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隨求陀羅尼의 유형과 활용 양상*

The Types and Uses of Mahāpratisarā-dhāraṇī in Goryeo Period*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1;309():5-39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1 March 31
doi : https://doi.org/10.31065/kjah.309.202103.001
**Myongji University
김보민**
**명지대학교
*

이 글은 김보민, 「고려시대 수구다라니 연구: 불복장 및 분묘 출토품을 중심으로」(명지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018. 2) 일부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Received 2021 January 14; Revised 2021 January 16; Accepted 2021 February 19.

Abstract

이 논문은 고려시대 수구다라니의 유형과 그 활용 양상을 살펴본 것이다. 수구다라니는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암송의 형태로 수행에 사용되었다. 그리고 중국과 마찬가지로 서사되어 합, 탑 등에 넣어졌다. 고려시대 수구다라니는 대부분 목판인쇄본으로 본고에서는 이를 13세기 전·후의 유형으로 분류했다. 첫 번째 유형은 고려 중기인 12세기 사례로 도상과 이미지를 활용한 것이다. 이들의 전체적인 구성은 중국 9~10세기 수구다라니와 유사하지만, 세부적인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해 나갔다. 두 번째 유형은 13세기 이후의 사례로 도상과 이미지에서 탈피해 텍스트만으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수구다라니는 분묘와 불복장에서 발견됐다. 분묘의 사례로 보아 중국 당대에 수구다라니를 분묘에 납입하는 전통이 고려시대에서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불복장에서 발견된 수구다라니는 중국에서 아직 그 사례가 보고되지 않아 고려시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수구다라니를 불복장에 납입하는 것은 불복장 의례의 규범 내에 위치하는 여타의 다라니와는 그 성격에 차이가 있다. 즉, 수구다라니는 불복장 의례 규범의 그 바깥에 위치하면서도 개인적인 신앙으로 제작되어 사용되었고, 발원자들은 수구다라니에 담은 소망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불복장이라는 성소에 납입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Trans Abstract

This study analyzes the types of Mahāpratisarā-dhāraṇī made in Goryeo Period and considers their roles in religious practices. Introduced to the Korean peninsula during the late Unified Silla period at the latest, Mahāpratisarā-dhāraṇī was recited from memory as a part of religious training. As in China, transcriptions of the text were made and placed in containers or pagodas. Most examples of Mahāpratisarā-dhāraṇī made during Goryeo Period were woodcut prints, which can be categorized into two types, as those made before and after the 13th century. The first type, made in the 12th century, in mid-Goryeo, were transcribed with iconographical images. They resemble 9th and 10th century Chinese examples in overall composition but also contain some original details. The second type, made after the 13th century, has no illustrations and only texts. Two types in Goryeo Period were found in tombs or consecrated inside Buddhist statues as bulbokjang. Burying Mahāpratisarā-dhāraṇī inside tombs was a custom imported from and continued since Tang China, but consecration was a practice specific to Goryeo without any precedence in China. Mahāpratisarā-dhāraṇī differs from other dhāraṇī usually placed inside Buddhist statues as they were made and used only as a form of personal worship, representing the wishes of the donors who had ordered and consecrated the transcriptions in hopes of continuation of their prayers.

Ⅰ. 서론

2004년 광주광역시에 소재한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에서 <수구다라니>가 발견됐다(Fig. 1). 이 <수구다라니>는 1184년에 목판인쇄된 것으로, 고려시대에 제작된 수구다라니의 첫 발견사례로 꼽힌다. 이후 불복장물의 조사가 활발해지며 다른 불상에서도 고려시대 수구다라니가 연이어 발견됐다. 2007년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 2014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목조관음보살좌상에서 나온 <수구다라니>가 그것이다. 그리고 2017년 합천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불좌상에서는 수구다라니가 인쇄되어 있는 <절첩 수진본 다라니경>이 발견됐다. 이처럼 활발한 불복장 조사에 따라 여러 수구다라니가 알려지면서 이들에 대한 연구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Fig. 1.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mitabha Buddha at Ch‘aunsa, 1184, Xylograph, 33.5×34.5cm (Photograph by Kim Bo Min)

陀羅尼란 일반적으로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 외우는 불교 주문으로 다양한 종류가 알려져 있다.1, 그중 몇몇은 암송을 넘어 경전의 지침에 따라 시각화되어 사용되었다.2, 대표적인 예는 隨求陀羅尼와 佛頂尊勝陀羅尼이다. 수구다라니는 해당 다라니 음을 종이에 써서 팔이나 목에 착용함으로써 착용자에게 다라니의 영험함이 전해지고, 불정존승다라니는 높은 石幢에 다라니 음을 새기면 경당을 스친 바람 혹은 먼지를 통해 다라니의 영험함이 옮겨진다. 두 다라니는 각각 종이와 돌기둥이라는 ‘물질’을 통해 이를 소지하거나 접촉하는 자에게 다라니가 가진 힘을 전이시킨다.3

이처럼 시각화된 다라니 중에서도 수구다라니는 다른 다라니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다. 첫째, 다양한 도상과 형태를 활용해 다라니를 구성했다. 단순히 다라니만 서사하거나 변상도를 덧붙이는 게 아니라 경전의 지침에 따라 부처나 보살, 다양한 인물상이 발원의 대상에 따라 그려졌다. 그리고 다라니는 인물상을 둘러싼 형태로 서사되고, 그 바깥으로는 밀교 법구나 수인 등 다양한 이미지가 배치됐다. 비록 시대에 따라 형식이 변하기는 했지만 초기 서사단계에서부터 이와 같이 다양한 도상이 활용된 다라니는 보기 드물다. 둘째, 단순히 암송하고 서사하는 것을 넘어 다라니의 ‘착용’이 강조되었다. 물론 다라니의 착용을 설한 다른 경전들도 있지만, 수구다라니의 경우 경전의 지침에 따라 착용했음을 알 수 있는 다수의 사례가 있다. 이러한 착용은 불복장과 탑의 납입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확대되어 갔다.

국내 학계에서 수구다라니에 대한 연구는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 발견 <수구다라니>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복장물목을 수습한 직후에 발간된 논문에서 이 수구다라니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례로 소개됐다. 그리고 다라니의 간기를 통해 간행 연대와 장소가 밝혀졌고, 이를 통해 복장의 최초 납입 시기가 추정되기도 했다.4, 자운사 <수구다라니>를 단독으로 연구한 것은 근래에 들어서다. 수구다라니를 설한 한역 경전들의 설화와 그 특징 그리고 唐·宋代, 고려에서 제작된 수구다라니 사례가 소개되었으며, 이에 대한 비교분석이 이루어졌다.5, 나아가 수구다라니경이 기존의 인식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 활발히 유통되고 사용되었음을 밝힌 연구도 진행되었다.6 하지만 고려시대에 제작된 수구다라니에 초점을 맞춘 도상분석 및 비교, 수구다라니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서는 아직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 없다.

본고에서는 선행연구를 바탕으로 고려시대 수구다라니 중에서도 제작 연대와 수구다라니가 납입된 당시의 정황이 추정 가능한 대상을 선정해 기존의 연구에서는 다루지 않았던 다음의 문제를 보완함으로써 미술사학적 의의를 도출하고자 한다. 첫째, 고려시대 수구다라니에 사용된 도상의 기원을 알아보기 위해 수구다라니의 대표 한역경전과 더불어 중국의 수구다라니 사례를 기존의 연구를 바탕으로 검토해보겠다. 둘째, 본고에서 선정한 고려시대 수구다라니를 기년작을 기준으로 도상을 분석하고, 중국 수구다라니와 비교 검토하여 시대에 따른 변천과정을 알아보겠다. 셋째, 고려시대 수구다라니가 불복장과 분묘에 납입된 상황을 재구성하여 납입장소에 따른 수구다라니의 역할을 밝히겠다. 이를 통해 고려시대 불교미술 및 시각문화의 다채로운 양상을 조명해 보는 것이 본 논문의 목적이다.

Ⅱ. 중국 수구다라니의 기원과 전개

수구다라니를 설한 대표 한역 경전은 7세기 말 寶思惟가 한역한 『佛說隨求卽得大自在陁羅尼神呪經』(이하 보사유 역 『수구즉득다라니』)과 8세기 중엽 不空이 한역한 『普遍光明淸淨熾盛如意寶印心無能勝大明王大隨求陀羅尼經』(이하 불공 역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 『金剛頂瑜伽最勝秘密成佛隨求卽得神變加持成就陀羅尼儀軌』(이하 불공 역 『성불수구즉득신변다라니』)가 있다.7 이 중 보사유 역 『수구즉득다라니』와 불공 역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에는 수구다라니의 서사법이 제시되어 있다. 그리고 세 경전은 서사된 수구다라니의 ‘착용’과 그로 인해 얻게 되는 사후세계 이익을 공통적으로 피력한다. 이와 같은 경전의 내용과 부합하는 유물은 중국에서 다수 발견되어 주목된다.

중국에 현전하는 수구다라니는 20여 점으로 唐代부터 北宋代에 걸쳐 제작되었다.8 이들은 대체로 삼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구성은 한가운데의 ‘중앙부’에서부터 바깥쪽으로 ‘주연부’, ‘외곽부’로 나눌 수 있다. 중앙부에는 주로 존상 및 인물이 표현되어 있다. 주연부는 서사된 다라니가 둘러싸고 있다. 외곽부에는 다양한 밀교법구와 수인 등이 배열된다. 이러한 수구다라니 중앙부의 도상과 주연부, 외곽부의 형태 및 표현방식은 시대에 따라 변화했다.

