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J Art Hist > Volume 310; 2021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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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南陽洪氏 大宗中 中央宗會, <洪錫龜 인보 족자>(1968년 6월) 발문 참조. 이 <홍석구 인보 족자>에는 홍석구 인장 83方과 아들 홍진종의 인장 10方 등 총 93방이 수록되어 있으며, 논문에 제시한 인영 도판은 이 족자에 날인된 이미지를 사용하였다.
2) 金洋東,「韓國 印章의 歷史」, 『韓國의 印章』 전시도록(국립민속박물관, 1987), p. 195; 박철상, 「문인전각가의 등장과 장서인」, 『문헌과 해석』 통권25호(2003 겨울), pp. 78-80; 고재식,「한국 전각사 개관」, 『印, 한국인과 인장』(한양대학교 개교 72주년 기념 특별전도록, 2010).
3) 成仁根, 『조선시대 印章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8; 具貲訓, 「朝鮮朝의 藏書印·藏書家 硏究: 고려대학교 소장본을 대상으로」,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1.
5) “噫, 今日不惟古書之罕有 中朝文獻 亦不可復見矣 今世之士 於此苟思其所自之不易 愛玩無斁 則其於漑鬵膏黍之感 自不能已 而因以了其經傳章句之指 則其風化之復於古也 亦庶幾焉 然則金生之功 亦不爲細矣 若其醇駁雅俗之氣 濃廉淡肉之態 則自有知者知之矣.”
8) 玉筯篆은 小篆體의 자형을 기본으로 변형된 서체로서 玉筯라는 명칭은 唐 篆書名家였던 李陽氷의 전서를 이르는 명칭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소전과는 별도로 33체, 38체의 하나로 소개되었는데, 중국에서는 원래 장식체의 범주에는 속하지 않았으나 원대부터 小篆體의 변형으로 소개되었다. (鄭枃, 「書要篇」, 『衍極』 卷2)
14) 金尙憲, 『淸陰集』 권38, 「群玉所記」, ‘淸陰居士有章數十枚。 欹劂次玉。 纍纍滿函。 燦然爛然。 巾之襲之。 閣之于金臺之山石室之內。 命曰群玉之所。 居士性樸拙。 平生無玩好。 無藏畜。 獨於此嗜之。 若淫者之好好色。 雖有他好。 不與易也。’
15) 金尙憲의 「群玉所記」에 관한 자세한 해석과 영향에 관해서는 박철상, 「조선후기 문인들의 인장(印章)에 대한 인식의 일면」, 『漢文敎育硏究』 35호, pp. 218-223 참조.
18) 이러한 인장의 분류방식은 전통시대부터 사용되었던 것은 아니며, 한·중·일의 인장 관련 연구서에서 인문의 내용별로 분류하는 경우, 사용하는 용어들이다. 연구편의상 사용하는 용어로 본 논문에서는 字號印은 字印과 號印으로 나누고, 履歷印은 綜合印으로, 籍貫世家印은 本貫印 등등으로 표기하였다. 향후에 학자마다 조금씩 다르게 사용하고 있는 용어에 관한 정리가 필요하다.
20) 李翊相, 『梅澗集』 권4, 「謝洪國寶錫龜 贈圖書」, p. 432; 李俁, 『百年錄』, 「答洪國寶書」(황정연, 『조선시대 서화 수장 연구』, 한국학중앙연구원 박사학위논문, 2006, p. 207 재인용).
22) ‘藏六居士’와 ‘六用齋’는 ‘藏六’과 ‘六用’이 거북과 연관되어 이름의 ‘龜’와 연결될 수 있다. (朴光一(1655-1723), 『遜齋集』 第八卷, 「藏六堂記」, ‘藏六’의 뜻은 대체로 거북이 六用을 감춘다는 데에서 취한 것이다. (其藏六之義, 盖取諸龜藏六用也.), 송나라 범성대(范成大)의 〈習閑〉 시에 “한가로움을 익혀 게으름이 되고 게으름이 바보가 되니, 육용을 모두 감추어 움츠리고 있는 거북과 같다. [習閑成懶懶成痴, 六用都藏縮似龜.]” 하였다. (《石湖詩集 卷29 習閑》)
31) 李端夏, 앞의 글, ‘其歷試外任, 聲績茂著, 大臣宰臣, 交相尉薦, 而竟無有力振之者, 遂使君落拓以歿. 才德抱負, 不能大展於世. 余念之, 未嘗不痛惜. 然君平素處得失榮辱之際, 未嘗有動於中, 晩年, 君弟府使君被言官論劾, 蓋以向時誣謗爲頭辭. 君方在北府, 以爲事達天聽, 冤及泉壤, 此而不暴, 無以爲人, 遂棄官歸.’
