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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n J Art Hist > Volume 312; 2021 > Article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의 근·현대기 존명 변화 과정과 그 의미

Abstract

이 글에서는 근·현대기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따른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의 존명 변화 과정을 살펴보았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국보 124호와 보물 81호로 이루어진 2구의 상이다. 1911년 일본으로 반출된 국보 124호 상은 도쿄박물관에 헌납되며 ‘다라보살’이라는 존명을 얻게 되고, 국내에 남겨진 보물 81호 상은 문수보살로 여겨졌다. 이후, 1966년 국보 124호 상의 반환을 계기로 상의 존명은 다시 한 번 변화하였다. 이 과정에서 한·일 양국은 국보 124호 상을 두고 견해차를 보였는데, 일본 학계는 국보 124호 상을 ‘중요하지 않은’ 유물로 치부하여 반환에 동의한 반면 국내에서는 국보 124호 상을 당시 반환 문화재를 대표하는 문화재로 인식하며 국보로 대우하였다.<br/>국보 124호 상의 반환 이후, 한송사지 상은 국내 학계에서 양식사적 방법론 등을 통해 활발히 연구되었다. 그 결과 대체로 문수를 국보 124호 상으로, 보현을 보물 81호 상으로 보았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두 도상의 명백한 근거가 되는 대좌가 훼손되어 어느 상이 문수이고 보현인지 명백히 알 수 없기 때문에 재고의 여지가 있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한송사지 상의 근·현대 연구사를 추적하고 존명 변화를 살펴보았으며, 한송사지 상의 미술사적 의의를 반추해보고자 하였다.

Abstract

This paper studies the changing process of the honorific name of the Stone Seated Bodhisattva from Hansongsa Temple Site according to the modern and contemporary political and social circumstances. The National Treasure no. 124, the stone image, was carried out to Japan in 1911, donated to Tokyo Imperial Museum, and got the honorific name, 'Tara Bodhisattva, ' and the record of the remaining Treasure no. 81, the stone statue, considered as Manjusri, was discovered in Korea. Also, The return of National Treasure no. 124 in 1966 is considered to be the significant event for the change of the honorific name again. There was a disagreement between Korea and Japan on the significance of the image. Japanese academia agreed to return the image because it considered the treasure was not worth possession whilst Korean academic circle treated it as a sculpture that represents the return of Korean remains scattered in Japan. After the return of the National Treasure no. 124, Stone Seated Bodhisattva from Hansongsa Temple Site has been studied actively through the methodology of stylistic analysis in Korean academia. As a result, the overall opinion that Manjusri as the National Treasure no. 124 and Samantabhadra as the treasure no. 81 should be reconsidered because, at present, due to the impairment of animal-shaped pedestals which is considered as the clear evidence for two figures, there is no way to distinguish which stone is Manjusri and which Samantabhadra. Through the above discussion this paper tried to reflect on the significance of the stone seated statues of Hansongsa temple site by looking at the changes of the honorific name tracing the modern and contemporary research history of the stone seated images.

I. 머리말

이 글에서는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의 존명이 일본 반출 이후 현재까지 변화하는 과정을 살펴봄으로써,1 현재 두 상의 존명에 대한 학계의 통설이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논의해보려고 한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강릉 한송사 터에서 발견된 고려 전기의 보살상으로, 국립춘천박물관 소장의 석조보살좌상(이하 국보 124호 상)과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 소장 석조보살좌상(이하 보물 81호 상)의 두 상이 현전한다.2 특히 국보 124호 상은 이국적인 풍모의 높은 보관과 섬세한 조각 기법, 인근 지역의 보살상들과 유사한 조형으로 고려 전기 새로운 불교조각 사조를 보여주며 일찍이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3
한송사지 상은 19세기 한송사의 폐사로 근·현대기 일본으로 반출되거나 전란 속에 분실되는 등 상당한 수난을 겪었는데, 이 과정에서 국보 124호 상의 인식과 평가가 당시의 정치·사회적 상황에 따라 기민하게 변화한 점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존의 한송사지 상 연구에서는 이와 같은 변화 과정에 주목한 바가 없으므로, 이 글에서는 본격적으로 상의 인식이 변화하게 된 1911년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和田雄治, 1859-1918)의 국보 124호 상 반출, 1966년 한·일 문화재 협정 타결로 인한 상의 반환 두 사건을 중심으로 상을 검토해볼 것이다. 이 두 사건의 여파로 발생한 국내에 남겨진 보물 81호 상의 존명 및 인식의 변화도 때에 따라 함께 다룰 예정이다.
우선 기록 자료들을 통해 반출 이후 국보 124호 상의 현황을 살펴보는 한편, 국보 124호 상이 일본에서 역사적·지역적 맥락이 단절된 채 어떻게 일본 중심적 시선으로 평가되었는가를 보여주고자 한다. 국보 124호 상은 일제 치하 우수한 작품으로 여겨져 일본으로 반출되었는데, 이후 도쿄제실박물관에 헌납되며 다라보살이라는 이질적인 존명을 부여받게 되는 등 존명의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1960년대 국보 124호 상의 반환을 둘러싼 과정을 파악해보고자 한다. 일본은 문화재 반환 협상 과정에서 국보 124호 상을 저평가하였는데, 이는 한국이 국보 124호 상을 국보급으로 평하였던 것과는 대조된다. 한·일 양국의 상반된 평가가 문화재 반환에 있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또 일본에서 약 50여 년만에 한송사지 상 평가가 급변한 요인 및 국내에서 진행된 탈식민주의적 한송사지 상 연구에 대해서도 살펴보려 한다. 마지막으로 반환 이후 국내 학계의 한송사지 상 연구를 다루고자 한다. 1970년대부터 국내 연구자들은 본격적으로 한송사지 상을 탐구하였는데, 이 시기 성립된 존명과 관련된 담론들을 정리하는 한편 가장 쟁점이 되는 문수-보현 문제를 재조명해볼 것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오늘날 학계에서 정립된 국보 124호 상을 문수로, 보물 81호 상을 보현으로 보는 통설이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밝히고자 하며, 한송사지 상의 미술사적 의의가 성립하는 맥락을 살펴봄으로써 한송사지 상을 보다 객관적으로 검토해볼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보고자 한다.

Ⅱ. 일제강점기 국보 124호 상의 반출과 ‘多羅菩薩’로의 명명

19세기 중반경, 한송사가 폐사되며 한송사의 두 보살상은 절터에 그대로 방치되었다.4 강릉 출신의 의병운동가 權仁圭(1843-1899)의 글 「寒松石佛」(1884)에서 폐사 이후 두 보살 상에 대해 간략한 기록이 전한다.
  • 한송사는 三韓의 고찰이다. … 처량한 이 두 개의 石佛만이 눈을 내리깔고 차가운 모래 위에 책상다리하고 앉아서 바람에 마모되고 비에 씻기며 중생의 비웃음 속에 가련히 여김을 받게 되었다. 도가 본래 공허하지만 끝내는 공허한 곳으로 돌아갔으니 아마도 福善과 禍淫이 교차하는 시기에 혹 베풂이 어그러져 이러한 보응을 받은 것인가.5

