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쌍탑가람의 기원과 출현배경*

The Background to the Origins and Appearance of Silla's Buddhist Monastery with Twin Pagodas*

Article information

Korean J Art Hist. 2020;308():35-71
Publication date (electronic) : 2020 December 31
doi : https://doi.org/10.31065/kjah.308.202012.002
**Pusan National University
양은경**
**부산대학교 고고학과 교수
*

이 논문은 부산대학교 기본연구지원사업(2년과제)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Received 2020 October 10; Revised 2020 October 13; Accepted 2020 November 16.

Abstract

필자는 신라 쌍탑가람에 대한 연구가 미제로 남아 있는 이유를 사천왕사, 명랑, 밀교경전이라는 세 키워드에 포커스를 집중시켰던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제시하였다. 이에 필자는 쌍탑가람의 근원지인 중국으로 그 시각을 확대시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 다시 신라로 접근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본고는 기존의 논쟁점들을 우선 세 가지 질문으로 제시된 후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서술되었다.

첫째,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은 수나라 쌍탑가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필자의 해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 쌍탑가람은 과거 학계에서 주장한 것과는 달리 5세기 후반 북위 휘복사에서부터 정식으로 출현한 후 북조 전 시기동안 그 맥을 계속해서 이어가다 수나라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가람배치로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수나라 쌍탑가람의 등장배경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수 황실에서 황제와 황후를 “二聖”으로 칭송하였던 특수한 정치적인 배경을 제시하였다. 북조에서부터 수대 사회, 여성의 파워는 당시 사회 전반에 만연한 유목민족 특유의 여성 사회생활상이 반영된 결과로 간주하였다.

셋째, 신라 쌍탑가람의 출현배경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은 신라식 호국관념과 신라식 “이성”개념이 서로 혼합되어 등장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필자는 문무왕만의 특별한 인생 즉 통일전쟁에 주동적으로 참여한 배경은 그가 발원한 사천왕사, 감은사에 호국사상이 강하게 반영되게 된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문무왕은 장안을 방문할 당시 인지하게 된 “二聖”의 개념을 귀국 후 본인과 아버지 태종 무열왕을 “이성”으로 추숭하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하였다. 다시 말해, 문무왕에 의해 재해석된 신라식 “이성”은 그가 발원한 사찰에 신라식 쌍탑가람이 탄생하게 된 원인이 된 것으로 결론내려졌다.

Trans Abstract

I have already suggested a possible reason why the origins of Silla's monastery with twin Pagodas remain unclear, namely, that previous research has focused on the three key words of Sacheonwangsa Temple, Buddhist monk Myeonglang, and the Scriptures of Esotericism. Therefore, I decided to resolve the fundamental problem by expanding the viewpoint to China, which is the origin of a monastery with two Pagodas, and then to Silla. To that end, I have written this report by presenting the existing issues along with three pertinent questions, and then tried to provide answers to those questions.

First, regarding the question of whether Silla's monastery with two stupas originates from that of China's Sui Dynasty, my answer is yes. However, it has been found that the monastery with two stupas built during the Sui Dynasty was not influenced by the Southern dynasty, as previously claimed by academic circles, nor did it suddenly emerge as a new style of temple during the Sui Dynasty. In other words, the monastery with two stupas made its official appearance during the late fifth century with the Huifu temple of the Northern Wei, and not during the Southern dynasty. Its construction style endured until sometime before the Northern dynasty, along with Sungyangsa and Yeongcheonsa Temples, while the complete form of two-stupa monastery finally appeared during the Sui Dynasty.

Second, regarding the question about the background to the emergence of the Sui Dynasty's two-stupa temple, I contend that it is closely related to the unique political background of the Sui imperial family, in which the emperor and empress were praised as “two saints”. Interestingly, this concept of 'two saints' is also found in the story of Emperor Xiaowen of Northern Wei and his grandmother, Empress Dowager Feng, who were the inspiration for the construction of the Huifu Temple in Northern Wei. It is considered that the female imperial power lasting from the Northern Wei to the Sui Dynasty had its roots in the women-led social life of the nomadic tribes, which prevailed throughout certain eastern societies at that time.

Third, regarding the question of the background to the emergence of Silla's monastery with two stupas, I contend that it was probably combined with Silla's notions of patriotism and reason. I have already pointed out in the report the fact that studies on Silla's two-stupa monastery were too focused on Sacheonwangsa Temple, the Buddhist monk Myeonglang, and the Scriptures of Esotericism, making it difficult to obtain a satisfactory explanation of the origins and appearance of Silla's monastery with two stupas. Therefore, I have suggested that the viewpoint of the study should henceforth be oriented towards Sacheonwangsa Temple, Gameunsa Temple, King Munmu, and Silla patriotism.

I assume that King Munmu's intentions relating to his active and principal participation in the wars of unification clearly show that the construction of Sacheonwangsa Temple, for which the king offered his prayers, and of Gameunsa Temple, are closely related to Buddhist ideas about the defense of the country, which were prevalent at that time. In addition, I have paid attention to the fact that King Munmu visited Chang'an in China, and that he tried to raise his own position and the Silla royal family's prestige by worshiping his father King Taejong Muyeol after the unification of the peninsula. It seems highly likely that when King Munmu visited China, he became aware of the idea of the “two saints” and the two-stupa monastery, and incorporated them into the construction of the two temples (Sacheonwangsa and Gameunsa), which would have accelerated the appearance of the Silla-style two-stupa monastery.

Ⅰ. 머리말

사찰 건축물 중 가장 핵심이 되는 건물은 부처님의 무덤인 탑과 부처님의 모습을 모셔놓은 금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삼국시대 탑은 금당 앞쪽에 1기가 건립된 것이 일반적이지만, 신라가 삼국을 통일할 즈음 한반도에는 1탑이 아닌 2탑 즉 쌍탑이 금당 앞쪽에서 동서로 나란히 배치되는 새로운 건물배치가 등장하였다.

신라에서 새롭게 등장한 쌍탑가람은 동아시아, 더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경주지역에서 유행한 가람배치로 평가받고 있다. 쌍탑가람은 중국, 일본에도 존재하지만 통일신라와 비교하면, 그 수량이 적을 뿐만 아니라 건축구조면에서도 한 시대를 풍미하며 유행하지는 못 하였다. 더 나아가 통일신라 쌍탑가람은 왕실발원과 수도지역 중심이라는 독특한 양상을 이루었는데, 이는 동시기 중국, 일본과는 구별되는 특징으로 간주되고 있다.

한마디로 쌍탑가람은 통일신라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또한 통일신라 불교문화를 복원하는데 중요한 매개체가 된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지금까지 신라 쌍탑가람에 대해서는 다양한 관점과 방법으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

그렇다면 신라 쌍탑가람배치에서 가장 큰 이슈가 되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여전히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쌍탑가람의 기원과 출현배경이다. 우리나라에서 쌍탑가람의 연구는 19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당시 연구자들은 삼국시대 가람배치에서 그 기원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신라 황룡사지 가람배치1,와 백제 일탑식가람배치2를 쌍탑가람의 기원처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이 학설은 1990년대부터 국내외에서 새로운 자료들이 발견되기 시작하면서 강한 도전을 받게 되었고 현재는 거의 폐기되는 수준에 이르렀다.

이에 학자들은 눈을 돌려 법화사상, 금광명경신앙 등 불교사상을 주목하거나 혹은 중국 가람에서 직접적인 기원처를 추적하기 시작하였다. 법화사상설은 석가·다보불의 이불개념이 신라 쌍탑, 특히 불국사의 석가다보탑과 연결된다고 주장하였다.3 그러나 이 학설 역시 신라 최초의 쌍탑가람으로 추정되는 사천왕사와는 그 연결고리가 서로 맞지 않아 지금은 연구자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있는 추세이다.

사천왕사가 발굴된 이후로는 많은 학자들이 사천왕사와 밀교승 명랑의 특수한 관계에 포커스를 맞추어 신라 쌍탑의 기원과 등장배경을 금광명경, 관정경 등 밀교계 경전에서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다.4, 그들의 주장처럼, 사천왕사의 조각상과 일부 건물지에서는 밀교계 경전과 관련된 내용들이 확인되기도 한다.5 그러나 결정적으로 쌍탑은 밀교계 경전에서는 쌍탑에 관한 개념을 비롯한 그 어떠한 내용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 여전히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그렇다면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처로서 최근 관심을 받기 시작한 중국 쌍탑가람의 상황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지금까지 중국에서는 고고학적인 유적으로 쌍탑가람이 발견된 사례가 없다. 이에 학자들은 기록물을 기준으로 하여 남조 혹은 수나라 쌍탑가람을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처로 주목하여 왔다.6 그러나 이 학설 역시 문제점은 발견되는데, 그것은 문헌자료를 폭넓게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결론이 도출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처가 중국에 있다는 사실 자체는 부정하기 힘들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지난날 쌍탑가람의 연구대상으로 사천왕사만을 주목하였던 편협적인 시각에서 벗어나 중국, 다시 말해 동아시아 쌍탑가람으로 확장시켜 고찰해 볼 필요성을 느낀다. 중국 쌍탑가람에 대한 고찰은 단순하게 중국의 상황을 좀더 살펴보는 작업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신라 쌍탑가람에 대해 지금까지 해결하지 못한 문제점과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이다.

