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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09; 2021 > Articl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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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래 초기 대승경전에서 다라니는 정신을 집중하여 경전을 기억할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경전의 憶持, 受持를 의미했다. 주문으로 기능하게 된 것은 3~4세기로 추정된다. 이후 다라니는 중국 불교의 전통과 오랫동안 함께 해오면서 다양하고도 즉각적인 쓰임새를 갖게 되었다. 7세기에는 『大日經』, 『金剛頂經』과 같은 밀교 경전에서 三密 중 하나인 口密로 成佛을 위한 의례 과정에 포함되기도 했으며, 除災를 목적으로 하는 간단한 의례에 효험을 가져다주는 다라니가 유행하기도 하였다. 松長有慶 저·장익 역, 『밀교경전 성립사론』(불광출판부, 1993), pp. 101-137; Paul Copp, “Dharani Scriptures,” in Charles D. Orzeck, Henrick H. Sørensen, and Richard K. Payne eds., Esoteric Buddhism and the Tantras in East Asia (Leiden and Boston: Brill, 2011), pp. 176-180.
2) 불교학자 폴캅(Paul Copp)은 이와 같은 다라니의 변화된 성격에 대해 물질적(material), 시각적(visual)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그것은 주로 입으로 염송될 수 있는 呪句의 형태였던 다라니가 7세기 이후 종이와 같은 특정 사물 위에 서사되어 착용이나 부착이 가능한 물질로 제작되었음을 뜻한다. Paul Copp, The Body Incantatory: Spells and the Ritual Imagination in Medieval Chinese Buddhism (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2014).
3) 이와 같은 다라니에 대한 연구는 국외에서 활발히 이루어졌다. 특히 폴캅은 수구다라니와 불정존승다라니의 물질성을 강조하며, 그 용례를 살펴 다라니와 밀교의 관계성을 재고했다. Paul Copp, 앞의 책(2014). 국외의 수구다라니와 불정존승다라니에 대한 연구는 각각 다음을 참고. 馬世長, 「大隨求陀羅尼曼茶羅圖像的初步考察」, 『唐硏究』 10(北京: 北京大學出版社, 2004), pp. 527-579; Katherine Tsiang, “Buddhist Printed Images and Texts of the Eight-Tenth Centuries: Typologies of Replication and Representation,” in Matthew T. Kapstein, Sam van Schaik eds., Esoteric Buddhism at Dunhuang: Rites and Teachings for This Life and Beyond (Leiden; Boston: Brill, 2010), pp. 201-252; 劉淑芬, 「《佛頂尊勝陀羅尼經》與唐代尊勝經幢的建立—經幢硏究之一」,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集刊』 第67卷 1號(臺北: 中央硏究院歷史語言硏究所, 1996), pp. 145-193; Liying Kuo, “Dharani Pillars in China: Functions and Symbols,” in China and Beyond in the Mediaeval Period: Cultural Crossing and Inter-Regional Connections, ed. Dorothy C. Wong and Gustav Heldt(New York: Cambria Press, 2014), pp. 351-385.
4) 송일기, 「光州 紫雲寺 木造阿彌陀佛坐像의 腹藏典籍考」, 『서지학보』 28(2004. 12), pp. 79-114. 이외에 수구다라니가 소개된 불복장물 도록 및 연구 논저는 다음과 같다. 온양민속박물관, 『고려의 불복장과 염직』(계몽사, 1999); 수덕사 근역성보관, 『至心歸命禮—한국의 불복장』(수덕사 근역성보관, 2004); 이선용, 「불복장 구성형식과 직물에 관한 연구」,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2005); 최성은, 「13세기 고려 목조아미타불상과 복장묵서명」, 『한국사학보』 30(2008, 2), pp. 111-151(최성은, 「목조아미타불상의 조성과 복장 묵서명」,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일조각, 2013), pp. 267-310. 재수록); 남권희, 「韓國 記錄文化에 나타난 眞言의 流通」, 『밀교학보』 7(2005), pp. 51-122; 우진웅, 「韓國 密敎經典의 版畵本에 관한 硏究」, 경북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2011. 2), pp. 125-127; 송일기, 「蘇州 瑞光寺塔 出土 北宋初期의 佛敎文獻 硏究」, 『한국도서관 정보학회지』 제45권 제1호(2014. 3), pp. 81-102; 남권희, 「奉化 淸凉寺 乾漆藥師如來坐像의 陀羅尼와 典籍資料」, 『미술사연구』 32(2017. 6), pp. 35-73; 同著, 「고려시대 간행의 수진본 小字 총지진언집 연구」, 『書誌學硏究』 第71輯(2017. 9), pp. 323-363.