이후 국보 124호 상은 19세기 후반경 신원불명의 누군가에 의해 인근의 七星庵(現 강릉 法王寺)으로 이운되었다고 하며,6 머리와 한쪽 팔이 사라진 보물 81호 상만이 한송사 터에 남겨졌다. 이렇게 흩어진 한송사지의 두 상은 20세기 초반경 조선총독부관측소 소장 와다 유지에 의해 再發見되며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와다는 1911년 강릉 체류 당시 한송사지상을 ‘비범의 걸작’이라 극찬하며, 두 상 중 보존 상태가 양호한 칠성암 소재 국보 124호 상을 일본으로 반출시켰다. 이와 같은 일련의 과정은 와다 본인이 1913년 ‘風鐸居士’라는 이름으로 투고한 논문 「江原道發見の白玉佛」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다.7 와다는 남겨진 보물 81호 상의 행방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1917년 3월 발간된 『朝鮮古蹟圖譜』 卷5에는 보물 81호 상의 소재지가 ‘江陵測候所’로 기록되어 있어 주목을 요한다(Fig. 1).8 1911년 와다의 강릉 방문은 측후소 설치를 위한 것이었으므로 보물 81호 상을 한송사 터에서 강릉 측후소로 옮긴 배후 역시 와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동년 8월 20일에 추가 작성된 「제170호 寒松寺址 석불상(F020-016-003)」 문서는 보물 81호 상의 소재지를 강릉군청으로 기록하여, 이 무렵 상의 소장처가 다시 한 번 변경되었음을 알 수 있다.9
한편 국보 124호 상은 1912년 12월 27일자로 도쿄제실박물관에 헌납되었는데,10 『東京帝室博物館美術課列品彫刻繪畵目錄(이하 美術課列品彫刻目錄으로 약칭)』(1920)에서 상의 所在가 확인된다.11 도쿄제실박물관은 『미술과열품조각목록』에서 와다 유지가 기증한 국보 124호 상의 국적을 朝鮮, 재질은 대리석, 존명은 ‘多羅菩薩’로 기록하였다. 여기서 등장한 ‘다라보살’이라는 존명은 국내의 한송사지 상 관련 사료에서 언급된 바 없는 새로운 존명인 만큼, 일본으로 반출된 국보 124호 상이 도쿄제실박물관에서 다라보살로 명명된 현상에 대해 논의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라(타라)’라는 명칭은 산스크리트어로 눈동자를 뜻하는 Tārā를 음차한 것으로, 다라 보살은 觀音의 눈물에서 피어난 연꽃으로부터 탄생했다고 하며 사람들에게 자비와 구원의 보살로 여겨졌다.12 인도에서의 다라보살은 중생들을 팔난에서 구제해주는 존격이나 모든 부처의 어머니, 혹은 守門神으로 모셔지는 등 다양한 유형으로 분화하여 신앙되었다.13 다라 신앙에 있어 인도의 도상적 전통을 이어받은 티베트에서도 다라는 ‘구제자’를 뜻하는 돌마(Sgrol ma)로도 불리며 널리 애호되었다. 1042년 인도 출신의 아티샤(Atiśa, 928-1054)가 티베트에 처음으로 다라신앙을 전했으며, 특히 후대인들에 의해 티베트를 통일한 吐番(617-842)의 명군 松贊幹布(r. 617?-650)의 두 왕비 文成公主(623?-680)와 赤尊公主(Bhrikuti Devi, ?-?)이 각각 다라의 화현으로 여겨지기도 했다.14 이처럼 인도 및 티베트 불교권에서 多羅信仰이 크게 성행한 반면,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에서는 다라신앙의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15 중국 또한 唐代 玄奘(602-664)을 위시한 구법승들의 활동으로 漢譯經典과 밀교가 전해지며 다라신앙도 함께 전해졌으나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이후 원, 명, 청 후대 왕조에서 티베트 불교를 후원할 당시 함께 신앙되었음이 확인될 뿐이다.16 물론 한국도 한송사지 상이 조성되던 무렵 국내에 다라보살 관련 경전 및 정보 등이 유입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현재까지 국내의 다라보살 관련 기록 및 유물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어 국보 124호 상이 다라보살로 조성되었을 확률은 극히 낮아 보인다.
또, 국내의 한송사지 상 관련 史料가 두 상을 대개 문수 및 보현으로 지칭하고 있다는 점 역시 국보 124호 상이 다라보살이 아님을 방증한다. 해당 사료들은 일찍이 전술한 와다의 논문을 통해서 일본에 알려진 바 있다. 와다가 고려 말 李穀(1298-1351)이 집필한 『東遊記』를 비롯, 『東國輿地勝覽』 및 『臨瀛誌』 등 각종 조선시대 지리지를 논문에 수록한 까닭이다.17 이 중 『동유기』는 1349년 집필된 현전하는 한송사지 상 관련 자료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이곡은 한송사지 상에 대해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문수, 보현 두 상이 땅속에서 솟아 나왔다’라 기록하였다.18 그러나 도쿄제실박물관은 어떤 이유에선지 와다가 인용한 각종 사료들을 수용하지 않고 국보 124호 상의 존명을 다라보살로 추정하였는데, 이는 일본이 어느 정도 다라보살을 신앙하였던 점과 일정 부분 연관성이 있다고 생각된다.
일본은 다라보살을 태장계만다라 연화부원에 속한 하나의 존격으로 모시거나 또 33관음의 一尊인 多羅尊觀音과 동일시하여 신앙하였다. 이 중 도쿄제실박물관은 국보 124호 상을 다라존관음으로 취급한 것으로 추측되는데, 兮谷 崔淳雨(1916-1984)가 국보 124호 상에 대해 ‘이 보살상의 佛名은 확인하기 힘드나 대강 33관음 중 다라보살로 인정된다’라는 언급을 남긴 바 있어 해당 추정에 신빙성을 더하고 있다.19 33관음 신앙 역시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法華經』 「普門品」에서 관음보살이 중생을 구원하기 위해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普門示現에서 출발해 다양한 형태로 변용되었다.20 다라보살은 17세기에 이르러 33관음의 도상을 정립한 『佛像圖彙』에서 千手觀音, 如意輪觀音 등과 함께 다라존관음으로 33관음에 편입되었다.21 그렇다면 일본의 불교 도상집 『覺禪鈔』, 『圖像鈔』의 도해나 전술한 『불상도휘』 등에 수록된 다라보살의 형상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국보 124호 상과 일본 도상집 내에 수록된 다라보살 및 그와 관련된 圖解들을 표로 정리한 것이다<Table 1>.
<Table 1>을 살펴보면, 『각선초』에는 크게 세 가지 유형의 다라보살을 수록해둔 것을 알 수 있다. 이들은 합장을 한 다라보살(1-b), 청련화를 들고 여원인을 취한 다라보살(1-c), 청련화와 길상과를 들고 있는 상(1-d)으로 나눌 수 있는데, 세 유형 중에서는 청련화를 들고 여원인을 취한 (1-c)가 가장 국보 124호 상과 유사해보인다. 그러나 『각선초』의 다라보살들은 모두 보관을 착용하지 않고 왼손에 지물을 들고 있다는 점에서 국보 124호 상과 구별된다. 『불상도휘』 내 다라존관음의 형상 역시 자세나 의복 면에서 국보 124호 상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 『도상초』의 다라보살은 녹색의 다라보살로, 피부색을 제외하면 높은 보관과 청련화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국보 124호 상과 상당 부분 유사하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상초』에 수록된 대세지보살이나 허공장보살의 도해를 살펴보면 오히려 국보 124호 상은 대세지나 허공장보살과 더 흡사한 모습을 보인다. 특히 대세지보살은 비록 손의 방향은 반대이나 연꽃을 들지 않은 오른손의 수인이 국보 124호의 왼손과 유사하며, 高冠 및 낙액, 군의를 착용해 의복 역시 거의 동일하다. 그렇다면 국보 124호 상과 일본 도상집 속의 다라보살 간에 도상적 공통점이 있다고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한편으로는 제실박물관이 국보 124호 상의 석재에 무게를 두고 존명을 추정하였을 가능성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일제 치하 발간된 한송사지 상 관련 연구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으나, 이들은 대부분 한송사지 상이 대리석으로 제작되었다는 점을 주목하고 있기 때문이다. 와다 역시 한송사지 상을 ‘백옥불’이라 언급하였는데, 『대일경』에서 묘사한 다라보살은 ‘합장하여 푸른 연꽃을 들고… 선명한 백색의 옷을 입고 미소하고 있다’고 하여, 경궤의 내용이 국보 124호 상의 외형과 일정 부분 부합하는 것을 알 수 있다.23 그러나 도쿄 제실박물관이 국보 124호 상을 ‘다라보살’로 명명한 상세한 경위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보았던 최순우의 글에서처럼 ‘이 보살의 불명은 확인하기 힘드나 대강 33관음 중 다라보살로 인정된다’고 하고, 일본의 다라보살 연구자인 수오난 쭤마(索南卓瑪) 역시 국보 124호 상의 조상양식이 다라보살의 도상과는 차이가 있다는 견해를 제기하여 그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향후 새로운 자료가 요구되는 바이다.24
다만 그 경위가 무엇이든 ‘다라’라는 존명은 국보 124호 상이 본래 지니고 있던 역사적 맥락과는 전혀 관련 없는 것이었다. 오히려 국보 124호 상의 서술 주체가 일본이었기 때문에 발생한 현상이라 생각된다. 국보 124호 상의 경우 조선 땅을 벗어나 일본으로 반출됨으로써 본래의 상이 지니고 있던 역사적, 지역적 맥락과 완벽히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국보 124호 상은 보다 일본 중심적 시선으로 검토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다라보살이라는 이질적인 존명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렇듯 국보 124호 상에 새롭게 붙여진 ‘다라보살’이라는 이름은 해방 이후에도 잔존하였으며, 1966년 국보 124호 상이 국내로 반환된 이후에야 점차 청산되기 시작하였다.

Ⅲ. 한·일 문화재 반환 협정과 국내 학계의 한송사지 상 재평가

1966년 5월 27일, 도쿄국립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던 국보 124호 상이 반출 약 55년 만에 한국으로 귀환하였다.25 이때의 문화재 반환은 1965년 6월 22일 비준된 한·일 기본조약의 결과물로, 주요 언론사들은 국보 124호 상을 포함한 총 1, 326점의 문화재 반환을 대서특필하였다. 한국으로 반환된 문화재들은 감정 확인 등의 절차에 따라 곧바로 국립박물관(現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운송되었다.26 국보 124호 상을 비롯해 국립박물관으로 인계된 문화재 1, 326점은 박물관 측이 문화재 반환을 기념해 1966년 7월 1일부터 한 달간 개최한 ‘반환 문화재 특별전’에 출품되었다.27 당시 국립박물관이 발간한 『返還文化財特別展示目錄』에 따르면 국보 124호 상은 해당 전시에서 多羅菩薩이 아닌 ‘석조보살좌상’으로 전시되었는데,28 조성연대 역시 高麗(918-1392)로 명기되었다.29 반환문화재 특별전 이전 발간된 한송사지 상 관계 자료들이 상 제작연대를 통일신라로 추정한 것과는 대조적이다.30 즉, 국보 124호 상은 어느샌가 다라보살에서 고려시대의 석조보살좌상으로 다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송사지 상의 연대 등이 수정된 명확한 시점은 반환문화재 특별전이 아닌 한·일 기본 조약, 즉 한·일회담으로 생각된다. 문화재 반환을 위해 반출 문화재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한송사지 상이 고려시대 석조보살좌상으로 정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는 해방 이후부터 지속된 국내 학계의 한국불교조각사 연구성과가 어느 정도 반영된 것이었다.31
그렇다면 국보 124호 상은 어떻게 반환 품목에 포함될 수 있었던 것일까. 한·일 회담 당시 일본 측이 문화재 반환 품목에 대해 논의한 문화재소위원회 회의록에 이와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이 수록되어 있어 주목을 요한다. 1965년 3월 20일 열린 일본 문화재소위원회 회의에서 도쿄박물관의 다나카(田中) 과장은 국보 124호 상을 두고 ‘훌륭한 것이 아니므로 한국 측에서도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있어 증여에 문제가 없다’고 평하였다.32 이와 같은 문화재소위원회의 결론은 한·일 회담 이전 발간된 일본의 한국문화재 관계 자료가 국보 124호 상을 다음과 같이 우수한 작품이라 평가한 것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 또 백사의 가운데에는 귀부, 석불 등이 산포해 있다. 그 안에 1체의 백옥좌상이 있어, 頭部와 兩腕은 없고, 또 다른 곳에 결손을 입었다고 해도 흉부의 장식과 옷주름 등을 보면 비범의 걸작으로, 확실히 신라시대의 조각이라는 데에 의심이 없다.33

