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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09; 2021 > Article
19세기 백자 연적과 계영배(戒盈盃)를 통해 본 조선시대 기교자기 제작의 함의(含意)

Abstract

본 논문은 19세기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과 <백자계영배>의 제작기법과 원류를 고찰하여 조선시대 기교자기 제작배경과 성격을 규명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이를 위해 먼저 두 작품의 제작기법과 관련문헌 고찰을 통해 사이펀의 원리가 어떻게 적용되었는지와 계영배 명칭의 사용례를 살펴보았다. 또한 고려청자와 조선백자에서 동일한 기법으로 제작된 예를 통해 형식을 나누었다. 다음 기법의 원류를 알아보기 위해 중국 송대와 청대에 걸쳐 도류주자와 공도배 등을 고찰하여 조선 기법과의 유사점을 고찰하였다. 끝으로 18세기 이후 북학파와 왕실 관련 기록 등의 고찰을 통해 조선시대 기교자기 제작이 중국자기의 수용과 선택적 모방 등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또한 계영배의 경우 중국 공도배 기술 수용과 달리 양식적으로는 조선 수요층의 기호를 반영하였음을 설명하였다.

Abstract

This paper aims to find the production background and characteristics of technical porcelain of Joseon dynasty. The main objective of the study is blue and white water dropper decorated with open work of dragon and cloud design and white porcelain siphoned cup of 19th century. Primarily surveying the documents and production technique of both porcelains addresses the way in which principle of siphon was adapted to porcelains and the example of using the term. Some Goryo Celadon and Joseon Porcelain with same technique made it possible to classify the types. This paper explains the technique was originated from Chinese ceramics, especially siphoned ewer and cup of Song Dynasty to Qing Dynasty. By illuminating the records of Northern School and Joseon royals, this paper assumed the production of technical porcelain of Joseon Dynasty was activated by the inflow of Chinese ceramics and copying Chinese ceramics since 18th century. And the style of Joseon siphoned cup showed the tastes of the Joseon consumers while the production technique was similar to the Chinese example.

Ⅰ. 머리말

조선 후기 사대부들은 18세기 이후 물질에 대한 관심의 수위가 높아지면서 이에 대한 관망을 넘어 실제 구매 행동으로 옮기는 데 거침이 없었다. 이러한 경향은 영조(英祖, 재위 1724-1776) 중반 사치 분위기를 염려한 왕실의 여러 금제조치를 통해 예견할 수 있었다. 영조 30년(1754) 청화백자 사용금지령을 시작으로1 영조 22년(1746) 의복에서 연화문단(燕貨紋段) 사용금지, 영조 30년(1754) 다시 의복 향직유문(鄕織有紋) 사용 금지를 내리게 되었다.2 도자의 경우도 백자 중 가장 화려하고 값비싼 청화백자에 금지령을 내린 것인데, 이를 통해 청화백자도 하나의 사치품이자 고가의 완상품으로 떠오른 것을 알 수 있다. 영조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현재 유전하는 백자를 보면 청화백자를 비롯한 여러 기교품들은 사회 분위기에 편승해서 꾸준히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금지령을 무시하듯 영조의 옹주들인 화유옹주(和柔翁主, 1740-1777)와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1752)의 부장품들은 화려한 중국과 일본의 수입자기로 이루어져 실제 최고 수요층들은 이율배반적으로 외래 수입 도자기와 사치품에 경도된 것으로 보인다.
원래 영조 연간 사회 분위기의 변화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 말부터 예견된 것이었다. 중국, 일본과의 대외 중계무역에서 재미를 본 조선은 전체적인 사회분위기가 소비 위주의 사회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중강개시(中江開市)와 책문후시(柵門後市)를 통해서도 청의 문물이 유입되었는데 그중에는 도자기도 한 품목으로 끼어 있었다.3 이런 무역관계로 인해 점차 국내에 사치품이 범람하고 생활관습의 변화를 초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상품화폐 경제와 생산력 발전에 따른 부의 축적과 생활의 여유로 문화에 대한 욕구는 그만큼 증대되었고 이에 따른 수요층의 확대와 양식의 변화를 예견할 수 있는 것으로 고려된다. 한편 사회분위기 변화에는 사상의 변화가 그 기저에 있었다.4 조선의 사대부들은 계속된 연행(燕行)을 통해 청(淸)을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배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사상의 변화는 중국문물에 대한 새로운 인식의 계기를 마련하여 이들이 호상하는 도자 양식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여겨진다.5
18세기까지 조선의 도자 수요층들은 묘지와 일부 기명을 사번으로 주문하였지만 그 수량과 종류에 있어서 매우 한정적이었다. 그러나 영조 연간 들어 경제적인 여유와 사회분위기 탓에 점차 문인과 중인 같은 왕실 이외 수요층들의 고급 백자 주문의 수량과 종류가 확대되었고, 이들의 예술적 취향이 적극적으로 자기에 나타나게 되었다. 예를 들면 17세기 중국자기에서 보이는 산수문의 등장, 사군자의 유행과 문방기명(文房器皿) 생산의 확대, 자기 위에 시화서사(詩畵書寫)를 하는 등 조선 백자에도 새로운 양식이 등장하였다. 또한 중국에 대한 인식을 반영하듯 중국자기의 양식적 특징인 각형 기형이나 여러 가지 장식기법도 유입되었다. 이는 정조(正祖, 재위 1776-1800) 연간 들어 더욱 심화되었고 19세기 순조(純祖, 재위 1800-1834) 이후는 왕실 연회용 중국자기의 유입 증가와 더불어 중국의 여러 기교자기를 모방하려는 시도가 일부 성공하여 조선백자에도 재현되었다. 이 중에는 기존 조선백자에서는 거의 시도되지 않았던 제작기법도 있었다. 이러한 새로운 과학적 제작기법은 조선백자 역사상 매우 흥미로운 것이다. 다만 아쉽게도 그 내용이 제대로 고찰된 적이 없어 기법의 성격이나 전래 혹은 영향을 미쳤을 중국자기의 원형에 대한 분석과 고찰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본고의 목적은 조선 후기, 특히 19세기 기교자기의 제작배경과 제작기법을 고찰하는데 있다. 사이펀(siphon)의 원리를 채용한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과 <백자계영배(白瓷戒盈盃)>를 대상으로 제작기법을 살펴보고, 중국 도류호(倒流壺)와 공도배(公道盃)와의 비교 고찰을 통해 조선 기교자기의 원형과 기법의 수용과 응용 등을 검토하고자 한다. 또한 기교자기의 유행과 중국도자의 모방이 어떤 시대배경에서 이루어졌는지 다양한 문헌과 관련 유물을 고찰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는 조선 19세기 기교자기의 제작이 중국 청대 건륭기 최고조를 이루던 중국의 다양한 기교자기 기법의 선택적 수용과 응용으로 이루어졌음을 밝히는 데 의의가 있다.