중국 수구다라니 중 가장 이른 시기에 제작된 사례는 허난성(河南省) 출토 <수구다라니>이다(Fig. 2). 비단에 채색을 한 것으로, 간기를 통해 8세기 초반에 제작된 것을 알 수 있다.9, 이 다라니는 방형의 삼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부에는 보살이 연화좌 위에 앉아 있다. 한 손에는 금강저를 들고, 다른 한 손은 보살의 오른쪽에 있는 인물의 머리 위에 올리고 있다. 이 인물은 무릎을 꿇은 채 보살을 향해 경건하게 합장을 하고 있다.10 주연부에는 범자다라니가 둘러져 있다. 외곽부에는 화염에 둘러싸인 밀교법구들이 연꽃 위에 놓여 배열되어 있고, 네 귀퉁이에는 연꽃봉오리를 담은 향로가 배치되어 있다.

Fig. 2.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excavated from Henan, early eighth century, Ink and colors on silk, 21.5 ×21.5cm, Yale University Art Gallery (https://artgallery.yale.edu/)

이른 시기의 제작으로 추정되는 또 다른 사례는 시안(西安) 출토 <수구다라니>이다 (Fig. 3). 이 다라니에는 간기가 없으나 수구다라니 경전의 역출 시기와 화풍으로 보아 당 玄宗 시기(재위년, 712~756)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11 이 다라니 역시 허난성 출토 <수구다라니>와 같이 방형의 삼중 구성이지만 세부표현은 차이가 있다. 시안 출토 <수구다라니> 중앙부에는 입상의 금강역사가 한 손에는 금강저를 쥐고 다른 한 손은 좌측의 인물을 향해 뻗고 있다. 주연부는 네 개의 직사각형으로 구획되어 있다. 외곽부의 법구는 스케치처럼 간결하게 표현되어 있다.

Fig. 3.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excavated from Xian, Eighth century, Tang, Stamped and handwritten on paper, 28.3×32.7cm (Xi’an Fengxi chutu de Tang yinben Fanwen tuoluoni zhou, Kaogu 5, p. 93)

이 두 다라니의 형태는 앞서 언급한 보사유 역 『수구즉득다라니』와 불공 역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에 제시되어 있는 수구다라니의 서사법과 어느 정도 상통한다. 첫째, 중앙부에 보살 또는 금강역사가 묘사된 것은 상황에 맞추어 신을 다르게 그려야 한다는 경전의 서사법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보사유와 불공의 한역본에는 다라니를 서사하는 방법이 발원자의 신분이나 상황에 따라 다르게 서술된다.12, 더구나 같은 형식의 수구다라니 중 중앙부가 비어 있는 사례들이 발견된 바 있다.13, 이는 다라니의 전체구성을 완성한 후, 다라니 소지자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중앙의 신을 선택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는 사례이다.14, 다라니 제작 당시 중앙부를 비워둠으로써 다라니를 소지하게 될 사람은 경전에서 제시하는 서사법을 용이하게 실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 둘째, 외곽부에 배치된 법구와 향로의 표현이 보사유 역 『수구즉득다라니』에 제시된 단을 만드는 지침과 유사하다. 경전에서는 단의 네 모서리에 병을 하나씩 두고, 크고 활짝 핀 연꽃을 만들어 이 위에 금강저, 도끼, 칼, 소라나팔 등을 놓을 것을 설한다.15, 특히 폴 캅(Paul Copp)은 이 구절을 지적하며 허난성 출토 <수구다라니>의 외곽부 도상이 보사유 한역본을 충실히 따랐을 가능성을 제시했다.16

그런데 8세기 후반부터 다수의 수구다라니에는 중앙부에 八臂의 大隨求菩薩이 등장하기 시작한다.17, 신상과 인물상이 함께 등장한 이전 시기와는 달리 대수구보살은 정면관을 한 채 홀로 표현되거나 인물상의 비중은 작아진다. 대표적인 사례는 청두(成都) 쓰촨대학(四川大學)에서 발견된 목판인쇄본 <수구다라니>이다(Fig. 4). 다라니 오른편 간기의 ‘成都府’를 통해 제작 시기를 8세기 중후반으로 볼 수 있다.18, 이 다라니는 방형의 삼중 구성으로 중앙부에 팔비의 대수구보살이 있고, 이를 범자 다라니가 둘러싸고 있다. 외곽부에는33개의 연꽃 위에 놓인 밀교법구, 보살상 등이 배열되어 있다. 이외에도 시안과 허난성 등에서 발견된 다수의 수구다라니 중앙부에 대수구보살이 등장한다.19 그리고 9~10세기에는 대수구보살을 중심에 둔 원형의 삼중 구성이 새로운 유형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Fig. 4.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excavated from Sichuan, Eighth, ninth century, Xylograph, 31×34cm, Sichuan University (Zhongguo fojiao banhua quanji 1, p. 6)

한편 1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 수구다라니의 구성과 체계가 크게 변화한다. 삼중 구성 다라니의 여백에 장식요소가 추가되고, 다라니 하단에 수구다라니의 사용법과 효험에 대한 핵심 구절이 한문으로 제시된다. 돈황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된 수구다라니에서 그 모습을 볼 수 있다. 먼저 스타인(Stein)본 <수구다라니>이다(Fig. 5). 이 다라니의 하단에는 사각형의 방제가 있다. ‘太平興國五年(980)’을 통해 판각 및 인쇄시기를 추정할 수 있으며, “수구다라니를 서사하여 팔이나 머리에 지닌 자는 보호를 받고 안락을 얻는다”는 수구다라니의 사용법에 따른 효험이 한문으로 간략하게 적혀 있다.20, 다라니의 원형 중앙부에는 연화좌에 앉은 정면관의 대수구보살이 있다. 주연부는 범자다라니가 중앙부에서부터 동심원으로 둘러져 있다. 이 중앙부와 주연부는 큰 연화대좌 위에 얹혀 있으며, 이를 2구의 신장상이 어깨에 인채 파도가 넘실대는 물위에 서 있는 것처럼 표현되어 있다. 그리고 다라니의 가장자리를 따라 천인, 금강저 등의 요소들이 반복적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처럼 화려한 장식 요소와 하단의 방제가 추가된 것은 펠리오(Pelliot)본 <수구다라니>(MG17688)에서도 마찬가지다(Fig. 6). 이 다라니는 중앙부의 존상과 주연부의 형태가 스타인본과는 차이가 있으나 하단의 방제, 다라니 가장자리를 천인, 금강저 등으로 장식한 점이 유사하다. 특히 방제에 있는 수구다라니의 사용법과 효험에 대한 내용은 간기를 제외하면 내용, 행과 글자 수가 스타인본과 아주 유사하다.21, 그밖에 펠리오 본 <수구다라니>(MG17689)에서도 위와 같은 특징을 볼 수 있다.22

Fig. 5.

스타인본<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980, Dunhuang Mogao cave 17, Xylograph, 43.2 ×31.8cm, Stein Painting 249 (ⓒBritish Museum)

Fig. 6.

펠리오 본 <수구다라니>(MG17688), Mahāpratisarā-dhāraṇī, Tenth century, Dunhuang Mogao cave 17, Xylograph, 37×29.7cm (ⓒLe musée Guimet)

이로 보아 10세기 돈황 지역의 수구다라니는 이전 시기에 경전의 서사지침을 준수했던 다라니에 비해, 기본적 구성은 따르면서도 여백 공간에 새로운 장식 요소들이 추가되는 등 비교적 자유롭게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단에 배치된 수구다라니의 핵심 내용이 적힌 한문 방제는 사용자에게 있어 수구다라니의 사용법과 효험의 메시지를 직접 전달해주는 효과적인 보조 장치로 기능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된 특징들은 이 시기 돈황 지역에서 수구다라니가 이전에 비해 보다 대중적으로 활발히 쓰였음을 시사한다.

북송대에도 수구다라니가 제작되었다.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 서광사탑 3층 천궁에서 발견된 眞珠舍利寶幢 안에서 <수구다라니>가 나왔다(Fig. 7).23, 다라니의 하단의 발원문을 통해 1001년에 항저우(杭州)에서 인쇄되었음을 알 수 있다.24 중앙부와 주연부는 모두 원형으로 이전의 수구다라니와 유사하지만 주연부 바깥에 4구의 신장이 다라니를 호위하듯 서 있는 모습은 다르다. 중앙부의 도상은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로 추정된다. 주연부의 다라니는 한문으로 쓰여 있다. 다라니 좌우의 가장자리에는 두 줄로 테두리를 만들고 그 안에 공양자의 이름과 직위를 명시했다. 이처럼 서광사탑 <수구다라니>는 10세기의 기본적인 구성을 따르면서도 비로자나불상, 신장상, 한자다라니와 같은 새로운 요소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북송대에는 또 다른 유형의 수구다라니가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Fig. 7.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Ruiguansi pagoda, 1001, Xylograph, 44 ×36.1cm (Soju sŏgwangsat’am ch’ult’o Puksongch’ogiŭi pulgyomunhŏn yŏn’gu, p. 99)

이상으로 중국의 수구다라니를 살펴보았다. 7세기 초에 수구다라니는 경전의 서사지침을 충실히 따르며 삼중 방형의 구성으로 제작되었다. 7세기 후반에는 중앙부의 도상이 대수구보살로 정형화되는 경향을 보이며 삼중 원형의 구성이 나타나기도 했다. 10세기 이후에는 다라니 여백에 장식요소가 추가되고 다라니 하단에 사용법과 효험이 제시되기도 하는 한편 도상의 변형이 나타나기도 한다. 여기서 보이는 몇몇 요소들은 뒷장에서 살펴볼 고려시대 수구다라니에서도 보인다.