  • 강원도 강릉군의 해안 모래사장이 된 폐한송사지에서 발견된 것으로, 두 보살상이 함께 매우 아름다운 백대리석으로 조각되어, 溫雅하고 優麗하며 실로, 당대(통일신라) 중기의 우수한 작품이다.34

  • 조선의 불상 중에는 가장 우수한 것으로 만들어진 신라통일시대에 관해서는 오늘날에 남아있는 예도 다 포함해서 많고, 이것을 하나하나 말할 수는 없지만 우선 자재에 따라 보면, 石像, 銅像, 銀像, 鐵像, 塑像이 있다. 석상은 이들 중에서 특히 발달된 것으로, 개중에는 강원도 강릉군 내면 한송사에 있었던 보살상과 같이 백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특수한 것도 있지만… (후략)35

위 기록을 살펴보면, 1913년 와다의 논문 「江原道發見の白玉佛」를 필두로, 1917년 『朝鮮古蹟圖譜解說』, 그리고 1930년대 경주박물관장을 역임했던 사이토 타다시(斎藤忠)의 『朝鮮佛敎美術考』(1947) 모두 한송사지 상을 고평가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국보 124호 상을 언급한 문화재소위원회 회의 또한 일본 외무성 북동아시아과 관계자를 비롯, 문화재 보호위원회 사무국 미술공예과장 마츠시타 타카아키(松下隆章)나 도쿄박물관 관계자 등 문화재 전문가들도 배석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 측은 국보 124호 상을 평가하는 데 있어 이전까지와는 다른 결론을 낸 것이다. 반면 한국은 국보 124호 상을 국보급 유물로 평하고 있는데, 당시 한국 측의 입장은 문화재관리국이 문화재 반환 이전 언론 보도자료 배포용으로 작성한 것으로 추정되는 『韓日會談文化財關係 參考集』(1965)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36
  • 또, 引渡 받은 中에 石造美術品으로 高麗時代의 優秀한 江陵 寒松寺의 石佛이 있는데 이것은 完品으로서 그 対가 되는 石佛이 현재 江陵에 一軀가 남어 있어서 우리나라의 寶物로 지정되어 있는데 이것은 頭部가 없는 欠品이다.37

한국은 국보 124호 상이 고려의 상이며, 원 봉안처가 강릉 한송사라는 점, 당시 강릉 군청이 소장하고 있던 보물 81호 상과 짝을 이룬다는 점 또한 명확히 인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국보 124호 상은 그간 기본 자료가 미비하여 어려움을 겪던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있어 주요한 고려시대 불상 자료로 기능하였다.38 따라서 국보 124호 상은 반환 당시부터 언론에서 국보급 문화재로 다루어졌으며,39 국립박물관의 『반환문화재특별 전시목록』의 표지를 차지할 만큼 대표성을 지닌 유물이었다(Fig. 2). 이에 1967년 6월 21일, 고국으로 돌아온 한송사지 상은 국보 124호로 지정되기에 이른다.40
이 시기 국보 124호 상을 둘러싼 가치 평가가 상반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적으로는 한·일 양국 간의 입장 차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일본 측은 협상 과정에서 일본 소재 한국 문화재가 모두 정당한 방법으로 취득되었으며, 그 불법성을 입증하기 어렵다고 협상 막바지까지 일관적으로 주장하였다.41 이는 과거 조선을 식민 통치한 것이 정당하다는 인식에서 기인한 태도였다. 당시 문화재보호위원회에 소속되어있던 미야치 시게루(宮地茂) 및 마츠시타 타카아키를 비롯한 문부성 측과 조선사 연구자인 가쿠슈인 교수 스에마츠 야스카즈(末松保和)와 후일 도쿄대 교수를 역임한 다가와 고조(田川孝三) 등이 이 같은 견해를 고수하였다.42
국보 124호 상에 대해 언급한 다나카 과장 역시도 한국으로 반환해야 할 문화재 품목을 평가하는 데에 정치적 의도가 내포된 ‘주관성’을 개입시켜 한송사지 상을 평가 절하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일본이 국보 124호 상의 가치를 절하한 데에는 전술한 ‘다라보살’이라는 존명도 일정 부분 영향을 끼쳤으리라고 추측된다. 어디까지나 다라보살은 33관음 중 한 존격으로서, 일본 내에서도 크게 각광을 받는 보살이 아닌바 그 가치가 저평가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일본으로 반출되며 도쿄박물관의 다라보살이 된 국보 124호 상은 약 50년 후인 1966년, 그야말로 다라보살이기 때문에 다시 한국으로 반환될 수 있었던 셈이 된다.
반면 국보 124호 상을 반환받은 한국 측의 경우, 전술하였듯 국내에 남아있던 보물 81호 상이 이미 보물급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므로 보다 온전한 국보 124호 상을 국보급으로 평가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이미 한국 측에서는 문화재 반환을 위해 한송사지 상 연구를 진행하며 국보 124호 상이 다라보살이 아니며, 반출로 상실되었던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일정 부분 복원해 그 가치를 되찾고자 하였다. 이처럼 국보 124호 상을 도쿄박물관의 다라보살에서 강릉 한송사의 고려시대 석불로 거듭나게 한 데에는 한·일 회담 전문위원으로 위촉된 蕉雨 黃壽永 박사(1918-2011)의 역할을 배제하고는 논할 수 없다. 황수영은 1950년대 후반부터 약 8년간 한·일 회담의 문화재 반환 협상에 관여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의 반환을 위하여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43 후일 선생은 각종 반출문화재 관련 자료들을 엮어 『일제기 문화재 피해 자료』(1973)를 출판하였는데,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의 관련 자료 역시 해당 자료집에 수록되어 있어 협상 과정에서 황수영 박사가 각종 자료를 조사해 한송사지 상을 연구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국보 124호 상의 반환 이후 한송사지 상의 인식은 황수영 박사를 위시한 국내 미술사학자들의 연구로 크게 변화하였다. 국보 124호 상의 국보 지정 이후 발간된 『文化財大觀: 國寶篇』(1967)을 살펴보면, 앞서 언급하였던 일제강점기 문헌들과 달리 ‘아름다움’, ‘우수함’ 등 주관적이고 모호한 기준이 아닌 양식사적 방법론을 도입해 한송사지 상을 분석하고 있다.
  • 圓筒形 寶冠을 쓴 形式이나 豐滿한 相好나 입가의 微笑等은 月精寺 八角九層石塔 앞의 石造菩薩坐像이나 神福寺址 三層石塔 앞의 石佛坐像 등과의 連繫를 볼 수 있으나 그들보다도 한층 유연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44

위 기록에 따르면, 당시 국보 124호 상은 유사한 양식을 지닌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 좌상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과의 양식적 비교를 통해 고려 전반기의 상으로 인식되었다. 무엇보다도 이들 두 상이 탑전 공양 자세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 한송사지 상 편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과 하나의 구성을 이루는 신복사지 삼층석탑이나 월정사 팔각구층석 탑이 이미 又玄 高裕燮(1905-1944)에 의해 신라가 아닌 고려로 편년되어 있었으므로,45 두 상과 유사한 양식으로 조성된 124호 상 또한 고려조에 조성된 것으로 본 것이다(Figs. 3, 4). 이후 보물 81호 상 역시 자연히 고려시대의 상으로 편년되었으며, 이로써 한송사지 상은 식민 치하에서 얻었던 다라보살이라는 존명 등 일본이 주도적으로 형성한 인식에서 탈피하게 되었다.