Ⅱ.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과 <백자계영배>

1.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

도자기를 더욱 장식적으로 보이게 하는 기교는 색과 형태뿐 아니라 조각이나 내부의 기능적 형태로도 나타난다. 난이도 높은 기법을 사용하여 그릇의 희소성을 높이고 제작기술을 자랑함으로써 그릇의 품격을 높이려는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白磁靑華透刻雲龍文硯滴)>은 19세기로 편년되는 장식과 기교가 수준 높은 연적이다(Fig. 1). 운룡문이 정교하게 연적 표면에 투각되었고 하부 종속문대에는 여의두문이 조각된 후 정갈하게 청채되었다. 투각된 몸체 안에는 물을 저장하는 저수조 역할을 하는 타원형의 동체가 표면 출수구와 관으로 연결되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연적이지만 출수구만 보이고 입수구는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제작되었을까.
실제 백자 연적의 바닥에는 무려 6개의 구멍이 자리하고 있다. 최근 X선 투과 실험을 통해(Fig. 2) 그릇의 종단면과 횡단면을 조사한 결과 테두리 5개의 구멍은 이중 바닥에 의해 막혀 있고, 가운데 한 개의 구멍은 그릇 내부 저수조의 관과 연결되었음이 확인되었다.6 이 관은 연적을 뒤집어 바닥을 통해 안으로 물을 투입할 때 입수구의 역할을 한다. 이후 연적을 바로 세우면 관을 통해 들어온 물의 양이 관 높이보다 아래에 있을 경우에는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관 높이 이상으로 물을 부으면 물은 다시 관을 통해 아래로 빠져나가게 된다. 이는 바로 사이펀의 원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이다. 사이펀의 원리란 높은 곳에 있는 액체를 기압차와 중력을 이용해 낮은 곳으로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연통관, 즉 사이펀 안이 액체로 가득 찬 상태일 때, 액체가 빨려나가게 되는 것을 말한다. 연적의 입수구와 출수구는 이러한 구조 원리에 따라 제작된 것이다.
연적의 제작순서는 먼저 연적 바닥판을 두껍게 만들고, 원형의 몸체와 내부 저수조, 몸체 출수구와 저수조 연결 관, 저수조 안의 관 등을 별도로 제작한다. 바닥판의 테두리에 5개의 구멍을 바닥판 반 정도만 뚫고, 중앙 구멍은 바닥판 전체를 뚫는다. 구멍 위로 상부가 열린 관을 저수조보다 낮게 설치한다. 저수조를 그 위에 접착하고 하부 측면에 구멍을 뚫어 출수구까지 연결될 관을 설치한다. 다음 몸체에 출수구 구멍을 내고 출수구를 기준으로 상하로 분할한 후, 하부를 연결관과 바닥판에 접합하고 다시 몸체 상부와 연결한다. 끝으로 표면의 용과 구름 문양을 음각 혹은 양각하고 여백은 투각하여 조각을 마친다. 초벌구이와 청화 채색, 시유, 소성을 마무리하면 복잡하고 까다로운 작업 일체가 마무리된다.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에 적용된 사이펀의 원리는 고려시대 청자에 사용된 소위 도류(倒流) 기법과 일맥상통한다. 물이 역전되어 흐른다는 의미의 도류는 사이펀의 원리에 따른 물의 흐름을 지칭한 것이다. 고려시대 청자의 도류 기법은 중국에서 비롯되었다. 송대(宋代) 요주요(耀州窯)에서 비롯된 도류 기법은 일반적으로 주자나 연적 등에 적용되었다. 두 기종 모두 출수구와 입수구가 별도로 있어야 하는데 입수구는 기물 바닥에 위치하여 사실상 출수구만 표면에 드러난 것이다. 바닥의 입수구는 몸체 내부와 관으로 연결되어 이를 통해 기압 차이를 이용하여 물이 빠져나가게 하였다. 중국 요주요의 이러한 기법을 그대로 차용한 것이 고려시대 청자에도 나타나는데,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청자도형연적(靑磁桃形硯滴)>(Fig. 3)과 일본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청자동자연적(靑磁童子硯滴)> 등 12세기 청자연적들로 연적 바닥에 주입구를 설치하고 도류 기법을 채용하여 제작하였다.
도류 기법을 사용한 요주요의 대표작인 <청자모란문도류주자(靑磁牡丹文倒流酒子)> (Fig. 4)의 제작형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주자의 뚜껑과 몸체가 일체인 이 주자는 바닥에 구멍을 뚫고, 구멍과 연결된 출수구 높이 정도 되는 연결 관을 바닥판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주자 몸체를 접합한 것이다. 물을 주자에 주입할 때는 기물을 거꾸로 뒤집어 놓고 입수구에 주입하게 된다. 주입된 물의 양이 관의 높이보다 낮으면 아무 문제없이 출수구로 물이 나가게 되어 있어 바닥의 구멍으로 물이 역류하는 경우는 생기지 않는다. 이런 특이한 방식의 청자는 송대 요주요나 여요 등의 북방청자에서 보이는데 대략 12세기경으로 추정되는 고려청자 연적에서도 그대로 보이고 있어 상호 영향관계를 짐작하게 한다.7 도류기법 청자는 상감청자와 13세기 이후에는 나타나지 않아 12세기 비색청자에만 중국 기법을 차용하여 일시적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동시기 중국과 달리 연적에만 응용된 것은 고려와 조선만의 특징이며 조선시대에는 거의 제작의 예를 찾아볼 수 없다가 19세기에 다시 제작된 것은 시대적 분위기와 관심에 의한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것은 도류기법을 사용했다고 해서 연적이나 주자의 기능이 향상되는 실용적 장점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직 장식과 연희의 대상으로 조선 19세기 들어 연적에서 다시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2. <백자계영배>