7) T. no. 1153, vol. 20; T. no. 1154. vol. 20; T. no. 1155. vol. 20. 그 외에도 菩提流志(572~727) 한역의 『佛頂心品亦通大隨求陀羅尼經』2卷 등이 있다. 참고로 『諸阿闍梨眞言密敎部類總錄』에도 일본 승려들이 장래한 수구다라니 관련 경전 명칭들이 등장한다. T. no. 2176, vol. 55, pp. 1125a04-24.
8) 중국의 수구다라니를 정리한 연구는 다음을 참고. 馬世長, 앞의 논문, pp. 527-579; Katherine Tsiang, 앞의 논문, pp. 201-252; Paul Copp, 앞의 책(2014), pp. 79-87. 이외에도 중국 수구다라니의 출토와 관련된 보고서가 계속해서 나오고 있어 그 수는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9) 중앙부의 우측에 기입되어 있는 간기는 다음과 같다. ‘受持者魏大娘一心供養奉持, 載六十三.’ 馬世長은 간기의 ‘載’는 ‘年’을 의미하는 것으로 당 현종시기에 쓰인 표현이라고 했다. 馬世長, 앞의 논문, p. 530.
10) 보살이 무릎 꿇은 재가자를 향해 한 손을 뻗고 있는 수기 장면은 중국의 수구다라니에서 주로 보인다. 한편 우리나라의 보원사지 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외함에도 유사한 장면이 선각되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를 참고. 강희정, 「서산 보원사 사리기와 신라 하대의 해상 교류」, 『신라사학보』 46(2019), pp. 158-161.
12) 비구가 지니려면 중앙에 금강저를 들고 있는 금강보살을 그려야 하고 자식을 낳기를 바라는 부인은 중앙에 동자를 그려야하는 등의 지침이 있다. T no. 1153, vol. 20, p. 624a12; T no. 1154, vol. 20, p, 641c29-642c04.
14) Tsiang, 앞의 논문, pp. 238-247. 한편 중국의 학자들은 중앙부를 비워둔 형태를 도상이 범자 다라니보다 새기기 어렵기 때문에 각인하지 않은 것으로 보았다. 程義, 「소주박물관 소장 대수구다라니경주 한문본에 대한 초보적인 연구」, 『(당송전환기의) 오월(吳越)』(국립전주박물관, 2015), p. 224.
16) Paul Copp, “Altar, Amulet, Icon Transformation in Dhāraṇī Amulet Culture, 740-980.” Cahiers d'Extrême-Asie vol. 17(2008), pp. 242-243.
17) 『佛說瑜伽大敎王經』에 따르면 대수구보살은 팔이 여덟 개, 얼굴이 네 개, 눈이 세 개이고, 몸은 금색이다. 여덟 개의 팔에는 각각 지물을 들고 있다. 오른쪽의 제1손은 검, 제2손은 법륜, 제3손은 三又, 제4손에는 화살을 들었고 왼손의 제1손은 금강저, 제2손은 견삭, 제3손은 도끼, 제4손에는 화살을 들었다. T. no. 890, vol. 18, p. 568a.