Ⅳ. 1970년대 이후의 한송사지 상 연구: 尊名 추정의 쟁점과 과제

반환 이후 한송사지 상은 식민 통치나 문화재 반환 등의 정치·사회적 의제에서 벗어나 활발하게 연구되었다. 본격적인 연구는 1970년대부터 진행되었는데, 주로 양식 분석을 통해 상의 미술사적 의미를 고찰하거나 원통형 보관 등 상이 지닌 이국적 요소를 통해 상을 교류사적으로 살펴보는 연구 방법이 주류를 이루었다.46 또한, 상에 관한 세부적인 논의가 진행되며 ‘문수’와 ‘보현’이라는 구전과 옛 기록에 기반하여 어느 상이 문수이고 보현인지를 쟁점으로 두기도 하였다.47
특히 전술한 『동유기』와 傳 한송사 터에서 발견된 대좌로 보이는 석물 2점이 상의 존명을 추정하는 데에 주된 근거가 되었다(Fig. 5). 『동유기』에는 ‘문수, 보현 두 석상이 땅속에서 솟아올랐다’고 전하는데,48 한송사지 발견 석조대좌는 훼손이 심각해 원형을 알기 어렵지만 문수의 사자좌와 보현의 코끼리좌로 익히 알려진 경북대 박물관 소장 성주 法水寺址 석조대좌나 불국사 박물관 소장 석조대좌와 유사한 형상을 갖추고 있다(Figs. 6, 7). 이는 한송사의 두 보살상을 각각 사자를 탄 문수와 코끼리를 탄 보현으로 추측케 하는 근거가 되었다.
사자를 탄 문수와 코끼리를 탄 보현은 각각 騎獅文殊와 騎象普賢이라고도 하는데, 654년 阿地瞿多(?-?)가 한역한 『陀羅尼集經』에서 본격적으로 對를 이루며 나타난다.49 경전에서 설하는 두 보살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 金輪佛頂像法. 그 형상을 그리고자 할 때에는 희고 깨끗한 모직이나 깨끗한 비단을 취하여 크기는 임의대로 하되, 자르지 말고 그 모직 위에 세존의 형상을 그려라. … 그 왼쪽 아래에는 몸은 모두 백색이고 정수리 뒤는 광명이 있으며 칠보영락으로 된 寶冠을 쓰고 天衣를 입고 온갖 장엄을 하고 師子를 타고 있는 文殊師利보살을 그려라. 오른쪽에는 앞에서와 같이 장엄하되 흰 코끼리를 타고 있는 寶賢보살을 그려라.50

하지만 현재로서는 어느 보살상이 어떤 대좌 위에 안치되어 있었는지 알 수 없으므로, 두 보살상 중 어느 상이 문수이고 보현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두 상의 지물인 연꽃과 보주(혹은 鉢)를 중심으로 한송사지 상의 존명에 접근하고자 하였다(Figs. 8, 9).
일찍이 선행 연구에서는 한송사지 상이 만다라 등에 보이는 밀교적 도상과 전통적 도상을 절충시킨 모습이라는 지적이 있었다. 또, 지물로 상의 존명을 추정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밝히면서도 국보 124호 상의 수인이 밀교의 ‘針印’이고, 또 석굴암 감실의 문수보살상이 유사한 수인을 취하고 있는 점, 청련이 전통적인 문수보살의 지물임을 들어 연꽃을 들고 침인을 취한 국보 124호 상을 문수보살로 조심스럽게 추정하였다(Fig. 10).51 이 경우 자연히 보주로 추정되는 지물을 지닌 보물 81호 상은 보현보살이 되는 것이다. 이후 청련이 문수보살의 지물이므로 국보 124호 상은 문수보살, 보주는 관음이나 문수, 보현 모두에게 나타나는 지물이기 때문에 보물 81호 상이 보현보살이라는 견해 등이 제시된 바 있다.52 반대로 보물 81호 상을 문수, 국보 124호 상을 보현으로 보는 연구도 있으나,53 어느 순간부터 국보 124호 상을 문수, 보물 81호 상을 보현으로 비정하는 일이 통설처럼 받아들여졌다.54 이처럼 지물을 통한 존명의 추정은 일견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경전 내에 언급된 문수보살의 지물로는 여의, 청련, 청련 위의 금강저(혹은 경권), 경권, 칼 등이 있으며,55 경전 속 보현보살의 지물로는 여의보주, 길상과, 불자(백불), 오고금강저, 금강령, 검(칼) 등이 전하기 때문이다.56
또한 경궤의 내용을 고찰하는 것뿐만 아니라 경전의 내용이 얼마나 불교미술에 충실히 구현되었는지 역시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57 기사문수상과 기상보현상이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중국 初唐期(613-741)부터 고려가 멸망하는 14세기 말엽까지의 기사문수상과 기상보현상의 여러 작례를 검토해보면, 선행 연구에서 지적된 바와 같이 한송사지 상과 동일한 지물을 들고 있는 예는 찾아보기 어렵다.
<Table 2>에 따르면, 오히려 시대를 불문하고 문수는 여의를, 보현은 경권이나 여의, 혹은 연꽃을 지물로 들고 있는 경우가 보편적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전의 내용과 실제 작례에 괴리가 있는 셈이다. 이렇듯 지물로 기사문수상과 기상보현상의 존명을 판별하는 것은 어려우며, 비록 사자좌나 코끼리좌를 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석굴암 내의 문수·보현보살상 역시 지물을 근거로 존명을 규명하는 데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 또한 이를 뒷받침한다. 오히려 보현보살이 본래 문수보살의 지물로 알려진 경권을 들고 있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견된다.58
이처럼 지물로 문수와 보현의 존명을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다라니집경』이 두 보살의 지물을 명확히 규정하지 않은 까닭이다. 무엇보다 두 존격의 경우 사자좌와 코끼리좌가 도상을 판별하는 가장 큰 요소이므로 조성 당시 지물 등으로 존격의 정체성을 드러낼 필요가 없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때문에 일본 지온인(知恩院) 소장 오백나한도 내 문수보살이 양류 가지를 들고 있거나, 미국 보스턴 미술관 소장 원각경변상도 속 보현보살이 석장을 들고 있는 등 보편적인 인식과 배치되는 특이한 지물이 발견되기도 한다(Figs. 11, 12).
지물로 존명을 알기 어렵다면, 대좌를 상실한 한송사지 상의 존명을 추정하는 데에는 여전히 불확실성의 문제가 남게 된다. 이와 관련하여 근·현대기 두 상의 존명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이 전하는데, 해당 기록들은 한송사지 상이 얻게 된 ‘존명의 불확실성’ 문제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원래 이 불상에는 대좌가 있었는데, 여하튼 거의 높이 2칸 위에 안치된 이 상을 올려다 바라보면 그 따뜻한 얼굴에 자애로운 모습 등 한층 더 미관을 더한다. 또 백옥상은 문수 등 두 상 중에서 문수사리보살이라고 생각된다. 과연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에 대해서 (필자는) 識者의 높은 가르침을 청하고자 한다.59

  • 동 석불은 순화강암으로 되었고 키가 칠십「센치」에 불과한 작은 불상이지만 신라 말기 “문수보살”의 직접적 지도하에 낭원대사가 만든 것으로 강릉시에서 약 삼「키로」 떨어진 해안가에 건립된 “문수사”(후에 한송사로 개칭)에 설치되어 오던 것이다.60

첫 번째 자료는 앞서 살펴본 바 있는 와다의 논문이며, 두 번째는 한국전쟁 발발 이후 분실했던 보물 81호 상을 되찾았음을 보도한 기사의 한 대목이다. 흥미롭게도 이 두 자료는 각 상을 모두 문수와 연관 짓고 있는데, 와다 스스로도 밝혔듯 기상학자인 와다가 국보 124호 상을 문수보살로 상정한 데에는 어떤 미술사학적 근거가 있다고 보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보물 81호 상을 ‘문수보살’의 지도하에 羅末麗初의 선승 朗圓大師 開淸(834-930)이 조성했다는 등의 내용도 신빙성이 현저히 떨어진다.61
그러나 위 자료에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는데, 먼저 와다의 경우 상당히 주관적으로 도상을 판별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두 상 중 完形에 가까운 국보 124호 상을 택해 일본으로 가져갔는데, 이 경우 와다가 문수와 보현 두 보살 중 보편적으로 더 널리 신앙되는 문수를 취사 선택해 임의로 상의 존명을 추정하였을 가능성이 있다.62 상의 훼손 정도가 존명에도 영향을 미친 셈이다.
또, 국내에 남아있던 보물 81호 상이 문수로 여겨진 데에는 상이 소재한 공간이 큰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상의 원 봉안처였던 한송사의 옛 이름이 ‘문수사’이고, 나아가 인근에 文殊住處 오대산이 위치하는 까닭이다. 국내의 오대산 신앙은 오늘날 강원도 강릉, 평창, 홍천 지역을 아우르는 산을 중심으로 9세기 무렵 通曉大師 梵日(820-889)을 주축으로 한 사굴산문에 의해 ‘五臺’라 불리고 사세가 확장되었다.63 앞서 살펴본 동아일보 기사에 등장한 낭원대사는 범일의 제자 중 한 사람으로, 1950년대에는 국내에 전하는 유일한 한송사(문수사)의 상인 보물 81호 상을 문수보살, 나아가 오대산과 연결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보물 81호 상이 보현보살로 여겨지고 있음을 고려한다면, 보물 81호 상은 근·현대기 문수보살에서 보현보살로 또 한 차례 존명의 변화를 겪은 셈이다.
그렇다면 어떤 상을 문수로 봐야 하고, 또 보현으로 보아야 하는 것일까. 전술하였듯 국보 124호 상을 문수로 보는 학설은 문수보살이 청련화를 지물로 한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하지만 <Table 2>에서 살펴보았듯 기사문수상과 기상보현상의 작례에서는 보현보살이 연꽃을 들고 있는 경우가 다수를 차지하며, 연꽃을 든 문수보살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반대로 보물 81호 상과 같이 보현이 보주를 들고 있는 경우는 또한 희소하였다. 오히려 두 보살이 유리 완을 들고 있는 경우가 발견되는데, 이때 유리 완을 발우로 보고 돈황 등지에서 조성된 千臂千鉢文殊菩薩圖 등 唐代 불교미술의 작례를 통해 문수보살과 발우가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기도 한다. 이렇듯 문수가 발우를 든 사례가 몇몇 발견된다는 점을 들어 한송사지 상 또한 문수보살이 발우를 든 경우도 상정해볼 수 있다.64 이에 따르면 발을 든 보물 81호 상이 문수보살, 연꽃을 든 국보 124호 상이 보현보살이 되는 셈이다.
이렇듯 현재로서는 한송사지 상의 존명을 명확하게 알 수 없으나, 한송사지 상의 훼손으로 상의 존명이 한층 더 유동적인 경향을 보이게 된 현상을 살펴보았다. 또한 한송사지 상의 지물과 기사문수상과 기상보현상의 조성 예를 함께 검토함으로써 국보 124호 상이 문수이고 보물 81호 상이 보현이라는 설은 재고의 여지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향후 한송사지 상의 존명을 연구하는 데에도 존명의 유동성을 유의하는 한편 객관적인 고찰이 요구되는 바이다.