사이펀의 원리를 주자가 아닌 잔에 응용한 것을 조선시대에는 계영배라 불렀다. 계영배는 1904년 분원 공인(貢人)이었던 지규식(池圭植, ?-?)의 『하재일기(荷齋日記)』에 시험 번조한다고 처음 등장하며8 이전까지의 사료에는 확인되지 않는다. 지규식이 계영배를 시험 번조하고자 한 까닭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당시 분원공소가 경영난으로 번자회사(燔磁會社) 체제로 전환한 후 치열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신제품 개발의 일환이었을 가능성도 추정해 볼 수 있다. 현존하는 계영배는 모두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 이름의 유래와 최초 제작 시기는 알 수 없다. 일제시대 조선도자 수집가이자 애호가였던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1891-1931)의 『조선도자명고(朝鮮陶磁名考)』에는 계영배의 그림이 실려 있어 그 형태를 확인시켜준다.9
국내 현존하는 계영배는 사이펀에 해당하는 관의 존재 여부에 따라 두 가지 형태로 나눌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이를 관형(管形)과 종형(鐘形)으로 명명하기도 하였다.10 그러나 종형 계영배란 명칭은 격벽이 설치된 실제 제작의 특징을 유추하기 어려워 본고에서는 격벽형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먼저 관형의 형태로 <백자거북형계영배(白瓷龜形戒盈杯)>를 들 수 있다(Fig. 5). 이 계영배는 앞서 예를 든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 등과 같이 잔 내부에 관을 설치했지만 관의 형태가 이중으로 되어 있다(Fig. 6). 외부 관의 상부는 막혀있으며 하부에는 구멍이 뚫려있어 잔에 술을 따르면 관 안으로 유입되도록 하였다. 내부 관의 하부는 잔받침으로 물이 빠져 나갈 수 있도록 뚫려있다. 따라서 잔의 외부 구멍을 통해 유입된 물이 내부 관의 높이 이상으로 찰 경우 내부 관 하부의 구멍을 통해 아래로 물이 빠져나가게 된다.
제작기법을 보면 <백자거북형계영배>는 잔과 받침, 물탱크 역할을 하는 몸체의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제작되었다. 먼저 거북형태의 몸체는 마치 탑비의 귀두를 미니어처로 만들어 놓은 듯하다. 거북은 고개를 위로 들고 입을 크게 벌린 형태로 등 한가운데 구멍이 크게 뚫려있어 위 잔받침에서 빠져나오는 물이나 술을 저장하게 되어있다. 거북의 구연부에는 구멍이 있어 물대 역할을 하여 안에 있는 물을 따르도록 하였다. 몸체 위에 잔받침을 놓게 되어 있는데 타원형 테두리를 화형(花形)으로 조각하여 19세기 유행하는 규화잔대(葵花盞臺)를 모방하였다. 잔대 위는 쌍학문을 양각하였다. 잔받침 바닥에는 잔과 접촉되는 관의 지름에 맞추어 여섯 개의 구멍을 뚫어놓아 잔에서 넘친 물이 아래로 빠져나가도록 하였다. 가장 상부에 있는 잔은 굽이 높고 구연부는 밖으로 살짝 벌어진 형태다. 잔 한가운 데에는 잔 높이와 거의 유사한 이중 관이 설치되었고 그 위는 매화형의 뚜껑으로 마무리하였다. 관 외부 하단에는 작은 구멍을 뚫고 잔에 따른 물이 그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관의 내부는 비어 있고 그 안에 위가 뚫린 또 하나의 작은 관이 잔의 내면 중앙에 부착되었다. 작은 관의 하부는 통째로 뚫려있어 물이 넘칠 경우 아래로 흐르게 하였다. 결국 잔에 따른 물이나 술이 설치된 내부관의 높이보다 높을 경우 그대로 넘쳐 잔받침으로 흐르고 최종적으로는 거북형 몸체에 저장되도록 하였다. 계영배에 과학적인 사이펀의 원리를 사용한 것은 고려시대 도류 연적 등과 같으나 제작은 한층 까다롭다.
다음 격벽형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양각쌍학문계영배(白磁陽刻雙鶴文戒盈杯)> (Fig. 7)는 내부 관의 설치 없이 잔 몸체 안에 격벽을 설치하고 잔 안의 액체가 잔 밖으로 벽을 타고 떨어지도록 독특하게 제작하였다. 먼저 몸체 겸 잔대는 마치 뚜껑이 부착된 통형 주자처럼 몸체와 잔대를 합쳐놓은 것 같은 형태다. 몸체 외측면에 출수구가 설치되었고 상부에는 잔을 받치는 홈이 파져있고 홈 측면에는 구멍이 뚫려있다. 몸체 테두리에는 날개를 활짝 편학의 형상을 양각하여 쌍학의 형태로 서로 마주보도록 하였다. U자형의 잔은 외면에 양각으로 매화를 조각하고 구연부에는 매화 가지를 두텁게 첩화 성형하였다. 관은 별도로 설치하지 않고 대신 잔 일부분에 얇게 격벽을 두고 벽을 통해 술이나 물이 잔 내외로 통하게 하여 벽이 관의 역할을 하도록 하였다(Fig. 8). 격벽이 설치된 부분의 구연부 위로는 첩화된 매화가지가 잔 내면의 구연부를 살짝 덮도록 성형하였다. 마치 관을 구연부에 비스듬히 부착한 한 것과 같다. 잔에 따라진 물이 첩화된 벽 높이를 넘으면 자연스럽게 잔 내부의 물은 구연부를 통해 외부로 흘러 잔대로 떨어지게 하였다.
이처럼 성형이 복잡한 계영배는 고려시대와 조선 18세기까지는 전혀 시도된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중국의 경우 계영배와 같은 공도배가 당대(唐代) 이후 꾸준히 제작된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도류호와 계영배 두 경우 다 사이펀의 원리에 기반하고 동시기 중국에서 제작되었지만, 고려시대는 도류 기법만 수용되고 계영배는 오랜 기간 제작되지 않았던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중국으로부터 제작 자체에 대한 정보가 전달되지 않았거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수요층들에게는 취향이 맞지 않아 제작이 시도되지 않다가, 19세기 말 신제품 개발의 하나로 분원에서 첫선을 보이고 이후 제작이 지속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또한 양식적으로는 조선 계영배의 기형이나 문양은 중국의 공도배와 거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 장수를 상징하는 거북의 기형과 양각 쌍학문을 사용하는 등 철저하게 조선 수요층의 기호에 부응한 것이 특징이다.

