 두어 진행해왔다.1 그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은 주제와 연구가 없고, 회암사의 유적과 유물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필수적인 연구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부족하게 여겨지는 것은 불상을 포함한 예배상과 불구나 의식구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드물기 때문이다. 회암사에 봉안한 문정 왕후 발원 불화 역시 상당히 중요한 연구대상이나 400폭이나 조성했던 이 불화들이 회암사에 전해지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문정왕후가 불화를 조성하여 개안공양을 한 후, 전국 사찰에 나눠주었고, 이 불화들이 국외로 유출되거나 흩어진 것은 조선시대부터 오랜 시간에 거쳐 자연스럽게, 혹은 인위적으로 유실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들 불화를 포함하여 회암사의 중요한 불교미술품이 산실되면서 회암사지에서도 관련 불교미술품의 발굴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조선 최대의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회암사에 대형 예배대상으로서 불상이 안치되지 않았을 리는 없으나 현재 발굴을 통해 알려진 불상은 소형의 금동불과 석조 불상 파편 정도이다. 이를 통해 대찰 회암사의 불교조각을 검토하는 것은 회암사의 전체 규모와 조선 전기 회암사의 위상에 비하면 대단히 부분적인 수준에 머무르게 된다는 위험부담이 있다. 하지만 또 다른 발굴이 이뤄지고, 불상이 발견되지 않는 한, 일부 불상편을 통해서라도 회암사 불교조각을 논할 필요가 있다. 불교사원에서 핵심은 역시 불상을 비롯한 예배대상이기 때문이다. 본고는 양주 회암사지 출토 불상편을 살펴보고, 그 재료를 검토한 후, 제작 시기를 비정하고자 한다. 회암사지 출토 석조불상편의 암석은 육안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므로 암석 재료를 정확하게 판단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본고에서는 최대한 비슷한 암질을 지닌 재료를 검토하여 회암사지 출토 석조불상의 원래 암석을 비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는 정도에 그칠 수밖에 없음을 밝혀둔다. 한국 석조불상의 대부분이 화강암제이기 때문에 그와는 다른 암질을 지닌 회암사지 석조불상편의 재료를 판정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석조 불교조각 재료의 확장을 시도한다는 점에 본고의 의의를 찾을 수 있다.