본고는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과 출현배경을 살펴보기 전 지금까지의 논쟁점들을 세 가지 질문으로 먼저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은 수나라 쌍탑가람인지, 둘째, 수 쌍탑가람의 등장배경은 무엇인지, 셋째, 신라 쌍탑가람의 출현배경은 무엇인지이다. 아래에서는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과 그 순서로 고찰하고자 한다.

Ⅱ.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은 수나라 쌍탑가람인가?

우리나라에서 쌍탑가람은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는 막바지 시기인 7세기 후반에 등장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Figs. 1, 2).7 그렇다면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처로 주목받는 중국 쌍탑가람은 그 최초 등장시기와 구체적인 사례, 이후 전개양상은 어떠한지 궁금하다. 앞장에서 이미 서술하였듯이, 지금까지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처로 언급되어 왔던 남조, 수나라 쌍탑가람이 과연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처인지 다시 한 번 구체적인 논증이 이루어져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Fig. 1.

<사천왕사 가람배치도>, Pla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site (Illustration from Eun Gyeng Yang)

Fig. 2.

<감은사 창건 가람배치도>, Plan of the Gameunsa temple site (Illustration from Excavation Report on the Gameunsa temple site, p. 386, figure 36)

중국 가람에서 쌍탑이 등장하는 시기와 사례에 대해서는 국내외 학자들이 사찰과 탑의 변천이라는 큰 주제 속에서 간략하게 고찰한 바가 있다.8 그러나 중국에서는 지금까지 쌍탑가람이 유적으로 발견된 사례가 없는 이유로 인해 중국 연구자들은 쌍탑가람에 대해 관심이 없었으며 그 결과 이에 대한 연구는 정식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실정이다.

고고자료가 부족한 현실로 인해, 국내외 학자들은 문헌기록에서 발견되는 쌍탑의 사례들을 제시하였으며, 그 결과 중국 쌍탑은 4세기 초반 동진시기 무창 창락사(昌樂寺)에 건립된 사례가 최초라고 하였다. 비록 그 숫자는 희소하지만 4세기 후반 수도 건강에 건립된 장간사(長干寺)와 5세기 후반 상궁사(湘宮寺), 6세기 초반 아육왕사(장간사와 동일한 사찰)에서도 계속해서 쌍탑의 존재는 확인된다고 하였다(Fig. 3).

Fig. 3.

<남조 건강성도>, Jiankang Palace and Buddhist Monastery with Twin Pagodas (Illustration from Records of the Nangjing City Wall, p. 37)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내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남조 쌍탑과 가람배치의 상호 관련성 문제이다. 창락사는 동탑이 먼저 건립된 이후 서탑이 만들어지게 되었으며,9, 장간사 3층탑은 전쟁으로 훼손되어 서쪽에 다시 탑을 세우게 되었는데 원래 동쪽의 탑에서 사리를 꺼내 서쪽 탑에 안치하였다고 한다.10, 523년 양 무제는 아육왕사(이전 장간사) 탑을 발굴하였으며, 이듬해에 두 탑을 수리하여 사리를 다시 안치하게 하였다.11, 상궁사는 유송 명제가 자신의 옛집을 사찰로 개조하였는데, 탑은 원래 10층탑을 건립하고자 계획하였지만 공사가 힘들다고 생각되어 5층의 쌍탑으로 나누어 완공하였다고 한다.12

위의 내용들을 통해, 동진, 남조 쌍탑은 불교사찰이 창건될 당시 가람배치의 계획 속에 포함되어 금당, 강당 등과 유기적인 관계에 있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이미 건립된 탑 옆쪽에 탑 1기가 새로이 건립되거나 혹은 10층탑을 계획하였지만 기술적인 한계로 인해 공사 도중 쌍탑으로 계획이 변경된 것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남조의 쌍탑은 통일신라 쌍탑가람 배치에서처럼 사찰이 창건될 당시 건축물 배치도 속에 이미 계획된 것이 아닌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조와 비교하여 북조 쌍탑과 쌍탑가람은 어떠한지 궁금증이 생긴다. 고고발굴이 미비한 남조 사원지와는 달리 지금까지 북조에서는 6곳의 사원지가 정식 발굴조사 되었으며 이들은 모두 탑 1기를 갖춘 사원으로 판명되었다. 이처럼 북조 가람은 1탑가람만 발굴된 배경으로 인해, 쌍탑은 북조가 아닌 남조가 그 기원처인 것으로 오인되어 왔다. 그렇다면 고고자료가 아닌 기록물에서 쌍탑을 확인할 수 있는 북조 사례들은 어떠한지 그 양상을 파악해 보아야 할 것 같다.

지금까지 북조 쌍탑에 대해서는 북위 왕우(王遇)가 건립하였다는 휘복사 쌍탑이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어 왔다. 중국 학자 趙一德은 섬서성 징성현(澄城縣)에서 출토된 <大代宕昌公暉福寺碑>(488년 제작)의 비문을 해독하는 과정에서 북위 쌍탑가람에 대한 내용을 발견하게 되었다(Fig. 4-1). 그는 484년 왕우가 자신의 고향에 있던 두 저택을 휘복사로 변경하여 각각의 원락에 탑 1기씩을 세웠으며, 결과적으로 이 사찰은 특이하게 남북의 두 원이 합쳐진 쌍탑가람이 되었다고 하였다.13

Fig. 4-1.

<휘복사비>, Stone tablet of the Huifu temple, 488, Xi’an forest of Stone tablets Museum (From Xian beilin bowuguan, p. 33)

휘복사라는 사찰은 이미 소실되어 현재 그 면모를 확인할 방법은 없다. 그러나 휘복사 비문에 근거하면,14 왕우의 저택이 사찰로 변경되면서 3층 쌍탑과 금당, 선실(禪室)이 갖추어졌으며, 공사는 484년부터 487년까지 진행된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 안타깝게도 쌍탑 이외에 금당, 선실 등의 전각들은 원래 저택의 건물 들이었는지 아니면 새로이 건립된 것인지 그 여부를 정확하게 확인하기는 힘들다. 그러나 두 탑은 동일한 모습으로 동시기에 축조되었다고 추정하기에는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

결국 5세기 후반 북조에는 쌍탑이 갖추어진 사찰이 이미 존재하였으며, 이 쌍탑가람은 신라 쌍탑가람과 비교하여 동일한 건축배치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 기원처로 눈여겨 볼 대상이라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다.

그렇다면 휘복사 쌍탑 이외에 북조에는 쌍탑 혹은 쌍탑가람의 사례가 없는 것인가. 필자는 이번 원고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북조 “쌍탑”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비석의 비문과 문헌기록의 사례들을 좀더 발견하게 되었다.

첫 번째 자료는 <唐永泰寺之碑>(706년 건립)이다. 이 비석은 현재 하남성 등봉시(登封市) 숭산 永泰寺(혹은 明練寺)에 현존하고 있으며(Fig. 4-2), 비문 중 “천불고탑 2기는 옛날 명련이 건립한 것인데, 수 인수2년(602년) 건립한 탑은 쌍탑의 중간에 건립되었다.”15는 내용은 북위 쌍탑의 존재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602년 수 문제가 전국에 사리탑을 건립할 당시 이곳 영태사에는 북위 쌍탑이 여전히 존재하였으며, 수 사리탑은 바로 그 쌍탑 사이에 건립되었다는 것이다.

Fig. 4-2.

<영태사비>, Stone tablet of the Yongtai temple, 706 (Photo by Eun Gyeng Yang)

영태사는 북위 문성제의 딸 전운(轉運)공주, 선무제의 딸 영태(永泰)공주, 양 무제의 딸 명련(明練)공주가 거주한 비구니 사찰이었다. 특히 북위 효정제는 누이 영태공주를 위해 탑 1기를 명련탑 옆쪽에 건립하였는데, 영태탑과 명련탑은 결과적으로 쌍탑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16

영태탑과 명련탑의 쌍탑은 소실되었으나 북위 쌍탑의 면모를 추정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명련탑과 영태탑은 애초부터 쌍탑으로 설계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비석의 내용을 통해 판단하면, 영태사 쌍탑은 두 공주를 위해 각각 시간을 달리하며 건립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북조와 수대 당시 사람들은 쌍탑으로 생각하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두 번째 북조 쌍탑자료로는 숭양사 비석이 있다(Fig. 4-3). 숭양사는 영태사와 인접한 곳에 위치하는데, 두 사찰 모두 중국 오악 중 하나인 중악 숭산에 소재한다.17, 숭양사 비석은 <崇陽寺倫統碑>로 명명되며, 이 비석은 현재 숭양서원(崇陽書院)에 보관되어 있다.18 비석의 정면 아래쪽에는 “中嶽崇陽寺碑銘序”로 시작하는 명문이 있으며, 비문은 숭양사의 내력과 이곳에 건립된 건물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Fig. 4-3.