한편 출토 장소 및 납입 방법을 통해서도 중국 수구다라니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다. 당의 사례들은 대부분 분묘에서 나왔고, 그 이후의 사례들은 돈황 막고굴 장경동과 탑에서 발견되었다. 분묘의 수구다라니는 주로 합, 팔찌와 같은 공예품에 넣어진 채로 나왔다. 먼저 합에서 발견된 사례는 허난성 출토 <수구다라니>이다(Fig. 2). 이 다라니는 가로와 세로로 6번씩 접은 흔적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접혀져 합에 넣어진 상태로 부장되었을 것이다(Fig. 8). 팔찌의 경우는 다라니를 돌돌 말거나 접어서 그 속에 넣었는데, 쓰촨대학 출토 <수구다라니>는 팔찌가 시신의 몸에 착용된 채로 발견된 사례이다(Figs. 4, 9). 이 다라니와 전체적으로 구성이 동일한 시안 출토 수구다라니도 팔찌에서 발견되었다.25, 또한 수구다라니로 추정되는 1cm 남짓의 다라니 잔편이 작은 경통이 달린 팔찌에서 발견되기도 했다.26, 이처럼 분묘에 수구다라니를 부장품으로 두거나, 팔찌에 넣어 시신에 착용시킨 것은 수구다라니 경전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되고 있는 사후세계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 보인다. 경전에서는 죄를 지은 사람도 수구다라니를 착용하거나 소지하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한다.27 당시 사람들은 이를 인지하고 실제로 수구다라니를 시신에 착용시키거나 분묘에 부장품으로 넣으며 망자를 추복했을 것이다. 돈황 막고굴 장경동은 이곳이 최종 납입장소라기보다는 경전을 포함한 문서류를 폐기 또는 은닉, 보관하기 위한 장소로 생각되는 점에서 수구다라니의 사용에 대해서는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다만 수구다라니의 착용이라는 사용법이 다라니 하단에 한문으로 기입되어 있어 다라니의 활용 방식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서광사탑 <수구다라니>는 사리장엄구에 사리와 함께 안치되었다. 11세기 초에 수구다라니가 분묘에 납입되거나 착용되는 것을 넘어서 사리장엄구의 물목 중 하나로 선택·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Fig. 8.

<합>, Case excavated from Henan, Bronze, Yale University Art Gallery (https://artgallery.yale.edu/)

Fig. 9.

<墓葬平面圖>, Drawing of anonymous Tang-era tomb, Sichuan (Ji Tang yinben tuoluni jingzhou de faxian, Wenwu cankao ziliao 5, p. 49)

Ⅲ. 고려시대 수구다라니의 수용과 발전

현재 알 수 있는 우리나라의 가장 이른 수구다라니는 광주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 발견 1184년명 목판인쇄본이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국의 수구다라니는 당대부터 활발히 제작 및 사용되었던데 반해, 동시기인 통일신라시대의 수구다라니 실물은 아직 확인되지 않는다. 하지만 통일신라시대의 수구다라니와 관련된 기록이 전해지며, 최근에는 고려 이전으로 추정되는 유물이 공개되었다. 이를 통해 고려 이전의 수구다라니 신앙을 단편적으로나마 살펴 볼 수 있다.

1. 고려시대 이전 수구다라니의 수용

『三國遺事』 卷3 第四 「臺山五萬眞身條」에는 寶川이 허공을 나는 신통력을 얻은 후, 蔚珍國掌天窟에서 밤낮으로 수구다라니를 외웠더니 窟神이 나타나 보살계를 받기를 청했다는 내용이 있다.28, 이는 8세기 전반의 사건으로 논의되고 있어 통일신라시대에는 수구다라니가 적어도 개인 수행에서 암송되었던 것이 확실해 보인다.29

9세기 말에는 서사된 수구다라니가 사용되었음을 추정해 볼 수 있는 기록이 전한다. 바로 <합천 해인사 길상탑>에서 나왔다고 전해지는 <海印寺妙吉祥塔誌>이다.30, 이 탑지는 총 4매의 전판에 6개의 기록이 새겨져 있다. 그중 제1판의 앞면은 崔致遠(857~?)이 찬한 서문으로 乾寧二年(895)의 연대가 있다.31, 나머지 판의 기록도 서문과 같은 시기에 새겨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중 네 번째 판인 「百城山寺前臺吉祥塔中納法賝記」에는 길상탑에 넣은 법보로서 무구정대다라니경, 법화경 등과 함께 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를 납입했다는 내용이 있다.32, 그런데 ‘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는 최치원이 904년에 당나라 法藏의 생애를 서술한 「唐大薦福寺故寺主飜經大德法藏和尙傳」에도 마찬가지로 등장한다.33, 이 기록에 따르면 법장은 睿宗연간(710~712)에 비를 내리게 하기 위해 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를 서사해 龍湫에 던졌다고 한다.34 여기서 언급한 수구다라니는 祈雨의례에 효험을 가져다주기 위해 사용한 물질화된 다라니로, 보천이 수행에서 읊었던 수구다라니와는 성격이 다르다. 최치원이 유학했을 시기의 당에서는 이미 수구다라니를 제작해 기우, 장례와 같은 특정 목적의 의례에서 활발히 사용하고 있었으며, 그 역시 이를 알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나아가 그는 885년 귀국 후, 895년에 <해인사묘길상탑지>의 서문을 쓰면서 백성산사 탑의 납입물목으로 유학 시기 당에서 익히 알고 있었던 수구즉득대자재다라니를 길상탑의 물목으로 선택하는 데 관여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한편 최근 조선총독부박물관 유리건판 사진에서 중국 8세기 초 수구다라니와 유사한 다라니가 발견되어 주목된다(Fig. 10).35 이 다라니는 ‘금동제호부용기 내 범자문편(건판 017528)’이라고 명명되어 있다(이하 유리건판 다라니). 유물 정보에 따르면 경주 남산에서 출토되었으며, 사진 상으로 봤을 때 2개의 필사본 수구다라니가 좌우에 나란히 표구되어 있다. 향 좌측의 다라니는 정방형의 삼중 구성이다. 중앙부의 형태는 훼손되어 알 수 없으며 주연부는 한자 다라니를 둘렀다. 외곽부에는 연꽃 위에 화염에 싸인 법구들이 배치되어 있다. 바로 옆의 다라니는 직사각형의 삼중 구성으로 수평으로 뒤집혀 표구되어 있다. 중앙부에는 훼손이 있지만 보살로 보이는 입상이 향 우측의 무릎을 꿇은 인물에게 손을 뻗고 있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다. 인물은 무릎을 꿇은 채 무언가를 들고 보살을 향하고 있다. 주연부는 범자다라니를 둘렀다. 외곽부에는 각종 법구들이 표현되어 있다.

Fig. 10.

<경북 경주 남산 금동제호부용기 내 범자문편>,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Gyeongju Namsan Mountain, Unified Silla, handwritten on paper, A glass plate no. 017528(ⓒNational of Museum of Korea)

<유리건판 다라니>에 표현된 방형의 삼중 구성, 중앙부의 신상과 인물, 외곽부의 향로와 법구 등은 앞서 살펴본 중국 8세기 초 허난성 출토 사례와 매우 유사하다. 앞으로 살펴볼 고려시대 수구다라니는 대부분 필사본이 아닌 목판인쇄본이며 이러한 특징이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유리건판 다라니>의 제작시기를 중국의 8세기 초와 멀지 않은 고려 이전 시기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만약 그렇다면, 이는 중국 당대와 동시대인 통일신라시대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이른 사례가 등장하는 고려 중기 이전까지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매우 중요한 표지 유물이 될 수 있다.

2. 고려시대 수구다라니 사례

우리나라 8~9세기에 암송과 서사된 수구다라니는 고려시대에도 계속해서 제작됐다. 현재 알려진 고려시대 수구다라니는 10여 점이다.36 그중 제작연대와 납입장소를 알 수 있는 6점의 목판인쇄물을 연대 순서에 따라 살펴보고자 한다. 그 결과 고려시대 수구다라니는 13세기를 기점으로 크게 두 유형으로 나뉜다. 첫 번째 유형은 도상과 이미지를 활용한 것이고, 두 번째 유형은 텍스트로만 구성된 것이다.

첫 번째 유형의 사례 중 가장 이른 것은 자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수구다라니>(1184)이다(Fig. 1). 정사각형에 가까운 종이의 중앙에 다라니가 찍혀 있고, 상단 방제의 ‘如意寶印大隨求陁羅尼梵字軍陁羅相’로 보아 불공 역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향 좌측 하단의 방형구획에는 간기가 있는데, 그중 ‘大定二十四年甲辰’이 있어 1184년 이후에 인쇄된 것임을 알 수 있다.37 다라니는 삼중 원형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화좌 위에 올려져 있다. 세부적인 모습을 살펴보면, 중앙부에는 한 인물이 복련의 연화좌 위에 右膝着地 즉, 왼쪽 무릎을 올린 채 꿇어 앉아 있다. 왼손에는 지물을 들고 있는데, 정확한 형상은 확인할 수 없으나 둥근 형태의 물건임은 확실하다. 보관과 가슴의 영락 장식으로 볼 때, 보살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된다. 천의자락은 바람에 날리듯 표현되었다. 다음으로 주연부에는 범자다라니를 둘렀다. 총 21줄의 나선형 다라니는 보살의 왼손 부근에서 시작하여 시계방향으로 돌아나간다. 외곽부에는 복련의 연화대좌 위에 올려진 33개의 밀교법구와 보살좌상 등이 배열되어 있다.