Ⅱ. 회암사지 출토 불상의 성격과 특징

현재 12차에 걸쳐 발굴된 양주 회암사의 규모와 전성기의 사세에 비하면 충분히 기록이 있을 법도 한데 애석하게도 창건과 폐사에 대한 기록은 명확하지 않다. 대략적으로 고려 중기 이전에 창건되어 어느 정도 유명한 사찰로 알려져 있었으리라는 점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에 ‘1174년(명종 4) 금(金)나라의 사신이 회암사를 다녀갔다’는 기록으로 짐작을 하고 있을 뿐이다.2 또 선조 28년(1595) “회암사(檜菴寺) 옛터에 큰 종이 있는데, 또한 불에 탔으나 전체는 건재하며, 그 무게는 이 종보다 갑절이 된다고 합니다.”라고 아뢴 기록으로 보면 임진왜란 이전에 폐사되었으리라고 추정할 수 있다. 넓게 보면 12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 존속했다고 할 수 있고, 그 가운데 아마도 조선 전기가 가장 사세가 확장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3 고려 말기에도 회암사가 매우 중요한 사찰이었음은 분명하다. 무엇보다 태고(太古) 보우(普遇, 1301~1382)가 1313년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하였고, 나옹(懶翁) 혜근(惠勤, 1320~1376) 역시 회암사에서 수도했다는 것을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 고려는 국운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고 어지러운 정세에 있었다. 1372년 나옹이 공민왕의 명을 받아 지공(指空)의 사리탑을 건립하고, 1374년에는 266칸에 이르는 막대한 규모로 중창 불사를 벌였다고 하지만 이와 같은 건물의 규모가 얼마나 불교미술의 가치와 수준을 대변하는지는 미지수이다. 비록 이색(李穡, 1328~1396)이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天寶山檜巖寺 修造記)」를 남겨 크고 웅장한 회암사의 당시 상태를 짐작하게는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유물은 많지 않다.4
양주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불상편은 불두 파편 3기, 불신부(佛身部) 파편이 몇 점일 뿐, 석불 완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완형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소형의 금동불만 3단지 서쪽 배수로에서 발견되었을 뿐인데, 이는 원래 호지(護持)용 불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Fig. 1). 회암사지에서 발견된 석조 불상파편들은 대부분 소형이며, 그 가운데 가장 큰 불두라고 해도 23.2cm에 불과하다. 파편들도 소형만이 남아있어 이색이 말한 높이 15척, 즉 4.55m에 달하는 불상과는 거리가 있다. 즉 회암사지 발굴을 통해 지금까지 확인된 불상들은 그 건물 유구의 규모와 문헌에 나오는 회암사의 사세에 비하면 현격하게 적은 크기이며, 적어도 이색이 목격한 대불은 아니다. 그는 4m가 넘는 불상이 7구나 있다고 했지만 불행히도 그의 기록을 증명해주는 불상이나 보살상편은 발굴되지 않았다. 물론 이색이 언급한 불상들이 언제 조성된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회암사가 중창되었을 때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며 늦어도 14세기에 존재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다만 발굴된 불상편이 너무 적어 이색이 언급한 불상이 아님을 확인시켜줄 뿐이다. 발굴된 불상편들의 발견 위치 역시 각기 다른 곳임에도 일부 두부와 불신이 합체되는 예가 있어서 의도적으로 파손되어 각기 다른 곳에 유기된 것으로 보고 있다.5 특히 가장 큰 편에 속하는 불상의 두부는 건물 유구 8단지에서, 상체는 6단지, 하체는 서승당지 북쪽 석축 아래에서 발견되었다. 이미 지적된 대로 불전과 불상들이 파괴될 때, 의도적으로 여러 곳에 흐트러뜨린 것으로 보인다(Fig. 2).
또 다른 불두 (높이 7.6cm)는 8단지 나한전지에서 발견되었고, 다른 불두(높이 9.35cm)는 7, 8단지 나한전지 남쪽 월대에서 발견됐다. 이 두 구의 크기도 비슷할 뿐만 아니라 얼굴 생김새도 유사하여 같은 시기에 같은 곳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단지 한 구는 나발이 명확하고, 다른 한 구는 민머리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Fig. 3). 비록 잔편에 불과하지만 발견된 불신들은 손 부분이 명확한 편인데 두 손을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포개고 있는 유형과 손 위에 약합을 올린 유형이다. 이들 불신 파편들이 대개 10cm 내외인 점을 보면 현재 건물 유구로 볼 때, 단독 불전에 모신 예배상의 역할을 하지는 못했을 것으로 보이며, 작은 불상들을 한 곳에 모아서 안치했을 가능성도 크다. 불신의 체구와 두 다리, 손이 모두 투박하고, 각선 역시 섬세한 편은 아니다. 발견된 불두와 불신은 합체가 되지 않아서 이들이 한 몸이었을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 남아있는 불신 중에 가장 큰 신체의 높이가 17cm인데, 가장 작은 불두라고 해도 7.6cm이고, 육계까지 남아있었다면 9cm는 족히 되었을 것인 바, 이를 두부로 삼아 불신과 불두를 갖추면 비례가 맞지 않는다. 물론 수종사 발견 금동불처럼 소형 불상처럼 머리가 신체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조각들도 있어서 한 세트였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 불신과 불두의 크기가 조금씩 차이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소조불상들처럼 일정한 규격의 불상들을 대규모로 만들었을 가능성은 적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
불신 파편이 발견된 장소 역시 여러 곳에 걸쳐 흩어져 발굴되었다. 명상을 하는 선정인의 수인이 명확한 불신편은 7, 8단지 나한전지 북서쪽 기단 밖에서, 굵게 표현된 대의 앞섶이 사선으로 가로지른 불신편은 7단지의 기타 건물지에서 발견되었다(Fig. 4). 선정인의 두 손과 통견의 대의, 그리고 그 안에 승기지(僧祇支)까지 표현된 불신편은 7, 8단지 서기료지 남쪽 기단부와 6단지 서승당지 내부에서 각각 발견되었는데 두 부분이 마침 합체가 된 것으로 미루어 불상 파괴 후에 훼손된 신체 파편을 의도적으로 다른 곳에 유기했음을 확신하게 한다. 약합을 손 위에 올려 놓은 부분은 6단지 동쪽 석축단에서 발견되었으므로 불신편들은 6단지에서 8단지에 걸쳐 흩어져 있었고 크기로 보면 어느 정도 일관성이 있다. 또 6단지 보광전지 남서쪽 기단 밖 박석 상부에서 수습된 석조대좌의 폭이 24cm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 정도 규모의 대좌가 위의 불신 대좌로 적합했을 것으로 보인다(Fig. 5). 실제 대좌가 발견된 위치도 거리는 있지만 불신편이 발견된 곳들과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도 이같은 추측을 할 수 있다. 결가부좌한 무릎 한 쪽이 그래도 잘 남아있는 불신의 폭이 13.1cm인데 왼쪽 무릎이 파손되지 않았다면 대략 15cm 정도는 됐을 것이기 때문에 불신을 대좌 위에 안치했을 때, 양쪽으로 약 4cm 정도의 공간이 남으면 불신과 대좌의 비례가 적당하게 보였을 것이다.6
이들 파손된 신체 파편들이 크기와 형태의 유사성으로 인해 한 곳에 안치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지만 현재로서는 발견된 파편의 수량 자체가 너무 적어서 쉽게 단정하기 어렵다. 작은 크기의 조각상들을 각기 따로 봉안하기는 쉽지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같은 공간에 모셔두었다고 하기에도 어렵고, 석상이라는 재료의 특징상 개인의 호지불이었다고 보기도 어려운 점이 있다. 무엇보다도 이들 불신편들이 현재 상태로는 불신인지 아닌지도 확인하기 어려운 것 역시 문제이다. 경기도박물관이나 회암사지박물관에서 간행한 도록에는 모두 석조불좌상, 혹은 석조불상편이라고 쓰고 이들이 벽면을 장식했을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현재 불신은 어깨와 다리 일부만 남아있거나 신체 일부만 남아있는 상황에서 이들이 벽면을 장식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벽면에 부착했다고 볼 정도로 납작한 조형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천불전 같은 공간에 모셨다고 하기에는 너무나 발견된 조각편이 적다. 현재 남아있는 부분으로 알 수 있는 대의의 착의법과 주름 처리법이나 수인으로 볼 때, 이 신체편들이 불상이었다고 단언하기도 어렵다. 가령 창령사 나한상처럼 조선시대 나한전 등에 모셔진 소형의 나한상도 대의는 비슷하게 처리된 경우들이 있고, 선정인의 수인이나 약합을 들고 있는 경우가 있다(Fig. 6). 그러므로 불상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두부와 안면이 있어야 가장 명확하게 알 수 있겠다. 회암사지에서 발굴된 두부는 육계와 나발이 분명하게 표현되었기 때문에 불상의 두부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불신의 경우는 현재 남아있는 상태만으로는 불상의 신체라고 말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형태는 불상인지 아닌지 확언하기 어렵지만 재료의 측면에서는 육안으로 보아 거의 대부분 비슷하게 보인다. 회암사지에서 발굴된 불상들의 석재를 확인하기 위해서라면 굳이 불두에 국한할 필요는 없겠으나 불두 파편이 좀 더 석재의 질이 좋아 보이는 것은 사실이다. 지금까지 회암사지에서 발굴된 불두와 불신편들은 사암으로 간주되었다.7 균일한 석질로 인해 응회암이라는 설도 있었다. 