Ⅲ. 중국의 倒流壺와 公道杯

앞에서 언급했듯이 고려의 도류호 연적과 조선시대 계영배의 기원은 중국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서양의 경우 이미 기원전 그리스 시기 계영배와 유사한 잔이 토기로 제작되었고 이를 피타고리언(Pythagorean)잔 혹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탐욕스런 제우스 아들의 이름을 따서 탄탈루스(Tantalus)잔이라 명명하였다.11 그러나 서양의 잔과는 연결고리를 찾기 어렵다. 중국의 기교자기의 기원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당대 이후 꾸준히 제작되었고 특히 청대 건륭제 연간(乾隆帝 年間, 1736-1796) 더욱 과학적 진보를 이룩하였다. 예를 들면 당시 경덕진 독조관이었던 당영(唐英, 1682-1756)은 건륭 8년(1743)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였다. 그중 하나로 투각선전병[鏤空旋轉甁](Fig. 9)이라는, 이중투각이면서 내부 그릇은 오르골처럼 회전시키는 새로운 기법을 선보였다.12 장식도 다양한 색상과 기형이 출현하면서 기술적으로 더 이상 불가능한 것이 없을 지경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기존의 도류호와 조선의 계영배에 해당하는 공도배(公道杯) 역시 적은 양이지만 꾸준히 제작되었다.13 단지 중국의 도류호와 공도배의 종류와 형식, 세부적인 기법 등은 조선의 그것과는 전혀 달라 조선이 수용 과정에서 주체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국의 기교자기 중 조선의 취향에 맞지 않는 것은 모방, 제작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 도류호

중국의 도류호는 연적이나 주자의 바닥 중심에 관을 설치하여 내관호(內管壺)라고도 하는데 언제 처음 제작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정론이 없다. 제작 원리는 사이펀의 원리에 근거한 것으로 어떻게 천 여 년 전 이러한 방법을 누가 고안하였는지 대해서는 아직 정확히 밝혀진 바 없다.14
도류호의 제작은 먼저 호의 몸체를 성형하고 별도로 관을 제작하여 호의 몸체 바닥에 접합한 후, 호의 뚜껑 구연부를 몸체에 접합하여 조각을 시작하는 순서로 진행된다. 도류호의 단면을 보면 내부에는 관이 있어 주자 바닥에서 주입된 액체가 관을 따라 주자 안으로 흐르게 되어 있다. 이 같은 구조는 사이펀의 원리에 따라 관의 높이보다 액체가 낮으면 정상적으로 출수구로 빠져나가지만, 높아지면 모든 액체는 관을 따라 밖으로 빠져나가게 된다.
도류호는 별도의 뚜껑 없이 몸체와 일체로 제작되어 실제 생활에서 사용 시 이런저런 재나 먼지가 주자 안으로 들어가지 않아 위생적일 수 있다. 그러나 역으로 내부를 씻기가 어려워 얼마나 위생적일지는 의문이다.
도류호는 아름다움과 기교를 갖춘 그릇으로, 남아 있는 유물을 보면 당(唐)을 거쳐 오대(五代)와 송대부터 유행하기 시작하여 청대에도 지속적으로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 송대의 경우 도류호는 여러 요에서 다투어 제작하였다. 북방(北方) 정요(定窯)의 백자, 요주요의 각화청자, 자주요(磁州窯)의 백유흑화, 균요(鈞窯)의 요변 자기 등 풍부한 장식기법으로 북방자기의 독특한 양식을 내보였다. 명·청시기에도 더욱 다양해져 청대 들어서는 채자(彩瓷), 의흥 자사(紫砂)와 심지어 석호(錫壺) 등으로 제작되어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청대 도류호는 손잡이가 뚜껑 위에 있는 제량(提梁) 양식은 매우 적고 손잡이가 측면에 달린 집병(執柄)식이 많다. 조형은 가지와 복숭아형이 주이고 장식은 박쥐, 사슴, 수성, 동자, 소나무 등이다.
초기 도류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섬서역사박물관 소장 북송 요주요 <청자모란문도류주자>를 들 수 있다. 1968년 섬서 빈현(彬縣)에서 출토된 요주요 명품 도류호 청자 중의 하나다.15 높이 18.3cm의 반구형 몸체에 몸체와 뚜껑이 일체로 접합되었다. 손잡이는 봉황문이 조각되었고 출수구는 새끼가 젖을 물고 있는 고개를 돌린 어미 사자로 형상화되었다. 몸체에는 네 개의 연지모란화가 정교하고 깊게 양각되었다. 출수구의 높이가 관보다 높고 출수구 아래로 격벽을 설치하여 출수량과 속도를 조절하도록 하였다(Fig. 10).16 이런 격벽 설치는 고려시대 도류연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조선시대 계영배에서는 보인다. 반면 당대 정요에서 제작된 정주시박물관 소장 <백자도류주자(白瓷倒流注子)>(Fig. 11)는 출수구의 위치가 관보다 더 높지만 격벽 설치는 되지 않았다. 대신 내부에 설치된 관의 폭이 점차 줄어드는 형태로 제작되어 이후의 직선 형태와 다르다.17 따라서 중국의 도류호는 출수구와 관의 상대적 높이와 격벽의 유무에 따라 형식을 나눌 수 있다.
원·명대 이후 도류호 제작에 필요한 공예 기술은 더욱 발전하여 정교하고 복잡한 과정을 이행하였다. 주자의 형태는 손잡이가 뚜껑 위에 위치하던 형태에서 몸체 측면에 부착되는 형태로 바뀌었다. 또한 출수구의 위치도 달라져 관에 비해 훨씬 낮게 배치되었다. 예를 들어 타이페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청대 <오채용봉문도형주자(五彩龍鳳紋桃形注子)>(Fig. 12)는 출수구의 위치가 관보다 낮고 격벽이 없는 형식이다(Fig. 13).18 용봉과 모란, 바위와 나뭇가지 등이 화려한 채색으로 장식되었고 굽은 타원형이다.
이처럼 중국의 도류호는 기이한 구조와 교묘한 내부 설계 등으로 고대 장인들의 지혜와 창조력을 충분히 보여주는 유물로 당대부터 청대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2. 공도배