현재 전하는 중국의 수구다라니 중 자운사 <수구다라니>와 동일한 것은 찾아볼 수 없다. 하지만 중국 수구다라니의 도상과 유사한 특징들을 공유하고 있어 이를 부분적으로 차용해 고려에서 독자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보인다. 먼저 연화대좌 위에 올려져 있는 점은 앞서 살펴 본 스타인 본<수구다라니>와 유사하다(Fig. 5). 연꽃잎이 화려하게 장식되어 있는 점도 비슷하나, 그 표현에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자운사 본의 연판 내부를 구슬로 장식한 표현은 고려 불화의 그것과 닮아있다(Fig. 11). 한편 원형의 삼중 구성과 외곽부의 세부표현은 9세기로 추정되는 중국의 芷蘭齋 소장 <수구다라니>와 아주 유사하다(Fig. 12). 특히 외곽부 상단에 묘사된 연꽃 위의 삼지창과 천의를 양쪽으로 휘날리는 인물, 그리고 하단에 묘사된 향로와 봉을 들고 있는 인물의 표현은 거의 동일하다(Fig. 13). 그러나 지란재 본의 중앙부에는 8비의 대수구보살이 측면을 향해 있고, 주연부에는 17줄의 범자다라니가 둘러져 있어 자운사 본과는 차이가 있다.

Fig. 11.

<비로자나삼존도>대좌세부, Detail of Vairocana Triad, late Goroyeo, colour on silk, 123.0 ×82.0cm, Museum für Ostasiatische Kunst, Köln (Masterpieces of Goryeo Buddhist Painting, p. 24)

Fig. 12.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in the collection of Zhilanzhai, ninth century (Zhongguo fojiao banhua quanji 1, p. 24)

Fig. 13.

Detailed comparison. left: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mitabha Buddha at Chaunsa, right: Mahāpratisarā-dhāraṇī in the collection of Zhilanzhai

무엇보다 자운사 <수구다라니>와 가장 유사한 유형은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19매의 수구다라니이다(Fig. 14). 보광사 <수구다라니> 중앙부의 보살상은 자운사 본과 비율만 다를 뿐, 자세, 보관, 영락장식, 두광과 신광의 표현 등 모두 유사하다.38, 주연부에 둘러진 다라니가 시작되는 지점, 21줄의 범자다라니,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여백의 위치마저 동일하다. 외곽부의 밀교법구와 인물상도 33개로 개수, 위치, 형태 모두 같다. 다만 보광사 본에는 연꽃받침, 제목, 간기가 없다. 따라서 원형의 삼중으로 구성된 수구다라니 도상의 모본이 있었지만, 판각자나 발원자의 기호에 따라 세부를 가감하며 다르게 제작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보광사 본은 1184년의 연대가 있는 자운사 본과 동일해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다가 복장에서 함께 발견된 <보협인다라니>와 「범서총지집」에는 각각 1007년, 1150년의 개판연대가 찍혀있다.39 이것들은 종이의 질과 복장의 안립 방식이 <수구다라니>와 같아 비슷한 시기에 복장물목으로 구성되어 안립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고려해보면, 보광사 <수구다라니>의 인출시기를 12세기 후반으로 볼 수 있다.

Fig. 14.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valokitasvara Bodhisattva at BoKwangsa, twelveth century, Xylography, 32.3×34.8cm, Pogwangsa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분묘에서도 자운사와 보광사 수구다라니와 유사한 유형의 다라니가 발견됐다. 이 <수구다라니>는 『조선고적도보』 권9 ‘고려시대 분묘 내 발견 공예품’에 실려 있다(Fig. 15).40 현재 소재가 불분명하나 도판을 통해 관찰해볼 때, 삼중원형의 수구다라니임이 확실하다. 중앙부는 연화좌에 앉아있는 보살상으로 추정된다. 주연부에는 20여 줄의 다라니가 둘러져 있다. 외곽부에는 33개의 법구가 배치되어 있는데, 손상에도 불구하고 법구들의 형태와 위치는 자운사, 보광사의 수구다라니와 유사하다. 특히 외곽부 하단부의 일고저와 삼고저의 형태가 동일한 것이 눈에 띈다. 따라서 『조선고적도보』 수록 <수구다라니>는 중앙부의 상을 제외하면 자운사, 보광사의 수구다라니와 동일한 유형에 속하므로 비슷한 시기에 같은 모본을 바탕으로 제작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Fig. 15.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excavated from tomb (Chosŏn’gojŏktobo 9, p. 1254)

한편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의 복장에서는 위와는 또 다른 유형의 수구다라니가 발견됐다(Fig. 16).41 이 다라니의 상단 방제에 ‘如意寶印心無能勝大隨求大陀羅尼’라는 제목으로 보아 이 역시 불공 역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앙부와 주연부는 앞서 살펴본 세 다라니와 같은 원형이다. 그러나 밀교법구나 인물상이 배치된 외곽부가 사라진 대신 다라니 바깥의 네 모퉁이에 4구의 신장상이 있어 원형의 삼중 구성에 변화가 일어났음을 알 수 있다. 세부를 살펴보면, 중앙부의 도상은 그 형태가 매우 불분명하나 특정 지물을 든 다비의 보살반가상처럼 보이며, 원형의 두광과 휘날리는 천의가 표현되어 있다. 주연부의 범자다라니는 21줄로 자운사와 보광사의 수구다라니와 같으나, 그 시작점은 중앙부 존상의 아래쪽으로 차이가 있다. 주연부 바깥의 신장상은 모두 천의를 휘날린 채 중앙의 다라니를 향해 서 있다.

Fig. 16.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mitabha Buddha at Kaeunsa, twelfth century, Xylograph, 35.5 ×33cm (Buddhist relics in Seoul Metropolitan City, p. 21)

이처럼 4구의 신장상이 외호하듯이 배치된 수구다라니 유형은 중국 10세기부터 새로이 등장한 유형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예로는 뤄양(洛陽) 출토 926년명 <수구다라니>, 10세기로 추정되는 <범문다라니경주>, 그리고 앞서 살펴본 1001년명 서광사탑 <수구다라니>가 있다.42, 하지만 중국의 예는 신장상의 세부표현에 있어서 개운사 본과는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신장상의 세부표현뿐 아니라 원형의 중앙부와 주연부 그리고 4신장이라는 전체적인 구성은 삼성미술관 리움 소장 <陀羅尼輪版畵>와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Fig. 17).43

Fig. 17.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Goryeo, Xylograph, 27.5×31.8cm, Leeum, Samsung Museum of Art (The Great KoryÌ Exhibition, p. 46)

개운사 <수구다라니>는 중앙부와 주연부가 원형으로 구성되어 있어 자운사, 보광사, 『조선고적도보』 수록 수구다라니의 유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한편 외곽부가 사라진 대신 신장상이 배치된 점은 중국에서 10세기에 등장한 수구다라니 유형의 영향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운사 본의 제작 시기는 자운사 수구다라니 유형보다 늦더라도, 그다지 멀지 않은 고려 중기로 보는 것이 합당해 보인다.44

두 번째 유형은 도상과 이미지에서 탈피해 텍스트로만 구성된 것이다. 그 예로는 먼저 국립중앙박물관 목조관음보살좌상 복장 발견 <수구다라니>가 있다(Fig. 18). 이 다라니는 목판에 불공역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의 진언을 15자로 구성된 행마다 한자와 범자를 번갈아가며 판각하여 인쇄한 것이다. 이 다라니의 조판 및 인쇄 시기는 박물관의 조사에 의해 고려시대로 판명되었다.45, 이에 더해 13세기에 제작된 『密敎大藏』과 1행 15자의 다라니 배치, 범자의 형태 등이 유사해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것으로도 연구된 바 있다.46

Fig. 18.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valokitasvara Bodhisattva, thirteenth century, Xylograph, 40.4×38cm (Buddhist sculpture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Ⅰ, p. 80)

또 다른 사례는 해인사 원당암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 발견 <절첩 수진본 다라니경>이다(Fig. 19). 이 다라니의 길이는 무려 약 4미터에 달하며, 수구다라니를 필두로 40여 개의 다라니와 여러 부적이 연달아 목판 인쇄되어 있다. 우선 경 첫머리에는 변상도가 있다. 바로 다음 수구다라니 부분에는 차례로 隨求卽得諸呪, ‘수구다라니를 얻어 성불에 이르고자 한다’는 내용의 발원문, 成佛隨求大陀羅尼, 隨求陀羅尼心呪가 이어지고 隨求終을 끝으로 마무리된다.47, 다라니의 이름으로 보아 『성불수구즉득신변다라니』에 근거한 것으로 보이며, 범자다라니만이 세로로 인출되어 있다. 그 뒤로 觀自在菩薩大悲心大陀羅尼를 비롯한 여러 다라니, 부적, 梵書唵子 도형, 呪 등이 인쇄되어 있다. 경 마지막에는 태후와 왕을 위한 기원, 발원자, 간행연대인 洪武乙卯(1395)가 있다.48, <절첩 수진본 다라니경>에는 이처럼 다양한 종류의 다라니가 나열되어 있으나 수구다라니를 맨 앞에 배치했고 발원문에서도 언급한 것으로 보아 여기에서는 다른 다라니들보다 수구다라니가 더 중요하게 인식되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여러 다라니를 한 곳에 모으는 방식은 遼代 다라니의 특징으로 꼽히기도 하며, 조선시대에도 주로 보인다.49 하지만 현재 알려진 바로 수구다라니를 중심으로 하는 다라니 모음집은 이 <절첩 수진본 다라니경>이 유일하다.

Fig. 19.