본 발표에서 석재에 주목한 이유는 적어도 현재까지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조불상 중에 이처럼 희고 고운 입자로 이뤄진 석질의 조각은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나마 이 회암사지 출토 불두와 비교할 만한 가장 가까운 예는 발해 팔련성에서 발견된 이불병좌상(二佛並坐像)이다(Fig. 7).8 필자가 2003년 조사한 바로는 발해의 상경에서 수습된 이불병좌상도 희고 고운 석질에 작은 돌 입자가 섞이지도 않고, 석재 자체에 점이나 선으로 이뤄진 무늬도 전혀 없었다. 당시에도 상경성 발견 이불병좌상이 화산재 퇴적층에서 나오는 응회암으로 만들어졌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석재는 비교적 무른 편이어서 화강암제 불상과는 상당히 큰 차이가 있다. 발해의 이불병좌상은 늦어도 8세기에는 조각된 것이기 때문에 회암사지 불두편들과는 시대적으로 차이가 있고, 거리상으로도 상당히 떨어져 있는 곳에서 발견되었다. 양자 사이에는 재료 이외에 어떠한 유사성도 찾을 수 없다. 하지만 적어도 석질과 석재의 성격, 색깔, 굳기로 미뤄 보면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불두편들은 발해 이불병좌상과 매우 유사한 재료를 써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화산재가 쌓여서 굳어진 화산암인 응회암(凝灰岩)은 용결응회암이라고도 부르는데 석재에 구멍이 많은 다공질 암석으로 분류된다(Fig. 8).9 구멍이 많아서 암석 입자가 치밀하지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특징인데, 현재 회암사지 출토 불두는 상당히 입자가 곱고 치밀해서 구멍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불두편의 재료가 응회암일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암석의 형성 과정은 다르지만 이와 비슷하게 보이는 것으로 퇴적암을 들 수 있고, 입자가 고운 퇴적암으로는 셰일, 이암, 사암이 있다.10 경기도박물관과 회암사지박물관은 회암사지 출토 불두편의 재료를 보통 사암으로 쓰고 있지만 일부 안산암설도 있었다. 안산암이나 유문암은 돌에 다른 입자가 섞여 무늬가 있으므로 회암사지 불두와는 차이가 있다. 안산암 미술을 대표하는 것은 인도네시아의 보로부두르이다. 화산재가 식어서 만들어진 화산암, 정확히 화성암의 일종이며, 이러한 종류의 화성암은 화산 폭발 이후 생기는 것이고, 대개 강이나 냇물, 호수를 만나 급격하게 식으면서 단단한 돌로 굳어진다. 화산이 폭발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화산재가 발생하므로 만일 화성암이라면 그 지대가 넓고 암석의 양도 많은 것이 일반적이다.11
안산암 역시 다 똑같지는 않으나 입자가 고우면서도 화산재에 공기가 섞여 작은 기포 같은 구멍이 있다. 하지만 현재 회암사지 출토 불두와 불신 파편을 보면 석질이 매우 고와서 눈에 잘 띄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작은 구멍이 있는 정도이다. 암석 입자가 곱고 치밀하여 돌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이다. 불순물이나 성질이 다른 입자가 전혀 섞여 있지 않고, 색도 일정하여 변화가 없다. 회암사지에서 발견된 석조불두는 모두 고르고 치밀한 암질에 굵기가 다른 입자가 섞이거나 색이 다른 부분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우리나라의 광물 가운데 응회암을 찾아보면 응회암에도 몇 종류가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암석 75% 이상이 유리인 유리질응회암과 마그마 결정이 굳어진 결정응회암, 기존 암석편이 굳어진 석질응회암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응회암은 화산재가 퇴적되어 굳어서 생성된 것으로서 광물학에서 화산쇄설암(pyroclastic rock)으로 분류한다. 사실상 이 화산쇄설암의 광물 구성은 화산이 분출할 당시 주위에 있었던 암석의 종류와 그때 바로 분출된 마그마의 암질에 따라 매우 다양하다고 한다. 따라서 응회암의 퇴적과 암석화 과정은 전혀 균질하게, 일관성 있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므로 암석 내 광물의 구성을 일반화하기는 어렵다.
다양한 구성을 지닌 응회암 가운데 회암사지 불두 파편의 암석 재료로 쓰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은 모래 성분이 많이 섞인 응회암질 사암이다. 사암이라는 점으로 보면 회암사지 박물관의 추정과 같고, 응회암의 한 종류이기도 해서 일반적으로 논의되는 조각 재료일 가능성도 있다. 회암사가 위치한 양주에서는 좀 먼 거리에 있지만 경기도 안산시 대부동에는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대부광산이라는 유명한 곳이 있고, 이곳은 원래 화산재에서 형성된 응회암질 사암과 이암 산지였다. 대부광산의 퇴적암층은 약 7,000만 년 전의 중생대 후백악기에 형성된 응회암질 사암과 이암으로 구성되어 있다.12 1999년에는 대부광산에서 초식 공룡인 케리니키리움 발자국이 발견되었고, 이후 총 23개의 공룡발자국 및 식물화석 클라도플레비스가 발견된 바 있다. 대부광산의 퇴적층을 구성하는 많은 암석층의 색과 두께가 변화된 상태 등을 고려하여 원래 이 지역은 호수였던 것으로 추정되었다.13 절개된 퇴적암층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두꺼운 편이며 비교적 색과 암질이 곱고, 두터운 퇴적암층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이쪽에서 산출된 응회암질 사암이 회암사지 불상 조각에 사용되었을 수도 있다.
한탄강 지질공원 지장산도 응회암 산지로 유명한데 이쪽의 응회암은 용결응회암이라 점점이 다른 색깔의 돌 입자가 섞여 무늬를 이루어 회암사지 출토 불두편의 재료로 쓰이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14 퇴적암은 삼국시대나 통일신라 석조불·보살상의 재료로 널리 쓰인 화강암에 비하면 조각하기에는 매우 편한 암석 종류이다. 응회암질 사암도 사암이라고는 하지만 전체적으로 균일한 암질과 색을 보이는 것은 아니다. 비교적 잘 알려진 경주 읍성에서 발견된 사암제 여래입상과 비교를 하면 과연 동일한 광물을 써서 만들었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Fig. 9). 회암사지 출토 불두편이 좀 더 입자가 곱고, 그 입자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다른 모든 광물처럼 사암의 산지에 따라 암질이나 색이 다를 수 있다. 경북대 박물관 소장의 사암제 비로자나불좌상 역시 경주 읍성 사암제여래입상과 유사한 이국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사암 조각이다. 암석의 색은 좀 더 어두운 회색이 감돌며, 입자는 조금 더 거칠다. 회암사지 불두의 돌이 훨씬 희고, 입자가 치밀하다.
회암사지 석조불두와 불신편의 암석 재료로 또 다른 가능성이 있는 것은 고령석이다. 고령석은 도자기의 재료인 고령토의 주성분으로 알려졌으며, 현대에는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광물이다. 장석이 분해되어 생성되는 고령토, 혹은 고령석은 수분을 포함한 알루미늄 규산염 계열의 광물로 점토의 한 종류로 분류되며, 색은 불순물이 없을 때 흰색을 띠며, 회백색, 담황색도 있다.15 해남, 밀양, 고령만이 아니라 여주, 충북 영동에도 광상이 있다.16 고령석은 『동의보감(東醫寶鑑)』에 나오는 약재 중의 하나로 고릉석(高陵石)이라고도 썼다.17 일단 육안으로 보면 곱고 균일한 암질, 아이보리 빛이 도는 석재의 색, 선이나 다른 광물 입자가 섞이지 않아 무늬가 형성되지 않은 점 등에서 회암사지 불두편 및 불신편과 상당히 비슷해 보인다. 특히 북한의 생기령 광산에서 캐낸 고령석을 보면 더욱 유사성이 보인다.18 함경북도 경성군 생기령에 위치한 생기령 광산의 고령토는 불순물이 적고 내화도가 강한 특징이 있다(Fig. 10). 특히 태조 이성계는 원래 전주 호족 집안이지만 함경북도 영흥이 고향이고 고려말에는 거의 함경도가 이성계의 통치 아래 있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오늘날의 금야로 명칭이 변경된 영흥과 경성은 그다지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양주에서는 역시 거리가 좀 떨어져 있지만 안양 삼성산에도 장석광산이 있었다. 안양시 석수동에는 ‘백토광(白土鑛)’이라 불리는 광산이 있었고, 현재는 폐광 상태이다. 여주, 이천 등의 도자기 가마에 장석을 공급했다고 하며, 일제기인 1920년대에 근대식 광산이 개발되기 전에도 장석을 생산했을 것으로 추측된다.19 이 광산이 위치한 석수동 인근에는 장석, 혹은 광산과 관련 있는 유적들이 알려져 있다. 가령 장석광사지(長石鑛寺址)라는 절터 역시 현지의 주초석 등의 조사를 통해 늦어도 고려말에는 존재했던 사찰로 여겨진다.20 지금은 폐광이 된 상태지만 오래전부터 중요한 장석 생산지였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암석의 경도, 색, 입자의 굵기와 고르기, 암석입자들의 혼유 여부 등으로 종합적으로 살펴 암질이 유사해 보인다고 하더라도 회암사지 출토 불두와 불상편 재료가 어떤 암석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도 이를 육안으로 판단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불두와 불신편에 쓰인 암석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위해서는 비파괴검사 등을 이용하여 좀 더 면밀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 현재로서는 원 재료가 된 암석의 종류에 대해 응회암과 사암 외의 가능성도 열어두자는 정도의 논의만 할 수 있을 뿐이다.