20) 大隨求陁羅尼/若有受持此神呪者, 所/在得勝. 若有能書寫帶/在頭者, 若在臂者, 是人/能成一切善事, 最勝淸/淨. 常爲諸天龍王之所/擁護, 又爲諸佛菩薩之/所憶念. 此神呪能與衆/生最勝安樂. 不爲夜叉/羅刹諸鬼神等爲諸惱/害, 亦不爲寒熱等病之/所侵損. 厭蠱呪咀不能/爲害. 先業之罪受持消/災. 持此呪者常得安樂, /無諸疾病, 色相熾盛圓/滿吉祥. 福德增長, 一切/呪法皆悉成就. 馬世長, 앞의 논문, p. 551. 발원문 뒤에 등장하는 간기는 다음과 같다. 若有人受持供養初宜護淨/太平興國五年六月二十五一雕板畢手泥.
21) 발원문은 제10행 7번째 글자가 作으로, 제13행 7번째 자가 悉로, 8번째 자가 得으로 되어 있는 것을 제외하면, 스타인본 <수구다라니>(Fig. 5)와 같다. 뒤이은 간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西天寶安寺三藏睗紫/佛頂阿闍梨吉祥/自對大隨求陁羅尼/雕印板散施普願/受持伏願/皇帝萬歲天下人安.
22) <MG17689>의 하단의 방제 내용은 스타인본, <MG17688>과는 완벽히 일치하지 않으나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大隨求經去佛告大梵天王此隨求陁羅尼過去九十九億諸佛同共宜說/若人依法印寫佩戴□有惡業重罪並得□□當知是人一切如來加□一切菩薩護念一切天龍守護離一切□□滅一切惡趣不被水火雷電毒惡之可傷普施諸衆生皆共成佛道/□□楊法彫印施.
24) ‘劍南西川城都府…(중략)…咸平四年十一月▨日杭州趙宗覇開.’ ▨표시는 일부러 공백을 둔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간기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문 참고. 송일기, 「蘇州 瑞光寺塔 出土 北宋初期의 佛敎文獻 硏究」, 『한국도서관·정보학회지』 제45권 제1호(2014), p. 86; 程義, 위의 논문, pp. 218-219.
27) 보사유와 불공 역의 『수구다라니경』에 등장하는 소신심 비구는 아비지옥에 떨어졌지만 비구의 시체 위에 수구다라니가 있었기 때문에 벌을 받지 않고 三十三天에 태어날 수 있었다. T. no. 1154, vol. 20, pp. 640c07-12; 불공 역 『성불수구즉득신변다라니』에도 죄를 많이 지은 바라문의 해골에 隨求卽得成佛自在 진언 중 한 글자가 붙음으로써 다라니를 소지하게 된 바라문은 지옥을 청정국토로 변하게 했고, 32상 80종호를 갖추어 성불하게 되었다. 석법성, 『隨求卽得陀羅尼』(운주사, 2016).
28) 『三國遺事』 塔像 第四 「臺山五萬眞身」 寳川常汲服其霊洞之水, 故晚年肉身飛空, 到流沙江外, 蔚珎國掌天窟停止, 誦隨求陁羅尼, 日夕爲課, 窟神現身白云, 我爲窟神, 已二千年, 今日始聞隨求真詮, 請受菩薩戒, 旣受已. 翌日窟亦無形, 寳川驚異, 留二十日, 乃還五䑓山神聖窟. (밑줄은 필자표시).
29) 보천의 기록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를 참고. 남동신, 「羅末麗初 華嚴宗圃의 대응과 《(華嚴)紳衆経》의 성립」, 『외대사학』 5(1993), pp. 143-174; 박미선, 「신라 오대산신앙의 성립시기」, 『한국사상사학』 28(2007), pp. 131-160.