<折帖 袖珍本 陀羅尼經> small folded dhāraṇī scripture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mitabha Buddha at Wŏndangam, Haeinsa, 1375, 7.2×4.8cm, 459.8cm (Haeinsa wŏndangam amit’abul Pokchangyumul t’ŭkpyŏlchŏn-Wŏndang, pp. 40-41)

이상으로 고려시대 수구다라니 6점의 도상을 분석하고 시대에 따른 변화양상을 살펴보았다. 고려 중기의 수구다라니는 중국의 당 말기부터 오대·북송 초기에 걸친 수구다라니의 구성과 도상이라는 큰 틀을 받아들여 제작되었지만 세부적인 표현을 변용하며 고려 특유의 양식을 구축해 나갔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일찍이 통일신라시대부터 당에서 유행하던 수구다라니를 받아들여 제작했음에도 불구하고, 고려 중기인 12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도 북송초기인 10세기의 양식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수구다라니 신앙을 일찍부터 받아들였으나 중국 수구다라니의 변화 속도에 그대로 따라가지 않았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오히려 고려 중기의 수구다라니는 이전 시기의 것에 기반하면서도 그 표현에 있어서는 고려의 색채를 가미해나갔다. 그러다가 수구다라니는 13세기 중·후반의 어느 시점부터 도상과 이미지에서 탈피하여 다라니 텍스트만으로 구성되기에 이르렀다.

Ⅳ. 납입장소를 통해 본 고려시대 수구다라니의 기능과 의미

앞서 살펴본 고려시대 수구다라니는 분묘와 불복장 내에서 발견되었다. 『조선고적도보』 수록 <수구다라니>는 분묘에서 출토된 것이 유력하다. 자운사, 보광사, 국립중앙박물관, 개운사 수구다라니의 경우 불복장 내에서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각 사례마다 그 납입된 공간과 방식에 차이가 있어 주목을 요한다. 그렇다면 수구다라니는 각각의 납입된 장소에 따라 어떤 의미를 지녔던 것일까?

먼저, 분묘에서 출토된 것으로 유력한 『조선고적도보』 수록 <수구다라니>이다. 이 다라니는 가로로 여덟 면을 접은 자국과 세로로 네 번 이상 접은 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접어서 용기에 넣어졌을 것이다. 『조선고적도보』 권9는 분묘출토품을 일괄 정리하여 수록한 것으로 <수구다라니>는 4269번의 ‘護符’로 명명되어 있고, 같은 쪽의 바로 옆에는 <銀製陽刻牡丹文護符容器>가 4268번으로 수록되어 있으므로 여기에 넣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Fig. 20).50, 이러한 원형 합에 수구다라니가 들어 있는 형태는 앞서 살펴본 8세기 초 허난성 출토 <수구다라니> 사례를 상기시킨다(Figs. 2, 8). 수구다라니를 부장하여 경전에서 언급한 사후세계의 이익을 얻고자 하는 사용법이 당대와 마찬가지로 고려시대에도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Fig. 20.

<銀製陽刻牡丹文護符容器>, Silver case with plum design excavated from tomb (Chosŏn’gojŏktobo 9, p. 1254)

망자와 함께 수구다라니를 분묘에 납입하는 방식은 조선시대에도 지속되었다.51, 17세기 초로 추정되는 부안 고부이씨 묘에서 <佛說一切如來普遍光明燄鬘淸淨熾盛思惟如意寶印心無能勝摠持大隨求大陀羅尼>가 발견되었다. 수구다라니의 제목에 이어서 범자다라니와 한자, 한글이 번갈아가며 좌에서 우로 인쇄되어 있다. 총 네 장의 이 다라니는 수의 속에 접힌 상태로 묘주의 가슴 부분에 납입되어 있었다.52 수의 속에 수구다라니가 들어 있는 것은 묘주가 수구다라니를 소지함으로써 사후 세계의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중국 당대와 고려시대에는 분묘에서 발견된 수구다라니가 합이나 팔찌 속에 들어있던 반면 이 사례는 수의 속에 넣어졌으므로 조선시대에 수구다라니의 납입 방식에 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즉, 분묘 내에서 망자의 사후세계의 이익을 위한 수구다라니의 소지는 신체에 부착되는 보다 직접적인 방식으로 변화했던 것이다.

다음으로 불·보살상의 복장에 안립된 수구다라니이다. 중국의 수구다라니는 주로 분묘에서 출토된 반면 고려시대 수구다라니의 대다수는 불복장에서 발견되는 점이 특징이다. 하지만 그동안 선행연구에서는 불복장의 다라니를 복장 내 빈 공간을 메우는 충전용지 정도로 인식하거나 다라니가 가진 벽사의 기능, 그리고 다라니의 시주로 인한 공덕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만 언급됐다.53 나아가 특정 다라니의 안립 의미에 대해서는 본격적으로 연구된 바 없었다. 필자는 고려시대 수구다라니가 불복장에서 가지는 의미를 도출하기 위해서는 앞서 다룬 자운사, 보광사, 국립중앙박물관, 해인사 원당암의 불·보살상의 복장 내의 위치, 안립 방식, 다른 물목과의 관계를 면밀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운사 <수구다라니>는 복장 내 발견된 <十二天曼茶羅>와 <眞言字輪>과 종이 질, 크기, 먹의 상태 등이 같은 것으로 보아 함께 인출되어 복장 내에 안립된 것으로 보인다.54 그러나 <십이천만다라>와 <진언자륜>의 매수는 각각 52매, 5매로 다수인 반면 수구다라니는 단 1매만이 발견되었으며 유일하게 간기가 있다. 간기의 ‘法界忘者往淨土之願’으로 보아 망자의 사후세계를 위한다는 수구다라니의 기본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분묘대신 불복장 내에 들어가 있는 점이 특이하다고 할 수 있다.

보광사 <수구다라니>는 『梵書摠持集』, 『一切如來心秘密全身舍利寶篋印陀羅尼經』 (이하 『보협인다라니』)과 함께 목조관음보살상의 무릎 부위에 해당하는 복장 내부 공간에서 3~4장씩 구겨진 채로 나왔다. 이곳은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운 부분으로 상이 완성된 이후 이곳에 물목을 후납하는 것은 어렵다. 따라서 세 점의 다라니는 불상 조성 때부터 복장 내의 안립 위치나 방법을 염두에 두고 사용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55 그중 『범서총지집』은 해인사 대적광전과 법보전의 비로자나불좌상, 화성 봉림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등과 같은 다수의 고려시대 불상에서도 발견되었다. 『보협인다라니』는 造塔이나 造像 시 공덕을 얻을 수 있는 다라니로 조선시대까지 꾸준히 불상 내에서 발견되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복장에서 삼중 원형 구성의 수구다라니가 19매의 다량으로 발견된 것은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상의 사례뿐으로 불상 조성 시 특별한 의도 하에 수구다라니를 선택하여 사용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수구다라니>는 목조관음보살좌상의 머리에서 원통형 금속체와 오색실을 싸고 있는 채로 나왔다.56 다라니를 찍은 종이의 전체 크기는 세로 40.4cm, 가로 38cm이고, 인쇄된 부분, 즉, 목판의 세로 길이는 20.5cm로, 정사각형의 가까운 종이의 중앙에 다라니를 찍었다. 이는 일반적으로 小자본 경전을 蝴蝶하기 위해 가로가 긴 형태로 제작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처럼 수구다라니를 정사각형으로 제작한 것은 이 다라니의 안립 상태로 미루어 보아 물목을 감싸기 쉽게 하기 위해서인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종이 한가운데에 수구다라니를 찍은 것은 복장 조성자 혹은 발원자가 원통형 금속체와 오색실에 수구다라니가 지닌 힘을 전이시키기 위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해인사 <절첩 수진본 다라니경>은 명주로 만들어진 포갑에 싸여 있었다. 다라니를 감싼 포갑은 다른 물목과 함께 보자기, 한지 꾸러미 등에 싸여 복장 안에 꽉 채워져 넣어 있었다. 이로 보아 누군가 소지하고 있다가 불복장의 물목으로 시주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개운사 <수구다라니> 역시 복장이 꺼내진 채 조사되어 안립 방식이나 위치는 알 수 없지만 단 1매만 발견되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불복장 내에서 수구다라니의 위치와 방식은 각각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다양성은 각각의 사례마다 수구다라니를 선택하여 불상 내에 안립한 의미가 달랐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자운사 <수구다라니>는 같은 복장에서 나온 다른 다라니가 여러 매로 구성된 데 비해 단 1장만 발견되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망자 추복의 발원문이 함께 쓰여져 있다. 이러한 사실은 자운사 <수구다라니>가 사후세계의 이익을 가져다주는 개인적인 목적으로 제작되어 불복장 의례에 물목으로 시주됐음을 짐작케 한다.57, 그렇다면 이는 수구다라니의 사후신앙과 불복장 의례가 결합된 흥미로운 사례라고 할 수 있다.58 그리고 해인사 원당암 <절첩 수진본 다라니경>은 소매 속에 들어갈 수 있는 작은 크기의 소형 절첩본으로 포갑에 싸여있던 채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안립 전에 발원자 개인이 소지용으로 사용했음이 분명하다. 발원자는 이를 직접 소지했다가 불복장 의례에 시주했을 것이다. 한편 보광사와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수구다라니의 경우 복장 내에서의 안립 위치와 그에 따른 역할을 염두에 두고 선택되어 복장 의례에 제작·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고려시대 수구다라니가 가장 많이 발견된 곳은 불복장이다. 그러나 복장에 안립된 여타의 다라니 종류에 비해서는 적은 수가 발견되었고, 심지어 고려 후기로 갈수록 그 수도 감소해가는 경향이 있다. 반면 보협인다라니는 고려시대 불복장의 다라니 중에서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심지어 고려 후기로 갈수록 그 수가 증가한다. 보협인다라니의 고려 초기의 모습은 변상도가 있는 절첩본 형식 혹은 卍자형 형태이다. 고려 후기에는 그 유형이 동심원의 모습으로 변하며, 다라니의 한 구석에 불상의 중수와 불교 제의를 담당하는 관청명인 ‘僧齋色’이 종종 등장한다.59, 이로 보아 고려 후기에는 다수의 불복장 의례가 승재색의 주관 하에 이루어졌음을 추정해 볼 수 있다. 불복장 의례는 이처럼 국가주도 하에 이루어지면서 체계성을 갖추게 되었을 것이다.60, 그러면서 소의 경전에 조탑이나 조상의 공덕이 언급되어 있는 보협인다라니를 그러한 지침이 제시되어 있지 않은 수구다라니보다 불복장 의례에 더 많이 사용했을 것이다.61