도류호와 함께 중국 공예기술을 잘 보여주는 것이 공도배로 조선시대 계영배에 해당하는 자기다. 중국에서 공도배가 가장 빨리 출현한 것은 송대로 주요 기능은 음주 시 사용하는 것이다. 중국의 공도배는 두 종류로 먼저 사이펀의 원리를 이용해 잔의 물이 관이나 격벽을 통해 아래로 빠져나가게 한 것으로 조선 계영배 형식과 동일하다. 두 번째는 부력을 응용하여 잔에 설치된 관 내부에 배치된 다른 기물이 떠오르게 하여 유희적 요소를 가미한 것이다. 즉 잔 가운데 속이 빈 관이 설치되고 그 안에 용두(龍頭)나 노인이 숨어 있어 관이 물로 차면 부력에 따라 위로 움직이게 되어 있다. 반대로 관 안의 물이 빠지면 이들은 관 안으로 숨게 된다. 이는 관의 저부와 잔 저부에 작은 구멍이 서로 통하여 압력과 부력의 차이에 따라 물의 흐름 방향이 바뀌게 되기 때문이다. 두 번째 형식은 고려와 조선에선 제작되지 않았다. 공도배는 송대 이후 기법도 다양해지고 유색의 종류도 증가해서 청화백자와 오채, 법랑채 등으로 발전하였다.
실제 공도배를 살펴보면 송대 작품으로 타이베이 국립고궁박물원 소장 <청자잔(青瓷盞)>이 있다(Fig. 14). 두 번째 형식의 남송 관요 청자로 보이며 높이 5.4cm, 구경 11.5cm이다.19 하엽형의 잔 중앙에 작은 구연을 가진 복발형 장식이 있고 외부 하단에는 6개의 구멍이 뚫려있어 잔 안으로 통하게 되어 있다. 복발 안에는 아마도 불상이나 용두가 숨겨져 있다가 물이 차면 구연부 위로 솟았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백자로는 독일 베를린아시아예술박물관(Museu m für Asiatische Kunst) 소장의 정요산으로 추정되는 <백자잔(白 瓷盞)>이 있다.20 잔의 중앙에 연화 복발형 장식이 있고 그 안에 관음보살이 들어 있어 물이 차면 보살이 위로 올라오도록 하였다. 이러한 잔들은 매우 희소한 예로 원대에도 제작이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실용성보다는 일종의 유희 도구로 인식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달리 명대에는 보다 조선 계영배와 유사한 공도배가 제작되었다. <청화백자구룡공도배(靑華白磁九龍公道杯)> (Fig. 15)는 잔과 잔받침이 나누어져 제작된 것으로 영락 연간(永樂 年間, 1402-1424) 경덕진 어기창에서 제작되었다.21 구룡배는 청화 공필로 오조룡(五爪龍)을 묘사하였다. 잔의 가운데는 조각한 용이 배치되었는데 아홉 마리 오조용으로 황제의 “구오지존(九五之尊)”의 위엄을 상징하고 있다. 또한 신비스러운 건 잔 중앙의 용 경부에 흑색 원점이 있는데 술이 원점 아래 있으면 정상적이나, 술이 흑점을 넘어서면 잔 안의 술은 신속하게 잔 밖으로 빠져나간다. 이는 용의 측면과 잔 굽의 접점부에 작은 구멍이 있어 잔 안의 술이 흑점을 넘어가면 술은 잔의 내저 작은 구멍으로 흘러 외저의 작은 구멍으로 빠져나가는 사이펀 현상이 작용하기 때문이다(Fig. 16).
끝으로 북경 고궁박물원 소장의 청대 <의흥요녹지분채공도배(宜興窯綠地紛彩公道杯)>는 청대 광서(光緖) 작품으로 높이 6cm, 구경 12cm이다(Fig. 17). 잔은 하엽형으로 삼족의 굽을 지니고 있다. 전형적인 의흥(宜興) 자사(紫砂)의 몸체 내외에 녹유를 시유하고 외벽에 단화(團花)문을 장식하였다. 잔 내부에 머리를 양 옆으로 따고 가슴에서 배까지 드러낸 채 웃고 있는 선인(仙人)이 황채(黄彩) 장식의 원주(圓柱)를 보며 앉아 있다. 원주는 가운데가 비어있고 안에는 세장한 기둥머리를 수성노인(壽星老人) 형상으로 제작하여 원주 안에 물이 차면 부력에 의해 떠오르도록 하였다. 계영배와 다른 유희적 기능이 우선하도록 제작되었다.
이상처럼 중국에서 공도배로 불리는 잔들은 희소하긴 해도 송대 이후 청대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되었다. 차이점은 조선 계영배에서 응용된 사이펀의 원리와 함께 부력을 이용하여 선인이나 거북, 관음상 등의 관을 타고 오르내리는 조형장치를 설치하여 유희적인 면이 강조된 것이다.

Ⅳ. 조선 후기 중국도자 유입과 모방

18세기 이후 고증학과 이용후생학 등의 등장은 청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중국 물품에 대한 선호를 넘어 선모의 단계에 들어서도록 하였다. 중국 도자 수요층의 확대와 활발한 유입, 중국도자의 왕실 연회용 사용빈도수 증가, 중국도자 모방 기록 등은 이를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이런 분위기 속에 기교와 과학이 결합된 청대 도류 주자와 공도배 등이 유입되어 연적이나 계영배에 그 기법이 응용되어 분원의 새로운 기교자기로 등장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은 18세기 후반 정조 연간에 들어서면 도자 수요층의 확대와 청 문물에 대한 호상 등이 제고되었다. 심지어 왕실 사용 연회 자기에도 중국자기가 버젓이 큰 몫을 차지하였다. 예를 들어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 1735-1815)의 회갑잔치를 열었던 1795년의 기록에는 분원의 각종 갑번자기뿐 아니라 화당(畫唐)대접, 화당사발, 화당접시 등과 채화 동사기(彩花銅沙器)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22 여기서 화당대접과 채화동사기는 중국으로 부터 수입된 청화백자와 법랑채자기로 추정된다. 19세기로 들어서면 왕실 연회에서 사용되는 중국자기의 수량과 빈도수는 점차 증가 추세를 보여준다.23
또한 연행사신들의 연행일기에는 중국의 도자와 골동 등을 구입해서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어 중국자기의 사적 구매를 통한 유입이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정조 1년(1777) 부사로 사행을 다녀온 이갑(李岬, 1737-1795)의 『연행기사(燕行記事)』에는 중국 통주(通州)의 자기가 아름답고 책상(柵商)에게서 각종 자기 등을 사온다고 적고 있다.24 북학의 선구인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도 중국의 골동을 제대로 고르기 위해 사는 장소와 구입 방법에 대해 조언을 받는 부분이 실려 있다.25
한편 중국자기의 우수한 제작기술을 들어 조선백자에 대한 자성의 목소리도 이어졌다. 19세기 초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북학의(北學議)』 내편(內編) 자(瓷)에서, 중국자기의 화려하고 정교함과 비교할 때 작금의 운종가(雲從街) 판매자기와 분원자기의 투박하고 정결하지 못함을 지적하였다.26 박지원의 제자인 이희경(李喜經, 1745-?)은 조선 도자 제작 기술의 낙후성을 지적하면서 일본과 중국의 예를 들어 분발을 촉구하였다.27 그는 『설수외사(雪岫外史)』에서 중국의 자기 사용의 보편화와 중국 명·청대 자기의 특징과 장점을 설명하였다.28 중국 자기에 대한 경이로운 설명은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 1731-1783)의 연행기에서도 확인된다.29
19세기 후반 풍석(楓石) 서유구(徐有榘, 1764-1845)는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에서 삼층 합을 기준으로 가요문이나 금화칠보, 금벽채를 사용한 중국, 일본의 화려한 합과 조선 관요 것을 비교하였는데 품질에서 우리 것은 감상할 만한 대상도 되지 못한다고 하였다.30 책문(柵門) 넘어 중국은 화자병(畫磁甁), 가요병, 유리병 같은 것이 관상용으로 곳곳에서 쓰이나 우리는 사치를 좇는다는 공경부호의 부엌 나인들조차 이를 모르고 있으니 그 도제(陶制)가 참으로 어리석고 중국에 비해 멀었다고 비판하였다.31
이러한 중국도자의 유입과 유행은 재현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점차 형태만이라도 모방 제작하려는 시도로 이어졌다.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32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考)』와 부록인 『오주서종(五洲書種)』에서 중국의 오채자기를 본뜬 질그릇이나 초벌구이 편에 아교에 안료를 섞어 유사 상회자기를 만들었다는 것과33 중국 송대 가요(哥窯)자기 모방 제작 방법 등을 기록하였다.34 특히 가요자기는 조선 수요층 사이에 꽤 인기가 있어 여러 책가도를 비롯해 김홍도의 <포의풍류도(布衣風流圖)>에도 등장하였다. 이규경은 「고금자요변증설(古今瓷窯辨證說)」에서는 중국 자기의 기원, 월주(越州) 비색청자에서 경덕진 청화 백자에 이르기까지 여러 중국문헌을 참고하여 설명하여 중국도자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드러내었다.35
한편 18세기 이후 왕실 묘에서는 명기 대신 생전 사용하던 중국과 일본의 소형 자기합이나 병, 완 등이 출토되어 외국도자에 대한 조선 왕실의 새로운 기호를 보여주었다. 예를 들어 영조의 옹주인 화유옹주(和柔翁主, 1741-1777) 묘에서 출토된 <법랑채황지장미문병(琺瑯彩黃地薔薇紋甁)>(Fig. 18)이나 <청화홍채만초문합(靑畫紅彩蔓草文盒)> 등은 아마도 화유옹주의 남편인 황인점(黃仁點, 1740-1802)이 연경 사은사로 중국을 왕래하면서 가지고온 화장(化粧)용기인 것으로 것으로 여겨진다. 특히 <법랑채황지장미문병>은 당초문을 암화(暗花)하고 장미문을 녹채와 홍채로 장식한 것으로 황제만이 사용한다는 황색을 위주로 채색한 귀한 그릇이다. 또한 최근 발굴된 화협옹주(和協翁主, 1733-1752) 묘에서도 거의 유사한 양식의 중국의 법랑채 화장용기와 청화백자 합이 출토되었다. 이밖에도 정조 이후 온통 중국도자로 채워진 <책가문방도(冊架文房圖)>가 왕실에서 버젓이 사용된 것 역시 중국도자 선호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준다(Fig. 19).36
결국 이 시기 중국 완상문화와 문물의 수용 분위기 고조는 중국에서 유행하던 기교자기의 유입 배경이 되기 충분한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에 가요자기와 같은 일부 중국 도자의 모방 시도는 도류주자와 공도배에 응용된 사이펀의 원리를 조선백자에 적용하는 데까지 확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양식적으로는 중국과 달리 기형과 문양에서 조선백자만의 독자성을 잘 나타내 수요층의 기호를 그대로 반영한 것이 특징이다.