Ⅲ. 불상 조성 시기 검토

억불숭유를 나라의 기치로 삼은 조선 건국 이후에도 회암사의 위상은 그다지 약화되지 않았다. 적어도 조선 초기에는 고려말의 위상을 이어나갔고, 억불정책을 편 왕들조차 회암사에 행차하거나 후원을 해 왕실 원찰로 기능한 것으로 보인다. 태조 이성계(李成桂)는 회암사에서 개최된 불사에 7번 다녀갔고, 1393년에는 무학(無學) 자초(自招, 1327~1405)를 회암사에 머물게 했으며, 퇴위한 뒤인 1402년에는 무학대사에게 계를 받고 회암사에서 수도를 했다. 심지어 1405년에는 그의 탑비(塔碑)를 세우기도 했다. 좀 더 강한 억불책을 썼던 세종은 1424년 선교양종(禪敎兩宗)으로 통폐합을 단행한다. 선종사찰에 포함된 회암사에 500결의 논과 250명의 승려가 허가되어 당시로서는 최대의 사찰이 되었으니 유생들의 이목과 반발이 회암사에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명종 21년(1566)의 『명종실록(明宗實錄)』 기사는 괜한 것이 아니었다. 세종부터 명종 때까지 억불책이 강화되는 중에도 회암사에 대한 지원과 관련 불사는 종종 진행되었다. 우선 그 자신도 불자였던 세조의 비 정희왕후(1418~1483)가 성종 3년(1472)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건했고, 중종 비 문정왕후(1501-1565) 역시 불교중흥책을 펴면서 선교양종과체제와 승과(僧科), 도첩제(度牒制)를 부활시켰는데 이때 회암사도 전국 제일 수선도량(修禪道場)으로 번창했다. 문정왕후의 과도한 불교 부흥책으로 결국 위에서 거론한 명종 21년 사건을 야기했고 그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에 회암사는 폐사가 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불두 및 불신의 조성시기와 관련하여 주목하는 것은 효령대군(孝寧大君, 1396~1486)의 회암사 불사이다. 1997년부터 지속됐던 회암사지 발굴 결과, 회암사가 궁궐 건축의 구조를 따르고 있음은 잘 알려졌으며, 8단의 단축과 남쪽 회랑(回廊) 설치 등이 고려의 궁궐 배치와 유사한 성격을 보이고 있음이 지적되었다.21 가람의 특성상 회암사는 남북을 축으로 하는 일반적인 가람 배치법을 따르면서도 건물 배치에 위계를 설정한 특징을 보이는데 이는 아마도 고려 말기 대대적인 중창 때 이뤄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사지 발굴에서 청자가 드물게 발견되고 분청사기, 백자 파편이 나오는 점, 많은 기와편이 조선시대 것으로 비정되는 점 등을 고려하면 실제 회암사의 주요 활용은 조선 전기에 집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나라의 기강을 세우려고 했던 조선 전기 왕실에서 한정적으로 사용된 용무늬 기와와 봉황 무늬 기와, 청기와 등이 발견된 점은 회암사가 당시 왕실과의 밀접한 관련 속에서 최고 수준의 미술로 꾸며졌음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나옹의 중창과 고려말 회암사의 위상, 현지에 남아있는 나옹 및 지공선사 등의 부도 등을 보면 고려의 유물과 유적이 중심이어야 할 것 같지만 실제 발굴된 유물로 보면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 경우가 많다.22 특히 기와의 경우는 압도적으로 조선 전기로 추정되는 와편이 많아서 주목된다.23
회암사지 건물지에서 발견된 수키와와 암키와 중에는 특별히 명문이 양각으로 새겨진 것들이 많이 있다. “천순경진(天順庚辰, 1460)”명이나 “성화육년(成化六年, 1470)”명처럼 제작연대를 알려주는 기와도 있고 범자가 새겨진 기와도 많지만 무엇보다 주목을 끄는 기와는 “효령대군(孝寧大君)”이 쓰인 기와들이다(Fig. 11). 기와 한가운데 범자를 크게 새기고, 그 주위에 효령대군을 쓴 이 기와들은 대체로 1434, 1436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24 불심이 깊은 효령대군이 억불숭유의 기조 아래서도 다양한 불사를 한 것은 잘 알려졌다.25 1408년 금 2만냥을 들여 유점사를 3천칸으로 중건한 일을 시작으로 많은 불사와 법회를 주도했다.26 이미 세종대인 1432년에 한강에서 7일간 수륙재(水陸齋)를 올렸고, 금강산 표훈사(表訓寺)에서도 수륙재를 올렸다. 세조 때인 1462년에는 회암사에서 사리 분신의 이적을 목격한 것을 기념하여 흥천사 종을 주성했다(Fig. 12).27 임영대군(臨瀛大君, 1420-1469), 영응대군(永膺大君, 1434-1467)과 함께 도제조(都提調)로서 종의 주조를 총괄했던 효령대군은 그 자신이 사리 신이의 목격자이기도 했다.28 실록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는 회암사를 원찰(願刹)로 삼아 왕래하며 재를 베풀었는데 세종조부터 세조대까지 한결같았다고 보아야 한다. 효령대군이 회암사를 중창할 때 성균관과 집현전에서 중수를 금하라는 상소를 올리는 등 반발이 심했지만 세종은 대비의 원불(願佛)이 걸려 있는 곳이라며 뜻을 굽히려 하지 않았다.29 계속되는 반대에 더 이상의 지원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실록의 이 기록은 세종 16년(1434)의 기사이나 양주 회암사지 발굴 기와의 제작연도를 보면 이후에도 효령대군을 통한 왕실의 지원은 계속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세종이 대비의 원불이 걸려있는 곳이라고 한 말을 보면 이때 이미 불화나 수불(繡佛)이 걸려있는 상태였음을 시사한다. 이색의 『목은집(牧隱集)』에 실린 「천보사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 이하 수조기)」에는 당시 회암사에 높이 15척(4.5m 추정)의 불상 7구와 10척(3m)의 관음상이 봉안되었다고 썼다.30 나옹이 회암사를 중창한 것이 1374년부터 2년간이고, 공양왕이 다시 크게 불사를 일으킨 것이 1391년이다. 그리고 『목은집』이 간행된 연대는 1404년인데 「수조기」 맨 앞부분에 회암사의 주지가 ‘보제께서 입적하시고 부도와 비석을 세웠으니…’라고 글을 청하는 일종의 연기가 나온다. 보제, 즉 나옹이 입적한 것이 1376년이고, 다음해 그의 부도와 비를 세웠다고 하므로 이색이 실제로 『수조기』를 쓰기 시작한 시기는 1377년 이후의 일이다. 적어도 이 시기에 회암사에는 15척 장신의 불상과 10척의 관음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은 늦어도 나옹이 중창할 당시에는 안치되어 있었거나 나옹 자신이 불상 조성을 주도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12차례에 걸친 발굴에서 이 정도 규모를 연상하게 하는 대형 불상이나 보살상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워낙 대형이고 공교하게 장엄되었을 것이므로 명종 21년(1566)에서 선조 28년(1595) 사이 폐사될 때 집중적으로 공격을 받아서 형체조차 찾지 못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색의 위상으로 보면 그가 본 회암사의 불상이 거상인 것은 분명하고, 적어도 조선 전기까지 회암사의 중심 예배대상 역할을 했을 것이다.