Ⅴ. 결론

이상에서 고려시대 수구다라니의 유형과 그 활용 양상을 중국의 사례들과 함께 살펴보았다. 수구다라니는 중국 당대부터 오대까지 암송 외에도 종이에 서사되거나 인쇄되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이 중 당대의 사례들은 중앙부나, 외곽부의 표현으로 보아 7~8세기에 한역된 수구다라니 경전의 서사지침과 어느 정도 상통한다. 이뿐만 아니라 이들 중 대부분은 분묘에서 합, 팔찌 등에 넣어져 시신과 함께 부장되었기 때문에 수구다라니를 착용하거나 소지하면 사후세계에서 이익을 보장받는다는 경전상의 지침에 따라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당대 이후 9~11세기 수구다라니는 장식성이 추가되거나 발원문을 따로 구획하는 등 보다 자유롭게 구성되었다. 그리고 돈황 막고굴 장경동과 탑의 사리함에서 발견되어, 그 사용이 경전의 지침을 넘어 다양해졌음을 알 수 있다.

수구다라니는 늦어도 통일신라시대에는 우리나라에 전해졌고, 암송의 형태로 수행에 이용되었다. 그리고 중국의 사례들처럼 서사되어 합, 탑 등에 넣어졌다. 고려시대 수구다라니는 대부분 목판인쇄본으로 나타나는데, 13세기를 전·후로 크게 두 유형으로 분류된다. 첫 번째 유형은 고려 중기인 12세기 사례로 도상과 이미지를 활용했다. 이들은 전체적인 구성은 중국 9~10세기 수구다라니와 유사하지만, 중앙부의 보살, 다라니 주위를 장식하는 세부적인 표현 방식에 있어서는 차이가 있다. 즉, 통일신라시대에는 중국 당 수구다라니와 유사하게 서사되었지만, 고려시대에는 세부표현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구축해 나갔다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유형은 13세기 이후의 사례로 이전 시기의 도상과 이미지에서 탈피해 텍스트만으로 구성되었다.

위에서 살펴본 수구다라니가 납입된 장소는 분묘 1점, 불복장 5점이다. 분묘 출토품으로 보아 당대에 수구다라니를 분묘에 납입하는 전통이 고려시대에도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불복장 발견 수구다라니는 중국에서는 현재 그 사례가 보고되지 않아 고려시대 수구다라니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수구다라니를 불복장에 납입하는 것은 보협인다라니와 같이 불복장 의례의 규범 내에 위치하는 다라니와는 성격이 차이가 있다. 수구다라니는 불복장 의례의 바깥에서 개인적인 신앙으로 제작되어 사용되었고, 이것은 발원자의 소망과 함께 불복장이라는 신성한 성소에 납입하는 데까지 이어졌을 것이다. 이외에도 국립중앙박물관에는 ‘은제상형경통(덕수2355)’내 납입 추정 수구다라니, ‘다라니경(고적 011730)’ 등 수구다라니로 추정되는 유물이 소장되어 있다. 이것과 앞서 살펴본 포갑, 경통 등 소지를 돕는 용기에 넣어졌던 사례들은 수구다라니가 개인 신앙생활에서 활발히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해준다. 향후 이 유물들을 포함하여 새로이 발견되는 수구다라니를 본격적으로 연구한다면, 고려시대 수구다라니 신앙의 다채로운 양상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Notes

1)

본래 초기 대승경전에서 다라니는 정신을 집중하여 경전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경전의 憶持, 受持를 의미했다. 주문으로 기능하게 된 것은 3~4세기로 추정된다. 이후 다라니는 중국 불교의 전통과 오랫동안 함께 해오면서 다양하고도 즉각적인 쓰임새를 갖게 되었다. 7세기에는 『大日經』, 『金剛頂經』과 같은 밀교 경전에서 三密 중 하나인 口密로 成佛을 위한 의례 과정에 포함되기도 했으며, 除災를 목적으로 하는 간단한 의례에 효험을 가져다주는 다라니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松長有慶 저·장익 역, 『밀교경전 성립사론』(불광출판부, 1993), pp. 101-137; Paul Copp, “Dharani Scriptures,” in Charles D. Orzeck, Henrick H. Sørensen, and Richard K. Payne eds., Esoteric Buddhism and the Tantras in East Asia (Leiden and Boston: Brill, 2011), pp. 176-180.

2)

불교학자 폴캅(Paul Copp)은 이와 같은 다라니의 변화된 성격에 대해 물질적(material), 시각적(visual)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것은 주로 입으로 염송될 수 있는 呪句의 형태였던 다라니가 7세기 이후 종이와 같은 특정 사물 위에 서사되어 착용이나 부착이 가능한 물질로 제작되었음을 뜻한다. Paul Copp, The Body Incantatory: Spells and the Ritual Imagination in Medieval Chinese Buddh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

3)

이와 같은 다라니에 대한 연구는 국외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폴캅은 수구다라니와 불정존승다라니의 물질성을 강조하며, 그 용례를 살펴 다라니와 밀교의 관계성을 재고했다. Paul Copp, 앞의 책(2014). 국외의 수구다라니와 불정존승다라니에 대한 연구는 각각 다음을 참고. 馬世長, 「大隨求陀羅尼曼茶羅圖像的初步考察」, 『唐硏究』 10(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4), pp. 527-579; Katherine Tsiang, “Buddhist Printed Images and Texts of the Eight-Tenth Centuries: Typologies of Replication and Representation,” in Matthew T. Kapstein, Sam van Schaik eds., Esoteric Buddhism at Dunhuang: Rites and Teachings for This Life and Beyond (Leiden; Boston: Brill, 2010), pp. 201-252; 劉淑芬, 「《佛頂尊勝陀羅尼經》與唐代尊勝經幢的建立—經幢硏究之一」,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集刊』 第67卷 1號(臺北: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 1996), pp. 145-193; Liying Kuo, “Dharani Pillars in China: Functions and Symbols,” in China and Beyond in the Mediaeval Period: Cultural Crossing and Inter-Regional Connections, ed. Dorothy C. Wong and Gustav Heldt(New York: Cambria Press, 2014), pp. 351-385.

4)

송일기, 「光州 紫雲寺 木造阿彌陀佛坐像의 腹藏典籍考」, 『서지학보』 28(2004. 12), pp. 79-114. 이외에 수구다라니가 소개된 불복장물 도록 및 연구 논저는 다음과 같다. 온양민속박물관, 『고려의 불복장과 염직』(계몽사, 1999); 수덕사 근역성보관, 『至心歸命禮—한국의 불복장』(수덕사 근역성보관, 2004); 이선용, 「불복장 구성형식과 직물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05); 최성은, 「13세기 고려 목조아미타불상과 복장묵서명」, 『한국사학보』 30(2008, 2), pp. 111-151(최성은, 「목조아미타불상의 조성과 복장 묵서명」,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일조각, 2013), pp. 267-310. 재수록); 남권희, 「韓國 記錄文化에 나타난 眞言의 流通」, 『밀교학보』 7(2005), pp. 51-122; 우진웅, 「韓國 密敎經典의 版畵本에 관한 硏究」, 경북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11. 2), pp. 125-127; 송일기, 「蘇州 瑞光寺塔 出土 北宋初期의 佛敎文獻 硏究」, 『한국도서관 정보학회지』 제45권 제1호(2014. 3), pp. 81-102; 남권희, 「奉化 淸凉寺 乾漆藥師如來坐像의 陀羅尼와 典籍資料」, 『미술사연구』 32(2017. 6), pp. 35-73; 同著, 「고려시대 간행의 수진본 小字 총지진언집 연구」, 『書誌學硏究』 第71輯(2017. 9), pp. 323-363.

5)

옥나영, 「紫雲寺 木造阿彌陀佛坐像의 腹藏 <如意寶印大隨求陀羅尼梵字軍陀羅相>의 제작 배경」, 『이화사학연구』 53(2016), pp. 147-180.

6)

옥나영, 「新羅時代 密敎經典의 流通과 그 影響」, 숙명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17. 2).

7)

T. no. 1153, vol. 20; T. no. 1154. vol. 20; T. no. 1155. vol. 20. 그 외에도 菩提流志(572~727) 한역의 『佛頂心品亦通大隨求陀羅尼經』2卷 등이 있다. 참고로 『諸阿闍梨眞言密敎部類總錄』에도 일본 승려들이 장래한 수구다라니 관련 경전 명칭들이 등장한다. T. no. 2176, vol. 55, pp. 1125a04-24.