<숭양사비>, Stone tablet of the Sungyang temple, 535 (Photo by Eun Gyeng Yang)

비문에서는 생선사(生禪師)가 484년 탑, 금당, 승방을 갖춘 가람을 이곳에 창건하였다고 한다. 특히 생선사가 추진한 15층 불탑은 완공을 보지 못한 상태로 있었으나 이후 그의 두 제자 윤(倫), 염(豔)법사가 완공하였으며, 더 나아가 이들은 7층 쌍벽돌탑까지 만들었다고 한다.19

생선사에 의해 484년 창건된 숭양사는 이후 그의 두 제자가 활약한 시기에 이르러 대규모 중창이 이루어졌으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535년 비석이 제작되었다. 그렇다면 숭양사 쌍탑은 비석이 만들어진 535년 이전, 즉 북위 말기에 건립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숭양사 쌍탑은 금당을 포함한 기타 사찰 건물들과 함께 계획된 것은 아니지만 탑 그 자체는 동일한 외관으로 동시기에 축조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세 번째, 북조 쌍탑 관련 자료로 북송대 편찬된 趙明誠의 『금석록』 기록을 제시할 수 있다. 그 내용은 각각 “후위 어사대 쌍탑송. 영희2년(533년)[後魏御史臺双塔頌. 永熙二年]”,20, “북제조쌍탑비. 천통3년(567년) 3월[北齊造双塔碑. 天統三年三月]”21,이다(Fig. 4-4). 안타깝게도 이 두 기록에 대한 부가적인 내용은 찾아볼 수 없는 이유로 인해, 533년 어사대에 존재하고 있었던 쌍탑과 북제시기 건립된 쌍탑에 대한 더 이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Fig. 4-4.

<금석록>, Bronze and stone inscriptions, Compiled by Zhaomingcheng

그러나 『금석록』의 기록을 통해, 북조에서는 쌍탑이 계속해서 건립되었다는 사실과 심지어 불교사찰이 아닌 중앙감찰기구였던 어사대에도 쌍탑이 만들어졌다는 내용은 사찰 속 쌍탑 혹은 불교신앙 속 쌍탑이라는 편협적인 관점에서 벗어나게 하는 좋은 자료가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네 번째, 하남성(河南省) 안양시(安陽市) 영천사(靈泉寺)에 현존하는 북제 563년 축조된 쌍석탑을 제시할 수 있다(Fig. 4-5).22 이 쌍탑은 북제 고승 도빙법사(道憑法師)의 묘탑이지만, 쌍으로 만들어져서 사찰 경내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Fig. 4-5.

<영천사(靈泉寺) 쌍탑>, Twin Pagodas of the Yongchonsa temple, 563 (Photo by Eun Gyeng Yang)

이상과 같이, 북조에서는 484년 건립된 휘복사 쌍탑을 시작으로 하여 영태사, 숭양사, 어사대, 영천사 등 북위, 동위, 북제로 이어지며 북조 전 시기동안 쌍탑이 계속해서 건립되었다. 다시 말해, 북조에서 쌍탑이라는 개념과 쌍탑 건립은 남조와는 차이가 나며 그 사례도 상대적으로 더욱 많은 수를 차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북조 쌍탑가람에 대한 구체적인 발굴이 없는 현 상황에서 북조 쌍탑가람이 신라 쌍탑가람의 직접적인 기원처가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된다. 하지만 그 기원처로 여전히 눈여겨 보아야 할 대상임에는 틀림없다.

그렇다면 북조를 이어 등장한 수나라 쌍탑가람의 상황은 어떠한지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국내외 학자들이 이미 언급한 것처럼, 광명사(光明寺), 법계니사(法界尼寺), 선정사(禪定寺)와 같은 수나라 가람에서는 쌍탑 혹은 쌍탑가람이 정식으로 등장한다(Fig. 5).23

Fig. 5.

<수 대흥성과 사찰>, Daxing Capital and Temples (Drawing from Eun Gyeng Yang, based on Comparative Study on the Capital of the early East Asia, p. 288)

지금까지 선정사는 국내 학계에서는 쌍탑가람으로 주목받지 못했지만, 동일한 이름의 사찰이 나란히 위치하며 각각의 탑은 한 사람의 발원으로 건립된 배경으로 인해 필자는 쌍탑가람의 큰 범위 속에 포함시키고자 한다. 두 곳의 선정사는 각각 수나라 대흥성의 평양방(平陽坊)과 화영방(和永坊)을 모두 차지한 대규모 사찰로 수나라 국찰 대흥선사와 더불어 1급 사찰로 분류될 정도로 중요한 사찰이었다.24, 각각의 선정사는 602년, 605년 건립되었지만 두 탑은 수 양제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높이가 330척(100m 좌우)이나 되는 거대한 7층 목탑이었다.25

수대 쌍탑과 관련하여 선정사보다 더욱 중요한 사찰은 바로 광명사와 법계니사이다. 광명사는 584년 수 문제가 법경(法經)스님을 위해,26, 법계니사는 수 문제의 부인 독고황후가 화휘(華暉), 영객(令客) 두 비구니를 위해 건립한 사찰이었다.27, 『長安志』, 『唐兩京城坊考』, 『廣弘明集』 등 문헌기록을 통해 판단하면, 광명사와 법계니사의 쌍탑은 사찰이 건립될 당시 기타 전각들과 동일한 시기 조성되었으며, 동서로 대칭을 이루며 나란히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28

특히 『광홍명집』 등 기록에서는 수 문제는 자신을 키워준 비구승 지선(智仙)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법계니사 쌍탑 기단을 서로 연결하였다고 하였다.29, 그런데 실제 일본 모토야쿠시지(本藥師寺:680∼698년 건립)의 쌍탑지에서는 동서로 연결된 참도(參道) 유구30,가 두 탑 사이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에(Figs. 6-1, 6-2), 법계니사의 쌍탑기단과의 연관성을 확인할 수 있다.

Fig. 6-1.

<本藥師寺 평면도>, Plan of the Hon-Yakushi-ji (Illustration from The Comparative Study of the Wooden Pagoda in Fareast Asia, p. 191)

Fig. 6-2.

<쌍탑지와 參道유구>, Twin Pagodas and Hallway (Illustration from Ars Buddhica 235, p. 63)

7세기 후반 일본 쌍탑가람에서 수나라 쌍탑가람의 특수한 시설이 확인된다는 사실은 7세기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처를 추적하는 데 좋은 참고자료가 된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추적과정 속에서 광명사를 거쳐 간 승려들을 조사하게 되었으며,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신라승 지인(智仁)이 말년에 이 사찰에 거주하였다는 사실이다. 지인은 현장스님의 제자로 역경에 참여하였으나 현장이 죽은 664년 이후에는 광명사에 머물렀다고 한다(Fig. 7).31

Fig. 7.

<장안 신라승과 사찰>, Silla Monks and Temples in Chang’an (Illustration from The Review of Korean History, vol. 110, p. 53)

7세기 중반 당나라 장안에는 대흥선사, 선정사를 포함한 광명사, 법계니사의 수나라 쌍탑가람들이 대부분 그대로 존재하고 있었다.32, 이 시기 당나라 황실에서 새롭게 건립한 사찰로는 631년 자덕사(慈德寺), 보광사(普光寺)와 634년 홍복사(弘福寺)가 있었지만(Fig. 8),33, 이러한 사찰에서는 쌍탑과 관련된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또한 하남성 내황현(內黃縣) 쌍석탑(743년)(Fig. 9),34, 임주(林州) 양대사(陽台寺) 쌍석탑(750년),35, 757년 안록산과 사사명이 북경 민충사(憫忠寺)에 건립한 쌍탑36 등 8세기 당나라 지방에서도 쌍탑이 만들어지지만, 당나라 전반에 걸쳐 쌍탑가람은 그다지 성행한 가람배치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Fig. 8.

<당 장안성과 불교사찰>, Chang’an and Buddhist Temples (Illustration from Eun Gyeng Yang, based on Comparative Study on the Capital of the early East Asia, p. 309)

Fig. 9.

<하남성 쌍석탑>, Twin Pagodas, Henan province, (Photo by Henan wenwu jinghua, p. 95)

이상과 같이 비석과 문헌기록 속에서 발견되는 위진남북조∼당대 쌍탑과 쌍탑가람을 검토한 결과, 수나라 쌍탑가람은 신라 쌍탑가람의 직접적인 기원처가 된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더 구체적으로 확인하였다. 그러나 수나라 쌍탑가람은 과거 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남조에서 수나라로 이어지거나 혹은 수나라에 이르러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가람배치가 아니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다시 말해, 쌍탑가람은 남조가 아닌 5세기 후반 북위 휘복사에서부터 출현한 후 숭양사, 북제 쌍탑 등 북조 전 시기 동안 그 맥을 계속해서 이어가다 수나라에 이르러 하나의 완성된 가람배치로 확인할 수 있었다.

Ⅲ. 수나라 쌍탑가람의 등장배경은 무엇인가?

앞 장에서 살펴본 것처럼, 광명사와 법계니사 등 수나라 장안에 건립된 쌍탑가람은 황실의 절대적인 후원 속에서 등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수 황실에서 쌍탑을 적극적으로 건립한 이유는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고고유적 자료가 없는 현 시점에서 이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부득이하게 문헌기록을 다시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광홍명집』, 『당양경성방고』에서 법계니사는 수 문제와 그의 부인 독고황후가 두 비구니를 위해 쌍탑을 건립하였다고 언급하였다.37 2명의 발원자가 2명의 비구승을 위해 2기의 탑을 사찰에 만들었다는 것은 아주 흥미로운 내용이다. 법계니사 이외에 2곳의 선정사 탑 역시 수 양제가 아버지 문제와 어머니 독고황후를 위해, 다시 말해 2명을 위해 2기의 탑을 건립하였다. 선정사에도 두 탑이 건립되었다는 것은 법계니사로부터 생긴 흥미로움이 가볍게 넘길 내용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하게 한다.

결과적으로 본다면, 법계니사, 선정사 쌍탑에서는 수 문제와 그 부인 독고황후가 공통분모로서 발견된다. 그렇다면 수 황실의 황제와 황후 사이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지 추적해 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이 의문점에 대한 한 가지 실마리를 찾을 수 있는 내용이 『隋書』 권36 「독고황후전」에서 발견된다.