기록과 발견 유물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효령대군의 불사가 전각을 중수하고, 기와를 새로 올리는 데만 그치지는 않았다. 효령대군은 여래가 현상했다는 1461년에 원각법회 때 사리신이(舍利神異)를 목도했다. 1464년에는 회암사에 석종(石鐘)을 세워 석가 사리를 안치하고, 다시 법회를 열어 『원각경(圓覺經)』을 강의했다.31 그가 불상이 없이 법회를 열었을 리는 없고, 아마도 15척에 달했다는 이미 봉안된 불상들이 이때 중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사실상 회암사를 원찰로 삼아 상시 왕래하며 법회를 베풀었던 효령대군이 세조의 암묵적인 지지와 후원 아래 석종까지 세웠는데 가장 중요한 불상과 불화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은 의외이다. 이는 무엇보다도 이미 고려 이래 대찰이었던 회암사에 『수조기』 기록대로 거대한 불상이 안치되어 있었고, 그 상태도 매우 좋았기 때문에 불상 개금이나 중수와 관련되는 기록이 따로 나오지 않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억불숭유를 내세워 비판적 태도를 유지했던 조선 초기에 새로 불상을 안치하는 불사를 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32 원래 법천사(法泉寺)에 봉안한 흑석사 목조아미타불좌상(1458년)만 보아도 효령대군과 왕실 종친들의 불상 조성 의지를 충분히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Fig. 13).33 그런데 유생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많은 불사를 했던 효령대군이 자신이 원찰로 삼고 출가생활까지 했던 회암사에 불상을 모시지 못했던 것은 이색이 기록에 남겼을 정도로 유명한 기존 대불이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효령대군은 대형 예배상 대신 소형의 석불을 안치하는 정도로 다소 소극적인 불사를 했으리라고 생각한다. 현재 발견된 기와 대다수가 조선 전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을 보면 그가 회암사에 막대한 기와를 만들어 새로 지붕을 중수하고, 잡상을 만들어 얹게 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34 그와 동시에 대대적인 건물 중창, 석종 건립, 소형 석불 조성도 함께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현재 남아있는 불신 파편이 너무 적어서 양식적 분석을 하기 어려운 점이 아쉽지만 적어도 우리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고려 말기 삼존불(1333)이나 서산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1346년)과는 그다지 양식적 유사성을 찾기 어렵다. 우선 회암사지 발굴 석조불두편의 얼굴은 장방형에 가깝고 얼굴에 양감이 별로 없는 밋밋한 편인데 비해 국립중앙박물관의 금동세지보살상은 얼굴이 둥글고 이마가 좁으며 통통한 뺨의 양감이 입술과 턱 표현에서 강조되고 있다(Fig. 14). 회암사지 불두의 눈썹이 위로 올라가 두 눈썹이 날아가는 기러기처럼 보이는 것과 달리 금동세지보살은 눈썹 끝부분이 아래로 처졌으며 콧날도 날렵하고 콧방울이 작다. 시기적으로는 많이 차이가 나지 않으나 고려 말기 조각이 라마교 불상 조각의 잔영을 보이는 것과는 다르게 처리되었다.35 두부와 얼굴 조각만으로 단언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현재 상태로도 충분히 양식적인 차이는 명확하게 보인다. 양식적인 차이점은 역시 고려 말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주 심향사 건칠아미타불상과 비교해도 드러난다(Fig. 15). 불상 조각의 재료에서 오는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회암사지 출토 석조불두에 비하여 얼굴이 좀 더 둥근 편이고, 눈과 눈썹이 곡선적이며 인상이 오밀조밀한 것이 고려 말기 불상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회암사지 불두의 얼굴 표현은 오히려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여래좌상(1466년)이나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불좌상(1694년 개금)에 가까운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36 그보다 앞서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서울 은평구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는 유사성이 있다(Fig. 16). 얼굴이 장방형이며, 눈과 눈썹 사이 눈두덩 간격이 일정하고, 코가 약간 뭉툭하게 표현된 점은 두 불상의 얼굴이 닮았음을 보여준다.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이 14세기말의 불상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14세기말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회암사지 출토 석조불두가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의 계보를 잇는 서울, 경기 인근의 조선 전기 불상으로 보는 데는 크게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37 이보다 늦은 1466년에 조성된 경주 왕룡사원 목조아미타불좌상은 흑석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과 시기적으로 가까우나 양식상으로는 약간 차이를 보인다. 이들은 둘 다 목조라는 점에서 회암사지 출토 불두편과 재료에서 차이가 있다. 하지만 얼굴이 밋밋하고 뺨에 양감이 별로 없으며 눈과 눈썹이 거의 평행하게 올라갔다는 점, 고려 조각과 달리 입과 턱 주위가 입체적으로 묘사되지 않았다는 특징에서 공통점을 보여준다. 남아있는 부분이 적고 훼손된 상태지만 회암사지 불두의 얼굴 묘사는 고려보다 조선 전기, 즉 15세기 불상과 좀 더 친연성이 있다. 이 시기는 효령대군이 왕실의 어른으로서 세조의 암묵적인 지지와 후원을 받아 적극적으로 불사를 벌이던 시기이다. 따라서 비록 효령대군이 대형 불상을 조성하려는 의지만 있었으면 불가능하지 않았을 텐데 그와 관련한 사료가 전혀 없으므로 애초에 새로운 불상을 만들어 모실 생각은 그에게 없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그가 회암사에 안치할 주존불을 발원하고 조성하지는 못했더라도 효령대군이나 그와 뜻을 같이 했던 영응대군, 정희왕후 등 왕실 여성, 부마 정현조 등 종친이 주도하고 참여하여 소형의 석조불상들을 여러 점 제작하여 보광전 외의 전각에 모셨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Ⅳ. 맺음말