Ⅴ. 맺음말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과 <백자계영배>는 매우 진기한 기법으로 제작된 19세기 백자들이다. 두 작품 모두 소위 사이펀의 원리를 이용하여 내부에 관이나 격벽을 설치하여 압력의 차이에 따라 액체의 입출입을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통제하도록 하였다. 이는 도자 제작기술에 유체역학적인 과학의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한국도자사 전체를 통틀어서 매우 희귀한 작품들이다.
제작기법을 보면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은 연적의 입수구를 굽바닥에 두고 그 위로 관을 설치하였다. 관을 통해 액체를 붓고 연적을 바로 세웠을 때 액체의 높이가 관보다 높으면 관을 통해 연적 안의 모든 액체가 연적 밖으로 빠져나가게 하였다. 이러한 기법을 활용한 자기는 이미 고려시대 청자연적에서 활용된 적이 있다. 이후 상감청자와 조선 전기에는 유사한 기법을 활용한 자기들이 전혀 제작이 되지 않다가 조선 후기 들어 다시 등장하였다. 이러한 기법은 중국에서 도류호라 불리는 송대 요주요 도류주자에 선보인 이후 청대까지 꾸준히 제작되었다. 따라서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은 청대 건륭제 때 제작된 각종 도류주자에 사용된 기법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고려와 조선 도류 연적은 특정시기에만 매우 희소하게 제작되었고 격벽 없이 관만 설치되었다. 또한 고려와 조선에서 이 기법을 명명한 기록은 찾을 수 없다.
다음 <백자계영배>는 잔과 잔탁으로 구성되었다. 잔 내에 관이나 격벽을 설치하고 잔에 부은 액체의 높이가 관이나 격벽보다 높으면, 잔 내 액체가 관이나 격벽을 통해 잔 밖으로 빠져나가 잔탁으로 흐르게 하였다. 계영배는 1904년 『하재일기』에 지규식이 시험번조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이름이 처음 등장하고 일제시대 아사카와 다쿠미의 『조선도자명고』에 이름과 그림이 실려 있다. 현존 작품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관과 격벽의 유무에 따라 두 형식이 존재한다. 중국에서는 공도배로 명명되어 적은 양이지만 송대 이후 꾸준히 제작되었고 청대에도 이어졌다. 조선 계영배에서 사용한 사이펀의 원리를 사용한 것과 부력을 이용하여 잔의 관 내부에 여러 형상을 설치하여 떠오르게 하는 유희적 요소의 잔 형식이 꾸준히 등장하였다.
한편 조선시대 기교자기 제작의 배경이 되는 18세기 이후 조선의 중국 도자에 대한 선호와 수용, 모방 경향 등은 각종 사료와 연행일기, 북학파 문헌 등에 기록되었다. 중국 도자 수요의 확대로 중국도자의 활발한 유입이 이어졌고, 중국도자의 왕실 연회 사용 역시 증가되었다. 왕실 부장품 내의 청대 도자와 책가도 속의 중국도자, 중국도자 모방 기록 등은 청대 도류 주자와 공도배에 사용된 기법 등이 조선에 유입되어 조선백자 연적과 계영배에 선택적으로 응용되기에 충분한 배경이 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기법의 유입과 수용 가능성은 농후하나 양식적으로는 조선 계영배만의 기형과 문양 장식으로 조선 수요층의 기호를 그대로 반영하였다.
끝으로 19세기 말 20세기 초 분원공소와 번자회사 등과 조선에 진출한 일본, 중국의 자기 회사와의 치열한 조선 도자시장 쟁탈 경쟁에서 백자계영배 같은 기교자기가 어떤 경로로 번조되었으며 어느 정도 경제 효과를 거두었는지는 추후 연구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한다.

Notes

1) 『英祖實錄』 卷82, 英祖 30年 7月 甲午條. “敎曰 磁器之畵 古用石間朱 今聞以回靑畵之云 此亦侈風 此後則畵龍樽外 一切嚴禁”.