  • “독고황후는 항상 황제와 정사를 이야기하며 뜻을 같이하였기 때문에 궁중에서는 두 명의 성인이라고 칭한다[后每與上言及政事, 往往意合, 宮中稱爲二聖]”38라는 내용이다.

이와 유사한 기록들이 『北史』와 『資治通鑑』에서도 발견된다.39 여기서 “두 명의 성인”은 곧 “두 명의 황제”라는 의미로도 해석될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일련의 문헌기록을 통해 판단하면, 수나라 독고황후는 황제와 더불어 “두 명의 성인(二聖)”으로 명명될 정도로 정치적으로 상당한 파워를 행사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2명의 최고 권력자가 존재하였던 수 황실의 특수한 정치적인 배경은 동일한 모습의 쌍탑이 서로 나란히 배치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는 “二聖”이라는 단어가 사용된 또 다른 기록을 좀더 살펴보아야 할 것 같다.

공교롭게도 북위 휘복사비(<大代宕昌公暉福寺碑> Fig. 4-1)에서도 이 단어가 발견된다. 내용인즉 “왕경시는 온 정성을 다하여 고향의 남북 옛 저택을 내어 두 명의 성인을 위하여 3층 탑을 각각 1기씩 건립하였다[散騎常侍、安西將軍、 吏部內行尙書、宕昌公、王慶時… 乃罄竭丹誠, 於本鄕南北舊宅, 上爲二聖, 造三級浮圖各一區]”41라는 것이다.

휘복사비에서 언급한 “두 성인”은 당시 절대 권력을 휘두른 효문제와 그의 할머니 문명태후를 가리킨다. 남북조시대 저택을 사찰로 개조할 경우, 일반적으로 공사가 힘든 이유로 인해 탑은 새로이 건립되지는 못한 채 금당이 가람의 중심이 되는 사례가 많았다.41 그러나 왕경시는 저택을 개조하여 사찰로 변모시킨 휘복사에 굳이 쌍탑을 건립하였는데, 그 이유는 비문에서도 강조한 것처럼 문명태후 때문이었다.

왕경시는 왕우(王遇) 혹은 겸이경시(鉗耳慶時)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로, 문명태후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신 羌族출신 환관이었다. 그는 자신의 고향이자 강족의 중심지였던 이윤진(李潤鎭)에 당시 최고 권력자 2명을 위해 2기의 탑을 건립하였던 것이다.42, 왕경시는 문명태후를 위해 휘복사 이외에 태후의 능묘(永固陵)와 능사(思遠佛寺), 운강석굴 중 호국사(護國寺)·진국사(鎭國寺)석굴(제7, 8굴)을 직접 공사하고 총감독하기도 하였다(Fig. 10).43, 호국사·진국사의 쌍굴을 포함한 5세기 후반 운강석굴은 2개의 동굴 혹은 쌍탑이 개착되는 사례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특이한 상황은 모두 “二聖”이라는 북위 황실의 특수한 정치배경이 원인이 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44 다시 말해 북위의 ‘이성’ 개념은 사찰과 석굴에서 쌍탑이 출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Fig. 10.

<문명태후와 영고릉, 사원불사, 운강석굴 제7, 8굴>, Empress Dowager Feng and Yongguling Tomb, Siyuanfosi Temple, Yungang Cave7, 8 (Photo by Eun Gyeng Yang)

그렇다면 북위 문명태후, 수 독고황후 두 여성만이 절대권력을 행사하였으며 그 결과 쌍탑, 쌍굴이라는 특이한 불교조형물이 출현하게 된 것일까. 해답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문명태후를 이어 6세기 전중반 북위 정치를 휘어잡은 인물로 영태후(靈太后)가 있다. 영태후 역시 열렬한 불교신자로 북위 최대 사찰인 영녕사를 비롯하여 진태상군사, 쌍녀사를 낙양에 건립하였고 경명사의 탑도 발원하였다.

필자는 과거 북조 태후 혹은 황후가 황제와 함께 최고의 권력을 장악하고 불사에 거액의 세금을 낭비한 배경으로 북조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하였던 모계씨족제(母系氏族制) 풍습을 주목한 적이 있다.45 북위 황실에서는 모계씨족제 풍습이 황후, 태후 등 여성세력 강화를 비롯한 외척세력과의 결탁이 가능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방지하기 위해 황태자를 낳은 엄마를 강제로 죽게 하는 “子貴(立)母死制度”를 실행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제도 역시 북위사회에서 여성이 정치적인 힘을 발휘하는 행위를 막지는 못하였다.

이처럼 북위를 포함한 북조사회에서 여성이 엄청난 파워를 보였던 모습은 안지추(顔之推)가 저술한 『顔氏家訓』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46 안지추는 남조 양나라에서 태어났으나 북제, 북주, 수 왕조에서 살았던 경험을 바탕으로 남조와 북조 사람들의 생활모습, 습속 등 그 차이점을 책 속에서 구체적으로 묘사하였다. 그는 남조의 여성은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고 얌전하고 조용한데 반해 북조 여성은 오랑캐의 풍속으로 한 집안, 각종 송사문제, 청탁 등 다방면에서 적극적이고 강인하다고 하였다.

안지추의 견해를 기준으로 판단한다면, 북조 여성은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유교적인 사상에 의거하여 살았던 것이 아니라 오랑캐 본연의 풍속을 향유하며 살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이러한 북조 여성의 생활풍습은 수나라에도 지속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결국 북조, 수의 전반적인 생활습속은 최고 권력층에도 투영되게 되었으며, 그 결과 “二聖”이라는 칭송과 더불어 이를 반영한 종교물들이 등장하게 된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북조 석굴, 사찰에서는 쌍굴과 쌍탑이 등장한 것 이외에 2구 불상, 즉 二佛도 유행하였다. 학자들은 불교경전 《법화경》 견보탑품에서 석가다보불이라는 “이불”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 이유로 인해, 이불상의 기원은 불교교리에서 구하고 있다.47 그러나 이불과는 대조적으로 쌍탑과 쌍굴은 《법화경》을 포함한 불교경전에서 서로 부합되는 내용을 찾기는 여전히 힘든 실정이다.

결국 불교경전 혹은 불교교리는 중국에서 쌍탑가람이 등장하는 것에 직접적인 배경이 되지 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추정은 수 광명사에 거주했던 승려들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힘을 실을 수 있을 것 같다.

광명사를 거쳐 간 승려로는 법경, 담장(曇藏), 혜장(慧藏), 보제(普濟), 진행(眞行), 혜료(慧了), 신라승 지인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수 문제 사리탑 건립 사업에 참여하였거나 혹은 독고황후의 명복을 비는 추복의식을 진행하였거나 국가적인 역경작업에 참여하는 등 수, 당 황실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수, 당대 이들은 열반학, 삼계교, 정토교, 유가법상종 등 다양한 불교교리와 사상을 가지고 있었으며, 광명사에서 이들을 선양하였다.48

위의 내용에 근거하여 판단하면, 광명사는 특정한 불교사상만이 존재하였던 사찰이 아니라 다양한 사상과 교리가 있었던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광명사는 창건 이래 사찰이 지속되는 동안 특정한 불교사상이 존재하였던 곳은 아니었다. 이러한 사실은 광명사에 건립된 쌍탑이 특정 불교교리와 밀착되었을 가능성을 희박하게 만든다고 볼 수 있다.

앞 장에서 필자는 중국에서 쌍탑가람은 북조에서 등장하고 지속되었으며, 북조를 이어 등장한 수나라에서 계속해서 출현하며 더욱 발전된 양상을 이루었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발맞추어 쌍탑이 등장한 원인 역시 북조와 수 황실에 출현한 “二聖”이라는 특수한 정치적인 배경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이러한 “이성”의 개념은 북조∼수대 사회 전반에 만연한 유목민족 특유의 여성 사회생활상이 반영된 결과로 간주하였다.

Ⅳ. 신라 쌍탑가람의 출현배경은 무엇인가?

수 황실의 특수한 정치적인 배경은 쌍탑가람이 건립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수 쌍탐가람은 신라 쌍탑가람의 직접적인 기원처를 이룬 것으로 고찰되었다. 그렇다면 신라에서 쌍탑가람이 등장하는 이유와 배경 역시 북조, 수와 동일하게 “두 명의 성인” 이라는 정치적인 배경에서 비롯되는 것일까. 이 문제에 대해선 지금까지 한 번도 의문이 제기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사천왕사 때문이다.

신라 쌍탑가람의 최초 사례로 사천왕사가 지목되는 것에는 큰 이견이 없다(Fig. 11).49 또한 사천왕사는 명랑과 문두루비법이라는 특수한 배경으로 인해 사천왕사, 명랑, 《관정경》, 《금광명경》은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되어 왔다. 다시 말해, 신라 쌍탑가람은 사천왕사, 명랑, 관정경과 금광명경이라는 세 키워드에 집중되어 연구가 진행되어 왔던 것이다. 그 결과 신라에서 쌍탑가람이 등장하는 배경은 불교경전 혹은 불교교리에서 그 답을 찾으려고 부단히 노력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두 경전에서는 쌍탑의 개념도 쌍탑가람이라는 내용도 발견할 수 없었다.

Fig. 11.