여말선초에 가장 중요한 불교사찰 가운데 하나였던 양주 회암사는 현재 밝혀진 유구만 보더라도 광대한 사역에 위엄 있는 건축물로 가득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지공과 나옹, 무학이 주석하기도 했던 중요한 고려 사찰이고, 조선 초기에도 왕실 원찰로 다양한 법회를 개최하며 억불숭유의 모진 바람을 비껴가기도 했다. 특히 태조가 퇴위 후에 머물렀던 인연이 있었으므로 회암사를 겨냥한 유신들의 억불 상소에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었다. 회암사의 사세와 위상은 부침을 거듭했지만 사원에 대한 왕실의 지원은 회암사가 조선 전기에도 고려말의 지위를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색이 기록에 남긴 15척 크기의 불상과 10척의 관음상의 실체를 짐작하게 하는 유물은 전혀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회암사에 대한 유생들의 반발로 명종-선조 대에 폐사될 때 그 파괴의 강도가 매우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발굴된 소형 석조불두편과 불신편만으로 회암사에 봉안된 불교조각의 실체를 규명하기는 무리이고, 이색의 기록과는 더욱 멀기만 하다. 발굴된 파편과 문헌기록을 통해 소형의 석조불상들은 효령대군의 후원으로 조성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미 대형의 불상들이 중요 전각에 봉안되어 있었기 때문에 효령대군은 불상을 제외한 기와나 부도 건립을 중심으로 불사를 했을 가능성이 크고, 대신 소형의 석불들을 조성하여 보광전이 아닌 다른 전각에 모셨다고 생각한다. 기존에는 이들 소형 석조불두편의 재료를 응회암이나 사암으로 추정했는데, 실제 암석과 비교해보면 암질, 돌의 입자, 색과 균질성 등에서 차이를 보여 고령석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보았다. 회암사지 출토 불두편과 불신편은 화강암으로 조각한 우리나라의 일반 석조 불상과는 달리 드물게 흰빛을 띠고, 입자가 구별되지 않을 정도의 고운 암질을 지니고 있다. 그에 따라 향후 이들 석조 조각편들의 재료 분석을 해볼 필요가 있으며, 과학적인 검증이 이뤄져 암석 성분이나 재료가 확정되기 전까지는 좀 더 다양하게 그 가능성을 제시하는 정도에 그치고자 한다. 여말선초 회암사의 위상에도 불구하고 대형 예배상의 존재가 확인되지 않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지만 이는 회암사에 대한 유생들의 적대감이 컸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양주 회암사에 이어진 왕실의 지원과 종친의 불사, 다른 왕실 불사와의 비교에 대해서 좀 더 후속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한다.