8)

중국의 수구다라니를 정리한 연구는 다음을 참고. 馬世長, 앞의 논문, pp. 527-579; Katherine Tsiang, 앞의 논문, pp. 201-252; Paul Copp, 앞의 책(2014), pp. 79-87. 이외에도 중국 수구다라니의 출토와 관련된 보고서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 그 수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9)

중앙부의 우측에 기입되어 있는 간기는 다음과 같다. ‘受持者魏大娘一心供養奉持, 載六十三.’ 馬世長은 간기의 ‘載’는 ‘年’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 현종시기에 쓰인 표현이라고 했다. 馬世長, 앞의 논문, p. 530.

10)

보살이 무릎 꿇은 재가자를 향해 한 손을 뻗고 있는 수기 장면은 중국의 수구다라니에서 주로 보인다. 한편 우리나라의 보원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외함에도 유사한 장면이 선각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를 참고. 강희정, 「서산 보원사 사리기와 신라 하대의 해상 교류」, 『신라사학보』 46(2019), pp. 158-161.

11)

安家瑤, 馮孝堂, 「西安灃西出土的唐印本梵文陀羅尼經咒」, 『考古』 5(1988).

12)

비구가 지니려면 중앙에 금강저를 들고 있는 금강보살을 그려야 하고 자식을 낳기를 바라는 부인은 중앙에 동자를 그려야하는 등의 지침이 있다. T no. 1153, vol. 20, p. 624a12; T no. 1154, vol. 20, p, 641c29-642c04.

13)

中國版畵全集編輯委員會 編, 『中國佛敎版畵全集』 1(北京: 紫禁城出版社, 2008), pp. 12, 23.

14)

Tsiang, 앞의 논문, pp. 238-247. 한편 중국의 학자들은 중앙부를 비워둔 형태를 도상이 범자 다라니보다 새기기 어렵기 때문에 각인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程義, 「소주박물관 소장 대수구다라니경주 한문본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 『(당송전환기의) 오월(吳越)』(국립전주박물관, 2015), p. 224.

15)

T. no. 1154, vol. 20, p. 641c.

16)

Paul Copp, “Altar, Amulet, Icon Transformation in Dhāraṇī Amulet Culture, 740-980.” Cahiers d'Extrême-Asie vol. 17(2008), pp. 242-243.

17)

『佛說瑜伽大敎王經』에 따르면 대수구보살은 팔이 여덟 개, 얼굴이 네 개, 눈이 세 개이고, 몸은 금색이다. 여덟 개의 팔에는 각각 지물을 들고 있다. 오른쪽의 제1손은 검, 제2손은 법륜, 제3손은 三又, 제4손에는 화살을 들었고 왼손의 제1손은 금강저, 제2손은 견삭, 제3손은 도끼, 제4손에는 화살을 들었다. T. no. 890, vol. 18, p. 568a.

18)

馮漢驥, 「記唐印本陀羅尼經呪的發現」, 『文物』 5(1957), pp. 48-51.

19)

李域錚, 「西安西郊出土唐代手寫境呪絹畫」, 『文物』 7(1984), pp. 53-54; 中國版畵全集編輯委員會 編, 앞의 책, p. 3.

20)

大隨求陁羅尼/若有受持此神呪者, 所/在得勝. 若有能書寫帶/在頭者, 若在臂者, 是人/能成一切善事, 最勝淸/淨. 常爲諸天龍王之所/擁護, 又爲諸佛菩薩之/所憶念. 此神呪能與衆/生最勝安樂. 不爲夜叉/羅刹諸鬼神等爲諸惱/害, 亦不爲寒熱等病之/所侵損. 厭蠱呪咀不能/爲害. 先業之罪受持消/災. 持此呪者常得安樂, /無諸疾病, 色相熾盛圓/滿吉祥. 福德增長, 一切/呪法皆悉成就. 馬世長, 앞의 논문, p. 551. 발원문 뒤에 등장하는 간기는 다음과 같다. 若有人受持供養初宜護淨/太平興國五年六月二十五一雕板畢手泥.

21)

발원문은 제10행 7번째 글자가 作으로, 제13행 7번째 자가 悉로, 8번째 자가 得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스타인본 <수구다라니>(Fig. 5)와 같다. 뒤이은 간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西天寶安寺三藏睗紫/佛頂阿闍梨吉祥/自對大隨求陁羅尼/雕印板散施普願/受持伏願/皇帝萬歲天下人安.

22)

<MG17689>의 하단의 방제 내용은 스타인본, <MG17688>과는 완벽히 일치하지 않으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大隨求經去佛告大梵天王此隨求陁羅尼過去九十九億諸佛同共宜說/若人依法印寫佩戴□有惡業重罪並得□□當知是人一切如來加□一切菩薩護念一切天龍守護離一切□□滅一切惡趣不被水火雷電毒惡之可傷普施諸衆生皆共成佛道/□□楊法彫印施.

23)

주경미, 「北宋代 塔形舍利莊嚴具의 硏究」, 『중국사연구』 60(2009), pp. 99-101.

24)

‘劍南西川城都府…(중략)…咸平四年十一月▨日杭州趙宗覇開.’ ▨표시는 일부러 공백을 둔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간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 참고. 송일기, 「蘇州 瑞光寺塔 出土 北宋初期의 佛敎文獻 硏究」,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제45권 제1호(2014), p. 86; 程義, 위의 논문, pp. 218-219.

25)

霍巍, 「唐宋墓葬出土陀羅尼經咒及其民間信仰」, 『考古』 5(2011).

26)

Copp, 앞의 책, p. 28.

27)

보사유와 불공 역의 『수구다라니경』에 등장하는 소신심 비구는 아비지옥에 떨어졌지만 비구의 시체 위에 수구다라니가 있었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고 三十三天에 태어날 수 있었다. T. no. 1154, vol. 20, pp. 640c07-12; 불공 역 『성불수구즉득신변다라니』에도 죄를 많이 지은 바라문의 해골에 隨求卽得成佛自在 진언 중 한 글자가 붙음으로써 다라니를 소지하게 된 바라문은 지옥을 청정국토로 변하게 했고, 32상 80종호를 갖추어 성불하게 되었다. 석법성, 『隨求卽得陀羅尼』(운주사, 2016).

28)

『三國遺事』 塔像 第四 「臺山五萬眞身」 寳川常汲服其霊洞之水, 故晚年肉身飛空, 到流沙江外, 蔚珎國掌天窟停止, 誦隨求陁羅尼, 日夕爲課, 窟神現身白云, 我爲窟神, 已二千年, 今日始聞隨求真詮, 請受菩薩戒, 旣受已. 翌日窟亦無形, 寳川驚異, 留二十日, 乃還五䑓山神聖窟. (밑줄은 필자표시).

29)

보천의 기록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를 참고. 남동신, 「羅末麗初 華嚴宗圃의 대응과 《(華嚴)紳衆経》의 성립」, 『외대사학』 5(1993), pp. 143-174; 박미선, 「신라 오대산신앙의 성립시기」, 『한국사상사학』 28(2007), pp. 131-160.

30)

네 전판의 크기는 약 23.2×23.2×2.5cm로 거의 같으며, 글씨체도 동일하다. 전판에 새겨진 여섯 기록은 「海印寺妙吉祥塔記」, 「寧二卯年相月雲陽臺吉祥塔記」, 「海印寺護國三寶戰亡緇素玉字」, 「五臺山寺吉祥塔詞 除序」, 「哭緇軍」이다.

31)

원문 및 번역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gsm.nricp.go.kr)을 참고.

32)

寧二旃蒙年百城山寺前臺 吉祥塔中納 法賝記 無垢淨大陀羅尼經一卷 法花經一部 淨名經一部 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 金剛般若經一卷…(중략).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gsm.nricp.go.kr)을 참고.

33)

법장화상전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를 참조. 김복순, 「崔致遠의 「法藏和尙傳」 檢討」, 『한국사연구』 57(1987), pp. 1-24; 同著, 「최치원의 해외체험과 문화수용」, 『한국문화연구』 10(2006), pp. 7-43.

34)

T. no. 2054, vol. 50: 284b16.

35)

이 다라니는 2020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한국미술사학회 공동주최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에서 통일신라의 유물로 논의되었다. 한정호, 「경주 남산의 사리장엄구」,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2020), pp. 138-152.

36)

김보민, 앞의 논문, pp. 47-50 참고.

37)

‘高麗國中原府內□□□□□□中尹劉▨▨法界/亡者往淨土之/願彫板印施無窮者/大定二十四年甲辰三月日記’ ▨표시는 일부러 공백을 둔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彫板印施’라고 되어 있어 판각하고 바로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中原府는 충주를 지칭하며, 大定은 금나라 세종 재위 시(1161~1189) 사용한 연호로 甲辰은 대정 24년인 1184년에 해당한다. 송일기, 앞의 논문(2004), p. 88; 옥나영, 앞의 논문(2016), p. 167.

38)

중앙부의 상은 대일여래로 추정된 바 있지만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진 않았다. 서병패, 「安東 普光寺 木造觀音菩薩坐像 腹藏典籍 硏究」,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09), p. 89.

39)

서병패, 앞의 논문, pp. 78, 84.

40)

『조선고적도보』 권9의 緖言에 大正十二年(1923) 9월 1일에 큰 화재로 소실된 도록 제8책을 보수해 고려시대 분묘에서 발견된 공예품 중 금속공예품을 昭和四年(1929)에 실은 것이라고 나와 있다. 여기에서 <수구다라니>는 ‘護符’라고 지칭되어 있으나 불복장물에서 출토된 수구다라니와 도상과 그 배치가 유사해 본고에서는 『조선고적도보』 수록 <수구다라니>라고 칭하고자 한다. 朝鮮總督府 編, 『朝鮮古蹟圖譜』 九(朝鮮總督府, 1929. 3. 21), p. 1254, no. 1269.