<사천왕사지>, Sacheonwangsa temple site (Photo by Excavation Report on the Sacheonwangsa temple Ⅰ, figure 5)

사천왕사와 명랑,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사실 그 자체를 부정하기는 힘들다. 그렇지만 문제해결을 위해 기존 연구에서처럼 명랑과 그의 불교교리만을 강조하던 분위기에서 벗어나, 명랑과 주변 인물, 즉 그의 외삼촌 자장과 문무왕으로까지 연구대상을 확대시켜 살펴볼 필요성이 제기된다.

주지하다시피, 명랑은 635∼638년, 그의 외삼촌 자장은 636∼643년 당나라에서 유학하였다.50, 명랑의 중국 내 행적은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힘들지만, 자장이 활동한 내용은 대략적으로 확인이 가능하다. 자장은 638년 장안에 도착하였을 당시 태종의 후의로 승광사(勝光寺) 별원에 거주하였다고 한다.51, 그런데 승광사는 당시 광덕방(光德坊)에 소재하고 있었으며, 이곳은 수 쌍탑가람 광명사, 법계니사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Fig. 8).

명랑과 자장이 유학한 7세기 중반 장안에는 쌍탑가람을 포함하여 수대 국가 사찰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7∼8세기 신라승들이 선정사 등 수 1급 사찰과 광명사 등 쌍탑이 있는 사찰에도 거주한 사례를 통해 판단하면,52 명랑과 자장 역시 이러한 사찰들을 방문하였거나 적어도 직접 보았을 가능성은 높다고 판단된다. 만일 명랑 본인이 장안에서 쌍탑이 있는 사찰을 방문하였다면 쌍탑가람은 타인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신라에 전래된 것이 아니라, 명랑에 의해 직접적이고 주도적으로 신라에 도입되었을 가능성도 높다고 생각된다.

이 시점에서 자장이 신라로 돌아온 이후 그의 권유로 645년 건립된 황룡사 목탑은 왜 쌍탑이 아니었는지 의문이 생긴다. 이 질문에 대한 간단한 대답으로는 황룡사는 창건 당시 1탑3금당식 가람배치가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라든지 아니면 선덕여왕 치세 당시는 쌍탑이 건립되어야 할 사회적인 요구가 크지 않았을 가능성 등등 여러 이유를 찾을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문무왕 치세 당시에는 쌍탑이 건립되어야 할 이유가 생겼기 때문에 쌍탑이 등장한 것인가라는 또 다른 의문이 생긴다.

사실 사천왕사는 명랑스님과 연관된 사찰이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문무왕의 발원으로 건립된 사찰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기록이 『三國史記』에서 발견되는데, 문무왕은 재위 4년(664년) “사람들이 함부로 재화와 토지를 사찰에 임의로 시주하는 것을 금지시켰다.”53,는 내용이다. 문무왕의 이 조치는 664년 이후 불사를 계획한다면 사전에 왕의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는 것을 의미한다.54

사천왕사 창건에서 문무왕이 명랑보다 더욱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을 것이라는 필자의 이러한 추정은 문무왕의 화장터가 사천왕사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하는 학자들과 그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55,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사천왕사지에서 출토된 비편은 문무왕릉비를 포함하여 총 3종류이며, 사찰 입구 동서에 비석이 세워져 있었다고 한다.56, 사천왕사 입구에 문무왕비가 세워졌는지에 대한 논쟁이 이루어지기도 하였지만, 문무왕비와 사천왕사가 서로 연결되어 언급된 사실 자체만으로도 문무왕은 사천왕사에서 중요한 인물이었다는 것을 시사한다는 것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생각된다.57

그런데 문무왕은 생전에 사천왕사 이외에 감은사도 함께 건립하였는데, 감은사 역시 쌍탑가람배치를 보인다(Fig. 12). 이 두 사찰을 함께 묶어 고찰해 본다면, 사천왕사와 감은사는 문무왕이 국가의 세금을 들여 건립한 국가사업의 일환이었으며 국가적 사찰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반영이라도 하듯, 이 두 사찰은 신라 중대 成典사원에 포함된 호국사찰이었던 것이다.58

Fig. 12.

<감은사지>, Gameunsa temple site (Photo by Gyeongju National Museum-Silla Art Exhibition Hall, p. 154)

그렇다면 신라 쌍탑가람의 등장은 기존학계에서 중요하게 다루어 왔던 사천왕사, 명랑, 밀교경전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압축되는 것이 아니라 사천왕사·감은사, 문무왕, 호국이라는 새로운 키워드로 축약될 수 있다.

“호국”이라는 개념은 기존의 사천왕사, 감은사와 관련된 일련의 논저에서 이미 활발하게 언급되었고 연구되어 왔다. “사천왕”이라는 寺名 자체와 사천왕상은 『金光明經』 권5 사천왕호국품에서 유래되었다는 견해가 그것이다.59, 또한 명랑의 문두루법과 사천왕사의 오방신, 신왕의 권속들은 『灌頂經』 권7에서 찾아 볼 수 있으며, 이 경전에서도 사천왕과 관련된 내용이 보인다고 주장하는 것 역시 호국과 연결된다고 말할 수 있다.60, 이에 덧붙여 감은사 동서석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에 표현된 사천왕상 역시 호국불교 사상이 반영된 것이며(Fig. 13), 동시기 중국 수당대 사리기에서 사천왕상이 성행하지 않았던 양상과는 다른 신라만의 특징으로 간주되기도 한다.61

Fig. 13.

<감은사지 서탑 출토 사리외함>, Sarira Reliqury, Western Pagoda of the Gameunsa temple site (Photo by Gyeongju National Museum-Silla Art Exhibition Hall, p. 155)

이상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무왕이 건립한 두 사찰에서 유독 호국사상이 다방면에 걸쳐 강하게 반영되고 표현된 결정적인 이유는 그의 특별한 인생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러한 추정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내용을 통해 쉽게 증명할 수 있다. 우선 그는 650년 진덕 여왕의 명으로 신라 사절단과 함께 중국 장안에 가서 태평송을 새긴 비단을 고종에게 직접 건네었다.62, 660년에는 병선 100척을 이끌고 덕물도에서 소정방을 맞은 후, 백제가 항복하는 현장에 문무왕이 있었다. 그는 사비성에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을 꿇어 앉히고 그 얼굴에 침을 뱉기도 하였다.63, 667, 668년 고구려 정벌 당시에도 서울을 거쳐 평양에서 직접 당나라 장군들과 만나 고구려와 접전을 벌이기도 하였다.64

676년 당나라 군사를 한반도에서 축출한 후 그의 호국의지는 다른 왕들과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다시 말해 문무왕은 그 모든 통일전쟁을 직접 지휘하고 현장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에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려는 그의 일관된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문무왕이 건립한 사천왕사, 감은사에도 그의 호국사상이 자연스럽게 반영되었을 것이라는 사실은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결국 사천왕사와 감은사는 삼국통일을 계기로 새로운 주적으로 부상한 중국 당과 일본을 물리치려는 염원을 안고서 창건된 새로운 호국사찰이라고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고신라의 주적이었던 고구려, 백제를 담당한 호국 사찰이 황룡사였다면, 통일을 이룬 이후 신라의 호국 대상이 변화하였다는 사실은 이를 담당한 새로운 호국 사찰을 필요로 하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65

문무왕과 함께 신라 통일전쟁시기 호국사상과 강하게 관련된 인물로는 김유신과 태종 무열왕을 거론할 수 있다. 흥미롭게도 『삼국유사』 권2의 기록 중 신문왕이 만파식적이라는 전설상의 피리를 얻게 되는 과정에서 문무왕과 김유신을 “두 성인”66이라고 서술한 대목이 있다. 필자는 이 기록에서 중국 “이성”개념을 떠올렸으며 중국 “이성”과 연결시키고자 시도하였다. 그러나 고려시대 일연스님에 의해 간략하게만 언급된 신라 “이성”의 존재를 중국 황실의 절대지존과 결부된 “이성”관념과 연결시키기에는 한계성과 위험성 심지어 후대에 윤색되었을 가능성 등등 문제점이 많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태종 무열왕 김춘추는 어떠한가. 사실 신라 통일전쟁에서 큰 역할을 한 김춘추는 문무왕의 아버지로 통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 唐, 倭를 방문한 특별한 이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장안에서 3개월 동안 체류하면서 직접 체험한 선진문물을 귀국 후 신라에 적극적으로 도입하기도 하였다.67

더욱이 김춘추는 민족통일과 율령정치 추진 등 정치, 종교, 군사적인 면에서 삼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하는 등 삼국통일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68, 또한 그가 신라 왕으로 즉위한 사실은 신라 역사에서 성골왕에서 진골왕으로의 왕통 변화가 생긴 큰 의미를 내포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즉위과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며, 즉위 후에도 무열왕권의 한계는 여전하여 그가 염원한 왕권강화를 성공적으로 이루지 못했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69

무열왕의 뒤를 이어 신라왕으로 등극한 문무왕은 삼국통일이라는 대업을 완성한 장본인으로 기존 신라 왕실과의 차별성을 도모하였다. 문무왕은 유교적 예제인 五廟制에 주목하였고, 이를 신라에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그는 새로운 오묘제를 통하여 직계 조상에게 제사함으로써 무열왕계 왕실을 김씨 집단과 차별 분리하고자 꾀하였고 무엇보다 왕위의 정통성과 정당성을 강조하였다.70

다시 말해, 문무왕은 삼국 통일의 위업을 만천하에 선전하고 스스로의 위상과 무열왕계 왕실의 권위를 드높이는 소위 왕권강화를 도모하는데 중국의 “이성”관념을 채용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문무왕이 “이성”이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있던 것은 그가 경험한 특별한 체험에서 비롯되었을 것 같다. 650년 중국을 방문한 문무왕은 당나라 장안의 모든 사람들이 고종과 그의 부인 측천무후를 “二聖”으로 칭송한 사실71을 인지하였을 가능성은 높다고 생각된다.