Notes

1) 잡상에 관한 연구는 조원창, 「고려시기 잡상연구」, 『지방사와 지방문화』 16/1(지방사학회, 2013), pp. 7-40; 윤나영, 「고려와 조선의 마루장식기와 연구」(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1) 참조. 범자문 기와에 대해서는 엄기표, 「양주 회암사지 출토 범자 진언명(眞言銘) 기와의 특징과 의의」, 『문화재』 50/2(국립문화재연구소, 2017), pp. 4-25.

2) 이철웅, 「고려말 회암사의 중건과 그 배경」, 『사학지』 30(사학회, 1997), pp. 167-191.

3) 명종 21년(1566) ‘유생들이 회암사를 불태우려 한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1566-1595 사이에 폐사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옛 회암사라고 쓴 1595년 기록으로 보면 이미 훼손된 후 시간이 좀 흐른 것으로 볼 수 있고, 늦어도 선조 초년기에 폐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4) 이색, 『목은집』에 실린 「천보사회암사수조기」는 『회암사지박물관 개관 기념 묻혀있던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왕실사찰 檜巖寺, 그 위용을 드러내다』(회암사지박물관, 2012), pp. 96-98 참조. 이색은 “회암사는 승려 3,000여명이 머무르는 대사찰로 건물은 모두 262칸이며, (중략) 높이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이 봉안되었으며, 아름답고 고와서 동국 제일이다.”라고 썼지만 이를 입증할 불상과 보살상은 파편도 발견되지 않았다.

5) 『회암사지박물관』, 앞의 책, p. 124.

6) 대좌의 상면 중앙에서 뒤편으로 19cm 간격으로 구멍이 두 개 뚫려있고, 반대쪽 면에는 13cm 간격으로 두 개의 구멍이 있다고 한다. 수좌료지에서도 훼손이 심하지만 대좌로 보이는 석재가 나왔다. 『묻혀있던 조선 최대의 왕실사찰 檜巖寺』(경기도박물관, 2003), p. 81. 13cm 간격의 구멍이 있는 쪽이 윗면이라면 위에서 언급한 불신편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7) 경기도박물관과 회암사지박물관에서 발간한 도록에 모두 갈색, 혹은 백색 사암으로 표기했다. 2001년에 발간된 경기도박물관·기전문화재연구원 보고서에서는 석재의 종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京畿道 楊州郡·경기도박물관·畿甸文化財硏究員, 『檜巖寺I』(2001), p. 235.

8) 서울대학교 박물관 편, 『해동성국 발해』(서울대학교, 2003) 전시도록 참조. 당시 필자는 당시 객원 큐레이터로 발해의 불교조각을 조사 및 관련원고 집필을 했다.

9) https://en.wikipedia.org/wiki/Tuff (검색일: 2021.5.10.) 이스터제도의 모아이 석상이 대표적인 응회암 조각상이다.

10) 이암, 역암 등 다양한 종류의 퇴적암에 대해서는 한국광물자원공사 홈페이지의 자료들을 검토했다. https://www.kores.or.kr/hmine/ro/ro03/ro0302/mineUser/getAboutRocks.do?mine_kind_c=10 (검색일: 2021.5.10.)

11) https://www.kores.or.kr/views/cms/hmine/ro/ro02/ro020101.jsp (검색일: 2021.5.10.) 우리나라에서 흔히 알려진 화성암은 제주도 용두암에서 볼 수 있다. 제주도의 많은 화성암은 비교적 큰 구멍이 눈에 잘 띄는 현무암이다.

12) 대부광산의 형성 연대는 화산이 폭발했던 당시 퇴적된 입자에 대한 칼륨-아르곤(K-Ar) 연대 측정을 통해 추정되었다. (검색일: 2021.05.12.) http://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cbaCpno=2333101940000&pageNo=1_1_1_1

14) http://www.hantangeopark.kr/bbs/content.php?co_id=sight_01_07 (검색일: 2021.05.12.) 한탄강 지질공원 웹사이트 참조.

16) 노진환, 「가야 지역 보성 고령토의 광화작용 및 광물 특성」, 『한국광물학회지』 21/4(한국광물학회, 2008), pp. 397-413.

18) 생기령 광산은 1907년에 개발된 광산이라고는 하지만 근대적인 광업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생기력에서는 고령토와 갈탄이 채굴되는데, 일제강점기에는 고령토보다 갈탄이 더 중요해서 갈탄을 캤지만 광복 후에는 고령토 생산에 주력하여 현지는 북한의 주요 도자기 생산지라고 한다. 생기령 광산에 대해서는 다음의 북한 정보 참조 (검색일: 2021.05.14.). https://nkinfo.unikorea.go.kr/nkp/search/search.do?eicode=S_336996&query=%EC%83%9D%EA%B8%B0%EB%A0%B9%EA%B4%91%EC%82%B0

19) <동아일보> 1997년 6월 25일자 기사 (검색일: 2021.05.13.). https://www.donga.com/news/Society/article/all/19970625/7264447/1

20) 안양시, 『안양문화총람』(안양시, 1996), p. 250

21) 한지만·이상해, 「檜巖寺의 연혁과 正廳·方丈址에 관한 복원적 연구」, 『건축역사연구』 17/6(건축역사학회, 2008), pp. 45-65; 오세덕, 「양주 회암사지 유구 분석을 통해 본 시기성과 조선시대 사찰에 미친 영향」, 『불교미술사학』 28(불교미술사학회, 2019), pp. 101-125.

22) 회암사지 부도에 관해서는 다양한 연구들이 있다. 엄기표, 「檜巖寺址의 石造浮屠와 塔碑에 대한 考察」, 『문화사학』 21(문화사학회, 2004), pp. 765-805; 박경식, 「회암사지 부도탑에 대한 고찰」, 『회암사지 부도탑』(회암사지박물관, 2013), pp. 38-65; 강병희, 「楊州 檜巖寺址 浮屠塔」, 『회암사지 부도탑』(회암사지박물관, 2013), pp. 68-113.

23) 엄기표, 「양주 회암사지 출토 범자 진언명(眞言銘) 기와의 특징과 의의」, pp. 4-25; 윤여훈, 「楊洲 檜巖寺址出土 朝鮮時代 瓦當 硏究」, 『한국기와학회 학술대회 발표자료집』(2016).