32) 『論語』 第七章, 「述而篇」, ‘孔子께서 顏淵에게 말했다. “세상이 나를 써주면 내 뜻을 펴고 나를 버리면 물러나 숨는 것은 오직 나와 자네가 그 사람일 것이다.” ’ (子謂颜淵曰:“用之則行, 舍之則藏, 惟我與爾有是夫”)
33) 『論語』 第七章, 「述而篇」,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를 구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내 비록 채찍을 잡는 천직이라도 하겠지만, 구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닌 바에야 내가 좋아하는 바를 좇으리라.” (子曰 富而可究也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34) 栗里는 현재의 江西 九江市 南陶村 서쪽이다. 晋 陶潛(淵明)이 일찍이 여기서 거주하였다. 白居易, 『長慶集』 七 「訪陶公舊宅試」: ‘柴桑古村落, 栗里舊山川.’ 三徑(逕)의 의미는 다음에서 유래하였다. 西漢 말, 王莽이 專權을 잡자, 兗州刺史 蔣詡가 병을 핑계로 고향에 은거하였는데, 세 길을 열어서 오직 求仲 羊仲만 왕래하게 하였다. 나중에 三徑은 집의 정원을 가리키는 데 사용하였다……晋 陶潛 『陶淵明集』 五 「歸去來兮辭」에는 “三徑就荒, 松菊猶存.”이라고 하였다. (吳澤炎 등 編纂, 『辭源-縮印合訂本』(1987.9) p. 842 및 p. 19)
36) 金昌翕, 『三淵集』 권1, 「洪海州錫龜挽」, ‘遊戲六藝林, 蔚然遊夏學, 精意妙 入神, 圭臬丹靑傳, 堂掛石鼓文, 几績華山璞, 琅琅禮樂器, 聊以澹留客.’(번역은 박철상, 「조선후기 문인들의 인장(印章)에 대한 인식의 일면」, 『漢文敎育硏究』 제35호, p. 224 참조).
42) 許穆, 『記言』 原集 上篇 「古文」, “漢唐來 諸作十四 芝英 飛帛 金錯 玉筯之類七 曹,劉王衛韋史之作又七…… 皆非古文 可見秦漢以降 風氣淺薄嗟乎”; 『記言』 別集 卷之六, 「答人論古文」 “惟陽氷玉筯文字 至今用之 而鄙拙無足可觀.”
44) 푸른 산은 나를 저버리지 않고, 흰 갈매기는 한가로움이 나와 같도다. 碧山不負吾: 金克一(1522-1585) ‘狂客’의 한 구절. 白鷗閑似我: 黃庭堅 ‘江南水色碧於天’의 한 구절.
45) 江漢을 漢江의 의미로 사용한 예는 홍석구보다 한 세대 정도 앞선 張維(1587-1638)의 시에 많이 보인다. ‘풍채 고상하신 분 회포 맘껏 푸셨는지, 한강 그 큰 이름 길이 기억하리(風雲高興愜, 江漢大名存)’ ‘뱃길로 한강 물 거슬러 올라, 다섯 묘역 동시에 이장하게 되었네(片舟泝江漢, 五喪同時擧)’ (張維, 『谿谷先生集』 28권, 五言律詩, 「次正使游漢江韻」/같은 문집, 25권, 五言古詩, 「金而好改葬挽詩」).
46) 金尙憲, 『淸陰集』 38권, 「群玉所記」, ‘曰淸陰者, 居士號也. 方形也, 玉筯也. 陽畫也. 其象如二童子綴耦, 間植玉戚, 周庠舞勺, 幼儀可觀.’/‘曰明哲保身者, 變倒薤法也. 方也陽也. 幽姿帶露, 如鮫女泣別, 點點成珠.’/‘曰白鷗沙者, 雜體也. 陽也, 恢奇卓詭, 迥拔常倫, 如曾點氣象, 鳳翔千仞.’
48) 중국 인장에도 이러한 인장이 象形印으로 명명된 사례가 있는데, 鳥자를 날아가는 새의 형상으로 하고 鳥鼠를 새와 쥐 형상으로 새겼다고 한다. 徐官, 『古今印史』, 象形印(이승연 편역, 『전각의 이해』(도서출판 이회, 2000) p. 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