30) 네 전판의 크기는 약 23.2×23.2×2.5cm로 거의 같으며, 글씨체도 동일하다. 전판에 새겨진 여섯 기록은 「海印寺妙吉祥塔記」, 「寧二卯年相月雲陽臺吉祥塔記」, 「海印寺護國三寶戰亡緇素玉字」, 「五臺山寺吉祥塔詞 除序」, 「哭緇軍」이다.
31) 원문 및 번역은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gsm.nricp.go.kr)을 참고.
32) 寧二旃蒙年百城山寺前臺 吉祥塔中納 法賝記 無垢淨大陀羅尼經一卷 法花經一部 淨名經一部 隨求卽得大自在陀羅尼 金剛般若經一卷…(중략).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gsm.nricp.go.kr)을 참고.
33) 법장화상전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를 참조. 김복순, 「崔致遠의 「法藏和尙傳」 檢討」, 『한국사연구』 57(1987), pp. 1-24; 同著, 「최치원의 해외체험과 문화수용」, 『한국문화연구』 10(2006), pp. 7-43.
35) 이 다라니는 2020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한국미술사학회 공동주최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에서 통일신라의 유물로 논의되었다. 한정호, 「경주 남산의 사리장엄구」, 『경주 남산 불교문화재 어제와 오늘』(2020), pp. 138-152.
37) ‘高麗國中原府內□□□□□□中尹劉▨▨法界/亡者往淨土之/願彫板印施無窮者/大定二十四年甲辰三月日記’ ▨표시는 일부러 공백을 둔 것처럼 보이는 곳이다. ‘彫板印施’라고 되어 있어 판각하고 바로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中原府는 충주를 지칭하며, 大定은 금나라 세종 재위 시(1161~1189) 사용한 연호로 甲辰은 대정 24년인 1184년에 해당한다. 송일기, 앞의 논문(2004), p. 88; 옥나영, 앞의 논문(2016), p. 167.
38) 중앙부의 상은 대일여래로 추정된 바 있지만 이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진 않았다. 서병패, 「安東 普光寺 木造觀音菩薩坐像 腹藏典籍 硏究」, 『안동 보광사 목조관음보살좌상』((재)불교문화재연구소, 2009), p. 89.
40) 『조선고적도보』 권9의 緖言에 大正十二年(1923) 9월 1일에 큰 화재로 소실된 도록 제8책을 보수해 고려시대 분묘에서 발견된 공예품 중 금속공예품을 昭和四年(1929)에 실은 것이라고 나와 있다. 여기에서 <수구다라니>는 ‘護符’라고 지칭되어 있으나 불복장물에서 출토된 수구다라니와 도상과 그 배치가 유사해 본고에서는 『조선고적도보』 수록 <수구다라니>라고 칭하고자 한다. 朝鮮總督府 編, 『朝鮮古蹟圖譜』 九(朝鮮總督府, 1929. 3. 21), p. 1254, no. 1269.
41) 개운사 <수구다라니>는 당시 복장물을 조사한 후 발간된 논문에서는 조선시대로 비정되었다. 사리 등 중요 물목이 이미 도난당한 뒤에 복장조사가 이루어져 정확한 시기추정이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문명대, 「高麗 13世紀 彫刻樣式과 開運寺藏 鷲峰寺木阿彌陀佛像의 硏究」, 『강좌미술사』 8(1996), pp. 38-39.
44)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복장에서 발견된 3개의 발원문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1274년이다. 그 이전 시기에 제작된 것이 복장에 넣어졌을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명대, 앞의 논문, p. 41; 최성은, 앞의 논문, pp. 111-151.
46) 남권희, 「高麗時代 ‘密敎大藏’ 卷9의 書誌的 硏究」, 『서지학연구』 58(2014. 6), pp. 5-54; 박광헌, 「高麗本『密敎大藏』卷 61에 관한 書誌的 硏究」, 『서지학연구』 58(2014. 6), pp. 437-463.