Ⅴ. 맺음말

이 글에서는 한송사지 상의 인식이 근·현대기 다양한 요인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과정을 검토하였다. 그 과정에서 한송사지 상의 존명이 어떻게 변화하였는지 그 유동성을 고찰하는 것으로 한송사지 상의 존명을 재검토하고자 하였다.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은 한국 근·현대사의 격변과 맞물려 수차례 인식 변화를 겪었다. 특히 일본으로 반출된 국보 124호 상은 도쿄제실박물관에서 ‘다라보살’이라는 존명을 획득하는데, 이를 중심으로 그 함의를 살펴보았다. 다라보살이라는 존명은 국보 124호 상이 지니고 있던 역사적·문화적 맥락과는 관련 없이 도쿄박물관에서 새로이 붙여진 것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반출된 한국 문화재가 역사적·문화적 맥락과 단절되며 일본의 시선에서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일례이다.
또한 국보 124호 상은 반환 추진 과정에서 일본에 의해 의도적으로 저평가되었음이 확인되는데, 이는 당시 일본이 과거 조선에 가했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차원의 일임은 물론 국보 124호 상이 다라보살이라는 낯선 존명을 부여받은 데에 원인이 있을 것으로 추측하였다. 이후 국보 124호 상은 보물 81호 상과 함께 한·일 회담 전문위원을 역임한 황수영 박사의 연구로 한송사 석불이라는 이름을 되찾았으며, 국내에 남아있던 보물 81호 상과 함께 국내 학자들에 의해 문수, 혹은 보현으로 활발하게 연구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오늘날에는 대개 국보 124호 상을 문수로, 보물 81호 상을 보현으로 상정하고 있다.
전술한 존명 변화 과정은 역설적으로 국보 124호 상을 문수, 보물 81호 상을 보현으로 추정하는 것이 타당한지 의문을 갖게 한다. 이와 같은 추정의 주된 근거가 된 것은 두 상의 지물인 연꽃과 보주를 경전 등을 통해 파악하는 것이었다. 다만 지물은 한송사지 상과 유사한 사례가 발견되지 않는 등 문수, 보현보살의 존명을 파악하는 절대적 근거가 되기 어려운 맹점이 있으며, 오히려 보물 81호 상을 문수, 국보 124호 상을 보현으로 볼 여지도 있음을 확인하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상의 과정을 반추하는 것으로 최근까지 한송사지 상의 존명이 유동적으로 변화하였음을 지적하였으며, 지금도 상의 존명이 지속적으로 변화하는 과정에 있다고 보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학계에서 정립된 국보 124호 상이 문수이고, 보물 81호 상이 보현이라는 통설 역시 수정의 여지가 있음을 고려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Notes

1) 불교 조각의 근·현대기 인식론에 대한 선구적 고찰로는 강희정의 석굴암 연구가 있으며, 특정 불상의 인식 변화 과정을 총체적으로 연구한 사례로는 고이즈미 요시히데(小泉恵英)의 구다라관음 논저를 들 수 있다. 본고 역시 전술한 연구들에 큰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이 글의 논지 전개에 있어 고이즈미의 연구를 추천해주신 익명의 심사위원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강희정, 『나라의 정화(精華), 조선의 표상(表象): 일제강점기 석굴암론』(서강대학교 출판부, 2013); 小泉恵英, 「百濟觀音像」, 『法隆寺美術論爭の視點』(東京: グラフ社, 1998), pp. 122-149 참조.

2) 차후 문화재 지정번호제도가 내부 관리용으로 전환됨에 따라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역시 지정번호(국보 제 124호, 보물 제81호)가 아닌 소장처(국립춘천박물관, 강릉오죽헌시립박물관)로 두 상을 구분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나, 본고에서는 두 상의 소장처가 변화하는 과정을 다루므로 혼란을 줄 수 있다고 판단하여 지정번호로 두 상을 구분하고자 한다.

3)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 관련 주요 연구는 다음과 같다. 최성은, 「溟州地方의 高麗時代 石造菩薩像에 대한 硏究」, 『佛敎美術』 5(1980), pp. 56-78; 김리나, 「高麗時代石造佛像 硏究」, 『美術史學硏究』 166·167(1985), pp. 63-64; 권보경, 「고려 전기 강릉일대 석조보살상 연구」, 『사림』 25(2006), pp. 113-149; 정은우, 「고려중기 불교조각에 보이는 요의 영향」, 『고려와 북방문화』(도서출판 양사재, 2011), pp. 145-182; 최성은, 「명주지역 나말여초 불교조각과 굴산선문」, 『문화재』 45(2)(2012. 6), pp. 54-71; 최성은, 「한송사지 석조보살상을 통해 본 강릉·오대산 지역의 고려 초기 불교조각」, 『임영문화』 38(2014), pp. 181-191; 김윤이, 「寒松寺址 石造菩薩坐像 硏究」(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20).

4) 조선 후기 학자 柳疇睦(1813-1872)이 1857년 강릉에 머물던 당시 지은 시문 「寒松寺」의 시구 중 ‘왕성한 자취는 모두 사라지고 逞蹟都無處 / 흰 모래사장엔 흰 갈매기만 있구나 明沙有白鷗’라는 구절이 전해, 19세기 중반경에는 한송사가 이미 폐사되었음을 알 수 있다. 박도식, 「한송사의 역사적 내력 연구」, 『제17회 강릉 전통문화 학술세미나: 구비전승과 기록으로 살펴본 한송사지의 실체』(강릉문화원, 2016), pp. 57-58.

5) 이규대 외, 『(國譯) 巢雲先生文集』(강릉항일운동“얼”선양회, 2014), pp. 183-184.

6) 48‌ 李穀, 『稼亭集』 卷5 記 「東遊記」 “以雨留一日. 出江城觀文殊堂. 人言文殊, 普賢二石像從地湧出者也. 東有四仙碑. 爲胡宗旦所沉. 唯龜跌在耳.”

7) 『增修臨瀛誌』(1932)에 따르면 칠성암은 강릉 구정면 칠성산 아래에 위치한 암자로, 신라 善德王(r. 632-647) 때 慈藏(590-658)이 창건했다고 전한다. 강릉문화원, 『(完譯) 增修臨瀛誌』(강릉문화원, 1997), p. 77; 이후 1947년 승려 聽雨(1912-1971)와 雲谷(생몰년 미상)이 칠성암을 중창하며 법왕사로 寺名이 바뀌었다. 보다 상세한 법왕사의 내력에 대해서는 강릉시사편찬위원회, 『江陵市史 上』(강릉문화원, 1996), p. 496 참조.

8) 風鐸居士, 「江原道發見の白玉佛」, 『考古學雜誌』 3(5)(1913), p. 37-39; 해당 논문은 한송사지 상과 관련하여 ‘금회 조선에 있는 某氏’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약술할 것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누군가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정황이 너무나 명확하게 제시된 점, 필자(후타쿠 거사)가 국보 124호 상이 도쿄로 반출되었을 당시 상을 실견하고 사진을 촬영하였다고 밝히고 있는 점 등을 토대로 후타쿠 거사가 와다와 같은 인물로 추측된다. 덧붙여, 와다가 익명을 사용한 것은 1911년 조선총독부가 반포한 寺刹令이 원인이라 추측된다. 사찰령 제 5조에는 ‘사찰에 속하는 토지, 삼림, 건물, 불상, 석물, 고문서, 고서화, 기타의 귀중품은 총독의 허가를 받지 않으면 이를 처분할 수 없다’고 하여, 총독부가 조선 내 불교 문화재의 유출을 금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찰령의 본격 시행이 9월, 와다의 국보 124호 상 반출이 10월경이었음을 고려한다면 국보 124호 상의 반출은 총독부의 사찰령에 위배된다. 따라서 일본의 저명한 학자인 와다가 ‘칠성암주에게 약간의 제사 비용을 납부하고 상을 양여받았다’는 등 사찰령에 反하는 국보 124호 상의 발견 빛 반출 과정을 상세히 적은 논문을 실명으로 발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 추정된다. 사찰령과 관련해서는 『朝鮮總督府官報』 제227호, 1911년 6월 3일 참조.

9) 朝鮮總督府, 『朝鮮古蹟圖譜 五: 新羅統一時代 二』(京城: 朝鮮總督府, 1917), p. 583.

10) 고적유물 등록원고 2_大正 6년 8월 20일에 추가된 강원도 소재 고적유물 등록원고(1917. 8. 30), 조선총독부박물관 문서 F020-016-003.

11) 현재 와다 유지가 도쿄제실박물관에 국보 124호 상을 기증한 내역을 적은 문서가 전한다. 李龜烈, 南永昌 역, 『失われた朝鮮文化: 日本侵略下の韓國文化財秘話』(東京: 新泉社, 1993), pp. 112-115.

12) 東京帝室博物館, 『東京帝室博物館美術課列品彫刻繪畵目錄』(東京: 東京帝室博物館, 1920), p. 186.

13) 국립중앙박물관, 『칸의 제국 몽골』(국립중앙박물관, 2018), p. 177.