2) 李肯翼, 『燃藜室記述』 別集 卷13 政敎典故(禁令)(민족문화추진회, 1967), p. 880.

3)  『萬機要覽』 財用篇(민족문화추진회, 1967, 고전국역총서 67), pp. 564-565.

4)  당시 사상계의 변화에 대해서는 유봉학, 『燕巖一派 北學思想 硏究』(일지사, 1995) 참조

5)  방병선, 『조선후기백자연구』(일지사, 2000), pp. 121-123.

6) 황현성, 이민희, 「X-선 단층 촬영기를 이용한 백자 연적의 3차원적 구조 및 제작기법 연구 - 백자투각청화운룡문연적을 중심으로 -」, 『한국도자학연구』 15호 1집(한국도자학회, 2018), pp. 125-136.

7)  방병선, 『중국도자사연구』(경인문화사, 2012), p. 194.

8) 池圭植, 『荷齋日記』 1904년 12월 10일(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하재일기 권7, 2009), p. 157; 방병선, 「하재 일기(荷齋日記)를 통해 본 조선 말기 분원」, 『강좌 미술사』 34(한국미술사연구소, 2010), p. 276.

9)  淺川巧, 『朝鮮陶磁名考』(東京: 朝鮮工芸刊行会, 1931), p. 49.

10) 국립중앙박물관, 『빛의 과학』(2020), p. 118.

11) 그리스에서는 사이펀과 파스칼의 원리를 사용한 이러한 토기 잔을 이미 기원전 4세기 제작하였다. 잔의 명칭은 Pythagorean cup, Tantalus(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의 아들로 신들의 비밀을 누설한 벌로 지옥의 물에 턱까지 잠겨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 하면 물이 빠졌다) cup, Greedy cup 등으로 불렀다. https://interestingengineering.com/the-pythagorean-cup-the-cup-that-spills-your-drink-when-you-get-too-greedy. 본고에서는 계영배와 중국의 공도배 모두 Siphoned cup으로 표기하고자 한다. 서양 계영배 관련 정보는 지도학생인 고려대 박사수료생 이정민의 도움을 받았다.

12) 방병선, 『중국도자사연구』(경인문화사, 2012), pp. 500-505.

13) 謝明良, 「記清宮傳世的一件南宋官窯青瓷酒盞」, 『故宫文物月刊』393期(臺北: 國立故宮博物院, 2015), pp. 66-73.

14) 중국의 도류호가 사이펀의 원리를 사용한 서양의 Tantalus cup에 영향을 받아 당대(唐代) 제작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마땅한 근거 자료는 없다.

15) 馬自樹主編, 『中國文物定級圖典——一級品·上卷』(上海: 上海辭書出版社, 1999年 12月). 섬서역사박물관의 전시 패널에는 注水壺로 명명되었다.

16) 杜文, 「倒裝壺源流考述」, 『收藏家』(北京: 北京市文物局, 2005年11期), pp. 40-44.

17) 陳盡忠, 李萍, 「結構獨特的唐代白瓷執壺」, 『文物』(北京: 文物出版社, 2012年3期), p. 59.

18) 張志光, 「文物中的科學原理-以倒流壺爲例」, 『故宮文物月刊』 416號(臺北: 國立故宮博物院, 2017), pp. 82-87.

19) 臺北故宮博物院編輯委員會編, 『宋官窯特展』(臺北: 國立故宮博物院, 1989), p. 108, 圖72.

20) 謝明良, 앞의 논문, p. 70, 圖3 참조.

21) 新浪微博, www.collection.sina.com.cn

22) 『承政院日記』 1746冊, 正祖 19年 6月 18日條. “乙卯六月十八日卯時 上詣明政殿 慈宮邸下周甲誕辰 親傳敎詞箋 文表裡入侍時 ……上曰 進饌異於進宴 …… 依今春華城進饌時例 …… 慈宮饌案八十二器 ……畫唐大楪各色蜜 粘雪只一器 ……彩花銅沙器 有前大圓盒眞苽一器 ……幷用甲燔器皿 ……”.

23) 방병선, 『도자기로 보는 조선왕실문화』(민속원, 2016), pp. 131-138.

24) 李押, 『燕行記事』聞見雜記(민족문화추진회, 1976). “…通州則香價雖踊積 而色品與制刻 勝於燕市 歸時卜物結 裹大布繩子及口袋 留館時所用鐵絲·燭籠·肉觸·粮太等物價直 比燕京差歇 故人皆賣買 至於磁器及花品亦佳矣 及其回還 使行出柵 仍令互市于柵外 凡東商紙扇·牛革·綿布·魚網·狐狸之皮 自義州照數入送定 以一萬兩價 銀 不許濫入 貿取于柵商者 棉花·鋡錫·蘇木·胡椒·龍眼·荔枝·閩薑·橘餠·各種磁器之屬”.

25) 朴趾源, 『熱河日記』 「盛京雜識·古董錄」(민족문화추진회, 1976), pp. 147-148.

26) 朴齊家, 『北學議』內編 瓷(아세아문화사, 1992). “中國瓷器無不精者 雖荒村破屋之中 皆有金碧綵畵之壺鐘罐碗 之屬 非其人之必好奢也 土工之事當如此也 我國瓷器極麤 沙粘其下仍而燒成 累累如乾飯 曳之 傷盤卓之屬 洗 之 滯滓穢之物 置之于地 恒臲兀而數傾 口哨而色惡 不可名狀 國之無法 至於此而極矣 舜陶河濱 器不苦寙 三 代之器 逾古逾巧 今雲從街上 列置累千瓷器 若在三代之時 皆在不得鬻之列者也 碎之而不足惜 碎不足惜之心 生 而可惜之器 亦不得完 今司饔院燔器 號稱極精者 猶太肥重 以爲不如是 必傷也 反咎中國之器焉”.

27) 정양모·최건, 「조선시대 후기백자의 衰退要因에 관한 고찰」, 『한국현대미술의 흐름』 石南李慶成先生古稀紀 念論叢(일지사, 1988), pp. 348-359; 최건, 「朝鮮時代 後期 白磁의 諸問題」, 『陶藝硏究誌』 5호(漢陽女專 도예연구소, 1990), pp. 103-117.