41)

개운사 <수구다라니>는 당시 복장물을 조사한 후 발간된 논문에서는 조선시대로 비정되었다. 사리 등 중요 물목이 이미 도난당한 뒤에 복장조사가 이루어져 정확한 시기추정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문명대, 「高麗 13世紀 彫刻樣式과 開運寺藏 鷲峰寺木阿彌陀佛像의 硏究」, 『강좌미술사』 8(1996), pp. 38-39.

42)

中國版畵全集編輯委員會 編, 앞의 책, pp. 32, 35 참고.

43)

다라니 종류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도상을 활용한 수구다라니의 유형을 따른 것은 확실하다.

44)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3개의 발원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274년이다. 그 이전 시기에 제작된 것이 복장에 넣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명대, 앞의 논문, p. 41; 최성은, 앞의 논문, pp. 111-151.

45)

신소연 외,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 조사보고 1』(국립중앙박물관, 2014), p. 80.

46)

남권희, 「高麗時代 ‘密敎大藏’ 卷9의 書誌的 硏究」, 『서지학연구』 58(2014. 6), pp. 5-54; 박광헌, 「高麗本『密敎大藏』卷 61에 관한 書誌的 硏究」, 『서지학연구』 58(2014. 6), pp. 437-463.

47)

남권희, 앞의 논문(2017), pp. 323-363.

48)

남권희, 앞의 논문(2017), p. 349; 해인사성보박물관, 『해인사 원당암 아미타불 복장유물 특별전-願堂』(해인사 성보박물관, 2017), pp. 36-43.

49)

이승혜, 「중국 묘장다라니의 시각문화: 당과 요의 사례를 중심으로」, 『불교학연구』 57(2018), pp. 283-316.

50)

같은 책의 앞 쪽에서도 4263번 <金銅護符容器> 다음에 그 안에서 발견된 4264, 4265번의 吳氏夫人 발원 <호부>가 배치된 점이 참고된다. 朝鮮總督府 編, 앞의 책, pp. 1253-1254.

51)

조선시대 분묘 출토 다라니 관련해서는 다음을 참고. 송미경, 「조선시대 출토복식에 보이는 불교의 영향」, 『한복문화』 21(2018), pp. 141-153.

52)

부안 고부이씨 묘 출토 수구다라니 관련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 엄기표, 「부안 古阜李氏 墓 출토 陀羅尼에 대한 고찰」, 『한국복식』 29(2011. 11), pp. 31-32.

53)

불상에 안립된 다라니에 대한 언급으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 남권희, 앞의 논문(1999), p. 131; 이선용, 앞의 논문(2005), p. 11; 신소연, 「금동아미타삼존불상 조사 결과에 대한 종합적 고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 조사보고』 2(국립중앙박물관, 2016), p. 243; 정은우·신은제, 『고려의 성물, 불복장』(경인문화사, 2017), p. 45.

54)

불상의 복장물 조사 직후 출판된 논문에서는 “발견된 당시 뭉쳐 구겨진 상태였으며, 여러 곳에 송진이 얼룩진 상태가 나타나고 좌우의 하단 일부가 대칭으로 떨어져 나간 상태”라고 했다. 송일기, 앞의 논문(2004), p. 171.

55)

서병패, 앞의 논문, p. 89.

56)

신소연 외, 앞의 책, p. 12.

57)

자운사 <수구다라니>가 납입된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조성 연대가 확실하지 않아 다라니의 납입시기를 확정하기는 힘들다. 불상 안에서는 1388년 중수원문이 발견되어 개인적으로 소지했던 수구다라니를 불복장 의례에 시주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중수원문에 대해서는 송일기, 앞의 논문(2004) 참고.

58)

한편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京都 淸凉寺와 寂光院의 지장보살입상의 복장에서 망자를 위해서 수구다라니를 넣었다는 내용의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 참고. 奧 健夫, 「清凉寺·寂光院の地藏菩薩像と「五境の良藥」」, 『佛敎藝術』 234(1997), p. 88.

59)

승재색이 찍힌 보협인다라니는 서산 부석사 동조관음보살좌상(1330), 국립중앙박물관 금동대세지보살입상(1333) 등에서 발견되었다.

60)

고려시대 불복장 관련 연구는 1960년대에 복장 내 물목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최근에는 불복장 연원의 근거와 성립, 특징 등과 같은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 민영규, 「장곡사 고려철불 복장유물」,『인문과학』14·15합집(1966. 6), pp. 237-247, 이승혜, 「고려시대 불복장의 형성과 의미」,『美術史學硏究』285(2015. 3), pp. 71-100; 정은우,「고려시대 불복장의 특징과 형성배경」, 『미술사학연구』 286(2015. 6), pp. 32-58; 이선용, 「우리나라 불복장의 특징」, 『美術史學硏究』 289(2016. 3), pp. 93-120. 이승혜, 「복장(腹藏)과 한국 불교미술사 연구–회고와 전망-」, 『인문과학연구』 제41집(2020), pp. 47-76.

61)

보사유 역 『수구즉득다라니』에는 다라니를 ‘胎藏’에 잘 지니면 뱃속의 아들이나 딸이 제때에 안락하게 출생한다는 구절이 있지만, 불상 안에 안립하라는 지시는 없다. 또한 불공 역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의 설화에서는 죽은 비구와 함께 탑 안에 놓이긴 했지만 이는 순전히 비구의 사후세계 공덕을 위한 것으로 조탑과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T. no. 1154, vol. 20, pp. 641a17-18; T. no. 1153, vol. 20, pp. 620b24-26. 한편 비록 조선시대에 간행된 경전이기는 하나 『造像經』에도 보협인다라니의 사용 규정이 있는 반면, 수구다라니의 사용에 대한 규정이 발견되지 않는 점도 하나의 방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선용, 「우리나라 불복장의 특징」, 『미술사학연구』 289(2016), pp. 9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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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mitabha Buddha at Ch‘aunsa, 1184, Xylograph, 33.5×34.5cm (Photograph by Kim Bo Min)

Fig. 2.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excavated from Henan, early eighth century, Ink and colors on silk, 21.5 ×21.5cm, Yale University Art Gallery (https://artgallery.yale.edu/)

Fig. 3.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excavated from Xian, Eighth century, Tang, Stamped and handwritten on paper, 28.3×32.7cm (Xi’an Fengxi chutu de Tang yinben Fanwen tuoluoni zhou, Kaogu 5, p. 93)

Fig. 4.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excavated from Sichuan, Eighth, ninth century, Xylograph, 31×34cm, Sichuan University (Zhongguo fojiao banhua quanji 1, p. 6)

Fig. 5.

스타인본<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980, Dunhuang Mogao cave 17, Xylograph, 43.2 ×31.8cm, Stein Painting 249 (ⓒBritish Museum)

Fig. 6.

펠리오 본 <수구다라니>(MG17688), Mahāpratisarā-dhāraṇī, Tenth century, Dunhuang Mogao cave 17, Xylograph, 37×29.7cm (ⓒLe musée Guimet)

Fig. 7.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Ruiguansi pagoda, 1001, Xylograph, 44 ×36.1cm (Soju sŏgwangsat’am ch’ult’o Puksongch’ogiŭi pulgyomunhŏn yŏn’gu, p. 99)

Fig. 9.

<墓葬平面圖>, Drawing of anonymous Tang-era tomb, Sichuan (Ji Tang yinben tuoluni jingzhou de faxian, Wenwu cankao ziliao 5, p. 49)

Fig. 10.

<경북 경주 남산 금동제호부용기 내 범자문편>,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Gyeongju Namsan Mountain, Unified Silla, handwritten on paper, A glass plate no. 017528(ⓒNational of Museum of Korea)

Fig. 11.

<비로자나삼존도>대좌세부, Detail of Vairocana Triad, late Goroyeo, colour on silk, 123.0 ×82.0cm, Museum für Ostasiatische Kunst, Köln (Masterpieces of Goryeo Buddhist Painting, p. 24)

Fig. 12.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in the collection of Zhilanzhai, ninth century (Zhongguo fojiao banhua quanji 1, p. 24)

Fig. 13.

Detailed comparison. left: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mitabha Buddha at Chaunsa, right: Mahāpratisarā-dhāraṇī in the collection of Zhilanzhai

Fig. 14.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valokitasvara Bodhisattva at BoKwangsa, twelveth century, Xylography, 32.3×34.8cm, Pogwangsa (ⓒResearch Institute of Buddhist Cultural Heritage)

Fig. 15.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excavated from tomb (Chosŏn’gojŏktobo 9, p. 1254)

Fig. 16.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mitabha Buddha at Kaeunsa, twelfth century, Xylograph, 35.5 ×33cm (Buddhist relics in Seoul Metropolitan City, p. 21)

Fig. 17.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Goryeo, Xylograph, 27.5×31.8cm, Leeum, Samsung Museum of Art (The Great KoryÌ Exhibition, p. 46)

Fig. 18.

<수구다라니>, Mahāpratisarā-dhāraṇī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valokitasvara Bodhisattva, thirteenth century, Xylograph, 40.4×38cm (Buddhist sculpture in the National Museum of Korea Ⅰ, p. 80)

Fig. 19.

<折帖 袖珍本 陀羅尼經> small folded dhāraṇī scripture found inside a seated wooden statue of Amitabha Buddha at Wŏndangam, Haeinsa, 1375, 7.2×4.8cm, 459.8cm (Haeinsa wŏndangam amit’abul Pokchangyumul t’ŭkpyŏlchŏn-Wŏndang, pp. 40-41)

Fig. 20.

<銀製陽刻牡丹文護符容器>, Silver case with plum design excavated from tomb (Chosŏn’gojŏktobo 9, p. 12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