14) 김진숙, 「인도의 관음신앙-서인도 불교석굴의 觀音諸難救濟圖를 중심으로-」, 『불교연구』 52(2020), pp. 70-71; 森雅秀, 『仏教の女神たち』(東京: 春秋社, 2017), pp. 12-14.

15) 森雅秀, 위의 책, pp. 33-34; 索南卓瑪, 「東アジア仏教における多羅信仰と文化交渉」(大阪: 関西大学 大学院東アジア文化研究科·文化交渉学専攻, 2018), pp. 93-105.

16) 森雅秀, 위의 책, p. 4; 索南卓瑪, 위의 논문, p. 15.

17) 索南卓瑪, 앞의 논문, pp. 150-167.

18) 風鐸居士, 앞의 논문, pp. 37-38.

19) 『稼亭集』 卷 第 5 記 「東遊記」 “人言文殊普賢二石像從地湧出者也.”

20) 국보 124호 상의 반환 과정에 대해서는 후술하겠으나, 상이 반환되던 1966년 국립박물관 미술부장을 역임하고 있었던 최순우가 당시 일본 측 관계자의 견해 혹은 자료를 얻은 후, 이를 그대로 옮기면서 국보 124호 상이 33관음 중 다라보살로 기록된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최순우,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도서출판 학고재, 2008), p. 381.

21) 33관음을 대표하는 경전은 『법화경』 「보문품」이나 일본의 33관음 신앙은 보다 복합적인 방식으로 전개되었다. Sherry D. Fowler는 일본 33관음 신앙을 분석하며, 일본의 33관음을 ① 『법화경』 33응신, ② 중국 유입 판화 유래 33관음, ③ 순례지의 33관음상, ④ 『佛像圖彙』 수록 33관음의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이 중 다라보살이 33관음의 일존으로 편입된 것은 『불상도휘』 초판본이 간행된 1690년 전후로 추측되며, 전술한 다라보살과 다라존관음을 동일시하는 현상 역시 일본에서만 나타난다. Sherry D. Fowler, “Bodies and Benefits, ” In Accounts and Images of Six Kannon in Japan (Honolulu: University of Hawaiʻi Press, 2016), pp. 247, 280-286.

22) 『佛像圖彙』 卷 第 2 三十三觀音; 『불상도휘』에 관한 상세한 연구는 정진영, 「‘아미타구품인(阿彌陀九品印)’의제 문제: 일본 에도시대 아미타구품인 도상의 형성, 확산, 그리고 일반화」, 『미술사와 시각문화』 26(2020), pp. 129-136 참조.

23) 국보 124호의 사진은 필자가 촬영하였으며, 『불상도휘』의 도판은 일본 국문학연구자료관본을, 『각선초』 및 『도상초』의 도해는 『大正大藏經』 圖像部(SAT Taishōzō Image DB)를 참조하였다.

24) 『大毘盧遮那成佛神變加持經』 卷1, T848, 18:7a “聖者多羅尊, 青白色相雜. 中年女人狀, 合掌持青蓮, 圓光靡不遍, 暉發猶淨金, 微笑鮮白衣.”

25) 索南卓瑪, 앞의 논문, pp. 197-201.

26)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大日本帝國憲法이 폐지되고, 1947년 5월 3일 日本國憲法이 시행되며 제실박물관은 익일인 3일 國立博物館으로 새로 문을 열었다. 이후 1952년 3월 25일에 東京國立博物館으로 개칭되었으며, 1963년에는 소속 역시 문부성으로 변경되었다. 세끼 히데오, 최석영 역, 『일본 근대 국립박물관 탄생의 드라마』(민속원, 2008), p. 266.

27) 「우리 文化財還國」, 『동아일보』 1966년 5월 27일.

28) 반환문화재 특별전이 종료된 이후 郵政 史料 35점은 체신부(現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에게 인도되었으며, 전적 853책은 국립도서관(現 국립중앙도서관)으로 이관되었다. 따라서 국립박물관은 1, 326점 중 도자기, 고고자료 및 석조미술품 438점을 소장하게 되었다. 반환문화재 보관 (1966. 8. 1.), 국가기록원 DA0122583.

29) 국립박물관, 『返還文化財展示目錄』(국립박물관, 1966), p. 13.

30) 1960년대 한·일 회담의 문화재 반환 관련 외교 문서 등에 한해서는 일본 측 명칭을 채택하여 국보 124호 상을 ‘石造多羅菩薩像’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외에도 ‘대한민국과 일본국 간의 문화재 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부속서’를 비롯, 반환 과정에서의 통관 관련 문서 및 몇몇 신문 기사에서도 국보 124호 상을 석조다라보살 상으로 지칭한 경우가 몇몇 발견된다. 이는 일본 소재 문화재를 반환받는 것이었으므로 우선 일본 측 유물 대장목록을 따라 기록하였던 것으로 사료된다. 반환문화재 수입신고에 대한 협조 (1966. 7. 20), 국가기록원 DA0122583; 「古美術品 4百38點」, 『경향신문』 1966년 5월 27일 등 참조.

31) 1950년대 후반경에도 한송사지 상은 통일신라시대의 불상으로 인식되었다. 1957년 5월 1일자 동아일보 기사인 「六·25 때에 없어졌던 石佛像 地下서 發掘」은 보물 81호 상을 신라 말 朗圓大師 開淸(835-930)이 제작한 상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1957년 黑白社가 발간한 『國寶圖錄』에도 81호 상을 ‘유려한 솜씨를 보여주는 신라시대의 작품’이라 언급하고 있다. 「六·25때에 없어졌던 石佛像 地下서 發掘」, 『동아일보』 1957년 5월 1일; 박노영, 『國寶圖錄』(黑白社, 1957), p. 134. 또한 이 시기에는 한송사지 상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광주 하사창동 출토 철불 등 현재 고려로 편년되는 불교미술품들이 상당수 통일신라의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현상과 고찰에 대해서는 朝鮮總督府, 앞의 책, pp. 605-609; 황종연 외, 『신라의 발견』(동국대학교 출판부, 2008); 신은영, 「불국사 사리탑의 流轉과 식민주의」, 『미술사학연구』 298(2019), pp. 127-153 등 참조.

32) 일례로, 1959년 문교부에서 발간한 『국보도록』에는 보물 81호 상을 언급하며 ‘동경박물관 보살’, 즉 국보 124호 상의 존재를 함께 언급하고 있어 주목을 요한다. 논고를 집필한 金元龍 박사(1922-1993)는 국보 124호 상과 함께 강릉 신복사지 석조보살좌상과 평창 월정사 석조보살좌상을 언급하며 세 상의 양식적 유사성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이미 국내 학계에서는 국보 124호 상의 존재를 인식하고 있었음은 물론 ‘다라보살’이라는 이칭은 사용하지 않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다만, 아직까지는 한송사지 상을 唐代 天龍山石窟 造像에 비견하는 등 통일신라의 상으로 파악하고 있다. 김원룡, 『國寶圖錄 第三集: 佛像篇』(문교부, 1959), pp, 40-41.

33) 検索結果詳細:文化財に関する打合会(1965. 3, 22), 일본 외교문서 581, p. 8; 해당 문서의 다나카 과장은 당시 문화재 전문 심의회 전문 위원으로 근무하던 다나카 이치마츠(田中一松)로 추정되나 향후 검토를 요한다. 또한, 이때 국보 124호 상과 함께 ‘훌륭하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은 석조미술품이 1점 더 있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石師子像(신수1371)이 바로 그것인데, 이 석사자상은 明代(1368-1644) 유물로 여겨지고 있다. 이처럼 반환 문화재를 두고 한·일 양국 간 품목 평가가 상이한 사례는 이전에도 존재한 바가 있다. 1958년 창녕 교동 출토 금제이식 2점을 비롯한 106점의 문화재가 1차로 반환될 당시, 황수영 선생은 106점의 문화재가 고려자기 우량품 1개와 맞먹는 정도라고 낮게 평가하였으나 일본에서는 학술상 매우 중요한 문화재라고 평가하였다. 일본 측은 반환 문화재 106점의 보고서가 빠짐없이 만들어졌을 뿐만 아니라 동시기 일본 유물과 유사하여 비교연구 자료로의 가치가 높아 해당 유물들을 중요하다고 보았다. 조윤수, 「한일회담과 문화재 반환 교섭 -일본 정부의 반환 문화재 목록 작성과정을 중심으로-」, 『동북아역사논총』 51(2016), p. 140; 박훈은 황수영이 창녕 교동 출토품 반환에 냉담한 평가를 내린 사실에 대해, 한국 측이 교동 출토품 반환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일 경우 추후 이루어질 문화재 반환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박훈, 「한일회담 문화재 ‘반환’교섭의 전개과정과 쟁점」, 『의제로 본 한일회담』(국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0), p. 362.

34) 風鐸居士, 앞의 논문, pp. 37-39.

35) 朝鮮總督府, 앞의 책, p. 18.

36) 齋藤忠, 『朝鮮佛敎美術考』(東京: 寶雲舍, 1947), p. 63.

37) 문화재청, 『한·일협정 반환문화재 자료집』(문화재청, 2005), p. 321.

38) 문화재관리국, 『韓日會談文化財關係 參考集』(문화재관리국, 1965), p. 106.