28) 李喜經, 『雪岫外史』(아세아문화사, 1986). “天下之物 貴不可偏愛 賤不可偏棄 使賤反貴 使貴反賤 以資生民 以 適萬世之用 是爲制産之法意也 若以金銀銅錫謂之可貴 而使民常用 莫知禁焉 則貴者尤貴 而反不用於貴用之地 矣 …我國僻處海隅壤地偏少 金銀銅錫 每有邦禁 民不常採 本自稀貴 而金銀則日走中原化爲易敝 無用之物 不 過數年消盡無痕 銅錫則又以蔘布換取 … 中國則不然 上自天子下至微末士庶 朝夕飮饌之器 只用磁器 雖匙箸 之微 以磁以木 竟無銅錫 盖磁者 不過燔土爲制 以至賤之料 成至繁之物 遍之天下 用之無盡 其法意之美 足産 之道 從可知矣 且物不精 則人必賤之 故百工究法 務售奇巧 古之宣成窯者 瑩白如玉 制度皆異 施以五彩爛成花 繡 用之蒸嘗 百神宜亨 用之宴讌 賓主爲樂 至於茶酒之鍾 氣味相稱 寔助馨香 文人韻士 尤爲愛玩也 況其哥窯 之冰紋者 世稱稀寶 樽罌之屬 價重百金 故嘗聞燔磁之日 祭神而祝之 或有窯變 一出羅漢之相 百怪之物 幻化莫 測 窯者得之因爲巨富 是其制度之極 必有神鬼之所感而然也”.

29) 洪大容, 『湛軒書』外集 燕記 卷十. “日用專尙磁器 鍮鑞次之 黃銅次之 白銅黃錫又次之 其磁器之破者 從外施鐵 釘 嘗見施釘者 以鐵鑽鑽之 架釘而椎之 頃刻而完 但鑽不透內 釘固不退 最是不可思議也 琉璃廠及通州市磁器 寶翫珍怪充溢 其數尺壺樽 彩虹蜺色 兩耳雕螭龍 貫大金環 異光奪目 其西洋磁器內爲銅器 外塗以磁華 而牢磁 之巧品也”.

30) 徐有榘, 『林園經濟志』. “炊爨之具 儲藏諸器 ‘瓷盒’ 倭造者佳或作哥窯紋 而金畫七寶 或金碧彩畫 皆三格層累爲 一盒 華造者制亦似之 我東官窯造者 但能作一格 不能作層累之格 品亦麤劣 不入鑑賞 (金華耕讀記)”.

31) 徐有榘, 앞 책. “若華造畫瓷甁·哥窯甁·琉璃甁 及數尺觚鬲 揷花揷翠之壺罇 入柵以後 店房村舍到處皆有云 而 我東 則京貴讌會努力侈觀者 僅有畫瓷 壺杯唱酬而已 雖公卿豪貴家廚婢目 不識哥窯琉璃之爲何物 蓋由國中陶 窯之失其制 而陶制因以魯莽也”.

32) 申炳周, 「19세기 중엽 李圭景의 學風과 思想」, 『韓國學報』 75輯(일지사, 1994 여름), pp. 144-173.

33) 李圭景, 『五洲書種』, 陶窯類 制陶窯上假彩法.

34) 李圭景, 앞 책, 磁器類 制哥窯紋法, 陶窯類 制瓷紋哥窯陶法; 憑虛閣 李氏, 『閨閤叢書』(鄭良婉譯, 보진제, 1975), p. 170.

35)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上 卷27 <古今瓷窯辨證說> “詳見天工開物林原十六志”. 『五洲書種』, 磁器類 制哥 窯紋法, 陶窯類 制瓷紋哥窯陶法.

36) 방병선, 「이형록의 책가문방도 팔곡병에 나타난 중국도자」, 『강좌미술사』 284(한국미술사연구소, 2007), pp. 209-238.

Fig. 1.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 Blue and white siphoned water dropper with openwork dragon and cloud design, 19th century, Joseon Dynasty, H. 11.5cm,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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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백자청화투각운룡문연적> CT, CT Modeling in Blue and white siphoned water dropper with openwork dragon and cloud desig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 by Byung Sun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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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청자도형연적>, Celadon peach shaped siphoned water dropper, 12th century, Goryeo Dynasty, H. 8.6cm, Leeum, Samsung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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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청자모란문도류주자>, Celadon siphoned ewer with peony design, Northern Song Dynasty (960-1127), H. 18.3cm, Shaanxi History Museum (photo by Byung Sun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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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백자거북형계영배>, Turtle shaped white porcelain siphoned cup and stand, 19th century, Joseon Dynasty, H. 13.3cm,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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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백자거북형계영배> CT, CT Modeling in Turtle shaped white porcelain siphoned cup and stand,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 by Byung Sun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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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백자양각쌍학문계영배>, White porcelain siphoned cup and stand with embossed pair of cranes design, 19th century, Joseon Dynasty, H. 10cm,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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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백자양각쌍학문계영배> CT, CT Modeling in White porcelain siphoned cup and stand with embossed pair of cranes desig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photo by Byung Sun B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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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양채누공선전병>, Yangcai spiral vase with double openwork design, Qianlong (1736-1796), Qing Dynasty, H. 23.5cm,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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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청자모란문도류주자> 도류호의 원리 설명도, Principle description of celadon siphoned ewer with peony design (Photo from Zhangzhiguang, Wenwu zhong de kexueyuanli yi daoliu huweili, p. 86, pl.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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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백자도류주자>, White porcelain siphoned ewer, 9th century, Tang Dynasty, Zhengzhou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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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오채용봉문도형주자>, Wucai peach shaped siphoned ewer with dragon and phoenix design, 18-19th century, Qing Dynasty (1616-1912), H. 14.7cm,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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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3.
<오채용봉문도형주자> 도류호의 원리 설명도, Principle description of wucai peach shaped siphoned ewer with dragon and phoenix design (Photo from Zhangzhiguang, Wenwu zhong de kexueyuanli yi daoliu huweili, p. 85, pl.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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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4.
<청자잔>, Celadon siphoned cups, Southern Song Dynasty (1127-1279), H. 5.4cm,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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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5.
<청화백자구룡공도배>, Blue and white porcelain siphoned cup and stand with nine dragons design, Yongle(1402-1423), Ming Dynasty, H. 20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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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6.
<청화백자구룡공도배> 공도배의 원리 설명도, Principle description of blue and white porcelain siphoned cup and stand with nine dragons design (Photo from Collection Sina, Kangxi's beloved object: Principle description of blue and white porcelain siphoned cup and stand with nine dragons design, www.collection.sina.com.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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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7.
<의흥요녹지분채공도배>, Fencai yixingyao siphoned cup with green ground, Gunagxu(1871-1908) Qing Dynasty, H. 6cm, National Palace Museum, Tai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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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8.
<법랑채황지장미문병>, Enamel Vase with rose design and yellow ground, 18th century, H. 14.8cm, National Palace Museum of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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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9.
이형록, <책가문방도>, Yi Hyungrok, Chaekgamunbangdo, 19th century, Joseon Dynasty, color on paper, 139.5×421.2cm, Leeum, Samsung Museum of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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