문무왕의 장안 방문은 664년 신라 부인들에게 중국 옷을 입게 하고,72, 674년 중국식 曆法을 시행하는73 등 중국 문물을 수용하는데 적극적인 모습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이러한 내용은 문무왕이 태종 무열왕과 본인을 “이성”개념을 품고서 왕권강화를 염원하였고 이와 동시에 그가 건립한 사찰에 대입하였을 가능성이 있음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 사천왕사와 감은사에 쌍탑가람이라는 새로운 가람배치가 출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문무왕과 당나라, 문무왕과 통일전쟁, 문무왕과 왕권강화라는 개념과 내용은 사천왕사와 감은사를 건립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이 두 사찰에서 쌍탑이 등장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사천왕사, 감은사의 쌍탑가람은 중국 쌍탑가람배치가 그대로 대입된 것이 아니라 신라식 호국관념과 신라식 이성관념이 서로 혼합되어 신라식으로 재탄생한 결과물이라고 말할 수 있다.

Ⅴ. 맺음말

신라 쌍탑가람배치는 독특한 가람배치와 더불어 신라에서 유독 성행한 이유로 인해 지금까지 활발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으나, 기원과 출현배경 등 중요한 문제들이 여전히 미제로 남아 있다. 필자는 미제로 남아 있는 이유에 대해 사천왕사, 명랑, 밀교경전이라는 세 키워드에 포커스가 집중되어 연구되어 온 것에서 비롯되었음을 제시하였다. 이에 필자는 쌍탑가람의 근원지인 중국으로 그 시각을 확대시켜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한 후 다시 신라로 접근하는 방법을 선택하였다. 이를 위해 본고는 기존의 논쟁점들을 우선 세 가지 질문으로 제시한 후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서술되었다.

첫째, 신라 쌍탑가람의 기원은 수나라 쌍탑가람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은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본고에서 수나라 쌍탑가람은 과거 학계에서 주장한 것처럼 남조에서 수나라로 이어지거나 혹은 수나라에 이르러 갑자기 등장한 새로운 가람배치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특히 필자는 중국 쌍탑가람은 484년 북위 휘복사에서부터 처음 등장한 이래 북조 전 기간을 거쳐 수나라로 전승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지금까지의 고고자료와 기록물을 통해 판단하면, 중국에서 쌍탑가람은 북위에서 최초 등장하였고 북조 전 기간 동안 건립되었으며, 이 전통은 수나라 쌍탑가람으로 계승되었던 것이다. 특히 수 쌍탑가람은 쌍탑과 기타 전각들이 창건 당시부터 동일한 계획 속에 있었으며, 쌍탑은 금당 앞쪽에서 동서로 서로 대칭을 이루며 나란히 배치된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둘째, 수나라 쌍탑가람의 등장배경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수 황실의 특수한 정치적인 배경을 제시하였다. 필자는 광명사, 법계니사 등 쌍탑가람에서는 수 문제와 부인 독고황후가 공통분모로서 발견되는 것에 착안하여 두 사람의 관계를 추적하였다. 그 결과 이 두 사람은 당시 “두 명의 성인(二聖)”으로 칭송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런데 “두 성인(二聖)”이라는 단어와 개념은 484년 휘복사비에서도 확인되며, 북위 “이성”은 효문제와 그의 할머니 문명태후를 가리켰다. 북조 여성은 유교사상에 입각한 남조 여성과는 달리 대외활동을 적극적이고 활발하게 하였으며, 이러한 생활상은 오랑캐 특유의 풍속에서 비롯된 것이다. 북조의 이러한 여성상은 수나라에도 지속되었으며, “이성”으로 칭송된 특수한 정치적인 모습 역시 북조와 수는 서로 연결되며 그 결과 쌍탑이라는 특수한 가람배치가 등장하고 지속된 것으로 추정하게 되었다.

셋째, 신라 쌍탑가람의 출현배경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은 신라식 호국관념과 신라식 이성 개념이 서로 혼합되어 등장하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사천왕사와 감은사는 문무왕 664년 내려진 사찰 시주금지 조치의 영향으로 문무왕의 허락을 받아 건립된 국가사찰이었다. 문무왕만의 특별한 인생 즉 통일전쟁에 주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배경은 통일 이후 그가 발원한 사천왕사, 감은사에 호국사상이 다방면에 걸쳐 강하게 반영되게 된 원인이 된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필자는 문무왕이 중국을 방문할 당시 장안에 널리 퍼져있었던 “二聖”이라는 개념을 알게 되었고, 이를 신라식 이성으로 재해석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다시 말해, 문무왕은 본인과 그의 아버지 태종 무열왕을 “이성”으로 추숭하였으며, 또한 그가 발원한 사찰에 “이성”개념을 대입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선진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문무왕의 개방성은 신라 사찰에서 쌍탑가람이 등장하는데 촉매제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결국 사천왕사, 감은사의 쌍탑가람은 중국 쌍탑가람이 그대로 대입된 것이 아니라 신라식으로 재탄생한 결과물인 것으로 결론이 도출되었다.

Notes

1

한정희, 『한국 고대 쌍탑의 연구-통일신라시대 쌍탑을 중심으로』(홍익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1).

2

장경호, 『한국의 전통건축』(文藝出版社, 1992).

3

김상태·박언곤, 「7·8세기 동아시아 2탑식 가람의 생성과 전개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12(2003) pp. 7-26; 김상태, 「감은사 사리장엄에 의한 2탑구성원리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16(2007), pp. 137-152.

4

신용철, 「통일신라 경주지역의 불탑 배치에 관한 고찰」, 『미술사논단』 31(2010), pp. 44-47; 한정호, 「신라 쌍탑 가람의 출현과 신앙적 배경」, 『석당논총』 46(2010), pp. 179-208.

5

장충식, 「신라 사천왕사 사지 壇席의 고찰」, 『불교학보』 39(2002), pp. 7-23; 김상태, 「사천왕사 초석의 장식에 관한 연구」, 『한국 실내디자인학회』 16-1(2007), pp. 3-10; 임영애, 「사천왕사지 소조상의 존명」, 『미술사논단』 27(2008), pp. 7-32.

6

박윤배, 「雙塔式伽藍配置의 기원을 통한 新羅와 隋의 관계」, 『CHINA연구』 14(2013), pp. 41-88; 양은경, 「신라의 사원」, 『신라고고학개론』 상(진인진, 2014), pp. 256-271; 임남수, 「불교가람의 중국화에 관한 문제」, 『미술사연구』 28(2014), pp. 204-208.

7

영묘사지로 추정되는 유적지에서 발굴조사를 통해 쌍탑 유구가 확인되었다. 그러나 쌍탑 유구는 창건가람(635년)이 아닌 재건되는 과정에서 건립된 것으로 판단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통일신라 후기로 비정되고 있다(신창수, 「흥륜사의 발굴성과 검토」, 『신라문화』 20(2002), pp. 290-295)

8

宿白, 「東漢魏晉南北朝佛寺布局初探」, 『慶祝鄧廣銘敎授九十華誕論文集』(河北敎育出版社, 1997), pp. 37-38; 宿白, 「隋代佛寺布局」, 『考古與文物』 2(1997), pp. 29-31; 현승욱, 「중국 초기 불교사원 배치에 관한 연구−후한부터 남북조까지의 문헌을 중심으로」, 『건축역사연구』 22(2013), pp. 37-38.

9

“王廙, 字世將, 上品上 瑯琊臨沂人. 善屬詞工書畫. 過江後爲晉代書畫第一. 音律衆妙畢綜. 元帝時爲左衛將軍, 封武康侯. 時鎮軍謝尚於武昌昌樂寺造東塔, 戴若思造西塔, 並請廙畫. 王敦用廙爲平南將軍, 荊州刺史, 護南蠻校尉. 贈侍中. 年四十七”(『歷代名畵記』 권5).

10

“釋慧達. 姓劉. 本名薩河.…… 先是簡文皇帝於長干寺造三層塔. 塔成之後每夕放光. 達上越城顧望見, 此剎杪獨有異色. 便往拜敬晨夕懇到. 夜見剎下時有光出. 乃告人共掘, 掘入丈許得三石碑. 中央碑覆中有一鐵函. 函中又有銀函. 銀函裏金函. 金函裏有三舍利. 又有一爪甲及一髮. 髮申長數尺. 卷則成螺. 光色炫燿. 乃周敬王時阿育王起八萬四千塔. 此其一也. 既道俗歎異. 乃於舊塔之西更竪一剎. 施安舍利. 晉太元十六年. 孝武更加爲三層”(『高僧傳』 卷13, T50, No. 2059).

11

“三年八月, 高祖改造阿育王寺塔, 出舊塔下舍利及佛爪髮,…… 至四年九月十五日, 高祖又至寺設無碍大會, 竪二剎, 各以金罌次玉罌重盛舍利及爪髮, 內七寶塔中. 又以石函盛寶塔, 分入兩剎下”(『梁書』 권54).