39) 국보 124호 상의 반환 이전 고려시대 불교조각 관련 연구는 손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다. 당시 황수영과 김원룡은 고려시대 불상 자료가 적고, 체계적인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은 관계로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가 어려운 현실을 토로한 바 있다. 이 시기에는 고려를 13세기 전반으로 전기와 후기로 대별하여 전기는 통일신라의 유풍에 송·요의 영향을 받은 것에 더해 논산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등의 웅건한 기상의 거석불이 조성된 시기로, 후기에는 원의 영향을 받은 라마 양식의 조상이 크게 유행한 것으로 보았다. 이때, 신복사지 상과 월정사 상은 고려 초 통일신라의 기풍이 남아있는 小像으로서 파악되었다. 국보 124호 상 반환 이전의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에 관해서는 고유섭, 『韓國美術史文化論叢』(서울신문사, 1949); 同著, 「朝鮮의 彫刻」, 『餞別의 甁』(통문관, 1958), pp. 14-15; 문교부, 『國寶圖錄 第三集: 佛像篇』(문교부, 1959); 김원룡, 「韓國佛像의 樣式 變遷 (下)」, 『사상계』 92(1961. 3), pp. 284-285; 황수영, 「高麗의 雕刻」, 『韓國藝術總覽: 槪觀 篇』(대한민국예술원, 1964), pp. 152-159. 이 시기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의 시각변화를 보다 상세히 정리한 연구로는 신은영, 「관촉사 석조보살입상 연구」(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pp. 35-39 참조.

40) 「文化財 還國」, 『조선일보』 1966년 5월 28일.

41) 문교부고시 제284호, 1967년 6월 27일; 한편, 보물 81호 상은 일제강점기 국보 123호 상으로 지정되었으나, 1962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고 문화재위원회의 논의를 거친 결과 국보 123호에서 보물 81호로 재지정되었다. 문화재 지정과 관련해서는 「朝鮮寶物古蹟名勝天然記念物保存令第1條ニ依リ左ノ通指定ス」, 『朝鮮總督府告示』 제430호, 1934년 8월 27일; 문교부고시 제173호, 1963년 1월 21일 등 참조.

42) 황수영은 협상 당시 국민이나 문화재 기관 직원들이 한국 문화재가 일본으로 많이 반출된 사실은 알고 있으나 일본 측이 요구하는 구체적 반출근거를 제시해오는 경우는 없었다고 회고하였다. 문화재청, 앞의 책, pp. 109-112; 또한, 일본 측은 7차 회담 당시 한국에 반환할 문화재 품목을 협상 종료 직전인 10일 전에 제출함으로써 한국이 그에 대응할 시간을 주지 않는 등 반환문화재 품목을 늘리지 않기 위한 교섭 작전을 실행하였다. 조윤수, 앞의 논문, p. 153.

43) 류미나, 「‘한일회담 외교문서’로 본 한·일 간 문화재 반환교섭」, 『일본역사연구』 20(2009), pp. 139-144; 미야치 시게루의 경우 일본 소재 한국문화재의 반환 자체에 부정적이었으며, 이를 두고 외무성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마츠시타 타카아키의 경우 교토대 도서관 소장 가와이문고(河合文庫) 관련 교섭 도중 이홍직 위원에게 ‘직접 조사하길 원한다면 소개장을 써주겠다’는 의사를 밝히는 등 비교적 한국과의 교섭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두 인물 모두 양산 부부총 유물만큼은 끝까지 반환을 거부하였다. 결국 부부총 유물은 국내로 반환되지 못하였다. 또한, 스에마츠 야스카즈와 다가와 고조는 데라우치문고(寺內文庫) 문제에 있어 그것이 정당하게 취득된 것임을 주장하고 반환을 지원하였다. 끝내 데라우치문고는 데라우치 총독이 관권으로 가져간 장서만이 반환되었으며, 나머지는 1995년에 이르러서야 국내로 반환되었다. 류미나, 「한일 회담 문화재 반환 교섭 관련 인물 연구」, 『한국학연구』 63(2007), pp. 70-85.

44) 황수영, 『일제기 문화재 피해자료』(국외소재문화재재단, 2014), p. 15; 당시 金庠基, 李弘稷, 김원룡 박사 등이 자문역으로 협상 과정에 참여하였으나, 황수영 박사가 실무 준비를 대부분 도맡아 하였다. 때문에 회담 도중 황수영이 교섭위원의 증원을 요청하여 이홍직 선생이 참여하게 되었으며, 전적 분야를 중점적으로 다루었다. 다만, 본고는 불교조각을 중심으로 논의하므로 황수영 박사의 역할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고자 한다. 「황수영 박사의 佛跡逸話 31 한일문화재반환 협정(1)」, 『불교신문』 2002년 10월 29일; 「황수영 박사의 佛跡逸話 34 한일문화재반환 협정(4)」, 『불교신문』 2002년 12월 15일.

45) 진홍섭, 『文化財大觀: 國寶篇』(문교부 문화재관리국, 1967), p. 300.

46) 고유섭, 『朝鮮塔婆의 硏究』(열화당, 2010), pp. 247-249, 257-262.

47) 이와 같은 연구 방법은 당시 한국 미술사학계가 떠안고 있었던 특수한 의제를 고려하였을 때 필수 불가결한 것이었다. 당시 한국 학계는 구미 학계 등이 이미 이룩한 근대적 미술사 연구를 확립하기 위하여 양식의 체계화 및 작품의 영향 관계 등을 규명하는 실증적 연구를 우선적으로 진행하였기 때문이다. 이주형, 「인문학으로서의 미술사학-반성과 모색」, 『미술사학연구』 268(2010), pp. 121-122.

48) 최성은, 「溟州地方의 高麗時代 石造菩薩像에 대한 硏究」, 『佛敎美術』 5(1980), pp. 56-78; 김리나, 「高麗時代石造佛像 硏究」, 『미술사학연구』 166·167(1985), pp. 113-149; 정영호, 「統一新羅時代 이후의 石佛」, 『國寶 4: 石佛』(예경산업사, 1985), pp. 181-184.

49) 小島彩, 「騎象普賢と騎獅文殊の図像-中国における成立過程」, 『美術史』 44(1995), p. 54.

50) 『陀羅尼集經』 卷1 T901, 18:0790a-b; 번역문은 동국대학교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시스템 참조.

51) 최성은, 「지방 호족의 불교조각: 강릉·오대산 지역의 석조보살상」, 『고려시대 불교조각사 연구』(일조각, 2013), pp. 157-159.

52) 권보경, 앞의 논문, pp. 115-116.

53) 朴亨國, 「朝鮮半島の佛敎美術」, 『漢字文化圏への広がり』(東京: 佼成出版社, 2010), p. 294.

54) 국립춘천박물관, 『국립춘천박물관: 강원의 역사와 문화』(국립춘천박물관, 2015), pp. 171-175.

55) 孙晓岗, 『文殊菩萨图像学研究』(蘭州: 甘肃人民美术出版社, 2006), p. 11.

56) 우선 한역된 시기를 막론하고 보현보살의 지물을 언급한 경전은 『大方廣菩薩藏文殊師利根本儀軌經』(여의보주, 길상과, 불자), 『普賢金剛薩埵略瑜伽念誦儀軌』(오고금강저, 금강령), 『不空羂索神變眞言經』(검), 『八大菩薩曼茶羅經』(칼), 『五佛頂三昧陀羅尼經』(백불), 『一字佛頂輪王經』(검) 등이 있다.

57) 이와 같은 불교 조각 연구의 난제는 이미 남동신, 「미술사의 과제와 역사학: 불교미술사를 중심으로」, 『미술사학연구』 268(2010. 12), pp. 91-98에서 지적된 바 있다.

58) 송진협은 이와 같은 현상에 대해 보현이 문수의 시각적 특성을 따르게 되어, 보현보살의 지물이 문수보살의 지물에 영향을 받아 조성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한 바 있다. 송진협, 「투명한 진리: 法門寺 持鉢 보살상 연구」(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3), pp. 31-45.

59) 風鐸居士, 앞의 논문, p. 39.

60) 「六·25때에 없어졌던 石佛像 地下서 發掘」, 『동아일보』 1957년 5월 1일.

61) 동아일보 기사 속의 설화는 단편적으로 전해져 세부적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문수보살이 직접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상이 조성될 수 있었다는 점은 중국 오대산 殊像寺에 전하는 문수 眞容 설화를 연상시킨다. 물론 수상사의 경우 상을 제작하던 장인이 문수보살의 참모습을 보고 나서야 문수보살상을 완성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한송사와 수상사의 설화가 내용 면에서 완전히 동일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대산 수상사 문 수진용에 관해서는 최선아, 「眞容의 遺産: 淸 乾隆帝의 五臺山 옮기기」, 『중국사연구』 94(2015), pp. 153-158 참조.

62) 문수보살은 『華嚴經』 「菩薩住處品」에서 근거한 오대산 신앙을 바탕으로 불교도들에게 최고의 영험으로 존숭되었다. 중국 산서성에 위치한 오대산은 문수 주처 청량산으로 여겨지며 한국, 일본 나아가 인도의 순례객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또한 新羅(57 BCE-935 CE)를 비롯해 遼(916-1125), 西夏(1038-1227) 등에서는 중국 오대산을 순례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자국에 오대산을 복제하고자 노력하였다. 일본의 경우에도 엔닌(円仁, 794-864)의 오대산 순례기가 담긴 『入唐求法巡禮行記』와 더불어 쵸넨(奝然, 938-1036)이 일본 아타고산에 오대산을 이식하고자 하는 등 오대산 신앙이 성행하였음이 확인된다. 또한 민중 구제에 힘쓴 고대 일본의 백제계 大僧 교키(行基, 668-749)는 ‘문수보살의 화신’으로 불리우는 등 일본에서 오래전부터 문수보살이 크게 숭앙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정병조, 『문수보살의 연구』(韓國佛敎硏究院 出版部, 1988), pp. 144-146; 최복희, 「교키와 일본의 오대산문수신앙」, 『일본불교문화연구』 4(2011), pp. 11-43; Susan Andrews, “Representing Mount Wutai’s 五臺山 Past: A Study of Chinese and Japanese Miracle Tales about the Rive Terrace Mountain, ”(PhD diss., Columbia University, 2013), pp. 189-192; Kim Youn-mi, “Virtual Pilgrimage and Virtual Geography: Power of Liao Miniature Pagodas(907-1125), ” Religions 8, no. 10(2017), pp. 19-20; 계미향, 「중국서부의 문수신앙과 西夏 오대산의 개창」, 『정토학연구』 28(2017), pp. 57-62.