50) 같은 책의 앞 쪽에서도 4263번 <金銅護符容器> 다음에 그 안에서 발견된 4264, 4265번의 吳氏夫人 발원 <호부>가 배치된 점이 참고된다. 朝鮮總督府 編, 앞의 책, pp. 1253-1254.
52) 부안 고부이씨 묘 출토 수구다라니 관련해서는 다음 논문을 참고. 엄기표, 「부안 古阜李氏 墓 출토 陀羅尼에 대한 고찰」, 『한국복식』 29(2011. 11), pp. 31-32.
53) 불상에 안립된 다라니에 대한 언급으로는 다음의 논문을 참조. 남권희, 앞의 논문(1999), p. 131; 이선용, 앞의 논문(2005), p. 11; 신소연, 「금동아미타삼존불상 조사 결과에 대한 종합적 고찰」,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불교조각 조사보고』 2(국립중앙박물관, 2016), p. 243; 정은우·신은제, 『고려의 성물, 불복장』(경인문화사, 2017), p. 45.
54) 불상의 복장물 조사 직후 출판된 논문에서는 “발견된 당시 뭉쳐 구겨진 상태였으며, 여러 곳에 송진이 얼룩진 상태가 나타나고 좌우의 하단 일부가 대칭으로 떨어져 나간 상태”라고 했다. 송일기, 앞의 논문(2004), p. 171.
57) 자운사 <수구다라니>가 납입된 목조아미타불좌상의 조성 연대가 확실하지 않아 다라니의 납입시기를 확정하기는 힘들다. 불상 안에서는 1388년 중수원문이 발견되어 개인적으로 소지했던 수구다라니를 불복장 의례에 시주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중수원문에 대해서는 송일기, 앞의 논문(2004) 참고.
58) 한편 일본 가마쿠라 시대의 京都 淸凉寺와 寂光院의 지장보살입상의 복장에서 망자를 위해서 수구다라니를 넣었다는 내용의 발원문이 발견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논고 참고. 奧 健夫, 「清凉寺·寂光院の地藏菩薩像と「五境の良藥」」, 『佛敎藝術』 234(1997), p. 88.
60) 고려시대 불복장 관련 연구는 1960년대에 복장 내 물목을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으며, 최근에는 불복장 연원의 근거와 성립, 특징 등과 같은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연구를 참고. 민영규, 「장곡사 고려철불 복장유물」,『인문과학』14·15합집(1966. 6), pp. 237-247, 이승혜, 「고려시대 불복장의 형성과 의미」,『美術史學硏究』285(2015. 3), pp. 71-100; 정은우,「고려시대 불복장의 특징과 형성배경」, 『미술사학연구』 286(2015. 6), pp. 32-58; 이선용, 「우리나라 불복장의 특징」, 『美術史學硏究』 289(2016. 3), pp. 93-120. 이승혜, 「복장(腹藏)과 한국 불교미술사 연구-회고와 전망-」, 『인문과학연구』 제41집(2020), pp. 47-76.
61) 보사유 역 『수구즉득다라니』에는 다라니를 ‘胎藏’에 잘 지니면 뱃속의 아들이나 딸이 제때에 안락하게 출생한다는 구절이 있지만, 불상 안에 안립하라는 지시는 없다. 또한 불공 역 『보편광명대수구다라니』의 설화에서는 죽은 비구와 함께 탑 안에 놓이긴 했지만 이는 순전히 비구의 사후세계 공덕을 위한 것으로 조탑과 상관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다. T. no. 1154, vol. 20, pp. 641a17-18; T. no. 1153, vol. 20, pp. 620b24-26. 한편 비록 조선시대에 간행된 경전이기는 하나 『造像經』에도 보협인다라니의 사용 규정이 있는 반면, 수구다라니의 사용에 대한 규정이 발견되지 않는 점도 하나의 방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이선용, 「우리나라 불복장의 특징」, 『미술사학연구』 289(2016), pp. 93-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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