12

“以上故第爲湘宮寺, 備極壯麗, 欲造十級浮圖而不能, 乃分爲二”(『景定建康志』 卷8 「建康表」 4, 『文淵閣 四庫全書』 第 488冊, p. 194).

13

趙一德, 「中國現存最古老的尼僧寺院」, 『2005年雲岡國際學術硏討會論文集』(文物出版社, 2006), p. 715.

14

이 비석은 488년 제작되며, 1971년 서안 비림박물관으로 이전되어 전시실에 진열되어 있다. 비석의 높이는 294cm이고 폭은 90cm이다(曹剛, 『西安碑林博物館』(陝西人民出版社, 2000), p. 33).

15

“千佛二古塔者, 昔明練之所起, 亭亭四照, 嶷嶷搖空, 龕室, 重光回, 其間大堵波者, 隋仁壽二載之所置” (<大唐中嶽永泰寺碑頌>, 『金石萃編』 권89).

16

湯淑君, 「中國現存最古老的尼僧寺院」, 『中原文物』 2(1998), p. 120.

17

중국 오악은 중원을 대표하는 다섯 개의 큰 산으로 동악 태산, 서악 화산, 남악 형산, 북악 항산, 중악 숭산이 바로 그것이다(이주해, 「오악과 중국 고대산문」, 『인문과학』 88(2008), p. 61).

18

숭양사 비석은 원래 숭양사에 소재하고 있었으나 당대 고종이 중악 숭산에 奉天宮을 건립하고자 하였기에 비석은 664년 會善寺로 옮겨졌다. 2003년 이 비석은 다시 현재의 숭양서원으로 이전되어 보관중이다.

19

“有大德沙门生禅师…太和八年(484년)歲次甲子, 建造伽藍, 築立塔殿, 布置僧房…禪師乃構千善靈塔一十五層, 始就七級, 緣差中止…禅师大弟子沙门统伦, 豔(艳)二法师…以師遺功, 成玆洪業, 分稟□磚, 更寧兩塔, 幷各七層”(비문은 王景筌, 「崇陽寺造像碑硏究」, 『中原文物』 6(2016), pp. 90-91).

20

『金石錄』 권2 제374(『愛如生數字古籍』, E愛如生).

21

『金石錄』 권3 제430(『愛如生數字古籍』, E愛如生).

22

河南省古代建築保護硏究所, 「河南安陽靈泉寺唐代雙石塔」, 『文物』 3(1986), pp. 6-7.

23

宿白, 앞의 논문, 1997, pp. 30-33; Youn-mi Kim, “Reliquaries from the Twin Pagodas of the Kamŭnsa Monastery: Intercommunication of this World and the Otherworld; Miracles of relics and jewels”(Harvard University, Qualifying Paper, 2006), pp. 7-11; 양은경, 앞의 책, pp. 256-271; 임남수, 앞의 논문, pp. 204-208.

24

宿白, 「試論唐代長安佛敎寺院的等級問題」, 『文物』 1(2009), pp. 27-29.

25

王亞英, 「隋大興城佛寺考」, 『世界宗敎硏究』 1(2005), pp. 54-55.

26

광명사의 법경스님은 585년 大興殿에서 수 문제에게 보살계를 주었으며(開皇五年爰請大德經法師, 受菩薩戒. 因放獄囚, 仍下詔曰, 朕夙膺多祉嗣恭寶命, 方欲歸依種覺敦崇勝果. 以今月二十三日, 請經法師於大興善殿受菩薩戒, 然菩薩之教, 以解脫為先”(『辨正論』 권3, T52, No. 2110), 같은 해 대흥선사에서 진행된 역경작업에 참여한 10大德沙門 중 한 명일 정도로 유명한 스님이었다 (“至開皇五年. 大興善寺沙門曇延等三十餘人…忽於大興善更召婆羅門僧達摩笈多. 并勅居士高天奴高和仁兄弟等, 同傳梵語. 又置十大德沙門僧休法粲法經慧藏洪遵慧遠法”(『續高僧傳』 권2 隋西京大興善寺北賢豆沙門闍那崛多傳, T50, No. 2060)).

27

郭海文·馬瑤, 「唐長安城尼寺分布硏究」, 『中國歷史地理論叢』 33(2018), p. 58.

28

“東南隅, 大雲經寺, 本名光明寺 隋開皇四年, 文帝爲沙門法經所立, 時有延興寺僧曇延, 因隋文賜以蠟燭自然發焰, 隋文奇之, 將改所住寺爲光明寺, 曇延請更立寺, 以廣其教, 時此寺未制名, 因以名焉, 武太后初, 此寺沙門宣政進大雲經, 經中有女主之符, 因改爲大雲經寺, 遂令天下每州置一大雲經寺, 此寺當中寶閣崇百尺時人謂之七寶臺. 寺内有浮圖東西相値, 東浮圖北佛塔名三絶塔, 隋文帝所立, 塔内有鄭法輪田僧亮楊契丹畵迹及巧工韓伯通塑作佛像, 故以三絶爲名”(『長安志』 권10. 辛德勇, 郞潔 點校, 『長安志』(三秦出版社, 2013), pp. 337-338) “皇帝皇后於京師法界尼寺. 造連基浮圖以報舊願. 其下安置舍利. 開皇十五年季秋之夜有神光. 自基而上右繞露槃. 赫若冶鑪之焱. 一旬內四如之”(『廣弘明集』 권17, 舍利感應記, T52, No. 2103) “(豊樂坊法界尼寺)隋文帝獻皇后爲尼華暉令客所立, 有雙浮圖各崇一百三十尺”(『唐兩京城坊考』 권4. 李健超增訂 『唐兩京城坊考』(三秦出版社, 1996), pp. 162-163).

29

范文瀾, 『唐代佛敎[附:隋唐五代佛敎大事年表]』(人民出版社, 1979), pp. 107-108.

30

모토야쿠시지의 발굴성과에 대해서는 花谷 浩, 「本藥師寺の發掘調査」, 『佛敎藝術』 235(1997), pp. 57-77;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한중일 고대사지 비교연구(1)−목탑지편』(2009), pp. 190-193 참고.

31

신라 승려 지인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저를 참고함. 김상현, 「신라 法相宗의 성립과 順璟」, 『신라의 사상과 문화』(일지사, 1999), pp. 305-306; 권덕영, 「당 장안의 신라승과 일본승, 그 과거와 현재」, 『사학연구』 110(2013), p. 53.

32

『長安志』, 『唐兩京城坊考』등 문헌기록을 통해 판단하면, 2곳의 선정사는 당나라에 접어들면 大莊嚴寺, 大摠持寺로 개명되었으며(杜斗城·吳通, 「隋代獨孤皇后與佛敎關係論述」, 『新疆師範大學學報』 35(2014), p. 57), 광 명사는 측천무후시기 이후부터는 大雲經寺로 개명되었으나 사찰은 계속해서 존재하고 있었다.

33

范文瀾, 앞의 책, pp. 116-131.

34

河南省文物管理局, 『河南文物精華』古蹟卷(文物出版社, 1999), p. 95.

35

安陽市文物管理局, 『安陽文物精華』(文物出版社, 2004), p. 54·64·67.

36

“憫忠寺寶塔頌. 今在京師憫忠寺…爲之薦福東西有兩磚塔, 高可十丈是. 安祿山史思明所建”(『金石文字記』 권4. 『文淵閣四庫全書』 683冊).

37

“東南隅, 大雲經寺, 本名光明寺 隋開皇四年, 文帝爲沙門法經所立…寺内有浮圖東西相値”(『長安志』 권10. 辛德勇, 郞潔 點校, 『長安志』(三秦出版社, 2013), pp. 337-338); “皇帝皇后於京師法界尼寺. 造連基浮圖以報舊願”(『廣弘明集』 권17, 舍利感應記, T52, No. 2103); “(豊樂坊法界尼寺)隋文帝獻皇后爲尼華暉令客所立, 有雙浮圖各崇一百三十尺”(『唐兩京城坊考』 권4. 李健超增訂, 『唐兩京城坊考』(三秦出版社, 1996), pp. 162-163)

38

『隋書』 권36 「文獻獨孤皇后傳」, (中華書局標點本, 1973), p. 1109.

39

『北史』 권14 「隋文獻獨孤氏傳」, 中華書局標點本, p. 533; 『資治通鑑』 권175(古籍出版社, 1956), p. 5446.

40

趙一德, 앞의 논문, p. 715.

41

蘇黙, 『燉煌建築硏究』(機械工業出版社, 2003), pp. 37-39.

42

劉東平, 「<暉福寺碑>相觀問題蠡測」, 『文博』 5(2013), pp. 84-87; 白趙峰, 「李潤鎭與暉福寺紀略」, 『渭南師範學院學報』 31(2016), pp. 9-13.

43

“遇性巧, 强於部分. 北都方山靈泉道俗居宇及文明太后陵廟, 洛京東郊馬射壇殿, 修太廣文昭太后 陵園, 太極殿及 東西兩堂, 內外諸門制度, 皆遇監作”(『魏書』 卷94 「列傳」 82 閹官 王遇傳: (中華書局, 1995), p. 2024); 王元林, 「十六國北朝時期關中東北部軍鎭李潤(堡)鎭考」, 『中國歷史地理論叢』 33(2018), p. 26.

44

宿白, 「平城實力的集聚和“雲岡模式”的形成與發展」, 『中國石窟·雲岡石窟』(一)(文物出版社, 1991), p. 192; 현승욱, 앞의 논문, p. 37.