63) 박광연, 「한국 오대산신앙 관련 자료의 재검토 -『삼국유사』 기록의 비판적 해석」, 『사학연구』 118(2015), p. 217.

64) 송진협, 앞의 논문, pp. 38-41; Michelle C. Wang, “The Thousand-armed Mañjus’ri at Dunhuang and Paired Images in Buddhist Visual Culture, ” Archives of Asian Art 66, Iss. 1(2016), pp. 87-88. 이처럼 문수보살과 발우 간의 연관성을 통하여 석굴암의 문수, 보현보살상 중 발우를 든 존상이 문수보살이라는 견해가 일찍이 학계에 제기되기도 하였다. 이와 관련된 상세한 내용은 주수완, 「토함산 석굴 문수·보현보살상 연구」, 『강좌미술사』 44(2015), pp. 97-120 참조.

Fig. 1.
<한송사지석조보살좌상>, Stone Seated Bodhisattvas from Hansongsa Temple Site, 1917, Chosen koseki zufu, vol. 5, Pl. 1921,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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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2.
<문화재반환특별전시목록 표지>, Cover of Munhwajae panhwan T'ŭkpyŏl Chŏnsi mongnok, National Museum of Korea, 1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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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3.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및 석조보살좌상>, Three-story Stone Pagoda and Stone Seated Bodhisattva at Sinboksa Temple Site, Kangnŭng, Koryŏ (Photo by Kim Y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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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4.
<평창월정사팔각구층석탑및석조보살좌상(복제)>, Octagonal Nine-story Stone Pagoda and Stone Seated Bodhisattva (replica) of Woljeongsa Temple, P'yŏngch'ang, Koryŏ (Photo by Choi Su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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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5.
<한송사지 석조대좌>, Stone Pedestals at Hansongsa Temple Site, probably Koryŏ, 108 ×70 ×67cm, 97 ×71 × 73cm, Hansongsa Temple Site, Kangnŭng (Chuncheon National Museum, Kangwŏn ŭi widaehan munhwa yusan, Pl.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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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6.
<성주 법수사지 석조비로자나삼존대좌>, Pedestals of Stone Seated Vairocana Buddha Triad from Beopsusa Temple Site, Sŏngju, Unified Silla, Kyungpook National University Museum (Gyeongju National Museum, Silla ŭi saja, p.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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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7.
<경주 불국사 석조대좌>, Stone Pedestals at Pulguksa Temple, Kyŏngju, Unified Silla, 77.8cm (Elephant), 83.1cm(Lion), Bulguksa Temple Museum (Gyeongju National Museum, Silla ŭi saja, p.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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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8.
<한송사지석조보살좌상(세부)>, Part of Stone Seated Bodhisattva from Hansongsa Temple Site, National Treasure no. 124, H. 92.4cm, Chuncheon National Museum (photo by Kim Y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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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9.
<한송사지 석조보살좌상(세부)>, Part of Stone Seated Bodhisattva from Hansongsa Temple Site, Treasure no. 81, H. 56.2cm, Gangneung Ojukheon & Municipal Museum (photo by Kim Yu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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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0.
<석굴암 석조문수보살좌상>, Stone Seated Mañjuśrī Bodhisattva, Unified Silla, H. 90cm, Sŏkkuram Grotto, Kyŏngju (National Research Institute of Cultural Heritage (below NRICH), Sŏkkuram, kŭ sajin, p. 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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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1.
<원각경변상도내보현보살>, Samantabhdra in Perfect Enlightenment Sutra Illumination, Koryŏ, 14th Century, Ink and Colors on Silk, Museum of Fine Arts, Boston (NRICH, Miguk posŭt'ŏn misulgwan sojang han’guk munhwajae, p.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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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g. 12.
<오백나한도 내 문수보살>, Mañjuśrī in Five Hundred Arhats, Koryŏ, 14th Century, Ink and Colors on Silk, Chion-in, Japan (Kikutake Jun'ichi, Chŏng Ut'aek, Koryŏ sidae ŭi purhwa, p. 2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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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1>
Comparison of the Sculpture from Hansongsa Temple Site (National Treasure no. 124) with Bodhisattvas' Illustrations in Collections of Buddhist Iconography in Japan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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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 2>
The Instance for Attribute of Manjusri Riding on a Lion and Samantabhadra Riding on a Elephant in East Asia during 7-14th Century
Attribute of Manjusri Attribute of Samantabhadra Example (Dated etc.)
Sutra & Water Bottle Sutra Gilt-bronze Seated Manjusri·Samantabhadra Bodhisattva, The Palace Museum in Beijing, China (Song)
Sutra & Kundika Bronze Seated Majusri·Samantabhadra Bodhisattva, British Museum, UK (Song)
None Clay Seated Majusri·Samantabhadra Bodhisattva at Chongquingsi Sansashidian, China (Song)
Ruyi Clay Seated Majusri·Samantabhadra Bodhisattva at Dongdadian Hall, Foguangsi Temple in Wut’ai shan, China (below Tang)
Clay Seated Majusri·Samantabhadra Bodhisattva at Dadian Hall, Nanchansi Temple in Wut’ai shan, China
Seated Majusri·Samantabhadra Bodhisattva in Huayendong of Anyue Grottos, China (Northern Song)
Manjusuri and Samantabhadra in the Mural of Yulin Cave 3, China (Western Xia)
Shakyamuni Triad, The Cleveland Museum of Art, USA (Yu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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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strated Buddhist Manuscript of the Avatamsaka Sutra vol. 41, Central Tiantai Buddhist Museum, Korea
Lotus Woodprints of Manjusri and Samantabhadra Discovered within Wooden Standing Shakyamuni Statue at Seiryō-ji, Japan (Northern Song)
Manjusri and Samantabhadra, Seikado Bunko Art Museum, Japan (Koryŏ/Yuan)
Shaka with Two Attendant Bodhisattvas and the Ten Great Disciples(2009.156), MET Museum, USA (below Japan)
Shakyamuni Triad, Nara National Museum, Japan
Lotus with Sutra Vairocana Triad in Kenchō-ji, Japan (Southern Song)
Illuminated Buddhist Manuscript of the Saddharma Pundarika Sutra vol.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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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lluminated Buddhist Manuscript of the the Saddharma Pundarika Sutra vol. 1, Horim Museum, Korea
Manjusri and Samantabhadra, Nison-in, Japan (below Yuan)
Shakyamuni Triad and the Sixteen Arhats, Ichirenji, Japan
Shakayamuni Triad and Sixteen Benevolent Deities (2012.18), Met Museum, USA (Japan)
Lotus & Bowl Manjusuri and Samantabhadra in the Mural of Mogao Cave 159 at Dunhuang, China (Tang)
Khakkhara Illuminated Buddhist Manuscript of the Saddharma Pundarika Sutra, Museum of Fine Arts, Boston, USA (Koryŏ)
None Illuminated Buddhist Manuscript of the Avatamsaka Sutra, Musée National des Arts Asiatiques-Guimet, France (Five Dynasties)
Shakyamuni Triad (29.100,469), MET Museum, USA (below Japan)
Shakyamuni Triad and the Sixteen Arhats (2015.300.1), MET Museum, USA
Ruyi Woodprints of Manjusri and Samantabhadra Discovered within the Library Cave at Dunhuang, China (Five Dynasties)
Manjusuri and Samantabhadra in the Mural of Yulin Cave 13, China (Song)
Sutra Statue of Manjusri and Samantabhadra at Dazu Maogao Miaogaoshan Cave 3, China (below Southern Song)
Statue of Manjusri and Samantabhadra at Dazu Beishan Cave 136, China
Willow Branches Five Hundred Arhats at Chion-in, Japan (Koryŏ)
Lotus Bud Lotus Bud Portable Shrine of Wooden Buddha Triad at Songgwangsa Temple, Sunch'ŏn, Korea (probably Tang)
Meeting of the Bodhisattvas Manjusri and Samantabhara (AC1998.83.2), LACMA, USA (Tang)
Bowl Bowl Manjusuri and Samantabhadra in the Mural of Mogao Cave 12 at Dunhuang, China (Tang)
None None Meeting of the Bodhisattvas Manjusri and Samantabhara (AC1998.83.1), LACMA, USA (below Tang)
Manjusri and Samantabhadra on the Fourth Casket from the Famensi Crypt, Xi’an, China
Manjusuri and Samantabhadra in the Mural of Mogao Cave 14 at Dunhuang, China
The Triad of Buddha in the Mural of Dasheng Wenshu Zhenshen-dian from West Wall Mural (Wutaishan-tu), Mogao Cave 61 at Dunhuang, China (below Five Dynasties)
Manjusri and Samantabhadra in the Mural of Stūpa Saṃdarśana Parivartaḥ, Mogao cave 61 at Dunhuang, China
Relief of the Vairocana Triad at Feilaifeng, Hangzhou, China (Northern S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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