24) 홍영의, 「회암사지 출토 기와 명문(銘文)의 사례와 그 의미」, 『회암사의 기와』(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20), pp. 44-45.

25) 이봉춘, 「孝寧大君의 信佛과 조선전기 불교」, 『불교문화연구』 7/1(불교문화연구회, 2006), pp. 89-120. 그의 다양한 불사가 조선 초기 불교미술에 미친 영향과 의의에 대해서는 김정희, 「孝寧大君과 朝鮮 初期 佛敎美術 : 後援者를 통해 본 朝鮮 初期 王室의 佛事」, 『미술사논단』 25(시공사, 2007), pp. 107-150.

26) 인용민, 「孝寧大君 李補(1396~1486)의 佛事活動)과 그 意義」, 『선문화연구』 5(선학회, 2008), pp. 25-61.

27) 흥천사 종에 대해서는 鄭永鎬, 「한국銅鐘의 특성과 樣式변천」 『韓國의 美 23: 金屬工藝』(中央日報 季刊美術社, 1985). 명문은 韓繼禧가 짓고, 글씨는 鄭蘭宗이 썼다고 한다.

28) 효령대군의 목격담은 『世祖實錄』 권33, 10년 5월 甲寅조. http://sillok.history.go.kr/id/kga_11005002_001 (검색일: 2021.05.29.)

29) http://sillok.history.go.kr/id/kda_11604013_001 (검색일: 2021.05.29.) 『세종실록』 세종 24년 4월 13일 庚申조. 단적으로 건물 중창을 둘러싼 유신들의 반대 상소와 이에 대응하는 세종, 성종 등의 태도를 보면 효령대군의 회암사 불사가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경우도 적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와 관련하여 이종수, 「조선시대 회암사의 역사와 위상」, 『회암사와 불교사』(회암사지박물관, 2016), pp. 56-93.

30) 『회암사지박물관 개관 기념 묻혀있던 고려말, 조선초 최대의 왕실사찰 檜巖寺, 그 위용을 드러내다』, pp. 96-98.

31) 이수정, 「檜巖寺址 塔 硏究」, 『회암사지 부도탑』(회암사지박물관, 2013), pp. 151-152. 1464년에 있었던 『원각경』 강의 내용은 <圓覺寺碑銘>에 기록된 것이고, 원각법회는 『세조실록』에 실린 기사라서 이 두 사건이 연대는 맞지 않지만 같은 사안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효령대군이 간경도감에서 일을 했던 때이므로 별개의 사건일 수도 있다. 인용민, 앞의 글, p. 47.

32) 특히 회암사에 대해서는 세종-세조 때 집중적인 반발, 반대 상소가 있었다.

33) 최소림, 「黑石寺 木造阿彌陀佛坐像 硏究: 15世紀 佛像樣式의 一理解」, 『강좌 미술사』 15(한국미술사연구소, 2000), pp. 77-100; 강희정, 「조선 전기 불교와 여성의 역할: 불교미술의 조성기를 중심으로」, 『아시아여성연구』 41(아시아여성연구소, 2002), pp. 269-297.

34) 고재용, 「회암사지 평기와의 시기별 특성」, 『회암사의 기와』(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20), pp. 110-149; 이동준, 「회암사지 기와의 공급과 수요」, 『회암사의 기와』(양주시립회암사지박물관, 2020), pp. 194-225.

35) 명 조각에 영향을 준 라마교 계통 불교조각과 원 지배 이후 고려의 티베트계 불상에 대해서는 문현순, 「明初期 티베트式 佛像의 特徵과 영향」, 『미술사연구』 13(미술사연구회, 1999), pp. 119-152; 정은우, 「高麗 後期菩薩像 硏究」, 『미술사학연구』 236(한국미술사학회, 2002), pp. 97-131 참조.

36) 왕룡사원 불상에 대해서는 문명대, 「왕룡사원의 1466년작 목 아미타불좌상 연구」, 『강좌미술사』 28(한국미술사연구소, 2007), pp. 3-21.

37)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최종준이 보시한 다라니가 들어있어 그의 졸년인 1239년경 조성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문명대, 「守國寺 高麗(1239년) 木阿彌陀佛坐像의 硏究」, 『미술사학연구』 255(한국미술사학회, 2007), pp. 35-65. 원래 이 불상은 철원 심원사에 봉안되었던 것이 이안된 것으로 알려졌으며, 복장발원문에서 1389년과 1562년 두 차례에 걸쳐 개금 및 중수가 이뤄졌음이 밝혀졌다. 하지만 다라니의 판각연대와 불상 조성 연대가 일치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1389년 개금발원문이 나온 만큼 이때로부터 멀지 않은 시점에 조성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Fig. 1.
<금동불입상>, Kŭmdong-buripsang, Goryeo,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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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석조불상편>, Sŏkchobulsangp'yŏn,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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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석조불두>, Sŏkchobultu,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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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선정인 불신편>, Fragment of Buddha Image with Meditation Mudra,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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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석조대좌>, Sŏkchodaejwa, Hoeamsaji Ch'ult'o,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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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나한상>, Nahansang, Yŏngwŏl ch'angnyŏngsaji, kungnipch'unch'ŏn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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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이불병좌상>, Ibulbyŏngjwasang, Parhae, Tonggyŏngdae P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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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응회암>, Ŭnghoeam, Chijang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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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사암제여래입상>, Saamjeyŏraeipsang, 8 segi, Kungnipkyŏngju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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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고령석>, Koryŏngsŏng, Hamgyŏngbukto Kyŏngsŏng Saenggiryŏnggwangs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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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효령대군’명 기와>, ‘Hyoryŏngdaegun’myŏng kiwa, 1435, Hoeamsaji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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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흥천사 동종>, Hŭngch'ŏnsadongjong, 1462, Tŏksug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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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법천사 목조아미타불좌상>, Pŏpch'ŏnsa mokchoamit'abulchwasang, 1458, Hŭksŏ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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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금동세지보살입상>, Kŭmdongsejibosaripsang, 1333, Kungnipchungangbangmulgw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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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건칠아미타여래좌상>, Kŏnch'ilamit'ayŏraejwasang, 14 Segi, Naju shimhyang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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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수국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 Suguksamokchoamit'ayŏraejwasang, 14 Segimal, Suguk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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