45

양은경, 「중국 북위 평성, 낙양지역 불교사찰의 분석과 선비족 습속이 불사활동에 끼친 영향」, 『고문화』 80(2012), pp. 29-30.

46

안지추 지음·유동환 옮김, 『안씨가훈』(홍익출판사, 2008),pp. 71-72.

47

石松 日奈子, 『北魏佛敎造像史の硏究』(ブリュッケ, 2005), p. 105가 대표적임.

48

聶順新, 「隋之唐初長安光明寺非摩尼敎寺院辨」, 『西北民族論叢』 15(2017), pp. 45-48.

49

사천왕사의 창건가람에 대해서는 아래의 논문을 참고함. 김동하, 「신라 사천왕사 창건가람과 유물 검토-발굴 조사 성과를 중심으로」, 『한국고대사탐구』 23(2016), pp. 209-243.

50

拜根興, 「入唐求法: 鑄造新羅僧侶佛敎人生的輝煌」, 『陝西師範大學學報』 37(2008), pp. 109-110.

51

『三國遺事』 권4 義解(일연 지음, 이가원·허경진 옮김, 『삼국유사』(한길사, 2008), p. 357).

52

권덕영, 앞의 논문, pp.50-76.

53

『三國史記』권6 신라본기 제6(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삼국사기』 상(을유문화사, 2002), p. 148).

54

이근직, 「통일신라 봉성사와 절원당」, 『신라사학보』 7(2006), p. 78.

55

今西龍, 「新羅文武王陵碑に就きて」, 『新羅史硏究』(國書刊行會, 1933), p. 413; 주보돈, 「통일신라의 (陵)墓碑에 대한 몇 가지 논의」, 『목간과 문자』 9(2012), pp. 46∼56.

56

洪思俊, 「新羅 文武王陵 斷碑-追記」, 『考古美術』 3-9호(1962): 최장미, 「사천왕사 출토 비편의 형태학적 검토」, 『역사와 경계』 85(2011), pp. 161-186; 최장미, 「사천왕사지 발굴조사 성과와 추정 사적비편」, 『목간과 문자』 8(2011), pp. 171-184.

57

사천왕사 입구에 비석 2기가 나란히 세워진 건축 축조방식은 흥미롭게도 중국에서 신라인을 위한 사찰에서도 엿보인다. 金州(섬서성 安康市)에는 636년 자장과 함께 당으로 간 僧實이 거주한 곳으로 유명하며, 639년 금주자사는 新羅寺를 건립하였다. 최근 이 사찰은 조사와 더불어 2기의 비석이 사찰 입구에서 조사되었는데, 이러한 사찰 축조방식은 신라 사찰의 특징이라고까지 해석되고 있다(李啓良, 「唐代金州新羅寺」, 『考古與文物』 6(2003), pp. 72-74).

58

윤선태, 「新羅 中代 成典寺院과 密敎-중대 國家儀禮와 視覺化와 관련하여」, 『선사와 고대』 44(2015), pp. 6-33.

59

최연식, 「8세기 신라 불교의 동향과 동아시아 불교계」, 『불교학연구』 12(2005), pp. 241-273; 김연민, 「신라 문무왕대 명랑의 밀교사상과 의미」, 『한국학논총』 30(2008), pp. 19-28; 한정호, 앞의 논문, pp. 192-193; Youn-mi Kim, “(Dis)assembling the NationalCanon: Seventh-Century “Esoteric” Buddhist Ritual, the Samguk Yusa, and Sach’onwang-sa,” New Perspectives on Early Korean Art:From Silla to Koryŏ, (Cambridge, MA: Korea Institute, Harvard University, 2013): pp. 123-191.

60

박태화, 「신라시대 밀교전래고」, 『조명기 화갑기념 불교사학논총』(1965), p. 73; 김상현, 「사천왕사의 창건과 의의」, 『신라와 낭산』(신라문화제학술회의논문집 17, 1996), p. 138; 장익, 「명랑의 문두루법과 진호국가밀교」, 『밀교학보』 16(2015), pp. 21-32.

61

주경미, 「신라 중대 불사리장엄의 다양성과 문화사적 의의」, 『한국고대사탐구』 23(2016), pp. 260-266.

62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제5(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앞의 책, p. 125).

63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 제5(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앞의 책, pp. 129-131).

64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제6(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앞의 책, pp. 151-155).

65

주보돈, 「경주 황룡사지 남쪽 광장」, 『경주시·신라문화유산연구원 발표문』(2020).

66

“제31대 신문대왕…돌아가신 선왕께서 이제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십니다. 또 김유신 공도 본래 33천 중 한 사람의 한 아드님인데 이제 이 땅에 내려와 대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이 덕을 같이해 성을 지킬 보물을 내리려고 하시니…”(일연 지음, 이가원·허경진 옮김, 앞의 책, pp. 144-145).

67

김춘추는 당 태종으로부터 허락받은 당의 章服制를 귀국한 이듬해에 시행하였고, 곧이어 당의 연호까지도 채용하였다(권덕영, 『古代韓中外交史』(일조각, 1997), pp. 272-273).

68

신형식, 「신라사의 시대구분」, 『한국사연구』 18(1977); 「신라본기 내용의 분석」, 『삼국사기연구』(일조각, 1981), pp. 48-53.

69

박용국, 「신라 무열왕대 정치세력의 구성과 변화」, 『역사교육논집』 35(2005), pp. 189-225.

70

김나경, 「신라 오묘제 수용의 의미」, 『한국고대사연구』 97(2020), pp. 107-139.

71

수 문제와 독고황후는 궁중에서 “二聖”으로 불리웠을 가능성이 높은데 반해, 당나라 고종과 측천무후는 궁중과 천하인이 모두 “二聖”으로 불렀다고 한다(孟憲實, 「論高宗、武則天竝稱“二聖”事」, 『中華文史論叢』 102(2011), pp. 138-149).

72

『삼국사기』 권6 신라본기 제6(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앞의 책, p. 148).

73

『삼국사기』 권7 신라본기 제7(김부식 지음, 이병도 역주, 앞의 책, p. 184).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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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魏書』.
3. 『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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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感恩寺發掘調査報告書』, 1997.
11.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四天王寺Ⅰ-金堂址 발굴조사보고서』, 2012.
12. 국립경주박물관, 『국립경주박물관』, 2018.
13.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한중일 고대사지 비교연구(1)−목탑지편』,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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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icle information Continued

Fig. 1.

<사천왕사 가람배치도>, Plan of the Sacheonwangsa temple site (Illustration from Eun Gyeng Yang)

Fig. 2.

<감은사 창건 가람배치도>, Plan of the Gameunsa temple site (Illustration from Excavation Report on the Gameunsa temple site, p. 386, figure 36)

Fig. 3.

<남조 건강성도>, Jiankang Palace and Buddhist Monastery with Twin Pagodas (Illustration from Records of the Nangjing City Wall, p. 37)

Fig. 4-1.

<휘복사비>, Stone tablet of the Huifu temple, 488, Xi’an forest of Stone tablets Museum (From Xian beilin bowuguan, p. 33)

Fig. 4-2.

<영태사비>, Stone tablet of the Yongtai temple, 706 (Photo by Eun Gyeng Yang)

Fig. 4-3.

<숭양사비>, Stone tablet of the Sungyang temple, 535 (Photo by Eun Gyeng Yang)

Fig. 4-4.

<금석록>, Bronze and stone inscriptions, Compiled by Zhaomingcheng

Fig. 4-5.

<영천사(靈泉寺) 쌍탑>, Twin Pagodas of the Yongchonsa temple, 563 (Photo by Eun Gyeng Yang)

Fig. 5.

<수 대흥성과 사찰>, Daxing Capital and Temples (Drawing from Eun Gyeng Yang, based on Comparative Study on the Capital of the early East Asia, p. 288)

Fig. 6-1.

<本藥師寺 평면도>, Plan of the Hon-Yakushi-ji (Illustration from The Comparative Study of the Wooden Pagoda in Fareast Asia, p. 191)

Fig. 6-2.

<쌍탑지와 參道유구>, Twin Pagodas and Hallway (Illustration from Ars Buddhica 235, p. 63)

Fig. 7.

<장안 신라승과 사찰>, Silla Monks and Temples in Chang’an (Illustration from The Review of Korean History, vol. 110, p. 53)

Fig. 8.

<당 장안성과 불교사찰>, Chang’an and Buddhist Temples (Illustration from Eun Gyeng Yang, based on Comparative Study on the Capital of the early East Asia, p. 309)

Fig. 9.

<하남성 쌍석탑>, Twin Pagodas, Henan province, (Photo by Henan wenwu jinghua, p. 95)

Fig. 10.

<문명태후와 영고릉, 사원불사, 운강석굴 제7, 8굴>, Empress Dowager Feng and Yongguling Tomb, Siyuanfosi Temple, Yungang Cave7, 8 (Photo by Eun Gyeng Yang)

Fig. 11.

<사천왕사지>, Sacheonwangsa temple site (Photo by Excavation Report on the Sacheonwangsa temple Ⅰ, figure 5)

Fig. 12.

<감은사지>, Gameunsa temple site (Photo by Gyeongju National Museum-Silla Art Exhibition Hall, p. 154)

Fig. 13.

<감은사지 서탑 출토 사리외함>, Sarira Reliqury, Western Pagoda of the Gameunsa temple site (Photo by Gyeongju National Museum-Silla Art Exhibition Hall, p. 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